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8권 – 2화 : 정군산 남쪽에서 한 팔이 꺾였네
정군산 남쪽에서 한 팔이 꺾였네
가맹관을 지키던 맹달과 곽준은 그런 황충을 보자 다시 걱정이 되었다. 가만히 성도로 사람을 보내 유비에게 그 같은 사정을 알리 고 도움을 청했다.
그 소리를 들은 유비는 크게 걱정이 되었다. 급히 공명을 불러들여 물었다.
“황충이 싸울 때마다 져서 이제는 가맹관 안으로 쫓겨와 있다 하 오. 어찌 된 일이오?”
“너무 걱정하실 일이 아닙니다. 지금 황충은 교병계(驕兵計, 적을 교만하게 만드는 계책)를 쓰고 있습니다.”
공명이 잔잔하게 웃으며 그렇게 유비를 안심시켰다. 그러나 조운 을 비롯한 여러 장수들은 한결같이 공명의 말을 믿지 않았다. 유비도 영 마음이 놓이지 않아 유봉을 가맹관으로 보냈다. 가서 보고 필요하면 황충을 도우라는 뜻이었다.
“작은 장군님께서 싸움을 도와주러 오신 까닭은 무엇입니까?”
유봉이 가맹관에 이르자 황충이 놀라는 얼굴로 물었다. 유봉도 공 명의 말을 들었으나 시치미를 떼고 말했다.
“아버님께서 장군이 여러 번 싸움에 지셨다는 말을 듣고 저를 뽑아 보내셨소이다.”
그러자 황충이 껄껄 웃으며 속을 털어놓았다.
“그것은 모두 이 늙은이의 교병계외다. 오늘 밤 보시면 알겠지만, 나는 한바탕 싸움으로 잃었던 영채를 모조리 되찾을 뿐만 아니라 적 지 않은 군량과 마필까지 얻을 것이오. 내가 영채를 적에게 내준 것 은 적이 그곳에다 치중을 가득 채워 내게 돌려주도록 만들기 위함이 었을 뿐이오. 이따가 곽준은 관을 지키고 맹장군과 나는 군량과 마 필을 뺏어올 터이니 작은 장군님은 구경이나 하시오.”
정말로 공명이 예측한 대로였다.
그날 밤 황충은 오천 군사를 이끌고 갑자기 가맹관 아래로 밀고 내려갔다. 이때 하후상과 한호는 연일 관을 들이쳐도 황충이 맞서지 않자 마음이 풀어질 대로 풀어져 있었다. 파수도 제대로 세우지 않 고곯아떨어져 자는데 갑자기 황충이 들이닥치니 사람은 갑옷을 걸 칠 틈이 없고 말은 안장을 얹을 틈이 없었다. 그대로 황충에게 짓뭉 개져 이리저리 쫓기는 가운데 하후상과 한호만 겨우 목숨을 건져 달 아났다.
악몽 같은 밤이 지나고 날이 밝은 뒤에 보니 하후상과 한호가 며칠을 싸워 뺏었던 세 개의 영채는 모두 황충에게로 되돌아가 있었다. 그것도 그 영채에다 옮겨놓았던 군량이며 병기, 마필까지 고스 란히 덤으로 얹어서였다.
황충은 맹달로 하여금 뺏은 군량과 병기, 마필을 모두 성안으로 옮기게 하고 자신은 다시 하후상과 한호를 뒤쫓으려 했다. 유봉이 그런 황충을 말렸다.
“지금 군사들이 모두 지쳐 있습니다. 잠시 쉬고 난 다음에 움직이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황충은 듣지 않았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 않고 어떻게 호랑이 새끼를 잡겠소이까?”
그렇게 소리치며 앞장서서 나아갔다. 장수가 그러하니 사졸들도 마찬가지로 기세가 치솟았다. 모두 몸을 돌보지 않고 앞으로 내달 았다.
어느 정도는 예측하고 있던 장합도 일이 그 지경이 되니 어찌 손 써 볼 도리가 없었다. 되쫓겨오는 자기편 군사들에게 밀리듯 진채를 버리고 달아나니 그동안 세워두었던 허다한 영채와 책이 모두 황충 에게 넘어가버렸다. 한수(漢)에 이르러서 겨우 한숨을 돌린 것 만도 불행 중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장합은 뒤이어 쫓겨온 하후상과 한호를 불러놓고 걱정스레 말했다. “이쪽에 있는 천탕산은 군량과 말먹이 풀을 쌓아둔 곳이오. 그 곁 미창산도 또한 군량을 쌓아둔 곳이외다. 그 두 곳은 한중에 있는 우 리 군사를 먹여 살리는 밥줄과도 같은 땅이니, 만약 그곳들이 적의 손에 들어가게 되면 한중은 지킬래야 지킬 수가 없게 되오. 마땅히 그곳을 지킬 계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오.”
그 다급한 중에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는 것으로 보아 역시 장합은 비범한 장수였다. 하후상이 그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하다 대꾸했다.
“미창산은 우리 숙부이신 하후연 장군이 군사를 거느리고 지키실 뿐만 아니라, 그 뒤로는 정군산이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 오. 그러나 천탕산은 우리 형님 하후덕이 지키고 있어 적지 않이 걱 정되오. 우리는 그리로 가서 천탕산이나 지킵시다.”
장합도 하후상의 말을 옳게 여겼다. 이에 장합과 하후상, 한호는 얼마 안 남은 군사를 수습해 천탕산으로 갔다.
