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1권 – 2장 : 미노-대드래곤의 성지 – 1화
수평선은 상쾌할 정도로 맑은 선을 그으며 시야의 끝에서부터 끝까지 이어져 있었다. 남해가 자랑하는 꿈결 같은 봄바다인 것이다. 하늘은 맑고, 가 장 조심스러운 뱃사람도 신경 쓰지 않을 뭉게구름 몇 조각만이 아스라한 하늘 어딘가를 정처없이 헤매고 있었다. 태양은 내일 다시 떠오르지 않아도 좋다는 듯이 이글거리며 타오르고 있었지만 봄바다의 어느 한 부분에서도 상쾌함을 빼앗지는 못했다.
그 상쾌한 바다 위로, 순풍을 받아 찢어질 듯 팽팽해진 돛을 오만하게 곤두세운 채 파도를 가르며 미끄러지는 배들의 궤적이 눈부시다. 바람이 너무 좋아 노를 저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노예를 구박하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없어 불행해하는 노예장 이외엔 모든 선원들이 행복해하는 날씨다.
배들은 모두 아홉 척이다.
최전방에는 두 척의 롱 갤리어스가 앞서고 있다. 한 척의 갤리어스는 모든 것이 검다. 완전한 칠흑의 돛. 역시 검정색의 선체. 선체의 의장들도 검정 색으로 통일되어 있었으며 심지어 갑판을 오가는 선원들의 셔츠나 바지, 머릿수건 같은 것들도 대부분 검정색이다. 뱃전을 장식하고 있는 것은 검은 색의 병장기들이었고 그 선수에는 검은 갑옷으로 온몸을 감싼 기사가 검은색의 랜스를 앞쪽으로 쭉 뻗은 모양의 피겨헤드가 자랑스럽게 서 있다. 함 명은 흑기사.
그 왼쪽에 나란히 나아가는 배는 오른쪽의 검은 배에 비한다면 초라해 보일 정도로 단순한 모양이다. 지금 막 처녀 항해를 나서는 배라 하더라도 이 만큼이나 단순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한 베테랑 선원이 이 배를 본다면 그는 먼저 이 배의 특이할 정도로 커다란 앞돛과 기이하게 보일 정도로 긴 선수부에 고개를 갸웃할 것이다. 그 다음 그는 이 배의 폭이 이상할 정도로 좁다는 것 – 긴 전장에 비해 볼 때 — 에 당혹해할 것이다. 그리고 마 지막으로 이 배의 선수에 적힌 함명을 볼 정도로 접근하게 된다면 그는 자유라는 함명에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공포를 느낄 것이다. 그제서야 선원 은 이 배가 제국의 공적 제1호 키 ‘노스윈드’ 드레이번의 자유호라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며, 가지고 있는 모든 기술을 동원해 배를 돌려 도망치려 할 것이다. 물론 그가 배에 타고 있을 경우라면.
자유호와 흑기사호 뒤편으로는 네 척의 배가 따르고 있었다. 좌우로 롱 갤리어스가 한 대씩, 그리고 가운데에는 두 척의 헤비 갤리어스가 위치해 있 었다. 왼쪽에서부터 차례대로 질풍호, 물수리호, 바다사자호, 페가서스호의 함명을 확인할 수 있다. 각자 트로포스, 알버트, 두캉가, 하리야 선장의 지휘를 받고 있다.
그리고 그 뒤쪽으로는 정직한 수병이라면 사기라고 외치며 분노할 배 두 척이 뒤따르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땅과 바다를 통틀어 강철의 레이디가 실제로 사용되는 유일한 장소인 터릿 갤리어스가 그 엄청난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함명은 각각 그랜드파더와 그랜드머더, 그 선장은 돌탄과 킬리.
그리고 함대의 최후방에는 한 척의 카밀카르 갤리어스가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 배가 카밀카르식으로 설계되었다는 사실을 알아보기 위해선 꽤 나 날카로운 눈이 필요할 것이다. 왜냐하면 카밀카르 갤리어스는 방금 전 전투를 끝낸 전함의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러진 돛대와 부서진 뱃 전, 배의 좌우현에는 커다란 구멍이 몇 개씩이나 뚫려 있다. 하지만 그 구멍들은 모두 흘수선 위에 있었고 폭풍이라도 만나지 않는 이상 당장 침몰하 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노련한 뱃사람은 다들 잘 아는 사실이지만 봄철의 이 바다에는 폭풍이 치지 않는다. 그래서 반파된 카밀카르 갤리어스 는 안전한 항해를 할 수 있었다.
