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2권 – 8장 : 불은 바람을 부른다 – 4화
세실은 잠에서 깼다. 자신이 키의 어깨에 기대어 깜빡 졸았던 것을 깨달은 세실은 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캄캄한 어둠 속에서 키의 얼굴을 분간하 기는 어려웠다. 어둠 속에서 키가 말했다.
“일어났나?”
세실은 커다란 하품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리고 조금 후 세실은 놀란 눈으로 키를 바라보았다. 키의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나 때문에 일어난 모양이군.”
“당신 때문에?”
“조금 전 노래가 멎었다. 그래서 내가 움찔했지.”
세실은 재빨리 메인 마스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가까이 있는 키의 얼굴도 보이지 않았는데 메인 마스트가 보일 까닭은 없다. 왜 이렇게 어두운가 생각하던 세실은 달이 졌음을 깨달았다.
“지금이 몇 시쯤 됐지?”
“조금 있으면 해가 뜨겠지.”
“노래가 멎었다고?”
“그래.”
세실이 해가 뜨기 직전의 가장 어두운 시간이라 여겼을 때, 주위는 느닷없이 밝아졌다.
세실은 뻣뻣한 몸을 일으켰다. 물수리호의 갑판 위에 선원들의 모습이 검푸른 그림자로 떠올랐다. 이제 떠올랐나 싶을 때 이미 동쪽 하늘의 푸르름 은 서쪽까지 치달아 해가 지나갈 길을 미리 표시했다. 고집스런 새벽별들이 아직껏 반짝이고 있었지만 이미 봄의 아침은 거침없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물수리호의 메인 마스트 쪽만은 아직 어두웠다. 삭구들이 조금씩 제 색깔을 주장하고 있었고 바다에는 잔물결이 넘실거리고 있었지만 메인 마스트 쪽은 어두웠다. 세실은 싱잉 플로라의 모습은커녕 알버트 선장의 모습조차 보기 어려웠다.
첫 햇빛이 비춰질 때일 거야. 아무런 이유 없이 세실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때 그녀의 등뒤에서 키가 그 목소리로 새 날을 이끌어내듯이 말했다.
“해가 뜬다.”
광선은 세실을 쓰러뜨릴 듯이 뿜어져나왔다.
맙소사! 이게 아침 햇살인가? 말도 안 돼! 세실은 두 팔로 눈을 가리며 비틀거렸다. 수만 번의 아침을 겪었던 세실이었지만 이런 아침햇살은 한번도 경험하지 못했다. 아침 수십 개를 합쳐놓은 것 같은 아침이었다. 빛은 밝다기보다는 날카로웠고 느껴진 순간 이미 모든 사물 속에서 어둠을 증발시켜 버렸다. 그때 키의 커다란 손이 비틀거리는 세실의 어깨를 부축했다. 비아냥거림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심하시지, 할머니.”
“고맙구나, 꼬마야. 젠장, 뭐가 이래?”
“저게 리포밍이라는 건가.”
세실은 눈을 잔뜩 찡그린 채 위를 올려다보았다. 키의 턱은 밤새 돋아난 수염들의 그림자까지도 보일 정도로 밝았다. 하지만 키는 눈을 뜨고 있었다. “보고 있냐?”
“그렇다.”
“어떻게 놀라지도 않냐!”
키의 눈썹에서도 빛멍울이 아롱지고 있었다. 키는 메인 마스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난 이미 의지만으로 자기 모습을 바꿔버린 사내를 알고 있지. 그가 또다른 것의 모습을 바꿨다고 해서 크게 놀랄 일은 없을 것 같군.”
맞는 말이군. 세실은 힘들게 눈을 떠 앞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그 아침은 평화로운 봄날의 아침으로 바뀌어 있었다.
핸솔 추기경은 기막힌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파킨슨 신부는 지금껏 치료하던 병사에게 다시 질문했다.
“그럼, 그 다벨군은 어디로 갔을 것 같소?”
병사는 잘린 왼팔을 신부에게 내맡기고 있었다. 다행히도 잘리자마자 누군가가 불로 지져준 모양이다. 파킨슨 신부는 운이 퍽이나 좋았다고 생각했 지만 병사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기 어려울 것이다. 병사는 시무룩하게 말했다.
“글쎄요, 신부님. 반델 아니면 판도겠지요.”
