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혼세편 2권 1화 – 그곳에 그녀가 있었다 4 : 명왕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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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혼세편 2권 1화 – 그곳에 그녀가 있었다 4 : 명왕교


명왕교

특별히 차편을 준비하지 않은 현암과 승희는 도운의 안내로 택시 정류장으로 갈까 하다가 렌터카를 이용하기로 했다.

차에 오르면서 도운이 승희에게 영어로 말을 꺼냈다. 현암도 영어는 어느 정도 알아들을 수 있었기 때문에 도운의 말을 대강 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 히로시 씨의 딸을 어떻게 찾을 계획이십니까?” 도운은 아까부터 경찰에서도 찾지 못한 히로시의 딸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지 무척 궁금한 모양이었다. 그러면서도 나름대로 는 현암과 승희의 능력에 신뢰감을 갖고 있었는지 여태까지 자 세한 질문을 하지 않다가 지금에서야 물어보는 것이었다. 승희 가 웃으면서 짤막하게 대답했다.

“염려 마세요. 저에게 맡기시면 돼요.”

현암은 전에 사이토 보좌관에게서 받았던 서류들을 뒤적거려 히로시의 가족사진을 복사한 종이를 꺼내 승희에게 주었다. 승 희는 그 사진을 뚫어지게 들여다보았다. 동그란 얼굴에 눈이 작 은 히로시의 딸은 예쁜 편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활짝 웃고 있 는 사이로 보이는 여러 개의 덧니가 귀엽게 보였다.

승희는 사진을 무릎에 내려놓고 한참 동안 차 속에서 눈을 감 고 생각에 잠겼다. 도운은 그런 승희의 모습을 보고 의아스럽다 는 듯 현암에게 눈짓을 했다. 현암은 말없이 고개를 한 번 끄덕 하고 잠시 기다리라는 시늉을 해 보였을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 았다. 그러나 도운은 여전히 의아하다는 듯 승희의 모습을 가만 히 쳐다보다 현암을 향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승희 씨의 몸에서 이상한 기운이 뻗치고 있네요. 불교 계열입 니까? 아니면…”

현암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밀교적인 기운을 느끼고 그렇게 말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자세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도운은 현암이 계속 묵묵부답이자 도저히 궁금 증을 참을 수 없는지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지금 승희 씨는 투시력을 발휘하시고 계신 것 아닙니까? 이 토록 영적인 기운이 짙게 뿜어져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일반적인 초능력은 아닌 것 같고. 혹시 이 기운은 밀교에서 말하는…………….”

현암은 도운이 자꾸 채근하자 귀찮은 생각이 들어서 짤막하게 한마디 했다.

“방해하지 마시오.”

현암의 말에 도운은 머쓱했는지 염불 비슷한 소리를 중얼대다 입을 다물었다. 주위가 조용해지자 현암은 승희의 얼굴을 다시 쳐다보았다. 승희의 얼굴에는 송골송골 땀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준후와 연희는 중간중간 사이토 보좌관의 휴대 전화로 전화하 면서 히로시가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된 벳푸의 온천장을 찾아가 고 있었다. 가는 도중에 준후는 주변의 경치가 신기한 듯 까불거 리며 좋아했으나 연희는 그런 준후의 모습이 평소와 달리 어딘 지 모르게 어색해 보였고, 불안감마저 들었다.

준후와 벳푸로 향하는 차편에 몸을 싣기까지 비록 사건에 대 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연희는 단지 영사(靈)만 행하고서 식물인간이 되어 버렸다던 밀교 술법자의 이야기가 머 릿속을 떠나지 않아 내심 찜찜해하던 참이었다. 준후도 그 일을 모르는 것은 아닐 텐데 그에 대해서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어디 놀러라도 가는 것처럼 저렇게 즐거워하는 것이 어쩌면 준후 자 신도 나름대로 불안감을 감추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 아닐까 싶 기도 했다.

여러 번 차를 갈아탄 연희와 준후는 드디어 벳푸에 도착해 온 천장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연희는 길을 걸으면서 이곳으로 오는 동안 내내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바를 준후에게 슬쩍 물어보았다.

“준후야, 히로시 씨가 죽은 게 아마 사월이라지?”

“예.”

“그렇담 거의 한 달 가까이 지난 건데 아직까지 영적 기운이 남아 있을 수도 있니? 물론 나는 잘 모르는 일이지만…………….” 

준후가 씨익 웃으면서 밝고 쾌활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마 남아 있을 거예요. 밀교의 술법자가 잔상만 보고도 식물 인간이 될 정도로 영적 기운이 강한 것이었다니까 한 달 정도 지 났다고 해서 금방 없어지지는 않을 거예요. 가 보면 뭔가를 알아 낼 수 있겠죠.”

연희는 준후의 말에 몇 차례 고개를 끄덕였을 뿐 말이 없었다. 한참을 조용히 걷던 연희가 준후를 내려다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그런데 준후야…..”

“예?”

“준후 너・・・・・・ 정말 자신 있니? 만에 하나 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게 된다면……………”

준후는 실눈을 뜨며 배시시 웃더니 귀엽게 말했다.

“그런 건 염려하지 마시라니까요. 저도 옛날의 제가 아니라구 요. 그런 정도는 별문제 없어요. 그리고 저도 만에 하나를 위해 준비해 놓았는걸요.”

준후는 소매 속을 툭쳐 보였다. 자세히 보니 소매 속에는 보통 준후가 가지고 다니던 부적들과는 다른 딱딱하고 길쭉하게 보이는 물건이 들어 있는 듯했다.

“여차하면 이걸 쓸 테니까 아무 염려 마세요.”

“그게 뭔데?”

“연희 누나도 전에 보시지 않았나? 제가 나갔다가 귀한 것을 얻어왔다고 좋아했던 때 말이죠.”

“아! 그때 …………….”

연희는 어렴풋이 생각이 났다. 연희는 와불 사건을 처리하고 나서 한참 뒤에 서울로 올라온 퇴마사 일행과 합류한 적이 있었 다. 그 사건 후에도 준후는 풍수사들과 함께 지맥을 살피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녔는데, 연희가 방문한 것과 때를 맞춰 돌아왔다. 그때 막 돌아온 준후가 큼지막한 나무토막을 들고 와서는 귀한 것을 얻었다고 매우 좋아했던 일이 있다. 승희가 어디서 기껏 썩 어 가는 시커먼 나무토막을 하나 얻어 와서는 무슨 귀중한 보물 이라도 되는 양 좋아하느냐고 말했지만, 준후는 아랑곳하지 않 고 지저분해 보이는 나무토막을 들고 신나했던 기억이 났다. 

“혹시 그때 그 나무토막?”

“예, 맞아요. 굉장히 귀한 거라고요. 벼락 맞은 대추나무를 우연히 지나가다가 발견한 건데 천지의 양기와 음기가 조화되어 있는 희귀한 물건이에요. 벽조목이라고 악령이나 사마를 제압하는 데 더없이 좋은 물건이라고요.”

“그래? 지금 그 나무토막을 갖고 있니?”

준후는 깔깔 웃었다.

“나무토막을 어떻게 그냥 갖고 다녀요? 잘 다듬어서 제가 부채 를 만들었다구요. 벽조선이라고 이름 붙였지요. 한번 보실래요?” 

