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말세편 1권 3화 – 부름 (Summoning) 2 : 해답
해답
눈이 떠졌다.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처음에는 흐릿하고 컴 컴할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다가 조금씩 빛나는 것이 보이기 시 작했다. 별이었다. 별들, 밤하늘.
‘죽지 않았나? 아직 내가 살아 있는 것인가?’
몸에는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아픔도 없었고 감각도 없었다. 신경 계통 전체가 마비된 것인지도 몰랐다.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눈꺼풀뿐. 그리고 이상할 만큼 거칠고 힘들지만 호흡도 되고 있 는 것 같았다. 그 외에는 고개조차 돌릴 수 없었다. 다만 별이 빛 나는 밤하늘, 그리고 주변에 둘러선 검은 바위의 언덕들은 보였다.
‘왜・・・・・・ 아니, 어떻게…………… 내가 죽지 않았을까?’
아무 감각을 느낄 수는 없었지만 무엇인가가 느껴졌다. 감각 으로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으로부터 느껴지는…………, 그 것은 ‘지금’ 박 신부로서는 따르기 힘들 정도로 거룩하고 엄 숙한 느낌을 안겨 주었다. 그리고 항상 옆에 있던 것처럼 친근한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것이 서서히 사라지려 하고 있었다.
‘베케트의 십자가!’
볼 수도, 느낄 수도 없었지만 박 신부는 알 수 있었다. 그 힘이 사라지려 하고 있다. 왕권보다도, 우정보다도 신앙을 택했던 베 케트의 힘과 그 느낌. 그 힘이 자신을 살렸다. 비록 기도력을 늘 려 주는 역할을 했지만, 그 자체로는 결국 하나의 성물(聖物)에 지나지 않았던 작은 십자가가 박 신부를 떠받쳤다. 그리고 마지 막 힘을 다해서 사라져 가고 있었다.
박신부는 몸을 움직이려 애를 썼다. 갑자기 날카로운 통증이 척추를 파헤치듯 쓱 지나갈 뿐, 몸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양쪽 팔, 그리고 다리 쪽에서 통증이 밀려들었다. 쑤시는 듯한 통증에 허전한 감이 느껴졌다. 팔다리가 박살이 난 모양이었다. 잠시 지독한 통증과 허무감을 견뎌 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박 신부는 고통에 눈을 감고 아스라이 사라져 가는 의식을 붙잡 으려 애를 썼다. 그러나……………
박 신부는 퍼뜩 눈을 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둠 때 문이 아니라 너무나 밝은 빛 때문이었다. 그는 놀라면서 몸을 움 찔했다. 몸이 움직여졌다. 게다가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 다. 박 신부는 놀라서 손을 펴고 들여다보았다. 손이 멀쩡했다. 이어서 다리에 힘을 주어 보았다. 그 역시 힘이 들어갔고 통증도 없었다. 그제야 눈을 들어 눈앞의 빛무리를 보았다. 아까 자신이 놓쳐 버린 그 빛무리. 그 빛이 다시 조금씩 벌어지면서 그 안의 영상을 박 신부의 눈에 비추려 하고 있었다.
‘아…………. 이건…… 이것은……..’
순간 아까 자신을 미혹시켰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박 신부는 귀를 막으려 했으나 다시 의문이 들었다.
‘아무리 저것이 미혹일지라도 어떻게 아까와 같은 바보짓을 반복하겠는가? 정말이면 어찌하는가?’
박신부는 몸을 벌떡 일으켜 밖으로 달려 나가려 했다. 하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놀란 박 신부는 비명을 질렀다.
눈앞에서 목을 매단 미라의 몸이 흔들거리고 있었다. 그 주변 으로는 박 여사가 울다가 까무러쳐 있었다. 차 교수는 몸을 덜 덜 떨면서 꼼짝도 못하고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박 신부는 의 사였을 때의 모습으로 미라의 목에 매여 있는 리본을 홀린 듯 들 여다보고 있었다. 스스로 죽음을 택한 여덟 살짜리 미라의 마지 막말.
