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7권 – 13화 : 장하구나 장문원, 씩씩하다 감흥패
장하구나 장문원, 씩씩하다 감흥패
양군 중에서 처음으로 부딪친 것은 감녕과 여몽이 이끄는 오(吳) 의 선봉과 악진의 부대였다. 감녕이 악진과 만나기 바쁘게 말을 달 려 덮치자 악진 또한 물러서지 않아 곧 한바탕 거친 싸움이 벌어졌 다. 하지만 악진에게는 처음부터 끝장을 보려고 시작한 싸움이 아니 었다. 몇 합 부딪기도 전에 악진이 거짓으로 져서 쫓겨가니 감녕은 여몽을 불러 함께 악진을 뒤쫓았다.
감녕과 여몽의 전군이 첫 싸움에 이겼다는 소식은 중군으로 뒤에 있던 손권의 귀에도 들어갔다. 손권은 그 기세를 탈 양으로 군사를 재촉해 앞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손권이 소요진 북쪽에 이르렀을 때 였다. 홀연 연주포(砲) 소리가 나면서 왼쪽에서는 장요가 오른 쪽에서는 이전이 각기 일군을 거느리고 뛰쳐나왔다.
손권은 몹시 놀랐다. 곧 여몽에게 사람을 보내 구해주기를 청하려 하는데 벌써 장요의 군사가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때 손권 곁에는 능통이 거느리는 삼백여 기뿐이었다. 그 군사로는 산을 뒤집 을 듯한 기세로 몰려오는 장요의 군사를 당할 수 없다 여긴 능통이 손권을 보고 크게 소리쳤다.
“주공께서는 무얼 하고 계십니까? 어서 소사교(小師橋)를 건너십시오!”
그러는데 장요가 이천여 기를 이끌고 앞장서 덮쳐왔다. 능통은 몸 을 돌려 장요와 죽기로 맞섰다. 손권은 그 틈을 타 말을 몰고 소사교 쪽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다리는 이미 이전이 끊어버린 뒤였다. 다 리 남쪽은 두어 길이나 무너져 내려앉아 나무판대기 하나 걸려 있지 않았다. 그걸 본 손권은 당황해 어쩔 줄 몰랐다. 아장곡리가 다시 큰 소리로 손권을 깨우쳐주었다.
“주공께서는 말을 뒤로 물렸다가 힘껏 채찍질해 앞으로 내달아 보십시오. 그러면 끊어진 곳을 뛰어넘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제서야 퍼뜩 정신이 든 손권은 그대로 따랐다. 말을 대여섯 길 뒤로 물렸다가 힘껏 고삐를 당기며 채찍을 휘두르니 말은 세차게 앞 으로 내달아 나는 듯 끊어진 다리를 건너뛰었다.
손권이 다리 남쪽으로 내려서자 서성과 동습이 배를 몰아와 손권 을 맞아들였다. 그러나 이때 능통과 곡리는 장요의 대군과 맞서 힘 겨운 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 소식을 들은 여몽과 감녕이 그들을 구 하려고 돌아섰지만 뜻 같지 못했다. 쫓기던 악진이 되돌아서서 오히 려 뒤를 덮쳐온 데다 이전이 또 길을 막고 들이쳐 오군은 태반이 꺾여버렸다.
능통이 이끌고 있던 삼백여 기는 끝내 장요의 이천여기에 에워싸여 모조리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오직 능통과 곡리만이 살아 있 었으나 그들도 몸 여기저기를 창에 찔려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이었 다. 겨우 에워싼 적병을 뚫고 소사교까지 달려갔다가 다리가 끊긴 걸 보고 물가를 따라 정신없이 달아났다.
배를 타고 있었던 손권은 능통이 피투성이가 되어 쫓기는 걸 보 자 급히 동습에게 명했다.
“어서 배를 저편 물가에 대어라. 능통을 구해야 한다.”
이에 동습은 위험을 무릅쓰고 배를 북쪽 물가에 대 능통과 곡리 를 구했다. 그때쯤 하여 여몽과 감녕도 겨우 목숨만 건져 남쪽 언덕 으로 돌아왔다.
조조 쪽의 대승리였다. 그 한판 싸움으로 강남 사람들은 모두 장 요를 두려워하게 되었으며, 밤에 울던 아이도 장요의 이름만 들으면 울음을 뚝 그쳤다.
하지만 손권은 그만 일로 기가 꺾이지 않았다. 여러 장수들이 지 켜 무사히 영채로 돌아간 손권은 능통과 곡리에게 큰 상을 내림과 아울러 군사를 유수로 물리고 새로운 싸움 준비로 들어갔다.
