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1권 – 3장 : 악마의 밤 – 3화
키 드레이번은 땅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검지와 엄지로 쥔 조그마한 알껍질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약탈했던 어떤 귀중한 보석들을 볼 때보다도 더 진지한 눈길이었다. 라이온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슈마허를 째려본 다음 모든 이들이 짐작하고 있던 말을 꺼내었다.
“노예와 공주로 구성된 풋내기 여행자들이지만, 최소한 그들은 자연의 선물을 이용할 줄은 아는군요.”
키는 라이온의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알껍질을 바라보았다. 그의 머리 위 새집에서는 어미 찌르레기가 소리 높이 꺅꺅거리고 있었다. 마치 키 드레이번이 새알을 깬 범인이라는 듯이. 키는 천천히 일어나서는 알껍질을 힘껏 집어던졌다.
“출발한다.”
키의 목소리는 음산했다. 율리아나와 오스발이 감히 도망친 주제에 굶주리지도 않는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다는 기세였다. 키는 명령을 내리자마자 그대로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고, 소속 함선별로 흩어져 쉬고 있던 해적들도 다급히 일어났다. 하지만 100여 명이나 되는 해적들이 선장들의 구령 에 따라 출발 준비를 갖추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다. 키 드레이번은 그들을 기다리지 않았고, 그래서 한참 앞서게 되었다.
숲속을 걸으며 키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히느라 입을 꾹 다문 채 빠르게 걸었다. 그의 거침없이 내딛는 발 아래로 풀들이 아우성을 질렀다. 그런 돌 진에 가까운 걸음걸이로 키가 모퉁이를 돌았을 때였다.
키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다섯 명의 사내들이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모두 산사람 같은 옷차림을 하고 있었지만 등이나 허리에 매달린 병장기들이 키의 눈을 잠깐 사로 잡았다. 산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무기들. 그들의 면면을 훑어보던 키는 재빨리 결론을 내렸다. 칼잡이의 눈이다.
선두에 서 있던 사내가 날카로운 눈으로 키를 훑어보고는 말했다.
“멧돼지라도 오는 줄 알았더니……. 사람이었군. 안녕하슈.”
키는 아무 말 없이 사내들을 마주보았다. 사내들의 인상이 험악해졌다.
“왜 그런 눈으로 사람을 보는 거요?”
“내 눈빛이 마음에 안 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더군.”
“그럴 거 같군.”
“그리고 그 말은 대개 그자들의 유언이 되었지.”
사내들의 표정이 더욱 험악해졌지만 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들을 살려둘 생각은 없었다. 키 드레이번이 상륙한 것을 본 목격자를 보내줄 수는 없었으니까. 그러나 키는 마음속으로 자신을 부정했다. 아니, 내가 피를 보고 싶기 때문이야.
그때 사내들 중 하나가 키의 허리에 매달린 복수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잠깐. 그 칼……….”
키는 미소를 지었지만, 사내들에게는 아무래도 이를 드러내는 것으로 보였다. 키는 허리 쪽으론 손도 가져가지 않은 채 오히려 팔짱을 끼며 말했다.
“이 검에 대한 이야기를 어디서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단번에 알아볼 정도로 상세하게 말해 준 그 작자를 원망해야겠군.”
사내의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팽창했다.
“맙소사! 보, 복수! 노스윈드다!”
다음 순간 사내들의 반응은 키 드레이번을 미치게 만들었다. 사내들은 환한 얼굴이 되어 각자의 무기를 뽑아들었던 것이다. 선두의 사내는 아예 좋 아 죽겠다는 얼굴로 말했다.
“신이여, 감사하나이다. 이런 행운이 다 있나! 저놈 목에 걸린 현상금이 얼마더라?”
“그놈들 처리하고 받기로 한 돈의 수백 배는 될걸.”
옆의 사내 하나가 시시덕거리며 대답했다. 그놈들? 키는 그놈들이 누군지 알 수 없었지만 이 자들에 대한 정보 하나는 알게 되었다. 키는 방자하게 떠드는 사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차갑게 말했다.
“인간 사냥개들이었군.”
선두의 사내가 껄껄 웃으며 앞으로 걸어나왔다.
“아아, 그래. 해적 나리. 듣던 대로 대가 세군. 하지만 여긴 육지야. 키 드레이번이 자유호를 떠나다니. 죽으려고 작정한 것으로 알고 감사히 네 목을 받기로……………”
사내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땅바닥을 뒹구는 사내의 얼굴은 아직도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까지도 꼿꼿이 서 있던 사내의 몸은 조금 늦게 피를 뿜 어내며 쓰러졌다. 다른 사내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이 어이없는 사태에 경악하는 동안, 키는 사내의 목을 날리고도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복수 를 천천히 세워들며 말했다.
“목이 어쨌다고?”
“으아아아! 죽여어!”
라이온은 앞쪽에서 고함이 들려온 순간 괴성을 지르며 그대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명백한 실수였다. 1등 항해사감은 되더라도 선장 감으론 아직 좀 모자란 놈이라고 생각하며 하리야 선장은 고함을 질렀다.
“전원 제자리에! 경계 태세!”