준후는 헤헤 웃으며 주변을 살피다가 소매 안에 들었던 길쭉 한 부채를 꺼내 보였다. 준후에게 저런 손재주가 있었는가 싶을 정도로 정교하게 다듬어진 부채는 보통 부채와는 다르게 검붉은 옻칠을 여러 겹 해서인지 반질반질하고 광택이 나는 퍽 고급스 러운 물건으로 보였다. 준후는 부채를 조심스럽게 반쯤 폈다. 검 붉은 표면과는 달리 안쪽은 새까맣게 칠해져 있었고, 빳빳한 누 런색 종이가 발려 있었으며 그 위에는 경면주사(鏡面朱砂)*로 보 이는 희한한 붉은색의 문양들이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빽빽하게 그려져 있었다.

“네가 직접 만든 무기야?”

“예, 꼭 무기라고 하기는 뭣하지만 그래도……………. 헤헤, 꽤 위력 을 낼 수도 있을 거예요. 한 번도 써 본 적은 없지만 그럴 거라는 기분이 들어요.”


* 잘 결정된 주사(朱), 부적 등의 붉은 글씨는 다 이 주사로 씌었다. 옛적부터 붉은 것이 악을 물리친다는 신앙에 의해 부적들은 모두 붉은 주사로 써야만 효력 을 발휘한다고 믿어져 왔다.


“그래? 그런데 이런 부채가 어떻게 무기가 되지?”

“하여튼 두고만 보세요. 솔직히 이 부채를 쓸 일이 없게 되기

를 바라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아무래도 석연치가 않아서 가지 고 왔어요.”

“석연치 않다고?”

연희는 머릿속에 짚이는 게 있었다. 일본에 오면서부터 퇴마 사들의 행동이 전과는 달리 어딘가 모르게 축 쳐져 있었다. 처음 엔 별로 내키지도 않고 거의 타의로 일본에 오게 되어서 그런가 보다 짐작했지만 가만 생각해 보니 그것 말고도 어떤 불길한 예 감 같은 것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싶었다.

그러나 연희는 일단 그 생각을 접어 두기로 하고, 준후와 함께 주위의 표지판들을 훑어보면서 온천장을 향해 바쁘게 걸음을 옮 겼다.


차는 첩첩산중을 달리고 있었다.

뒷좌석에 사이토와 나란히 앉아 있던 박 신부는 오는 동안 내 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박 신부는 왜 갑자기 스즈키가 일행 전부를 만나지 않겠다고 했는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내심 불쾌하기도 했다. 박 신부도 현암이나 준후와 마찬가지로 일본에 오는 것을 그다지 탐탁하게 여기고 있지 않았던 데다가, 사전에 아무런 양해도 없이 이런 식으로 일을 처리하는 게 아무리 느긋한 성격이라고 해도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그런 박 신부의 마음을 아는 듯 사이토가 박 신부의 눈치를 힐 끗힐끗 보다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양해해 주십시오. 일행분을 같이 모시지 못한 점 말입니 다. 사실 말씀을 드렸어야 하는 건데 워낙에 급작스러운 일이어 ……”

“무슨 일이 생겼기에 그러신 거죠? 이야기라도 좀 들읍시다.” 

“예. 그게 좀…………… 일단 말씀드리겠습니다. 스즈키 씨는 지금 정상적인 상태가 아닙니다. 그래서 ……………..”

“예?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뇨? 어제까지만 해도………….”

“어제와는 또 얘기가 다르죠. 그렇게 보안을 철저히 해 놨는데 도 오늘 아침 스즈키 씨는 무엇에 놀랐는지 반실성한 상태로 횡 설수설하더군요. 진정제 주사를 맞고 잠드는 모습을 보고 나왔 는데 저희가 도착할 때쯤이면 깨어 계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모습을 여러분께 보여 드린다는 게 좀…………. 더군다나 낯선 사람들이 여럿 있게 되면 스즈키 씨가 몹시 불안정해져서 행여 증세가 도질까 봐 그런 것이니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허…… 이것 참…….”

박 신부도 뭐라고 말을 할 수는 없었지만, 자신들을 믿고 일을 부탁한 사람들이 자기들 편한 대로 일을 끌어간다는 게 영 꺼림 칙했다. 박 신부가 입을 다문 채 말이 없자 사이토가 당황했는지 머리를 긁적거리며 변명했다.

“도대체 왜 그런지 저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주변에서 경호 하는 사람들만도 수십 명이 있는데 무언가가 나타났다고 횡설수 설하면서 몸을 오들오들 떨고 있었어요. 스즈키 씨가 언제 어떻 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라서 신부님만 모시게 되었습니다. 신부 님은 제일 연장자인데다가 성직자이시기도 하고 또 전에는 의사 이셨다는 말씀도 언뜻 전해 듣긴 했습니다만…………….”

“저에 대해 꽤 열심히 조사하셨나 보군요.”

사이토가 겸연쩍게 웃으며 말했다.

“예, 일이 일이니만큼 기초적인 조사는 해 두었습니다. 본의 아니게 실례했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닙니다. 그런 문제에 대해선 크게 개의치 않습니다. 다만 우리를 초대한 스즈키 씨에게 우리가 어떻게 도와 드려야 할지 참 난감하군요. 구체적인 방법이 떠오르지도 않고, 게다가 지금 스즈키 씨가 제정신이 아니라니 제대로 도와 드릴 수나 있을지 모르겠네요. 물론 그런 일이 없어야 되겠습니다만, 만에 하나라도….”

사이토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조금만 더 버텨 주셨으면 했는데……………. 스즈키 씨가 갑자기 저렇게 발작을 일으키실 줄은…………..”

사이토의 얼굴이 어두워지는 것을 보고 박 신부는 눈을 껌벅거리다가 문득 생각난 것처럼 물어보았다.

“그런데 스즈키 씨는 무엇을 보고 그렇게 되었답니까? 무언가 에 놀랐다고 하는데 그게 어떤 것이었는지 모르십니까?”

“음, 어떻게 설명드려야 될지 모르겠네요. 거의 실성한 상태로 그림자라느니 어둡다느니 하는 말을 자주 하는 모양입니다.”

“어둡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검은 그림자라고 할 수 있겠네요. 숨어 있 는 그림자라든가 뭐 그런 말을 중얼거린답니다. 도대체 알 수 없 는 일이죠. 밤에도 대낮같이 불을 환하게 밝혀 놓고 주위에 사람 들이 항상 지키고 있는데도 헛것이 보인다니 말이죠.”

“글쎄요. 스즈키 씨에게까지 뭔가 마수가 뻗치기 시작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군요. 단순히 헛것을 본 것이라면 그나마 다행일 텐데…………….”

“그도 그렇군요.”

사이토와 박 신부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차는 험한 고갯길 을 지나서 어느덧 깊은 산속으로 난 좁은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승희는 꽤 오랫동안 투시를 행하고 있었다.

투시를 행하는 승희에게 방해가 될까 봐 현암과 도운은 차 밖 으로 나와 있었다. 투시가 쉽지 않은지 승희의 얼굴에서는 땀이 비 오듯 흐르고 있었다. 현암은 곁에서 부스럭대는 것조차 마음에 걸려 아예 도운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던 것이다.

