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세계편 2권 – 용어 해설

랜덤 이미지

퇴마록 세계편 2권 – 용어 해설


왕은 아발론 섬에 잠들고

도끼창(Halberd, 핼버드)

15~16세기에 만들어진 무기로 도끼와 같은 넓적한 날과 열 쇠의 모양인 뾰족한 돌출구가 있고, 창처럼 날카로운 날이 끝에 솟아 있는 복합적인 무기로서 철퇴와 긴자루가 달린 도끼, 그리 고창을 겸용할 수 있는 무기이다.

드루이드(Druid)

드루이드는 고대 켈트족의 의례를 담당하던 전문 사제들을 일 컫는다. 이들은 특권 지위를 누리던 귀족 계급으로 형성되어 켈 트족의 종교 행사를 관장했기 때문에 켈트족의 종교는 드루이 드교라 불렸다고 한다. 그들은 고대의 사제들이 그랬듯이 희생 제의를 관장했고 점술사이자 악마를 추방하는 주술을 하였으며, 의사면서 은밀한 지식의 샘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드루이드 가 된다는 것은 당시의 사회에서 곧 특권 계급으로의 상승을 의 미했기에 드루이드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녀에 관계없이 20여 1년에 걸친 고된 훈련을 거쳐야만 했다. 수많은 경전과 주문을 외 워야 함은 물론 그에 연관된 드루이드의 지적 사료들을 통찰해 야 했기 때문이다.

로마인들이 갈리아를 정복한 후 수많은 자료들을 파괴한 탓 에 드루이드에 대한 자료는 미미하다. 타키투스나 케사르, 디오 도로스 시켈로스, 플리니우스의 간략한 기록만이 전할 뿐이지 만 그 기록도 실제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 여겨진다. 타키투스는 “드루이드들은 양손을 하늘로 향하여 번쩍 들고 기도하면서 무 시무시한 저주를 뿜어 댔다. 이 냉혹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은 전 투 뒤에 공물대를 포로들의 피로 적시고 그 내장을 그려서 신 에게 바치고 있다”고 묘사했으며, 또 케사르는 “한 생명을 구하 기 위해서는 한 생명을 희생시켜야 한다”는 드루이드들의 사상 을 예로 들면서 드루이드의 신들은 죄인을 산 채로 바치기를 원 하지만 죄인이 언제나 부족했기 때문에 죄 없는 사람들까지도 처형했다고 적고 있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는 “그들은 횡경막 윗부분을 칼로 찔러 남자를 쓰러뜨린 뒤 손발의 경련과 출혈 모 양에 따라 미래를 예언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플리니우 스의 『박물지』에도 드루이드 의식의 내밀한 부분을 언급하고 있다. “드루이드의 의식은 신성한 떡갈나무 주위에서 행해진다. 그들은 떡갈나무의 가지와 잎사귀 없이 산 제물을 바친다든가 하는 따위의 의식을 거행하는 경우는 결코 없다.”

이러한 드루이드교는 로마인들에 의해서 말살되고 만다. 케사 르가 갈리아를 정복한 후 로마인들은 드루이드를 이용하여 호전 적인 켈트 귀족들의 저항을 무력화시켰다. 갈리아가 평정된 다 음에는 드루이드교가 야만적이라는 이유로 박해를 시작했으며, 마침내 클라우디우스 황제 때 드루이드교를 말살시키는 데 성공 하였다. 때마침 팽창하기 시작한 크리스트교는 드루이드교를 회 생 불능의 사태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18세기의 성직자인 스투 클리 박사는 스톤헨지를 조사하던 끝에 이 거대한 유적을 만든 사람이 드루이드이며, 드루이드들은 아브라함의 직계자손으로 정통 영국적 종교의 계승자라고 하면서, 실제로 로마인들에 의 해야만적으로 왜곡되었으며 산 제물을 바치는 의식은 아브라함 의 행동을 오해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발표했다.

현대에 이르러 영국에서는 여러 형태의 드루이드 협회와 신 드루이드교가 등장하여 활동하고 있다. 물론 고대의 드루이드 형태와는 다른 친목의 의미나 로맨티시즘, 신비적인 경향을 견 지하는 모임이 다수이다. 윈스턴 처칠도 청년기 때 드루이드 협 회의 회원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현대의 신 드루이드교 도들은 1905년 이래 하짓날 스톤헨지에 모여 그들의 의식을 거행하는데, 고대의 유물인 스톤헨지의 훼손을 염려하는 영국 정부로서는 이 행사를 합법적으로 금지시킬 방법이 없어 고민중이라고 한다.

런던탑

런던탑은 영국의 명소 중 하나이나 주로 비극적인 전설이 많 고 감옥으로 많이 쓰였다. 또한 런던탑은 요새지로서 난리가 났 을 때 최후의 피난지이기도 했으므로 어두운 기억이 많은 것도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주 건물인 화이트타워는 현재 무기 박물 관으로 쓰이고 있다.

런던탑의 유령 소동

런던탑의 컴컴한 건물은 각기 수많은 역사상의 비극을 목격해 왔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비참하고 잔인한 사건은 ‘피의 탑’의 한방에서 있었다고 하는 국왕 에드워드 4세(제위 1461~1483) 의 두 명의 유아 암살이다.

요크가와 랭커스터 가가 상쟁한 긴 장미 전쟁의 말기에, 요크 가의 에드워드 4세가 승리를 거두고 왕위에 올랐을 때, 그 동생 인 글리스터 공은 어떻게 해서든지 권력의 자리에 앉으려는 야 심을 품고, 먼저 형인 왕에게 참언을 해서 왕의 다음 동생(글리 스터 공에게는 형이 된다) 클래런스 공을 런던탑에 투옥시켰다.

