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외전 2 : 죽었다고 지옥을 아는가? [퇴마록(세계편) ‘아르타로트의 약속’ 직후] : 11화 – 그녀의 진심
그녀의 진심
출입구를 차단한 방호벽은 완전히 밀폐된 형태는 아니었다. 오 른쪽 구석에 사람 하나 정도가 간신히 들어갈 수 있을 만한 작은 문이 달려 있었다. 리볼버를 들고 문 바로 옆에 몸을 붙인 더글러 스는 뒤에 따라온 승희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냥 들어가면 위험하겠소?”
승희는 잠시 눈을 감고 관자놀이에 손가락을 대 투시를 행하더 니 눈도 뜨지 않은 채 말했다.
“문 건너편에서 여럿이 기다리는 모양인데요? 물론 총도 들고 있는 것 같고.”
작은 문을 통해 들어가면 안에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사격해 들어온 사람을 벌집으로 만들려는 수작이었다. 더글러스 는 점점 불안해졌다.
“어떻게 하지? 아무래도 지원을 불러야………….”
“그럴 필요 없어요.”
현암이 태연히 말하면서 앞으로 나섰다. 오른손에 공력을 집중 시키며 손바닥을 활짝 펴고는 마치 누구의 뺨이라도 치듯 크게 손 을 휘둘러 철제 방호벽을 후려쳤다. 퉁 하는 육중한 굉음이 울리 며 폭 오 미터, 높이 삼 미터는 돼 보이는 거대한 철판이 움푹 찌 그러면서 안쪽을 향해 단박에 넘어갔다.
원래 입구에 설치돼 있던 유리문도 비스킷처럼 깨져 나갔고 방호벽 문을 노리고 바로 뒤에서 대기하던 자들은 그대로 철제 구조 물에 눌려 버렸다. 이윽고 입구 로비 쪽을 훤하게 드러내며 방호 벽이 완전히 넘어지고 나자 그 밑에 깔린 자들의 신음이 가냘프게 새어 나왔다. 현암이 한 번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 뒤를 돌아보자 이반 교수가 아예 통로처럼 훤하게 열린 금속 구조물을 밟으며 앞 장섰다.
“좀 아프겠군. 몇 톤은 되겠지만 여럿이 같이 깔렸으니 하중이 분산돼 죽지는 않을 거요.”
현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이반 교수의 뒤를 바로 따라 뚜 벅뚜벅 걸어갔고 승희는 그래도 조금 마음이 켕기는 듯 웃으며 혼 잣말했다.
“밟아서 미안해요.”
더글러스는 멍하니 보다가 한번 고개를 세차게 휘저어 정신을 차린 후 곧 그들의 뒤를 따랐다.
“이게 뭐야? 이놈들 뭐야? 무슨 짓을 한 거지?”
CCTV를 통해서 출입문의 상황을 보던 빌은 대경실색했다. 침 입자가 있다고는 들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주차장에서 부 하들이 정체불명의 화력에 밀렸지만 그럴 수도 있다 생각했다. 허 나 어지간한 차로 들이받아도 끄떡하지 않을 방탄 철문이 한 방에 허물어져서 부하들을 깔아뭉개는 장면은 충격적이었다. 바깥에 서 무슨 짓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상대를 보니 제복 입은 경찰이나 스와트 팀도 군대도 아니었다. 민간인 복장으로 태연하게 들어오는 네 사람을 보자 빌은 속이 뒤집혔다.
“저것들 뭐야?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상황 아는 놈 있어?!”
빌의 호출을 받고 주변에 서 있던 보좌관 격 부하는 목만 움츠 릴 뿐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도 어지간히 기가 질린 것 같았다. 빌은 이를 갈며 말했다.
“전부 자리에 배치해! 다 쏴 죽여 버려! 무슨 수단을 쓰든 다 죽이란 말이야.”
부하는 고개만 끄덕여 보이고 총총히 밖으로 나섰다. 빌은 기가 막혔다.
“겨우 넷인데, 그것도 총 든 사람은 둘뿐인데 이런 짓을………….”
믿어지지 않아서 빌은 다시 한번 CCTV를 통해 그들의 얼굴 을 자세히 파악하려고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CCTV 스크린에 은 빛 섬광이 한 번 번쩍하더니 바로 먹통이 돼 버렸다. 총성이 들린 것도 아니고 이쪽을 쳐다보는 사람도 없었는데 어떻게 그랬는지 알 수 없었다. 더군다나 하나뿐이 아니고 출입구 쪽에 배치해 둔 CCTV 모두가 보이지 않는 뭔가에 맞은 것처럼 연속적으로 꺼져 나갔다.
‘보통 놈들이 아니야’
빌은 혼자서 생각했다. 이마에서 땀이 흘렀다.