라이온을 따라 무턱대고 달리려던 해적들은 하리야 선장의 우렁찬 고함에 멈춰 섰다. 하리야 선장이 해적들을 패닉 상태에서 구제하는 동안에도 라 이온은 곧장 달렸다. 모퉁이를 돈 라이온은 네 명의 사내들과 대치중인 키의 모습을 발견했다. 키는 악귀 같은 얼굴을 한 채 사내들을 공격하고 있었 고, 사내들 역시 무서운 기세로 키를 공격하고 있었다. 라이온은 사내들의 주의를 끌어들이기 위해 힘껏 외쳤다.
“가슴을 펴라! 죽음은 양해를 구하지 않고 찾아오는 불청객인 법!”
언제 목이 떨어질지 모르는 치열한 싸움 도중이었지만, 키는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랐던 분노가 빠르게 사라지며 대신 한숨을 내쉬고 싶어지는 것을 느꼈다. 저 빌어먹을 자식. 키를 후려치려던 사내들 중 일부도 당황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향해 라이온은 싱긋 웃으며 검을 뽑아들 었다.
“라이온 가라사대, 너희들의 고독했던 방랑에 라이온이라는 종지부를 찍을 때가 도래했노라!”
키는 갑자기 눈앞의 사내들보다 라이온을 두드려패는 것이 화를 푸는 데 더 도움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싸움의 한복판으로 뛰어들며 라 이온은 세 번째로 외쳤다.
“난 인도주의자야. 나 자신에 대해서만!”
그리고 라이온은 자신의 발언에 대해 책임지는 건실한 모습을 보였다. 그 자신에게 일어났다면 미쳐 날뛰었을 행동을 상대방에게는 아낌없이 베풀 었던 것이다. 라이온의 검에 사타구니를 찔릴 뻔했던 상대는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꼈다. 이놈은 보통이 아니다. 보통을 훨씬 뛰어넘는……………
“완전히 미친놈이잖아, 이거?”
“껄껄껄! 사춘기 때는 다 그런 거야. 주위의 모습이 불합리해 보이고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거란다. 너희들이 폭력적으로 바뀐 것도 그 때문이겠지!”
키는 라이온의 말에 신음을 토하며 중얼거렸다.
·좀 갑작스럽지만, 저놈의 입을 뭉개준다면 너희들과 우호를 나누는 문제를 고려해 보겠다.”
네 사내들은 키와 라이온이 번갈아 던지는 화두에 곤혹스러워했다. 그러나 정작 그런 화두를 중얼거리던 두 사람은 자신들의 말에 아무 영향도 받지 않은 채로 검을 휘둘러대었다. 결과적으로 두 사람의 포위 공격에 의해 네 명의 칼잡이가 발이 묶이는 희한한 상황이 발생했다.
그리고 그 상황은 한번의 반전도 없이 결말까지 유지되었다.
세 명의 사내는 각자 치명상의 교본 같은 모습을 한 채 땅을 뒹굴게 되었고, 마지막 사내는 부러진 칼자루를 집어던지고 무릎을 꿇었다. 조금 늦게 도착한 하리야 선장은 참극의 현장을 보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돌탄 선장에게 해적들의 지휘를 맡긴 하리야는 세 구의 시체 옆에 서서 기도를 시작했다. 키는 그런 하리야의 모습을 흘끔 바라본 다음 라이온에게 명령했다.
“신문해 소속과 목적, 그리고 의뢰인. 사냥개로 보이더군. 그리고 돌탄은 저 시체들을 처리하고, 머리카락 하나 남겨두면 안 돼. ·하리야 선장의 기도가 끝나고.”
기도중이었기에 하리야는 감사의 표시를 보내지는 않았다. 라이온은 씩 웃으며 마지막 사내의 겨드랑이를 붙잡아 일으켰다. 하지만 사내는 주위를 둘러싼 해적들의 숫자에 질려 반송장이나 다름없는 꼴을 하고 있었다. 라이온은 몇 명의 해적들을 시켜 사내를 통채로 들어올리게 한 다음 으슥한 숲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라이온이 사라지자, 키는 나무 등걸에 주저앉아서 복수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손수건으로 복수의 검신을 닦아내는 키의 손길은 차라리 관능적이었다. 검이 아파할 거라고 믿는 것처럼 키는 섬세하고 꼼꼼하게 피를 닦아내었다. 해적들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버렸다. 뭔가 보아서는 안 되는 것, 침대 속에 있는 자신의 부모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은 모든 해적에게 똑같이 다 가왔다. 하지만 오닉스는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시체들에게 다가섰다. 기도를 올리고 있던 하리야가 잠시 이맛살을 찌푸렸지만 오닉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시체들을 관찰했다.
오닉스의 시선이 한 사내의 어깨 부분에 이르렀을 때였다.
사내의 어깨 부분의 옷자락은 칼에 맞아 크게 잘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잘린 틈 사이로 오닉스는 무엇인가를 발견했다. 오닉스는 손을 뻗어 옷을 벌 리고는 피를 닦아내었다. 하리야는 호통을 치려 했지만 그때 그 역시 사내의 어깨에 있는 문신을 발견했다.
