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혼세편 3권 5화 – 홍수 2 : 칠인의 신동(神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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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혼세편 3권 5화 – 홍수 2 : 칠인의 신동(神童)


칠인의 신동(神童)

투덜거리며 알짱대는 아라의 존재조차 잊고 책장을 넘기던 준 후는 문득 묘한 기운이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서 지나가는 느낌 을 받았다. 마침 준후는 규원사화의 원문을 복사한 판본을 뒤 적거리고 있던 중이었다. 준후는 혹시 아라가 움직인 것이 아닌 가 하고 서재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아라는 준후를 조르다가 지친 듯 구석에 머리를 기댄 채 잠들어 있었다. 아라가 아까 보여주었던 목걸이가 형광등 불빛에 빛나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훤했던 밖은 책에 너무 정신을 쏟고 있었는지 벌써 어두워 져 있었다.

“내가 잘못 본 걸까?”

준후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책으로 눈을 돌렸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뭔가가 지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희미한 영력을 띠며 집의 위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준후는 아 까 아라에게 들었던 대로 주기 선생일 거라고 짐작했다. 주기 선 생은 나쁜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지난번 초치검 때 만났던 기억에 의하면 사리사욕을 챙기는 편이라 이렇게 아라의 집 안 을 드나든다는 것이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그는 뭔가 자신에 게 필요한 것이 생긴다면 남에게 해가 되는 것도 불사하는 성격 이었다. 주기 선생도 주술의 사용을 엄격하게 자제하는데다 아 무 연관이 없는 아라나 최 교수를 괴롭힐 정도로 막무가내인 성 격은 아니라는 것을 준후도 잘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남의 집에 함부로 드나들면서 뭘 하려는 거지. 창피를 좀 주 어야겠군.’

준후는 몸을 일으켰다. 아라를 깨울까 했지만 공연히 아라까 지 끌어들일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준후는 조심스레 서재를 나 서면서 영기가 느껴지는 곳을 찾기 시작했다.


현암과 승희의 우려와는 달리 연희의 집 초인종을 누르자 연 호가 얼굴을 내밀었다. 오랜만에 보는 연호였다. 연호는 갑자기 찾아온 두 사람을 반가운 표정으로 맞이했다. 아직은 아무 일 없 는 것 같다는 생각에 승희는 안도의 한숨을 몰래 내쉬었다. 

“연희 씨 계신가요?”

“예? 지금 집에 있어요. 들어오세요.”

현암과 승희는 머뭇거리다 안으로 들어섰다. 현암은 예전에 준후가 연희와 연호의 사촌동생 수정이를 지키기 위해 주었던 부적 주머니가 마루 한구석 액자 위에 걸려 있는 것을 보고는 미 소를 지었다. 불과 이 년도 안 된 일이었지만 새삼스럽게 아주 먼 옛날에 일어났던 것 같았다. 잠시 후 연희가 여느 때와 같은 미소를 지으면서 마루로 나왔다. 승희와 현암은 연희가 나오자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면서 눈치를 살폈다. 연희에게 위험할지 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한다는 게 두 사람에겐 퍽이나 어려운 일 처럼 느껴졌다.


연희와 백호가 나가고 난 뒤 박 신부와 윌리엄스 신부는 꽤 오 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윌리엄스 신부는 다른 사람들과 함 께 있는 자리에서 차마 말하지 못한 이야기를 비로소 꺼냈다. 박 신부 역시 개인적인 문제인데다 아직 확실하게 결정된 것도 아니어서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피하고 있었다.

그러나 박 신부 개인으로 볼 때에는 상당히 중요한 문제이기도 했다.

“팍 신부님, 신부님은 파문 상태로 계속 계셔서는 안 됩니다. 이번 일을 수락하셔서 다시 성직으로 돌아가셔야만 합니다.”

“저도 파문된 상태로 있는 것이 좋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팍 신부님의 믿음이 굳건하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제가 잘 알 고 있습니다. 과거에 파문당한 일만 없으시다면 제가 나서서 성 자로 서품해 달라는 청원을 했을 것입니다. 팍 신부님의 믿음의 힘은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는 힘이요, 은총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제 개인적인 문제입니다. 저는 파문을 당했지 만 그 일을 섭섭하게 생각하거나 원망한 적은 없습니다. 제 문제 의 관건은 믿음이었고 일이 이렇게 된 것은 견해의 차이라고 여 겼기 때문입니다. 저는 천주님을 저버린 적이 없습니다. 직위가 있다고 그 사실이 달라진다고 보진 않습니다.”

“그렇게만 볼 일은 아닙니다. 파문이라고 하는 것은 믿음의 길 이 끊어진 것입니다. 사실 예전의 팍 신부님의 일을 보면 교단 측에서 지나치게 성급한 결정을 내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러나 교단도 조직체입니다. 일단 내려진 결정을 쉽게 되돌릴 수 는 없는 것입니다. 아멘.”

“그래서 파문 선고를 취소해 주는 조건으로 그 일을 맡아 달라는 말이 아닌지요?”

“간단하게 생각하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교환 조건으로 여기시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것은 팍 신부님이 파 문을 당한 몸인데도 복장이나 생활 방식을 그전처럼 해 온 것을 그냥 묵인한 데에서도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팍 신부님 의 행동을 제제한 적도 없고요.”

“그건 교단에서 파문당한 사람까지 신경 쓸 필요가 없었기 때문 아닐까요? 제가 심한 말을 한다고 생각되시면 말씀해 주십 시오.”

“팍 신부님의 믿음의 힘, 그것은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 로 매우 강합니다. 그리고 그 힘이 세이튼(사탄)이나 흑암의 권 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이제는 명백합니다. 그러 나 교단에서는 그 증거를 원하는 것입니다. 팍 신부님과 거래를 아멘 하자는 것이 아니라 신부님께 기회를 주자는 것입니다. 되 돌아오실 수 있는 계기를 만들 수 있는 증거로 말입니다. 팍 신 부님, 파문당한 자에게는 구원이 없습니다.”

박 신부는 굳게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윌리엄스 신부는 매우 안타까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윌리엄스 신부가 이토록 집 요하게 설득하는 동기가 순수하다는 것은 박 신부도 잘 알고 있 었다. 그리고 교단 측의 입장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 을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힘을 사용한다는 것이 박 신부는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물론 교단 측에서 원하는 일은 그렇게 힘든 일도 아니고, 나쁜 일도 아니었다.

박 신부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박 신부는 지옥에 대해 여러 번 생각했었다. 파문당한 자는 지옥으로밖에 갈 수 없 다는 가르침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박 신부는 그 가르침이 고 스란히 실현된다고는 믿지 않았다. 그러나 그 가르침은 자기가 믿고 따르던 것이었다. 그 점이 중요했다. 가르침에서 전하는 가 장 큰 벌이라고 할 수 있는 파문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길 수 있 다면 가르침을 진실로 믿는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박 신부는 자신이 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소 신대로 행동한 결과가 그것이라면 후회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 만 그렇다면 자신의 소신과 모든 가르침은 상반된 것이 되고 결 국 자신이 믿고 따르고 몸 바치기로 각오한 교리 전체를 부정하 는 것이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항상 박 신부를 번민하 게 했다. 그리고 지금 그 번민은 완연한 현실이 되어 자신의 눈 앞에 있었다. 선택을 해야만 한다. 윌리엄스 신부를 비롯해 자신 을 아는 많은 사람들이 이 일 때문에 무척 노력했다는 것을 너무 나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힘을 어떤 목적을 위해 쓴다는 것은・・・・・・ . 물론 사리사욕을 추구하는 것도 아니고, 모두에 좋은 일이며 자신이 하지 않는다면 다른 누군가가 해야 될 일이었다. 그러나 그 동기에 아주 작게나마 자신에 대한 일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 박 신부를 고민하게 만들었다.


준후는 서재를 나와 어두컴컴한 마루로 들어섰다. 해가 저문 지도 꽤 되었는데 마루엔 불도 켜져 있지 않았다. 최 교수는 일 에 몰두하느라 해가 저문 것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최 교수 방의 작은 문틈 사이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연구가 무척 바쁘신가 보구나. 내가 자꾸 들락거려 방해가 되 는 것은 아닐지……?”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던 준후는 눈을 감고 주위의 영력을 살 폈다. 왠지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게 하는 묘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것도 한 곳이 아니었다. 영기는 집 전체를 빙 둘러싼 십여 군 데에서 느껴졌다. 움직이지도 않고 그 자리에서 고요히 힘을 발 휘하고 있는 것을 보아 사람이 아니라 물건인 것 같았다. 그렇다 면 ・・・……….

‘진법을 치다니. 주기 선생이 무슨 장난을 치려나?’

그러고 보니 희미하게 느껴지는 기운들이 주기 선생이 전에 펼쳐냈던 십이지신술의 기운과 매우 흡사했다. 준후는 다시 집 중해 보았다.

‘가만, 저 힘들은 안쪽으로는 작용을 하지 않는 것 같네. 여기 서는 이렇게 희미하게 느껴지니 말이야. 그렇다면 저 힘들은 밖 으로 뻗어 나간다는 얘긴데……………..’

힘이 안으로 뻗는다면 주기 선생이 이 집에 뭔가 장난을 친다고 볼 수 있었지만 밖으로 뻗는다면 그렇게 보기 어려웠다.

‘그렇다면 주기 선생이 이 집을 보호하기 위해서 진을 설치한 것이라는 말인데 도대체 무엇을 막으려고 그러는거지?’

준후는 예상한 것보다 문제가 심각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었다. 주기 선생도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 사람이라면 어지 간한 것은 소리 소문 없이 해치워 버릴 만한 능력이 있었다. 그 런 그가 진법까지 쳤다는 것은 그 상대도 상당한 수준이라는 이 야기다. 일단 집 안에 별 느낌이 없는 것으로 보아 진을 친 주기 선생은 밖에 있을 것 같았다. 공연히 최 교수나 아라를 놀라게 할 필요는 없었으니 그편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준후는 조심스럽게 현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차!”

현암이 큰 소리를 질렀다. 연희에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던 현암은 우연히 벽에 붙어 있는 이두 글자 표를 본 순간 근래에 중요한 것을 해석하고 있는 사람이 연희가 아니 라후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해동감결! 그것 때문에 해동밀교는 풍비박산이 났고 일본 에서도 묘렌 교주가 그 많은 밀계를 꾸미지 않았는가! 그런 중요 한 것을 준후가 해석하고 있다는 것을 미처 떠올리지 못했다니!’