이것이 1478년의 일이다.

그 후 1483년에 에드워드 4세가 병사하고 나이 어린 큰아들이 왕위를 이어받아 에드워드 5세가 되었다. 그러나 글리스터 공은 에드워드 5세와 그 동생 요크 공이 전왕의 정당한 적자가 아니 라는 소문을 퍼뜨리고 자기에게 왕위 계승권이 있다고 주장하여 억지로 왕좌에 앉은 뒤, 어린 왕자 둘을 런던탑에 유폐시켰다. ‘피의 탑’ 위에 있는 한 방이 에드워드 5세와 동생 요크 공이 갇혀 있던 곳인데 1483년, 어느 날 밤 백부 글리스터 공의 명 령을 받은 암살자 월터 티렐이 침입하여 두 형제를 교살하였 다. 글리스터 공이 조카를 교살한 주모자라는 설에 확실한 증 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영국의 추리 소설가 조세핀 테 이(1896~1952)가 이 역사 미스터리에 도전하여 『시간의 딸 (1951)이라는 장편 추리 소설을 발표했다. 부상당한 형사가 병 원에서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여러 가지 역사책을 독파한 다음, 최후로 몇 가지 자료로부터 글리스터 공이 무죄라는 결론을 이 끌어 낸다. 살인범, 왕위 찬탈자라는 오명을 오랫동안 뒤집어쓰 고 있던 글리스터 공은 이것으로 누명에서 해방된 셈이며, 전문 역사학자도 이 쾌거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룬(Rune) 문자

중세 드루이드들이 사용했다고 믿어지는 고대 문자. 그러나 정확한 기원은 알려져 있지 않다.

멀린

아더 왕을 도왔다는 영국 고대 전설상의 대마법사 멀린은 사 악하지도 선하지도 않은 존재인 요마(妖)잉큐부스의 아들이 다. 멀린의 어머니는 멀린을 낳자 곧 승려에게 맡겨 세례를 받게 했기 때문에 아버지와 같은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멀린이 태어난 당시 영국은 자신의 군주인 모이네스를 죽이 고, 그 두 동생 유더와 펜드래건을 추방한 집사 보티건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다. 그는 왕국의 합법적인 후계자들이 공격해 올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견고한 요새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렇지 만 그 요새는 번번이 무너졌다. 점성가들은 이 같은 현상을 막기 위해서는 인간을 아버지로 하지 않고 태어난 아이의 피로 요새 의 주춧돌을 적셔야만 한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보티건은 전국 에 수소문한 결과 멀린을 발견하게 되었다. 멀린은 왕에게 끌려 간 다음 요새가 불완전한 이유를 알려 주었다. 그것은 두 마리의 거대한 용이 요새 밑에서 싸우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멀 린의 말에 따라 보티건은 일꾼들에게 요새의 밑을 파보도록 하 였다. 땅을 파자 빨갛고 흰 커다란 두 마리의 뱀이 나와 용트림 을 하며 싸움을 시작하였다. 그것은 왕위 계승자인 유더와 펜드 래건의 공격을 상징한 것이었다. 얼마 후 유더와 펜드래건이 대군을 이끌고 보티건을 공격하여 그를 생포한 다음 그가 애써 건축한 요새에서 산 채로 화형시켜 버렸다.

멀린은 펜드래건과 이후의 유더, 아더 왕의 시대에 이르기까 지 가장 신임받는 고문이었다. 그는 다양한 마법의 능력을 가지 고 있었다. 변신의 능력도 있어 왕을 위해 사용하기도 했고 오락 을 위해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항상 예지하고 있었다. 그는 호수의 요정 비비안을 사랑하였다. 그런데 사랑에 빠진 비비안은 항상 멀린 을 자기 곁에 붙잡아 놓고자 골몰하였다. 그러던 중 그녀는 멀린 에게 결코 허물어지지 않는 아름다운 마법의 저택을 고안해 달 라고 한 다음, 자신에게 그 방법을 알려 준다면 자신이 직접 그 집을 짓겠다고 말했다. 멀린은 기분이 좋아 그녀에게 방법을 알 려 주었다. 어느 날 아름다운 브리셀리앙드 숲을 지나던 멀린은 꽃이 만발한 사시나무 숲에서 비비안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잠이 들었다. 그러자 비비안은 멀린에게 배운 마법으로 결코 자신의 힘이 아니면 허물어지지 않는 저택을 지어 그를 가두어 버렸다. 그 후 비비안은 그 저택 안을 수시로 드나들었지만 멀린은 그 안 에 갇힌 채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못했다. 아더 왕은 궁에서 갑 자기 멀린이 사라져 버리자 기사들을 보내 그를 찾도록 했다. 멀 린을 찾기 위해 나선 기사들 중 한 사람인 가웨인 경이 브리셀 리앙드 숲을 지나다가 멀린의 메시지를 듣게 되었다. 멀린은 갇혀 있는 와중에서도 자신의 마법의 힘을 동원하여 아더로 하여 금성배)를 찾아 나설 것을 전하고, 아울러 성배를 찾을 수 있는 기사는 이미 탄생하였으며 이미 왕으로부터 기사의 작위를 받았음을 알려준다. 이 밖에도 멀린이 예언한 것들은 모두 이루 어졌다고 한다.

