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2권 – 9장 : 구름이 고요속을 흐를 때 – 1화
오스발은 잠에서 깨어났다.
그가 머물고 있는 오두막은 원래 산장의 다른 하인들이 쓰던 곳이다. 하지만 피나드 미망인은 가정 경제를 긴축시켜야 할 많은 필요성을 가지고 있 었기에 하인을 대부분 해고시켰다. 올리브 수확철이 되거나 밀 수확철이 된다면 많은 인부들이 몰려와 이 별채를 땀 냄새로 채우고 피나드 부인의 하 녀들을 설레게 할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텅 비고 약간 을씨년스러운 건물일 뿐이다. 그래서 오스발은 일어났을 때 넓은 침상 가운데 외롭게 앉아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머리를 긁적거리던 오스발은 자신이 왜 깨어났는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잠시 후 오스발은 바지와 셔츠를 꿰어입고는 손에는 숄을 집어든 다음 오두막의 문을 열고 나섰다.
끝없는 밀밭에 달빛이 떨어지고 있었다.
멀어지는 검은 산 아래 밀밭은 너울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검은색 하늘 속에 빠진 별들도 침묵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고 바람은 고요한 계곡, 밀 밭만이 신비스러울 정도로 빛나며 파도치고 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흰색의 꽃은, 계곡 위쪽의 풍차였다. 오늘 밤 풍차의 날개는 바람 대신 달빛으로 도는 것 같았다. 사월 정도로 희게 빛나는 날개들은 멈춰 있는 것이 아니라 너무 느리게 돌고 있는 듯했다.
오두막 앞에 서서 밀밭을 바라보던 오스발은 은빛 밀밭 가운데 서 있는 사람을 보았다.
넓은 밀밭 가운데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놓쳐버릴 작은 점으로 서 있는 여인은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밀밭에 떨어지는 달빛들 중에서 그녀 에 이르른 달빛이 더 희게 빛나고 있는 것 같았다.
여인이 고개를 돌렸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오스발은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했다. 오스발은 발걸음을 떼었다. 밀밭은 소리 없이 갈라졌고 오스발은 강물 위의 월광을 헤치는 낙엽처럼 밀밭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파르스름한 밀밭 속에 허리까지 잠겨 있는 여인은 다가오는 그를 보며 고요히 서 있었다.
오스발은 여인 앞에 섰다. 여인은 차가워진 자신의 팔을 끌어안은 모습으로 오스발을 바라보았다. 밀의 사스락거림은 조용한 파도 소리 같았다. 오 스발은 여인의 오른쪽 눈 주위로 달빛이 모여드는 것을 보았다. 빠르게 모여든 달빛이 한 점에 집중되었을 때, 투명한 눈물이 여인의 차가운 뺨 위를 미끄러져 내렸다.
“집에 가고 싶어요.”
그녀의 입술이 말했는지, 아니면 그녀의 입술 주위를 감돌던 바람이 말했는지 오스발은 잘 알 수 없었다. 율리아나는 조금 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오 스발을 바라보고 있기만 했다. 오스발은 손을 뻗어 공주의 어깨를 살짝 붙잡았다.
오스발이 먼저 끌어당겼는지, 아니면 율리아나가 먼저 걸어왔는지는 확실치 않았다. 오스발은 자신의 가슴 앞에 서 있는 공주를 향해 미소 지으며 그녀의 어깨에 숄을 둘러주었다. 차가운 숄이 목 뒤의 맨살 위로 미끄러지는 느낌에 율리아나는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그리고 율리아나와 오스발은 나란히 밀밭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사수좌 멜바골은 서쪽을 겨냥한 채 발사되지 않는 그 화살 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밀밭 위에 부서지는 달빛들이 휘영청하다.
본관에 도달한 공주는 오스발을 돌아보았다. 오스발은 가만히 선 채 기다리고 있었다. 율리아나는 고개를 옆으로 약간 기울인 채 마치 이상하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았지만 오스발은 그저 미소 지었다.
잠시 후, 율리아나의 입매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율리아나는 문을 열고 들어섰다. 오스발은 그 문을 조용히 닫은 다음, 하품을 하며 오두막을 향해 걸었다.
