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5권 – 7화 : 북풍(北風)은 누운용을 일으키나
북풍(北風)은 누운용을 일으키나
그때 조조는 삼공의 제도를 없애고 자신이 승상으로서 나라의 권 세를 오로지하고 있었다. 곧 모개(毛玠)를 동조연(東曹椽)으로 삼고 최염(崔)을 서조연(西曹椽)으로, 그리고 사마의(司馬懿)를 문학연 (文學掾)으로 삼아 삼공의 자리를 아우른 자신을 돕게 했을 뿐 따로 삼공을 세우지 않았다.
모개는 일찍이 조조가 연주 자사로 있을 때 얻은 사람이요, 최염 은 원소를 깨뜨린 후 하북에서 거두어들인 명사였다. 둘 다 조조가 손발로 부릴 만한 사람들이었으나 그들과 나란히 일하게 된 사마의 는 비교적 새로운 인물이었다. 그러면 이 사마의란 사람은 어떤 인 물일까.
사마의의 자는 중달(仲)이요 하내군 온(溫) 땅 사람이었다. 그 할아비는 사마전(司馬雋)이라 하며 영주 태수를 지냈고, 그 아비는 사마방(司馬)으로 경조윤을 지냈으며, 그 형사마랑(司馬)은 주 부 벼슬을 했다. 사람됨이 권모술수와 임기응변에 능한 데다 군사를 부리는 데도 남다른 재주가 있어 일찍부터 주위 사람들의 눈길을 끌 었다.
조조도 그의 재주를 높이 사서 불러들이기는 했으나 마음속으로 는 그리 믿지 않았다. 어딘가 자신의 젊은 날을 연상시키는 데가 있 어 까닭 모르게 섬뜩해질 때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상도 몸을 돌 리지 않은 채로 뒤를 볼 수 있는 이른바 낭고상(狼顧相)이었기 때문 이었다. 그러나 그대로 묻어둘 수 없는 재주라 실권과는 좀 거리가 먼 문학연의 자리를 주어 곁에 있게 했다.
하지만 조조의 내심이야 어떠하든 그 무렵부터 문관의 진용도 제 대로 짜이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능력을 앞세우는 조조다운 성격의 일면을 잘 보여주는 용인(用人)이었다. 그렇게 내정이 다져지자 조 조는 다시 무장들을 불러 모아놓고 바깥일을 의논했다. 하후돈이 기 다렸다는 듯이 일어나서 말했다.
“듣자 하니 요즈음 유비는 신야에서 매일 군사를 조련하고 있다 고 합니다. 반드시 뒷날의 걱정거리가 될 것이니 일찌감치 쳐 없애 는 게 좋겠습니다.”
실은 조조 자신도 가장 하고 싶은 일이었다. 아직도 유비보다 세 력이 큰 인물들이 여럿 남아 있었지만 조조는 왠지 유비의 움직임에 유독 신경이 곤두섰다. 따라서 하후돈의 말에 두 번 묻는 법도 없이 유비를 칠 군사를 일으킬 뜻을 굳혔다. 하후돈을 도독으로 하고 이전, 우금, 하후란(夏侯蘭), 한호(韓浩)를 부장으로 딸린 뒤 군사 십만을 주어 똑바로 박망성으로 보내려 했다. 그곳에서 유비가 근거로 삼고 있는 신야를 엿보려 함이었다.
조조의 그 같은 서두름이 불안했던지 순욱이 가만히 나서서 조조에게 말했다.
“유비는 흔치 않은 영웅입니다. 거기다가 지금은 제갈량까지 군사(軍師)로 삼고 있으니 가볍게 맞싸워서는 아니 됩니다.”
그 말에 하후돈이 불끈하며 큰소리를 쳤다.
“유비는 쥐 같은 무리에 지나지 않소. 내 반드시 사로잡아 올 테 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장군은 유현덕을 너무 가볍게 보지 마시오. 이제 유현덕은 제갈 량의 도움을 받게 되었으니 이는 마치 호랑이에 날개가 돋은 것과 다름이 없소.”
그 자리에 끼어 있던 서서가 내키지 않는 대로 한마디 거들었다.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 서서가 그렇게 말하자 조조가 문득 궁금한 듯 물었다.
“제갈량은 어떤 사람이오?”
“그 사람은 자를 공명(孔明), 도호를 와룡선생(臥龍先生)이라 하는 데 재주는 하늘을 주름 잡고 땅을 뒤엎을 만하며 꾀는 귀신도 마음 대로 부릴 만합니다. 참으로 당세의 기사(이니 결코 작게 보아 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서서의 그 같은 대답에 조조가 못 미더운 듯 다시 물었다.
“공과 비하면 어떠하오?”
“이 서서가 어찌 감히 제갈량과 대일 수나 있겠습니까? 제가 만약 반딧불만 한 밝기라면 제갈량은 보름달의 밝기라 할 것입니다.”
그때 하후돈이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원직의 말씀이 틀리오. 내가 보기에 제갈량은 풀잎이나 지푸라기 같은 무리이니 두려워할 게 무엇이오? 내가 만약 한 싸움에 제갈량 과 유비를 산 채로 잡아오지 못한다면 이 목을 승상께 바치겠소!”
하후돈의 씨근거리는 품이 서서가 제갈량을 지나치게 추켜세우는 게 바로 자신을 얕잡아본 탓이라 여기는 것 같았다. 조조가 그런 하 후돈을 달래듯 말했다.
“네 말을 믿겠다. 너는 얼른 가서 싸움에 이긴 소식을 보내 내 마 음을 위로해다오.”
