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외전 2 : 대성인의 죽음 (1965년 인도-파키스탄 2차 전쟁 직후) : 4화 – 바바지
바바지
힌두교의 대성인인 바바지가 여자라는 것은 정말 의외였다. 소 비에트 연방인이지만 인도 풍습에 대해 잘 아는 키르모비치 대령 으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힌두교의 율법에서는 여자 를 결코 높은 존재로 인정하지 않는다. 여자로 태어난 것 자체가 과거의 인과를 속죄하는 것이라 여기며 어떤 진리나 깨우침도 여 자는 얻을 수 없다고 여긴다. 그런데 인도 최고로 받들어지는 힌 두교의 성자가 여자였을 줄이야…………. 그러자 그때까지 아무 말도 없던 고반다가 조용히 키르모비치 대령을 돌아보며 음산한 목소 리로 말했다.
“그래서 내가 저것을 미워하지.”
고반다의 목소리는 평범했지만 기이하게 그 소리를 듣자 키르모비치 대령은 귀에서부터 이상한 통증이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것 같았다.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떠는 데 고반다가 덧붙여 말했다.
“브라만의 위대한 율법을 저것보다 더 모욕한 존재는 없을 거야.”
힌두교보다도 훨씬 엄격한 고대 브라만의 율법에 의하면, 여자 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 자체를 인정할 수 없을지도 몰랐다.
그때 바바지 앞에 있던 어쁘랭띠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또 울고 계십니까. 스승님?”
바바지의 목소리가 조용히 전달돼 왔다. 몹시 차분하고 경건한 그래서 도저히 거역할 수 없을 것 같은 따뜻함을 지닌 목소리. 그 러나 분명히 고우면서도 힘 있는 여인의 음성이었다.
“나는 자주 운단다.”
어쁘랭띠는 뒤틀린 어조로 말했다.
“제 선물이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군요. 물론 인간들이 만들어 낸 이런 장난감이야 운명을 마음대로 비껴 내는 당신께 아무런 타 격도 주지 못하겠지요. 현대 무기는 아직도 멀었지만, 당신에게 행해지는 저주의 기분은 어땠습니까? 당신이 그토록 끔찍하게 아 끼시는 그 인간들의 저주 말입니다. 아, 현대 무기도 아주 쓸모가 없는 것은 아니군요. 물론 아무것도 당신을 다치게 할 수는 없겠 지만, 저주를 막는 건 아무리 당신이라도 오랫동안 하기는 어렵겠 지요. 당신을 보호하는 이 빛 무리가 예전 같지 않군요.”
넘치는 감정을 뒤틀린 입가에 머금으며 어쁘랭띠는 덧붙였다.
“저주와 증오, 마음에 드셨나이까? 마하 바바지. 당신께서는 너 무나도 밝으셔서 삼라만상을 다 들여다보는 존재시지요. 당신이 그렇게 걱정해 주던 인간들이 당신에게 퍼부어 대는 악마라 외치 는 증오와 저주의 맛은 어떠셨는지요? 이 어쁘랭띠가 바치는 마 지막 선물 중 하나라고 여겨 주셨으면 합니다만.”
“그들이 원해서 그러지 않았다는 것을 나는 물론 알고 있단다.”
바바지가 조금의 노여움도 깃들어 있지 않은 어머니 같은 음성 으로 말하자 어쁘랭띠는 이를 악물었다.
“물론 당신께서는 아실 테지요. 하지만 인간의 증오심이 얼마나 추악한지 당신께서 더 잘 느끼지 않았겠습니까? 그리고 그 증오 심이 당신에게 퍼부어질 때 어떤 기분이셨나이까? 항상 존경받던 위대하신 성자님으로 받들어지던 분이니 색다른 느낌이었을 것 같은데요.”
어쁘랭띠가 집요하게 말하자 바바지는 다시 눈물을 흘렸다.
“예찬과 비난은 나에게 있어서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단다. 너는 큰길을 눈앞에 두고도 작은 것에 발목이 잡혀 더 나아가지 못하는구나…….”
