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혼세편 3권 4화 – 홍수 1 : 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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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혼세편 3권 4화 – 홍수 1 : 예감


예감

“학교에 가고 싶어요.”

신년회와 박 신부의 퇴원 축하를 겸하여 퇴마사들과 몇몇 안 면 있는 사람들이 한데 둘러앉아 한담을 나누는 중에 준후가 꺼 낸 말이었다. 그 자리에는 현암과 박 신부, 승희와 연희를 비롯 해서 백호와 오랜만에 한국에 들른 윌리엄스 신부까지 있었다. 지난번 일본에서 일을 겪은 이후로 준후가 어딘지 어두운 기색 을 보이며 말수가 적어져 걱정스러웠는데, 느닷없이 그런 말을 꺼내자 모두 조금 놀랐다.

“어, 준후 너 정말 그러고 싶니?”

승희가 눈을 크게 뜨면서 준후를 바라보자 준후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연희는 그 모습을 보고 미소를 지었고 윌리엄스 신부와 백호도 좀 의아한 빛을 띠기는 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제 다시 학교에 가고픈 생각이 든 모양이구나. 그래・・・・・・ 그래야지.”

잠시 침묵이 지난 후에 입을 연 것은 박 신부였다. 박 신부 는 이미 퇴원을 했지만 다리의 부상만은 결국 완치가 되지 않았 다. 휠체어 신세를 져야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지팡이에 기대어 절뚝거리며 걸음을 옮겨야 하는 상태여서 전처럼 뛰거나 할 수 는 없었다. 박 신부가 온화하게 웃으면서 준후를 바라보자 준후 는 여전히 웃음기 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현암은 옆에서 그런 준후의 모습을 날카롭게 빛나는 눈빛으로 조용히 지켜보았다. 현암은 준후가 커 가는 모습을 남들보다 주 의 깊게 관찰하고 있었다. 박 신부의 허리춤에도 차지 않던 키가 어느 사이에 박 신부의 허리띠 위로 껑충 올라갈 정도로-그래 도 아직 같은 또래에 비하면 작은 편이었지만ᅳ자라 있었고, 맑 은 눈빛이나 아무렇게나 질끈 동여맨 머리카락은 여전했으나 순 진무구해 보이던 얼굴에는 어느새 날카로움이 깃들기 시작했다. ‘칼이 되어 가는구나. 아직 날은 서 있지 않지만…………….

현암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지난번 일본에서의 일 이후로 현 암에게 준후는 마냥 귀엽기만 한 동생의 모습이 아니었다. 어떻 게 보면 자신이 걸어왔던 길을 그대로 답습할지도 모를 일종의 후계자나 아들 같다는 느낌까지도 주었다. 인간의 역사는 고난을 통해 계속 발전해 앞으로 나가는 것이라는 신념을 지닌 현암이다. 그러나 가까운 준후가 자신이 겪은 험난한 길을 반복하는 것은 안타까우며 안쓰럽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준후 에게 이래라저래라 간섭하는 것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준후의 인생은 준후의 것이지. 나는 그냥 옆에서 지켜만 보면 되는 거다. 그리고 나를 필요로 할 때 도움이 되어 주면 되는 거 야.’

그런 생각을 계속해 오던 현암은 준후의 이번 결정을 듣고도 달리 해 줄 말이 없었다.

“그런데 준후야. 너도 숙고해 보고 하는 말이겠지?”

“네, 신부님.”

“그러면 됐다. 충분히 생각해 보고 내린 결정이라 믿는다. 그렇게 하렴.”

박 신부는 그 말을 한 후에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무릎 위에 놓인 지팡이를 집어 들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 지팡이 끝에 는 베케트의 십자가가 박혀 있었다. 한 손에 지팡이를 쥐고, 또 다른 손에 베케트의 십자가까지 들 수는 없었으므로 손재주 좋 은 준후가 깎고 다듬어 선물로 준 지팡이에다가 아예 베케트의 십자가를 붙여 버린 것이다. 박 신부는 몸을 일으키고는 윌리엄 스 신부에게 눈짓을 보냈다. 이야기 좀 하자는 신호 같았다. 윌 리엄스 신부와 박 신부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옆방으로 가자.

