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혼세편 1권 12화 – 터
“이런 염병할, 도대체 왜 공사를 못 한다는 거야? 엉?”
강준 사장의 성질이 원래 다혈질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 안다. 그러나 요즘 들어 강 사장의 화내는 횟수가 평소보다 부쩍 늘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계획된 콘도 공사가 예정된 날짜보다 훨 씬 지연되고 있었던 것이다. 공사가 지지부진하자 강 사장의 얼 굴은 금방이라도 폭발해 버릴 것같이 시뻘겋게 부풀어 올랐다. 저러다가는 금방 펑 하고 터지지나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강사 장은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뜨거운 콧김까지 씩씩거리면서 수 화기에 대고 고함을 질렀다.
“이런 우라질! 뭐? 뭐가 어째? 에라. 이 주변머리 없는 것들 아! 요즘 세상에 무슨 놈의 귀신이야 귀신이! 뭐? 정말이라고? 이 쌍놈의 자식들, 거짓부렁 치지 마! 뭐? 직접 와서 보라구? 아 니기만 해봐라. 그냥 확……………”
수화기를 부서져라 내던진 강 사장은 그래도 화가 가라앉지 않는 듯 앞에 놓여 있던 물컵을 끌어당겨 냉수를 벌컥벌컥 단숨에 들이켰다.
‘어디 내가 직접 가 봐야지. 안 나오기만 해 봐라. 현장 감독이 니 작업반장이니 모조리 모가지를 날려 버린다. 아이고, 제기랄. 고혈압조심해야 하는데………………
강 사장은 좀처럼 속이 가라앉지 않는지 계속 씨근거리며 숨 을 내뿜었다.
00 지역의 산 중턱. 그다지 높거나 험한 산세는 아니었지만 제법 산수가 화려하고 멀지 않은 곳에 자그마한 호수도 자리 잡 고 있어서 경관이 좋았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 지 않은 곳이라는 점에서 대한민국에 남아 있는 땅 중 이만큼 좋 은 콘도 자리는 없을 것이다.
건물 짓는 일을 전부 쳐서 백이라고 한다면 기초 토목 공사가 칠십이라고 한다. 그런데 벌써 팔 개월이나 인부들을 다그쳤는 데도 원래 예정했던 공정의 육십 퍼센트밖에 작업이 진행되지 않았다는 것을 강 사장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인부를 삼교 대로 해서 밤에도 공사를 진행하면 칠 개월 내로 토목 공사는 다 끝낼 수 있다고 큰소리 뻥뻥 치던 놈이 바로 박세곤이라던 현장 감독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밤에는 전혀 공사를 진행시킬 수 없을 뿐더러, 아예 인부를 뽑을 수 없다니. 거기에다가 아무리 높은 임금을 제시해도 일할 사람을 구할 수 없다고? 이 무슨 빌어먹을 소리란 말인가!
“당장 현장 감독 불러와! 어서!”
놀란 강 사장의 비서가 황급히 밖으로 달려 나가더니 잠시 후 무척 피로한 듯 얼굴이 움푹 꺼져 추레한 몰골의 남자가 현장 사 무실로 들어왔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간다는 거야! 뭔 놈의 귀신 타령이 야, 귀신 타령이!”
박 감독은 말없이 강 사장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 었다. 박 감독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강 사장은 더욱 울화가 치밀었다.
“이런 젠장! 뭐라고 말 좀 해 봐! 어서!”
박 감독은 그냥 서 있는 것만으로도 피곤하다는 듯, 강 사장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잠시 눈을 비비다가 흰 봉투 하나를 내밀고는 몇 걸음 뒤로 물러서서 멀거니 강 사장을 쳐다보았다. 강사장은 황당했던지 손에 든 봉투를 열어 보았다. 사직서였다.
“이런 염병할! 누구 마음대로 그만둬? 공사 망쳐 놓고 그만두 면 다야?”
강 사장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으나 박 감독은 오히려 그런 강 사장을 불쌍하다는 눈초리로 바라보더니 어깨를 으쓱하고는 몸을 돌려 문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래! 젠장! 갈놈 다 가랏! 너희 놈들 말고는 사람이 없냐?”
강 사장은 큰소리 뻥뻥 쳤지만 막상 어둠이 깔리자 공사 현 장에 가 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은근히 켕기는 것이 있었기 때 문이었다. 흰 수의를 휘날리고 다닌다는 정체 모를 귀신을 보고 서 기절해 병원으로 실려 가거나 더 이상 일을 못하겠다며 빠져 나간 인부의 수가 벌써 이십 명이 넘었다.
“그러니 어쩌겠습니까? 남아 있는 인부들을 간신히 달래고는 있지만 해만지면 통일하려고 하지를 않아요.”
“안 나가는 게 어디 있어? 아이구…………… 이렇게 늑장부리다가 부도라도 나면 임 소장이 책임질 거야, 엉? 회사 망한 다음에 갈 곳 잡아놨어?”
“그런 말이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냐? 응? 까짓 거 땅에서 해골바가지랑 관부 스러기가 나왔다고 이렇게 귀신 타령이면, 원 세상에, 제길. 우 리나라에 사람 죽어 안 묻힌 땅이 어디 있어, 엉?”
“하지만 실제로 귀신이 나타나는 것을 어쩝니까?”
“뭔 귀신이냔 말이야? 헛것을 보고 지랄들하는거지!”
“아닙니다. 제가 요즈음 마음을 가다듬고 찬찬히 생각해 보았 는데 귀신들이 나타나는 곳은 거의 일정합니다. 밤에 어느 지점으로 다가가거나 파헤치려고 하면 꼭 귀신들이 나타납니다. 관 부스러기와 인골이 나온 것으로 보아 이곳은 전에 묘지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
강 사장의 안색이 이상할 정도로 새파랗게 질렸으나 막상 입 에서 튀어나오는 욕지거리는 여전했다.
“야, 인마! 묘지면 어떻고 어디면 어때? 그냥 밀어 버리면 그만이잖아!”
그러나 임 소장은 강 사장의 욕지거리에는 이력이 난 듯, 침착 하게 말을 이어갔다.
“저도 공사를 하지 말자는 것은 아닙니다. 이만큼이나 진행시 켜 놓았는데 어쩝니까? 그러나 귀신이 나온다는 소리가 정말이 건 아니건………….”
“정말은 뭐가 정말이야? 요즘 세상에 귀신이 어딨냐 말야? 이 병신아!”
강 사장이 계속 욕을 해대자 임 소장도 굳은 표정으로 강사 장을 노려보듯 쳐다보았다.
“그러면 사장님이 직접 현장을 돌아보시지요. 제가 책임지고 안내하겠습니다.”
“지랄하지 마, 병신아! 명색이 사장인데, 내가 밤중에 거기가 서 쪼그리고 앉아 있게 생겼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강 사장은 어딘가 겁먹은 표정이었다. 강 사장의 말투가 조금 누그러진 것을 보고 임 소장은 어조를 낮추 었다. 임 소장도 화가 나지 않는 바는 아니었지만 할 수 없었다. 어차피 임 소장은 아랫사람일 뿐이었고, 이 회사에 밥줄이 걸린 처지였다. 임 소장 자신은 회사의 정책이나 기타 여러 가지의 일 에 대해서는 잘 알지도 못했고, 그런 것에 관심을 갖고 있지도 않았다. 자신의 일은 이곳에 콘도를 건설하는 것뿐, 그 일에 충 실하여 맡은 바의 소임을 다하는 것만이 지금으로서는 가장 중 요했다.
