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세계편 2권 14화 – 그 맑은 가을 하늘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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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세계편 2권 14화 – 그 맑은 가을 하늘빛


케임브리지 부근에 있는 도자기 박물관은 일반인에게 잘 알 려져 있진 않다. 그러나 동서양을 통틀어 수만 종을 헤아리는 엄 청난 양의 도자기가 잘 보존되어 있어 도예에 관심 있는 사람들 이 손꼽는 장소였다. 영국에서 발생한 괴이한 일들을 해결하여 영국 여왕까지물론 비공식적인 일이었지만 접견한 퇴마사 일행은 영국에 온 김에 잠시 쉬기로 하고 각자 흩어져서 가보고 싶은 곳들을 돌아보는 중이었다.

준후는 도자기박물관이 있다는 소리를 주워듣고 그곳을 방문 하고 싶어 했다. 박 신부는 영국 성공회 측과 상의할 일이 있었 고승희는 어디서 멋진 남자라도 발견했는지 밖으로 나가고 없 었다. 현암은 피곤하고 귀찮다며 숙소에서 쉬겠다고 드러누워 움직이지 않았다. 준후의 표정은 울듯이 일그러졌다. 한나절의 시간으로 전시되어 있는 수많은 도자기를 다 둘러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준후는 그곳에 가고 싶었다. 다들 처음 안 사실이었 지만 준후는 도자기나 그릇 같은 것을 좋아했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것 중의 하나가 흙이잖아요. 그런 흙 으로 예쁜 도자기를 만든다는 게 신기하거든요.”

가장 귀여움받는 준후가 애타게 조르고 나서니 무뚝뚝한 현암 이야 못 들은 체해도, 마음 약한 연희는 청을 거절할 수가 없어 같이 박물관에 가기로 약속했다. 준후는 사람들의 눈에 띄는 것 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 헐렁한 흰 한복을 걸치고 연희와 함께 길 을 나섰다.

“여기 있는 도자기들, 좀 오래된 것들은 거의 영국이나 유럽이 아닌 다른 나라 것이구나.”

도자기를 만든 나라는 많았으나 언뜻 보아서는 중국의 도자기가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근세에 이르기까지 서양에서는 그다지 훌륭한 도자기를 만들어 내지는 못했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영국이나 유럽의 도자기는 그리 오래된 것이 없었고, 화려하기는 했으나 전체적인 격조는 떨어지는 편이었다. 준후의 간청에 못 이겨 따 라 나오기는 했지만 특이한 도자기들도 많아 연희도 제법 즐거 웠다.

한참을 둘러보자 연희는 크기나 규모에 비해 도자기박물관에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은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화려하 고 멋진 도자기들은 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했지만, 계속해서 엄 청난 수의 비슷한 도자기들만 보다 보니 점점 지치게 되었다. 그 러나 준후는 지칠 줄도 모르고 감탄사를 연발하면서 도자기 진 열대 사이를 다람쥐처럼 뛰어다녔다. 아직 삼분의 일도 채 보지 않았는데 연희는 서서히 다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래도 내 색을 하지 않고 계속 달음질치다시피 돌아다니는 준후를 열심히 따라가다 보니 어느덧 박물관의 외진 곳에 도달했다.

“어, 누나! 저기 봐요!”

준후가 한쪽의 장식장을 가리켰다. 그곳에 있는 도자기들은 어딘가 다른 느낌을 주었다. 대부분 푸른빛을 띠고 있는 것이 눈 에 확 들어왔다. 연희도 호기심이 생겼다.

“파란 도자기들이네. 고려청자일까?”

준후도 고개를 끄덕이며 꼴깍 침을 삼켰다. 보통의 칠이나 유 약을 먹이는 것만으로는 청자의 은은한 푸른빛을 제대로 낼 수 없다는 이야기는 연희나 준후도 들은 적이 있었다. 멀리서 보기 에도 은은한 빛을 맑게 풍기는 것이 친근한 느낌을 주었다. 준후 와 연희는 자신도 모르게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다가갔다. “와! 이 색깔 봐요. 정말 곱네요.”

연희도 고개를 끄덕였다. 사진이나 국내에서 보던 청자와는 또 다르게 이곳에 전시된 청자들은 정말 색이 고왔다. 맑은 가을 하늘의 푸른빛을 닮았다고나 할까?

“어떻게 흙을 구워서 저런 색깔을 냈는지 정말정말 신기해요.” 준후는 눈을 크게 뜨고 진열되어 있는 도자기들을 하나하나 유심히 훑어보았다. 연희도 도자기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지만, 보기만 해도 아! 하는 탄성이 절로 나올 정도로 색깔은 물론 자 태도 아름답고 우아했다.

“준후야, 정말이지 너무 아름답지 않니? 그렇지?”

준후는 홀린 듯 청자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고개만 끄덕거렸 다. 맑은 날을 찾아보기 힘든 영국에서 고향 하늘과 비슷한 고운 빛의 청자들을 보고 있노라니 고향에 대한 향수가 절로 일었다. 집 떠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러나 생각하니 연희는 피식 웃음 이 나왔다. 그러나 준후가 갑자기 시무룩하게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고향 생각을 떨쳐 냈다. 연희는 의아했다.

“왜 그러냐, 준후야?”

“음, 모르긴 몰라도 이게 진짜 청자의 색깔 같네요. 너무 고와요. 그쵸?”

“응, 동감이야.”

“그런데 왜 우리나라에선 이런 색깔의 청자를 하나도 못 봤을까요? 있는데 못 본 걸까요? 아니면 없는 걸까요?”

연희는 무어라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연희도 이런 고운 빛깔의 청자를 국내에서 본 적은 없었다. 국보급 도자기들은 간혹 볼 기회가 있었지만 그것들도 이렇게 맑은 빛깔이 나지는 않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청자 만드는 기술도 다 잊혔다잖아요. 왜 그렇게 됐는지…………..

연희는 말을 하지 못했고 후는 시무룩한 얼굴로 옆 칸에 있 는 청자들로 눈을 돌렸다. 갑자기 준후의 입에서 놀라는 듯한 소 리가 흘러나왔다.

“어? 저건…….”

준후가 손으로 가리키는 곳에는 다른 것들과는 어울리지 않게 온통 잿빛인 자기 하나가 놓여 있었다. 분명 모양이나 장식 따위 를 보면 청자임이 분명한데 우중충한 회색빛을 띠고 있을 뿐, 파란 빛깔은 전혀 없었다.

“희한하네요. 저건 왜 저렇다지?”

연희도 이상한 생각이 드는 참에 마침 옆을 지나가던 박물관 안내원이 보였다. 연희는 안내원을 불러 세우고 어째서 저기에 회색빛 자기가 있느냐고 물었다. 안내원은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짓다가 금세 미소를 되찾고는 사무적인 목소리로 친절하게 일러 주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변색되지 않았나 생각되네요.”

안내원의 말에 연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덧칠을 해서 색을 낸 가짜가 아닌 다음에야 청자가 변색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있을 법한 일이 아니었다.

“고려청자는 원래 전체가 푸른빛이 나게 만들어진 것이고 그렇게 만들어진 도자기의 색이 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데요?”

안내원은 어깨를 으쓱했다.

“저도 알 수 없지요. 저도 여기 근무한 지 오래됐습니다만 도 자기에 관한 건 자세히 모릅니다. 다만 들리는 말에 의하면 처음 에는 옆에 있는 것들보다 더 아름다운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고 해요. 그런데 어느 날부터 색이 탁해지기 시작하더니 저렇게 우 중충한 색으로 변해 버렸다고 합니다. 기이한 일이지만 무슨 이 유가 있겠죠. 조사도 해 보았습니다만, 당최 원인을 알 수 없다 더군요.”

안내원은 말을 마치고 가 버렸다. 연희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 다. 무슨 까닭이 있는 것은 아닐까? 준후는 벌써 눈을 감고 회색 청자에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영기가 느껴져요. 연희 누나.”

준후가 눈을 감은 채 속삭이듯 말했다. 연희는 준후의 말에 응 답하는 대신 주위를 먼저 둘러보았다. 준후가 하고 있는 행동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다행히 박 물관 내부는 오가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경비원 몇몇과 관람객 들이 어슬렁거리기는 했으나 이쪽을 주목하는 사람은 없는 듯했다. 연희가 조심스럽게 사방을 살피는 것도 알지 못한 채 준후는 계속 중얼거렸다.

“아주 오래된 영 같은데. 희미해요. 의사소통이 쉽지 않네요. 이건…….”

준후가 말을 하다 말고 연희의 손을 슬며시 잡아끌었다. 그러자 연희에게도 회색빛 청자 주위에 이상한 기운이 서서히 일어 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연희는 흠칫 놀라서 손을 빼려다가 이상 한 기운이 보여 주는 영상이 신기해 멈추었다. 연희는 과거에 이 름 모를 남자가 허공에 그려 내는 형상을 보고 그것이 일종의 영 적인 소통법임을 알게 되었다. 그때와 흡사하게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호기심이 일었다.

처음에 나타난 영상은 어수선했다. 강한 열기와 불 같은 것이 번득였고 그 와중에 혼란스러운 사람들 무리가 보였다. 동양 사 람도 있고 서양 사람도 있었다. 연희의 마음속으로 준후의 생각 이 전달되어 왔다.

연희 누나, 저건 저 도자기에 깃든 영의 기억이에요. 도대체 뭐가 뭔 지 알 수가 없군요.

준후의 말에 연희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영상의 대부분은 불 과 열기, 그리고 뭔가가 타는 모습이었고 소란스러운 싸움터 같 은 정경이었다. 우리나라를 연상시키는 장면도 있었지만, 대부 분은 중국 같았고 간혹 서양인의 얼굴도 흐릿하게 보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음울한 회색빛으로 물들어 가기 시작했고, 곧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준후가 한숨을 쉬면서 눈을 뜨자 연희의 시야에서도 청자 뒤 편의 영상이 사라졌다.

“기억이 너무 오래됐고, 또 혼란스럽게 나타나서 알아볼 수가 없네요. 이상해요.”

연희도 방금 본 것이 무엇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준후 의 영사로 인해 영상이 나타나고, 더구나 파래야 할 청자의 모습 이 회색빛을 띠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곡절이 있을 것이라는 생 각이 들었으나, 더 이상은 알 수가 없었다. 준후가 연희를 돌아 보았다.

“소혼을 해 볼까요?”

“그런 것 함부로 하면 안 된다고 신부님이 말씀하시지 않았 니? 그러지 마.”

“궁금한걸요. 더군다나 저건 고려청자인데, 우리나라 거란 말예요.”

준후가 말을 하는데 박물관 내에 안내 방송이 울려 퍼졌다. 이 제 박물관의 문을 닫을 시간이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연희는 어 깨를 으쓱하고는 준후의 손을 잡아끌었다.

“준후야, 일단 돌아가기로 하자.”

“싫어요. 궁금하다구요. 저 청자가 왜 저렇게 색깔이 우중충하게 되어 버렸는지. 이유가 있는 것이 분명해요. 알고 싶단 말 예요.”

“오늘은 돌아가자. 박물관 문 닫을 시간도 다 되었잖아. 오늘 본 것은 차차 생각해 보기로 하고 뭐 짚이는 것이 있으면 내일 다시 오자꾸나.”

준후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아쉬움이 남는지 계속 뒤를 돌아보 았다. 둘은 박물관의 문 쪽으로 걸어가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연희 누나, 누나는 역사에 대해서 잘 알죠?”

“글쎄, 나보다는 승희가 잘 알겠지. 나야 뭐…………….

“그래도 연희 누나도 잘 알 거 아니에요. 고려청자의 맥이 왜 끊어졌을까요?”

“그건・・・・・・ “

연희는 난감했지만 그냥 얼버무려서 말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우리나라는 과거에 도자기를 만드는 장인들을 천대하는 성 향이 있었단다. 손으로 뭔가 만드는 것을 천하다고 생각한 거지. 그래서 차차 사라져 간 것 아닐까?”

준후는 이해가 안 가는 듯 입을 삐죽 내밀고 뭔가 생각하다가 말을 꺼냈다.

“그럼 뭘까요? 더 좋은 것을 억지로 만들어 내라고 구박을 하 니까 그런 재주를 가진 사람들이 진저리가 나서 재주를 감춘 나머지 전해지지 않은 것이 아닐까요?”

연희가 듣기에도 준후의 말이 정답에 가까울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희는 섬뜩함과 대견함이 묘하게 뒤섞인 기분을 동시 에 느끼면서 눈을 크게 뜨고 준후를 쳐다보았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준후야, 어떻게 그런 생각까지 할 수 있었지?”

“당연하잖아요. 사실 그런 생각을…….”

준후는 뭔가 이야기하려다 말을 끊었다. 막 박물관의 정문을 걸어 나오는 참이었고 뒤에서 둘이 나가기를 끈기 있게 기다리 던 박물관 경비원이 문을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

바깥은 금세라도 비가 쏟아질 듯 잔뜩 찌푸린 회색빛 구름만 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연희도 준후의 말을 듣고 입을 다문 채 말이 없었다. 준후는 우물쭈물하다가 입을 열었다. 곁길로 빠 진화제를 나름대로 바꾸려고 하는 것 같았다.

“연희 누나, 아까 그 영상들 봤지요? 그게 뭐였을까요?” 

연희도 이상하고 혼란스러웠던 아까의 광경들을 떠올렸다.

“그러게. 나도 궁금해. 준후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헤헤헤. 한 가지는 알아요. 연희 누나도 거기서 불꽃 같은 거 봤지요?”

“응, 봤어. 그게 뭐였지?”

“전 알아요. 도자기 굽는 가마의 불꽃일 거예요.”

준후의 말에 연희는 깜짝 놀란 듯 우뚝 서더니 준후를 쳐다보며 말했다.

“맞아. 그렇구나. 그러고 보니 아까 나타난 광경들은 청자에 맺힌 영적인 기운이라고 했지?”

“예.”

“그러면 이번엔 내가 맞혀 볼까? 후후후.

준후에게 자극을 받아서였을까? 연희의 상상력이 부풀어 오 르기 시작했다. 고려청자는 고려인의 자랑거리였을 것이다. 아 까 영상에서 본 중국인의 모습. 그건 분명 고려청자를 수탈해 간 중국인 같았다.

“중국인이 우리나라를 침략했을 때, 아니 고려 때니까 몽고인 이라는 표현이 맞겠구나. 몽고인도 고려청자가 보물이라는 것을 알았을 테고, 우리가 본 그 회색으로 변한 청자도 그때 휩쓸려서 빼앗긴 걸 거야. 그럴 것 같지 않아?”

“음, 일리가 있어요. 박물관에 소장된 저 청자들은 지금 보기 에도 명품이니까요. 그런데 그런 청자들이 어떻게 이렇게나 많 이 이곳에 와 있는거죠?”

“음! 아까 본 영상에는 금발 머리를 한 서양인의 모습도 많았 어. 그렇다면……….”

연희는 의화단의 난 때 당시 중국의 수도였던 북경이 유럽, 그것도 영국군을 주류로 한 연합군에게 무참히 함락되었던 사실을 생각해 냈다. 예로부터 문화재에 대해 남달리 애착이 많았던 영 국인은 중국에서도 대량의 문화재들을 약탈했던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원나라 때 약탈당했다가 어딘가에 보관되어 있던 고려청 자들은 다시 서구 열강에 의해 약탈당했을 것이고, 그런 경로를 통하여 머나먼 영국까지 오게 된 것이라 추측했다.