승희가 준후의 옆구리를 쿡 찌르고는 눈웃음을 살살 흘리면서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준후야, 너 정말 잘 다닐 수 있겠니? 나도 물론 학교 가는 것 엔 찬성이지, 당연히! 학교가 지겹고 공부도 골치 아프긴 하지 만……………. 아, 너야 뭐 공부 좋아하니 잘됐다. 학교 다니면 친구들 도 많아지고 재미도 있단다. 그렇지만 너, 물론 나도 그냥 조금 들은 이야기지만, 전번에는 못 견뎌했다며. 그런데…”

현암이 무거운 눈짓을 보내자 승희는 아차 싶었는지 입을 다 물었다. 예전, 그러니까 승희는 제대로 알지 못하지만 준후를 처 음 박 신부가 데리고 왔을 때, 박 신부와 현암이 준후를 학교에 보내려고 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바깥세상이라고는 하 나도 모르던 준후는 학교에서 엄청난 일들을 벌여서 오히려 손 가락질을 받고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다. 철모르던 준후는 아이 들의 호기심 섞인 꼬임에 넘어가 전교생이 모인 조회 시간에 소 환술을 써서 학교를 뒤집어 놓는 등 능력들을 보여, 아이들에게 무서움의 대상이 되고 결국은 따돌림을 받는 지경까지 갔었다. 우연히 학교에 들렀던 현암이 괴로워하는 준후를 보다 못해 그 자리에서 번쩍 안아 들고 아무 말 없이 학교를 나와 버린 후로, 다시 학교에 가겠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박 신부나 현암도 준후가 먼저 이야기를 꺼낼 때까지 학교 문제는 덮어 두 기로 했었다. 그전까지 여러 가지 일들을 겪으면서 만나게 된 사람들, 특히 아이들은 준후에게 별로 거부감을 느끼지 않아 친하 게 지내는 것도 가능했지만 정작 준후 자신이 일이 끝난 후에는 아이들을 멀리했다. 준후 쪽에서는 항상 사람들과 어느 정도 거 리를 두면서 지냈던 것이다. 그러던 준후에게서 갑자기 학교에 다니겠다는 말이 나온 것은 심경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 다는 의미였다. 승희가 조잘대는 사이에 연희가 말했다.

“그런데 준후야, 물론 축하해야 할 일이지. 전에 너는 주민등 록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으니 언제든 학교에 간다면 갈 수도 있겠지. 그러나…………….”

준후는 맑은 눈으로 반론을 제기하려는 연희를 바라보았다. 

“일단, 네가 학교에 간다면 중학교에 가야 할 거야. 그러면 머 리를 깎고 교복까지는 입지 않는다 하더라도 지금처럼 한복을 입고 다니기는 어려울 텐데. 그걸 견뎌 낼 수 있겠니?”

승희는 연희의 말을 듣고 뭐 그런 것까지 따지느냐고 말하려 다가 마음을 바꾸었다.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그런 작은 것이야말로 오히려 더 중요한지도 몰랐다. 연희가 말을 이었다. “준후 머리가 좋다는 것은 알아. 그렇지만 중학교에 갑자기 간 다면 수학이나 영어 같은 과목들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은 있 어야 할 거야. 그렇지 않으면 귀찮은 일이 생기게 될지도 모르고 그러면 …………. 나는 네가 학교에 가고 싶다는 것을 반대하는 입장 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야. 그렇지만 결심을 하려면 그런 문제들도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는 거지. 그에 대해서는 생각해본적 있니?”

연희의 말은 지극히 타당하고 일목요연했다. 그러나 준후는 조용히 말했다.

“생각해 둔 게 있어요.”

“그래? 어떤 거지?”

“근데 백호 아저씨가 도와주셔야해요.”

남의 집안일(?)에 간여할 생각이 없었던지 예의 빈 담배만 빙글빙글 돌리고 있던 백호가 눈을 크게 뜨더니 씨익 웃으며 말 했다.

“그래? 내가 도울 일이라고? 어떤 것을 도와주면 되지?”

“좀 뭣한 말씀이기는 하지만……………. 백호 아저씨가 여기 계셔 서 제가 이 말을 꺼낸 거예요. 백호 아저씨는 전에 주민등록과 호적이 없던 저에게 그런 것을 다 만들어 주셨지요? 그러니 한 번만 더 수고해 주셔서 내용을 조금만 손봐 주세요.”

백호는 지난번 일본행을 유도했던 것 때문에 퇴마사들을 이용 했다며 현암과 승희에게 거세게 항의를 받았다. 비록 자기 자신 도 내심으로는 그런 일에 찬동하지 않았었지만 어쨌거나 지난번 일본행만은 자신의 잘못이 크다고 여기던 터라 준후가 아니라 누가 무슨 부탁을 하더라도 거절하기가 어려운 입장이었다. 백 호는 속으로 이 꼬마가 어리기는 해도 영악하기가 이를 데 없다고 혀를 찼다. 그러나 결코 얄밉다거나 짜증스럽지는 않았다. 오히려 당돌한 준후가 더 귀여워 보이기까지 했다. 백호가 여유 있 게 씨익 웃으면서 준후에게 대답했다.

“어떻게 말이냐?”

“그러니까…………… 제가 청학동에 살던 아이였다고 해 주셨으면 해요. 그러면 문제가 없을 거예요.”