“지금 공사도 문제지만 이후의 일들이 더 문제입니다.”
“그건 또 뭔 소리야?”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이 상태로 일을 진행시켜 어떻게든 완 공을 시킨다고 합시다. 그러다가 만약 손님들이 든 후에 이상한 일이 하나라도 생겨 보십시오. 또 공사중에 이러한 사건들이 있 었다는 것이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알긴 어떻게 알아!”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습니다. 어떻게든 알려질 겁니다. 그 렇게 된다면 애써 세운 건물을 사람들이 찾지 않게 되는 일까지….”
“음!”
강 사장은 신음 같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기가 막힌 일이기 는 했다. 이십 세기도 막바지에 접어든 지금 귀신 때문에 공사가 진척이 안 된다니. 그리고 그런 것을 두려워해야 하다니…………….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임 소장의 말도 옳거니 와 뭔가 꺼림칙한 게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지. 엉? 굿이라도 할까?”
강 사장은 반은 농담으로 한 말이었는데 임 소장의 태도는 심각해 보였다.
“그렇게라도 해야죠.”
“그럼 어떻게? 원, 참. 제기랄! 무당이라도 찾아가야 한단 말인가?”
“그럴 수는 없지요. 사람들 보는 눈이 있는데요.”
“못 할 건 뭐 있어? 다들 고사는 지내잖아.”
“그거야 사람들에게 알린다는, 그리고 축하하고 번영을 바란 다는 좋은 의도로 그러는 것이지, 이번처럼 일을 정말 수습하기 위해 그러지는 않지 않습니까?”
“아는 거 많아서 좋겠어. 말도 그렇게 잘하니 얼마나 좋을까? 부러워, 흥!”
임 소장은 화가 나선지 부끄러워선지 얼굴이 벌겋게 되더니 말을 이었다.
“무당 말고라도 이런 일들에는 또 나름대로의 전문가를 써야 하는 법입니다. 제가 아는 사람이 있으니 어떻게든 조치를 취해 보죠”
“전문가? 흥! 세상에 ………… 사기꾼이겠지.”
“사기꾼이라도 효과만 있다면 그만 아닙니까? 제가 듣기로는 그 사람이 맡아서 해결 못한 일이 없었다고 하더군요.”
임 소장은 삐치기는 했지만 그래도 호기심과 기대에 가득 찬 눈으로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는 강 사장의 얼굴을 보면서 머릿속으로 한 사람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 친구에게서 우연히 얻어들은 이야기를 이럴 때 써먹게 될 줄이야……………
안재민 기자는 느닷없이 걸려온 선배의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그냥 오랜만에 안부나 물으려고 전화한 줄 알았더니 자 신에게 다짜고짜 청탁을 했기 때문이었다.
“아이고, 안 돼요. 그 친구 성질이 워낙 불같아서………….”
“안 될 것이 뭐가 있어? 어차피 그 사람들, 그런 일들 처리해 주고 다닌다며? 이번 일도 급해. 나를 포함한 수십 명의 일자리 가 달린 일이라고.”
“그래도 그건 ・・・・・・ 이거 참 곤란한데…….”
“꼭 좀 잘 이야기해 달라구. 보수는 섭섭하지 않게 해 준다고 약속했어. 지금 하루 공사가 지연되면 손실이 억대에 이르는 판 인데 잘만 해결해 주면 보수가 문제겠어?”
“그 친구는 돈을 받는 사람이 아닙니다.”
“허허허. 그럴 리가. 뇌물을 준다는 것도 아니고 정당하게 맡은 일을 하면 주겠다는 것인데 그래도 마다해?”
“아마 받지 않을 겁니다. 자신의 능력을 써서 보수를 받는다는 것은 생각도 하지 않는 친굽니다.”
“허허허. 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는 그만하게. 그러면 그 친구 는 흙 파먹고 사나?”
“진짜로 흙만 먹고 살지도 모르죠.”
안 기자는 조금 멍청하게 대꾸했다. 친구이기는 했지만 알다 가도 모를놈이었다. 자신의 눈으로 여러 번 보고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힘을 가진 친구. 현암이라면 정말 흙은 아니더라도 공기 나 이슬만먹고 사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해서였다. 그러나 수화 기 건너편의 임 소장은 웃으며 말했다.
“예끼, 이 사람, 장난하지 말게. 어쨌든 자네만 믿겠네. 꼭 연 락해 주게. 이건 정말 중요한 일이란 말일세.”
더 이상의 말도 없이 임 소장은 그만 전화를 끊어 버렸다. 안 기자가 당황하여 거푸 임 소장을 불렀지만 이미 수화기는 뚜 하 는 발신음만 울리고 있었다. 안 기자는 울상이 되어서 전화를 던 지듯이 내려놓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런데 저편에 서 안 기자의 눈치를 살살 보고 있던 스크립터 김자영이 슬그머 니 곁으로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안 기자! 지금 누구랑 이야기했어요?”
“아? 응……. 아니야, 아냐…………….”
안 기자는 얼버무리려고 했지만 자영의 눈동자는 장난기와 호 기심이 섞여서 집요하게 반짝였다. 지난번 초치검 사건 때 생사 고락을 겪은 이후로 손민구 기자를 포함한 세 사람은 같이 비밀 을 간직하고 있다는 의미에선지, 저승 문턱까지 갔다가 돌아온 동지애 때문인지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스스럼이 없어져 가까이 지냈다. 그러나 남자답게 아마 마음속으로 존경하던 지연 보살의 죽음에도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입도 뻥긋하지 않는 손 기자와는 달리 김자영은 지난번 일에 일말의 아쉬움을 가지고 현암과 박 신부, 준후 등의 능력을 세상에 밝히자는 견해 를 몇 번인가 꺼낸 적이 있었다. 퍽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모양 이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몇 번이나 타일렀지만 아직도 그런 마음은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현암 씨 이야기 같던데……………. 맞죠?”
그렇게 눈치챌 만한 말은 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도 어떻게 여 우같이 눈치를 챘는지 모를 일이었다. 워낙 천성이 순진한 안기 자는 뭐라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울상이 되어 주변의 눈치 만 살폈다. 세상 모든 것의 화(禍)가 입에서 나온다는 말을 지금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안 기자가 임 소장을 알게 된 것은 초치검 사건이 일어나기 전 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초치검 사건이 발생했을 때에도 안 기자 는 처음엔 현암이 정말로 그렇게 경천동지할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다만 괴사건이나 이상한 일들을 목 숨 걸고 따라다니는 현암을 이상한 놈으로 여기거나 그런 쪽에 정신 팔린 괴짜 정도로 치부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현암이 관심을 가지고 개입하는 일들은 하나같이 더 이상의 여 파를 남기지 않고 잠잠하게 사라져 버렸다. 공식적인 보도는 없 었지만 직업 특성상 일반인보다는 자세한 것을 알 수 있는 안기 자는 그때마다 묘한 경찰 측의 뒷이야기를 듣곤 했다.
“거참, 이상하지. 누가 말끔히 뒷수습까지 해 버린 것 같아요. 그것도 우리가 도저히 알 수 없는 방법으로……………. 이번 일에도 이상한 흔적이 많이 나왔는데 어떻게 뭐라고 딱 잘라 단정할 수 가 없네요. 돌벽이 깨어지지도 않고 마치 벤 것처럼 반으로 갈라 져 있기도 하고. 목격담도 도대체가 희한한 것들만 들리데요. 불 이 붕붕 날아다니고 번개가 번쩍거리고 했다는데, 원…….”
