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9권 – 9화 : 맹획은 드디어 꺾이고 공명은 성도로
맹획은 드디어 꺾이고 공명은 성도로
공명은 먼저 마대를 불러 영을 내렸다.
“그대는 검은 기름칠한 상자가 실린 수레 열 대를 끌고 가되 대나 무 줄기 천 개를 따로이 마련하라. 그래서 그 궤안에 든 것과 대나무 통으로 내가 이제부터 시키는 대로 하라.”
공명은 그렇게 말하고 한동안 마대만 알아듣게 귓속말을 한 뒤 다시 소리를 높였다.
“그대가 이끈 군사들로 반사곡 양 입구를 막고 다른 사람들이 모 르게 해야 한다. 보름 말미를 줄 것이니 반드시 그 안에 모든 채비를 끝내도록 하라. 만약 조금이라도 소홀함이 있으면 마땅히 군법으로 다스릴 것이다.”
마대가 군령을 받고 나가자 공명은 다시 조운을 불렀다.
“장군은 반사곡 뒤 삼강성으로 가는 큰길 입새를 지키도록. 거기 소용되는 물건은 오늘 안으로 모두 갖추어야 하오.”
그리고 다시 위연을 불렀다.
“그대는 수하의 군사들을 데리고 도화 나루터 아래 있는 진채로 가라. 적군이 강물을 건너 치고 들면 진채를 버리고 달아나되 반드 시 흰 깃발이 보이는 곳으로 달아나야 한다. 보름 동안에 열다섯 싸 움을 모두 져주고 일곱 군데 진채를 적에게 내주도록. 그리고 열네 번째로 질 때까지는 나를 보러 오지 말라.”
위연은 그런 명을 받자 마음이 즐겁지 아니했다. 한 번도 아니고 열다섯 번씩이나 싸움에 져야 하는 게 하도 기가 막혀 투덜거리며 물러났다.
공명은 또 장익을 불러 일렀다.
“그대는 한 떼 군마를 이끌고 가서 내가 말하는 곳에 든든한 진채 와 책(柵)을 얽도록 하라.”
장의와 마충도 따로이 군령을 받았다. 항복한 만병 수천 명을 데 리고 어떤 은밀한 일을 하라는 명이었다. 장수들은 모두 어리둥절했 지만 공명의 말이라 시키는 대로 각기 떠났다.
한편 맹획은 오과국 군사들이 첫 싸움에 이기고 돌아와도 영 마 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 임금 올돌골(兀突骨)에게 주의를 주었다.
“제갈량은 계교가 많은 자입니다. 매복을 잘하니 삼군에 분부를 내려 거기 대비케 하십시오. 앞으로 촉군과 싸우다가 산골짜기가 나 오고 나무와 숲이 짙으면 결코 가볍게 나아가서는 아니 됩니다.”
올돌골도 그렇게 앞뒤가 막힌 사람은 아니었다. 수긋하게 맹획의 말을 받아들였다.
“대왕의 말씀에도 일리가 있소. 나도 중국 사람들이 속임수가 많은 것은 잘 알고 있소이다. 대왕의 말씀대로 따르도록 하겠소. 앞으 로는 내가 앞장서서 쳐나가거든 대왕은 뒤에서 길을 일러주시오.”
그렇게 둘이서 의논을 맞추고 있는데 문득 졸개 하나가 들어와 알렸다.
“병들이 도화 나루터 북쪽에다 진채를 얽고 있습니다.”
그러자 올돌골은 곧 데려온 저희 장수[俘]들을 불러 명했다.
“너희들은 도화수를 건너 그 병을 쳐부숴라.”
명을 받은 두 오랑캐 장수는 곧 등갑군을 이끌고 도화수를 건넜다. 위연은 공명이 시킨 대로 몇 번 싸워보지도 않고 달아나기 시작 했다. 그러나 만병들은 매복이 있을까 두려워 뒤쫓지 못하고 저희 진채로 돌아가버렸다.
다음 날이 되었다. 만병들은 위연이 또 돌아와 진채를 얽고 있다 는 소식을 듣고 강물을 건너 덮쳤다. 위연은 마주 나와 싸우는 체했 으나 다시 몇 합 붙어보지도 않고 말 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약간 간이 커진 만병들은 이번에는 한 십 리쯤 뒤쫓아보았다. 복 병 같은 게 있는 것 같지는 않고 위연이 엮어둔 영채 하나가 있을 뿐이었다.
다음 날이 되었다. 두 오랑캐 장수는 저희 임금 올돌골에게 자신 들이 두 눈으로 본 걸 아뢰었다. 올돌골은 믿을 수가 없어 그날은 스 스로 군사를 이끌고 나가보았다.
위연은 올돌골과 한바탕 싸운 뒤 전날처럼 또 달아나기 시작했다.
촉병들도 갑옷과 창을 버리고 그 뒤를 따랐다. 위연이 한참 가다 보 니 정말로 흰 깃발이 저만큼 보였다. 급히 그 깃발 있는 데로 가보니 거기에는 영채가 하나가 얽어져 있었다. 위연은 다시 그곳에 자리 잡았다.