그러고는 서서와 순욱의 말을 못 들은 체 그날로 하후돈을 보냈다. 그럴 즈음 신야의 유비는 뜻밖의 어려움에 빠져 있었다. 그것은 관우와 장비가 제갈공명에게 공공연한 반발을 나타내는 일이었다. 유비가 공명을 스승처럼 대접하는 게 두 사람 모두에게 즐겁지 않은 까닭이었다. 오랫동안 친형제처럼 지내오던 유비와 그들 사이에 낯 선 공명이 끼어든 데 대한 불만도 있었지만, 어떤 점에서는 눈에 보 이지 않는 주도권 다툼이기도 했다.
사실 제갈공명이 나타나기 전만 해도 관우와 장비는 유비만 빼면 자기들의 무리에서 으뜸가는 권위를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난데 없이 새파란 애송이가 끼어들어 자기들 위에 서려 하니 유비와 사이 가 멀어지는 듯한 섭섭함 이상으로 못 견딜 일이었다.
“공명은 아직 나이가 어리니 설령 큰 재주와 학문이 있다 해도 형님의 대접은 너무 지나치십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아직 그가 참으로 재주가 있는지 없는지 써보지도 아니하였잖습니까?”
어느 날 두 사람은 정색을 하고 유비를 찾아가 불만을 말했다. 유 비는 그들의 마음속을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정에 끌려 자신이 홀로 정한 위계를 흐트려버리고 싶지 않았다. 역시 정색을 하고 두 아우 에게 대답했다.
“내가 공명을 얻은 것은 마치 고기가 물을 얻은 것과 같네. 두 아 우는 두 번 다시 그런 말을 하지 않도록 하게.”
이른바 수어지교(水魚之交)란 말이 생겨난 연원이다. 유비가 정색 으로 그렇게 대답하자 관우와 장비도 더는 불평을 말할 수 없었다. 별수없이 잠자코 물러났으나 마음속이 즐겁지 않기는 전과 마찬가 지였다.
관우와 장비의 그 같은 불평에 대꾸나 하듯 공명이 자신의 높은 식견을 보여준 것은 그로부터 며칠 되지 않아서였다. 그날 어떤 사 람이 유비에게 얼룩소[釐]의 꼬리를 바쳤는데, 유비는 그 털을 뽑 아 손수 모자를 짜기 시작했다.
그 옛날 돗자리를 치고 짚신을 삼던 때의 솜씨였다. 한가로울 때 재미로 그런 일을 해보는 수도 있지만 어떤 때는 머릿속이 어지러워 생각을 가다듬기 위해 몰두해보는 수도 있었다.
마침 유비를 보러 왔던 공명이 정색을 하고 물었다.
“명공께서는 예전의 큰 뜻을 버리셨습니까? 어찌하여 이같이 한 가로운 일이나 하고 계십니까.”
공명이 나무라듯 묻자 별 생각 없이 모자를 짜고 있던 유비는 놀랐다. 예전에 그러다가 공명을 알아보지 못하고 보낸 일이 떠올랐
다. 얼른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땅바닥에 내던지며 잘못을 빌듯 대답
했다.
“심심하던 차에 근심이나 잊어볼까 하고 만져보았을 뿐입니다. 선생께서는 너무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그 말에 공명이 약간 얼굴을 풀며 다시 물었다.
“스스로 헤아리기에 명공께서는 조조에 대해 어떻다 보십니까?”
“실은 내가 걱정하고 있던 게 바로 그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도 계책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제서야 공명은 옅은 한숨과 함께 조용히 유비가 해야 할 일을 알려주었다.
“되도록이면 빨리 백성들 중에서 군사로 쓸 만한 이들을 뽑아 모 으십시오. 제가 한번 가르쳐보겠습니다. 그들만 제대로 조련할 틈이 있다면 그럭저럭 오는 적은 막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답답하던 유비의 가슴에는 한 줄기 시원한 바람과도 같은 가르침 이었다. 유비는 공명의 가르침에 따라 신야의 백성 중에 군사로 쓸 만한 이들을 모아보았다.
며칠 안 돼 삼천의 장정이 새로 모였다. 공명은 그들을 아침부터 저녁까지 쉬지 않고 조련시켰다. 창칼을 다루는 법뿐만 아니라 점차 싸움에서 무게를 더해가는 진법에 응하는 것까지 가르치니 오래잖 아 흙이나 파던 장정들에 지나지 않던 그들은 원래 있던 군사에 뒤 지지 않는 정예가 되었다. 결국 공명은 몇 달 동안에 유비의 군사력 을 두 배로 늘려놓은 셈이었다. 속으로 공명을 못마땅해하던 관우와 장비도 그걸 보고는 은근히 감탄해 마지않았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얘기한 배송지松, 정사 삼국 지』의 주(註)를 단 사람)의 주와 연관지어 살펴볼 게 있다. 공명이 유비 를 먼저 찾아갔다는 기록은 삼고초려(三顧草廬)라는 감동적인 이야 기를 『연의』 전편을 통해 가장 빛나고 아름다운 부분으로 삼고자 했 『연의』의 지은이로서는 어떻게든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구주춘추(九州春秋)』를 비롯한 몇몇 저술 또한 끝내 무시할 수 없어 방금과 같은 형태로 뒤늦게 끼워넣었으리라.
어쨌든 공명의 조련에 의해 새로 뽑은 군사들도 이전의 군사들에 못지않게 되었을 무렵 홀연 급한 전갈이 들어왔다.
