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외전 3 : 새로운 시대를 꿈꾸며 : 2화 – 번뇌
번뇌
하지만 곧 번뇌가 밀려왔다. 이전에도 준후는 참다 못해 사람을 공격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해동밀교 당시 양아버지인 서 교주 를 공격했던 과거가 있었던 준후는 사람을 공격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퇴마사 일을 하면서 몇 번이나 상대를 없애 버리고 싶다는 충동에 빠진 적이 있었다.
마스터와 최후를 상대할 때도 뇌전 기술을 끌어올렸고 마스터 를 맞추었다. 물론 그건 마스터가 조롱 삼아 일부러 맞아 준 것이 지만, 정말 고의로 맞출 생각을 한 건 분명했다. 게다가 아녜스 수 녀와 박 신부가 싸울 때도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아녜스 수녀를 죽이려 했었다. 박 신부가 말려서 간신히 참았지만, 그때도 준후 는 감정의 고삐를 놓쳤었다.
준후는 문득 지금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또 다른 마음속 의 자신이 속삭였다. 준후는 마음속으로 번뇌와 치열하게 싸웠다.
‘할 수 없잖아. 이제 너는 곧 소멸돼 없어진다고! 신부님이나 현 암 형을 구하려면 뭐든지 할 수 있어야지!’
‘아냐, 그래도 이런 식으로는 안 돼!’
‘정말 그럴까? 그럴 수 있을까? 아녜스 수녀도 살려 둘 수 있 어? 지금의 너라면 문제가 안 돼! 아무도 몰라! 암살 기술에다가 네가 지닌 수많은 사람의 힘을 합하면 간단히 아무도 모르게 죽여 없앨 수 있다고! 가장 적은 불합리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란 말이야!’
‘그 여자는 절대 용서할 수 없어!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는….!’
‘현암 형을 생각해 봐. 아녜스 수녀를 막지 못하면 현암 형은 죽 어! 승희 누나와 함께 손목만 남고 죽게 돼! 당장 막더라도, 그 여 자는 집요하게 방해하고 무슨 일이든 꾸밀 거야! 이번 위기도 잘 풀릴 수 있는 것을 그 여자가 다 망쳐 놓은 거야! 그런 여자를 살 려 둬서야 되겠어?’
준후는 몹시 괴로웠다. 다른 누구에게나 자비심을 가질 수 있 었지만 아녜스 수녀만큼은 용납하기 힘들었다. 더구나 그녀는 최 고로 위험한 능력자인 데다가 거의 미쳐 있었다. 준후 자신도 내 심 아녜스 수녀를 가장 없애 버려야 할 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밉다. 없어지는 게 낫다.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 반드시 죽여버리겠 …….
후는 번민에 빠졌다. 겉으로는 아닌 척하고 있었지만 마음은 계속해서 기울어져 갔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생각이 점점 짙어졌다. 아녜스 수녀를 죽여 불합리가 발생하더라 도 오히려 그편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굳어졌다.
그때 해밀턴이 다시 재촉했다.
점점 견디기 힘들어진다! 그리고 시간도 없다! 저쪽에서 폭음이 들렸다!
폭음이 들렸다는 것은 이미 아녜스 수녀의 일당들이 현암과 승희를 공격하기 시작했다는 의미였다. 그것은 이미 퇴마사들이 최 소두 갈래로 나눠졌다는 뜻이다.
이미 나눠졌네요 이때쯤 현암 형과 승희 누나하고 저와 신부님이 나눠졌었어요!
그러면 어떻게 할 거냐? 우리도 나눠질까? 아니면 함께 한 쪽씩 상대할 까? 네가 바라서 얻은 권능이니 나는 네 뜻대로 하겠다!