 현암은 준후와 연희를 안 지 오래되었고 그들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선입관이 생겨서 준후가 『해동 감결을 해석하고 있다는 생각을 못한 채, 해석하는 것은 의당 연희라고만 믿었던 것이다. 그것은 승희도 마찬가지였다.

“승희야, 혹시 준후가 아닐까?”

“음? 뭐가 말야?”

“해독하는 것은 준후, 그러니까 네가 짚어 낸 해독이라는 구절은…….”

“엑? 가만, 그러고 보니………….”

승희도 놀란 것 같았다. 그러더니 그 자리에서 눈을 감고 뭔가 에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연희는 왜 두 사람이 갑작스레 자 기를 찾아왔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분 명 무슨 일이 터졌나보다 싶어서 잠자코 있었다. 현암도 나름대 로 머릿속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들이 노리는 대상이 준후라고 한다면 연희보다는 문제가 수월했다. 비록 어리기는 하지만 대 단한 주술력을 지닌 준후이니만큼 그리 만만하게 당하거나 낭패 를 보지는 않을 것이었다. 오히려 그보다는 그 블랙서클과 유사 한 능력을 가진 자들이 노리는 사람이 전혀 다른 제삼의 인물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연희나 준후가 아니라면 누굴 노리 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그것까지 추측해 낼 길은 없었다. 그것 을 알려면 그 정체 모를 작자들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하는데 그들이 누구인지 알아낼 방법이 없지 않은가?

영문도 모른 채 멀뚱히 앉아 있는 연희를 두고 승희가 뭔가를 애써 투시하는 동안 현암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때 불쑥 연호가 방에서 고개를 내밀고는 연희를 불렀다.

“말씀중에 미안합니다. 연희야. 국제 전화인데 받을래?”

“음? 무슨 전화지?”

“아, 수정이가 전화한 거야. 네 목소리 듣고 싶대서.”

현암은 과거에 자신이 구해 주었던 귀여운 꼬마 수정이를 떠 올리고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가 머릿속을 스치듯 지나가는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소스라치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준후는 현관을 나서면서 미소를 지었다. 문밖을 나서자 더욱 뚜렷이 느껴진 진법의 기운이 어떤 것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 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주기 선생이 펼친 수법이 분명했다. 진을 폈다면 주기 선생도 틀림없이 이 근방에 있을 것이다. 준후는 씁 쓸한 웃음을 띠며 나직한 목소리로 주기 선생을 불렀다.

“오래간만이네요. 주기 선생님.”

주기 선생이야 으레 호칭이 주기 선생이니 자연히 선생님 소 리를 하게 된 것이지만, 학교에 다녀 보지 않은 준후로서는 선생 님이라는 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뭔가 아릿한 것이 마음속을 휩싸 는 것 같았다. 괜한 생각이라고 떨쳐 버리며 준후는 다시 말했다.

“어디 계세요? 인사드리고 싶네요.”

준후가 말을 마치기 무섭게 지붕 위에서 피식 웃음소리가 들 리더니 누군가가 건너편 마당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그곳은 나 무들에 가려 준후가 선 자리에선 잘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이층 이나 되는 집의 지붕에서 뛰어내렸는데도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 는 것으로 보아 예전에 비해 주기 선생의 도력이 상당히 높아진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네요.”

준후가 그쪽을 향해 씩 웃으면서 인사를 하자 작은 바람이 일 더니 어느새 뒤쪽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하하하. 꼬마야, 오래간만이구나.”

주기 선생이 자랑하는 힐기보법(法)을 써서 준후의 뒤 로 돌아간 것 같았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준후는 쓴웃음을 지었 다. 주기 선생의 도력이 높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준후에게 과 시하듯이 그런 보법을 쓰다니. 도력이 그 정도로 높으면서 왜 아 직도 치기를 버리지 못한 것일까. 준후는 몸을 돌려 인사를 꾸벅 하고나서는 고개를 들어 주기 선생을 바라보았다.

이 년 만에 보니 한편으론 반가운 마음도 들었다. 도시에서 주 로 일을 하기 때문인지 전처럼 도복을 입고 있지는 않았지만 턱 에만 기른 수염은 전보다도 많이 자란 것 같았고 등에는 여전히 공작 꼬리 모양으로 활짝 펼쳐 놓은 깃발들을 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 깃발들이 열두 개가 아니라 열여섯 개였다. 십이지신의 열 두 깃발과 양옆 가장자리에 두 개씩 좀 더 화려한 깃발들이 꽂혀 있는 것이 보였다. 뭔가 술수를 늘린 것이 분명해서 준후는 미소 띤 얼굴로 깃발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승부심 강한 주기 선생 같 은 사람에게 술수나 도력의 증진이 기분 나쁘게 들릴 리는 없었 으니 칭찬해 주고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깃발이 늘었네요? 위력적인 술수를 익히셨나 보죠?” 

주기 선생은 준후의 말에 기분이 좋은 듯, 껄껄 웃었다.

“이건 제황사신(帝皇四神幡)*이라고 하는 거지. 십이지신술 보다 한 단계 위의 술수란다.”

준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유심히 깃발들을 보는 체했다. 물론 그 깃발들에서 뿜어 나오는 기운이 범상하지 않은 건 분명했지 만 그것에 신경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주술이나 도력은 자랑하 기 위해 익히는 것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다만 준후는 주기 선생 이 의기양양해하는 것을 보고는 앞으로 승희나 아라를 만나면 무조건 칭찬하는 말로 시작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 소설에서 주기 선생이 십이지신술과 함께 사용하는 고단계의 술수. 번(幡)은 기와는 달리 깃발이 가로로 되어 나풀거리는 것이 아니라 세로, 즉 깃대 방 향으로 세워져 있는 깃발을 의미한다. 사신이란 청룡, 백호, 주작, 현무 네 마리 의 신수로서 우리나라에서는 고대부터 이러한 사신을 동서남북 네 방향의 수호신으로 생각하여 왔다. 주기 선생은 이러한 네 신의 힘을 깃발에 넣어서 조 종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그건 그렇고, 네가 여기를 왔다 갔다 하는 것은 전부터 보아

왔다. 그러나 여기 일은 내 일이니 너는 간섭하지 마라. 현암이 도 왔니?”

주기 선생이 굳이 현암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듣자 준후는 조 금 부아가 치밀었다. 초치검 사건 때 현암에게 굴복한 이후로 주 기 선생이 현암을 무척이나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이 한마디로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뇨.””

“그렇군. 하하하. 그럼 너희는 일곱 꼬마들 일은 모르고 있니?” 

“일곱 꼬마라니요?”

주기 선생이 눈빛이 번쩍이며 준후의 안색을 살폈다. 그러다 가 조금 뒤 미소를 띠며 말했다.

“정말 모르고 있니? 그렇다면 왜 자꾸 여길 드나든 거지?”

“도움을 받을 게 있어서요. 여긴 구하기 힘든 고서들이 많거든요.”

“음, 그래? 그럼 너는 최 교수의 연구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니?”

“최 교수님의 연구요?”

“모른다면 됐어. 더 알 것 없다. 이건 내 일이니 내 스스로 처리하마.”

“그런데 최 교수님과 아저씨는 무슨 관계지요? 최 교수님의 연구에 왜 아저씨가?”

“관계? 하하하. 그래, 관계라고 할 수 있지. 관계가 있단다. 아주 중요한 관계야. 그러니 너는 몰라도 된다.”

준후는 심통이 났다. 주기 선생의 태도로 보아 최 교수를 방해 한다거나 뭔가를 훔치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주기 선생 은 일곱 꼬마라는 말을 했다. 그렇다면 혹시?

“일곱 꼬마들과 무슨 관련이 있나요? 아저씨는 지금 이 집에 진을 쳐 놓았지요? 누구에게서 이 집을 지키려고 그러신 거죠?”

“많이 알면 호기심이야 풀리겠지만 어떤 일은 알면 알수록 손 해다. 위험하니깐 말야.”

“아저씨는 무엇 때문에 그러시는 거죠? 최 교수님도 아저씨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시나요?”

“아니 그 영감님이야 이런 일에 대해 알겠니? 그저 연구나 하 고 지내는 양반이지.”

“그러면 왜?”

준후가 더 말을 잇기도 전에 갑자기 무언가가 다가오는 느낌 이 들었다. 희미했지만 일종의 영기임이 분명했고 빠른 속도로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 사람 같지는 않았다. 준후가 흠칫하 자주기 선생도 그것을 느꼈는지 싸늘하게 웃음을 머금고 그 방 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또 슬슬 시작하는군. 이번엔 얼마나 잘난 술수를 부리는지 볼까?”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주기 선생은 휙 하고 몸을 솟구쳐서 지붕 으로 올라갔다. 주기 선생의 목소리가 준후의 귓전에 맴돌았다.

“너는 상관없는 일이니 끼어들지 마라. 알겠니? 오히려 방해 가 된단 말이다.”

준후는 양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품에서 부적을 꺼내서 현관에 다가 휙 던졌다. 부적들은 저절로 불이 붙어 타들어 가면서 현관 주변에 작은 결계를 형성했다. 그다음 준후는 주기 선생의 말을 듣지 않고 그 자리에 버티고 선 채 다가오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알아내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현암의 얼굴이 별안간 딱딱하게 굳어지는 것을 보고 승희는 의아한 듯 현암의 옆구리를 살짝 찔렀다. 그러나 현암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무엇인가를 계속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연희가 전화를 받고 오겠다고 자리를 비우자 승희는 현 암에게 슬쩍 물었다.

“현암군. 왜 그래? 어디 아파?”

“승희야, 짐작이 가. 그들이 누구인지.”

“그들? 누구 말이야?”

“블랙서클의 주술을 쓴다는 자들 말야.”

“어? 누군데? 짐작가는 데가 있어?”

“나가서 이야기하자.”

현암은 다짜고짜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도 하지 않고 문밖으로 나섰다. 승희는 영문도 모르고 현암의 뒤를 따랐다. 밖으로 나가 문을 닫고 나서야 현암은 승희에게 말했다.

“수정이의 이름을 듣고서 생각이 났어. 너도 기억하지? 전에 수정이가 리에게 잡혀갈 뻔했던 일 말야.”