“조조가 하후돈에게 십만 대군을 주어 신야로 보냈습니다. 머지않아 하후돈이 이곳에 이를 것입니다.”
그 소식을 들은 장비가 관우를 찾아보고 빈정거리듯 말했다.
“공명을 먼저 보내 적을 막게 하면 되겠소이다그려.”
그 같은 장비의 말 속에는 공명에 대한 의심 못지않게 싸움은 역 시 자기들 같은 무장에게 맡겨야 한다는 거드름도 들어 있었다. 관 운장은 아무런 대꾸가 없었으나 그의 속마음 역시 장비와 크게 다르 지 않았다. 따라서 겉으로는 장비를 나무라는 체하면서도 은근히 공 명을 빈정거리고 있는데 유비가 사람을 보내 두 사람을 불렀다.
“하후돈이 큰 군사를 이끌고 이곳에 이르렀다 하네. 어떻게 적을 막아야 좋겠는가?”
유비 역시도 막상 적의 대군이 이르렀다는 말을 듣자 더 미더운 것은 두 아우였던 모양이었다. 공명과 의논하기 전에 먼저 장비와 관우를 부른 것이었다. 장비가 기다렸다는 듯 퉁명스레 내뱉었다. “형님께서는 어찌 물더러 가서 막으라고 하지 않으십니까?”
전에 유비가 제갈량과 자신을 고기와 물에 비유한 것을 비꼬는 말이었다. 유비가 그들의 속뜻을 짐작하고 부드럽게 달랬다.
“꾀를 쓰는 일은 공명에게 의지하고 힘을 쓰는 일은 두 아우에게 의지하려는데 자네들은 어찌하여 한가지로 모든 일을 공명에게만 미루려 하는가?”
그러나 관우와 장비는 먹은 마음이 있어 선뜻 나서려 하지 않았 다. 유비는 하는 수 없이 공명을 청해 의논했다.
“하후돈이 대군을 이끌고 이곳에 이르렀다 하는데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그리 걱정하실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공명이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하다가 문득 얼굴빛을 흐렸다. 유비가 얼른 물었다.
“그러나 무엇입니까?”
“관우와 장비 두 사람이 내 영을 잘 따르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주공께서 만약 이 양으로 하여금 군사를 부릴 수 있게 하시려면 주 공의 칼과 대장인(大將印)을 잠시만 제게 내려주십시오.”
제갈량 또한 예사 인물이 아니니 관우와 장비의 반발을 느끼지 못할 리 없었다. 생각하면 귀찮고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으나, 이번 기회에 그들의 기를 꺾어두지 않으면 안 된다 싶어 주공인 유비의 권위를 빌려보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자 유비도 공명의 속마음을 알고 작은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권위를 상징하는 보검과 패인佩印)을 끌러 공명에게 내주었다. 그러자 공명은 곧 여러 장수들에게 군령을 받들어 모이라는 전갈을 보내게 했다.
“한번 가보기나 합시다. 그가 어떤 영을 내리는지 꼬락서니나 한 번 보아두는 것도 좋지 않겠소?”
전갈을 받은 장비가 마지못해 일어서며 관우에게 말했다.
관우와 장비가 공명이 있는 곳에 이르니 공명은 이미 여러 장수 들을 벌려 세운 가운데 엄숙히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을 본 공명은 곧 위엄 실린 목소리로 영을 내렸다.
“박망성 왼쪽에 산이 하나 있으니 이름하여 예산豫山)이라 한다. 또 그 오른쪽에는 숲이 하나 있으니 이름하여 안림(林)이라 한다. 둘 다 군마를 숨겨둘 만한 곳이다. 운장은 일천 군마를 이끌고 먼저 가서 매복해 있으라. 적군이 그곳을 지나더라도 맞서지 말고 그대로 보내야 한다. 반드시 그 군마의 뒤편에 있을 적의 치중輜重)과 양초 (糧草)까지도 모두 통과시켰다가 남쪽 산에서 불이 일거든 비로소 군사를 놓아 그 양초를 불태워버리도록 하라.
익덕은 또 일천 군마를 이끌고 안림 뒷산의 가운데 골짜기에 매 복해 있으라. 역시 남쪽 산에 불이 일거든 군사를 움직이되 오히려 적이 있던 박망산으로 가서 그곳에 있는 군량과 마초를 태워 없애야 한다.
관평과 유봉은 군사 오백과 불 붙일 물건들을 준비해 박망파 뒤 편으로 가라. 양쪽으로 나누어 기다리다가 초경 무렵 군사들이 이른 소리가 들리거든 얼른 달려 나가 사방에 불을 놓으면 된다.”
그런 다음 다시 번성에 있는 조자룡을 불러들여 남은 본군의 앞장에 세웠다.
“적을 이기려 하지 말고 오히려 져주라.”
그런 이상한 명과 함께였다.
장수들의 배치가 끝나자 공명은 비로소 유비를 바라보며 말했다. “주공께서는 한 떼의 군사를 이끌고 뒤에서 돌보시다가 필요할 때만 나가시도록 하십시오. 모두가 계책에 충실히 따를 것이며 결코 터럭만 한 실수라도 있어서는 아니 됩니다.”
주인인 유비에게까지 다짐을 받는 걸 보자 관우가 속이 뒤틀렸는 지 불쑥 공명에게 물었다.
“우리들이 모두 나가 적을 맞아 싸우는 동안 군사께서는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하실 작정이시오?”
“나는 다만 여기 앉아 이 성을 지키고 있겠소.”
공명이 꼿꼿이 대답했다. 장비가 크게 웃으며 관우를 편들어 빈정거렸다.