오닉스는 사내의 옷을 아예 찢어버린 다음 찢어진 옷가지로 어깨를 쓱쓱 닦아내었다. 이윽고 드러난 문신은 푸르스름한 새의 모습이었다. 하리야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이 되어 키를 돌아보았다.
“선장님. 여기 문신이 있는데………… 푸른 까마귀 같습니다.”
복수의 칼날을 닦고 있던 키의 손이 멈췄다. 키는 고개를 들어 하리야를 보았다. 하리야는 자신의 말에 놀라서 당황하고 있었다. 키는 다시 고개를 숙이며 혼자말처럼 말했다.
“애져버드(Azurebird) 놈들이라고? 그놈들이 이곳에는 왜?”
“그 친구는 많은 것을 말했고, 그래서 제가 침묵의 미덕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신문을 끝내고 죽였다는 말을 이렇게 표현한 라이온은 얼굴을 긴장시 키며 나직하게 말했다.
“놀랍게도 놈들은 애져버드의 병아리들이었습니다!”
아무도 놀라지 않았고, 그래서 라이온은 퍽 무안해졌다. 하리야는 언제나처럼 찌푸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푸른 까마귀 문신은 이미 확인했네. 배덕한 이단자 놈들이 이곳에 온 이유는 뭐지?”
하리야의 표현은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다. 원래 애져버드는 법황의 직접 지배를 받는 교회 기사단이었다. 그들 자신이 이단과 싸우고 이교도들과 싸우며 신앙을 지키는 자들인 것이다. 한때 제국 곳곳의 요충지에 애져버드의 푸른 까마귀 깃발이 날리지 않는 성이나 관문이 없었다.
하지만 제국의 강국들은 교회의 세력 강화를 두려워했다. 모함과 모략. 그것들은 체계적이지도 않고 일괄적이지도 않았지만 모든 나라에서 동시에 터져나왔다. ‘이단자와 이교도와 맞서 싸우는 동안 애져버드는 오히려 그에 동화되고 말았다’는 요지의 모함이 뚜렷한 형체를 지니고 애져버드를 공 격하게 된 것은 법황령의 실질적 팽창을 기도하던 ‘은혈의 법황’ 오펠 2세 시절의 일이었다.
기실 그런 모함은 많은 진실을 내포하고 있기도 했다. 애져버드는 연대감을 다지기 위한 목적으로 어깨에 푸른 문신을 새겼지만, 교회는 신으로부터 받은 육신을 훼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또한 이 푸른 까마귀의 문신은 우상 숭배의 혐의를 받을 수도 있다. 그 외에도 많은 이단의 증거가 있었 기에 은혈의 법황 오펠 2세도 더 이상 애져버드를 편들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제국의 수도 란셀에서 이단 재판이 열렸다. 이 점이 시사하는 바는 크 다. 법황 직할령인 펠라론이 아니라 제국의 수도에서 열린 이단 재판은 개정되기도 전에 애져버드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애져버드는 소환에 불응했고, 각국에 산재한 애져버드의 기사단 지부들은 철저한 습격을 받았다. 하지만 애져버드의 재산 중 법황에게 반환된 것은 극히 드물었다. 각 나라는 법황의 버릇을 고쳐줬다고 생각했고, 법황은 진노 외엔 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애져버드는 용병단으로 성격을 바꾸어 살아남았다. 제국의 강국들을 자극하는 것은 무모한 일이었기에 애져버드는 ‘아이언블러드’라는 새 이름을 사용했고, 자신에 대한 변호나 빼앗긴 재산에 대한 소유권 주장 등은 일체 하지 않았다. 그래서 각국은 그들을 묵인해 주었고 사람들은 아직 도 아이언블러드라는 낯선 이름보다는 애져버드라는 옛이름을 사용했다. 어쨌든 이들의 정식 명칭은 아이언블러드였고 이단자인 애져버드는 이제 존재하지 않으므로, 하리야가 그들을 이단자라고 부른 것은 정확한 호칭은 아닌 것이다.
라이온은 이번에야말로 놀라봐라! 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예. 놈들은 카밀카르의 전령들을 추적하여 이곳에서 그들을 포착, 살해한 후 귀환하는 중이었습니다.”
“카밀카르의 전령?”
“그게 재미있습니다. 그건 바로 우리 소식이라고 하더군요.”
라이온은 뜸을 들이기 위해 말을 잠깐 끊었지만, 곧 키의 살벌한 시선을 대하고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그 전령은 율리아나 공주가 우리들에게 잡혔다는 소식을 필마온 기사단에 전하기 위해 달려가던 중이었다고 합니다.”
“이상하군. 그 소식이 전달되는 것을 방해하고 싶어한 것이 누구란 말이야?”
“그건 당연히 모르더군요. 자객답게.”
“흐음.”
괴이한 일이군. 키는 생각에 잠겼다. 공주가 납치된 사실을 숨긴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런 사건들은 숨긴다고 해서 숨겨지는 성질의 사건이 아니 므로. 그렇다면 애져버드의 자객들이 원한 것은 카밀카르의 협조 요청이 필마온에 도달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인가?
