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6권 – 4화 : 모든 것을 갖추었으되 동풍이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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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6권 – 4화 : 모든 것을 갖추었으되 동풍이 없구나


모든 것을 갖추었으되 동풍이 없구나

이튿날 술에서 깨어난 조조도 유복을 죽인 일을 후회하여 마지않 았다. 유복의 아들 유희가 부친의 시체를 거두어 장례 지낼 수 있도 록 해달라고 청하자 울며 말했다.

“내가 어제 그만 술에 취해 죄 없는 너의 아버님을 죽였다. 실로 뉘우쳐도 어찌할 길이 없구나. 다만 장례라도 삼공의 예로 후하게 치르려 하니 부디 내 정성을 물리치지 말아다오.”

그러고는 군사를 뽑아 운구에 호위로 붙여주며 그 고향에 돌아가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그날로 유희를 돌려보냈다.

유복의 죽음으로 침울해진 군중의 분위기가 그 유자(遺子)에 대한 조조의 뉘우침 가득한 사죄와 이례적일 만큼 후한 장례로 좀 가라앉 은 다음 날이었다. 수군 도독인 모개와 우금이 조조의 장막을 찾아 말했다.

“크고 작은 배들에 실을 것은 다 갖춰 실었고, 또 쇠고리로 연결하여 그 위에 널판을 까는 일도 마쳤습니다. 깃발이며 싸움에 쓰이 는 기구들도 하나하나 빠짐없이 채비를 해두었으니 바라건대 승상 께서 한번 살펴보시고 곧 군사를 내도록 하십시오.”

말하자면 싸움에 앞서 마지막 점검을 해보자는 뜻이었다.

조조도 그 말을 옳게 여겨 그날로 진병을 앞둔 조련을 해보기로 했다. 조조는 수군 한가운데 자리 잡은 큰 배 위에 올라 여러 장수들 을 불러놓고 영을 내렸다.

“물에서 싸우는 군사와 뭍에서 싸우는 군사는 각기 다섯 가지 색 을 가진 깃발로 표시를 삼는다. 수군의 가운데 부대는 누른 기를 쓰 며 모개와 우금이 이끈다. 수군 전군은 붉은 기를 쓰며 장합이 이끌 고후군은 검은 기를 달아 여건이 이끈다. 좌군은 푸른 기를 달아 문 빙이 이끌며 우군은 흰 기를 달아 여통이 이끈다.

또 마보군의 앞장은 붉은 기를 쓰며 서황이 이끌도록 하고 뒤는 검은 기를 쓰며 이전이 이끈다. 왼쪽은 푸른 기를 쓰며 악진이 맡고, 오른쪽은 흰 기를 쓰며 하후연이 맡는다. 물과 뭍 두 길의 변화를 아 울러 맡아 적절하게 대응하는 일[水陸路都接應使]은 하후돈과 조홍 이 맡고 군진을 오가며 싸움을 감독하는 일[護衛往來監戰使]은 허저 와 장요가 맡도록 하라!”

이어 조조는 나머지 장수들에게도 각기 군사를 나누어주며 그들 이 있을 곳을 정해주었다. 조련에서뿐만 아니라 정말로 싸울 때의 배치이기도 했다.

이윽고 조조의 군령이 끝나자 대군은 그동안 머물렀던 진채를 떠나 조련으로 들어갔다. 수채에 북소리 세 번이 크게 울리며 크고 작 은 싸움배가 길을 나누어 진문을 빠져나가는데 조조가 보기에도 자 못 법도가 있었다.

거기다가 조조를 더욱 기쁘게 한 것은 방통이 일러준 연환계(連環 計)의 효험이었다. 마침 서북풍이 심하게 불었으나 몇십 척씩 쇠사 슬로 묶어둔 조조의 배들은 돛을 있는 대로 다 올려도 거친 파도를 헤치고 나아가는 게 마치 평지를 달리듯 했다.

배 멀미에 시달리지 않게 되자 군사들도 원래의 용맹을 되찾는 것 같았다. 이리저리 뛰고 내달으며 창을 내질러보기도 하고 칼을 휘둘 러보기도 했다. 앞뒤 좌우 기치들도 그날따라 더욱 정연해 보였다. 쇠사슬로 엮지 않은 오십여 척의 작은 배는 그런 조조군의 선단 사이를 바쁘게 오가며 때로는 그 지나치게 나아감을 말리고 때로는 뒤처짐을 몰아댔다.