“아니면 슬퍼서 그러신 건가요? 제게 분노를 느끼시나요?”
“어쁘띠 난 화나지 않았단다. 네가 언제나 나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 이미 알고 있단다. 하물며 나를 공격한 지금에서도
속을 단번에 읽힌 듯 어쁘랭띠는 잠시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러나 곧 씁쓸하게 말했다.
“제 마음을 들여다보지 마세요. 저는 제 마음을 살의와 중증오와 그건・・・・・・ .”
악마의 추악한 분노로 가득 채웠습니다
바바지는 차분하고도 조용히 말했다.
“내가 들여다보는 것이 겁나서?”
어쁘랭띠는 이를 악물었다.
“아아…………… 지금도 당신은 여전하시군요, 스승님. 당신은…… 당 신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존재세요. 그리고・・・・・・ 역시 내 마음속 을 비롯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바바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어쁘띠, 나는 결코 단 한 번도 네 마음을 멋대로 들여다본 적이 없단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세요! 그러면 어떻게…………….”
“아아, 가엾은 어쁘랭띠. 그렇게 못된 아이처럼 표 나는 장난을 하는데 누가 눈치채지 못하겠니?”
어쁘랭띠는 허탈한 듯 말했다.
“장난・・・・・・이라고요……?”
“작고 못된, 그리고 너무도 티 나는 장난이지. 너는 결코 나를 진정으로 증오하지 못해, 어쁘랭띠. 그리고 네 마음은 나의 존재 로 너무나도 가득 차 있지. 그리고 그것을 내가 눈치챌까봐 못된 장난을 하는……………..”
어쁘띠는 더 듣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만두십시오! 당신은 위대한 성자라면서 거짓말을 하고 있어 요! 내가 한 짓이 하찮은 장난이라면, 그래서 아무 영향도 주지 못 하는 거라면! 당신은 왜 눈물을 멈추지 못하는 겁니까?!”
“난 거짓말하는 것이 아니야, 어쁘랭띠. 모든 것이 영향을 주었지. 그러나 나를 진정으로 슬프게 하는 건…….”
바바지의 말을 끊으며 어쁘랭띠는 외쳤다.
“내 배신 때문입니까? 아니면 인간들의 배신 때문에? 그러 면・・・・・・ 그러면 더 이상 울지 마십시오! 차라리 당신의 그 어마어 마한 힘으로 나를 쓸어버리시란 말입니다!”
바바지는 자신의 어쁘랭띠가 말을 끊었음에도 가만히 그의 말 이 끝나기를 기다리다가 조용히 말했다.
“아직도 너는 힘을 우선 생각하는구나. 그건 깨달음에 부수적으 로 따라오는 것이라 그토록 일렀건만…………. 오직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평범한 한 사람분의 기도요, 흘릴 수 있는 것은 한 사람분의 눈물뿐이란다.”
“아니오!”
어쁘랭띠는 절규하듯 외쳤다.
“당신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고 강하잖습니까! 그런데………… 그런데 왜 이렇게 우는 겁니까! 나는…. 나는…… 더 견딜 수가 없어요!”
어쁘랭띠는 고통스러운 듯 양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움켜쥐고 외쳤다.
“왜 당신께서는 이렇게 울고만 계십니까! 당신이 그 힘을 보이기만 하면 모든 인간이 당신의 발밑에 엎드리고 허튼짓을 못 할 것인데! 세상을 뒤엎을 수도 있고………….”
어쁘랭띠의 절규 같은 호소에도 바바지는 조용히 고개만 저었다.
“그래서는 안 되고, 그러지도 않을 것이며, 그럴 수도 없단다.”
“그래! 그렇다 쳐요! 당신께서는 선의의 존재니까! 저 빌어먹을 인간들이 가엾다는 겁니까? 그러나 그렇다면, 왜 저들을 돕지 않 는 겁니까? 왜 손을 내밀어 주지 않습니까?”
바바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미 기도하고, 간구하고 있잖니. 한시도 사람들을 위해 기도 하지 않은 적이 없단다.”
