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혼세편 4권 14화 – 홍수 27 : 정의는 이기는가
정의는 이기는가
동굴의 입구는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정도로 비좁았다. 체구 가 큰 박 신부는 안에 들어가는 데 상당히 애를 먹었지만, 일단 들어가자 그 안은 상상보다 넓었다. 그리고 안쪽으로 들어갈수 록 계속 넓어졌다. 박 신부는 준비해 온 랜턴을 켜고 주변을 둘 러보았다. 종유석이 맺혀 있고 간간이 물이 떨어지는 소리 외에 동굴 내부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종유석의 크 기로 보아 꽤 오래된 동굴인 것 같았다. 현암이 박 신부에게 말 했다.
“동굴 입구를 무너뜨려 버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준후가 들 어오지 못하게요.”
그러나 박 신부가 채 대답을 하기도 전에 승희가 고개를 번쩍
들면서 작은 소리로 외쳤다.
“앞에 누군가가 있어요! 두 사람, 아니 여섯 사람.”
“여섯 사람?”
“모르겠어요. 두 사람은 확실한데 나머지 네 사람은 이상해요.”
“좀비나 악령 아닐까?”
현암이 묻자 승희는 고개를 저었다.
“잘 몰라! 하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아. 이제껏 본 적이 없는 것들이야.”
승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저쪽에서 뭔가가 휙휙 소리를 내 며 날아들었다. 박 신부가 재빠르게 오라 막을 펼치자 날아온 것 들은 막을 뚫지 못하고 그 자리에 떨어졌다. 새의 깃털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물건이었지만 날아오는 속도로 볼 때 그대로 맞 았으면 큰 상처를 입을 수 있었다. 더구나 똑바로 날아오는 것이 아니라 주술력에 의해 조종되는지 굽은 동굴 안을 돌며 날아들 었다. 연이어 수없이 많은 깃털들이 날아왔다. 현암은 주저하지 않고 일갈성과 함께 태극기공의 자결로 동굴의 벽을 후 려갈겼다. 그러자 그들이 들어온 좁은 틈바구니가 조금씩 무너 져 내리기 시작했다. 현암은 월향검을 날렸다. 월향의 귀곡성이 동굴을 울리는 것과 동시에 박 신부의 오라 막이 동굴 안을 환하 게 비추었다.
동굴의 입구 주변에 진을 설치하면서 준후는 아까 읽었던 비 문의 내용을 되씹어 보았다. 홍수와 치우천왕의 이야기는 연희 가 조각을 보고 판단했던 그대로였고 그 이후의 주문들은 준후 로서도 알 수 없었지만 맨 앞부분의 개괄적인 가르침에 대한 것 은 분명 천부경(天符經)과 비슷했다. 서방으로 전달되었던 에 메랄드 태블릿은 스키타이어로 쓰여 여러 번 변했고 천부경도 원래의 신지 문자가 맥이 끊어져 신라 때 최치원이 한문으로 번 역한 것만이 남아 있다. 그런 점을 감안한다면 그 안에 쓰인 가르침은 같은 것이라 할 수밖에 없었다. 태곳적부터 내려오던 한민족의 가르침…
그때 준후는 멀리서 이상한 소리가 빠르게 다가오는 것을 깨달았다.
“어! 저건!”
헬리콥터였다. 거기에는 필경 승희가 말했던 요원들이 타고 있을 것이다. 준후는 동굴의 입구 주변에 널찍하게 화염진을 설 치하여 사람들의 출입을 막고 동굴의 입구 자체를 은형술로 가 릴 요량이었다. 그런데 헬리콥터 소리로 판단하건대 시간은 채 일 분도 남지 않은 것 같았다. 진을 펼칠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 족했다.
‘할 수 없다! 진은 포기하고 신부님을 따라가자!’
준후는 급히 동굴의 입구 쪽으로 달려갔다. 그때 우르르 하는 소리가 들렸다. 놀라서 다가가 보니 동굴의 입구가 무너지고 있었다.
“어! 이게 왜!”
준후는 왜 동굴의 입구가 무너지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깨 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세 사람! 준후는 자신의 입으로 세 사람의 영혼이 필요할 것이라 말했다. 그래서 자신만 을 남겨 두고………….
“너무해!”
준후는 소리를 질렀다. 동굴 입구는 몸집이 작은 준후도 뚫 고 들어갈 수 없을 만큼 막혀 버렸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그 러나 동굴 안으로 뛰어들려는 순간, 불에 덴 듯한 아픔이 어깨 를 스치고 지나갔다. 동시에 준후의 앞에 있던 바위가 패면서 돌 가루가 얼굴을 쳤다. 얼굴을 돌리자 거기에는 한 대의 헬기가 떠 있었다.
“아뿔싸! 벌써 발각되었구나!”
“발견했다! 두 시 방향 저격중이다. 다시 한번 쏘겠다!”
백호는 자기도 모르게 벌떡 몸을 일으켰다. 결국 발견되다니. 도망가거나 최소한 동굴 안으로는 들어갈 수 있게 하려고 했는 데 벌써 발견되어 저격을 받다니. 총소리에 놀란 주기 선생도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백호를 바라보았다.
“무슨 소리요?”
“그들이 발견되었나 봐요. 저격을…………”
“개자식들!”
주기 선생이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에 요원은 주기 선생을 총 으로 위협하여 앉히려 했지만 주기 선생은 더 이상 참지 않았다. 힐기보법을 써서 순식간에 요원의 눈앞에서 사라진 주기 선생은 눈 깜짝할 사이에 한 요원의 발을 걸어 넘어뜨리면서 다른 한 명 의 뒤통수를 잡고 기둥에 처박았다. 그리고 백호가 만류할 사이도 없이 헬기의 앞으로 달려갔다. 그곳에서 주기 선생의 눈에 뜨 인 것은 저격용 총에 총알을 장전하는 저격수와 놀란 얼굴의 맥 라렌, 그리고 저만치 산비탈에서 혼자 뒹굴고 있는 하얀 점이었 다. 하얀 점. 준후였다. 자신이 전인으로 생각하고 처음으로 마 음을 주었던 아이.
