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외전 2 : 마음의 칼 [퇴마록(혼세편). ‘와불이 일어나면’ 얼마 전과 직후]
“정말 후회하지 않겠느냐?”
세상을 달관한 것 같은 차분한 노(老)비구니의 음성이 귀를 간지럽힌다. 현정은 합장을 한 자세를 거두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 다. 노비구니는 말한다.
“정식 수계는 한참 뒤에 있어. 원래 사미니(십계[戒]를 받은 18세 미만의 어린 여자 승려)를 거쳐 이 년 동안 식차마나(式叉 구족계를 받아 비구니가 되기 위해 수행하는 18세 이상 20세 미만 의 사미니)로서 수련한 후에야만 비구니계를 받을 수 있는 것이야. 하지만 네가 말한 대로 네가 그간 속세에서 행해 왔던 일을 이녀 방尼房)’ 수행으로 쳐줄 수 있다 여겼기에, 또 그런 전례도 있었 기에 비구니계를 내리는 것이지만……………. 이제 머리를 깎고 정식 비구니가 되면 돌아갈 수 없어.”
1 세속 모습 그대로 비구니계를 수행하는 특수한 경우를 말한다.
노비구니는 차분하고도 담담한 음성으로 타이르듯 말했으나 현 정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합장한 자세를 흩뜨리지 않았다. 노비 구니는 탄식하듯 다시 말한다.
“비구의 계는 5계라고 일컬어져 있지만 비구니의 계는 그것보 다 훨씬 엄격해. 348계를 다 지켜야만 하고, 그중에서도 세존께서 말씀하신 팔귀경계戒 비구니가 특별히 지켜야 할 여덟 가지 지켜야 해, 백 년 동안 도를 닦은 비구니라 해도 갓 머리 깎은 비 구에게 예를 올려야 한다. 비구는 비구니의 허물을 들출 수 있어 도 비구니는 절대 비구의 허물을 들출 수 없고, 해마다 석 달 동안 안거(居해 비구에게 참회하고 질문하며 보름에 한 번씩 비구에 게 제법 강설을 받아야 하는 등……………. 네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엄 하고 견디기 힘들 게야. 그런 것을 다 받아들이겠느냐?”
노비구니가 다시 한번 타이르듯 길게 말하는데 현정은 합장을 풀지 않고 눈도 뜨지 않은 채 고개만 살짝 숙여 보인다. 노비구니 의 말은 한탄처럼 이어진다.
“네 경우가 몹시 특별하고 여러 깨우친 분들의 추천이 있어 이 렇게 조용히 계를 내리는 것이다만, 정말 너에게 맞지 않을지도 모르고 후회할지도 모른다. 분명 돌이킬 수 없다고 말했다만 마지 막으로 묻겠다. 정말 세속을 모조리 버리고 내가 말한 비구니의 계율을 모두 지키며 평생 스스로를 닦아 나갈 수 있겠는가? 머리 를 깎는다고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야. 오히려 더 큰 고통을 짊어지는 것일 수도 있고.”
그러자 여태까지 말이 없던 현정이 비로소 입을 열어 말한다.
“인생 자체가 고통 아닙니까? 고통을 근본적으로 벗어나려면 깨우침이 있어야지요. 그 중간까지는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계율 을 지키고 수행에 정진할 마음입니다. 어차피 제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현정이 잠깐 말을 끊었다가 말하자 노비구니는 쯧쯧 혀를 차며 다시 고개를 젓는다.
“내 너를 본 것은 오늘이 처음이지만, 너의 성품과 성미가 급하 고 자존심이 센 것을 모르지 않아. 더군다나 너는, 이런 말을 하기 는 그러나 세속에서 칼을 휘두르던 사람 아니냐. 물론 네가 흉한 짓을 하지 않고 옳은 일을 위해서 그랬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 살기까지도 정말 삭혀 낼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구나. 그것은 너 자신의 마음에 물어보아도 똑같은 의문점으로 남을 것인데…….”
말을 멈추고 조금 생각하던 노비구니는 마침내 말했다.
“허나 네 바람이 그렇다면야. 내 몇 번이나 반복했으나…………… 다 시 한번 마지막으로 묻겠다. 정말 후회하지 않겠느냐?”
“후회하지 않습니다.”
현정은 딱 부러지게 말한다. 이제 더 이상 다른 길은 없다. 이것만이 유일한 길이다.
“흠.”
한숨을 쉰 노비구니가 합장하며 경을 읊자 주변에 늘어서 있던 다른 비구니들도 목탁을 두드리며 엄숙하게 경을 읊기 시작한다.
이윽고 장도칼을 가진 다른 비구니가 와 현정의 머리에서 삼단처 럼 자란 머리칼을 쓱쓱 밀기 시작했다.
현정도 그에 맞추느라 그냥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불호 를 읊고 있지만 눈은 꼭 감은 상태다. 조금도 몸을 떨거나 움츠리 는 기색도 없다. 담담한 표정 그대로다. 하지만 현정의 뇌리로는 자기가 겪었던 수많은 일과 사건이 주마등처럼 흘러 지나갔다. 애 당초 고된 수행을 수도 없이 견뎌 낸 몸, 자신의 마음을 정리하는 법도 안다. 이 모든 기억을 다시 한번 돌아보리라. 그리고 이제 앞 으로는 영원히 잊으리라. 영원히…….
현정은 고아원 출신이다. 현정이라는 이름도 당연히 혈육이 지 어 준 것이 아닐지 모른다. 고아원에 있을 때 원장 선생님이나 누 가 지어 준 것인지, 혹은 또 다른 누군가가 지어 준 것인지, 어쩌 면 정말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나 부모가 붙여 주었던 이름인지 알지 못한다. 자신이 어디서, 누구에게서 태어났는지 현정도 알지 못한다. 허나 흔히 생각하듯 엄청난 고통이나 외로움을 겪은 것도 아니다. 고아원은 몹시 작고 가난했지만, 원장 선생님은 그만큼 마음씨도 곱고 자상한 분이었다. 단출하고 궁핍하기는 했어도 큰 외로움이나 고통의 기억 없는 밋밋한 어린 시절이었다. 스스로를 자각할 때부터 거기서 자랐기에 과거의 인연 같은 것은 생각해 보 지도 않았고, 나중에 고아원을 떠나고 나서야 그런 게 존재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았다.
현정이 마음에 든다며 데리고 왔다던 노파가 현정에 대해서 물 어보거나 기록을 남기길 원치 않았기 때문에 애당초 알 길조차 없 었다. 그나마 한 오라기 남은 인연의 흔적이라도 기억하고 있을지 모를 고아원 원장 선생님은 현정이 자신의 태생에 대해 의문을 가 질 나이가 되기도 훨씬 전,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타계했다. 애당 초 무슨 특별한 기록이나 문서를 남길 정도의 큰 고아원도 아니었 다. 현정은 결국 현정이라는 이름 하나만 달랑 들고 고아원을 떠 났다.
현정을 데리고 가서 키워 준 사람은 특이하게도 나이 든 무당 이었다. 그러나 현정은 어렸을 때부터 그 무당을 어머니라 부르지 못했다. 스승님 내지는 사부님이라고 불러야 했다. 물론 그렇다고 무당이 되는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다. 정상적으로 보통 아이처럼 학교에 다녔다. 학교에서는 자신의 스승이자 사부님을 할머니라 고 불렀다. 현정의 스승은 현정에게 보통의 아이와 똑같은 교육을 받게 하고 똑같은 사고방식을 갖게 했을 뿐, 한 번도 굿이나 주술 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없다.
그리고 현정은 실제로도 철들기 이후까지 자신의 스승이 굿을 하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본 기억은 한 번도 없었다. 그랬기에 어릴 적에는 스승이 무당인지도 알지 못했다. 어딘가 꼬집어 말할 수 는 없어도 살짝 좀 특이하고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느낌만 있었을 뿐. 그나마도 옆에서 함께 사는 현정 정도나 막연하게 느낄 만큼 옅었다.
스승은 정말로 티가 나지 않게 은거하며 조용히 사는 사람이었 다. 스승님의 존함을 함부로 입에 올린 적은 없지만 간혹 찾아오 는 기이한 행색의 사람들은 자신의 스승을 ‘도지’라고 불렀다. 한 자로 하면 ‘복숭아 꽃가지’라는 예쁜 이름일 수 있었으나 약간 심 술궂은 옛 친구 느낌이 나는 노인 중 몇 명은 도야지나 돼지라고 도 불렀다.
실제로 현정의 스승인 도지 무당은 결코 살이 찌지 않았다. 나 이는 몹시 많았으나 은근히 고운 자태를 간직하고 있었고 말수가 극히 드문, 태도 또한 아주 느릿느릿하고 조용조용한, 곱게 늙은 할머니였다. 그리고 퍽 자상하고 고운 마음씨의 스승님이었다. 그 런 평이한 생활은 현정이 열한 살이 될 때까지 이어졌다. 현정이 열한 살이 되자 도지 무당은 그녀에게 드디어 처음으로 ‘특이한’ 무언가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스승님이 가르쳐 준 것은 결코 현정이 예상조차 하지 못 한 것이었다. 맨 처음 도지 무당이 현정에게 내준 것은 어른들의 것보다는 조금 짧은 목도였다. 그것과 함께 도지 무당은 이름 모 를 한자가 가득 박힌 거의 부스러져 버릴 정도로 낡디 낡은 책 세 권을 현정에게 내밀었다. 그때까지 도지 무당이 현정에게 가르친 교육은 거의 없었다. 일상적인 뒷바라지를 해 주고 학교에 보낸 것 외에 도지 무당이 현정에게 가르친 것이 있다면, 한자 공부였 다. 그리고 그제야 현정은 왜 도지 무당이 한자 공부를 시켰는지 알 수 있었다. 눈앞에 내밀어진 낡은 책, 그것을 스스로 보고 익히 게 하기 위해 그런 것 아니겠는가. 그 책을 놓고 도지 무당은 만감이 교차하는 듯한, 그리고 약간 망설이는 듯한 어조로 조용히 말 했다.
“이건 아미파의 비전이다.”
“네? 무슨 말씀이죠?”
“옛날 중국에 아미파라는 비구니들의 단체가 있었어. 거기서 나온 검법이다.”
“검법이요? 칼 휘두르는 기술 말이에요?”
“그렇다.”
“비구니가 칼을 써요?”
아직 어린 현정은 도지 무당에게 물었다. 도지 무당은 묵묵히 옅은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일 뿐 다시 별다른 설명을 해 주지 않았다. 현정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그런데 왜 이걸 배워야 하죠? 칼 쓰는 거 무서운데..”
“그래도 해야 된다.”
“스승님이 가르쳐 주실 거예요?”
“아니, 나는 칼은 만져 본 적도 없어. 다만 누군가에게 전해야 한다는 사명이 있었을 뿐.”
“사명이요?”
도지 무당은 한숨을 쉬며 넋두리라도 하듯 말했다.
“몇십 년 전, 아미파가 있던 중국에 문화 대혁명이라는 큰 난리가 있었단다. 수천 년을 이어 온 중국의 정신세계가 순식간에 무 너졌지. 모든 사찰과 도관이 불타고 지식인과 학자, 종교인, 스님, 도인들이 모조리 죽거나 견딜 수 없는 핍박을 받았단다. 아미파도 그때 완전히 말살됐고・・・・・・・ 그때 비구니 한 명이 국경을 넘어 탈 출했는데, 아미파의 마지막 비전을 지니고 있었지. 온갖 곳을 전 전하다가 결국 이역인 우리나라에까지 와서 숨을 거두었는데…………… 우연하게도 그걸 내가 맡았단다.”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어요.”