‘아직 부하는 많고 무기도 충분해. 그래도 뭔가 수를 써야 할 것 같아’
빌이 결심한 듯 인상을 쓰며 이마에 주름을 깊게 만들었다. 빌의 오른손이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
현암이 월향검을 받았다. 월향검은 이미 로비 부근에 장치된 모든 CCTV를 부순 후였다. 현암은 사람을 상대하는 일에 월향검 을 쓰고 싶지 않았고 월향검이 총에 맞을까 걱정스러웠다. 또 든 든한 화력을 지닌 이반 교수가 함께 있고 전혀 밀리지 않으니 아 직은 이런 용도에만 월향을 사용하고 있었다. 건물 로비에는 출입 구들이 여럿 있었고 엘리베이터도 두 대나 있었다. 어디로 가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이반 교수가 돌아보자 더글러스가 짧게 말 했다.
“나도 이 건물 내부는 몰라요. 빌의 소굴인데 그런 걸 누가 알겠소.”
현암은 말없이 승희 쪽을 돌아보았다. 승희는 눈을 감고 관자놀 이에 손가락을 올렸다. 곧이어 승희가 짧게 말했다.
“왼쪽 두 번째 문.”
더글러스가 그쪽으로 걸어가려고 했는데 승희는 곧바로 말했다.
“누가 나와요.”
이반 교수가 철컥하고 손에 들고 있던 총을 문 쪽으로 향했다. 곧이어 안에서 문을 걷어차며 빌의 부하 하나가 M4 카빈을 들고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가 방아쇠를 당기는 것보다 이반 교수가 벨 지움 컨바인을 발사하는 것이 더 빨랐다. 기세 좋게 뛰어나오던 빌의 부하는 문을 다 나서지도 못한 채 덤덤탄에 맞고 도로 안쪽으로 처박혀 쓰러졌다. 쉴 틈도 없이 승희가 다시 외쳤다.
“오른쪽. 세 번째 문.”
이번에는 더글러스가 주운 리볼버를 그쪽으로 겨누었다. 무서 운 기세로 샷건을 든 남자가 튀어나왔다. 허나 미리 대기하던 더 글러스는 곧장 남자의 다리에 총을 발사했다. 남자는 주저앉아 다 리를 움켜쥐고 신음했다. 더글러스는 남자의 샷건까지 주워 들었 다. 이번에는 승희가 이야기하기도 전에 다른 쪽 문이 쾅 소리를 내며 열리고 남자 두 명이 튀어나왔다. 더글러스는 조금도 지체하 지 않고 손에 들었던 리볼버와 막 왼손으로 주워 든 샷건까지 연 속으로 발사했고, 막 튀어나온 두 사람은 다리 쪽을 맞고 앞서 튀 어나온 자와 똑같은 신세가 됐다. 그때 승희가 소리쳤다. “정면! 많아! 다섯 이상!”
가볍게 생각하기에는 적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그러나 더글러 스가 총을 난사한다면 사망자가 나올 수도 있었다.
‘할 수 없군.’
현암은 문을 향해 공력을 집중하며 왼손을 내뻗었다. 이반 교수 와 더글러스도 문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지만 현암의 왼 손목에 있 던 월향이 은색의 선을 그리며 문 쪽으로 날아가 문에 자그마한 구멍을 내며 뚫고 들어갔다. 그러더니 문 너머에서 빌의 부하들이 나오는 대신 그들이 내는 비명이 들려왔다.
“이게 뭐야!”
“으악!”
“억!”
몇 발의 총성도 울려 퍼졌지만 곧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러는 사이 현암은 서두르지 않고 뚜벅뚜벅 천천히 걸어서 그 문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안에서 나던 총성이 멎은 후에 현암은 가볍게 문을 열었다.
