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7권 – 10화 : 장강을 뒤덮는 호기(豪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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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7권 – 10화 : 장강을 뒤덮는 호기(豪氣)


장강을 뒤덮는 호기(豪氣)

“나는 이제 법령으로 위엄을 세워 그게 지켜지는 게 오히려 은덕 이 됨을 알게 할 것이며, 또 벼슬에는 한도를 두어 벼슬이 오르면 그 게 영화로운 것임을 알게 할 것이오. 은덕과 영화로움을 아는 게 되 살려지면 아래위는 절로 절도가 있게 되게 마련이니 이로써 다스리 는 도리는 뚜렷해질 수 있을 것이외다.”

그러자 법정도 말문이 막혔다. 예와 이제를 아울러 꿰뚫는 공명의 말에 감복하여 머리를 숙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럭저럭 성도의 군민이 모두 안정을 되찾자 유비는 다시 아직도 유비 밑에 들기를 마다하는 서천의 고을들을 평정하기 시작했다. 익 주(州) 마흔한 고을로 군사를 나누어 보내니 오래잖아 그 모두가 온전한 유비의 땅으로 변했다.

그 무렵 법정은 촉군 태수로 임지에 가 있었다. 원래 사람됨이 그 리 좀스럽지는 않았으나 은원(恩怨)을 지나치게 가렸다. 지난날 그 가 어려울 때에 밥 한 끼라도 먹여준 일이 있는 사람이면 모두 찾아 은혜를 갚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남에게 눈흘김을 받은 정도의 작은 원한[怨]까지도 모두 들춰 그 갚음을 하는 데는 어지간한 사 람도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이 그걸 부풀리어 공명에게 일러바쳤다.

“법정의 하는 짓거리가 너무 지나칩니다. 좀 꾸짖는 게 옳겠습니다.” 그러자 공명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지난날 우리 주공께서 형주를 지키고 계실 때의 어려움을 생각 해보시오. 북쪽으로는 조조가 두렵고 동쪽으로는 손권이 겁나는 딱 한 처지였소. 그때 만약 법정이 도와 이 땅을 얻을 수 있게 해주지 않았더라면 주공께선 그대로 엎드러져 다시는 일어서실 수 없게 되 고 말았을 것이오. 그런데 이제 와서 어떻게 법정이 하는 일을 가로 막고 그 마음 내키는 대로 하는 바를 꾸짖을 수 있겠소?”

언제나 상벌에 엄격한 공명이었지만, 때로는 이와 같이 융통을 부 릴 줄도 알았다. 법정의 공훈을 높이 산다는 뜻도 있지만, 자칫하면 그를 꾸짖는 게 유장 밑에 있다가 항복한 모든 벼슬아치들을 불안하 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불문에 부치는 쪽을 택한 것 같다. 그 소문은 곧 법정의 귀에도 들어갔다. 불우했던 시절에 응어리진 감정을 이기지 못해 좀 지나친 짓을 한 것은 사실이나 법정이 본시 그리 막힌 사람이 아니었다. 공명이 했다는 말을 듣자 스스로 깨달 은 바 있어 그 뒤로는 다시 남의 원성을 살 일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어느 정도 마음의 여유를 얻은 유비가 공명과 더불어 한가한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사람이 와서 알렸다. 

“운장께서 관평을 보내 주공께서 내리신 금과 비단에 고마움을 표하고자 하십니다.”

그 말을 들은 유비가 얼른 관평을 불러들였다. 관평은 유비에게 엎드려 절한 뒤 관우가 써 보낸 글 한 통을 올리면서 말했다. 

“아버님께서는 마초의 무예가 뛰어나단 말을 들으시고 서천으로 와서 한번 겨뤄보고자 하십니다. 어느 쪽 솜씨가 더 나은가를 재보 고 싶을 뿐이니 허락해달라고 큰아버님께 말씀드리라는 분부셨습 니다.”

그 말에 유비는 크게 걱정이 되었다. 곁에 있는 공명을 보며 탄식하듯 물었다.

“만약 운장이 서천으로 와서 마초와 솜씨를 겨룬다면 둘 중 하나 는 상하게 되고 말 것이오. 이를 어쨌으면 좋겠소?”

그러나 공명은 별로 걱정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큰일 아니라는 듯 유비를 진정시켰다.

“괜찮습니다. 제가 운장에게 글 한 통을 써 보내면 될 것이니 주 공께서는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유비는 관우가 급한 성미를 이기지 못해 당장 달려올까 봐 겁이 났다. 불같이 공명을 재촉해 글 한 통을 쓰게 한 뒤 관평에 게 내주며 말했다.

“너는 밤낮을 가리지 말고 달려가 운장에게 이걸 전하라.”

이에 관평은 하룻밤 쉬지도 못하고 온 길을 되짚어 돌아갔다.

“내가 마맹기(馬孟起)와 겨루고 싶어한다는 말을 했느냐?”

관평이 형주로 돌아가자 관우는 그것부터 물었다. 관평이 품안에 서글한 통을 꺼내 내밀며 말했다.