얼마 후 올돌골이 등갑군을 이끌고 거기까지 뒤쫓아왔다. 위연은 선뜻 그 새로운 진채마저 내어주고 군사들과 함께 또다시 달아났다. 다음 날이 되었다. 전날 촉군에게 진채 하나를 뺏어 기세가 오를 대로 오른 만병은 다시 촉군을 뒤쫓기 시작했다. 달아나던 위연이 되돌아서서 싸웠으나 역시 세 합을 넘기지 않았다. 져서 쫓기는 체 흰 깃발이 꽂힌 곳을 바라보며 달아났다.
한참을 가다 보니 또 새로운 진채 하나가 마련되어 있었다. 위연 은 그 진채로 군사들을 몰아넣고 하룻밤을 쉬었다. 다음 날 만병들 이 뒤따라 그 새로운 진채를 덮쳤다. 위연은 그들과 싸우는 체하다 가 또 진채를 버리고 달아났다. 만병들은 촉군에게 진채 하나를 더 뺏고 그날 싸움을 끝냈다.
그 뒤로 똑같은 일이 거듭 벌어졌다. 위연은 싸우다 달아나고, 달 아나 싸우는 식으로 내리 열다섯 번 싸움에 져주고 일곱 개의 진채 를 만병들에게 내주었다.
만병들은 점점 더 기세가 올랐다. 촉군을 뒤쫓아 밀물처럼 나아갔 다. 그들의 임금 올돌골도 신이 났다. 앞장서서 병을 무찌르며 나 아가다가 갑자기 숲이 무성하고 나무가 울창한 곳을 만났다.
올돌골은 복병이 있을까 두려워 함부로 나아가지 못하고 사람을 보내 멀리서 그곳을 살펴보게 했다. 짐작대로 숲과 나무그늘 여기저기 깃발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는 게 보였다.
올돌골이 새삼 함부로 뒤쫓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기며 맹획에게 말했다.
“정말로 대왕의 헤아림을 벗어나지 않는구려. 기세만 믿고 군사를 내몰았다면 참으로 큰일날 뻔했소이다.”
맹획이 그것 보라는 듯 껄껄 웃으며 그 말을 받았다.
“제갈량도 이번에는 우리에게 깨뜨려지게 되었소이다. 우리가 그 들의 잔꾀를 다 알고 있으니 무슨 수로 견뎌내겠소? 거기다가 대왕 은 잇달아 열다섯 번의 싸움에 이기고 일곱 개의 진채를 빼앗았습 니다. 병들은 바람에 쏠리는 듯 달아나고 제갈량도 그 계교가 다 한 것 같소. 이제 여기서 한 번만 더 밀어붙이면 결판이 날 것 같소 이다.”
그 말을 들은 올돌골은 어깨가 으쓱했다. 그때부터 더욱 촉군을 얕보게 되었다.
열여섯째 날이 밝았다. 위연은 숲속에 숨어 있기 답답하다는 듯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나와 싸움을 걸었다. 그런 싸움이라면 등갑군 이 마다할 리 없었다. 다시 한바탕 싸움이 벌어졌다.
올돌골은 코끼리를 타고 저희 등갑군의 선두에 섰다. 머리에는 해 와 달 모양의 장식이 달린 늑대 털가죽 모자를 쓰고 몸에는 금구슬 꿴 줄을 둘렀다. 양 겨드랑이에는 저절로 돋은 비늘이 갑옷처럼 번 쩍였고, 두 눈에서도 세찬 빛이 쏟아지는 듯했다.
그런 올돌골이 위연을 손가락질하며 꾸짖자 위연은 금세 겁먹은 얼굴이 되었다. 싸워보지도 않고 말 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올돌골은 등갑군을 휘몰아 그런 위연과 촉군을 뒤쫓았다.
위연은 군사들을 이끌고 반사곡을 돌아 흰 깃대가 세워져 있는 곳으로 달아났다. 올돌골은 졸개들을 휘몰아 그 뒤로 마음 놓고 쫓 았다. 산 위에 나무도 숲도 별로 없고 복병을 숨기기 어려움을 보고 더욱 마음을 놓은 것이다.
촉군은 드디어 반사곡 안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올돌골이 그 촉 군을 쫓아 반사곡 입구에 이르니 검은 칠한 상자가 실린 수레 수십 대가 버려져 있는 게 보였다.
“저게 무엇이냐?”
올돌골이 감깐 나아가기를 멈추고 곁에 있는 졸개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졸개들 가운데 하나가 아는 체 나서서 말했다.
“이 길은 촉병들이 군량을 운반하는 길입니다. 대왕의 군사가 밀 어닥치니 놀란 나머지 군량 실은 수레를 버리고 달아난 듯합니다.”
그 말을 들은 올돌골은 마음이 흐뭇했다. 이제 정말로 촉군은 몰 릴 대로 몰려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올돌골은 더욱 급하게 졸개들을 몰아 촉군을 뒤쫓게 했다.
