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7권 – 12화 : 한중이 떨어지니 불길은 장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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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7권 – 12화 : 한중이 떨어지니 불길은 장강으로


한중이 떨어지니 불길은 장강으로

조조의 영을 받아 남정으로 가던 하후연은 오래잖아 양임의 군사 와 마주쳤다. 양군이 서로 벌려선 가운데 양임의 진중에서는 창기 (昌奇)란 부장이 말을 달려 나와 하후연과 맞섰다. 양임의 명에 따라 나온 것이지만 어림없는 짓이었다. 창칼이 부딪기 세 번을 넘기기 전에 창기는 하후연의 칼을 맞고 말 아래로 떨어졌다.

이번에는 양임이 스스로 창을 들고 말을 박차 달려 나왔다. 제법 싸움다운 싸움이 이루어져 서른 합이 넘도록 승부가 가려지지 않았 다. 하후연은 싸움을 질질 끄는 게 싫어 타도계(刀)를 썼다. 거짓 으로 싸움에 진체 달아나다 양임이 좋아라 뒤쫓아오기를 기다려 몸 을 뒤집으며 한칼을 후리니 양임은 외마디 소리와 함께 두 동강이 나 말 아래로 떨어졌다.

창기와 양임이 차례로 하후연의 칼 아래 죽자 한중의 군사들은 얼이 빠졌다. 한번 싸워볼 생각도 않고 뒤돌아서서 달아나기에 바빴 다. 또 한 번의 대패였다.

하후연이 양임을 죽이고 그 군사를 흩어버렸다는 말을 듣자 조조 는 군사를 똑바로 남정으로 몰아갔다. 그리고 거기다 진채를 내리게 한 뒤 잠시 장로의 움직임을 살폈다.

양임이 다시 싸움에 져서 죽음을 당했다는 소식은 곧 장로의 귀 에도 들어갔다. 놀란 장로는 문무의 벼슬아치들을 불러 모으고 다시 조조 막을 일을 의논했다.

염포(閻圃)가 일어나 말했다.

“제가 한 사람 믿을 만한 장수를 천거하겠습니다. 그라면 조조 밑에 있는 여러 장수와 넉넉히 맞설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게 누구요?”

장로가 반갑게 물었다. 염포가 자신 있게 밝혔다.

“남안의 방덕(德)입니다. 전에 마초를 따라 주공께 투항해왔으 나, 마초가 서천으로 유비를 치러 갈 때 병이 나서 누워 있다가 따라 가지 못했습니다. 그 뒤 마초는 유비에게 항복하고 그는 이곳에 남 아 주공의 두터운 은혜를 받았으니 이제는 우리 사람이나 다름없습 니다. 어째서 그에게 가서 조조를 막으라고 하지 않으십니까?”

그제서야 장로도 잊고 있던 방덕을 생각해냈다. 곧 방덕을 불러 두터운 상을 내리며 말했다.

“그대에게 군사 일만을 줄 테니 가서 조조를 막으라. 만약 이번에 조조를 쫓아준다면 앞으로는 더욱 그대를 높이 쓰리라.”

이에 감격한 방덕은 곧 군사를 이끌고 성을 나갔다. 성 밖 십 리쯤되는 곳에 이르니 조조의 대군이 진을 치고 있는 게 보였다. 방덕은 조금도 두려워하는 빛 없이 맞은편에 진채를 내리고 말을 달려 나가 싸움을 걸었다.

조조는 전에 위교에서 마초와 싸울 때 방덕의 용맹스러움을 잘 본 적이 있었다. 문득 그런 방덕을 아끼는 마음이 일어 여러 장수들 을 돌아보며 당부했다.

“방덕은 서량의 용맹스런 장수이다. 전에는 마초를 섬기다가 지금 은 장로에게 의지하고 있으나 그는 마음으로 따르고 있지는 않을 것 이다. 나는 저 사람을 얻고 싶다. 그대들은 그와 싸우되 급하게 싸움 을 몰아가지 마라. 천천히 싸우며 그의 힘이 다하기를 기다려 사로 잡아야 한다.”

“그럼 제가 먼저 나가보겠습니다.”

장합이 먼저 방덕과 싸우기를 청하며 달려 나갔다. 그리고 조조의 당부대로 모질지 않게 서너 번 부딪친 뒤 거짓으로 쫓겨 돌아왔다. 다음은 하후연이었다. 역시 서너 번 창칼을 부딪다가 쫓겨 들어오니 서황이 그 뒤를 이어 달려 나갔다.

서황 역시 서너 합 부딪고는 방덕을 허저에게 넘겨주었다. 허저는 조조의 당부를 잊지는 않았지만 싸우다 보니 문득 마음이 달라졌다. 힘이 빠진 방덕을 사로잡을 욕심으로 싸움을 끌다 보니 어느새 쉰 합이 넘어섰다.

방덕은 그날 조조의 진중에서도 손꼽는 맹장 넷과 번갈아 싸우는 셈이었으나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그들 네 장수 덕분에 조조 앞에서 자신의 무예를 마음껏 펴 보인 셈이었다. 방덕의 놀라운 무예를 보자 조조는 마음속으로 기쁨을 이기지 못했다. 곧 북을 쳐 허저를 불러들인 다음 여럿을 모아놓고 물었다.

“어떻게 하면 방덕을 내 사람으로 만들 수 있겠는가?”

가후가 일어나 한 꾀를 내놓았다.

“제가 알기로 장로의 모사 가운데 양송(楊松)이란 자가 있습니다. 사람됨이 탐욕이 많고 뇌물을 좋아하니 그에게 남 몰래 금은과 비단 을 보내 장로에게 방덕을 헐뜯는 말을 하게 하십시오. 그렇게 되면 방덕을 얻기는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지금 어떻게 사람을 남정 성안으로 들여보낼 수 있겠 는가?”