“거기 대해서 군사께서 써주신 답이 여기 있습니다.”

관우가 얼른 그 편지를 받아 뜯어보니 대략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 양이 들으니 장군께서는 마맹기와 더불어 어느 편이 솜씨가 나은가를 가려보고자 하신다기에 몇 자 적습니다. 헤아려보건대 맹 기가 비록 남달리 빼어난 용맹과 무예를 지녔다 하나 옛적 경포鯨 布)와 팽월(彭越, 둘 다 한초의 명장)의 무리를 크게 넘지 못합니다. 익 덕과 겨루면 서로 앞을 다툴 만큼은 되어도 미염공(美髥公)의 초절 (超絶)함에는 어림도 없습니다. 거기다가 지금 장군께서는 형주를 맡고 계시니 그 책임 또한 무겁다 아니할 수 없습니다. 만약 가볍게 서천으로 오셨다가 형주라도 잃게 되는 날이면 그 일은 어찌하시겠 습니까? 부디 스스로를 무겁게 여기시고 깊이 헤아려 움직이도록 하십시오.’


어찌 보면 너무도 어린애 다루듯 하는 글이었지만 읽기를 마친 관우는 흐뭇한 표정이었다. 보기 좋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껄껄 웃고 말했다.

“공명이야말로 참으로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로군.”

그런데 여기서 한 번 더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관우의 그같이 단순한 성격보다는 끝간 데를 모르는 그 자부심이다. 아마도 그는 누군가를 통해 처음 마초가 가맹관에 나타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공명이 장비를 단속하기 위해 한 말을 전해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공명이 마초를 감히 자신과 동격으로 놓은 게 천 하에 무예라면 자기와 비할 자가 없다고 믿고 있던 관우에게는 참을 수가 없었다. 다행히 일은 공명의 재치로 우선은 잘 풀렸지만 결국 관우는 바로 그 지나친 자부심 때문에 패망하게 된다 해도 크게 지 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한편 동오의 손권도 오래잖아 유비가 서천을 차지하고 원래의 주 인인 유장을 공안으로 내쫓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대로 보고만 있 을 일이 아니라 여긴 손권은 곧 장소와 고옹을 불러놓고 의논했다. 

“애초 유비가 내게서 형주를 빌 때는 서천을 손에 넣으면 형주는 바로 돌려주겠다 했소. 그런데 이제 그가 파촉 마흔한 고을을 얻었 으니 한상의 여러 군은 도로 찾아야겠소. 만약 그가 돌려주지 않으 면 나는 창칼을 써서라도 찾고 말 것이오.”

그러자 장소가 가만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지금 우리 오(吳) 땅은 모든 것이 한창 자리를 잡아가는 중이라 군사를 움직이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제게 유비로 하여금 형주를 두 손으로 주공께 받쳐올리도록 할 계책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오?”

손권도 싸움 없이 형주를 되찾을 수 있다면 굳이 마다할 까닭이 없 어 얼른 물었다. 장소가 대단찮다는 듯 자신의 계책을 털어놓았다. 

“유비가 믿고 의지하는 것은 오직 제갈량뿐입니다. 그런데 제갈량의 형 제갈근은 지금 우리 동오에서 벼슬을 살고 있으니 그를 한번 써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곧 제갈근의 가솔들을 모조리 옥에 가두 고 제갈근만 서천으로 보내 그 아우에게 매달려보게 하는 것입니다. ‘네가 유황숙께 말해서 형주를 동오로 돌려주지 않으면, 그 화가 반 드시 내 모든 가솔들에게 미칠 것이다.’ 제갈근이 그렇게 말하며 사 정하면 제갈량도 형제의 정은 어찌하지 못할 것 아니겠습니까? 반 드시 형의 말을 들어 유비를 달랠 것이며, 유비도 제갈량이 나서면 형주를 아니 내놓고는 못 배길 것입니다.”

“제갈근은 참되고 미더운 군자라 할 만한데 어찌 차마 그 가족을 가둘 수 있겠소?”

손권이 반 승낙을 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듯 그렇게 물었다. 장소가 그런 손권을 안심시켰다.

“먼저 제갈근에게 이 계책을 밝게 일러두면 그도 마음을 놓을 것 입니다.”

이에 손권은 장소의 계책에 따라 그날로 제갈근의 가솔들은 늙고 젊고를 가리지 않고 모조리 옥에 가두게 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가만히 제갈근에게 일의 내막을 일러준 뒤 유비에게 보낼 글을 주며 서천으로 가보게 했다.

며칠 안 돼 성도에 이른 제갈근은 먼저 유비에게 자신이 온 것을 알리게 했다. 기별을 받은 유비가 뜻밖이라는 얼굴로 공명에게 물었다.

“군사의 형님께서 어인 일로 여기를 오셨겠소?”

“아마 형주를 찾으러 오셨을 것입니다.”

공명이 별로 깊이 생각하는 빛도 없이 그렇게 대답했다. 유비가 다시 물었다.