물론 율리아나 카밀카르를 태우고 필마온 성채로 향하던 레보스호다. 이 배의 선주인 카밀카르 해군은 절대 인정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현재 레보스 호를 지휘하는 것은 원래 자유호의 갑판장이었던 라이온이다. 그래서 라이온은 레보스호의 선장실에 앉아 있을 수도 있었고, 식스가 가져온 항해 계 획표를 옆으로 조금 밀어내며 퉁명스럽게 말할 수도 있었다.
“미노 만에 드래곤이 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라이온은 방자한 태도로 질문했다. 마치 이 숲에는 사슴이 많다지요? 라고 물어보는 듯한 태도였지만, 식스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드래 곤의 이름이 완고한 뱃사람에게 야기하는 반응으로서는 퍽 모범적인 반응이었다. 식스는 무서운 눈으로 라이온을 쏘아보았다.
“라이온 임시 선장. 그런 무서운 이야기는 하지 마시게.”
“임시 선장이라는 말은 좀 뱁시다. 낯간지럽게시리. 어쨌든 그 이야기가 사실입니까?”
식스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라이온을 바라보다가 마지못해 말했다.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곤 하지. 슬픔의 해역 미노는 대드래곤의 성지라고. 하지만 그건 노선원이 견습선원을 놀리고 싶을 때나 하는 이야기야. 실제 로 거기서 드래곤을 봤다는 선원은 한번도 못 봤네. 자네가 왜 그런 허무맹랑한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나?”
“흐음. 관심을 가질 이유가 있다면?”
“무슨 말인가?”
식스는 천진스러워 보이는 표정으로 되물어왔다. 라이온은 잇소리를 조금 내고는 준비했던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건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제국력 238년, 대드래곤 라오코네스는 제국을 상대로 미노 만이 자신의 영토임을 선언했습니다. 제국기록보 관소에는 관계 서류가 남아 있습니다. 당시 황제는 미노 만을 제외한 제국의 다른 모든 장소에 대한 황가의 통치권을 인정받는 조건으로 라오코네스 의 선언을 받아들였습니다. 그 이후로 라오코네스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고 사람들은 대드래곤의 존재를 잊었지만, 서류는 남아 있는 겁니다. 무려 800년 전의 서류가 말입니다. 그래서 미노 만은 아직껏 어떤 제후에게도 하사되지 않았고 어떤 나라의 영토로도 편입되지 않은 거지요. 그런데 절 유 혹하실 생각입니까?”
“뭐라고?”
“그렇잖으면 왜 그렇게 입술을 육감적으로 꿈틀거리시는 겁니까?”
놀람으로 입술을 꿈틀거리고 있던 식스는 그것을 꽉 깨물었다. 그리고 라이온은 씩 웃었다.
“사람들이 이름까지 잊어버린 드래곤에 대해 좔좔 외울 정도로 제가 똑똑할 리야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 레보스호에는 카밀카르의 법무대신이 타고 있지요. 게다가 『제국백과사전』도 있고, 화물 목록을 보다가 까무러칠 뻔했습니다. 먹지도 못할 책을 1,200권이나 싣다니.”
“아, 그렇군. 그럼 그게 헛소리가 아니었군. 진짜 드래곤의 성지인가 보지.”
라이온은 잠시 속으로 투덜거렸다. 이렇게 느리단 말인가.
“이 시점에서, 우리는 결코 유쾌할 수는 없는 상황에 봉착합니다.”
“뭐?”
라이온은 책상 한구석에 치워두었던 해도를 좌악 펼치며 말했다.
“여기 해도가 있습니다. 가지고 오신 그 항해 계획표와 함께 좀 보시죠. 이대로라면 나흘 후 이 함대는 이보레 열도를 빠져나가게 될 겁니다. 맞죠? 예. 그런데 1년 중 이 시기에는 이보레 열도의 주민들이 하눈치일이라고 부르는 바람이 분단 말입니다.”
“그런데?”
“젠장, 하눈치일은 남동풍이란 말입니다. 여기서 바람을 받으면 우리 선단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식스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라이온이 가리켜 보이는 해도를 바라보았다. 대륙에서 뚝뚝 흘러 떨어진 물방울들 같은 모습의 이보레 열도를 바라보던 식스의 눈은 해도의 좌상단, 즉 북서쪽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한 지점에 멈춰 섰다. 해도의 그 지점에 적혀 있는 짧은 글자를 본 식스는 마치 막 글자 를 배우기 시작한 어린아이처럼 더듬거리며 그 글자를 읽었다.
“미 노 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