현암이 문을 열자마자 허공을 휘젓고 있던 월향은 현암의 왼손 으로 돌아왔다. 현암의 앞에는 이미 반으로 잘렸거나 여기저기 토 막이 나 버린 총의 잔해만이 너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아무도 상 처를 입지는 않았지만 안에 있던 빌의 부하들은 죄다 얼이 빠져 있었다. 뭔지 구별할 수도 없는 번뜩거리는 은색 빛이 날아 들어 와 춤추며 모두가 들고 있던 총을 가차 없이 수수깡처럼 베어 못 쓰게 만들었으니까. 순간적으로 총을 몇 발 발사한 자도 있었지만 총이 부서져 버리는 바람에 기겁하며 땅에 내던질 수밖에 없었다. 현암은 굳은 표정으로 빌의 부하들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그중 그나마 정신을 차리고 있던 흑인 한 명이 부서진 총을 야구 방망 이처럼 휘둘러 현암을 내리치려 했다. 하지만 현암의 오른손이 총 개머리판 부분을 잡자 그 남자는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했다. 이 허공에 고정된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곧이어 현암이 오른손 에 약간 공력을 주어 뒤로 밀었다. 겉보기엔 결코 힘을 많이 쓰는 것 같지 않았지만 흑인은 비명과 함께 뒤로 날아가 벽에 머리를 부딪친 다음 다시 앞으로 쓰러져 버렸다. 나머지 네 사람은 주춤대며 물러서려 했지만 그보다 빨리 현암이 한 사람의 멱살을 잡아 문 쪽으로 집어 던졌다. 더글러스는 문 안으로 들어서려다 안에서 사람 하나가 포대 자루처럼 날아와 땅바닥에 처박히는 것을 보고 움찔하며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현암의 그다음 상대는 체구가 크고 수염을 기른, 딱 봐도 터프 해 보이는 대머리 거한이었다. 현암의 괴력에 놀라 조금 물러서던 대머리 거한은 손으로 벽을 휘젓다가 우연히 그 근방에 놓여 있던 그라인더를 잡았다. 거한이 급히 스위치를 넣자 마침 전원에 연결 돼 있던 그라인더가 무섭게 돌아갔다. 거한은 욕설과 함께 그라인 더를 휘두르며 현암에게 달려들었다. 무섭게 회전하는 그라인더 날이 현암의 이마께를 노리고 날아 들어왔다. 하지만 현암은 담담 하게 오른손을 뻗어 그라인더 날을 맨손으로 덜컥 잡았다. 현암의 손에 잡혀 잠시 끼익하고 불꽃이 튀기던 그라인더 날은 곧 거짓말 처럼 정지해 버렸다. 그것을 보고 대머리 거한의 눈이 커졌다. “말도 안 돼!”
곧이어 현암이 오른손에 힘을 주자 세라믹으로 된 그라인더 날 이 깨져 나가며 그라인더의 전면 금속 부분이 깡통처럼 현암의 손 모양대로 찌그러져 버렸다. 대머리 거한이 주춤하며 뒤로 허둥지 둥 물러서는데 마침 다시 문 쪽으로 들어선 이반 교수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벨지움 컨바인을 발사했다. 역시 덤덤탄이라 피가 뒤진 않았지만 대머리 거한은 고무탄의 충격에 밀려 뒤로 붕 뜨듯 넘어지며 탄에 얻어맞은 배를 움켜잡고 신음했다. 그사이 남아 있던 두 명은 재빨리 다음 문을 열고 도망친 상태였다. 현암이 그들의 뒤를 쫓으려는 듯 걸음을 옮기자 더글러스가 현암을 제지했다.
“저런 녀석들보다 빌을 잡는 게 우선이오.”
그러면서 더글러스는 잠시 머리를 굴렸다. 빌은 이 건물의 보스 다. 보스라고 하면 전망이 좋고 환기가 잘 되는 제일 높은 층에 있 을 가능성이 제일 높았다.
“위층으로 가봅시다. 우선 엘리베이터를 점거해야 해요.”
더글러스는 총알을 다 쓴 리볼버를 그냥 버리고, 샷건을 철컥 장전하며 앞장섰다. 현암도 잔챙이들을 쫓는 대신 더글러스의 뒤 를 따랐고 승희가 그 뒤를 따르며 푸념했다.
“아, 총소리 때문에 정신 집중이 어려워 빌이 위쪽에 있는 건 맞는 것 같은데…”
이반 교수는 후미에 남아 혹시라도 또 튀어나올지 모를 빌의 부 하들을 경계하며 뒤를 엄호했다.
CCTV를 들여다보던 빌의 안색이 변했다. 이미 건물 맨 위인 십이 층 빌의 방은 어두운 커튼이 드리워져 있고 빌의 손에는 아 이린의 브로치가 들려 있었다. 어둠 속에서는 CCTV 화면들만이 빛을 발했지만 그나마도 반 이상은 꺼져서 무의미하고 혼돈스러 운 화면이었다. 허나 빌은 한 동양인 남자의 무지막지한 힘을 아 직 망가지지 않은 CCTV 화면으로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빌의 뒤 에는 이마에 구멍이 뚫리고 눈이 희게 뒤집힌 아이린의 유령이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빌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저것들은 사람도 아니야. 아이린! 저들을 막아. 어떻게든 막으라고!”
빌의 말을 듣자 아이린은 잠시 서서히 고개를 돌려 빌 쪽을 바 라보았다. 항상 봐오고 매일 부리던 아이린이었지만 그녀의 켕한 눈망울이 자신을 향하자 빌은 흠칫했다.
“말 못 알아듣겠어? 날 보지 말고 저놈들을 막아!”
빌이 땀을 흘리며 언성을 높이자 아이린은 서서히 공기 속으로 스며들 듯이 사라졌다. 빌은 한숨을 내쉬고 다시 호출용 인터폰 단추를 눌렀다. 반대편에서 부하의 목소리가 “네, 보스” 하고 들리 자 빌은 높은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나도 지하실로 갈 거니까 다들 내려가 저놈들은 내가 어떻게 든 알아서 해 볼 테니 일단 피해, 그리고 내가 내려가면 바로 엘리 베이터도 차단하고 방화용 격벽들도 전부 내릴 수 있게 준비하고 있어. 알았지?”