장대(將臺) 위에 높이 앉아 그 모든 조련 광경을 보고 있던 조조 는 매우 흡족했다. 그대로 간다면 싸움은 이겨둔 것이나 다름없다고 속으로 기뻐하며 조련을 그치게 했다.

“모든 배들은 돛을 내리고 수채로 돌아가도록 하라!”

그러자 배들은 나갈 때와 마찬가지로 차례에 맞추어 수채로 되돌아갔다.

배를 내려 자신의 장막으로 돌아간 조조는 마음속의 기쁨을 감추 지 못해 여럿을 둘러보며 감탄의 말을 했다.

“만약 하늘이 돕는 게 아니라면 내가 어떻게 봉추의 묘한 계책을 얻을 수 있겠는가! 쇠사슬로 배를 엮어놓으니 과연 험한 강을 건너는 게 평지를 지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대들은 어찌 보았는가?” 

조조의 그 같은 물음에 모두가 옳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으나 오 직 정욱이 나서서 걱정하는 소리를 했다.

“배들을 모두 얽어놓아 흔들림이 없어진 것은 실로 좋은 일이나, 저쪽에서 화공을 쓴다면 피하기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반드시 거기 에 대한 방비를 해두셔야 할 것입니다.”

“공의 헤아림이 비록 멀리까지 미쳐 있기는 하나, 그래도 아직 미 치지 못한 곳이 있는 듯하오.”

조조가 껄껄 웃으며 그렇게 대답했다. 그 자리에 있던 순유가 영 문 몰라하는 눈길로 조조를 바라보며 물었다.

“정중덕(德)이 매우 옳은 말을 하고 있는데 승상께서는 어찌 하여 그렇게 웃으십니까?”

순유도 실은 마음속으로 정욱과 같은 걱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 었다. 그러자 조조는 한 번 더 껄껄거리더니 타이르듯 까닭을 일러 주었다.

“무릇 화공이란 반드시 바람의 힘을 빌려야 되는 법이오. 그런데 지금은 한겨울이라 오직 서북풍(西北風)이 있을 뿐 동풍이나 남풍이 있을 리 없소. 나는 서북쪽에 있고 적군은 남쪽 언덕에 있으니 설령 적이 불을 쓴다 해도 자기 군사들만 태워 죽일 뿐이란 말이오. 그러 니 그 같은 화공을 내가 왜 두려워하겠소? 만약 지금이 시월이거나 초봄만 같아도 나는 벌써 거기에 대비했을 것이오.”

정욱과 순유는 물론, 속으로 은근히 걱정했던 다른 장수들도 그 말을 듣고는 모두 감탄을 금하지 못했다. 일제히 엎드려 고개를 조아리며 입을 모아 말했다.

“승상의 높은 안목은 실로 저희가 따를 수 없습니다.”

조조는 그런 그들을 내려다보며 한 번 더 방통의 계책을 치켜세웠다.

“나의 청주병은 물론 서주에서 온 군사나 연(燕), 대(代)에서 온 군사들은 모두 배 타는 데 익숙하지 못하다. 이번에 연환계를 얻지 못했던들 무슨 수로 이 대강의 거칠고 험함을 이겨내어 건너겠느 냐?”

그러자 문득 두 장수가 반열에서 뛰쳐나오며 소리쳐 대꾸했다. 

“저희들은 비록 유주와 연 땅에서 왔으나 배를 잘 몰 줄 압니다. 바라건대 저희들에게 순선 스무 척만 내려주십시오. 바로 북 강구로 짓쳐들어가 적군의 북과 기치를 빼앗아 돌아오겠습니다. 그 렇게 하면 우리 편의 사기를 높이는 것이 될 뿐만 아니라 우리 북군 도 배를 잘 부린다는 것을 보여주어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할 수 있 을 것입니다.”

조조가 한편은 놀라고 한편은 기특해 그들을 바로 보니 다름 아 닌 초과 장남이었다. 원래 원소 밑에 있다가 항복해 온 장수들로 이 기회에 한번 공을 세워보고자 나선 것이었다. 조조가 그들을 타 이르듯 말했다.