준후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에게서 아 하는 감탄의 소리가 터 져 나왔다. 청학동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한복만을 고집하며 댕 기머리에 서당 공부를 하는 등 조상의 민속을 고스란히 보존하 며 사는 것으로 유명하다. 준후는 그 마을의 아이들이 다른 곳으 로 공부를 하러 갈 때에는 교복이나 삭발의 의무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낸 것이다. 준후가 말을 이었다.

“뭐, 제가 불편하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해서는 안 되는 것도 알아요. 하지만 갑자기 다른 모습이 되면 잘 적응하지 못하게 될 것이고 그러다 보면 지난번 학교에 갔을 때와 같은 실수를 하게 될지도 모르지요. 그러니까 가능하면 저 자신을 그대로 두고 학 교에 갈 수 있는 방법이 더 좋을 것 같아요.”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방법을 쓴다면 준후의 행동이 조 금 이상하더라도 대부분 이해할지도 모른다. 이제까지 말없이 있던 현암이 불쑥 한마디를 했다.

“그런데 준후야, 너 왜 학교에 가려는 거냐? 뭘 위해서지?”

준후가 지체 없이 말했다.

“사람에 대해 배우려고요.”

준후의 의외의 대답을 듣고 모두는 고개를 갸웃하기도 하고 끄덕이기도 했다. 준후가 안 되느냐는 듯 서글픈 눈빛으로 현암 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현암은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고개를 끄 덕해 보이면서 준후의 어깨를 툭 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준후도 환하게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 어섰다. 그때 승희가 물었다.

“어? 너 어디 가려구?”

“가볼 곳이 있어요.”

승희가 그 말을 듣고 킥킥거리며 웃었다.

“너 아라네 집에 놀러 가려고 그러지? 학교 가게 된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러?”

승희가 크게 웃자 준후가 빨개진 얼굴로 변명하듯 말했다.

“아니에요. 최 교수님께 새해 인사드리고 또……………”

“오호라 미래의 장인어른께 인사드리러? 우하하.”

“치, 놀리지 말아요! 요즘 『해동감결』을 해석하는 중인데 저도 모르는 이야기가 꽤 많아요. 마침 최 교수님 댁에 고서들이 많단 말이에요! 그러니 그렇지요!”

“그래 알았어, 알았어. 근데 농담에 왜 얼굴까지 빨개지고 그럴까? 호호호”

승희가 계속 배를 쥐고 웃어 대자 준후는 치 하고 혀를 날름 내밀고는 밖으로 쪼르르 달려 나갔다. 준후가 나가자 승희는 언 제 그랬냐는 듯 웃음을 뚝 그쳤고, 연희는 아무리 그래도 아이에 게 심하지 않냐고 나무라듯 말했다. 그러자 승희가 어두운 표정 으로 뜻밖의 대답을 했다.

“미안해. 그렇지만 뭔가 예감이 안 좋아서 좀 지워 보려고 억 지로 그랬나 봐.”

“예감?”

“응, 이상한 꿈 그리고 이상한 생각이 ・・・・・・ . 뭐 별것 아니겠지 만 그래도 ………….”

“어떤 건데?”

“아냐, 됐어. 그만하자구. 얼굴 빨개지는 걸 보니 준후가 아무 리 어른스러운 척해도 아이는 역시 아이야, 그치? 자, 백호 씨. 이야기나 해요. 그러니 ………….”

승희의 쉴 새 없는 조잘거림에 넘어간 연희와 백호는 한담을 나누었고, 현암은 방에서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리고 준 후는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최 교수의 집으로 달려가고 있 었다. 한참 동안 이것저것 준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던 연희 는 준후를 학교로 보내는 데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백호의 말 을 듣고 승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승희의 안색이 이상 하리만큼 창백해져 있었다.

“왜 그러지? 어디가 불편하니?”

“아, 아냐. 괜찮아.”

“안 좋아 보이는데?”

“괜찮다니까. 별것 아니야. 잠깐만.”

승희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어 보이고는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연희나 백호도 승희가 왜 저러는지 알 수 없었지만 머리 가 아픈가 보다 하고 별 생각 없이 고개만 갸웃할 뿐이었다. 마 침 박 신부와 윌리엄스 신부가 자리로 돌아왔기 때문에 둘은 승 희의 일은 잠시 제쳐 두었다.

유쾌한 기분으로 아라의 집에 도착한 준후는 콧노래라도 부르 듯이 톡 하고 벨을 눌렀다. 조금 지나자 낯익은 목소리가 답답한 도어폰 스피커를 타고 들려왔다.

“누구세요.”

“나야, 준후.”

“우와! 오빠구나!”

저쪽에서 아라가 외치는 소리와 함께 금세 문이 열렸다. 아라는 뭐라고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코앞에까지 쪼르르 달려와서 재잘댔다.