파킨슨 신부는 고개를 돌렸다. 스베이 요새의 폐허를 보고 있던 핸솔 추기경 역시 고개를 돌렸고 잠시 그들의 시선이 서로 부딪혔다. 파킨슨 신부는 무의식중에 말했다.
“판도일 거요.”
병사는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가능성이 높겠지요. 판도가 열리면 투란까진 탄탄대로라 할 수 있으니까. 신부님께선 의외로 전략에 관심이 많으신가 보군요.”
그게 아니야. 파킨슨 신부는 고개를 다시 돌려 저편에 서 있는 데스필드를 바라보았다. 데스필드는 한가로운 태도로 스베이 기지의 폐허를 오락가락 하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뭐 건질 게 없나 찾는 도둑의 모습이었지만 무너진 성벽에 기대어 앉아 있던 스베이 기지의 부상병들은 제지하기도 귀찮다 는 듯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어쩌면 그들을 치료하는 신부의 동행이라서 건드리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파킨슨 신부는 병사의 붕대를 단단히 고쳐 매주었다.
“그럼 당신들은 어쩔 생각이오?”
“우리요? 곧 떠야지요. 움직일 수 있는 녀석들은 다 떠났고 이 친구들은 아직 움직이기 어렵기 때문에 남아 있었던 겁니다.”
“당신은?”
“저야 두 다리가 성하긴 하지만………… 친구들 때문에 남았죠.”
“부상병들을 왜 후송하지 않은 거죠?”
“후송이고 뭐고 할 겨를 없이 철저하게 박살났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적군을 막기 위해 움직일 수 있는 병력만 재빨리 이동시킨 것이고. 따라서 이 망가진 놈들이 스베이 주둔군인 셈이죠.”
병사는 자조의 웃음을 띄우며 몸을 일으켰다.
“감사합니다, 신부님. 의외로 솜씨가 좋으시네요. 어디의 신부님이시기에 이렇게 능숙하신지 궁금하군요.”
파킨슨 신부는 손을 닦으며 대답했다.
“테리얼레이드.”
탄성을 지르거나 고개를 끄덕이는 부상병들을 뒤로하고 파킨슨 신부는 핸솔 추기경에게 다 가갔다.
핸솔 추기경은 두 손을 허리 앞에 모은 채 파킨슨 신부에게 살짝 목례했다.
“저 병사의 말이 옳아요. 정말 훌륭한 솜씨요.”
“테리얼레이드의 형제 자매들이 연습을 많이 시켜줬으니까요. 그곳에선 ‘약간의 언쟁’은 대여섯 명쯤의 칼잡이가 칼침을 맞아 죽는다는 뜻이고 ‘원 만한 조절’이라는 건 암살이나 상대편 소굴에 대한 방화를 의미합니다.”
파킨슨 신부는 시큰둥한 어조로 대답하고는 데스필드를 돌아보았다. 데스필드는 아직까지도 스베이 기지의 잔해를 뒤적거리고 있었고 그 모습을 보 자 파킨슨 신부는 남아 있던 마지막 존경심마저 사라지는 것을 느껴야 했다. 결국 신부는 낮게 외쳤다.
“이 새매 같은 놈. 흉한 짓 그만두고 이리 와!”
데스필드는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걸어왔다. 데스필드가 입을 열기 전 파킨슨 신부가 먼저 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도대체 저 병사들이 보고 있는 마당에 뭘 하고 있는 거냐?”
“그럼 보지 않을 때 할까요, 신부님 당신?”
“닥쳐라, 이놈아. 네녀석의 신기한 재주로 전장을 피하게 해준 건 고맙다만 이런 짓은 보아줄 수가 없어.”
“이런 짓이라니, 무슨 짓 말이오, 신부님 당신?”
“구울 같은 짓 말이다!”
데스필드는 한숨을 쉬었다.
“헛소리 작작하쇼, 신부님 당신. 쓸 만한 건 이미 다 쓸어갔소. 당신이 말씀하시는 그 구울 같은 당신들이 말이오. 그 당신들은 행동이 빠르거든. 아, 그래. 병사 당신들이 가만히 있는 것 못 보셨소?”
파킨슨 신부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럼 넌 도대체 뭐한거냐?”
“구울 같은 짓.”
파킨슨 신부는 노기가 충천한 얼굴로 데스필드를 쏘아보았다. 데스필드는 낄낄 웃으며 손을 가로 저었다.
“시체벌레 같은 짓을 하려고 한 건 아니니 신경 쓰지 마쇼. 본인은 다벨 당신들의 소지품이 좀 보고 싶었거든. 확인할 것이 좀 있어서 말이오.”