“우리들이 모두 나가서 적과 싸우는 동안 선생은 집안에서 가만 히 앉아 있겠다는 말이구려. 그것 참 좋겠소이다그려.”
그러자 공명이 낯빛이 변하며 유비에게서 받은 보검과 패인을 높 이 쳐들고 소리쳤다.
“주공의 보검과 패인이 여기 있다. 감히 영을 어기는 자는 목 베리라!”
저 사람이 몇 달 전만 해도 산골에 처박혀 책이나 뒤적이던 그 백 면서생일까 싶을 정도로 위엄 서린 목소리였다. 유비도 곁에서 공명을 편들어 두 아우를 나무랐다.
“그대들은 유악, 군대의 영채 안에 치는 막) 안에서 계책을 써 천 리 밖의 싸움을 이기도록 한다[運籌惟幄之中 決勝千里之外]는 말도 듣 지 못했는가? 두 아우들은 결코 이 영을 어겨서는 아니 된다!”
유비까지 그렇게 나서자 장비는 참을 수밖에 없었다. 찬 웃음으로 대꾸를 대신하며 그곳을 물러났다. 관우도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유비의 낯을 보아 물러나면서도 홀로 중얼거리기를 잊지 않았다. “잠시 저의 계책이 맞나 안 맞나 구경이나 하기로 하자. 따지는 것은 맞지 않음이 밝혀진 뒤라도 늦지 않다.”
관우와 장비 두 사람이 그렇게 떠나자 다른 장수들도 차례로 신 야를 나섰다. 그러나 아직 공명의 도략(韜略)을 모르는 까닭에 비록 영에 따라 움직이기는 해도 마음속의 의혹은 없어지지 않은 채였다. 모든 장수들이 떠난 뒤에 공명은 다시 유비에게 안심시키듯 말 했다.
“주공께서는 오늘 되도록이면 빨리 군사를 이끌고 박망산 아래로 가 기다리도록 하십시오. 내일 저녁이면 적군이 반드시 그곳에 이를 것입니다. 적군이 오면 주공께서는 얼른 달아나시다가 뒤에서 불길 이 일거든 뒤돌아 적을 치십시오. 이 양은 미축, 미방과 더불어 오백 군사로 현을 지키면서 손건을 시켜 즐거운 술자리나 마련케 하겠습 니다. 아마도 장수들이 세운 공을 기록할 공로부(功勞簿)도 한 벌매 어두고 기다려야겠지요.”
그러나 군사를 이끌고 나서는 유비 또한 제갈량의 도략에 대한 의혹을 완전히 지울 수가 없었다.
한편 박망에 이른 하후돈, 이전, 우금 등은 군사를 둘로 나누어 반 은 전대로 삼고 나머지는 뒤로 돌려 군량과 마초를 실은 수레를 호 위해 가게 했다. 때는 마침 가을이라 거센 가을바람이 일고 있었다. 사람과 말이 뒤섞여 나아가는데 홀연 앞에서 자욱이 먼지가 솟았다. 하후돈은 얼른 사람과 말을 벌려 세우게 하고 길 안내하는 이에게 물었다.
“저기가 어딘가?”
“박망파란 곳인데 그 뒤로는 나구천(羅川)이 흐릅니다.”
그 같은 대답을 듣자 하후돈은 곧 우금과 이전에게 진의 중요한 모퉁이를 단속해 지키게 하고 자신은 진문 앞으로 말을 내어 바라 보았다. 한참을 바라보던 하후돈이 문득 크게 소리내어 웃었다.
“장군께서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소리내어 웃으십니까?”
곁에 있던 군사들이 까닭을 몰라 물었다. 하후돈이 여전히 웃음을 멈추지 않고 대답했다.
“나는 서원직이 승상 앞에서 제갈량을 천인(天人)인 양 떠벌리던 것을 생각하며 웃었다. 지금 그가 군사를 쓰는 것을 보니 어찌 웃지 않고 배기겠느냐? 저따위 군마를 앞에 내세워 나와 맞싸우게 하는 것은 개나 양을 몰아 호랑이나 표범과 싸우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 다. 나는 승상 앞에서는 분김에 유비와 제갈량을 산 채로 잡아다 바 친다고 큰소리를 쳤는데, 이제 정말로 그 말처럼 되겠구나!”
그러고는 스스로 말을 놓아 앞으로 내달았다. 맞서 오는 군마의 보잘것없는 세력을 보고 한 말발굽에 짓밟아 버릴 양으로 휘몰아간 것이었다. 저편에서 말을 내어 마주쳐 오는 것은 조운이었다. 하후돈은 조운을 보고 큰 소리로 꾸짖었다.
“너희들이 유비를 따라다니는 것은 마치 외로운 혼이 귀신을 따라다니는 꼴 같구나. 이제 승상의 대군이 이르렀으니 어서 말에서 내려 항복하지 못할까?”
그 말에 성이 난 조운은 더욱 말을 박차 하후돈과 맞붙었다. 그러 나 제갈량에게서 받은 군령이 있는지라 힘대로 싸울 수는 없었다. 말과 말이 부딪기를 서너 번이나 했을까, 조운은 문득 거짓으로 패 해 달아났다.
하후돈은 부쩍 힘이 났다. 이것저것 깊이 헤아릴 것도 없이 말배 를 걷어차며 달아나는 조운을 뒤쫓았다.
