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세계편 3권 9화 – 왈라키아의 밤 9 : 재집결
재집결
연희는 승희를 부축해서 살벌한 싸움이 벌어지는 문에서 멀리 떨어지려고만 했다. 그러나 승희가 계속해서 히스테리를 부리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며 이리저리 옮겨 다 니다 보니 길을 잃고 말았다. 분명히 꺾이는 모퉁이마다 똑바로 기억을 하면서 왔다고 생각했지만 착오가 있었던 모양이다. 원 래의 위치로 되돌아가려 했지만 길이 너무 복잡해서 제 위치를 찾지 못했다. 분명히 머릿속에서 그린 대로 움직였는데, 90도로 꺾였다고 생각했던 길들이 실은 교묘하게 각도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굽이를 네 번 돌면 원래의 방향이 되어야 하는데 실제로 는 그렇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내가 홀린 걸까?”
연희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았다. 승희는 얌전해졌지만 큰 충격을 받아서인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연 희는 그런 승희를 반쯤 업다시피 해서 데리고 다니는 중이었다. 지금 승희에게 투시를 부탁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했다. 죽어 나자빠진 쥐 한 마리라도 보이면 기겁을 하면서 연희에게 달라 붙어 무작정 아무 방향으로나 잡아끄는 바람에 연희는 할 수 없 이 방향을 잃은 채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모르겠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승희를 진정시키는 일이 중요하다.’
연희는 계속 걸음을 옮기려다가 쥐의 자취가 전혀 보이지 않 는 우묵한 곳을 발견했다. 승희를 둘러메고 가다 보니 무척 힘이 들었고, 승희도 지쳤는지 몸이 휘청거렸다. 게다가 한쪽 다리를 심하게 삐었는지 계속 다리를 절뚝거렸다. 연희는 그런 승희가 안쓰러웠다.
“여기서 잠시 쉬어 가자. 승희야.”
승희는 아직도 작은 소리로 쥐, 쥐 하면서 흐느꼈다. 연희는 승희를 바닥에 앉히고 삔 발목을 어루만져 주었다. 승희의 발목 은 퉁퉁 부어서 보기에도 측은할 정도였다. 연희가 발목을 잡고 뼈를 맞춰 나가자 우두둑 하는 소리가 났다. 간신히 발목을 맞추 고 나서 연희는 승희를 다독거리면서 진정시켜 주려고 애썼다.
“승희야, 진정해. 이제 쥐들은 없어. 응? 쥐들은 현암 씨가 모조리 쫓아 버렸어. 이제 다신 나오지 않을 거야. 응? 후후훗. 염 려하지 마. 진정해. 진정…….”
연희가 한참을 그렇게 다독거려도 승희는 여전히 얼빠진 사람 처럼 중얼거렸다.
“쥐, 이젠 쥐들은 없다구? 아! 쥐들, 쥐…………. 그리고 흡혈귀. 으악!”
승희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연희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연 희는 그런 승희를 꽉 껴안고는 귀에다 대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괜찮아, 괜찮아. 나도 봤어. 네 잘못이 아니야. 네 잘못이 아니었어.”
“내가 내가 죽였어. 눈앞에서………… 완, 완전히 터뜨려서………… 그건 너무 끔찍, 끔찍……………”
“할 수 없었던 거야. 승희야, 너는 사람을 해친 게 아니야. 사 람을 해친 게 아니었어. 응?”
그러나 승희는 연희가 달래는 것도 아랑곳없이 계속 중얼거리 고 있었다.
“아니야. 흡혈귀도 살아날 수 있는 흡혈귀가………… 있는데 나 는…………… 못했어. 신부님이라면 안 그랬을 텐데. 준후라도, 바 보 현암 군이라도…………. 그런데 나는 해치고 말았어. 너무 무 서워서……. 그런데………… 그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아, 무서워…..”
“괜찮아. 할수 없는 거야. 할 수 없었던 일이야.”
“아니야!”
승희는 고함을 쳤다. 그런 승희를 달래려고 몸을 추스르고 있 는데 주머니 속에서 세크메트의 눈이 달각 하는 소리를 내며 땅 에 떨어졌다. 연희가 떨어진 세크메트의 눈을 주우려고 손을 뻗 기도 전에 승희가 세크메트의 눈을 집어 들었다.