-의사 아저씨, 전 그것하고 같이 가긴 싫지만 아무래 도…………. 안 갈게요. 아저씨. 약속할게요. 저 잘래요. 안녕…………… 자신은 무력하고 힘없는 대신 죽겠다는 말조차 못한 가련한 의사일 뿐이었다.
“그만・・・・・・ “
저절로 탄식이 나왔다. 눈을 돌리고 싶었다. 이건 악몽이다. 이제 와서 그때로 되돌아갈 수도 없는 일이다! 그건 불가능하 다!! 분명 나는 헛것을 보고 있는 것이다!!!
미라의 몸이 흔들렸다. 바람에 나부끼듯 천천히, 천천히, 박 여사는 까무러쳐서도 눈물을 쏟고 있었고, 차 교수는 천천히 신 음을 흘리며 주저앉았다. 구원의 길은 없었다. 미라는 죽었고, 끝이었다.
“헛것이야….. 환영일 뿐이야…….”
환영이라고? 이건 환영이 아니었다. 미라가 죽은 것이 사실이 아니란 말인가? 이 장면이 만들어진 헛것이었단 말인가? 그렇지 는 않았다. 있었던 일이다. 다만 과거의 일이었을 뿐…….
“지나간 일이야!”
그러나 박 신부, 닥터 박, 박윤규로서는 잊을 수 없는 일이었 다. 절대로,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그렇다면 그것을 과거의 일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박윤규의 마음속에서 미라는 매일 죽 는 것이 아니던가?
“아니야!”
총소리가 들려왔다. 등이 욱신거리면서 쑤셔 왔다. 손에 든 메 스가 찰캉 소리를 내며 떨어지자 닥터 박은 놀라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군의관님?”
마스크를 쓰고 눈만 내놓은 위생병이 놀라 물었다. 더웠다. 찌 는 듯이 더웠다. 에어컨이 고장 난 베트남의 병동 안은 거의 게 헨나*만큼이나 더웠다. 눈앞에는 등이 흉하게 갈라진 남자가 엎 드려 있었다. 메스로 절개된 틈 사이로 척추뼈가 희멀겋게 드러 나 보였다.
“괜찮으십니까, 군의관님?”
위생병의 목소리에 여자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닥터 신이었다. “어서 탄환을 빼야 해요. 늦어지면 위험합니다.”
소독된 다른 메스가 닥터 박의 손에 쥐어졌다. 떨어진 메스는 소독에 던져졌다. 부글부글 끓는 소독통. 초열지옥이나 다름 없는 곳이었다. 등줄기가 아파 왔다. 으레 그랬다. 등을 수술하 면 등이 아프고, 팔을 수술하면 팔이 아팠다.
엎드려 있는 젊은 남자의 씨근거리는 숨소리. 닥터 박은 자신 도 모르게 그에 맞추어서 호흡하고 있었다. 고통. 닥터 박에게는 환자들의 고통이 그대로 밀려오곤 했다. 고통, 등줄기가 아팠다. 그래도 참고 메스를 놀리며 살 속으로 집어넣는 순간, 자신의 등
* 일종의 지옥을 의미한다. 예수는 설교중에 게헨나에 대해 몇 번 언급하는데, 불 이 붙어 영원한 고통을 주는 지옥을 가리킨다.
줄기도 똑같이 아파왔다. 마스크가 땀으로 축축이 젖었다.
“서두르세요. 어서 철수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총소리가 들려온다. 그리 멀지 않다. 점점 다가오고 있다. 환 자는 아우성을 친다. 약이 부족하다. 그러나 시간이 없다. 연락 장교가 모두 나가라고 고함을 친다. 등은 계속 쑤셔 온다. 폭음. 무엇인가가 가까운 곳에서 폭발했다. 천장에 늘어진 전등들이 흔들리며 먼지를 뿌린다. 감염의 위험. 하지만 어찌할 시간조차 없다. 이를 악물면서 탄환을 파헤쳐 내는 순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뒹군다. 메스는 닥터 박의 등에 깊이 박혀 있다.