조조가 생각은 있지만 어렵다는 듯 가후를 보고 물었다. 가후는 그것도 이미 생각해둔 듯했다. 별로 머리를 쥐어짜는 기색도 없이 대답했다.

“내일 다시 방덕과 싸우다가 거짓으로 패한 체 진채를 버리고 달 아나 방덕으로 하여금 우리 진채를 차지하게 하십시오. 그런 다음 밤이 깊기를 기다려 우리가 다시 그곳을 급습하면 쫓긴 방덕은 반드 시 성안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때 말 잘하는 군사 하나를 뽑 아 적군으로 꾸미게 하고 그들 속에 끼워넣으면 함께 성안으로 들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조조는 가후의 말이 그럴듯하다 보았다. 곧 똑똑한 군사 하나를 골라 후한 상을 내린 뒤 해야 할 일을 일러주었다. 그리고 금으로 된 엄심갑(甲)한 벌을 주어 속에 두르게 한 다음 겉에는 한중 군사들의 복색을 입혀 알맞은 곳에 숨어 있게 했다.

그다음은 방덕을 꾀어들이는 일이었다. 다음 날 조조는 먼저 하후 연과 장합에게 각기 한 갈래 군사를 주며 멀리 가 숨어 있게 한 뒤, 하후돈을 시켜 싸움을 걸게 했다. 방덕이 기다렸다는 듯 뛰쳐나와 하후돈과 맞붙었다. 하후돈은 조조가 이른 대로 몇 합 싸우기도 전 에 거짓으로 져서 쫓겼다.

방덕은 이긴 기세를 타고 군사를 휘몰아 조조의 진채를 덮쳤다. 조조의 군사들이 겁에 질린 듯 뿔뿔이 달아나니 오래잖아 진채는 방 덕의 손에 들어갔다. 방덕은 진채 안에 군량과 말먹이 풀이 매우 많 은 걸 보자 몹시 기뻤다. 한편으로는 장로에게 이긴 소식을 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크게 잔치를 열어 군사들을 위로했다.

그런데 그날 밤이었다. 삼경 무렵 하여 갑자기 세 갈래 방향에서 횃불이 대낮처럼 타오르며 조조의 대군이 역습을 해왔다. 가운데는 서황과 허저요, 왼쪽에는 장합이며 오른쪽은 하후연이었다. 아무런 준비 없이 있는데 그들 세 갈래의 군마가 짓쳐들자 아무리 용맹한 방덕이라 해도 견뎌낼 재간이 없었다. 어떻게 싸워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길을 앗아 달아나기 바빴다. 그 뒤를 역시 반나마 얼이 빠진 한중의 군사들이 조조의 세 갈래 군마들에게 쫓기며 재주껏 뒤따르 고 있었다.

그럭저럭 남정 성문 아래 이른 방덕이 성문 위를 보고 다급하게 소리쳤다.

“문을 열어라.”

성안에서 보니 바로 그날 낮에 승전보를 올린 방덕이었다. 까닭을 물을 틈도 없이 성문을 열자 방덕을 비롯해 군사 수천이 한덩어리가 되어 성안으로 몰려들었다.

이때 조조가 미리 숨겨두었던 세작도 함께 성안으로 들어갔다. 그 세작은 성안으로 들어가기 바쁘게 양송의 집을 찾아갔다.

“위(魏) 조승상께서는 오래전부터 공의 덕이 깊음을 듣고 사 모해오셨습니다. 오늘 특히 저를 보내 황금 갑옷 한 벌을 보내시며 믿음의 표시로 삼으려 하시니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승상께 서 보내신 밀서가 있으니 읽으시고 선처해주십시오.”

세작은 양송을 만나자마자 옷 속에 입고 있던 황금 엄심갑을 벗 어 바치며 그렇게 말했다. 탐욕스런 양송은 그 황금만으로도 이미 입이 귀밑까지 째졌다. 거기다가 조조가 밀서까지 보냈다고 하는 말 을 듣자 더욱 기뻤다. 장로가 망하더라도 살길이 생겨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시키신 일에 대해서는 마음놓고 기다리시라고 위공께 말씀 올리 게. 내가 좋은 계책을 꾸며 처리하고 다시 아뢸 말씀이 있으면 따로 아뢰도록 하겠네.”

조조의 밀서를 읽고 난 양송은 그렇게 말하여 세작을 돌려보내고 그날 밤으로 장로를 찾아갔다. 장로가 무엇인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가 들어오는 양송을 보고 불쑥 물었다.

“그 참 이상한 일이오. 공은 어찌해서 일이 그리 된 줄 짐작할 수 있겠소?”

“무슨 말씀입니까?”

양송이 간사한 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되물었다.

장로가 천천히 대답했다.

“방덕 말이다. 낮에는 싸움에 이겨 조조의 본진까지 빼앗았다더

니, 하룻밤도 못 넘겨 이제는 데리고 간 군사까지 잃고 성안으로 쫓 겨 들어왔소. 아무리 싸움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병가(家)에게 늘 상 있는 일이라고는 하지만, 너무 손바닥 뒤집히듯 해서 어찌 된 영 문인지 통 알 수가 없구려.”

일이 되려고 그런지 양송이 노리던 때가 절로 온 것이었다. 양송 은 기다렸다는 듯이나 방덕을 헐뜯고 나섰다.

“그야 뻔하지요. 방덕은 틀림없이 조조의 뇌물을 받고 진채를 내주었을 것입니다. 싸움 한바탕[陣]을 판 셈이지요.”

그 말을 들은 장로는 몹시 성이 났다. 양송이 기대한 것 이상으로 펄쩍 뛰며 방덕을 불러들여 꾸짖은 뒤 좌우를 보고 소리쳤다.