“나는 영형(兄)께 무어라고 답하면 되겠소?”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

공명은 그러면서 목소리를 낮추어 유비가 해야 할 바를 자세히 일러주었다.

대강 의논을 맞춘 뒤에야 공명은 성을 나가 형을 맞아들였다. 그 러나 자기 집으로 데려가지는 않고 공무로 온 손님을 맞이하는 빈관 으로 데려갔다. 제갈근은 공명이 절을 끝내기도 전에 목을 놓아 울 기부터 먼저 했다. 공명이 아무것도 모르는 체하며 물었다. “형님께서는 무슨 일로 그토록 슬퍼하십니까?”

“이제 내 식구는 늙고 젊고를 가릴 것 없이 모두 죽었다.”

제갈근이 그렇게 대답하고 다시 더 이상 시치미를 떼지 않고 바 로 털어놓았다.

“형주를 돌려달라는 일 때문이겠지요. 아우 하나 잘못 두신 탓에 형님의 가솔들이 모두 갇히었다니 이 아우의 마음인들 어찌 편안하 겠습니까?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게 되도록이면 빨리 형주를 동오로 되돌려줄 계책이 이미 서 있습니다.”

제갈근은 그 말을 듣자 비로소 얼굴이 환해졌다. 곧 아우와 더불 어 유비를 찾아보고 손권이 보낸 글을 올렸다. 읽기를 마친 유비가 문득 성난 얼굴로 소리쳤다.

“손권은 이미 그 누이를 내게 시집보내 놓고도 내가 형주에 없는 틈을 타 결국은 남 몰래 도로 데려가버렸다. 사람의 정리로는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다! 내 마땅히 크게 군사를 일으켜 강남으로 내려가 한을 풀어야 하는데, 오히려 형주를 찾아갈 생각을 하고 있다고?” 

그때 공명이 울며 땅에 엎드렸다.

“오후가 제 형님의 가솔들을 모조리 잡아다 옥에 가두었습니다. 만약 주공께서 형주를 돌려주지 않으시면 형님의 집안 사람들은 모 두 결딴나고 말 것이니 형이 죽고 어찌 이 양이 홀로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주공께서는 제 낯을 보아서라도 형주를 동오 에 돌려주시어 우리 형님의 집안을 보전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유비는 공명의 그처럼 간곡한 말조차 들은 체도 않았다. 공명이 두 번 세 번 엎드려 빌어도 다만 무겁게 고개를 가로젓다가 거듭거듭 울며 빌자 마침내 마지못한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이 꼭 그렇다면 군사의 낯을 보아 우선 형주의 절반을 돌려드 리겠소. 장사, 계양, 영릉 세 군을 줄 터이니 그리 아시오.”

“이왕 허락을 하신 일이니 문서로 밝혀주십시오. 운장에게 글을 내리시어 그 세 군을 떼어주라 하십시오.”

공명이 얼른 유비의 말을 받아 그렇게 쐐기를 박았다. 유비는 별 로 탐탁잖은 얼굴로 붓을 들어 운장에게 보내는 글을 쓴 뒤 그걸 제 갈근에게 내주며 말했다.

“자유는 거기 가서 좋은 말로 내 아우 운장에게 매달리시오. 내 아우의 성미가 불같아 나도 항상 두려워하는 바이니, 아무쪼록 상세히 사정을 일러주어야 할 것이오.”

이에 제갈근은 우선 형주의 반이나마 찾게 된 걸 다행으로 여기며 유비가 주는 글을 받아 형주로 갔다.

제갈근이 관우를 만나러 가자 관우는 공명의 낯을 보아서인지 제갈근을 중당(中堂) 안으로 맞아들였다. 주인과 손님이 서로 예를 마 친 뒤 제갈근이 소매에서 유비의 글을 꺼내놓으며 말했다.

“황숙께서는 형주의 세 군을 동오에 돌려주시는 걸 허락하셨습니 다. 바라건대 장군께서 어서 그 땅을 떼주시어 이 제갈근이 좋은 낯 으로 오주(吳主)를 뵈올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어찌 된 셈인지 관우는 유비가 보낸 글을 다 읽기도 전에 낯색부터 변해 소리쳤다.

“나와 우리 형님은 도원에서 의를 맺어 쓰러져 가는 한실을 함께 바로잡기로 맹세하였소. 형주는 원래 대한의 땅이거늘 어찌 한 뼘인 들 함부로 남에게 내줄 수 있겠소이까? 또 옛말에 장수가 밖에 있을 때는 임금의 명도 받지 못할 때가 있다[將在外 君命有不受]했소. 비 록 형님께서 보낸 글이라 해도 나는 결코 그 땅을 내놓을 수 없소!” “지금 오후는 제 가솔들을 모조리 잡아 가두었습니다. 만약 제가 형주를 돌려받지 못하면 그들은 모두 죽게 될 것이니 바라건대 장군 께서는 저를 가엾게 보아주십시오.”