싸움배를 정돈하여 물과 뭍으로 다시 나가기로 의논을 정하는 한 편, 사람을 강남으로 보내 다시 인마를 뽑아 그 싸움을 돕도록 했다. 손권이 유수에 자리 잡고 다시 크게 군사를 일으켜 쳐올라오려 한다는 소문은 곧 장요에게도 전해졌다.
방금 싸움에 이긴 다음이긴 하나 장요는 은근히 겁이 났다. 아무래도 합비에 있는 적은 군사만으로는 손권이 마음 먹고 일으킨 대군을 막아낼 수 있을 성싶지 않았다. 이에 급히 조조에게 사람을 보내 합비의 위태로움을 알리고 구원을 청했다.
장요의 전갈을 받은 조조는 크게 놀랐다. 그러나 장졸들을 놀라게 하지 않으려고 시치미를 뗀 채 여럿을 불러놓고 물었다.
“이제 서천을 쳐서 빼앗아보는 게 어떻겠는가?”
마음은 이미 합비에 가 있으면서도 짐짓 해보는 소리였다. 유엽이 나서서 조조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주었다.
“지금 촉 땅은 안정이 된 데다 이미 우리가 온 데 대한 준비도 갖 추었을 것입니다. 서천을 쳐서는 아니 됩니다. 차라리 군사를 물려 합비를 구하고 강남을 노려보는 쪽이 낫겠습니다.”
그러자 조조는 못 이긴 체 그 말을 따랐다. 하후연을 남겨 한중과 정군산(山)의 좁은 길목을 지키게 하고, 장합은 몽두암(蒙頭岩) 을 비롯한 다른 몇몇 길목을 맡게 한 뒤, 남은 장졸들은 모조리 남쪽 으로 돌렸다.
이때 손권은 유수에서 합비를 칠 군마를 수습하느라 여념이 없었 다. 새로 장정을 뽑고 말을 모아들이는데 문득 급한 전갈이 들어왔다.
“조조가 한중에서 사십만 대군을 이끌고 합비를 구하러 달려오고 있습니다.”
손권은 모사들과 의논한 끝에 먼저 동습과 서성에게 큰 배쉰척 을 끌고 유수로 드는 강 입구에 매복해 있게 하고 다시 진무는 군사 를 이끌고 이편 강 언덕을 오락가락하며 순시를 보게 하도록 했다.
합비로 쳐나가려던 처음의 계획에 비해 많이 움츠러든 기세였다. 그게 못마땅했던지 장소가 일어나 말했다.
“이제 조조는 먼 길을 왔으니 반드시 그 날카로운 기세부터 먼저 꺾어놓아야 합니다.”
손권이 그 말을 못 알아들을 리 없었다. 장소의 말을 받아들여 그 자리에서 바로 여럿을 돌아보며 물었다.
“방금 장자(子布)가 말한 대로 조조는 멀리서 왔소. 누가 앞장서 적을 깨뜨려 그 날카로운 기세를 꺾어놓겠소?”
“제가 나가보겠습니다.”
능통이 얼른 일어나며 소리쳤다. 손권이 기뻐하며 물었다.
“군마는 어느 정도나 데려가겠는가?”
“삼천이면 넉넉할 것입니다.”
그때 감녕이 나서서 능통을 비웃듯 말했다.
“백 기만 있으면 얼마든지 적을 깨뜨릴 수 있습니다. 뭣 때문에 삼천씩이나 데려간단 말입니까?”
드러내 놓고 능통을 업신여기는 소리였다. 그러지 않아도 감녕을 아비 죽인 원수로 여겨 속으로 이를 갈고 있던 능통이 그 소리를 듣 고 참을 리가 없었다.
“싸움 마당에는 농지거리가 없는 법이다. 네 무엇을 믿고 그따위 큰소리냐?”
감녕도 지지 않고 마주 일어나며 소리쳤다.
“너같이 어린것이 어찌 싸움을 알겠느냐? 주공께서 백기만 내려주신다면 네게 싸움은 어떻게 하는가를 보여주마.”
저번에 능통이 칼을 빼들고 달려든 일로 틀어질 대로 틀어진 둘사이였다. 손권의 눈앞이건만 금세라도 맞붙어 뒹굴 기세였다. 손권 이 우선 능통을 편들어 둘의 싸움을 말렸다.
“조조의 군사가 세력이 크다 하니 가볍게 맞서서는 아니 될 것이오.” 그러고는 능통에게 삼천 군마를 내려주며 말했다.
“그대는 지금 유수구를 나가 망을 보다가 조조의 군사들과 만나 거든 바로 덮쳐 그 기세를 꺾어놓도록 하라.”