“그대들은 모두 북방에서 자란 사람들이라 방금 한 말과 같이 배 를 잘 부릴 수 있을지 걱정된다. 강남의 군사들은 물 위를 오가며 오 래 조련을 받아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수전에 날래다. 귀한 목숨을 아이들 장난하듯 가볍게 내걸지 말라.”

“만약 저희들이 이기지 못한다면 군법에 따라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조조의 말에 더욱 오기가 솟는지 초촉과 장남이 고함치듯 한꺼번에 대답했다.

“싸움배는 이미 모두 쇠사슬로 얽어놓았고, 오직 작은 배가 몇 척 남아 있을 뿐이다. 거기에는 기껏해야 군사 스무 명을 태울 수 있을 뿐인데 그런 배 몇 척으로 어찌 제대로 싸울 수 있겠느냐?”

아무래도 못 미더운지 조조가 한 번 더 초과 장남을 말렸다. 이 번에는 초촉이 홀로 나서서 부득부득 졸랐다.

“만약 큰 배를 이끌고 가서 이긴다면 그게 무슨 별난 일이 되겠습 니까? 부디 작은 배 스무남은 척만 저희들에게 빌려주십시오. 저와 장남이 반씩 나누어 이끌고 오늘로 강남의 수채를 들이쳐 적장의 목 을 베고 그 기치를 빼앗아 돌아오겠습니다.”

그제야 조조도 한번 해볼 만하다 생각이 들었던지 그들의 청원을 들어주었다.

“좋다. 그대들에게 배 스무 척과 날랜 군사 오백을 내주겠다. 모두 긴 창과 강한 쇠뇌를 지닌 군사들이다. 그러나 그대들이 떠나는 것 은 내일 날이 밝은 뒤라야 한다. 수채에 있는 큰 배들이 강으로 나가 멀리서 뒤를 받칠 뿐만 아니라 문빙에게도 따로이 배 서른 척을 주 어 그대들이 돌아오는 걸 맞아들이게 하리라.”

조조의 허락이 떨어지자 초촉과 장남은 기쁜 얼굴로 물러났다. 다음 날이 되었다. 사경 무렵 하여 밥을 지어 먹은 조조의 군사는 오경 무렵 모든 채비를 갖출 수 있었다. 곧 수채 안에서 요란하게 북이 울리고 싸움배들이 채를 나와 강물 위를 덮기 시작했다. 푸른 기, 붉은 기의 어지러운 신호로 장강 일대는 금세 꽃이라도 뒤덮인 듯 장관을 이루었다.

초촉과 장남은 수채 안의 모든 배들이 나가 강물을 뒤덮은 뒤에 야 스무 척의 작은 배를 이끌고 강남을 바라보며 떠났다. 그들을 기 다리는 운명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나 기세만은 제법 드높았다. 하지 만 강남의 주유라고 해서 자고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 전날 강북 에서 북소리가 요란하기에 주유는 사람을 보내 알아보았다. 

“조조가 수군을 조련하고 있답니다.”

한참 뒤에 그런 전갈이 들어왔다. 주유는 조조가 수군을 조련하는 모습을 보아두고 싶었다. 그러나 산등성이에 올라가 내려다보려 했 을 때는 이미 조조의 수군이 진채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날 다시 조조의 진채 쪽에서 북소리가 하늘을 떨어 울 리는 듯하더니, 높은 곳에 올라 그쪽을 살펴본 군사 하나가 급하게 달려와 알렸다.

“작은 배 스무남은 척이 우리 진채로 짓쳐들어오고 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주유는 조조가 드디어 정면으로 부딪쳐오는 것이 라 짐작했다. 먼저 그 날카로운 기세부터 꺾어두어야겠다 싶어 좌우 를 돌아보며 물었다.

“누가 먼저 나가 적의 예기를 꺾어놓겠는가?”

“제가 잠시 선봉이 되어 적을 깨뜨려보겠습니다.”

한당과 주태가 한꺼번에 나서며 소리쳤다. 주유는 그들이라면 믿을 만하다고 보아 기꺼이 허락하는 한편 각 진채에 영을 내려 방비 를 더욱 엄히 하게 했다.