멀린은 중세 기사 이야기에 흔히 등장한다. 그는 어떤 커다란 사건이 일어났을 때 신비스럽게 나타나곤 하였다. 스펜서의 작 품 속에는 멀린이 마법사로서 아더 왕의 도저히 뚫을 수 없는 방 패와 무기를 제작했다는 등의 이야기들이 그려져 있다.

면도날 잭

빅토리아 시대의 런던의 이스트엔드는 영국의 얼굴에 돋아 난 곪은 상처였다. 악취가 풍기는 거리의 양쪽에는 누추한 집들 이 옹기종기 붐비고 있었다. 밤이 되면 골목길, 공터, 모퉁이들 은 창문 밖에까지 촛불이 미치지 못해 깜깜한 동굴이나 다름없 었다. 오막살이 안에서는 과밀하게 들어찬 주민들이 조금이라도 장소를 더 차지하려고 아우성이었다. 집 밖에서는 남자, 여자, 어린애 할 것 없이 거리에서 비참한 밥벌이에 혈안이 되어 있었 고, 범죄를 밥 먹듯 일삼기도 했다. 유일한 위안은 몇 페니를 주 고진 한 병을 사가지고 곤드레가 되어 만사를 잊는 것이었다. 여자들은 매춘 이외에 살아갈 길이 달리 없었다.

이러한 가난과 비참의 도가니 속으로 면도날 잭이 발을 들여 놓았다. 1888년 가을의 일이었다.

메리 앤 니콜스는 한물간 여자였다. 마흔두 살로 남자의 눈을 끌 만한 매력은 모두 잃어버린 처지였다. 그날 밤은 싸구려 여인 숙에서 하룻밤을 지내는 데 필요한 4페니조차 없었다. 동전 몇 푼은 이미 진을 사 마시는 데 써 버린 터였다. 그때 빅스 로라는 좁은 골목길에서 조그만 사나이가 접근해 왔을 때만 해도 메리 는 이제 발을 뻗고 편안히 하룻밤을 잘 수 있는 기회가 오는구나 생각했다. 따라서 남자가 어둠 속으로 유인했을 때도 별로 놀라 지 않았다. 몇 미터 떨어진 곳에 오가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 었다. 그러나 뭔가 좀 잘못된 것 같다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 미 늦었다. 면도날 잭은 뒤로 돌아 손으로 메리의 입을 틀어막고 선 그녀의 목을 땄다. 1888년 8월 31일 금요일 이른 아침, 트럭 운전사가 난도질당한 여인의 시체를 발견했다. 면도날 잭의 공 포 시대가 막을 올린 것이다.

그는 정확히 일주일을 기다린 후에 두 번째 살인을 했다. 희생 자는 역시 매춘부였다. 마흔일곱이 된 애니 채프먼이 두 번째 희 생자였다. ‘다크 애니’로 알려진 이 매춘부는 면도날 잭에게 살 해되었을 때 폐결핵으로 이미 죽어 가고 있었다. 이 여자의 시체 는 핸버리가(街) 이십구 번지에 있는 뒷마당에서 시장(市場)의 한 수위에 의해 발견되었다. 시체 발치에는 죽은 여자의 반지와 얼마 안 되는 동전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여자는 배를 난도질당해 내장이 송두리째 나와 있었다.

그러나 면도날 잭은 아무런 단서도 남기지 않았다. 검시관들 이 추측할 수 있었던 것은 범인이 왼손잡이라는 것과, 약간의 의 학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시체를 검시한 한 외과의 사는 살인이 능숙하게 그리고 매우 솜씨 있게 자행되었다고 말 했다.

9월 30일 밤, 면도날 잭은 또 두 여자를 살해했다. 그리고 그의 끔찍스러운 살인 경력에서 유일한 직접적인 단서라고 할 만한 것을 남겼다. 롱 리즈 스트라이드라는 여자는 버너가 사십 번지 뒷골목에서 시체로 발견되었을 때, 목에서 아직 피가 흐르고 있 었다. 가장 처참하게 난자당한 케이트 에도우스의 시체는 거기 서 걸어서 몇 분 안에 갈 수 있는 마이터 광장에서 발견되었다. 하룻밤 사이에 일어난 연쇄 살인으로 전 런던 시가 공포에 사 로잡히게 되었다. 갖가지 소문이 나돌았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정체는 몰랐다. 그러던 중 11월 9일 또 다른 살인 사건이 발생 했다.

스물다섯 살의 메리 켈리의 생전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본 사 람은 살인마를 제외하고는 조지 허친슨이라는 행인이었다. 메리 는 조지에게 밀러스 코트 십삼 번지에 있는 자기의 방세를 낼 돈 이 필요하다며 치근거렸다. 그러다가 그녀가 깔끔한 콧수염을 달고 사냥 모자를 쓴, 말쑥한 옷차림의 조그만 사나이를 따라가 면서 말을 붙이는 것을 허친슨은 지켜보았다. 이튿날 아침, 비좁 은 자기 방에서 팔다리가 절단된 그 여인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메리는 면도날 잭의 마지막 희생자였다. 그 후로 살인마는 소 름끼치는 살인 행각을 하지 않았다. 형사들은 범행 후 계속 그를 추적했으나 결정적인 성과는 올리지 못했다.