손권이 제편을 들어주는 데 신이 난 능통은 곧 삼천병마를 이끌 고 유수의 진채로 떠났다. 얼마 가지 않아 자욱이 먼지가 일며 조조 의 군사들이 몰려오는 게 보였다. 조조군의 선봉은 장요였다.
능통은 앞장서 말을 달려 장요와 어울렸다. 창칼이 부딪고 말과 말이 엇갈리기를 오십여 차례가 넘어도 승부가 가려지지 않자 그 소 식을 들은 손권은 혹 나이 젊은 능통이 실수라도 할까 걱정이 되었 다. 여몽을 불러 싸움터로 보내 능통을 영채로 데리고 오게 했다. 감녕은 능통이 이렇다 할 성과 없이 돌아온 것을 보고 곧 손권에 게 나아가 말했다.
“오늘 밤 제가 백 명만 데리고 조조의 영채를 짓밟아보겠습니다. 만약 그 백 명 중에 한 사람만 잃는 일이 있어도 공으로 치지 않을 것이니 허락해주십시오.”
앞서는 능통을 편들었지만, 감녕이 다시 그렇게 나오자 손권은 그 기세를 장하게 여겼다. 군사들 중에서 날래고 사나운 자들로만 백여 명을 뽑아 감녕에게 주고, 아울러 술 쉰 동이와 양고기 쉰 근을 내 렸다.
자기 진채로 돌아온 감녕은 뽑혀 온 백 명의 용사를 줄지어 앉히고, 은으로 만든 그릇 가득 술을 따라 먼저 곱배기로 마신 뒤에 말했다.
“오늘 밤 우리는 주공의 명을 받들어 조조의 영채를 휩쓸어버릴 것이다. 모두 한 잔씩 가득 부어 마시고 힘을 다해 나아가자!”
그러나 군사들에게는 너무도 엄청난 소리였다. 겨우 백 명으로 조 조의 수십만 대군이 진 치고 있는 데를 뛰어들겠다니 그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무 대답도 없이 서로 서로 얼굴만 마주볼 뿐이었다. 감녕은 모든 군사들의 얼굴에서 그 일을 어렵다고 여기는 기색을 보자 칼을 뽑아들고 성난 소리로 꾸짖었다.
“나는 상장으로서도 목숨을 아끼지 않고 명을 받들려 하거늘, 너 희가 어찌 감히 머뭇거리고 걱정하느냐!”
그러자 군사들도 마음을 다잡아 먹고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절하 며 말했다.
“저희들도 죽을힘을 다하겠습니다. 부디 노여움을 풀어주십시오.”
이에 감녕은 손권에게서 받은 술과 고기를 내어 그들 백 명의 용 사와 더불어 먹고 마셨다. 술이 동이 나고 고기가 떨어졌을 때는 어 느덧 어둠이 짙어 있었다. 감녕은 이경이 되기를 기다려 흰 거위털 백 개를 나누어주고 모든 군사들의 투구에 꽂아 서로를 알아보는 표 지로 삼게 했다. 그리고 갑옷끈을 단단히 매게 한 뒤 말에 올라 조조 의 진채로 짓쳐들었다.
감녕을 비롯한 백 명의 용사는 녹각을 뽑아젖히고 큰 고함 소리 와 함께 진채로 뛰어들자마자 똑바로 조조가 있는 중군으로 몰려갔다. 하지만 중군이란 원래가 허술한 곳이 아니었다. 수레를 빙 둘러 세우고 그 틈틈에 인마가 들어앉아 지키니 마치 철통 같았다. 감녕 을 비롯한 백 기는 그곳을 뚫지 못하고 닥치는 대로 좌충우돌할 뿐 이었다.
그러나 한밤중에 갑작스레 밀어닥친 적이라 조조의 군사들은 놀 라고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적병의 수효가 적은지 많은지도 모 르고 저희끼리 밟고 밟히며 어찌할 줄 몰랐다. 그 틈을 탄 감녕의 백 기는 진채 안을 가로세로 치달으며 조조의 군사들을 마음껏 찌르고 베었다.
조조의 진채는 그대로 수라장이 되었다. 영채마다 북소리가 요란 하고 횃불은 별처럼 총총한데 이쪽 저쪽에서 지르는 함성은 천지를 뒤흔드는 것 같았다. 감녕은 한바탕 조조의 진채를 휩쓴 뒤에 남쪽 진문으로 빠져나갔다. 그 기세가 얼마나 거센지 아무도 그를 가로막 지 못했다.