“시체를 둔 곳이 어디라던가?”
“저 앞쪽으로 보이는 산 있잖습니까? 저기 중턱쯤이라고 하더군요.”
“뭐 챙겨온 것은 없고?”
“그런 것은 없는 모양입니다. 아마도 의뢰자가 명령하지 않았겠지요.”
“응?”
키는 고개를 돌려 라이온을 바라보았다. 라이온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의뢰자는 놈들에게 소지품을 뒤지라는 명령은 내리지 않았을 거라고 했습니다. 당연하잖습니까?”
“뭐가 당연하다는 거지? 난 잘 모르겠는데.”
“그거야 소지품, 그러니까 서신이나 서류 같은 것을 가져오라는 명령을 내린다면 자객들이 틀림없이 그 서류를 훔쳐볼 테니까 그런 명령은 처음부 터 내릴 수 없는 겁니다. 그런 서류 같은 것을 자객들이 본다면 의뢰자의 신원을 추측해 볼 수도 있으니까요. 그건 자객들을 고용할 때의 상식 중의 하나…………”
라이온은 주위의 해적들 대부분이 이상한 동물을 보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말꼬리를 흐렸다. 짧은 순간 몇 번이나 바 뀌던 그의 안색이 최종적으로는 약간 창백해졌다. 라이온은 그 창백한 얼굴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고 그런 라이온을 향해 돌탄 선장이 질문했다.
“어, 라이온. 차네……”
“출발.”
키 드레이번이 갑자기 일어나며 외쳤다. 해적들은 당황하여 고개를 돌렸지만 키는 이미 걸음을 떼고 있었다. 몇 발자국을 걸어간 키는 눈살을 찌푸 리며 말했다.
“두 번 말해야 되나?”
테리얼레이드는 독특하게 생긴 도시였다.
오래된 건물들은 너무 오래되었고, 새 건물들은 지나치게 새것들이었다. 폐가 바로 옆에 시장의 떠들석함이 공존하고 있었고, 도시를 관통하는 옛성 벽의 그늘 아래에서는 거지와 양떼가 함께 오가고 있었다. 양떼를 몰고 있는 것은 분명히 양치기였지만 그들의 발 아래에는 풀밭 대신 포석이 깔려 있었다. 말라버린 강바닥에 마련된 좌판에서는 노점상들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다리 위를 걸어가는 시민들을 불러세우고 있었다. 구역이라 불릴 수 있는 최소한의 구분점은 보이지 않았고 반 마일 이상 계속되는 대로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어떤 요인이 작용해야 도시가 저렇게까지 무 계획하게 성장할 수 있는 것인지 오스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오스발은 테리얼레이드에 대한 해석을 포기하고는 고개를 돌려 율리아 나 공주를 바라보았다. 얼굴에 진흙을 바르던 율리아나는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푸아!”
그 얼굴을 본 오스발은 폭소를 터뜨리지는 않았다. 다만 고개를 조금 가로저으며 말했다.
“턱과 목에도 바르세요. 얼굴에만 바르시니 색깔이 서로 달라보이지 않습니까.”
“꼭 이런 독특한 화장이 필요할까요?”
“저는 공주님을 지킬 수 없지만, 그 진흙은 공주님을 지킬 것입니다.”
율리아나는 포기한 듯한 얼굴로 옷 속으로까지 진흙을 발라넣었다. 잠시 후 건조된 진흙이 떨어지고 나자 대륙에서 손꼽히는 미녀의 모습은 온데간 데없이 사라졌다. 오스발은 그제서야 공주와 함께 테리얼레이드에 들어섰다.
먼곳에서 볼 때 희극적이던 테리얼레이드의 모습은, 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바뀌었다.
오스발이 가장 먼저 안 사실은 무장한 사람이 너무 많다는 사실이었다. 거리를 걷고 있는 남자들 중 둘에 하나는 무장을 하고 있었다. 큰 칼을 가진 사람은 별로 없었지만 단검은 수도 없이 많이 보였다. 잠시 더 주위를 관찰하던 오스발은 무장한 사람이 둘에 하나라는 견해를 수정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오스발이 보기에 분명히 무기가 없어보이던 청년 하나가 갑자기 왼손 소매 속으로부터 단검을 뽑아들어 마주 오던 사내들 가운데로 뛰어든 것이다. 짧은 비명과 함께 사내들 가운데 한 명이 쓰러질 때까지도 사내들은 무의미한 말들을 외칠 뿐 막을 생각도 못했다. 암살자는 찔린 사내만큼이나 창백 해진 얼굴로 더듬거리며 외쳤다.
“코, 코딜리어를 기억하라, 케록스!”
습격당한 케록스는 땅바닥에 벌렁 쓰러졌고, 케록스의 동행으로 보이던 사내들은 그제서야 괴성을 지르며 습격자에게 달려들었다. 그 광경을 정면 으로 보게 된 공주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새파랗게 굳어버렸지만, 오스발은 재빨리 그녀를 이끌며 옆쪽의 골목 속으로 숨어들어갔다.