그때 성벽에 기대어 앉아 있던 동료에게로 돌아가려던 왼팔이 잘린 병사가 데스필드를 바라보았다.
“다벨의 물건이 보고 싶다고 하셨소?”
“그래요. 뭐 있소?”
병사는 자신의 검집을 풀었다. 한 손만 사용하는 힘든 동작으로 검집을 풀어낸 병사는 그것을 데스필드에게 던졌다.
“내 검은 내 왼손하고 같이 떠나갔소. 왼손잡이였거든. 그래서 전쟁터에서 그걸 주워 가졌소. 당신이 말하는 다벨의 물건이지.”
데스필드는 동정의 의미를 담아 병사에게 고개를 숙여보인 후 검집을 살폈다. 파킨슨 신부와 핸솔 추기경 역시 호기심을 느끼곤 그에게 다가왔다. 대장장이와 같은 눈으로 검집과 검을 면밀히 살피던 데스필드는 검집을 다시 던져주려다가 멈칫했다. 데스필드는 병사에게 걸어가 직접 검집을 채워 주고는 씩 웃었다. 병사는 역시 웃으며 말했다.
“록소나?”
“동감이오. 감탄했는데.”
“별말을. 그럼.”
병사는 오른팔만 흔드는 불안정한 모습으로 걸어갔다. 성벽에 기댄 채 햇살을 쬐고 있던 그의 동료들은 옆으로 조금씩 움직여 병사의 자리를 내주었 다. 물끄러미 그 모습을 보던 데스필드는 기다리고 있던 성직자들에게로 돌아왔다.
“불쌍한 당신들.”
데스필드는 푸념처럼 말했다. 신부와 추기경은 그런 패스파인더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한줌 햇볕만으로 행복할 수 있는 소박한 당신들이 왜 저런 비참한 꼴을 당해야 하는지. 제길.”
“……..록소나는 무슨 말이냐, 데스필드?”
데스필드는 배낭을 추어올리며 말했다.
“다벨 산 강철이 맞는데 형식은 록소나 식이오. 전에도 그런 걸 봐서 확인하고 싶었는데 똑같더군. 롱레인저 당신들 기억나시오?”
기억을 떠올린 파킨슨 신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핸솔 추기경의 얼굴이 약간 굳었다.
“데스필드 군. 그렇다면 당신은 다벨과 록소나 사이에 어떤 교류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거요?”
“더러운 협잡의 냄새가 난다는 것은 확실히 알겠소. 퇘!”
땅바닥에 침을 뱉은 데스필드는 북쪽 하늘을 쏘아보았다.
“똑똑하고 잘난 당신들이 원대하고 무시무시한 계획을 세우지요. 그런 거창한 계획들이 부딪힐 때 햇볕 쬐기를 좋아하는 당신들이 피를 흘리고. 하 지만 그 소박한 당신들이 정말 아무것도 모를까? 흥. 다 알 겁니다, 다. 그런 당신들도 다 노련하고 긍지 있는 사내들이니까요.”
“맞는 말이오. 데스필드 군.”
핸솔 추기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데스필드는 아직 말을 끝낸 것이 아니었다.
“저 당신을 보시오. 왼팔이 잘렸지. 죽을 때까지 저렇게 살아야 할 거요. 그리고 당신은 어쩌다가 그렇게 됐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가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자랑거리 삼아 말하며 살겠지. 멍청해 보이고 초라해 보이겠지요? 하지만 당신의 속을 볼까요. 당신은 당신의 팔을 가져간 것이 록소나 형식으로 칼 끝 처리가 된 다벨 산 강철검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소. 따라서 당신은 다벨이 동쪽의 안전을 보장함과 동 시에 팔라레온과의 세력비를 증가시키기 위해 록소나와 손잡았고, 그런 야합에 의해 당신의 팔이 잘렸다는 것도 알고 있소. 하지만 차마 창피스러워 서 그렇게 말하진 않을 거요.”
핸솔 추기경은 잠시 감탄하며 말했다.
“창피스럽다고?”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지도자들의 야합 때문에 이렇게 되었노라고 말하는 건 너무 창피스럽지요.”
“적국의 지도자들이잖소.”
