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2권 – 6장 : Bladerunner – 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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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라리스 랩소디 2권 – 6장 : Bladerunner – 3화


“왜 그를 보내셨습니까?”

핸솔 추기경은 우울한 눈으로 다림 수도원장을 바라보았다. 수도원장이 말하는 ‘그’가 누군지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핸솔 추기경은 그에 관해 별 로 말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수도원장은 추기경이 못 알아들었다고 생각하고는 좀더 상세하게 말했다.

“파킨슨 신부 말입니다. 그가 나서면 공주를 미사에 끌어들이기가 더 쉬울 텐데요.”

“그에게 더 이상을 바라는 것은 부당하오. 그는 이미 이곳까지 공주를 데려왔소.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을 때, 아무도 짐작하지 못한 곳으로부터. 따 라서 나머지는 당연히 우리 몫이오. 법황 성하 자신이라도 그에게 ‘조금 더’를 말할 수는 없을 거라 생각되오.”

그가 상관에 돌아가서 계획을 말하면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그러지 않을 거요.”

“그의 교회에 대한 충성심을 믿으시는 겁니까?”

“아니. 난 그 사람의 성격을 믿소.”

“글쎄요. 제 생각엔 그를 붙잡아두는 편이 더 안전했을 것 같습니다만.”

“원장. 만일 그랬다면 그 계획은 반드시 실패했을 거요. 설령 그에게서 핸드건을 빼앗는다 하더라도 그는 자신의 의지만으로도 수도원을 탈출하여 공주에게 사실을 알렸겠지.”

수도원장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추기경을 바라보았다. 추기경은 팔짱을 꼈다.

“그는 억누르면 그 두 배의 힘으로 반발하는 사람이오. 강력한 용수철 같은 사람이라고 할까. 따라서 그를 억누른다는 건 아무 소용이 없소. 더 거세 게 반항해서 기필코 압박을 분쇄해 버릴 사람이니까. 그가 그 교회의 성물을 길들인 방식을 원장도 보셔야 했을 텐데. 그는 오른팔이 부러지자 왼손 으로 핸드건을 쥐고 쏘아대었던 사람이오. 그를 가르쳤던 죠르지오 신부는 그토록 빠르게 핸드건을 터득한 제자는 처음 보았다고 감탄하더군. 혹자 만할까 봐 그에겐 말하지 않았지만.”

“그렇습니까?”

“그가 어떤 도시에 교회를 건설하겠다고 덤비고 있는지만 봐도 그의 성격을 미루어 짐작하실 수 있으실 거요. 테리얼레이드요. 제국도 손을 안 대고 하이낙스도 비켜갔던 도시지. 그런 도시에서 포교하는 건 단순히 강인한 정신력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오. 정신력이나 신앙의 깊이만으로는 그보다 나은 이도 있을 수 있겠지. 하지만 불굴의 정신력이라도 세월 속에선 닳는 법이오. 억누르면 억누를수록 닳아버리는 대신 더 거세게 반발하는 성격은 타고 나는 것이지. 파킨슨 신부는 그런 사람이오.”

“그래서・・・”

“그래서 난 그에게 진실 그대로를 말해 주었고 그를 붙잡지도 않은 거요. 그에게 분노의 대상을 주는 것은 화를 자초하는 일이오. 하지만 분노의 대 상을 전혀 주지 않으면? 그는 무엇에 반발해야 될지 모르고 당황해하겠지. 그리고, 그냥 이 도시를 떠날 것이오.”

“확신하십니까?”

원장은 미심쩍다는 투로 질문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확고했다.

“확신하오.”

원장은 핸솔 추기경의 설명보다는 추기경의 권위에 대해 머리를 조아렸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말씀하실 것이란 무엇이십니까?”

“좋은 소식을 알게 되었소. 암살 혐의를 뒤집어쓸 작자를 찾아내었지.”

“예?”

“키 노스윈드 드레이번. 그가 육지에 올라왔소. 목적은 공주의 추적인 듯하오. 또 하나의 용수철 같은 사내라고 할까. 지옥이나 다름없을 이 육지도 그에겐 힘을 복돋아주는 압박일지도 모르지. 어쨌든 그 미치광이면 충분하오. 율리아나 공주도 겪은 일이라 하니 아마 지금쯤 폴라 대사도 알고 있을 거요. 그 자의 이름을 이용하도록 합시다.”


