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외전 2 : 죽었다고 지옥을 아는가? [퇴마록(세계편) ‘아르타로트의 약속’ 직후] : 5화 – 습격
습격
더글러스는 몹시 피곤했다. 육체적 피로보다 정신적 피로가 그 를 짓눌렀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잠도 오지 않았다. 침대 머리맡 에 앉아 경찰국에서 뽑아낸 자료들을 훑어보던 더글러스는 이내 보고 있던 종이 뭉치들을 거칠게 땅바닥에 흩뿌려 버렸다. 그중에는 아이린의 면허증 사진 복사본도 있었다. 그녀가 바로 악령임은 이제는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말이야.’
더글러스는 엉망으로 헝클어진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이린의 실종을 알아낸 것은 확실히 일종의 성과였다. 허나 아이린의 사체 는 아직까지 발견조차 되지 않았다. 따라서 그것으로 빌을 기소할 수도 없다. 그런데 그보다 더 더글러스를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왜 빌이 죽인 것이 틀림없는 아이린의 유령이 빌을 돕고 있느냐는 것이다. 그것만은 정상적으로 납득되지 않았다.
‘빌이 사악한 마법사라도 되나? 죽은 자를 노예로 부리고 조종 하는? 이건 뭐가 점점 더………………’
어차피 악령이라는 존재가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정상적인 경 찰이 다룰 범위를 훨씬 넘어선 셈이다. 그렇다고 이것을 상의할 만한 사람도 없다. 믿고 가깝게 지내는 친구나 동료도 없을뿐더 러 자신에게는 정식 파트너조차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본래 정식 으로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고 하면 누군가 한 사람이 더 파트너가 돼 파트너십 관계 안에서 일을 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더글 러스는 성격도 성격이거니와 상관에게조차 퉁명스럽게 대했고 또 파일을 보자마자 사건을 제멋대로 진행한 것이기 때문에 털어놓 을 조력자조차 없었다. 아니, 어쩌면 이제는 끝까지 혼자 가야 할 지도 몰랐다. 어차피 혼자 일하는 게 편하다고 생각하는 더글러스 지만 이번 경우는 다르다. 이렇게 악령이나 조종하는 마법사 같은 놈과 상대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들이라면 어떨까?”
더글러스는 다시 그들을 머리에 떠올렸다. 분명 이런 종류의 사 건에는 최적화된 사람들일 것이다. 동양에서 온 네 사람, 그들에 대해서 정확하게 아는 것도, 아직 친분을 형성한 것도 아니지만 그들이 가진 능력이라면 이런 일 정도는 별로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건 더글러스 자신의 일이었지만 이제는 자 신 혼자 해결할 단계를 넘었다. 가장 기본적인 미스터리조차 풀어 낼 수 없으니까.
‘역시 도움을 청해야 될까?’
그러나 선뜻 나서 줄지도 의문이다. 그럼에도 혹시나 싶어 주머 니를 뒤져 보니 네 사람 중 조금 눈매가 날카롭고 아름다운 여자 가 주었던 연락처 쪽지가 있었다.
‘정말 이런 식으로 부탁을 해도 되는 걸까?’
더글러스는 연락처가 적힌 쪽지를 한동안 들여다보다가 이내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인상을 구겼다. 그리고 쪽지를 아무렇게 나 뭉쳐 주머니에 집어넣은 뒤 쓰러지듯 침대에 누웠다. 그러면서 도 혹시나 싶어 더글러스는 자신의 총이 장전된 것을 확인한 다음 배게 밑에 넣어 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피곤과 고민에 지친 더글 러스는 오른팔을 얼굴 위에 얹으며 자신도 모르게 스르르 눈을 감았다.
놈과 상대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들이라면 어떨까?”