“그런데?”

“그때 리가 연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했어. 수정이는 위대한 힘을 가질 수 있는 자질이 있다고 말야. 그리고 그다음엔 케인이 수정이를 납치해 가려고 했었지. 마스터의 명이라고 하면서. 그 런데 그들이 노렸던 게 과연 수정이 한 명뿐이었을까?”

현암의 말을 들은 승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어. 그렇다면…….”

현암은 긴장했을 때 으레 나타나는 무뚝뚝한 얼굴로 승희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지금 블랙서클의 잔존자들은 성난큰곰밖에 없어. 그는 이제 블랙서클에서 벗어났지. 그렇다면 블랙서클과 똑같은 주술을 사 용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때 수정이와 비슷한 경로를 통해 잡혀 갔던 아이들뿐일 거야.”

“하지만 그럴 순 없을 것 같은데. 수정이와 비슷한 또래일 텐 데 그 애들만 남아서는 무엇 하나 제대로 익히지도 못했을 거야. 어린애들끼리 뭘 하겠어? 블랙서클 안에 우리가 모르는 또 다른 사람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능력이 없던 사람이 갑자기…… “

현암은 승희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런 사람이 있었을지도 모르지. 승희야, 지금 네 투시를 피 하려면 어느 정도의 경지가 되어야 하지? 갑자기 그런 큰 능력이 생길 수 있겠니?”

“다른 사람도 현암 군 같은 그런 기회를 얻지 말라는 법은 없잖아.”

현암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나는 도혜 스님의 칠십 년 공력을 물려받았지만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걸 완벽하게 운용하지 못하고 있어. 신부님도 영 능력을 처음 얻으시고 자유로이 힘을 사용하게 되는 데는 거의 칠팔년이 걸렸다고 하셨고, 블랙서클이 무너진 지는 겨우 이 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고, 더구나 주모자들은 거의 다 죽고 없어. 그런데 누가 그런 기회를 부여할 수 있지? 오히려 우리가 모르는 제삼의 인물이 있을 가능성이 높지.”

승희는 중얼거리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건 아냐. 나는 코제트의 마음속을 들여다본 적이 있어. 당 시 블랙서클에서 강한 능력을 가진 멤버는 우리가 상대한 자들 뿐이었어. 혹시 성난큰곰이라는 아저씨가 마음을 고쳐먹은 것이 아닐까?”

현암은 성난큰곰을 상대해 본 적이 있었다. 물론 한 번뿐이었 고 그 사람을 다시 만난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때 받은 느낌으 로는 그가 다시 아이들을 부추겨 무슨 짓을 꾸밀 것이라고는 절 대 믿을 수 없었다. 성난큰곰은 실제로 악행을 하지 않기 위해서 일부러 현암의 손에 목숨을 잃으려고까지 하지 않았던가. 

“글쎄 그럴 것 같지는 않아.”

“하지만 아이들만 남은 상태에서 그런 강력한 주술을 자기들 끼리 익혔을 리라고는 상상하기 힘들어. 현암 군은 누군가가 기 회를 준다고 해도 단시간 내에 강한 주술력을 가지게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지? 그러면 그 아이들의 경우에는 그런 능력 을 가지게 되기가 더 어려운 게 당연한 거잖아. 그 애들이 아무 리 선천적으로 자질을 타고났다 하더라도 누군가가 이끌어 주지 않으면 그런 주술을 배우지 못할 것 아니겠어?”

승희의 말을 듣고 보니 현암도 할 말이 없었다. 하긴 그랬다. 준후와 같은 신동도 나면서부터 해동밀교에서 수련을 해 왔기에 오늘날의 힘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인데 하물며 자기 힘으로만 모 든 능력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더더욱・・・・・・・ 그런 생각을 하던 현암의 머릿속에 뭔가가 퍼뜩 스쳤다.

“이런 제길! 그렇구나!”

“왜 그러지?”

“죽은 자들이 일을 벌일 가능성은?”

“죽은 자들?”

“그래. 보통 사람들이야 믿지 않을 테지만, 분명 영혼이 있고 그 일부는 세상에 남아서 뭔가 일을 하거나 생전에 못 다한 것을 달성할 수도 있는 거야. 우린 그것을 알고 있잖아. 그러니 ………….” 

“그러니 블랙서클 사람들이 영혼이 남아서 그들을 가르쳤다 구? 글쎄, 블랙서클이라는 이름 자체가 왜 생겨났는데? 그들의 영혼은 죽고 나서 모두 블랙서클의 검은 원 안으로 빨려 들어갔 어. 지옥으로 떨어진 거라구. 영혼이 남아 있을 리가 없잖아.” 

“그래, 그건 나도 알아. 연희 씨에게 리의 영혼이나마 만나게 해 주려고 준후가 무지 애를 썼어도 성공하지 못했지. 그러니 블 랙서클의 일원이었다가 죽은 자들의 영혼은 예외 없이 사라졌을 거야. 그러나 우리가 확인하지 않은 자가 있어. 그게 누구였는지 는 너도 알지?”

승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렇다면 마스터?”

현암의 얼굴이 침통한 빛을 띠었다.

“그래, 마스터, 마스터가 처참하게 죽은 것은 나도 알지만 그 때 당시 온전한 정신으로 깨어 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모두 가 쓰러져 의식을 잃고 있었지. 나중에 미국 경찰들이 왔을 때에야 마스터의 시체를 확인할 수 있었어. 허나 마스터의 영혼도 블 랙서클에 휘말려 사라졌는지 아닌지는 아무도 몰라. 마스터는 소환술이 잘못되어 죽었지만, 그렇다면 죽는 순간 블랙서클의 소환술이 깨어졌을 것 아냐. 그렇다면 마스터의 영혼은 블랙서 클에 말려들어가지 않았을지도…

당시 박 신부는 악마의 출현과 마스터의 죽음을 목도했지만, 그 일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아스타로트는 마스터를 아 예 증발시킨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실제로 거의 정신적인 현 상에 가까워서 육체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악마가 사라지 고 나자 마스터의 시체는 처참한 모습으로 박살이 난 채 모습을 드러냈다. 그 말을 사실대로 하기에 마음 아파하던 박 신부는 마 스터가 무리한 소환술을 쓰다가 잘못되어 제품에 죽었을 것이 라고 말을 지어냈다. 때문에 현암, 준후나 승희도 그때의 사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잠깐 잠깐, 연희 언니는?”

“연희 씨도 기절해 있었다고 들었는데.”

“그래도…………… 뭐가 조금이라도 없을까? 아, 왜 지난일까지 들춰야하는거야! 다 끝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연희 씨라고 뭔가 기억하고 있을까? 물어보기나 하자.”

“그래, 알았어.”

승희가 대답하고 안으로 들어서려는 순간 현암이 뒤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내 짐작이 맞다면 그런 짓을 할 만한 자는 마스터밖에 없어. 그자의 영혼은 아직도 떠돌면서 또 다른 일을 꾸미고 있는 건지도 몰라. 만약 그자면 우리가 막아야만 해.”

현암의 말을 듣고 승희는 떠오르는 예전의 기억에 치를 떨면서 중얼거렸다.

마스터라니! 연희 언니를 위해서라도 그놈은 용서하지 못해!’


음산한 바람이 불어오자 뜰에 심어진 나무들이 우스스 휘날 렸다. 준후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서 주기 선생이 편 진의 방향을 살폈다. 역시 십이지신술을 응용한 진법이었다. 그 진법은 집을 보호하는 한편 집의 바깥쪽으로 큰 소리가 새어 나가는 것을 어 느 정도 막아주는 역할을 하는 듯 싶었다. 준후가 고개를 돌려 위쪽을 보니 주기 선생은 지붕 위에 올라서서 천천히 등에 지고 있는 깃발 중에서 십이지번의 깃발 두 개를 뽑아 들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도 집 전체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좋은 위치였다. 이 집을 지키기 위해 여러 번 싸웠던 듯 익숙한 동작들이었다. 주기 선생은 기를 뽑아 든 뒤 꼼짝도 하지 않고 허공을 노려보며 서 있었고, 준후도 역시 한 손을 부적이 들어 있는 소매 속에 넣은 채 사방을 조심스럽게 둘러보았다. 무엇인가 영기를 품고 있는 것들이 점점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준후가 느끼기에 그 것은 무형의 기운이 엉긴 것이 아니고 작은 형체를 지니고 있는 것 같았다. 준후는 소매 속에서 부적을 꺼내 들고 한 손으로 떨쳐 수인을 맺었다. 그러자 위에서 주기 선생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끄러운 술수는 부리지 마라. 온 동네 사람들이 다 깨어나고 발칵 뒤집히는 꼴을 보고 싶지는 않겠지? 너는 참견하지 말란 말 이다.”

“아저씨의 진법이 이렇게 고명하신데 어떻게 소리가 새어 나 가겠어요?”

“좌우간 너는 빠져. 이크, 온다.”

빠르게 다가오고 있던 ‘그것’들은 집에 근접해 오자 갑자기 여 러 개의 형체로 갈라지더니 집을 에워싸고 돌며 빠르게 움직였 다. 순간적으로 벌어진 일이라 준후와 주기 선생은 긴장을 늦추 지 않고 ‘그것’들이 갈라져 나간 좌우를 살폈다. ‘그것’들은 나뉜 여러 개가 다시 여러 개로 나뉘고 또다시 여러 개로 갈라져서 집 주위를 에워싸며 빙글빙글 돌았다. 진으로 보호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음산한 기운이 점점 안으로 파고들기 시작하자 주기 선생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제길, 좀비돌(Zombie Doll)*인가 보다!”

“좀비 뭐라구요?”

준후의 말에 주기 선생이 대답하기도 전에 집 주위를 에워싸고 있던 기운들이 갑자기 집 뒤쪽을 노리고 모여들다가 폭발하는 듯한 기운을 내뿜으며 하나로 합해졌다. 집 뒤쪽에서 짙어지 는 영기에 준후는 고개를 돌렸고, 주기 선생은 이미 휙 하고 몸 을 날린 뒤였다.

‘나누어서 집 주변을 돌며 살피다가 하나로 합해서 진을 뚫으려고 하는구나!’

준후는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주기 선생을 따라 집 뒤쪽을 향해 달려갔다.