“글쎄다. 나중에 나이가 들면 이해될 거야. 다만 그 사람은 죽는 순간까지도 이 비전이 끊이지 않게 해 달라고, 단 한 명이라도 좋 으니 자기 대에서 끝나게는 하지 말아 달라 당부했지… 아, 네 게 전하는 것이 옳을지 몰라 오랫동안 고민해 왔지만, 결국 네게 넘기는 게 옳을 것 같구나. 인연이란 건 이미 정해졌는지도…….”
“어려워요.”
“그냥 그런 게 있단다. 현정이는 착하니까. 그리고 내가 볼 때 현정이에게 꼭 맞을 거야.”
평생을 같이 지냈지만 스승님이 이렇게 길게 이야기한 경우는 그 긴 시간 중에도 극히 드물었다. 아직 어린 현정은 자신에게 잘 대해 주는 스승의 가르침을 어길 마음이 들지 않았다.
물론 그때까지는 여자아이로서 칼을 잡는다. 칼을 휘두른다는 일은 꿈조차 꾸어 보지 않았다. 그러나 앞에 놓인 목도를 만져 보 니 묘한 느낌이 왔다. 마치 옛날부터 친숙했던 것도 같고 자신의 손에 딱 맞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현정과 칼의 인연은 시작됐다.
눈을 감은 채였지만 길게 길렀던 머리가 툭툭 잘려 현정의 밑에 쌓여 가는 것이 느껴졌다. 가벼운 머리칼이 어째서 그토록 마음을 울리는 느낌을 자아내는 걸까. 손은 합장하고 입으로는 불호를 읊 고 있었지만 이상하게 가슴이 미어진다. 그건 자신의 과거다. 뭣 모르고 철없고 방종했고 슬펐고 아팠고 그러면서도 애틋하 고 소중한. 그러나 이제는 잊고만 싶은 혼탁한 과거의 모든 것이 다. 모든 것이 점 같고 부유하듯 쓸모없는 것. 제행무상(諸行無常), 색즉시공(色卽是空).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가 아무런 소용이 없어져 야 진정으로 이루어진다는 열반의 경지와 높은 깨달음. 그 모든 것의 시작이 이것을 벗어남에 달린 것 같다.
그리고 자신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버리는 과거의 모든 것에 대해 실제로 버리는 것이 아닐지 모른다. 버리고 싶은 것도 끌어안아야 했고 유지하고 싶은 것도 방기(해야 했다.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방법을 찾았다. 이 길밖에는 없다. 당연한 길이고 간신히 찾아낸 방법인데.
‘그런데 왜 눈물이 나는 걸까.’
현정의 눈에서는 어느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한참 후에나 깨 달았다. 예민해 눈을 감고도 숨은 사람의 기척까지 찾아낼 수 있 는 현정의 감각과 통제력이 그것을 왜 모르고 있었을까. 왜 눈에 서 계속 눈물이 흘러나와 방울방울 떨어져 자기 손을 적시고, 바닥을 적시고, 잘려져 쌓여 가는 머리카락에 떨어지고 있는 것을 왜 지금까지 몰랐을까. 그리고 이 눈물은 왜 멈추지 않을까.
“아미타불.”
현정은 다시 한번 나지막이 불호를 읊었다.
스승님이 내준 한자로 된 책은 검법을 설명한 것이었다. 한자도 한자지만 맨 처음 현정은 거기에 나와 있는 여러 가지 도해들을 보고 웃었다. 책에 그려진 그림 솜씨가 어떻게 이렇게 엉망진창이 지 하고 생각했다. 간결하게 그려진 사람들의 모습은 현정의 눈으 로 보아도 서툴고 투박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니 그런 모습들이 나 타내고 있는 동작들도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그리고 한자로 가득 메워진 본문 해석도 그다지 쉽지 않았다. 다행히 한문은 글자를 외우는 것이 어렵지 문법 자체는 퍽 간단한 편이었다.
옥편을 뒤지면서 현정은 책에 쓰여 있는 내용을 습득해 갔다. 단순히 쓰인 문구가 아니라 거의 대부분 비유나 은유라 해독하는 데도 제법 오래 걸렸고 다른 많은 책을 읽어야만 했다. 그렇게 하 고도 자신이 해독한 내용이 정말 맞는지, 실은 더 포괄적이고 깊 은 내용을 다루는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어린 현정은 그냥 자기가 느낀 대로 무조건 맞다 생각하고 어떻게든 비슷하게 해 보려고 했다. 누가 확인하거나 시험을 볼 것도 아니니 자유로 워서 마음껏 멋대로 해 볼 수 있었다. 나중에야 안 것이지만 그렇 게 느껴진 그대로 치기 어리게 수련하는 것이 차라리 낫지, 안 그랬다면 골머리를 싸쥐고 눈씨름만 하면서 평생을 보내야 할 내용 일지도 몰랐다. 현정은 어느 순간부터 사용하던 목검이 너무 가볍 게 느껴졌다. 조금 더 큰 검을 사용하며 현정은 여러 가지를 익혀 갔다.
맨 처음에는 그냥 못 그린 그림으로만 보이던 그림들이 그 동 작을 자꾸 연마하면서 보니까 잘 그린 것처럼 생각됐다. 그림 솜 씨가 좋은 것이 아니라 그림이 나타내고자 하는 동작, 아니 단순 한 동작이 아니라 기세라고나 할까. 어쨌든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같이 그려진 무언가가 희미하게 느껴졌다. 신기했다. 눈에 보이지 않고 동작에 나타나지 않는 느낌을 찾아 자신도 그 동작을 계속 익히며 따라갔다.
“그려지지 않은 뭔가가 보이는 것 같아요”라고 스승에게 말했을 때 도지 무당은 웃으며 “그래, 맞단다”하고 칭찬 해 주었다.
학교를 다니며 당연히 특별 활동으로 검도부에 들었다. 그리고 들어가자마자 현정은 전국 대회에 출전하라는 권고를 받았다. 현 정은 검도를 하긴 했지만 속으로는 계속 장난 내지는 아주 쉬운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로 검도의 동작들은 물론 몹쓸 것 은 결코 아니지만, 현정이 익히고 있는 것에 비하면 아주 기본적 이고 초보적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 안에도 기세가 있고 추구하는 바는 있었다. 그러나 다른 점 도 있었다. 현정이 익히는 검술은 실제 사용하기 위한 것이지만.
학교 검도부에서 배우는 기술은 살상 기술이 아니라 일종의 단련 과정이었다. 딱 떨어지게 그렇게 구분할 것은 아니어서 간단하게 생각하고 그러려니 넘어갔다. 은근한 자부심도 있었지만, 열심히 땀 흘리는 다른 친구들이 안쓰러워 잘 참으며 티는 내지 않았다. 쉽게 결정 내린 일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잘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 리고 전국 대회에 나간 현정은 준결승까지 진출해 3위를 했다. 3위 상장을 가지고 돌아온 현정을 도지 무당은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잘했구나.”
그러나 현정은 울적했다. 뭔가 답답하고 우울했다. 어쩐지 눈물 이 날 것 같았다.
“잘한 거 아니에요. 하려고 한다면 다 이길 수 있었어요. 아주 쉬울 것 같았어요. 하지만…………….”
“하지만 뭐지?”
“글쎄요. 그냥・・・・・・ 그렇게 하면 안 될 것 같아서요.”
“그랬니?”
“내가 이런 걸 숨기고 있는 걸, 아, 일부러 숨긴 건 아니지만요. 어떻든 다른 사람이 아는 게 왠지 싫었어요. 또 그러면 너무 상대 가 안 될 것 같기도 하고・・・・・ 그, 그래서 그냥 져 준 거예요. 이건 제대로 된 시합을 한 게 아니에요. 나는 참…………… 이걸 뭐라고 해야 하죠?”
눈물을 흘리지도, 거울을 보고 확인한 것도 아니지만 울 것 같 은 얼굴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도지 무당은 현정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조용히 웃었다.
“아니야, 네가 생각하는 게 맞단다. 참 잘했다. 현정아.”
“하지만 저는 시합에서 전력을 다한 것도 아니고, 그러면서도 난・・・・・・・ 내가 정말 잘한 게 맞나요? 열심히 연습한 다른 사람들을 놀린 거 아닌가요?”
“절대 아니지. 너는 시합보다 더 큰 싸움을 해서 이긴 거니까.”
뭔지 제대로 이해는 되지 않았으나 도지 무당은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날 이후 현정은 검도부 활동을 집어치웠다. 꼭 시합 결 과나 싫증 때문은 아니었다. 칼을 좋아하는 자신이 검도를 안한 다는 게 이상할 수도 있지만, 도리어 그렇기에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날 도지 무당은 목검이 아닌 진검(劍)을 쓰라고 내 어 주었다. 그 검은 일반적으로 검도에서 사용하는 것과는 어딘가 많이 달랐다.
실제로 굉장히 오래 묵은 것 같았으며 이상한 기운이 배어 있는 느낌이었다. 마치 검 자체가 살아 있는 것 같았다. 또 상당히 낡아 부스러질 것 같은 칼자루와는 달리 날은 무서울 정도로 잘 들었고 그것을 휘두를 때는 마치 자신의 혼이 조금씩 쓸려 나가는 듯한 착각까지 들었다. 칼의 뒷부분에는 청홍(靑)이라는 글자가 새겨 져 있었다.
현정은 처음에 이 검이 어떤 내력을 지닌 것인지 알지 못했다. 나중에 삼국지연의를 본 후에야 이 칼을 떠올리게 됐다. [삼국지연의] 영웅 중 하나인 상산 조자룡이 사용한 칼이 청홍검이 었다. 당연히 이게 설마 그 칼인가 하는 의문이 들어 나중에 도지 무당에게 물어보니 그 칼이 맞다고 했고, 현정은 소스라치게 놀랐 다. 그렇다면 골동품 내지는 국보에 가까운 물건이다. 어떻게 우 리나라에 존재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도지 무당은 그 과정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말해 주지 않았다. 다만 이런 말은 해 주었다.
“신검이니 잘 간수하거라.”
“오래 묵은 거라 신검인가요?”
“아니지. 오래 묵었다고 해서 좋은 건 아니지. 오히려 칼을 만드 는 기술은 예전보다 지금이 더 좋단다. 고대의 명검이라고 해도 요즘 기술로 본다면 조악하기 그지없겠지.”
슬쩍 날을 빼서 검 날을 확인한 현정은 치기 어린 사춘기 소녀 답게 따지고 들려했다.
“그런데 스승님, 검과 칼은 달라요. 날이 양쪽에 서면 검이고 그렇지 않은 칼은 도(刀)라고 구분해서……………”
도지 무당은 그냥 따뜻하게 웃었다.
“칼은 그냥 칼이란다.”
그 말 한마디를 듣고 단박에 부끄러워진 현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그런가요. 알겠어요. 그런데 이게 어떻게 신검이 되죠? 무슨 하늘의 힘이라도 담아서 만들었나요?”
도지 무당은 조용히 웃으며 현정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 건 아닐 거다. 오히려 생명 없는 물건에 힘을 주는 것은 하늘이 아니라 사람이야. 수많은 세월을 거쳐 전해 내려오는 동안 사용한 사람들이 이렇게 만든 것이지.”
그러면서 도지 무당은 약간 긴 이야기를 해 주었다. 이 칼이 그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청홍이라고는 하지만 정작 도지 무당도 확실히 알지는 못하고, 이걸 전해 준 사람도 확신은 하지 못한다 는 것이다. 오히려 삼국지연의 자체가 가상일 확률이 더 높으며, 그나마도 다른 이름으로 기술된 판본도 많으니 단정을 내릴 수 없 다는 것이다. 도지 무당이 덧붙여 말했다.