“그런 한 사람분의 기도 따위가 무슨 소용입니까!”
어쁘띠는 소리를 질렀다가 털썩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그 리고 다시 목소리를 바꿔 애절하게 호소했다.
“마하 바바지시여. 당신께서 마음만 먹으면 이 땅에 전쟁을 없 앨 수 있잖습니까. 아니, 온 세계의 전쟁을 없앨 수 있겠지요! 모 든 인간의 마음속 악의 요소를 모조리 제거할 수도 있을 테고요. 허나.. 허나…….”
말투는 조용해졌으나 어쁘랭띠는 아까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것 같았다.
“당신께서는 기도하고, 눈물을 흘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않으셨나이다……………..”
바바지는 이미 그에 대해서는 말했다고 믿는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어쁘랭띠는 간절하게 호소했다.
“존경하는 스승이시여. 지금이라도 마음을 돌리셔서 더 이상 슬 퍼만 하지 마시고 힘을 사용하신다 해 주시면 더 바랄 것이 없겠나 이다. 죽으라 하면 죽을 것이며 당신의 어쁘랭띠로 돌아가라 하시 면 그리하겠나이다. 허나 당신은 그러지 않으시겠지요.
“그래야 한다는 걸 너도 알고 있잖니.”
바바지가 차분히 말하자 어쁘랭띠는 다시 한번 머리를 땅에 조 아리며 호소했다.
“스승이시여. 인간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아시겠지요? 인 간의 역사라고 하는 도중에 전쟁과 살인이 없는 날이 과연 존재하 기나 했을까요? 당신께서 계심에도 불구하고 인도와 파키스탄은 끝없이 서로를 노리고 전쟁을 해 왔습니다. 더구나…………….”
어쁘랭띠는 어깨를 부르르 떨며 말했다.
“이제 그들은 더욱 엄청난, 어떤 악마보다도 강한 힘조차 휘두르려고 합니다!”
바바지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으나 어쁘랭 띠는 더 열을 올리며 외쳤다.
“핵무기! 그들은 비밀리에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습니다! 양쪽 모두 말입니다!”
바바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런 것이 악마의 힘보다 강할 것 같니? 어쁘랭띠?”
“당신께서는 그에 대해 잘 모르십니다! 핵무기는 인간을 절멸 시킬 수도 있는, 아니 지구를 온통 쓸어버릴 수 있는 무기입니다! 당신이나 나의 가장 강력한 파멸적인 주술보다도 훨씬 강해서 한 번에 수백만을 날려 버릴 수 있단 말입니다. 으르렁거리는 두 나 라가 이런 것까지 만들어 대니, 이제 인간의 세상은 조만간 끝난 다고 봐야겠지요. 마하 바바지시여, 그런데도 당신께서는 그냥 두 고 보기만 하실 것입니까?”
어쁘랭띠가 호소했지만 바바지는 조용히 말할 뿐이었다.
“세상의 끝이 다가왔지만, 네가 생각하는 대로는 아니란다. 물 리적인 힘 같은 사소한 일에 아직도 마음을 쓰는구나. 어쁘랭띠, 언젠가는 너도 알게 될 거야.”
바바지가 태연히 말하자 어쁘랭띠는 더 이상 참기 어렵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당신은 내가 언젠가는 안다고 말하지만, 나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소”
더불어 어쁘랭띠의 목소리가 격해지기 시작했다.
“이런 짓까지 하는 인간들이 정말 당신의 뜻대로 평화롭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시오? 물론 당신에게 퍼부어진 무기와 저주는 내가 속여 그리하게 만든 것이오. 그러나 당신의 실체를 인간들이 알았을 때는 어떨까요? 세상을 뒤엎을 힘을 지니고 있 다는 것을 알면・・・・・・ 인간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당신을 없애려 괴롭힐 것이오! 지금보다 수백 수천 배 더 악랄하고 집요하게! 당신은 또 그 속에서 슬퍼할 것이오……………. 그런 끝없는 악순환을 나는 견딜 수가 없소…….”
바바지가 이해한다는 듯 말했다.