공주를 가리며 밖을 바라보던 오스발은 눈이 튀어나올 듯한 모습을 목격했다. 암살자는 하필이면 그들이 숨어든 골목으로 달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맙소사! 오스발이 암살자의 다리라도 걸어 추격자에게 건네어주고 달아날까 하는 생각을 떠올렸을 때였다. 그의 등뒤에서 날카로운 고함이 들 려왔다.
“코리! 어서 와!”
골목 안쪽으로부터 들려온 고함에 고개를 돌린 오스발은 웬 젊은 여자가 골목 안쪽의 술집으로부터 뛰어나오는 모습을 발견했다. 그녀의 손에는 커 다란 대야 같은 것이 들려 있었다. 대야를 들고 달려오던 여자는 오스발과 공주를 흘끔 바라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코리라고 불렸던 암살자가 골목 안으로 뛰어들었다. 여자는 코리의 옆을 재빨리 지나쳐서는 그 뒤를 따라오던 추적자들을 향해 대야를 집어던졌다. 대야 속의 물을 뒤 집어쓴 사내들은 기겁하며 외쳤다.
“푸아아! 뭐야, 이건?”
“네놈들보단 훨씬 깨끗한 설거지 물이야, 이 강간마 놈들아!”
사내들에게 설거지 물을 뒤집어씌운 젊은 여자는 씩 웃으며 코리의 어깨를 강하게 붙잡으며 말했다.
“얼간이 녀석, 결국 해냈군!”
“아, 세실, 세실. 그러니까 내가, 내가…………”
“코딜리어의 일은 나도 벼르고 있었어. 자, 기다려!”
세실이라는 그 여자는 곧 몸을 돌렸다. 오스발은 그녀의 입 안으로 손가락 두 개가 들어간 것과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들려온 것 중 어느 것이 먼 저인지 알 수 없었다. 세실은 낭랑하게 외쳤다.
“코딜리어의 복수다! 외상 모두 지워줄 테니 외상 있는 놈들은 다 튀어나와!”
느닷없이 사건에 휘말려 꼼짝도 못한 채 관객의 역할을 강요당하고 있던 오스발과 율리아나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술집 안쪽으로부터 거친 함성 이 튀어나오더니 곧 사람의 물결이라 불릴 만한 것이 우르르 쏟아져나왔다.
“우와아아!”
끝이 없을 것 같은 인파의 손에는 거의 대부분 단검이 들려져 있었지만 간혹 깨진 술병이나 의자 다리, 부지깽이 같은 것도 보였다. 술에 취한 데다 가 너무 많은 인원이 골목을 메우는 바람에 인파는 자기들끼리 밀고 밀리면서 대로에 있던 사내들을 향해 달려갔다. 설거지 물을 뒤집어쓴 사내들의 황당한 얼굴이 공포에 질린 얼굴로 바뀐 것은 순식간이었다. 사내들은 칼을 맞아 땅에 쓰러져 있던 케록스를 들어올리고는 필사적으로 달아나기 시 작했다. 그리고 술집으로부터 달려나온 주당들은 그 뒤를 따라 끝없이 달려갔다. 짧은 순간 오스발은 저렇게 많은 외상 손님이 있다면 영업이 가능할 것인가에 대해 우려했다.
세실은 달려가지 않았다. 주당들이 사라지자 세실은 곧 코리를 바라보았다. 방금 사람을 찌른 코리는 그 흥분으로 온몸을 떨고 있었고, 그 모습을 본 세실은 온화한 미소를 지은 다음 코리의 뺨을 세차게 후려갈겼다.
“정신차려!”
“어, 어, 세, 세실. 내가, 내가 찔렀어. 찔렀어요. 그놈을……”
“그래, 알아! 죽어라 책만 파던 놈에게 이런 배짱이 있을 줄은 몰랐군. 자, 이젠 도시 밖으로 튀어야 되는 차례야. 칼 있어? 없어? 아차, 제길. 그놈 배에 꽂아놨구나. 이거 가져.”
세실은 갑자기 치마를 걷어올리더니 종아리에 묶어두었던 단검을 풀어 코리의 혁대에 꽂아주었다. 그리고 세실은 주머니 속을 뒤져 손에 잡히는 대 로 돈을 꺼내어 코리의 손에 쥐어준 다음 다시 코리의 뺨을 후려갈겼다.
“정신차려!”
결국 코리는 벌컥 화를 내었다.
“그만 좀 때려요, 아프잖아!”
“얼씨구? 음. 이젠 기합이 좀 들어갔군. 좋아! 자, 죽어라고 뛰어. 알았지? 아무도 만나지 말고 누가 물어보든 이름, 나이, 고향 모두 바꿔! 책 많이 읽으니 그 정도는 알겠지? 자, 몇 년 동안 안녕이로군. 이젠 뛰어!”
세실은 코리의 엉덩이를 힘껏 갈겼다. 코리는 비슷한 일을 당한 말이 그러하듯 죽어라고 뛰기 시작했다. 달려가던 코리는 갑자기 멈추더니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소매로 눈가를 쓱 닦으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외쳤다.
“고마워요, 세실!”
“얼어죽을 새꺄! 헛소리 할 시간 있으면 달려!”