급해진 제갈근이 이번에는 관우의 인정에 호소해보았다. 그러나 관우는 별로 놀라는 기색도 없이 대꾸했다.

“그게 다 오주의 속임수외다. 선생의 가솔은 아무런 일이 없을 것 이오. 그따위 꾀로 어찌 나를 속일 수 있겠소!”

“장군은 어찌 그리 사람의 낯을 봐주지 않습니까? 황숙의 말씀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제 아우의 낯을 보아서라도 이건 너무 지나치 십니다.”

참지 못한 제갈근이 마침내 원망조가 되어 그렇게 따졌다. 그러자 운장은 한술 더 떴다. 문득 칼을 손에 잡아 제갈근에게로 들어보이며 엄히 말했다.

“두 번 다시 이 일을 말하지 마시오. 이 칼이야말로 사람의 낯을 알아보지 못하오!”

그때 관평이 곁에 있다가 양부를 달랬다.

“군사의 낯을 보아서라도 노기를 거두십시오. 뒷날 그분과 좋은 낮으로 만나려면 이리 하셔서는 아니 됩니다.”

그러나 관우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군사의 낯을 보아주지 않았더라면 그대는 살아서 동오로 돌아갈 수조차 없었을 것이오!”

그렇게 제갈근을 보고 을러댔다. 제갈근은 부끄럽고도 두려웠다. 더 말해봤자 소용 없음을 알고 이내 관우와 작별한 뒤 다시 서천으 로 돌아갔다.

제갈근은 먼저 아우 제갈공명부터 찾았다. 그러나 그때 공명은 지 방을 순시하러 가고 없었다. 제갈근은 하는 수 없이 바로 유비를 만 나보고 울며 관운장이 자기를 죽이려 하던 걸 일러바쳤다.

“내가 걱정하던 대로 되고 말았구려. 내 아우는 성미가 급해 함께 말하기가 매우 어렵소. 할 수 없소이다. 자유는 잠시 동오로 돌아가 기다려주시오. 내가 동천(東川)의 한중 여러 고을을 뺏으면 관우를 그리로 불러 지키도록 하겠소. 형주는 그때 돌려받도록 하시오.”

안됐다는 표정으로 능청을 떤 유비가 그런 엉뚱한 소리를 했다. 그러나 제갈근으로서는 더 어찌 해볼 길이 없어 한숨을 푹푹 쉬며 돌아서는 수밖에 없었다.

제갈근이 동오로 돌아가 손권에게 그간에 있었던 일을 고해 올리 니 듣고 난 손권은 성이 나서 어쩔 줄 몰랐다.

“이번에 자유께서는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오히려 쓸데없이 바쁘기만 하셨구려. 혹시 그게 모두 제갈량의 꾀는 아니었소?” 

손권이 씨근덕거리며 그렇게 물었다. 제갈근이 펄쩍 뛰며 부인 했다.

“아닙니다. 제 아우는 현덕에게 엎드려 울며 빌어 세 군을 돌려주 라는 허락을 받아냈습니다. 이번에 형주를 되돌려받지 못하게 된 것 은 순전히 운장의 건방진 고집 때문입니다.”

“이왕에 유비가 먼저 세 군을 돌려주겠다는 말을 했다니 장사, 영 릉, 계양 세 곳에 우리 관원을 보내도록 해야겠소. 이번에는 관우가 또 어떻게 하는지 두고 봅시다.”

무슨 생각에서인지 손권은 일단 그렇게 일을 매듭짓고 제갈근의 가솔들을 풀어주게 하는 한편 관원들을 뽑아 유비가 돌려주겠다고 한 세 군으로 보냈다.

하루도 안 돼 손권이 뽑아보낸 관원들이 모조리 쫓겨 돌아와 말했다.

“운장은 전혀 우리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날로 우리를 되쫓 으면서 만약 조금이라도 머뭇거리는 자가 있으면 잡아 죽이겠다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그 말을 들은 손권은 더욱 성이 났다. 곧 사람을 보내 노숙을 불러들이고 꾸짖듯 말했다.

“자경은 지난날 스스로 보증을 서고 형주를 유비에게 빌려주었소. 이제 유비가 서천을 얻고도 형주를 돌려주지 않는데 보증 선 사람은 가만히 앉아 구경만 하실 작정이오?”

그러자 노숙이 얼른 대답했다.

“제가 이미 한 가지 계책을 생각해놓았습니다. 이제 막 주공을 찾아뵙고 말씀드리려는 참에 부르심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게 어떤 계책이오?”

손권이 노기를 억누르며 물었다.

“육구에 군사를 머무르게 하고 크게 잔치를 열어 운장을 부르는 것입니다. 운장이 만약 그 잔치에 온다면 먼저 좋은 말로 달래보도 록 하지요. 정히 듣지 않을 때는 미리 감춰둔 도부수로 죽여버리면 됩니다. 또 군사를 형주로 내어 결판을 내고 형주를 다시 빼앗아보 도록 하겠습니다.”