* 좀비 인형, 즉 보통의 인형을 주술력으로 좀비화해서 마치 생명이 있는 것처럼 움직이게 만든 것.


달려가던 준후의 귓전에 째지는 듯한 비명 소리가 스쳤다. 집 뒤뜰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그 소리는 영적인 것이어서 보통 사 람들에게는 들리지 않았겠지만, 준후의 귀에는 끔찍할 정도로 크게 울려왔다. 준후는 부적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면서 다시 소맷 자락을 떨쳐냈다. 소매 속에서 벽조선이 미끄러져 내려와 준후 의 손에 잡혔다. 준후가 막 뒤 모퉁이를 도는 순간 눈앞에서 번 쩍이는 광채와 함께 사방의 공기가 폭풍처럼 강한 힘으로 쏟아 져 오는 것이 느껴졌다. 준후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꼬마야! 넌 빠지래두!”

주기 선생의 목소리를 듣고 준후는 눈을 떴다. 준후의 눈앞에 는 주기 선생이 버티고 서 있었고 그 앞에는 거대한 형체가 꾸물 거리고 있었다. 주기 선생은 인번幡)과 축(丑) 두 개의 깃발을 휘둘러 그놈이 밀고 들어오려는 것을 막고 있었다. 그 거대 한 형체는 처음에는 그저 무언가가 마구 뭉쳐져 있는 듯했지만 자세히 보니 조그마한 인형들이 한데 엉켜서 커다란 형체를 형 성한 것이었다. 좀비 돌이라고 주기 선생이 소리를 질렀지만 영 어라고는 단 한 글자도 모르는 준후로서는 그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주기 선생은 이마에 힘줄까지 불거진 채로 있는 힘을 다 해 그놈을 막아내는 듯했다. 그런데도 주기 선생은 눈앞의 인형 보다 준후가 자신을 도와 손을 쓰는 것이 더 걱정되는 듯, 서둘 러 준후의 눈치를 보다가 길게 고함을 질렀다.

“아아앗!”

주기 선생이 고함을 지르자 등에서 제황사신이라고 하던 네 개의 깃발과 지금 빼어 들고 있는 두 개의 깃발을 제외한 열 개 의 깃발이 저절로 쑥 빠져나오더니 허공을 뒤덮을 듯 활짝 펴지 면서 인형 뭉치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러나 인형 뭉치는 깃발들 이 채 닿기 전에 사방으로 폭발하듯 흩어져 버렸고 버티고 있던 힘이 없어지자 주기 선생은 순간적으로 몸을 앞으로 주춤거렸 다. 그 앞에서는 열 개의 깃발들이 아슬아슬하게 서로 비껴 나가 허공으로 날아올랐고 인형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가 다시 주기 선생을 향해 날아들었다. 인형들은 전부 노랑머리에 늘씬한 몸 매를 한 소위 마론인형이라고 불리는 것들이었다. 주기 선생은 역습을 받자 기합 소리와 함께 손에 든 두 개의 깃발을 곧추세우며 재빨리 몸을 회전시켰다. 주기 선생의 몸은 순식간에 회오리 바람처럼 돌면서 달려들던 인형들을 어지럽게 튕겨 냈다. 준후 는 그때까지 멍하니 보고만 있다가 문득 그 인형들 하나하나에 짙은 요기가 서려 있는 것을 느끼고는 반사적으로 손에 들고 있 던 부적들을 허공에 흩뿌렸다. 십여 장의 부적이 허공에서 타오 르면서 제각기 인형을 적중시킨 것과 주기 선생이 회전을 멈추 고 팔을 내뻗은 것은 거의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부적에 적중 된 십여 개의 인형들은 마치 폭죽처럼 푸르스름한 불꽃을 터뜨 리며 폭발했고, 준후는 주기 선생이 몸을 비틀하는 것을 보고 그 쪽으로 뛰어갔다.

“아저씨! 괜찮아요?”

“에이, 제길, 조금 어지러운 것뿐이다! 너무 돌았더니. 끼어들 지 말란 말이다!”

말을 잇는 주기 선생은 너무 몸을 무리하게 돌려서 아직까지 어지러운지 있는 대로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준후가 보고 있 는 것을 의식해 평소보다 무리하게 돈 것이 아닐까 싶어 준후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웃어? 야, 인마, 왜 웃어?”

주기 선생은 준후가 웃는 모습을 보고 자기를 비웃는다고 생 각했는지 역정을 내면서 팔을 휘둘러 허공에서 깃발들을 모조리 잡아 열두 개의 깃발을 뭉쳐 잡았다. 준후는 이렇게 화를 내는 주기 선생의 모습에 오히려 친근감이 들었다. 비록 자기에게 화 를 내고는 있지만 전에 생각했던 것만큼 냉혈한은 아닌지도 모 른다는 기분이 들어서였다. 주기 선생은 준후야 어떻게 생각을 하든 말든 입술을 깨물면서 반대편에서 뭉쳐드는 좀비 인형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좀비 인형들은 다섯 개의 형체로 나뉘어 뭉쳐 가고 있었다. 준후와 주기 선생은 둘 다 그 모습에 온 신경을 집 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좀비 인형들이 뭉쳐 가는 모습이 마치 슬 로모션처럼 느리게 보였지만 실제로 좀비 인형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뭉치기를 마치고 무서운 속도로 다시 날아들었다. 두 개 가 주기 선생 쪽으로, 그리고 나머지 세 개가 준후 쪽으로 날아 들자 주기 선생과 준후는 동시에 몸을 날렸다. 그러면서 주기 선 생은 준후에게 엉뚱한 소리를 했다.

“제길! 왜 네 쪽으로 세 놈이 가지?”

준후는 그 말에는 대꾸도 하지 않은 채 한쪽 어깨를 숙여 하나 를 피한 뒤 한쪽 발을 들어서 아래쪽으로 날아드는 좀비 인형들 을 피하며 벽조선을 크게 휘둘렀다. 벽조선에서 검은 기류 같은 것이 쏜살같이 뻗쳐 나갔다. 그러자 준후의 허리춤을 노리며 날 아들던 좀비 인형이 벽조선의 검은 바람을 맞고 기괴한 영적인 소리를 지르면서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주기 선생은 준후를 곁눈으로 보면서 양손에 여섯 개씩 쥔 깃 발을 몽둥이처럼 휘두르며 한꺼번에 달려들던 두 개의 좀비 인형 뭉치를 후려갈겼다. 좀비 인형 중의 한 덩어리는 산산조각이 나며 흩어졌고 나머지 한 덩이 역시 푸른 불꽃을 흩뿌리며 순식 간에 타들어 갔다. 준후는 뒤로 돌아간 좀비 인형들이 덮쳐 올 것을 대비하여 몸을 재빨리 뒤로 돌렸다. 그러나 좀비 인형들은 준후에게 덮쳐 오지 않고 허공을 돌아서 담장 너머로 꺼지듯 사 라졌다. 준후와 주기 선생이 그놈들을 마저 쫓을 요량으로 담장 너머로 눈을 돌리는데 갑자기 담장 위로 작고 하얀 손 하나가 불 쑥 올라왔다. 예상하지 못한 광경에 주기 선생과 준후가 흠칫하 고 뒤로 한 걸음씩 물러서자 이번에는 또 다른 손이 담장 가를 잡더니 곱슬곱슬한 금발머리의 여자아이가 담장 위로 쑥 머리를 내밀었다.

“어어?”

주기 선생이 미간을 찌푸렸고 준후는 알 수 없는 가운데 온몸 이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


“마스터요? 저도 그땐 기절해 있어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해 요. 다들 마찬가지 상태였잖아요.”

연희는 그때의 일을 생각하자 몸서리가 쳐지는 듯 간간이 말 을 끊었다. 현암은 인상을 쓰며 연희를 마주 보고 앉아 있었고, 승희는 초조한 눈빛으로 연희를 바라보았다. 원래부터 위로 쭉 치켜 올라간 눈썹이 더욱 높이 치솟은 듯했다. 연희는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이었다.

“마스터가 죽기 전에, 아주 커다란 블랙서클이 나타났었잖아 요. 그건 모두 보셨을 거구요.”

“그러나 그건 아무 이유 없이 사라졌죠. 그러고 보니 이상한 일이에요. 마스터가 블랙서클을 불러냈고, 지옥문이 열리려던 참이었죠. 우리는 전부 당했지만, 마스터는 무리한 소환술의 여 파로 죽은 것 같다고 신부님이 말씀하셨죠. 그렇다면 마스터의 영혼은 블랙서클로 들어가 파괴되지 않았을 수도 있어요.”

“그렇네요. 그때는 왜 그런 생각을 못했는지. 끝났다는 느낌에 미처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연희가 중얼거리듯 말하다가 반쯤 숙였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럼 어떻게 된 거죠? 마스터의 영혼은……………. 그럼 마스터가 살아 있다는 건가요?”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일은 없습니다.”

현암이 무뚝뚝하게 말하자 연희는 떨리는 듯한 눈으로 현암을 쳐다보았다.

“그러면?”

“문제가 되는 것은 마스터의 영혼입니다. 연희 씨도 이제는 영혼의 존재를 믿으시겠지요?”

“물론이에요.”

“그러면 그 영혼이 승천하지 않고 지상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경우도 있다는 것도.”

거기까지 현암이 말하자 연희는 흠 하는 소리를 내며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승희가 간략하게 자신들이 생 각한 것을 연희에게 말해 주었다. 연희는 수정의 이야기가 나오 자 몸을 떨었지만 그래도 침착함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말 했다.

“마스터는 무슨 짓을 꾸미고 있을까요?”

연희의 말에 이번에는 현암이 대답했다.

“글쎄요, 그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군요. 블랙서클 중에서 생존자는 성난큰곰뿐이고 그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 습니다. 승희의 투시도 그런 고도의 영능력자에게는 통하지 않 지요. 그리고 그 이외의 사람들은 모두 죽었고 소혼도 되지 않으니까요.”

그러자 연희가 눈빛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한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도 죽었지만 소혼술이 가능하다고 한다면 뭔가 알아내는 게 가능할지도 몰라요.”

그러자 승희가 고개를 갸웃했다.

“응? 블랙서클의 구성원 중에서? 그런 사람이 누가 있지? 모두가 블랙서클에 영혼을 흡수당했는데.”

승희의 말을 듣고 연희가 살짝 웃었다.