그럭저럭 골짜기 입구를 지나고 앞이 훤히 트였다. 그러나 촉군은 어디로 갔는지 자취도 없고 통나무와 바윗덩어리만 어지러이 쏟아 져 골짜기 앞뒤를 막아버렸다.
“모두 길을 열고 앞으로 나아가라!”
올돌골은 그렇게 영을 내리고 스스로 앞장서서 달렸다. 문득 멀지 않은 곳에 마른 풀과 장작을 실은 크고 작은 수레가 나타났는데 모 두 불이 붙어 있었다.
“모두 물러나라! 어서 이 골짜기를 벗어나라!”
놀란 올돌골이 그렇게 소리쳤다. 그러나 그때 뒤쪽에서 함성이 들 리며 졸개 하나가 달려와 급하게 알렸다.
“골짜기 입구도 이미 마른 나뭇가지로 막혔습니다.”
그 말에 올돌골이 달려가보니 들어올 때 지나쳐 본 검은 상자가 실린 수레에서 거센 불길이 오르고 있었다. 원래 거기 실려 있던 것 은 화약이었다. 한 번 불이 붙자 걷잡을 수 없게 금세 골짜기 입구를 세찬 불꽃으로 막아버렸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올돌골은 그렇게 크게 놀라거나 겁내지 않았다. 골짜기에 나무와 풀이 별로 없어 불붙어 봤자 대단하지 않 다고 여긴 탓이었다.
“놀라지 말고 이곳을 나가자!”
올돌골은 그렇게 소리치며 앞장서 길을 찾았다. 갑자기 양쪽 벼랑 에서 골짜기를 향해 횃불이 쏟아졌다. 불이 골짜기에 닿자마자 땅에 묻혀 있는 화약 선에 닿아 불이 붙었다. 그 불길은 순식간에 대나무 대롱을 따라 번지며 만병들의 발밑에 묻혀 있는 철포를 터뜨렸다. 땅이 갈라져 치솟고 쇳조각이 흩어지며 골짜기는 금세 화약 연기 와 불꽃으로 자욱했다. 불꽃이 튀어 등갑에 닿기만 하면 어김없이 불이 붙어 벗어던질 틈조차 주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몇 번씩 기름에 절이고 말리기를 되풀이한 등갑이라 불에 약할 수밖에 없었 다. 결국 올돌골과 그의 삼만 등갑군은 모두 반사곡 안에서 서로 껴 안은 채 모조리 타 죽고 말았다.
공명은 산 위에서 그 광경을 내려보고 있었다. 몸에 불이 붙은 만병은 주먹을 부르쥐고 다리를 오그린 채 타 죽어갔고 절반은 또 터
지는 철포의 쇳조각에 맞아 죽었다. 머리통이 부서지고 팔다리가 찢 어져 날리는데, 그 끔찍한 광경은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었다. 사람 의 살을 태우는 냄새도 그대로 속을 뒤집는 듯했다.
보고 있던 공명이 주르르 눈물을 흘리며 탄식했다.
“내가 비록 나라에는 공이 있을지 몰라도 반드시 목숨이 줄겠구 나. 저 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죽이고 어떻게 오래 살기를 바랄 수 있 으리!”
그 말에 곁에 있던 장수들도 모두 처연함을 이기지 못했다. 그때 맹획은 뒤처져 있으면서 올돌골로부터 좋은 소식이 오기만 을 고대하고 있었다. 갑자기 만병 천여 명이 달려오더니 맹획 앞에 엎드려 울며 말했다.
“오과국 군사들은 병과 크게 싸워 이겨, 제갈량은 마침내 반사 곡 안에 갇혔습니다. 지금 등갑군이 그를 에워싸고 있으니 대왕께서 도 함께 가셔서 돕도록 하십시오. 저희들은 원래 이곳 사람들입니 다. 제갈량의 강압을 못 이겨 항복했던 자들입니다. 이제 대왕께 이 소식을 알려드림과 아울러 특별히 대왕을 돕고자 달려왔습니다.”
그 말에 맹획은 몹시 기뻤다. 급히 함께 있던 피붙이와 졸개들을 끌어모아 말에 올랐다. 새로운 만병들이 그런 맹획의 길잡이가 되 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반사곡에 이르러 보니 아직도 불길과 연기 가 치솟는데 사람과 말의 살 타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맹획은 금세 등갑군이 공명의 계책에 떨어진 걸 알았다. 얼른 군사를 물리려는데 갑자기 함성이 일며 두 갈래 군마가 뛰쳐나왔다. 왼쪽은 장의요, 오른쪽은 마충이 이끄는 촉군이었다.
맹획이 놀란 중에도 이를 악물며 맞싸울 채비를 했다. 하지만 그 것조차 뜻대로 되지 않았다. 얼마 전 되돌아왔다는 저희 군사들이 다시 촉군 편이 되어 갑자기 덤볐다. 그 바람에 맹획의 그 피붙이들 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모조리 사로잡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 다. 하지만 맹획은 달랐다. 또다시 사로잡힐 수는 없다는 결의로 죽 을힘을 다해 겨우 몸을 빼냈다. 그리고 산길을 따라 정신없이 달아 났다.