세 사람이 하후덕을 찾아보고 그리로 온 까닭을 밝히자 하후덕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곳은 십만의 대병이 지키는 곳이니 걱정할 게 없소. 그대들 세 분은 공연히 여기 와서 북적거릴 게 아니라 돌아가 잃은 진채나 되 찾을 궁리나 하시오.”
장합이 울컥 치미는 속을 억누르고 좋게 받았다.
“지금은 굳게 지켜야 할 때오. 함부로 움직여서는 아니 됩니다.”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산 밑이 수런거리더니 군사 하나가 달려와 하후덕에게 알렸다.
“황충이 군사를 이끌고 산 아래 나타났습니다.”
하후덕이 같잖다는 듯 웃으며 소리쳤다.
“그 늙은 도적놈이 병법도 모르면서 용맹만 믿고 너무 날뛰는구나!”
“아니오. 황충은 지모가 있는 장수외다. 용맹만 믿고 저러는 게 아니니 조심해서 맞서야 하오.”
여러 번 황충에게 혼이 난 장합이 얼른 하후덕을 깨우쳐주었다. 그러나 하후덕은 들은 체도 안했다.
“서천 군사들은 먼 길을 와서 매우 지쳤을 것이오. 그런데도 그들을 몰아 적진 깊숙이 들어왔으니 어찌 지모 있는 장수라 할 수 있 겠소?”
그렇게 황충을 비웃었다. 장합이 그런 하후덕을 한 번 더 말렸다.
“그래도 가볍게 맞서서는 아니 되오. 굳게 지키는 게 제일 낫소 이다.”
하지만 한호는 달랐다. 황충이 왔다는 말에 눈이 뒤집힌 그는 전 날의 패전도 잊고 다시 나섰다.
“제게 날랜 병사 삼천만 빌려주시오. 당장 내려가 황충을 때려잡겠소!”
그렇게 하후덕에게 청하자 하후덕은 두말 않고 군사 삼천을 떼어주었다.
한호가 군사를 이끌고 산을 내려오는 걸 보고 황충은 군사들을 정돈해 맞을 채비를 했다. 유봉이 걱정스레 말했다.
“이미 해가 서쪽으로 기운 데다 군사들은 또 먼 길을 달려온 뒤라 매우 지쳐 있습니다. 잠시 쉬었다가 싸우도록 하시지요.”
그러나 황충은 이번에도 듣지 않았다.
“무슨 소리. 이거야말로 하늘이 내게 큰 공를 세울 기회를 주신 것이오. 그걸 마다하는 것은 바로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 되오.”
그렇게 말하고는 북을 치고 함성을 울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형을 죽인 원수만 생각하고 제 힘은 잊은 한호가 곧 군사들을 이끌고 산밑에 이르렀다. 황충은 똑바로 말을 몰아 그런 한호를 덮쳤 다. 한호는 원래 황충의 적수가 아니었다. 겨우 한 번 부딪쳤는데 느새 한호의 목은 말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황충이 한칼에 적장을 베어버리자 그걸 본 촉군의 기세는 드높았 다. 연일 달려온 피곤함도 잊고 함성과 함께 산 위로 치달았다. 장합 과 하후상이 놀라 그들을 막으려고 군사를 이끌고 나왔다.
하지만 막아야 할 것은 황충뿐만이 아니었다. 갑자기 산 뒤에서 크게 함성이 일며 하늘을 찌르는 듯한 불꽃이 치솟더니 곧 산 아래 위를 온통 불바다로 만들었다. 황충이 미리 보냈던 엄안이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제서야 놀란 하후덕이 허둥지둥 군사들을 몰아 불을 끄러 나섰 다가 엄안과 정통으로 맞닥뜨렸다. 늙은 엄안이 벼락 같은 호통과 함께 한칼을 내리치는가 싶자 벌써 하후덕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 다. 엄안이 누구인지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토막 난 시체가 되 어 말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황충이 시키는 대로 먼저 천탕산으로 와 으슥한 곳에 숨어 있던 엄안은 황충이 이르자마자 미리 준비했던 마른 풀과 나뭇가지 더미 에 불을 질렀다. 그리고 그 불이 산 아래위로 옮아 붙어 적이 당황해 하는 틈을 타 불쑥 나타나 한칼에 적장을 베어버렸던 것이다.
하후덕을 죽인 엄안이 기세를 몰아 산 뒤편에서 쏟아져 나오고, 다시 앞에서는 황충이 밀고 올라오자 장합과 하후상은 버틸래야 버 틸 수가 없었다. 그대로 천탕산을 버리고 정군산에 있는 하후연에게로 한목숨 건져 달아나는 게 고작이었다.
황충과 엄안은 천탕산을 뺏은 뒤 방비를 엄히 하는 한편 사람을 급히 성도로 보내 유비에게 그 소식을 전했다. 유비는 여러 장수들 을 불러모아 그 일을 알리고 함께 기뻐해 마지않았다. 법정이 나와 권했다.
“전에 조조가 장로의 항복을 받고 한중을 뺏었을 때 그 여세를 몰 아 파촉까지 휩쓸지 않은 것은 큰 실수였습니다. 그는 하후연과 장 합 두 장수를 남겨 한중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대군을 이끌고 북쪽 으로 돌아가는 잘못을 저지른 것입니다. 이제 장합이 다시 싸움에 지고 천탕산을 잃었으니 주공께서는 이 틈을 타 대군을 거느리고 몸 소 치시면 한중을 평정할 길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다음에 더욱 군 사를 조련하고 곡식을 쌓는다면 나아가서는 역적을 칠 수 있고, 물 러나서는 지키기가 쉽습니다. 이것은 하늘이 주시는 기회이니 잃어 서는 아니 됩니다.”