***
“혼자 서게!”
등이 아프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눈을 뜨니 맑은 하늘이 눈에 들어온다. 맑다. 참 맑기도 하다.
“혼자서!”
아, 이제야 알겠다. 제주도였지. 그것도 아주 깊숙한 곳……………. 조용한 곳을 찾는다고 여기까지 왔었다. 그래. 그리고…………. 기억이 되살아나자 날카로운 통증이 온몸을 꿰뚫고 지나갔다.
정신을 잃을 만큼의 쓰라린 통증. 여러 개의 손이 보인다. 그리고 조심스레 자신의 몸을 들어 올린다. 소리 낼 기운조차 없지만 차라리 기절하고 싶을 만큼 아프다. 나는 구조를 받은 건가? 제 주도 촌민들의 손에? 도대체 왜? 무엇 때문에?
여러 개의 손이 자신의 몸을 내동댕이친다. 곧이어 다른 한 개 의 손이 머리를 끌어 뒤로 젖혀지게 만든다. 무섭게 아프다. 눈 앞에는 마스터가 서 있다. 언제 다시 부활했는지, 미국에서 보았 던 그 모습 그대로 서 있다. 마스터가 복화술로 말한다.
“나를 기억하시는지요. 박 신부님?”
아냐 이건 그자의 말이 아니었어. 이건…………….
간신히 손가락을 들어 마스터를 가리키며 말한다.
“너는・・・・・・ 너는 소멸되었어………….”
그러자 마스터가 웃는다.
“그랬던가요? 뭐, 그렇다고 해 두지요. 그런데 당신은요? 당신 은 살아 있나요? 무엇으로, 어떻게 그렇게 믿지요? 눈으로 본 지 각으로요? 머리로 생각한 이성으로요? 아, 답답하신 분. 미지의 힘을 직접 쓰면서도 눈과 머리밖에는 믿지 못하시는 겁니까?”
몸에 확 하고 오한이 돈다. 발버둥을 치고 싶다. 그러나 여러 개의 손은・・・・・・ . 그 여러 개의 손은……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물소리가 들린다. 나지막이 통통거리는 발동기 엔진 소리도…………….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나는 지 금 어디로 실려 가고 있는 거지? 눈을 뜬다.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겁다. 증오보다도, 신앙보다도 무겁다. 간신히 눈을 떴다. 가 장 먼저 보이는 것은 겁먹은 듯한 어린 소녀의 얼굴. 누구였더 라? 나는 이 아이를 안다. 누구였더라? 수십 년 전에 만난 적이 있는 얼굴……. 누구였더라? 그래・・・・・・ . 나・・・・・・ 나희?
“하루방, 아푸꽈?”
소녀가 고개를 받쳐 준다. 그래, 전에도 이랬었지. 이런 일이 있었지…………. 교회에서……………. 단식기도 끝에 죽어 가고 있던 나 에게…………….
고개를 받쳐 올렸다가 기절할 뻔했다. 아프지 않는 곳이 없다. 정신을 잃을 뻔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정신이 퍼뜩 들었다. 눈 에 자신의 몰골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다리가 오징어처럼 세 번 이나 꼬여서 흐물흐물 늘어져 있다. 늘어진 팔도 보인다. 아니, •저며진 고깃덩어리가 보인다. 뼈가 원래 그 안에 들어 있는지조 차 의심스러운……………. 인간의 몸이 아니라 으깨어진 오징어다. 붉 디붉은 오징어. 그리고 피는 계속 빠져나가고 있었다.
“아아………. 안 돼!”
그러나 소리는 입안에서만 빙글빙글 맴돌 뿐이다.
