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혼세편 1권 18화 – 그곳에 그녀가 있었다 1 : 일본행 비행기
일본행 비행기
쾌청한 날씨였다.
약한 진동음과 함께 날고 있는 비행기의 창 너머로 구름들이 내려다보였다. 뛰어내려도 푹신하게 받쳐 줄 양털이나 솜뭉치 같았다.
퇴마사 일행과 연희는 일본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바깥 풍경 에 열중했다. 승희는 준후 바로 옆자리에서 한껏 멋을 낸 모자를 눌러쓰고 졸고 있었다. 건너편 자리에 앉아 아무 말 없이 눈을 감고 석상처럼 앉아 있는 현암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무표 정했고, 박 신부는 예약이 취소된 창가 쪽 빈자리에 혼자 떨어져 앉아 창밖을 내다보는 중이었다. 느긋하게 앉아 있는 연희의 기 분은 별로 나빠 보이지 않았지만, 창 너머로 시선을 붙박고 있는 준후의 표정은 평온한 바깥 풍경을 보면서도 이상하게 밝지 않았다.
“이번에는 예감이 이상해요. 가지 않는 게 어떨까요?”
그것은 준후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정확한 예지나 현몽은 아 니었지만 불길한 예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일본 에는 가야 할 이유가 있었다.
준후는 창에서 얼굴을 돌리고 소맷자락 안에 넣어 둔 부적 뭉 치와 부채를 쓰다듬어 보았다. 우연한 기회에 산간 지방을 떠돌 아다니다가 얻은 벽조목) 덩어리를 틈날 때마다 갈고 다 듬어서 살을 만들고 부적과 길상도안을 겹겹이 붙여 만든 벽조 선棗扇)이었다.
‘이걸 쓸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준후는 벽조선을 가만히 만져 보다가 서글픈 생각에 고개를 떨구었다. 얼마 전, 불쑥 현암을 찾아와 놀라운 이야기를 전해 준 한빈 거사가 언뜻 준후를 보며 전음술로 해 준 말이 자꾸만 떠올랐다.
-허허허. 나이는 어쩔 수 없군그래. 하지만 그렇다고 하늘의 뜻이 변하는 것은 아니지.
준후는 눈을 감고 머리를 조용히 흔들었다.
하늘의 뜻! 준후는 천기를 미리 짚어 읽은 적이 있었다. 다른 것이 아니었다. 그건 바로 준후 자신의 명…………….
‘왜 시간이 이렇게 없지? 할 일은 많은데, 너무 많은데…..’
시간이 얼마 없다고 느껴졌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이 그다지 길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은 어린 준후에게 매우 버거 운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나이를 먹는 것이 싫었다. 하루하루가 너무나 짧았다. 그러나 어떤 때는 그래도 아직 꽤 많은 시간이 남은 것이 아니냐고 스스 로 위안을 해 보기도 하고, 운명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억지 로 체념하려고 마음을 다지기도 했으며, 또 때론 모든 것을 잊고 마구 장난을 치거나 정신 집중이 필요한 수련에 몰두하기도 했 다. 그러나………….
한빈 거사가 준후에게 많은 말을 한 것도 아니었고, 다른 사람 들에게 들리게 말한 것도 아니어서 다른 사람은 준후의 그런 고 민을 알고 있지 못했다. 하지만 준후에게 한빈 거사의 말은 뇌성 벽력처럼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차라리 바보였으면, 아무것도 알아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바보였으면…………. 그렇지만 준후 는 한빈 거사의 말 속에 담겨 있는 뜻을 속속들이 알 수 있었다. ‘나이…………. 난 나이 드는 게 싫어. 나이가 들다 보면 어른이 되고, 그러면 나는 떠나야 하는걸…?