주유의 허락을 함께 받은 한당과 주태는 각기 작은 배 다섯 척을 이끌고 좌우로 갈라서 적을 맞으러 나갔다. 초촉과 장남이 제 용맹 만 믿고 나는 듯 노를 저어 다가들고 있었다. 한당은 가슴을 보호하 는 갑옷을 두르고 긴 창을 짚은 채 뱃머리에 섰다.

먼저 이른 것은 초촉의 배였다. 초촉은 군사들에게 명을 내려 한 당의 배 쪽으로 어지럽게 화살을 날려보냈다. 한당이 방패를 들어 화살을 막는 사이에 두 배의 거리는 창칼을 맞댈 수 있을 만큼 좁혀 졌다. 초촉 또한 긴 창을 들고 일어나 바로 한당과 어울렸다. 하지만 초촉의 솜씨 가지고는 어림도 없었다. 한당의 창 끝이 한번 번뜩하 는가 싶자 초촉은 가슴이 꿰어 물 위로 떨어졌다.

뒤따라오던 장남은 초촉이 죽는 걸 보자 큰 소리를 지르며 한당 을 덮치려 했다. 그러나 미처 한당의 배에 이르기도 전에 주태의 배 가 먼저 장남의 뱃머리를 막았다. 아직 두 배의 사이가 창칼을 맞댈 만큼 되지 않아 장남은 긴 창을 짚고 뱃머리에 선 채 졸개들에게 주 태의 배에다 화살을 퍼붓게 했다. 주태의 배에서도 지지 않고 활을 쏘아대니 양편에서 모두 화살이 어지럽게 날았다.

그럭저럭 주태와 장남의 배 사이가 일고여덟 자 정도로 가까워졌 을 때였다. 한 손에는 방패를 들고 한 손에는 칼을 든 주태가 훌쩍 몸을 날렸다. 그리고 장남의 배에 뛰어내리자마자 한칼에 장남을 베 어버렸다. 이미 대장인 장남이 죽은 마당에 그 배 안에 달리 주태를 당해낼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주태는 양 떼 틈에 뛰어든 호랑이처럼 그 배에 타고 있던 조조의 군사들을 닥치는 대로 쳐죽였다.

초촉과 장남의 배를 뺀 나머지 배들은 그 광경에 놀라 급히 뱃머 리를 돌리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한당과 주태가 노 젓는 군사들을 재촉해 급하게 그들을 뒤쫓았다. 강을 반쯤 건넜을 무렵 조조 편에 서 문빙이 쫓겨오는 자기편 배를 구하러 왔다.

초 장남이 거느리고 갔다 쫓겨오는 배가 여남은 척에 문빙이 새 로 거느리고 온 배가 또 서른 척이라 배나 사람의 머릿수는 조조군이 자기편의 다섯 배에 가까웠지만 주태와 한당은 조금도 겁을 먹지 않 았다. 곧 강 복판에서는 다시 한바탕 어지러운 싸움이 벌어졌다.

그때 주유는 여러 장수들과 더불어 가까운 산 위에서 조조군의 진용을 살피고 있었다. 크고 작은 싸움배가 강물 위에 알맞은 거리 로 늘어서 있는데 기치며 군호가 제법 격식을 갖추고 있었다.

한참을 살핀 주유는 이어 강 한가운데로 눈길을 돌렸다. 주태와 한당이 조조의 장수인 문빙과 싸우는 것이 보였다. 군사나 배의 수 효로는 문빙이 훨씬 많았으나 한당과 주태가 워낙 힘을 다해 덤비니 싸움은 곧 한편으로 기울어졌다. 마침내 당해내지 못한 문빙이 뱃머 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주태와 한당은 또 그런 문빙을 뒤쫓으려 했다. 그러나 주유는 그 들이 너무 적진 깊이 들어갔다가 낭패를 볼까 걱정이 되었다. 곧 북 과 징을 크게 울리며 흰 기를 휘둘러 주태와 한당을 불러들였다. 두 사람이 군호를 알아듣고 돌아오는 걸 보자 마음이 놓인 주유 는 다시 조조의 수채로 눈길을 돌렸다. 강을 사이에 두고 이쪽 산 위 에서 보는 것이지만 그 법도를 느낄 수는 있었다.

한참을 자세히 살핀 주유가 문득 둘러선 장수들을 보고 묻는다기 보다는 탄식에 가깝게 말했다.