준후 선택해야만 했다. 둘이 나눠져서 상대할지, 아니면 같이 가서 하나씩 상대할지. 그리고 나눠진다면 누가 어느 쪽을 상대할 지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일단 마음이 급했다. 그 이유는 박 신부와 현암 측의 정확한 사 망시간을 둘 다 몰랐기 때문이다. 시간적으로는 현암 측이 먼저 인 것 같았으나 폭음이 들리는 것으로 보아 아직 늦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래도 서둘러 구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앞섰다. 불행히도 아무리 많은 수법을 알고, 영체의 몸이 됐어도 몸을 여러 개로 나 누는 수법은 없었다. 비슷한 것이 있긴 했지만 그렇게 나누면 위 력도 떨어져서 상당한 강적들인 상대를 격파하지 못하고 발각될 확률이 높았다. 더구나 영체는 비행 속도가 그리 빠르지 않았다. 달리는 것보다야 당연히 빠르지만, 엄청나게 빠른 이동은 하지 못 했다. 둘 다 영체 상태가 익숙하지 못해서 그럴지도 몰랐다. 준후 는 많은 기술을 얻었지만 모조리 인간의 몸으로 쓰는 기술이라 영 체에 잘 적용될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 어느 쪽 전력도 만만치 않았다.
원래였다면 상대가 가능했을 것이다. 해밀턴은 여전히 최강자 고 많은 능력자의 힘을 얻게 된 준후는 그 이상이었다. 그러나 섭리에 의해 지속적으로 몸이 갉아지는 핸디캡이 생겼으며, 퇴마사 들이 그들을 인식해서도 안 된다는 큰 제약이 있었다. 심지어 퇴 마사들에게 가까이 가면 섭리에 의한 반발은 더더욱 강해져서 견 딜 수 없을 정도였다.
아녜스 수녀 쪽은 어느 정도 여유가 있겠지만 아스타로트가 보 낸 괴물 무리는 그 힘의 정도를 아직 몰랐다. 결정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고민 끝에 준후는 말했다.
나눠져요.
그 말에 해밀턴은 다시 한번 물었다.
그게 나을 것 같으냐? 내 생각은…………….
말끝을 흐리던 해밀턴은 말을 중단했다.
아니, 됐다.
준후는 걱정돼 물었다.
버틸 수 있으세요?
아직은 괜찮다. 다만, 좀 손해가 큰 것 같다. 어느 쪽을 택하건, 네가 좀 서둘러 처리하고 내 쪽을 도와줘야 할지도 모른다.
사실 해밀턴은 몹시 약해진 상태였다. 최강자였지만 역시 섭리 의 반발력을 계속 이겨 내는 것은 불가능했던 것이다. 지금도 불 사의 능력과 준후의 보조로 어떻게든 버티고는 있는 셈이었다. 자 존심 강한 해밀턴이 이렇게 말한다면, 정말 좋지 않은 상황인 것 이다.
‘어쩌지? 함께 하나씩 처리할까? 그게 더 나을까?’
박 신부는 한참을 더 도망치다가 괴물 무리를 만나고 나서 준후 와 헤어졌다. 그러므로 시간적 여유는 있었다. 그렇다면 함께 영 체를 보존하면서 단번에 아녜스 수녀를 제압하고, 박 신부를 구하 러 가는 편이 맞을 수도 있었다. 머릿속의 생각으로는 그랬다. 그러나 준후는 쉽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일단 현암 측을 구하 러 가자니 박 신부가 너무도 마음에 걸렸다. 또 박 신부를 먼저 구 하러 가자니 현암 측이 마음에 걸렸다. 양측 다 너무도 구하고 싶 었기에 차마 한쪽을 선택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무조건 두 갈래 로 나눠져야만 했다.