유비와 공명도 그 말을 옳게 여겼다. 곧 영을 내려 조운과 장비를 선봉으로 삼은 뒤 유비와 공명이 함께 십만 대병을 이끌고 나가 한 중을 치기로 했다. 때는 건안 이십삼년 초가을 칠월이었다. 길일을 골라 성도를 떠난 유비는 가맹관에 이르러 황충, 엄안에게 후한 상 을 내리며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장군들이 늙었음을 걱정했으나 오직 군사만 이 장군들의 능력을 알아주셨소. 이제 과연 뛰어난 공을 세우셨구 려. 하지만 아직 적이 지키고 있는 정군산과 남정은 적의 군량과 마 초가 쌓여 있는 곳이오. 만약 그곳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걱정이 없을 터인즉 장군들은 한 번 더 나아가셔서 정군산을 뺏어보지 않으시겠소?”
“그리 해보겠습니다.”
황충이 얼른 그렇게 대답하고 군사를 몰아 나가려 했다. 공명이 그런 황충을 잡으며 말했다.
“노장군께서 비록 영스러우나 하후연은 장합의 무리에게 견줄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하후연은 육도삼략에 깊이 통했고, 군 사를 움직일 기틀을 잘 분간할 줄 압니다. 그 때문에 조조는 전에 서 량이 시끄러울 때는 그를 장안으로 보내 마초와 맞서게 했고, 이제 는 또 한중을 맡겼던 것입니다. 조조가 다른 사람을 제쳐놓고 유독 하후연을 믿은 것은 그 장수로서의 재질이 남다른 까닭입니다. 장군 께서도 장합은 쉽게 이기셨지만 하후연은 그렇지 못할 것입니다. 내 가 생각하기에는 한 사람을 형주로 보내 관운장을 대신하게 하고, 그를 불러 보내는 게 좋겠습니다.”
다시 한번 황충을 분기시키려는 속셈이었으나 황충은 어김없이 걸려들었다.
“옛날에 염파(廉頻)는 나이 여든이었으나 여전히 한 말 밥에 열 근 고기를 먹었으며 제후들은 그 용맹이 두려워 감히 조나라를 넘보 지 못했습니다. 이 몸은 아직 일흔도 차지 않았는데 안 될 게 무엇이 겠습니까? 군사께서는 이 몸을 늙었다 하시나 이번에는 부장도 거 느리지 않고 이끌고 있는 삼천만 데리고 가서 하후연을 목 베다 바 치겠습니다.”
그렇게 분명히 소리치며 당장 내달으려 했다. 공명이 그런 황충을 붙들고 차분하게 말했다.
“장군께서 또 가시겠다면 법정을 데리고 가십시오. 모든 일을 그와 의논하여 하신다면 잘 풀릴 것입니다. 나도 곧 인마를 끌고 뒤따 르겠습니다.”
그러자 황충은 그렇게라도 공명이 자신을 인정해준 걸 고맙게 여 기며 법정과 함께 떠났다. 황충이 떠나자마자 공명이 다시 유비를 보고 말했다.
“이번에는 황충도 감정이 격해 큰소리를 앞세웠습니다. 비록 가기 는 갔으나 공을 세우기는 어려울 것이니, 반드시 따로 인마를 뽑아 먼저 보내 그를 돕도록 해야 됩니다.”
그러고는 조운을 불러 영을 내렸다.
“그대는 한 떼의 군마를 이끌고 샛길로 나가 황충을 도우라. 적이 뜻하지 않을 때 군사를 내어 그 어려움을 풀어주어야 한다.”
뿐만 아니었다. 공명은 또 유봉과 맹달을 불러 영을 내렸다.
“삼천 군마를 이끌고 그 부근 산속 험한 곳으로 가서 기치를 많이 세워두도록 하라. 되도록 우리 군사가 많은 것처럼 꾸며 적이 놀라 고 의심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에 세 사람은 각기 그대로 따랐다.
공명은 다시 사람을 뽑아 하판에 보내 마초에게 이리이리 하라는 계책을 일러주었다. 또 엄안에게는 파서와 낭중을 맡겨 그곳의 험한 길목을 지키게 하고 장비와 위연을 불러들여 함께 한중을 뺏으러 나 섰다. 한편 황충에게 쫓겨간 장합과 하후상은 정군산의 하후연을 찾 아보고 말했다.
“천탕산은 이미 적군의 손에 들어가고 하후덕과 한호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거기다가 이제 듣자 하니 유비가 몸소 한중을 뺏으러 나섰다고 합니다. 되도록이면 빨리 위왕께 알려 날랜 군사와 용맹한 장수를 보내주시도록 청하십시오. 앞일에 대비한 계책을 세워 거세 게 밀려오는 적을 막으셔야 합니다.”
하후연도 듣고 보니 사태가 심상치 않았다. 먼저 사람을 뽑아 조 홍에게 급한 사정을 알렸다.
조홍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허도로 달려가 조조를 찾아보고 하후 연에게서 들은 말을 전했다. 조조는 깜짝 놀랐다. 급히 문무 벼슬아 치들을 모아놓고 한중으로 군사 낼 일을 의논했다. 유엽이 먼저 일 어나 말했다.
“만약 한중을 잃으면 중원까지 놀라 떨게 될 것입니다. 대왕께서 는 반드시 몸소 나가시어 정벌하셔야 합니다.”
조조가 생각해도 그밖에는 달리 도리가 없었다. 그제서야 스스로 후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경의 말을 듣지 않아 일이 이 지경에 이르게 했으니 실로 한스럽구려!”