코리는 다시 달려갔고 그 뒷모습을 보고 있던 세실은 허리에 손을 얹고는 통쾌하게 웃기 시작했다. 그 웃음 소리를 들으며 오스발과 율리아나는 누 가 더 황당한 얼굴을 할 수 있는가 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서로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때 세실이 고개를 돌린 채 말했다.
“남자는 속여도 여자는 못 속여. 그쪽 미녀는 뭐지?”
세실이 율리아나를 지적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오스발은 몸속에서 뭔가가 떨어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세실이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얼굴 아래쪽엔 아직 웃음기가 남아 있었지만 코 위쪽으로는 빈말로라도 즐거워 보인다고는 말할 수 없는 날카로운 두 눈이 드러나 있었다. 세실은 율리아나를 본격적으로 쏘아보기 시작했고, 율리아나는 오스발의 등뒤로 숨을 것인지 세실의 시선을 마주 볼 것인지를 놓고 고민했다. 갑자기 세실은 피식 웃었다.
“사연이 있으시겠지, 딴엔 말야. 흥. 따라와. 나 오늘 기분좋아. 도와줄 테니 빨리 들어와.”
세실은 그대로 가게 안으로 걸어들어가 버렸다. 오스발은 고개를 숙여 율리아나를 바라보았다.
“진흙도 가리지 못한 아름다움에 찬탄을 보내고 싶지만, 그것보다는 먼저 저 여자를 따라갈 것인지 말 것인지를 여쭙고 싶군요.”
“…….가요. 난 조금 전 저 여자가 여동생의 복수를 한 오빠를 돕는 걸 봤어요.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긴 하지만, 어, 내가 제대로 본 거죠?”
오스발은 어깨를 으쓱한 다음 세실의 뒤를 따라 술집 안으로 들어갔다. 먼저 들어왔던 세실은 벌써 주당들이 쓰러뜨리고 나간 테이블과 의자를 정리 하고 있었다. 세실은 문가로 들어서는 오스발과 율리아나를 보더니 어이없는 얼굴이 되었다.
“진짜 따라오네?”
“예?”
“이봐요들. 당신들 도망자로선 실격이군. 아무 말이나 믿다니. 못살겠군. 오늘 본 머저리는 코리로 충분할 줄 알았는데 이젠 둘이나 더 보게 되는군. 오늘이 머저리를 가호하시는 성 이디오테우스의 축일이었나? 일단 거기 아무데나 엉덩이 붙이고 있어. 청소 좀 하자.”
율리아나와 오스발은 앉으라는 말에 무턱대고 앉았다간 다시 머저리로 취급당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 속에서 쭈뼛거리며 의자에 앉았다. 다행 히도 세실은 그들을 머저리로 취급하는 대신 휘파람을 휘휘 불며 테이블과 의자, 땅바닥을 뒹구는 술잔 등을 치웠다. 율리아나는 그런 그녀를 향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성함이 세실이라고 하셨나요?”
세실은 청소하던 손을 멈추더니 율리아나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입술을 비죽거리며 말했다.
“아니오, 공주님. 미천한 소녀는 세실리아라고 한답니다. 세실은 제 추종자들이 부르는 애칭이지요. 아, 제 추종자들이 모두 술주정뱅이에 깡패에 불량배라는 사실은 굳이 거론하진 않겠어요.”
오스발은 ‘공주님’이라는 말에 다시 기겁할 뻔했지만, 세실이 단순히 비아냥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간신히 깨달았다. 율리아나는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저는 유리라고 합니다. 이쪽은 발이고요.”
“그렇게 기억해 드리지요. 까먹을 때까지는.”
세실은 우아하게 절을 한 다음 다시 청소를 시작했다. 그 틈을 타 오스발은 율리아나의 귓가에 입을 가져갔다.
“유리? 발이라고요?”
율리아나는 생긋 웃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녀로부터 나온 소리는 입이 아니라 뱃속에서부터 나왔다. 꼬르륵. 율리아나는 자신의 뱃속에서 난 소 리에 당황하다가, 이곳이 술집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술집, 술도 팔지만 음식도 팔지. 음. 와본 적은 없지만 아마 그럴 거야.
그 순간 율리아나는 너무나 급격한 사건 때문에 알아차리지 못했던 사실을 떠올렸다. 자신은 노예 한 명과 함께 해적선을 탈출한 후 헐벗은 채로 황 야와 숲과 산을 가로질러 마침내 사람들이 사는 도시에 들어와 사람이 만든 의자에 몸을 앉히고 있는 것이다. 율리아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이럴 땐 어떻게 하는 것이 적합한 행동일까. 아마도, 음. 기쁨의 함성을 질러야겠구나.
“우와아아아!”
청소하던 세실은 갑자기 들려온 괴성에 기겁하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고함이 들려온 쪽을 향해 얼빠진 얼굴을 돌린 세실은 오스발의 목에 매달려 미 친 듯이 감격하고 있는 율리아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해냈어요! 우와아아앗! 우리는 드디어 해냈어요! 끼야아아앗!”