“헷! 적국이니 뭐니 하는 건 그런 지도자들의 머릿속에나 있는 거요. 저 당신에겐 다벨의 당신이든 록소나의 당신이든 똑같은 사람이요. 친척이나 친구일 수도 있소. 예하 당신께선 친구의 부모를 욕하실 수 있으실까요? 친구의 가슴을 아프게 할 텐데?”
핸솔 추기경은 입을 다물었다. 데스필드는 성벽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저 당신은 모두 다 알지만 그저 묵묵히 말할 거요. 나라를 위해 싸우다 이렇게 되었노라고. 그것으로 만족해하고, 남는 시간엔 햇볕이나 실 컷 쬘 거요. 그것이 긍지 있는 당신이지.”
데스필드는 걸어갈 듯이 발걸음을 뗐다. 하지만 두어 발자국 걸어간 데스필드는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하지만 세상엔 그런 긍지 있는 당신들이 드물지요. 지도자들 중에는 하나도 없고. 갑시다!”
데스필드는 무너진 스베이 요새의 외성벽의 잔해를 피하며 걸어갔다. 파킨슨 신부와 핸솔 추기경은 각자 부상병들에게 축복과 무사 귀환을 바란다고 말해 주었고 병사들은 희미한 미소를 띄웠다. 그리고 신부와 추기경은 걸음을 재게 놀려 데스필드를 따라갔다. 핸솔 추기경은 데스필드의 옆얼굴 을 향해 질문했다.
“다음엔 어디로 갈 거요, 데스필드 군? 아, 이제 난 당신 뒤를 절대 벗어나지 않을 테지만, 궁금해서 말이오.”
“록소나를 최대한 빨리 가로질러서, 안팔로 계곡입니다. 예하 당신.”
파킨슨 신부는 신음처럼 말했다. “강행군이 되겠군.”
“원한다면 도스 계곡으로 패스를 설정할 수도 있수다, 신부님 당신. 그게 더 빠르지.”
“농담 마라, 자식아.”
데스필드는 낄낄거리며 걸어갔다. 추기경은 뒤로 조금 뒤쳐져서는 신부에게 속삭였다.
“파킨슨 신부. 저 친구는 지혜의 보물상자 같은 친구군요.”
“예하?”
“한마디씩 툭툭 던지는 말들이 예사롭지 않소. 조금 전 지나가는 말처럼 다벨과 록소나의 밀약을 짚어낸 것 신부님도 봤지요? 억지로 시작된 도피행 이지만, 난 이 여행을 즐기게 될 것 같은데. 아, 어차피 저 패스파인더 친구가 패스를 그은 이상 따라가는 것이 현명한 일이겠지만, 난 원래는 적당한 교회에서 발을 뺄까 생각하고 있었소. 하지만 난 이제 저 친구를 더 관찰하기 위해서라도 펠라론까지 저 친구의 패스를 따라가야겠소.”
파킨슨 신부는 조용히 웃었다.
“역시 학자이십니다.”
5월 17일. 휘리 노이에스가 이끄는 다벨군은 투란에 입성했다. 투란 방어전은 치열하기로는 다른 어떤 전쟁에도 뒤지지 않는 전투였지만 전체 전개 는 전사학자들의 흥미를 끌 수 없는 단순한 모습으로 전개되었다. 공방의 수위는 거의 유사했으나, 한쪽에서는 이길 생각이 있었고 반대쪽에서는 이 겨야 될지 져야 될지를 몰랐다. 그리고 그 작은 차이가 결국 전투의 승패를 결정했다.
하팔 장군의 죽음은 투란 쪽 사람들을 극히 혼란시켰다. 팔라레온의 이상주의자와 애국자들은 하팔 장군이 배신했다는(!) 사실에 좌절했다. 그리고 하팔 장군의 배신이 죽음으로 보답받았다는 사실은 내부 반동 세력이 될 수 있었던 자들을 엉거주춤하게 만들었다. 휘리 노이에스의 포고문과 마찬 가지로, 하팔 장군의 처형은 팔라레온으로 하여금 상대방의 의중을 종잡을 수 없게 만드는 효과를 충분히 발휘했다.
그들은 휘리 노이에스가 어떤 성향의 인물인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하팔 장군 같은 이마저도 배신시킬 수 있는 음험한 책략가인가? 아니면 배신을 용서하지 않는 순수주의자인가? 전자였다면 투란 궁에서는 대규모의 배신이 발생했을 것이고 후자였다면 애국자들이 대량 발생했을 것이다. 하지만 휘리 노이에스는 전자로도, 후자로도 판단될 수 없었다. 그래서 전투는 김빠지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로드 데자크는 달아나다가 체포되었고 이후 생 사가 불명해졌다.