그리고 급히 영을 내려 사십만 대병을 일으키고 스스로 나가 싸 우기로 했다. 때는 건안 이십삼년 가을이었다.
조조는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나아가는데, 전부 선봉은 하후돈이 요, 자신은 중군을 거느렸으며, 조휴에게는 뒤를 맡게 했다. 사십만 대군이 한꺼번에 나아가니 꼬리에 꼬리를 물어도 끝이 없었다.
흰 말에 금으로 만든 안장을 얹고 올라탄 조조의 모습은 참으로 볼만했다.
비단옷에 옥띠를 두르고 앞뒤에는 무사들이 천자의 위엄에 못지 않은 의장으로 조조를 둘러쌌다. 붉은 비단에 금줄 늘인 일산(日傘) 이며, 금조, 금칠한 손톱 같은 의장용 갈퀴), 은월(銀鉞, 은칠한 붉은 자루 나무도끼), 등봉(棒)과 과모(矛)가 그러했고 하늘을 찌를 듯 한 용봉(龍鳳)의 기치가 그러했다. 조조의 수레를 지키는 군사만도 이만 오천인데, 오천씩 다섯 대로 나누어, 청, 홍, 백, 적, 흑 다섯 가 지 색으로 구별했다. 각기 깃발뿐만 아니라 갑옷이며 말까지 그가 속 한빛깔로 휘감고 있어, 모든 게 눈부시고 씩씩해 보였다.
군사가 동관 가까이 이르렀을 때 조조는 말 위에서 저만치 떨어 진 곳에 있는 숲을 보고 물었다.
“여기가 어디냐?”
“남전이란 곳입니다. 저 숲 안에는 채의 집이 있는데, 지금은 그 의 딸 채염이 남편 동사(祀)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조조는 자못 감회가 깊었다. 원래 조조는 채옹과 서 로 친했다. 그가 동탁의 시체 앞에서 운 죄로 왕윤에게 죽음을 당한 뒤 그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그 딸 채염은 일찍이 위도개(衛道玠 란 사람에게 시집을 갔으나 뒷날 오랑캐에 붙들려 그 땅에 끌려가 살게 되었다.
채염은 거기서 두 자식까지 두고 살다가 「호가십팔박(胡 拍)」을 지었는데, 아비의 재주를 이었는지 노래가 매우 애절했다. 그 노래가 중원으로 흘러 들어와 그걸 들은 조조가 그녀를 가엾게 여기고 많은 돈을 들여 사들이게 하자 오랑캐의 좌현왕(王)은 조조의 위세를 두려워하여 채염을 다시 한으로 돌려보내주었다.
이에 조조는 그녀를 동사와 짝지어준 적이 있는데 그녀가 바로 남전에 살고 있었다.
조조는 군사들을 앞서 보내고 자신은 백여기만 이끌고 장원 앞 에서 말을 내렸다. 이때 동사는 밖으로 벼슬살이 나가고 집 안에는 채염만이 있었다. 채염은 조조가 왔다는 소리를 듣자 황망히 문 밖 으로 나와 맞아들였다.
조조가 당에 오르자 채염은 조조의 기거(起)를 물은 뒤 곁에 모 시고 섰다. 자리를 잡고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조조의 눈에 문득 벽에 걸린 비문이 들어왔다.
“저게 무어냐?”
조조가 그걸 읽어보고 물었다. 채염이 대답했다.
“저것은 조아(曹娥)의 비(碑)에 있는 구절입니다. 지난날 화제(和 帝) 때 상우 땅에 조간이라는 무당이 하나 있었는데, 특히 사바악신 (娑婆樂神, 굿 이름인 듯)에 능하였습니다. 어느 해 단오날 에 술에 취 해 배 위에서 춤을 추다가 강물에 떨어져 죽자 그의 열네 살 된 딸 이 물가를 오르내리며 이레나 울다가 마침내는 그녀도 뛰어들어 죽 었다 합니다. 그리고 닷새 뒤에 그 아비를 등에 업은 채 다시 물 위 로 떠올라 동네 사람들이 신기하게 여기며 그들 부녀를 함께 강변에 장사 지내주었지요. 그때 상우의 현령 탁상(尙)은 그 일을 조정에 알려 그 딸을 효녀로 기리게 하고, 다시 함단순(邯鄲淳)이란 사람을 시켜 비문으로 그 일을 새겨두려 했습니다. 함단순은 그때 겨우 열 세 살이었는데, 점 하나 더할 것 없이 붓 한번 들어 비문을 다 지으니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 재주에 놀랐다고 합니다. 저의 선친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 보러 가셨으나 마침 날이 저물어 비문을 읽으시지 못하고 어둠 속에 손으로 더듬어 읽으신 뒤 붓을 찾아 그 비석 뒤에 큰 글씨 여덟 자를 써두시고 오신 적이 있습니다. 뒷사람들이 그 여 덟 자마저 비문에 새겨 오늘날까지 그대로 있다 하는데, 저기 있는 족자가 바로 그 글귀를 그대로 떠온 것입니다.”
조조는 그 말을 듣고 다시 한번 그 글귀를 바라보았다. ‘황견유부 (黃絹幼婦) 외손제구(外孫)’ 여덟 자였는데 무슨 뜻인지 얼른 알 수가 없었다.
“너는 저 글귀가 무슨 뜻인지 아느냐?”
조조가 궁금한 나머지 그렇게 물었다. 채염이 부끄러운 듯 대답
했다.