그런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을 무렵, 우연히 모 건설 현장 소장이라는 임진호 선배와 한 술자리에서 자기도 모르게 현암이 라는 괴짜 친구에 대해 입을 나불거린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때 웃기만 했던 임 선배가 이렇게 자신에게 현암을 소개시켜 달라 는 청탁을 하리라고는 예상도 못했다. 자영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는 안 기자가 밉살스럽다는 듯, 특유의 여우 전술(?)로 안 기자를 눈에 보이지 않게 달달 볶아서 신경을 거슬리게 만들고 있었다.
“아이고, 미치겠네. 사람 속 좀 긁지 말아요.”
결국 안 기자가 지고 말았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자영은 얄밉게 웃으면서 무슨 일이냐고 다그쳤다. 물론 사람이 잘 안다 니는 흡연실 구석에서 말이다.
수련할 때 외에는 밖에 잘 다니지 않는 현암은 느닷없이 준후 가 바꿔 준 전화를 받고 인상을 찡그렸다. 안 기자의 전화였는데 아직 무슨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니지만 목소리가 기어들어 가는 품이 보나마나 뭔가 아쉬운 소리를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현암이냐? 나다. 그런데 있잖냐. 그러니까…………….너 뭐 하냐?”
“아, 응. 음, 그래. 실은, 흠흠…… 말하자면………..
“속 시원하게 말해. 답답하다.”
“음, 그러니까 누가 너를 찾는다. 무슨 일을 부탁하려고 한대…..”
안 기자는 잔뜩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현암이 소리라도 지 르지 않을까 싶어 반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사자후던가? 그런 것으로 소리를 지른다면 전화통이 터져 날 아가버릴 거야. 으으으!’
안 기자는 떨리는 손으로 수화기를 부여잡고는 자초지종을 이 야기했고 벼락이 말로만 듣던 벼락이 아니라 현암이 정말로 벼락을 떨어뜨리는 것은 아닐까 불안하기도 했다떨어지지 않 나 싶어서 목을 잔뜩 웅크렸다. 그러나 의외로 현암의 반응은 선 선했다. 현암은 남을 돕는 일에 있어서 일의 경중을 놓고 가린다 는 생각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크건 작건 간에 보 이는 일, 들리는 일 중에서 현암이 도움을 줄 수 있는 일, 그러니 까 영적인 일이 있다면 언제나 달려 나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래? 음, 뭐 별다른 일도 없으니 가보도록 하지.”
“어? 너 정말이냐?”
“못 갈 거야 뭐 있니. 남을 돕는 일인데. 그런데 너, 나 많이 팔고다니냐?”
“으윽! 아, 아니야. 아주 오래전에 입 한번 잘못 놀린 것뿐이 야. 절대 그 이후는 누구에게도 이야기한 적 없어! 정말이야 정말….”
“흠!”
현암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좌우간 앞으로는 내 이야기 절대로 떠들고 다니지 마라. 남
돕는 건 좋지만 공연히 소문나는 건 질색이야. 알겠지?”
“응? 응! 그럼!”
“그래. 미리 연락 취해 줘. 아, 참, 그전에 조건이 있다.”
“뭔데?”
“이번 일 무사히 끝내도 절대 다른 사람에게 소문나지 않도록 약속을 받아야 해. 그쪽 사람들도 말이야 알겠지? 남의 구경거 리가 되는 건 질색이니까.”
“아, 물론, 그럼, 그럼. 꼭 그럴게. 보수는 두둑할 거야 아마.”
“그런 건 필요 없어.”
“왜 필요 없냐? 정당한 일의 대가인데……………. 너는 흙 파먹고 사니?”
“남을 구하라고 얻은 힘인데, 그걸 팔아먹으란 말이냐?”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해. 그나저나 그런 종류의 소문 중에는 헛소문이 훨씬 많은데 헛고생이 되지는 않을지 모르겠군. 하긴 내가 헛고생하는 편이 무슨 일이 있는 것보다는 낫지만……………. 나 혼자만 가도 충분할 테니 금방 그리로 가도록 할게.”
현암은 간단히 말하고는 안 기자가 알려 준 전화번호와 주소 를 받아 적었다. 그리고 안 기자는 내려올 필요 없으며 언론 쪽 의 어떤 사람도 얼씬거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다짐받 은 뒤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뒤에서 김자영이 눈을 반짝거리고 있다가 슬쩍 사라진 것을 안 기자는 알지 못했다.
목적지인 공사 현장에 도착한 현암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분명히 안 기자가 잘 알아듣고 조치를 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강 사장이라는 사람이 떠들썩하게 사람들을 한 무더기 몰고 마중까지 나온 것이었다. 언제나처럼 남루한 차림으로 터벅터벅 흙길을 걸어 올라온 현암은 당황스럽기도 하고 곤혹스럽기도 했다.
“핫하하. 전 이 회사 대표인 강준이라고 합니다. 먼 길 오시느 라 고생 많으셨소. 핫하하. 잘 부탁합니다.”
현암은 당황스럽고 창피하기까지 했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강 사장이라는 사람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뻔뻔하게 생긴 얼굴이었다. 또 겉으로는 웃고 있어도 속으로는 현암을 우 습게 여기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현암은 승희처럼 남의 마음을 읽어 내는 재주는 별로 없었지만 어느 정도 눈치는 있는 터였다. 강 사장의 얼굴을 유심히 보던 현암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돌 처럼 굳은 표정 그대로 몸을 돌려서 올라오던 길을 내려가기 시 작했다.
“에엥?”
강 사장은 옆에 있는 임 소장에게 눈짓을 했다. 왜 저러느냐, 혹시 사람을 잘못 본 것은 아니냐는 뜻이었다. 그러나 현암의 모 습은 임 소장이 안 기자에게 들었던 모습 그대로였다.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게 있나 봅니다. 아이고, 이러다가 가 버 리겠군요. 제가 데리고 오죠.”
강 사장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아니, 제깟 놈이 도대체 뭐라고! 무당 부스러기같이 생긴 놈이 사람을 도대체 뭘로 보고!
당장이라도 소리를 칠 것 같은 강 사장의 표정을 보고는 옆에 서있던 비서가 강 사장을 끌고 임시로 지어진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여보세요! 이봐요! 이현암 씨 아니십니까?”
임 소장이 구르듯이 달려 내려와 현암을 붙잡고 말하자 현암은 조용히 대답했다.
“맞습니다.”
“아니, 그럼 안 기자가 연락한 분이 맞죠? 그런데 왜 그냥 가십니까?”
“제가 할 일이 없을 것 같아섭니다.”
“예? 그게 무슨…….”
현암은 방금 강 사장의 관상을 보고 정나미가 떨어진 것이었 다. 그런 타입의 사람이 어떻게 행동할지는 뻔했다. 이번 일도 필경 강 사장의 어떤 잘못 때문에 벌어진 것이라고 짐작되었으 며, 일을 잘 해결하더라도 그런 사람에게서는 도리어 화를현 암을 틀림없이 난처하게 만들 것 같았다-입을 것 같았기 때문 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임 소장은 현암에게 집요 하게 매달렸다. 현암이 입도 뻥긋 않는데도 임 소장은 극진한 말 로 애원했다.
“사장님 보시고 기분이 상하셨습니까? 참아 주세요. 선생님 이 그냥 가 버리면 우리는 어쩝니까? 무서워 죽겠습니다. 제발요…….”
임 소장의 말에는 진실함이 배어 있었다. 게다가 자신이 무슨 대가를 바라고 온 것도 아니었는데 이렇게 무작정 뒤돌아 가 버 리면 어쩌면 무슨 자존심이나 허세로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암은 마음을 고쳐먹기로 했다.