더글러스는 다시 그들을 머리에 떠올렸다. 분명 이런 종류의 사 건에는 최적화된 사람들일 것이다. 동양에서 온 네 사람, 그들에 대해서 정확하게 아는 것도, 아직 친분을 형성한 것도 아니지만 그들이 가진 능력이라면 이런 일 정도는 별로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건 더글러스 자신의 일이었지만 이제는 자 신 혼자 해결할 단계를 넘었다. 가장 기본적인 미스터리조차 풀어 낼 수 없으니까.
‘역시 도움을 청해야 될까?’
그러나 선뜻 나서 줄지도 의문이다. 그럼에도 혹시나 싶어 주머 니를 뒤져 보니 네 사람 중 조금 눈매가 날카롭고 아름다운 여자 가 주었던 연락처 쪽지가 있었다.
‘정말 이런 식으로 부탁을 해도 되는 걸까?’
더글러스는 연락처가 적힌 쪽지를 한동안 들여다보다가 이내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인상을 구겼다. 그리고 쪽지를 아무렇게 나 뭉쳐 주머니에 집어넣은 뒤 쓰러지듯 침대에 누웠다. 그러면서 도 혹시나 싶어 더글러스는 자신의 총이 장전된 것을 확인한 다음 배게 밑에 넣어 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피곤과 고민에 지친 더글 러스는 오른팔을 얼굴 위에 얹으며 자신도 모르게 스르르 눈을 감았다.
피곤에 지쳐 잠깐 잠이 들었던 더글러스가 어깨를 움찔하며 잠 에서 깨어났다. 차가웠다. 아직 찬 바람이 불 때도 아니고 에어컨 을 켠 것도 아닌데 갑자기 몸에 확연히 느껴지는 한기가 스며들었 다. 북극에 파이프를 연결해 찬 바람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그 한 기는 피부에 느껴지는 온도로서의 차가움이 아니었다. 냉기의 느 낌이 몸속에서부터 전신에 피를 통해 퍼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놀란 더글러스가 눈을 채 뜨기도 전에 바로 코앞에서 낯선 목소리 가 울려왔다.
더글러스-!
등골에 소름이 쫙 돋게 하는 여자의 목소리. 그리고 그 목소리 는 귀로 들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온몸을 울리며 퍼져 나왔다. 놀란 더글러스는 올려놓았던 오른팔을 반사적으로 베개 뒤쪽으 로 집어넣으며 눈을 번쩍 떴다. 그러나 차라리 뜨지 않는 것이 나 을 뻔했다. 더글러스의 코앞, 불과 삼십 센티미터도 떨어지지 않 은 곳에 피로 얼룩지고 희게 뒤집힌 익어 버린 생선의 눈알처럼 번들거리는 눈 두 개가 보였다.
바로 아이린, 그녀의 얼굴이었다. 그녀의 희게 뒤집힌 눈동자. 총알구멍이 뚫린 이마. 피에 젖은 금빛 머리카락, 더글러스가 투 시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은 모습을 한 채 아이린이 코앞에 얼굴을 바짝 들이밀고 있었다.
“아아악!”
더글러스는 자신도 모르게 겁에 질려 비명을 질렀다. 그는 반사적으로 베개 뒤에 넣어 놓았던 권총을 꺼내 코앞으로 내밀었다. 반사적으로 권총을 내미는 바람에 더글러스의 손은 아이린의 얼 굴을 뚫고 지나갔다. 아무 느낌도 없었고 걸리지도 않았지만 더글 러스의 팔이 아이린의 얼굴을 뚫고 나간 모습은 더더욱 끔찍해 보 였다.
“으아악!”