현암과 도운은 함께 히로시 딸에 대한 서류를 다시 한번 훑어 보았다. 현암이 도운에게 일본어로 쓰인 히로시 딸의 이름을 손 가락질해서 물어보자 도운은 ‘후지코’라고 대답했다. 그 서류에 는 자잘한 신상명세만 적혀 있을 뿐 도움이 될 만한 특별한 내용 은 없었다. 현암이 서류를 대충 훑어볼 때까지 도운은 승희가 궁 금한 듯 힐끗거리면서 그럭저럭 지루함을 참고 기다렸다.

서류를 덮은 현암은 눈을 들어 시내의 정경을 죽 둘러보았다. 일본이나 우리나라나 크게 다를 것은 없었다. 사람들의 생김새 도 엇비슷하고 겉으로 보아서는 외국에 와 있다는 느낌이 별로 들지 않았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마음이 불편하고 낯선 곳에 와 있는 느낌까지는 지울 수 없었다.

한참 동안 둘은 말없이 앉아 있었다. 도운도 다소 지겨웠는지 염주 알만 뱅뱅 돌리고 있었는데, 그때 차 안에서 승희의 목소리 가 들렸다.

“됐어. 현암 군.”

현암은 반가워서 차문을 열고 승희에게 말을 걸었다.

“이번엔 왜 이렇게 오래 걸렸지? 다른 때보다도 훨씬 오래 걸린 것 같네.”

“아무래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이고 사진도 너무 흐릿해서 마음속에 잘 와 닿지가 않아서 그랬어. 아무튼 끝났어.”

“수고했어.”

승희가 웃는 얼굴로 땀을 닦아 내다가 문득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이 사람, 지금 말도 못할 곤경에 빠져 있는 것 같아. 빨리 구 해 주어야 할 텐데…….”

“곤경에 빠져 있다고? 하긴 그러고 보면 굉장히 오랜 시간이 지났지. 작년 십일월에 납치되었다고 하니 벌써 육 개월이나 지 났잖아. 그런데도 요행히도 아직 살아 있다고 하니 다행이군.” 

“그렇지만…………….”

승희는 숨을 고르고 나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살아 있다는 건 다행이겠지만 너무 기대하지 않는 편이 좋을 거야………. 아무튼 어서 가보자고.”

승희는 무엇엔가 놀란 듯 얼굴이 핼쑥했다. 의아하게 여긴 현 암이 말을 더 걸려고 하자 승희가 자리에 앉아 있는 도운을 살짝 눈짓해 보였다. 현암은 승희가 왜 그러는지 알 수 없어 고개를 갸 웃하다가 운전석으로 들어가 차의 시동을 걸었다.

승희가 현암에게 갈 방향을 말해 주었다.

“여기서 동쪽 방면으로 계속 가. 해변이 내려다보이는 곳으….”

“해변이 내려다보이는 곳?”

“응.”

“동쪽 방면?”

“응.”

“그것뿐이니?”

“응. 대강의 위치와 방향만을 알아냈을 뿐이야. 그리로 가면 될 거야. 빨리 서두르자고. 그 히로시의 딸 이름이 뭐더라?”

“후지코.”

“아, 그래. 후지코 양이 있는 곳은 어느 절의 지하인 것 같아. 무서운 불상들과 침침한 정경이 보였어.”

“절?”

“응.”

“그렇다면 명왕교?”

“그것까지는 모르겠어.”

현암은 습관적으로 차를 몰면서 묵묵히 생각에 잠겼다. 

‘절이라…………. 하긴 명왕교도 밀교에서 비롯된 것이니 절이 그 들의 본거지일 수도 있겠군. 그렇다면 명왕교가 정말로 수상한 데……………. 도대체 명왕교에서는 왜 이런 일들을 벌이는 것일까? 그리고 명왕교와 칠인방과는 무슨 연관이 있기에 ……………..’

현암은 승희가 일러 주는 방향으로 액셀러레이터를 힘껏 밟았 다. 승희는 눈을 감았다. 피곤해서인지, 아니면 계속 투시를 하 기 위해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차가 멈추어 서자 박 신부는 천천히 문을 열고 내렸다.

멀리 병풍같은 푸른 숲을 뒤로 한 산뜻한 분위기의 별장이 보 였다. 산속에 있는 것치고는 상당히 규모가 큰 삼 층짜리 흰색 건물이었다. 차에서 내린 사이토가 박 신부에게 안으로 들어가 자며 깍듯이 허리를 굽혔다. 박 신부는 고개를 끄덕해 보이고는 별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별장의 문 앞에는 검은 양복에 덩치 가 큰거한이 떡 하니 버티고 서 있었다. 그들은 곱지 않은 눈길 로 박 신부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박 신부는 개의치 않고 사이 토 보좌관이 안내하는 대로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

별장 문을 열고 들어서자 문 안쪽에도 덩치가 어마어마하게 큰 거한 하나가 의자에 앉아서 담배를 뻐끔거리고 있었고, 계단 양쪽에도 역시 커다란 덩치에 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이 버티고 서 있었다. 아무리 스즈키가 정계의 고관이었다고 할지라도 지 금은 은퇴한 상태인데 어떻게 이렇게 많은 경호원을 부리고 있 는 것인지 박 신부는 조금 의아했지만 차마 그 이유를 묻지는 못 했다.

앞서 가던 사이토가 박 신부를 돌아보며 삼층 맨 구석방이 스 즈키의 방이라고 일러 주었다. 삼층 복도에도 덩치 큰 서너 명의 거한들이 경비를 맡고 있었다. 박 신부와 사이토가 스즈키의 방 문 앞에 다가섰을 때 마침 방문이 열리면서 흰 가운을 입은 남자 의사가 나타났다. 그 의사는 박 신부를 힐끗 보더니 사이토 보좌관에게 나지막한 소리로 말을 건넸다. 사이토 보좌관은 의사와 대화를 나누면서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귓속말로 뭐라고 말하기도 했다.

박신부는 두 사람의 대화가 워낙 조용조용한데다가 일본말인 지라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의사의 말 도중에 간간이 의학 용어가 섞여 나오는 것을 듣고는 현재 스즈키가 쇼크로 인 한 일시적 착란 증세를 보인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스즈키 의 증상이 일시적이라는 데 박 신부의 마음은 훨씬 가벼워졌다. 눈치를 보아하니 의사는 신부를 데려온 것을 꺼리는 것 같았 으나 사이토는 개의치 않고 박 신부에게 안으로 들어가자는 손 짓을 해 보였다. 쏘아보는 의사의 눈빛을 뒤로하고 박 신부는 방 안으로 들어섰다. 방 중앙에 침대가 놓여 있었고, 그 옆에는 두 명의 남자가 경호를 서고 있었다.

“저기 누워 있는 게 스즈키 씨인가 보군.’

박 신부는 어째서 사람을 답답하게 얼굴까지 천으로 덮어 놓았는지 궁금했다.

“잠들어 계신 겁니까?”

사이토 보좌관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잠들어 계시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아마 발작 때문에 몸을 묶어 놓은 모양이군요.”

“예?”