“설령 이 칼이 이천 년은 되지 않았다 해도, 최소 수백 년 이상 이걸 사용해 온 사람들은 그렇게 굳게 믿었단다. 장판파 의 명장 조자룡을 떠올리며 자기가 지닌 이상의 힘을 냈고, 그 힘을 칼에 실은 것이지. 또 믿지 않은 사람은 설마 하며 보물로 취급하 지 않고 오로지 검으로 쓰려고 했어. 그렇기에 도리어 벽에 걸리 거나 궤짝에 보관되지 않고 계속 사용돼 왔어. 이런 기구한 내력 을 지닌 칼도 극히 드물 거다. 실제 과거가 어떻게 됐건 간에, 그 수많은 무인이 그렇게 믿고 사용한 염원과 기를 담았으니, 이걸 조자룡이 쓴 칼이 아니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느냐. 그 수많은 무인이 조자룡을 떠올리며 조자룡의 화신처럼 돼 칼을 썼으니 말 이다. 실제 조자룡이 사용한 청홍이 따로 있어서 발견된다 해도, 이제 이 칼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거야.”
잘 이해할 수 없었던 현정은 역시 그녀 나름대로 간단히 마음을 정해 버렸다.
“조자룡이 쓴 칼 맞을 거예요. 전 그렇게 믿어요. 절대 의심 안해요. 조자룡. 멋지잖아요.”
도지 무당은 선선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다면 그것도 좋겠지.”
“그런데 어디서 구하셨어요? 신기하네요.”
도지 무당이 짧게 말했다.
“네가 보는 책을 전해 준 아미파 사람이 같이 준 거다. 그 역시 보물이라면서. 다만 아무리 역사니 뭐니 해도, 이 칼만은 박물관 이나 전시실에 걸리게 하지 말고 계속 사용해 달라고 당부했어.”
나름 깊은 연유가 있는 물건이었으나 현정은 그저 자기가 써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것으로만 생각했다. 그래서 기쁜 나머지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그렇군요. 다행이네요.”
청홍검을 사용하면서 현정의 검술 실력은 눈부시게 늘었다. 물 론 청홍검에서 무슨 엄청난 힘이 쏟아져 나온 것은 아니었다. 다 만 이런 희귀한 물건을 다룬다는 사실 자체가 현정의 각오를 다르 게 만들어 주었다. 이런 보물과 같이 전달된 것을 보면 이 검술에 뭔가 깊은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일반적인 무도니 신체 단련이니 이런 것이 아닌 뭔가 독특한 것이 있을 것 같았다. 생전 누구도 들어 본 적 없을 것 같은 이상한, 아주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특이한 검법.
현정은 이미 아미 비급의 내용 해독을 몇 번이나 마쳤지만 그때 마다 의문과 풀리지 않은 점들이 끊이지 않고 나왔다. 그래서 폭 넓게 독서를 하기 시작했다. 이런 내용을 다룬 허구의 소설들은 넘쳐 났고 꽤 많이 읽어 보았지만 실제 검을 느끼기에는 너무나 과장된 내용이 많아 헛웃음만 자아냈다. 다만 아미파가 실재했다 는 정도밖에 쓸 만한 내용을 알아내지 못했는데, 그나마도 현정에 게는 ‘정말이었구나’ 하는 조금은 턱없는 확신을 갖게 해 주었다. 그리고 집중할수록 실력은 점점 늘어 갔다. 누구에게 보일 일도 없고, 보일 수도 없었으나 현정은 즐거웠다. 즐거워했기에 발전도 빨랐는지 모른다.
그렇게 현정의 검술이 계속 발전했고 현정은 고등학교 이 학년 이 됐다. 그리고 그제야 도지 무당은 비로소 자신이 무당임을 밝 혔다. 그것도 일반적으로 굿을 하는 무당이 아니라 그보다는 몇 단계 높은 일, 그러니까 실제로 보이지 않는 악령들을 퇴치하고 다니는 그런 묘한 일을 한다는 것도 알려 주었다.
도지 무당은 아주 드물기는 했지만 그런 일을 할 적에 현정을 대동하기 시작했다. 도지 무당은 인적 없는 외딴곳 어두운 밤에 현정을 데리고 가면, 중얼중얼 노래를 부르고 가볍게 춤을 추며 빙빙 돌기도 하고 무슨 종이로 만든 부적 같은 것을 허공에 뿌리 기도 했다. 현정은 그 곁에서 칼을 쥐고 가만히 경계하는 것이 전 부였다. 처음에는 무엇을 하는지조차 알지 못했고 특이한 것을 보지도 못했다. 현정의 눈으로는 도지 무당이 춤추는 것 외에 실제 로 뭘 하는지, 하고 있기는 한 건지 알 수조차 없었다. 그저 존경 하는 스승님이 하시는 일이니 최대한 엄숙하게 따를 뿐이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도지 무당은 현정을 자신의 후계자로 만들 것인지 여부를 그때 심각하게 고민했던 것 같다. 고아였던 자신을 데려다가 제자로 삼은 것을 보면 당연히 후계로 삼으려 했을 것이 다. 또 자신을 스승이라 부르게 한 것도 그렇다. 하지만 정작 도지 무당이 현정에게 알려 준 것은 검법뿐이었다.
현정은 그 이상한 굿에 대한 의식을 하나도 알아보지 못했고, 그에 대해 언젠가 도지 무당에게 물으니 도지 무당은 약간 서글 픈 듯 “보지 못 하는구나”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그러고는 평소처 럼 말이 없었는데, 도지 무당의 표정은 조금은 슬픈 듯도 했지만 어쩐지 시원한 듯, 복잡하게 느껴져서 은근히 두려워진 현정은 더 묻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며칠도 지나지 않은 어느 날, 현 정은 정좌를 한 채 도지 무당이 선언하는 말을 들었다.
“오래 고민했는데 지금 결정을 내렸다. 너는 내 뒤를 잇지 마라.”
“예? 하지만…………….”
현정은 고개를 숙였다.
“제가 재능이 없나 보네요.”
“아니, 나도 많이 고민했어. 꼭 네가 재능이 없어서는 아니다. 다만 내 생각이 바뀌었을 뿐이란다.”
“어떻게요?”
도지 무당은 조금 허탈한 미소를 띠며 멍하니 현정의 머리 위쪽 허공을 응시했다.
“글쎄다. 이런 험한 건 그냥…………… 앞으로는 남아 있지 않아도 돼.”
“험하다니요? 무당을 천시한 것은 옛날이고・・・・・・ 뭐, 지금도 꼭 좋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저는 충분히……”
“아냐. 그리고 현정아, 내가 전에 주었던 그 검술 가지고 있지?”
“아, 네. 그럼요.”
“가지고 오너라.”
현정이 보물처럼 책의 한 귀퉁이라도 상할까 봐 조심스럽게 보 았던 아미파의 비급 세 권을 도지 무당 앞에 내놓자 도지 무당은 그것을 쥐고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현정은 영문을 몰라 조심스레 눈치를 보며 도지 무당의 뒤를 따랐다. 도지 무당은 곧바로 앞마 당에 가서 책을 땅에 놓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성냥을 꺼내 책 에 불을 붙여 태워 버렸다. 현정은 깜짝 놀라 신음성 같은 것을 냈 으나 스승이 하는 일이라 막지도 못했다. 다만 서글픈 기분으로 그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책이 다 타서 새카만 재가 되자 현 정은 자신도 모르게 흑흑거리며 울어 버렸다. 그러자 도지 무당이 조용히 말했다.
“이제 돌이켜 보니 너에게 칼을 가르친 것도 후회되는 구나. 과 거의 인연과 약속이 있어 네게 전했으니, 고인과의 약속은 지킨 셈이다. 그리고 단 한 명이라도 전수자가 나와 자기 대에서 맥이 끊이지 않으면 된다 했으니 이제 됐다. 이건 이제 이 세상에는 필요 없는 물건이야.”
“하. 하지만…….”
“현정아. 나는 여러 가지 인연을 얻었지만 그런 쪽에는 통 자질 이 없었어. 맨 처음에는 너를 잘 가르쳐 여러 가지를 겸비한 사람 으로 만들려 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지금 세상에서 내 재 주나 검을 해 봐야 아무 쓸모도 없어.”
“왜 아무 쓸모도 없어요? 저는 누구보다도 강해질 수 있고…………. “
“현정아, 내 말 들어라. 앞으로라도 절대 이 검술은 보통 사람 앞에 보이지 말아야 해. 이것은 잊혀야 될 물건이고 그걸 혹시라 도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되면 너는 몹시 힘들어진단다. 내 말 명심 해. 그리고 약속해 다오.”
“약속하겠습니다. 스승님. 하지만 그러면 이건……………. 제가 배운 건 뭔가요? 아무한테도 보일 수 없고 사용할 수 없다면?”
“글쎄, 꼭 필요한 경우가 생길 수도 있겠지. 그게 무슨 뜻인지 너도 차차 알게 될 거야.”
“하지만 스승님의 기술 같은 것은…………….”
“이제 없어져야 해. 나를 끝으로.”
도지 무당은 그 말만 슬프게 남기고 더 이상 그에 대해서는 말 하지 않았다. 이날 도지 무당과 현정의 대화는 이제까지 두 사람 이 같이 살면서 나눈 대화 중 가장 애틋하고도 복잡한 것이었다. 그날 현정에게 전해진 느낌은 후일에는 뭐라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비감했다. 원래부터 말수가 적었던 도지 무당은 그 이후로 그냥 옅은 미소를 띠거나 표정으로만 대답했을 뿐, 죽는 날까지 거 의 몇 마디 말고는 아예 말을 하지도 않았다. 다만 뭔가 생각하듯 조용히 자신의 방에 앉아 있었을 뿐이다.
여하튼 현정은 몹시 답답해졌다. 청홍검은 아직도 현정이 가지 고 있었으나 조금 더 나이를 먹어 가면서 현정은 차차 도지 무당 이 말한 뜻을 깨닫게 됐다. 정말 아무리 현대 사회가 되고 직업의 귀천이 없다고들 말하지만 무당이 된다는 것은 결코 좋은 시선을 받을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일반적인 무당도 아니고 칼을 휘두 를 줄 아는 무당이라는 것, 그리고 자신이 갖고 있는 아마 국보 급 보물에 해당되는 칼에 대해서도 차차 걱정스러워졌다.
아무 힘도 없이 보물을 지니고 이것을 지켜야 한다는 것. 이것 은 현정에게도 굉장히 골치 아픈 일이었고 그에 대한 근본적인 해 결책은 결국 하나밖에 없었다. 이것이 무엇인지 아무도 모르게 만 드는 것이다. 이게 청훙검이라는 것을 탐욕스러운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자신은 절대 검을 끝까지 지켜 낼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무리 검법이 강하고 검술이 강해도 이 검술을 쓸 대상이 없 었다. 검도 대회는 자신이 배운 실질적인 살검)과는 거리가 멀었다. 여러 가지 규칙이 있어서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됐지 만 자신이 몸에 익힌 검법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다른 검은 이제 사용하기도 어려웠다. 청훙검만으로 거의 모든 검술을 익혔기 때문에 청홍검을 떼고는 검술이 제대로 발현될 것 같지도 않았다.
하지만 누가 이런 칼을 가진 현정과 잠깐이라도 진심으로 대련 해 줄 수 있을까. 그리고 자신이 익힌 검법의 경지는 어떨까. 어떻 게 하면 더 나아갈 수 있을까. 이론이나 구상만으로는 한계가 있 다. 실전을 겪어야만 더 늘 수 있을 것 같은데, 도대체 누구와 제 대로 실력을 발휘해 싸워 볼 수 있을까. 일반적인 검도의 고수는 전혀 눈에 차지 않았고 설령 진검 대결을 한다고 해도 현정의 살 검은 일반적인 검도 고수들로는 막아낼 수 없었다.
이건 몸에 익은 것이라 어쩔 도리가 없었다. 대충 가볍게 봐주 거나 쉽게 진정한 초식을 쓰지 않고 하는 것은 어차피 자신이 바 라는 바에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나이가 들고 알면 알수록 자신 의 처지는 점점 답답해졌고 왜 도지 무당이 그것을 내보이지 않는 편이 좋을 것이라고 말했는지도 이해가 갔다.