더 문제가 된 것은 준후의 번뇌였다. 준후는 아녜스 수녀를 직 접 보게 되면 과연 자신이 참을 수 있을지, 마치 조금 전 운명이 의도적으로 깨닫게 해 준 것 같은 암살 기술을 사용하지 않을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지금 지닌 능력으로 암살 기술을 사용한다 면 전대미문의 위력이 나올 것이다. 아무리 영혼이 붕괴되는 중이 라도 아녜스 수녀 정도는 단방에 끝장내 버릴 자신이 있었다. 그 러나 직접 사람을 죽이는 것은 퇴마사들이 평생 지켜 온 원칙을 깨 버리는 행위였다.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준후는 결국 수단을 가리지 않는 쪽을 택했다. 어차피 없어질 영혼뿐인 몸이다. 그리고 모든 것을 걸고 시작한 일이니 반드시 성공시켜야만 했다. 박 신부와 현암, 승희의 생존과 평온한 삶을 위해 자신은 무엇이든 희생시킬 수 있다고 결심했다.
‘심지어는 지구를 멸망시킬 생각도 했던 나야!’
그렇게 생각해 보니 최선의 방법이 떠올랐다. 상대적으로 시간 적 여유가 있는 박 신부에게 해밀턴을 보내고, 자신은 현암 쪽으 로 가서 아녜스 수녀를 끝장내 버리면 된다. 그건 박 신부를 도우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해밀턴이 자신의 살인 장면을 못 보게 하 려고 보내는 것에 가까웠다. 게다가 그렇게 하면 조금이라도 해밀 턴의 힘을 보존할 수 있을 테니 나쁘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현암 과 승희는 영을 보는 능력이 떨어지니 크게 조심할 것도 없었다. 아녜스 수녀의 부하들도 내친김에 모조리 처리해 버리면 될 것이 었다. 현암과 승희는 영문을 몰라 하겠지만… 어쨌든 그걸로 끝 이다. 그 이후 박 신부에게로 가서 아스타로트의 괴물들을 처리해 버리면 된다. 괴물들의 처리 정도는 수단 방법을 가릴 것 없으니 오히려 쉬울 것이다.
‘신부님이 눈치채시기도 전에, 모든 힘을 한 번에 터뜨려 버리자!’
어차피 상대는 괴물들이었다. 그렇다면 능력자들에게 얻어 낸 수백 종의 기술을 동시에 쓸 수 있었다. 영체이며 넘치는 힘이 있 는 데다 뒤를 생각하지 않아도 되니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물론 그렇게 무리하면 아마 영체가 터져 나갈 것이다. 그러나 준후는 그래서 더 좋다고 생각했다. 반작용으로 몸이 터져 나가건 말건, 후련하게 모조리 싹 쓸어버리고 박 신부가 눈치챌 틈도 없이 곧바 로 소멸돼 버리면 가장 간단한…………….
후는 한참 생각하고 있다가 돌연 해밀턴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내가 미스터 현암 쪽으로 간다.
네? 저더러 결정하라고…………….
해밀턴은 무겁게 말했다.
아니, 그래선 안 되겠다.
아뇨! 제가 그쪽으로 가는 게…………….
그러자 해밀턴은 엄하게 말했다.
아녜스 수녀가 그쪽에 있기 때문인가?
그 말에 준후는 놀라 말을 멈추었다. 그러자 해밀턴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천 년 동안 피바다에서 살아온 나다. 그런 내가 네 마음속에 서 살의가 마구 뻗어 나오는 것을 못 느낄 것 같으냐? 아녜스 수 녀가 밉겠지. 나도 그렇다! 아녜스 수녀를 죽이기 위해 남겨 둔 세 계에서 암살자까지 고용한 게 나다. 그러나 너는 안 돼. 그러니 가지마라.
하지만 그게 최선의 방법…………….
준후야. 나는 박 신부님이 아니다. 그러나・・・・・・ 신부님이 너를 그렇게 가르치셨느냐?
그 말 한마디에 준후는 큰 충격을 받았다. 머릿속에서 커다란 동종이 울리는 것 같았다. 준후가 대답하지 못하자 해밀턴은 부드럽게 설득하는 듯 덧붙였다.
최선의 방법이건 뭐건, 가장 옳은 길을 택해야만 하는 거다. 박 신부님이 라면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 같구나. 나를 구원하신, 내가 제일 존경하는 분을 대신해 감히 한마디 해 보았다.