다시 비명을 지르며 더글러스는 옆으로 몸을 굴려 침대에서 우 당탕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되는대로 마구 몸을 굴린 것이기 때 문에 허리가 얼얼했다. 그러나 어떻게 할 겨를도 없이 더글러스는 오른손에 쥐었던 손잡이를 왼손으로 받치며 아이린을 향해 리볼 버를 마구 쏘아 붙였다. 리볼버의 탄창이 완전히 한 바퀴 회전할 때까지 여섯 발의 총소리가 사방을 울리고 아이린의 뒤에 있던 스 탠드와 액자가 산산이 깨어져 나갔다. 물론 액자 안에 들어 있던 꽤 마음에 들어 하던 그림도 여지없이 총알구멍이 났다. 문에 두 개의 구멍, 벽에 네 개의 구멍이 연달아 뚫렸지만 허공에 둥둥 떠 있던 아이린은 더글러스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피에 젖은 입술로 슬쩍 웃어 보였다. 더글러스가 쏜 총알에는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 것 같았다.
공포가 가득한 비명을 지르는 더글러스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뭔가 본능적으로 움직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 같은 그의 성 격이 이런 상황에서도 그를 가만히 있지 못하게 만들었다. 총알 을 모두 써서 철컥철컥 빈 소리만 나는 총구를 두어 번 당기다 더글러스는 권총을 아이린에게로 냅다 집어 던졌다. 물론 권총 역시 아이린의 반투명한 몸을 그대로 통과해 벽에 부딪힌 다음 땅에 떨 어져 버렸다.
“이런 제길! 제길! 제길! 제길!”
아무 효과도 없는 것이 분명했지만 더글러스는 포기하지 않았 다. 물론 무서워서 죽을 지경이다. 언젠가 보았는지 기억도 명확 하지 않은 B급 싸구려 공포 영화와 짜증 날 정도로 비슷했다. 그 영화에서 이렇게 날치던 녀석은 조금 있으면 귀신에게 갈가리 찢 겨 죽는다. 그 영화를 보면서 더글러스는 이렇게 비웃었었다.
‘그렇게 투명한 존재에게 공격하는 게 말이 돼? 또 그런 존재라 면 그게 무슨 힘을 쓰겠어? 찢겨 죽을 리가 없잖아.’
그러나 막상 닥쳐 보니 그런 논리적 판단은 떠오르지도 않았다. 아이린의 악령이 힘을 쓰지 못할 거라며 담담하게 있을 수가 없 다. 일단 접근하지 못하게 하려고 더글러스는 침대 머리맡에 놓여 있던 스탠드를 집어 들고 미늘창처럼 아이린을 향해 마구 휘둘러 댔다. 혹시라도 전기나 빛에는 어떤 반응이 있지 않을까 싶은 생 각에서였다. 불행히도, 더글러스가 너무나 힘을 주어 크게 휘두르 는 바람에 스탠드의 플러그가 툭 빠져나갔다.
“악! 이런 제길! 제기랄!!”
순간적으로 전기가 꺼져 원했던 전기나 빛에 대한 실험을 더 해 볼 수는 없었지만 더글러스는 아이린을 향해 두어 번 더 스탠드를 휘두르며 악을 썼다.
“포기 안 해! 이런 썅! 난 포기 안 해!!”
아이린은 결코 서두르지도 않으며 서서히 더글러스 쪽으로 둥 둥 떠왔다. 더글러스는 여자처럼 비명을 질러 대며 스탠드를 아이 린에게 집어 던졌다. 그런 다음 침대 시트와 이불도 동시에 움켜 쥐어 아이린의 몸 위로 집어 던졌다. 흉한 모습이라도 덮어 보려 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역시 힘없이 통과.
‘이런 빌어먹을!!’
더글러스는 이를 악물고 허둥지둥 몸을 돌렸다. 더글러스의 아 파트는 화장실 빼고는 다른 방도 없는 전형적인 원룸 구조였다. 밀폐시키거나 문을 잠그거나, 어디로 도망칠 곳도 없었다. 침대가 있는 곳에서 밖으로 도망칠 수 있는 현관문까지는 불과 칠팔 미터 밖에 되지 않았지만 아이린의 유령은 더글러스가 침대에서 도망 치자마자 곧 유일한 출입구인 현관문 쪽을 감시라도 하듯 문을 등 지고 있다. 프랑코가 화장실 창문을 뚫고 도망칠 수밖에 없던 이 유와 같다. 아무리 담력이 강해도 저 유령에게 정통으로 달려들어 문으로 나갈 엄두는 나지 않았다.