다시 빛이 나타났다. 눈앞에……………. 『요한 묵시록의 광경을 보여 주려는 듯, 서서히 빛이 갈라지고 궁창이 드러난다. 그러나 슬픈 울음소리가 계속 박 신부의 귀를 헤집어 파고 있다. 박신부는 또 번민한다. 그리고 역시 밖으로 달려 나가는 쪽을 택한다. 눈물을 흘리면서.
달려 나가다가 돌연 박 신부의 다리가 허물어진다. 허물어져 서 연체동물의 살처럼 땅에 퍼져 버린다. 달릴 수가 없다. 손도, 팔도 허물어져 늘어지다가 넓적하게 땅에 퍼져 버린다. 비명을 지르고 싶다.
무엇인가 날카로운 것이 파고든다. 메스. 그래. 닥터 박의 메 스가 스으윽 가벼운 소리를 내면서 흐느적거리는 손을 얇게 저 민다.
“서두르세요. 어서 철수해야 합니다.”
다시 스윽스윽 하는 소리와 함께 박 신부의 팔이, 그리고 다리 가 떨어져 나간다. 얇게 저며진 것이 마치 생선회 같다. 피처럼 붉은 생선회. 빛은 없다. 모두 사라져 버리고 한 줄기도 남아 있 지 않다. 구원은? 모른다. 종말은? 오고 말지도……………. 그런데 이 목소리는?
-너에게는 아직 할 일이 있다.
이제 무슨 일이 있을까? 더 이상 무슨 일이 남아 있을까? 마스 터가 귀에 배를 바싹 대고 복화술로 지껄여 댄다. 움직거리는 뱃 가죽이 혓바닥 같다.
“네가 살아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알지?”
미라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그 옆에 자신도 매달린다. 리본 이 수없이 달린 기다란 커튼 천. 수많은 손들이 몰려와 팔다리가 베인 박 신부의 오뚝이 같은 목을 매단다. 모두의 이름으로, 순 교자의 이름으로 그들은 번제(燔祭)*를 원한다. 목이 매달리자 미래가 보인다. 아브라함은 양을 발로 차버리고 이삭의 목을 땄 다. 롯은 소돔에서 인파에 밀려 발이 묶이는 바람에 불비를 맞았 다. 요셉은 불면증으로 아무런 꿈도 꾸지 못했고, 모세는 갈라진 바다를 반쯤 건너가다가 관절염으로 넘어져 물에 빠졌다. 여호 수아는 한 번도 이기지 못하고 군수품을 훔쳐 도망쳤고, 연약한 다윗은 거인 골리앗의 한 발에 밟혀죽었다………… **
“하루방, ᄒ끔만 참읍서(할아버지, 조금만 참으세요).”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감각이 되살아났다. 삐걱거리는 나 무 소리. 그리고 물소리. 짭조름한 바다 내음 흔들거리는 기분. 멀미가 날 것 같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다시 통증이 느껴진다. 이제는 통증에 저항하여 버틸 의지력마저 고갈되었다. 그러다
* 구약 시대의 하느님께 올리던 제사 짐승을 통째로 구워 재물로 바침. **모두 성경의 내용을 뒤집은 것들이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오른팔격인 장군으 로, 광야를 방랑하던 중에 만난 많은 적대적인 민족과 싸워 그들을 물리친 용맹 한자이다. 다윗은 어렸을 때 전장으로 심부름을 갔다가 돌팔매로 블레셋의 거인 골리앗을 죽임으로써 나중에 왕위에 오르는 인물이다. 또 다윗은 『시편』의 저자 로도 유명하다.
통통거리던 발동기의 엔진 소리가 뚝 끊어진다. 당황스런 두런거림. 들려오는 떠들썩한 외침.
“파도가!! 파도가!!”
“배 돌리라게(배 돌려라)!”