“준후야!”
주기 선생은 소리를 지르면서 총을 쏘려는 저격수를 덮쳤다. 맥라렌은 재빨리 권총을 뽑아 주기 선생을 쏘려고 했지만 주기 선생 쪽의 동작이 더 빨랐다.
“이 개자식! 아이에게 총을 쏴?”
달려드는 주기 선생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저격수가 총을 떨 어뜨리면서 균형을 잃었다. 주기 선생과 저격수는 한 덩어리가 되어서 헬리콥터에서 떨어져 내렸다.
순간적으로 땅에 몸을 굴리던 준후는 다음 총알이 날아올 줄 알고 눈을 감았다가 총알이 날아오지 않자 눈을 떴다. 그 순간 두 사람이 헬기에서 땅으로 털썩 떨어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 다. 준후는 몸을 피할 절호의 기회라 생각하고 은신술을 펼쳤다.
“아이가 사라졌습니다!”
이를 갈고 있던 맥라렌에게 다른 헬기의 저격수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맥라렌은 밖을 내다보았다. 그 몇 초 사이에 아이는 흔적 하나 남기지 않은 채 사라지고 없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괴물 같은 놈!”
백호는 안간힘을 다하며 맥라렌에게 덤벼들려고 했지만 정신 을 차린 두 명의 요원이 백호를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붙들고 수 갑을 채웠다. 백호는 발악을 했으나 당해 낼 수가 없었다. 맥라 렌이 백호를 째려보면서 무전기에 대고 외쳤다.
“전부 착륙! 유령 같은 놈이다! 포위망을 구성하고 움직이는 건 무조건 갈겨 버려!”
몰아치듯 닥쳐오는 깃털 무더기를 있는 힘을 다해 막아 낸 월 향은 길게 귀곡성을 내지르면서 현암의 손으로 날아들었다. 박 신부는 숨을 고르면서 오라를 약하게 했고, 승희는 기가 질려 소 리조차 내지 못했다. 그들의 앞에 여섯 개의 그림자가 서 있었다. 그들은 상상 밖의 인물들이었다.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두 명은 레드와 새의 깃털 옷을 입은 구구루. 그리고 그들의 뒤에 서 있는 다른 네 사람은 바로 박 신부와 현암, 준후와 승희 였다.
주기 선생은 안간힘을 다해 몸을 일으켰다. 천만다행으로 떨 어지는 순간 저격수가 밑에 깔려서 목숨은 건졌지만 부상을 입 었던 몸에 다시 큰 충격이 가해져 숨조차 쉴 수 없을 지경이었다. 주기 선생은 몸을 일으켰다. 준후가 어디로 갔을까 하는 염려밖에 없었으나 이미 준후는 사라지고 없었다.
‘은신술!’
그래, 조그마한 것이 영특하게도 은신술을 써서 숨었구나. 주 기 선생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저만치 돌 뒤에서 인기척을 느꼈 다. 볼 것도 없이 힐기보법을 사용하여 그리로 달려갔다.
“너, 너희들은 뭐야! 누구야!”
승희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소리를 질렀으나 그들은 대답하 지 않았다. 무엇인지 유리와 같은, 잘 보이지 않는 것을 들고 있 는 레드도, 아프리카 풍의 깃털이 가득 박힌 화려한 옷을 입고 있 는 구구루도, 그리고 그쪽에 서 있는 박 신부와 현암, 준후와 승희 도 마찬가지로 대답하지 않았다. 승희는 눈을 씻고 그들의 모습 을 살펴보았다. 정말 똑같았다. 다만 저쪽의 현암에게는 월향검 이 없었다. 그리고 박 신부에게서도 오라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 들의 얼굴은 바윗덩어리처럼 표정에 변화가 하나도 없었다.
“저것들은 영체로 만들어진 것이야.”
“영체요?”
“엑토플라즘. 반은 물질이고 반은 정신력인 물질이지. 마스터가 만들어 낸 것이 분명해.”
박신부가 몸에서 오라를 밝게 빛냈고 현암이 소리를 지르면서 그들 쪽으로 달려갔다. 그러자 저쪽에서 구구루가 날개를 펄 럭이듯 손을 흔들어 깃털을 우수수 내쏘았고 레드는 잘 보이지 않는 뭔가를 휙 내던졌다. 그리고 저쪽에서도 현암이 마주 달려 나왔다. 현암은 이를 악물었다. 아무리 마스터가 만들어 낸 영체 인형이라고는 하지만 자신과 똑같이 생긴 자와 싸운다는 것은 등골이 서늘한 일이었다. 갑자기 박 신부가 오라 구체를 내쏘아 구구루의 깃털들에 맞서며 소리를 질렀다.
“현암군!서!”
현암은 놀라 걸음을 덜컥 멈추었다. 문득 어깨 언저리와 발목 에 섬뜩한 아픔이 전해졌다. 놀란 현암이 뒤로 조금 물러서면서 주위를 살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현암의 어깨 와 발목은 예리하게 베여 피가 배어 나왔다.
“대체 이건…!”
그 순간, 저쪽의 현암이 이쪽의 진짜 현암에게 달려들었다. 현 암은 아슬아슬하게 가짜 현암의 주먹을 피하면서 아랫배에 일격 을 가했다. 쩡 하는 쇳소리와 함께 손목이 시큰해졌다. 마치 그 소리가 신호였던 것처럼 뒤에 서 있던 가짜 박 신부와 가짜 준 후, 가짜 승희까지도 달려들기 시작했다. 구구루는 계속 깃털을 내쏘아 박 신부를 붙들고 늘어졌고 네 명의 가짜 영체 인형들은 현암만을 향해 우르르 몰려들었다. 가짜 박 신부의 뒤에서는 검 은 기운이 솟아올랐으며, 가짜 준후에게서는 섬뜩한 붉은 기운과 함께 마치 과거의 리에게서처럼 여러 가닥의 염체들이 솟아올라 삽시간에 현암의 주위를 뒤덮어 버렸다. 현암은 이리저리 피했지만 순식간에 여러 대의 타격을 받고는 서너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예전의 현암이었다면 쓰러졌을지도 모르지만 천정개혈대법을 받은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게다가 승희가 현암에게 있는 힘껏 힘을 보내 주었기 때문에 큰 부상을 피할 수 있었다. 그때 현암 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저 수법들은 전에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틀림없어!’