“돌아가신 분의 글이라 간수해두고는 있어도 그 뜻은 잘 모릅니다.” 그러자 조조가 뒤따라온 모사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대들은 저 글귀를 풀 수 있겠는가?”
“제가 이미 그 뜻을 알았습니다.”
조조가 묻기 바쁘게 한 사람이 나서며 그렇게 대답했다. 조조가 보니 주부 양수였다. 조조가 잠깐 무엇을 생각하다 양수에게 말했다.
“경은 잠시 말하지 말라. 나도 한번 생각해봐야겠다.”
그런 다음 조조는 서둘러 채염과 작별하고 여럿과 함께 그 집을 나섰다. 말 위에 오른 조조가 한 삼 마장쯤 갔을까 문득 무엇을 깨우 쳤는지 빙긋이 웃으며 양수에게 말했다.
“이제 그 여덟 자가 뜻하는 바를 알겠다. 그럼 경이 먼저 말해보라.”
양수가 기다렸다는 듯 풀어나갔다.
“그것은 일부러 뜻을 감춰 적은 글입니다. 먼저 황견(黃絹)을 풀이 하면, 황견은 얼굴빛이 나는 실[絲]로 짠 비단입니다. 결국 실[]에 색깔[色]이 있으니 합치면 ‘절(絶)’이 됩니다. 또 유부(幼婦)는 나이 어린[] 여자[]이니 둘을 합치면 ‘묘(妙)’가 되지요. 따라서 황견 유부는 ‘절묘(妙)’하다는 뜻을 감춰 쓴 글입니다. 외손제구도 마찬 가지로 풀이하면, 외손은 딸[]이 낳은 아들[]이니 합쳐 ‘호)’ 가 되고, 제구는 다섯 가지 맵고 신 것을 담는 그릇이니 담을 수受) 자에 매울 신(辛)을 더하면 ‘사’자가 됩니다. 곧 외손제는 ‘호 사(好)’가 됩니다. 다 합쳐 풀이하면, 결국 절묘호사(絶妙好辭), 다 시 말해 썩 잘 지은 글이란 뜻이지요.”
조조는 양수가 어김없이 알아맞히자 몹시 놀라는 눈치였다.
“나도 바로 그렇게 보았지만 좀 전에야 겨우 깨달았는데 경은 한 눈에 알아보았으니 참으로 놀랍구나.”
그렇게 칭찬을 하면서도 속으로는 그 지나친 총명함이 은근히 언 짢았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한결같이 양수의 재주와 지식을 놀라 워하고 부럽게 여겨 마지않았다.
남전을 지나고 채 하루도 안 돼 조조의 대군은 남정에 이르렀다. 조홍은 조조를 맞아들이고 장합이 그간에 한 잘못을 낱낱이 조조에 게 일러바쳤다. 듣고 난 조조가 가만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것은 장합의 죄가 아니다. 이기고 지는 것은 싸움하는 장수에 게 매양 있는 일이 아니겠느냐.”
그러자 조홍은 다시 하후연을 나무라기 시작했다.
“지금 유비는 황충을 시켜 정군산을 두들겨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후연은 대왕의 군사들이 오신 걸 알고도 나가 싸우지 않고 굳게 지키기만 하니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그건 좀 좋지 않구나. 만약 나가 싸우지 않으면 두려워하고 있음 을 적에게 보이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조조는 그렇게 대꾸하고 곧 사람을 하후연에게 보내 나가 싸울 것을 재촉했다. 유엽이 그런 조조에게 걱정스런 얼굴로 말했다.
“하후연은 성미가 매우 곧고 거세 적의 계책에 말려들까 두렵습니다.”
그러자 조조는 몸소 글을 써서 사자에게 주어 보냈다. 하후연이 받아 뜯어보니 대강 이렇게 씌어 있었다.
‘무릇 장수 된 사람은 굳셈과 부드러움을 함께 갖춰 서로 도움이 되도록 해야 한다. 지나치게 용맹만 믿지 말라. 용맹만 믿는다면 이 는 한낱 이름 없는 자나 싸워 이길 수 있을 뿐이다.
나는 지금 대군과 더불어 남정에 이르러 있거니와, 여기서 먼저 그대의 묘재, 묘한 재주란 뜻임과 아울러 하후연의 자)를 구경하고자 한다. 부디 욕됨이 없게 하라.’
그걸 읽은 하후연은 몹시 흐뭇했다. 조조가 그토록 자신을 남달리 여기고 아껴주는 데 감격해 사자를 돌려보내기 무섭게 싸움을 서둘 렀다. 은연중에 싸움을 말려온 장합을 불러놓고 씩씩하게 말했다.
“지금 위왕께서는 대병을 이끌고 남정에 이르러 계시오. 크게 유비를 쳐 없애실 뜻인 것 같소. 그런데 우리는 오랫동안 들어앉아 지키고만 있으니 어찌 큰 공을 세울 수 있겠소? 나는 내일 싸우러 나 갈 것이오. 힘써 싸워 반드시 황충을 사로잡고야 말겠소!”
그러나 장합은 전과 다름없이 말렸다.
“황충은 꾀와 힘이 갖춰진 장수인 데다 법정까지 곁에서 돕고 있 으니 가볍게 맞서서는 아니 됩니다. 거기다가 이곳은 산길까지 험하 기 그지없으니 굳게 지키는 게 마땅합니다.”
“만약 딴 사람이 나서서 공을 세우면 장군과 나는 무슨 낯으로 위 왕을 보겠소? 정히 마음 내키지 않는다면 그대는 남아 이곳을 지키 시오. 나는 나가서 싸워야겠소.”