손권은 감녕이 걱정이 되어 주태로 하여금 한 갈래 군마를 이끌 고 감녕이 돌아오는 것을 돕도록 했다. 이에 감녕을 비롯한 백기는 유수로 유유히 빠져나갔으나 조조의 군사들은 매복이 있을까 봐 두 려워 감히 뒤쫓지를 못했다.
감녕이 오병의 진채로 돌아와 헤어보니 과연 데리고 간 백 명은 한 사람도 줄어들지 않았다. 영문 근처에 이르러 감녕은 백 명의 용 사들에게 말했다.
“지금도 북을 치고 피리를 불며 크게 함성을 질러라. 주공을 위해 만세를 불러라!”
백 명의 용사들이 이긴 기세를 더해 그 말을 따르니, 오군의 영채 는 갑자기 승리의 함성으로 뒤흔들리는 듯했다. 손권이 몸소 영문까 지 나와 그런 감녕을 맞아들였다. 감녕은 손권을 보자 말에서 내려 땅바닥에 엎드렸다. 손권은 감녕을 일으켜 두 손을 쓸어주며 말했다. “장군의 이번 걸음은 늙은 역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기에 넉 넉했소. 내가 장군을 말리지 않은 것은 바로 장군의 이 같은 배포를 보고자 함이었소!”
그러고는 비단 천필과 좋은 쇠로 만든 칼 백 자루를 상으로 내렸 다. 감녕은 그 상을 백 명의 용사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주고 자신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다. 손권은 그런 감녕을 보며 여러 장수들에게 말했다.
“조조에게는 장요가 있고 내게는 감흥패가 있다. 한번 맞붙어볼만하지 아니한가!”
하지만 조조라고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다음 날 날이
새기 바쁘게 장요를 앞세워 손권에게 싸움을 걸어왔다.
지난밤 감녕이 공을 세우고 돌아온 걸 보고 심사가 틀어질 대로 틀어진 능통이 분연히 나섰다.
“이번에는 제가 나가 장요와 한번 싸워보겠습니다.”
손권이 선뜻 허락하니 능통은 오천 군마를 이끌고 유수를 나섰다. 손권도 감녕과 더불어 멀찍이 따라가 능통이 싸우는 모습을 구경 했다.
양군이 마주보며 둥글게 진을 치자 조조 쪽에서 장요가 말을 몰 아 나왔다. 오른쪽에는 이전이, 왼쪽에는 악진이 따르고 있었다. 능통이 그런 장요를 향해 칼을 휘두르며 말을 달려 나갔다.
장요는 곁에 있던 악진을 내보내 자기 대신 능통을 맞게 했다. 이에 맞붙게 된 능통과 악진은 잠깐 사이에 쉰 합을 넘겼으나 얼른 승 부가 나지 않았다.
능통과 악진이 싸운다는 말을 들은 조조도 몸소 말을 몰아 문기 아래로 나갔다. 조조가 보니 두 장수의 싸움은 이미 쉰 합이 넘었건 만 아직 한창이었다. 쉽사리 승부가 나지 않을 것을 안 조조는 가만 히 조휴를 불렀다.
“너는 몰래 능통을 쏘아 악진을 도와라. 이 싸움은 반드시 우리가 이겨야 한다.”
전날 감녕이 이끈 백기에 놀림을 당한 뒤라 그날은 어떻게든 이겨 보려고 짜낸 편법이었다.
조조의 명을 받은 조휴는 가만히 장요의 등 뒤로 가서 능통이 탄 말을 향해 활시위를 당겼다. 화살을 맞은 아픔을 이기지 못해 몸을 곧추세우자 능통은 그대로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악진은 그 좋은 때를 놓치지 않으려고 창을 꼬나들고 말에서 떨 어진 능통을 덮쳐갔다. 그러나 악진의 창이 미처 능통을 찌르기 전 에 갑자기 시위 소리가 나며 화살 한 대가 날아왔다. 화살은 그대 로 악진의 얼굴에 꽂혀 악진은 외마디 소리와 함께 말에서 굴러떨 어졌다.
그 광경을 본 양편의 군사들이 일제히 달려 나가 각기 저희 장수 를 구해 돌아갔다. 그렇게 되니 어느 쪽도 더 싸울 마음이 없었다. 곧 징을 울려 군사를 거둬들였다.
위급한 지경에 빠졌다가 겨우 구함을 받아 본채로 돌아간 능통은 손권 앞에 엎드려 고마움을 나타냈다. 손권이 가만히 손을 저으며 말했다.
“내게 고마워할 건 없네. 활을 쏘아 그대를 구해준 것은 바로 감녕일세.”