노숙이 그렇게 말했다. 손권도 얼핏 생각하기에는 어떻게 될 법한 계책 같았다. 언제 성을 냈더냐는 듯, 기쁜 얼굴로 허락했다. 

“그게 꼭 내 생각과 같소. 얼른 그대로 해보시오.”

“아니 됩니다. 관운장은 세상이 다 아는 실로 범 같은 장수올시다. 그를 상대로 어설프게 일을 꾸몄다가는 일은 안 되고 오히려 그에게 해만 입게 될까 두렵습니다.”

그 또한 귀담아 들을 만한 말이었지만 형주를 되찾는 일에만 급 해진 손권은 화부터 먼저 냈다.

“그런저런 거 다 따지다가는 언제 형주를 얻는단 말인가!”

그렇게 감택을 꾸짖어 물리치고는 노숙을 재촉해 계책의 시행을 서두르게 했다.

손권과 작별한 노숙은 곧 육구로 가서 여몽과 감녕을 불러놓고 말했다.

“진채 밖 강가에 있는 정자에 술자리를 마련한 다음 말 잘하는 사 람 하나를 골라 관우를 부르도록 해야겠소. 그가 오든 안 오든 큰 차 이는 없으나 아무래도 이리로 오게 하는 편이 우리에게 손쉬울 것이 외다.”

그리고 계책의 나머지를 자세히 일러준 뒤, 말 잘하는 사람을 사 자로 뽑아 관우에게로 보냈다. 노숙의 사자는 곧 배에 올라 강을 건 넜다. 강가를 지키던 관평이 그를 잡아 신분을 확인한 뒤 관우에게 로 보냈다. 사자는 관우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잔치를 연 뜻을 밝힘 과 아울러 노숙의 글을 올렸다.

다 읽고 난 관우가 사자에게 말했다.

“이왕에 노숙이 잔치를 벌이고 나를 청했으니 아니 갈 수 없다. 내일 일찍 갈 테니 그대는 먼저 돌아가 그렇게 전하라.”

그 말을 들은 사자는 됐다 싶었다. 애써 기쁜 웃음을 감추며 관우 에게 작별하고 돌아갔다. 하지만 누가 봐도 그 갑작스런 초대가 약 간은 이상한 일이었다. 관평이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일전 아버님께서 제갈근을 쫓아보내셔서 노숙이 꽤나 난처해졌 을 것입니다. 좋은 뜻으로 부르는 것이 아님에 분명한데 아버님은 어찌하여 가겠다고 하셨습니까?”

그러자 관우가 태연히 웃으며 대꾸했다.

“낸들 어찌 그걸 모르겠느냐? 이는 틀림없이 제갈근이 세 군을 돌려받지 못한 게 나 때문이라고 일러바친 탓이다. 노숙이 육구에 둔 병(兵)하며 잔치를 열어 나를 부른 것도 그 자리에서 어떻게 수를 부려 형주를 찾아보려는 것이겠지. 하지만 내가 가지 않으면 저들은 나를 겁쟁이로 몰아부칠 터이니 안 가고 어쩌겠느냐? 나는 내일 배 한 척에 가까이 데리고 있는 여남은 명만 데리고 떠나겠다. 칼 한 자 루만 차고 그 잔치 자리에 나가 노숙이 나를 어찌하는가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게다.”

“하지만 아버님께서는 무슨 까닭으로 귀하신 몸을 돌아보시지 않 고 스스로 호랑이나 늑대의 굴 같은 그곳에다 발을 디디려 하십니 까? 아무래도 큰아버님께서 당부하신 바를 무겁게 여겨 하시는 일 같지 않아 두렵습니다.”

그러나 운장은 조금도 꺼리는 빛이 없었다.

“나는 수천 수만의 창칼이 번득이고 화살과 돌이 비 오듯 하는 싸 움터도 말 한 필에 의지해 아무도 없는 곳을 지나듯 휩쓸고 다녔다. 강동의 쥐새끼 같은 무리가 감히 나를 어쩔 수 있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노숙이 비록 장자(長)의 풍도가 있는 사람이 나 지금은 그도 일이 매우 급하게 되었습니다. 딴마음을 아니 품을 래야 아니 품을 수 없게 되었으니 장군께서 가벼이 생각하고 가셔서 는 아니 됩니다.”

곁에 있던 마량(馬)도 관우를 말렸다. 평소에는 마량의 식견을 높이 보는 관우였으나 이번에는 그의 말도 듣지 않았다. 무겁게 고 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옛적 전국 시절에 조(趙)나라 사람 인상여(藺相如)는 닭 한 마리 묶을 만한 힘도 없었지만, 민지(渾池)의 모임[會盟]에서 강한 진(秦)나라의 군신을 보기를 마치 아무것도 없는 양했소. 하물며 일찍부터 한꺼번에 만인과 맞서 싸우는 법을 배워온 이 몸이겠소? 이미 저들 에게 승낙한 일이니 믿음을 저버려서는 아니 될 것이오.”