“강북의 싸움배는 갈대처럼 빽빽이 늘어섰고, 또 그들을 거느리는 조조는 지모가 높기로 이름난 사람이다. 무슨 계책을 써야 적을 깨 뜨릴 수 있겠는가!”

그런데 미처 대답이 있기도 전에 문득 조조의 수채 가운데 우뚝 솟아 있던 누런 깃발이 거센 바람에 부러져 내리는 게 보였다. 그걸 보자 이제까지 그를 사로잡고 있던 걱정이 깨끗이 씻겨진 듯 주유가 크게 웃으며 말했다.

“저것은 반드시 조조에게 상서롭지 못한 징조이다. 그렇다면 곧 우리에게 이롭다는 뜻이 아닌가!”

그러고는 다시 조조의 수채를 살피고 있는데 갑자기 미친 듯한 바람과 함께 강물에 크게 파도가 일어 강 언덕을 후려쳤다. 뿐만 아 니었다. 한바탕 불어젖힌 그 바람은 주유 앞에 세워둔 대장기를 꺾 어 주유의 뺨을 세차게 후리며 땅에 떨어지게 만들었다.

주유는 그 아픔 못지않게 바람의 방향을 보고 문득 떠올린 어떤 일에 상심하여 한마디 큰 외침과 함께 입으로 시뻘건 피를 토해내며 뒤로 쓰러졌다. 여럿이 달려들어 주유를 일으켜 세웠으나 그는 이미 혼절해 있었다.

곁에 있던 사람들은 급히 그런 주유를 업고 장막에 데려다 뉘었 다. 모든 장수들이 달려와 주유가 그리된 까닭을 묻고는 한결같이 놀라며 서로를 돌아보고 탄식했다.

“강북의 백만 대군이 호랑이가 움키려 하고 고래가 삼키려 하듯 우리 강남을 노리고 있는데 뜻밖에도 도독께서 이 지경이 되셨으니실로 큰일이다. 만일 조조가 이때를 틈타 일시에 들이닥치면 어쩌겠는가?”

그들 중에서도 가장 걱정이 많은 사람은 노숙이었다. 그는 주유가 갑자기 병들어 눕자 걱정하다 못해 공명을 찾아보고 어찌하면 좋을 까를 의논했다. 그러나 듣고 있는 공명은 별로 걱정하는 기색이 없 었다. 그저 담담한 얼굴로 노숙의 말을 다 듣고 난 뒤에 불쑥 물었다. 

“공은 무엇 때문에 그리되었다고 생각하오?”

“조조에게는 복이고 강남에는 화가 되는 일이겠지요.”

공명의 말뜻을 얼른 알아듣지 못한 노숙이 탄식 섞어 대답했다. 그러자 공명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게 아니라 공근이 갑자기 병을 얻게 된 까닭을 물은 것이오. 어쨌든 나는 그의 병을 낫게 할 수가 있소.”

그래도 노숙은 공명의 참뜻은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가 주유를 치 료할 수 있다는 것만 반가워했다.

“그럴 수만 있다면 나라를 위해 그보다 더한 다행이 어디 있겠소!” 

그 말과 함께 다른 것은 더 물어보려고도 하지 않고 어서 가서 주 유의 병을 보아주기만을 재촉했다. 공명도 구태여 자기 참뜻을 밝히 려 하지 않고 노숙을 따라나섰다.

주유의 장막에 이른 노숙은 공명을 잠시 밖에 기다리게 하고 혼 자 먼저 들어갔다. 주유는 다친 머리를 싸맨 채 누워 있었다.

“병세가 좀 어떠하십니까?”

“가슴과 배가 뒤틀리듯 아프고 때로 정신을 잃게 되는 것이 처음과 별 차도가 없소.”

노숙의 물음에 주유가 괴로운 듯 대답했다. 예사병이 아니라 여겨 노숙이 더욱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무슨 약을 들어보셨습니까?”

“토악질이 심해 도대체 약을 마실 수가 없소.”

그 같은 주유의 말을 듣고서야 노숙은 공명을 데려온 것을 알렸다. 

“마침 공명을 보러 갔더니 공명이 말하기를 자기가 도독의 병을 낫게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지금 장막 밖에 와 있는데 불러들여 한 번 치료해보게 하는 게 어떻습니까?”