준후의 눈에서 이슬 같은 눈물방울이 흘러내렸다. 준후는 다 른 사람들이 혹시 자신을 보는 것은 아닌가 하고 힐끗 옆을 쳐다 보면서 눈물을 소맷자락으로 재빨리 훔쳐 냈다. 그랬다. 자신은 그 생각뿐이었다. 나이를 먹기 싫다는 것, 어른이 되기 싫다는 것. 그러나 제아무리 세상을 뒤집는 능력이 있다고 해도 시간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다.
준후는 자신의 자그마한 몸을 내려다보았다. 편한 것을 좋아 하는 자신의 취향대로 헐렁헐렁하고, 많은 것이 들어가도록 유 달리 크게 지어 소맷자락이 땅에 끌릴 정도인 하얀 저고리. 그 안에 들어 있는 준후의 가냘픈 몸은 원래 나이보다도 대여섯 살 은 적어 보였다. 나이가 드는 것이 싫다는 생각을 항상 머릿속에 두어 왔던 것이 몸이 자라지 않는 결과로 나타난 것 같았다. 자 신은 아직 어렸고, 그렇게 하면 된다고 생각해 왔다.
‘그래, 육체가 자라지 않는다고 나이를 먹지 않는 것은 아니 야. 나는 그걸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거야. 이제 난 어떻게 하지? 어떻게 ……………’
준후는 더 참을 수가 없었다. 눈물이 쏟아졌다. 소리 없이 숨 을 죽여 우는 준후의 어깨가 가냘프게 들썩였다. 그때 누가 준후 의 어깨를 따뜻하게 감쌌다. 옆자리에 앉은 승희였다. 굵은 한 줄기 눈물이 천천히 흘러내려 승희의 옷자락을 적시고 있었다.
누나는 다 알지? 응?
준후가 눈물을 흘리면서 속으로 말하자 승희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준후는 이런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았지 만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승희에게만은 예외였다. 준후는 몸을 돌려 자신을 가려 준 승희의 어깨 너머로 건너편을 쳐다보면서 다른사람이 눈치채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누나, 절대 이야기하면 안 돼요. 응? 신부님이나 형이 걱정하는 거, 난 싫어, 응?
승희는 다시 고개를 까딱하더니 한쪽 팔을 뻗어 준후를 안아 주었다. 자연스럽게 승희의 팔에 파묻힌 준후는 소리가 나지 않 도록 흐느꼈고, 승희는 준후의 작은 등을 계속 쓰다듬었다. 챙 넓은 모자로 얼굴을 가린 승희의 눈에서도 눈물방울이 천천히 흘러내렸다.
현암은 조용히 눈을 감고 참선하는 자세로 앉아 한빈 거사의 당부를 떠올렸다. 지난번 운주사의 와불 사건 때에 잠시 만나 보름 후에 자신을 찾아오겠다고 했던 한빈 거사는 약속대로 보 름째 되는 날 밤에 홀연히 현암을 찾아왔다. 박 신부와 준후가 같이 있을 때였다.
“세상이 흔들리고 있네. 천지의 조화가 흔들리고 있어. 큰 변화가 있을 걸세.”
“나쁜 일입니까?”
“그렇게 단정 지을 수는 없네. 그리고 그 일은 우리나 혹은 다른 어떤 사람의 힘으로도 영향을 받지 않을 걸세.”
박신부가 물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사람의 힘으로 운명 자체에 영향을 줄 수는 없는 일. 그러나 그러한 변혁과 부조화의 틈을 타고 발호하는 악의 세력은 누가 나서서 막아야 하지 않겠소?”
이번엔 현암이 물었다.
“변혁과 부조화의 틈을 타고 일어나는 악이라뇨?”
“천지의 조화가 흔들리면서 잊혔던 악의 힘들이 곳곳에서 일어날 것이다.”
“잊혔던 악의 힘이라면, 그것은 악령이나…………….”
“아니다. 그런 정도가 아니야.”
한빈 거사의 말꼬리가 흐려졌다. 항상 껄껄 웃는 모습만을 보 이던 한빈 거사의 안색이 어두워진 것을 현암은 처음 보았다.