하후연은 그렇게 우기며 그대로 싸울 채비를 서둘렀다. 장합의 대 꾸를 듣지도 않고 바로 좌우를 돌아보며 물었다.
“누가 앞서 나가 적을 한번 꾀어보겠느냐?”
하후상이 얼른 나서 아재비의 기를 돋우어주었다. 그러자 하후연 은 반가운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
“네가 앞서가 살피다가 황충과 싸우되, 거짓으로 져줄지언정 약함 을 보이지는 말라. 내게 계책이 있으니 다만 그대로 따르면 된다.”
그러고는 그 계책을 일러준 뒤 하후상에게 군사 삼천을 주어 먼 저 정군산의 큰 진채에서 떠나게 했다.
이때 황충은 법정과 더불어 정군산 입구에 진을 치고 있었다. 여 러 번 싸움을 걸어도 하후연이 굳게 지킬 뿐 나오지 않아 쳐들어가 려 했으나 그 또한 쉽지 않았다. 산속으로 드는 길이 거칠고 험해 가 로막는 적을 물리치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래서 그 또한 하는 수 없이 굳게 지키고만 있는데 홀연 군사 하나가 달려와 알렸다.
“적이 산을 내려와 싸움을 걸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황충은 얼른 군사를 이끌고 싸우러 나갈 채비를 했 다. 아장 진식(式)이 나서서 말했다.
“장군께서는 그냥 계십시오. 제가 나가서 한번 맞서보겠습니다.” 진식은 뒷날 정사 『삼국지』를 쓴 진수의 아비 되는 사람이다. 그 런 대로 장수감이 되었던지 황충은 기꺼이 그 청을 받아주었다. 군 사 일천을 떼어주며 골짜기 입구로 가서 진을 벌이고 산을 내려오는 적을 맞게 했다.
이윽고 하후상이 그곳에 이르자 곧 양군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 하후상은 진식과 맞붙은 지 얼마 안 돼 짐짓 싸움에 진양 되돌아서 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진식은 신이 나서 그런 하후상을 뒤쫓았다. 그러나 얼마 가기도 전에 산길 양편에서 바위와 통나무가 굴러떨어져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그제서야 진식이 속은 걸 알고 돌아서려 했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갑자기 진식의 등 뒤에서 하후연이 나타나더니 못 당할 줄 알고 달아나는 진식을 냉큼 사로잡아버렸다. 그 통에 진식을 따라갔던 군 사들도 모조리 항복해버렸지만, 개중에도 용케 몸을 빼낸 자가 있었 다. 숨이 턱에 닿도록 황충에게 달려가 진식이 사로잡힌 것을 알렸다. 놀란 황충이 법정을 불러놓고 의논했다. 법정이 가만히 생각하다 계책을 냈다.
“하후연은 사람됨이 가볍고 성질이 급한 데다 용맹을 지나치게 믿고 지모가 적습니다. 사졸들의 힘을 북돋운 후에 진채를 거두고 전진하도록 하시지요. 사졸들이 서서 걷는 게 곧 진채를 이루도록 하여 하후연을 꾀어내면 그를 사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바 로 반객위주책(反客爲主策, 손님이 오히려 주인이 되는 계책)입니다.”
황충은 그 계책을 옳게 들었다. 곧 진중에 있는 값진 것들을 모두 내어 삼군에게 두루 상을 내리고 사기를 돋워주니 곧 골짜기는 죽기 로 싸우겠다는 군사들의 함성으로 가득 찼다. 황충은 그날로 진채를 거두고 군사를 몰아 앞으로 나아갔다. 조금씩 나아가다 서고 또 나 아가는 식으로 며칠이 되자 그 소문을 들은 하후연은 가만있지 못 했다.
“안 되겠소. 아무래도 내가 나가 싸워야겠소.”
하후연이 그렇게 나서자 장합이 또 말렸다.
“저것은 바로 손님이 주인을 내쫓는 계책입니다. 나가서 싸워서는 아니 됩니다. 싸우면 반드시 지게 되니 이대로 굳게 지키도록 하십 시오.”
그래도 하후연은 듣지 않고 먼저 하후상에게 수천 군사를 주어 똑바로 황충의 진채를 들이치게 했다. 황충이 칼을 빼들고 말에 올 라 하후상을 맞았다. 하지만 싸움이라기보다는 나꿔챔이라는 편이 옳았다. 두 필의 말이 스치는가 싶더니 어느새 하후상은 황충에게 사로잡혀 있었다.
쫓겨간 군사들이 급히 그 일을 하후연에게 알렸다. 하후연은 조카 하후상이 적에게 사로잡혔다는 말을 듣자 깜짝 놀랐다. 얼른 황충에 게 사람을 보내 전하게 했다.
“그대들의 아장 진식이 여기 사로잡혀 있으니, 내일 진채 앞에서 그와 하후상을 바꾸도록 하자.”
황충도 그걸 마다할 리 없었다. 곧 하후연에게 응낙의 말을 전했다.
다음 날 양군은 모두 산골짜기 입구의 널찍한 곳에 진세를 벌이 고 마주섰다.
황충과 하후연은 각기 말에 올라 자기편 문기 앞에 서 있는데, 황 충 곁에는 하후상이, 그리고 하후연 곁에는 진식이 갑옷 투구도 없 이 얇은 옷만 걸치고 끌려나와 있었다.