그제서야 능통도 자기를 구해준 것이 누군 줄 알았다. 사내답게 감녕 앞에 가서 머리를 숙이며 감사했다.
“공이 이 같은 은혜를 드리워주실 줄은 몰랐소이다. 길이 잊지 않겠소.”
그러고는 그날부터 감녕과 더불어 생사를 함께하는 벗이 되어 다 시는 변하지 않았다. 손권의 오랜 골칫거리 하나가 절로 해결된 셈 이었다.
한편 조조는 악진이 화살에 맞는 것을 보고 크게 걱정이 되었다. 몸소 악진이 누운 장막을 찾아가 그 치료를 돌아보고 악진을 위로했 다. 그리고 마치 그의 원수를 갚아주려는 듯이나 다음 날로 대군을 움직여 유수로 밀고 나갔다.
조조는 대군을 다섯 길로 나누고 스스로는 가운데 길을 맡았다. 왼 쪽 한 길은 장요에게 맡기고 그 다른 길은 이전에게 맡겼으며, 오른 쪽 한 길은 서황을 앞세우고 그 다른 길은 방덕을 세웠다. 그리고 각 길마다 일만의 군사를 주어 강변을 따라 유수로 짓쳐가도록 했다. 이때 오(吳)의 서성과 동습은 배 위에서 조조군의 움직임을 살피 고 있었다. 조조가 대군을 다섯 길로 나누어 밀고 내려오는데 기세 가 여간 드세지 않았다. 그걸 보는 군사들의 얼굴에 한결같이 두려운 빛이 떠오르자 서성이 말했다.
“주군의 녹을 먹었으니 주군을 충성으로 섬길 뿐이다. 두려워할게 무엇이란 말이냐?”
그러고는 용맹스런 군사 수백 명을 데리고 작은 배를 내어 강을 건넌 뒤 이전이 이끄는 군사들을 덮쳤다.
배에 남은 동습은 군사들에게 영을 내려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 게 하며 멀리서나마 서성의 기세를 돋우어주었다. 그런데 그때 홀연 바람이 크게 일기 시작했다. 물결은 희게 부서지고 파도는 거세기 짝이 없어 동습이 타고 있던 큰 배도 뒤집힐 것만 같았다.
그걸 본 군사들이 다투어 배에서 내려 목숨을 건지려 했다. 동습 이 칼을 빼들고 크게 소리쳤다.
“너희들은 주군의 명을 받들어 여기서 역적들을 막고 있다. 어찌 감히 배를 버리고 갈 수 있느냐?”
그러고는 배에서 내리려는 군사 여남은 명을 선 채로 목 베 죽였 다. 그 충성은 갸륵했으나 동습도 자연의 위세 앞에는 어찌하는 수 가 없었다. 더욱 거세진 바람은 눈깜짝할 사이에 큰 배를 뒤집어, 마 침내 동습은 강 어귀의 깊은 물속에 빠져 죽고 말았다.
그때까지도 서성은 이전의 군사들 사이를 이리저리 내달으며 싸 우고 있었다. 그 싸움 소리를 들은 오의 진무는 드디어 조조의 대군 이 이른 줄 알았다. 급히 한 갈래 군사를 내어 그쪽으로 달려가다 조 조의 장수 방덕과 맞닥뜨렸다. 거기서 양군 사이에 다시 한바탕 싸 움이 벌어졌다.
한편 손권은 아직도 유수의 둑에 있는 진채에 머물러 있었다. 멀리서 싸우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 궁금히 여기고 있는데 문득 군사 하나가 달려와 알렸다.
“조조가 대군을 몰아 이리로 밀고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손권은 주태와 더불어 몸소 군사를 이끌고 싸움을 도우려 달려 나왔다. 얼마 가지 않아 서성이 이전의 군사들에게 둘 러싸여 이리 치고 저리 베며 싸우는 게 보였다.
“모두 서성을 구하라!”
손권이 그렇게 소리치며 앞장서서 그 싸움판으로 뛰어들었다. 젊 은 혈기에 휩쓸려 앞뒤 살피지도 않고 움직인 게 탈이었다. 갑자기 장요와 서황이 각기 한 갈래 군사를 이끌고 달려와 그런 손권을 에 워쌌다. 원래 있던 이전의 군사에다 다시 장요와 서황의 군사가 덮 치니 손권은 어느덧 적진 한가운데에 갇히고 말았다.
이때 조조는 높은 강언덕에서 싸움터를 내려보고 있었다. 손권이 자기편 군사 한가운데 갇혀 있는 걸 보자 얼른 허저를 불렀다. “그대는 어서 저쪽으로 가 손권의 군사들을 두 토막으로 갈라놓 도록 하라. 서로서로 구할 수 없도록 완전히 갈라놓아야 한다!” 명을 받은 허저는 큰 칼을 휘두르며 싸움판 가운데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무쪽 가르듯 손권의 군사를 두 토막으로 갈라놓으니 손권은 더욱 어려운 지경에 빠졌다.