면도날 잭의 정체에 관한 가장 그럴듯한 의견은 작가이며 방 송인이던 대니얼 파슨이 제시한 의견이다. 그는 조사의 기초를 멜빌 맥노튼 경의 노트에 두고 있다. 맥노튼은 연쇄 살인 사건이 발생한 이듬해에 런던 경시청에 들어가 1903년 범죄수사부장을 지낸 인물이다. 그의 노트에 의하면 경찰은 세 명의 용의자에게 수사를 집중하고 있었다. 경찰은 몬태규 존 드루이트라는 타락 한 변호사를 살인범으로 단정했다고 한다.

파슨도 다년간 드루이트의 가족을 조사한 후, 이 결론에 동의 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드루이트의 가족들도 그를 면도날 잭이 라고 믿고 있었다 한다. 또 파슨에 의하면 그의 사촌 라이어넬 드루이트는 가장 먼 살인 현장에서도 걸어서 10분 거리의 화이 트채플 마이노리스에 외과 병원을 차려 놓고 있었다 한다. 또한 드루이트의 어머니는 정신병자였으며 드루이트도 자기가 발광 하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드루이트는 체포되지는 않았다. 그는 최후의 살인이 있은 얼마 후 행방을 감추었다. 칠 주 후인 1888년 12월 31일, 그의 시 체가 템스 강물 위에 떠 있었다. 자살했을까? 아니면 그도 역시 살인마의 제물이 된 것일까? 만약 드루이트가 진짜 화이트채플 의 살인마였다면 그것은 마땅한 인과응보였다고 할 것이다. 모 든 진실을 알고 있는 것은 오직 면도날 잭 자신뿐이다. 그러나 면도날 잭이 누구였건 그의 무시무시한 비밀은 영원히 어둠속 에 파묻혀 버렸다.

스톤헨지 (Stonehenge)

그 근처에서는 구할 수 없는 거대한 돌들로 이루어진 유럽 최 대의 선사 시대 구조물. 전설에 의하면 드루이드들이 스톤헨지 를 세웠다고 하지만 실제로 스톤헨지가 세워진 것은 그보다 훨 씬 전인 기원전 1900년경인 것으로 추정된다. 스톤헨지가 만들 어진 이유나 그 용도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정확한 내용이 밝혀 지지 않고 있다.

아더왕의 전설

브리튼 왕 콘스탄스에게는 모이네스와 유더, 펜드래건의 세 아들이 있었다. 이들 중 모이네스와 펜드래건은 색슨족과의 전 쟁과 신하들의 반역에 의하여 죽고 유더가 왕위를 이어받게 된 다. 유더는 선대로부터의 고문으로 있던 마법사 멀린에게 명령하여 아일랜드에서 거대한 돌을 운반해 오도록 하였다. 이것이 오늘날 솔즈베리에 있는 ‘스톤헨지’이다. 멀린은 또 잉글랜드 북 부에 있는 칼라일로 가서 원탁을 만들어 왔다. 이 원탁에는 그 나라의 고귀한 귀족만이 앉을 수 있도록 하였다. 이 집단에 가입 된 사람들은 선서에 의해서 모험과 협동과 임전무퇴의 의무가 부여되었다. 그 후 왕은 이 조직의 결성과 매년 칼라일에서 열기 로 한 축제를 기념하기 위하여 모든 신하들을 부부 동반으로 초 대하였다. 이 연회에서 왕은 틴터디엘의 영주 골로이스의 부인 인 이젠에게 반해 구애하게 된다. 이젠의 고백으로 이 사실 을 알게 된 공작은 왕에게 작별을 고하지도 않고 궁을 빠져나가 버린다. 이를 기회로 왕은 공작에게 소환령을 내리고 이에 불복 하자 반역자로 몰아 군사를 동원하여 공작을 살해한다. 그리고 왕은 멀린의 도움으로 골로이스로 분장하여 이젠느와 결혼하게 된다. 이 결합으로 전설의 주인공 아더가 탄생하게 된다.

아더는 유더 왕 사망 당시 겨우 15세의 소년이었기 때문에 그 가왕으로 즉위하는 데 반대하는 귀족들이 많았다. 그러자 평판 을 얻고 있던 브라이스 주교는 크리스마스 이브 집회에서 미래 의 왕에 대한 신의 뜻을 알려 줄 것을 기도하였다. 그러자 교회 문 앞에 커다란 돌 한 개가 나타났고, 돌에서 보검이 발견되었는 데 손잡이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나는 엑스칼 리버라 하는 왕의 아름다운 보물이다.” 그러자 브라이스 주교는 그 돌에서 칼을 빼내는 사람이 왕으로서의 자격을 부여받게 될 것이라고 선포하였다. 브리튼의 전 기사들이 앞다퉈 엑스칼리 버를 뽑으려 하였으나 칼은 꼼짝도 안 했다. 해마다 마상 경기가 열리던 성촉절, 부활절, 성신강림절이 와도 칼은 그 자리에 그대 로 있었다. 당시 아더는 케이 경의 종자로 일하고 있었다. 케이 경은 마상 경기에서 열심히 싸우다 칼이 부러지자 아더에게 새 칼을 가져오라고 일렀다. 아더는 급히 집으로 갔으나 칼을 얻지 못했다. 그러던 중 교회 앞에 있는 엑스칼리버를 발견하고는 쉽 게 그 칼을 뽑아 케이 경에게 가져다 주었다. 이로 인하여 엑스 칼리버를 가지게 된 케이 경이 왕으로 추대될 뻔하였으나, 이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칼을 돌에 꼽고 다시 뽑기로 하였다. 그러나 케이 경은 칼을 빼지 못해 왕의 자격이 박탈되고 만다. 이렇게 해서 엑스칼리버를 뽑은 아더가 브리튼의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아더는 왕이 되자 로킹햄의 숲에서 진을 치고 있는 열한 명의 왕과 한 사람의 공작이 자신을 공격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멀린의 충고로 훌륭한 기사인 밴 왕과 보호트 왕에게 도움 을 요청하였다. 이들의 용맹과 멀린의 마술을 동원하여 아더는 수적으로 우세한 반역자들을 격퇴할 수 있었다.