그렇게 외치고는 대답도 듣기 전에 빌은 서랍에서 자동 권총 두 자루를 꺼내 허리춤에 대충 찔러 넣고는 금고를 열었다. 금고 안 에는 큼지막한 가방 하나와 돈다발, 서류 뭉치가 잔뜩 들어 있었 다. 빌은 떨리는 손으로 급히 돈과 서류 뭉치를 닥치는 대로 쑤셔 넣은 다음 가방을 둘러매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
로비로 나온 더글러스는 초조하게 엘리베이터 버튼을 연속으로 눌렀다. 엘리베이터들은 이미 다른 층에서 여러 번 눌렀는지 제대 로 작동되지 않았다.
“제기랄, 제기랄. 빨리 좀 내려와!”
더글러스가 초조하게 외치며 엘리베이터 문 위쪽에 있는 충수 표시판을 보았다. 엘리베이터 하나는 이미 일 층을 통과해서 지하 로 내려가고 있었고 또 하나의 엘리베이터는 계속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올라가던 엘리베이터가 십이 층에 멈추는 것을 본 더글러 스가 급히 말했다.
“이거 같소. 아마 여기 빌이 탈 것 같소.”
“그런가요?”
승희가 눈을 감고 관자놀이에 손가락을 얹으며 말했다.
“가만 보자……………. 그래, 빌 맞는 것 같은데. 어? 그런데….”
승희가 말끝을 흐리자 현암이 돌아보았다. 승희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 생각도 참 번잡한 사람일세. 뭔가 꾸미고 있는 것 같긴 한 데. 어? 잠깐.”
승희가 주춤하자 현암이 약간 눈을 치떴다. 그리고 동시에 이반 교수도 약간 굳은 얼굴이 돼 승희 쪽을 쳐다보았다. 승희의 표정 이 심상치 않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이린이 우릴 막을 거라 생각하는데?”
더글러스가 급히 말했다.
“빌이 아이린의 유령까지 풀어놓을 모양이군. 당신들은 상대할 수 있잖소?”
현암 군이나 나나 그쪽에는 조금 취약하지만… 걱정 말아요. 이런 정도야. 뭐, 어떻게든 되겠죠.”
“어떻게든 되다니? 나는 그 빌어먹을 것과 또 마주치고 싶지 않단 말이오!”
“우릴 이리로 데리고 온 건 당신이란 사실을 잊지 말아요.”
그사이 십이 층에 있었던 엘리베이터가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 했다. 더글러스는 흠칫 놀라며 엘리베이터 개폐 스위치 쪽을 보았 다. 아까 분명히 스위치를 눌렀음에도 스위치의 등이 다 꺼져 있 었다. 혹시나 싶어 몇 번 더 두들겨 눌러 보았지만 여전히 등이 켜 지지 않았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더글러스가 당황하자 이반 교수가 말했다.
“뭐, 비상 장치 같은 게 있는 모양이오.”
“제길! 엘리베이터가 안 서면 밑으로 내려갈 방법이 없을 것 같은데! 아무래도 지원을 요청해야…”
승희가 말했다.
“악령까지 풀어놓았다는데 일반 경찰을 들일 거예요? 별로 좋은 생각 같지는 않은데요?”
“그러면 어떻게 할 거요?”
말하는 사이에도 엘리베이터는 계속 아래로 내려가 마침내 이 들이 있는 일 층의 숫자가 빛났다. 현암은 처음에는 엘리베이터를 부숴 버릴까도 생각했지만 작동되는 엘리베이터를 부수는 건 너 무 위험했다. 더글러스는 스위치를 두들기듯 계속 눌렀으나 허망 하게도 엘리베이터는 일 층을 그대로 통과해 지하로 향했다. 그와 동시에 화재경보기라도 작동됐는지 여기저기의 통로에서 셔터가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통로가 셔터로 막히는 것을 보고는 더글러 스는 당황한 기색이었으나 현암은 조금도 긴장하지 않고 담담한 얼굴로 한쪽을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더글러스가 보니 그곳은 비 상계단이었다. 혹시나 싶어 더글러스는 빌이 타고 있던 엘리베이 터가 도착한 층수를 확인했다.
“지하육층 깊군!”
확인한 다음에 더글러스는 현암의 뒤를 따라 비상계단 쪽으로 향했다. 물론 승희와 이반 교수도 그 뒤를 따랐다.
비상계단을 통해 현암이 한 층을 내려가려 했지만 그곳도 이미 화재용 셔터가 내려와서 길이 막힌 상태였다. 그걸 보고선 이반 교수는 투덜거렸다.
“계단까지 막다니. 이러다 불이라도 나면 다 죽겠다는 건가?”
더글러스가 말했다.
“화재보다는 경찰 추적을 막으려고 달아 놓은 것 같소만?”
