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세계편 3권 24화 – 아스타로트의 약속 2 – 입구에서
입구에서
일행은 조심스럽게 대오를 지어 현관 복도를 지나 지하로 내려갔다. 마스터의 말대로 저들의 근거지는 지하일 것이 틀림 없었다. 승희의 투시와 준후의 영사, 그리고 로렌스 경감의 조사 로도 건물 위쪽에는 수상한 것이 없었다. 허나 엘리베이터가 없 는 건물의 지하. 이 남루하고 좁은 곳이야말로 지옥문을 열어 세 상을 무너뜨리고 파멸시키려는 증오와 공포와 고통의 총본산이었다.
조용히 걸음을 옮기면서 퇴마사들은 그간의 일들을 떠올리며 만감이 교차되는 것을 느꼈다. 현암은 히루바바의 마지막 모습 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었고, 박 신부는 장난기 어린 미소를 띤 채 죽어 간 코제트의 얼굴을, 준후는 불길에 휩싸여서 쓰러져 간 사토니 우쟈 티의 미라의 모습을, 승희는 코제트를 남몰래 연모 한 것처럼 보이는 젠킨스의 얼굴을, 그리고 연희는 과거에 자신 에게 십자가와 마음을 동시에 주었던 남자를 생각했다.
그들의 뒤에는 윌리엄스 신부와 이반 교수가 따라오고 있었다. 윌리엄스 신부의 얼굴은 긴장한 탓인지 흡혈귀의 힘이 나타나려는 듯 낯빛이 푸르게 변해 있었다. 이반 교수는 등에 예의 커다란 배낭을 둘러메고 있었다.
그들이 건물 안에 들어섰는데도 영기나 방해하는 장애물은 없었다. 지하 일층으로 통하는 계단으로 내려갈 때까지도 마찬가 지였다. 박 신부는 준후에게 영기가 투시되지 않느냐고 물어보 았으나 준후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러면서 간단하게 한마 디를 덧붙였다.
“아까 본 것이 거짓말 같아요. 아주 깔끔해요. 저………… 솔직히 다리가 좀 떨리는데요.”
현암이 묵묵히 되받았다.
“괜찮아. 나도 떨리니까.”
“세상에, 형이요?”
준후가 놀라자 박 신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태까지 상대해 왔던 블랙서클 주술사들의 힘도 보통이 아니 었다. 그러나 방금 보인 마스터는…………… 더구나 총수의 힘은………….”
준후가 꽤 오래 정신을 모으더니 중얼거리듯 말했다.
“뭔가가 느껴져요. 아래에 뭔가 있는 것이 틀림없어요.”
“마스터?”
“아니요. 그 정도는 아니구요. 그래도 굉장히 세지만…..”
현암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
“시험 같은 거겠죠. 자길 만날 자격이 있는가 하는・・・・・・ 건방지게!”
“흠..”
박 신부는 경계를 늦추지 않고 몸에서 오라를 발하기 시작했 다. 현암도 암암리에 기공력을 몸에 돌렸고 준후도 손에 많은 부 적을 들고 있었다. 준후가 잠깐 일행을 정지시키고는 눈을 감더 니 입을 열었다.
“지금 바로 아래층에서 영기가 느껴져요. 그렇지만 그것보다 는 아래층으로 갈수록 영기가 짙어지고 있네요. 아마도 층마다 다른 방법으로 방어를 해 둔 것이 틀림없어요.”
“층마다 서로 다른 주술로 방어를 해 놓았다고?”
“예, 틀림없어요. 예상을 하기는 했지만, 풍겨 나오는 기운이 보통은 아닌 것 같아요. 바깥쪽에는 투시가 안 되게 술수를 부려 놓은 것 같은데, 승희 누나도 안을 투시하기가 어려울 거예요. 저는 영적인 면을 읽는 것이라 약간 느껴지는데 무지무지 수상 해요. 멋모르는 사람들이 이리로 들어왔다가는 떼죽음당하기 십상인데요.”