자신감을 얻은 아더는 호엘과 합세하여 색슨족과의 전쟁을 개 시하였다. 용을 새긴 황금 투구를 쓰고 어깨에는 프리웬이라는 성 처녀가 그려진 방패를 걸치고, 아발론 섬에서 제조된 검 엑스 칼리버와 롱기누스라 불리우는 창을 들고 전장에 임했다. 그리 하여 험악한 대치 끝에 벌어진 전투에서 적을 대패시켰다. 이승 리를 바돈 산의 승리라고 일컫는다. 이와 함께 아더는 색슨족과 의 싸움에서 열두 번의 승리를 거두면서 색슨족의 진출을 저지 시키는 데 성공한다. 이로 인하여 아더는 그의 용감한 기사들과 함께 오랫동안 브리튼을 평화롭게 통치하였다.

그러나 이십 년 후 그의 조카 모드레드가 사리사욕에 눈이 멀 어 반란을 일으켰다. 이로 인하여 콘웰 주의 캄란에서 치열한 전 투가 벌어져 모드레드는 살해되고 아더는 중상을 입게 된다. 아 더는 해로를 통하여 글래스톤베리로 옮겨졌으나 생명을 잃고 그 곳에서 매장되었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아더 왕의 묘지는 웨스트민스터 사원 안에 있 다고 한다. 후일 헨리 2세의 명령에 의해 1150년 아더 왕의 분묘 발굴을 지켜본 기랄두스 캄브렌시스는 아더의 유골과 검, 납으 로 만든 십자가를 보았다고 한다. 그 묘비에는 거친 로마 문자로 이렇게 씌어 있었다고 한다.

“이곳 아발론 섬에 유명한 아더 왕이 누워 있노라.”

영국 사람들은 아직도 아더는 죽지 않았고 상처를 치료받기 위 해 호수의 요정인 비비안에 의해 요정의 나라로 이송되었으며, 그는 언젠가 다시 나타나 그들을 독립국에서 살도록 해 줄 것이 라는 오랜 믿음을 지켜가고 있다. 현대에 이르러 많은 비평가들 이 아더왕 신화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실제로 그와 유사한 왕이 있었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는 추세이다. 웨일스의 음유시인들 의 저서에 아더 왕의 이야기가 자주 등장하는 연유이다.

영국심령학회

영국심령연구협회(S.P.R.)를 일컫는다. 이는 1882년 심령 현상 연구를 위하여 설립되어 현재도 활동하고 있는 의

세계 최고의 추도적 기관이다.

정기 간행물로 회지와 부정기 간행물로 보고서를 발행하고 있 다. 그 전신은 미국의 하이즈빌 사건 삼 년 후인 1951년 케임브 리지 대학의 망령학회(亡靈)라고 한다. 역대 회장에는 헨리 시지윅, 윌리엄 배릿, 프레드릭 마이어즈, 윌리엄 크룩스 등이 있었다. 이 S.P.R은 해외의 저명한 학자를 회장으로 받아들여 윌 리엄 제임스(1895), 샤를 리셰(1905), H. L. 베르그송(1913), 카미유 플라마리옹(1923), 한스 드리슈(1926~27) 등이 명성을 드높였다. 시초에는 심령 연구에 유령 문제를 포함하는 것이었 으나 근래에 와서는 초심리적인 것에 주로 중점을 두고 연구하고 있다.

중세 기사의 복장

아더 왕 기사들의 복장이 12~13세기의 철갑 복장으로 알려진 것은 아더 왕을 중세의 기사처럼 묘사한 토머스 맬러리 경 때문 이다. 그러나 아더 왕과 기사들의 복장은 로마의 영향을 많이 받 아 로마 시대의 복장과 유사했을 것이다.

캐드베리

아더왕의 전설의 밑바탕이 되고 있는 성 캐멀롯은 으레 캐드 베리로 알려져 있다. 이 지역은 요새의 성벽이 6세기경, 그러니 까 아더 왕 시대에 대대적으로 보수되었음이 증명되었다. 따라 서 캐드베리에는 영국 남서부 최대의 군사 시설이 있었다는 이 야기다. 이 마을 사람들에게는 아더 왕의 유령에 얽힌 이야기들 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보름달 뜬 밤이면 말을 탄 아더 왕과 그 의 기사들이 언덕을 지나가기도 하고, 크리스마스이브에는 마을 교회 곁에 있는 샘물을 마시러 오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 언덕은 속이 텅 비어 있는데 성 요한의 이브에 쇠나 금으로 된 빗장을 열고 안을 엿보면 신하들에게 둘러싸인 아더 왕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아더 왕의 주검이 묻혀 있다고 알려져 온 글래스톤베리의 수도원도 이 캐드베리와 매우 가까우며 자그마한 오솔길이 이 두 지점을 연결시키고 있다. “황량하기 이를 데 없는 겨울밤이면 아더왕이 사냥개들을 이끌고 이 오솔길을 지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전해 온다.