“아니야. 아주 중요한 사람이 한 명 있어. 블랙서클에 영혼을 흡수당하지 않은 사람이.”

“그게 누군데?”

“안드레이, 처음에 블랙서클을 조직했던 사람 말이야.”


“넌 누구냐?”

금발머리의 꼬마 여자아이가 담장 위로 서두르는 기색도 없이 올라서자 주기 선생이 고함을 질렀다. 조금 마른 편인 그 아이는 하얀 얼굴에 탐스러운 금발을 기르고 있었는데 얼굴에 알 수 없 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어 어딘지 모르게 섬뜩해 보였 다. 나이는 열두어 살이나 되었을까? 그렇지만 아이의 창백한 얼 굴에 떠올라 있는 표정은 서릿발처럼 싸늘한 느낌을 주었고 푸 른 두 눈에서는 이상한 광채가 일렁이고 있었다. 그 아이는 주기 선생이 외치자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주기 선생과 준후를 몇 번 훑어보았다. 한국말을 알아듣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 아이는 손가락 하나를 펴서 자신을 가리키며 조용히 주기 선생을 향해 말했다.

“레그나 슈바르츠…….”

주기 선생의 말을 알아들은 것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아마도 자신의 이름을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말을 듣고 주기 선생 이 인상을 썼다.

“레그나슈바르츠? 이름을 보아하니 독일 아이 같은데?”

준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아이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 아이에게서 흘러나오는 음산하고 악한 기운은 어디에선가 한 번 접해 본 듯한 것이었다. 아니, 한 번이 아닐지도…………. 준후가 더 생각하기도 전에 레그나의 등 뒤로 아까 도망쳐 갔던 좀비 인 형들이 한데 뭉쳐서 둥둥 떠올랐다. 그것을 보고 주기 선생이 고 함을 질렀다.

“못된 것!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 감히 어쭙잖은 힘을 믿 고 이런 나쁜 짓을 꾸미다니! 썩 꺼져 버리지 못해?”

좀비 인형들은 뭉쳐서 커다란 형태로 변하더니 담장 위에 있 는 레그나를 양팔로 안아 들었고 아이는 그 인형 더미가 만들어 낸 커다란 인형의 팔에 기대어 앉았다. 그리고 자신을 안고 있는 커다란 팔 속에 손을 넣어 작은 인형 하나를 꺼내 품에 안더니 뭐라고 중얼거렸다. 준후나 주기 선생은 모두 그 말을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다. 레그나가 여전히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 을 보고 주기 선생이 다시 소리를 질렀다.

“다른 놈들은 어디 갔냐? 전부 일곱 놈이라던데. 한데 뭉쳐서 덤벼라!”

준후는 주기 선생의 말을 듣고 눈을 크게 떴다.

“다른 자들요? 일곱이라고요?”

“그래. 저놈들은 모두 일곱 명이야. 겨뤄 본 건 저 계집애까지 셋뿐이었지만, 난 벌써 칠 일이나 여기를 지켰지.”

“그런데 여기를 왜 지키지요? 저 애들은 뭘 노리는 거예요?” 

“더 묻지 말라고 했지?”

주기 선생은 준후에게 쏘아붙이듯 말하고는 일갈성을 지르며 놀랍게 빠른 동작으로 오른손에 쥐고 있었던 여섯 개의 깃발 중 다섯 개를 허공에 뿌리고 남은 한 개의 인번을 그 아이를 향해 휘둘렀다. 그러자 펑 하는 소리와 함께 깃발 위의 기폭에 불이 붙으며 호랑이 깃발답게 커다란 기운이 포효하듯 허공을 날아 그 아이를 향해 덮쳐 갔다. 준후는 비록 좀비 인형을 부리는 아 이기는 하지만 조그만 여자아이에게 강한 주술을 쓰는 주기 선 생이 못마땅해서 무어라 한마디 항의라도 해야겠다 싶었다. 하 지만 그럴 사이도 없이 날아가던 인번의 기운은 옆에서 끼어든 또 다른 기운과 충돌해 허공에 흩어져 버렸다. 주기 선생과 준후 는 둘 다 흠칫하여 그 이상한 기운이 날아온 왼쪽을 쳐다보았다. 그쪽 담벼락 위에는 킥킥거리며 자기들끼리 뭔가 이야기를 나 누고 있는 두 명의 다른 아이들이 보였다. 한 아이는 금발에 푸 른 눈을 가진 남자아이였고 또 한 명은 옷차림이나 얼굴 생김새 로 보아 중국 아이인 듯했다. 금발의 남자아이는 이상한 털가죽 을 뒤집어쓰고 있었고 다른 아이는 무척이나 긴 머리에 옛날 사 람들이 입고 다녔을 법한 도포 비슷한 것을 걸치고 있었다. 주로 떠드는 쪽은 금발의 남자아이였고 긴 머리의 아이는 표정도 바 꾸지 않고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준후를 빤히 쳐다보던 중국 아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 얼거렸다. 중국어는 아닌 듯했는데 준후나 주기 선생은 한마디 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중국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준후 를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음산한 기운이 준후를 향해 날아왔다. 주기 선생은 깃발 하나를 펴서 준후의 앞을 막으려고 했으나 준 후는 주기 선생을 말렸다. 아이가 쏘아 보낸 기운은 준후의 바로 발 앞의 땅에 부딪히더니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몇 자의 한자가 씌어 있었다. 준후가 그것을 보고 주기 선생에게 말했다.

“말이 안 통하니 필담을 하려는 모양이네요. 저 보고 준후가 맞느냐는데요?”

주기 선생은 불쾌한 듯 인상을 찌푸리면서 대답했다.

“그 정도 한문은 나도 읽을 줄 안다. 그런데 놈들이 왜 이야기 를 하자는 거지? 사람을 없애고 증거만 날리면 될 텐데.”

주기 선생의 말에 준후가 뒤를 돌아보았다. 주기 선생은 눈을 가늘게 뜨고 준후를 마주 보며 말했다.

“넌 나를 나쁜 사람으로 알고 있지만, 그리고 나도 꼭 좋은 일 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번 일에서는 나를 의심하지 마. 난 지 금 이 집을 지켜 주고 있는 거야.”

“그런데 저 애들이 사람을 없애려 한다고 하셨지요? 그게 누구지요?”

“누구겠니? 이 집에 많은 사람이 사는 것도 아니고…………..”

“아라를?”

“그 철없는 아이가 뭘 안다고 없애려 하겠느냐? 최 교수야.”

“저, 저런!”

“저 애들은 사람 같지 않은 종자들이야. 꾸물대고 있을 필요가 없다구. 차라리 화끈하게 한판 뛰어서 극락왕생을 시켜 주든지 최소한 혼쭐을 내서 쫓아 버려야지.”

준후는 뭔가 더 물어보려고 하다가 고개를 돌려서 중국 아이 를 향해 부적을 날렸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부적을 조종하자 부 적은 저절로 화르르 타올라 허공을 날며 마치 제비처럼 준후의 손가락 놀림에 따라 불빛으로 글씨를 써 내려갔다. 마치 살아 있 는 생명체가 움직이는 것처럼 불꼬리가 자유자재로 늘어나며 글 자 하나하나를 완성하고 곧 사그라졌다. 허공에 불로 새겨진 글 자가 넘실거리자 저쪽의 아이들은 꽤 놀라는 듯했고 사실 주기 선생까지도 속으로 감탄을 했다.

‘나이도 얼마 안 먹은 꼬마 놈이 이런 놀라운 재주를 부리다 니. 정진한다면 엄청난 괴물이 되겠군!’

준후는 왜 이 집에 있는 사람을 해치려 하냐는 뜻의 한자 문 장을 다 쓰고 나서는 화가 난 듯 손가락을 아래로 향했다. 그러 자 글씨를 쓰던 불붙은 부적이 아이들이 앉아 있는 담장의 바로 밑으로 날아들어 번쩍하는 밝은 광채와 함께 거센 불길을 뿜었 다. 그러나 그 위에 앉은 두 명의 아이들은 미동도 하지 않고 아까보다 조금 더 굳은 얼굴로 준후를 바라보았다. 소름 끼칠 듯한 적막이 흘렀다. 아이들과 준후가 주고받는 시선에서 팽팽한 긴 장감이 맴돌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레그나를 비롯한 세 명의 아이들이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으나 준후와 주기 선생도 방심하고 있지는 않았기에 재빨리 등을 맞 대고 돌아섰다. 레그나의 작은 몸이 금발 머리를 휘날리며 허공 에 떠오르자 그 뒤의 좀비 인형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두 사 람을 향해 날아들었고 다른 두 명의 아이들도 담장에서 뛰어내 렸다. 푸른 눈동자의 아이는 총알처럼 몸을 뭉쳐 굴리면서 앞으 로 쏟아져 왔고 중국 아이는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좀비 인형이 뭉쳐서 날아오는 것을 주기 선생이 재빨리 깃발을 휘두르며 차 단하자 준후는 벽조선을 오른손에 옮겨 쥐고 마치 바위처럼 굴 러 들어오는 아이의 앞을 막아서면서 중국 아이 쪽을 보았다. 그 아이가 꺼낸 것은 작은 구리종)이었다.


“안드레이라면 연희 언니가 만나 보았다던 블랙서클을 만든 사람을 말하는 거야?”

승희의 말에 연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사람은 원래 주술적인 힘들에 경도되어서 그 힘을 가지면 큰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블랙서클을 만들었 다고 해. 그러나 마스터에게 배신당하고 말았지. 그래도 원래 총수였으니 그 사람의 영이라면 뭔가를 알고 있지 않을까? 아이들을 잡아 오는 것은 언뜻 간단한 일 같지만 인원이 몇 되지 않는 그들 조직으로 볼 때에는 상당히 큰일이었을지도 모르잖아.” 

“뭐가 큰일이야?”

승희의 말에 현암이 대신 대답을 했다.

“자질을 지닌 아이들이 우리나라에만 있지는 않겠지. 전 세계 에 흩어져 있었을거야. 그런 아이들을 찾아내는 것도 용이한 일 은 아니었겠지. 아이들을 교육시키려면 여러 사람의 주술을 하 나로 모아야 했을지도 모르니까.”

“그래요. 안드레이가 아무리 명목상의 총수였다고는 해도 뭔 가 알고 있을 거예요.”

연희의 말에 승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소혼을 해 봐야 하나? 하지만 준후에게 그런 걸 시킬수는…………….”