“오빠, 오빠! 정말 신기해. 재밌더라구. 오빠가 준거.”

“내가 준 거? 어떤 거?”

“전에 오빠가 주었던 목걸이 말야.”

아라의 말을 듣는 준후의 눈에 놀라는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아하, 그거? 근데 그게 신기하다구? 왜?”

“킥킥 좀 있다가 내가 보여 줄게.”

아라는 애교 있게 웃더니 잡을 틈도 없이 쪼르르 달려가서 큰 소리로 아버지인 최 교수에게 준후가 왔다고 알렸다. 그동안 준 후는 입술을 꼭 깨물고 불안한 예감을 지워 보려 했다. 자신이 지난번에 준 목걸이. 원래 그것은 명왕교의 군다리명왕이 지니 고 있던 물건인데, 사람을 끄는 듯한 영통한 기운이 있어 무심코 집어 온 것이었다. 그러나 준후는 그 기운이 뭔지 알아낸다거나 이용할 생각이 없어서 그냥 가지고만 있다가 우연히 그것을 본 아라에게 반강제로 빼앗기다시피 선물하게 된 것이었다. 목걸이 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범상한 것은 아니었지만 영과 소통된다거 나 하는 사람을 놀라게 할 성질의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문 위 에 붙이는 부적 정도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거기에 아 라가 신기해할 만한 무슨 능력이 따로 있다면 주의해야 할 것 같 았다.

혹시 공연한 것을 주어서 아라까지 이상한 데에 빠뜨리게 되 는 건 아닐까? 그러긴 싫은데..

그런 고민을 하는 중에 최 교수가 나왔다. 방학이라서 학교에 잘 나가지 않는다고 들었지만 그것보다는 집에서 따로 연구하는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며칠 밤을 새고 뭔가에 골몰한 듯, 빨갛게 충혈된 눈에 부스스한 머리칼이 얼굴을 초췌해 보이게 했지 만 눈빛만은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최 교수가 모습과는 딴판인 정감이 넘치는 목소리로 준후에게 말을 걸었다. 최 교수는 몇 번 사학이나 한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본 후로는 준후에게 마치 옛날의 어른들이나 쓸 법한 말투로 이야기를 했다. 

“아. 꼬마 도령이 오셨구먼. 그래, 요즘은 잘 지내고 있나?” 

준후는 인사를 꾸벅한 다음에 대답 대신 멋쩍게 씨익 웃었다. 

“그래 왔으니 잘 놀다 가게. 내 딸아이도 많이 기다렸다네. 허 허허.”

아라는 아버지가 농담을 하자 메롱 하고 혀를 길게 보이고는 순식간에 자기 방으로 사라져 버렸다. 최 교수는 멋쩍은 듯이 입 맛을 다시고는 말했다.

“내가 귀여워만 했더니 워낙 버르장머리가 없어서 미안하네.”

“아니에요.”

“이번에는 무슨 일로 왔나? 보고 싶은 책이 있나? 전에 이야 기한 그 책의 해석 때문에?”

준후는 『해동감결』을 해석하는 중이었다. 신시 문자를 읽을 수 있는 준후라고 해도 은유적인 표현으로 묘사된 내용들은 해 석하기가 쉽지 않아 자연히 그 모태가 되는 한문 고서 등을 참조 해야만 했다. 그런데 그런 책들을 고서점에서 기웃거리다 보면 다른 사람들이 이상한 눈길로 쳐다보기 일쑤여서 최 교수가 소장하고 있는 책을 보는 편이 훨씬 편했고, 그래서 준후는 자주 최 교수를 찾았던 것이다. 최 교수는 전공이 한국사학이기도 했 지만 대단한 고서 수집광이어서 집에 엄청난 분량의 고서를 소 장하고 있었다.

“예, 몇 권 빌려 보고 싶은 책들이 있어서요.”

“그래. 그럼 내 서가에서 마음대로 찾아보게나. 나는 하던 일 이 있어서 얘, 아라야! 네 손님이 오셨는데 네가 안내해 드려야 할 것 아니겠니?”

최 교수는 아라를 부르고는 준후에게 웃어 보이며 안으로 들 어갔다. 다시 나온 아라는 준후와 함께 집의 마루보다도 훨씬 넓 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서재로 들어갔다. 가면서 아라가 묘한 소리를 했다.

“아빠가 좀 부스스하지? 무슨 연구인지 난 잘 모르겠지만 되 게 중요한 건가 봐. 그래서 만날 밤새는 것 같아. 아라랑 놀아주 지도 않구. 미워어. 그치?”

준후는 피식 웃고 서가에서 책들을 골라 보기 시작했다. 아라 는 자신은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한문 책들을 술술 훑어보는 준 후를 신기한 듯이 쳐다보다가 말을 덧붙였다.