박 신부가 고개를 갸웃하자 사이토 보좌관은 침대로 다가가 가만히 시트를 걷어 냈다. 시트를 걷어 내자 나이가 많이 든, 다 소 뚱뚱해 보이는 남자 하나가 온몸이 꽁꽁 묶이고 재갈을 물린 채로 눈알만 굴리며 누워 있었다. 사이토 보좌관이 박 신부에게 이분이 스즈키 씨라고 일러 주었다. 눈동자는 초점이 없고 흐리 멍덩하게 풀려 있었다. 아마도 지쳤거나 진정제 주사 같은 것을 맞았는지, 묶여 있긴 했지만 몸부림을 치지는 않았다. 박 신부는 손을 뻗어 자리에 누워 있는 스즈키의 눈꺼풀을 뒤집어 동공을 살펴보았다. 그러고는 사이토 보좌관에게 말했다.

“진정제 주사를 많이 놓았습니까?”

사이토 보좌관은 고개를 갸웃하면서 옆에 서 있는 경호원에게 물었다. 그가 건조한 목소리로 짧게 대답하자 사이토 보좌관은 박 신부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예, 아침에 제가 나가고 난 뒤에도 발작 증세를 심하게 보여 서 몇 번 더 진정제를 맞았다고 하는군요.”

“음…… 하지만 진정제 주사를 맞은 것치고는 좀 이상해 보이는데?”

“예?”

“아, 아닙니다.”

박신부는 조금 이상했지만 말을 하지는 않았다. 스즈키는 진 정제라기보다는 마약에 취해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어쨌든 박 신부는 그런 것보다는 방 안에서 뭔가 느껴지는 것이 없 나 영사해 보기로 하고 정신을 집중시켰다. 방 안에는 그다지 강 력한 영기가 느껴지지 않았지만 희미한 자취 같은 것이 남아 있 었다. 박 신부는 그 기운에 좀 더 정신을 집중한 다음, 한참 동안 궁리를 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스즈키 씨는 단순히 헛것을 본 게 아니로군.’ 박신부가 사이토 보좌관을 돌아보며 말했다.

“일단 지금 이 방은 안전합니다. 그런데 …………….”

박 신부의 말에 사이토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엄 중한 경호를 하고 있으니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 걸까? 아 무리 사람이 많아도 소용없을 거라고 말하려다가 박 신부는 쓴 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스즈키 씨를 저렇게 재갈을 물린 채 계속 내버려 둘 겁니까? 이제는 많이 진정된 것 같아 보이니 재갈을 풀어 주도록 하시죠. 제가 스즈키 씨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요.”

“글쎄요. 지금 상태로 온전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할지 모 르겠습니다. 조금 더 기다리시면 정신을 차리실지도 모르는데 그때 ・・・・・….”

“꼭 정신을 차렸다고 온전한 이야기를 하라는 법은 없지요. 기 억이 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요. 비록 환상이라고 할지라도 자 기가 본 바를 솔직하게 들어 보아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게도 생각이 있으니 염려는 마시고 재갈만 풀어 주 십시오. 또…….”

“제가 말하는 것과 스즈키 씨가 말하는 것을 전부, 한 치의 오 차도 없이 있는 그대로 직역해서 옮겨 주시기 바랍니다. 꼭 그래 야만 합니다. 조금 어려우실지도 모르지만 그래 주시겠습니까?” 

“예, 노력해 보도록 하지요.”

“그리고 지금 나눌 이야기는 대단히 중요한 것일지도 모르니 녹음기를 하나 준비해 주십시오.’

“녹음기요? 음…… 글쎄요.”

사이토 보좌관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녹음기를 구하기가 어려워서가 아니라 스즈키의 사생활이 외부로 드러난다는 게 영 내키지 않아서 그러는 듯했다.

“박 신부님을 못 믿는 게 아닙니다만 지금 스즈키 씨의 상황이 바깥으로 누출된다면 ・・・・・・ . 그럴 위험성이 있는 일은 아예…………….. “

”누출시키고자 하는 게 아닙니다. 아무튼 혹시라도 빠뜨리고 넘어가거나 아주 미세한 표현이나마 누락될지도 몰라서 그러는 것이니 염려 마시고 준비해 주세요.”

사이토 보좌관은 박 신부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도 한참을 머 뭇거리더니 결국 고개를 끄덕거리고 경호원 한 명에게 나직하게 지시를 했다. 밖으로 나간 경호원이 잠시 후 조그마한 소형 녹음기를 가지고 들어왔다. 사이토 보좌관은 녹음기를 열어 테이프가 들어 있나 확인해 본 다음 박 신부에게 주면서 고개를 끄덕여 보였고, 박 신부도 여러 번 고개를 끄덕였다.

사이토 보좌관이 눈짓을 하자 경호원 한 명이 조심스레 스즈 키의 입을 막아 놓은 재갈을 풀기 시작했다.


한편 준후와 연희는 고급 온천장의 별실로 발을 들여놓고 있 었다.

사전에 조치가 취해져 있었던 듯싶었다. 주인은 그들을 보고 조금 의아해하는 듯했지만 별다른 말없이 히로시가 죽었다는 방 으로 안내했다. 가는 동안 주인은 준후가 입고 있는 한복을 보고 한국에서 왔냐고 연희에게 물었는데, 연희는 짤막하게 그렇다 고 미소를 띠며 대답한 뒤 주인의 질문을 더 이상 피하기 위해 고개를 돌려 버렸다. 무안해진 주인장이 가뜩이나 온천장 안에 서 사람이 죽어서 뒤숭숭한데 잊어버릴 만하면 왜 이렇게 찾아 오는 사람이 많은지 모르겠다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연희의 귀에 들렸다.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찾아왔었느냐고 연희가 주인에게 묻자 주인은 승려들도 두어 번이나 다녀갔고 중년의 남자들이 여자 아이를 데리고 서너 번이나 왔었으며, 그 여자아이가 따로 한 번 왔었다고 일러 주었다. 연희는 주인의 말에 의아한 듯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구태여 자세히 묻지는 않고 그 말들을 잘 기억해 두었다.

온천장에서 가장 좋은 방인 듯한 별실로 준후와 연희를 안내 해 주고 나서 주인이 더 필요한 것이 있는지 연희에게 물었다. 무슨 일을 하려는지 궁금한 모양이었지만 연희는 그만 됐다면서 주인을 돌려보냈다.

복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연희가 그제야 옆에 있는 준 후를 돌아보았다. 준후는 긴장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일부러 태 연하게 보이려고 꾸며서인지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연희는 그런 준후의 모습을 보자 자신도 긴장되는 것 같아 헛기 침을 하고는 준후에게 물어보았다.

“준후야, 왜 그래? 느껴지는 게 있니?”

준후는 연희의 질문에 바로 대답하지 않고 방 안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천천히 말했다.

“뭔가 있긴 있어요.”

“뭐가 있다고? 그게 무슨 말이지?”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뭐랄까…………. 그러니까 한 달 전 히로시 씨의 죽음과 연관된 게 아직도 여기에 남아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영적인 것인데……………. 아이고, 그러니까 뭐랄 까…………….”

연희가 공연히 불안해져서 재빨리 눈을 굴리면서 방 안 구석구석을 살펴보자 준후가 말했다.

“가만히 계세요. 괜히 성급하게 행동하면 그놈이 놀라서 달아나 버릴지도 몰라요. 어딘가에 숨어 있는 것 같은데…”

“무서운 거니?”

“염려는 하지 마세요.”