한편 손권과 함께 적진에 갇혔다가 간신히 몸을 빼낸 주태는 강 변으로 달려갔으나 정신을 차려보니 주군인 손권이 없었다. 다시 말 머리를 돌려 겨우 빠져나온 적진 속으로 뛰어들었다.
“주공은 어디 계시냐?”
이리저리 손권을 찾아 헤매던 주태가 낯익은 졸개 하나를 붙들고물었다. 조조의 군사들에 쫓기던 그 군사가 겨우 정신을 차려 손가락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유난히 적병이 두텁게 에워싸고 있는 곳이었다.
“주공께서는 저기 계십니다만 지금 몹시 위급하십니다!”
그러자 주태는 온몸을 내던지듯 그쪽으로 뛰어들었다. 오래 찾아 헤맬 것도 없이 손권을 찾아낸 주태가 소리쳤다.
“주공께서는 저를 따라 나오십시오. 제가 길을 열겠습니다.”
허둥지둥 몰리고 있던 손권은 그런 주태가 지옥에서 부처를 만난 것만큼이나 반가웠다. 얼른 앞을 가로막는 적병을 베고 주태를 뒤따 랐다. 주태는 앞서 길을 열고 손권은 뒤를 막으면서 둘은 있는 힘을 다해 에움을 뚫고 나갔다.
워낙 빽빽한 적병 사이라 둘 다 옆도 뒤도 살필 틈이 없었다. 그럭 저럭 강변에 이른 주태가 그제서야 겨우 한숨을 돌리고 뒤를 돌아보 았다. 그러나 뒤따라오는 줄 알았던 손권이 보이지 아니했다. 놀란 주태는 다시 몸을 뒤집듯 되돌아서서 적진 속으로 뛰어들었다. 겨우 손권을 찾아 그리로 달려가니 손권이 죽는 소리를 했다.
“에움에서 벗어나면 활과 쇠뇌를 한꺼번에 쏘아대니 도무지 빠져 나갈 수가 없소. 어찌하면 좋겠소?”
“그럼 이번에는 주공께서 앞장을 서십시오. 제가 뒤에서 따라가면 서 막으면 적진을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주태가 그렇게 권했다. 자신이 방패가 되어 손권의 등 뒤를 막아 서겠다는 것이었으나, 다급한 손권은 사양할 틈도 없이 그 말에 따랐다. 손권이 말을 박차 앞서고 주태는 뒤를 따르며 다시 적병을 헤 치고 나가기 시작했다.
손권은 앞만 바라보며 나가면 됐지만 주태는 뒤와 옆을 함께 막 아야 했다. 거기다가 적병들도 손권을 놓치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덤 벼들었다.
주태의 몸은 서너 군데나 창에 찔리고 두꺼운 갑옷을 뚫고 들어 온 화살에 이곳 저곳을 상했다. 그러나 워낙 성난 범같이 날뛰며 뒤 를 막아 손권을 그럭저럭 구해낼 수 있었다.
주태가 손권을 데리고 강가로 갔을 때 마침 여몽이 한 갈래 수군 을 이끌고 그곳에 이르러 그들을 배 위로 맞아들였다. 손권이 허탈 한 목소리로 푸념하듯 말했다.
“나는 주태가 세 번이나 적진에 뛰어들어 구해준 덕분에 겨우 빠 져나올 수 있었으나, 서성이 아직 적 한가운데 갇혀 있으니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 말을 들은 주태가 피투성이가 된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제가 다시 한번 가서 서성을 구해오겠습니다!”
그러고는 손권이 말릴 틈도 없이 바람개비 돌리듯 창을 휘두르며 다시 적진 속으로 뛰어들었다. 잠시 후에 주태는 정말로 서성을 구 해 가지고 강가로 나왔다. 그러나 그때는 두 장수가 모두 몸에 무거 운 상처를 입고 있었다.
“활을 쏘아라!”
여몽이 배 위의 군사들에게 그렇게 영을 내려 뒤쫓는 적병들을 물리치고 두 장수를 배로 맞아들였다.
하지만 그날 싸움에 나섰던 손권의 또 다른 장수 진무(陳武)는 끝내 무사하지 못했다. 서성이 싸우는 소리를 듣고 달려 나갔다가 방 덕과 마주친 진무는 방덕과 한바탕 볼만한 싸움을 벌였으나, 뒤를 받쳐주는 우군이 없어 차차 밀리게 되었다.