“저자를 끌어내다 목을 베어라!”

방덕에게는 한마디 자신을 변호할 틈도 주지 않은 채였다. 방덕을 천거한 염포가 힘을 다해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양송의 말만 철석같 이 믿고 있던 장로는 끝내 방덕을 목 베려 하다가 마지막에야 겨우 무슨 큰 선심이나 쓰듯 말했다.

“좋다. 내일 다시 싸워 네 죄를 씻어라. 만약 또 이기지 못한다면 그때는 반드시 네 목을 베리라.”

방덕으로서는 실로 어이없는 일이었다. 죄 없이 떨어졌을 뻔한 목 을 어루만지며 한을 품고 장로 앞을 물러났다.

다음 날이 되었다. 조조의 군사들이 드디어 성을 공격하기 시작했 다. 방덕은 장로의 으름장에 등이 떼밀리듯 군사를 이끌고 성을 나와 그런 조조의 군사들과 맞섰다.

조조는 방덕이 나오는 걸 보자 허저를 내보내 싸움을 걸게 했다. 명을 받은 허저가 달려 나가 곧 방덕과 어울렸다. 그러나 허저는 몇 합 싸워보지도 않고 거짓으로 패해 달아나기 시작했다. 방덕이 부쩍 힘이 나서 그런 허저를 뒤쫓았다.

얼마나 갔을까, 방덕이 허저를 쫓아 한군데 산굽이를 도는데 문득 말을 탄 조조가 언덕 위에 나타나 소리쳤다.

“방영명(名, 방덕의 자)은 어찌하여 일찍 항복하지 않는가?” 

하지만 그때껏 방덕에게는 항복할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멀지 않은 곳에 조조가 있는 걸 보자 생각이 달라졌다.

‘조조를 사로잡는다면 까짓 장수 천 명을 사로잡는 것보다 훨씬 낫지 않겠는가.’

방덕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허저는 놓아두고 조조가 있는 산 언덕 위로 말을 몰았다. 방덕이 조조를 잡는 데만 마음이 급해 정신없이 말을 몰아댈 때였다. 문득 함성이 크게 일며,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한 느낌과 함께 방덕은 말을 탄 채 깊은 함정 속으로 떨어 졌다.

방덕이 놀란 가운데도 자세를 가다듬어 함정을 벗어나보려 했으 나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사방에서 밧줄과 갈고리가 날아들어 눈 깜짝할 사이에 방덕을 멧돼지 옭듯 옭고 말았다.

군사들은 이어 방덕을 끌고 언덕 위로 올라갔다. 조조가 얼른 말 에서 뛰어내려 군사들을 꾸짖어 물리치고 손수 방덕을 풀어주었다. 

“영명을 기다린 지 오래다. 이제 공은 나와 함께 일해보지 않으시겠소?”

방덕이 원래가 목숨을 아까워하는 위인이 아니었으나 조조가 그 같이 너그럽게 나오자 생각이 달라졌다. 문득 장로가 양송의 간사한 말만 믿고 자기를 죄 없이 죽이려 하던 일이 떠오르며 도대체 조조 의 권유를 마다해야 할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항복하겠소. 이 몸을 거두어주신다면 개나 말의 수고로움이라도 마다하지 않겠소이다.”

방덕이 넙죽 절을 하며 그렇게 말했다. 조조는 그런 방덕을 몸소 부축해 말에 오르게 한 뒤, 말 머리를 나란히 하여 대채(大寨)로 돌 아갔다.

그것도 성안의 사람들이 잘 볼 수 있게 일부러 골라둔 길을 지나서였다.

그걸 본 성안의 군사들이 급히 장로에게 알렸다.

“방덕이 조조와 말 머리를 나란히 하고 성 아래로 지나갔습니다. 진작부터 조조와 내통해온 것임에 분명합니다.”

바로 양송이 간밤에 말한 대로였다. 장로는 양송 때문에 자신이 방덕을 조조에게로 떼밀어 보낸 줄도 모르고 그때부터 한층 더 양송 의 말을 믿었다.

다음 날이었다. 조조는 삼면으로 구름 사다리를 세우고 비포(飛 砲)로 돌을 날리며 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장로는 그 기세가 엄청 난 것을 보고 아우 장위를 불러 의논했다.

“아무래도 이곳 남정은 틀린 것 같다. 창고에 있는 곡식과 비단을 모두 태워버리고 남산으로 달아나 파중이나 지키도록 해야겠다.”

그때 곁에 있던 양송이 속마음을 드러냈다.

“그보다는 성문을 열어 조조에게 항복하는 편이 낫겠습니다. 주공 과 백성들을 아울러 구해주는 게 상책인 듯싶습니다.”

다른 사람이라면 벌컥 성부터 냈을 장로였지만 믿고 믿는 양송의 말이라 무겁게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삼 대(三代)를 이어온 기업을 그토록 허무하게 넘길 수는 없어 얼른 결 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데 장위가 양송과는 다른 소리를 했다. 

“형님 말씀이 옳습니다. 빨리 모든 걸 불살라버리고 파중으로 가 시지요.”

그 역시 장로와 같은 핏줄이라 부조(父祖)의 기업을 넘기느니보다 는 끝까지 싸우는 쪽을 권했다. 장로가 한참을 생각하다가 그 중간 을 택했다.

“나는 원래 나라의 다스림을 받으려 했으나 미처 내 뜻이 전해지 기도 전에 일이 이렇게 되고 말았다. 이제 이곳을 빠져나가되 창고 며 곳간에 든 것은 모두 나라의 물건이니 함부로 없애서는 안 된다.” 