북소리가 한 번 크게 울리며 진식과 하후상은 각기 자기편 진채 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하후상이 자기편 진문에 이를 즈음, 황충이 날린 화살 한 대가 등판에 꽂혔다. 진식을 성하게 보내주었 는데, 하후상은 화살을 맞고 돌아오자 하후연은 크게 노했다. 곧 말 을 박차 황충에게 덤벼들었다.
황충도 기다렸다는 듯 말을 박차고 달려 나와 한바탕 볼만한 싸 움이 어우러졌다. 둘의 싸움이 스무 합을 넘어 한창 불꽃을 튀기고 있을 때 홀연 조조군의 등 뒤에서 군사를 거두는 북소리와 징소리가 요란했다.
그 소리를 들은 하후연이 놀라 말 머리를 돌리자 황충이 기세를 타고 덮쳤다. 그 바람에 하후연은 한바탕 싸움에 지고 자기 진채로 쫓겨 돌아갔다.
“무엇 때문에 북과 징을 울렸는가?”
겨우 숨을 돌린 하후연이 진채를 맡아 지키던 장수에게 물었다.
그 장수가 대답했다.
“산속 우묵한 곳에 촉병들의 깃발이 몇 군데 보였습니다. 그게 복병인 것 같아 급하게 장군을 불러들인 것입니다.”
하후연도 돌아와서 생각해보니 자신이 아무래도 가볍게 싸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날부터 다시 나와 싸울 생각도 않고 굳게 지키기 만 했다.
그럭저럭 나아간 황충은 마침내 정군산 바로 아래 이르렀다. 하지 만 하후연이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자 걱정이 되어 법정을 잡고 물 었다.
“이제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러자 법정이 손을 들어 한곳을 가리기며 말했다.
“정군산 서쪽에 산 하나가 높이 우뚝 솟아 있는데 사방이 모두 험 한 길로 되어 있습니다. 저 산에 올라가면 정군산을 내려볼 수 있어 그 허실을 살필 수 있지요. 만약 장군께서 저 산을 뺏을 수 있다면 정군산은 손바닥 안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황충도 눈을 들어 살펴보니 그 산꼭대기는 평평한데 많지 않은 군마가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한번 해보지요.”
황충은 그렇게 말하고 어둡기를 기다렸다.
그날 밤 이경 무렵, 황충은 많은 군사를 이끌고 북과 징을 울리며 똑바로 산꼭대기를 향해 몰려갔다. 그 산을 지키고 있었던 것은 하 후연의 부장 두습(杜)이었다. 겨우 백여 명을 데리고 지키다가 황 충이 큰 군사를 이끌고 쳐 올라오자 놀라 산을 버리고 달아났다. 황충이 그 산꼭대기를 뺏고 보니 정말로 정군산이 훤히 바라보였다. 법정이 다시 계책을 일러주었다.
“장군은 산 중턱에 계시면서 지키십시오. 저는 산꼭대기에 있겠습 니다. 하후연의 군사가 와도 제가 흰 깃발을 흔들 때는 군사를 움직 여선 아니 됩니다. 그쪽이 마음이 풀어져 대비가 없을 때를 기다렸다 가 제가 붉은 기를 올리거든 그때 얼른 산을 내려가 적을 치십시오. 편히 쉬면서 적이 지치기를 기다린 것이니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황충은 매우 기뻐하며 그대로 따랐다.
한편 두습은 졸개들과 함께 하후연에게로 쫓겨 돌아가 그 산을 황충에게 뺏긴 일을 알렸다.
“황충이 이미 그 산을 차지했다면 내가 아니 나가 싸울 수가 없 다. 모두 싸우러 나갈 채비를 하라!”
하후연이 성나 그렇게 소리쳤다. 장합이 그런 하후연을 다시 말렸다.
“이것은 틀림없이 법정의 꾀입니다. 장군께서는 결코 나가셔서는 아니 됩니다. 굳게 지키기만 하십시오.”
그러자 하후연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적이 그 산을 차지하고 우리의 허실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어찌 나가 싸우지 않는단 말인가?”
장합은 그래도 거듭거듭 하후연을 말렸으나 끝내 소용이 없었다. 하후연은 군사를 나누어 그 산을 에워싸게 하고 함성을 올려 싸움을 돋우었다. 그러나 산 위의 법정은 흰 기를 세우고 하후연이 아무리 욕설을 해도 꿈적도 않았다. 황충도 흰 기를 보고는 미리 정한 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한나절이 지나도록 싸움을 걸어도 받아주지 않자 하후연의 군사들은 차차 마음이 풀어지기 시작했다. 대오가 흐트러지고 더러는 말 에서 내려 땅바닥에 퍼질러 쉬기도 했다.
그걸 본 법정이 문득 흰 깃발을 내리고 붉은기를 높이 올렸다. 북 소리 피리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함성이 일며 촉병이 물밀 듯 산아 래로 쏟아졌다. 그들 맨 앞에서 흰 수염을 휘날리며 닫는 것은 황충 이었다. 화살처럼 말을 몰아 산을 내려오는데 그 기세는 마치 하늘 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것 같았다.
워낙 급작스런 일이라 하후연은 뻔히 보면서도 손쓸 틈이 없었다. 어떻게 군사들을 수습해보려는데 어느새 해가리개 아래 이른 황충 이 한 소리 벽력 같은 외침과 함께 덤벼들었다. 하후연이 급히 그를 맞아보려 했지만 황충의 칼이 더 빨랐다. 칼도 제대로 뽑아보지 못 하고 머리에서 어깨에 걸쳐 황충의 칼을 받은 하후연은 그대로 두 토막이 나 숨을 거두었다.