질풍호의 선교에는 긴의자가 마련되어 있었다. 바람 몇 올이 갑판 위를 스쳤을 때 긴의자에 누워 햇살을 쬐고 있던 트로포스는 다리를 덮고 있던 모 포를 위로 조금 끌어올렸다. 쇠약해진 몸은 봄햇살 속에서도 한기를 느끼고 있었다. 질풍호의 선원들은 안쓰럽다는 듯이 그들의 선장을 바라보며 되 도록 소음을 내지 않으며 작업하려 애썼다. 그때 조용히 밧줄을 감고 있던 젊은 해적은 자신을 바라보는 선장의 눈길을 느꼈다.
“스우. 내 지팡이를 가져오너라.”
“예? 마법 쓰시려고요?”
“그건 아냐.”
젊은 해적 스우는 경쾌한 동작으로 일어서 달려갔다. 잠시 후 스우는 지팡이를 들고 와 공손히 내밀었다. 하지만 트로포스는 지팡이를 받아드는 대 신 약간 얼떨떨해하는 눈으로 스우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선장님?”
“네녀석도 그렇고, 다른 놈들도 그 지팡이를 겁내지 않는군?”
스우는 피식 웃었다. 세실이 그 지팡이로 해적들의 머리를 두드려대기 시작한 이후 스우나 다른 해적들이 그 지팡이에 대해 가지고 있던 불안은 거 의 사라졌다. 스우에게 설명을 들은 트로포스는 눈살을 조금 찌푸리며 지팡이를 받아들었다.
“이제 됐으니 가서 일 보거라.”
스우가 달려가고 나서 트로포스는 지팡이를 자신의 배 위에 내려놓고는 그것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곧고 묵직하며 특색 없는 지팡이를 보던 트로포스의 손이 자신의 왼손으로 옮겨졌다. 트로포스는 마치 햇살을 가리려는 것처럼 손을 들어올려서는 그 손등을 바라보았다. 시계 문자판의 1에서 10까지의 위치에서 원을 그리고 있는 열 개의 점을 보며 트로포스는 턱을 조금 떨었다.
잠시 후 트로포스는 담백하게 미소 지었다.
결국은 키 선장님을 구했지. 그걸로 됐어. 씁쓸함이 아주 없지는 않았기에 트로포스는 오른손으로 열 번째 점을 살짝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트로포 스는 자신이 정신을 잃은 사이에 발생한 열 번째 점에 대해 만족하기로 했다. 트로포스는 두 손으로 지팡이를 쥐고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오후가 저녁이 되어가는 그 미묘한 순간 동안 잠시 졸았다.
그러나 오랫동안 쉴 형편은 아니었다. 졸음에서 깬 트로포스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왜 잠에서 깼더라? 아무 소리도 없었는데. 그 러나 선교를 올라오는 세실의 모습을 보며 트로포스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렇게 사람 혐오스럽다는 듯이 쳐다보지 마라, 트로포스. 약간 주의를 끌어봤는데 효과가 놀라울 정도군. 민감한데?”
트로포스는 대답 대신 조금 전 세실이 했던 행동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세실은 주춤하며 뒤로 물러났고 그런 세실을 향해 트로포스는 사납게 말했 다.
“마법장 뒤로 물려, 세실.”
“너도 좀 물려주지 그래? 그 표정을 보아하니 맨몸으로 그 안쪽으로 들어가고 싶진 않군.”
“가까이 오지 않으면 될 거 아냐. 거기서 말하라구.”
“트로포스, 트로포스, 이러지 말라구. 네가 한심한 얼굴로 졸도하고 있는 동안 네 지배력을 북돋아주고 네 주위의 마법장을 유지시켜준 게 누군지 내 입으로 말하기는 싫어.”
트로포스는 인상을 찌푸렸지만 자신 주위의 마법장에 대한 지배를 조심스럽게 약화시켰다. 세실은 씩 웃고는 역시 마법장을 약화시키며 트로포스에 게 다가섰다.
세실은 약간의 흥분을 느꼈다. 마법사들의 세련된 예의 ᅳ 동시에 결투이며, 알력이며, 일종의 무용이다 를 구사하는 것은 퍽 오래간만의 일이었 다. 두 마법사가 스스로의 마법장을 겸손하게 후퇴시키는, 하지만 상대방의 후퇴 정도를 측정하며 자신의 마법장을 최대한 축적시켜 결국은 양자간 의 거리의 중간점에 마법장의 경계를 일치시키는 이 행위는 인간의 다른 행위에서는 유사점을 찾아볼 수 없는 마법사들만의 독특한 인사법이다. 무 사들의 결투가 거리를 조절한다는 점에서는 이와 비슷할지 모르나 목적이 정반대이기 때문에 같다고는 볼 수 없다. 무사들은 결국 자신이 거리를 지배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마법사들의 이 인사는 서로가 상대방에게 지배역을 내어주며 결국 가까워지는 것……
“잘하는데.”