‘어차피 응낙했던 일 아닌가 말한 건 지켜야지. 할 수 없다. 얼른 처리하고 가는 게 도리겠지?’
현암은 속으로 생각하고는 말없이 몸을 돌렸고 임 소장은 기 뻐하면서 함께 사무실로 올라왔다. 그 와중에도 강 사장은 비서 에게 잡혀 사무실 안에서 현암에게 별의별 욕을 내뱉고 있었다. 청각이 예민한 현암은 보통 사람 같으면 절대 듣지 못할 욕들을 고스란히 들을 수 있었지만, 묵묵히 쓴웃음을 짓고는 걸음을 옮 겼다.
시간이 흘렀다.
강 사장은 씨근거리면서 현암의 얼굴도 보지 않으려 했고 임 소장은 현암의 눈치를 보면서 비위를 맞추려고 주위를 알짱거렸 다. 그러나 현암은 그런 임 소장의 모습까지도 보기가 싫어서 혼 자 있게 해달라고 하고는, 사무실 옆에 쳐 놓은 작은 천막에 혼 자 들어가 앉아 있었다.
인부들의 증언도 들을 만큼 들었고 그 밖의 정황도 대강이나마 조사해 놓았기 때문에 더 이상 알아볼 일은 없었다. 그러나 현암으로서는 정말 이번 일을 해야만 하는가 고민스러웠다. 정 황은 분명했다. 이곳은 분명 묏자리였다. 주변을 보더라도 명당 자리인데다 죽은 지 오래되지 않은 인골과 관 조각이 나왔다는 점. 어느 부근을 건드리면 흰옷의 노인이 나타나서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로 호통을 친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틀림없이 묏자리에 건물을 세우기 때문에 영이 노한 것이었다.
현암은 동티가 난다는 자리에 가 보았으나 이상한 것은 없었 다. 임 소장은 공사중에도 전혀 항의를 받은 적이 없으니 남의 묏자리일 리는 만무하다는 의견이었다. 현암은 그 말을 별로 믿 고 싶지는 않았으나 인부들에게 물어보아도 누구 하나 그런 일 을 전에 듣거나 본 적은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아마도 누가 모 르는 사이 묘를 썼거나, 아니면 묘를 쓰고 난 후 불초한 후손들 에게 버림받은 묘지였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의미에서 건 아직 백(魄)이 스러지지 않은 사이에 묘를 무참히 발굴한 것 이나 다름없으니, 영이 놀랄 만도 했다. 그렇지만…………….
‘잘 타일러서 승천시켜야 하지 않을까? 사실 그 방법밖에 없지 않은가.
첫눈에도 마음에 들지 않은 강 사장 같은 사람을 위해, 어쩌면 가엾은 일을 당한 것일지도 모르는 영을 무작정 승천시켜 일을 마무리 짓는다는 게 현암으로서는 영 내키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러한 일로 영이 인간 세상에 복수를 한다는 것도 결코 옳은 일이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현암은 강 사장이 장삿속으로 한 말이 기는 했지만 그 말이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다고 여겨졌다. -전국에 묏자리 아닌 곳이 어디에 있는가. 이승에서는 산사 람이 살아야지 죽은 사람이 자리를 잡고 있으면 되겠는가? 마음에 드는 사람이 아닌 강 사장이 그런 말을 했기 때문에 현 암으로서도 더욱 조심스러워지고 전적으로 그 의견을 묵살해서 는 안 된다는 압박감이 생기는지도 몰랐다. 옳은 판단을 하기 위 해서는 귀가 열려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현암이었다. 결국 현 암은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잘 타이르자. 사람을 난폭하게 다루고 위험한 짓까지 한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으면 힘은 사용하지 않으면 될 것 아닌가. 어 차피 영은 저승으로 가서 환생을 해야 하는 운명이니까. 이승의 일에 집착하기보다는 편히 쉴 수 있게 해 주는 편이 좋겠지?’ 현암은 속으로 몇 번이고 다짐하면서, 주머니 안에 손을 넣어 준후가 만들어 준 부적을 더듬어 보았다. 현암이 영과 직접 대화 를 하는 방법은 준후가 만든 부적의 힘을 빌리거나 신필을 쓰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자꾸만 강 사장의 악에 받친 듯 벌게 진 얼굴이 떠올라서 기분이 찜찜해졌다.
사실 한 가지 이상해 보이는 것이 있었다. 큰소리를 계속 치면 서도 강 사장 자신은 현장 부근에 결코 발을 들여놓으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겁쟁이여서 그렇다고도 볼 수 있었지만 강사장은 불량배 부류에 가까웠지 겁쟁이 부류는 아닌 것 같아 묘하 기는 했다. 그러나 그것도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라고 생각하면 서 현암은 한숨을 내쉬었다.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군. 에이, 더러워서.’
밤이 으슥하게 깊어 가자 산기슭을 타고 내려오는 바람이 가 랑잎을 휘감아 먼지와 함께 쓸쓸한 듯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믐 께라 찌푸린 눈썹 같은 희미한 그믐달 한 자락이 밤하늘 구석에 구름을 타고 빛날 뿐이었다. 반쯤 구름에 가린 채 괴괴하게 빛나 는 달은 이상하게 노랗다 못해 핏빛처럼 붉어 보였다. 비가 오려 는지 하늘은 짙은 회색 구름으로 뒤덮여 있었고 별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인부들은 이상하게 기가 질리는 듯 소리도 크게 내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현암이 있는 천막 쪽을 바라보면서 수군대고 있었 다. 현암이 정말로 재주가 있는지 보려고 그런 것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사무실에서 환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것이 강 사장 과 임 소장도 내려가지 않고 머무는 모양이었다.
강 사장은 계략을 꾸미는 중이었다. 강 사장으로서는 말 한마 디 않고 천막에 불상처럼 앉아만 있는 현암이 아무래도 의심스 러웠다. 그래서 동티 나는 장소에 일부러 불도저를 들이대게 해서 귀신을 불러낼 계획이었다. 현암이 재주가 있다면 당장 일이 처리될 것이니 좋고, 현암이 도망치면 실컷 비웃고 망신을 주면 된다고 생각했다.
“둘이 같이 도망가면 좋은데……………. 흐흐흐.”
강 사장은 음흉하게 웃으면서 다시 한번 술잔을 기울였다. 공 사까지 와서도 양주 아니면 마시지 않는 강 사장의 행실과 그 가 지금 하고 있는 생각에 기가 막혀서, 임 소장은 아무 말도 하 지 못했다. 그런 말을 듣고 보니 은근히 현암의 처지가 걱정이 되기도 해서 슬쩍 빠져나가 현암에게 가 볼까도 했지만, 강 사장 은 그런 마음을 다 아는 듯이 임 소장을 나가지 못하게 옆에다 붙잡아 놓았다.
“임 소장, 내 옆에 있어. 임 소장 후배가 얼마나 재주 좋은지 나랑 같이 보자구. 응?”
밤에는 부근에 삽 대는 시늉만 해도 흰옷의 노인이 무서운 얼 굴로 나타나 사람이 내는 것 같지 않는 목소리로 호통을 친다는 데, 불도저로 밀어 버린다면 귀신이 노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임 소장의 걱정이었다. 그러나 강 사장은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 는지 태연했고 속이 타는 것은 임 소장뿐이었다. 왜 현암을 불러 왔을까. 그냥 이깟 놈의 사장이 하는 공사는 되든 말든 놔둘걸 하는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들었다.