되돌아보면 참으로 허망한 최후였다. 삼십여 년 전 조조를 따라 처음 의군에 가담한 이래 하후연은 그의 손발처럼 싸워왔다. 장수 중에는 맹장이요, 신하 중에는 원훈(元勳)인 하후연이었는데 그때까 지만 해도 별 이름이 없던 늙은 황충에게 어이없게 목을 바친 꼴이 었다.
하후연을 죽인 황충은 그 기세를 타고 조조의 군사들을 모두 흩 어버린 뒤에 정군산을 뺏어버렸다. 장합이 맞서보았으나 황충만 해 도 무서운데 진식까지 나타나 거드니 견딜 수가 없었다. 별수 없이 목숨을 건져 달아나기 바빴다.
쫓기던 장합이 한군데 산굽이를 돌았을 때였다. 갑자기 한 떼의 군마가 쏟아져 나와 길을 막으며 앞선 장수가 크게 소리쳤다.
“이놈들 어디로 가려느냐? 상산의 조자룡이 여기 있다!”
놀란 장합은 졸개들을 이끌고 정군산을 향해 돌아섰다. 그러나 몇발 달아나기도 전에 다시 앞에 한 떼의 군마가 나타났다.
장합은 이제 죽었다 싶었다. 어찌할 줄 몰라 허둥대다 알아보니 다행히도 그것은 자기편 두습이 이끄는 군마였다.
“정군산으로 가셔서는 아니 됩니다. 그곳은 이미 유봉과 맹달에게 빼앗겼습니다.”
두습이 장합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장합은 기가 막혔다. 하는 수 없이 남은 졸개들을 이끌고 한수가로 물러나 진채를 얽는 한편 조조 에게 그 급한 소식을 알렸다.
조조는 하후연이 죽었다는 말을 듣자 목을 놓아 울었다. 하후연이 생가 쪽으로의 피붙이라는 말도 있으나, 그게 아니라도 조조가 슬퍼 하고 분해한 까닭은 수없이 많았다. 어릴 적부터의 벗이요, 젊어서 의 동지이며, 뒷날 뜻을 이룬 뒤에는 더할 나위 없이 미더운 충신으 로서, 하후연은 일생을 조조를 위해 몸과 마음을 다한 사람이었다. 팔다리를 잃은 사람처럼 괴로워하고 슬퍼하던 조조는 그제서야 지난날 관로가 뽑았던 점괘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맨 첫째 글 귀 삼팔종횡三八縱橫)은 삼팔 이십사로 그해 건안 이십사년을 말한 것이요, 황저우호(黃猪遇虎)의 누른 돼지가 호랑이를 만났다는 뜻은 그해 기해년(己亥年) 곧 돼지해에 그 달 인월(月) 곧 호랑이 달로 하후연이 죽은 날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또 정군지남(定軍之南)은 정군산 남쪽 곧 하후연이 죽은 땅이며 상절일고(傷一股)는 하후연의 죽음이 조조에게 주는 의미임에 틀림없었다.
“건안 이십사년 기해 정월에 정군산 남쪽에서 한 팔이 꺾인다.”
그 얼마나 어김없는 관로의 예측인가. 조조는 슬픈 중에도 그 놀 라운 점술에 감복하여 관로를 찾아보게 했다. 그러나 그때 이미 관 로는 어디로 갔는지 찾을 길이 없었다.
“크게 군사를 일으키라. 내 친히 정군산으로 가서 황충을 죽이고 하후연의 원수를 갚으리라!”
하후연의 장례가 끝나자 조조는 이를 갈며 그런 영을 내렸다. 그 리고 대군이 모이기 바쁘게 서황을 선봉으로 삼아 몸소 한중으로 나 아갔다.
조조가 한수에 이르니 거기까지 밀려 있던 장합과 두습이 울며 맞아들였다. 조조가 그런 둘을 차갑게 훑어보며 물었다.
“적의 형세는 어떤가?”
“이미 정군산을 적에게 잃었으니 군량과 마초가 걱정됩니다. 미창 산에 있는 군량과 마초를 북산의 진채로 옮겨 쌓은 뒤에 군사를 내 도록 하십시오.”
한번 군량과 마초를 잃어본 두 사람이 그렇게 권해 올렸다. 조조 도 그 말을 옳게 여겼다. 곧 미창산의 군량과 마초를 모두 북산으로 옮기게 했다.
한편 하후연을 목 벤 황충은 가맹관으로 돌아가 유비를 찾아보고 공을 아뢰었다. 유비는 크게 기뻐하며 황충을 정서대장군으로 삼음과 아울러 크게 잔치를 열어 그 공을 기렸다.
한창 잔치가 무르익어 가는데 장저가 달려와 알렸다.
“조조가 스스로 이십만 대군을 이끌고 하후연의 원수를 갚아주러 왔다고 합니다. 지금 장합은 미창산의 낱알이며 말먹이 풀을 한수 북쪽에 있는 산 발치에 옮겨 쌓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공명이 유비를 올려보며 조용히 말했다.
“조조가 이십만 대병을 데리고 왔으나 곡식과 마초가 모자랄까 걱정이 되는 모양입니다. 그 때문에 잠시 군사들을 묶어두고 곡식과 마초부터 옮기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지금 한 사람을 적진 깊숙이 보내 그 곡식과 마초를 태워버린다면 조조의 날카로운 기세를 꺾어 놓을 수 있습니다.”
“이 늙은이가 한번 가서 해보겠습니다.”
황충이 다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공명이 그런 황충에게 깨우쳐주듯 말했다.
“조조는 하후연과 견줄 사람이 아니오. 실로 가볍게 맞서서는 안 될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