“장군께서 가시더라도 마땅히 대비는 있어야 합니다. 이대로 그냥 가셔서는 아니 됩니다.”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마량이 다시 그렇게 권했다. 관우 도 그것까지는 마다하지 않았다. 잠깐 생각하다 마량의 말을 따랐다. 

“정히 그렇다면 내 아들 평(平)에게 빠른 배열 척을 고르게 한 뒤 물질에 익숙한 수군 오백을 태우고 강물 위에 떠 있게 하시오. 그러 다가 내가 붉은 기를 세우거든 그리로 얼른 배를 보내면 별일은 없 을 것이오.”

그 말을 들은 관평은 마량이 시키기도 전에 스스로 배와 군사를 뽑으러 나갔다.

한편 육구로 돌아간 사자는 노숙을 보고 관우가 선뜻 가리라고 말한 걸 그대로 전했다. 노숙은 곧 여몽을 불러놓고 의논했다. 

“관우가 이리로 온다고 했다니 이제 어찌하면 좋겠소?”

“그가 군마를 데리고 온다면 저와 감녕이 각기 한 떼의 군사를 거 느리고 강언덕에 숨어 있다가 한꺼번에 뛰쳐나가 때려잡겠습니다. 그러나 만약 군사를 이끌고 오지 않는다면 다만 도부수 쉰 명을 뜰 에 숨겨두는 것으로 넉넉합니다. 잔치 도중에 때를 보아 관우를 죽 여버리도록 하십시오.”

노숙도 생각해보니 그게 그럴듯했다. 곧 여몽의 말대로 계책을 정하고 관우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다음 날이 되었다. 노숙은 일찍부터 사람을 강 언덕으로 보내 형주 쪽을 살펴보게 했다.

진시 무렵 해서 강물 위에 배 한 척이 떠오는데 뱃길잡이나 사공 은 몇 안 돼 보이고 붉은 깃발만 한자락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거기에 크게 쓴 ‘관(關)’자로 미루어 관우의 배임에 틀림없었다. 가까이 오는 뱃전에는 정말로 푸른 머릿수건에 풀빛 옷을 입은 관우 가 엄숙하게 앉아 있었다. 그 곁에는 주창이 큰 칼을 받쳐든 외에 여 덟이나 아홉쯤의 몸집이 우람한 관서의 장골들이 각기 허리에 칼을 차고 따를 뿐이었다.

노숙은 그런 관우를 맞자 한편으로는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의 아스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군사의 호위도 받지 않고 오 는 것으로 보아서는 자기들의 계책에 속은 듯도 하지만, 풍기는 분 위기로 봐서는 자기들의 계책을 잘 알면서도 무언가 믿는 데가 있는 것처럼 보인 까닭이었다.

노숙은 그런 속마음을 애써 감추고 관우를 정자 안으로 맞아들였 다. 예를 끝낸 뒤 술자리에 앉아 서로 잔을 권하는데, 아무래도 자신 이 꾸며둔 계책 탓인지 관우를 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런 노숙 의 마음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웃으며 얘기를 나누는 관우의 태도는 태연하기가 그지없었다.

술이 반쯤 올랐을 때 노숙이 드디어 용기를 내 벼르던 말을 꺼냈다. 

“장군께 드릴 말씀이 있어 청했는데 다행히 물리치지 않아서 고 맙기 그지없소이다. 지난날 장군의 형님 되시는 유황숙께서는 이 노숙의 보증으로 형주를 빌려가시면서 서천을 차지하면 돌려보내겠다

고 언약을 하셨소. 그런데 이제 황숙께서는 이미 서천을 차지하셨으 나, 형주는 아직 우리 동오에게로 돌아오지 않았으니 이게 믿음을 저버린 게 아니고 무엇이겠소?”

“땅을 주고받는 것은 나라의 일이외다. 이런 술자리에는 어울리지 않으니 말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소.”

관우가 슬쩍 받아넘겼다. 그러나 노숙은 그대로 흐지부지되도록 두지 않았다. 한층 정색을 하고 따지듯 말했다.

“우리 주공께서 구차하게 강동에 계시면서도 형주를 빌려주신 것 은 그때 황숙을 비롯한 여러분이 싸움에 져서 멀리서 쫓겨오신 까닭 에 마땅히 기댈 만한 땅이 없었기 때문이었소. 그런데 이제는 황숙 께서도 익주를 얻으셨으니 형주는 응당 돌려주셔야 하지 않겠소? 더구나 황숙께서 먼저 세 군을 돌려주라 하셨다는데 장군께서 따르 지 않는 까닭은 무엇이오? 아무래도 너무나 이치에 닿지 않는 처사 같소이다.”

관우도 드디어 정색을 했다.

“오림()의 싸움은 우리 형님께서 친히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적을 쳐부수신 싸움인데 어찌 힘이 안 들었으며, 또 그 공으로 한 뙈 기 땅을 얻어 밑천 삼았다 한들 그게 어찌 이치에 어긋난단 말씀이 오? 그래 공은 이제 그 땅을 찾으러 다시 오시겠단 뜻이오?”