그러고는 부중의 창고와 곳간에 자물쇠를 채우고 엄히 봉하게 하 는 한편 모든 벼슬아치들에게는 떠날 채비를 하게 했다.

그날 밤 이경 무렵이었다. 장로는 밤이 깊기를 기다려 모든 벼슬 아치와 집안 노소를 거느리고 남문으로 빠져나갔다. 갑작스레 쏟아 져 나간 덕분에 성은 그럭저럭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멍해 있 던 것도 잠시 조조의 장졸들이 곧 장로를 뒤쫓아 나섰다.

“그냥 보내주어라. 서두를 것 없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조조가 그런 그들을 말렸다.

조조가 텅 빈 남정 성안으로 들어가 보니 모든 관가의 창고와 곳간은 엄히 봉해져 있었다. 그런 장로를 기특히 여긴 조조는 잠시 군 사를 쉬게 하며 사람을 뽑아 파중으로 보냈다. 장로에게 항복을 권 유하기 위함이었다.

조조의 사자가 찾아와 다시 항복을 권하자 장로도 슬몃 마음이 움직였다. 그러나 그의 아우 장위는 달랐다.

“형님, 아니 되오. 부조에게서 물려받은 땅을 어찌 이리 쉽게 내줄 수 있단 말이오!”

그러면서 거듭 맞설 것을 우겨대자 장로도 마침내는 아우의 뜻을 따랐다. 일이 그렇게 돌아가는 것을 본 양송은 조조에게 남몰래 글 을 보냈다.

‘아무래도 장로는 권하는 술을 먹지 않고 벌주(罰酒)를 마실 작정 인 것 같습니다. 승상께서는 얼른 군사를 내어 이 일을 매듭짓도록 하십시오. 이 양송은 때를 보아 안에서 호응하겠습니다…………..’

그 같은 편지를 받은 조조는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파중으로 달 려갔다.

조조가 대군을 이끌고 왔다는 말을 듣자 장로는 아우 장위에게 군 사를 주어 성 밖으로 내보냈다. 장위가 뛰쳐나오는 걸 본 조조는 허 저를 내보내 잡게 했다. 장위가 겁없이 허저와 맞섰으나 아무래도 무 리였다. 몇 합 부딪기도 전에 허저의 칼에 찍혀 말 아래로 떨어졌다. 다시 쫓겨 성안으로 돌아간 장위의 졸개들이 장로에게 그 소식을 전했다. 그러나 장로는 조금도 흔들림없이 성을 굳게 지켰다. 이때 양송이 나섰다.

“이제 나가 싸우지 않고 성안에 앉았다가는 그대로 말라죽고 말 것입니다. 제가 성을 지킬 것이니 주공께서 친히 나가셔서 조조와 결판을 내십시오. 죽기로 싸운다면 아니 될 것도 없습니다.”

다른 꿍꿍이속이 있어 그리 권한 것이지만 그를 믿는 장로는 그 말에 따랐다. 염포가 나서서 다시 말렸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장로가 군사를 이끌고 성을 나가자 조조의 군사들이 기다렸다는 듯 몰려왔다. 장로는 그래도 한 무리의 우두머리답게 죽을 각오로 적과 맞섰다. 그러나 나머지 군사들은 그렇지가 못했다. 거듭되는 패전에 겁을 먹을 대로 먹은 군사들은 조조의 군사들과 한번 맞붙어 보기도 전에 뒤돌아서 달아나기 바빴다.

일이 그쯤 되니 장로도 싸워볼래야 싸워볼 수가 없었다. 얼른 돌아 서서 성으로 향하자 그 뒤를 조조의 군사들이 벌떼처럼 쫓아왔다. 겨우 성문 앞에 이른 장로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어서 문을 열어라! 내가 왔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아무리 소리쳐도 성문은 굳게 닫힌 채 열릴 줄 몰랐다. 양송이 안에서 일을 꾸민 탓이었다. 그걸 알 리 없는 장로는 드디어 성안으로 들기를 단념하고 달아나려 했으나 그 마저도 안 되었다. 어느새 등 뒤까지 뒤쫓아온 조조의 외침이 귓가 를 울렸다.

“이놈 장로야, 어찌하여 빨리 항복하지 않느냐?”

마침내 장로도 달아날 생각을 버렸다. 얼른 말에서 뛰어내려 조조 앞에 엎드리니, 그 할아비 장릉에서 시작된 기업은 결국 조조의 손 에 넘겨지고 말았다.

장로가 항복하자 조조는 기꺼이 그를 받아들였다. 남정에서 달아 날 때 창고며 곳간을 온전히 봉해놓고 간 일을 갸륵히 여겨 그 누구 의 항복을 받았을 때보다 후하게 대접하고 그를 진남장군에 봉했다. 또 장로를 따라 항복한 한중의 벼슬아치들도 버리지 않아, 염포를 비롯한 여러 사람을 모두 후에 봉하니 조조를 겁내던 한중 사람들이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그때까지 한중의 여러 지방은 오두미도(五斗米道)의 조직에 따라 다스려지고 있었는데 조조는 그것도 군현제로 고쳤다. 각 군에 태수 (太守)를 세우고 도위(都尉)를 둔 게 그랬다. 태수며 도위도 되도록 이면 한중 사람들 중에서 뽑아 보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가장 공이 크다 할 수 있는 양송만은 상을 받기는커녕 가 장 무거운 벌을 받았다.

“너는 주인을 팔아 영화로움을 사려한 놈이다. 나의 사람들이 너 를 본받을까 실로 두렵구나.”

조조는 큰 벼슬이라도 내릴 줄 알고 찾아온 양송을 그렇게 꾸짖 은 뒤 무사들을 향해 매섭게 소리쳤다.