현암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 준후에게 그런 것을 시킬 수는 없어. 자신의 힘이 아닌 타력(他)으로 행하는 소혼이나 주술은 자신의 명을 갉아먹어. 준후에게 그런 것을 하게 할 순 없지. 나도 조금은 아는 바가 있 으니 내가 해 보도록 할게.”

“어머, 그러면 하지 마. 현암 군 수명도 줄어들잖아?”

“나는 괜찮을 거야. 난 힘을 빌려서 하는 것이 아니니까.”

승희는 현암의 말에도 안심이 안 되는 듯 연신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때 스르르 현관문이 열리며 두 남자가 들어왔다. 예상치도 못했던 박 신부와 윌리엄스 신부였다. 박 신부는 손에 지팡이를 짚은 채 윌리엄스 신부의 부축을 받고 있었다.

“어? 신부님이 여길 어떻게 오셨어요?”

“음? 현암 군과 승희도 여기 있었구나.”

현암과 승희, 그리고 박 신부와 윌리엄스 신부는 똑같이 어리 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어라?”

한 아이가 몸을 바위처럼 구부린 채 준후를 향해 굴러오고 있 었다. 준후는 아이의 앞을 막아서면서 낙지생근술(落地生根術) 로 그 아이와 맞부딪쳐 튕겨 낼 심산이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준후의 바로 앞까지 굴러오다가 고무공처럼 튕겨 올라가서 머리 위를 휙 하고 넘어갔다. 준후는 몸을 돌리려고 했으나 그럴 사이 가 없었다. 이번에는 중국 아이가 구리종을 딸랑거리면서 준후 앞으로 달려들었다. 주기 선생은 화가 난 듯 고함을 지르면서 사 방에서 밀려들어오는 좀비 인형들을 손에 든 깃발들로 막아 내 느라 정신이 없었다. 준후의 머리 위를 뛰어 넘어간 짐승 가죽을 뒤집어쓴 아이는 허공에서 웅크렸던 몸을 펴고는 다시 한번 위 로 튀어 올라가면서 길게 늑대 울음소리를 질렀다. 집 안으로 바로 뛰어들어 가려는 모양이었다. 준후는 다급해져서 자신을 노려보는 중국 아이를 무시하고 몸을 날리려고 했다. 그러나 그때 검고 가는 뱀 같은 것이 자신에게 쏘아져 왔다.

“이크.”

준후는 중심을 잃을 듯 몸을 비틀었다. 그 순간, 그 검은 줄 같 은 것이 아슬아슬하게 준후의 허리께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 나 그놈은 지능이 있는 것처럼 허공에서 둥글게 방향을 바꿔 준 후를 휘감으려는 듯 다시 날아들었다. 그때 그 검은 밧줄 같은 것의 끝에 금빛으로 ‘곤선승仙)이라는 세 글자가 반짝이 는 것이 얼핏 보였다. 준후는 망설일 겨를도 없이 그 자리에 납 작하게 엎드렸다. 곤선승은 준후의 위를 날아서 주인의 손으 로 되돌아갔다. 준후는 날쌔게 몸을 일으키면서 얼굴을 털어냈 다. 급한 나머지 얼굴을 냅다 땅에 박은 탓에 얼굴 여기저기에 흙 이 묻고 입안에선 흙모래가 씹혔다. 준후가 퉤퉤하면서 흙을 뱉 자 그 중국 아이는 깔깔거리며 놀리듯 손가락질을 했다. 준후는 녀석의 공격을 피하기는 했지만 놀림을 받자 부아가 치밀었다.


* 소설에서 룽페이가 사용하는 밧줄 내지는 채찍의 이름. 원래 곤선승은 중국의 고전신마 소설(小說)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봉신방(封)」의 등장인 물인 토행손이 사용하는 무기이다. 곤선승은 곤선색이라고도 하는 밧줄로 던지 면 스스로 적을 옭아매는 신통력을 지닌 법기로 등장하는데 여기에서의 곤선승 은 그 곤선승을 따서 이름 붙여진 것으로 설정하였다.


‘비웃어? 어디 얼마나 더 재주를 부리나 보자!’

준후는 주문을 외워 벽조선의 기운을 불러내기 시작했다. 저 정도로 한가락 하는 녀석이라면 벽조선쯤 되는 것으로 맞서 주 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면서도 준후는 의아한 느낌이 들 었다. 방금 곤선승이 날아드는 모습은 어디에선가 본 적이 있는 듯한 수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디서 보았는지 생각해 볼 여유는 없었다. 벽조선에서 기운이 뭉클하고 일어나자 녀석도 뭔가 알아차렸는지 대번에 웃음을 멈추고 방울을 흔들면서 손 을 내뻗었다. 그와 동시에 놈의 소매 속에서 다시 곤선승이 처 럼 쏘아져 나왔다. 이번에는 준후도 그에 대한 대비를 하고 있었 다. 준후가 왼쪽 소매를 허공에 떨치자 부적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와 곧바로 허공을 날아오르면서 준후의 주변을 에워싸듯 돌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써 보는 만부원진(萬符)의 술수였다. 곤 선승이 준후를 휘감으려고 하는 것을 만부원진의 부적들이 준후 의 주위를 세차게 맴돌면서 밀어냈다. 부적들과 밧줄이 서로 조 이고 밀어내며 힘겨루기를 하는 듯했다. 중국 아이는 그것을 보 고 한 손으론 방울을 더욱 세차게 흔들면서 다른 한 손을 품속에 집어넣었다.

비록 주기 선생이 좀비 인형들을 막아 내느라 정신없는 상태 이기는 했지만, 한 명의 아이가 집 안으로 날아 들어가려는 것까 지 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주기 선생은 이레 동안 이 집을 지키면서 여기 있는 세 명의 아이들과 이미 겨루어 본 일이 있었 다. 그러나 세 명이 한꺼번에 나타나서 달려드니 자부심이 강한 주기 선생으로서도 힘겹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오늘 준후가 나 타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을까 싶기도 했으나 워낙 오만한 성 격의 인물인지라 그런 생각을 머리에서 곧바로 지워 버렸다. 주 기 선생은 상한 자존심도 회복할 겸 혼자서 모두를 상대해 보겠 다고 마음먹고, 날아 들어오는 인형 무더기를 냅다 쳐내 얻은 틈 을 이용해 재빨리 발로 땅을 구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기 선 생이 자랑하는 힐기보법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주기 선생의 자취가 사라지자 주기 선생에게 달려들던 좀비 인형들은 자기들 끼리 허공에 충돌하면서 몇 개는 뒤로 튀어 날아가고 몇 개는 부 서지면서 땅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레그나가 화난 듯 날카로운 소리를 지르는 사이 주기 선생은 번개 같은 발걸음으로 막 창문 을 깨고 안으로 뛰어들어 가려는 또 한 명의 아이를 막아섰다. 

“요 얌체 같은 자식. 어딜……………..”

말을 잇던 주기 선생은 그 아이의 모습을 보고는 깜짝 놀라 입 을 다물었다. 방금 전까지도 멀쩡하던 아이의 얼굴이 어느새 온 통 금빛 털로 뒤덮여 있었다. 게다가 눈은 흰자위 하나 없이 붉 게 빛나고 있었고 길게 튀어나온 입에는 날카로운 이빨들이 섬 뜩할 정도로 뻗어 나와 있었다.

“늑대 인간?”

주기 선생이 주춤하는 사이 그 아이는 늑대 울음소리를 내면 서 뛰어들어 번쩍이는 금빛 털로 뒤덮인 손ᅳ앞발이라 부르는 것이 더 맞겠지만으로 주기 선생을 후려갈겼다. 특별히 빠른 것도 아니었고 특이한 수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주기 선생도 충분히 피할 수 있었지만 저까짓 거야 하는 마음에 기를 들어서 늑대 소년의 공격을 막았다. 그러나 가볍게 휘두르는 듯한 늑대 소년의 힘은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주기 선생의 깃발 두 개가 동시에 부러지면서 몸이 뒤로 튕겨지듯 날아가 집의 담벼락에 쾅 하고 부딪혀 버렸다. 컥 하는 주기 선생의 신음 소리가 들리 자 준후는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사이 레그나는 좀비 인형들 을 주기 선생에게 날려 보냈고 준후와 맞서고 있는 중국 아이는 품 안에서 부적을 한 뭉치 꺼냈다. 준후의 만부원진과 곤선승은 조이고 당기면서 우열을 가리기 힘든 싸움을 하는 와중에 중국 아이가 부적으로 무슨 술수를 부린다면 균형이 깨어질 우려가 있었다. 하지만 주기 선생이 위기에 빠진 것을 보고 가만히 있 을 수가 없어서 준후는 벽조선의 기운을 주기 선생을 노리고 날 아드는 좀비 인형 쪽으로 내쏘았다. 그와 동시에 중국 아이도 십 여 장의 부적을 준후를 향해 날렸다. 부적들은 마치 준후가 던졌 을 때처럼 허공에서 저절로 불이 붙어서 사방으로 퍼졌다가 준 후의 만부원진을 향해 날아 들어갔다. 벽조선의 검은 기운이 어 지럽게 날아들던 좀비 인형들과 부딪히자 좀비 인형들은 사방으로 갈가리 찢어져 나가거나 밀려 나갔고 중국 아이가 쏘아 낸 부 적들은 준후의 만부원진의 주위에 우르르 달라붙어서 폭발하듯 밝은불꽃을 내뿜었다. 좀비 인형들이 밀려나자 금발의 늑대 소 년은 흉악한 소리로 포효하며 주기 선생에게 달려들었으나 순간 적으로 위기에서 벗어난 주기 선생은 예의 힐기보법으로 재빨리 몸을 빼냈다.

“꼬마 녀석아. 누가 너더러 도와 달라고 했냐? 공연히 남의 일 에 끼어들지…………..”

소리를 지르던 주기 선생은 준후의 만부원진이 어지러이 흩어 지면서 준후가 휘청이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중국 아이의 부적들이 만부원진과 충돌하여 힘을 약화시킨 것이 틀림없었다. 만부원진의 주위를 감고 있던 곤선승도 더더욱 힘을 가하는 듯 했다. 아직까지는 만부원진이 준후의 주위를 보호하고 있긴 했 지만 곤선승의 힘에 조금씩 찌그러져 가고 있었고, 준후도 충격 을 받은 듯 몸을 가누지 못했다.