현암이 넷의 집중 공격을 당해 위기에 몰린 순간, 가짜 박신 부가 주춤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가짜 박 신부의 가슴에는 무엇인가 짧은 막대가 박혀 있었다. 현암이 뒤를 돌아보니, 하얗 게 질린 얼굴을 한 승희가 석궁을 들고 있었다. 아까 요원과 숙 덕거리다가 얻어 가지고 온 것은 석궁이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가짜 신부는 별 타격을 받지 않은 듯, 가슴에 박힌 석궁 화살을 단숨에 잡아 뽑더니 그대로 꺾어 버렸다. 염체로 만 들어진 몸이라 피도 흐르지 않았다. 승희는 계속해서 석궁 화살 을 날렸으나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이내 화살이 떨어져 버 렸다. 그러나 그사이 현암은 정신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가짜 준 후는 멀리서 염체로만 공격을 해 왔고 가짜 승희도 뒤로 물러서 무언가 중얼거리고만 있었기 때문이다. 현암은 월향을 날려 염체들을 상대하도록 하고 가짜 현암과 싸우는 데에만 전념했다. 가 짜박 신부는 몸에 박힌 석궁 화살을 뽑아내더니 이번엔 박 신부 에게로 향했다. 승희는 바닥에 주저앉아 힘을 보내는 데에만 집 중했다.
박 신부는 베케트의 십자가까지 꺼내어 들고 있는 힘을 다해 구구루가 쏘아대는 깃털보다도 더 많은 오라 구체를 쏘아 보냈 다. 구구루는 깃털을 쏘다가 더 많은 박 신부의 구체 세례를 받 고 땅에 쓰러져 굴렀지만 여전히 얼굴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고 눈에도 초점이 없었다. 연달아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들 어 던지는 레드의 눈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몸은 영체로 된 것 같지 않았으나 살아 있는 느낌이 전혀 오지 않았다. 박 신부는 이를 악물었다. 구구루와 레드는 이미 죽어 좀비가 된 것이 분명 했다. 그 아이들을 그렇게 만든 자는 마스터였다.
“사악한 놈!”
“준후야.”
주기 선생은 마침내 동굴의 앞까지 달려갔다. 준후가 보이지 는 않았지만 붉은 핏자국이 점점 번져 가는 모습은 보였다. 주기 선생이 다가가 손을 대자 은신술이 사라진 듯 준후가 모습을 드 러내었다.
“아, 상준이 형.”
준후가 눈을 뜨며 말하자 주기 선생이 미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니, 응? 총을 맞은 것 같은데………….”
“아, 스쳤어요. 놀라서 그만 괜찮아요.’
준후의 총상은 다행히 크지 않았다. 하지만 총을 맞았다는 충 격 때문에 은신술을 쓴 뒤 잠시 정신을 잃은 것이 분명했다. 주 기 선생이 준후를 몸으로 가리면서 일으켜 세우자 준후가 벌떡 일어났다.
“다른 사람들은?”
“나만두고 저 안에 들어갔어요!”
“왜 너는 여기 버려둔 거야?”
“세 사람의 영혼……. 설명하기 힘들어요. 날 위해서 그런 거 같아요. 근데 동굴이 …………….”
주기 선생은 화급히 동굴 쪽을 돌아보았다. 준후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납득이 가지 않았으나 우선은 이 위기를 모면해야 했 다. 이대로라면 준후도 요원들의 총알에 죽고 말 것이었다. 자신 도 온몸이 엉망진창이었지만 준후에 대한 걱정 때문에 자신의 몸 걱정은 뒷전이었다. 주기 선생은 무너진 동굴 입구에서 조그 마한 틈을 발견했다. 준후는 그곳으로 가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주기 선생은 은신술을 써서 준후를 도망치게 하고 싶었다. 먼발 치에서 헬기들이 착륙하고 있었다.
“너, 내가 여기서 시간을 끌 테니 도망쳐 알았니?”
“안 돼요! 나도 동굴로 가야 해요!”
주기 선생은 준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저 동굴로 보내면 이 아이가 살아날 수 있을까? 아니, 도망을 시킨다고 빠져나갈 수 있을까? 어차피 둘 다 승산이 없다. 그럴 바에는………….
도구르가 했다던 말이 주기 선생의 머릿속에 되살아났다. 남 에게 무엇을 해 주려면 그 사람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해 주어야 한다고.
“준후, 너, 그들과 같이 가고 싶으냐?”
“네! 할 일이 있어요!”
“일이라……. 중요한 일이겠지?”
“네!”
“그럼 가라!”
주기 선생은 준후를 자신의 몸으로 가리면서 십이지신의 깃발 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열두 개의 깃발 모두를 동굴의 작은 틈 사이에 끼우고 크게 기합성을 넣었다. 폭발과 함께 바위가 산산 조각이 나면서 사방으로 튀었다. 그러나 주기 선생과 준후에게 는 돌 조각이 튀지 않았다. 먼지가 일어나는 사이로 동굴의 벌어 진 틈이 눈에 들어왔다. 준후가 그 안으로 뛰어들려고 할 때, 주 기 선생이 준후의 옷깃을 잡았다.
“내가 전에 너에게 정의에 대해 말했지. 지금 다시 묻겠다. 너는 정의가 정말로 이긴다고 생각하니?”
엉뚱한 말이었지만 준후는 눈빛을 빛내며 단호하게 말했다.
“네!”
“정의가 정말로 이긴다는 거지? 정말로?”