“저놈을 저잣거리에 끌고 나가 목을 베어라! 그리고 그 목을 높이 매달아 주인을 팔아먹은 죄인이 어떻게 되었는가를 모든 사람이 알 게 하라.”

양송은 그제서야 후회했으나 이미 늦은 뒤였다. 개처럼 무사들에 게 끌려나가 목 없는 귀신이 되고 말았다.

여기서 다시 한번 드러나는 것은 일생을 통해 거의 예외가 없었 던 조조의 금기(禁忌) 가운데 하나이다. 조조는 아직 군웅群雄)의 하나에 지나지 않았을 때부터도 사욕에 눈이 멀어 주인을 판 자는 자신에게 아무리 큰 이익을 갖다 주어도 용서하지 않았다. 어릴 적 부터의 벗이며, 힘에 겨운 원소를 이겨내는 데 뺄 수 없는 공을 세운 허유(許)조차도 끝내는 제 명에 죽지 못했다. 그를 죽인 것은 허저 이지만, 조조가 그를 높이 치고 있었다면 어찌 한낱 장수가 말 몇 마 디 잘못한 걸로 그를 죽일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그 뒤로도 마찬가 지였다. 조조는 거의 일관되게 사욕으로 주인을 팔아먹은 자는 죽였 고, 아무리 자신에게는 매섭게 저항해도 그 주인을 위해 힘을 다한 이는 되도록 해치지 않으려고 했다.

간혹 끝내 항복하지 않아 죽인 적이 있지만, 그때조차도 상대의 깨끗한 이름을 지켜주기 위해서였고, 또 그 뒤에는 후한 장례를 잊 지 않았다. 조조를 순전히 권모술수의 사람으로만 몰아붙일 수 없게 만드는 남다른 품성의 하나였다.


그럭저럭 한중이 평온을 되찾아가고 있을 무렵, 주부로 따라왔던 사마의(司馬懿)가 조조를 찾아보고 말했다.

“유비는 속임수와 힘으로 유장의 기업을 뺏어 촉 땅 사람들은 아 직도 마음으로는 그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거기다가 이제 주 공께서 한중을 차지하시니 그 위엄이 익주까지 떨쳐 울리고 있습니 다. 빨리 그곳으로 군사를 내도록 하십시오. 그리하면 보잘것없는 유비의 세력은 기왓장 부스러지듯 무너져버릴 것입니다. 지혜로운 이는 때를 타는 걸 귀하게 여기는 법인 바, 지금이 바로 잃어서는 안 될 그 때입니다.”

그러나 조조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사람이란 참으로 만족을 모르는 물건이로구나! 이미 농(隴) 땅을 얻어놓고 또 촉 땅을 바란단 말인가?[得隴望蜀].”

그때 유엽이 곁에서 사마의를 편들었다.

“반드시 그렇게만 말씀하실 일은 아닙니다. 제가 보기에도 사마중 달(司馬仲達)의 말이 옳은 것 같습니다. 만약 이 일을 늦추시게 되면 나라를 다스리는 데 밝은 제갈량은 승상이 되고 삼군을 잘 이끄는 관우와 장비는 장수가 되어 촉의 백성들을 안정시킬 것입니다. 그런 다음 험한 관과 좁은 길목에 의지해 굳게 지킨다면 촉은 다시는 넘 볼 수 없는 땅이 되고 맙니다.”

그래도 조조는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아 했다. 사마의와 유엽을 번갈아 보며 달래듯 말했다.

“지금 우리 군사는 먼 길을 왔을 뿐만 아니라 오랜 싸움을 끝낸 뒤라 몹시 지쳐 있네. 우선은 좀 쉬게 하여 기운부터 돋워야겠네.” 그러고는 군사를 움직이지 않았다.

한편 조조가 이미 한중을 뺏었다는 소문은 서천에도 들어갔다. 서 천 백성들은 조조가 반드시 서천으로 올 것 같아 하루에도 몇 번씩 놀라고 두려워했다. 은근히 떨리기는 유비도 마찬가지였다. 그 소식 을 듣기 바쁘게 공명을 불러 의논했다.

“조조가 동천(川)을 이미 삼켰으니 다음은 틀림없이 우리 서천 으로 밀고 들 것이오. 우리에게는 아직 조조를 막아낼 만한 힘이 없 으니 실로 걱정이외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소?”

“제게 한 가지 계책이 있습니다. 그걸 쓰면 조조는 싫어도 스스로 물러가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제갈량이 별로 걱정할 것 없다는 투로 대답했다. 유비가 놀라움과 반가움을 감추지 못하며 물었다.

“그게 어떤 계책이오?”

“조조가 군사를 나누어 합비에 머물러 있게 한 것은 손권이 두려 운 까닭입니다. 이제 우리는 강하, 장사, 계양 삼군(三郡)을 동오에게 돌려주도록 하지요. 아울러 말 잘하는 사람을 동오에 보내 이해로 달랜 다음, 그들로 하여금 합비를 치도록 하면 조조는 틀림없이 놀 라 강남으로 달려갈 것입니다.”

“누구를 사자로 보냈으면 좋겠소?”

그럴듯하기는 하지만 아직도 걱정은 남았다는 듯 유비가 다시 물었다. 곁에 있던 이적(伊)이 스스로 나섰다.

“그 일이라면 제가 한번 가보겠습니다.”

그러자 유비도 마음이 놓이는 것 같았다. 이적이 스스로 나서준 걸 몹시 기뻐하며 손권에게 보낼 글 한 통을 써주었다. 전에 없이 예 를 갖춘 글이었다.

이적은 곧 서천을 떠나 먼저 형주로 갔다. 관운장을 만나 세 군을 돌려주는 까닭을 일러주고 일이 어긋나지 않도록 미리 말을 맞춰두 기 위함이었다. 형주에 이르러 관운장을 만난 이적은 다시 손권이 있는 말릉으로 가 자신이 온 것을 손권에게 알리게 했다.