의외라는 듯 소리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흘러갔다. 곧 이어 서 철렁하며 몸이 허공에 떠오르는 듯한 기분. 날아올랐다가 떨 어져 내리는 것 같다. 아픔을 채 느끼기도 전에 바닷물이 우박같 이 부서지면서 온몸을 때린다. 그리고 파고드는 날카로운 통증. 사람들의 악쓰는 소리. 그러나 눈에 들어오는 것은 맑기만 한 하 늘 바람조차 거의 없는 날씨 같은데…………….
‘왜 맑은 하늘 아래서 갑자기 큰 파도가……………?’
퍼뜩 느낌이 온다. 그것이다! 어젯밤의 시커먼 형체. 그것이 내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다시 온 것은 아닐까? 그것이 어 제 보여 준 정도의 힘이라면 파도를 일게 하는 것쯤은 문제도 되 지 않을 것이다. 배의 엔진을 꺼뜨리는 정도는 더더욱 일도 아닐 텐데. 그렇다면 ・・・・・・ 자신을 살리기 위해 엔진조차 꺼진 배를 젓는 이 사람들은 어떻게 된단 말인가? 지금 나는 아무런 힘도, 기도력도 없는 터인데………….
“나・・・・・・ 나를…………… 나를……”
몸을 버둥거리며 나를 내려놓으라고 외치고 싶지만 소리가 되 어 나오지 않는다. 스스로 물로 뛰어들려고 해도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다시 한번 철썩하고 온몸이 흔들릴 만큼 커다란 파도 가 부딪히는 것이 느껴진다. 몸이 허공에 떠오른다. 자신을 싣고 있던 부서질 듯한 쪽배가 보인다. 나희를 닮은 소녀는 자신의 처진 옷자락을 꽉 잡고 있어서 바닷물로 떨어지지 않았다.
키와 노를 잡은 몇 명이 소리를 지르면서 배를 바로잡으려 애 쓰지만 파도는 계속 밀려온다. 분명 무엇인가 이상하다. 아무리 여기가 뭍에서 그리 떨어진 곳은 아닐지언정 이렇듯 큰 파도가 밀려오다니. 더구나 먼바다나 근방의 바다는 모두 잔잔한데, 여 기만 유독 큰 파도가 일고 있는 것이다.
‘사라져라! 사라져!’
박신부는 속으로 안타깝게 외쳤다. 그렇지만 박 신부의 기도 력은 조금도 발휘되지 않았다. 아니, 발휘할 수 있더라도 사악한 기운이 어떻게 해서 파도를 치는지 알 수도 없었고, 예전의 박 신부 또한 기도력이 제아무리 강하다 해도 이토록 큰 파도를 막 을 만한 힘은 없었다.
‘제발……………! 제발 다른 사람들은 놔줘!’
박 신부는 마음속으로 외쳤으나, 사념을 전달할 수 있는 능력 도 진작 없어졌다. 배를 몰고 있는 사람들은 지척지간에 보이는 해변으로 배를 대려고 애쓰는 것 같았지만 번번이 파도에 밀려 나고 있었다.
‘아아……………. 안 돼. 이 힘없는 사람들까지 죽게 만들어서는……………. 나 때문에. 이제 아무 쓸모도 없는 나 때문에…………’
박 신부는 필사적으로 몸을 꿈틀거리려 애썼다. 비록 팔다리 는 완전히 짓뭉개졌지만 몸을 어떻게 굴리면 물로 뛰어들 수 있 을 것 같았다. 자살해서는 안 된다는 박 신부의 평소 신념은 생 각나지도 않았다. 박 신부가 극심한 고통을 참으며 몸을 굴렸으 나 금방 무엇인가가 그를 잡아당겼다. 나희를 닮은 소녀였다.
더 힘을 주어 소녀의 손을 뿌리치려는 순간, 박 신부는 정신이 멍해지는 것을 느꼈다. 소녀는 웃고 있었다. 이렇게 크고 거대한 파도 앞에서 말이다. 소녀는 밝은 미소를 띤 채 웃통을 벗어젖힌 건장한 남자를 쳐다보았다. 소녀의 아버지인 것 같았다.