“요즘 몇 번이나 도둑이 들어서 아빠 신경이 더 날카로워졌는지도 모르지만…………..”

“도둑?”

“응. 근데 강도나 그런 건 아니고 책 도둑인 것 같아. 돈이나 그런 건 안 없어지는데 서가가 자주 흩어져 있어. 그러면 아빠가 참 침울해해. 그래서 잘 말은 안 하지만…………. 나 그 도둑 한 번 봤다.”

준후는 아라가 도둑을 보았다는 말에 놀라 보던 책을 탁 덮고 는 아라를 쳐다보았다. 아라가 배시시 웃으면서 다시 말했다. 

“내가 도둑을 몰래 보고 있다가 쑥 나와서 ‘에비!’ 하니깐 놀라 서 도망갔다아? 놀랐지? 거짓말이야아. 헤헤헤.”

준후는 고개를 흔들며 쩝 하고 입맛을 다시곤 다시 책을 폈다.

그러자 아라가 달라붙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 화났어? 장난친 건데. 그거 가지고 삐치면 안 돼애.”

준후는 책에서 눈도 떼지 않고 대답했다.

“화 안 났어.”

“정말이지?”

“응.”

“헤헤헤. 그럼 됐구우. 근데 책 고를 거 많어어? 빨리 고르구나랑 놀자아. 응?”

“지금 고르고 있잖니.”

“참! 내가 신기한거 보여줄게에 봐라?”

아라는 부스럭거리며 뭔가를 꺼내는 것 같았다. 준후는 돌아보지도 않고 책만 뒤적거렸다. 『격암유록의 내용 중에 해동감결』의 비유 내용과 비슷한 구절이 있는 것처럼 보여서 흥미로웠 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아라의 목소리와 함께 밝은 빛이 그리고 그것보다도 강한 영기가 바로 옆에서 쏟아져 나왔다. 준 후는 놀라서 화다닥 옆으로 물러섰다.

“자, 봐! 신기하지?”

아라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무서움 없이 빛나는 목걸이를 들여 다보고 있었으나, 준후는 놀라움과 눈부심 때문에 눈을 비볐다. 그 목걸이가 영적인 물건이긴 했지만 자신이 살펴보았을 때에는 영력을 이끌어 낼 방법이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아라가 달라고 할 때에도 별 생각 없이 주었던 것인데……………. 이렇게 아라가 목 걸이에서 무언가를 이끌어 낼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터였 다. 준후는 마음을 가다듬고 목걸이에서 빛의 형태로 뿜어져 나 오는 영력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아내려고 눈을 감았으나 빛은 금방 사그라져 버렸다. 그리고 아라의 킥킥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때, 놀랐지? 색깔이 너무 이뻐. 촛불이나 손전등 같은 것보 다 훨씬 좋아. 헤헤헤.”

아라가 말하는 것으로 보아서 목걸이의 정확한 사용 방법을 알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아 준후는 조금 마음이 놓였다. 아라에게 목걸이를 달라고 해서 다시 한번 살펴보았지만 목걸이는 그냥 은은한 기운을 풍기는 것 외에는 보통의 구슬 목걸이와 다를 바 없었다.

“아라야 너 이거 누구에게 이야기했니?”

“아빠한텐 이야기 안 했어.”

“응. 절대로 이야기하면 안 돼. 그런데 방금 어떻게 해서 빛이 나오게 된 거지? 무슨 주문 외웠니?”

“주문? 무슨 주문?”

하기는 준후로서도 아라가 주문을 외웠다고는 볼 수 없었기에 고개만 갸웃하고 말아 버렸다. 이런 목걸이를 아라가 가지고 있 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도로 달라고 하면 난리가 날 테니 그 럴 수도 없었다. 준후가 멍하니 있자 아라가 배시시 웃으면서 말 했다.

“누가 가르쳐줬어. 속으로 야압하고 정신을 집중하면 된다고.” 

“누가 그런 걸 가르쳐 줬지?”

“그건 몰라도 돼.”

“아니야. 누가 그런 걸 알고 있단 말이야? 누가 그랬지?”

“어떤 아저씨가 우연히 만난 사람이었어.”

“우연히 만나다니? 너 방학이어서 집에만 있었잖아?”

“좌우간 그랬어. 더 물어보지 말어. 아저씨가 비밀이라고 했으니까.”

아라의 얼굴이 고집스러운 빛을 띠자 준후는 평상시에는 쓰지 않던 필살기(?)를 썼다.

“나한테도 비밀이야?”

“음……. 우우웅……..”

준후가 속으로는 ‘미안하다’라고 생각하면서 아라를 빤히 쳐다보자 아라는 끙끙거리며 나름대로 한참 고민을 하더니 할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푹 쉬고 말했다.

“밤에 어떤 아저씨가 서재에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어.”

“어떤 아저씨? 도둑?”