“힘에 힘으로 맞서면 깨어지고 부서져서 사방으로 흩어지는 법이다. 힘으로 제압하면 안 될 것이야. 상대가 힘을 쓰는 데 당 하면 안 되겠지만, 똑같은 힘으로는 상대를 제압하지 못하느니 라. 상대가 옳지 않다는 것을 상대 스스로 알게 한다면, 그것이 가장 큰 무기가 되느니라.”
한빈 거사는 그 말을 남기고 일어서더니 거침없이 걸음을 옮 겼다. 현암이 당황해 한빈 거사를 쫓아가며 어디서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이냐고 물었지만 한빈 거사는 다음과 같은 한마디만을 남겼을 뿐이었다.
“순리대로 되리라. 네가 갈 길은 정해져 있다. 내가 구태여 일러 주지 않아도 가야 할 곳으로 가게 될 것이다. 다만 내가 말한 것을 잊지 말도록 해라. 힘은 힘이 아니고, 옳은 것이 힘이니라.”
‘힘은 힘이 아니고, 옳은 것이 힘이라……………’
현암은 한빈 거사가 남기고 간 마지막 말을 곰곰 되씹어 보았다. 박 신부는 심기가 편하지 못했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다른 일행에게 그런 심기를 보이기 싫어서 그냥 망연히 창밖만 내다보고 있었지만, 마음속으로 왠지 모를 불안감이 치밀어 올 라 언짢았다.
‘석연치가 않아. 이번 일은 어딘가…….’
박 신부는 몸을 비틀고 의자를 뒤로 젖혀 답답했던 자세를 다 소나마 편하게 고친 다음 창밖을 다시 내다보았다. 날씨는 맑았 고 솜사탕처럼 보이는 구름들도 포근하고 따뜻해 보였다. 박 신 부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몸을 푹 파묻고 눈을 감았 다.
‘아무래도 이번 일은……’
이제부터는 떠들썩한 큰일에서 벗어나 주위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 주어야지 했던 자신의 다짐과는 달리, 난데없는 백호의 연 락을 받고 나간 자리에서 예전에 알던 사람을 만났을 때부터 석 연치 않았다. 더구나 그 사람은 적대적 관계였던 일본 밀교의 승 려 도운이었다.
“아시는 사이입니까? 이쪽은 일본 밀교의 승려이신 도운이라 는 분인데…….”
백호는 황당해하는 박 신부의 얼굴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하면 서 물었다. 하긴 초치검 사건 때 있었던 일을 백호가 알 리도 없 었고, 또한 그때의 일은 백호에게 들려줄 만한 성격도 아니었으 니 의아해하는 게 당연한지도 몰랐다. 그러나 도운은 박 신부의 태도에 아랑곳없이 박 신부에게 정중한 태도로 깍듯하게 인사 했다. 도운의 옆에는 깔끔하고 날렵한 차림을 한 삼십 대 중반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이것 참 일이 묘하게 되었습니다.”
박신부가 무슨 일이냐고 묻자 백호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말했다.
“지금 일본에서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데 자신들의 힘 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고 하는군요. 그래서 도와 달라고 요청 이 온 것이지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말입니까?”
박신부가 질문을 하자 도운의 옆에 앉아 있던 깔끔한 인상의 일본 남자가 능숙한 한국말로 말했다.
“아주 복잡합니다. 우선 제 소개부터 드리자면 전에 일본의 각 료로 계셨던 스즈키 씨의 비서관 사이토라고 합니다. 자세한 말 씀은 곧 드리겠지만, 이번 일은 스즈키 씨와 특별한 연관을 가지고 있는데다 외부에 알릴 성질의 것이 아니라서 스즈키 씨가 전부터 친분 관계를 가지고 있던 한국의 …………….”