불안해진 연희가 다시 말을 붙이려는 사이, 준후가 어느새 소 매 안에서 부적 하나를 꺼내더니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러 자 부적에 저절로 불이 확 하고 붙더니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긴장한 연희의 얼굴을 보고는 준후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모산(山) 부적술이에요. 제 놈이 뛰어야 벼룩이지.” 

그러더니 준후가 얼굴에 웃음기를 거두고는 크게 외쳤다. 

“이놈 나타나랏!”

준후가 호통을 치자 벽 저편에서 뭔가 아물아물한 기운이 느 껴지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연희가 눈을 질끈 감고 정신을 가다 듬은 다음 그곳을 바라보았다.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역시 조 금씩 공간이 아물거리면서 뭔가가 나타나고 있는 것 같았다. 연 희가 다소 놀란 것 같자 준후가 한마디 했다.

“부적으로 밝힌 불 때문에 연희 누나에게도 저놈이 보이나 보 군요. 별것 아니니 놀라실 건 없어요.”

준후는 말을 하면서도 한 손으로 맺고 있던 수인을 몇 번 바꾸어 교차시켰다. 그러자 울렁거리는 형상은 점차 검은색으로 변하더니 거무죽죽한 연기 덩어리 같은 것으로 꿈틀꿈틀 변해 갔다.


달리는 차 안에서 현암은 운전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고, 승희 는 계속 눈을 감고 뭔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뒷좌석에 앉은 도운 은 지도책을 꺼내어 들고 여기저기를 뒤적거렸다. 아마도 승희 가 말한 방향에 혹시 절이 있지 않을까 싶어 지도를 뒤져 보는 것 같았다.

얼마나 달렸을까, 승희가 감았던 눈을 뜨더니 고개를 흔들면서 현암에게 말했다.

“이상해. 아주 이상해.”

“왜 그러지, 승희?”

“후지코가 죽지 않은 것은 분명한데 어딘가 느낌이 달라. 도대체 뭐라고 해야 할지.”

“무슨 느낌인데 그래?”

“굉장히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 같고, 누군가를 지독하게 원망하고 있어. 그런데 기가 막힌 건………….”

승희는 말을 끊었다가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말을 이었다.

“마음이 그대로 들여다보이지가 않아. 장막을 친 것 같지도 않고. 이상해. 이런 느낌은 처음이야.”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군.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줄은 알겠지만 그래도 이해하기 쉽게 잘 좀 이야기해 봐.”

“후지코 한 사람 같지가 않아. 왜 그런 거 있잖아. 한 사람에게 두 가지 이상의 상반된 성격이 나타나는 그런 다중 인격 증상이 라고 하던가?”

“뭐? 후지코 한 사람 같지가 않다고? 그럼 후지코 말고도 사 람이 여럿 있다는 거야?”

“아니, 분명 후지코 한 사람인데 이상하게 그러니까 한 몸에 여러 영혼이 들어 있다고 해야 하나?”

“그렇다면, 빙의?”

현암은 고개를 갸웃했다. 후지코의 몸속에 영혼이 여럿 있다 는 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아서였다. 물론 다른 사람의 영이 어떤 사람의 몸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현암으로서는 수도 없이 보고 경험했던 일이었지만, 어디론가 납치당해 감금되어 있는 후지코의 몸속에 어떻게 여럿의 영이 들어가 있는 것인지 의아했다.

“혹시 명왕교에서 무슨 특별한 실험을 한 건 아닐까? 그래서 후지코의 몸에 인위적으로 여럿의 영이 들어선 게………… “

“실험?”

“그래. 주술적인 실험일 수도 있어. 죽은 사람을 살리려는 것 일 수도 있고, 아니면 어떤 꿍꿍이를 가지고 후지코를 완전히 다 른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일 수도 있어.”

“원 세상에, 끔찍해!”

“하지만 그렇게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어. 후지코는 납치된 지 무척 오래되었어. 그런데도 금품을 요구하거나 협박 같은 게 없 었던 것으로 보아 일반적인 유괴와는 성격이 달라. 그렇다고 후 지코가 죽은 것도 아니고 아직까지 살아 있다면 그건 어떤 다른 목적을 위해서 그런 것이라고밖에 할 수 없지.”

현암이 침울한 어조로 말하자 승희도 섬뜩한 듯, 어깨를 움츠 렸다. 현암은 특유의 굳은 표정으로 시선을 앞으로 돌리며 핸들 을 힘 있게 잡았다.

“서둘러야겠어. 후지코를 찾게 되면 그간의 사정을 알아낼 수 있겠지.”

“여기서 그다지 멀지 않아. 느낌이 와.”

“이 근처에 절 같은 것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데요? 그런데 경 찰의 도움은 필요 없을까요?”

뒷좌석에서 도운이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지만 승희와 현 암은 대꾸하지 않고 계속 동쪽으로 차를 몰았다. 해변이 보인다 는, 후지코가 갇혀 있는 곳을 향해서.


스즈키의 행동은 의외로 침착했으나 그의 표정에는 어딘가 얼 이 빠진 기색이 역력했다. 재갈을 풀어 입이 자유롭게 되자 스즈 키는 거친 숨을 몇 번 내뱉고는 박 신부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볼 뿐, 발작을 일으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박 신부는 그런 스즈키의 눈매에서 왠지 수상쩍은 기색을 느꼈다.

‘분명 약 기운이 남아 있는 것 같다. 스즈키의 발작 때문에 마 약 성분이 강한 약을 투여한 것일까?’

박 신부는 아무래도 의아했지만 그 생각은 마음속에 감추어 두기로 하고, 스즈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꺼냈다. 

“저는 한국에서 온 박윤규라고 합니다. 스즈키 씨를 괴롭히는 것이 있다고 하기에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박 신부의 말을 사이토가 통역하자 스즈키는 중얼거리며 신음 섞인 소리를 내뱉었다. 제정신이 아닌 스즈키는 망령 든 노인처 럼 추해 보였고, 일본 정계를 좌지우지했다던 옛 모습의 자취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무서워, 무섭다고 하십니다.”

“무엇이 무섭죠?”

박신부가 묻자 사이토는 재빠르게 말을 옮기느라 서둘렀다. 그러나 연희의 통역만큼 능숙하게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 같지가 않아서 박 신부는 답답했다.

“그림자, 그리고 그 얼굴이 바라보고 웃는 것 같다고 합니다.”

“그냥 직역을 해 주시면 됩니다. 그대로 옮겨 주세요. 어감까 지도 그대로!”

“예, 노력하겠습니다.”

사이토는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박 신부가 다시 물었다.

“그림자라뇨? 그리고 얼굴이라고 했나요?”

“그림자, 검은 가미(神)*, 가미라고 말하고 있어요. 그리고……………..”

스즈키의 얼굴에 갑자기 형언할 수 없이 두려운 기색이 떠올랐다.

“가면의 얼굴, 그 얼굴이 ・・・・・・”

“가면? 그렇다면 노의 가면입니까?”

“노의 멘 그리고 그 뒤에, 뒤에 ……………..”

스즈키의 얼굴이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박 신부가 재빨리 약간의 기도력을 내어 스즈키의 몸으로 보일 듯 말 듯한 오라를 보내자 스즈키가 힘을 얻었는지 간신히 말을 이었다.

“나를 미워하고 그리고…………….”

“그 얼굴은 누구죠?”

“흰 칠을 하고 어둡고 가미 그리고 여자…………….”