연희는 준후에게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면서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준후는 연희보다 더 큰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받았다. 

“남들은 저토록 애지중지하는 물건인데, 우리는 직접 만들었 으면서도 만드는 방법까지 잊어버리게 하다니. 이건………….”

연희는 마치 자신이 죄를 지은 양, 이유 없는 부끄러움을 느꼈 다. 준후는 비록 학교는 다니지 않았지만 똑똑했다. 아이다운 단 순함과 솔직함이 영악함과 어우러져 연희도 준후에게 뭐라고 말 할 수가 없었다. 준후는 갑자기 곤혹스런 표정을 짓더니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눈을 반짝 빛냈다.

“아, 그래. 저건…… 그렇다면…………..”

“준후야, 뭐지?”

“아! 그러면 그 도자기는………… 연희 누나, 나 잠깐만 다시!” 

준후는 순간 뭔가 떠오른 듯 연희가 되물을 틈도 주지 않고 달 음질쳐서 박물관을 향해 뛰어갔다. 연희가 뛰어가는 준후를 놀 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유리문 너머로 경비원이 준후에게 손을 휘휘 저어 들어올 수 없다는 표시를 했다. 준후는 무엇에 홀린 것처럼 쪼르르 옆으로 돌아가 건물 주변에 무성히 자라고 있는

나무들 사이로 자취를 감추었다. 연희는 도대체 무슨 일인지 영 문을 몰라 어리둥절하게 서 있다가 큰 소리로 준후를 불렀다. 

“준후야, 뭐야? 왜 그러는 거야!”

그러나 준후는 대답이 없었다. 아까 그 회색빛 고려청자 때문 에 그러는 것 같았다. 연희는 재빨리 박물관 문으로 달려가서 유 리문을 탕탕 두들겼다.

회색빛 하늘,

준후는 박물관 밖으로 나와 회색빛 하늘을 보다가 뭔가를 생 각해냈다. 연희에게 자세한 사정을 말할 여유가 없어서 무턱대 고 박물관으로 걸음을 옮기기는 했지만, 정문의 경비원은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더군다나 사람들이 막 빠져나간 이후에는 영화나 소설에서 많이 나오는 박물관들이 흔히 그렇듯이 경비 시스템이 작동될 것이고, 그러면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렇게 서둘렀던 것이다. 준후는 박물관에서 보았 던 뒤뜰로 향해 나 있는 작은 창문을 기억해 내고 그리로 달려갔 다. 창문은 몹시 작아서 어른이 드나든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지만 준후처럼 작은 아이라면 가능했다.

‘어디쯤일까? 이쪽이 맞나?’

준후는 나지막한 관목들이 빽빽이 있는 박물관의 정원을 달리 면서 머릿속으로 자신이 생각한 것을 되짚어 보았다. 자신의 생각이 맞다면 그 도자기는 틀림없이 지금 위기에 빠져 있을 터이고, 위기 상황은 어렴풋한 아까의 그 메시지 속에서 충분히 느낄 수 있 었다. 아까는 미처 거기까지 생각해 내지 못하고 그냥 과거의 회상 쯤으로 여겼다. 그렇지만 영상들 중 적어도 한 가지는…………….

‘서둘러야 해! 자세히 알아내야 해!’

준후는 헐떡거리며 벽을 따라 달리다가 마침내 작은 들창을 발견했다. 그러나 안에서 보았을 때보다 들창의 높이는 더 높아 보였다. 준후는 힘껏 팔을 뻗고 간신히 들창에 매달려서 힘겹게 몸을 위로 끌어 올렸다.


“관람 시간이 지났습니다. 내일 와 주시기 바랍니다.”

연희가 아무리 사정을 하고 이야기를 해도 사무적인데다 융통 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박물관의 경비원들은 몸에 밴 친절한 미 소만 보이며 문을 열어 주기를 한사코 거부했다. 그렇다고 아이 가 박물관 안으로 숨어 들어갔다고 이야기할 수도 없는 처지였 다. 연희는 하는 수 없이 경비원과 입씨름하기를 포기하고 정문 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곳으로 갔다. 준후의 뒤를 따라서 정원을 뒤져 보려고 생각한 것이다. 구름이 짙어 해는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고, 어느덧 구름 너머로 해가 지고 있는지 사방이 소리 없이 점점 어둑어둑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기분도 좋지 않고 음울한 느낌이 들어서 연희는 몸을 움츠렸다.

‘박물관은 좋은 곳이지만, 이런 분위기는 정말 싫어!’


준후는 간신히 작은 창문으로 몸을 비집고 들어가는 데에 성 공했다. 애지중지하며 고국에서 입고 온 한복 자락이 찢어지지 는 않았는지 살펴본 다음 주변을 둘러봤다. 경비원들은 이제 막 문을 닫은 뒤여서 남아 있는 관람객이 없는지 둘러보고 있는 듯, 사방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일단 어디에 숨어 눈에 띄지 않도 록 해야 할 텐데……. 준후는 저만치에 놓여 있는 커다랗고 주둥 이가 넓게 벌어진 항아리로 눈을 돌렸다. 별다른 보호 장치도 없 었고, 또 유리상자로 덮인 몇몇 작은 조각들 앞에 놓여 있는 것 으로 보아 조각들을 복원한 모조품 같았다.

준후는 목표를 정하자 고양이처럼 몸을 날려서 항아리 속으 로 들어가 안에서 조심스럽게 뚜껑을 닫았다. 뚜껑을 닫자 완전 한 어둠과 함께 바닷속 같은 고요함이 느껴졌다. 준후는 한숨을 쉬면서 희미하게 울려오는 발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수선거리는 발소리는 여전히 많이 나고 있었지만, 조금만 더 기다리면 경비 원들도 대기실로 들어갈 것 같았다.

‘내가 너무 성급했던 건 아닐까?’

준후는 아까 본 영상 중에서 갑자기 떠오른 장면을 눈을 감고 곰곰이 떠올렸다. 불타는 영상, 그건 예사 것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불길 속에 뭔가가 있었던 것 같다. 언뜻 보고 지나쳐서 당시에는 별생각 하지 않았지만, 지나고 나서 나중에 영상이 제대로 보이게 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번이 바로 그런 경우 였다. 밖에 나가서 회색빛 하늘을 보자 돌연 그 영상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영상의 회색빛 하늘 아래에서 서서히 무너져 가는 건 물의 모습이 보인 듯했다. 이 박물관의 모습과 흡사했다.

‘그건 분명 경고야. 도자기에 깃든 영이 참혹한 일을 예언하여 가르쳐 주는 것이 분명해.’

불길 안에서 어른거렸던 그림자의 모습은 사람의 형체를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준후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영력으로 영의 생각을 읽어 내자 자신의 옛 기억들과 함 께 닥쳐올 일을 경고해 주려고 박물관의 모습을 보여 준 걸 거 야. 그나저나 경비원들은 왜 아직도 돌아다니는 거야? 대충 하고 들어가면 안 되나? 그건 그렇고・・・・・・ 너무 오래 걸리면 연희 누 나가 걱정하지 않을까?’

준후는 초조한 마음에 연신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연희는 박물관 주위를 여러 차례 돌다가 의심스러운 눈초리의 경비원에게 제지를 당하고 문이 굳게 닫힌 정문 밖으로 밀려나 고 말았다. 길을 잃었다고 둘러대기는 했지만 그러는 바람에 오 히려 친절한(?) 안내를 받아서 박물관 안으로 들어간 준후를 내 버려둔 채 문 밖으로 밀려나게 된 것이다. 연희는 안절부절못했다. 돌아가서 일행에게 사실대로 이야기할까 생각도 해 보았지 만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준후가 무사히 나온다 해도, 또는 만 에 하나 경비원에게 붙잡힌다 해도 속수무책이긴 마찬가지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니 그냥 초조할 수밖에.

‘그래도 기계화사단 내부까지 뚫고 들어갈 만큼 영특한 아이 니까 별일은 없을 거야. 그렇지만 아직 어린데…………….

근처의 공중전화를 들락날락하면서 호텔로 전화를 해 보았지 만 받는 사람이 없었다. 기다리던 연희는 자신도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야겠다고 결심했다. 오히려 준후를 방해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도 있었지만 이대로 있기보다는 안에서 무슨 일이 벌 어지고 있는지를 아는 편이 더 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초조하게 한 시간 이상을 기다리던 연희는 궁리 끝에 드디어 박물관 안으로 들어갈 방법을 짜냈다.


‘이제 됐다.’

더 이상 발소리가 들리지 않자 준후는 항아리 속에서 몸을 일 으켰다. 뚜껑을 밀어내다가 깨뜨릴 뻔했지만 어쨌든 밖으로 나 오자 답답함이 가셔서 살 것 같았다.

준후는 몇 번 숨을 몰아쉬다가 회색 청자가 있는 쪽으로 조심 스럽게 몸을 낮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박물관 안의 불은 모두 꺼져 있었고 주변은 지나칠 정도로 고요해서 조그마한 소리만내도 커다랗게 메아리가 칠 것 같았다. 고양이처럼 소리 없이 걸음을 옮기는 동안 알 수 없는 기운이 조금씩 느껴졌다.

‘과연 뭔가가 있긴 있구나. 일단은 그 청자를 놓고 다시 영사를 해야…………….’

준후는 소리 없이 몸을 움직여서 그 청자가 있는 진열장 앞까 지 나아갔다. 자기는 그대로 놓여 있었다. 낮에 보았을 때보다 영기가 더 짙어져 있었다. 준후는 눈을 감고 영사를 시작했다.


“도와주세요! 도와줘요!”

소리치면서 한참 동안 문을 두드리던 연희는 경비원이 나타 나자 애처로운 표정을 짓고는 급박한 말투로 사정을 하기 시작 했다.

“저는 한국에서 온 관광객인데 저 안에다가 여권이 든 지갑을 깜박 놓고 온 모양이에요. 내일이면 출국인데 어쩌면 좋아요? 들 어가게 해 주세요. 예?”

“아, 아가씨. 사정이 딱하시군요. 제가 들어가서 찾아보겠으니 대략의 위치를 말씀해 주세요.”

연희는 뜨끔했다. 이게 아닌데…………….

“위치는 말로 설명할 수가 없어요. 들어가서 보면 생각이 날것 같은데……”

“관람시간 이후에는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아이고! 그러면 저는 집에도 돌아가지 못해요. 저더러 어쩌 라는 말씀이에요. 예?”

“그러나 규칙상……”

“잠깐이면 돼요. 정말이에요. 정 의심스럽다면 저와 같이 다니 시면 되잖아요. 예?”

말도 없이 박물관에 뛰어든 준후가 걱정될 뿐만 아니라 정황 으로 볼 때, 만약 경비원에게 거짓말을 들켜도 준후가 가진 재주 라면 위기를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연희는 그렇게 말했다. 연희가 눈을 크게 뜨자 경비원은 뭔가에 홀린 것 같은 표정으로 힘들 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연희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나도 힘이 있기는 있나 보구나. 심연의 눈이라더니 그건가?’ 

“사정이 안된 것 같아 예외를 인정해 드리는 겁니다. 그러나 반드시 저와 동행하셔야 합니다.”

경비원은 뒤돌아서면서 혼잣말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정말 안됐군. 그렇다고 울려고 하다니.”

연희는 아주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는 경비원의 말을 듣고는 ‘힘이 아니라 불쌍해 보여서 그런 거구나’ 하고 조금 실망했지만 곧바로 경비원의 뒤를 따라 박물관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안에 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상상도 못한 채.


밤이 되자 회색 청자는 더욱더 강렬한 영기를 뿜었다. 그렇더라도 좀 더 정확하게 영사를 행하기 위해서는 청자에 직접 손을 대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회색 청자를 비롯한 모든 도자기들의 주변에는 감시 장치가 있을 터였다. 준후는 장식장의 여기저기 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과연 칸막이마다 자그마한 감시 렌즈가 숨겨져 있었다. 준후는 그 사실을 확인하고 조심스럽게 유리장 의 문을 열었다. 유리판은 쉽게 열렸다.

영화에서 나오는 빛을 이용하는 감지 장치인가 보다. 사람은 영화도 많이 봐두어야 해.’

준후는 빛이 나오는 경로를 짚어 보았다. 빛줄기는 도자기가 빠져나오지 못할 정도로 촘촘하기는 했지만 가느다란 준후의 손 목 정도는 충분히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만큼 빈구석도 많았다. 준후는 넓은 소맷자락을 접어 올리고 온 신경을 집중하여 회색 청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청자에 손을 대자마자 준후의 몸에 후 끈한 열기가 전달되어 왔다.

“이크!”

준후가 어깨를 흠칫하자 접어 올렸던 한복 자락이 후르르 흘 러내렸다. 준후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제 비상벨이 울릴 것이 고 자신은・・・・・・ 잉? 이상하게도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비상 벨이 울리지 않았다.

‘이상하다. 분명 폐관 시간이 지났으니 경보 장치를 켜 놓았을텐데….’

왜 경보 장치가 작동하지 않는지 의아하기도 했지만 준후에게는 천만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준후는 마음을 가다듬고 안 심하고 손을 뻗었다. 직접 손을 대자 확실히 전달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까처럼 막연한 공포나 회상이 아니었다. 비명처럼 지 르는 외침이었다.

‘매일 밤 괴롭히는 자들이 있다구? 악마 같은 것들이……………… 음? 이게 무슨 소리야? 모두를 지배하려고 하는…………. 음? 지금 도? 앗! 조심하라구?’

놀란 준후가 뒤를 채 돌아보기도 전에 시커먼 그림자 같은 것 이 시야를 가렸고 머리에 둔탁한 충격이 왔다. 준후는 회색 청자 를 끌어안은 채 뒤로 넘어졌다. 다시 한번 옆구리에 강한 충격이 왔다. 준후의 희미해지는 의식 속으로 푸른색의 제복이 언뜻 보이더니 이내 깜깜해졌다.


연희는 경비원과 함께 박물관 안으로 들어갔다. 박물관 안에 들어서자마자 경비원은 큰 소리로 동료의 이름을 불렀다. 높은 천장을 타고 동료를 부르는 경비원의 목소리가 음산하게 메아리 쳤다. 그런데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경비원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대기실로 보이는 방문을 열고 기웃거렸다. 그러나 역시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들 간 거야? 근무 시간인데 이거 참…………….”

경비원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연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 았다. 준후는 분명 무슨 낌새를 알아채고 박물관 안으로 숨어 들 어간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제 위치를 지켜야 할 경비원들이 모두 어디로 갔단 말인가? 혹시 준후가 걱정한 일이 벌어지기 시 작한 것은 아닐까? 아니면 준후가 무슨 방법을 써서 경비원들을 꼼짝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닐까? 아니지. 준후는 절대로 주술을 사람에게 사용하지 않는데……. 경비원은 쓰고 있던 모자를 들 썩이면서 머리를 긁적거렸다.

“이상하군요. 좌우간 아가씨는 어서 지갑을 찾으셔야죠. 저와 함께 갑시다.”