사이토는 백호가 살짝 눈짓을 하자 말을 얼버무렸다. 아마도 소위 ‘높으신 분’으로 백호가 말하곤 했던 사람의 이름이 나올까 봐 백호가 신호를 보낸 듯싶었다.
“그분에게 부탁을 드렸습니다. 일이 일이니만큼 도와주실 것 으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박 신부는 표정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불쾌 한 감정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높은 사람이 부탁을 했다고 해서 우리가 선뜻 응하는 줄 아는 모양이지? 애당초 우리는 그 높은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고 있고, 더군다나 부하도 아닌데…………….’
그러나 차차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들도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는 것 같기는 했다. 전직 각료였던 스즈키의 옛 동료들 이 차례대로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다. 사망 현장도 대부 분 집 안이나 밀폐된 장소였고, 대부분 고령자라 죽음은 자연사 로 처리되었다. 사망 시간은 모두 늦은 밤. 검시 결과도 그저 흔 히 있을 수 있는 뇌졸중이나 심장마비 따위로 나타났다.
“그분들의 나이로 볼 때 사망에 특별한 원인이 있다기보다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라고 볼 수는 없을까요?”
박신부의 말에 사이토 보좌관은 고개를 저었다.
“사실 언론이나 외부의 사람들은 그렇게 알고 있지요. 현직에 종사하고 있는 분들을 포함해 정계의 원로들이 그런 식으로 의 문의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 알려지면 파문이 상당히 클 테니까 요. 그렇지만, 아니, 직접 보시는 편이 좋겠군요. 외부에는 절대 공개하지 않은 것입니다만 이것을 보십시오.”
사이토 비서관은 품 안에서 누런 봉투 한 장을 꺼냈다.
“그분들이 시체로 발견되었을 당시의 모습을 촬영한 사진입니 다.”
박 신부는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면서 봉투를 열고 사진들을 꺼내 보았다. 각각의 사진에는 하나같이 육칠십 대가 넘는 노인 들이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그 모습 들은 보는 사람의 가슴을 섬뜩하게 만들었다. 전직 의사였고 그 이후에도 수없이 많은 죽음을 봐 왔던 박 신부는 비교적 감정의 동요 없이 사진들을 볼 수 있었지만, 사진에 찍힌 주검들이 정계 의 거물이었다고 한다면 누구든 섬뜩한 느낌을 갖기 충분했다. 인생무상이라고 할까, 주검들은 한결같이 극도의 공포에 휩싸여 양 눈을 크게 뜨고 이를 악물거나 비명을 지르다 숨이 막힌 듯이 입을 반쯤 벌리고 있었으며, 발악을 하다가 쓰러진 징후가 역력 했다.
“이것은……..”
사이토가 사진을 뚫어지게 들여다보고 있는 박 신부에게 말했다.
“그렇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분명 검시 결과는 어떤 외 부의 물리적 충격이나 약물 등이 가해지지 않았다고 나왔습니 다. 또 식구나 보좌관, 경호원이 있는 각자의 집이나 사무실 등 에서 변을 당했습니다. 살해당한 장소가 밀폐돼 있긴 했지만 아 무도 안으로 들어간 적이 없었고, 전화나 외부에서 침입한 소리 도 없었습니다. 방은 안에서부터 잠겨 있었고 누군가가 들어왔 던 흔적도, 탈출한 흔적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분들은 분명 어 떤 대상을 보고 충격을 받거나 놀라서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습 니다. 어떻습니까, 신부님?”
박 신부도 사이토와 비슷한 생각이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사이토가 바다를 건너와서까지 자신들을 찾는지도 알 것 같았 다. 아마도 죽음의 정황이 마음에 걸린 사이토나 그 일행이 밀교 의 자문을 구했던 것 같고, 일본 밀교에서는 여러 차례 그들과 접촉했던 퇴마사 일행의 이야기를 전해 주었을 것이다. 사이토 는 계속해서 열변을 토했다.