그때부터 현정은 몹시 외로워졌다. 검은 여전히 현정의 가장 가 까운 친구나 다름없었지만 사용할 수가 없다. 그리고 도지 무당을 스승이라고 불렀지만 스승 스스로가 가르쳐 주지 않는 한 이제 더 이상 할 것도 없고 특별할 것도 없다.
-보통 사람의 생을 살아라.
도지 무당이 그리 말했으나 아직까지는 확실히 보통 사람의 생 이 더 좋은지 실감조차 할 수 없었다. 뭔가 하나라도 제대로 해봤 어야 선택할 것 아닌가. 현정은 몹시 방황하는 마음으로 고교 시절의 뒷부분을 보냈다. 그러나 도지 무당에게만은 항상 쾌활하고 밝게 행동하려고 했으며, 그런 마음속의 고민이나 거리낌을 말하진 않았다.
그리고 현정은 대학에 진학했다. 이제 어른이라 생각했기에 스 승의 신세를 지기 싫어 아르바이트를 해 보기도 했고 공부를 열심 히 해서 장학금을 타기도 했다. 무엇보다 대학 생활을 하면서 스 승의 말대로 검은 잊어버리려 했다. 남자 친구도 사귀었다. 이대 로 완전히 보통 사람의 일상으로 들어갈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 게 되지는 않았다.
현정은 그 남자가 점점 좋아졌다. 아직 대학생의 신분이었지만 결국 남자에게 몸도 주었다. 그 남자와 결혼해 행복한 생활을 이 어 가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졸업은커녕 학년도 채 바 뀌기 전에 그 남자는 다른 여자를 당당히 현정의 앞에 끌고 와 이 별을 선언했다.
배신당했다. 보통 사람과 전혀 다르지 않은 현정의 표정이었지 만 이때만은 뭔가가 달랐다. 자신이 생각해 두고 꿈꾸어 온 것이 한꺼번에 허물어졌다. 현정은 시끄러운 학생 식당에서 볼펜으로 리포트를 작성하는 중이었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녀의 손가락 이 딱 멎었다.
현정은 조용히 그 남자의 뻔뻔스러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자신의 표정이 어땠는지는 알 수 없다. 기억도 나지 않는다. 다만 웃 지 않았던 것은 분명했다. 현정의 마음속은 이때까지 경험해 온 어떤 마음 상태와도 달랐다. 흥분된 것도 아니고 격노한 것도 아니다. 차가운 호수에 깊이 가라앉은 것 같은 기분만 남았는데 표 정이 어땠는지까지는 알 수 없지만 크게 찡그리거나 인상을 쓴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남자의 반응이 달라졌다. 단지 고개를 돌려 얼굴을 본 것 뿐인데 남자의 얼굴이 그 순간 크게 질린 것만은 잊히지 않는다.
‘그렇게 사랑했던 사람인데, 그렇게 좋아하고 꿈꾸던 사람인데 왜 저렇게 하얗게 질리지? 스스로의 죄, 스스로 한 배은망덕한 행 동이 나쁜 거라고 비로소 깨달은 거야, 아니면 내가 무서운 거야? 도대체 왜?’
허나 그 남자도 갈피를 잡지 못함이 분명했다. 그래도 남자는 옆에 끌고 온 새로운 애인을 의식하며 현정에게 지지 않겠다는 듯 얼굴을 들이밀며 뭔가 소리를 지르려고 했다.
현정은 차분하게 리포트를 쓰던 손을 들어 마침 쥐고 있던 볼 펜의 끝으로 남자의 이마를 건드렸다. 물론 때리거나 치려던 것 은 아니었다. 다만 바짝 들이미는 그 낯짝이 역겨워서 밀어 내려 고 했다. 손을 대기도 싫어서 볼펜 끝으로 밀어 낼 생각이었고 그 렇게 간단히 밀었다. 결과적으로는 그냥 ‘툭’ 민 것이다. 소리가 난 것도 아니고, 하다못해 볼펜 끝이 남자의 이마에 닿았으나 볼펜 자국조차 남지 않았다. 그리고 그러자마자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져서 현정의 손은 자기가 작성하던 리포트 글자로 돌아가 려 했다. 그러나 계속 글을 쓸 수는 없었다.
이마를 살짝 맞은 남자가 정신을 잃으며 학생 식당의 의자와 책 상들과 함께 쓰러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다음의 일은 현정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혼란스러워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남자를 따라온 여자가 비명을 지르며 울었던 것은 기억이 난다. 그리고 자신의 주변에 있던 같은 과 친구들과 다른 사람들이 우왕좌왕하 던 것만 기억이 난다.
현정은 조금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 오히려 멍한 상태였다.
‘쓰던 걸 계속 써야 하나? 이 사람은 왜 이러는 거지? 장난인가?’
흥분하지도 않고 어떤 상념도 일지 않았다. 정말 자신이 생각 없이 밀어 낸 볼펜 끝에 자신이 익혀 왔던 검술의 기운이 들었을 지 모른다는 추측도 사실은 나중에 억지로 돌이켜 짜낸 것이다. 그때는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다.
남자는 결국 병원으로 후송됐고 진단을 받았다. 아니, 진단을 받 으려 했다. 그런데 의사들은 이 남자의 어디가 잘못됐는지 전혀 찾 지 못했다. 아무리 병원 장비를 돌려서 검진해 보아도 남자는 조그 마한 외상도, 내부의 출혈도, 충격을 받은 흔적조차 없었다.
다만 현정이 볼펜으로 남자의 이마를 톡 민 것은 꽤 많은 사람 이 목격을 했다. 그것 말고는 건강하던 남자가 갑자기 식물인간처 럼 돼 버린 이유를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렇지만 볼펜 끝이 그런 결과를 빚었다고 단언할 수 없었다. 마침내 경찰은 현정이 옛날에 검도 대회에 나갔던 기록을 찾아내어 추궁하려 했다.
원래 검도의 고단자는 신문지를 둘둘 만 것이나 볼펜, 우산, 하다못해 나무젓가락만으로도 사람을 쳐서 중상을 입힐 수 있다. 하 지만 현정은 검도의 공인 단중도 없을뿐더러 설령 그렇다고 하더 라도 이 경우는 달랐다. 아무리 나무젓가락이나 볼펜으로 치더라 도 분명히 물리적인 충격량을 전달하는 법이다. 비록 볼펜일지라 도 쳐서 상해를 입히면 상처와 타격 흔적은 그대로 남게 된다. 허 나 현정이 볼펜으로 살짝 민 이마에서는 어떤 외과적인 소견도 발견되지 않았다.
결국 의사 쪽에서 내린 결론은 필연적이었다. 현정이 친 것은 우 연에 불과하고 뭔가 남자의 내부가 잘못돼 이렇게 됐다고 판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경찰도 입건하거나 죄를 씌우지 않았다.
남자는 영영 깨어나지 못했다. 현정의 친구들은 재수가 없었다 거나 불행한 사고에 휘말렸을 뿐이니 안심하라고 말해 주었으나 다른 사람들의 시선은 달랐다. ‘살인자’라고 입 밖에 내어 말하진 않았지만 적의에 찬 시선은 말보다도 더 웅변처럼 현정에게 들렸 다. 그리고 사실은 현정도 그 말이 맞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사람을 죽였네. 아니, 사람 맞나?’
당시 현정의 생각은 분명히 그랬다. 그러나 그 사실을 인정하기 는 싫었다. 당당히 사실을 털어놓거나 하는 것을 넘어서 일단 정 말 자신이 그런 것인지조차도 확신이 없었다. 그동안 익힌 검법이 아무리 살인적인 위력을 지녔을지라도 툭 민 것만으로 이런 결과 를 낳는다고는 상상도 못 했다. 아니, 상상조차 않으려 했다. 현정 은 자신은 전혀 책임이 없다는 듯 사람들 앞에서 당당히 행동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와서는 한없이 울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속해서 현정이 우는 것을 본 도지 무당 은 조용히 그녀의 뒤에 와서 말없이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무슨 일인지 묻지도 않았고 위안을 하거나 마음을 달래려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등을 두들겨 주는데 그 손길은 확실한 무관심도, 완벽한 이해도 아니었다. 그저 아무것도 아닌 위안이었다. 아무것도 아니고 무슨 일이라도 상관없다는 듯 조용 히 두들겨 주는 그 손끝에서 현정은 큰 위안을 얻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그때 현정의 마음은 완전히 무너져 버렸을지 모른다. 그즈음 현정은 자신이 여태까지 배운 검법에서 검기라고 하는 것이 발출된 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었다. 굳이 생각했다기보 다 그런 의심이 마음을 꽉 채워 버린 상태였다.
현정은 그 일에 대해 입 밖에 내어 말하지 않았지만, 경찰이나 기타 사람들이 여러 번 찾아왔기 때문에 도지 무당도 진상을 어느 정도 파악했다. 그러면서도 도지 무당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현정은 사흘이 넘게 지난 이후에야 어느 정도 마음을 가다듬고 도 지 무당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털어놓았다. 그리고는 그것 에 대해 말했다.
“스승님이 주신 검법이 정말 그렇게 나올 줄은 몰랐어요. 그게 검기라는 건가요? 아, 정말 뭐라고 생각하기도 싫지만……… 물론 제 잘못이고 제 실수지만 그렇게 사람이 허무하게 죽을 줄은…….”
현정이 울며 말하는데 도지 무당이 차분히 말했다.
“그런 것은 그 검법에 없단다.”
“예? 하지만 분명히…….”
“검법에는 없다. 그리고 네가 검기를 뽑아낼 수 있는 경지였을까? 난 그게 의문스럽구나.”
정신이 나간 듯- 당연히 현정은 그때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기 에 마음을 가다듬었다 생각했는데도, 입에서는 아무 말이나 닥 치는 대로 튀어나왔다.
“스승님. 하지만 분명히 그 남자는 죽었어요. 그게 아니라면 누가 그를 죽였죠? 저, 잡혀가고 싶진 않아요. 그리고 제가 정말 죽 였다는 증거도 없고요. 죄를 뒤집어쓰고 싶지 않아요. 신고라도 하실 건가요?”
도지 무당은 현정의 말을 묵묵히 듣다가 한마디만 했다.
“다시 한번 시험해 보려무나. 정말 그런지 아닌지.”
현정은 처음에는 그 말을 흘려버리고 방구석에 움츠린 채 움직 이지 않으려 했다. 그냥 이대로 굳어서 돌이 돼 버렸으면 좋을 것 같았다. 검 같은 것, 아니 길쭉한 것은 하나도 만지고 싶지 않았 다. 아예 손을 잘라 버릴까 싶기도 했다. 그러나 계속 곰곰이 생각 해 보니 아무래도 검기 같은 것을 자기가 발출할 수는 없을 것 같 았다.
‘시험? 그래. 시험해 보는 거야.’
물론 현정이 벌을 받을 리는 없다. 이런 현상에 대해서는 세상 의 누구에게도 들은 적이 없다. 현정이 남자의 죽음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는 증거를 대지 못하는 한 경찰이나 누구도 현정을 비난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현정 스스로가 의문을 버릴 수 없었다.
‘내가 정말 사람을 죽인 걸까?’