주유가 굳이 마다할 까닭이 없었다. 오히려 은근히 기대하는 눈 치로 공명을 불러들이게 했다. 그리고 자신은 좌우의 부축을 받아 일어나 좌상 위에 앉았다. 공명에게 약한 꼴을 보이기 싫어서였다. 

“며칠 도독을 뵙지 못한 사이에 이렇게 편찮으시게 될 줄은 몰랐 습니다.”

공명이 장막 안으로 들어서며 그렇게 위로의 말을 했다. 주유가 애써 괴로움을 감추며 그 말을 받았다.

“사람의 화와 복은 아침저녁으로 달라지는 법인데, 나라고 어찌늘 병 없이 지낼 수 있겠소이까?”

그러자 공명은 빙긋 웃으며 한마디 했다.

“하늘도 헤아릴 수 없는 풍운이 있는 법입니다. 사람이 어찌 모두 알 수 있겠습니까?”

얼른 들으면 주유의 말에 그냥 대구를 맞춘 것 같지만 그 같은 공 명의 반문 속에는 감추어진 뜻이 있었다. 주유가 그걸 알아듣고 낯빛이 변하며 괴로운 신음 소리를 냈다. 공명이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 같다는 데서 온 놀라움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공명은 얼른 그걸 털어놓지 않고 빙 둘러 얘기를 했다.

“도독께서는 가슴속에 무엇이 쌓인 듯 답답함을 느끼시지 않습니까?”

“그렇소이다.”

“반드시 시원하게 해줄 약으로 가슴속의 응어리를 풀어야 합니다.” 

“이미 약을 써보았지만 아무런 효험을 보지 못했소이다.”

그러면서 주유는 가만히 공명을 살폈다. 공명은 그래도 여느 병자 대하는 것 같은 소리만 했다.

“먼저 기운을 고르게 다스려야 합니다. 기운이 골라지면 숨을 내 쉬고 뱉고 하는 사이에 절로 낫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주유는 공명이 이미 자기의 마음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하는 소리란 걸 알아듣고 떠보듯 물었다.

“기운을 고르려면 어떤 약을 먹어야 하겠소?”

“제게 한 가지 처방이 있습니다. 도독께서는 그걸로 우선 기운을 고르게 하십시오.”

공명은 그렇게 대답한 뒤 좌우에 있는 사람을 병풍 뒤로 물러나 게 하고 종이와 붓을 가져다 가만히 열여섯 자를 썼다.

‘조조를 깨뜨리려면 마땅히 화공을 써야 하리. 모든 걸 갖추었으되 다만 동풍이 없구나公 宜用火攻 萬事俱備 只缺東風].’

쓰기를 마친 공명은 그걸 주유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이것이 바로 도독께서 병이 나신 까닭입니다.”

주유는 공명이 내준 글을 보고 크게 놀라며 가만히 생각했다.

‘공명은 참으로 귀신 같은 사람이다! 짐작대로 벌써 내 마음속을 알고 있었구나. 이렇게 된 바에야 모든 걸 털어놓는 수밖에 없다.’ 

원래 주유의 병은 쓰러지는 대장기에 머리를 맞아서라기보다는 그때 바람 부는 방향을 보고 느낀 실망 때문이었다. 아무리 화공을 쓰려 해도 서북풍이 불어서는 안 되는데, 때는 동지섣달이니 서북풍 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아무에게도 그걸 말하지 못하고 혼자서만 걱 정하다 보니 절로 가슴의 병이 된 것인데, 공명은 그걸 멀리 앉아서 도 알고 있었다.

“선생께서 이미 내병의 원인을 바로 아셨소. 그래 이제 어떤 약 으로 그 병을 다스리시겠소? 일이 위급하니 바라건대 내게 좋은 가 르침을 내려주시오.”

주유가 문득 태도를 공손하게 하여 그렇게 간곡히 말했다. 공명도 정색을 하고 거기에 답했다.