연희는 왠지 모를 불안한 기분에 경비원에게 조심하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입속에서 맴돌 뿐 자신이 한 거짓말이 탄로 날까 봐 그렇게 하지 못했다. 자신이 지금 잘하고 있는지 어떤지 알 수 없었다. 여태껏 퇴마사들과 행동을 같이하면서 느낀 바로는 정말로 엄청나고 믿어지지 않는 일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태 연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이번에도 준후가 자신에게 아무런 설 명도 없이 박물관 안으로 숨어든 것을 보면 여기서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음이 분명했다. 다른 때 같으면 신부님이나 현암, 승 희가 항상 옆에 있어서 안심이 되고 든든했다. 하지만 지금은 준 후를 만나기 전까지는 혼자다.

“어서 가시죠. 급하시다면서요?”

경비원이 재촉하자 연희는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박물관의 전시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악의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거 짓말을 하게 되자 호랑이 등에 탄 것과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 었다.

경비원이 비춰 주는 랜턴 빛을 받으며 진열장 사이를 누비던 연희는 부스럭거리며 평소보다 좀 더 크게 목소리를 내었다. 준 후에게 눈치를 주기 위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일부러 고려청자 들이 진열되어 있던 곳의 반대편으로 갔다. 자신과 동행한 경비 원을 의식해서였다. 그런데 오히려 경비원 쪽에서 이상한 것을 느낀 듯했다.

“아, 잠깐만요.”

연희는 뜨끔했다.

“예? 무슨 일이죠?”

“위층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지 않아요?”

연희는 자신이 일부러 시간을 끌고 있는 것을 경비원이 눈치챈 것이 아닐까 해서 마음이 뜨끔했지만 태연한 척했다.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대답하는 연희의 귀에도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웅웅거리는 소리였는데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알아봐야겠어요. 그런데 ………….”

경비원은 고민하는 것 같았다. 다른 경비원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것도 이상한데 위층에서 알 수 없는 기묘한 소리까지 들 려오니 찜찜할 수밖에. 거기다가 낯선 이국 여자까지 데리고 들 어왔으니 혼자서 이상한 소리가 나는 위층을 올라가 볼 수도 없 는 노릇이고, 도자기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는 이곳에―지금 생 각하면 수상쩍게 들어온 외부인을 혼자 남겨 두고 간다는 것 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연희는 그런 상대방의 심중 을 눈치채고는 말을 붙였다.

“그러면 같이 올라가 보시죠. 저도 아까 위층에 간 적이 있었 으니까 위층에 지갑을 놓고 왔는지도 몰라요.”

소리의 주인공이 준후라면 연희가 같이 가야 쓸데없는 오해를 줄일 수 있었다. 연희의 제안에 경비원은 의외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별일은 아닐 테지만 조심하시고 제 뒤쪽에 서세요. 다른 경비 원들도 보이지 않고 기묘한 소리까지 들리니 이상하군요. 그러 나전 아가씨를 믿겠어요. 그래도 되겠죠?”

연희는 경비원의 솔직함에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고 경비원도 연희가 미소를 짓자 한결 안심이 되는 듯 몸을 돌려 앞장을 섰 다. 경비원이 돌아서자 연희는 주머니에 숨기고 있던 지갑을 살 짝 바닥에 떨구고는 뒤를 따랐다.

멀리에 고려청자들이 진열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연희는 진열 장을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회색 청자의 자리가 비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준후가 한 것일까? 이런…………….’

연희는 경비원에게 말을 할 수도 없고 가능한 한 표정을 변하 지 않게 애쓰면서 경비원의 뒤만 따라갔다. 계단께에 이르자 웅 웅거리는 소리는 분명하게 들려왔고 경비원도 두려운지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허리에 찬 권총을 꺼내 들면서 작은 소리로 연 희에게 말했다.

“만약 무슨 일이 벌어지면 지체 없이 달려 나가세요. 그리고 경찰에 알려요. 알았죠?”

연희는 일부러 겁먹은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 려 연희는 준후가 청자를 들고 어디론가 숨었거나 달아난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을 하고 있었다. 지난번의 공로로 영국 여왕까 지 접견했으니 해결 못할 바는 아니지만 잘못하면 일이 뒤틀리 고 말 것이다. 연희는 습관적으로 목에 걸려 있는 작고 닳은 구 리 십자가를 손에 쥐고 걸음을 옮겼다.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굽이돌자 웅웅거리는 소리와 함께 쉿쉿거리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분명 사람의 소리였다. 경비원 은 긴장하여 연희에게 그 자리에 있으라고 손짓을 한 뒤 혼자 조 심스럽게 올라갔다. 연희도 무섭긴 마찬가지였지만 그냥 있을 수만은 없었다. 무엇보다도 준후가 걱정되었다. 연희는 푸른 제 복을 입은 경비원이 어둠속으로 사라지자 잠시 망설이다가 위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박물관의 아래층은 그래도 경비실이나 외등 불빛이 있어서 그렇게 어둡지 않았는데 위층은 그야말로 캄 캄한 암흑 절벽이었다. 무서웠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방금 올라간 그 사람은 어딜 간 거야.’

계단을 다 올라와서 몇 발자국 옮기는데 먼저 올라온 경비원 의 뒷모습이 보였다. 무섭던 차에 연희는 반가운 생각이 들어서 경비원에게 다가가 어깨를 살짝 치면서 말을 건넸다.

“저….”고개를 서서히 돌리는 경비원을 보고 연희는 놀라서 비명을 지를 뻔했다. 경비원의 얼굴은 거무칙칙하게 일그러져 다른 사 람의 얼굴로 바뀌어져 있었다. 눈에는 붉은 핏발이 서 있었고 입 가에는 잔인한 미소가 흘렀다.

“꺄!”

경비원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지르면서 연희에게 팔을 뻗었다. 손마저도 거무튀튀하게 변해 있었다. 상식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연희는 비명을 지르면서 경비원의 손을 피했다.

경비원의 행동은 느릿느릿했다. 연희는 놀란 나머지 평소 익혀둔 호신술로 남자의 다리를 걸었다. 마치 나무등걸이나 바위를 걷어찬 듯한 통증이 연희의 발목에 밀려들었다. 그러나 남자는 끄덕도 하지 않았다.

“어어!”

연희는 소리를 지르며 당수로 경비원의 목 부위를 후려쳤다.

보통 사람 같으면 연희의 일격에 무릎이 꺾이기 마련이건만, 경 비원은 모자가 날아가고 목을 움츠렸을 뿐, 여전히 잔인한 미소 를 띤 채 연희를 향해 팔을 뻗었다.

연희는 질린 나머지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악령의 농간이 분 명한데, 무슨 술수에 의해 저렇게 변해 버린 것 같은데, 도대체 어쩌면 좋단 말인가. 연희는 주먹을 쥐고 경비원의 명치 부위를 강타해 보았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연희의 얼굴이 공포에 질 려 새하얗게 변해 갔다.

‘이건 사람도 아니야! 어쩌다가 순식간에 이 사람이…………. ‘

연희는 심한 절망감으로 정신없이 경비원의 명치 부근을 두들 겼으나 딱딱한 바위를 치듯 손이 저려 올 뿐, 상대는 조금도 타 격을 받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만 경비원에게 손목을 잡혀 버렸다.

“으아악! 이거 놔!”

연희는 있는 힘을 다해 발로 걷어차서 경비원의 손을 뿌리치 고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준후야! 준………….?”

준후를 소리쳐 부르려던 연희는 경악하여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어디에 있다가 나타났는지 위층에 있는 경비원과 똑같이 변해 버린 경비원 대여섯 명이 계단 아래로 모여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 똑같이 검은 얼굴에 일그러진 흉측한 미 소를 띠고서 느릿느릿 원격 조종을 받는 인형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연희는 계단을 내려가려다가 비명을 지르면서 도로 계단 위로 향했다. 그러나 계단 위에서는 아까의 그 경비원이 연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저리 가!”

연희는 경비원을 밀쳐 내려고 했으나 오히려 자신이 두어 발 자국 뒤로 밀려났다. 연희는 신경을 곤두세우며 재빨리 경비원 의 옆으로 돌았다. 경비원은 천천히, 느릿느릿하면서도 지칠 줄 모르는 듯 계속 연희에게로 다가섰다. 어느새 계단 아래쪽에 있던 대여섯 명의 경비원들도 계단을 포위하듯 둘러싸고 위로 올 라오는 참이었다.

‘내려갈 길이 없네. 다른 계단을 찾아봐야겠어.’

연희는 도자기들이 진열되어 있는 장식장 사이를 누비며 반대 편으로 달려 나갔다. 그러나 박물관은 굉장히 큰데도 불구하고 위아래로 오르내리는 계단이 하나뿐인 것 같았다.

‘큰일이군! 내려갈 방법이 없어.’

연희는 몸을 돌렸다. 일곱 명으로 늘어난 경비원들은 하나같 이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다가오는 중이었다. 숨 가쁘게 쫓고 쫓기는 상황이었다면 차라리 나았을지도 모르는데 오히려 저렇게 느릿느릿 다가오는 것이 연희에게는 더욱 무섭게 느껴졌다. 일 곱 명의 경비원들은 사냥감을 몰기라도 하듯 박물관의 복도에 나란히 서서 길을 막은 채로 다가오고 있었다.

“저리가! 왜 자꾸 따라오는 거야. 준후야, 준후야!”

연희가 준후를 소리쳐 부르는 동안에도 경비원들은 느릿느릿 한 동작으로 계속 다가왔다. 연희는 한동안 준후를 부르다가 뒤 돌아 뛰기 시작했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얘야, 얘야……………..

준후는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사방은 칠흑같이 어두워서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지 아니면 어딘가에 갇혀 있는지 알 수 없 었다. 아니, 눈을 뜨고 있는지 감고 있는지조차 불확실했다. 그 런 와중에도 나지막한 소리가 준후의 마음속에 울려 퍼졌다. 

얘야, 정신을 차리렴. 어쩌자고 이런 일에 끼어든 거니?

준후는 들려오는 소리에 대답을 하려고 애썼으나 얻어맞은 자 리가 욱신거려서 집중이 되지 않았고 말을 할 기력도 없었다. 준 후의 마음속에 울려오는 소리는 계속되었다.

이곳은 밤만 되면 무서운 곳이란다. 열두 명의 짐승 같은 놈들이………… 

열두 명의 짐승 같은 놈들이라고? 준후는 힘겹게 정신을 집중 해서 소리가 나오는 쪽에 대고 물어보았다.

열두 명의 누구라구요? 아저씨는 청자 속에 계시던 분 맞나요?

정신이 들었구나, 아이야. 그런데 어떻게 나하고 이야기를 할 수가 있지? 내가 살아난 기분이 드는구나. 허허허.

그런 건 지금 이야기할 때가 아닌 것 같네요. 그나저나 아저씨가 품 고 있던 생각을 읽다가 위험한 일이 이 안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방금 말씀하신 열두 명과 관계가 있는 건가요?

그렇단다. 이곳에는 많은 도자기들이 있지만 위층에 있는 열두 개의 도자기는 아주 무섭단다. 다른 도자기들은 평범하지만 내가 있는 청자 와 위층의 열두 개의 도자기는 사람의 영이 깃들어 있단다.

그럼 그들도 도자기에 깃든 영들이란 말인가요? 아저씨는 어쩌다가 승천하지 않고 자기에 혼이 깃들게 된 거죠?

이야기하자면 길단다. 열두 놈들이 깃든 것은 도자기라고 할 수도 없는 것들이지.

영으로부터 불같은 분노의 기운이 느껴졌다. 

준후는 궁금증이 일었다.

도자기가 아니라면 뭐죠? 여기는 도자기만 모아 놓은 곳인데…………. 그건 도자기가 아니야. 그릇일 뿐이지. 그 그릇들은 말이다. 거기 깃든 놈들의 두개골로 만들어진 거야.

두개골이요? 사람의 머리로 만든 그릇이란 말인가요?


연희의 온몸에 피곤이 엄습해 왔다. 너무 많이 뛰어다녀서인지 몸이 물먹은 솜처럼 늘어지고 숨도 몹시 찼다. 입에서 단내가 났다. 지긋지긋하게 따라오는 경비원들을 피해 얼마나 숨바꼭질 을 하고 다녔는지 모른다. 처음에는 그들의 느리고 어설픈 동작 을 보고 설마 잡히기야 하겠나 생각했지만, 그들은 조금도 지치 거나 서두르는 기색 없이 사냥꾼이 사냥감을 몰듯 연희를 끊임 없이 몰아붙였다. 물론 자신이 뛰어다니는 동안에야 잡히지 않 겠지만 언제까지나 뛰어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피곤하여 조금 틈을 내 쉴라 치면 몇 번 심호흡을 하기도 전에 그들은 느 릿느릿하게 연희에게 다가서는 것이었다. 버티지 못할 것 같았 다. 연희는 몇 번이나 준후를 소리쳐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준후마저도 저들에게 당한 것은 아닐까? 아니야, 준후는 그럴 아 이가 아니야. 얼마나 재주가 많은 아이인데. 그러나 지금은 흉악 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경비원들 역시 분명 사람이었고, 준후는 사람에게는 절대 자신의 술수를 쓰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준후는…………….

“안 돼! 이 나쁜 놈들. 그 아이를 어떻게 한 거야. 가까이 오지 말란 말야. 저리가!가!”

연희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다가드는 경비원들을 향해 소리쳤 다. 그러나 경비원들은 들은 척도 않고 징그러운 팔을 뻗은 채 연희에게 계속 다가왔다. 연희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정 말 뭐라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무서웠다. 아니 무섭다기보다는 지긋지긋했다.

연희는 이를 갈면서 재빨리 경비원 중의 하나에게 달려들었 다. 도망만 치던 연희가 도리어 달려드는데도 그들은 당황하거 나 놀라는 기색도 없이 여전히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연희를 잡 으려 했다. 연희는 마지막 남은 기운으로 와르르 덮쳐드는 그들 의 손을 피했고 동시에 몸을 숙여 한 경비원의 허리춤에서 권총 을 뽑아 들었다.

한 손이 연희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어찌나 세게 잡았는지 아 찔할 정도의 통증이 어깨를 엄습했다. 연희는 날카로운 소리를 지르며 있는 힘을 다해 손을 뿌리쳤다. 옷자락이 놈의 손톱에 걸 려찍 하고 찢어졌다. 연희는 급한 김에 데굴데굴 굴러서 덮쳐드 는 손을 피했다. 정신없이 한참을 구르다가 몸을 일으켜 보니 그 들은 저만치 뒤로 떨어진 채 서두르는 기색 없이 느릿느릿 다가 오고 있었다. 연희는 더 이상 몸을 가누기도 어려웠고 눈앞에서 별이 자꾸만 반짝이는 것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쓰러져선 안 돼. 절대 안 돼. 아, 하지만 너무 힘들어. 차라리 죽는 게………… 아니, 내가 무슨 생각하고 있는 거야. 아, 또 다가온 다. 제발 오지 마, 제발! 제발! 제발!’

연희는 고개를 마구 흔들며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제발 가까이 오지마! 저리 가! 저리 가!”