유비가 형주를 돌려주지 않아 속으로 이를 갈면서도 손권은 사자인 이적을 불러들였다.

“그대는 무슨 일로 여길 왔는가?”

이적이 예를 마치기 바쁘게 손권이 퉁명스레 물었다. 이적이 천연스레 늘어놓았다.

“지난번에 제갈자유께서 장사를 비롯한 세 군을 돌려받으러 오셨 으나 마침 우리 군사께서 자리에 아니 계셨던 까닭에 돌려드리지 못 했습니다. 이제 그 땅을 돌려드린다는 것을 글로 써서 가져왔습니 다. 원래는 형주에 속한 남군과 영릉까지 돌려드려야 하지만 조조가 이번에 동천을 차지해버린 까닭에 만약 그 두 군까지 돌려드리게 되 면 우리 관장군은 몸둘 곳이 없어지게 됩니다. 지금 합비가 비어 있 으니 바라건대 군(君侯)께서는 군사를 일으켜 그곳을 쳐주십시오. 그러면 조조는 군사를 남으로 돌릴 것인즉 그때 우리 주공께서 동천 을 빼앗아 관장군을 그리로 불러들이고 형주는 모두 동오로 돌려드 리도록 하겠습니다.”

비틀어진 기분으로 들으면 속이 뻔한 소리로 들릴 수 있었으나 손권은 신중한 사람이었다. 얼른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먼저 시간 부터 벌었다.

“그대는 잠시 역관으로 돌아가 계시오. 그 일은 여러 사람과 의논해 보아야겠소.”

그렇게 좋은 말로 이적을 내보낸 뒤 여러 모사들을 불러놓고 물었다.

“유비가 이제 와서 장사, 강하, 계양 세 군을 돌려주며 우리더러 합비를 들이치라 하는데 여러분의 뜻은 어떠시오?”

그러자 장소가 일어나 말했다.

“이것은 틀림없이 유비가 조조를 두려워해서 급히 끼워맞춘 꾀입니다. 조조가 한중을 뺏은 기세를 타고 서천으로 밀고 들어올까 걱 정이 되어 뒤늦게 세 군을 돌려주며 도움을 청하는 것입니다. 그러 나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조조가 멀리 한중에 있는 틈을 타 우리가 합비를 차지해두는 것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계책이 될 수도 있으니 못 이긴 체 유비의 청을 들어주도록 하 십시오.”

손권도 그런 장소의 말을 옳게 들었다. 갖은 생색을 다 내며 이적 을 촉으로 돌려보낸 뒤 크게 군사를 일으켜 조조의 뒷덜미를 후려칠 의논을 시작했다.

이때 손권의 장수들은 대개 밖에 나가 장강 곳곳의 물목을 지키 고 있었다. 손권은 먼저 노숙을 보내 유비로부터 강하, 장사, 계양 세 군을 돌려받는 한편 육구에 둔병해 그곳에 있는 여몽과 감녕을 말릉 으로 돌려보내게 했다. 또 여항에도 사람을 보내 평소 아끼는 능통 도 불러들여 그 싸움에 끼게 했다.

하루도 되지 않아 여몽과 감녕이 먼저 말릉에 이르렀다. 여몽은 손권을 보는 자리에서 다시 한 계책을 올렸다.

“지금 조조는 여강 태수 주광(朱)으로 하여금 환성에 둔병하면 서 크게 논밭을 떠 거기서 난 곡식을 합비로 보내고 있습니다. 그 덕 에 합비는 허도의 곡식을 따로 받지 않아도 넉넉히 그 군사들을 먹 이고 있으니 이제 주공께서는 먼저 환성부터 빼앗도록 하십시오. 합 비는 그 뒤에야 치도록 하는 게 좋겠습니다.”

손권도 기꺼이 그 말을 따랐다.

“그 계책이 꼭 내 마음에 드오. 그렇게 합시다.”

그렇게 말하면서 그날로 군사를 일으켰다. 여몽과 감녕은 선봉이 되고 장흠과 반장은 후군이 되었으며 손권 자신은 주태, 진무, 동습, 서성, 정봉과 더불어 중군이 되었다. 이때 손견 때부터의 오랜 장수 들인 황개와 정보와 한당은 각기 멀리 있는 군진(軍鎭)을 맡아 지키 고 있어 그 싸움에 따라가지 못했다. 어쩌면 적벽의 싸움을 끝으로 그들의 시대는 다 갔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장강을 건넌 오(吳)의 병마는 먼저 화주를 뺏은 다음 지름길로 환 성에 이르렀다. 환성을 지키던 여강 태수 주광은 사람을 뽑아 합비 에 구원을 청하는 한편 굳은 성에 의지해 지키기만 하고 나가 싸우 지 않았다.

손권은 몸소 성 아래로 가서 성을 지키는 군세를 살펴보았다. 성 안에서 화살이 비 오듯 쏟아져 손권의 해가리개며 수레 덮개에까지 꽂혔다. 손권은 급히 진채로 되돌아와 모든 장수들을 불러놓고 물 었다.

“어떻게 하면 환성을 쉬이 뺏을 수 있겠소?”

“군사를 뽑아 흙으로 산을 만들게 하고 그 위에서 공격하는 게 좋겠습니다.”

동습이 그렇게 대답하자 곁에 있던 서성이 딴 의견을 내놓았다.

“구름사다리와 무지개 다리 [홍교, 공성전에 쓰이는 높은 다락 같은 것]

를 세워 성안을 굽어보며 공격하면 될 것입니다.”

그때 여몽이 동습과 서성 둘 모두에게 타이르듯 했다.