“이런 제길 그러니 자기 걱정이나 하란 말이야!”

주기 선생은 힐기보법으로 달려드는 금발의 늑대 소년을 살짝 피하면서 소리치다가 뭔가 결심한 듯, 지금까지 쥐고 있던 십이 지신의 깃발 중 한 개를 허공에 던지고 나머지는 보이지 않을 정 도의 빠른 동작으로 등에 꽂았다.

“자번)의 힘이여!”

주기 선생은 쥐의 기운을 불러내는 자번을 허공에 던지고는 자번의 힘이 채 나타나기도 전에 여태 사용하지 않았던 제황사 신번 중 두 개의 깃발을 꺼내 들었다.

“제황사신! 이놈들 각오해라!”

주기 선생이 양손을 떨치자 십이지번보다 크고 금빛과 붉은색 이 수놓아진 두 개의 깃발이 활짝 펴지며 주위가 훤하게 밝아졌 다. 오른손에 쥔 것은 청룡의 깃발이었고 왼손에 쥔 것은 백호의 깃발이었다.

준후는 비틀거리다가 만부원진의 술수를 포기하고 손에 수인 을 맺으면서 벽조선을 사방으로 떨쳤다. 그러자 준후를 중심으 로 돌던 부적들이 곤선승 주위에 달라붙었고, 한꺼번에 폭발하 듯 불이 붙으며 곤선승을 준후의 주위에서 밀어냈다. 준후는 재 빨리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서면서 고개를 휙 내저어 땀을 흩뿌리 고는 눈을 매섭게 치켜떴다. 준후의 묶은 머리카락이 어깨로 떨 어지기도 전에 곤선승은 상처 입은 뱀처럼 꿈틀거리며 중국 아 이의 손으로 돌아가려 했다. 준후는 그 곤선승이 상당히 영통한 물건 같아서 그대로는 쉽게 상대하기 어려울 것 같다고 생각했 다.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중국 아이의 손으로 돌아가려던 선 숭이 부르르 떨면서 그 자리에서 미친 듯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주변의 작은 기운들이 모여 곤선승을 갉아 들어가는 듯했다. 

“아! 십이지번 자번의 기운이구나.”

주기 선생이 불러낸 자번, 즉 쥐의 기운이 떼로 몰려들어 선 승을 갉아 들어가는 것이 분명했다. 곤선승이 영통하다고는 하 지만 밧줄의 일종이어서 사방에서 갉아 대는 데에는 당해 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곤선승이 요동을 치자 중국 아이의 얼굴은 당 황한 빛이 역력했다. 하지만 방울을 휘두르며 다시 덤벼들 태세 를 갖추었고, 이번에는 준후 쪽에서 흥하고 코웃음을 치며 우보 법으로 중국 아이의 발을 땅에 묶어 버렸다. 레그나는 좀비 인형 에 의해 허공에 떠 있었고 늑대 소년은 힘이 너무 강해서 우보법 을 써 보았자 준후가 도리어 튕겨 나갈 것 같아 강한 공격이나 힘보다는 준후처럼 주술력에 주로 의존하는 것처럼 보인 중국 아이에게 우보법을 쓴 것이다. 우보법의 술수가 완성되자 중국 아이는 두 다리가 마비된 듯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다. 그러 나 곧이어 그 아이도 뭐라고 중얼거리면서 발에 힘을 주는 듯했 고 그러자 준후도 몸이 뻣뻣하게 굳는 느낌을 받았다.

‘얼래? 저놈도 우보법을 쓸 줄 아는 건가?’

준후는 속으로 당황했다. 물론 우보법이나 부적술은 자신이 만들어 낸 것도 있지만 근원을 따지자면 중국 모산파의 술법이 나 화산파의 도가 술법에서 유래된 것이니 비슷한 술법을 쓸 수 도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중국 아이와 준후가 같이 굳어 버리면 주기 선생 혼자서 레그나와 늑대 소년 둘을 다 상대해야 하는데, 주기 선생이 비록 고수이기는 하지만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막강한 주술력을 지니고 있는 둘을 이겨 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러나 주기 선생은 준후와 중국 아이의 몸이 한꺼번에 굳어진 것에 만족한 듯 미소를 띠면서 두 개의 제황사신번을 허공에 휘 둘렀다. 깃발에서는 각각 용과 호랑이의 모습을 띤 금빛 기운이 빠져나와 포효하듯 허공을 한 바퀴 돌다가 각각 레그나와 금발 소년에게 맹렬한 기세로 다가들었다. 자세히 보니 제황사신의 붉은 깃발에 금박으로 그려져 있던 청룡과 백호가 빠져나가 실 제처럼 금빛을 흩뿌리면서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금박으로 이루 어진 두 짐승이 허공을 가로질러 날아드는 모습은 정말이지 현 란하기 이를 데 없었다. 퍽 아름답게 보이기도 했지만 거기에 서 린 기운도 예사 것이 아니었다. 주기 선생이 맞서고 있는 아이들 도 그런 느낌을 받은 듯 경솔하게 달려들지 않았다. 레그나는 청 룡번의 기운이 꿈틀거리며 다가오자 날카로운 소리를 지르면서 좀비 인형들을 한데 모아서 커다란 손 모양을 만들었고 늑대 소 년은 뒤로 팔딱팔딱 재주를 넘으면서 달려드는 백호번의 기운을 날쌔게 피해 나갔다. 그러나 주기 선생은 일단 두 아이들이 멈칫 하자 그 아이들은 그대로 두고 재빨리 등에서 진번(辰幡의 깃발 을 뽑아 들어 몸이 굳은 채로 있는 중국 아이에게 쏘아 붙였다. 그것도 있는 힘을 다한 듯, 깃발에서 기운만 쏘아 낸 것이 아니 고 깃발 자체에 불을 붙여 모든 기운을 합한 듯이 보였다. 준후 는 주기 선생의 수법이 너무 지독하다고 생각했지만 준후와 중국 아이 둘 다 우보법으로 발이 묶여 있었으니 별수 없었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중국 아이는 진번의 기운에 적중되어 뒤로 주 욱 밀려나다가 뜰의 나무에 부딪혀 그 나무까지 꺾어 버리고 뒤 로 데굴데굴 뒹굴었다. 그와 동시에 레그나가 뭉쳐 낸 커다란 손 모양의 좀비 인형들과 청룡의 기운이 허공에서 격돌했다. 순 간의 굉음과 함께 몇 개의 인형들은 부서져서 흩어져 갔고 청룡 번의 기운은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우하하! 이놈들! 맛이 어떠냐?”

주기 선생이 크게 웃어 대자 레그나는 입술을 깨물면서 좀비 인형을 조종해 달려드는 청룡의 기운을 막아 내면서 또 다른 한 무더기의 좀비 인형들을 쓰러져 있는 중국 아이에게 보내어 그 아이를 일으켰다. 그런데 그사이 놀라운 속도로 재주를 넘으 며 백호번의 기운을 피하던 늑대 소년이 몸을 굴리며 주기 선생 쪽으로 달려들었다.

“이 녀석이?”

주기 선생이 놀라서 깃발을 휘두르려 하자 늑대 소년은 아까 준후가 한 것처럼 순식간에 몸을 숙여 땅바닥에 납작하게 엎드 렸다. 그러자 늑대 소년의 뒤를 쫓던 백호번의 기운이 채 방향을 바꾸지 못하고 주기 선생 쪽으로 달려들었다. 주기 선생이 헉 소 리를 내면서 재빨리 몸을 돌려 아슬아슬하게 백호번의 기운을 피하기는 했으나 몸을 돌리는 사이 늑대 소년의 앞발이 주기 선생의 옆구리를 할퀴고 지나갔다. 주기 선생이 비명을 지르자 자 신을 묶어 놓았던 우보법의 주술에서 막 풀려난 준후가 재빨리 벽조선을 흩뿌렸고 늑대 소년은 주기 선생의 얼굴을 긴 발톱이 돋은 앞발로 후려치려다가 벽조선의 기운을 느끼고는 몸을 굴 려 피했다. 그러자 레그나가 뭐라고 고함을 쳤고 늑대 소년은 훌 쩍 뛰어 레그나의 옆으로 물러났다. 아이는 훌쩍 뛰는 사이에 마 술처럼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레그나는 어느새 중국 아이를 부축하고 있었다. 중국 아이는 큰 충격을 받은 듯 입에서 가는 선혈을 흘리며 고개조차 가누지 못했다. 준후도 재빨리 주 기 선생 옆으로 가서 상태를 살폈다. 옆구리의 상처가 생각했던 것보다 꽤 깊었고 출혈도 심했다. 하지만 주기 선생은 그 와중에 도 아픔을 참아내려는 듯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소리를 쳤다. 

“뭐 하냐? 놈들을 다 물리쳐 버려!”

주기 선생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아이들 셋은 섬뜩한 눈초리 로 주기 선생과 준후를 노려보다가 담장에서 뛰어내려 사라져 버렸다. 준후가 곧 담장 위로 뛰어올라 살펴보았으나 그사이에 셋은 모두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더 이상 영기도 느껴지 지 않았다. 어떻게 사라졌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들이 물러간 것은 확실했다. 준후가 돌아왔을 때 주기 선생은 상처가 심한데 도 일어난 채로 경계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손에는 청룡번과 백 호번을 들고 있었는데 금박으로 그려진 그림이 돌아온 것으로보아 쏘아 냈던 기운을 불러들인 것 같았다.

“괜찮으세요?”

“문제없다. 그런데 놈들은 도망쳤니?”

“네, 그런 것 같아요.”

“이런 제기랄. 방심하는 바람에…………. 하지만 한 놈이 다쳤으니 적어도 오늘은 안심해도 되겠지.”

주기 선생이 말을 이으면서 손가락으로 사방을 튕기자 땅에 파묻혀 있었던 듯한 작은 깃발들이 휙휙 빠져나와 땅에 누웠다. 집 안을 보호하며 소리가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진법을 푼 모양이었다.

“이제 진법은 없애도 되겠지. 저것들 좀 주워다 주겠니?” 