캔터베리의 대주교, 베케트

토머스 베케트(Thomas Becket)는 위대한 왕 헨리 2세 즉위 당시 캔터베리 대주교 테오발드(Theobald)가 왕의 측근에 신임 할 만한 인물을 두기 위해서 등용, 최고 법관을 대신하는 국새상 서에 임명되었다.

테오발드 대주교가 세상을 떠나자 헨리 2세는 베케트에게 캔 터베리 대주교의 직분을 주었다. 세간에서는 무사로 보이는 대 영주 베케트를 신성한 수도사의 우두머리로 임명한 것에 대해 불평이 많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베케트는 대 주교로 자리하게 되자마자 완벽한 금욕주의자로 변화하였다. 그 는 여생을 기도와 종무(宗)에 바쳤다. 그는 절제와 자부심으로 완전한 성직 생활을 추구하면서 어쩔 수 없이 왕과 마찰을 빚게 된다.

그것은 종교 재판 문제였다. 당시 재판은 세속 재판과 종교 재 판으로 분리되어 있었는데, 교회가 모든 재판을 극형이 없고 회 개와 벌금만이 있는 종교 재판으로 조작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 에 따라 헨리 2세는 종교 재판에서 유죄가 확정된 성직자의 관직 을 박탈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렇게 되면 그 성직자는 일반인이 되므로 종교 재판 이후 세속 재판을 다시 받아야 하는 형편이었다. 베케트는 한 사람이 한 범죄로 두 번 처벌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단호히 거부하였다.

이에 격노한 왕은 클래런던 종교 회의를 소집하게 된다. 이에 베케트는 생명의 위협을 받고 왕의 승리를 증거하는 클래런던 헌장에 서명하였지만, 강압된 서약은 효력이 없다는 교황 알렉 산더의 추인에 의해 굴레에서 해방되었다. 그는 귀족 법정에서 유죄 선고를 받고 패배했으나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연한 태도로 영국을 떠나 망명지인 베즐레이로 간 다음, 헨리 왕의 파문을 공 표한다.

당시 시대 상황은 왕이 아무리 강력하다 해도 파문을 당하고 서는 왕조를 유지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왕으로서 자신이 제정한 클래런던 헌장을 포기하고 대주교에게 굴복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왕은 절충안을 모색한 끝에 베 케트를 만나 화해를 표하고, 그에게 영국의 관례를 존중하겠다 는 서약을 요구했다. 베케트는 대주교가 왕의 총애를 잃었을 때 그를 배반한 주교들을 파면할 수 있다는 교황의 지시서를 입수 하고 그에 따라 행동했다.

크리스마스 잔치 도중 이러한 소식을 들은 왕은 분노하였고 신하 중 네 명의 기사가 캔터베리로 베케트를 찾아가 왕에게 굴 복할 것을 강권하였다. 베케트가 응하지 않자 그들은 칼을 뽑아 베케트의 목을 치게 된다. 그리하여 베케트는 영국 역사상 왕권에 대항하여 종교의 권위를 사수한 위대한 순교자가 되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왕은 절망에 빠진 자신의 위급한 신세를 깨닫게 된다. 국민들은 일제히 순교자의 편을 들어 왕의 적대자 들과 함께 궐기하기 시작하였다. 헨리 2세는 급히 클래런던 헌 장 폐기를 발표하고 교황을 무마하려 한다. 그다음 몰수한 캔터 베리 대주교의 재산을 반환하고, 그리스도의 성묘를 수호하는 성전기사단에게 의연금을 보냄과 아울러 수도원을 건립하고 가 톨릭 교회로부터 이탈한 아일랜드인을 토벌할 것을 서약하였다. 그러나 영국에 있던 처와 자식들마저 자신을 배반하고 군사를 일으켜 역모를 꾀한다. 그는 일대 존망의 위기에 이르러 대륙에 서 영국으로 상륙함과 동시에 캔터베리로 간 다음, 장시간 기도 를 올린 후 옷을 벗고 70명의 수도사로 하여금 자신의 몸에 채찍 질을 하도록 한다.

이후 그는 승승장구하여 반란자들을 정벌하고 질서를 회복하 게 된다. 논란이 되었던 종교 재판 문제도 자연스럽게 해결되었 다. 즉 반역죄로 고발된 성직자는 국가 재판에, 기타 살인 및 폭 행같은 중죄로 고발된 성직자는 교회 재판에서 처리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구분 짓기 모호한 문제들 때문에 이후 몇 세대 간 갈등을 겪었다. 이러한 불완전한 협정을 달성하는 데까지만 도 가장 위대했던 두 사람의 생명과 우정이 희생되었던 것이다.

켈트족

켈트족은 유럽 인종의 하나로 현재는 스코틀랜드, 스위스 등 지에 남아 있는데, 일반적으로 키가 크고 머리털은 금발 또는 붉은 밤색을 띠고 있다. 켈트족은 기원전 4세기경부터 중부 유 럽에는 골(Gaul)인이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영국에는 브리튼 (Britain)인으로 번영을 누렸다. 특히 영국의 켈트족은 아더 왕 이라는 걸출한 지배자를 만나 영국 내부뿐만 아니라 유럽 원정 을 나서서 여러 지방을 점령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 아더 왕의 시대는 기원후 5세기경으로 중세의 기사 시대가 아니 며, 당신의 켈트족은 로마의 문물을 매우 많이 받아들여서 거의 반(半) 로마화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국 남부에는 로마식을 본뜬 유적이 많이 남아 있으며 그들의 의식주도 로마 것의 영향 이 많아서 뒤의 연대기 기록자들은 켈트족을 ‘로마인’이라 부르 고 있을 정도다.