“이미 이런 식으로 목숨을 잃은 분이 다섯 분이나 됩니다. 한 결같았지요. 다음 날이 되어서야 발견된 경우도 있고 비명 소리 를 낸 분도 있지만, 그 소리를 듣고 집안 식구나 경호원들이 달 려갔을 때는 이미 이런 몰골로 쓰러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습 니다. 그분들은 모두 스즈키 씨와 막역한 관계에 있었지요. 스즈 키 씨는 다음번엔 당신의 차례가 될지도 모른다고 불안해하고 계십니다. 부탁드립니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그런데 제가 간다고 그분에게 무슨 힘이 되어 줄 수 있겠습니까?”
박신부가 대답을 하자 이번엔 도운이 입을 열었고 사이토가 통역해 주었다.
“저로서는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도운 화상의 말씀에 의하면 그분들의 사망 원인에는 주술적인 냄새가 난다고 하는군요. 때 문에 어떤 주술적인 힘에 의해 살해당한 것이 아닌가 하고 일본 밀교 측에서는 보는 모양입니다.”
“일본의 밀교에 계신 분들 중에서도 커다란 능력을 가진 분이 많을 터인데 어째서 저에게 그런 것을 부탁하시는지요?” “물론 일본 밀교에서도 백방으로 힘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밀교에서는 자신들의 힘만으로는 부족한 모양입니다. 그들은 꼬 리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교묘한 수법을 사용하고 있답니다. 더 군다나 주술적인 흔적도 미미해서 정확히 식별하기가 힘들었다 고 합니다. 다만 지금까지 알아낸 바로는 분명 명왕교(明王敎)의 흔적이 …………….”
“잠깐, 명왕교라고요? 그건 뭡니까?”
박신부의 질문에 도운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언제부터인지 비밀스럽게 일어난 종파랍니다. 밀교의 한 분 파로 추정되는데 행동이 은밀하고 비밀에 붙여져 있어 아직까지 자세한 것은 알려져 있지 않다고 합니다. 그러나 말세론을 펴면서 주술적인 힘을 축적하고 있는 이단 종파인 것만은 틀림이 없답니다.”
“가만, 갈피를 잡기가 힘들어서 그러는데, 일단 제가 질문을 해도 되겠습니까?”
박 신부가 말하자 사이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이토의 얼굴 에는 조금도 감정이 드러나 있지 않았다. 일본인다운 얼굴이라 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의 전직 고위 관료들은 한두 분이 아닐 겁니다. 그런데 왜 몇몇 사람들의 사망이 스즈키 씨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시 는 겁니까? 또 스즈키 씨는 무슨 이유로 다음 차례가 자기라고 생각하는지요? 이미 사망하신 분들과 스즈키 씨와는 어떤 관계 였습니까?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사이토의 안색이 흐려졌다.
“이번 일을 맡아 주신다고 약속하기 전에는 말씀드릴 수가 없 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러면 다른 한가지. 일반적으로 정치인은 주술적인 것을 부 정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의 사망 현장에 명왕교 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까지 알아내신 것을 보면, 애당초 그분들 이 주술을 주로 하는 종교 집단과 깊은 연관이 있었던 것이 아닌 가 싶군요. 맞습니까?”
“자세한 이야기는 역시 신부님이 응낙하시기 전까지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대강은 맞습니다.”
“그러면 돌아가신 분들과 아까 말씀하신 명왕교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까?”
“글쎄요, 그런 자세한 것까지는 알 수 없군요. 아무튼 신부님 께서 스즈키 씨를 직접 만나 보시면 자세한 것을 알 수 있으실 겁니다.”
사이토는 정작 중요한 것은 말해 주지 않으면서 교묘하게 박 신부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박 신부는 생각에 잠겼다가 물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그분들의 사망 현장 에서 명왕교의 주술적인 흔적을 발견했다고 하셨는데, 그게 뭐 죠?”