연희의 목소리가 휑한 박물관 안에 이리저리 메아리쳤다. 그러나 연희의 절규는 아랑곳없다는 듯 그들은 계속 다가왔다. 연 희는 상처 입은 짐승처럼 가쁜 숨을 내쉬면서 더 이상 피하지 않 고 다가오는 놈들을 째려보았다. 맞다! 내 손에는 권총이 있다. 더 이상 다가오면……….

“더 이상 가까이 오면 쏴버리겠어! 저리 가!”

연희는 반은 울먹거리고 반은 이를 갈면서 다가오는 경비원들 을 향해, 아니 악령이 조종하는 인형들을 향해 총을 겨눴다. 그 들은 총구가 자기들을 향하고 있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해서 느릿느릿 다가오고 있었다.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이곳에 상당히 오랫동안 있으면서 대강의 일 들을 알게 되었단다. 그들은 나보다도 훨씬 오래전에 죽어서 자신들의 두개골로 만든 그릇을 떠나지 못하고 머물러 있는 자들이지. 그런데 그 들이 자꾸 나를 괴롭힌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말이지…………….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린다고요? 그리고 아저씨를 괴롭히다니요? 무 슨 말씀이세요?

그들은 무슨 이유인지 영이 들어갈 수 있는 다른 그릇을 찾고 있어. 그러나 사람의 영이 깃들어 있는 도자기는 여기서도 내 것 하나뿐이야. 그들은 내가 있는 이 청자를 차지하기 위해 나를 몰아내려 하고 있어. 

준후는 무슨 말인지 정확히 이해되지는 않았지만 고충이 있는 것만큼은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세상에, 사람의 두개골로 도자기를 만들다니. 그 악령들도 무슨 사연이 있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그건 그렇고 누가 자신을 때려서 기절시켰을까? 

그런데 나를 이렇게 만든 건 누구죠? 악령들의 힘으로 어떻게…………. 그들은 밤만 되면 이곳을 지배한단다. 여기에는 열두 명의 경비원이 있지. 그들을 이용하는 거야.

준후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대충 추리해 보면 이런 것이었다. 도자기, 아니 그릇 속에 깃든 악령들은 낮에는 가만히 웅크리고 있다가 밤만 되면 이곳의 경비원들에게 빙의해 서 멋대로 활보했다. 회색 자기와 의사소통을 하려는 준후를 기 절시켜 잡아 온 것도 악령에 빙의된 경비원의 소행이 분명했다. 

그런데 어떤 방법으로 아저씨를 괴롭히는 거죠?

처음에는 협박을 하더군. 지금은 그들도 지독해졌어. 그들이 왜 경비 원의 몸을 빌리는지 알겠니? 그들은 밤만 되면 내 청자로 와서 갖은 방 법으로 나를 떠나보내려 한단다. 깨뜨리려고 내던지고 마구 치기도 해. 불로 지지고 발로 차고 다니기도 하지. 이젠 나도 힘이 빠진단다. 모든 힘을 다해서 내 목숨보다 더 중요한 이 청자를 지키느라 버텨왔지만, 이제는 너무 힘이 들어.

준후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회색 청자에 대해 목숨보다도 강 한 애착을 가지고 있는 이 영은 분명 청자를 직접 만든 사람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기에 저들의 협박에도 굴하지 않 고 오로지 정신력으로 청자를 수호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러고보니 청자가 서서히 회색빛으로 변해 갔다는 것도 짐작이 갔다. 하도 고생을 하니 영의 생각이 침침하고 어두운 쪽으로 기울어 졌을 것이 분명하고, 그래서 영이 지키고 있는 청자의 색깔까지 도 침침한 회색빛으로 변한 것이다. 준후는 수없이 고생을 하면 서도 여전히 자기가 만든 청자를 지키고 있는 영에 대해 뭉클함 을 느끼면서 다시 생각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들이 원하는 건 뭐죠?

나도 확실히는 몰라. 그러나 짐작은 간단다. 그건 바로………….

뭐죠?

누군가를 다시 살리는 것………. 아마 해서는 안 될 일을 꾸미려는 것 같아.

영의 생각이 다 전달되기도 전에 닫혀 있던 준후의 귀에 희미하게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총소리였다.

‘어, 이건…….’

준후는 재빨리 정신을 모아 반사적으로 무슨 일인가를 알아내 려고 했다. 준후는 승희와는 달리 영이 아닌 사람에 대한 투시는 할 수 없었지만, 그런 준후에게도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청자의 영에게서 들은 흉측하고 잔인한 여러 영들과 뒤섞인 희미하지만 낯익은 작은 영기였다. 그건 바로 염체, 연희가 늘 가지고 다니 던 작은 구리 십자가에 깃들어 있던 염체의 영기였다.

‘앗, 연희 누나 무슨 일이 벌어진 것 같군. 이런!’

준후는 몸을 움직여 보았다. 다행히 몸이 묶여 있지는 않았으 나옴짝달싹할 수 없을 정도로 상자 안에 처박혀 있는 상태였다. 준후는 손을 뻗어 보았다. 꺼칠꺼칠한 감촉으로 보아 나무 상자 같았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빠져나갈 수 없을 듯했다. 그렇다 고 주술을 사용하자니 공간이 좁아서 품에 안고 있는 청자가 상 할지 몰랐다. 그러나 시간이 없었다.

‘아저씨 저 급히 나가 봐야 돼요. 청자가 상하지 않도록 힘을 좀 쓰세요. 어서요!’

청자에 깃든 영도 준후의 마음을 알아채고 힘을 쓰고 있는 듯, 청자가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무슨 방법을 어떻게 쓴 것 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준후는 급한 마음에 인드라의 뇌전 한 방 을 상자 뚜껑이 있음 직한 곳으로 쏘아 붙였다. 번쩍하면서 폭음 과 함께 강한 충격이 느껴졌다.


연희는 큰 눈에서 눈물을 펑펑 쏟으며 경비원들에게 다가오지 말라고 외치다가 공포를 한 발 쏘았다. 그러나 그들은 총에 전혀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연희는 자신 의 손에 들려 있는 권총을 다시 확인해 보았다. 6연발 리볼버, 들 어 있던 여섯 발 중 방금 한 발은 자신이 공포로 쏘았다. 설혹 남 은 다섯 발을 다 명중시키더라도 두 명의 경비원들은 남게 된다. 그렇게 된다면…..

“아, 이건 도대체…….”

안타까운 생각에 연희는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눈앞에는 복도 대신 그림이 걸린 벽이 보였다. 머뭇거리는 사이에 막다른 골목에 갇혀 버린 것이다. 저렇게 느릿느릿한 몸짓으로 움직이 고 있는 경비원들의 간격이라면 틈 사이로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더 이상은 몸을 움직일 기력도 용기도 남지 않았 다. 연희는 입술을 깨물면서 경비원들의 발밑을 겨냥하여 한 발 쏘았다. 대리석 바닥에 불꽃이 일어나며 총성이 긴 여운을 두고 울려 퍼졌으나 그들은 주춤거리지도 않고 계속해서 연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분명히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들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 없 어서 더욱 무서웠다. 연희는 울먹이면서 떨리는 손으로 서서히 총구를 올려 다가오는 경비원 한 명의 심장을 겨누다가 머리를 향했다. 검게 일그러진 얼굴과 붉게 충혈된 눈. 경비원의 얼굴 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사람의 몰골이 아니었다. 총을 들고 떨면서 서 있는 연희의 뇌리에 온갖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비 록 저들은 지금 악령에 씌긴 했지만 그래도 사람이다. 이런 상황 에서 현암이나 박 신부, 준후라면 어떻게 했을까? 죽으면 죽었지 총을 쏘지는 않겠지? 상대가 악령이 깃든 자라 할지라도 자신을 구하고자 다른 사람을 겨누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건 문제가 달라. 쏴!’

연희의 마음속에서 다른 목소리가 소리쳤다.

‘그들은 스스로 방어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갖가지 힘이 있 어! 하지만 지금 네겐 무슨 힘이 있느냐 말야!’

그 말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연희에게는 아무런 힘 이 없었다. 연희는 이를 악물고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손을 치켜 들었다. 그리고 다가오고 있는 경비원들을 다시 겨냥했다. 이번에는 아까와는 다른 큰 목소리가 연희의 마음속에 들려왔다. 

‘그래선 안 돼! 그러면 살인자가 돼! 어떤 이유로도 사람이 죄 없는 다른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되는 거야!’

그러자 먼젓번 목소리가 소리쳤다.

‘너 혼자 죽는 게 억울하지 않아? 쏴! 쏘라구!’

연희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결국 다가오는 경비원이 맞지 않도록 허공에 대고 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결 과는 마찬가지였다. 이제 경비원들은 몇 걸음만 더 걸어오면 곧 바로 연희를 덮칠 것이고 더 이상 물러설 곳도, 물러날 수도 없 었다. 등 뒤로 단단한 벽의 감촉이 느껴졌다.

‘쏴 쏘라구! 지긋지긋하지 않아? 끝내, 끝내라구! 쏠 수 있는 데까지 쏘는 거야. 그게 멋지지 않아?’

“그래 좋아. 그렇다면……………”

더 이상 아무런 생각도 하기 싫었다. 더 이상 저들에게 증오감 을 느낄 수도 없었다.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다. 연희는 서서히 총을 치켜 올렸다.

“이 수밖엔…….”

연희는 눈을 감으며 천천히 관자놀이에 총구를 갖다 대었다.


‘빨리 가야 해.’

준후는 청자를 옆구리에 낀 채 달음박질하기 시작했다. 총소 리가 들려오는 것은 위층이었다. 준후가 뛰어가는 도중에도 몇 차례 총소리가 더 들렸다. 한 번, 그리고 다시 두 번 연속으로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릴까? 경비원들이 연희 누나에게 총을 쏘 아 대는 것은 아닐까?’

뛰는 준후의 마음이 타들어 갔다. 뇌전을 이용해 상자를 부수 고 나오느라 충격을 받았는지 눈앞이 아른거렸지만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어쩌다가 연희 누나가 저 지경에 빠졌을까? 준후는 달리면서 연희가 가지고 다니던 십자가 안에 들어 있는 염 체를 투시해 보았다. 염체의 활동이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아이고, 서둘러야 해!”

준후는 서두른 나머지 계단을 뛰어오르다 주르르 미끄러 떨어 졌다. 넘어지면서 들고 있던 청자가 계단 모서리에 쾅하고 찧었 지만 다행히 청자는 멀쩡했다. 아마 깃들어 있는 영이 청자를 보 호하고 있는 힘을 아직 풀지 않은 것 같았다. 무릎이 깨졌는지 찢어진 옷자락 사이로 적잖은 피가 배어 나왔다. 하지만 그런 것을 살필 겨를이 없었다. 재빠르게 몸을 일으킨 준후는 계단 위로 줄달음질했다.


총소리가 박물관 내부를 울렸다.

관자놀이에 총을 대고 방아쇠를 당긴 연희의 손이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위로 치켜 올라가면서 총알이 천장으로 날아간 것이 다. 연희가 깜짝 놀라 감았던 눈을 떴다. 손을 보니 구리 십자가 속에 들어 있던 푸른 염체가 맺혀 있었다. 경비원들도 눈앞에 푸 른 불빛이 튀어나오자 영적인 기운을 느껴서인지 놀란 듯 흠칫 거리며 두어 발자국 앞에서 멈칫거리고 있었다.

“날 보고 어떻게 하란 말이야? 막지 마!”

연희는 눈물을 흘리며 염체에게 호소하듯 울부짖었다. 그러나 염체는 연희의 손을 잡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 원래 그 염체는 그리 큰 힘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색깔이 파란색에서 연녹색, 그 리고 다시 밝은 하늘색으로 변해 가는 것으로 보아 연희의 행동을 제지하려고 무척 힘을 쓰고 있는 것 같았다.

잠시 멈칫하던 눈앞의 경비원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다시 움직 이기 시작했다. 자신을 향해 뻗쳐 오는 검은 손들을 보면서 연희 는 왼손으로 오른손을 잡아 끌어내렸다. 물론 죽기는 싫었다. 무 서웠다. 그러나 저들에게 잡히기보다는 죽는 것이 낫다고, 저들 을 향해 총을 쏘기보다는 자신의 관자놀이를 겨냥하는 게 깨끗하고 빨리 끝내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안녕, 모두들…………. 준후야, 너만은 무사하길………….’

연희가 안간힘을 다해서 한 발 남은 총알을 쏘기 위해 총구 를 자신의 이마로 끌어 올리는 찰나, 뒤에서 앙칼진 소리가 들려 왔다.

“비켜!”

고함 소리와 함께 강한 바람이 연희에게 몰아닥쳤다. 연희는 방아쇠를 당기려던 손가락을 멈추었다. 들려온 것은 준후의 목 소리가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준후야!”

반가운 마음에 연희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러나 강한 바람 이 밀어닥치는 바람에 몸의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준후가 불 러일으킨 바람이었다.

연희 앞에서 달려들 기회만 노리던 경비원들은 뒤에서 강한 바람이 불어오자 그 기세에 밀려서 연희에게 우르르 덮쳐들었 다. 넘어질 듯하더니 그중 두 명이 순간적으로 연희의 팔을 잡았 다. 양쪽에서 팔을 잡힌 연희는 총을 떨어뜨렸고, 푸른 염체는 허공을 미친 듯이 날면서 경비원들에게 달라붙으려 했으나 그들 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양쪽에서 강한 힘으로 팔 을 쭉 잡아당기자 연희는 순간적인 충격에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이놈들아, 연희 누나를 놔줘!”

준후는 옆구리에 청자를 낀 채로 한쪽 손으로 수인을 맺으며 소리를 질렀다.

준후가 불러낸 바람의 기운이 경비원들에게 몰아쳤다. 그들은 바람에 밀려 뒤로 주춤거리긴 했지만 넘어지진 않았다. 경비원 들의 수는 모두 일곱 명. 다섯 명은 준후 앞에 버티고 서서 느릿 느릿 몸을 뒤로 돌렸고, 그 틈 사이로 나머지 두 명이 연희의 양 팔을 잡고 번쩍 들어 올리는 것이 보였다.

“이런…………. 뭐 하는 거얏! 어서 놔주지 못해!”

준후가 앙칼지게 소리를 지르자 무의식중에 양쪽 손에서 지지 직하면서 뇌전의 기운이 맺히기 시작했다. 순간, 준후의 옆구리 에서 이상한 감촉이 느껴졌다. 뇌전의 기운을 일으키자 청자에 도 뇌전의 기운이 들어갔는지, 청자가 움직이려는 것 같았다. 준후의 마음속으로 청자 안에 깃들어 있는 영의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네가 쓰는 힘이 무엇이지? 참으로 이상하구나. 내가 청자를 움 직일 수 있을 것 같구나. 신기해!

영도 놀라서 말하는 것이었겠지만, 준후에게는 그런 것이 들 릴 계제가 아니었다. 준후는 바람의 기운을 더욱더 세차게 쏘아 붙였다. 하지만 그들은 옷자락을 어지러이 휘날리며 이번엔 준 후를 향해서 걸어오기 시작했다. 뒤쪽에 있는 놈들이 기절한 연 희를 질질 끌면서 걸음을 모퉁이 쪽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준후는 별로 소용이 없는 것 같자 바람의 기운을 거두었다. 한 손에 서 인드라의 하얀 번개가 바지직하면서 커다랗게 뭉쳐 갔다. 준 후가 청자를 안은 채로 번개를 쏘려고 손을 뒤로 힘껏 내미는 순 간, 몸이 굳은 것처럼 꼼짝하지 못했다. 저들이 사람이란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사람에게 주술을 써서는 안 되는데…………. 특히 이런 번개를 맞으면 영혼이 제압당해 있는 상태에서는 죽을지도 몰라. 어떻 게 하지?’