주기 선생은 마치 자신에게 되뇌는 것처럼 말했다. 그러더니 준후를 왈칵 떠밀었다.
“가! 십이지신을 잊지 마라! 절대!”
준후는 대답하려고 했으나 주기 선생의 손이 너무도 우악스럽 게 밀어붙이는 바람에 돌 벽 틈을 굴러서 안으로 미끄러져 떨어 졌다. 주기 선생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저격수가 총을 쏜 것 이다. 주기 선생은 그것을 직감적으로 느끼고 준후를 몸으로 보 호했지만 총알은 벌써 세 방이나 주기 선생의 몸을 파고들었다. 흉물스럽고 번질번질한 죽음의 피조물이 몸 안에 들어 있는 느 낌. 그러나 주기 선생은 쓰러지기는커녕 최후의 오기를 발휘하 여 크게 소리를 치면서 몸을 일으켰다.
“이야아!”
저쪽에서는 맥라렌과 요원들, 저격수들이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여러 방의 총을 맞았는데 쓰러지기 는커녕 다시 몸을 일으키다니! 맥라렌의 곁에서 한 요원이 중얼 거렸다.
“괴물, 괴물이 저기도 있었어!”
주기 선생은 길게 고함을 지르면서 나머지 네 개의 깃발을 꺼내 들었다. 제황사신번의 네 깃발이었다. 네 개의 깃발을 동시 에 휘두르자 현란한 광채가 사방을 덮어 맥라렌과 요원들은 눈 을 뜰 수 없었다. 거기서 솟아 나온 네 가닥의 불기둥이 산자락 을 쳤고 바윗돌들이 무더기로 굴러 내려 동굴의 입구를 막아 첩 첩이 쌓여 갔다. 바위들은 주기 선생의 앞에도 마치 방벽처럼 쌓 여서 주기 선생을 보호하려는 듯했다.
“아무도 가까이 오지 못한다!”
주기 선생은 최후의 힘을 끌어내 길게 고함을 쳤다. 그러고 나 서 쏘고 남은 네 개의 깃발, 이제는 주술력이 빠져나가 타 버린 막대기에 불과한 네 개의 깃대를 지팡이 삼아 동굴 앞을 막은 채 장승처럼 우뚝 버티고 섰다.
‘정의가 이긴다고 했지? 그래, 꼭 보여 줘, 저 자식들에게 그 때까지는 쓰러지지 않는다. 절대 ……….’
자그마한 산사태가 끝나자 맥라렌과 요원들이 다시 주기 선생 을 저격하려고 했지만 바윗덩이들이 사방에 깔려 주기 선생에게 총을 쏠 수 없었다.
“죽었을까?”
맥라렌은 중얼거리면서 손짓을 했고 두 명의 요원이 조심스럽 게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자 바위 뒤에서 노란색의 작은 깃발이 솟아오르더니 요원들에게 날아들었다. 요원들은 그게 무엇인지 몰라 멈칫거렸다. 다음 순간 깃발들이 요원들의 어깨와 손발에 각각 박혔다. 요원들은 총을 떨어뜨리고는 발버둥을 치면서 몸에 경련을 일으켰다.
“저게 무슨 마법이야?”
맥라렌은 다음 사람들을 내보내려고 했지만 앞서 두 요원들이 몸을 비틀며 바위 뒤쪽으로 기어가자 잠시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두 요원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 저절로 움직이자 겁에 질려 소리를 질러 댔다. 이윽고 두 명의 요원들은 바위 뒤 로 돌아가 주기 선생에게 붙잡혔다. 바위 뒤에서 주기 선생의 카 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도 못 온다! 섣불리 다가오면 이 자식들은 죽어!”
“저놈, 총을 세 발이나 맞고…………….”
맥라렌은 이를 갈며 무전기를 잡으려 했다. 공격 헬기를 불러 모조리 날려 버릴 작정이었다. 그런 맥라렌의 생각을 눈치챈 듯, 한 요원이 만류했다.
“저놈 아무리 저래도 오래가지는 못할 겁니다. 부하들의 안전 도 생각해야죠.”
“저놈이 무슨 독 같은 걸 쓴 건 아닐까?”
“우리가 저들을 쫓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들이 가진 괴이하 고 위험한 능력 때문이 아닙니까? 조금 기다려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저놈이 무슨 수작을 부린 것인지 알아봐야죠.”
그 말에 맥라렌은 아랫입술을 깨물다가 외쳤다.
“백호라는 코리언을 데려왓!”
현암은 옆구리가 시큰해지는 것을 깨닫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이건 보통 수법이 아니었다. 레드가 손에 들고 있다가 계속 뿌려 대는 투명한 것. 마치 보이지 않는 칼날을 허공에 걸어 두고 있 는 것 같았다.
‘팬텀 블레이드인가? 보이지 않는 칼이라니.’
그 칼을 염두에 두지 않고 그냥 행동하다가는 팔다리나 심지 어 목까지도 스르륵 잘릴지 몰랐다. 마음 놓고 싸울 수 없는 현 암은 못 박힌 듯 선 채로 공격당하고 있었다. 레드는 끝없이 팬 텀 블레이드를 던졌고 가짜 현암은 이상한 붉은 기운이 실린 주 먹을, 가짜 준후는 염체 줄기를 솟구쳐서 공격해 왔다. 현암이 날린 월향은 염체 줄기들을 터뜨리며 싸웠고, 현암은 가짜 현암 과 치고받으며 힘겹게 싸우고 있었다.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행동을 제약받는 상태에서 주먹질을 하다 보니 현암이 입는 타 격이 훨씬 큰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한편 박 신부는 구구루와 가짜 박 신부를 상대로 싸우고 있었 는데 가짜 승희는 진짜 승희가 뒤에서 힘을 보내 주는 일에 전념 하는 흉내라도 내는 것인지 조금 뒤에 떨어진 채 중얼거리고 있 을 뿐 직접적으로 싸움에 끼어들지는 않았다. 구구루의 깃털 옷 은 얼마나 깃털이 많이 달려 있던지 끊임없이 박 신부에게 깃털을 내쏘았고 가짜 박 신부는 검은 기운을 휘몰아 박 신부의 앞뒤 를 각각 공격했다. 박 신부는 오라 막을 퍼뜨려 검은 기운을 밀 어내는 한편 오라 구체로 깃털들을 막았다. 현재까지는 그런 대 로 대등하게 맞서고 있는 셈이었지만 상대에 비해 수가 적다는 것이 싸움을 힘들게 만들었다.