켈트족은 아더 왕의 죽음 이후 색슨족에 밀려 스코틀랜드 지 방으로 밀려났으며 외국 영화(예: <로빈훗>>에 등장하는 것처럼 야만적인 종족이 아니라, 로마식으로 높은 문화를 자랑하는 종 족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히려 당시에는 색슨족이 훨씬 야만인에 가까웠다.

현재도 스코틀랜드인은 자신들의 독특한 문화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자주성을 굳게 지키고 있다.

플레일

쇠사슬로 뾰족뾰족한 돌기가 솟은 아홉 개의 짧은 쇠막대를 연결한 무기. 여러 가닥의 끈에 납추를 매단 무기도 플레일이라 고 부르지만 원래는 짤막한 쇠막대를 연결한 형태의 것이다.

헨리 8세와 토머스 크롬웰

<천일의 앤> 이야기로 유명한 영국의 왕 헨리 8세는 야망이 많 은 군주였다. 그는 형수였던 캐서린(Catherine of Aragon)과 정 략 결혼했으나 캐서린이 왕자를 얻지 못하자 대통을 잇고자 하 는 욕심으로 캐서린과 이혼하고 앤(Anne Boleyn)과 결혼하고 자 한다. 그러나 가톨릭은 이혼을 금지하고 있어 헨리 8세는 울 지 추기경을 파견하여 교황과 교섭하나 실패한다. 결국 헨리 8세 는 파문을 당하고 만다. 헨리는 교황, 그보다는 가톨릭과 심하게 대립하고 토머스 모어와 존 피셔 등의 고관들을 사형시키기까지 이른다. 이 과정에서 간신인 토머스 크롬웰은 온건파인 성직자 크랜머와 함께 수도원들의 영지를 몰수하고 종교(가톨릭) 건물 들과 수도원 등을 파괴한다. 이후 행해진 우상 타파의 투쟁 때, 크롬웰은 성 토머스 베케트의 혈흔이 가짜가 아닌가 검사를 시 키고, 성 토머스 베케트의 성자의 이름을 박탈하며 캔터베리에 보관된 유골까지 파괴하게 된다. 이 와중에 앤은 공주를 낳지만 아들을 유산한다. 이에 분노한 헨리는 앤의 목을 베고 제인 시모어(Jane Seymour)와 결혼한다. 제인 시모어는 결국 왕자(에드 워드 6세)를 낳고 죽으며 이후 왕을 루터파로 유인하려던 간신 크롬웰은 독일 클레브 가의 왕녀 앤과 헨리가 정략결혼을 하게 유도하지만, 그녀가 헨리의 마음에 들지 않자 그 대신 목숨을 바치게 된다.


그 맑은 가을 하늘빛

두개골로 만들어진 잔

실제로 고대에는 적의 두개골에 금박 등을 입혀 잔을 만드는 야만적 풍습이 있었으며, 대영 박물관에는 스키타이족이 만든 두개골에 금박을 입힌 잔이 남아 있다.

수형도(形)

손에 공력이나 주술을 넣어 맨손을 칼과 같은 날이 선 형태로 바꿀 수 있는 술수.

스키타이족(Scythian)

기원전 8~7세기 중앙 아시아에서 러시아 남부 지방으로 이주 했던 유목 민족. 원래 이란인에 속하는 이들은 현재의 크림 지역을 중심으로 기원전 4~2세기에 사르마트인에 흡수될 때까지 강력한 제국을 형성하여 5세기 이상 유지했다.

스키타이는 용맹성, 특히 전투 중 말타기 솜씨로 인해 다른 부 족들의 경외의 대상이었다. 이들은 역사상 최초로 말타기를 터 득한 민족이기 때문에 그 솜씨는 다른 민족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스키타이는 아시아에서 이동한 뒤 이미 카프카스와 흑해 북부 평원을 점령하고 있던 킴메리족을 정복하고, 페르시 아 서부에서 시리아와 유대 땅을 지나 이집트 경계 지역까지 영 토를 넓혔다. 그러나 페르시아를 지배하던 메디아인이 이들을 공격해 아나톨리아 지방으로부터 몰아냈기 때문에 이들의 영토 는 페르시아 경계 지역과 쿠반을 거쳐 러시아 남부까지로 축소 되었다.

스키타이는 전투력뿐만 아니라 그들이 건설한 문명에 있어서 도 탁월했다. 이들 중 부유한 귀족 계급은 황금과 귀중품들로 가 득 찬 무덤들을 남겼다. 지배 계급이었던 로열 스키타이는 마침 내 러시아 남부와 크림 지역의 지배자가 되었다. 스키타이 군대 는 일반 평민들로 구성되었으며 음식과 의복을 지급받는 이외의 급료를 전혀 받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은 죽은 적의 머리를 베어 옴으로써 전리품을 나누어 가질 수 있었다. 대부분의 전사들은 그리스 양식의 청동 헬멧을 쓰고 쇠사슬 갑옷을 입었다. 주요 무 기는 두 번 휘게 만든 활과 끝이 세 갈래로 난 화살이었다. 칼은 페르시아 형이었다. 모든 스키타이인들은 적어도 한 필의 개인 용 말이 있었다. 그러나 부유한 사람들은 여러 마리의 말들, 특 히 몽골 조랑말을 갖고 있었다. 이들의 장례 풍속은 매우 정교했 으며 남자가 죽으면 그의 아내와 종, 많은 말들을 함께 매장했다. 스키타이의 미술품들은 주로 말 · 천막· 수레를 장식하는 물건 과 보석류로 이루어져 있다. 가장 인상적인 스키타이 공예품(지 금의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슈 미술관에 소장된 보 물의 일부)은 대부분 순금으로 주조(鑄造)된 것이며, 근대의 고 고학적 방법론이 발달하기 전인 17~19세기에 발굴되었다. 조금 만 더 나중에 발견되었다면 그 기원을 명확히 밝힐 수 있었을지 도 모른다.