맹획이 한참 달리는데 산등성이 우묵한 곳에서 다시 한 떼의 인 마가 작은 수레 하나를 에워싸고 나타났다. 수레 위에 한 사람이 윤 건에 도포 입고 깃털부채를 든 채 앉았는데 바로 공명이었다.
“반적 맹획아, 이번에는 어쩔 셈이냐?”
공명이 맹획을 큰 소리로 꾸짖었다. 맹획은 다급하기만 했다. 대 답할 겨를도 없이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바빴다.
하지만 멀리는 못 갈 팔자였다. 길가에서 한 장수가 펀뜻 나타나 더니 길을 가로막았다. 마대였다. 맹획은 그래도 어떻게 뚫고 나가 보려 했으나 손발이 제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마대는 그런 맹획을 어린애 낚아채듯이 말에서 끌어내려 꽁꽁 묶고 말았다. 그때는 왕평 과 장익도 만병들의 본채를 덮쳐 축융부인과 나머지 맹획의 피붙이 들을 모두 사로잡아버린 뒤였다.
공명은 진채로 돌아와서야 여러 장수들에게 씁쓸한 얼굴로 그간의 경위와 심경을 말해주었다.
“내가 이번에 쓴 계책은 마지못해 쓰기는 했지만 내게 끼쳐진 하 늘의 음덕(德)을 크게 깎아내렸을 것이다. 나는 적이 내가 틀림없 이 나무와 수풀이 우거진 곳에 매복을 하리라고 생각할 줄 알았다. 그래서 숲속에 깃발을 세워두었지만 실은 군사를 감추지 않았는데 그것은 적으로 하여금 내가 저희들이 헤아린 대로 움직이는 것처럼 알게 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또 위연에게 열다섯 번이나 싸움에 져주게 했다. 이 또한 서 너 번으로는 적이 나의 유인에 말려들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적의 기세를 돋우어준 것이다.
따라서 적은 반사곡이 바위산 사이에 난 길이고 바닥은 모래며 나무와 숲이 없는 걸 보자 열다섯 번이나 이긴 기세를 몰아 의심 없 이 우리 군사를 뒤쫓아 들어왔다. 하지만 그때 이미 나는 마대를 시 켜 골짜기 안에 등갑군을 한꺼번에 때려잡을 설비를 해놓고 있었다. 곧 검은 칠한 상자 안에 들었던 것을 땅에 묻었는데, 그것은 성도에 서 미리 만들어 온 ‘지뢰’라는 화포였다. 포 하나에 아홉 개의 포환 이 들어 있는 것으로 나는 그걸 서른 발짝마다 하나씩 묻게 하고 지 뢰와 지뢰 사이를 화약이 찬 대나무 대롱으로 연결하게 하였다. 하 나에만 불을 붙여도 거기 묻힌 모든 지뢰가 다 터져 그 위력은 돌을 쪼개고 산을 허물 만했다.
나는 또 조자룡을 시켜 마른풀 실은 수레를 골짜기 입새에 버려 두게 하고, 골짜기 양편의 산 위에는 굵은 나무와 바위들을 모아두 게 했다. 그리고 위연이 골짜기를 지나간 뒤에는 그 나무와 바위로 길을 끊고 골짜기 입새의 수레에도 불을 지르게 했다. 등갑군을 그 반사곡 안에 가둬두기 위함이었다. 내가 듣기로 ‘물에 이로운 것은 불에는 이롭지 못하다’ 했다. 등갑군의 등갑에 창칼이 들어가지 않 고 또 물에 뜨는 것은 그 갑옷이 기름을 먹은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기름 먹은 물건이 불을 만나면 탈 것은 뻔한 이치가 아니겠느냐? 그 런 물건으로 몸을 가린 만병들을 불이 아닌 것으로야 어떻게 이길 수 있겠느냐?
하지만 이제 오과국 사람들의 씨를 말려버렸으니 내 죄가 너무 크구나!”
그 말을 들은 장수들은 모두 땅에 엎드려 절하며 감탄의 소리를 냈다.
“승상의 하늘 같은 헤아림은 실로 귀신도 짐작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잠시 『연의의 흥미를 끊는 이야기를 하나 하고 넘 어가야겠다. 먼저 제갈량이 등갑군 삼만을 지뢰로 전멸시켰다는 것 은 정사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아니, 오과국이란 나라도 실제 있 었던 것 같지가 않다.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의 지리지에는 없고 산해경(山海經)』에나 그 이름이 보이기 때문이다.
또 공명이 썼다는 지뢰도 의심스럽기 짝이 없다. 일반적으로 화약 이 싸움에 이용되기 시작한 것은 십삼세기로 되어 있으나 제대로 위 력을 발휘하는 것은 그보다도 이, 삼세기 뒤의 일이 된다. 그런데 공 명이 이세기 중엽에 지뢰를 썼다면 그 뒤 천 몇백 년이란 공백이 생 기는 걸 설명할 길이 없다. 대개 전쟁의 기술이나 무기는 그보다 더 효과적인 것이 나올 때까지는 유지되는 법인 까닭이다. 아니 그 이 상, 그 기술이나 무기가 온전히 쓸모없어질 때까지 유지된다고 하는 편이 옳다.