주기 선생의 목소리는 평소의 그답지 않게 차분하고 온화했 다. 준후가 고개를 갸웃하면서 땅 위에 즐비하게 흩어져 있는 것 발들을 주우려고 발걸음을 옮겼다. 몇 걸음이나 떼었을까 주기 선생이 핑그르 돌더니 땅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심한 상처를 무 릅쓰고 고집스럽게 버티려다가 쓰러진 것 같았다. 준후는 어떻 게 하면 좋을까 궁리하다가 별수 없이 주기 선생의 몸을 부축해 서 집 안으로 옮기려 했다. 하지만 주기 선생은 혼미한 정신에도 손을 내저으며 준후를 뿌리치려 했다.

“이 녀석아! 나를 어쩌려고 그러냐?”

“아저씨, 일단은 치료받으셔야죠. 그러니 …………….”

“그렇다고 이 집에 들어가란 말이냐? 최 교수와 알지도 못하 는 처지에? 어디서 뭘 하다가 다쳤다고 할 거야. 응? 주술을 부 리는 아이들이 당신을 죽이려고 쳐들어와서 막아 주기 위해 싸 우다가 다쳤다고 할 거냐? 어이구.”

준후는 어떻게 할까 망설였다. 그러고 보니 주기 선생의 말에 도 일리가 있었다. 머뭇거리던 준후가 떠올린 곳은 자신이나 현 암, 박 신부가 다쳤을 때 가는 병원이었다. 이유를 묻지 않고 치 료해 주는 병원이 있다고 말하자 주기 선생도 고개를 끄덕이고 는 나직하게 신음 소리를 내면서 머리에 썼던 도관(冠)을 벗 어 품에 넣었다. 준후는 주기 선생을 도와 끈으로 등에 동여맸던 십이지신의 깃발들과 제황사신번의 뭉치를 풀어 내렸다. 그리고 웃옷을 말아 옆구리에 대고 허리띠로 묶어서 조금이나마 지혈을 했다.

“제기랄, 천하의 주기 선생이 부축받는 신세가 되다니. 재수 옴 붙은 날이군.”

주기 선생의 푸념에서 준후는 주기 선생이 은연중에 자신을 부축해 달라는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얼른 부축해 집 밖 으로 나와 택시를 잡았다. 주기 선생이 쳤던 진법이 신통했던지 그렇게 요란하게 싸웠어도 아무도 최 교수의 집을 이상하게 보 지 않았고 일에 열중해 있을 최 교수나 잠들어 있을 것이 분명한 아라도 밖을 내다보지 않았다. 주기 선생은 계속 투덜거렸으나 그 말투에는 정말 불만스럽다기보다는 쑥스러움과 준후에 대한 고마움이 묻어 있는 것 같아서 준후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박 신부와 현암에게 전화를 해야겠 다고 생각했다.


박신부가 왜 윌리엄스 신부까지 대동하고 연희의 집에 나타 났는지에 대해서 박 신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현암과 승 희, 그리고 연희는 지금까지 그들이 나눴던 이야기를 그대로 전 해 주었다. 그 말을 듣자 박 신부 역시 놀라고 당혹스러워했다. 

“블랙서클의 잔존자들이라니. 이럴 수가 있나.”

“승희의 투시가 틀린 적은 없었어요. 뭔가 대비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대비를 한다. 어떻게 말인가? 안드레이를 소환해 보겠다는 것인가?”

“제가 해 보겠습니다. 능숙한 건 아니지만 신필(神)*로 영과 대화를 나누는 정도는 저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도가에서는 영과 소통하는 방법으로 영매를 쓰기도 하지만 신필이라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는 붓이나 꼬챙이를 허공에 매달아 놓고 밑의 종이나 모래에 글자를 새기게 하는 것으로 영계 통신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후대 서양의 위자 보드나 연필로 하는 영계 통신(볼펜 장난과는 조금 다르다)도 이러한 맥락에서 변형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방법은 좋지가 않아. 저승과 이승 간의 관계를 만드는 것은…………..”

“그렇지만 중요한 일 아닙니까? 허락해 주십시오. 제가 한다면 준후와 같은 부작용은 없을 겁니다.”

“흠.”

박신부는 그래도 내키지 않는 듯했다.

“조금 더 알아보고 난 다음 결정하기로 하세. 죽은 자의 영에 게 뭔가를 물어보는 것도 일종의 청탁이라고 할 수 있지. 그런 일을 하는 데에는 반드시 대가가 필요해. 그런 일이 좋지 않다는 것은 자네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현암보다도 연희가 오히려 질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것, 신기하다고만 생각해 왔는데 정말로 좋지 않은 건가 요?”

“좋을 것이야 하나도 없지요.”

현암의 말을 듣고서 연희는 뭔가 생각해 보는 것 같았다. 박 신부와 현암, 승희도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현암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준후는 어디 있지? 집에 있나요?”

“글쎄, 나도 보질 못했는걸? 최 교수 댁에 가서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네.”

“늦는 것 같은데요. 준후를 믿기는 하지만 걱정이 되네요.”

이야기를 듣던 승희가 냉큼 전화기를 집어서 최 교수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반대쪽에서 아라가 졸린 목소리로 전화를 받고 는 준후를 찾다가 없다고 대답했다. 승희가 그럼 언제쯤 준후가 나갔느냐고 물었지만 아라는 모른다고 했다. 승희는 전화를 끊 고일동을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갔다니까 집에 와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준후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닐까?”

“잘 있는 것 같네요. 별로 깊이 들여다본 것은 아니지만 그냥 잘 있는 건 확실해요.”

“투시력을 그렇게 막 써먹으면………..”

박신부가 한마디 하려 하자 승희가 선수를 쳐서 애교 있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조금만 보다가 말았어요. 호호호, 신부님, 너무 염려 하지 마세요.”

승희의 재롱에 모두들 피식하고 웃음을 터뜨릴 때 윌리엄스 신부가 불쑥 말을 꺼냈다.

“이제 시간도 늦었습네다. 돌아가서 마저 상의하시는 것이 어 떨까 싶습네다만..

그 말에는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아서 모두들 연희와 연호에 게 작별 인사를 하고 자리를 일어났다. 현암과 승희가 먼저 문을 나섰고 박 신부의 불편한 다리 때문에 윌리엄스 신부와 박 신부는 조금 뒤에 뒤를 따랐다. 현암은 항상 승희가 앞장서서 박신 부를 부축했기 때문에 따로 신경 쓰지 않았는데 승희가 박 신부 를 그냥 두고 자신을 따라오자 의아해하며 돌아가서 박 신부를 부축하려고 했다. 그런데 대문 앞에서 승희가 현암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현암이 돌아보니 승희의 얼굴은 비록 웃고 있기는 했 지만 아까와는 달리 약간 침울하게 굳어져 있었다.

“현암군, 나랑 새자.”

“어디로?”

“준후 찾아서.”

“준후 잘 있다면서?”

“그런데 뭔 일에 말려든 모양이야.”

“그건 무슨 소리야?”

“준후 지금 병원에 가 있더군.”

“음? 그럼 다쳤어?”

“아니, 아니. 다친 건 아닌데 병원에 가 있는 것 같았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지는 못했지만 골치 아픈 일에 말려든 모양이 야.”

“음, 그렇다면…….”

“별것 아니니 우리끼리 가면 되잖아. 신부님 불편하신데 자꾸 거동하시게 만들지 말구.”

“흠.”

현암이 대답도 하기 전에 승희가 박 신부에게 현암과 잠깐 들를 데가 있다고 선수를 치고 나섰다. 할 수 없이 현암도 승희가 말한 대로 병원으로 차를 돌렸다. 그런데 차 속에서 승희가 느닷 없이 딴소리를 했다.

“현암 군.”

“음?”

“둘만 어디 가는 거 싫어?”

“좋고 싫고 할 게 뭐가 있겠니?”

“우리 둘이서만 이야기하자. 어때?”

“하렴.”

“으으, 하여튼…….”

“왜 그러는데?”

승희는 뭔가 말을 하려다가 억지로 참는 듯했으나 현암은 무 표정한 얼굴로 운전에만 신경을 쏟고 있었다. 조금 지나서야 승 희가 다시 말을 꺼냈다.

“나랑 이야기하는 게 그렇게 싫으냐?”

현암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싫어’ ‘싫어’ ‘싫으냐’는 또 뭔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현암은 아무런 내 색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

“뭐 특별히 좋을 것도 없고 그렇다고 못 견디겠다는 것도 아니 니 안심하고 이야기하려무나. 누가 언제 싫다고 했니?”

“흥, 좌우간 무드꽝이야.” 

“무드? 허어.”

“아, 정말! 뭐가 허어냐!”

“나 그런 거 이제 알았니?”

승희는 기가 막혔다. 농담으로 그런 소리를 한다면 승희도 태 연하게 받아넘기고 이야기를 계속 끌어가겠지만 이건 그게 아니 었다. 돌같이 무표정한 얼굴에 기계 같은 음성으로 대답하니 정 이 뚝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승희는 참고 목소리를 가다듬 으며 말을 이었다.

“오늘이 무슨 날인 줄 알아?”

“몰라.”

너무나 간략하고 일순의 지체도 없이 현암이 대답하자 승희는 기어코 부아통이 터진 모양이었다.

“으이구, 이런 돌탱아. 세상에 자기 생일도 모르는 바보가 어 디 있냐? 오늘이 네 생일이다. 생일!”

“그랬던가?”

승희의 말을 듣고서도 현암의 얼굴 표정이나 목소리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승희는 기가 막힌다는 듯 한숨을 쉬더니 핸드백 에서 뭔가를 꺼내 현암에게 던졌다.

“으이구, 답답해 할 수 없지 뭐. 생일 축하해. 현암 군.”

“고맙군.”

현암은 대답만 했을 뿐 여전히 무뚝뚝한 표정으로 선물을 집 어들 기미조차 없었다. 승희는 이제 포기한다는 듯 창밖으로 시 선을 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현암은 차창에 비친 승희 의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고 보니 다른 때보다도 옷차 림에 신경을 쓴 듯했다. 현암의 마음 한구석이 찡하게 저려왔 다. 그러나 현암은 내색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미안하다. 승희야, 나라고 네 마음 모르겠니? 그러나 어쩔 수 없단다. 나에겐 이제 다른 누구를 좋아할 만한 감정이 남아 있지 않아. 그리고 이젠 돌아갈 수도 없고. 어쨌든 선물 고마워.’

현암이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을 승희는 아는지 모르는지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고 차는 무심하게 밤거리를 달려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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