주변이 습해지는 것을 몸으로 느끼던 현암은 산 중턱 어딘 가에서 스멀스멀 기운이 맺혀 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영 적 능력이 그다지 크지 않은 현암으로서는 미리 준후의 부적으 로 알아내고 마음을 다지고 있었지만 천막 주위에 사람들이 자 주 드나들어서 헷갈리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영적 기운이 짙어지자 현암은 천막 안에서 조용히 몸을 일으키고는 태극패 를 꺼내 왼손에 쥐었다. 딱히 무기로 쓰기 위해 집어 든 것은 아 니었다. 자신은 준후의 부적으로 영을 볼 수 있었지만, 혹시 인 부들이나 다른 사람의 불안감을 해소시키기 위해서는 영을 보여 주어야 할 경우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 다. 그런데 현암이 텐트를 나서자마자 눈앞에는 전혀 뜻밖의 사 람이 나타났다. 생글생글 웃음을 띠고 있는 사람은 바로 초치검 사건 때에 만났던 친구 재민의 동료 김자영이었다.
“안녕하세요, 현암 씨?”
“어, 아, 예……. 여기는 어떻게?”
현암이 머쓱해하면서도 무뚝뚝하게 묻자 자영은 애교를 담아 웃어 보였다. 보통 남자들이 보기에는 충분히 매력적인 미소였 겠지만 불행하게도 현암에게는 그저 여우 한 마리로밖에는 보이 지 않았다.
“그냥 와봤어요. 호기심도 나고….”
“이런 일에는 호기심을 가져서 좋을 일 하나도 없습니다.”
현암은 그 말만 하고 걸어가려고 했으나 자영이 현암의 앞을 막아섰다.
“이러기예요? 오랜만에 봤는데?”
“그러니까 모르는 척 안 하고 인사도 하지 않았습니까?”
“흐음…….”
자영은 기분이 상하는지 입을 샐쭉거리다가 금세 얼굴을 폈다. “제가 또 취재 온 것으로 알고 그러시는군요. 걱정하지 마세 요. 현암 씨 이름은 하나도 안 낼게요.”
“기왕 인심 써 주시는 것, 아예 영에 관련된 것은 하나도 쓰지 말아 주십시오.”
“그게 뭐예요? 저도 취재는 해야죠. 얼마나 떼써서 왔는데.”
“안됐군요. 그렇게 애를 쓰셨다니. 다른 곳에나 가 보실 것
현암이 말하면서 걸음을 떼려고 하는데 이번에는 요란한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인부들이 주로 귀신이 나온다고 말하던 근방 이었다.
“어? 이건…….”
현암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이런 밤중에 갑자기 중 장비를 돌리는 것일까? 그것도 보통 때에는 작업을 할 수 없을 만큼 뭔가가 나온다는 곳 부근에서 남의 눈에 띄는 것이 싫어서 사람들 접근을 막아달라고까지 부탁했는데…………….
“아차! 혹시 일부러 영을 자극하려고……………”
속이 뒤집혔다. 현암은 서둘러서 그쪽 방향으로 뛰어 올라가 기 시작했고, 샐쭉해져서 째려보고 있던 자영도 뒤를 따라 달음 질쳐 비탈을 올라갔다.
토목 공사가 어느 정도 진행되어 평평하게 깎아 들어간 산비 탈 중턱 부근에서 흙을 밀어내며 맹렬히 달려가고 있는 불도저 가 보였다. 현암은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그곳으로 몸을 날렸다. 도대체 무슨 심보로 이런 짓을 하는지 강 사장이 앞에 있다면 한 대갈기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 생각도 잠시, 주변의 요기가 짙어지면서 불도저의 주변으로 이상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이 먼 발치에서도 눈에 들어왔고, 움직이는 불도저 위로 흐릿하게 흰 형체의 모습이 점점 맺히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불도저를 운전 하고 있는 사람에게 머리 위의 모습이 보일 리 없었다. 그 형체 는 요란스럽게 덜컹거리며 달려가는 불도저의 위에 꼿꼿하게 발 을 붙이고 서 있었다. 현암은 반사적으로 월향검에 손이 갔으나 함부로 영을 해칠 수도 없어서 그냥 죽어라고 달려가며 운전자 에게 차를 멈추고 비켜서라고 고함을 쳤다. 그러나 현암의 목소 리를 못 들었는지 불도저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인부들 사이에 ‘금단의 구역’이라고 알려져 있던 장소는 산중 턱을 거의 다 깎은 공사 현장의 한쪽 구석에 있었는데, 그곳만은 공사를 하지 못해서 멀리서 보기에도 표가 났다. 불도저는 그 부분을 정면으로 밀어붙일 것처럼 달려들고 있었다.
제길, 이럴 거였다면 나는 왜 불렀다는 말인가! 밥통 같은 놈들!’
현암은 힘을 다해서 달렸으나 불도저가 더 빨리 도달할 것 같 았다. 그 순간, 불도저 위의 흰 형체가 스르르 사라지더니 갑자 기 펑 하는 소리가 들렸고, 기세등등하게 달려들던 불도저가 검 은 연기를 내뿜으며 덜컹 멈추어 서고 말았다. 그와 더불어서 불 도저를 타고 있던 사람의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불도저가 멈 췄기 때문이 아니라 땅에서 수십 개의 불빛이 허공으로 솟아올 랐기 때문이다. 누가 잡고 있거나 줄로 매달지도 않았는데 공중 에 둥둥 떠 있는 불덩어리들은 도깨비불이었다.
“으아악!”
현암이 불도저에 다다랐을 때, 운전하던 인부가 비명을 지르 면서 뛰어내렸다. 인부의 몸에는 어느새 현암이 보았던 사람 모 양의 흰 형체가 엉겨 붙어 있었고, 인부는 얼굴을 후벼 파듯이 움켜쥐고는 비명을 질렀다. 현암은 급한 김에 월향을 내쏘았다. 꺄아악!
월향의 귀곡성 소리가 허공을 울리면서 가는 은빛 선이 날카 롭게 허공을 그었다. 총 같으면 빗나가서 사람이 맞을 우려도 있 었지만 월향검이 빗나갈 리 없었다. 그러나 월향검이 인부의 머 리 윗부분에 닿을락 말락 할 즈음 흰 형체가 꺼지듯 스르르 사라져 버렸다. 그 앞에서는 도깨비불이 시위를 하듯 사방을 빙빙 돌 았다. 현암은 숨을 몰아쉬면서 인부에게 뛰어들어 쓰러지려는 그 사람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고통과 공포에 질린 남자의 얼굴 에는 몇 개의 기다란 붉은 줄무늬가 언뜻 보였고 피도 흐르고 있 었다.
‘음? 이 상처는?”
현암이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인부는 쓰러지듯이 그대로 기 절했다. 현암은 월향검을 받아 쥐고는 주변을 살폈다. 눈앞에서 는 여전히 도깨비불들이 빙빙 돌면서 날고 있었지만 그것은 그 다지 겁날 것도 없었다. 다만 흰 형체가 사라져 버린 것이 마음 에 걸렸다.
저쪽에서 왁자지껄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조마조마해 하고 있던 인부들이 이상한 소리를 듣고 몰려나온 것이다. 하지 만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해서 도움이 될 리는 없었다. 물론 사 람이 많이 있으면 양기가 짙어져서 음기를 기본으로 하는 영들 이 물러나는 법이지만, 이러한 원령들은 무슨 짓을 할지 몰랐고 행여 다치는 사람이 생기면 안 될 것 같아 현암은 공력을 모아 소리쳤다.