현암은 왼 손목에서 월향검을 때 들더니 마치 종이라도 뚫듯 셔 터에 월향검을 박아 넣었다. 그리고 크게 한 번 휘두르자 쇠로 만 든 셔터는 별다른 소리도 내지 않고 크고 동그랗게 잘려져 갔다. 마침내 사람 몇 명이 들어갈 만큼 크게 구멍이 뚫리자 남은 셔터의 부분은 철컹 소리와 함께 반대쪽으로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셔터 너머로 내려다보이는 아래쪽 계단도 또 다른 셔터 로 막혀 있었다. 계속 뚫으며 내려갈 수도 있을 테지만 시간이 너 무 걸릴 것 같았다. 현암은 몸을 돌려 계단에서 나와 일 층, 아까 빌이 타고 내려간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더글러스와 다른 사람들 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현암의 뒤만 따라갔다. 현암은 엘리베이 터의 닫혀 있는 문을 강제로 밀어 열었다. 그러나 엘리베이터는 아래층에 내려가 있었기에 컴컴한 빈 통로에 두꺼운 강철 와이어 가 늘어져 있는 것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현암은 망설임 없이 엘 리베이터 통로 아래로 몸을 날렸다.
“헉! 저거?”
더글러스는 놀라서 앞으로 달려 나가 통로 안쪽을 내려다보았 다. 현암은 오른손으로 엘리베이터의 굵은 강철 와이어를 잡은 채 아래층으로 활강하듯 내려가고 있었다. 손에 장갑이나 다른 장비 를 착용한 것도 아닌데 강철 와이어와 손이 마찰하며 불꽃이 튀고 금속성의 끼이익 하는 마찰음이 통로에 울려 퍼졌다.
“저러면 손 다치지 않을지?”
더글러스가 묻자 승희가 살짝 웃었다.
현암군의 오른손은 끄떡없어요. 세상에서 제일 단단할걸요?”
“아무래도 사이보그 감소”
“순수 자연산이라고요.”
현암은 그사이 무사히 엘리베이터의 와이어를 잡고 내려갔다.
그리고 천장을 월향검으로 가볍게 도려내고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뛰어들었다. 조금 지나자 엘리베이터가 위층으로 작동하며 와이 어가 끌어 올려지는 모습이 보였다. 현암이 안에서 비상 스위치를 꺼서 엘리베이터를 다시 올라가게 만든 것이다. 더글러스는 뒤로 한 발짝 물러서서 현암이 억지로 열어 놓은 엘리베이터 문을 닫고 스위치를 누른 후 기다렸다.
지하육층은 건물의 맨 아래층이었고 지하 주차장보다 더 아래 쪽에 있는 비밀 창고 격인 장소였다. 엘리베이터실로부터는 긴 복 도와 몇 개의 문으로 단단히 차단돼 있었다. 지금 그 안엔 비명과 총소리가 난무했다. 총을 쏘는 것도, 비명을 지르는 것도 모두 빌 의 부하들이었다.
비명과 공포가 가득한 외침들이 컴컴한 지하층 복도에 울려 퍼졌다.
“저…………… 저게 뭐야? 가까이 오지 마!”
빌의 부하들은 모두 겁에 질려 있었다. 공포에 질린 채 마구 총 을 난사하고 더러는 울음을 터뜨리기까지 했다. 그도 그럴 만했 다. 그들의 앞에는 아이린의 모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피 칠갑이 된 금발 머리를 늘어뜨리고 총알구멍이 뚫린 이마와 희게 뒤집어 진 눈망울을 한 그녀의 모습이 피인지 매니큐어인지 모를 붉은 것이 흐르는 섬뜩한 열 개의 긴 손톱을 고슴도치처럼 곤두세운 그 녀의 모습이 허공에 둥둥 떠서 사방을 휘저었다.
빌은 아이린에 대한 것은 모조리 비밀로 해 두었기 때문에 빌의 부하들도 아이린의 유령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당연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아이린은 손톱을 휘둘러 댔고 손톱은 벽 과 천장에 깊은 자국을 새겼다. 날카로운 손톱에 놀라고 아이린의 모습에 경악한 갱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비명을 지르다가 총을 쏘 아 댔다. 좁은 복도에서 사방으로 총을 쏘아 대자 반대편에 있던 다른 자들에게도 총알이 명중했고 콘크리트 벽에 총알이 튀며 또 다른 피해를 낳기도 했다. 아이린은 가만히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빌의 부하들 사이를 누비며 떠다녔기 때문에 피해는 더 급속도로 심해졌다.
아주 두꺼운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숨어 있던 빌조차 바깥에서 울려오는 비명과 총소리가 석연치 않았다. 문을 조금 열고 조심 스레 내다보니 그곳엔 아이린이 있었다. 빌은 경악했다. 여태까지 말을 잘 듣던 아이린이 왜 목표를 상대하지 않고 따라왔는지, 왜 부하들에게 흉포한 모습을 드러내는지 빌은 알 수 없었다.