“아방, 힘들지 않우파(아버지, 힘들지 않아요)?”
그러자 땀을 뻘뻘 흘리며 굳은 얼굴을 하고 있던 남자가 고개 를 저으며 딸을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두 부녀의 미소를 보는 순간 박 신부는 온몸이 굳는 것 같았 다. 나의 기도력이 무슨 소용이던가? 내가 얼마나 잘났기에 이들 을 힘없는 사람이라고 했던가? 소녀는 아버지를 믿고 있었고, 그 때문에 산더미 같은 파도 속에서도 겁먹지 않고 미소를 띠고 있 다. 아버지도 딸을 사랑하고 있다. 아무리 사악한 힘이라도 그들 을 덮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렇다. 그들에게는 힘이 있었다. 온 몸으로 오라를 발산하던 예전의 박 신부보다도 훨씬 더 크고 강 한 힘이 있었다. 그것은 믿음이었다.
종교가 무엇이던가? 신앙심은 무엇이고, 기도와 기원과 갈구 가 무엇이던가? 모든 것은 믿음을 위한 것이 아니던가? 모든 교 리와 가르침과 설법은 무엇을 위해 있던가? 예수님은 왜 겨자씨 만한 믿음만 있어도 산을 움직일 수 있다 했는가? 아니, 나의 기 도력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인가? 단식기도로 왔단 말인가? 교리공부에서 왔단 말인가? 성령의 힘은 어디에 있던가? 유치 원 코흘리개들의 그림에서부터 성령의 힘이 흘러 들어왔던 것이 아닌가? 그러면 성령은 어디에 임해 계신단 말인가? 만물에 모 두 임하여 깃들어 있는 것이 성령이 아니던가? 박 신부의 몸이 마치 학질에라도 걸린 것처럼 덜덜 떨려 왔다.
“여어!”
웃통을 벗어젖히고 얼굴이 검게 그을린데다가 수염마저 듬성 듬성 돋은 남자가 소리를 치면서 용을 썼다. 산더미 같은 파도가 밀려왔지만, 작은 쪽배는 아슬아슬하게 곡예를 하듯 그 파도에 올라탔다. 그리고 그 힘을 이용하여 단번에 해변가까지 밀려오 는 데 성공했다. 허리 정도까지 오는 깊이의 물로 배가 들어서자 남자는 지체 없이 다른 한 명의 조금 늙은 남자에게 눈짓을 하며 배에서 뛰어내려 배를 잡고 끌었다. 조금 늙은 남자도 물에 첨벙 뛰어들어 곧바로 뱃전에 얼기설기 얽힌 밧줄을 잡아끌었다. 그 들의 뒤에서 파도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다시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그들을 놓쳐서 화가 난 것처럼………………
“재게재게 ᄒ게(빨리빨리 하자)!”
두 남자는 있는 힘을 다해 철벅거리며 해변으로 배를 끌고 가 려 했지만, 파도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높이 솟아올랐다가 그 들을 덮치듯 밀려왔다. 소녀는 파도를 등지고 있어서 보지 못한 듯싶었지만 뱃전에 누워 있던 박 신부는 파도를 똑똑히 볼 수 있 었다. 소녀는 아무것도 모르고 미소를 띤 채 박 신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뒤로 파도가 솟구쳐 올랐다.