“양이 비록 재주 없으나 일찍이 한 이인을 만나 기문둔갑奇門遁 甲)에 관한 천서(書)를 얻은 일이 있기에 바람을 부르고 비를 내리 게 하는 법을 좀 압니다. 도독께 동남풍이 필요하시다면 남병산(南屛 山)에 칠성단이란 제대(祭臺)하나만 쌓아주십시오. 높이는 아홉자 로 하고 삼층으로 하되 군사 백이십 명을 딸리어 갖가지 기를 들고 그곳을 둘러싸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주신다면 저는 그대 위에 서 술법을 부려 세 밤 세 낮의 거센 동남풍을 빌어보겠습니다. 그것 이면 도독께서 군사를 부리는 데 넉넉히 도움이 될 것인즉 어떻습니 까? 저를 믿고 한번 그리 해보시겠습니까?”

“세 밤 세 낮은커녕 단 하룻밤이라도 동남풍만 크게 불어준다면 이번 싸움은 이긴 것이나 다름이 없소이다. 어찌 선생 같은 분을 믿 지 않을 수 있겠소? 다만 일이 급하니 한 시각도 늦출 것 없이 당장 시작하도록 하지요.”

허황되다는 의심은커녕 기쁨에 차 환한 얼굴로 주유가 그렇게 서 둘러댔다. 공명 또한 작은 망설임도 없이 그런 주유에게 동남풍이 일 기일까지 일러주었다.

“동짓달 스무날 갑자일(日)부터 바람이 일어 스무이틀 병인일 (丙寅日)에 그치게 하겠습니다. 되겠습니까?”

“좋지요. 다만 선생을 믿을 뿐이다.”

그렇게 대꾸하는 주유의 얼굴은 이미 병자의 얼굴이 아니었다. 주 유는 곧 자리를 걷어치우고 일어나 영을 내렸다.

“힘세고 일 잘하는 군사 오백 명을 뽑아 남병산에 제단을 쌓도록 하라. 또 따로 군사 백이십 명을 뽑아서는 기를 들고 그 제단을 지키 며 공명의 영을 따르게 하라.”

공명은 주유가 그 같은 영을 내리는 걸 보고 장막을 나왔다. 그리 고 노숙과 함께 말을 타고 남병산으로 가 지세를 살핀 뒤 한 곳을 지정해 동남방에서 가져온 붉은 흙으로 제단을 쌓게 했다.

군사들은 공명이 시키는 대로 단을 쌓는데 둘레가 스물네 길[丈] 이요, 한 층의 높이는 석 자로 삼층을 올리니 전체 높이는 아홉 자였 다. 맨 아래층에는 이십팔 수宿) 별자리에 따른 기를 꽂았는데 동쪽 일곱 면에는 푸른 기를 각, 항, 저, 방, 심, 미, 기(角, 亢, 底, 房, 心,尾, 箕, 모두 이십팔 수 중 동방칠수에 속한 별 이름) 자리에 꽂아 창룡(蒼龍,사방신 중에 동쪽을 가리키는 신, 또는 동방칠수의 다른 이름)의 모습을 꾸미고 북쪽 일곱 면 검은 기는 두, 우, 여, 허, 위, 실, 벽(斗, 牛, 女, 虛, 危,室,壁, 이십팔 수에서 북방칠수) 자리에 꽂아 현무(玄武, 북방을 가리 키는 사방신의 하나) 기세를 지었다.

서쪽 일곱 면 흰 기는 규, 누, 주, 묘, 필, 자, 삼奎, 婁, 胄, 昴, 畢, , 參, 서방칠수) 자리에 꽂아 백호(白虎, 서쪽을 가리키는 사방신의 하나) 위엄을 펼치게 하고, 남쪽 일곱 면 붉은 기는 정, 귀, 유, 성, 장, 익, 진(井, 鬼, 柳, 星, 張, 翼, 軫, 남방칠수) 자리에 꽂아 주작(朱雀, 남방 신)의 형상을 지었다.

둘째 층은 누른 기 예순넷으로 육십사 괘(卦)를 벌이되 여덟 방위 로 나누어 세웠고, 맨 위층에는 네 사람을 세웠는데 그들의 차림이 또한 볼만했다. 머리에는 속발관(冠)이요, 몸에는 검은 비단으로 지은 도포[羅袍]를 걸쳤으며 봉의(鳳衣)를 입고 띠를 두른 데다 붉 은 신발에 모난 옷 뒤 자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네 사람 중 앞쪽 왼편에 있는 사람은 긴 장대를 들었는데 장대 끝 에는 닭털을 일산 모양으로 달아 바람의 방향을 보게 하고, 오른쪽 에 있는 사람은 칠성호대(七星號帶)를 달아 원하는 바람의 형태를 나타냈다. 뒤편 왼쪽에 있는 사람은 보검을 받쳐들었고 오른편에 선 사람은 향로를 받들고 서 있었다. 그리고 단 아래 또 스물넷이 섰는 데, 각기 정기(旗)와 보개(寶蓋), 날이 크고 긴 창[大戟長]과 깃털 달린 누른 소꼬리기[]며 은도끼[白鉞], 붉은 기[朱] 검은 기 [纛]를 나눠 잡고 사방을 빙 둘러싸고 있었다.