‘그럼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해?’
더글러스는 울상이 돼 이를 악물었지만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 다. 어떻게든 해야 하고 무슨 수든 내야만 한다. 더글러스는 손이 닿는 대로 집 안의 잡동사니라도 손에 쥐려 했지만 마땅한 것이 없었다. 무슨 십자가나, 묵주나 하다못해 불상이나 부두교 토템이 라도 있으면 들이밀겠지만 아쉽게도 모든 종교에 무신경한 더글러스였다. 집에 종교와 관계된 뭔가가 남아 있을 턱이 없었다. 더글러스는 포기하면 안 된다고 자기에게 주문이라도 걸듯 계속 되 되었다.
‘그래도 포기 안 해. 난 포기 안 해!’
아이린의 유령은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양손을 내밀 듯 들어 올 린 채 공중을 부유해 천천히 더글러스에게 다가왔다. 포기하지 않 겠다고 중얼중얼 입으로 주문을 외우고 있다고 해서 악령이 다가 오는 것이 달가울 리는 없었다. 뒷걸음질 치던 더글러스는 거실에 놓여 있던 소파에 걸려 뒤로 나동그라졌다. 두려움에 떨면서 발악 하듯 뒤로 몸을 끌며 도망치는데 아이린의 유령은 결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그러나 압박해 포위라도 하듯 더글러스에게로 다가 들었다.
‘아냐, 아냐. 이건 아냐.’
비록 공포에 질려 있었지만 결코 더글러스의 두뇌 회전은 멈추 지 않았다.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더글 러스는 최대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 이 있었다.
아이린의 유령은 지난번 프랑코가 죽었을 때 투시로 본 것이긴 하지만 직접 본 것만큼이나 생생했다. 아이린의 유령이 프랑코를 몰아 이 마일이나 떨어진 곳까지 밀어붙이고, 거기서 빌이 최종적 으로 프랑코를 죽였다. 아마 지금도 그와 동일한 상황이라면 아이 린의 유령은 직접적으로 사람을 죽일 힘은 없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빌이 굳이 총알을 박아 넣는 짓을 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나 유령이 힘이 없다고 아무리 머릿속으로 확신한들 목숨 을 걸고 직접 덤벼들어 실험해 보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다 만 적어도, 최소한 한 가지는 분명했다. 아이린의 유령은 자신을 창가 쪽으로 계속 몰아붙이고 있다. 그것은 곧 저 창가 쪽으로 가 면 안 된다는 뜻이었다. 빌이 기다리고 있다가 총을 쏘려는 것인 지, 아니면 밀어 떨어뜨리려는 것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적이 원 하는 대로 움직여서는 안 된다. 아무리 상대가 안 될 강한 것과 대 적하고 있어도 상대할 방법이 없어도
‘절대 네가 원하는 대로는 안 할 거야!’
더글러스는 뒤로 끌던 몸을 아무렇게나 굴려 테이블 탁자에 부 딪힌 다음 밀리면서 옆으로 빠져나갔다. 거칠게 몸을 굴린 더글러 스의 몸이 부엌의 싱크대에 털컹 부딪히며 멈췄다.
‘혹시 칼은?’
더글러스는 허겁지겁 싱크대의 아래쪽 문을 열었다. 얼마 전 세 일 기간에 세트로 샀던, 그러나 요리하는 것이 귀찮아 한 번도 사 용해 본 적 없는 날카로운 식칼들이 칼꽂이에 가지런히 꽂혀 있었 다. 더글러스는 되는대로 식칼을 양손에 한 자루씩 뽑아 들었다. 그리고는 약간의 자신감을 얻은 듯 유령 쪽을 돌아보았다. 아이린 의 유령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여전히 섬뜩한 미소를 흘리며 천 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이거나 먹어라!”