“그렇지는 않소이다만 한번 돌이켜보시오. 원래 장군께서는 황숙 과 더불어 장판(長)에서 패해, 계책은 궁하고 힘도 다한 까닭에 다 만 멀리 달아날 생각뿐이지 않았소? 그때 우리 주공께서 형주를 빌려주신 것은 기댈 땅이 없는 황숙을 딱하게 여기셨기 때문이지 땅을 무겁게 여기지 않으셔서는 아니었소. 황숙께서 약간의 공이 있다 해 도 그것은 그 뒤의 일이외다. 이제 황숙께서 스스로의 덕을 허물고 우리 동오와 좋은 사이를 어그려가면서 서촉을 얻고도 아직 형주를 차지하고 계신 것은 탐심에 가득 차 의를 저버리신 것이나 다름없 소. 실로 천하 사람들의 비웃음을 살까 두려우니 장군께서는 부디 그 점을 살펴주시오.”

노숙도 지지 않고 그렇게 맞섰다. 그러자 관우가 다시 말머리를 돌렸다.

“그 일은 모두 우리 형님께서 하신 일이외다. 내가 관여할 일은 아닌 듯싶소.”

그런 관우의 말꼬리를 노숙이 잡고 늘어졌다.

“내가 듣기로 장군과 황숙은 도원에서 의를 맺고 죽음과 삶을 함 께 하기로 맹세했다 하였소. 장군이 곧 황숙이라 할 수 있는데 어찌 그런 핑계를 대시오?”

그 말에 관우가 미처 무어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저만치 떨어져 있던 주창이 돌연 소리 높여 끼어들었다.

“천하의 땅은 오직 덕 있는 이가 차지할 뿐이오. 어찌 당신네 동 오만 차지할 수 있겠소?”

그대로 가다가는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것 같아 먼저 일을 벌 이고 나선 듯했다. 관우가 놀란 체 낯색까지 변하며 일어났다. 그리 고 주창에게로 가서 그가 받쳐들고 있던 큰 칼을 뺏은 뒤 짐짓 눈을 부라리며 꾸짖었다.

“이것은 나라의 큰일인데 네 따위가 감히 끼어들어 여러 소리를 하느냐? 어서 없어져라!”

말은 그렇게 엄했지만 거기에는 다른 뜻도 숨겨져 있었다. 얼른 그 뜻을 알아들은 주창은 마지못해 쫓겨가는 듯 잔치 자리를 벗어나 강 언덕으로 갔다. 주창이 붉은 기를 크게 휘두르니 기다리던 관평 의 배가 쏜살처럼 강을 건너 강동 쪽의 언덕에 닿았다.

이때 술자리에 남아 있던 관우는 오른손으로 큰 칼을 잡고 왼손 으로는 노숙의 손을 움켜잡은 채 거짓으로 술이 취한 체했다. 

“공은 나를 잔치에 청했지 형주의 일을 따지려고 부른 것은 아니 지 않소? 그 이야기는 이제 그만합시다. 나는 이미 취했으니 공연히 그 일로 언성을 높이다가 옛정이나 상하지 않을까 걱정되어 하는 말 이외다. 다른 날 공을 형주로 청할 테니 그 일은 그때 다시 의논하도 록 합시다.”

겉보기에는 술 취한 것 같아도 실은 하나하나가 다 계산된 행동 이었다. 처음에는 주창을 꾸짖는 체하며 뜰 가운데로 나가 큰 칼을 받아줘으로써 손에 아무런 병기도 없이 술자리에서 적을 받게 되는 일을 피했다. 그리고 이제는 적의 우두머리 장수인 노숙을 술주정 부리듯 하며 인질로 잡아놓고 있다.

비록 힘은 관우에게 미치지 못했으나 머리를 쓰는 데는 남다른 노숙이 그런 관우의 속셈을 모를 리 없었다. 언제 관우의 오른손에 쥐어진 큰 칼이 자신을 동강낼지 몰라 넋 빠진 사람처럼 강변까지 끌려갔다.

여몽과 감녕은 속이 탔다. 생각 같아서는 군사를 휘몰아 관우를 덮치고 싶었으나, 관우가 한 손에는 칼을 들고 한 손에는 노숙을 잡고 있으니, 관우를 죽이기 전에 노숙이 먼저 죽을까 봐 겁이 났다. 함부로 움직일 수 없어 멍하니 노숙이 끌려가는 꼴만 구경했다. 관우는 강변에 이르러서야 노숙의 손을 놓아주고 이미 와서 기다 리고 있는 관평의 배에 뛰어올랐다.

“안녕히 계시오. 오늘 술 잘 마셨소이다.”

뱃전에 우뚝 선 관우가 그렇게 작별의 말을 던졌을 때에야 노숙 은 겨우 정신이 들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순풍을 타고 멀어져가 는 관우를 멀거니 바라보는 일밖에 달리 아무것도 할 일이 없었다. 일껏 자기편 진중으로 끌어들인 관우를 어이없이 돌려보내고 만 노숙이 다시 여몽과 머리를 맞대고 의논했다.