“여자? 누구죠? 아는 사람입니까?”

“몰라. 무서워 무서워서 보고 싶지 않아.”


*신, 정령, 성스럽고 초인간적인 성질이나 존재 등을 가리키는 광범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모든 존재가 가미의 성질을 지닐 수 있고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있지 만, 유태, 기독교, 이슬람적인 의미에서의 절대적인 신이 존재한다는 의미는 아 니다. 또한 자연 현상, 물체, 동물만이 아니라 성장, 풍요, 생산을 가져오는 신비 로운 생명력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


“자자, 진정하세요. 사실대로 모두 말씀하셔야 합니다. 얼굴을 보았습니까?”

더듬거리는 스즈키와 쉴 새 없이 물어 대는 박 신부의 중간에 서, 사이토는 얼굴이 파랗게 질린 채 땀을 비 오듯 흘리며 두 사 람의 빠른 대화를 정확히 옮기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안 보았어. 보면 죽어. 그걸 보면 난…… 그건…….”

“얼굴이 누구인지 알고 있나요?”

“보면 죽어. 난 안 볼 거야. 안 볼 거야!”

“보지 않도록 해 드리기 위해서는 제가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그 얼굴이 누구죠?”

“그건…….”

“아는 사람의 얼굴입니까?”

“아아, 으아악!”

스즈키는 끝내 비명을 지르면서 몸을 뒤틀려고 했다. 그러자 양옆에 버티고 있던 두 명의 거한이 스즈키의 몸을 잡아 발버둥 치지 못하게 꽉 붙들었다. 사이토가 땀에 젖은 얼굴을 박 신부에 게 돌리고는 소리를 쳤다.

“이제 그만! 그만해요!”

“알겠습니다. 스즈키 씨가 진정할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죠.” 

박 신부도 숨을 크게 내쉬었다.

스즈키의 말로 미루어 볼 때, 스즈키에게 보이는 것은 어둠 속에서 살며시 나타나는 노의 흰 가면이 틀림없었고, 스즈키가 두 려워하는 것은 그 뒤에 숨어 있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스즈키 는 필사적으로 얼굴을 보지 않는다고 했다. 어둠 속에서 그러 한 영상이 계속 보인다는 것은 단순한 공포 때문이었을까? 아니 면…………….

‘흠! 스즈키와 칠인방 그리고 다카다에 대해 상세하게 알아보아야겠군.’

가면 뒤에 나타난 얼굴이 누구의 것인지 알아내야 할 것 같은 데 스즈키는 그 얼굴을 보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스즈키 는 그게 누구의 얼굴인지 짐작하고 있는 건 아닐까? 도대체 그 얼굴이 누구이기에 저렇게 고통스러워할까? 히로시가 죽음을 당 했을 때 남은 잔상만을 보고 밀교의 술법자가 정신을 잃은 일이 있었다. 박 신부는 그것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금 스 즈키에게 나타나는 것과 히로시에게 나타났던 환영이 비슷하거 나 동일한 것이라고 한다면, 지금 스즈키가 노의 가면 뒤에 숨어 있는 얼굴을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히로시도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밀교의 술법자는 왜 그 모습을 보고 의식을 잃었 을까? 그 얼굴이 아무리 무섭고 끔찍한 것이라 해도 자신과 관련 도 없는 사람의 얼굴을 보고 공포에 질려 식물인간이 되어 버릴 수 있는 걸까? 그것도 영사에 능한 밀교의 고승이 말이다.

‘생각하면 할수록 더더욱 오리무중이군.’

박신부가 상념에 잠긴 사이 두 명의 거한과 어느새 달려온 의 사, 그리고 사이토의 간호를 받아 스즈키의 호흡 소리는 점차 고 르게 바뀌어 가고 있었다. 사이토가 더 해야 하느냐는 듯 걱정스 러운 눈길을 보내자 박 신부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당장 스즈키가 괴로워한다고 해서 근본적인 치유를 그만둘 수는 없었다. 증상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앞뒤의 사정을 확실히 알아 놓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어른어른하던 검은 형체가 구체의 모양을 하고 간헐적으로 부 르르 떨면서 준후와 연희의 눈앞에 완연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 러나 어떤 특별한 형체나 생김새가 있는 것이 아닌, 그저 검은 덩어리에 불과했다.

“이놈은 뭐지?”

연희가 그 검은 덩어리를 한동안 기분 나쁘다는 듯이 바라보 다가 준후에게 물었다.

“글쎄요. 생물의 영은 아니고, 뭐랄까? 정령 종류가 아닌가 싶은데요.”

“정령? 그렇다면 일본에서 말하는 가미(神) 같은 것일까?”

“가미요?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좌우간 요놈!”

준후가 검은 덩어리를 향해 손짓을 하자, 그 가미는 부르르 떨면서 준후 앞으로 다가오는 듯하더니 갑자기 휙 하고 사라져 버렸다.

“에게게, 요놈이?”

“왜 그러지? 준후야?”

“도망가 버렸어요. 하지만 멀리는 못 갔을 거예요.”

“어떻게 도망갔다는 거지? 그냥 없어졌잖아?”

“사람이 아닌 그런 놈들은 모습을 감추는 방법이 많지요. 그러나 염려 마세요. 이제 찾기만 하면 꼼짝 못할 거예요. 그나저나 이상한데?”

“왜?”

“저 따위가 왜 이런 곳에 웅크리고 있는지 말이에요. 그놈이 여기 숨어 있었다면 뒤에서 누군가의 조종을 받는지도 모른다는 얘기인데……………. 정령을 부리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연희는 준후가 중얼거리는 말을 알아듣기가 어려웠지만, 준후 는 아는지 모르는지 밝게 웃으며 연희에게 말했다.

“이제 우리가 온 목적대로 한번 영사를 해 봐야죠. 이제 엿보 는 놈도 없어졌으니까요.”

“그럼 지금 사라진 저 가미가 형사처럼 잠복근무를 하면서 누 가 여기서 무슨 일을 하는지 감시하고 있었다는 말이니? 그래서 먼저 그걸 쫓아 버린 거야?”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비슷해요.”

“원참.”

연희도 오랫동안 퇴마사들과 함께 다니느라 그런 가미를 보고 놀라지는 않았지만, 그런 것들을 부려서 사람의 행동을 감시하 는 자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머리끝이 쭈뼛해지는 느낌 이었다. 사람이라면 몰라도 그런 것들이 숨어서 지켜보는 것을 어떻게 피할 수 있단 말인가?

연희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기분 나쁜 표정을 짓고 있는 사이, 준후는 어느새 눈을 감고 영사에 들어가고 있었 다. 한 달 전의 자취를 찾아서, 그리고 아직 무엇인지는 알 수 없 지만 여기에 숨어 있을 공포의 비밀을 찾아서.

연희는 준후의 모습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갑자 기준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연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 만 공연히 건드려서는 좋을 것이 없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었 다. 정신적으로 깊은 집중에 빠져 있을 때 외부에서 충격을 주면 자칫 큰일이 벌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준후의 얼굴 이 핏기가 빠져나간 것처럼 하얗게 질리더니 연희도 느낄 수 있 는 어떤 무형의 기운이 봇물처럼 준후의 몸으로부터 터져 나오 기 시작했다.

“앗! 준후야!”