날아드는 가짜 현암의, 붉은 기운이 실린 주먹을 피하며 현암은 생각했다.
‘이놈들의 수법은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맞아!’
현암은 월향을 조종해 뒤에서 달려들던 염체 두 줄기를 터뜨 리다 몸을 흠칫했다.
‘이놈들, 레드와 구구루만 빼면 과거 블랙서클의 인물들이 쓰 던 수법들을 그대로 쓰고 있다!’
되짚어 보니 과거 블랙서클 인물들의 수법이 가짜 영체 인형 들에게 하나씩 깃들어 있었다. 가짜 준후의 염체술은 케인이 쓰 던 것과 같았다. 염체술은 리도 썼지만 리가 쓰던 염체술과는 느 낌이 달랐다. 그리고 가짜 현암이 쓰는 붉은 기운은 과거에 이집 트술사가 불러냈던 미라가 사용한 수법과 흡사했다. 가짜 박신 부가 뿜어내는 검은 기운은 코제트가 쓰던 검은 안개와 유사했 지만 그와는 또 느낌이 달랐다. 그 기운들은 어딘지 모르게 과거 발뭉검을 휘두르고 늑대 인간을 만들던 카프너의 기운을 느끼게 했다.
‘그렇다면 마스터가 블랙서클로 흡수한 다른 자들의 힘을 영 체 인형에게 부여했단 말인가?’
돌이켜 보면, 마스터는 블랙서클의 승정을 한 사람 한 사람 퇴 마사들과 대적하게 했고 그래서 패배했다. 물론 패배는 마스터 의 계획에 의한 것이었지만 당시 블랙서클 한 사람 한 사람은 상 당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니 이번에는 한꺼번에 모두를 내 보내 일거에 이겨 보려고 하는 것일까?
갑자기 뒤에서 승희가 소리치는 것이 들렸다.
“현암군! 왜 그리 머뭇거려?”
그 소리를 듣고 현암은 주춤했다. 머뭇거린다고? 현암은 눈을 돌려 가짜 준후를 향해 쏘아져 나가는 월향을 보았다. 그러나 월 향은 가짜 준후를 향해 정통으로 달려들지 못했다. 아무리 가짜 인 것을 알더라도 차마 준후를 공격하지는 못하는 것이 분명했 다. 그리고 자신의 모습과 똑같은 가짜 현암에게도 치명타를 입 힐 공격은 가하려 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심리적인 함 정이 분명했다.
‘제길! 치사한 방법이군!’
현암은 마음을 다잡고 월향에게 마음속으로 외쳤다. 염체는 무시하고 이 빌어먹을 칼날들을 모조리 부숴 버리라고. 마음이 통했는지 월향이 가볍게 솟구쳐 오르면서 소용돌이치듯 현암의 주변을 맴돌았다. 그와 동시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팍팍 무엇인가가 푸른 불꽃과 함께 허공에서 쉬지 않고 폭발해 갔다. 그사이 현암은 등 뒤로 달려든 염체 두 방을 맞았다. 타격 때문에 현암 의 몸이 앞으로 휘청하는 순간, 앞에서 가짜 현암이 붉은 기운이 감도는 주먹을 휘두르며 덮쳐들었다. 현암이 노린 것이 그것이 었다. 현암은 오른손에 태극기공의 ‘폭’자결의 공력을 돌려 가 짜현암의 주먹보다 한 발 앞서 가짜 현암의 아랫배에 주먹을 명 중시켰다. 영체로 만들어진 몸이 아니라 실제 인간의 몸이었다 면 박살이 났을지도 몰랐으나 가짜 현암은 뒤로 퉁기듯 날아가 동굴 벽에 호되게 부딪혔다.
그러나 다음 순간, 현암의 등에 염체들이 우르르 박혔다. 타격 도 타격이었지만 그 염체들은 현암에게 살아 있는 것처럼 달라 붙어 행동을 구속했다. 팬텀 블레이드를 부수던 월향은 그런 현 암을 보고 길게 귀곡성을 질렀다.
한편 박 신부는 오라 구체를 내쏘고는 있었으나 이대로 간다 면 끝이 없을 것 같았다. 박 신부는 구구루가 좀비가 되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좀비라면 끝없이 싸우려 들 것이다. 상황 을 뒤집어야 한다고 본 박 신부는 오라 구체를 내쏘던 것을 중지 하고 몸을 뒤로 돌렸다. 오라 구체가 없어지자 몇 개의 깃털이 오라 막의 틈을 비집고 들어와 박 신부의 등에 박혔다. 하지만 박 신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가짜 박 신부에게 뚜벅뚜벅 걸 어갔다. 가짜 박 신부는 놀랐는지, 뒤로 물러서면서 검은 안개를 내쏘아 적중시켰으나 박 신부는 물러서지 않았다.
“사악한 피조물…….”
박 신부는 아픔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중얼거리면서 품 안 에서 베케트의 십자가를 꺼내 들었다. 다시 한번 가짜 박 신부의 검은 안개가 박 신부를 후려치자 박 신부도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래도 박 신부는 물러서지 않고 크게 노호성을 지르면서 훌쩍 달려들어 가짜 박 신부의 멱살을 잡고 베케트의 십자가를 이마 에 들이대었다. 가짜 박 신부는 발악했지만 이미 베케트의 십자 가는 이마를 파고들었다. 영체로 이루어진 몸을 아이스크림처럼 녹이며 베케트의 십자가가 파고들자 가짜 박 신부의 얼굴이 흉 악하게 일그러지면서 입에서 시커먼 구체가 기분 나쁜 컥 소리 와 함께 튀어나왔다. 박 신부가 흠칫 놀라는 순간, 박 신부의 등 뒤에서 깃털을 내쏘던 구구루가 옷자락을 젖히면서 뼈로 만들어 진 창날을 단 기다란 창을 꺼내 들었다.