“네가 나를 얼마나 생각하고 있는지 안단다. 어쁘랭띠.”
“그걸 안다면・・・・・・ 제발…더 슬퍼하지 마시오. 가치 없는 인간들 따위 지배해 버리거나, 힘으로 밀어 버리든지! 정 그도 아니면 제발 그들에게 마음을 쓰고 괴로워하지 마시란 말이오!”
“내가 너에게만 마음을 써 주길 바라는 거니, 어쁘랭띠?”
바바지가 말하자 어쁘랭띠는 조금 충격을 받은 듯 어깨를 움찔 하며 대답하지 못했다. 정곡을 찔린 것 같았다. 바바지는 어느새 그쳤던 눈물을 다시 주르륵 흘리며 말했다.
“네가 나를 스승이 아니라 여성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내가 모를 것 같았니?”
“아…그………그건…”
천하의 어쁘랭띠가 말을 더듬었다. 뒤에서 보고 있던 키르모비 치 대령조차 눈치챌 수 있을 정도였다. 겉보기에는 어쁘랭띠가 더 나이가 많아 보여 이상했다. 물론 키르모비치 대령도 얼른 심정적 으로 납득은 되지 않았으나 바바지가 얼마나 영원한 존재인가 알기에 이해는 됐다. 그러나 그렇게 초월적인 힘을 지닌 어쁘띠 도 그런 마음에 얽매인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가 예전처럼 거대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면서도 은근히 대등하게 소통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분도 들었다. 그러나 옆에 있던 고반다는 아주 경멸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성큼성큼 앞으로 나섰다.
바바지는 눈물을 흘리며 간곡하게 말했다.
“어쁘랭띠, 내가 왜 슬퍼하는지 너는 아직도 모르는구나.”
“당신은 항상 인간들, 저 하찮고 비루한 존재들 때문에 슬퍼하 고, 스스로에게 고통을 줘 왔어요!”
“어쁘랭띠……”
“나는 나는 인간들에게 너무나도 절망했소. 나도 인간의 몸을 가졌기에 인간의 마음으로 생각하지요. 그래서 당신을 배신하려 하고・・・・・・ 알면서도 옳음을 저버리려 하고 타락하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소! 나, 나 자신이 추악해 견딜 수 없고…… 그러면서도 벗 어나지 못하는……………. 이런 이런 인간 따위. 나를 포함해 모든 인간 따위는 세상에서 없어져야…………….”
바바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너는 인간들을 비난하지만, 지금 네 행동은 어떻지?”
“내 행동이 옳다고는 하지 않겠소! 그러나 그렇게 눈물이나 홀 리면서 무력하게 앉아 있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하오! 움직이시 오! 스승이시여! 세상을 바꾸어 주시오! 그렇지 않으면 ・・・・・・ 그렇 지 않으면 나는……”
어쁘랭띠가 절규라도 하듯 말했으나 바바지는 고개를 저었다.
“어쁘띠, 너도 초월의 경지에 다다르면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될 거야.”
“그ᆞᆞᆞᆞᆞᆞ 그 초월의 경지라는 것! 나는 이제 싫소! 오를 수 있 어도 오르지 않을 거요! 그 경지에 오른 후에 남은 일이 당신처 럼 무력하게 앉아서 우는 것뿐이라면! 위대한 당신을 한낱 나약 …….”
어쁘랭띠는 외치는 와중에도 어깨를 부르르 떨다가 내뱉듯 외쳤다.
여자로 만든 게 그 초월이라면……. 나는 차라리 타락을 택하겠소!”
“아, 어쁘띠, 여전히 너는 내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구나. 내가 눈물을 흘리는 까닭은…………….”
어쁘랭띠는 이를 악물면서 일부러 거칠게 소리쳤다.