“가까이 오지 마시오!”
현암의 목소리가 사방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며 산 저편에 부 딪혀 와르르 되돌아왔다. 거짓말처럼 웅성거리는 소리가 그쳤고 현암은 사방을 둘러보았다. 어느 사이엔가 도깨비불들은 깜박거 리면서도 이글이글 타오르는 모습을 하고 현암의 주위를 위협하 듯이 에워싸고 있었다. 현암은 도깨비불들보다 흰 형체를 찾는 데에 기를 집중했다. 아무래도 도깨비불들은 허상 같았고, 조금 전에 사라졌던 형체가 진짜인 것 같았다. 현암은 쓰러진 인부를 두드려 깨웠다. 인부가 간신히 정신을 차리자 현암은 빠른 목소 리로 말했다.
“뒤쪽으로 물러서시오!”
현암이 빨리 도망가라는 듯 인부를 툭 건드리자 그는 언제 자 기가 넘어졌었냐는 듯 벌떡 일어나서는 쏜살같이 달음질쳤다. 뒷전에서 인부들이 와하고 소리를 질렀지만 현암은 들은 척도 않고 주위의 기척에만 신경을 집중했다. 현암은 영들도 알아챌 수 있도록 공력을 약간 넣어서 외쳤다.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무분별하게 사람을 해치지 마 시오!”
말을 외치자마자 현암의 발밑에서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현암은 반사적으로 몸을 날렸다. 무언가가 휙 하면서 발을 아슬 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가는 느낌이 전해졌다. 방금 전에 사라져 버린 흰 형체였다. 형체는 몹시 작았다. 현암이 의아해할 사이도 없이 흰 형체는 허공에서 공이 튀듯이 몇 번이나 방향을 바꾸어 서 현암을 덮쳤고, 그러자 도깨비불들도 현암의 시야를 방해하면서 난무하기 시작했다. 현암이 몸을 옆으로 틀자 그 형체가 어깨 부분을 스치고 지나갔다. 상처는 입지 않았지만 옷이 찌익 소 리를 내며 찢겨 나갔다.
“괘씸한!”
현암은 몸을 빙그르르 회전시키면서 태극기의 ‘흡’ 자결을 사용해 오른손에 공력을 모았다. 그러자 허공을 튕기며 날아오 르던 흰 형체는 부르르 떨면서 흡인력에 필사적으로 반항했다. 현암은 발에 힘을 실어 디디면서 공력을 점차로 올렸지만 흰 형 체도 끌려들지 않으려고 공중에 팽팽히 버텨 매달렸다. 마치 보 이지 않는 줄을 놓고 줄다리기를 하는 것 같았다. 오성의 공력을 썼는데도 놈이 끌려오지 않자 현암은 속으로 조금 당황했다.
‘상상외로 대단한 놈이군.’
현암은 공력을 더 끌어 올릴까 하다가 급하게 힘을 ‘발(發)’자 결로 바꾸었다. 흰 형체는 자신이 버티던 힘에다가 현암이 밀어 내는 힘까지 더해 밀려드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빙그르 돌면서 한쪽으로 날아갔다. 현암은 됐다 싶어 안도의 숨을 쉬려 했으나 이른 판단이었다. 흰 형체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재빠른 놀림으 로, 허공에 떠 있던 도깨비불들과 교묘하게 부딪히면서 속도를 줄이지 않고 방향만을 바꾸어 그대로 현암의 얼굴을 향해 날아 들었다.
‘이크!’
현암은 반사적으로 오른팔을 들어 흰 형체를 막았다. 현암의 공력으로 인한 반탄력과 흰 형체의 영력이 충돌하면서 푸른 불 꽃을 튀겼고, 흰 형체는 뒤로 튕겨 나가 사라져 버렸다.
“어디 갔지? 나와라!”
현암의 눈이 피로한 듯 풀리면서 일시적으로 앞이 흐려졌다. 빌린 부적의 힘이 사라질 때에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아차! 그러고 보니 부적을 사용한 뒤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났 구나. 그렇다면 다른 것을…………….’
현암이 다른 부적을 찾기 위해 주머니에 오른손을 넣었지만 부적이 잡히지 않았다.
‘이크! 이거 어디다가 흘린 모양이네!’
당황한 현암은 할 수 없이 왼손의 태극패를 오른손으로 옮겨 쥐었다. 공중의 도깨비불들만 일렁이며 다가와 어느새 주위를 완전히 포위하고 있었지만, 다른 느낌은 전해지지 않았다. 현암 이 긴장하여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흰 형체는 보이지 않았다.
“모습을 보여라!”
현암이 소리치자 또 한 번 사방이 쩌렁 울렸다. 현암의 큰 소 리에 도깨비불 몇 개가 파르르 떨면서 꺼질 듯이 깜박였다. 현암 은 다시 소리쳤다.
“어서!”
이번에는 육성의 공력밖에 사용하지 않았지만 사자후의 수법으로 소리를 친 것이라 그야말로 산이 꽈르릉 울릴 만큼이나 소 리가 컸다. 오히려 저쪽에서 구경하고 있던 인부들 몇이 어이구 야” 하는 신음을 흘릴 지경이었다. 현암은 몸을 한 바퀴 돌리면 서 사방을 뚫어질 듯 쳐다보았다. 일렁거리는 도깨비불 사이로 스산한 바람이 몰아쳐 먼지를 일으켰을 뿐, 다른 것은 보이지 않 았다. 그러나 분명 범상하지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모습을 감추어 버리다니 ・・・・・・・ 영이 공격적이군. 위험한 자다.’
갑자기 현암 주변의 도깨비불들이 일렁거리면서 빙빙 돌기 시 작했다. 한 줄기 흙바람이 일어나면서 사방에서 먼지가 자욱하 게 일었다. 현암은 차라리 눈을 감아 버렸다. 어차피 저쪽에서 모습을 감추겠다고 마음먹은 이상에는, 그리고 부적도 잃어버린 바에는 눈을 뜨고 있어 보아야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눈을 감고 나자 일렁거리던 도깨비불들이 보이지 않아 마음이 편했다.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 마음으로…………..?’
흙바람이 광풍으로 변했는지 사방에서 먼지와 모래가 바람에 실려 현암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그런 자극들에 정 신을 팔 수는 없었다. 그리고…………….
갑자기 현암의 깜깜해진 시계에서 번뜩하면서 흰빛이 보였다. 현암은 텅 빈 마음으로 그쪽을 향해 천천히 오른손의 태극패를 내밀었다. 태극패에 묵중한 힘이 느껴지는 순간, 공력을 ‘추(推)’ 자결로 운용했다.
공중에서 둔탁한 굉음이 들리더니 비명 같은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사람의 음성이 아니라 무슨 짐승 소리 같았다. 그 소리 를 듣자 현암은 조용히 눈을 뜨고 몸에서 공력을 지웠다. 끝났다 고 판단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그만! 그만!”
현암은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현암의 앞에는 흰옷을 입은 노 인이 비틀거리며 서 있었다. 얼굴은 고통스러워 보였고, 눈동자 에는 체념과 원망이 섞인 야릇한 빛이 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눈은 이상하게도 어둠 속에서도 파랗게 빛났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이제 편히 쉬세요. 더 이상 집착하지 마 시고요.”
현암은 조용히 말했다. 그러자 그 노인은 고통스러운 표정으 로 입을 열려고 하더니 꺼지듯 사라져 버렸다. 그때 누가 옆에서 현암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러나 우악스럽게 움켜쥐는 것이 아니 라 조용하고 따뜻하게 잡는 손길이어서 놀라지는 않았다. 현암 이 옆을 돌아보니 김자영이 있었다.