더글러스는 손에 들었던 칼을 냅다 집어 던졌다. 총알이 안 되 면 칼이라도 먹히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는데 불행하게도 아무 소 용이 없었다. 역시나 투명한 환등기 그림을 지나치듯 더글러스가 던진 칼은 저만치 날아가 쨍그랑 소리를 내며 벽에 부딪혀 바닥에 떨어졌다. 다른 한 자루는 아예 아이린을 빗나가서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 문에 꽂혔다. 당황해서 너무 막 집어 던진 결과다.
“으아아! 제길, 제길. 제기랄!!!”
더글러스는 세트로 돼 있던 여러 장의 칼을 마구 집어 모두 던 졌다. 머리에, 몸에, 하다못해 손을 노리고도 던져 보았지만 모든 칼은 아이린의 몸을 속절없이 통과해 버렸다.
‘그래, 저건 분명 허깨비일 거야. 이건 뭐 영사기 불빛과 다를 게 없잖아?’
더글러스는 용기를 내기로 했다. 모든 발악이 헛되더라도, 저것 의 몸을 뚫고 나갈 용기를 얻는다면 헛된 일만은 아니다. 유용한 실험 결과다. 더글러스는 이를 악물고 단거리 달리기 자세로 몸을 일으키며 바로 달려 뚫고 나가려 했다. 그때 아이린이 한 손을 주 욱 내뻗었다. 그 손은 아직 더글러스와 이삼 미터는 떨어져 있음 에도 농담처럼 주욱 늘어나 더글러스의 바로 옆까지 뻗어 왔다. 피에 젖은 매니큐어를 칠한 붉은색의 날카로운 손톱이 더글러 스의 얼굴을 움켜쥘 것처럼 다가오는 것을 급히 고개를 숙여 피했 다. 다음 순간 두꺼운 나무와 수지(樹)로 만든 싱크대의 문짝 일 부가 손톱에 뜯겨 나가기라도 하듯 주먹 크기만큼 통째로 파인 것을 더글러스는 똑똑히 보았다.
“이런 제기랄! 세상에 이래도 되는 거야?”
더글러스는 이제 절망적인 기분이 됐다. 정말 불공평했다. 싸구 려 영화 스토리만큼이나 재수 없을 정도로 유령 쪽에 유리한 상황 이다. 자신은 공격할 수도 대적할 수도 없는데 저쪽은 맘대로 할 수 있다. 그냥 죽으라는 소리나 마찬가지였지만 더글러스는 포기 하지 않았다. 포기를 모르는 더글러스였으니까.
“물? 물은 어때?”
더글러스는 소리를 지르며 몸을 일으켜 싱크대에 수도꼭지를 아무렇게나 틀어 아이린의 유령 쪽으로 물놀이를 하듯 뿜어댔다. 거친 물줄기가 아이린에게 뿜어져 나갔지만 역시나 별 소용이 없 었다.
“그래, 물도 안 된단 말이지? 그랬단 말이지?”
조롱당하는 느낌에 이제는 분노까지 머금자 더글러스의 행동은 더 과격해졌다. 이를 악물고 냉장고를 열어 거기에 들어 있던 레 몬주스와 맥주, 각종 소스까지 닥치는 대로 집어 던지며 더글러스 는 절규처럼 외쳤다.
“이것도 안 되냐? 이것도 안 통해? 응?”
누군가 보았다면 웃었을 테지만 더글러스로서는 최선을 다한 필사적인 실험과 노력이었다.
불행히도 아이린의 유령에게는 정말 조금의 타격조차 주지 못 했다. 타격을 주지 못했다기보다는 아예 느낌도 주지 못했다. 오히려 아이린의 유령 쪽이 더글러스의 행동이 재미있어 데리고 놀듯 장난치는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하느님, 맙소사. 이런 씨발!’