승희는 그때 누군가가 와르르 소리를 내며 미끄러져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힘을 보내느라 정신이 없는 상황임에도 본능적 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준후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승희는 방 금까지 가짜 준후를 보았던 터라 또 하나의 가짜 준후가 나타난 것이 아닐까 의심부터 들었다.
“준후야!”
사실 승희보다 더 놀란 것은 준후였다. 자신의 눈앞에서 현암과 현암, 박 신부와 박 신부가 싸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저편에도 승희가 있었고, 자신의 모습도 보였다. 갑자기 뛰어 들어 온 준후로서는 도대체 어느 쪽이 진짜인지 구별할 수가 없 었다.
“어느 쪽이 진짜죠?”
“바보야! 그럼 너부터 공격해! 가짜 준후 말야!”
승희의 말에 준후는 번쩍 정신을 차렸다. 여기 서 있는 자신이 진짜이니 저쪽에 있는 준후는 가짜일 것이다. 영적 직감이 퇴마 사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준후는 가짜들이 영체로 이루어져 있 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준후는 더 이상 사람의 생김새에 구애받지 않고 가짜 준후 쪽으로 몸을 돌리며 벽조선 을 꺼내어 폈다.
현암은 온몸에 엉킨 염체를 떼어 내려고 발버둥 쳤지만 잘되 지 않았다. 현암이 움직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레드는 팬텀 블레 이드를 던졌으나 월향이 끼어들어 간신히 무서운 칼날을 부수어 주었다. 그러나 가짜 준후가 다시 염체를 쏘았고, 가짜 현암도 큰 타격을 입은 듯 절름거리면서도 다가들었다. 그때 염체를 쏘 던 가짜 준후에게 불덩이를 품은 검은 기운이 확 달려들었다. 현 암을 공격하느라 정신이 없던 가짜 준후는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불이 붙어 뒤로 밀려나다가 데굴데굴 굴렀고, 현암은 몸을 에워 싸고 있는 염체의 힘이 느슨해지는 것을 느꼈다. 현암이 뒤를 돌아보니 준후가 서 있었다. 사정을 물을 틈이 없었다. 가짜 현암이 현암에게로 닥쳐들었다.
준후는 가짜 준후에게 벽조선과 멸겁화의 기운을 합친 일격을 가하고 구구루 쪽을 보며 소매에 손을 넣었다. 구구루가 박 신부 의 등을 향해 창을 던지는 순간 준후는 부적을 고를 틈도 없이 무더기로 집어 던지며 소리를 쳤다.
“막아서라!”
준후가 외치자 뿌려진 부적들은 활짝 펼쳐졌다가 마치 도미노 로 줄을 세우듯 창 앞에 주르르 섰다. 구구루가 던진 창은 부적 들을 툭툭 꿰뚫어 나갔지만 그때마다 기운이 눈에 띄게 약해졌 고, 결국 부적만 잔뜩 꽂은 채 허공에서 툭 떨어지고 말았다. 준 후가 수인을 맺으면서 기합을 넣자 부적들이 확 타올랐고 구구 루의 창도 화염에 휘말려 화르륵 타 버리고 말았다. 그것을 본 구구루는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한편 현암은 가짜가 달려들자 월향을 불렀지만 월향은 가짜 현암의 어깨를 스치듯 날아가면서도 정통으로 일격을 가하지 못 하고 레드에게 날아들었다. 아무리 가짜라도 현암의 형상이라서 차마 꿰뚫지 못하는 월향의 마음을 읽고 현암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거야 원. 뭐라고 할 수도 없고……………?
일격을 당한 현암은 정신이 아찔했다. 하지만 오히려 현암은 그 시간을 이용해 공력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영체로 만들어진 놈에게 보통 공격은 통할 것 같지 않았다. ‘탄’ 자결의 공력을 모으는 동안 현암은 또 일격을 받았지만 공력을 흐트러뜨리지는 않았다.
레드는 안간힘을 쓰면서 보이지 않는 칼날을 던졌다. 월향이 빙글빙글 돌아 칼날을 부수면서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레드에게 로 날아들었다. 마침내 월향이 레드의 오른팔을 휙 스치고 지나 가자 레드의 오른팔은 날카롭게 잘려 허공에 떴다가 땅에 툭 떨 어졌다. 피는 나지 않았다. 박 신부는 레드가 좀비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몰랐던 준후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틈 을 타 구구루의 깃털들이 준후에게로 쏘아져 나가는 것을 박신 부가 서둘러 오라 막을 펼치며 가로막았다. 그러면서 박 신부는 가짜의 몸에서 빠져나온 검은 구체가 허공에 떠오르는 것을 놓 치지 않고 눈으로 쫓았다.
‘블랙서클이구나. 예전 블랙서클 사람들의 영혼을 가둔 것일 까?’
박 신부도 현암의 생각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뒤에 물러서 있던 가짜 승희가 뭐라고 소리를 치자 레드가 무표 정한 얼굴로 자신의 잘린 오른팔을 집어 덜컥 붙이는 것을 보고 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준후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승희는 현암에게 공력을 보내 주기 위해 눈을 감고 있어서 그 장면을 보 지는 못했다.
“신부님! 저건….”
준후가 외치자 박 신부가 이를 악문 채 대답했다.
“레드와 구구루는 이미 좀비가 되었어.”