“음. 그래?”
박 신부는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블랙서클 이 이곳에 은신처를 정한 것은 현명한 판단이었는지도 몰랐다. 누가 대도시 한복판에 있는 건물 지하에 이러한 주술력을 가진 집단이 근거지를 두고 있다고 생각이나 해 보았겠는가. 더군다 나 지하에 거점을 마련한 이상 외부에서 화력이나 다른 수단으 로 그들을 무너뜨리기도 쉽지 않았다. 그들을 잡으려면 아래로 내려가야 하는데 아무리 총으로 무장을 한 사람들이라도 그것은 어려운 일임이 분명했고, 더욱이 블랙서클이 했던 대로 보통 사 람들을 주술력으로 정신을 잃게 해서 노예로 만든 뒤 안에 풀어 놓았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그렇게 되면 피차 막대한 사 상자가 생기게 마련이다.
일행은 복잡한 눈빛을 교환하면서 지하로 내려갔다. 복도를 지나 일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의 층계참에 도달했을 때 걸음을 옮기던 준후가 일행을 멈추게 했다.
“잠깐만요. 뭔가………….”
“왜 그러니 준후야, 뭐가 있니?”
“글쎄요, 알 수 없는 기운이 이 앞을 벽처럼 차단하고 있는 것 같아요. 준비 없이 들어가면 안 될 것 같은데요.”
“그게 무슨 말이냐, 준후야.”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이런 것에 대해서는 들어 본 적이 없고, 느낌이 그렇다는 거예요.”
“느낌이 어떤데?”
“글쎄요. 뭐라고 그럴까요.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면 통과할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느낌………….”
“음. 그건 무슨 말이지. 준후야?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면 통과하지 못한다니. 그렇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아니냐?” “아니죠. 문제가 있지요. 우선 생각하더라도 월향검⋯⋯⋯”
“응. 월향검?”
현암은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준후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월향검이 이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이니?”
준후가 말을 이었다.
“아니, 하여튼 제 느낌이 그렇다는 거예요. 가. 가만. 그럼 시험을 해 볼까요.”
준후가 중얼거리면서 조그마한 소리로 주문을 외우자 준후의 손끝에서 일렁거리는 듯한 환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준후는 잠시 후 그 환영을 보면서 이야기를 했다.
“저쪽으로 가 봐.”
준후가 하급 영을 불러낸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 영은 무엇엔 가 부딪힌 듯이 계속 앞을 맴돌기만 할 뿐 통과하지 못했다. 준 후가 고개를 휘휘 저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고! 틀림없군요. 이게 일차 관문이에요. 하긴 이상할 것도 없죠. 영들이나 영력이 출입하지 못하도록 만든 관문일 테니…….”
“그렇다면 어떻게 하지. 준후야?”
“글쎄요. 현암 형도 시험을 해 봐요. 월향검은 분명 저 안으로 들어갈 수 없을 거예요.”
현암은 준후의 말을 듣고 월향검을 빼서 그 앞으로 슬쩍 내밀어 보았다. 정말이었다. 현암의 손에는 아무런 감촉도 없었는데 월향검은 벽에 부딪힌 것처럼 멈추어 섰다.
“아니 이럴 수가! 이런 조치를 취해 놓다니.”
“글쎄요. 언뜻 생각해 보더라도”
현암이 입술을 깨물면서 말했다. 사람들은 현암에게 시선을 모았다.
“여태까지 우리가 블랙서클과 상대해 온 것은 한두 번이 아니 었으므로 그들도 우리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코제트 도 약점까지 모두 조사해서 그것으로 우리를 해치려 했던 적이 있었잖아요. 그러한 일들이 마스터에게 보고가 되지 않을 리가 없겠지요. 그것을 알고 마스터가 이런 방어막을 만들어 놓은 것 이 분명해요.”