“아이린, 뭐야! 왜 놈들을 없애지 않고…………!”
그러다가 튕긴 탄환 하나가 귓가로 핑 소리를 내며 스쳐 지나가 자 빌은 찔끔했다. 조금 더 몸을 숨기고 빌은 필사적으로 외쳤다.
“아이린, 그만! 모두 그만, 사격 중지! 쏘지 마!”
유령인 아이린이 총알에 맞을 일은 없다. 허나 빌에게는 흔하게 구할 수 있는 갱보다는 세상에 다시없는 존재인 아이린 쪽이 소중 했다. 빌은 부하들이 아이린을 화나게 한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총질을 해 댔다면 아이린이 기분이 나쁠 것도 같았다. 또는 아이린이 다른 마음을 먹었을지도……………
‘그럴 리 없어!’
빌은 주머니에 손을 넣어서 아이린의 브로치를 꺼내 떨리는 손 으로 꽉 쥐었다. 그리고 급히 브로치를 문지르며 외쳤다. “아이린, 그만 둬! 너희도 사격 중지!!”
허나 그사이에 열 명이 넘게 배치된 빌의 부하 중 다섯 명이 마 구 돌아다니는 총알에 맞아 죽었고 몇몇은 부상을 입었다. 그중 커다란 기관총을 들고 있던 녀석은 아직도 아이린을 향해 기관총 을 갈겨 대고 있다. 빌은 상황을 타개하려고 바지춤에 꽂아 넣었 던 권총을 꺼내 천장을 향해 두어 번 발사했다. 그러면서도 왼손 으로는 아이린의 브로치를 쓰다듬었다. 그러나 아이린은 여전히 화난 듯, 분노한 표정을 드러내며 이번에는 기관총을 쏴대는 녀 석에게 다가갔다.
“으악! 오지 마! 오지 마!”
그 녀석은 빌이 사격 중지를 외치며 권총을 쏘는 것도 듣지 못 했는지 계속 아이린을 향해 총을 갈겨 댔다. 그때 아이린의 모습 이 변했다. 정확히 말하면 변했다기 보다는 풍선이 부풀어 오르듯 갑자기 아이린의 얼굴 부분이 부풀어 올랐다. 아이린의 몸 전체가 거대해진 것인지 그것까지는 알 길이 없다. 건물 바닥 아래쪽을 뚫고 지나면서 얼굴만이 복도에 가득차서 사람보다 더 큰 크기로 순식간에 확대됐으니까.
크게 확대된 아이린의 얼굴은 익히 그녀를 알고 있는 빌조차도 저절로 뒷걸음질을 칠 만큼 끔찍했다. 그런 아이린이 새빨간 입술 을 크게 벌렸다. 사람을 한입에 삼켜 버릴 만큼이나 큰 입, 한 때 는 아름다운 입술이었지만 저렇게 커진 아이린의 입술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았다.
“으아악!”
중기관총을 든 녀석이 아이린의 얼굴을 향해 방아쇠를 있는 대 로 당겨 연사로 탄환을 퍼부었다. 어떨 때는 눈을 향해, 어떨 때는 코와 입을 향해. 그럼에도 아이린의 얼굴에 총알은 한 발도 명중 되지 않았다. 오히려 뒤쪽의 부하들이 속절없이 죽어 나갔다. 아 이린은 물론 유령이니 완벽히 실체를 가진 것이 아니다. 반투명하 고 뒤가 어느 정도 비춰 보이기는 한다. 그렇지만 끔찍한 유령의 얼굴이 코앞에서 갑자기 크게 부풀어 오르면 누구라도 제정신일 수 없다. 뒤쪽에 사람이 있다는 생각을 까맣게 잊을 정도로 결국 기관총을 든 자 앞에서 아이린은 총알을 퍼붓도록 유도한 것이다. 기관총의 난사에 직접 맞기도 했지만 좁은 복도에서 튕긴 탄환들 이 참극을 빚었다. 결국 지하실 내에 있던 빌의 부하는 그 한 녀석 을 빼고는 모두가 죽었다. 그 녀석조차 튕긴 탄환에 여기저기 스 치고 뚫려 피투성이가 됐지만, 여전히 총을 쏴 댔다. 빌조차 그것 을 막지 못했다. 기관총에서 철컥 소리가 나자 그 녀석은 비명을 올리며 빌 쪽으로 도망쳐 오려고 했다. 분노한 빌은 외쳤다.
“이 망할 자식! 무슨 짓을 한 거야!”
빌은 거침없이 그 녀석의 이마를 권총으로 쏴 버렸다. 거대한 아이린의 얼굴은 이제 빌을 향해 있다. 빌은 권총을 거두며 외쳤다.
“아이린! 그만해! 이제 화내지 마!”
다음 순간 빌은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 그녀의 표정은 분노가 아니었다. 만족한다는 듯한 흡족한 미소, 아이린의 커다란 붉은 입술이 피에 젖은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서서 히 빌을 향해 다가왔다.