데스필드는 먼저 돈주머니를 열고 금액을 확인하는 것으로써 율리아나의 따가운 시선을 산 다음, 짐짓 근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무슨 말이쇼, 그거. 교회는 당신 마음속에 있느니 어쩌니 하던 당신이 갑자기 교회가 걱정되다니.”

“부둣가에서 싸우셨다고 했어요. 내 생각이지만 아마 그 와중에 누굴 찌른 걸지도 몰라요. 그러곤 그대로 도망치신 거죠.”

“젠장! 신부님 당신이라면 그럴 법도 하지.”

데스필드의 대답을 들으며 오스발은 잠시 테리얼레이드에서의 파킨슨 신부의 생활에 대해 의심해 보았다. 율리아나는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창 밖 을 바라보았다.

“어쩌죠? 데스필드 당신이 빨리 추적하면 따라잡을 수 있을까요? 아무리 핸드건을 가지고 계신다 해도 아피르 족을 피해서 테리얼레이드까지 혼자 가시긴 어려울 거예요. 당신이 빨리 뒤쫓아가서 신부님을 보호해 드리는 편이 낫겠지요?”

그때 오스발이 문득 혼자말처럼 말했다.

“누굴 다치게 하신 걸까요?”

데스필드와 율리아나는 동시에 오스발을 돌아보았다. 오스발은 약간 머쓱해하는 표정이었다.

“오스발? 무슨 말이에요?”

“글쎄요. 전 잘 모르겠습니다만 신부님이 누군가를 찔렀다고 해서 테리얼레이드로 가셨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보다는 다림 수도원으로 가서 고 해하신 다음 법황께서 내릴 벌을 기다리시는 것이 보다 신부님답지 않을까 생각되는데요.”

율리아나와 데스필드는 모두 눈을 크게 떴다. 율리아나는 말까지 더듬었다.

“그………렇네요? 신부님이시니까 그게 원칙이겠군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어요?”

“볼드윈 저택에서 만났던 그 백부장님의 경우가 생각났습니다.”

오스발의 대답에 데스필드는 이마를 딱 치며 외쳤다.

“아, 그렇군! 맞아 신부님 당신이라면 당연히 그랬을 거야. 그랬을 거야! 그렇다면 다림 수도원으로……………”

“하지만 그분은 이 도시에 있어서는 안 될 사정이 생겼다고 했어요. 분명히 다림을 떠난다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 같은데요.”

잠시 어리둥절해하던 데스필드는 곧 적절한 대답을 떠올렸다.

“그럼 고해할 일이 없다는 건가? 어느 당신을 찌른 일 같은 건 없는 것이군?”

“그런가 봐요. 오해를 했었나 보네요. 그렇지만 그분이 홀로 떠나신 것은 맞으니까 역시 당신이 빨리 따라가는 편이 좋겠군요.”

데스필드는 잠시 돈주머니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흐음. 그렇잖아도 대금 받는 대로 떠날 생각이었으니, 뭐 돌아가는 길에 신부님 당신 찾아보지.”

“테리얼레이드로 가셨을까요?”

율리아나와 데스필드는 다시 오스발을 돌아보았다. 오스발은 이제 재촉을 기다리지 않고 말했다.

“테리얼레이드로 돌아가시긴 힘드실 텐데요. 아피르 족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키 선장님과 다른 선장님들이 따라오고 계실지도 모르니까요. 대사 와의 싸움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위험은 남아 있지 않겠습니까.”

율리아나 공주는 의식과 무의식 양쪽을 통해 잊으려고 노력했던 이름을 듣고 질겁했다. 그리고 데스필드는 신음을 토하며 이마를 짚었다.

“그럼 뭐야? 오스발 당신 생각은?”

“특별히 떠오르는 생각은 없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당당하게 대답하면 듣는 본인 기운 빠지잖아. 어쨌든 그 생각을 못했군. 노스윈드 당신이 쫓아오고 있을지도 모른단 말 이지.”

데스필드는 자신의 계획을 수정할 필요를 느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적절한 패신저도 구할 수 없는 이상 대금을 받는 즉시 테리얼레이드로 떠날 생 각이었다. 하지만 오스발의 말에 의해 데스필드는 키 드레이번을 간과할 수 없게 되었고 어쩌면 다림 교외쯤에서 진을 치고 있을지도 모르는 해적들 을 돌파한다는 것은 그에게 매력이 별로 없었다. 데스필드는 율리아나에게 키 드레이번의 처리를 물어보았다.