어지간한 사람 같으면 포기할 상황이었고 ‘차라리 죽여’라고 멋지게 말했을 상황이다. 하지만 아무리 우습고 비참해져도 더글러 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다가오지 마! 다가오지 말란 말이야! 이런 제기랄!”
더글러스는 책이며 유리잔이며 자기가 아끼던 장식품조차도 아 낌없이 손에 잡히는 대로 쥐었다. 그리고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 로 계속 아이린의 유령을 향해 집어 던졌다.
“아직 해 볼 게 더 남았어! 오지 마! 오지 마! 이건 어때? 이건? 이것도 안 통해?”
초라하지만 필사적인 발악이었다. 궁색해진 더글러스는 물리적 인게 아무것도 통하지 않자 어떻게든 말을 걸어 볼 생각까지 했다.
“이봐… 이러지 마. 원하는 게 뭐지? 우리 대화해 보자고. 너 내 이름도 불렀잖아. 그렇다면 넌 말할 수 있을 거 아니야? 뭘 바 라지, 응원하는 게 뭐야?”
말도 경우에 따라서는 훌륭한 무기가 될 수 있지 않은가? 그러 나 안타깝게도 아이린의 섬뜩한 미소는 변하지 않았다. 계속 협박 하듯 빨간 매니큐어인지 혹은 피인지가 번들번들하게 빛나는 손 톱만 협박처럼 휘둘러 보일 뿐,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이봐, 아이린, 너 이러는 게 맞아? 너 빌에게 죽은 거 맞지? 나는 그걸 조사하고 있어. 네 억울한 죽음을 밝혀 주려고!”
그래도 아이린은 다가온다.
“이런 건 결코 현명한 행동이 아니야. 왜 빌의 손아귀에 놀아나 는 거지? 조종당하고 있어? 지배? 마법? 이런 제기랄. 뭐든 좋으 니 다가오지 마 제발 다가오지 말라고”
원래 말재주가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래도 더 이상 집 어 던질 것도 무기로 쓸 것도 통하는 것도 없는 판에서 포기하지 않고 필사적으로 입을 놀렸다. 그러나 아이린은 더글러스의 말 같 은 것은 파리만큼도 신경 쓰지 않았다. 악령은 다시 더글러스를 창가 쪽으로 몰아붙이려는 듯 조용히 다가왔다.
‘이런 제기랄. 이렇게 죽는 건가?’
더글러스는 순간 마음속으로 망설였다. 귀신의 손톱에 찢겨서 갈기갈기 찢어져 죽는 게 나을까. 아니면 창밖에서 대기하고 있을 빌의 총 한 방을 이마에 맞고 죽는 편이 나을까? 더글러스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둘 중 하나밖에는 없어 보였다.
‘그래, 그렇다면 차라리 총 쪽이 훨씬 더 빠르고 고통이 적지 않 을까? 빌이 그랬다고 써 놓으면 적어도 빌은 처넣을 수……!’
절망에 빠진 나머지 자기희생적인 생각까지 들었으나, 곧 더글 러스 특유의 오기가 치밀어 올랐다.
‘이런 제기랄.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너희가 바라는 대로는 안해 죽더라도 너희가 바라는 대로는 안 죽을 거야.’
다시 오기가 치민 더글러스는 인상을 찌푸리며 크게 외쳤다.