세실은 율리아나를 향해 ‘나는 당신의 정신 상태에 대해 퍽 회의적이다’라고 말하는 듯한 시선을 보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율리아나는 목을 놓아 울다가 다음 순간 테이블을 쾅쾅 두드리며 웃어대고 있었다. 기어코 의자째로 뒤로 넘어진 율리아나는 땅을 구르며 웃어대었다. 오스발은 멋적게 웃 었다.
“아, 저, 두 사람이서 이 도시까지 오느라 고생을 심하게 했거든요.”
“고생이 상당했던 모양이군. 저런 미친 짓을 할 정도면.”
“예. 그러고 보니 배도 많이 고프군요. 음식 좀 부탁할까요.”
땅을 구르며 좋아하고 있던 율리아나는 음식이라는 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음식! 그래, 벼슬이 달린 거! 아니면 킁킁거리며 땅을 파는 거! 아냐, 지금 심정 같아서는 갈기를 휘날리며 달리는 거라도 좋아요. 음식, 사람의 음 식, 불고문을 겪은 음식!”
세실은 킬킬거리다가 대답했다.
“흐음. 당장 준비할 수 있는 건 풀을 우적거리며 슬픈 눈으로 지평선을 바라보는 것뿐이군. 아, 불고문? 바싹 구워줄 테니 좀 기다려.”
잠시 후 율리아나는 세실이 가지고 나온 스테이크에 저돌적인 자세로 달려들었다. 오스발 역시 스테이크 접시에 대해 만만찮은 터프함을 발휘했고, 세실은 두 사람의 식사 광경을 보며 어이없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광란스러운 식사를 마무리한 율리아나와 오스발이 배를 문지르며 의자에 길게 늘 어지자, 세실은 접시가 깨지지 않은 것에 안도하며 말했다.
“개업 이래로 당신들만큼 내 음식을 맛있게 먹어주는 손님들은 처음이군. 헷. 난 지금 이 업종이 사실은 내 천직이 아니었을까 하는 착각에 빠져 있어.”
율리아나와 오스발은 입을 모아 너무나도 맛있는 음식이었다는 둥, 이런 음식을 맛본 것만으로도 태어난 의미를 획득했다는 둥 함으로써 세실을 실 소하게 만들었다. 세실은 식기들을 설거지 통에 던져넣은 다음 두 사람에게 와인 잔을 내놓으며 말했다.
“그래, 당신들이 좇는 별은 뭐야? 도와주겠다고 한 말은 책임질 테니 말해 봐. 뭘 도와줄까, 발?”
오스발이 세실의 질문에 대해 대답하는 데 조금 머뭇거린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로 공주가 너무도 행복한 표정으로 와인 잔을 들여다보 면서 그녀가 대답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오스발을 배신했기 때문에, 둘째로 사실을 말해야 될지 근사한 거짓을 말해야 될지 몰랐기 때문에, 결국 오스 발은 사실을 말하기로 결심했다.
“저, 세실. 만일 우리가 지금 당장 카밀카르로 가야 한다면 어떻게 하면 좋을지 조언해 주시겠습니까?”
“카밀카르? 농담하는 거야? 휘이유! 당신들 두 명이서? 어려워. 거기까지 안전하게 가려면 우호적인 쇠붙이가 꽤나 많이 있어야 할걸.”
율리아나와 오스발 모두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두 사람이 못 알아듣는다는 것을 알아차린 세실은 보다 보편적인 말로 바꿔 말했다.
“칼이나 돈 말이야. 돈으로 사든 우정으로 사든 어쨌든 무장한 동료들이 꽤 있어야 될걸. 산적, 노상 강도, 국경 통과는 또 어떨까. 야수들, 괴물들. 흐음.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가장 안전한 길은 뱃길이지만 요즘은 키 드레이번 때문에 뱃길 안전하다는 말도 못하겠군.”
오스발은 황급히 고개를 숙여 와인 잔 속을 노려보았다. 키 드레이번이라는 말에 자신의 표정이 어떻게 바뀔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율리아나는 반대로 천장을 쏘아보았다. 그래서 두 사람은 오히려 세실에게 이상한 인상을 주고 말았다. 세실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말했다.
“그리고 뱃길을 타려면 항구로 가야 하는데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야. 여기서 가장 가까운 항구는 미노 만이고 거긴 대드래곤의 성지야. 실격. 그 다 음 가까운 항구는 동남쪽의 다림. 거기는 이보레 열도를 오가는 화물선들의 종착항이지. 하지만 다림까지 가려면 아피르 족의 땅을 지나가야 해. 아 피르 족은 조금 전 당신들이 스테이크를 먹어치우던 모습 그대로 당신들을 먹어치울걸. 역시 실격.”
자유호의 조타수 칸나를 떠올린 오스발은 오싹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율리아나는 열성적인 얼굴로 말했다.
“저, 세실 양. 이곳에 교회가 있나요?”
세실의 얼굴이 확 바뀌었다. 세실은 눈을 몇 번 심하게 깜빡거리더니 곧 가늘게 뜬 눈으로 율리아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봐요, 교회라니? 물론 이 빌어먹을 테리얼레이드에도 교회는 있어. 대륙의 열 번째 불가사의가 아닐까 생각되긴 하지만. 그런데 거긴 왜?”