준후는 부끄러워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해밀턴의 말이 맞았 다. 퇴마사들은 항상 최선이나 최상의 길보다는 무조건 옳은 길, 신념의 길을 걸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과 많은 영혼, 심지어는 블 랙 서클의 영혼까지도 구원할 수 있었다. 아하스 페르츠 같은 최 고의 악도 더없이 든든한 동료 해밀턴으로 바꿀 수 있었다.
초치검사건이나 대홍수의 위기에서도, 말세의 징벌자 사건에서 도 오히려 최선이 아니었기에 세상을 구할 수 있었다. 심지어 해 동감결이라는 전대미문의 예언조차도 부정해 버리면서 말이다. 준후는 다시 한번 깨달았다.
잘못했습니다. 제가 정말 잘못 생각했습니다.
준후 즉시 해밀턴에게 사과했다. 그러자 해밀턴은 마치 박신부처럼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 그러면 됐다.
그럼, 제가 신부님 쪽으로・・・・・・・
아무래도 그게 좋겠다. 솔직히 난 박 신부님 쪽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 해밀턴의 판단은 냉정했다. 아녜스 수녀에 대한 준후의 감정도 문제지만, 기왕 나눠질 경우라면 이편이 맞았다. 이미 둘은 양쪽 의 전투 상황을 함께 본 바 있었다.
박 신부와 괴물들이 어떻게 싸웠는지는 몰라도, 해밀턴은 남은 흔적을 보았을 때 이 정도는 자신도 감당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죽지는 않더라도 그것들을 압도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면 아녜스 수녀 측은 달랐다. 아녜스 수녀도 무서웠지만 해밀턴이라면 상대하고도 남았다. 그보다 더 두려운 것은 사방 에서 쏟아지는 현대 화기의 총알과 폭탄들이었다.
그건 저도 막을 수 있어요. 저도 영체 상태잖아요?
준후가 말했지만 해밀턴은 간단히 되받았다.
총 정도는 그렇겠지만, 폭발물은 그렇게 만만치 않다.
현대 무기들은 영체에게 아무 타격을 가하지 못한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실상은 달랐다. 가령 총알이라면 주된 공격력은 물리력 이다. 그래서 물리력에 반응하지 않는 영체라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폭발물은 달랐다. 물리적 파편과 더불어 가장 근본적인 불 공격과 폭압에 의한 압력, 오행으로 치면 풍(風)에 해당하는 타 격도 같이 가하는 이 세 가지에 모두 면역이 되기란 쉽지 않았다. 영체라고 해도 강렬한 열과 폭압 등에는 타격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해밀턴은 조금 더 설명했다.
그리고 우리의 목적은 미스터 현암과 미스 승희를 지키는 거다. 나만 멀쩡 하면 되는 게 아니다. 그들에게 쏟아지는 공격을 막아 줄 수 있어야 한다. 영체로는 그렇게 못하지.
그러면 해밀턴 씨도 방법이 없지 않나요?
아니, 있다. 잠시 동안 몸을 급조해 가지면 된다. 정 안 되면 주변 사물에 빙의라도 해야지. 그러면 내게는 육체가 생긴 것이나 다름없으니 불사의 능력으로 인해 모조리 빗나가게 될 거다. 그리고 나는 그들과 너보다 연관이 적어서 불합리가 덜 발생할 거다. 그들과 친한 네가 직접 나서는 것보다는.
이쯤 되자 준후도 더는 고집을 부릴 수 없었다.
알겠어요.
결정이 되자 둘은 신속하게 헤어져 각각 목표를 찾아 나서게 됐 다. 준후가 해밀턴의 영체에서 나가자, 준후의 보호 주술도 준후 의 영체만 보호하게 됐다. 그러자 둘은 스스로의 힘만으로 섭리의 반발력을 버텨내야만 했다. 예상대로 그 힘은 엄청났다. 준후 보호 주술에 힘을 더 퍼부어서 영체가 깎여 나가는 것을 막았고, 해밀턴은 계속 재생시키는 것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그렇게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서둘러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