“폴라 대사님은 다벨 공국에 그들의 체포를 의뢰할 생각이세요. 다벨의 롱레인저는 이 근처에서 가장 빨리 동원할 수 있는 군사력이니까요.”

“그렇소? 흐음. 본인은 노스윈드 당신이 잡혔다거나 달아났다는 소식부터 듣고 나서 테리얼레이드 쪽으로 가는 편이 낫겠군. 그럼 어디로 갈까.” 

데스필드는 돈주머니를 챙겨들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율리아나는 당황하여 데스필드를 불렀다.

“가다뇨?”

“이곳 일은 끝냈고, 테리얼레이드 쪽으론 못 가니, 적당한 일거리 찾아 떠나야 될 거 아뇨. 지금으로선 팔라레온 쪽으로 들어가 볼 생각이오.”

데스필드는 이상할 것 하나도 없다는 듯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물론 그의 말은 틀린 데가 없다. 하지만 율리아나가 그런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녀는 테리얼레이드에서부터 그녀와 함께 걸어온 데스필드의 가슴속에 자신의 감정과 똑같은 감정이 자라나 있을 거라고 지레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데스필드에겐 동료애 같은 것은 없었다. 그에게 율리아나는 패신저였을 뿐이고 임무를 끝낸 지금은 그나마 작은 관계 도 없어진 것이다.

“신부님은 어쩌고요!”

율리아나는 질문을 던지면서도 자신이 무슨 대답을 들을지 거의 짐작할 수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과연 데스필드는 그녀의 짐작대로 대답했다. “신부님? 신부님 당신이 왜 검은 황야 쪽으로 안 갔다면, 그리고 고해할 만한 죄를 지은 것도 아니라면 대륙의 이쪽 편에서 신부님 당신에게 특별히 위험할 일은 없어요. 그리고 위험한 일이 있어도 본인이 어쩌라는 거요.’

“난, 당신이 신부님을 친구로 생각하는 줄 알았어요. 나나 오스발은 아니더라도.”

“친구?”

데스필드는 친구라는 말을 생전 처음 들어보는 도시 이름이나 이교도의 신의 이름이라도 되는 것처럼 발음했다. 그리고 율리아나에겐 그 발음으로 충분했다. 데스필드는 더 이상 설명을 하는 대신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갔다. 아까 본 광경이야. 하지만 율리아나는 아까처럼 복도로 달려나가지는 않았다. 잠시 후 계단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데스필드가 문틈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재미있었수, 공주님 당신. 그럼 카밀카르까지 즐거운 여행 되시오.”

오스발은 차분하게 대답함으로써 율리아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안녕히 가세요, 데스필드, 다음에 또 만나뵈면 좋겠습니다.”

데스필드는 껄껄 웃으며 문 저편으로 사라졌다. 몸을 돌린 오스발은 율리아나를 쳐다보았다.

율리아나는 소파에 몸을 묻은 채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보고 있었다. 오스발은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하다가 잘 주무시라고 인사드리고 나가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바로 그때 그의 마음을 짐작이라도 한 것처럼 율리아나 공주가 말했다.

“당신은 안 떠나나요?”

오스발은 침실로 가는 것을 ‘떠난다’는 거창한 말로 표현했을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제가 떠나길 원하십니까. 공주님.”

“당신이 원하는 것을 말해 보세요. 자유호로 돌아가길 원하죠?”

“아니오. 이젠 그렇지 않습니다. 키 선장님이 저를 용서하실 리가 없으니까요. 괜찮으시다면 공주님께 간청드릴까 생각해 봤습니다. 저를 적당한 댁 에, 그러니까 글도 읽을 줄 모르고 기술이라곤 노 젓는 기술밖에 없는 노예라도 할 만한 일이 있는 댁에 소개시켜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소개시켜 주지 않겠다면?”

“그럼 저는 주인 잃은 노예입니다. 다행히도 이곳은 항구이니, 노잡이를 원하는 배가 있을 것 같습니다. 걱정인 것은 제 처지가 탈주 노예로 결정되 는 것입니다. 그럼 처형당할지도 모르지요. 소개서 한 장만이라도 부탁드리면 안 되겠습니까?”

율리아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오스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의 얼굴엔 그녀가 기대하던 표정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표정에 초점을 맞출 수는 없었다. 오스발의 얼굴은 차분했다.