“나는 더 이상 당신의 제자가 아니오. 당신의 어쁘랭띠가 아니 란 말이야! 나는 이제 질렸어. 아직도 나는 당신을 존경하고 당신 이 세상 누구보다도 거룩하다고 믿고 있소. 그렇지만, 그렇지 만……………. 나는 절대 당신을 용납할 수 없소. 그리고 당신이 그렇게 거룩한 희생을 치러 뿌려 대는 눈물도 견딜 수 없고, 그렇게 당신 이 눈물을 뿌리면서 구해 주려고 하는 인간들, 그 인간들은 당신 이 그렇게 애를 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전쟁을 하고 있소. 불과 며칠 전까지 말이야! 그리고…………….”
“인간들은 항상 그래 왔단다. 어쁘랭띠, 너도 알고 있잖니.”
“당신이 당신이 정말 마음만 먹으면 세계의 지배자가 되고도 남을 텐데, 모든 인간을 굴복시켜서 더 이상 그런 병신 같은 짓거리를 못 하게 할 수도 있잖소. 왜 그러지 않는 거요? 왜?”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란다. 너도 알고 있잖니. 어쁘랭띠.”
어쁘랭띠는 마음속에 남아 있는 수십 년간의 정과 인간다움을 한 번에 부정하기라도 하듯, 이를 악물면서 안간힘을 짜내어 짐승 같은 목소리로 외쳤다.
“제발 나를 어쁘랭띠라고 부르지 마시오. 이미 수십 년 동안 당 신에게, 그리고 그 천박한 인간들에게 그렇게 불려 왔고, 이제 그 것으로 충분하오. 요기의 길을 잃고 방황하던 나를 이끌어 주어서 여기까지 오도록 만들어 준 당신에게는 나도 고맙게 생각하오. 그 리고 당신은 역시 누구보다도 존경스럽고 거룩한 존재이기도 하 고 하지만……..”
바바지는 요가의 자세를 흩뜨리지 않았으나 다시금 눈에서 수 정 같은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나에게서 여성을 느꼈니? 가련한 어쁘랭띠.”
어쁘랭띠는 이를 악물면서 외쳤다.
“그래, 그랬소, 그래서 어쩌란 말이오! 당신은 늙지도 변하지도 않는 영원불멸의 존재. 나도 요가의 수행자, 그게 넘어야 할 마지 막 관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나 당신이 마음에 걸려서 나는 도저 히 더 이상은 나아갈 수 없었소. 차라리 지옥이 더 현명했지!” “그러나, 어쁘랭띠……”
“당신의 말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 당신의 목소리가 나를 괴롭혀! 당신의 존재가 나를 나를 더 이상 나답지 못하게 만들어! 나를, 나는 더 이상 우주에 존재할 수 없는 그런…”
잠시 정신이 나간 듯 두서없이 말을 쏟아 내던 어쁘랭띠는 안간 힘을 다해 이를 악물며 차갑고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지으려 애쓰 면서 말했다.
“어쨌든 상관없소. 나는 이제 내가 아니야.”
“어쁘띠. 너는 그래도 항상 어쁘랭띠야.”
“이미 충분히 이야기했어. 그리고 당신의 제자로서 당신에게 진 신세는 이것으로 다 갚았다고 생각해!”
어쁘랭띠는 마치 견딜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당신의 거룩한 신념과 평화를 더 이상 짓밟히지 않게 하기 위 해서는 여기서 죽는 편이 나아요 더 이상은 눈물을 흘리지 않아도 된단 말이오. 어차피 삶과 죽음에 연연하지 않는 당신 아니오? 떠 나 주시오. 이 세상은 대가를 치러야 해요. 나는 지옥문을 열 거요. 미천한 인간들은 악마들에게 사육되는 존재로도 충분해. 그것만이 그들을 존속시킬 수 있고 그것만이 그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길 이오. 이게 진정으로 내가 변한 이유요. 존경하는 바바지님.”
어쁘랭띠가 말을 하자 바바지는 눈물을 흘리며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될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마음이 아프긴 아프 나. 나는 너를 통해서 세상을 보았고 너의 앞길이 보인단다. 너는 지금 극한으로 떨어졌다고 생각하겠지만 삼생을 거치기 전에 정 도로 돌아오게 된단다.”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아! 나는 지옥과도 손을 잡을 수 있소. 그리고 나는 이제 더 이상 힌두교도가 아니오! 나는 브라만 교로 개종했소. 이제는 당신과도 비견될 만한 브라만교의 우두머 리 고반다와 손을 잡았으니까!”