준후의 눈에 모퉁이로 질질 끌려가는 연희의 모습이 보였다. 준후가 다섯 명을 상대하는 동안 두 명이 연희를 끌고 가서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었다. 준후는 망설였다. 그런 와중에도 다섯 명의 경비원들은 준후를 향해서 계속 다가왔다. 준후는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 굴렀다. 다섯 명을 어떻게 상대하더라도 연희를 내버려 둘 수는 없다. 그렇다고 사람에게 주술을 사용할 수도 없 는 노릇이고………

“아이고, 이런! 어떻게 하지? 무슨 방법이………….”

준후는 옆구리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청자를 쳐다보았다. 그런 다음 연희를 끌고 가는 두 명의 경비원에게로 눈을 돌렸다. 준후 는 청자에 깃들어 있는 영에게 마음속으로 말했다.

‘아저씨, 한 번만 도와줘요! 청자를 움직일 수 있을 것 같다고 했죠?’

준후는 영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야압 하는 기합 소리를 내면 서 청자를 집어 던졌다. 그리고 재빨리 양손으로 수인을 겹쳐 맺 으며 인드라 뇌전의 기운을 있는 대로 청자에다 밀어 넣었다. 허 공에 떠오른 청자는 하얀 번개의 기운을 받자 살아 있는 것처럼 빠른 속도로 회전하면서 연희를 끌고 가던 경비원 중 하나에게 로 덮쳐들었다. 그것을 보고 준후는 재빨리 몸을 작게 오그렸다 가 있는 힘을 다하여 오행의 기운 중 바람의 기운을 땅바닥을 향 해서 내뿜었다. 준후의 몸이 로켓처럼 연희를 끌고 가던 또 한 명의 경비원을 향하여 날아가기 시작했다. 사람에게 주술을 쓰 지 않고 연희를 구하려면 이 방법밖에는 없을 것 같았다.

경비원 중 맨 앞에 선 놈이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소리를 냈지만, 청자는 그 소리에도 아랑곳없이 흡사 살아 있는 생물처 럼 허공을 빙빙 돌면서 날아가 그들 중 하나의 얼굴을 정통으로 강타했다. 뇌전의 기운을 담은데다가 영이 단단하게 수호하고 있는 청자에 정통으로 얼굴을 맞은 놈은 한쪽 구석에 퍽 소리를 내며 처박히더니 벽에 뒤통수를 찧고는 아래로 미끄러져 내렸다. 연희의 팔을 잡고 있던 또 한 명의 경비원은 의외의 사태에 놀 란 듯 고개를 서서히 돌리다가 탄환처럼 날아오고 있는 준후의 웅크린 몸을 보자 더욱더 놀란 표정이 되었다. 준후는 경비원의 몸에 부딪히려는 순간 몸을 뒤집어서 두 무릎과 두 팔꿈치를 한 쪽으로 향하게 하여 경비원의 배를 강타했다. 비록 영에게 씌어서 조종되고 있는 몸이었지만 경비원의 입에서 헉 하는 소리가 새어 나오면서 벽과 준후의 몸 사이에 끼었다. 정지 화면처럼 한 참 동안이나 망연하게 있다가 벽을 타고 주르르 미끄러져 대리석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준후도 충격이 컸던지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머리가 어지 럽고 몸이 제대로 말을 듣진 않았지만 힘 있게 발로 방위를 밟으 면서 나머지 다섯 명의 경비원들을 노려보았다. 한쪽 구석에서 는 뇌전의 기운이 빠져나간 청자가 데구르르 굴렀다. 쓰러져 있 는 연희의 입에서 가벼운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준후는 연희부터 부축해서 일으켰다. 연희는 의식을 잃고 있 었다. 워낙 키가 큰 연희인지라 준후가 부축을 해도 무릎이 땅에 닿았다. 그 상태로는 끌고 갈 수 없었다. 다섯 명의 경비원이 다 가오는 것을 보고 준후는 안 되겠다 싶어서 연희를 내려놓고 그 들 앞을 막고 섰다.

“가까이 오지 마!”

준후는 씩씩거리면서 상대를 위협하듯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좋아. 네놈들이 영에 빙의됐다 하더라도 이쯤 되면 사정을 봐줄 수 없지.”

원래는 저들이 어떤 사연이 있는지 알아보고 조치를 취해야 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사정이 바뀌었다. 준후는 품속에서 부적을 한 움큼 꺼냈다. 제압부였다.

부적을 붙이면 영들은 경비원의 몸속에 갇혀서 부적이 기능을 다할 때까지 한동안 꼼짝도 못할 것이었다. 준후는 일단 손에 잡 히는 대로 세 장의 부적을 허공에 날렸다. 다가오던 놈들은 저절 로 불이 붙은 부적이 날아오자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피하려 했 으나 부적들이 훨씬 빨랐다. 세 장의 부적은 한 놈의 이마와 나 머지 두 놈의 가슴팍에 각각 명중했다. 부적을 맞은 그들은 석고상처럼 그 자리에서 꼼짝도 않고 굳어 버렸다.

“하하하. 맛이 어떠냐.”

준후는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양손에 부적을 하나씩 꺼내 들고 나머지 두 명의 경비원을 째려보면서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그 둘은 멈칫멈칫하면서 뒷걸음질을 했다.

“남의 몸을 빌려서 악한 짓을 하는 나쁜 놈들. 어디 맛좀…….” 

그러나 말을 끝내기도 전에 갑자기 등 뒤쪽에서 여러 개의 억 센 손이 몸을 잡아챘다.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준후는 아까 청 자에 깃든 영이 한 말이 생각났다.

-저들의 수는 열두 명, 열두 명의 경비원의 몸을 이용하고 있다지 …….

위층에서 연희에게 덤벼든 경비원의 수는 일곱. 준후가 신경 쓰지 못한 사이에 나머지 다섯이 올라온 것이었을까. 왜 그 생각을 미처…………….

준후는 발버둥쳤으나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뒤통수에 둔탁한 충격이 왔다. 준후는 아찔함을 느끼면서 정신을 잃고 말았다. 하 필이면 아까 맞은 곳에 다시 충격이 온 것이다.

‘이러면 머리가 나빠질 텐데.’

준후는 희미해져 가는 의식 속에서도 멋쩍게 중얼거렸다. 이 상한 일에 휩쓸린 것은 그렇다 쳐도 하룻밤 사이에 두 번이나 머 리를 얻어맞고 정신을 잃다니.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닌가.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준후가 연희의 나직한 목소리를 듣

고 간신히 눈을 뜬 것은 꽤 시간이 흐른 뒤였다.

“준후야, 준후야, 정신이 드니? 준후야, 일어나.”

준후는 나지막한 신음 소리를 내더니 간신히 눈을 떴다.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맘과 달리 움직여지지 않았다. 온몸이 상자를 묶는 끈으로 미라처럼 우악스럽게 묶여 있었다. 옆에 있 는 연희도 마찬가지였다. 둘 다 어떤 힘도 쓰기 어려웠다. 준후 는 수인을 맺어야 제대로 힘을 쓸 수 있는데 그럴 수도 없고 또 주변에 흉흉한 눈빛을 번득이는 검은 얼굴의 경비원들이 둘러서 있어서 어떻게 해 보기가 어려웠다.

“준후야, 여기는 삼층이야. 저기 저것들은 뭐지?”

연희가 속삭이는 소리에 준후가 머리를 돌려보니 그쪽에는 우 두머리 격인 듯한 경비원 한 명이 아까의 청자를 앞에 두고 있었고, 그 뒤에 유리장 속으로 이상하게 생긴 번쩍거리는 황금색 그릇들이 보였다. 열두 개였다.

‘저것들이 두개골로 만들었다는 그릇이구나.’

준후는 연희에게 슬쩍 물어보았다.

“저 그릇들은 도대체 뭐래요?”

연희가 눈을 약간 찌푸리더니 진열장 앞에 씌어 있는 보일 듯말듯한 글자들을 읽어 주었다.

“스키타이족의 황금 채색 그릇이래. 스키타이족이라면 퍽오 래된 족속이고 이미 사멸되었는데…………”

준후가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건 보통 그릇이 아니에요. 두개골로 만들어진 그릇이에요.” 

연희는 사람 해골로 만든 그릇이라는 말에 눈을 크게 떴다. 좌우에 서 있던 경비원들이 말을 하지 말라는 듯 위협적으로 손을 저었다. 연희와 준후는 입을 다물고 그들이 무슨 짓을 하려는 것 인지 사태를 관망하기로 했다. 맨 앞의 우두머리쯤 되어 보이는 녀석은 청자를 앞에 두고 화를 내고 있는 것 같았다. 청자를 발 로 차기도 하고 번쩍 들어 땅에 내치기도 했으나 청자는 공처럼 통통 튀고 데구르르 구르며 폭행을 묵묵히 견디고 있었다. 그것 을 보고 있는 준후의 마음에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청자에 깃들어 있던 아저씨가 이야기해 준 대로 놈들은 아저 씨에게 청자에서 떠나라고 협박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 스키타이족이라. 그중에서도 그릇을 이용하여 영을 부르려는 것을 보니 고대의 주술사임이 틀림없군!

준후는 조금 더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하고 투시를 시작했다. 저 앞에서 발광하듯이 청자를 괴롭히고 있는 녀석은 굉장히 흥 분한 상태라 쉽게 투시할 수 있었다.

이들은 스키타이족의 이단자들이었다. 이상한 주술을 행하 고 사악한 힘을 얻기 위해 사람들을 살해하는 것을 서슴지 않았 으며, 시체를 태우고 아기를 죽이는 등 못된 짓을 밥 먹듯 한 놈 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열세 명으로, 우두머리가 마법사였고 나 머지 열두 명은 부하였다. 이들은 같은 족속들에게 미움을 받아 죽음을 당했다. 스키타이족은 원래가 잔악한 족속이었다. 적장 을 잡거나 싸움에서 승리하면 머리 가죽을 벗기고 두개골에 술 을 따라 마시는 관습이 있었다. 스키타이족의 족장은 저들이 동 족에게 저지른 잔악한 짓에 대한 보복으로 마법사를 말발굽으로 밟아 전신을 으깨서 죽이고 열두 명의 추종자들은 목을 자른 뒤 들개와 새 떼의 밥으로 던져 버렸다. 그러고는 열두 명의 두개골 로 잔을 만들어 금박을 입힌 후 다시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 록 경고의 의미로 삼기 위해 마을에 놓아두었던 것이다.

원래 그런 자들이었구나. 가만…………! 우두머리 마법사는 말발 굽에 밟혀서 완전히 으깨어져 형태가 없어졌을 테고. 그러니까 되살아날 수 있는 매체가 될 만한 그릇을 세상에 남기지 못했군.

나머지 열두 명의 영혼은 자신의 두개골로 만들어진 그릇 속에 숨어 있다가 이곳 박물관에 진열된 후 그들의 마법사를 불러내 기 위해서 애쓰고 있는 것일 테고. 그나저나 이렇게 오랫동안 기 다리고 있었다니. 정말 지독한 놈들이로군.’

대강의 사정을 짐작한 준후는 이번엔 청자에 깃들어 있는 영 과열두영의 우두머리와의 대화를 엿들었다.

대화는 협박을 하는 쪽이나 당하는 쪽이나 서로 상대방의 말 을 기다리지 않고 전개되어 혼란스러웠지만 언어가 아닌 심정으 로 전달되었기에 알아들을 수는 있었다.

어서 거기에서 꺼져! 우리 마법사님을 부르기 위해선 네놈의 그릇이 필요하다. 계속 고집을 부린다면 그릇마저도 부숴 버리겠다. 그러니 어서 떠나라.

절대 그럴 순 없다. 내가 청자를 구운 것은 아름다움을 위해서였지, 너희처럼 사악한 목적으로 쓰기 위해 만든 것은 아니다. 너 따위 놈들에 게 빼앗기려고 내 몸을 태우면서까지 이 자기를 구운 줄 아느냐? 어림 없다. 절대로 떠날 수 없어. 내가 만든 자기는 그런 목적에 쓸 수 없다.

준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 청자가 영의 몸을 태워서 구워진 것이라고?

그렇다면 부숴 버리겠다!

절대로 부술 수 없다. 안 돼! 그것만은 안 된다!

이래도냐?

괴이한 함성을 외치면서 경비원의 몸을 빌린 악령은 청자를 높이 들어서 땅에 있는 힘껏 내던졌다. 퉁 하면서 청자가 땅에 한번 튀겼다가 높이 떠오름과 동시에 청자를 지키고 있는 영의 깊은 신음 소리가 준후의 가슴에 크게 울렸다.

‘저런 식으로 얼마나 고생을 했을까?’

회색 도자기의 영이 당한 고초를 생각하니 준후는 비감한 마 음이 들어 몸 둘 바를 몰랐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 뛰쳐나가 서 부적과 술수로 그들을 제압해 버리고 싶었지만 온몸이 꽁꽁 묶여 있는 상태에선 쉽지 않았다. 수인을 맺어야 하는데 하필이 면 손이 쫙 펴진 채로 온몸이 꽁꽁 묶여 있었기 때문에 전혀 힘 을 쓸 수가 없었다. 입으로 주문을 외우는 것은 가능했지만 그것 도 힘을 발휘하려면 발로 방위를 밟아야 했다. 그 밖에 특별히 쓸 만한 주술은 당장 떠오르는 게 없었다. 대책을 강구하느라 한 참동안이나 끙끙거리고 있는데 우두머리 되는 놈이 분이 풀리 지 않았는지 씩씩거리면서 땅바닥에 놓인 청자를 바라보다가 준 후와 연희 쪽을 향하여 야릇한 눈빛을 보냈다. 우두머리 영이 외 치는 소리가 준후에게 느껴졌다.

말을 듣지 않으면 저 둘을 하나씩 없애 버리겠다. 네놈하고 같은 곳 에서 왔지? 네놈의 후손일지도 모르지. 그러니 순순히 사라져. 저들을 죽이기 전에.

그런 짓을 해선 안 돼!

닥쳐! 그러면 없어져 버리면 될 것 아니야. 그까짓 그릇 하나가 뭐가 대단하다고 그러는 거냐.

놈은 성큼성큼 걸어서 꽁꽁 묶여 있는 준후와 연희 앞으로 다 가왔고, 다른 경비원 중 한 명이 예의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다가 와 청자를 치켜들었다. 놀란 준후와 연희는 몸을 이리저리 비틀 어 보았지만 꽁꽁 묶여 있는 끈은 전혀 풀릴 기미가 없었다. 우 두머리는 잔인한 눈빛을 번득거리면서 둘을 쳐다보았다. 누굴 먼저 희생물로 삼을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놈의 시선이 연희 와 자신을 번갈아 보는 것을 느끼고 준후가 몸을 움찔움찔하면 서 앞으로 기어 나갔다. 연희는 어린 준후가 자기를 위해 죽음을 무릅쓰는 것을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안 돼! 준후야.”