방덕에게 쫓긴 진무가 어느 작은 골짜기 어귀에 이르렀을 때였다. 나무와 숲이 빽빽한 걸 보고 진무는 다시 한번 싸울 양으로 몸을 돌 렸다. 그러나 진무의 명이 다했는지, 갑자기 전포의 소매가 나뭇가 지에 걸려 덮쳐오는 방덕의 칼을 막아내지 못하고 죽음을 당하고 말 았다.
한편 손권이 에움을 뚫고 나가는 것을 본 조조는 몸소 앞장서서 군사를 몰고 그 뒤를 쫓았다. 조조가 강가에 이르니 손권은 물론 주 태와 서성도 배에 오른 뒤였다. 다 잡은 손권을 눈앞에서 놓치게 된 조조가 발을 구르며 소리쳤다.
“활을 쏘아라. 결코 손권을 저대로 살려 보내서는 아니 된다!”
그러자 조조의 군사들은 여몽의 배를 향해 일제히 화살을 날렸다. 워낙 많은 군사가 쏘는 활이라 화살이 비 오듯 손권의 머리 위로 쏟 아졌다. 그러나 이때 여몽 쪽은 이미 화살이 다한 뒤였다. 조금 전 주태와 서성을 구하느라 모두 써버린 까닭이었다.
여몽이 당황해 어찌할 줄 몰라하고 있는데 그때 갑자기 강물 위 로 수십 척의 배가 몰려오는 게 보였다. 앞선 뱃머리에 서 있는 장수 를 보니 다름 아닌 육손이었다.
육손은 오군 오 땅 사람으로 자는 백언(伯言)이라 썼다. 그 집안은 대대로 강동의 대족(族)이었으나 육손은 어려서 고아가 되어 종조 부인 육강 손에서 자랐다.
나이 스물하나에 손권 밑에서 벼슬살이를 시작하여, 이곳저곳을 돌 아다니며 여러 가지로 공을 세웠다. 치민(民)에 능하여 피폐한 고 을을 다시 일으키는가 하면, 회계산의 도둑 반림(潘臨)이며 파양호 의 수적 우돌尤) 등을 무찔러 싸움에도 능함을 보여주었다.
이에 손권은 육손에게 형 손책의 딸을 시집 보내 인척으로 받아 들이고, 아직도 도적들이 들끓는 고을로 내려보내 민심을 안정시키 게 했다. 이번에도 육손이 늦게 이른 것은 그가 맡은 고을이 육구에 서 멀리 떨어진 땅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매사에 침착하고 준비 성 있는 그답게 이끌고 온 군사는 손권이 거느리고 있는 것보다 훨 씬 많은 십만이었다.
육손이 데리고 온 대군이 일제히 조조의 군사들에게 화살을 퍼부 어대니 조조는 우선 그 기세에 눌렸다. 조조가 급히 군사를 물리치 자 육손은 승세를 타고 강 언덕에 배를 대 조조군을 뒤쫓았다.
그렇게 되자 싸움의 형국은 완전히 뒤바뀌고 말았다. 그때까지 쫓 기던 오병은 조조군을 뒤쫓으며 마음껏 죽이고 싸움말 수천 필을 다 시 빼앗았다. 조조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군사를 잃고 본채로 쫓겨가니 실로 뜻밖의 대패였다.
하지만 진 싸움을 뒤집기는 했어도 손권은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어지럽게 싸우는 중에 방덕에게 죽은 진무의 시체를 찾아냈을 뿐만 아니라 동습이 또 물에 빠져 죽은 걸 알게 되었다.
손권은 슬퍼해 마지않으며 사람을 물속에 풀어 동습의 시신을 찾 게 했다. 그리고 진무의 시신과 함께 정성들여 염한 뒤 후하게 장사지내주었다.
죽은 자를 장사 지낸 다음은 산 자의 위로와 포상이었다. 손권은 크게 잔치를 열어 주태가 목숨을 돌보지 않고 자기를 구해준 공을 기렸다. 손수 잔을 쳐 주태에게 권하고 그 등을 쓸어주며 눈물 가득 한 얼굴로 말했다.
“경은 두 번씩이나 목숨을 아끼지 않고 나를 구하느라 창에 찔리 기 수십 번, 살껍질이 마치 창날로 그림을 새긴 듯하구려. 내 또한 경을 어찌 부모형제의 정으로 대하지 않을 수 있겠소? 이제 경에게 병마의 무거운 일을 맡기고자 하니 부디 물리치지 마시오. 경은 나 의 공신이라 마땅히 이 몸과 더불어 영화와 욕됨을 같이하고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눠야 할 것이오.”