따라서 반사곡 지뢰 이야기는 이른바 ‘세푼[三分]의 허구’에 속하는 것으로 읽혀져야 할 것이다.
“이제 맹획을 데려오너라.”
등갑군을 전멸시킨 계책을 장수들에게 풀이해주면서 탄식하던 공 명은 이어 무사들에게 그런 영을 내렸다.
얼마 후 멧돼지 옭듯 옭힌 맹획이 끌려와 공명의 장막 앞에 무릎 을 꿇었다. 공명은 또다시 그 결박을 풀어주게 함과 아울러 무사들 에게 명했다.
“맹획을 다른 장막으로 데려가 술과 밥을 주어라. 먼저 놀란 가슴 을 가라앉힌 뒤에 내 다시 저를 불러 얘기하리라.”
그리고 맹획이 끌려나가자 그에게 술과 밥을 가져다줄 관원을 가 까이 불러 가만히 무어라고 일러주었다.
그때 맹획이 끌려간 장막에는 그의 아내인 축융부인과 아우 맹우, 처남 대래동주와 이런저런 피붙이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맹획은 그 런 그들과 쓴 술잔을 나누면서 한숨과 탄식 속에 의논을 거듭했다. 하지만 이제는 더 물러날 곳도 힘을 빌릴 만한 나라도 남아 있지 않 았다.
그때 한 관원이 그 장막으로 들어와 맹획에게 말했다.
“승상께서는 너무 많은 이 땅 사람들을 죽여 공과 얼굴을 맞대기 부끄럽다고 하오. 그래서 나를 보내시면서 공을 풀어주고, 공에게 다시 한번 인마를 모아 덤벼보라고 전해달라 하셨소이다. 공은 어서 빨리 이곳을 떠나시오.”
그러자 어지간한 맹획도 더는 버텨내지 못했다. 갈 곳도 없거니와 이기고도 부끄러워할 줄 아는 그 너그러운 인품이 감격스럽기 그지 없었다. 이에 눈물을 흘리면서 그 관원에게 말했다.
“적을 일곱 번이나 사로잡았다 놓아준 일은 예부터 이제껏 한 번 도 없던 일입니다. 제가 비록 왕화를 입지 못한 사람이라 하나 예의 를 조금은 압니다. 어떻게 그리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짓을 할 수 있 겠습니까?”
그러고는 형제와 처자 및 모든 무리를 이끌고 기듯이 공명의 장 막으로 가 무릎을 꿇었다. 맹획이 잘못을 빌기 위해 옷을 벗고, 여 기서는 벌을 받기 위해 오른쪽 어깨를 벗은 것을 말함인 듯]머리를 조아리 며 공명에게 한 말은 이러했다.
“승상의 하늘 같은 위엄 앞에 진심으로 무릎을 꿇습니다. 앞으로 우리 남쪽 것들은 두 번 다시 모반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공명도 전에 없이 예를 갖춰 다짐을 받았다.
“공은 이번에는 참으로 항복하는가?”
“저의 자자손손이 모두 승상의 살려주신 은혜를 입었습니다. 어찌 항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맹획이 그렇게 말하며 마음에서 우러난 눈물을 쏟았다. 굳은 독립 의 의지와 꺾일 줄 모르던 자유의 혼이 마침내 강력한 제국의 지배 에 무릎을 꿇는 쓸쓸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공명으로서는 가장 빛나 는 승리의 순간이었다.
공명은 어렵게 얻은 승리의 효과를 오래 지켜가기 위해 조금도 마음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맹획을 일으켜 세워 장막 안으로 들 이고 크게 잔치를 열어 한 번 더 그를 감격시켰다. 뿐만이 아니었다. 그를 전과 같이 동주로 삼아 제 족속을 다스리게 하고 뺏은 땅도 모 조리 돌려주었다.
공명의 그 같은 너그러움에 맹획의 피붙이와 졸개들도 고마워하 지 않는 이가 없었다. 모두 기뻐 날뛰며 제 땅으로 돌아갔다.
공명이 그렇게 맹획을 돌려보내는 걸 보고 장사(長) 비위가 들 어와 물었다.
“이제 승상께서는 몸소 사졸들을 이끌고 이 거친 땅 깊숙이 들어 와 남쪽 오랑캐를 평정하셨습니다. 거기다가 그 왕까지 이미 마음으 로 항복했는데도 어찌하여 이대로 돌아가려 하십니까? 왜 관리를 이 땅에 남겨 맹획과 더불어 지키게 하지 않으십니까?”
그러자 공명이 가만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장사의 뜻은 알겠으나 그렇게 하기에는 세 가지 어려운 일이 있네.”
“세 가지 어려움이란 무엇입니까?”
비위가 알 수 없다는 듯 다시 물었다. 공명이 차분하게 그 세 가지 어려운 일들을 들려주었다.