아무도 모르더라도 자기만은 알아야 한다. 사람의 죽음은 그렇 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세상 모두를 속이더라도 그 사람을 죽인 당사자만은 알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불행은 현정 자신도 정말 자 신이 그 남자를 죽였는지 아닌지 모르는 데 있었다. 죽였다고 믿었 는데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아닌 것 같고 아니라고 생각하다 보면 그것 말고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 도대체 뭘까. 며칠 동안 이를 악 물고 용기를 낸 끝에야 현정은 쓰레기봉투에 모조리 처박았던 볼 펜과 필기구 중 한 자루를 꺼내 들었다. 전에 사용했던 볼펜과 같 은 모델이었다. 그것을 들고 현정은 조심스럽게 천천히 책상을 건 드려 보았다. 최대한 지난번과 비슷하게 글씨를 쓰다가 자연스럽 게 톡 미는 것처럼. 톡 소리가 났고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책상에 흠집도 가지 않고 책상이 망가지거나 부서지는 일 같은 것도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현정은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역시 최대한 똑같이 움직이며 확인해 보았다. 검술을 익힌 현정의 감각 은 남보다 예민한 데가 있어서, 보통 사람은 몸을 움직이는 동작 이 어땠는지 기억하기 어렵지만 무술의 초식을 연마해 온 현정은 그 동작 하나하나를 기록한 것처럼 똑같이 반복할 수도 있었다. 보통 맹인들이 이런 능력을 지닌다고 하는데 현정은 후천적으로 습득한 능력이었다. 그렇게 집중해, 약간 각도는 다르지만 똑 같은 움직임으로, 완전히 똑같을지는 모르겠지만 최대한 똑같은 움직임으로 현정은 자신의 손목을 쳐 보았다. 역시 ‘톡’ 소리가 나 며 약간의 감촉이 있었다. 하지만 현정의 손은 아무 이상도 없었 다. 어디가 부러지지도 망가지지도 않았다. 물론 마음은 심란해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지만 그 순간 현정은 자신도 모르게 픽 웃었다. 이렇게 톡 치는데 당연히 그렇게 될 리가 없었다. 현정은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고 이번에는 자신의 이마를 똑같은 방법 으로 쳐 보았다. 심장이 두근거리며 긴장됐다. 자신도 정말 죽어 버리는 것은 아닐지.
‘내가 죄가 있다면 나도 똑같은 방법으로 죽는 게 마땅하지. 내 가죽인 게 아니라면 내 머리를 친다고 해도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을 테고.’
논리적으로는 당연했다. 당연히 그랬어야 하는데 현정의 손이 덜덜 떨렸다. 절대 그때와 같이 평정한 상태가 될 수 없었다. 현정 은 억지로 이를 악물고 몇 시간이나 마음을 가다듬으며 생각을 정 리하고 정리한 끝에 결국 자신의 이마를 톡 건드려 봤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톡’ 소리만 나고 볼펜의 감촉만 느껴졌을 뿐, 이상하 다고 느낄 만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아니, 달라. 이게 아니었어. 그때는 이렇게 덜덜 떨리고 생각이 많지 않았어.’
다시 기억을 돌이켜 봤다. 분명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그게 상당한 충격이었던 것 같기는 하다. 마음속이 텅 빈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처럼 됐으니까. 물론 정신이 완전히 나간 것은 아니 다. 분명히 사물도 정상적으로 보였고 사고도 정상적으로 됐다. 그런데 뭔가가 없어졌다. 평상시에 항상 존재했기에 그 존재조차 도 느끼지 못하는, 말하자면 공기와도 같은 무엇인가가 그때는 자 신의 마음속에서 사라져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공기만큼이나 필수적이어서 없으면 스스로를 유 지할 수 없는 그 무엇이었다. 그게 뭘까. 그 상황을 똑같이 재현할 수 없다면 현정은 확신할 수 없었다. 자신이 정말 그 남자를 죽인 것인지, 정말 그 무엇인가가 자신 안에 깃들어 있는 것인지, 이것 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였다.
현정은 이미 태워 버린 옛날의 비급을 떠올려 보았다. 수도 없 이 보아서 그 내용은 머릿속에 완벽하게 암기돼 있었다. 내용을 아무리 천천히 되짚어 보아도 검 밖으로 무언가가 뽑혀 나온다거 나기를 전달한다거나 또는 그럴 수 있다는 구절 따위는 단 한 군 데도 없었다. 칼은 칼일 뿐이었다.
‘그럼 도대체 뭐지?’
자신이 정말 사람을 죽게 했다면 자신의 몸에서 무언가가 볼펜 으로 전달돼야만 했다. 그건 뭘까? 외면적으로는 아무런 흔적도 자국도 충격도 주지 않은 채 그 남자의 뭔가를 부숴 버렸어야 한 다. 무엇을 부숴 버렸을까? 그때 현정에게서 빠져나갔던 것? 물론 현정 스스로도 그것이 무엇인지, 존재했던 것인지조차 알 수 없지만, 그것이 뭔가를 건드린 건 아닐까? 살아 있으려면 필수적으로 존재해야 하지만 눈에 띄지도 느껴지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무언 가가 그 순간에 파괴된 것은 아닐까? 현정이 한 짓이 확실하다고 보면 이런 식의 억측에 불과한 가설일지라도 일단은 조건이 성립 된다. 그럼 그게 무엇인데? 그런 게 존재할 수는 있는 건가?
의외로 그 실체와 비슷한 것에 대한 이야기는 주변에 널려 있었 다. 무협 소설이나 환상소설에 보면 마음속의 기(氣)라는 것을 뿜 어서 유형화시켜 멀리 있는 상대를 격살하고 사람을 조종하는 등 등의 이야기가 난무했다.
물론 그것은 이야기일뿐이고 실제로 그런 것이 일어나는 경우 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리고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겨졌 다. 이런 내용을 쓴 작가들도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는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런 건 일어날 수 없는데.’
하지만 현정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난 셈이다. 그러니 문제는 그 런 것이 존재하느냐 아니냐로 귀착됐다. 그런 일이 존재할 수 있 다면 현정은 그 남자를 죽인 것이 맞다. 반대로 그런 일이 존재할 수 없다면 현정은 무죄다.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오랫동안 나 름대로 숙고해서 내린 결론이기 때문에 틀림없으리라 믿었다.
현정은 다시 검을 잡았다. 옛날보다도 더 미친 듯이 필사적으 로 휘둘러 댔다. 검기라는 것은 절대로 나오지 않을 것임을 현정 스스로도 알았고 이미 불가능하다고 내심 확신했다. 하지만 휘둘러 볼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수련을 하면 검기라는 게 만들어질까? 그리고 검기라는 것은 정말로 닿지 않는 것 또는 검을 통하지 않고서도 뭔가를 파괴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러나 현정의 경우는 파괴한 것도 아니었다. 뭔가 보이지 않 는 것을 제거해 버렸다고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그런 일이 가능은 한 걸까? 하물며 형체도 없는 것이 정말 파괴될 수는 있을 까? 의문들은 끝도 없이 일었다.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억측 같았 다. 이성적으로는 그 남자의 내부 기관 어딘가가 우연히 바로 그 순간 재수 없이 잘못됐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그 남자에 대한 의 사들의 소견서와 의학적 소견에 대해서는 이미 수도 없이 확인해 보았다. 의사들의 소견서에는 전혀 사인을 ‘짐작할 수 없다’라고 만 적혀 있었다. 의사들도 사인을 짐작하지 못하는 경우 일반적으 로 사용되는 병명이 몇 가지 있다. 급성 신부전이나 심장 마비 등 등. 은근히 많은 수가 확신 없이 내려지는 결론이다. 그 병세들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고 발동되면 이런 경우와 같이 조금의 흔적 도 남지 않고 사람이 죽는다. 때문에 의사들도 확실한 판정을 내 릴 수 없게 되면 그중 하나를 고를 수밖에 없다. 정확한 진단이 아 니라 거의 추측에 가까운 진단을 내리게 되는 셈인데 이럴 때마다 의사들은 자신의 무력함을 한탄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현정은 그 런 병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위안을 받을 수 있었다.
‘죽음에 대한 결론이 확실하게 내려지지 않는 경우도 존재해. 그런 경우라면・・・・・・ 내가 죽인 게 아냐.’
그럼에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때 자신이 그 남자에게 품은 아주 짧고도 텅 빈 감정이 과연 살의는 아니었을까? 제삼자를 죽 이고 싶어 했다면, 그래서 보이지 않는 뭔가가 뻗어 나가 사람을 죽였다면 그것은 살의여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기억을 필사적으로 헤집어 보아도 그때 자신에 게 떠올랐던 감정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냥 텅 비고 멍한 감정, 남자가 적반하장으로 소리를 지르려고 얼굴을 들이댔을 때 그 얼 굴이 보기 싫었던 것까지는 기억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 해도 절대 살의 섞인 감정은 아니었다.
‘그럼 대체 뭘까?’
더 모호해졌다. 그때부터 현정은 더더욱 필사적으로 검을 휘둘 렀다. 예전보다 연습량이 훨씬 많아졌다. ‘걷기’라는 것을 발출하 기 위해서, 또는 그때의 텅 빈 마음 상태를 다시 한번 재현해 보기 위해서 검의 경지가 아주 높아져서 마음이 명경지수(明鏡止水)처 럼 된다면 혹시라도 확인할 수 있을지 모르기에.
허나 소용없었다. 필사적으로 수련을 했지만 그 경지는 보이지 도 않았다. 죽을 때까지 수련을 해도 그렇게 될지조차 의문스러웠 다. 변한 것은 없었다. 다만 가장 두려워하고 멀어져야 했던 검이 어느새 다시 손에 찰싹 붙다시피 했고, 예전과 달리 이제는 아예 검을 가지고 다니게 됐다. 떼놓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어느새 그녀의 마음속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남자의 죽음이나 사람을 죽였을지 모른다는 죄책감이 아니었다. 그보다도 훨씬 커다란, 공포와 같은 의문.
책임감이 없어서 잊은 것은 아니다. 아무리 파고들어도 알 수가 없어 멀리한 것도 아니다. 어쩌면 생각을 연결하는 사고의 끈이 너무도 많이 사용한 끝에 닳아 가는 것일지도.
이제는 검이 중요했다. 검의 경지를 높이는 게 중요한 것은 아 니다. 정말 그런 경지가 가능한 것인가? 설혹 우주 전체의 생성 소 멸만큼 희박한 확률일지라도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날 수는 있을지 가 중요했다. 그것을 알아야 정말 자신의 마음속에 칼처럼 박혀 있는 의문을 확인할 수 있으니까.
‘나는 죄가 있나? 혹은 없나? 내가 사람을 죽인 건가? 아닌가?”
혼자 하는 수련에 한계를 느낀 현정은 검도의 고수들을 찾아다 녔다. 물론 다짜고짜 싸움을 건 것은 아니다. 하지만 검의 경지에 대해서 말로 표현하거나 배운다는 것은 표현력의 경지를 넘는다. 때문에 자꾸 대련을 해서 상대방의 검에 대한 경지를 보아야 했 다. 이제는 의문을 풀기 위함이었다. 죄책감을 느끼지도 벗어난다 는 생각조차 없었다. 겉으로 볼 때는 멀쩡했지만 현정은 반쯤 미 쳐 있었는지도 모른다. 검이 좋아서 미친 것이 아니고 검과는 전 혀 상관없는 이유 때문에 검에 미쳤다.
사실 간혹가다 현정은 자신이 반 정도는 인간의 세계가 아닌 곳 에 한 발을 걸치고 있는 것 아닐까 생각한 적이 있다. 예전부터 도 지 무당이 굿을 할 때 간혹이나마 함께해 왔었지만 그즈음 현정의 검경지가 높아짐에 따라 조금씩 큰일에도 대동된 적이 있다.
글자 그대로 전설로 내려오는 주술이나 신통력을 사용하는 사 람들도 보았고, 상당히 드물기는 하지만 보통 사람의 눈에는 보이 지 않는 악령이나 염체, 사념, 정령, 악의, 살의 같은 것이 유형화 돼 보이지 않게 사건을 일으키는 것도, 또 그것을 막아 내는 사람 도 있음을 알게 됐다.