“내 노예로 삼겠어요. 당신은 키 드레이번에 대한 내 전리품이에요. 그게 싫다면 내가 당신의 전리품이라고 여겨도 무방해요. 사실 그렇게 보인다는 건 누구도 부인 못할 테지요. 깔깔깔! 말해 놓고 보니 정말 재미있네요. 당신이 제국의 공적 1호로부터 강탈한 것이 뭔지 보세요. 낄낄낄낄!”

율리아나는 발을 구르며 웃어대었지만 오스발은 약간의 미소만 지었다.

“전 도와드렸을 뿐, 공주님께서는 스스로의 의지로 탈출하신 겁니다. 괜찮으시다면 전 앞쪽의 견해를 따르고 싶습니다. 공주님께서 탈출의 도구로 쓰시기 위해서 저를 탈취해 오신 거라고.”

“그래두우 ―!지금은 당신이 날 구해 냈다고 말해요.”

“공주님?”

“날 도와주던 사람들이 다 떠나버렸어요. 왜 그런지 모르지만 서럽고 약간 무서운 기분까지 들어요. 뭔지 모르겠지만 전 키 드레이번에게 쫓기며 이 곳까지 올 때보다 여기 카밀카르 대사관에 앉아 있는 것이 더 무서워요. 아마도……”

“예?”

“아마도, 지금부터 일어날 일들에 대해 제가 아무런 영향도 끼칠 수 없다는 것 때문이겠죠. 전 폴라 대사님에 의해 카밀카르로 돌려보내질 테고, 다 시 카밀카르에 의해 필마온으로 돌려보내지게 될 거예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될지도 모르겠어요. 당신 말이 맞았어요. 난 노예였나 봐요. 내겐 인권이 없어요. 스스로 내 인격을 만들어나갈 수 없으니까. 그래서 이렇게… 무서운 것인가 봐요. 씨이. 다시 키 드레이번 에게 잡혀갈까 보다. 그럼 내 의지대로 탈출할 수 있을 테니까.”

오스발은 뭐라 대답해야 될지 몰라 멋적게 웃었다. 율리아나는 갑자기 고개를 돌려 오스발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된다면.”

“예? 공주님?”

“그렇게 된다면 다시 날 도와줄 거죠? 키 드레이번에게서 도망칠 수 있도록?”

쉬운 질문이었다. 오스발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공주님께서 절 노예로 삼겠다고 하셨으니 전 공주님의 노예입니다. 당연히 그래야겠죠.”


파킨슨 신부는 잔교 옆의 말뚝에 앉은 채 밤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배의 밧줄을 매는 말뚝은 거칠디 거칠 뿐만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빨아들인 습기와 냉기 때문에 지독하게 차갑다. 따라서 그 위에 앉는다는 건 멋으 로라도 그다지 추천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파킨슨 신부 역시 이 쓸쓸한 말뚝 위에 앉아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핸드건의 무게까지도 버겁게 느껴질 만큼 몸에 힘이 없었기에 파킨슨 신부는 다른 곳으로 옮겨볼 생각이 들지 않았다.

바다를 향해 내뻗은 기중기에서 밧줄이 가볍게 손사래를 쳤다. 차고 습한 바람은 부표를 지나 방파제를 건너 신부를 향해 수렴되고 있는 것 같았다. 배에 매달린 등불들이 까불거리며 먹물빛 밤바다 위에 이교도의 부적 같은 무늬를 날렵하게 그려대고 있었다. 파킨슨 신부는 한숨을 내쉬었다.

등뒤로부터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랄 같은 밤바다에 우거지상을 한 신부님 당신이라………… 예술하쇼, 신부님 당신?”

파킨슨 신부는 피식 웃었다.

“귀신 같은 놈. 어떻게 찾아내었지?”

“글쎄. 패스파인더 본인이잖아. 신부님 당신과 본인 사이에 패스 하나 그어봤지.”

잔교가 삐걱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껏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고 생각하던 파킨슨 신부는 데스필드가 패스파인더라는 사실을 되새겼다. 밤 속에서 걸어나온 데스필드는 자신의 배낭을 집어던지곤 잔교 위에 주저앉았다. 파킨슨 신부는 그 배낭을 잠시 눈여겨보았다. 잔교 바깥으로 내밀어 진 다리를 까딱거리며 데스필드는 말했다.

“누굴 찌르셨수?”