“헤헤헤. 연희 누나 누나는 여자잖아요.”

“어쨌든 안 돼!”

연희가 안간힘을 다해 몸을 굴려서 어깨로 준후를 휙 하고 밀 쳐 냈다. 그리고 놈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연희가 눈을 사납게 치 켜뜨고 올려다보자 놈은 찔끔하고 뒷걸음을 치다 부하들에게 손 짓을 했다. 부하들은 묶여 있는 줄을 잡고 연희의 몸을 짐짝처럼 허공에 번쩍 치켜들었다. 준후는 안간힘을 다해 저항했지만 꽁 꽁 묶여 있는데다가 세 명이나 되는 경비원들이 준후를 그야말 로 무지막지하게 땅바닥에 눌러 버려서 소리를 지르는 것밖에는 별다른 수가 없었다.

“연희 누나! 연희 누나!”

“준후야, 힘내!”

연희는 대롱대롱 허공에 매달려 끌려가면서도 준후에게 소리 쳤다. 놈은 박물관 어디선가 모서리가 날카로운 철제 앵글을 주 워 와서는 연희에게 위협적으로 겨누었다. 온 힘을 쏟아 내려치 기라도 할 듯한 기세였다. 준후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발 만 동동 굴렀다.

‘아! 손, 손을 묶은 이 끈만 풀 수 있다면……………’

연희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 놈이 내리치려 하는 살기 어린 앵 글을 바라보았다. 맞기만 하면 머리가 박살 날 것 같았다. 묶여 있 는 여자를 무지막지하게 후려갈기려 하다니. 생전에 잔인무도하 고 흉포한 짓을 태연스럽게 자행했던 놈들이 분명했다.

그때였다. 청자에서 묘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청자의 회색빛이 차츰 희미해지더니 푸른빛이 돌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영이 청자에서 빠져나가고 있음이 분명했다. 놈은 앵글로 연희 를 내리치려다 그 광경을 보고 동작을 멈춘 채 흡족한 듯한 표정 을 지었다.

‘아! 저래선 안 되는데………….’

연희는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놓여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색이 변해 가는 청자를 보며 안타까운 마음에 안절부절못했다.

‘꽁꽁 묶여 있어서 그러나? 준후가 전혀 힘을 쓰지 못하고 있네. 풀려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혹시……………..’

그 순간, 초조해하는 연희의 마음을 읽었는지 가슴팍에 매달 려 있는 십자가에서 강한 느낌이 전해져 왔다. 십자가에 깃들어 있던 염체가 연희의 생각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뛰쳐나오려 하 고 있었다.

‘맞아! 네가 있었지! 그래, 준후의 손을 풀어 줘. 손만이라도. 어서!”

염체는 십자가에서 빠져나가 휙 하고 허공을 가로지르더니 경비원들의 손을 이리저리 피하며 준후의 등 뒤로 날아들었다. 준 후가 마음속으로 다급하게 외쳤다.

‘그래! 어서 조금만! 손만 풀리면 돼! 손만!’

경비원 중 몇 명이 푸른 염체가 준후의 손에 달라붙어 밧줄을 풀려고 하는 것을 눈치챈 듯, 느리면서도 서두르는 동작으로 준 후에게 손을 내밀었다. 준후는 급한 김에 몸을 데구르르 굴렸다. 염체는 몸을 굴리는 준후의 손목에 달라붙어 끈을 계속 갉아 냈 다. 이번에는 다른 경비원들이 다가와 짓밟으려 했지만 준후는 재빨리 놈들의 발길질을 피했다. 이렇게 엎치락뒤치락하는 동안 준후의 양손이 조금 자유로워졌다. 준후는 마음속으로 푸른 염 체에게 감사를 표했다.

“됐다!”

준후가 허리힘을 이용해서 용수철처럼 몸을 벌떡 일으켰다. 푸른 염체가 연희를 향해 날아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우두머리 의 영이 쐰 경비원은 앵글 막대를 들고 푸른빛으로 변해 가고 있 는 청자를 바라보면서 분노의 표정을 지었다. 놈의 입에선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이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고, 연 희는 그 틈을 이용해 그자에게서 조금이라도 떨어지려고 계속 몸을 꿈틀댔다. 푸른 염체는 그런 연희를 위해 마치 경계를 보듯 허공을 빙빙 돌았다.

준후는 일단 손을 놀릴 수 있을 만큼 자유롭긴 했으나 몸을 묶 은 끈이 다 풀린 게 아니었다. 한 가닥의 줄로 온몸을 묶은 것이 아니고, 여러 개의 끈으로 이곳저곳을 묶어 놓았는지, 매듭이 수 십 개는 되는 것 같았다. 끈을 완전히 풀지 않은 상태라 몸을 자 유로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준후는 뒤돌아서서 우두머리를 향 해 뇌전을 쏘려 했지만 표적을 정확히 겨냥할 수 없었다. 그러는 중에 두어 명의 경비원이 준후를 향해 다가왔다. 준후는 토끼처 럼 깡충깡충 뛰면서 놈들의 공격을 피했다. 저편에서는 더 많은 수의 경비원들이 연희 쪽을 향하고 있었다.

‘안 되겠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자. 그러면 수인을 맺을 수 있을 테니까.’

이런 생각이 들자 준후는 재빨리 양손으로 수인을 맺고 껑충뛰면서 발로 땅을 쾅하고 굴렀다.

“땅을 지배하는 지령이여! 물의 기운을 받아들이고 파도를 치게 하라!”

준후가 발을 구른 데서부터 단단한 대리석 바닥이 물결치듯 큰 파도와 같은 울림을 사방으로 퍼뜨렸다. 바닥이 출렁거리자 경비원들이 우르르 나자빠졌다. 비록 삼층의 바닥이라도 주문이 제대로 통하는 것을 보고 준후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파도쳐라! 파도쳐!”

준후는 있는 힘을 다해서 두 번 세 번 발을 굴렀다. 눈에 보일 정도로 바닥이 출렁하면서 넓게 파장이 전달되자 바닥에 나자 빠진 경비원들이 몸을 일으키려다가 균형을 잃고 데굴데굴 굴 렀다. 청자도 멀찌감치 굴러가고 있었고 연희도 중심을 잡지 못 하고 바닥에 누운 채 몸을 굴렸다. 힘이 부쳤는지 준후의 얼굴엔 비 오듯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나마 아직 힘이 남아 있을 때 연희에게 가까이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준후의 머리에 한 가지 생각이 번뜩 떠올랐다.

‘도가의 오행기운 중 금의 기운을 손에 집중시키면 손이 칼같 이 되는 술수가 있었지. 왜 진작 이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준후가 손에 기운을 넣어 수형도의 술수를 쓰자 싸늘하고 번 쩍거리는 기운이 손날에 맺혔다. 그 상태에서 손을 휘두르자 몸 을 묶고 있던 끈들이 마치 칼에 베인 것처럼 와스스 끊어져 버렸다.

“됐다!”

준후는 연희의 곁으로 다가왔다. 준후는 다시 한번 수형도의 기운을 발해서 남아 있던 끈을 모조리 끊고 연희의 몸을 묶었던 끈도 끊어냈다. 신기하게도 끈이나 옷은 수형도의 영향을 받아 서 끊어지거나 찢어졌지만 사람의 몸에는 수형도의 기운이 먹혀 들지 않았다.

‘이것도 좋은 방법이구나. 앞으로 자주 써먹어야지.’

“준후야, 고맙다!”

자유로워진 연희는 몸을 일으키자마자 목에 걸린 구리 십자가 를 꺼내 들었고, 경계하듯 허공을 빙빙 돌고 있던 염체가 십자가로 돌아왔다. 땅바닥에 넘어져 있던 경비원들이 느릿느릿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어서 가요. 일단 피해야 해요. 아 참! 저 청자.”

굴러간 청자는 한쪽 구석의 모퉁이에 처박혀 있었다. ‘저 청자를 어떻게든 가지고 가야 할 텐데.’

구석에 처박혀 있는 청자를 주우러 갔다간 포위될 우려가 있 었다. 준후가 어쩔까 망설이면서 연희를 쳐다보자. 연희는 입술 을 깨물더니 청자가 있는 쪽으로 뛰어갔다. 준후도 그 뒤를 따랐 다. 아무리 사정이 급하다고 해도, 실제로 청자가 살아 있는 물건 이 아니라 해도, 악한 일에 쓰이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연희 가 잽싸게 청자를 집어 들고 준후가 앞을 막아서는 동안, 경비원들은 다시 일어나 느릿느릿하게 움직이며 연희와 준후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쭉 둘러서서 주위를 에워쌌다. 숫자를 세어 보니 아 홉이었다. 준후가 제압부를 써서 몸을 굳혀 버린 세 명의 경비원 들은 아직도 그대로 있는 모양이었다.

“좋다. 이 나쁜 놈들아! 두고 보자.”

제압부를 꺼내려고 품을 뒤지던 준후는 깜짝 놀랐다. 정신을 잃은 사이 흘렸는지, 아니면 놈들이 빼앗아 갔는지 준후의 품 안 에는 부적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니, 이런! 이러면 이야기가 달라지는데.’

준후의 이마에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연희가 걱정스러운 눈 으로 준후에게 물었다.

“준후야, 왜 그래? 어서 부적을 날려.”

“연희 누나, 좀 두고 봐요.”

부적이 없는 상태에서 영들을 떼어 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 다. 맨손의 준후가 쓸 수 있는 것은 공격 주술밖에 없는데 사람 에게 주술을 쓴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옳은 일이 아니었다. 준후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골몰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경비 원들도 준후가 꽤 무섭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더 이상 다가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팽팽히 대치한 채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그 것도 잠깐 우두머리 놈의 입에서 이상한 노랫가락이 흘러나오 기 시작했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다른 놈들도 노랫가락에 맞추어서 일제히 음을 냈다. 준후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연희가 의아해서 준후에게 물었다.

“준후야, 왜 그러니? 저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글쎄요, 확실치 않지만 소리로 누군가를 불러내는 것 같아요. 혹시 영을 불러 보려는 것이 아닌지. 자기네들은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으니까. 진짜 우두머리인 마법사를…………….”

준후가 채 말을 끝내기 전에 연희와 준후를 둘러싸고 있던 아 홉 명에게서 이상한 변화가 일어났다. 그들은 한군데로 모이더 니 자석에 쇳조각이 붙듯이 바싹 몸을 밀착시켰다. 이상한 기운 이 사방으로 팽팽히 번졌다. 준후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나타나셨군. 어디 누가 이기는지 한번 해보자.”

아홉 명의 입이 한꺼번에 열리면서 마치 한 사람이 이야기하 듯 이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짐승 울음소리 같기도 하고 고함 을 치는 소리 같기도 했다. 신기한 것은 그 소리를 통해서 저쪽 에 있는 영이 이야기하는 내용이 준후의 마음속으로 전달되는 것이었다.

너희는 뭔데 남의 일에 방해하는 거냐? 쓸데없는 일에 끼지 말고 어서 사라져라!

준후는 영력을 담아 마음속으로 대답했다.

헛소리 마라. 너희야말로 무슨 일을 꾸미는지 모르지만 지옥에 좋은 자리가 있으니 그리로나 가라. 너희는 윤회도 필요 없고 환생도 안 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건방진 녀석! 네놈이 무엇을 안다고 지껄이는 거냐?

아는 거야 없지. 그러나 네놈들이 나쁜 짓을 꾸미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알고 있다. 이 나쁜놈들아.

나쁜 짓? 나쁜 짓이라고? 으흐하하하.

마법사의 영은 큰 소리로 웃어 젖히더니 잠시 후 말을 이었다. 살고 싶은 것도 나쁜 짓이냐? 네놈의 눈으로 봤을 때 과거 내가 한 일이 잔혹해 보일 수야 있겠지. 그러나 영원히 살고 싶다는 것은 모든 인간의 꿈 아니더냐. 나는 그것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것 뿐이다. 억울하게도 그 방법을 실행하기 직전에 죽음을 당하고 말았지 만. 그래서 때가 오기만을 바라며 수천 년을 기다렸다. 수천 년을…………. 아니, 얼마나 오래 기다려 왔는지 헤아릴 수조차 없다. 그때 내 몸이 완 전히 부서지지 않았다면……………. 이 방황하는 넋을 담을 수 있는 형체를 지닌 물건만 얻을 수 있었다면…………….

마법사의 영은 잠시 회상에 잠기는 듯했다.

내 부하들은 그래도 머리라도 있어서 그릇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제까지 남아 있을 수 있었지. 하지만 내가 얼마나 힘들고 괴로웠는지 아는가? 그렇게 오랫동안 세상을 헤매고 저 그릇들이 옮겨지는 곳마다 따라다녀도 내 넋을 담을 만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저기 보이는 저 파 란 도자기, 저것만 빼놓고 말이다. 그런데 이상한 놈이 딱 잡고서 놓아 주지 않는 거야. 그래, 부탁이다. 더 이상 너희가 말하는 악행은 저지르지 않겠다. 더 이상 사람을 죽이지도 않을 거고. 그러니 제발 내가 다시 살아날 수 있게만 해줘.

사람의 몸을 얻기 전 중간 단계가 될 저 도자기만 있으면 난 다시 살 아날 수 있어. 좋다면 너희에게도 알려 주지. 죽지 않고 영생할 수 있는 방법을.

“닥쳐라!”

준후가 소리쳤다.

“영원히 사는 것이 좋을 것 같냐? 그리고 너 같은 놈은 영원히 살아도 소용이 없다.”

무슨 소리지?

“그렇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의 몸을 빼앗아 영원히 살아서 무얼 어쩌겠다는 거냐! 너 같은 놈에게는 지옥의 불구덩이가 가장 맞는 자리다.”

쪼끄만 놈이 주둥이만 까졌구나. 그으래? 그러면 죽어 봐라! 내 다시 살아나지 못해도 네놈들, 나를 방해하는 놈들은 씨를 말려 버리겠다. 일단 계집년부터. 흐흐흐.

준후는 연희를 돌아보았다. 만일 저자가 연희의 몸속으로 들 어가서 경비원들에게 한 것처럼 연희를 지배하게 된다면……………

“그것만은 안 돼!”

준후는 하늘에 대고 기다란 고함을 질렀다. 동시에 준후의 손 가락이 허공에 글자 같은 것을 그리는 듯 재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의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놀림이었다. 열 번, 스 무번, 아니 셀 수 없을 정도로 손가락이 전광석화처럼 움직이자 허공에 어렴풋하게 글씨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연희는 준후가 무엇을 하는지 몰라서 당황스런 표정으로 준후를 쳐다보고 있었 다. 준후는 순식간에 온몸이 땀에 젖은 채 모든 힘을 다 쏟아서 허공에 글자를 쓰고 있었다. 연희의 눈에도 글자가 희미하게 보 이기 시작했다. 글자인지 도형인지 모양이 보일 정도로 뚜렷해 지자 준후가 헉하면서 가쁜 숨을 내쉬고 한쪽 무릎을 비틀하다 가 연희의 팔을 잡고 겨우 균형을 잡았다. 준후가 말했다. 