“나두 처음엔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래애. 그 아저씨는 여길 지키는 사람이래애.”

준후는 속으로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아라가 놀랄까 봐 그 말을 입 밖에 꺼내지는 않았다. 아라는 한번 말하 기 시작하자 그침 없이 말했다. 역시 아이는 아이였다.

“그 아저씨도 준후 오빠나 현암 아저씨 같은 사람이래애. 아 저씨가 그랬어어. 그래서 여기 드나드는 나쁜 사람을 잡으려고 한대.”

“나쁜 사람? 그건 그렇고 그 아저씨도 우리 같은 사람이라고 직접 말했단 말이야?”

“으응. 오빠도 사람들한테 오빠 이야기하면 안 된다고 했잖아 아. 그 아저씨도 그렇다고 하더라구. 그리고 오빠나 현암 아저씨 나 신부 할아버지도 다 잘 안다고 해서 나도 믿었어어.”

“그 아저씨 이름은 뭐래?”

“이름은 안 가르쳐 줬어. 그냥 평범하게 생긴 아저씬데 턱에만 수염 기르구..”

“음. 그런데 나쁜 사람들이 드나든다는건 뭐지?”

“나도 몰라 그냥 아빠에게 말하면 걱정하실 테니 이야기하지 말라고 하셔서 그러겠다고 했더니 ‘착하고 똑똑한데다 예쁘기까 지하구나’ 하고 웃으면서 아라 머리 쓰다듬어 주구 금방 어디론 가 없어져 버렸다? 이 이야긴 내가 지어낸 거 아니야아. 헤헤헤.”

“그렇다고 정말로 아빠한테도 이야기 안 했단 말이야?”

“오빠 같은 사람이면 신기한 일 하는 사람이잖아. 오빠 일도 절대 이야기하지 말라면서? 그러구 오빠 아는 사람인데 뭘 그래. 아빠는 아무것도 몰라서 아라가 먼저 이야기 안 하면 하나도 모 른단 말이야.”

“흐음……”

“그 아저씨가 가기 전에 오빠가 준 목걸이를 보면서 귀한 걸 가지고 있구나. 요렇게 손바닥 위에 올리고 속으로 얍 하고 기합 을 넣어 보렴. 재미있을 거다’라고 했거든. 그래서 해 봤더니 정 말 빛이 나잖아.”

말을 하면서 아라는 구슬 목걸이를 손바닥 위에 얹고 폼을 잡 아 보였다. 이번에는 준후도 그 모습을 자세히 보았고 그제야 아 라가 목걸이에서 빛을 내게 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결지법(法)*이구나! 수인하고는 좀 다른 건데. 우리나라 도맥에서 사용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라 폼이 좀 엉성하군.’ 언뜻 본 목걸이를 결지법으로 작용하게 만들었다면, 또 아라 의 눈앞에서 홀연히 나타났다가 사라졌다면 보통 사람일 것 같 지는 않았다. 아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는데도 아라가 이상 한 것을 느끼지 못했다면 사람인 것 같은데…………….

“아저씨가 이름은 안 가르쳐 줬니?”

“아니.”

“턱에 수염 기른 것 말고 또 뭐 특이한 점은 없었니?”

“아, 무슨 깃발 같은 걸 들고, 등에도 지고 있는 것 같았어.” 

준후는 속으로 탄성을 질렀다.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오래전 에 만났던 주기 선생이 분명했다.

‘그 사람은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꼭 그렇게 좋은 일만 하는 사람도 아니라고 하던데. 그런 사람이 왜 여기 아라 아버님의 서 재를 드나드는 걸까? 그리고 나쁜 사람을 잡기 위해 왔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


* 손가락과 손으로 특정한 모양을 만들어 특이한 힘을 이끌어 내는 방법 중에서 일반적인 것은 밀교에서 사용되는 수인(무드라)이다. 그러나 도교 측에서도 손 가락을 맺음으로서 기의 순환을 트며 주술력을 부여하는 비슷한 방법이 존재하 는데 이를 결지법이라 한다. 그 형태나 사용하는 방법 등은 수인과는 조금 다르 지만 많은 유사성을 갖는다.


준후는 깊은 생각에 빠졌다. 불안하고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 준후의 속도 모르고 아라는 같이 놀자며 다시 옷소매를 잡 아당겼다.


백호와 연희가 가고 난 뒤, 승희는 이층으로 가서 자신의 방원래 승희는 퇴마사들과 같이 살지는 않았지만 박 신부가 빈 방 중의 하나를 승희에게 내주어서 올 때마다 그 방을 사용 했다에 들어가 생각에 빠졌다. 간밤에 꾸었던 꿈, 그리고 불 안한 예감. 그 예감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마치 더운 여 름에 오랫동안 목욕하지 못한 듯이 찜찜했다. 그리고 자신의 꿈

‘그 사람의 얼굴. 아직도 대강은 기억나는데……………..’