세실이 툭 던진 한마디에 트로포스의 집중이 깨졌다. 마법장의 경계가 자신에게로 빠르게 밀려들어오는 것을 느끼며 트로포스는 분노에 찬 신음을 내뱉었다. 세실은 빙긋 웃으며 자신의 마법장을 조금 물렸다.
세실은 트로포스의 곁에 섰다.
마법사가 아닌 사람은 아무도 알 수 없었지만 평온하게 서 있는 두 마법사의 모습은 사실 각자를 중심으로 반경 1피트까지 억압된 마법장들이 거칠 게 부딪히고 있는 전장이었다. 세실의 경우 자신의 마법장을 더 축소시키며 다가갈 자신이 있었지만, 쇠약해진 트로포스를 고려해서 모험은 하지 않 기로 했다.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기분 어때?”
트로포스는 한쪽 눈으로 세실을 노려보았지만 그 말엔 대답하지 않았다.
“용건이 뭐야?”
“그 지팡이.”
“이게 왜?”
“부러뜨리자. 그거.”
트로포스의 손이 지팡이를 꽉 움켜쥐었다. 세실은 차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서 있었고, 트로포스는 이를 부드득 갈며 말했다.
“그런 말 같잖은 소릴………날 마법사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미인 거냐?”
“그 지팡이의 소유자가 네가 아닌 다른 마법사였더라도 같은 말을 했을 거야.”
“닥치고 꺼져. 듣기 싫어.”
“후회할 텐데.”
“후회는 무슨! 빌어먹을 !”
“그거 어디서 얻었어?”
“뭐라고?”
“네 사부가 깎아주었나? 아니면 스스로 만들었나? 그게 아니라면 다른 마법사에게 뺏었나?”
“대답할 의무가 없어.”
“좋을 대로 하라고. 하지만 내가 추측하는 건 막을 수 없겠지. 난 레보스호에 있던 백과사전을 뒤져 그 지팡이의 내력에 대해 조사해 봤어.”
트로포스는 아차 하는 표정이었다. 세실은 그 표정을 보며 웃었다.
“학구열이 부족했던 모양이더군. 트로포스 선장. 조사 안해 봤지? 도서 공포증은 아마 어릴 때부터의 성향이었을 테고, 그러니 지금 해적질을 하고 있는 것이겠지. 하하하.”
트로포스는 씩씩거리다가 대답했다.
“관심없어.”
“어린애같이 굴지 마. 그 얼굴로 그러면 귀엽기는커녕 소름 돋는다.”
•뭘 알아냈지?”
“백과사전으론 한계가 있지. 전문 서적이 아니니까. 추측성 조사밖에 되지 않겠지만, 일단 내 조사가 정확하다면, 그건 세야의 아카나야.”
트로포스의 얼굴을 본 세실은 그가 그 이름을 처음 들어보았음을 짐작했다. 트로포스는 입 속으로 그 이름을 한번 중얼거려보았다.
“또 뭘 찾았지?”
“없는데.”
“뭐?”
“세야의 아카나. 그걸로 끝이야. 그 지팡이에 대해 알려진 건 그 이름뿐이야. 세야가 뭔지도 모르겠는걸. 누구의 이름인지, 아니면 어딘가의 지명인 지, 다른 의미가 있는 건지. 그리고 아카나가 뭘 뜻하는 건지도 모르겠어.”
트로포스는 비웃듯이 코를 실룩거렸다.
“무슨 조사가 그래?”
“아직 끝난 건 아냐. 백과사전으로 알아낸 건 거기까지고 나 스스로 추리한 것도 있으니까.”
“뭐가 있는데?”
“처음부터 가지. 네녀석이 졸도하고 있는 동안 난 치료 목적으로 네 외부 마법장을 지우려 시도했지. 하지만 지울 수가 없었어. 기가 막힐 노릇이더 군. 결국 키 드레이번이 가지고 있는 복수를 동원해서야 간신히 네 마법장을 지우고 내부 마법장을 이끌어낼 수 있었지. 일단 그렇게 처치는 해두었지만 그 이해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선 계속 생각했었지. 졸도한 마법사의 마법장을 왜 지울 수 없었다는 말인가.”