“나라 밖에 관원을 남기고 가려면 반드시 군사들도 남겨야 한다. 그런데 군사를 남기려면 먹을 것도 남겨야 하는 바, 그 먹을 것이 없 는 게 첫 번째의 어려움이다. 그다음 이번 싸움에서 많은 이 땅 사람 들이 다치고 그 아비나 형이 죽었다. 그런 이 땅에 관원을 남기고 군 사를 딸려주지 않으면 반드시 화가 생길 것이니 그게 두 번째의 어 려움이다. 그밖에 이 남쪽 오랑캐는 서로 죽이고 내쫓는 짓거리들을 해오는 동안 의심과 미움만 잔뜩 자라왔다. 거기에 다른 나라의 관 원을 남겨두면 결국은 서로 못 믿게 돼 일이 날 것이니 그게 세번 째 어려움이다. 내가 지금 이곳에 사람을 남기고 가지 않는 것은 양 식을 이곳으로 실어오지 않아도 될 뿐만 아니라 서로 평안하며 일없 이 지내기 위해서이다.”
그 말을 듣자 비위는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사람까지도 공명의 속 깊은 헤아림에 모두 감탄했다.
남쪽 사람들도 공명의 은덕에 감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공명이 아직 살아 있는데도 사당을 지어 사철 제사를 지내고 공명을 부르기 를 자부慈)라 했다. 또 금은과 진주, 단칠(丹)과 약재, 밭갈이 소 와 싸움말 등을 바쳐 군용에 쓰이게 함과 아울러 다시는 배반하지 않을 것을 맹세했다. 남쪽은 가장 바람직한 형태로 촉에게 평정된 셈이었다.
그 모든 일을 마무리지은 공명은 군사들을 배불리 먹인 뒤 곧 군 사를 물려 성도로 돌아가기로 했다. 먼저 위연에게 거느린 군사와 더불어 돌아가는 길을 앞장서기를 명했다.
그런데 명을 받고 먼저 떠난 위연이 노수 가에 이르렀을 때였다. 갑자기 검은 구름이 사방에서 몰려오며 강물 위에서 한바탕 미친 듯 한 바람이 일었다. 그 바람이 돌과 모래를 날려 군사들이 도무지 앞 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놀란 위연은 군사를 물리고 공명에게 그 일을 알렸다. 공명도 놀랍 기는 마찬가지였다. 그곳 풍수에 밝은 맹획에게 그 까닭을 물었다. 그때 맹획은 크고 작은 동의 추장들과 그 동민들을 데리고 공명을 배웅하러 와 있었다. 공명이 노수의 일을 묻자 별것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그 물은 원래 창신(神)이 화를 일으키는 곳입니다. 건너려면 반 드시 제사를 지내 그 미친 귀신을 달래야 합니다.”
“그런 귀신이라면 여느 제물로는 달래기 어려울 듯하오. 어떤 제물을 써야겠소?”
공명이 다시 그렇게 물었다. 맹획이 아는 대로 대답했다.
“예전에는 창신이 화를 일으키면 사람 머리 마흔아홉과 검은 소 흰 양으로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렇게 하면 바람이 그치고 물결이 가라앉으며 해마다 풍년이 든다 했습니다.”
그러자 공명이 어두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나는 이미 이 땅을 평정했는데, 어찌 한 사람이라도 함부로 죽일수 있겠는가?”
그러고는 몸소 노수 가로 나가 살펴보기 시작했다. 사람의 목을 마흔아홉이나 잘라야 하는 걸 피해 보기 위함이었다.
공명이 물가로 나가보니 정말로 음습한 바람이 거세게 일고 험한 물결이 드높았다. 건너기는커녕 보는 데도 사람과 말이 다 놀랄 만 큼 거센 바람이요, 험한 물결이었다.
공명은 그걸 직접 보자 더욱 괴이쩍었다. 한낱 물귀신이 장난하는 것 이상으로 느껴지는 데가 있어 그곳 토박이들에게 물었다.
“이곳이 언제나 이러한가?”
그러자 토박이 하나가 새로운 사실을 하나 알려주었다.
“승상께서 이곳을 지나가신 뒤로 물가에서 귀신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는데 해질 무렵부터 날 밝을 때까지 그치지 않습니다. 독한 안개 같은 게 자욱한 가운데 수많은 원통한 귀신들이 깃들여 아 무도 감히 이 물을 건너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공명은 문득 깨달은 게 있는 듯 탄식 섞어 말했다.
“그것은 모두 나의 죄다. 전에 마대가 촉병 천여 명을 이끌고 여 기를 지나려 하다가 그 모두가 이 물에 빠져 죽은 적이 있다. 거기다 가 우리가 죽인 이곳 사람들의 시체도 모두 이 물속에 던졌으니, 그 많은 놀란 혼 원통한 귀신이 어딜 갔겠느냐? 그 한이 풀리지 않아 일이 이렇게 된 것임에 틀림이 없다. 오늘 밤 내 마땅히 이 물가에서 큰 제사를 지내 그들의 한을 풀어주리라.”