투시력을 발동해 볼까 싶었다. 비록 생면부지의 사람이었지만 꿈에서 본 것이 아무래도 꺼림칙했다. 꿈도 너무나 생생한 느낌 이었고…………….

‘그래, 이렇게 찜찜하게 있는 것보다는 한번 뚫어 보는 것도 괜찮겠지.’

승희는 자리에 앉아 정신을 집중했다.


현암은 막 운기행공을 마치고 잠자리에 들려던 참이었는데 갑 자기 방문이 열리면서 승희가 들어서자 조금 짜증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

“무슨 일이지? 노크도 안 하고 문을 확 열면 어떻게 해?”

승희는 현암의 말에는 대꾸하지 않고 긴장한 듯 말했다.

“현암군 나랑 같이 가.”

“가? 지금 시간에 어딜 가?”

“연희 언니에게 가 보자.”

“연희 씨한테? 왜?”

“불안해서 그래. 연희 언니에게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아.”

“뭐라구?”

현암은 정색을 하고 승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승희가 농담 을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마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혀 있는 것이 방금 투시를 마치고 달려온 것 같았다.

“뭔가 읽어 낸 것이 있니? 아니면…….”

“아무 말 말고 같이 가. 응? 부탁이야. 신부님은 몸이 불편하 시고, 준후는 나가서 아직 안 들어왔어. 나 혼자서는 가 봐야 별 다른 힘이 없잖아. 그러니 가자구.”

승희는 긴말을 하지 않고 현암을 질질 끌다시피 해서 방을 나 섰다. 현암은 무슨 영문인지 궁금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차분히 승희의 뒤를 따랐다. 승희의 차에 올라타면서 현암은 묘한 느낌 이 들었다. 예전 같았으면 영문도 모르고 따라가거나 하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스스로 돌이켜 보아도 성격이 많이 변한 것 같았다. 급하고, 물불을 가리지 않던 성격이 언제부터 이렇게 참 을성 많고 온화하게 바뀌었는지 궁금하기까지 했다. 그러자 그 동안 겪어 왔던 수많은 사건과 위기의 순간들, 그리고 자신을 스 쳐 지나갔던 적과 동지의 모습이 순식간에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들 중에는 세상을 달리한 사람도 있었다.

‘그래, 많은 일이 있었지. 느낀 것도 많았고 깨달은 것도, 배운 것도 많았어. 그래서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겠지.’

현암이 차에 올라타자 승희는 난폭하게 운전하여 퇴마사들의 아지트 앞 언덕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무슨 일이지? 자세히 설명해 줄 수 있겠어?”

“나도 잘은 모르겠어. 하지만 연희 언니가 위험할지도 몰라.”

“위험? 그게 무슨 말이야?”

“뭐랄까. 나도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어. 그냥……”

말을 하는 순간 반대편에서 무서운 소리를 내면서 커다란 트 럭 한 대가 마주 달려왔다. 승희는 딴생각을 했는지 중앙선을 조 금 넘어 차를 몰다가 트럭을 보고는 재빨리 핸들을 꺾었다. 와아 앙 하는 소리와 함께 지나쳐 간 트럭에서 욕지거리와 에어클랙슨 소리가 커다랗게 들려왔다. 현암이 승희를 쳐다보았다. 승희는 발갛게 상기된 채 무엇인가를 두려워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냥 뭐야?”

“꿈! 현암군, 어제 꿈을 꾸었어.”

“꿈? 무슨 꿈이지?”

“아, 그런데 잘 기억나질 않아. 그러니 미치겠다는 거야.”

“하나도 기억나질 않아?”

“그래, 뭔가…… 뭔가 있는 꿈이었는데, 그러니까….”

승희가 속도도 줄이지 않은 채 끼이익 하는 격한 마찰음을 내 며 커브를 급히 돌자 현암의 몸이 옆으로 쏠렸다. 현암은 승희가 왜 이러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운전을 하기에는 너무 흥분한 상태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좀 차분하게 운전하는 게 어때? 흥분하지 말고……………. 그런데 어떤 꿈이었지?”

“아버지, 꿈에 아버지가 나왔어. 그래서 나에게 무엇이라고 말 해 주었는데……. 제기랄! 기억이 안나!”

“아버님이 나오셨다고?”

현암은 기억을 되짚어 승희의 아버지인 현웅 화백의 모습을 떠올렸다. 화가이자 알려지지 않은 초능력자인 현웅 화백의 비 장했던 마지막 순간. 그런데 승희는……

“뭔가 급한 내용이었어. 제기랄! 이 돌대가리! 그런데도 생각 이 나질 않는다니!”

“그러면 꿈에 아버님이 나타나셔서 연희 씨가 위험하다고 말씀해 주신 거야?”