“현암 군! 준후야! 신부님! 내가 과연 어떻게 한 건가요? 내가…………… 내가 옳았나요?”
승희는 세크메트의 눈을 통해서 소리를 질러 대다가 눈을 감 고 몸을 부르르 떨며 힘을 쏟아 넣었다. 연희는 그런 승희의 행 동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준후는 부적들을 띄워서 흡혈귀들이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불붙은 부적들이 휙휙 눈앞을 날아다니며 준후의 앞을 방어하듯이 차단하자, 흡혈귀들은 더 이상 가까이 오지 못하고 주변에 둘러선 채 으르렁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맨 앞에는 얼굴 이 시퍼렇게 변해 버린 윌리엄스 신부가 있었다.
‘아! 저런 어떻게 하지. 윌리엄스 신부님을 공격할 수도 없고. 부적들의 효력이 떨어지면 흡혈귀들은 다시 덤벼들 텐데.’ 준후가 고민하고 있는데 흡혈귀들이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입 을 크게 벌리면서 훅 하고 큰 숨을 내쉬는 것이었다. 그러자 시 체 썩는 듯한 악취가 났다. 준후는 숨이 턱 막히는 듯했고, 게다가 머리까지 했다.
‘이건 또 무슨 술수지?’
준후는 흡혈귀들이 내쉬는 썩은 냄새를 맡지 않으려고 애썼 으나 숨을 쉬지 않고 오랫동안 버틸 수는 없었다. 준후의 행동이 부자연스러워졌다고 느꼈는지 흡혈귀들이 부적을 피해 사방에 서 덤벼들었다. 준후는 흡혈귀들의 공격을 피하면서 할 수 없이 몇 모금씩 숨을 가쁘게 내쉬었다. 점점 머리가 띵해지면서 골치 가 지끈지끈 아팠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거 또…………….”
흡혈귀들이 내쉬는 숨결에는 썩은 냄새는 물론이고, 준후가 아까 맡았던 마취제 성분이 섞여 있었다. 한 번 중독이 되었기 때문에 더 쉽게 중독이 되는 것은 아닌지. 정신이 점점 혼미해졌 다. 그러나 그런 것보다도 그런 준후를 바라보고 있는 윌리엄스 신부의 잔혹한 눈길이 준후를 더욱더 괴롭혔다. 준후는 위급함 을 느끼고 어떻게든 정신을 차려야겠다고 다짐했다. 이미 부적 들은 거의 다 타들어 가 힘을 잃는 듯했고 흡혈귀들은 차분하게 부적의 힘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안 돼! 이러면 안 돼!”
흐릿해지는 눈으로 옆을 힐끗 보았으나 박 신부는 코제트와 싸우느라 여력이 없어 보였다. 코제트는 공간 이동술을 자유자 재로 구사하며 박 신부를 정신없이 몰아붙였다. 코제트의 채찍 이 사방에서 박 신부의 오라 막을 후려치고 있었다. 갑자기 준후 의 눈앞이 또다시 아롱아롱해지더니 다리가 휘청거렸다. 준후는 소매 속에 들어 있는 세크메트의 눈을 생각해 냈다.
‘만약에 현암 형이 근처에 있다면……..’
준후는 떨리는 손으로 세크메트의 눈을 쥐었다. 그런데 그 순 간 세크메트의 눈으로부터 알 수 없는 기운이 확 하고 밀려들어왔다. 예전에 승희가 보내 주던 기운과 흡사했지만 그것과는 성질이 다른 것이었다. 준후의 몸이 타오르듯 뜨거워지면서 기운 이 솟기 시작했다. 흡혈귀들이 준후에게 덤벼들기 일보 직전이 었다.
이건 승희 누나 것 같지도 않고, 도대체 뭐지?”
정신이 단번에 말끔해지면서 준후의 몸에서 힘이 강렬하게 솟구쳤다. 준후는 흡혈귀들이 달려들자 허공에 대고 호통을 질러 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