“연희 누나, 저기에 손을 짚어요. 어서 글자를!”

연희는 영문도 모르고 준후가 이야기한 허공에 떠 있는 글자 에 손을 짚었다. 그러자 화끈한 감촉이 느껴지면서 연희의 손에 글자가 빨려들듯 섬광처럼 빛나다가 이내 사라져 갔다. 준후가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떠듬떠듬 말을 이었다.

“연희 누나, 옛날에 봤어요. 연희 누나도 몸동작이 꽤 빠르죠? 이제 저들에게 당하지 않을 거예요. 제가 허공에 그린 것은 부적 천장의 공력을 한꺼번에 쏟아 낸 거예요. 이걸로 저들을 풀어 줘요. 자, 어서요! 나는 지금 당장 움직이기가 힘들 것 같으니 어서.” 

연희와 준후가 이야기하고 있는 순간에도 한데 뭉쳐진 아홉 명의 경비원들은 서서히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마법사의 영이 아홉 명의 영을 한곳에 모으고 다시 경비원의 육체적인 힘을 하나로 뭉친 듯 기세가 엄청났다. 마법사의 영이 모두를 통 솔하고 있어서인지 아홉 명의 동작은 로봇처럼 일사불란했다.

아홉 명이 동시에 오른팔을 내뻗었다. 그들이 팔을 내뻗자 획 하는 바람 소리가 들리면서 기분 나쁜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준후는 기운이 빠진 듯 휘청거리면서 한쪽으로 몸을 굴렸다. 뛰 어갈 힘이 없어서이리라. 준후가 빠르게 말했다.

“연희 누나, 어서요. 자신감을 갖고 스스로를 믿어요! 전…………… 누나를 믿어요. 자신을…………….”

연희는 엉겁결에 몸을 피하면서 청자를 구석에 내려놓고는 평 소에 익혀 왔던 호신술의 동작으로 맨 왼쪽에 있는 경비원 한 명 의 팔을 왈칵 잡았다. 그러자 팔을 잡힌 경비원은 으악 하는 비 명소리를 지르면서 데구르르 구르다가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나머지 여덟 명의 경비원들이 놀란 듯 고개를 서서히 연희 쪽으로 돌렸다.

반은 미용을, 반은 유사시 방어를 위한 목적으로 호신술을 익 혔는데 이 정도 몸을 움직였다고 숨이 차다니. 연희는 숨을 헐떡 거리며 의아해하고 있었다. 준후가 자신에게 심어 준 부적의 힘 으로 경비원들의 몸에서 나쁜 영들을 떼어 낼 수 있었지만 그것 역시 힘을 크게 요하는 것이 분명했다. 저쪽 끝에서 준후도 수인 을 맺어 가며 또 하나의 경비원을 뒤로 넘어뜨리고 있었다. 백지 장처럼 하얗게 질려 버린 준후는 기운이 다한 듯 동작 하나하나가 위태로워 보였다. 아무리 재주가 좋아도 기운을 무한정 쓸 수는 없었다.

양쪽에서 한 명씩의 경비원이 땅에 나자빠지자 나머지 일곱 명의 경비원들은 당황한 듯 일렬로 서 있던 배치를 바꾸어서 둥 글게 등을 맞대고 섰다. 그러더니 둥글게 선 상태에서 간격을 넓 히며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일곱 명이 동시에 캬아악 소리를 지 르자 손톱이 호랑이 발톱처럼 길게 늘어났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었다. 십오 센티미터는 족히 될 것 같았다. 게다가 그들이 입을 벌릴 때마다 썩은 피비린내가 풍겨 나왔다.

그들의 동작은 아직도 느릿느릿했다. 둥글게 선 경비원들 중 두 명이 연희를 향해서 손톱을 뻗어 오자 가볍게 피하면서 그중 한 명의 팔목을 있는 힘껏 잡아 비틀었다. 그러자 다시 연희의 몸에서 기운이 쭉 빠지는 듯하더니 그놈이 악 하는 비명을 내지 르며 땅바닥에 그대로 뒹굴었다. 연희도 아찔해지며 머리가 빙 돌았다. 연희는 이를 악물면서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섰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죽기 아니면 살기. 누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

이를 악다물고 있는 연희의 눈에, 비실거리다가 한 바퀴 맴을 돌며 픽하고 쓰러지는 준후의 모습이 보였다. 아무래도 큰 주술 을 여러 번 써서 탈진해 버린 것 같았다. 연희는 여기저기서 획 휙 뻗쳐 오는 경비원들의 손톱을 피해 준후에게 달려갔다.

“준후야, 정신 차려. 왜 그러니!”

연희는 준후를 부축해 일으켰다. 준후는 그야말로 핏기 하나 없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준후는 애써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너무 힘을 써서 그래요. 조금 있으면 나을……………. 연희 누나, 조금만 버텨줘요.”

“알았어. 염려 마, 준후야.”

“내 삼 년의 명이 그 부적 속에 들어 있어요. 그러니…………. “

연희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목이 메어 무어라 말을 할 수 가 없었다. 준후는 혼자 싸워도 됐을 텐데 자기의 안위를 염려해 서 삼 년의 수명을 희생하면서까지 부적을 만들어 주었다는 말인가.

그러는 중에 다른 경비원의 손톱이 연희와 준후에게 다가섰고 연희는 자신도 모르게 치밀어 오르는 분노로 다가오는 놈의 손 목을 잡아서 아예 한쪽으로 엎어쳐 버렸다. 이번에는 힘을 과하 게 쓴 듯 연희도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눈앞이 빙빙 도는 것을 느 끼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직도 다섯이나 남았는데.

그러나 다시 일어서기는커녕 고개를 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힘 에 겨웠다. 이대로 있다간 정신을 잃고 쓰러져 버릴 것 같았다. 

‘정신을 잃으면 안 되는데, 안 되는데.’

연희는 정신을 차리려 애를 썼으나 아무리 다짐을 해도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정신을 모으면 거짓말처럼 다시 힘이 난다던데. 난 역시 영화 속의 주인공은 아닌가 봐.’

다섯 명의 경비원들이 자신과 준후를 향해 다가오는 것이 보 였으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지금 연희가 할 수 있는 일이라 고는 정신을 잃은 준후를 감싸 안아 앞을 막는 것뿐. 연희는 최 후의 힘을 다해 야앗 하고 기합을 지르며 다가오는 한 놈의 팔을 잡았다. 놈을 쓰러뜨리고 난 연희는 이제 고개도 가누기 어려워 벽에 휘청하며 기대앉았다. 나머지 네 명의 여덟 개의 손, 마흔 개의 길고 날카로운 손톱이 느릿느릿하게 연희를 향해 다가왔 다. 이럴 바에야 빨리 다가와서 끝장을 보는 것이 나을 텐데.

“준후야, 미안하다. 나 때문에 너까지………….”

연희가 체념한 듯 중얼거렸다. 그때 연희의 목에 걸려 있던 구 리 십자가에서 푸른 염체가 휙 하고 튀어나왔다.

‘아, 그래 봐야 저놈들한테 염체의 힘 정도는 아무런 소용도 없을 텐데.’

연희는 이제 모든 것이 끝장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무 슨 일인가. 염체는 난데없이 아까 연희가 한쪽 구석에 내려놓았 던 청자를 향해 다가가더니 청자를 밀어 연희가 있는 쪽으로 굴렸다. 청자를 밀고 온 푸른 염체가 이번에는 준후가 그려준 부적의 힘이 맺혀 있는 연희의 손을 잡고 청자 쪽으로 끌어가는 것이 아닌가. 염체도 너무 많은 힘을 써서 지쳤는지 색깔이 흐릿해 진 것 같았다.

“응? 이 청자에 손을 짚으라고?’

연희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염체가 하라는 대로 옆에 있던 청자에 손을 갖다 댔다. 연희가 손을 대자 화끈한 열기가 느껴졌 다. 뭔가가 연희의 손을 빠져나와 청자로 들어갔다. 실제로 몸이 데거나 타는 것은 아니었지만 느껴지는 열기는 벌겋게 달아오른 숯덩어리 같았다. 빠져나온 열기가 힘으로 바뀌기라도 한 듯 청 자는 살아 있는 것처럼 허공으로 붕 튀어 올랐다. 그러더니 다가 오던 경비원의 한쪽 뺨을 퍽 소리를 내며 강타했다. 연희는 그제 야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청자의 영이 부적의 힘을 대신 받아서 혼자 움직이고 있는 거야.’

청자는 허공을 빙빙 돌며 열기를 뿜으면서 두 명의 경비원을 쓰러뜨렸다. 그러나 경비원들도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두 놈 이 무시무시한 손톱을 뻗쳐 청자를 움켜잡았다. 청자가 몇 번 빠 져나오려 움찔거렸지만 잘되지 않았다. 청자의 기운이 소진되기 라도 한다면 그대로 박살이 나 버릴 수도 있었다. 연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안타까운 심정에 손만 부르르 떨고 있는데 준후 의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연희 누나, 내 손을, 손을……………. 수인을 맺어 줘요.”

“뭐라고, 준후야?”

“저 청자에 깃든 아저씨는 나하고는 영이 잘 맞는………… 내가 수인을 맺고 힘을 조금만 더 보내 주면 이길 수 있…….”

준후는 어설픈 동작으로 손가락을 꼼지락댔다. 하는 수 없이 연희는 준후의 손을 움켜잡고 수인을 맺어 주었다. 준후는 고개를 가로저으려 움찔거렸다.

“아니, 그거 왼손 둘째손가락………… 좀 더위………….”

연희는 준후가 말하는 대로 수인을 다시 맺어 주었다. 그사이 두 명의 경비원은 청자를 바닥까지 끌어내리고 기다란 막대기와 앵글로 청자를 내려치고 있었다. 청자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타격을 입을 때마다 조금씩 회색으로 변했다.

“어서 저쪽을 향, 향…….”

다급한 준후의 말에 연희도 있는 힘을 다해서 준후의 손을 청 자가 있는 쪽으로 향하게 했다. 연희의 몸에서도 기운이 쭉 빠져 나가는 듯했다. 준후는 자신의 기운에 연희의 기운까지 한데 모 으려는 모양이었다. 준후의 손가락 끝에서 빠른 속도로 기다란 불줄기가 뻗어 나가 땅바닥에 구르고 있는 청자를 향했다.

불줄기를 받은 청자는 붉은빛을 사방에 내뿜으며 허공으로 솟 아올랐다. 솟아오르는 청자 속에서 불길에 둘러싸인 사람 형상 의 희미한그림자가 준후의 눈에 비쳤다. 준후는 틀림없이 청자를 만들기 위해 자신의 몸을 태웠던 도공의 그림자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청자에서 솟아 나오는 불길은 도자기 가마의 뜨 거운 불길과 흡사했다. 청자에 깃든 영은 준후에게서 받은 힘을 그런 식으로 발산하는 것 같았다. 남아 있던 두 명의 경비원 중 우두머리 행세를 하던 경비원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져서 바닥을 구르다가 이내 잠잠해졌다.

이제 마법사와 부하의 영이 한 몸에 빙의된 듯한 한 명의 경비 원만이 남았다. 그는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마지막 남은 경비원의 입에서 분노에 찬 고함 소리가 터져 나오더니 솟아오르는 불길에도 불구하고 허공에 떠 있는 청자를 향해 손을 뻗은 채 조금씩 조금씩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게 아 닌가.

연희는 준후가 정신을 차리려 하자 그리로 눈을 돌렸다. 준후 는 더 이상 눈을 뜨고 있을 기운조차 없어 보였다.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힘을 모조리 쏟아 내며 청자에 기운을 불어 넣었는데 마법사란 놈은 생각보다 강한지 그 기운으로도 꺾이지 않았다. 놈의 영을 가둘 수만 있다면……………. 준후의 뇌리에 붉은색 종이에 그려진 흡령부가 떠올랐다.

“부적 부적만 있으면, 그 붉은 부적만 있으면………….’

“준후야, 정신 차려!”

“그것을 저놈에게 붙인다면…………… 저놈도………… 별 힘을…… 쓰지 못할…….”

준후는 더 이상 중얼거리지 못하고 식식거리는 소리만 몇 번 내다가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연희도 온몸에 기운이 빠져나가 꼼짝도 할 수 없는 지경이라 그 광경을 그냥 바라만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청자는 여전히 사방을 시뻘겋게 물들이며 강렬 한 불길을 뿜어내고 있었지만, 마법사도 이에 질세라 입으로 계 속 커다란 고함을 지르며 손톱을 곤두세운 채 힘겹게 청자를 향 해 조금씩 접근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내가 어떻게 해주…………’

안타까운 마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연희의 눈에 이상한 것이 보였다. 쓰러져 있는 경비원 중 한 명의 주머니 속에서 낯 익은 누런 종잇조각끄트머리가 보였기 때문이다.

‘저건 준후가 가지고 다니던 부적 같은데…………’

아마 준후를 기절시키고 나서 부적을 빼앗아 엉겁결에 집어넣은 것 같았다.

연희는 있는 힘을 다해 기어갔다. 얼마 안 되는 거리가 수 킬 로미터는 되는 기분이었다. 드디어 놈의 주머니에 손이 닿았다. 마지막 안간힘을 써 부적 뭉치를 끄집어냈다. 손이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부르르 떨렸다. 준후의 말대로 그중에는 누런 종이가 아닌 붉은 종이로 씌어 있는 부적 하나가 보였다.

연희는 그 부적을 손에 쥐고 청자와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경비원, 아니 마법사를 바라보았다.

‘지금 그리로 간다면………… 그래서 준후의 말대로 부적을 놈의 등에 붙인다면……?

연희는 기다시피 하여 힘겹게 몸을 움직였다. 마법사가 청자 를 손톱으로 거머쥐려 하는 순간이었다. 놈은 연희가 자신을 향 해 비틀거리면서 기어 오는 것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준후의 술수가 어떤 것인지 제대로 알 수 없었겠지만 뭔가 있다는 것 은 느낀 듯했다. 놈은 안간힘을 다해 몸을 돌리려 했지만 청자에 서 거센 불길이 강력하게 뻗어 나오자 청자에서 손을 떼지 못했 다. 만일 놈이 손을 뗀다면 불길에 휩쓸려 버릴 터였다.

놈은 이를 갈더니 노랫가락 비슷한 고함을 질렀다. 놈의 등 뒤 에 다다른 연희는 노랫소리가 들리자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순간 놈과 연희의 시선이 마주쳤다. 연희는 주춤거리며 뒤로 물 러섰다. 놈은 이제 경비원의 모습이 아니었다. 무슨 방법을 어떻 게 썼는지 알 수 없지만 팅팅 부은 것 같은 커다랗고 징그러운 모 습으로 변해 있었다. 옷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몸은 온 통 시퍼렇고 엄청난 크기의 혹으로 뒤덮여 있었고 여기저기 물 집과 더러운 상처에 뒤덮인 추악한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더군 다나 상처에서 끊임없이 누런 진물과 검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쭈글쭈글하게 주름 잡힌 시퍼렇고 거무튀튀한 몸뚱이를 보자 연 희는 손대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졌다. 무섭다기보다는 구역질이 났다.

-연희 누나 자신감을 가지고 스스로를 믿어요! 스스로를……

‘그래, 난 할 수 있어! 준후의 말이 틀릴 리 없어. 부적을 놈에 게 붙이기만 하면………….’