의화단의 난

의화단(團)은 중국 청(淸)의 비밀 결사로 1900년에 외국 세력을 배척할 목적으로 산둥성(山東省)에서 봉기하여 각국 공 사관을 습격하는 등 북청 사변(의화단 운동)의 원인이 되었다.

제압부(制壓)

악귀나 악령의 힘을 눌러 꼼짝하지 못하게 만드는 부적.


가장 논리적인 남자

늑대 인간

늑대 인간은 ‘Werewolf’라고 불리며, 늑대의 머리와 손에 사 람의 신체를 지녔다고 하는 전설상의 괴물이다.

늑대 인간의 전설은 중부 유럽보다는 동구권에 주로 퍼져 있 는 전설로 프랑스 지방에도 상당히 널리 알려져 있다. 본문에서 의 배경은 독일이지만, 이는 블랙서클이 비교적 늑대 인간의 전 설이 적게 퍼진 곳을 이용하려 한 것이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설 정한 것이며, 실제로 독일에서는 유럽 내의 여타 지방보다 늑대 인간 전설이 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변신하지 않았을 때의 늑대 인간과 흡혈귀는 많은 공통된 특 성을 갖고 있다. 양 눈썹이 서로 붙었다는 것과 손톱이 동물의 발톱 같다는 것, 약간 뾰족하기도 한 작은 귀, 손바닥에 털이 나있다는 것 등이 흡혈귀와 흡사하다. 그러나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 늑대 인간은 두 손의 세 번째 손가락이 두 번째 손가락과 같거나 길다는 것.

늑대 인간은 변신하면 거대한 늑대가 되어 네 발로 걸어다니 기도 하고 털이 엄청나게 많이 난 두 발로 걷는 동물이 되기도 한다. 두 발로 걸을 경우, 보기 흉하기는 해도 얼굴은 사람 형상 을 갖추고 있으나 손에는 동물의 앞발처럼 갈퀴 모양의 손톱을 달고 있다. 어떤 형상을 하든 동물이나 사람의 목을 찢어 생살을 먹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사람이 늑대 인간이 되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중세 틸버리의 저바스라는 목사의 말에 따르면 보름달이 뜬 밤에 벌거벗고 모래사장에서 데굴데굴 구르는 것이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민화(民)에 따르면, 초승달 뜰 무렵에 잉 태되거나 보름달이 뜬 금요일에 집 밖에서 자기만 하면 흡혈귀 가 태어난다고 한다.

아일랜드에서는 신앙심의 부족으로 성(聖) 패트릭의 노여움 을 산 한 집안 식구 전부가 성자의 저주를 받아 칠 년마다 한 번 씩 늑대 인간으로 변했다고 한다. 어떤 유럽의 전설은 늑대가 물 을 마신 개천에서 물을 마신다든가 미친 늑대에게 물리거나 또 는 바꽃(늑대꽃)을 먹기만 해도 늑대 인간으로 변신하게 된다고 한다.

늑대 인간을 다루는 방법도 매우 다양하다. 프랑스계 캐나다 사람들 사이에 전승되는 이야기로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말하거 나 진짜 세례명으로 그 늑대 인간의 이름을 세 번 부르면 액막이 가 된다고 했다.

프랑스에서는 늑대 인간을 ‘루가루(loupgarou)’라 부르며, 그 것이 늑대 모습을 하고 있을 때 그 피를 세 방울만 빼내면 죽일 수 있다고 했다.

늑대 인간의 저주를 푸는 가장 잘 알려진 방법은 은으로 만든 총알로 쏘는 것이다. 은(銀) 탄환은 교회의 십자가를 만들 때처 럼 성화(聖化)된 은으로 만들어야 한다.

아스타로트어

아스타로트는 언어의 이름이 아니라, ‘악마의 군주’로 불리는 지옥의 삼대 실력자인 악마의 이름이다. 거대한 박쥐를 타고 다 니는 발명에 능한 악마로 대공작의 칭호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본문에서 카프너는 늑대 인간을 만드는 가상의 언어에 아무 이 름이나 둘러댄 것에 불과하며, 이런 이름의 언어가 실재하는 것은 아니다.


아라크노이드

‘나’ 자결

태극기공 18구결 중 하나. 나(拿)는 밀어낸다는 의미로 기공 력을 짧게 밀어내는 힘으로 바꾸어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불어 시 번역에 대해

본문에 나오는 불어 시의 내용은 필자가 한국어로 만들어 낸 말을 서강대 불어 강사로 재직중이신 김현정 님이 프랑스 대사 관에 근무하시는 분의 조언을 얻어 수고해 주신 것이다. 하이텔 에 도움을 요청하는 공고를 띄웠을 때 많은 분이 수고를 해 주셨 으나 최종적으로 이것을 본문에 실었으며 다른 분들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안시(ANSI) 문자

컴퓨터 그래픽용으로 쓰이는 표준 그래픽 문자의 이름.

테제베(TGV)

프랑스의 고속 전철.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