“내 장기 지배력이.”
“관둬, 친구. 자기가 천재라고 주장하고 싶다면 그 날 그 교회 앞의 일부터 설명해 봐. 아니, 지금의 이 상황부터 설명해 보시지. 너와 나의 순간 지 배력은 비슷해. 자신이 장기 지배력만 괴상하게 강하다고 주장할 건가?”
트로포스는 그렇게 주장하지 않았다. 대신 찡그린 한쪽 눈으로 세실을 바라보았다. 세실은 싱긋 웃고는 트로포스의 배 위에 놓인 지팡이를 바라보았 다.
“그리고 알다시피, 나는 그걸 써봤어.”
지팡이 위에 얹혀 있던 트로포스의 왼손이 마치 가상의 상대방의 턱을 올려칠 듯 꿈틀거렸다. 세실은 그 반응을 보지 못한 채 자신의 감상을 토로했 다.
“솔직히, 속옷 적실 지경이더라. 내 마법장이 얼마나 광대해졌는지 아직도 계산이 잘 안 될 지경이야. 어쨌든 사방 수십 마일 이내의 바람이란 바람 은 다 끌어올 수 있더라고. 그제서야 깨달았지. 통념을 뛰어넘고 대단한 발상 전환을 이루어내었다고 자평하고 싶지만…………… 이런 주장을 해보겠어. 너 를 치료하려 했던 날 방해한 건, 그 지팡이의 장기 지배력이었어.”
“지팡이가?”
“지팡이가.”
“당신 마법사 맞나? 지팡이가 마법장을 지배한다고? 지팡이가 핵(核)이 된다고?”
“내 말을 정리해 주고 싶다면 이렇게 말해. ‘세야의 아카나’는 마법장을 지배하며, 그 점에서 미루어볼 때 세야의 아카나’는 핵이 될 수 있다고. 그 리고 내가 한마디 덧붙이자면, 그 지팡이는 살아 있어.”
트로포스는 모포 위에 놓여 있는 지팡이를 바라보았다. 이게 살아 있다고?
“역설에 역설을 계속 붙여서 그따위 허무맹랑한 결론을 이끌어내곤………… 같은 마법사끼리 지팡이를 부러뜨리라느니 어쩌니 하는 망발을 한단 말이 지.”
“그렇게 말했어.”
“하나도 받아들일 수 없어.”
“그럼 내 말이 아닌 백과사전에서 나온 말이라도 받아들여. 그건 세야의 아카나야.”
“그렇다면? 이게 당신 말대로 세야의 아카나인지 뭔지라면?”
“너무 위험해.”
“젠장, 그 이름밖에 모른다고 했잖아! 다른 건 알아내지도 못했다면서. 그런데 뭐가 위험하다는 거야?”
“이름밖에 모른다는 점이 위험해.”
“나와 모순 어법 경쟁을 하고 싶었던 것이었다면 미리 말하지 그랬어?”
“그러니까, 이걸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흐음. 그 지팡이는 분명히 강력해. 그리고 그런 것은 키 드레이번의 복수가 그렇듯이 당연히 유명해야 돼. 그런데 전혀 유명하지 않아. 수상하다는 기분이 전혀 안 드나, 트로포스? 왜 백과사전엔 복수에 대해서는 그렇게 많이 나오는데 세야의 아카나에 대 해서는 그 이름 하나만 간신히 나오는 거지?”
“가능한 대답은 엄청나게 많아. 당신의 사전 독해 능력이 엉망이었다거나 백과사전 편찬자들이 마법사에 대해서는 약간 소홀했다거나, 백과사전이 라는 것은 어차피 보다 많은 사람들의 요구에 부응하는 책이지 특수한 몇몇 사람들의 요구에 부응하는 책은 아냐.”
트로포스에게 침착함이 돌아오며 그는 점점 더 완고해지고 치밀해졌다. 세실은 자신이 했던 말을 몇 번씩이나 반복하며 지팡이를 버릴 것을 종용했 지만 트로포스는 점점 더 귀찮아할 뿐이었다. 더군다나 세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증거들은 너무 빈약한 것이고 그에 비해 마법사에게 그의 지팡이 를 부러뜨리라고 요구하는 것은 너무 거대한 일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실은 오히려 트로포스에게 존경심을 느낄 정도였다. 트로포 스는 만일 그녀 자신이라면 이런 경우, 빈약한 논거를 대며 그녀의 지팡이를 부러뜨리라고 말하는 작자를 만났을 경우 상대방에게 저질러버렸을 일 의 50분의 1도 저지르지 않았다. 세실은 무슨 일이든 당할 각오를 하고 찾아왔었지만 침착을 되찾은 트로포스는 그저 귀찮아하고 화를 조금 내었을 뿐이었다. 결국 세실은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이만. 다음에 다시 오지.”