그 말에 바바지는 희미하게 웃었다.
“어쁘띠. 내가 왜 이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었는지 알겠니? 그 첫 번째 이유는 바로… …저자 때문이란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 는다고 생각한 건 네 오해야. 나는 내 할 일을 잘 알고 있단다.”
그 말에 뒤에 있던 고반다가 움찔했고 어쁘랭띠도 놀란 표정을
지었으나 바바지는 계속 조용히 말했다.
“저 덜떨어진 자가 너의 스승이 될 수 있다고 믿니?”
“당신보다는 나아!”
어쁘랭띠가 소리치자 바바지는 살짝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저자가 세상을 더 어지럽히게 두어서는 안 되겠지. 네 마음도 더 헝클어지게 둘 수는 없고………….”
바바지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고반다는 성큼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그렇게 될까?”
고반다는 크게 숨을 들이마신 뒤 여태껏 치켜세우고 있던 온몸 의 수염과 머리카락을 빳빳이 곤두세우며 입으로 폭풍 같은 외침 을 냈다. 살짝 휘파람만 불어 마을 하나를 쓸어버리거나 완전 무 장한장갑차들까지도 가루로 만들어 버린 나다 요가의 엄청난 위력이 그야말로 극한의 힘을 다해 전개된 것이다.
삽시간에 바바지의 주위에 있던 모든 것이 폭발하며 파괴됐다. 땅거죽도 통째로 들려 공중에서 가루로 변하고 폭발해 비산(飛 했고 거센 포격에도 견뎌 낸 바위산이 통째로 무너졌다. 바위산 이 허물어지며 거대한 돌 조각들과 먼지가 폭풍처럼 산사태를 일 으켰고 바바지의 뒤를 덮쳐 왔다. 그러나 수천, 수만 톤에 달하는 거대한 바위와 흙더미는 바바지의 영롱한 구체 앞에 도달하자 대 나무가 쪼개지듯 두 개로 갈라져 사방으로 어지러이 흩어져 갔을 뿐, 그녀에게 조금의 타격도 주지 못했다.
고반다는 기세를 높여 목에서 피를 토할 정도로 격렬한 소리를 냈다. 아까처럼 멀리 퍼지는 소리는 아니었지만, 모든 힘이 바바 지의 구체에 집중되는 것 같았다. 고반다가 내지르는 나다 요가의 힘이 무시무시했던 듯, 바바지의 빛나는 구체도 한순간 부르르 떨 렸다.
그러나 그 안에 있던 바바지가 살짝 손끝을 들자 바바지의 몸을 에워싸고 있던 구체가 통째로 고반다에게 덮쳐들며 날아갔다. 바 바지의 몸은 여전히 원래의 자세에서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떠 있 었고, 구체만이 총알같이 고반다를 향해 날아간 것이다.
의외의 전개에 고반다는 깜짝 놀란 듯 날아오는 구체를 향해 나 다 요가의 소리를 집중하려고 했으나, 무엇이라 외치기도 전에 고 반다의 몸은 바바지의 몸을 둘러싸고 있던 구체에 휩싸여 버렸다. 고반다는 몹시 놀라 그 구체에서 벗어나 보려 팔을 내뻗기도 하고 여기저기를 휘둘러 봤지만 그 구체는 그를 완전히 속박해 가두어 놓았는지, 조금도 뚫리지 않았다. 그야말로 빛의 구체에 갇혀 버린 셈이었다. 그때까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있던 어쁘랭 띠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저자는 역시 저 정도였군.”
더러운 것을 씹어뱉듯 말한 어쁘랭띠는 바바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렇게 하면 당신을 지켜 주고 있던 모든 힘이 사라져 버리지 않습니까? 아직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잊은 건가요?”
그러자 바바지는 비로소 요가의 자세를 풀고 조용히 허공에서 내려와 땅에 발을 디디며 어쁘랭띠에게 말했다.