그 순간, 밝은 광채가 사방에 비춰지며 커다란 폭음이 울렸다. 현암이 ‘탄’ 자결을 발동하여 내쏜 것이다. 박 신부와 준후가 그 쪽을 돌아보았을 때 현암은 저만치 밀려 쓰러져 있었고 가짜 현 암은 가슴에서 배까지 구멍이 뻥 뚫린 채 부들부들 떨며 서 있었 다. 아무리 영체로 만들어진 인형일지라도 그런 참혹한 몰골이 되어서 있는 것은 저절로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가짜 현암의 몸속에서도 검은 구체 하나가 빠져나와 허공에 둥둥 떠올랐다. 박신부가 쓰러져 있던 현암에게 소리쳤다.
“현암군! 괜찮은가?”
“문제없습니다!”
힘겹게 몸을 일으키는 현암이었지만 목소리만은 활기찼다. 박 신부가 구구루의 깃털을 막는 사이에 준후가 벽조선을 휘두르면 서 앞으로 나섰다. 반대편에는 가짜 준후가 몸을 일으키면서 등 뒤로 길게 염체 가닥을 솟구쳐 올리고 있었다. 준후의 오른손에 들린 벽조선에서는 검은 기운이 일렁거렸고 왼손에서는 지직 하 는 뇌전의 기운이 둥글게 뭉쳤다. 준후가 과거에 딱 한 번 마스 터에게 사용하려다가 실패했던 최강의 뇌전 바즈라였다. 그 위 력을 눈치챈 듯, 가짜 준후는 염체를 뾰족한 기둥 모양으로 솟구치게 하여 한꺼번에 일곱 가닥으로 쏘았지만 준후는 눈 하나 깜 짝하지 않고 벽조선을 휘두르며 왼손을 내밀었다. 벽조선이 뿜 어내는 검은 기운이 사방을 가득 메울 듯 퍼져 나갔고 무서운 기 세로 닥쳐들던 염체 기둥들은 기운에 휘말려 힘없이 부서졌다. 그때 준후의 왼손을 떠난 바즈라의 뇌전이 그 사이를 뚫고 날아 들었다. 가짜 준후가 뒤로 물러서려는 듯 주춤거렸다. 준후는 그 마저도 놓아주지 않고 발을 굴러 우보법의 술수를 부렸다. 순식 간에 가짜준후는 벽조선의 기운에 온몸을 휘감긴 채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굳어 버렸다. 이어서 바즈라의 기운이 가짜 준후의 몸에 정통으로 적중되었다. 휘황한 광채가 번쩍 빛나면서 가짜 준후의 가슴은 만신창이가 되었고 그 안에서 예의 블랙서클이 빠져나왔다.
박 신부와 현암까지도 준후의 술수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껏 저렇게 과격하게 술수를 부린 적이 없었는데 지금의 행 동은 현란함이 지나쳐 지독해 보였다. 그러나 끝난 것이 아니었 다. 레드와 구구루, 가짜 승희는 아직 멀쩡했다. 그리고 가짜 박 신부, 현암, 준후에게서 나온 세 개의 블랙서클이 천천히 한데 모여 가짜 승희의 몸으로 쑤욱 들어가고 있었다.
“저놈들이…………….”
박신부가 중얼거리자 현암이 월향검을 받아들며 외쳤다.
“저건 우리가 싸웠던 자들의 영혼을 담은 블랙서클들입니다.”
박 신부도 아스타로트와 대면 후 알게 되었지만, 블랙서클은 원래 마계와의 통로나 마찬가지다. 따로 존재하는 물체는 아니 다. 그런데 영혼의 기운은 그대로 느껴졌다.
“저건 진짜 블랙서클이 아닐세. 마스터가 비슷하게 재현한 것 일 뿐. 영혼을 그냥 담아 둔 것 같군.”
박 신부는 의아했다. 과거 저 영혼들은 아스타로트에게 바쳐 졌는데, 그것을 마스터에게 돌려주었단 말인가? 어째서? 그러다 가 박 신부는 생각했다.
‘아스타로트는 그럴 수도 있다. 영혼이건 뭐건 악마에게는 아 무것도 중요하지 않아. 우리를 괴롭힐 수 있다면 뭐든 한다. 그 러니 우리에게 대적하는 마스터에게 힘을 실어 주기 위해 과거 잡아 두었던 영혼을 돌려주었을지도 모른다. 지금의 마스터는 너무 약하니까. 그렇다면…………….’
현암이 소리쳤다.
“힘을 모으나 봐요!”
박신부가 마침내 외쳤다.
“저 가짜 승희는 과거 좀비를 부렸던 호웅간이 분명해! 레드 와 구구루를 다루는 것도 저놈이야! 진짜 블랙서클은 아니지만, 저걸 파괴하면 영혼이 해방될지도 몰라! 마스터는 힘을 잃 을 테고!”
“그럼 날려 버립시다!”
현암은 박 신부 쪽으로 몸을 날렸다. 이미 ‘탄’ 자결의 공력을 소모하여 많이 지쳐 있었지만 천정개혈대법의 시술 탓인지 전 보다는 힘의 소모가 덜했다. 그러나 박 신부와 현암이 한데 모인 순간에 준후는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너무해요. 다들……”
준후의 목소리에 박 신부와 현암은 몸을 움찔했다.
“준후야…………….”
박 신부가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준후는 원망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나 혼자 두고 가면 고맙다고 할 줄 알았어요?”
박 신부는 한숨을 내쉬었고 현암도 할 말을 잃었다. 그 틈을 타 가짜 승희가 외마디 고함을 질렀고 레드와 구구르가 미친 듯 이 퇴마사들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준후가 말했다.
“앞으로는 절대 그러지 마세요. 약속해요. 네?”