공명은 동짓달 스무날인 갑자일에 좋은 시[辰]를 골라 목욕재계하고 도의(道)로 갈아입은 뒤 맨발에 머리를 푼 채단 아래에 이르렀다. 그리고 단에 오르기 전에 거기 와 있는 노숙에게 일렀다.

“자경께서는 진중으로 돌아가 공근이 군사를 내려고 채비하는 것 이나 도와주시오. 혹이 양이 비는 것이 아무 효험이 없더라도 괴이 쩍게 여겨서는 아니 되오.”

진작부터 공명이 벌여둔 칠성단의 신비스런 분위기에 은근히 위 압되어 있던 노숙은 공명의 그 같은 말을 듣자 아무 소리 않고 물러 갔다. 공명은 다시 단을 지키는 장졸들에게 엄한 영을 내렸다. 

“서 있는 방위에서 함부로 떠나서는 아니 된다. 머리를 맞대고 수 군거려도 아니 되며, 쓸데없이 입을 열어 어지러운 말을 해서도 아 니 된다. 또 공연히 놀라거나 괴이쩍게 여겨 떠들어대도 아니 되니, 이중에 어느 것이라도 어기는 자가 있으면 그 머리가 어깨 위에 남 아 있지 못하리라!”

그러자 모두 겁먹은 얼굴로 그 영을 받들 것을 다짐했다.

공명은 천천히 단 위로 올라가 다시 한번 방위에 맞게 사람과 기 치가 배치되어 있는지를 살핀 뒤에 향로에 향을 사르고 사발에 물을 부었다.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보며 무언가 알아듣지 못할 주문을 가 만가만 외어댔다.

주문 외기가 끝나자 단을 내려온 공명은 잠시 단 곁에 쳐둔 장막 에 쉬면서 군사들을 교대로 밥을 먹게 했다. 공명은 하루 세 번 단에 올라 빌고 내려왔으나 해질녘이 되어도 동남풍이 이는 기미는 없 었다.

한편 주유는 정보, 노숙을 비롯한 장수들을 모두 장막 안에 불러놓고 동남풍만 일면 재빨리 군사를 낼 수 있게 채비하도록 하는 한편 손권에게도 사람을 보내 뒤에서 호응할 채비를 갖추도록 당부했다.

황개는 황개대로 화공에 쓸 배 스무 척에 모든 채비를 갖추었다. 배 앞머리는 큰 못을 박아 적의 배에 부딪치면 떨어지지 않도록 하 고, 안에는 갈대와 억새며 마른 싸리 따위를 가득 실은 위에 생선 기 름을 부었다. 뿐만 아니라 그 위에는 다시 유황이며 염초(焰硝)같이 불붙기 쉬운 물건들을 얹은 뒤에 역시 기름 먹인 푸른 천으로 덮고 뱃머리에는 작은 배들을 묶었다. 뱃머리에는 조조에게 거짓 항복을 할 때 이미 약조해둔 청룡기를 내걸고 주유의 명만 떨어지면 바로 배를 낼 수 있게 해놓고 기다렸다.

감녕과 감택도 맡은 일에 소홀함이 없었다. 조조에게서 거짓으로 항복해 온 채중과 채화를 진채 밖으로 불러내 매일 술판을 벌여 진 채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그들이 눈치챌 수 없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함께 데려온 군사들도 모두 뱃속에 몰아두어 한 사람 도 진채가 있는 강 언덕 쪽에는 올라가지 못하게 했다. 거기다가 채 중과 채화 주변에는 동오의 군마를 함빡 풀어놓아 물 한 방울 새어 나갈 틈이 없도록 해놓으니 그들이 들을 수 있는 소식은 다만 위에 서 내려오는 군령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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