조운은 한 십 리쯤 달아나다가 다시 말을 돌려 싸우는 체했다. 그 러나 몇 합 겨루기도 전에 힘에 부친 듯 말 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그래도 하후돈은 아무 의심 없이 조운을 뒤쫓는 데만 열을 냈다. 하 후돈의 부장 한호(韓浩)가 문득 짚이는 게 있던지 말을 달려 하후돈 을 따라잡은 뒤 말렸다.
“조운은 적을 꾀어들이고 있습니다. 매복이 있을까 두려우니 더는 쫓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간이 커질 대로 커진 하후돈은 그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너는 적군의 꼬락서니가 보이지도 않느냐? 저따위 적군이라면 비록 십면에 매복해 있다 한들 두려워할 게 무엇이겠느냐?”
그러고는 그대로 조운을 쫓기에만 열을 올렸다.
하후돈이 박망파에 이르렀을 때였다. 홀연 한소리 포향이 울리더니 유비가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마주쳐 나왔다.
하후돈의 눈에는 쫓기는 조운을 구해준답시고 남은 군사를 모조리 끌어모아 나온 것처럼 비쳤다. 하후돈이 한호를 돌아보며 비웃음 띤 투로 말했다.
“저게 겨우 매복한 군사란 것이다. 오늘 밤 안으로 신야로 들어가 지 못한다면 내 맹세코 군사를 거두지 않으리라!”
그런 다음 군사를 재촉해 앞으로 나아갔다. 유비 또한 제갈량에게 들은 말이 있는지라 힘써 싸우려 들지 않았다. 잠깐 하후돈의 군사 들과 어울렸다가 조운을 따라 급히 달아날 뿐이었다.
이때 이미 날은 저물고 짙은 구름이 하늘 가득 드리우기 시작했 다. 거기다가 달이 없어 어두운데 낮에 일던 바람은 밤이 되자 더욱 거세졌다. 그만하면 한번쯤 군사를 멈추고 앞뒤를 눈여겨 살펴볼 만 도 한데, 어찌 된 셈인지 하후돈은 여전히 군사를 재촉해 유비를 뒤 쫓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조조 아래서 단련된 일급의 맹장이 건만 한번 패신(神)에 흘리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자기편이 어쩌면 적의 유인에 말려들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 이 처음 든 것은 이전과 우금이었다. 하후돈을 뒤따라 박망파에 이 른 그들은 골짜기가 좁고 양편이 모두 억새와 갈대로 덮여 있는 곳 에 이르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적에게 속는 자는 반드시 지게 되어 있는 법이오. 지금 남쪽으로 난 길은 좁을 뿐더러 산과 내가 너무 가깝고 수목이 빽빽이 들어서 있소. 만약 불로 공격을 당한다면 어쩌겠소?”
이전이 우금을 보고 걱정스레 말했다. 우금 또한 걱정스런 얼굴로 맞장구를 쳤다.
“그대의 말이 옳소. 내가 앞으로 가서 도독에게 말씀드릴 테니 그대는 뒤에 오는 군사를 멈추도록 하시오.”
그 말에 이전은 말 머리를 뒤로 돌리며 꾸역꾸역 밀려드는 후미 의 군사들에게 크게 소리쳤다.
“뒤에 오는 군사들은 걸음을 천천히 하라.”
그러나 힘을 다해 달려오던 군마라 금세 속도를 줄일 수가 없었 다. 앞선 자가 멈추려 해도 뒤에서 밀고 들어오는 자 때문에 그대로 꾸역꾸역 나아갈 뿐이었다.
한편 앞으로 말을 달린 우금은 저만큼 하후돈이 보이자 큰 소리로 불렀다.
“전군 도독께서는 잠시 멈추시오!”
그 소리를 들은 하후돈이 말꼬삐를 당겨 세우고 돌아보니 우금이 헐떡이며 달려오고 있었다.
“무슨 일이오?”
잠시라도 적을 뒤쫓는 게 늦어진다는 생각으로 하후돈이 귀찮은 듯 물었다. 우금이 굳은 얼굴로 깨우쳐주었다.
“남쪽으로 난 길은 좁은 데다 산천 사이에 끼어 있고 나무와 수풀 이 빽빽이 들어차 있습니다. 마땅히 적의 화공에 대한 방비가 있어 야 할 것입니다.”
그제서야 주위를 돌아본 하후돈도 퍼뜩 느껴지는 게 있는 모양이 었다. 우금에게 대답하는 대신 뒤따르는 군마를 향해 소리쳤다.
“모두 말 머리를 돌려라. 아무도 앞으로 나아가서는 아니 된다!”
그러나 미처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등 뒤에서 함성이 크게 떨쳐 울리더니 한 줄기 불이 숲에 옮아 붙었다. 이어 불은 길 양쪽 갈대숲과 억새풀밭 여기저기서도 일기 시작하여 잠깐 동안에 사방 팔방이 모두 불길에 휩싸였다.
뿐만이 아니었다. 바람이 한층 거세지며 불길을 키우니 그 불길을 피하다 서로 밟혀 죽은 조조의 군사만도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 도였다. 어렵게 불길을 헤치고 나간다 해도 앞에는 어느새 말 머리 를 되돌려 나타난 조운이 사나운 기세로 덮쳐왔다. 거기서 하후돈은 데려간 군사의 태반을 잃고 간신히 불구덩이를 빠져나와 달아났다. 한편 군사의 후미에 있던 이전은 자신의 예상대로 전대(前)가 불리함을 보자 얼른 군사를 돌려 박망성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미처 군사를 돌리기도 전에 한 떼의 군마가 나타나 길을 막았다. 앞 선 장수는 다름 아닌 관운장이었다.