하지만 현정에게는 그런 자질이 조금도 없었다. 애당초 없었을 지도, 혹은 도지 무당이 그런 능력이 발현될 기회를 주지 않았을 지도 모르지만 하여간 없었다. 물론 검술에 대해서는 상당한 경지 에 올라와 있다고 자부했다. 그러나 그것도 어디까지나 인간들 사 이에서 통용되는 수준 안에서였다. 눈에 보이고 잡혀야 벨 수 있 으니까. 손안에 자신이 항상 쥐고 다니는 청홍검이 설령 전설에 서 말하던 보검이라 할지라도 엄청나게 잘 들고 견고하다는 것 외 에는 보통 칼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결국 다른 세계와 접하면 서도 그녀는 그 세계에도 몸을 담을 수 없었다. 한 발 이상을 딛는 것은 불가능했다.
인간 세계가 아닌 다른 이면의 세계에 한 발을 디디고 나머지 한 발은 보통 사람의 세상에 그대로 딛고 있는 어중간한 중간자적 존재가 바로 자신이었다. 그리고 우습게도 그것은 현정의 마음속 에 깊이 숨어 있는 의문과도 많이 닮아 있었다.
‘나는 살인자인가 아닌가’
‘나는 죄가 있나 없나.’
그런 기이한 능력을 지닌 사람들조차도 차차 신기하게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익숙해졌다. 하지만 그런 사람 중에도 전혀 생채
기나 흔적도 없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경지의 도인이나 검사, 주 술사는 없었다.
현정이 생각해 오던 대로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는 뭔가를 움 직여 역시 다른 사람의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파악되지도 않는 뭔 가를 파괴해 죽음에 이르게 하는 기술. 그런 것은 주술이나 법술 도력을 가지고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도 있 을 수 없다고 결론이 내려졌다.
‘그럼 난 뭘 생각했던 거지?’
상당히 마음이 홀가분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있을 수 없다면 정말 마음속으로부터 죄책감이 사라질 지도 몰랐다.
그러다가 현정은 그 남자의 이야기를 들었다. 아주 우연한 기회 였지만 듣게 됐다. 이현암이라는 남자. 검기를 뿜어낼 수 있고 검 을 조종할 수 있다는, 괴물 같은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확인해 보고 싶었다. 듣자 하니 이현암이라는 괴물 같은 남자는 ‘공력’을 발휘한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공력은 흔히 무협 소설 에서 나오는 공력과는 약간 다르다고 했다. 내공이나 공력이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창안한 것은 옛날 중국 무당파의 장삼봉이라는 도인인데, 그의 내공론은 도교적이며 믿기 힘든, 연단술과 비슷한 고대 이론이었다. 그것과 다소 흡사한 점은 있지만, 현암이 수련한 내공공력은 그것과도 또 다르며, 이론은 그럴듯하되 실제 이루기는 어려운 굉장한 제약 조건을 안고 있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하면 될 수 있다고 믿지만 실제로 내공력을 축적한다는 것은 보통 사람에게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 한다. 쉽게 말하면 돌연변이나 초능력자만큼의 확률로 정 말 드물게 일어나는 체질을 타고나야 가능한 것으로 실제로 내공 을 수련할 수 있었던 사람은 역사를 통틀어도 손에 꼽는다 했다. 즉 수천만 분의 일의 체질적 확률을 기본으로 하는 셈인데 더더욱 어려운 점이 또 있다. 실제로 내공 수련을 하려면 다섯 살, 아무리 늦어도 일곱 살 이전부터는 하루의 거의 모든 시간을 수련에 투자 해야 했다. 또 그 수련을 해서 가능성이 있는지 없는지 판별기 까지에도 최소한 오 년에서 십 년 이상이 걸린다고 했다.
그러니까 학교에 다니며 교육을 받아야 할 가장 좋은 시기를 될 지 말지 모를 아주 희박한 가능성만 안은 채 모조리 희생해야 한 다는 소리다. 당연히 현대에 이런 짓을 할 사람이 나올 리 없었다. 그나마도 역사에 꼽힐 만큼밖에 나타나지 않는 회귀 체질이 수반 돼야 한다. 그렇기에 공력을 가진 사람을 찾을 확률은 돌연변이를 넘어 외계인을 찾아낼 수준에 육박하는 것이다.
그런 희미한 확률에 자기 생애를 걸고 달려들 사람이 있으랴. 그것도 어린 시절부터 인생을 버리다시피 매진해 그것을 실행할 사람이 몇이나 되랴. 그런 상황에서 한국에 그런 공력을 가진 사 람이 있다는 것은 정말 기적이라 했다. 물론 듣자 하니 이현암의 공력은 자신이 쌓은 것이 아니고 다른 공력을 쌓은 사람이 물려준 것이라고 했다. 이 이야기를 듣고 현정은 흥분해 도지 무당에게 물어보았는데 도지 무당은 오히려 담담하게 말했다.
“그럴 테지. 내가 아는 바로, 공력을 깊이 수련한 사람은 온세 상 다 합해도 다섯 명을 넘지 않을걸? 우리나라에서 그만큼 깊이 공력을 수련한 사람은 아마 도혜뿐일 거고.”
“도혜요?”
“법명이지. 그냥 그렇게만 알고 있으면 돼. 이제는 공력을 다 내 줬으니 보통 사람만도 못 하게 됐을 테지만…………….”
그게 무슨 의미인지 현정은 제대로 알지 못했지만 어쨌든 현암 이라는 사람을 반드시 만나 보고 싶다는 바람이 강렬했다. 그러나 찾아갈 명분도 없었고 다짜고짜로 칼을 들이밀 수도 없는 일이다. 현정은 어떻게든 강제로 쳐들어가서라도 묻고 싶었다. 정말 그 런 경지가 존재하는 것인지, 검기라는 것이 나오는지. 그것이 정 말 마음 깊숙이 칼처럼 박힌 죄책감을 떨궈 낼 만큼 그녀의 ‘그것’ 과 흡사한지. 애가 탔다. 체면이고 예의고 따질 것 없이 마구잡이 로 쳐들어가거나 납치할까 하는 망상까지 했다.
기회는 갑자기 생겼다. 어느 날 도지 무당이 말했다.
“이번에는 아주 큰일이다. 너도 꼭 같이 가 줘야 되겠구나. 그리고 사람들이 많이 모일 거야.”
“그런가요?”
현정은 아주 오래간만에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따라나섰다. 그리고 목적지인 강화도에서 분명 ‘이현암’이라는 이름의, 얼핏 봐 서는 특별히 느껴지지도 않는 덤덤한 남자를 만날 수 있었다. 일 본 술사도 있었고 다른 신기한 재주를 가진 사람도 많이 모여 있 었으나 현정은 오로지 검기를 뿜어낼 수 있다는 이현암 그 한 사 람에게 집중했다.
그러나 거기서 벌어진 일은 실로 참담하고도 파격적이었다. 반 쯤 이쪽 세계에 몸을 담은 현정도, 현정뿐 아니라 거기에 있는 모 든 사람들이 거의 목숨을 잃을 뻔했다. 그 와중에서도 현정은 일 본에서 왔다는 요염해 보이는 일본 무녀와 이현암을 주목했다. 이 현암은 월향검이라고 불리는 이상한 칼을 날리면서 사용했고, 홍 련이라는 그 일본 무녀는 구마열화검이라는 일본 밀교의 신기한 법기를 사용했다.
신기한 법기라고 호기심을 가진 게 아니라 정말 뭔가가 검에서 뿜어 나오는 모습을 보는 게 흥분됐다. 그것이 검기건 또는 도력 이건 법력이건 뭐건 간에 정말 자기 마음속의 앙금처럼 남아 있는 그것과 닮은 것인지 아닌지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현정의 기대는 무참히 깨졌다. 물론 그 두 가지의 검은 신기하기 이를 데 없었다. 옛 전설이나 괴담에서나 나올 법한 믿 을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더구나 이현암이 간혹 검에 실어 내는 검기는 이 세상 어떤 것도 대적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 나 그럼에도 현정은 크게 실망했다.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검기 조차 무형은 아니었다. 닿는 것은 무엇이든지 잘라 버리는 무서운 것이지만 아무 흔적 없이 상대를 파괴할 수는 없었다.
그러자 오히려 가슴이 더 조여들었다. 주술에서조차 자신이 찾 는 힘은 발견하기 힘들었다.
‘그런 건 없는 건가? 그래. 존재하지 않아. 헛된 고민을 하고 있었던 거야’
그렇게 마음속 앙금을 지워 버릴까도 했다. 하지만 지울 수 없 었다. 현정은 검기라거나 구마열화검, 다른 세상에 속한 것 같은 사람들의 현란한 주술을 보았다. 허나 그것들조차도 무형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저런 것들도 있었어. 분명 없을 거라 믿은 것도 있었어. 그러면 내 ‘그것’이 없다고 단언할 순 없잖아.’
의구심이 새로 싹텄다. 지금은 유형의 주술일지라도 더 단계가 올라가면 정말 무형의 경지에 달하는 것은 아닐까? 어차피 논리 와 상식이 통용되지 않는 세계의 일이다. 비록 현재는 미흡하지만 더 올라가면 그것을 넘어설지 모른다. 그보다 더한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으랴. 자신이 겪었던 일이 실제로 재현되 지 않으리라는 법이 어디 있으랴. 마음의 힘이 휘둘러질 수 있다 면, 마음의 칼이 튀어 나가지 못한다는 법이 어디 있으랴.
그렇게 생각하니, 확인을 위해서라도 이현암과 대련을 계속하 고 싶었다. 물론 이현암의 경지가 자신보다 훨씬 높다는 것도 안 다. 하지만 그도 그런 경지는 아니다. 어떻게 해서든 그 사람의 경 지를 높여 줄 수 있다면, 그래서 마음의 칼이 가능한지 확인할 수만 있다면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 속에서도 현정은 계속 이 현암을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전혀 예기치 못한 일이 생겼다. 자신을 여태까지 북돋워 주고 버팀목이 돼 주었던 스승, 어머니와도 같고 선생님과도 같고 그 모든 것을 합한 존재라고도 할 수 있던 도지 무당이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마음속에서 슬픔이 넘쳐흘렀다. 도지 무당의 죽음은 그녀의 마 음속에 메울 수 없는 큰 구멍을 내 버렸다.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 고 편안하게 눈을 감은 채 누워 있는 도지 무당의 모습을 보아도 실감 나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눈을 떠서 다시 ‘현정아’ 하고 조용 하면서도 단아한 목소리로 불러 줄 것 같았다.
주변에 다른 술사들도 여러 명 목숨을 잃었지만 현정의 눈에는 스승밖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현정을 위로하려 도지 무당에 대해 이것저것 말해 주었다. 스승이 결코 고통스럽지는 않 았을 것이라는 점, 도지 무당이 모든 힘을 다해 자신의 굿의 힘으 로 수많은 해골 악령들을 어느 정도 억누르지 않았더라면 아마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으리라는 것, 도지 무당의 영력은 드러내 놓지 는 않았지만 어쩌면 세상에서 제일 강했을지도 모른다는 것 등. 하지만 그런 것들은 다 상관없었다.
자신의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느꼈던 뭔가를 상실한 기분. 그 것보다도 더 많은 것이 송두리째 빠져나가는 느낌. 자신은 껍데기 만 남고 속이 텅텅 비어 버린 기분. 그러나 그 안에도 흉측한 검은 점 하나는 끝내 남았다. 그런 혼란과 슬픔 속에서도 현정은 끝내 이현암에게 언젠가 다시 만나 검을 겨루어 보자는 말을 하고야 말았으니까.