“두 분의 말씀이 모두 옮긴 하나 어느 쪽을 택하든 날짜가 오래걸리는 흠이 있습니다. 그사이 합비에서 구원이라도 오면 모든 것은 헛일이 되고 맙니다. 차라리 바로 군사를 몰아 공격해보도록 하지요. 우리 군사들은 이제 막 싸움터에 나와 기세가 한창 날카로우니 그 기세를 타고 힘을 다해 공격한다면 아침에 싸움을 시작해도 점심 나절이면 성을 깨칠 수 있을 것입니다.”

손권은 그중에서 여몽의 말을 가장 옳게 여겨 거기 따르기로 했 다. 다음 날 새벽 오경 무렵 군사들을 밥 지어 먹인 뒤 그대로 삼군 을 휘몰아 환성을 들이쳤다.

성벽 위에서는 화살과 돌이 비 오듯 쏟아졌다. 오의 군사들이 잠 시 멈칫하는 걸 보자 감녕이 쇠로 된 연(鍊, 죄인을 묶는 차꼬 같은 무 기)을 휘두르며 앞장서서 성 위로 뛰어올랐다.

주광은 궁노수들을 시켜 감녕에게 일제히 활과 쇠뇌를 쏘아 붙이 게 했다. 그러나 감녕은 빽빽한 숲속을 지나듯 화살비를 헤치고 달 려들어 단매에 주광을 쓰러뜨렸다. 여몽도 스스로 북채를 잡고 북을 울려 군사들의 기운을 돋우었다.

이렇듯 장수들이 앞장서서 싸우니 오의 군사들도 힘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두 한덩어리가 되어 성벽을 타고 넘어 쓰러진 주광을 베어 죽 이자 조조편의 남은 군사들은 모두 무기를 버리고 항복했다.

손권이 환성을 온전히 손에 넣었을 때는 겨우 진시 무렵이었다. 장요가 급히 환성을 구하러 달려오다가 도중에 이미 성이 떨어졌다 는 말을 들었다. 가봤자 소용없음을 알고 군사를 합비로 되돌렸다. 손권의 부름을 받은 능통이 본진에 합류하게 된 것은 손권이 이 미환성을 차지하고 들어앉은 뒤였다. 이때 손권은 삼군에게 술과 고기를 넉넉히 내려 그 수고로움을 위로한 뒤 장수들과 더불어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여몽, 감녕에게 큰 상을 내림과 아울러 다른 장수 들의 공을 치하하기도 잊지 않았다.

여몽은 윗자리를 감녕에게 내주고 그가 앞장서 성벽 위로 뛰어오 른 공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추켰다. 손권도 그게 옳다는 듯 흐뭇한 얼굴로 감녕에게 술잔을 권하니 잔치는 온통 감녕만을 위한 것 같 았다.

늦게 이른 바람에 그 싸움에 끼지 못한 능통은 술이 오를수록 속 이 뒤틀렸다. 감녕은 아비를 죽인 원수인 데다 여몽이 지나치게 그 의 공을 추켜세운 탓이었다. 아비 죽인 원수란 감녕이 아직 황조(黃 祖)의 사람일 때 손책을 따라 황조를 치러 온 능통의 아비 능조(凌 操)를 활로 쏘아 죽인 일을 말한다.

자리가 자리인 만큼 함부로 날뛸 수가 없어 부글부글 끓는 속을 억누르며 여몽과 감녕을 쏘아보고만 있던 능통이었으나 손권이 자 리를 비우자 더 참고 있을 수가 없었다. 문득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뽑아들고 잔치상 앞으로 나가 말했다.

“잔치 자리에 풍악이 없으니 어째 삭막하오이다. 제가 솜씨 없으 나마 한바탕 칼춤을 출 터이니 곱게 보아주시오.”

그러고는 칼을 휘두르며 춤을 시작했다. 감녕이 얼른 그 같은 능 통의 속셈을 알아차렸다. 그 역시 양손으로 창 한 자루를 잡고 자리 에서 일어나며 여럿에게 말했다.

“저는 이 창으로 여러분의 흥겨움을 보탤까 합니다. 서투르더라도 너그럽게 보아주십시오.”

그러고는 자리에서 빠져나와 창을 휘두르는데 춤이라기보다는 싸움의 자세였다.

두 사람이 결코 좋은 뜻으로 나선 게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먼 저 알아차린 것은 여몽이었다. 그냥 두고 볼 수 없다 여겨 그 또한 나섰다. 한 손에는 방패를 들고 다른 손에는 칼을 잡은 채 능통과 감 녕 사이에 끼어들어 능청을 떨었다.

“두 분의 솜씨가 좋다고 하지마는 어찌 내 솜씨는 알아주지 않으 시오? 나는 이 방패와 칼로 한바탕 흥을 돋울 것이니 잘들 보아주 시오.”

그러고는 방패와 칼을 춤추듯 휘둘러 능통과 감녕을 양쪽으로 갈 라놓았다. 일이 그쯤 되니 아무리 둔한 사람이라도 이상한 낌새를 아니 느낄 수가 없었다. 그중에 하나가 급히 손권에게 달려가 그 일 을 알렸다.

손권이 놀라 급히 잔치 자리로 달려갔다. 손권이 들어오는 걸 보 자세 사람은 하는 수 없이 손에 들고 있던 병기를 거두었다. 손권이 엄한 눈으로 능통과 감녕을 번갈아 쏘아보며 꾸짖었다.

“내가 늘상 그대들 둘에게 묵은 원수는 잊어버리라고 당부하지 않았소? 그런데 이게 무슨 꼴들이오?”