“그런 적 없다, 망할 자식아. 그런데 웬 배낭이지? 공주님께서 날 찾으라고 보낸 것 아니냐?”

“아니. 본인도 떠나온 거요. 일 끝났잖아. 그런데 누굴 찌른 게 아니라면 왜 그렇게 달아난 거요?”

“알 것 없다.”

“뭐, 뭐. 좋으실 대로. 그래서 말인데, 어디로 가실 거요? 본인 고용할 생각 없으슈?”

“패신저를 구하지 못했나 보지?”

“그렇잖으면 왜 신부님 당신이 떠났다는 말 듣고 부리나케 쫓아왔겠소. 어디로 가실 거요? 아, 먼저 말해 드리겠는데 테리얼레이드는 안 돼요. 노스 윈드 당신이 길 가로막고 짖어대고 있을지도 모르거든.”

“그놈들도 이젠 도망쳐야 되지 않겠느냐? 공주님이 이곳으로 들어오셨으니 놈들을 체포할 병사들이 출동할 것은 당연하니까.”

“이곳엔 병력이 없어요. 총독부 휘하로 치안 헌병이 약간 있고 각 대사관이나 공관, 상관 따위에 호위병은 있지만 노스윈드 당신을 때려잡을 만큼은 못 돼. 본인은 노스윈드 당신의 목에 걸린 현상금을 내걸고 선원 당신들 사이에서 모집을 해볼까도 생각해 봤지만, 아무래도 어렵겠더라고요. 뱃놈 당신들 중에 노스윈드라는 이름 좋아할 당신은 아무도 없겠지만 그 이름에 살떨리는 기분 느끼지 않을 당신도 드물걸. 노스윈드 당신이 이미 100명 값을 할 것이 분명한 이상, 못 돼도 이, 삼백 명은 모아야 되는데 그런 인원 모을 자신도 없고 관리할 자신도 없어.”

“그런 생각까지 해봤느냐?”

“그 ᅳ 럼. 뭐, 공주님 당신의 말에 의하면 다벨에 롱레인저 출동을 부탁할 모양이요. 메르데린 공작 당신께서 환호를 지르게 되겠지. 그 자아 도취 공작님 당신이 얼마나 으스댈까……”

데스필드의 말은 계속 이어졌지만 파킨슨 신부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파킨슨 신부는 롱레인저라는 말에 도나텔 백부장을 떠올렸고, 문득 그의 처지와 자신의 처지를 비교하게 되었다. 결투 끝에 사람을 죽인 그는 위안을 구하며 신부를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파킨슨 신부는 그 누구에게서도 위안을 받을 수 없다. 교회 그 자체에 의해 이루어지는 살인이니까.

파킨슨 신부는 참을 수 없이 광포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긴장하여 수축한 피부 위로 몰아치는 밤바람은 쇠붙이의 비산처럼 느껴졌다. 파킨슨 신부는 벌떡 일어났다.

“데스필드. 이 시간에 술 마실 수 있는 곳을 아느냐?”

“에엑?”

“아느냐?”

“어디로 떠날 생각 아니셨소?”

“지금은 술집이다. 그 다음은 나도 모르지만.”

데스필드는 의아한 표정으로 신부를 올려다보다가 순순히 일어났다. 배낭을 들어올린 데스필드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어디로 갈지 모르겠다라. 길 잃은 목자로군.”

파킨슨 신부는 이 재담에 쓴웃음을 지을 수도 없었다. 데스필드는 농담을 말한 것이지만 파킨슨 신부에게 그것은 차가운 진실이었으니까. 하지만 어 둠 때문에 신부의 얼굴을 볼 수 없었던 데스필드는 신부를 앞장서며 중얼거렸다.

“하긴 뭐, 교회는 신부님 당신 마음속에 있다며? 어디로 가도 무슨 상관이시겠어.”

데스필드는 몇 발자국 걸어갔다. 그러곤 갑자기 멈춰 섰다. 언젠가 이런 상황을 겪었던 것 같은 기분 속에 데스필드는 뒤를 돌아보았다.

파킨슨 신부는 제자리에 선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하쇼? 안 따라올 거요?”

“너 방금 뭐라고 그랬냐?”

“어? 마음 상하셨소? 길 잃은 목자 어쩌고 한 건 그냥 농담이었는걸.”

“젠장! 그것 말고 말이다!”

“응? 교회는 신부님 마음속에 있다는 거 말이오? 그건 신부님 당신이 직접 말한 거잖소.”