투란 낙성 후 나흘 뒤인 5월 21일. 신성 펠라론은 공식적으로 다벨에 대한 성무 금지 처분을 발표했다. 제국 전역의 수도와 수도원, 교회에 배포된 포고문은 그 내용이나 숫자를 통해 퓨아리스 4세가 다벨의 팔라레온 침략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듯했다. 포고문 전체를 통 틀어 ‘야비한’, ‘몰지각한’, ‘규탄받아 마땅할’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지 않은 문장이 없을 정도였다. ‘악마적’이라는 말이 들어가 있지 않은 것은 거 의 기적처럼 보였다. 만일 그 단어가 사용되었다면 그것은 파문, 혹은 이단 선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한 준엄한 내용의 포고문이 5,000매라 는 막대한 숫자로 인쇄되어 제국 전역에 배포된 것이다. 팔라레온이 반 달 만에 함락된 것에 놀라고 있던 제국은 법황청의 이런 맹렬한 반응에 더욱 놀랐다. 일부에선 ‘법황이 왜 저렇게 핏대를 올리는 거지? 그의 정부가 팔라레온의 미녀였나?” 라는 관측이 나올 정도였지만 법황에겐 정부가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므로 그건 농담일 뿐이었다.
그러나 다케온에 이르러서는 그런 농담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들에게 그것은 이웃에서 일어난 재난이었다. 메르데린 공작의 의중을 몰라서 당 황해하던 그들은 법황의 맹렬한 반응에 더욱 어리둥절해졌다. 다케온의 정보부원들이 다양한 심인성 질환에 신음하고 있는 가운데 다케온인들은 한 결같은 질문을 서로에게 던져대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표면적으론 단순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한 나라가 이웃나라를 정복한 사건은 슬프다거나 불행한 일이라고 말할 수는 있어도 신선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정황은 누구의 눈에도 이상해 보였고 ‘알지 못하는 무엇’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 또한 누구의 눈에도 자명했다. 하지만 ‘알지 못하는 무엇’이 과연 무엇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심지어 그들은 메르데린 공작에게 정복을 축하한다고 해야 할지 그 행위를 규탄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다케온 백작 네그리파 다케온은 고심 끝에 일단 규탄하기로 결정했다. 그것이 보편적인 도덕관에도 일치하고 법황의 의도와도 일치하는 일 이었기 때문이다. 네그리파 다케온 백작은 자신이 내린 결정에 만족하기로 했다.
그리고 휘리 노이에스도 다케온 백작의 결정에 만족했다.
5월 32일. 다케온 백작은 휘리 노이에스의 서명이 든 선전포고문을 받아들고 아연해해야 했다. 그는 그것이 선전포고문인지조차 잘 알 수 없었다. 휘리 노이에스가 보낸 서신에는 ‘전쟁’이나 ‘항복’, 혹은 ‘죽음’ 등의 단어는 하나도 들어 있지 않았다. 실상 그런 단어가 들어갈 수도 없는 내용이었 다.
‘귀국의 다이아몬드 광산에 항상 행운이 있기를. 그런데 근래에 들어 나는 귀국의 광산에서 퍽이나 불미스러운 일이 있음을 전해 듣고 매우 놀라고 불쾌해하고 있소. 귀국의 광산에서는 채굴전 동남동녀들로 하여금 제사를 올리게 한다는데, 이는 성스러운 교회가 용서하지 않는 이교 행위임이 분 명하오. 나는 귀국의 이런 행위에 대해 크게 슬퍼하오.’
휘리는 짐짓 놀랐다는 듯이 표현했지만 이것은 절대로 뉴스가 아니다. 다이아몬드 광산이 아니라 다른 어떤 광산에서도 행하여지는 속신으로 광맥 을 추적하기 전 어린 소년, 소녀들로 하여금 광맥으로 추정되는 위치에 과자를 던지게 하는 작은 미신을 말한다. 이것은 심지어 다벨의 철광산에서도 행하여진다. 교회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광부들만의 작은 풍습에 대해 개탄스럽다는 듯이 적어보낸 휘리의 서신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알 수 있 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어느샌가 제국 곳곳에서는 ‘무슨 내용인지 모를 정도로 악필이다’라는 말을 ‘휘리의 서신 같다’고 표현하는 일이 발생하기 시 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