“저희들은 교회에 도움을 청할까 생각하고 있어요.”
“유리 당신…… 설마 귀족인가? 교회에 도움을 청한다고?”
세실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율리아나를 바라보았지만, 율리아나는 대답 대신 애매모호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보던 세실은 끙 하는 소리를 내었 다. 쳇. 다벨이나 팔라레온에서 도망친 귀족 부스러기 정도 되는 모양이군. 이 남녀에게 가르침을 좀 베풀어볼까? 관둬, 쳇. 이 작자들에게 테리얼레 이드가 그들이 생각해 오던 낭만적인 도피처가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쳐줄 사람은 나 외에도 많겠지. 파킨슨에게 맡기면 되겠군.
세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좋아, 뭐. 그러지. 교회야 원래 만인을 도우니까. 아, 그렇게 주장하는 걸 들었다는 말이야. 그럼 서두르지. 조금 더 늦어지면 미사 시간이 될 테니 까 그 전에 만나봐야겠지?”
세실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곧장 몸을 돌렸다. 그리고 벽에 있는 옷걸이에서 모자를 하나 들어올렸다. 엄청나게 챙이 넓은 푸른색의 모자였다. 그 리고 바 뒤로 돌아간 세실은 그곳에서 커다란 지팡이 하나를 꺼내었다. 노인들이 힘없는 다리를 의지하기 위한 종류가 아니었다. 곧고 똑바르며 묵직 한 것으로서 무기로 써도 무방할 듯하며 여차하면 텐트의 기둥으로도 쓰임직한 지팡이였다. 모자를 쓰고 지팡이를 짚은 세실이 두 사람 앞에 서자 율 리아나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당신……?”
세실은 빙긋 웃으며 말해 보라는 듯이 턱을 조금 내밀었다. 율리아나는 휘둥그레진 표정으로 말했다.
“마법사(witch)예요?”
“하! 유리 양. 당신 재수좋았어. 만일 마녀(hag)라고 불렀다간 당장 개구리로 만들어서 내 설거지통 속을 헤엄치게 만들 생각이었거든. 그래, 난 마법 사야. 일어나시지요, 젊은이들.”
오스발은 젊은이라는 호칭에 당황하지 않았다. 마법사라는 말이 사실이라면 이 겉보기에 젊고 예쁘장한 아가씨는 어쩌면 백 살이 넘은 할머니일지 도 모르는 것이다. 아이고 맙소사. 어쩐지 이런 조그만 술집의 주인 치곤 거리의 깡패들을 제멋대로 다루더라. 하지만 율리아나는 겁을 잔뜩 집어먹 은 얼굴이 되었다. 그녀는 혼자말처럼 더듬거리며 말했다.
“자, 잠깐만요. 이곳은 테리얼레이드고, 그러니까 제국의 공적 1호 하이낙스의 마지막 본거지였고, 그리고 당신이 마법사라면……?”
율리아나는 세실의 시선 때문에 말꼬리를 흐릴 수밖에 없었다. 공주의 질문이 계속되면서 세실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기 때문이다. 끝내 세실은 무 시무시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율리아나의 말을 받았다.
“어쩌면 하이낙스의 제자일지도 모르며, 그의 몰락을 바라보며 복수를 다짐했을지도 모르며, 무법의 도시 속에서 주점이나 경영하며 정체를 숨겨왔 을지도 모르는, 제국의 마지막 반역자일지도 모른다?”
율리아나의 목에서 울려나온 소리는 오스발을 놀라게 만들었다. 저게 침 삼키는 소리 맞나? 오스발은 고개를 돌려 하얗게 변한 율리아나의 얼굴을 보다가 다시 세실을 돌아보았다. 그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음식값은 얼마죠?”
잠시 동안 두 여자는 형언키 어려운 표정으로 오스발을 바라보았다. 오스발은 어깨를 으쓱였다.
“전 이곳 물가는 몰라서요.”
세실은 간신히 숨을 골랐다.
“이, 이봐, 발, 당신은 보기 드문 용감한 성격의 소유자인가, 아니면 보기 드문 얼간이인가?”
“글쎄요. 제가 만일 ‘정말 그러십니까?”라고 물었다면 당신은 당장 나를 보기 드문 얼간이 쪽으로 판단하셨을 거라는 점은 짐작되는군요.”
세실은 자기 이마를 딱 소리나게 친 다음 웃음을 터뜨렸다.
“180데리우스. 그리고 당신이 보기 드문 사내인 건 확실하군. 유리 양, 발 군에게 감사해요. 당신은 얼간이로 취급될 위험을 벗어났어. 아, 다음번 얼간이 짓을 할 때까지 말이야.”
“어째서 그런지 설명해 주시겠어요?”
“내가 지금 당신들을 어디로 안내하려 하고 있는 거지? 교회야. 불법 마법사가 교회를 찾을 수 있을까? 그럴 리는 없지. 그럼 난 교회로부터 인정받 은 적법한 마법사겠지? 그럼 하이낙스와 어떤 관계가 있을 리가 없지.”
율리아나는 가엾게도 자기 혐오에 빠져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