어떻게 거기서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자신은 그만큼 이기 적이고 나쁜 년이었단 말인가? 어머니와도 같고, 아니 어머니이 자 스승의 죽음을 앞에 놓고도 기껏 한다는 이야기가 자기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 추악한 호기심을 위한 것뿐. 그런 순간에조차 이 기심을 떨쳐 버리지 못한 자신이 추악하고 더럽고 메스껍고 혐오 스러웠다. 정말 뭐라고 할지, 어떻게 지탱해야 할지. 솜이 빠진 인 형같이 껍데기만 남아 악령처럼 부유하다가 재가 돼 어느 순간 훅 흩어질 것 같은 기분. 꺼칠한 혐오감이 마음속의 목소리들을 더 날 세웠다.
‘너는 살인자야’
‘아니야. 아닐 거야.’
‘너는 벌을 받아야 해.’
‘내가 뭘 잘못했다고. 나는 살의도 없었어. 그리고 내가 그렇게 한 게 아니야! 내가 그렇게 했다는 증거도 없고・・・・・・ 그렇게 필사 적으로 찾아도 나오지 않잖아. 검기를 사용하는 사람조차 그런 것 은 꿈도 꿔 본 적 없다고 했어. 그런데 어떻게 나 같은 게…?’
마음속에 뚫린 시커먼 점이 현정에게 말했다.
‘정말 그렇지 않다고 얘기할 수 있어? 그렇게 확신할 수 있어? 정말 네가 죄가 없다면 왜 죄를 벗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 이미 모든 것을 인정하고 있었던 것은 아냐?’
‘아냐! 절대 아냐! 나는 그러지 않았어! 나는 그럴 수도 없어! 그러려 해도 그러지 못한단 말이야! 그런데 왜! 그런데 내가 왜!’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으나 속으로부터 빨려 들 듯 허물어질 것 같았다.
그때 강화도에서 검기 외에 현정의 눈길을 끈 것이 하나 더 있다. 물론 준후라는 소년의 주술이나 주기 선생이라는 사람의 깃발 을 이용한 이상한 주술, 신을 몸속에 마음대로 불러서 강신시켜 빙의돼 부리는 주술 등 신기한 것이 많았으나 정말로 현정의 눈길 을 끈 것은 하나 더 있었다.
바로 박 신부라고 불리는 사람의 오라. 형체도 없고 기운도 없 고 다만 경우에 따라서 영력이 약간 있는 사람들에게만 환하게 그 냥 빛처럼 보이는 것. 아무런 느낌도 없지만 그것은 수백 마리 악 령의 공격을 혼자 버텨 내고 모든 것을 튕겨 내 버릴 만큼 강했다. 아주 부드러우면서도 느껴지지 않는 보이지 않으면서도 매우 강 한 힘. 그렇다면 그것이야말로 오히려 현정이 느꼈던 마음의 칼과 더 비슷한 것은 아닐까?
현정은 강화도 사건 이후 한참이 지나서도 그 생각을 떨쳐 버 리지 못했다. 결국 전에 만났던 박 신부에게 연락을 했다. 제발 한 번만 만나 달라고 제발 고민을 들어 달라고, 처음에는 거절당하 면 엎드려서라도 간청할 생각이었는데 박 신부는 도리어 저쪽이 무슨 잘못이라도 한 양 급히 정색을 하고 달려왔다. 무엇이든 도움이 된다면 할 수 있는 대로 할 테니 이야기해 보라고 그쪽에서 간청하듯이 말했다. 눈물이 나도록 고마웠지만 일단 자신의 의문 을 푸는 것이 궁금했다.
절대 다시는 입에 올리고 싶지도 않았던 자신의 과거, 품고 있 는 의문, 마음의 칼 이야기를 낱낱이 털어놓았다. 처음에는 조심 스레 상황을 봐가면서 적당히 마음속 깊은 곳은 감추려 했다. 그 러나 박 신부의 진지한 표정을 앞에 두고는 그러지 못했다. 현정 은 펑펑 울기까지 하면서 박 신부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게 됐다. 도지 무당의 죽음 앞에서조차 이기심을 버리지 못한 부끄러움과 후회까지도 창피하고 부끄러운 마음도 없지 않았으나 이상하게 도 이 나이 든 신부 이제는 더 이상 정식 사제가 아니라고 했지 만의 조금도 흔들림 없는 신실한 맑은 분 앞에서는 조금도 거 짓을 말할 수 없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나자 박 신부는 고개를 저었다.
*현정 씨가 고민하시는 것은 알겠습니다만 너무 심하게 고민하 시는 것 같습니다. 절대로 그런 경지는 없습니다.”
“정말 없는 걸까요?”
“글쎄요. 정말 없다고 단언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인간이라 면 절대 그런 능력을 보일 수 없을 겁니다. 진실로 그런 정도가 된 다면 그건 정말 사람의 경지를 한참 뛰어넘은 게 되겠지요.”
“하지만요…….”
“사람이 무엇 때문에 죽는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글쎄요.”
“현정 씨가 분명히 말씀하셨죠. 자기 마음속에 있는 보이지도 않고 느껴지지도 않는 뭔가가 그때 빠져나온 것 같았고, 그 죽임 을 당한 남자도 보이지도 않고 느껴지지도 않는 부분을 파괴당해 서 죽음에 이른 것 같다고요. 주술과 생사와 영혼을 연구한 저 같 은 사람들은 물론 보통 사람들보다 그런 면에 대해 조금은 더 알 고, 나름의 견해를 가지고 있지요. 하지만 우리조차도 사실이 뭔 지는 알지 못합니다.”
“정말인가요? 하지만 신부님 같은 능력자들은..
“남보다 조금 더 알거나, 안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능력을 쓰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진실을 알지는 못해요. 예를 들어 볼까요? 우린 영혼의 존재를 믿고, 어느 정도 그에 대해서도 알죠. 그렇다고 실제로 지옥이나 사후 세계가 있는지는 정확히 몰 라요. 하물며 신이 존재하는지조차 확답을 내리지 못합니다. 죽음 역시 마찬가지예요. 사람의 죽음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은 경험적 인 것뿐이지요. 필수적인 장기를 손상당하면 사람은 죽습니다. 그 건 일반적인 상식이지요. 그런데 장기의 손상이 없어도 죽는 사람 이 많아요. 그렇다면 죽음이 뭘까요? 생명이 끊어지는 시점이 죽 음이죠. 하지만 그건 상태를 말하는 거고, 죽음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도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현정 씨, 무엇이 사람을 죽입니까? 그리고 무엇이 사람을 살아 있게 합니까?”
“제가 영혼을 파괴한 건 아닐까요?”
“글쎄요. 영혼이라는 것조차 보통 사람은 이해조차 못 하죠. 그 래서 사람의 생의 근원을 영혼이라고 비유하고는 합니다. 하지만 그 영혼이라는 것 역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한데 붙여 놓은 집합물 같은 거예요. 영혼이라고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개념조차 실제로는 엄청나게 많고 다양합니다. 이미 우리들은 그 정도는 알 고 있지 않습니까? 실제 사람의 영혼, 영혼의 한 갈래, 영혼의 부 품, 염체, 사님, 악의, 살의, 정령, 악마…………… 우리들조차도 그것이 얼마나 다양한 형태를 가지고 있고 얼마나 다양하게 나타날지 모 릅니다. 다만 어떻게든 불러야 하니까, 다뤄야 하니까 나름대로 엉성한 일반화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 본질이 뭔지는 우리도 모 르지요. 영원히 모를 수도 있고요.”
“하지만 제 문제는 영혼 같은 것이 아니에요. 내가 그 남자를 죽 인 건지 아닌지…..”
“흠…… 현정 씨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물론 저도 단언할 수는 없어요. 현정 씨가 진짜 그 남자를 죽인 것인지 아닌지는 저도 알 수 없고, 같은 말밖에 드리지 못하겠습니다. 다 만 그때 현정 씨에게 살의가 있었다고 생각할 수 없고, 엄청난 보 이지 않는 힘이 발출됐다고도 절대 믿지 못합니다.”
“단정하실 수 있나요?”
박신부는 조금 괴로운 듯 말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으리라는 단정도 드릴 수 없군요.”
“제가 괴로워하는 건 바로 그건데요.”
“그러니까요. 정말 죄송스러울 뿐이군요.”
현정은 몹시 실망했다.
‘이대로 영원히 지옥 끝까지 이 번민을 지니고 가야 하나? 박신부 정도 되는 사람도 모른다면……………. 정말 방법이 없는 건가? 그때 박신부가 다른 말을 했다.
“좀 우습게 들릴지 모르지만 현정 씨, ‘슈뢰딩거의 고양이’라는 것 아십니까?”
“그게 뭐죠?”
“그게 사실은 저도 잘 모릅니다만, 현암 군이 공대 출신이라 언젠가 한 번 했던 이야기인데 무슨 양자 역학과 관련된 이야기라고 하더군요.”
“그런 과학적인 건 하나도 몰라요.”
“저도 잘은 모릅니다.”
박신부는 부끄러운 듯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그런데 그게…………. 나도 모르게 현정 씨 이야기를 듣다 보니 그 경우가 현정 씨 고민하고 좀 흡사한 것 같군요.”
“그게 뭔데요?”
“슈뢰딩거라는 물리학자가 공개 석상에서 다른 사람과 양자 역 학에 관해 토의하다가 나온 비유였대요. 참 우스운 일이 슈뢰딩거 자신은 그 이야기는 그 자리에서 급하게 지어낸 잘못된 비유일 뿐 이라 했다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슈뢰딩거 자신의 업적보다 이고 양이 사례가 훨씬 유명하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게 참……..”
“그게 어떤 내용이죠?”
“그게 제가 설명할 만한 말재주가 없는 것 같아서. 현정 씨가 직접 보시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글쎄요. 그렇다면 한번 찾아볼게요.”
박 신부와 현정의 대화는 대충 그렇게 끝났다. 박 신부는 전혀 소용이 없을지도 모른다고 미안해하면서도 현정에게 말했다.
“그것을 보시면 여러 가지. 물론 억측이긴 합니다만, 여러 가지 가 해결될 수도 있을 거예요. 꼭 답을 내야만 하는 것이 진실은 아 니니까요. 물론 그런 식으로 보라고 나온 이론이나 비유는 아닙니 다만 뭐 생각하기 나름이지 않습니까? 현정 씨도 부디 마음의 억 압에서 어떻게든 벗어나시길. 그 비유가 도움이 될지 안 될지는 정말 모르겠으니 너무 기대는 하지 말아 주시고요. 허허허…….”
그러면서 박 신부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정은 박 신부와 헤어진 직후 곧장 서점에 달려가 슈뢰딩거와 관련된 책을 찾았다. 그러다 보니 양자 역학이라는 자신은 여태 까지 전혀 관심도 흥미도 없었던 종류의 책들도 사게 됐다. 현정 의 이해도가 부족했기 때문에 더 많은 책이 필요했다. 사전 지식 도 전혀 없었고 난해한 분야라 처음에는 몹시 이해하기 힘들었다. 어쨌든 책을 읽다 보니 몇 가지 사실들을 알게 됐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슈뢰딩거라는 한 물리 학자가 제안한 사고 실험에서 나왔다. 다른 물리학자 막스 보른이 자기가 만든 파동 함수가 확률을 뜻한다고 주장하자 슈뢰딩거가 이에 예시를 들어 반박하며 나온, 머릿속으로 이뤄진 사고 실험이 지 실제 수행된 것은 아니다. 허나 여기서의 역설이 기묘한 인상 을 주었기에 대중적으로 유명해진 것이다. 그 사고 실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밀폐된 상자 안에 고양이와 독가스가 담긴 병, 병에 연결된 작은 장치가 있다. 독가스 병에 연결된 장 치에는 자연 붕괴되는 입자 하나와 가이거 계수기, 그리고 계수 기와 연결된 망치가 있다. 가이거 계수기 위에 놓인 입자는 한시 간에 오십 퍼센트의 확률로 핵붕괴 해 알파선을 방사하는 성질 을 지니고 있다. 가이거 계수기는 방사선을 감지하므로 입자가 붕괴해 알파선이 나오면 망치를 작동시킨다. 그러면 망치가 병을 깨뜨리므로 입자가 핵붕괴 하면 독가스가 새어 나와 고양이는 죽게 된다. 입자가 핵붕괴 하지 않을 확률도 오십 퍼센트이므로 이때는 장치가 작동하지 않게 되고 고양이는 죽지 않는다.