“제사를 지내시려면 반드시 지난 예에 따르셔야 합니다. 사람의 머리 마흔아홉 개가 있어야만 원통한 귀신들이 흩어질 것입니다.” 그 토박이가 다시 맹획과 똑같은 소리를 했다. 공명이 무겁게 머 리를 가로저었다.
“원래 사람이 죽어 저 같은 원귀가 되었는데, 어찌 또 산 사람을 죽여 원귀를 늘리겠는가? 내가 따로 생각이 있으니 그 일은 내게 맡 기라.”
공명은 그렇게 말하고 군중에서 음식 만드는 이를 불러 영을 내렸다.
“너는 소와 말을 잡고 그 고기와 국수를 반죽해 사람의 머리 모양 으로 빚으라. 그런 다음 그 속은 소와 양의 고기를 채우고 삶아 제상 에 올리도록 하라.”
이른바 만두(饅頭)가 만들어진 것은 제갈공명의 노수대제(水大祭)가 그 처음이 되는 셈이다.
그날 밤 공명은 노수 언덕에다 큰 제상을 펼치고 향을 사르며 마 련한 제물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그 둘레에 마흔아홉 개 등잔과 혼 백을 부르는 깃대를 벌여 세운 다음 만두라는 그 새로운 음식과 다 른 제물들을 땅에 펼쳤다.
삼경 무렵이 되자 공명은 금으로 만든 관에 흰 학창의를 입고 나 와 몸소 제사를 맡았다.
공명이 제문을 읽게 하니 동궐(董)이 엄숙하게 읽어나갔다.
‘대한 건흥(興) 가을 구월 초하루, 무향후武侯영익주목 州牧) 승상 제갈량은 삼가 제물을 펼치고 예의를 갖추어, 나라를 위 해 목숨을 바친 촉의 장졸 및 이곳 남쪽 땅 사람들의 영혼 앞에서 고한다.
우리 대한 황제의 위엄은 옛적 오패(五覇, 춘추 시절 패권을 누렸던 다섯 제후)보다 더하고 그 밝음은 삼왕(三王, 전설 속의 세 황제)을 이을 만하다. 그런데도 지난번 풍습 다른 이곳의 군사는 멀리서부터 국경 을 침범해 전갈이 꼬리를 뻗쳐 요사스러움을 일으키듯 이리 같은 마 음이 내키는 대로 대한의 땅을 어지럽히고 장난질을 쳤다.
나는 왕명을 받들어 그 죄를 묻고자 멀리 거친 이 땅으로 왔는 바, 비휴, 범 비슷한 짐승으로 옛날에는 길들여 전쟁에 썼다 함)가 땅강아 지와 개미 떼[鏤蟻]를 쓸어버리듯, 씩씩한 우리 군사는 미친 도적들 을 얼음 녹듯 녹여 없앴다. 들리느니 오직 대나무가 쪼개지듯 적이 부서지는 소리요, 보이느니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지듯 무너지는 적의 기세였다.
우리 장졸은 나이 어린 사졸이라도 모두가 하나같이 구주의 호걸 이요, 높고 낮은 장교는 또한 모두가 사해의 영웅이었다. 무예를 닦 아 싸움터로 나섬으로써 밝음을 쫓아 주인을 섬겼고, 삼령(三令)을 어김없이 지켜 싸움으로써 나와 함께 일곱 번 적의 우두머리를 사로 잡는 일을 했다. 언제나 나라를 받드는 정성으로 굳세었고, 임금께 충성하는 마음으로 힘을 다했다.
그러하되, 어찌 생각이나 하였으랴. 그대들은 어쩌다가 싸움터에 서 때를 잃기도 하고 적의 간사한 계책에 빠지기도 하여, 더러는 흐 르는 화살에 맞아 그 넋이 구천으로 돌아가고 더러는 칼에 다쳐 그 혼백이 기나긴 어둠 속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슬퍼하지 말라. 그대 들은 살아서는 그 씩씩함을 마음껏 떨쳐 보였고, 죽어서는 길이 전 해질 이름을 남겼다.
이제 싸움에 이긴 노래를 높이 부르며 돌아가려 하거니와 사로잡 고 뺏은 것을 먼저 그대들에게 바쳐 그대들을 기리려 한다. 그대들 의 영령은 아직도 스러지지 않았을 것이니 반드시 우리가 비는 소리 를 듣고 있을 것이다.
비나니, 그대들은 휘날리는 우리 깃발을 따르고 우리 군사들의 뒤 를 쫓아 함께 본국으로 돌아가자. 그리하여 각자의 고향을 찾아가 형제와 처자의 제사를 받을 수 있도록 하라. 부디 낯선 땅의 귀신이 되어 쓸데없이 남의 나라를 떠도는 일이 없게 하라.
나는 마땅히 천자께 그대들의 공을 말씀 올려 그대들의 집집마다 나라의 은덕이 미치게 할 것이다. 해마다 옷과 양식을 내어주고 다달이 녹봉을 내려 그대들의 공에 보답함으로써 그대들의 넋을 위로 하려 한다……..