다음 순간 파킨슨 신부의 마음속에서 일어난 일은 신부 자신도 똑똑히 설명할 수 없었다. 하지만 무엇인가가 그의 마음속에서 일어났다. 파킨슨 신 부는 옷자락을 펄럭이게 만드는 밤바람도, 그를 바라보는 데스필드의 의심스러워하는 눈빛도 신경 쓰지 않은 채 그것에 파고 들었다.

그의 마음속에 일어난 일을 그런 대로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인 핸솔 추기경의 말을 빌려본다면, 파킨슨 신부의 용수철이 마침내 올바른 방 향을 잡았다고 말할 수 있다. 정확한 방향으로 놓인 용수철은 그 자신의 마음속의 교회를 향했다. 그러자 용수철의 반대쪽은 정확한 압력을 받기 시 작했다. 파킨슨 신부는 긴장과 흥분 속에서 물었다.

“내가………… 그렇게 말했었지?”

“지금 교리문답하쇼? 그렇다! 그 왜, 테리얼레이드 교회를 버렸을 때 그랬잖소.”

데스필드의 말은 다시 파킨슨 신부의 뇌리를 강하게 때리고 지나쳤다. 기절할 정도의 충격이었어, 이 자식아. 다음 순간 데스필드는 어둠 속에서 뭔 가가 움직인다는 기분과 지독한 불안감을 동시에 느꼈다. 뭐지?

“이놈! 축복받아라!”

퍽! 왠지 상쾌하게까지 느껴지는 소리와 함께 데스필드는 잔교 위로 나가떨어졌다. 데스필드는 자신의 볼을 움켜쥔 채 화도 못 내는 얼굴로 신부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파킨슨 신부 역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신의 주먹을 보다가 갑자기 이마를 딱 쳤다.

“아차! 착각했다. 아까 일을 생각했어. 축복은 이게 아니었지?”

“시, 신부님 당시 인!”

“미안. 미안하다고. 우하하하! 미안해, 으킬킬킬. 이놈, 정말 복받아………… 야! 어딜 도망가? 진짜 복받으란 말이었다고! 으헷헤헤헤!”

파킨슨 신부는 이제 배를 붙잡고 웃어대고 있었다. 고즈넉하고 약간 쓸쓸하기까지 했던 부두의 향취가 일순간에 사라지고 남은 건 미친 듯한 웃음 소리와 한 사내의 두통뿐이었다. 데스필드는 자신의 이마를 짚으며 거칠게 외쳤다.

“우, 씨! 본인한테 신부님 당신이 미치지 않았다는 걸 납득시키기 전엔 팔 길이 이상 가까이 오는 건 용납 안할 거요!”

“네놈 말, 네놈의 그 말 말이다. 끄하하하! 그 말이 맞았어! 맙소사, 주여! 저 악마의 사생아 놈에게 어떻게 그런 분별력을? 끄하!”

“젠장, 무슨 말을 말하는 거요!”

“난 이미 교회를 버렸어!”

도저히 예상할 수 없었던 대답을 들어버린 데스필드는 공포 속에서 입술을 떨었다. 맙소사. 평소부터 그런 끼가 있긴 했지만, 정말 미쳤던 거였군? 하긴 미치지 않았으면 테리얼레이드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신부질 못했겠지만, 보자, 다림에 정신병자 수용소가 있던가? 그러나 파킨슨 신부는 계속 외쳤다.

“맞았어. 난 이미 교회를 버렸었어! 경험자라구! 하지만 내가 버린 건 물질의 교회. 그건 교회가 아니야. 교회는, 그래, 자식아! 교회는 내 맘속에 있 어!”

파킨슨 신부는 희열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그는 자신이 진리를 찾았다고 믿었지만 핸솔 추기경이라면 그가 반발할 대상을 찾은 것이라고 말했을 것 이다. 그리고 핸솔 추기경이 알았다면 틀림없이 씁쓸해하고 심지어 당황했겠지만, 파킨슨 신부가 반발할 대상은 바로 공주를 죽이려는 ‘교회’였다. 그리고 파킨슨 신부에게 그것은 절대로 교회에 대한 반항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파킨슨 신부는 교회를 두 개로 분리하여 그것을 구분하는 데 성공했 던 것이다. 파킨슨 신부는 명랑하게 외쳤다.

“가자! 패스파인더, 안내해라! 공주님께 가는 거다!”