이전이 이를 악물고 군사를 내어 어지러운 싸움을 벌였으나 그 싸움이 유리할 리 없었다. 죽을 힘을 다해 싸운 결과가 겨우 제한 몸 길을 앗아 달아난 것뿐이었다. 관운장은 굳이 이전을 뒤쫓지 않 고 그가 호위하던 군량과 마초만 불태워버렸다.
하후돈에게 갔다가 되돌아오던 우금은 자기편의 군량과 마초를 실은 수레들이 불타고 있는 것을 보자 이미 싸움은 글렀다고 보았 다. 구태여 적진에 뛰어들 것까지는 없다고 생각하고 샛길을 찾아 황급히 달아났다.
하후란과 한호가 군마와 양초가 불타는 걸 보고 달려갔으나 소용 이 없었다. 미처 그곳에 이르기도 전에 장비와 마주친 하후란은 몇 번 창칼이 부딪기도 전에 장비의 한 창에 찔려 말 아래로 떨어지고 그 끔찍한 광경에 놀란 한호는 그대로 말을 박차 달아나버렸다.
장수들이 모두 달아나거나 죽어버린 군사들과의 싸움이니 뒤끝은 뻔했다. 유비의 군사들은 날이 밝도록 마음껏 적을 죽이다가 진채로 돌아갔다. 널브러진 조조군의 시체는 들판을 덮고 거기서 흐르는 피 는 내를 이룰 지경이었다.
하후돈이 남은 군사를 점검해보니 열에 두셋을 넘지 못했다. 그 대로는 유비와 싸움을 할 수 없어 분한을 머금은 채 허창으로 돌아 갔다.
이윽고 공명은 모든 장수들에게 군사를 거두어 신야로 돌아오라 는 영을 내렸다. 관우와 장비는 말 머리를 나란히 신야로 돌아가면 서 서로 쳐다보고 감탄했다.
“공명은 참으로 뛰어난 인물이로구나!”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는데 몇 리 가기도 전에 미축과 미방이 군 사를 이끌고 마중을 나오는 게 보였다. 가까이 가보니 하늘을 찌를 듯한 정기(旌旗) 아래 작은 수레가 한 대 섞여 오고 있는 그 위에는 제갈공명이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관우와 장비는 서로 말을 맞추기나 한 듯 말에서 뛰어내렸다. 그 리고 공명의 수레 앞에 나아가 땅에 엎드려 절했다. 그들 두 사람에 대한 제갈공명의 우위가 비로소 자리 잡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오래잖아 유비도 조운, 관평, 유봉 등과 함께 그곳에 이르렀다. 유 비는 여러 갈래의 군사를 모두 수습해 모은 뒤 빼앗은 양초와 치중 을 장수와 사졸들에게 골고루 상으로 나누어주었다.
유비가 이긴 군사를 이끌고 신야로 돌아가자 백성들은 길을 빽빽이 메우도록 나와 절하며 말했다.
“저희가 이토록 온전하게 살아남은 것은 모두가 사군(君)께서 어진 이를 얻으신 덕입니다!”
못 미더운 유표의 다스림 밑에서 북방 조조의 남하를 두려워하던 백성들로서는 유비가 무슨 든든한 성벽처럼이나 느껴졌을 것이다. 하지만 공명은 그들 백성들과 마음이 같을 수 없었다. 한 싸움은 비록 이겼으나 그것으로 조조의 힘 전부를 꺾어버렸다고는 볼 수 없 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공명은 현으로 돌아오기 바쁘게 유비에게 말 했다.
“하후돈이 비록 패해 물러갔다 하나 어려운 싸움은 오히려 지금부 터 시작입니다. 조조는 반드시 스스로 대군을 이끌고 올 것입니다.”
“일이 그러하다면 이제는 어찌해야 좋겠습니까?”
유비도 공명의 말을 듣자 이내 걱정스런 얼굴이 되어 되물었다. 공명이 무엇 때문에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용히 대답했다.
“제게 한 계책이 있습니다. 조조를 넉넉히 깨칠 수 있을 것입니다 …….”
“그게 무엇입니까?”
유비가 반갑게 물었다. 공명이 다시 망설이는 기색이더니 곧 입을 열었다.
“신야는 작은 고을이라 오래 머물 곳이 못 됩니다. 그런데 요사이 듣기로 유경승이 위독하다고 합니다. 한번 틈타볼 만한 기회니, 형 주를 얻기만 하면 몸을 지킬 만한 땅을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조조와도 맞서볼 만한 근거지를 얻는 게 될 것입니다.”
전에도 그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어 크게 놀라지는 않았으나 공 명의 그 같은 말에 유비의 얼굴에는 이내 난감한 기색이 떠올랐다.
“공의 말씀이 옳을지는 모르나 이 비는 경승으로부터 여러 가지 은혜를 입은 몸입니다. 어찌 차마 그를 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만약 지금 형주를 손에 넣어두지 않으면 뒷날에는 후회 해도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
공명은 인정과 의리에 얽매여 큰일을 그르쳐서는 안 된다는 듯 짐 짓 차게 말했다. 그러나 유비는 무겁게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나는 비록 죽게 될지언정 의를 저버리는 짓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자 공명은 다시 감동과 한탄이 뒤섞인 눈길로 유비를 바라보 다가 문득 말머리를 돌렸다.
“정히 그러하시다면 이 일은 뒷날 다시 의논드리도록 하지요.”
억지로 권해봐야 되지 않을 일이란 걸 알고 잠시 뒤로 미룬 것이 었다.