“아…………… 아이린! 나야! 왜…………….”
그때 아이린의 입술이 움직였다. 그리고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옥에 갈 준비는 됐어, 달링?
빌의 등에 소름이 쭉 끼쳤다. 아이린은 아무 생각 없는 꼭두각 시라 생각했었다. 그리고 지금도 무심코 화가 나서 움직인 거라 생각했었다. 허나 아이린은 결코 아무 생각 없이 움직인 것이 아 니다. 그리고 그녀는 이제 빌을 노리고 있었다.
더글러스와 승희, 이반 교수가 현암이 작동시킨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올 때까지 현암은 엘리베이터 출구 앞에서 움직이지 않 고 있었다. 상당히 어둡고 좁은 복도인 데다가 반대편에서 총성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현암이라도 이런 좁은 곳에서 갑 자기 총알이 날아오면 방어할 방법이 없다. 어느덧 크게 울리던 기관총 총성도 사그라졌고 곧이어 탕 하는 권총 소리가 들려왔다.
현암도 어둠 속을 뚫어 볼 재주는 없다. 반사적으로 살짝 벽에 몸을 붙였으나 이쪽을 향해서 총알이 날아온 것은 아니었다.
그때 다른 사람들이 탄 엘리베이터가 내려왔다. 승희는 엘리베 이터를 나서자마자 눈을 감고 지하실 복도 건너편에 무엇이 있는 지 투시해 보더니 인상을 썼다.
“유령!”
더글러스는 승희에게 물었다.
“유령이 어쨌다는 거요? 그러면 아이린?”
“맞아요.”
“아이린 유령이 저 앞에 있단 말이오? 그러면 총성은?”
“그건・・・・・・ 유령에게 총질한 것 같아요.”
“음? 왜 우리에게 오지 않았지?”
“몰라요!”
“아이린은 여태까지 빌을 도와주어서 살인하게 해 주었잖소. 그런데 왜 갑자기……………..”
“몰라요! 남은 사람은 빌 정도인데……. 그는 지금 굉장히 겁을 먹어 혼란스러운 상태라……………”
“빌밖에 안 남았다고? 총성으로 봐선 숫자가 많은 것 같던데?”
더글러스가 묻자 승희는 안색을 흐렸다.
“다 죽은 것 같아요.”
“그럼 아이린의 유령이?”
“몰라요! 아이린의 사념이 강력해요! 마음을 뚫고 투시할 수가 없어요”
그러자 현암이 뚜벅뚜벅 앞으로 나섰다.
“어쩌려는 거요?”
더글러스가 묻자 현암은 계속 전진하며 짧게 답했다.
“악령이 사람을 더 죽이게 놔둘 순 없잖습니까?”
더글러스도 잠시 고민했다. 어차피 악당들이니 죽든 말든 그대 로 두는 게 편할 거란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이들은 절대 그렇게 놔두지 않을 것이며, 사실 경찰이라는 자신의 위치를 생각하면 자 신도 그러지 않는 편이 맞다.
“조심하시오. 뒤 따르겠소.”
현암은 대답 대신 오른손에 들고 있던 월향검을 살짝 올려 보였 다. 그 뒤를 더글러스와 이반 교수가 따랐고 승희는 맨 뒤를 따라 왔다. 길을 가는 동안 간헐적으로 총소리가 들려왔는데, 그 소리 를 식별한 더글러스가 말했다.
“권총이고, 한 사람이 쏘는 것 같소. 아마 빌이겠지.”
현암은 대답이 없었지만 그의 걸음은 빨라졌다. 뒤에서 승희가 말했다.
“다 죽고 빌 하나 남은 것 같은데…
그때 닫힌 문 하나를 연 현암의 몸이 잠시 멈칫했다. 뒤따라 들 어선 더글러스와 이반 교수도 안색을 굳혔다. 방 안은 피바다였고 많은 갱들의 시체가 널려 있었다. 갱들의 시체는 비참했지만 더글 러스는 몇 몇 시체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상한 걸? 유령이 죽인 게 아니라 총탄에 벌집이 된 것 같은..”
이반 교수는 천장과 벽에 깊게 난 날카로운 자국을 보며 말했다.
“저건 총탄이 아니군?”
더글러스는 그 자국들을 보고 몸서리를 쳤다.
“저건 악령의 손톱자국이오. 한데…………… 한데…………….”
더글러스는 헝클어진 머리를 한 번 쓸어올리며 중얼거렸다.
“저기 베인 시체는 없는 것 같은데……………. 대체 무슨 짓을 한거지?”