“상관없다. 다만 저자의 어두움이 세상을 흩뜨리는 데 사용되는 것을 놓아둘 수는 없었기에 그리한 것이지.”
저자의 주술도 문제지만, 입도 무섭죠.”
“앞으로 저자는 거짓을 말하지 못하게 될 거야. 그러면 고통으로 대가를 치르게 될 테니 큰일은 벌이지 못할 거야.”
어쁘랭띠는 차갑게 웃었다.
“여전히 다른 자들에게만 신경 쓰시는군요. 내가 당신을 노리는 것을 아시면서도.”
“네가 원한다면 나는 무엇이든지 줄 수 있단다. 어쁘랭띠.”
“나를 더 이상 어쁘랭띠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너는 여전히 나의 어쁘랭띠인걸. 너만이 나에게 그런 목소리로 말을 건넬 수 있단다.”
그 말에 어쁘랭띠는 전신을 부르르 떨면서 발작적으로 오른손 을 들어 자신의 입안에 쑤셔 넣었다. 거의 손목까지 들어갈 정도 로 깊숙이 손을 넣은 어쁘랭띠의 몸이 움찔했다. 잠시 후 오른손 이 입에서 빠져나왔다.
그 손에는 찢어진 살 뭉치가 핏덩이와 함께 쥐어져 있었다. 그 것을 땅에 내팽개치는 순간 어쁘랭띠의 입에서도 한 줄기 선혈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어쁘랭띠는 입을 열지 않고 조용히 힘을 아랫 배에 집중했다. 요가에서 말하는 복화술의 수법이었다.
당신에 대한 최후의 성의로 내 목소리를 바치오. 내 성대와 목구멍을 내 손으로 완전히 파괴했으니 난 앞으로 절대 그 누구에게도 내 목소리는 들려 주지 않을 거요.
물론 복화술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경지이기에 대화의 소 통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이것은 자기가 존경하고 사랑해 마지않 던 바바지에게 바치는 일종의 선물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앞으로 누구를 위해서도 목소리를 내지 않겠다는 결의는 곧 반대급부로 바바지의 목숨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했다. 바바지는 그것을 보고 또다시 눈물을 흘렸다.
“꼭 이런 식으로 표현하지 않았어도 될 텐데. 아프지 않니. 어쁘랭띠?”
어쁘랭띠는 복화술로 말했다.
나는 더 견딜 수 없소 당신이 한 말은 모두 맞소 내 마음은 당신으로 가득 차 있고, 앞으로도 그럴 거요. 허나 당신이 우는 모습은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소. 나는・・・・・・ 나는 우주 영겁 끝까지 후회할지라도 지금 물러서지 않겠소. 더는 견딜 수 없소. 둘 중 하나요 내가 당신을 해치우든지, 당신이 나를 없애 버리든지. 더 이상은 물러서지 않을 거요.
어쁘띠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듯 자신도 눈물을 흘리면서 최대한의 힘을 끌어모았다. 양손에서 보이지 않는 이상한 암흑 같 은 기류가 시커먼 구체로 이글이글 타오르며 커져 갔고, 그 무시 무시한 어두운 힘의 전파가 뒤에 있던 키르모비치 대령에게까지 느껴졌다. 그러나 바바지는 조금도 겁내거나 동요하지 않은 채 밝 은 미소를 띠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바바지의 이름은 내가 아니어도 전승된단다. 나는 이미 모든 것을 예측하고 기다리고 있었어. 허나 어쁘랭띠, 선과 악이라는 건 본래 있지 않았어. 네가 하는 것이 악행도 아니고 내가 하는 것 이 선행이라고 볼 수도 없단다. 그리고 너에게는 아직 말하지 않 았지만…………….”
수다스럽게 계속 떠들지 마시오.
어쁘랭띠가 말했으나 바바지는 말을 중단하지 않았다.