“어딜 간다고?”

흥분 속에서도 파킨슨 신부는 데스필드의 목소리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저 녀석, 왜 키 드레이번의 목소리로 말하는 거야?

“노스윈드!”

데스필드는 고함과 동시에 몸을 돌렸다. 어둠을 향해 휘둘러진 그의 대거는 갑자기 덜컥 멈춰 섰다. 파킨슨 신부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허공에 정지 한 데스필드의 대거를 보다가 그의 손목이 무엇인가에 의해 붙잡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파킨슨 신부가 데스필드의 팔 아래에서 칠흑 같은 옷 차림을 한 키 드레이번의 모습을 간신히 발견한 순간 키는 다른 손으로 데스필드의 턱을 올려쳤다. 데스필드는 졸도하면서 생각했다. 오늘은 매맞는 운수가 무더기로 겹친 날인가 보구나.

“이놈!”

파킨슨 신부는 오른손을 허리로 가져갔다. 그러나 키는 잠시도 기다리지 않았다. 키는 쓰러지는 데스필드의 손에서 대거를 나꿔채어 그대로 집어던 졌다. 대거는 빗나갔지만 신부는 순간 주춤거렸고, 그 동안 지체된 시간은 키에겐 충분했다. 멀리서 누군가 이 모습을 본다 하더라도 검은 옷차림을 한 키의 움직임을 보며 밤바람이 움직였겠거니 생각했을 것이다.

파킨슨 신부는 핸드건을 쥔 자신의 오른손을 덮쳐누르는 키의 왼손을 보았다. 선장의 손답게 큼직한 키의 손은 핸드건째로 파킨슨 신부의 손을 나꿔 챘다. 다음 순간 파킨슨 신부는 창피도 잊은 채 자지러지는 비명을 지르며 무릎을 꿇었다. 무지막지한 힘에 의해 그의 손이 핸드건째로 비틀어 올려 진 것이다. 키는 힘이 빠진 신부의 오른손을 간단히 비틀어 핸드건의 포구를 신부의 관자놀이에 가져다 대었다.

“손가락을 떨지 않도록 주의해.”

키의 침착한 목소리를 들으며 파킨슨 신부는 얼어붙었다. 오발을 두려워한 파킨슨 신부가 감히 반항할 생각을 못하는 사이에 키는 다른 손을 자신의 코트 속으로 집어넣었다. 키의 코트 안쪽으로부터 복수가 뽑혀나왔다. 키는 복수를 손에 든 채 나직하게 말했다.

“손을 놓겠다. 미동도 하지 마라.”

그리고 키는 파킨슨 신부의 손을 놓았다.

파킨슨 신부는 경악한 눈으로 키를 올려다보았다. 어쩌면 키는 스스로를 위험에 몰아넣은 것일지도 모른다. 파킨슨 신부는 자신이 손목을 비틀어 키 를 쏘는 것과 키의 손에 들린 복수가 그를 베는 시간 중 어느 것이 빠를지를 놓고 무서운 고민을 시작했다.

하지만 확신은 없었다. 파킨슨 신부가 서부 제일의 건맨이라면 키는 제국의 공적 1호였다. 그리고 파킨슨 신부가 알고 있는 것은 그것뿐, 그 외엔 가 능성이 따져볼 만한 근거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파킨슨 신부는 자신의 손으로 자기 관자놀이를 겨냥한 채 비참한 심정으로 키를 올려다보아야 했다. 똑같은 고민을 해볼 법도 하지만, 키는 아무런 의혹도 떠오르지 않은 차가운 얼굴로 파킨슨 신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파킨슨 신부의 갈등과 비참함이 극에 달했을 때 키의 입이 느닷없이 열렸다.

“당신 목소리는 너무 크더군. 멀리서도 알아챌 수 있었지.”

파킨슨 신부의 마음속에 다시 공포가 스며들었다. 키의 말 자체엔 아무런 위협도 들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파킨슨 신부는 그 냉랭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팔이 굳어버리는 것을 느끼며 자신의 육체가 기어코 자신의 의지를 배신해 버릴 것이라는 확신을 느꼈다. 내 팔은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난 덤 벙거리고 주춤거릴 것이고 키는 그런 나를 쉽게 베어버릴 것이다. 아마도 웃고 있을 것이다. 차갑게……………

“그럼, 조금 전 당신이 거론하던 레이디에 대해 이야기를 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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