말을 마치면서 준후는 씩 웃었고, 박 신부와 현암은 누가 먼저 랄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드와 구구루가 덮쳐들려던 순간, 준후는 박 신부의 손목을 잡았고, 박 신부는 현암의 등에 한 손을 얹었다. 마스터가 남아 있으니 힘을 아껴야 한다는 생각은 아무에게도 들지 않았다. 순 간순간에 최선을 다한다는 기분으로 승희마저도 최대한의 힘을 끌어 보냈다. 그때 현암의 손에 쥐어 있던 월향검에서 강렬한 파동이 일어났다. 처음 퇴마행에 나섰을 때 세 명이 힘을 합치면 검기가 여섯 자까지 뻗치곤 했다. 그리고 많은 세월이 지나고 퇴 마사들의 힘이 증가되면서 세 명이 합한 힘은 그보다 훨씬 늘었 다. 더구나 지금은 퇴마사들 전원이 목숨을 돌보지 않고 있는 힘 을 다하는 상황이었다. 이제는 길이로 말할 정도의 검기가 아니 라파도 같은 느낌의 기운이 월향검 끝에서부터 뻗어 나와 그 앞 의 공간을 가득 메웠다. 월향을 쥔 채 파사신검의 절초를 시전하 던 현암은 달려드는 레드와 구구루를 정면으로 맞받아치듯 앞으 로 나아갔고, 좀비가 된 그들의 몸은 월향검의 끝에서 뿜어져 나 오는 검기와 부딪히는 순간 산산조각이 나 허공에 흩어졌다. 하 지만 현암은 잠시의 멈춤도 없이 그대로 가짜 승희를 향해 달려 들었다. 가짜 승희와 부딪친 현암의 몸에서 부동심결의 광채가 솟구쳤다.
큰 소리나 폭발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가짜 승희의 온몸이 굳 은 듯 그 자리에 넘어져 버렸다. 아무런 상처도 없었다. 다만 가 짜 승희의 몸에서 솟아오른 네 개의 검은 구체들이 황금색 휘황 한 광채에 휘말려 서서히 녹아들듯 사라지고 있었다.
쓰러져 있던 현암이 고개를 들어 뒤를 돌아보았다. 박 신부와 준후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었고 승희 역시 쓰러져 있었지만 큰 부상을 입은 사람은 없어 보였다.
“다들 괜찮습니까?”
“괜찮네.”
박신부가 준후와 승희를 훑어보고는 말했다. 준후가 말했다. “네 명의 영혼은 이제 블랙서클의 속박에서 풀렸을 거예요. 잘
된 것인지 안 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한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현암이 비틀거리며 박 신부 곁으로 왔다.
“그들은 호웅간과 이집트 술사, 카프너와 케인이었어요. 그러 면 리와 코제트, 히루바바는 어떻게 된 것일까요? 사실 더 중요 한 것은 그들인데요.”
“글쎄, 그들은 죽기 직전에 회개를 했어. 지금 싸운 자들과는 달리 이미 선한 존재가 되었다고 나는 믿네. 그래서 마스터도 가 두어 두기는 했지만 통제하지는 못한 것이 아닐까?”
박 신부의 생각으로, 그들은 아스타로트가 이미 놓아주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들도 선해졌으니까. 그렇다면 악마들로서는 그들이 다시 태어나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이 더 좋을 테니까.
“이상한 게 또 있어요. 블랙엔젤은 어디로 간 거죠? 블랙엔젤 이 같이 있었다면 우리가 이긴다는 장담은 할 수 없었을 텐데.”
박신부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스타로트처럼 블랙엔젤이 원하는 것도 우리의 길고 긴 고 통일 거야. 그러니 우리를 그냥 쓰러뜨리지 않으려는 거겠지. 미안하다. 모두 그래도 계속할 수밖에 없으니…………. 너무도 안쓰럽구나.’
박 신부는 마음이 무거워져서 그 말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준후와 현암도 짐작이 가지 않았다. 막 안간힘을 쓰며 몸을 일으 키던 승희가 고개를 들다가 겁에 질린 듯 중얼거렸다.
“그, 그런데 저것들은・・・・・・ “
승희의 말에 모두가 그쪽을 바라보았고, 경악하지 않을 수 없 었다. 그쪽에는 다시 네 명의 박 신부와 현암, 준후와 승희가 서 있었다. 그것도 상처 입지 않고 망가지지 않은 원래의 모습대로.
“영체 인형! 마스터를 없애지 않는 한 저것들은 사라지지 않 나 봐요!”
준후가 안타까운 듯 소리를 질렀다. 그 말에 모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눈앞의 싸움에 온 힘을 소모해 버리다니. 그러나 네 명의 영체 인형은 그 자리에 선 채 다가오지 않았다. 가짜 박신 부의 영체 인형이 마스터 특유의 복화술로 말하기 시작했다.
“강해졌군. 모두들 아주 강해졌어. 하하하.”
“너….”
현암이 노기를 띠며 몸을 일으키자 가짜 박 신부가 다시 지껄였다.
“나하고 대적해 보고 싶겠지? 나도 그것을 바라고 있어. 간절하게 따라오게. 어서.”
그 말만 남기고 네 명의 영체 인형은 뒤로 돌아 동굴 속을 걸어갔다. 하지만 아까와는 달리 약간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 다. 그 모양을 보고 현암은 의혹에 가득 찬 목소리로 박 신부에 게 물었다.
“어떻게 하죠? 저것들이 또 덤비면……
박신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영체 인형이 아까같이 잘 움직 이고 싸울 수 있었던 것은 마스터가 블랙서클에 봉인되었던 자 들의 힘을 그 안에 넣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블랙서클에 들어 있던 네 명의 영혼이 깨어져 사라진 지금, 영체 인형은 별 것 아닐 것이란 믿음이 강하게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왜 마스 터가 영체 인형을 넷만 만들었겠는가? 더구나 지금 뒤돌아 가는 영체 인형의 동작을 볼 때 결코 그들은 인형 이상의 존재가 아니 었다. 마스터가 죽지 않는 한 영체 인형이 계속 생겨난다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형에 불과한 것이다. 어차피 위험할 바에 야 조금이라도 빨리 마스터를 직접 상대하는 편이 낫다. 그런 생 각을 독촉이라도 하듯, 영체 인형이 다시 외쳤다.
“자꾸 지체하면 수다르사나의 힘을 써 버리겠어! 나는 너희에 게 기회를 주는 거야!”
그 말에는 현암과 준후, 승희도 놀라 벌떡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박 신부가 우울한 어조로 말했다.
“할 수 없군. 가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