그러나 아까와 마찬가지로 또 다른 목소리가 연희의 마음속에 울렸다.

‘징그럽지 않아? 저런 도자기쯤이야 어찌 되건 무슨 상관이야. 어찌 저런 더러운 것에 손을 댄단 말이야. 피해! 피하라.’ 갈피를 잡지 못하는 연희의 마음속에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저건 환상이야, 환상이라구. 스스로를 믿으라고 했잖아. 용기 를 내! 용기를!’

연희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부적을 치켜 들면서 허리를 폈다. 순간, 놈은 연희의 행동이 수상쩍다고 느꼈는지 캬악 하는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놈의 시퍼런 등짝이 마구 갈라지고 혹들 이 터지면서 등에서 기분 나쁜 시퍼런 색을 띤 징그러운 벌레들 이 수백 마리나 와그르르 머리를 내밀며 꿈틀댔다. 정말 눈 뜨고 는 볼 수 없는 끔찍한 광경이었다. 저절로 욕지기가 나오며 간신 히 일으킨 허리가 꺾였다.

‘아, 난 못해! 난 못해! 환영이라 해도 저렇게 징그럽고 꿈틀거 리는 것에 손을 댄다는 것은……?

연희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저쪽에 쓰러져 있는 준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마법사의 손톱이 청자를 움켜쥐고 바스러뜨리려는 모습도 보였다. 청자에서 뿜어 나오는 붉은빛은 눈 에 띌 정도로 옅어지고 있었다. 또 놈의 등판에서 꿈틀대며 기어 나오고 있는 많은 벌레들………….

“아아아아!”

연희는 눈을 질끈 감고 길게 비명을 지르면서 놈의 등에 부적 을 갖다 댔다. 처음에는 뭉클하면서 따끔따끔한 감촉이 손에 전 해 오는 것 같더니만 곧이어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단지 평 평한 사람의 등짝이라는 느낌만 들었을 뿐. 땡그랑하면서 뭐가 떨어지는 소리에 연희는 번쩍 눈을 떴다. 땅바닥에는 회색빛으 로 변한 청자가 구르고 있었고, 자신은 석고상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는 경비원의 등에 손을 짚고 있었다.


“준후야, 준후야, 정신 차려!”

연희가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준후는 간신히 눈을 떴다. 연희 의 웃음을 머금은 얼굴이 준후의 눈에 들어왔다. 준후가 겨우 입 을 열었다.

“연희 누나・・・・・・ 청자는? 그리고・・・・・・ 경비원들은?”

“응, 걱정 마. 다 잘됐어. 경비원들은 모두 힘을 잃고 석고상처럼 굳어 있어. 청자도 안전해. 염려하지 않아도 돼.”

준후는 간신히 몸을 일으키고는 주변을 훑어보았다. 여덟 명의 경비원들이 땅에 뒹굴고 있었고 마법사의 영이 씌어 있던 경비원은 등에 붉은 부적을 붙인 채 뻣뻣하게 서 있었다. 그리고 밑에는 회색빛 청자가 앉아 있듯이 놓여 있었다.

“연희 누나, 난 누나를 믿었어요. 어떻게 붉은 부적을 찾았는 지는 모르지만 잘했어요. 고마워요.”

“고맙기는 내가 뭘………….”

준후는 서서히 몸을 일으켜 청자가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정 신을 잃고 있던 사이에 지쳤던 몸도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한 것 같았다. 준후의 뒤를 따라온 연희가 준후의 어깨에 손을 짚었다. 준후는 청자에 손을 대고 안에 깃들어 있는 영과 대화하기 시작 했다.

아저씨, 도와줘서 고마워요.

내가 뭘…………. 그나저나 나도 내가 죽어서 이런 일을 겪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이제 저 악령들이 사라졌으니 더 이상 고생하지 않아도 되겠지? 네, 그럼요. 물론이죠.

준후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는 말을 받았다. 그리고 무언가 를 골똘히 생각하더니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아저씨.

왜 그러니, 꼬마야?

이제 그 청자에서 떠나 승천을 하시는 것이 어때요? 아무리 아저씨 의 마음이 간절하다고 해도 정해진 하늘의 법도에 따르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어떠세요? 글쎄다……………

아저씨가 이 청자에 애착심이 많다는 것은 알아요. 아저씨는 청자를 만들기 위해 스스로의 몸을 태우셨죠?

영은 아무 말이 없었다. 스스로 불에 뛰어들어 몸을 태우면서 까지 도자기를 만든 사람의 심정이 어떠리라는 건 이해하지 못 할 바 아니었지만, 준후는 그래도 천의에 따르는 것이 좋을 것이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저씨, 더 이상 청자가 남에게 이용당하는 일은 없을 거예 요. 그렇게 믿으시고 아저씨는 아저씨에게 주어진 운명을 받아 들이세요.”

영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마치 수백 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 가는 듯한 깊은 침묵이 흘렀다. 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말이지, 그다지 내세울 것이 없는 보통 도공이었단다. 하지만 …….

청자에 깃든 영은 회상에 잠겼다. 준후는 청자에 손을 댄 채 눈을 감았다. 준후의 마음속에 흰옷을 입은 도공이 하늘을 쳐다 보고 있는 모습이 비춰졌다.

나는 언젠가 하늘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지. 아주 맑은 가을날이었 단다. 저 파란 하늘을 내가 만든 자기 속에 옮겨 보았으면……………. 그때부 터 나는 모든 것을 잊은 채 어떻게 하면 저렇게 맑은 가을 하늘빛이 나는 자기를 만들 수 있을까 고민을 하게 되었지. 그리고 그런 자기를 만 들기 위해 애를 썼지. 그러나 잘되지 않았다. 그러기를 수십 차례, 아니 수백…………. 심한 갈등과 번민이 뒤따랐음은 물론이고. 그러다 마지막으 로 이 청자를 만들 때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었는데……………

영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 대신 영이 겪었던 기억이 준 후의 마음속에 영상처럼 되살아났다.

도자기를 굽는 가마 앞에서 도공은 밤을 새며 먹고 마시는 것 도 잊은 채 초조하게 귀를 기울였다. 청자를 굽는 과정은 몹시도 어렵고 까다롭다. 조금이라도 불을 잘못 다루어서 온도가 맞지 않으면 그 안에 넣어 두었던 도자기들은 가차 없이 깨어져서 터 져 나갔다. 펑 하는 소리가 가마 안에서 들려왔다. 가마 안에 넣어 두었던 초벌 도자기들은 일곱 개. 계속해서 펑펑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장작이 바싹 말라서 불기운이 너무 센 게 틀림없었다. 도공은 불기운을 잡을 방법이 없을까 하여 엉겁결에 가마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화끈한 열 기운이 느껴진다. 그러나 차곡차곡 쌓은 나뭇단을 헐 수는 없었다. 쌓아 놓은 나뭇단이 무너져 버리 면 도자기도…………. 불기운은 어떻게든 낮추어야 했다. 가마 문을 연 도공은 주저했다. 그의 마음속에 푸르고 맑은 가을 하늘이 떠 올랐다. 또다시 도자기들이 펑펑 터지는 소리를 듣자 자신의 몸 이 으깨지기라도 한 듯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더 이상 참지 못한 도공은 가마의 문을 닫고는 불길을 향해 몸을 부딪쳐 갔다.

하나 남은 청자를 끌어안고서……………

단 하나 남은 도자기는 성공적이었지. 그 대가로 내 몸은 타 없어져 서 유골조차도 남지 않게 되었고. 나중에 사람들이 이 청자를 보고 감탄 을 하는 것을 이 속에서 들을 수 있었어. 이 청자는 내 무덤이나 다름없 단다. 이 청자는 임금님 진상품으로 바쳐지기도 했지. 그러나 그 후에는….

준후가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의 영상은 아까 청자를 처음 보았을 때 영의 기억을 읽은 바 있어서 이야기를 듣 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도공이 청자를 얼마나 끔찍 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잠시 후 청자에 깃든 영이 한숨을 내쉬 면서 말했다.

그래. 이러고 있어선 안 되겠지?

준후는 자신도 모르게 말을 꺼냈다.

도공 아저씨. 지금 저 청자의 빛이 어떤지 아세요? 청자의 빛은 아저 씨가 생각하시는 것과는 달리 파란빛이 아니랍니다.

어, 뭐라구? 그건 무슨 소리지?

아저씨의 우울한 마음이 청자를 감싸고 있어서 우울한 회색을 띠고 있어요. 우리 고향의 하늘이 아닌 이 낯선 땅의 하늘과 같이…………….

청자에 대고 있던 준후의 손에 떨리는 듯한 감촉이 전해 왔다.

이 자기의 빛이 정말 파란색이 아니니? 아! 하기야 너무도 많은 시간이 흘렀지. 그사이 견디기 힘든 일도 수없이 많았고, 내가 나오면 이 자 기의 빛이 다시 파란색으로 변할까? 맑은 가을 하늘빛으로 되돌아갈까? 

예, 틀림없어요. 틀림없이 그럴 거예요.

영은 깊은 상념에 잠긴 듯 한동안 말을 잊다가 잠시 후 짙은 탄식조로 말을 이었다.

하늘을 보고 싶구나. 이곳처럼 우중충한 하늘이 아닌 푸른 하늘을. 하지만……………..

다시 보세요. 아저씨가 만든 청자 속에 그 하늘빛이 있어요. 나와서 보세요. 그러면 보일 거예요.

그래. 그렇다면 주저할 필요가 없지. 얘야, 너는 재주가 많은 것 같던 데 힘을 빌려 주지 않겠니?

그럴게요.

준후가 청자를 한 손으로 짚고 다른 한 손으로 수인을 맺으며 입으로 나지막이 주문을 외우자 도공의 영은 서서히 청자에서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연희는 둘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고 갔는 지는 들을 수 없었지만 청자의 회색빛이 물에 씻겨 벗겨지듯이 점점 파란빛을 띠어 가는 것을 보고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어느덧 도공의 영이 완전히 빠져나온 듯 청자는 금방이라도 푸른 물이 뚝뚝 떨어져 내릴 것 같은 맑은 가을 하늘의 푸른빛으 로 바뀌었다. 도공의 영은 허공에 머물고 있었다.

그랬구나, 얘야, 저 고운 빛을 한번 보거라. 내가 평생을 바쳐 만들려 했던 빛이 바로 저것이란다. 곱지 않니?

예, 너무 고와요.

그래, 저게 바로 내가 살던 고향 하늘빛………….

준후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영은 흐뭇한 듯이 한동안 말이 없었다. 영이 준후에게 물었다.

그런데 꼬마야. 내가 죽은 이후로 세월이 많이 흘렀지?

예, 많이 흘렀죠.

지금도 청자를 굽는 사람은 많겠지? 나보다도 훨씬 곱게.

준후는 우울해졌다. 도공이 죽은 지 적어도 육칠백 년은 지났 다. 그러나 그동안 이어져 내려오기커녕 고려 왕조가 멸망할 때 쯤엔 청자를 굽는 방법은 거의 잊혔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 준후 의 마음을 눈치챘는지 도공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그랬구나….. 말 안 해도 알겠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야. 이런 아름다운 것이 왜 잊혔는지. 왜 사람들은 말로만 이 아름다움을 이야기 하면서 정작…………….

도공의 탄식의 말이 끊겼다. 도공의 영은 승천을 하려는 듯 점 점 기운이 약해지고 있었다. 준후는 뭐라고 말을 할 수 없어 입 을 다물고 있다가 영이 거의 사라지려 할 때 나지막한 소리로 말 했다.

그렇지만 기억하세요. 가을 하늘빛을요……………

알았다. 어쨌거나 시원하구나. 나는 다시 태어나도 청자를 구울 거란다. 꼬마야, 고맙다 고마워…………..

도공의 영이 서서히 사라져 가는지 청자는 더더욱 완연한 푸 른빛을 내뿜으며 우아한 자태를 뽐냈다. 그 모습을 본 준후와 연 희는 한동안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다가 청자를 들고 아래층으 로 걸음을 옮겼다. 마법사의 영이 깃들어 있던 경비원의 몸에서 흡령부를 떼어 오는 일도 잊지 않았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들어온 준후와 연희를 보고 무슨 일이 있 었냐고 다른 사람들이 물어보았지만 둘은 얼버무렸다. 준후가 자신의 삼 년 동안의 명을 소모해 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현 암이나 박 신부가 불같이 화를 낼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그 말만 은 하지 말아 달라고 연희에게 사정했다. 다행히도 승희는 어디 선가 술을 마시고 들어왔는지 아니면 피곤했는지 일찌감치 자고 있었기 때문에 투시당할 염려는 없었다.

무사히 호텔에 돌아온 다음 날, 연희는 벨을 누르는 소리에 문 을 열었다. 연희가 문을 열자 앞에는 어제 박물관에서 만났던 경 비원이 서 있었다. 처음에는 연희도 흠칫했다. 설마 저 사람이 어제 일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 긴장했다. 준후가 어 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야 몸이 풀리도록 해 놓고 박물관을 떠 났는데. 그러나 연희는 그런 생각을 떨쳐 내고 미소로 경비원을 맞이했다.

“하루만에 다시 뵙는군요. 무슨 일이시죠?”

“어제 잘 들어가셨습니까? 지갑은…”

“예. 찾아보다가 그냥…….”

연희는 자기가 작은 지갑을 떨구고 준후와 함께 그냥 박물관을 빠져나온 것을 기억해 내곤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연희가 경비원에게 말했다.

“예, 저랑 같이 찾아보셨지만 찾지 못했잖아요. 기억나지 않으 세요?”

“아, 예. 어제 일 말이죠. 그거 참 이상하더군요. 박물관에 근 무하는 동료들은 평소 성실한 사람들인데 어째 한데 몰려가서 잠이 들었는지. 그리고 나는 또 왜 그랬는지. 좀……………. 아니지.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경비원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더니 얼버무렸다. 그러다가 그제 야 찾아온 용건이 생각났는지 불쑥 지갑을 꺼내서 연희에게 내 밀었다.

“오늘 아침에 찾았어요. 아래층 전시물 사이에 끼어 있더군요. 그나저나 오늘 출국을 못하셔서 어쩌죠?”

“예, 괜찮아요. 다행히 연기됐어요. 지금이라도 찾았으니 다행이군요. 정말 고마워요.”

연희가 미소를 짓자 경비원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뭘요.”

그 순간 아무것도 모르는 현암이 누가 연희를 찾아와 대화를 나누나 보려고 뒤에서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그러자 경비원은 현암이 연희의 동행인이라는 생각을 했는지 얼굴을 붉히면서 서 둘러 돌아서는 것이었다.

“아, 예, 예. 이만 됐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요. 죄송하다니요. 이렇게 찾아서 돌려주시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아, 예. 뭘요.”

경비원은 서둘러 발길을 옮겼고 그런 경비원의 뒷모습을 연희 는 미소 띤 얼굴로 바라보았다. 현암은 영문을 모른 채 잠시 그 런 연희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무심한 표정으로 안으로 들어갔고, 언제 왔는지 준후가 눈을 반짝거리며 웃는 얼굴로 연희를 바라보았다. 연희도 준후를 마주 보며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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