“겨우 이 정도냐? 응? 더 해 봐. 맘대로 해 보라고! 내가 그렇다 고 눈 하나 깜짝할……”
더글러스가 말을 다 잇기도 전에 아이린이 다시 한번 그 무시 무시한 손톱을 허공에 휘둘렀다. 더글러스는 여태까지 기세등등 하게 소리치던 것과는 다르게 기겁해서 머리를 움켜쥐고 주저앉 으며 그 손톱을 피했다. 분명 거기서 손을 아래로 뻗기만 하면, 아 까의 싱크대 문짝처럼 더글러스를 갈기갈기 찢어 버릴 수 있을 텐 데도 아이린의 유령은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조롱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조롱하고 괴롭히고 마음껏 가지고 노는 것이다. 그러다 마침내 자신은 빌의 총에 맞아 이마에 뚫린 구멍으로 피를 내 쏟 으며 쓰러져 가겠지.
‘아니야. 그렇게 할 수는 없어. 그건 안 돼. 이런 제기랄.’
더글러스는 바닥 쪽으로 몸을 굴려서 그나마 땅바닥에 흩어져 있던 그릇과 유리 조각, 그리고 손에 잡히는 잡동사니를 닥치는 대로 아이린을 향해 집어 던졌다.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아이린의 유령에게 이런 잡동사니 중 하나가 통한다는 기대 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포기할 수는 없었다. 계속 겁먹고 목을 움 츠린 추한 꼬락서니를 보였고 절대 사내다운 모습은 아니었다. 허 나 상대가 바라는 대로 되기는 싫었다. 최소한 추한 발버둥이라 도치다 죽어야지. 이대로 포기할 순 없었다. 발작적으로 물건을 집어 던지던 더글러스는 아이린의 유령이 성큼 더 다가오자 뒤로 계속 밀려만 갔다. 싱크대 가스레인지가 등에 닿았다. 더글러스는 가스레인지에 몸을 바싹 붙인 채 서서 덜덜 떨며 울부짖었다.
“이봐. 이러지 마. 제발.. 이러지 말아 달라고 네 억울한 죽 음을…………. 아, 제기랄. 그 손톱 좀 집어넣을 수 없어? 아니, 제발 이러지 말란 말이야……………”
애걸하듯 추하게 울부짖는 더글러스 앞에서 아이린의 유령은 잠깐 다가드는 것을 멈추었다. 그런 눈동자로 보이는지조차 의문 이었지만 익은 생선의 눈동자로 역겹다는 듯이 더글러스를 바라 보다가 표정을 살짝 일그러뜨렸다. 경멸과 조소가 잔뜩 어린 표 정. 그리고 쉴 틈 없이,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지도 모르는 채 움직 이는 더글러스의 입을 향해 서서히 양손을 뻗었다. 그 무서운 손 톱으로 입을 찢어 버리려는 듯 성큼 다가왔다.
“오오・・・・・・ 안 돼. 제발…………….”
애걸하며 겁에 질린 채 울부짖던 더글러스의 표정이 일순간에 득의에 찬, 그리고 그 특유의 독기를 뿜는 굳은 표정으로 바뀌었 다. 그리고 입에서 거친 욕설이 튀어나왔다.
오지 말랬지? 이 쌍년아!”
그와 동시에 더글러스는 여태껏 등 뒤로 손을 돌려 조작하던 가 스레인지 레버를 돌렸다. 아까부터 가스가 계속 퍼지도록 가스레 인지 레버를 열어 놓고 어떻게든 시간을 끌던 참이었다. 이건 구 형 고물이라 안전장치조차 달려 있지 않을 테니까. 충분히 가스가 퍼졌는지 모르겠지만 더 이상은 시간이 없다. 만약 이것마저도 안 통한다면 방법도 없었고, 설령 통하지 않는다고 해도 빌의 손에 죽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제기랄!”
더글러스는 독하게 마음먹고 가스레인지의 레버를 힘껏 비를 었다. 곧이어 커다란 불덩어리가 허공에 생겨나 주변을 휩쓸었다. 온몸을 덮쳐누르는 거대한 충격, 소리라고 느끼기도 전에 귀를 후 려치는 묵직한 타격감, 환해졌다고 느끼기도 전에 눈앞이 깜깜해 졌다. 그리고 이윽고 모든 것이 잠잠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