“현암 씨. 이, 이건……………”
현암이 고개를 갸웃하면서 눈썹을 치켜뜨자 자영은 금방이라 도 눈물이 쏟아질 듯한 표정을 지으며 떨리는 손을 들어 보였다. 그 손에는 준후가 만들어 준 부적이 쥐어져 있었다.
“이걸 전해 드리려고…………. 그런데… 현암 씨, 저쪽을 보세요.”
자영은 아마 현암의 뒤를 따라오다가 현암이 무심코 흘린 부 적을 보고 그것을 갖다 주려고 온 모양이었다. 부적을 지니고 있 으면 영을 볼 수 있는 법・・・・・・ . 지난번의 경험으로 자영은 부적 을 든 사람이 손을 잡아 주면 옆의 사람도 영을 볼 수 있게 된다 는 사실을 아는 모양이었다. 현암은 고개를 돌렸다. 눈앞에는 미 처 예상도 못했던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평범해 보이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두 사람, 아니 두 영이 쪼그 리고 앉아서 뭔가를 쓰다듬고 있었다. 그것은 비틀거리면서 캑 캑대는 한 마리 조그만 흰 고양이였다. 살아 있는 고양이 같지는 않고 역시 영인 것 같았다. 그런데 그 두 노인의 영은 고양이를 자상하게 쓰다듬어 주면서도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슬프다는 것인지 기쁘다는 것인지…………. 옆에서 자영이 울먹이 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부터 전 들었어요. 백묘더러………… 저분들은 죽은 자신 들 때문에 그러지 말라고, 그럴 필요 없다고, 계속 말려 왔는데…”
“백묘?”
“저 고양이의 이름인가 봐요. 불쌍해요.”
그렇다면 지금 일어난 일들은 모두 평소에 자신을 길러 준 두 노인의 묏자리가 파헤쳐지자 고양이인 백묘가 저지른 것이란 말인가? 그러고 보니 가끔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나긴 했지만, 그 소리도 고양이와 닮았고 작고 매우 민첩한 행동, 빛나는 눈, 할 퀴는 것 같은 몸놀림들이 고양이와 흡사했다. 현암은 사람도 아 넌 한낱 미물이 은혜를 갚기 위해 그런 일을 했다는 것이 기특하 다는 생각이 들었고, 또 자신이 멋모르고 손을 써서 고양이의 영 을 다치게 만든 일이 후회가 되었다.
현암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노인들은 그저 도란도란 백묘의 이름을 부르면서 고양이를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그러나 몸을 떨고 있는 백묘의 몸은 점차 빛이 희미해지며 금세라도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너마저 가면 우리는 어쩌니….. 어쩌니, 응?
자식도 못 믿고 너만 믿었는데 가면 어쩌니……………. 가면 안 돼. 안 돼……
현암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자영의 부적을 빼앗듯이 들 고 그 앞에 털썩 무릎을 꿇고 앉아 두 노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두 노인이 현암 쪽을 쳐다보더니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분명 현 암이 자신들의 모습을 알아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젊은이…………….
현암은 붉어진 눈으로 미소를 지으며 두 손을 내밀었다. 두 노인은 서로 눈치를 보고 중얼거리더니 말했다.
젊은이가 악의로 그런 게 아니라는 건 아우. 그러니 우리 백묘를 어떻게…………….
현암은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고 애써 미소를 지으며 손 을 내민 채 고개를 끄덕해 보였다. 두 노인은 주저주저하더니 조 심스럽게 이미 반쯤 희미해져 버린 백묘를 현암에게 내밀었다. 현암이 살아 있지 않은 백묘의 영을 받아 들 수 있다고 믿지는 않는 것 같았으나, 백묘를 칠 수 있다면 받을 수도 있다고 나름 대로 생각한 모양인지 선선히 현암의 요구에 응했다.
현암은 공력을 모은 오른손으로 털빛이 눈부시게 희었을 것 같은 백묘의 영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조용히 눈물을 흘리면서 눈을 감고 공력을 모았다. 단전에서 후끈한 기운이 솟구쳐 오르 면서 오른손에 모였다. 사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현암도 알지 못했다. 공력을 어떻게 운용한다거나 하는 계획도 없었다. 다만 간절한 마음과 혼신의 힘을 다한 정성뿐이었다. 아무런 생 각도 하지 않았다. 무념의 상태로 현암은 묵묵히 필생의 공력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감고 있던 현암의 눈에 밝은 빛이 얼핏 비쳤다. 현암은 지친 상태였지만 조용히 눈을 떴다. 그러고는 평소 무뚝뚝했던 것과 는 다르게 환하게 함박웃음을 지었다. 현암의 손 위에는 그야말 로 눈부시게 빛나는 고양이 한 마리가 몸을 웅크렸다 펴며 막 기 지개를 틀었다. 고양이의 몸에서 나오는 빛은 눈보다도 하얗고 보름달보다도 환했다. 반짝이는 별빛까지도 같이 담고 있는 듯 했다. 현암의 등에 자영이 손을 대는 것 같더니 덩달아 좋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나! 예쁘기도 해라!”
고양이가 눈을 떴다. 고양이의 눈은 이제 아까의 분노와 원망 으로 뒤덮인 눈이 아닌 에메랄드빛의 맑은 눈동자로 변해 있었 다. 고양이는 기분이 좋은 듯 갸르릉 소리를 내면서 현암의 손에 등을 비볐다. 현암이 평소에 거의 보이지 않던 너털웃음을 터뜨 리면서 왼손으로 고양이의 등을 쓰다듬는 시늉을 해 보이자 고 양이는 눈을 반쯤 감으며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고, 우리 백묘가…………….
고맙네! 젊은이!
두 노인의 영은 그들의 뒤로 후광이 번득일 정도로 진정 기뻐 하고 있었다. 현암이 씨익 웃으며 백묘를 두 노인에게 넘겨주자 두 노인은 고양이를 어르고 좋아하며 눈물까지 흘리는 것 같았 다. 자영은 손등으로 입을 막은 채 웃으면서도 눈물을 흘렸고, 현암은 그저 미소만을 머금고 있었다.
두 노인은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자그마한 체구였고 특이한 것은 없어 보였다. 아까는 몰랐는데 저만치에는 아주 희미하게 많은 노인들이 열을 지어 서 있는 것 같았다. 현암 앞에 서 있는 분들이 가장 최근에 이곳에서 쉬던 분들이고 저 뒤의 분들은 그 조상들인지도 몰랐다. 두 노인 중 할아버지가 먼저 현암에게 고개를 숙였다. 현암은 송구스러워서 얼른 땅바닥에 엎드려 절을했고, 그러자 노인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고마우이, 젊은이. 고마워. 우리는 이제 가겠네. 사실 백묘를 말리려고 했지만, 이놈이 워낙 고집쟁이여서 말이네.
현암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씨익 웃었다.
사실 우리가 누울 자리 때문에 안 가고 있던 것은 아니네. 물론 산 사 람이 살아야지 죽은 주제에 버틸 수야 있겠는가. 다만 한 번이라도 자식 놈을 보려고…………….
할머니가 슬픈 어조로 중얼거리듯 말하자 갑자기 할아버지가 호통을 쳤다.
그런 말은 뭐하러 하는 거야!
할머니는 당황한 것 같았으나 현암은 그저 고개만 끄덕이면서 말했다.