연희가 놀라서 소리를 쳤으나 채 말이 바깥으로 새어 나오기 도 전에 준후의 몸에서 퍼져 나가던 폭풍우 같은 기운이 방 전체 를 에워싸고 휘감아 돌았다. 흰빛이 뒤섞인 기운들은 돌풍처럼 물리적인 힘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연희는 숨이 막힐것 같았다.

“준후야!”

연희가 억지로라도 준후를 깨워야겠다고 마음먹고 막 준후에 게로 손을 뻗으려 하는데, 준후가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눈을 번쩍 뜨는 바람에 연희는 놀라서 그만 뒤로 몇 걸음 물러서고 말 았다.


“아무래도 경찰을 부르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뒷자리에서 도운이 중얼거리듯 두 사람에게 말하자, 승희는 현암의 의견을 구한다는 듯이 현암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 나 현암은 잠시 생각해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승희가 현암의 이 야기를 들은 뒤, 도운에게 영어로 현암의 의견을 전해 주었다. 아무래도 현암의 영어 실력으로는 이야기를 길게 할 수 없었다. “우리가 살펴본 다음에 경찰을 부르도록 하지요. 제가 투시한 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후지코는 정상이 아닌 것이 분명해요. 확실한지는 모르지만, 명왕교에서 무슨 술수를 부린 것이 아닌 가 싶군요. 그러나 경찰은 그런 것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 을 거예요. 후지코를 찾아냈다는 사실 외에는 다른 관심을 기울 이지 않을거구요. 더군다나 경찰의 손에 후지코의 신병이 넘어 가게 되면 후지코를 만날 수 없을지도 몰라요. 그러면 우리가 뭔가 알아낼 수 있는 길도 막혀 버리는 것 아니겠어요?”

“그렇지만 우리끼리만 그리로 간다는 게 영……………”

승희는 도운이 불안해하는 낌새를 보이자 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그리로 가고 있다는 것을 명왕교에서는 모를 거예요. 그다지 위험한 일은 없을 테니 염려 말아요.”

승희의 이야기를 듣고는 현암이 나직한 목소리로 승희의 말 중간에 끼어들었다.

“정말 모를까?”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가 지금 그리로 향하고 있다는 것, 명왕교에서 알고 있을 지도 몰라.”

“그들은 우리가 일본에 왔다는 사실도 모를 텐데?”

“글쎄, 명왕교에 대한 자료들을 보았더니 여러 가지 이적과 술 수를 보이는 사람들이 꽤 되더라고. 명왕교는 명왕의 힘을 빌려 서 현신해 힘을 보인다고 하는 종파잖아. 그러니 그중에는 투시 력이나 예지력을 가진 사람도 있을지 몰라.”

“아무리 그래도.

“아니야. 확실해.”

현암이 굳은 얼굴을 한 채 어색한 미소를 띠면서 힐끗 백미러를 쳐다보았다.

“조금 전부터 이상한 차 한 대가 따라붙고 있어. 명왕교가 우리가 그곳으로 가고 있다는 걸 안다는 확실한 증거가 아닐까?”

승희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검은색 승용차 한 대가 일 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일행이 탄 차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이런, 어떻게 된 거야?”

“나도 모르겠어. 좌우간 우리가 길 찾는 데에는 확실한 도움이 되겠군.”

“무슨 소리야?”

“우리가 길을 잘못 들어 엉뚱한 곳으로 가 버린다면 뒤차는 우 리에게서 멀어질 거야. 하지만 길을 제대로 찾아서 목적지 근처 로 간다면 그때에는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겠어? 그러니 뒤에서 반응을 보일 때까지는 신경 쓸 것 없어. 가던 길이나 계 속 가자구.”

승희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래도 불안했던지 몸을 뒤척였다. 도운도 눈치를 챈 듯 힐끔힐끔 뒤를 돌아보았으 나 현암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차를 몰았다. 차가 산굽이를 도는 순간, 탁 트인 해변이 눈앞에 펼쳐졌다.

“현암 군! 여기! 이 부근이야!”

승희가 소리치자 현암은 고개를 끄덕해 보이면서 힐끗 백미러 를 보았다. 따라오던 뒤차가 조금씩 속도를 내 일정하게 유지했 던 간격을 좁히면서 일행이 탄 차로 접근하고 있었다.

“길은 정확하게 찾은 것 같군.”

현암의 눈이 빛났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스즈키는 다소 진정되었다. 스즈키 를 간신히 진정시킨 의사는 환자에게 충격을 주지 말라는 어조 로 사이토에게 장광설을 퍼부어 댔다. 박 신부는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전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 의사의 기분은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계속 의사로 남아 저런 환자를 돌봤다면 박 신부도 지금의 저 의사처럼 환자를 안정시켜야 한다고 대들었을지도 모 른다.

‘참, 사람의 입장이란 게 묘한 거야.’

그러나 감상에 더 젖어 들 겨를도 없이 사이토가 의사를 밖으 로 내보냈다. 박 신부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는 스즈키 앞으 로 다가섰다. 스즈키의 눈매는 거의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스즈키 씨, 꼭 물어보아야 할 일들이 몇 가지 있으니 사실대 로만 말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이토가 박 신부의 말에 몇 마디를 덧붙여서 말하자 스즈키 는 한숨을 내쉬면서 띄엄띄엄 대답했다.

“제발 그것만 없애 달라고 하는군요. 뭐든지 말하겠으니.”

“사실을 알 수 있다면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저를 믿고 말씀해 주십시오.”

“예, 그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스즈키 씨, 명왕교를 알고 계십니까?”

스즈키가 박 신부의 질문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고는 불 안한 듯 주변을 한번 둘러보았다. 사이토가 스즈키의 속마음을 눈치채고는 경호원들에게 밖으로 나가라는 눈짓을 보냈다. 경호 원들이 나가자 스즈키가 잠시 숨을 가다듬으며 불안한 듯 눈을 굴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계시답니다.”

“제 추측일지도 모르지만 칠인방과 명왕교는 어떤 관련이 있지 않습니까?”

스즈키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그러더니 돌연 빠른 어조로 뭔 가 중얼거렸다.

“자신은 종교를 믿지 않지만 신부님께는 고해성사를 드릴 수 있는 것이라고 알고 계시답니다. 그러한 기분으로 모든 것을 말 씀하고 싶다고 하시는데, 고해로 생각하고 받아주시겠습니까?” 

박신부는 교단에서 파문당한 처지였지만 지금 그런 것을 말 할 필요는 없었다. 상황이 상황이니까.

“예, 마음 놓고 이야기해 주십시오. 모두 다.”

스즈키는 한동안 숨을 거칠게 몰아쉬다가 갑자기 슬프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생을 달관한 것 같기도 한 표정을 지었다.

“칠인방은 명왕교의 도움으로 조직된 것이었다고 합니다.”

“명왕교의 도움으로요?”

“처음에는 자금을 지원해 주었고, 그다음에는 명왕교가 가진 신비한 힘으로 가호를 해 주겠다고 했답니다. 칠인방 중 누구도 신비한 힘의 가호 따위는 믿지 않았지만, 손해가 될 것은 없다는 생각에서 그런 제의를 받아들이겠다고 했답니다.”

“그 내용이 어떤 것이었지요?”