현암은 뭔가를 생각하더니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준후야, 이것을 어떻게 깰 방법이 없겠니?”
“음, 글쎄요. 여기서는 뭐 어떻게 할 수가 없는데요.”
“정말 큰일이군. 이걸 어쩐다…….”
박 신부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박신 부는 아무런 장애도 없이 지나갈 수 있었고 준후도 뒤를 따랐다. 이어서 이반 교수와 연희가 뒤를 따랐다. 그러나 윌리엄스 신부가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몸이 무엇에 걸린 것처럼 탁 하고 부딪혔다.
“아니, 이런 내가 들어가지 못한다니 어찌 이런 일이…”
준후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더니 말했다.
“흡혈귀의 힘이 남아 있기 때문에 그럴 겁니다. 어떻게 하죠?”
“그러게 말이야.”
승희가 말을 하면서 무심코 걸음을 옮기다가 역시 벽에 부딪힌 듯이 멈추어 섰다. 애염명왕이 몸속에 봉인되어 있는 승희도 그곳을 지나갈 수가 없었다.
“아이고! 이게 뭐야. 왜 나도 지나가지 못하지?”
“승희 누나도 마찬가지예요. 이런 세상에, 이러면 다시 생각해 봐야 되겠는걸요.”
“벌써 일행 중 두 사람이나 떨어지게 되고 더군다나 승희가 같 이 오지 않는다면 힘에 부칠 텐데.”
승희는 얼굴을 찌푸리면서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예전부터 떨어진 공간을 사이에 두고 힘을 전달하는 일이 많았으니 이번 에도 괜찮을 것 같았다.
“여기서 윌리엄스 신부님과 기다리고 있을게요. 월향검도 저 에게 일단 맡겨 주세요. 보관하고 있다가 방어벽이 풀리게 되면 그때 가지고 가지요.”
현암은 한시도 떼어 놓지 않고 가지고 다니던 월향검과 하필 마지막 싸움을 앞두고 떨어져야 된다고 생각하자 마음이 아팠으 나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안에서 꿍꿍이를 꾸미고 있을지 모 를 블랙서클의 마스터와 총수를 그냥 내버려 둘 수도 없었다. 내 려가는 유일한 통로에 주술의 벽을 설치해 놓은 것은 평상시에 자신들의 아지트를 외부와 차단하기 위한 방법이라 할 수도 있 었지만, 어쩌면 퇴마사들이 자신들을 찾아오리라는 것을 진작 눈치채고 그랬는지도 몰랐다. 좌우간 시간을 끌다가 그쪽에서 빠져나가버려 그들을 잡지 못하게 된다면 정말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현암은 할 수 없이 승희에게 월향검을 건네주고는 장막 너머로 걸어갔다. 윌리엄스 신부가 불안한 듯 말했다.
“우리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습네다. 주술 막은 안쪽에서 풀 수 있을지도 모르니 노력해 주십시오. 주술이 풀리면 언제든지 그쪽으로 갈 테니 계속 연락을 취합시다.”
연희는 가지고 있던 세크메트의 눈 하나를 승희에게 주었다. 만약의 경우에 연락을 해서 승희가 힘을 보낼 수 있도록 하기 위 해서였다. 장막이 혹시 승희가 보내 주는 힘까지 차단하는 것이 아닌가하여 시험 삼아 약간의 힘을 보내 보았으나 다행히도 힘 을 보내는 데에는 지장이 없었다. 박 신부는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일행을 재촉했다.
“할 수 없군. 여기서 일단 기다리고 있게나. 주술을 써서 이러 한 것을 설치했다면 푸는 방법도 있겠지.”
내키지 않는 듯이 박 신부와 현암, 준후, 연희, 이반 교수가 지하 일층의 복도 저편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승희의 손에 있던 월향검이 나지막하게 우는 소리를 냈다. 승희의 마음이 불 편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