그때까지도 또 다른 복도 건너편의 두꺼운 문에서는 총성이 간 헐적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한데 빠른 걸음걸이로 복도 끝에 먼저 도달한 현암은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잠깐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앞에는 이상한 뿌옇고 누리끼리한 금빛의 막 같은 것이 커 튼처럼 출입구를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명도 아니고 실체도 불 분명했다. 정체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몹시 불길한 느낌을 주었기 에 현암도 걸음을 멈추었고 이반 교수와 승희 그리고 더글러스도 걸음을 멈추었다. 승희가 잠시 눈을 감고 투시하더니 현암에게 고 개를 설레설레 저어 보였다. 현암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연신 승희 의 얼굴과 두꺼운 문을 번갈아 돌아보았는데 안에서 벌어질지 모 를 끔찍한 상황이 퍽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더글러스는 샷건 안전장치를 푼 것을 확인하고는 앞으로 나 섰다. 변변한 활약 한 번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번에야말로 앞장서야 한다 생각했다. 눈앞에 펼쳐진 금색의 막 같은 것이 무엇인지는 생각도 해 보지 않았다. 다만 그냥 뿌연 조명의 잔상이나 별것 아닌 것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판단한 더글러스가 거침없이 걸어서 문 쪽으로 성큼 다가서자 현암이 놀라 급히 더글러스의 옷 깃을 잡아 뒤로 당겼다. 그 찰나 더글러스는 눈을 크게 떴다. 그의 몸 일부가 금색의 막에 닿은 순간 잘 발동되지 않았던 사이코메트 리능력이 우연히 발동했기 때문이다.
“이・・・・・・이건.”
더글러스는 입을 딱 벌리며 제품에 놀라 뒤로 후드득 뒷걸음질 을 치다가 엉덩방아를 찧고 넘어져 버렸다. 순식간에 등이 젖고 이 마에도 식은땀이 송골송골 솟아났으며 입이 딱 벌어지고 있었다.
“이게・・・・・・ 아이린?”
희끄무레한 형체였기 때문에 자세히 알아보지는 못했지만 그것 은 바로 거대하게 변해 버린 아이린의 뒤통수 머리칼 부분이었다. 반투명한 형체로 방보다 크게 변해 있기 때문에 뒤통수의 머리카 락 일부만이 출입구 쪽으로 나와 있었다. 그것만 보고는 아무도 그 정체를 짐작하지 못했던 것이다.
비록 영감이 특별히 발달하지는 않았더라도 그것이 뭔가 불길 한 것임을 그간의 경험을 통해 느낄 수 있었던 현암은 걸음을 멈 추었다. 그렇지만 그런 감이 전혀 없는 더글러스는 하마터면 유령 의 몸속으로 뛰어들 뻔한 것이다. 그 순간에 발동된 사이코메트리 능력 덕분에 더글러스는 아이린의 속마음을 읽어 낼 수 있었다. 아이린이 무엇을 바라는지까지도…………. 원래 사이코메트리 능력은 상황을 보여 주는 것이었지만 몸에 직접 접촉했기 때문에 더글러스는 아이린의 속마음까지 눈치챌 수 있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현암은 월향검을 꺼내 오른손에 쥐고 공력을 끌어올렸지만 다음 순간 아이린의 뒷머리는 문 안으로 빨려들 듯 이 사라졌다. 앞으로 전진했는지 혹은 다시 작아진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현암이 문 앞으로 한 발짝 다가서는데 또다시 안쪽에 서 총성이 들려왔다. 그리고 안에서 아주 희미하게 빌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린! 이 빌어먹을 년. 배신하는 거냐? 내가 널 겁낼 줄 알 아? 또 죽여 주겠어! 와 봐! 와보라고!”
현암이 안으로 뛰어 들려 하자 더글러스가 제지하며 말했다.
“빌이 총질하고 있으니 위험하오. 잠시 총알이 떨어지길 기다리시오!”
“그러다 빌이 죽으면…………….”
현암이 말했지만 더글러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이린은 빌을 안 죽이니까 기다리시오!”
그 말을 듣고 뒤에 있던 승희가 따라와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죠? 아이린이 저 사람들을 전부 …………….”
더글러스는 이를 악물었다.
“죽게 만들었지. 허나 아이린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교활하오.
자기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복수를 하는 거요!”
“피를 안 묻힌다고?”
이반 교수가 묻자 더글러스는 말했다.
“겁을 주어서 서로 총을 난사하게 만든 거요. 당신들 추측이 맞 았소. 아이린은 결코 생각 없이 조종당한 게 아니었소. 오히려 더 치밀하고 사악하게 일을 꾸민 거요.”
“하지만 그렇다면 왜 빌을 도와 살인을 부추겼죠?”
더글러스는 한숨을 쉬었다.
“그건・・・・・・.”
그때 문 옆에서 벽에 살짝 등을 대고 안의 소리를 집중하던 현 암의 귀에 탄창이 비었는지 희미하게 찰칵하는 빈 공이 소리가 들 려왔다. 더불어 빌의 “제기랄!” 하는 비명 같은 외침도 들렸다. 현 암은 그 순간 더글러스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문을 박차며 안으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