사이토가 박 신부의 말을 도운에게 건네자 도운이 뭐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이토가 박 신부를 쳐다보며 도운의 말을 한 국말로 옮겼다.
“흠, 지금 도운 스님이 하신 말씀을 어떻게 옮겨 드려야 할지 잘 모르겠군요. 굳이 번역하자면 일종의 여운이라고 할까요? 영 적인 여운, 그런 뜻 같습니다.”
“여운이라고요?”
“자세한 말씀은 역시 이후에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일단은…….”
사이토가 말을 얼버무리자 박 신부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두 사람의 침묵으로 어색해진 분위기 를 깬건 옆에서 묵묵히 듣고만 있던 백호였다. 그가 입을 열었다. “이번 사건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희한한 것들이죠.”
“공통점이라고요?”
“아니, 미심쩍긴 하지만 공통점이라기보다는 단서라는 표현이 맞겠군요. 물론 제 직감에 지나지 않고, 사건 자체에 아무런 증 거도 없어 분명한 건 아닙니다만.”
“그게 뭡니까?”
“사진에 있는 각료들은 이런 모습의 변사체로 발견되었다는 것 외에 또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죠. 이들 주변의 여성들, 그러니까 부인이나 딸, 정부에 이르기까지 그들과 가까이 지내 던 여성들이 한사람씩 실종되었다는 겁니다.”
“예?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여자들이 실종, 즉 유괴되었거나 납치되었다는 말이지요.”
백호가 말하자 사이토는 원망스럽다는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사이토가 불만스러운 듯 퉁명스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것 역시 공개하기가 어려운 사정이 있습니다. 이해해 주십 시오. 어쨌거나 이번 일에 힘이 되어 주신다면 전부 말씀드리겠 습니다. 그러나 그전에는, 죄송합니다만 알려 드릴 수가 없습니 다. 양해 바랍니다.”
박 신부는 눈을 뜨며 몸을 옆으로 틀었다. 옆에는 현암이 석상처럼 앉아 있었고, 건너편에는 연희와 승희가 조용히 앉아 있었 다. 준후의 모습은 승희에게 가려 보이지 않았다.
‘나 혼자라면 모를까. 내가 이런 일을 시작한 것이 오히려 모 두를 고생시키는 결과가 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군.’
박 신부는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하여 이런 일을 시작하는 것은 지금 생각해 보아도 옳은 것이었다. 또 일본으로 가서 스즈키인가 하는 각료를 구하고 일 본에서 일어난 의문의 살인 사건-그렇게 부를 수 있다면 말이 다ᅳ을 해결하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일이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는 우리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일들, 즉 이름 없는 사람들의 고통과 고난을 풀어 주러 달려가지 못하 는 것이 박 신부로서는 더 안타까웠던 것이다. 일본 사람들을 미 워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떻게 보면 그것은 당연한 마음이었 다. 집안 식구가 아픈데 생판 모르는 남의 병간호를 먼저 할 수 는 없는 일 아닌가? 박 신부의 입에서 끙 하는 한숨 소리가 새어 나왔다.
‘좋지 않아. 느낌이 별로…………….’
박신부는 답답한 마음에서 벗어나기 위해 생각을 바꿔 보려 애썼다. 떠나기 얼마 전에 한빈 거사가 찾아와서 했던 말이 아직도 가슴에 걸려 있는데, 전원이 거의 반강제로 일본으로 떠난다
는 사실이 박 신부의 마음을 더욱 답답하게 만들었다.
잊혔던 악의 힘이 일어나려고 한다는 말, 그렇지만 한편으로 순리대로 흘러가리라는 한빈 거사의 말을 되새겨 보았다. 어떻 게 보면 아무런 연관이 없어 보이는 일이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각 사건들에 무슨 연관이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마도 일본 행을 결심하게 된 나머지 반의 이유는 그런 추측 때문이었을 것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