하지만 북쪽의 형세는 그런 일을 오래 접어둘 만큼 조용하지 못 했다. 싸움에 지고 허창으로 돌아간 하후돈은 스스로를 죄인처럼 묶 은 뒤 조조 앞에 나아가 목을 길게 빼고 죽음을 빌었다.
조조가 그런 하후돈을 풀어주게 한 뒤 물었다.
“어쩌다가 이런 꼴이 되었느냐?”
“제가 어리석어 제갈량의 못된 꾀에 빠졌습니다. 불을 써서 저희 군사를 공격하는 바람에 그만 지고 말았습니다.”
하후돈이 부끄러움과 뉘우침 섞인 어조로 대답했다. 조조가 알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너는 어렸을 적부터 군사를 부려왔으면서도 어찌 좁은 곳에서는 화공을 방비해야 된다는 것조차 몰랐느냐.”
“이전과 우금이 말해주었습니다만 그걸 깨우쳤을 때는 이미 늦어있었습니다.”
하후돈이 한층 부끄러워하며 대답했다.
그러자 조조는 이전과 우금을 불러 상을 내렸다. 어찌됐건 하후돈 과 마찬가지로 패장인 이전과 우금으로서는 전혀 뜻밖이었다. 조조 가 패전에 화를 내지 않고 너그러이 대하자 다소 기세를 회복한 하 후돈이 문득 목소리를 돋우어 말했다.
“유비가 이토록 기세 좋게 날뛰니 실로 배와 가슴이 우환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급히 없애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내가 걱정하고 있는 것도 유비와 손권이다. 나머지 하잘 것 없는 인물들이야 마음에 걸려할 게 무엇이 있겠는가? 이번 기회에 강남 을 소탕하여 평정해야겠다.”
조조는 그렇게 대답하며 스스로 앞장서 남정征)할 뜻을 굳혔다. 한번 뜻을 정하면 누구보다도 신속하게 움직이는 조조였다. 조조 는 누구와 다시 의논하는 일도 없이 그날로 영을 내려 오십만 대군 을 일으킨 뒤 대(隊)마다 십만씩 다섯 대로 나누었다. 제일대는 조홍 (曹)과 조인, 제이대는 장요와 장합, 제삼대는 하후돈과 하후연, 제 사대는 이전과 우금이 맡고, 자신도 나머지 장수들을 거느리고 제오 대를 이끌기로 했다.
또 따로 허저는 절충장군으로 세워 군사 삼천을 이끌고 선봉이 되게 한 뒤 길한 날을 택하니 날은 바로 건안 십삼년 칠월 병오(丙午)일이었다.
태중대부로 있던 공융이 그런 조조를 말렸다.
“유비와 유표는 모두 한실의 종친이니 가볍게 쳐서는 아니 됩니 다. 또 손권은 강동의 여섯 군을 소혈 삼아 범처럼 도사리고 있는 데 다 대강(江)의 험난함을 끼고 있으니 함부로 사로잡기 어렵습니 다. 그런데도 이제 승상께서는 이렇다 하게 내세울 대의명분도 없이 대군을 일으키셨다가 자칫 천하의 신망을 잃을까 두렵습니다.”
비록 지금은 조조 밑에서 벼슬을 살고 있으나 한때는 제후의 한 사람으로 조조와 어깨를 나란히 동탁을 치려고 의병을 일으켰던 공 융이었다.
뒷날 사람들로부터 건안칠자建安)라고 불렸던 당대 제일급 의 문사인 동시에 공자의 이십대 손이란 자부심이 겹친 그로서는 아 무래도 남들처럼 조조에게 고분고분할 수 없었다. 거기다가 유비에 대한 옛 정까지 겹치자 참지 못하고 나섰다.
공융의 그 같은 말에 조조는 불같이 화를 냈다.
이미 마음속에 정해진 자신의 뜻을 공융이 정면으로 말리고 나선 것이나 유비를 은근히 두둔하고 자신의 군대를 대의명분 없다고[無 義之師]말한 것도 심기를 건드렸지만 그 자신만의 특별한 혐오와 원한도 함께 작용한 탓이었다. 지난날 예형(衡)을 죽였을 때나 뒷 날 양수(楊)를 죽일 때와도 맥이 닿는 어떤 기묘한 감정이었다.
“유비와 유표, 손권은 모두 천자의 명을 거스르는 역적들인데 어 찌 토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거기다가 이제 내가 일으키려는 군 사가 어찌하여 무의지사란 말인가?”
조조는 일단 공융을 그같이 꾸짖어 물리쳤다. 그러나 그 정도로 화가 풀리지 않는지 다시 명을 내려 여럿에게 알리게 했다.
“앞으로 이 일에 대해 두 번 다시 공융과 같이 말하는 자가 있으 면 반드시 그 목을 베리라!”
한편 공융은 공융대로 조조의 그 같은 꾸짖음이 그 어느 때보다 아니꼽고 분했다. 군사적인 지식과 권모술수를 빼면 공융이 조조를 우러러볼 만한 것은 별로 없었다.
가문, 학식, 재주, 문장 그 어느것을 따져봐도 조조에게 뒤질 것은 하나도 없다고 자부하는 공융에게는 있을 법도 한 감정이었다.
“지극히 어질지 못한 것으로 지극히 어진 것을 치려 함이니 어찌 패하지 않으랴!”
승상부에서 쫓겨나오던 공융은 문득 하늘을 바라보며 그렇게 탄 식했다. 그런데 그 한마디가 탈이 되었다. 어사대부 극려(廬)란 자 의 집을 드나들며 빌붙어 지내는 건달 하나가 그 말을 듣고 극려에 게 전했다.