“자제분이 찾지 않으시는가 보군요. 제가 연락을 취해 이장하 여 편히 모시라고 전하겠습니다. 이름이라도 알려 주시면…………… “
아니네! 젊은이! 우리 자식은 죽었어. 그러니…….
“예? 그렇다면 못 만나실 리가 없잖습니까? 그런…………….”
아니야, 아니야. 젊은이, 신경 쓰지 말게. 이제 우리는 곧 갈 것이니 공연히 수고할 필요 없네.
“그래도 …………….”
아니야. 지금 보여 준 마음 씀씀이만 해도 정말 고마우이. 정말……..
영감. 어서, 어서 갑시다. 어서………….
그, 그래. 어서 가자구. 젊은이, 잘 있게. 자넨 좋은 사람이야. 착한 일 하라구. 응?
현암은 고개를 깊이 숙여 절을 했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두 노인은 서둘러서 고양이 백묘를 안고 허공으로 걸음을 옮 겨 하늘로 향했다. 현암은 두 노인의 영이 왠지 모르게 허둥대는 것처럼 보여 조금 의아했다. 그래도 그러려니 하고 있는데 갑자 기 할머니의 품에 있던 백묘가 쏙 하고 품을 빠져나와 달음질쳐 갔다.
아이고, 아가야! 백묘야!
할머니가 울상이 되어 백묘를 불렀으나 백묘는 계속 달음질쳐 서 공사장의 한쪽 구석까지 달려간 뒤에 길고 날카롭게 세 번 울 었다. 놀랍게도 백묘의 울음은 영적인 울림이 아닌 실제의 울림 이었고, 너무나도 날카롭고 처절한 소리여서 주변의 산마저도 찌르릉 울리며 한참 동안이나 여운이 사라지지 않은 채 길게 메 아리쳤다. 현암과 자영은 어안이 벙벙해 그대로 서 있었다. 울음 을 그친 백묘는 날쌔게 달려가서는 할머니의 품으로 뛰어들어 어리광을 부렸다.
젊은이, 우리 정말 가네. 잘 있게. 또 보세.
아이고! 영감도 주책이지! 저 창창한 젊은이 보고 얼른 죽으라는 말이유?
아이고, 저런저런…… 미안허이! 허허허…….
두 노인의 소박하고 친근한 모습은 어느덧 서서히 어둠 속에 묻혀 사라져 갔다. 현암도 공력을 너무 쓴 탓인지 지치기는 했지 만 흐뭇하게 자영과 시선을 나누었다. 그런데 기분 좋은 정적을 깨고 째지는 소리가 들렸다.
“고양이! 고양이!”
바로 강 사장이었다. 사무실에만 웅크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언제 여기까지 달려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퍽이나 급히 달려온 듯, 숨은 헐떡거리고 얼굴은 파랗게 질린데다가 흙먼지를 마구 피우고 왔는지 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고 있었다. 현암이 대꾸하 고 싶지도 않아서 시선을 돌리려는데 강 사장이 반쯤 미친 듯한 소리로 울부짖듯이 지껄여댔다.
“고양이! 고양이 소리를 들었나? 엉? 그, 그 소리・・・.”
“도대체 왜 그러죠? 그 소리가 뭐가 무섭다고요?”
좀 당돌한 끼가 있는 자영이 나름대로 둘만의 좋은 시간을 깨 뜨린 데 대한 적의를 숨기지 않고 눈에 불꽃이 튈 듯 쏘아붙이 자강 사장은 그 자리에 주저앉으면서 정신이 나간 것처럼 중얼 거렸다.
“고양이, 그놈의 고양이…………. 그놈을…………. 백묘를………….”
그때 섬뜩한 것이 현암의 등줄기를 오싹하게 훑고 지나갔다.
자영도 몸을 휘청하면서 뒤로 물러섰다. 현암의 눈초리가 서서히 무섭게 치켜 올라갔다. 현암의 입에서 무척 화가 났을 때만 나오는 나직하지만 사방을 울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백묘가 뭐요? 고양이?”
“고, 고양이 ・・・・・・ . 그놈의 고양이…………… 내 그놈을….”
“어떤 고양이냐니까!”
현암이 고함을 쳤다. 무의식중에 공력이 들어갔는지 사방의 산이 우르릉 울렸다. 강 사장이 놀라 얼이 빠진 듯이 중얼거렸 다.
“백, 백묘……. 고양이…………… 부모님이 키우던………………”
현암의 눈앞이 샛노랗게 변하면서 순간적으로 아무것도 보이 지 않았다. 지금 이자는 자신의 조상들과 부모가 묻힌 곳을 밀어서 공사를…………….
-불도저로 밀어붙일 때 인골과 관 부스러기 같은 것들이 나 왔지요.
-모르겠어요. 묏자리 같기는 한데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 으니 우리는 그런가보다 하고 그냥…………
“이 금수만도 못한 놈아!”
현암이 무의식중에 있는 힘을 다해 소리를 치자 사방의 산이 흔들리면서 사무실의 유리창과 전구 들이 와르르 깨어져 나갔 다. 옆에 있던 자영도 으악 소리를 내며 귀를 막고 그만 주저앉아 버렸고, 강 사장은 크악 하고 비명을 지르며 넘어져 입에서 거품까지 뿜었다. 그러나 현암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 다. 현암이 오른손으로 강 사장의 멱살을 잡고 들어 올리자 강 사장의 몸은 종이 인형보다도 가볍게 허공에 들렸다. 어쩔어찔 해서 고개를 흔들며 일어나던 자영은 현암의 눈에서 번쩍이는 푸른빛을 보았다. 그 시선은 조금 떨어져 있는 큰 바위를 향하고 있었다. 현암의 힘으로 그곳에 강 사장을 패대기친다면………………
“안 돼요!”
자영은 현암을 붙잡으려다가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안 될 것 같아 양팔을 벌리고 현암의 앞을 막아섰다. 최소한 현암이 사 람을 해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자영의 뇌리에 파고들었 다. 현암은 누구보다 할 일이 많은 사람이 아닌가.
“안, 안돼요! 안돼. 예? 알겠어요? 안돼………….”
현암의 머릿속으로 많은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이제껏 겪어 왔던 많은 일들, 피눈물 나는 과거, 고되었던 시련, 목숨을 걸었 던 아찔했던 기억, 수많은 사람, 사람들………. 사람을 위해서 일 을 한다는 자신이 정말 옳은 것일까? 그러한 의문이 커다랗게 현 암의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공허하게 변했다.
현암이 오른손을 풀자 강 사장은 먼지투성이인 땅바닥에 처박 혔다. 저만치에서 직원과 인부들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으나 누구도 감히 앞으로 달려 나올 생각은 하지 못했다. 현암은 강사장을 놓아주고 나서 그대로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임 소장이 뭐라고 말을 하는 것 같았으나 들리지도 않았다. 현암의 표정은 무뚝뚝하게 변해 있었고 입은 두 번 다시 열릴 것 같지 않게 굳게 닫혀 있었다.
“저는 ᄋᄋ 통신의 스크립터 김자영입니다. 여기 강준 사장은 콘도를 세운다는 미명하에 이 터를……………..”
뒷전에서 들려오는 자영의 목소리도, 인부와 직원들의 웅성 거림도 들려오지 않았다. 현암은 터벅터벅 한결같은 걸음걸이로 비탈을 내려가고 있었다. 땅만 보고 걷던 현암이 잠시, 아주 잠시 하늘을 바라보는 모습을 자영은 미어지는 마음으로 쳐다보았다. 하늘에는 구름이 끼어 별 하나 보이지 않았고, 심술궂은 그믐 달만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