“이번 계략이 또 어그러졌으니 이제 어쨌으면 좋겠는가?”

노숙의 걱정스런 물음에 여몽이 결연히 말했다.

“되도록 빨리 주공께 알리도록 하십시오. 크게 군사를 일으켜 관우와 결판을 내도록 해야 합니다.”

노숙도 달리는 형주를 되찾을 꾀가 생각나지 않았다. 곧 사람을 손권에게 보내 또 일이 어그러졌음을 알렸다.

그 소식을 들은 손권은 성이 머리끝까지 올랐다. 나라의 온 힘을 기울여 크게 군사를 일으키고 형주를 쳐서 뺏기로 마음을 정했다. 손권이 문무 벼슬아치를 모두 모아놓고 한창 형주를 칠 의논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급한 소식이 날아들었다.

“조조가 삼십만 대군을 일으켜 강남을 치려 하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손권은 크게 놀랐다. 얼른 노숙에게 사람을 보내 관우를 건드리지 말라는 전갈을 보내고 조조를 막는 일에 힘을 모았다.

“모든 군사를 합비와 유수로 옮기도록 하라. 먼저 조조부터 막아야 한다.”

이에 동오와 관우의 싸움은 일단 뒤로 미루어지고 말았다.

한편 조조는 이번에야말로 지난번에 당한 치욕을 씻으리라 벼르 면서 크게 군사를 일으켜 남으로 내려오게 했다. 한창 그 준비를 하 고 있는데 참군으로 있던 부간傅)이란 사람이 글을 올려 말렸다.


‘제가 듣기로 무(武)를 쓰려 함에는 먼저 위엄을 갖추고, 문(文)을 내세우려 할 때는 먼저 덕을 쌓아, 그 위엄과 덕이 함께 어우러진 뒤 에야 왕업을 이룰 수 있다 했습니다. 지난날 천하가 크게 어지러울 때 명공께서는 무를 쓰시어 열 중에 아홉은 평정하셨으나 오직 오와 촉만이 왕명을 받들지 않고 있습니다. 오는 장강의 거친 물결을 두 르고 촉은 숭산의 험한 길이 가로막혀 무의 위엄만으로는 이기기 어 렵습니다.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먼저 문덕(德)을 닦은 뒤에 무위 (武)에 의지하심이 옳을 듯합니다. 갑옷은 걸어두고 병기는 뉘시 며, 군사는 쉬게 하고 선비는 평안히 기르시다가 때를 기다려 움직 이도록 하십시오. 이제 수십만의 대병을 일으켜 장강의 물가로 나갔 다가 만약 적이 그 험함에 기대어 깊이 숨어 우리의 군마로 하여금 그 능함을 모두 떨쳐 보이지 못하게 만들어버린다면 그것은 또 어쩌 시겠습니까? 그 예측할 수 없는 변화 앞에서는 힘도 쓸모가 없어지 니 자칫 하늘 같은 위엄이 꺾이게 될까 두렵습니다. 바라건대 명공 께서는 이 모든 것을 자세히 살펴 결단하십시오.’

그 같은 글을 읽은 조조는 적지 않이 마음이 움직였다. 곧 군사를 일으키려 하던 걸 멈추고 문덕 쪽으로 힘을 돌렸다. 학교를 세우고 글 하는 이를 높이 추켜세우며 그 자신도 오래 주렸던 글 향기에 흠 뻑 취했다.

흔히 이 부분이 무시되고 있지만, 사실 조조는 유비나 손권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학문적인 사람이었다. 지금 남은 것은 백여 편의 시와 문장뿐이나 조조의 문집인 『위무제집(魏武帝集)』은 모두 스무 권이나 되었다고 한다. 조조의 숭문호학(崇文好學)의 정신은 뒷날 그 아들 조비의 술회에서도 자주 보이거니와, 현대 중국 문학의 개척자 인 노신(魯迅)도 조조의 문학에 대해 이렇게 평하고 있다.

‘조조는 완고하고 한쪽으로 치우친 후한(後漢)의 문학적 기풍에 대해 통탈(脫)을 주장했다. 통탈이란 얽매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주장이 당시의 문단에 영향을 끼쳐 하고 싶은 말을 거리낌없이 하는 문장들이 생겨났다. 사상이 통탈되어 완고함과 치우침에 벗어 난 덕분에 이단과 외래 사상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었으며, 공자 의 가르침 이외의 것들도 속속 흡수되었다. ……………애석하게 여기는 것 은 다만 조조 자신의 문장이 조금밖에 전해지지 않는 일이다.’

따라서 조조의 문덕은 그의 일생에 걸친 것이었으며, 반드시 『연 의』에서처럼 어떤 목적을 위한 방편만은 아니었다. 정사에 따르면 조조는 오히려 그해 칠월에 손권을 공격한 것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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