극려는 원래부터 공융을 미워해오던 자였다. 평소 공융으로부터 사람됨이 비루하고 학문이 모자란다 하여 모욕과 업신여김을 받아 온 까닭이었다. 공융이 했다는 그 말을 듣자 마음속의 원한을 풀좋 은 기회로 여겨 조조에게 달려가 알렸다.
극려가 전하는 공융의 말을 듣자 조조는 또다시 불같이 노했다. 그걸 본 극려는 한술 더 떠 다른 것까지 꺼내 공융을 헐뜯었다.
“공융은 평소에도 늘상 승상을 모욕해왔습니다. 또 죽은 예형과도 서로 친해 예형이 공융을 추겨 ‘공자는 죽지 않았다[仲尼不死]’하는가 하면 공융은 예형을 추겨 ‘안회가 다시 살아났다[顔回復生]’고 했습지요. 지난날 예형이 승상을 욕한 것도 실은 공융이 시켜서 한 짓입니다.”
조조는 그 말을 듣자 소위 글줄 한다는 것들의 짓거리가 눈에 선 했다. 공자가 죽지 않았다는 말은 공융이 곧 제 이십대 할아비인 공 자라는 뜻이요 안회가 되살아났다는 것은 예형의 학덕이 십철(哲) 의 으뜸인 안회와 같다는 흰소리가 아닌가. 거기다가 죽은 예형에게 당한 욕이 떠오르자 조조는 드디어 공융을 죽일 마음이 들었다.
돌이켜보면 공융은 전에도 몇 번인가 조조를 놀린 적이 있었다. 조비가 원희의 처 진씨(甄氏)를 아내로 맞았을 때였다. 공융이 조조 앞에서 천연스레 말했다.
“주(周) 무왕(武王)은 은(殷)을 친 뒤에 달기(己)를 주공(周公)에 게 주었습니다.”
그 말을 듣자 원소의 둘째 며느리를 뺏어 자신의 맏며느리로 삼 게 된 꼴이 된게 내심 꺼림칙하던 조조는 반가워하며 그 출전出典) 을 물었다. 만약 그런 고사가 사실로 있다면 자기들 부자가 한 일도 비난을 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때문이었다. 그러나 공융의 대답은 엉뚱했다.
“지금 일로 옛일을 추측해보았을 뿐입니다. 아마도 그때도 틀림없 이 그랬을 것입니다.”
공융의 그 같은 대답에 조조는 벌레 씹은 얼굴이 되었다. 조비에 게 원희의 처와 혼인하도록 한 것이 잘못이라는 비꼼뿐만 아니라, 고전에 밝지 못해 없는 출전을 물은 자신의 깊지 못한 학식을 조롱당한 셈이었기 때문이다.
또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조조가 어떤 명분을 만들어 금주령 을 내리자 공융이 조조에게 글을 보내 부당함을 말했다.
‘술은 예부터 덕 있는 것이라 일컬은 지 오래니, 조상을 제사하고 귀신을 위로하며 사람의 괴로운 마음을 달래고 가라앉혀 주기 때문 입니다. 술이 나라를 망치기 때문에 금한다면 여자 때문에 천하를 잃은 자가 있는데 어찌 혼인은 금하지 않습니까? 또 노나라는 유학 을 너무 존중하여 나라가 쇠퇴해졌지만 그래서 유학을 금한 나라는 없습니다……………..’
대강 그런 식으로 몰아간 끝에 조조가 내린 금주령은 다만 군량 을 확보하기 위한 것일 뿐임을 지적하여 조조의 감춰진 속셈을 아프 게 꼬집었다.
그 같은 지난 일까지 떠오르자 조조는 더욱 공융을 죽일 마음을 굳혔다. 그리고 군모좨주(軍謀祭酒벼슬을 하는 노수(路粹)란 자를 시켜 공융을 탄핵하게 했다.
조조가 하는 일을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곧 공융은 대역죄인이 나 다름없이 다루어져 정위廷尉)가 잡으러 나섰다. 정위가 공융의 집으로 들이닥쳤을 때 공융은 마침 어린 두 아들과 바둑을 두고 있 었다. 부리던 사람들이 달려와 공융에게 급하게 알렸다.
“존군(君)께서 정위에게 잡혀가시면 아마도 죽음을 당하시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두 분 공자님은 급히 피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어린 두 아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부서지는 새 둥지에 어찌 성한 알이 남을 수 있겠소?”
역시 그 아비에 그 아들이라 할 만했다. 곧이어 들이닥친 정위는 과연 공융뿐만 아니라 두 아들과 일가 노소를 모조리 끌어갔다. 그 리고 형식적인 심문 끝에 공융의 일가는 남김 없이 죽음을 당했는 데 특히 공융의 목은 뒷사람에 대한 경계로 저잣거리에 내걸렸다. 이때 경조(兆) 벼슬의 지脂)이란 사람이 있었다. 공융의 목 앞에 엎드려 울다가 그 말이 조조의 귀에 들어갔다. 성난 조조는 그 마저 죽이려 했으나 순욱이 말렸다.
“제가 들으니 지습은 항상 공융에게 나무라기를, 그대는 너무 강 직하여 화를 입게 될 것이라 했다 합니다. 그러나 막상 공융이 죽자 와서 곡을 하는 것을 보면 지습은 의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죽여서 는 안 됩니다.”
그 말에 지습을 기특히 여긴 조조는 죽일 마음을 버렸다. 그러나 지습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공융 부자의 시신까지 거두어 모두 장례 를 치러주니 듣는 사람 치고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