이럴 경우 한 시간이 지났을 때 고양이는 어떤 상태로 존재하는가?
양자 역학의 파동함수를 적용해 보면 ‘고양이는 반은 죽어 있 고 반은 살아 있다’는 억지 유추를 하게 된다는 데서 이 유명한 역설이 도출된 것이다. 허나 슈뢰딩거는 양자 역학을 설명하기보다는 이론을 부정하기 위해 ‘죽었으면 죽고 살면 살았지. 어떻게 이런 것이 존재할 수 있겠느냐’라고 예시를 들어 반박한 것이다.
물론 이 사고 실험에 대한 상식적인 답은 죽었거나 살았거나 둘 중 하나다. 하지만 양자 역학 이론파인 코펜하겐 해석에서는 이 상태를 다른 방향으로 해석한다. 상자가 외부와 완전 차단돼 있 으므로 외부에서 관측하기 전까지 상자 안의 상태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결국 외부적 관찰자의 입장에서 이 고양이의 상태 를 함수로 예측하자면, 그것은 죽음과 살아 있음이 중첩된 이상한 상태에 놓여 있다가, 관측에 의해 죽음과 살아 있음이 확정된다는 답을 내놓는 것이다. 그러나 슈뢰딩거는 특히 코펜하겐 해석에 있 어서 무엇보다 과학적 사실이 관측과 무관한 결정론적인 것 이 아닌 관측에 의해 확률적으로 결정된다는 점에 불만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 양자 역학적인 특성 이론을 거시적인 관점으 로 확대한다면 이런 역설이 생긴다고 예시를 든 것이다.
물론 ‘반은 죽고 반은 살아 있는 좀비 같은 상태의 고양이’는 하 나의 그릇된 예시이며, 양자 역학의 수학적 특성을 무모하게 대입한 하나의 해프닝일 뿐이다. 실제 코펜하겐 학파의 해석에 의 하면 ‘양자적 결풀림’, 즉 고양이라는 존재는 많은 수의 양자로 이 루어져 상호 작용을 하게 되므로 실제로는 반은 죽고 산 상태가 아닌 하나의 명확한 상태를 가지는 것이라 설명하고 있다. 반은 죽고 반은 산 상태는 외부적 관찰자의 시점에서만 그럴 뿐이지, 상자를 여는 순간 고양이의 상태는 죽은 것과 산 것 둘 중의 하나로 명쾌하게 확인된다. 많은 일반인이 생각하는 ‘좀비 고양이’는 이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부족한 지식수준으로 마음대로 망 상해 빚어낸 결과물일 뿐이다. 이 문제를 놓고 직접 토론한 보른 이나 슈뢰딩거도 실제 좀비 고양이 따위는 연상도 하지 않았을 것 이다. 그러나 제일 관건이 된 파동 함수와는 관련조차 없는 좀비 고양이가 오히려 대중적으로 유행해 본질과는 전혀 다른 망상이 실제 이론처럼 판치는 지경에 이르렀다. 물론 이 해석 말고 평행 우주론에 입각한 다른 해석도 있다. 하지만 현정은 거기까지 파고 들 생각은 없었다. 파고들자면 한이 없었으며, 물리학적 소양이나 자질이 있지도 않다. 사실 책을 열심히 읽었어도 파동 함수는 양자적 결풀림 같은 말은 별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다만 현정의 마 음속에는 ‘관찰’이라는 단어가 깊이 파고들었다.
고양이는 산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죽은 것도 아니다.
어떤 상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상자를 여는 순간 결정된다.
나는 죄가 없다.
그렇다고 무죄라 할 수도 없다.
어느 것이 맞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내가 확신하는 순간 결정된다.
내가 관찰자다. 내가 봐야, 내가 확신해야 내 죄도 비로소 생긴 다. 양자 역학이니 파동 함수는 이제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내가 관 찰자고, 내가 내 죄를 만든다. 혹은 없앤다. 이때껏 내가 죄가 있나없나. 밖으로부터 찾으려는 데 모든 시간을 보내 왔다. 그 모든 게 잘못이었는지 모른다. 적어도 이 경우는 마음의 칼의 경우는.
더구나 단순한 죄의 유무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사람의 목 숨은 어디서 생기고 어디서 끝날까. 누군가가 돌아봐 주는 데서 생겨나고, 누군가가 외면하는 것에서 죽는 것은 아닐까. 지금까지 는 그런 능력이 없었다 해도, 자신이 마음의 칼을 움직일 수 있다. 면? 보이지도 흔적도 남지 않게 사람을 죽일 수 있는 힘이 정말 있다면? 나는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까? 그것을 통제할 마음의 힘 이 있을까? 자신 없었다.
허탈했다. 생각해 보니 자신은 모든 것이 어중간했다. 반은 보 통 사람들의 세계에 다리를 걸쳐 놓고 반은 주술과 혼령과 악령이 난무하는 다른 세계에 걸치고 있었다. 나쁘게 살아온 것 같지도 않지만 착하게 살았다고 자신할 수도 없다. 불행하다 절망한 적은 드물지만 행복하다고 감격한 적도 없다.
더더군다나 가장 큰 문제는 그래도 남는다. 나는 죄가 있나. 아 니면 없나. 거기서 새끼쳐 나온 더 큰 문제. 그게 만약 내가 사람 을 죽인 쪽으로 결정지어질 경우, 나는 그 힘을 어떻게 할 것인가. 쓸 것인가 말 것인가. 통제할 수 있을까 없을 것인가……………
‘끝이 없어…….’
결국 해답은 하나뿐이었다. 관찰, 자기가 죄가 있는지 혹은 없 는지, 자신이 정말 뭔가 양자 역학적으로라도 설명될 수 있는 이 상한 것을 발현해 그 남자를 죽였는지 또는 죽이지 않았는지 아무도 모른다. 자기 자신도 모른다. 그러나 정말 그것을 정의하는 것 은 제대로 된 행위 자체가 아니지 않을까? 단언을 내리려고 열리 지 않는 상자를 젖히려고만 한 자신에게 문제가 있던 게 아닐까. 양자 역학은 더 이상 상관없다. 이론적으로 맞거나 틀리는 것도 상관없다. 이것은 나만의 이론이고, 나만이 답을 낼 수 있다. 관찰 자는 나뿐이니까.
나는 죄가 있다. 없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죄가 없다. 있다고도 할 수 없다.
관찰에 의해서만 결정될 문제라면, 그리고 외부적 이론으로 명 백한 답을 도출할 수 없다면 끝까지 파헤치는 것만이 정의이고 현 명일까? 상자 속의 고양이의 상태가 상자를 여는 순간, 그 의지와 관찰에 의해 분명해진다면, 그 행동이 상자 속 고양이를 죽이고 살리는 결과를 보게 되는 거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현정은 그때 마음을 굳혔다.
‘나는 열지 않겠어.’
열지 않는 것이다. 상자는 절대 열지 않으리라. 고양이의 슬픈 미래를 보느니, 또는 좋은 미래만을 연상하며 견딜 수 없는 슬픔 을 감내하느니, 그 상자를 영원히 봉인하고 영원히 관찰하지 않 는 편이 현명한 것 아닐까. 이건 회피도 아니다. 벌을 받지 않겠다 는 얘기도 아니다. 하지만 죄가 있다는 얘기도 아니다. 그렇다고 죄가 없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죄가 없다고 단언하고 행복하게 살 수도 없다. 모든 것을 턱없이 짊어져서 자책감에 빠지고 싶지도 않다. 벌을 받고 싶지도 않고 벌을 면하고 싶지도 않다.
‘상자 속으로……………?’
열지 않는다. 반대로 나를 상자에 가둔다. 절대 관찰할 수 없도 록, 또 다른 상자로 자신을 가둔다. 현정이 택한 결과는 결국 이것 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동떨어진 곳, 세상 속에 있으면서도 가장 동떨어지고 세상이라고 할 수 있는 것과 가장 가까우면서 먼 곳 불도 수행자들의 세계.
결코 회피도 아니고 속죄도 아니다. 나름의 수행하는 것도 의미 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현정이 원하던 바가 아니다. 현정이 이런 식으로 인생 전체를 수행해서 살겠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도지 무당의 말처럼 항상 보통 사람으로 행복하게 살고 싶 었다. 그렇지만 그럴 수 없었다. 마음속의 앙금을, 상자를 열어서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을, 고양이가 살아 있는지 죽어 있는지 확인 하고 싶은 마음을 자신은 이겨 낼 자신이 없었다.
상자를 봉인한다. 모든 것의 도움을 받아 내가 조금 큰 다른 상 자로 들어간다. 벌을 받는 것이 아니다. 회피하는 것도 아니다. 나 는 죄가 있지도 않아. 없지도 않아. 내 마음속의 칼이 진실일 수도 있어. 그렇다면 봉인해 버리는 것이 맞지.
그 칼이 정말 위험한 것인지, 정말 사람이 무엇 때문에 죽고 무 엇 때문에 사는지 꼭 열어 보고 확인해 봐야만 할까. 이건 결 코 회피가 아니다.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할 거야. 그것 밖에 방법이 없어.
현정의 머리는 거의 다 깎여 남은 몇 터럭이 간헐적으로 잘리는 촉감이 느껴진다. 항상 머리를 덮고 있던 편안하면서도 따스한 머리털의 감촉은 앞으로 더 이상 느낄 수 없다. 차갑고 황량하지 만 변화했다는 느낌이 온다. 눈은 감고 있으나 이제부터는 세상이 전부 변할 것 같다. 실제는 자신만이 변한 것일 테지만 모든 세상 이 변했다. 적어도 자신에게 있어서는 자신이 관찰자니까. 또 다 른 상자의 뚜껑을 닫고 다시는 열지 않을 테니까. 혹시라도 불도 의 가르침에서 뭔가를 깨달으면, 이 상자를 열 수 있는 날도 올까? 그러다가 속으로만 살짝 웃는다. 비릿하게 조소를 담아.
‘역시 나는 어중간해. 뭐, 어떻게든 되겠지.’
될 대로 되라고 방치하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일로정진(精 進)할 각오가 있는 것도 아니다. 마음이 후련하지는 않지만 암담 하지도 않다. 특별히 기쁘지도 않지만 슬프지도 않다. 가슴 아프 지만 심하지도 않다. 이 정도는 버틸 수 있다.
죄가 있으면 어떻고 아니면 또 어떤가. 살았으면 어떻고 아니면 또 어떤가. 도피하기 위해 머리를 깎으면 어떻고, 또 다른 경지를 깨우쳐 이 모든 것을 이겨내 보려 머리를 깎은 거면 또 어떤가.
“이제부터 너의 법명은 무련(無)이다.”
무련. 자신의 새 이름이 내려졌다. 속세와의 완전한 결별을 뜻 하는 이름이다. 또 다른 상자의 뚜껑이 닫힌다. 현정은 다시 한번 조용히 속으로 생각한다.
‘나는 현명한 선택을 했어. 내 일생에 한 선택 중에 제일 잘한 것일지도 몰라.’
상자는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비구니 무련이 된 그녀의 주변을 조용히 감싸 주던 불경과 목탁 소리도 어느 새 사라졌다. 비구니의 생활은 항상 조용하다던데, 앞으로도 영원히 조용하기를
이제 더 이상 무련의 눈에서는 눈물도 나지 않았다. 저만치 오 후 햇살이 비치고 선방 귀퉁이에 매달린 풍경이 딸랑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참 한적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