그런 다음 주태에게 옷을 벗게 하고 그 몸을 모든 장수에게 보이 게 했다. 안팎 가죽과 살이 칼로 도린 듯, 몸 한 구석도 성한 곳이 없 었다. 손권은 그 상처를 하나하나 짚어가며 물었다.
“이곳은 어쩌다 이리 되었소? 또 이곳은 어디서 상했소?”
주태는 그 물음에 싸움터에서 있었던 일들을 아는 대로 모두 말 해주었다. 손권이 그때마다 술을 권하니 주태는 결국 상처 하나마다 한 잔씩 마신 셈이라 몹시 취했다. 손권은 그래도 마음이 차지 않았 다. 자신이 받고 다니던 푸른 비단으로 지은 일산을 주태에게 주며 말했다.
“경은 이제부터 어디를 가든지 일산을 받쳐 쓰도록 하시오. 경의 공을 돋보이고 빛나게 하고자 함이니 결코 내 작은 정성을 저버려서 는 아니 되오.”
한편으로는 자신의 깊은 고마움의 뜻을 드러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다스리는 자의 책략을 곁들인 별난 상이었다. 주태가 손권이 나 쓸 수 있는 일산을 받쳐 쓰고 거리를 다니는 것을 보고 다른 장 수들도 분발해주기를 은근히 노린 것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손권이 유수에서 인마를 정돈하며 움직이지 않으니 조조도 쉽게 다루기가 어려웠다. 원래 유수는 오직 조조를 막기 위해 여러 가지 설비를 한 곳이라 지키기는 쉬워도 빼앗기는 쉽지가 않은 탓이었다. 하지만 손권 또한 조조의 대군을 이길 수는 없어 양군이 맞선 지 한 달이 넘어도 얼른 결판이 나지 않았다.
일이 돌아가는 형편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장소와 고옹이 손권 에게 권했다.
“조조는 이끌고 온 세력이 커서 힘으로는 당장 이겨내기 어려울 듯합니다. 그렇다고 싸움을 끌어봤자 군사들만 더 많이 상하게 될 뿐이니 차라리 화친을 하시지요. 싸움을 그치고 돌아가 백성들이나 돌보는 게 가장 나을 듯싶습니다.”
손권도 가만히 헤아려보니 그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곧 그들의 말을 따라 보질(步)을 조조에게로 보냈다. 해마다 조공을 드릴 것 이니 이만 싸움을 그치자는 자신의 뜻을 전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얼핏 보면 항복에 가까운 것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조공은 천자에게 바치는 것이라 아직 왕호조차 쓰지 않는 손권에게는 그리 욕될 것도 없었다.
약간 세력이 낫다고는 해도 조조 또한 그 싸움을 굳이 고집해야 할 까닭이 없었다. 아직 자기의 힘으로는 강남을 통째로 삼켜버리기는 어렵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가 손권 쪽에서 조공이라는 명분까지 세워주자 못 이긴 체 받아들였다.
“동오에서 먼저 인마를 물리도록 하라 이르라. 나는 그런 다음에 야 군사를 물려 허도로 돌아가리라.”
그렇게 보질에게 말해 보냈다. 보질이 돌아와 그 같은 조조의 말 을 전하자 손권은 곧 거기에 따랐다. 장흠과 주태를 남겨 유수구를 지키게 하고 자신은 나머지 군사들과 더불어 배에 올라 말릉으로 돌 아갔다.
손권이 돌아갔다는 말을 들은 조조도 군사를 돌렸다. 장요와 조인 을 합비에 남겨 손권이 다시 오는 것에 대비케 하고 자신은 나머지 장졸들과 더불어 허도로 돌아갔다.
그런데 이 화려하면서도 처절하기 짝이 없는 싸움은 정사를 더듬 어보면 대개 세 번의 싸움을 뒤섞어 얽은 것 같다. 곧 건안 십팔년에 서 이십일년까지 유수구를 중심으로 벌어진 손권과 조조 간의 세 번 에 걸친 격돌이 그것이다.
따라서 사실과 다른 구성도 그 어느 때보다 잦다. 이를테면 주태 의 활약은 손책이 살아 있을 때의 일을 끌어다 쓴 것 같고, 진무는 방덕에게 죽은 것이 아니라 장에게 죽었다. 능통과 감녕의 화해도 『연의』를 지은 이가 끼워넣은 허구이며, 보질이 강화를 청하러 간 적도 없다. 읽는 이의 흥을 깨는 일이 될는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혹 혼동될까 두려워 참고로 덧붙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