승희가 거칠게 핸들을 꺾으면서 쏘아붙이듯 소리쳤다.

“아냐! 기억 안 난다고 했잖아!”

“그러면?”

“아버님이 말씀하신 건 하나도 기억이 나질 않아! 그러나 그뒤에 ……… 그 뒤에 또 누군가가 있었어!”

“누군가가 있었다구? 누구지?”

“이 바보야! 그걸 알면 내가 왜 고민을 해! 나도 모르는 아이의 얼굴이었어!”

“그런데 왜?”

다시 평평한 직선 도로가 눈앞에 펼쳐졌고 지나가는 차도 별로 없었다. 그러자 승희는 심호흡을 하고는 빠르게 말을 이어갔다. 

“꿈을 꾸고 나서 왠지 모르게 기분이 안 좋았어. 중대한 메시 지를 들은 것 같았는데 도대체 기억이 나질 않는단 말야. 분명 난 꿈에서 아버지 말고 또 다른 사람의 얼굴을 보았어. 그 사람 이 어떻게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좌우간 좋지 않았어. 그래서 …………”

“그래서?”

“그 사람을 투시해 보려고 했어. 아주 힘들었지. 누군지도 전 혀 모르고 꿈에서 본 얼굴이니 제대로 기억도 나지 않고 말야.” 

현암은 고개를 끄덕였다. 승희의 투시력이 아무리 뛰어나더라 도 단서가 없으면 투시를 제대로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아 무리 좋은 망원경을 가지고 있어도 보아야 할 방향을 모른다면 무용지물인 것과 흡사했다.

“그래도 해냈어. 해낼 수 있었어. 그리고 그 사람은 우리나라 아니 서울에 있어.”

“그래? 그럼 꿈에 나타난 사람이 정말 있었다는 거구나.”

현암은 흥미를 가졌다. 데자뷔 현상 같은 것이 아니라면, 확실 히 승희의 꿈에서 뭔가가 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러면 그 사람의 마음속도 투시해 봤니?”

“그래, 해봤지. 그런데 ・・・・・・ 그런데 말야.”

“뭐지?”

“그 사람의 마음은 거의 투시가 되질 않았어. 마치 옛날 블랙 서클 사람들을 투시하던 때처럼. 온통 캄캄해서 하나도 짚어 낼 수 없는…………….”

과거의 강적이었던 블랙서클의 이야기가 나오자 현암은 몸이 움찔했다. 블랙서클은 와해되었다. 마스터도 죽었고 코제트, 히 루바바, 젠킨스 모두가 죽었다. 인디언 주술사인 성난큰곰만이 아직 살아 있을 터이지만 그는 해방되었고 악행을 할 리가 없었 다.

“블랙서클? 그건 없어졌잖아.”

“하지만 그랬어! 그래서 온 힘을 다 써 봤지. 그랬더니….”

“뭐지?”

“아주 작은 한마디만 읽어 낼 수 있었어. 해독(讀)을 막아야 한다는……………. 그러니까 독을 없애는 해독 말고 읽어서 뜻풀이 하는 해독 말이야.”

“해독을 막는다구?”

“그래! 해독을…………. 뭔가 번역되는 것을 막으려 하는 거야.”

“틀림없니?”

“그것만은 틀림없어. 그렇다면 해독을 하는 건 누구겠어? 분 명연희 언니야, 연희 언니가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거야.”

현암은 생각에 잠겼다. 이 정도까지 말한다면 승희의 말을 믿 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난데없이 블랙서클과 같은 주술을 사 용하는 사람이 왜 나타났는지, 그리고 그들이 도대체 무슨 해독 을 막으려 하는 것인지는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연희 씨가 요즈음 무슨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있니?” 

“나도 몰라. 그러나 중요한 것을 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해도 실제로는 그 안에 중요한 것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르잖아.”

현암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가능성도 있다고 여겨졌기 때 문이었다. 그러나 무엇인가가 마음에 걸렸다.

“승희야, 네가 느낀 그 마음의 차단이 예전의 블랙서클의 것과 비슷하니?”

“아니.”

“음? 그럼 비슷하지 않단 말야?”

“비슷한 게 아니고 똑같아!”

“이상하군. 도대체 그들이 어디서 나타난 거지? 블랙서클의 모든 사람들은 죽었고 성난큰곰 하나만 남아 있어. 그러나 그는 이제 절대 악한 일은 하지 않을 거야.”

“성난큰곰은 아니야. 그 덩치 큰 아저씨를 내가 분간 못할 것 같아?”

“그럼 도대체 누구지?”

“나도 모른다니까!”

어느새 두 사람이 탄 차는 연희의 아파트 근방에 도착했다. 주 변은 평화롭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 나 겉으로만 봐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승희와 현암은 차에서 내려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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