파도는 소녀의 머리 위로 솟아올라 산처럼 하늘을 덮을 듯이 솟아올랐다. 이런 배는커녕 거대한 여객선이라도 단박에 가 루가 되어 버릴 만한 크기였다. 소녀의 얼굴은 여전히 태연했다. 아무것도 보지 못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 박 신부는 더 이 상 파도를 보지 않았다. 소녀의 티 없는 미소만을 홀린 듯 바라 볼 따름이었다. 박 신부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박신부는 아까의 거룩한 빛무리 앞에 서 있었다. 그 빛무리는 ‘묵시록’의 내용을 보여 주려는 듯 갈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박 신부의 귀에서는 또다시 슬픈 울음소리, 거짓임이 분명한 울음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박 신부는 금방 달려 나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갈라진 틈을 들여다보지도 않았다. 박 신부는 눈을 감 고 그 자리에 앉았다. 앉아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박 신부는 그림을 떠올렸다. 과거 자신에게 성령을 충만하게 해 주었던 철없는 꼬마들의 낙서 같은 그림들. 그리고 그림 속에 있는 마리아의 미소를 찾았다. 크레파스로 쭉쭉 그어진, 검은 코 와 검은 눈썹, 그리고 붉은 크레파스로 둥글게 그려진 미소. 박 신부는 그 미소를 다시 찾았다. 이름 모를 제주도 벽촌의 어느 가무잡잡한 소녀의 미소로부터. 그녀는 지금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파도가 다가오고 있는 것을….
‘바로 이것이다! 이것이었다! 이것이 지금, 나의 현재다!’
닥터 박은 메스를 버리고 십자가를 쥐었다. 미라의 주검 앞에 서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달려왔다. 지금 여기까지 달려왔다. 오면서 신부복을 입었고, 다짐했다. 신의 섭리에 따라 인간을 멸 망에서 구해야 한다고. 그러나 누가 누구를 구한단 말인가? 신이 인간을 구원하는 것인가? 내가 인간을 구원하는 것인가? 신이 인간을 파멸시키는 것인가? 무엇이 인간을 파멸시키는 것인가?
‘그렇다……………. 말세이기는 하나 말세가 아니다. 나는 큰 착각 을 하고 있었다. 인간의 파멸은 인간의 손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다. 신의 섭리는 아니다. 묵시록을 아무리 뒤지더라도 지금의 말 세는 읽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신의 말씀이므로, 지금의 종 말은 인간의 힘으로 오는 것이므로 신이 이번 말세를 허락했다 면 내가 그것을 읽을 수도, 막으려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것 은 그것과 다르다.’
박 신부는 부끄러워졌다. 그들을 위협하던 파도를 이긴 것은 박 신부가 아니었다. 이름 없이 생업에 종사하던 한 어부였다.
아무런 힘도 없고, 아무런 영능력도 없으며, 아무런 깨우침도 없 을지 모르는…………
‘성령은 어디에 있는가? 구원은 어디에 있으며, 파멸은 어디 에 있는가? 나는 애당초 왜 이 길을 택했으며, 왜 이 길을 걸었던 가? 나는 신의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인간의 부름을 받은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렁이 인간. 그러나 모두가 똑같이 위대하고 소중한 인간. 내가 그들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결코 아니다. 나는 그들의 부름을 받은 것뿐이다. 내가 걸어온 길은 그것이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며, 그래야 한다. 인간의 길로, 인간의 힘으로……………. 인간을 믿어야 한다.’
파도가 미친 듯 달려와서 쪽배를 뒤엎으며 덮치는 순간, 박신 부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리고 그 작은 소녀를 감싸 안았다. 거대한 파도는 쪽배를 산산이 부수며 배를 끌던 두 사람까지도 휩쓸어 버렸다. 나무토막들이 사방으로 흩어졌지만, 다음 순간 삽시간에 꺼져 버린 파도의 여파가 바다에 큰 소용돌 이를 만들어 냈다. 기이한 소리를 내며 깊고도 깊은 소용돌이가 퍼져 나가자 바다 밑에 박혀 있던 모래와 돌까지 마구 솟구쳐, 혹은 빨려들고, 혹은 바깥으로 대포알처럼 튀어 나갔다.
한동안 바다는 엉망진창으로 헝클어졌다. 그러다가 마지막으 로 기이한 소리를 내며 무저갱 같은 물구멍이 입을 다물 듯 닫히고, 바다는 잔잔해졌다. 마치 거짓말처럼. 물 위에는 부서진 배의 나무 부스러기 말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