“그건 스즈키 씨도 모른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명왕교가 아무런 조건 없이 칠인방을 돕지는 않았 을 것 같은데요? 뭔가 그쪽의 조건이나 요구 사항은 없었습니 까?”

“예, 처음에는 없었답니다. 칠인방은 흔히 있는 정치 세력에 대한 종교 단체의 지원 정도로만 여겼고요. 그런데 칠인방이 어 느 정도 정치적인 권력을 갖게 되자 그때서야 터무니없는 요구 를 했답니다.”

“그게 어떤 것이었답니까?”

“이와마치 주변의 일대를 성역화해 달라는 요구였답니다.”

“성역화?”

“예, 이자나미를 섬기는 성역으로 지정해 달라는 요구였다고 합니다.”

“이자나미라니요?”

“태고로부터 내려온 일본의 여신이지요. 이자나기와 함께 뭇 가미들의 시조가 되었다는…………….”

“그건 조사해 보면 되는 것일 테고, 그러고요?”

“그런 요구는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고 하여 완곡히 거절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저주 비슷한 내용이 실린 편지가 각자에게 배달되었는데, 그 내용이 몹시 섬뜩했다고 말씀하시네요.”

“어떤 내용이었습니까?”

“행한 대로 결과가 올 것이다. 그런 내용이었다는군요. 내용이 적나라하지 않고 은근한 말투를 담고 있는 것이 오히려 더 마음 에 걸리긴 했지만 다들 별것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답니다. 좌우 간 그런 일이 있고 나서도 직접적으로는 아무런 위해나 협박도 없었고요.”

“직접적으로라니요? 그러면 간접적으로는 어떤?”

“처음에는 별것 아닌 것으로 생각했다고는 아까 말씀드렸지 요? 그런데 자꾸 이상한 일들이 벌어졌다는군요.”

“이상한 일들이라면?”

“글쎄요.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다고 하십니다만, 꿈자리도 뒤 숭숭해지고 이유 없이 일이 꼬여서 계획들이 틀어지고……” 

“그게 명왕교의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믿지 않았답니다. 그러나 한 사람, 다카다 씨만은 예외였다는데요.”

“다카다 씨가요?”

“예, 다카다 씨만은 그 일들이 명왕교의 소행이라고 하면서 빨리 명왕교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는 겁니 다. 처음에는 나머지 사람들이 다카다 씨를 설득시키려고 애써 보았지만 별 효과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오히 려 다카다 씨는 명왕교에 광신적인 증세까지 보였다고 합니다.” 

“흠!”

“결국 칠인방이 두 갈래로 갈라진 것도 따지고 보면 그 이유에 서였다고 하는데, 아무튼 다카다 씨의 태도에 질려 버린 나머지 여섯 명이 비밀리에 합의를 했다고 합니다.”

“합의라면?”

박 신부는 힐끗 스즈키를 살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스즈키 는 마음속으로 꺼리는 것을 용기를 내어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다카다 씨의 현재 상태를 그대로 볼 수는 없다. 그러니 다카 다 씨를 축출해야겠는데 그렇다고 그런 터무니없는 이유로 다카 다 씨를 내몰 수는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나카무라 씨가 머 리를 써야 한다고 하면서 아이디어를 냈는데………….”

“나카무라 씨가요?”

나카무라라고 한다면 다카다와 함께 칠인방에서 벗어나서 소 수 파벌을 만들었고 후에 다시 칠인방으로 넘어온 사람 아닌가? 박신부는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렇다면 나카무라 가 한 일련의 행동들은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이루어졌을 가능성 도 없진 않았다. 박 신부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다카다 씨와는 칠인방 결성 때부터의 동료가 아니었습니까? 대화로 풀지 않고 왜 그런 식으로………….”

“글쎄요, 정치니까요. 그리고 다카다 씨에게는 일종의 광기 같 은 것이 보였던 모양입니다. 이념이나 논리는 설득이나 대화로 바꿀 수 있지만, 광신만은 절대로 고칠 수 없다고 강력하게 주장 한 것도 나카무라 씨였다고 합니다.”

“음, 그렇다면 칠인방 결성 이후 두 파벌이 첨예하게 대립한 것이나 또 다카다 씨의 독직 사건이 발생한 것 등도 모두 따지고 보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카다 씨를 확실히 축출하기가 어려웠 으니까요. 나카무라 씨는 술수에 능한 사람이었답니다. 그래서 삼사 년에 걸친 공작 끝에 결국 1985년 무렵 다카다 씨는 모든 공직에서 은퇴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칠인방 내의 명왕교 논쟁 도 자취를 감추게 되었던 거죠.”

“흠…….”

박 신부는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말로는 그럴듯했지만 그 과정이 얼마나 추잡스러웠을지 더 이상 구구한 설명이 없어도 짐작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 신부는 그런 것보다도 다른 한 가지가 더 마음에 걸렸다.

“그런데 다카다 씨는 공직에서 물러나고 난 뒤, 호수에 몸을 던졌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다카다 씨는 그때까지도 그 모든 일을 계획한 것이 나카무라 씨와 요시다 씨를 필두로 한 전의 동료였다는 사실을 몰랐을 거 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다카다 씨에게 알려 주고 좋은 말로 위로하려 했던 것이 스즈키 씨라고 합니다. 차라리 그러지 않는 편이 좋았을 텐데……………. 다카다 씨는 그 사실을 알고 인생 의 허망함을 느껴 자살했을 거라는군요. 두고두고 가슴 아픈 일 이었다고 말씀하시는군요.”

언뜻 스즈키의 얼굴을 보니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슬픈 표정이었다. 그러나 박 신부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문제가 남아 있었다. 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스즈키를 비롯 한 나머지 육인방 사람들이 정치권력을 굳혀 가는 데 조금도 동 요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쳐서였다. 스즈키와 히로시가 정계에서 은퇴한 것은 바로 1994년, 실종과 죽음이 연이어진 이 후에서야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권력욕이라는 것이 무섭기는 무섭구나.’

씁쓸한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박 신부는 스즈키가 말한 것들 을 앞뒤로 정리해 보았다. 명왕교 쪽에 열광적인 관심을 보였던 다카다가 제일 먼저 죽은 후 이러한 괴사건들이 생긴 것이라면, 육인방 사람들이 명왕교를 무서워하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더군다나 스즈키에게도 보였다는 노의 흰 가면은 명왕교 에서 자주 사용하는 물건이고, 또 명왕교의 저주 같은 것도 있었다니 말이다. 그런데 박 신부가 읽은 기록 중에는 일련의 사건들 이 다카다의 저주에 의한 것이라고 육인방이 말했었다는 기록도 있었다. 다카다가 스즈키의 말대로 인생무상을 느끼고 자살한 것이라면 굳이 육인방이 다카다를 두려워할 까닭은 없지 않은가 싶었다. 그들이 다카다에게 몹쓸 짓을 한 건 사실이지만 직접적 으로 위해를 가한 것도 아닌데, 무슨 이유에서 그들은 죽은 다카 다가 자신들을 괴롭힌다고 생각했을까?

박 신부는 다카다가 자살을 하게 된 배경에 좀 더 직접적인 육 인방의 모략이 있지 않을까 추측했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를 지 금 이 자리에서 할 필요는 없다 싶어 입을 다물었다.

박 신부는 굳어진 얼굴을 펴면서 헛기침을 해 보이고는 스즈 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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