동궐은 거기서 잠시 숨을 멈추었다. 듣는 이 치고 눈시울이 뜨거 워지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달래야 할 귀신은 촉군(蜀)의 전 사자들뿐만이 아니었다. 동궐은 다시 다른 이들을 위해 읽어나갔다.
‘…..아울러 이 땅의 귀신과 이번 싸움에 죽은 이곳 남쪽 사람 시들의 넋에게도 고한다. 그대들에게도 제사를 지내고 희생이 바쳐 질 것이니 머지않아 기대어 쉴 곳도 생기리라. 살아 있는 이는 천자 의 위엄을 입어 늠름하고, 죽은 이도 왕화(化) 아래로 돌아왔다. 마음을 평안히 가다듬어 울부짖지 말라. 정성을 다하여 제사를 바쳐 올리노라. 오오, 슬프다. 엎드려 비나니 모든 넋들은 흠향하라.’
동궐이 제문을 읽기를 마치자 공명은 목을 놓아 울었다. 그 슬퍼 함이 얼마나 지극한지 삼군의 마음이 모두 움직여 눈물을 흘리지 않 는 이가 없었다. 맹획을 비롯한 남만 사람들도 모두 울며 곡을 했다. 그러자 그들의 정성이 귀신에게도 전해졌던 것인지 어두운 구름 과원(怨)서린 안개 속에 수천의 귀신이 은은히 나타나더니 바람을 따라 흩어졌다. 공명은 좌우의 장수들에게 준비한 제물을 모두 노수 로 던져넣게 해 원통한 넋들을 한 번 더 위로했다.
다음 날 공명은 대군을 이끌고 노수 남쪽 언덕에 이르렀다. 전날 의 제사 덕분인지 구름은 흩어지고 안개는 걷혀 있었다. 거기다가 바람도 없고 물결도 잔잔하니 병은 아무런 힘들이지 않고 물을 건널 수 있었다.
그다음부터는 자랑스런 개선행군이었다. 북소리 드높고 말발굽 소리 요란한데 군사들의 개선가가 하늘 높이 울려퍼졌다. 개선군이 영창에 이르자 공명은 왕항王)과 여개(呂)를 남겨 사군(四郡)을 지키게 하고 거기까지 따라온 맹획은 제 땅으로 돌려보냈다.
“부디 나라를 다스리는 데 게으르지 말 것이며 백성들을 잘 보살 피라. 어떤 까닭으로든 농사짓기를 저버려서는 아니 된다.”
공명은 맹획에게 그렇게 당부했다. 맹획과 그를 따르는 무리들은 한결같이 울며 공명에게 절하고 돌아갔다.
이로써 공명의 남만 정벌은 끝났다.
하지만 정사에 비추어보면 가장 허황되고, 『연의』를 지은 이의 작 가적인 재능을 보여주는 데 가장 빛나는 부분이 이 남만 정벌이 아 닌가 한다.
진수의 정사는 ‘장무 삼년 봄 제갈량은 무리를 이끌고 남쪽을 정 벌해 가을에 그 땅을 평정하다[武三年春亮率衆南征 其秋悉平]’란 한 구절뿐이고 주()에서도 서너 줄로 칠종칠금(七縱)의 사실 만을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민간의 설화도 참고는 되었겠지만, 맹획을 상대로 제갈량이 펼친 그 현란한 계책들과 갖가지 준비, 그리고 맹획을 도우러 나온 설화 적 남만 왕들은 거의가 『연의』를 지은 이의 상상력에서 나온 셈이 다. 지나치게 공명을 추켜세우다가 공명을 한 술사(術)나 이인(異 人)처럼 보이게 해 오히려 현실감이 없도록 만들었다는 비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재능이다. 『삼국지연의를 기서(奇書)라 일컫는 것도 실로 그런 지은이의 재능을 높여 한 말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공명이 남만 정벌을 끝내고 성도로 돌아오자 후주는 성 밖 삼십 리까지 나왔다. 그리고 임금이 타는 수레에서 내려 길가에 선 채 공 명을 기다렸다. 그걸 본 공명은 황망히 수레에서 내려 길바닥에 엎 드리며 아뢰었다.
“신이 얼른 남방을 평정하지 못해 주상으로 하여금 근심하시게 하였으니 그 죄가 큽니다.”
후주는 그런 공명을 일으켜 세운 뒤 공명과 수레를 나란히 하여 성안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태평연(泰平筵)을 크게 열어 싸움에 애 쓴 장졸들을 위로하고 삼군에게 두터운 상을 내렸다. 공명이 남만을 평정하고 돌아오자 촉의 위엄은 사방에 크게 떨쳐 울리었다. 그로부 터 그 위엄에 떨어 조공을 바쳐오는 곳만도 이백 곳이 넘었다.
공명은 또 후주께 아뢰어 나라를 위해 싸우다가 죽은 장졸들의 가족들을 나라에서 일일이 돌보게 했다. 그렇게 되자 백성들은 고마 움과 기쁨에 차고, 나라 안팎은 맑고 평온하기 그지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