그러나 능통이 복받치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땅에 엎드려 통곡 했다. 아비의 원수를 눈앞에 두고도 참아야 하는 원통함이 변한 눈 물이었다. 손권은 그런 능통을 두번 세번 달래 겨우 진정시켰다. 다음 날이 되었다. 손권은 전날의 개운치 못한 기분을 씻어버리려 는 듯 일찍부터 서둘러 군사를 움직였다. 합비로 삼군을 몰아가니 전날에 이긴 기세를 탄 그 위용이 자못 볼만했다.

한편 환성이 이미 손권에게 떨어졌다는 말을 듣고 합비로 되돌아 온 장요는 적잖이 걱정스럽고 답답했다. 손권이 몸소 대군을 이끌고 나온 것으로 보아 혼자서는 당하기 어려우리란 짐작이 든 까닭이었 다. 그런데 문득 한중에 있는 조조가 설제(薛悌)를 보내 나무로 된 상자 하나를 전해왔다. 장요가 받아보니 봉해진 상자 한 모퉁이에 조조의 친필이 조그맣게 붙어 있었다.

‘적이 오거든 뜯어보라.’

그걸 본 장요는 좀 마음이 놓였다.

그런데 바로 그날이었다. 문득 군사 하나가 달려와 장요에게 급한 소식을 전했다.

“손권이 스스로 십만 대군을 이끌고 합비로 오고 있습니다.”

이에 장요는 얼른 조조가 보낸 나무상자를 뜯어보았다. 거기에는 이런 글이 씌어져 있었다.

‘만약 손권이 쳐들어오거든 장요와 이전은 나가 싸우고 악진은 안에서 성을 지키라’

자세한 계책은 아니었지만 장요는 그것만으로도 막막한 느낌에서 만은 벗어날 수 있었다. 곧 이전과 악진에게도 그 글을 보여주어 조 조의 뜻을 전했다.

“장군의 생각은 어떠시오?”

읽기를 마친 악진이 가만히 장요에게 물었다. 장요는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대답했다.

“지금 주공께서는 멀리 나가계시니 오는 이 틈에 반드시 우리를 깨뜨려버리려 할 것이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군사를 이끌고 성을 나서서 죽기로 싸워 적의 날카로운 기세를 꺾어놓는 것이외다. 그렇 게 하여 장졸들의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라앉힌 뒤에야 이 성을 지켜 낼 수 있을 것이오.”

이전은 평소부터 장요와 사이가 좋지 못했다. 조조가 시킨 대로라 면 마땅히 장요와 함께 나가 싸워야 할 사람이었으나 그런 장요의 말을 듣고도 입을 다물고 아무런 대꾸를 않았다. 악진은 이전이 아 무 말도 없는 걸 보자 장요와 생각이 달라서인 줄 알고 그를 대신해 다른 의견을 내보았다.

“적은 머릿수가 많고 우리는 적소이다. 성을 나가 맞기는 어려우 니 차라리 안에서 힘을 합쳐 굳게 지키는 게 낫지 않겠소?” 그러자 장요가 결연히 말했다.

“공들은 사사로운 감정을 앞세워 공사(公事)를 돌아보지 않으시는 구려. 그렇다면 나 혼자서라도 나가 한바탕 죽기로 싸워보겠소!” 

그러면서 곁에 있던 군사들에게 어서 말을 끌어오라고 다그쳤다. 그때껏 말없이 있던 이전이 문득 깨달은 바 있어 개연慨然)히 몸을 일으켰다.

“장군이 그리하시는데 내가 어찌 사사로운 감정을 앞세워 공사를 팽개칠 수 있겠소? 바라건대 제게도 할 일을 일러주시오.”

그 말을 들은 장요는 기뻐 어쩔 줄 몰랐다. 원래 이전은 어릴 적부 터 조조의 사람이었던 데 비해 장요는 훨씬 나중에 조조 편에 끼어 든 항장(降將) 출신이었다. 말하자면 한편은 창업 공신인 반면 다른 한편은 뒷날 영입된 사람인 셈이었다.

그러나 장수로서의 자질은 장요가 앞서 능력을 위주로 사람을 쓰 는 조조는 곧 장요를 이전보다 윗자리에 앉혔는데, 그게 두 사람 사 이를 해친 원인이 되었다. 이전은 굴러들어온 돌에 밀려난 박힌 돌 신세가 된 느낌 때문에 장요가 까닭없이 마땅치 않았고, 장요는 장 요대로 이전의 심술이 시골 개 텃세 같아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그런데 중요한 대목에 이르러 둘의 해묵은 감정이 풀리게 되니 장요 로서는 반갑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왕 만성, 이전의 자)께서 도와주실 양이면 이렇게 해주시 오. 내일 일군(軍)을 이끌고 소요진 북쪽에 매복해 기다리다 오병이 지나가거든 먼저 소사교(小師橋)를 끊어버리는 것이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나와 여기 이 악문겸(樂謙)이 적을 흠씬 두 들겨놓겠소이다.”

장요가 그 어느 때보다 겸손하게 이전이 할 일을 일러주었다. 이 전도 전에 장요에게서 영을 받을 때 느끼던 역겨움은 조금도 느낌이 없이 그대로 따랐다. 군사를 점고하여 소요진 북쪽으로 가 알맞은 곳에 소리 없이 숨었다.

한편 이때 손권은 여몽과 감녕을 선봉으로 삼고 자신은 능통과 함께 중군이 되어 합비로 달려오고 있었다.

남은 장수들도 모두 후대가 되어 뒤따라오게 하니 오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았다.

양군이 모두 먹은 마음이 있어 이를 악물고 맞붙게 된 탓에 싸움은 전에 없이 격렬해질 수밖에 없었다. 제갈량이 서천에서 옮겨 붙 인 불은 이제 이 장강 가에서 거세게 타오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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