“이 세상의 끝은 이미 정해져 있어. 너는 그것을 보고 절망한 것 이겠지? 하지만 그건 네가 생각하는 식의 그런 결말이 아니야. 종 말, 말세, 파멸의 의미가 아니라 이 모든 것은…………. 아! 그때가 오 면 너도 알 수 있을 텐데, 어쁘랭띠. 한 발짝만 더 나아가면 대도 의 길이었는데,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니. 어쁘랭띠, 나는 네가 진실로 안타깝구나…………….”
더 이상 말하지 마시오. 그리고 더 이상 그 빌어먹을 눈물도 흘리지 말라고했어!
어쁘랭띠가 악을 썼지만 바바지는 눈을 감은 채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어쁘랭띠, 내가 눈물을 흘린 진정한 이유는…………….”
그만! 난 당신이! 여자가 우는 게 싫어!
그렇게 외치면서 어쁘랭띠는 양손에 깃든 지옥의 악마와 거래 해서 얻은, 그리고 거기에 고대 브라만의 술수와 힌두교의 요가 수법을 결합한 어마어마한 힘을 바바지의 몸을 향해 발출했다. 주 변이 시커먼 흑암으로 뒤덮이는 것 같은 엄청난 힘이었지만 그 힘 은 바바지의 코앞에 도달하는 순간 딱 멈추어 버렸다. 마치 시간 이 정지되고 우주가 정지된 듯이 어쁘랭띠는 조금 놀란 표정이 됐으나 으레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는 듯, 곧 태연한 표정으로 돌 아왔다. 그러자 바바지가 말했다.
“네가 내 말을 끝까지 들어 주지 않으니 이럴 수밖에 없구나. 내 가 계속 눈물을 흘린 건 바로 너 때문이었어. 너와의 이 순간이 이 렇게 될 것이라는 걸 난 이미 알고 있었단다. 그리고………… 모든 인 간만큼이나, 나는 너를 소중하게 생각했어. 어쁘랭띠.”
거의 멈춰진 것 같은, 영원한 정적과도 같은 속에서도 바바지의 말만은 어쁘랭띠의 마음에 그대로 울려왔다. 어쁘랭띠가 부르르 어깨를 떠는데 바바지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어쁘랭띠 수십 년 전에 어렸던 너와 처음 대면하는 순간부터 나는 오늘 이날이 올 것을 알았단다. 그리고 지금도 나는 후회하 지 않아. 이것은 끝이 아니니까. 너는 더 치열하게 세상을 휘젓고 나서야 죽음을 맞이할 거고, 그럼에도 죽음보다 더 큰 인과의 결 과로 깨달음에 도달하게 될 테니까. 진정한 이 세상 끝의 순간에 가서야 왜 모든 것이 이래야만 했는지를 두 눈으로 볼 수 있을 테 니까. 또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주는 것이야말로 네 깨달음을 위해 스승으로서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이니까…………….”
바바지는 더 하고 싶은 말들을 억누르려는 듯 잠시 침묵했다가 말을 이었다.
“어쨌거나 어쁘띠. 이제 이별이구나. 이별이 오기 전부터 헤 어짐을 알고 있다는 것은, 저절로 눈물이 나오는 일이란다. 그게 내가 운 진정한 이유였어. 알면서도 그 순간이 다가오니 눈물을 막을 수 없더구나. 너와 헤어지는 게 아쉬워서. 그럼에도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게 안타까워서. 네 마음을 이렇게밖에 받아 줄 수 없다는 것이 슬퍼서 말이야. 그러면…………….”
다. 당신・・・・・・ 스, 스승님・・・・・・
어쁘랭띠가 멍하니 중얼거렸으나 바바지는 슬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안녕, 사랑하는 어쁘랭띠.”
그 말만 남기고 바바지는 힘을 거두었다. 마치 무슨 물체라도 되는 것처럼 허공에 붙잡혀 있던 어쁘랭띠의 방만한 힘은 다시 생명을 얻은 듯 바바지의 전신을 덮쳐 갔다. 그리고 바바지는 조금 의 미동도 없이 자신의 사랑스러운 제자가 가한 일격을 아무런 방 어도 하지 않은 채 인간의 육신 그대로인 맨몸으로 묵묵히 받아들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