“오지 마. 제길.”
“이 배엔 선장을 위시하여 그 아래까지 비뚤어진 애정 표현을 하는 친구가 너무 많군. 다시 방문해 주시면 영광이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법을 배워 봐. 아, 가기 전에 묻겠는데, 네 손등의 점 말이야, 그거 아홉 개 아니었나?”
“….열 개였어. 그리고 내 얼굴로 말할 것 같으면, 당신이 빨리 떠나지 않으면 더 엉망이 될 거야. 제발 떠나줘.”
바탈리언 남작은 문을 열고 들어서며 말했다.
“라트랑으로 결정했다.”
의자에 앉아서 오스발에게 책을 읽어주고 있던 유리는 그녀가 빌릴 수 있었던 피나드 부인의 소장 도서는 요리책과 장정이 화려한 로맨스 소설 들이 대부분이었고 그래서 유리는 로맨스 소설의 끔찍한 대사들에 지겨워하고 곤혹스러워하던 참이었다. 그리고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오스발 역시 끔찍해하고 있었다 바탈리언 남작을 돌아보았다.
“예? 라트랑이오?”
“그래. 우리의 다음 목적지 말이야. 마을 쪽에서 들었는데, 그쪽으로 여행가는 사람들이 있어. 동행해도 좋다는 동의를 받았지. 여기서는 좀 먼 길이 긴 하지만 아무래도 그쪽의 항구엔 카밀카르 배도 많이 들어오고.” 바탈리언 남작은 한쪽 눈을 찡긋 했다. “게다가 좋은 점이 하나 더 있지.”
유리는 거의 비명처럼 외쳤다. “룸 언니!”
“룸? 아아, 바다의 공주님을 그렇게 부르나 보지?”
유리는 책을 들어 입을 가리며 환하게 웃었다.
“예! 그렇게 불러요. 우아아! 룸 언니를 보다니!”
바닥에 앉아 있던 오스발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눈으로 바탈리언 남작과 율리아나 공주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유리는 환한 얼굴로 오스발에게 설 명했다.
“발, 발, 라트랑에는 우리 언니가 살고 있어요. 3년 전에 거기로 시집갔어요. 와앗! 그럼 나 3년 만에 룸 언니를 보게 되는 거예요!”
오스발은 고개를 끄덕이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유리의 언니라면 아마도 카밀카르의 일공주나 이공주일 것일 테고 그럼 당연히 유력자의 부인일 테니까. 유리는 즐거워 견딜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탈리언 남작을 바라보았다.
“난 찬성이에요. 언제 떠나죠?”
“내일이야. 오늘 저녁엔 피나드 부인께 인사드려야지. 그럼 준비를 하거라.”
바탈리언 남작은 다시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그가 나가고 나자 유리는 발그레해진 볼을 만지작거렸고 오스발은 미소를 지었다.
“유리 님은 언니를 무척 따르셨던 모양이군요.”
“예. 더군다나 드디어 만나게 되는 가족이 그렇게 보고 싶었던 사람이라니, 나 정말 흥분돼요. 룸 언니, 그러니까 이루미나 언니는 나한테 정말 잘해 줬어요. 아아! 룸 언니라니! 매일 납치당하고 싶어졌어요!”
오스발은 그건 좀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그런데, 바탈리언 남작께서는 바다의 공주님이라고 하시던데……”
“예? 아아, 그건 둘째 언니의 별명이에요.”
“이공주님이십니까?”
“아, 그렇지요. 하지만 사실 언니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룸 언니뿐이에요. 큰언니는 거의 어머니 같았거든요.”
“터울이 많았던 모양이군요.”
“그렇기도 하지만, 어마마마가 일찍 돌아가셔서 그랬을 거예요. 그래서 큰언니는 어릴 때부터 폰스파 궁의 안주인처럼 행동했어야 했거든요. 큰언 니도 사실 다정한 성격이지만 일부러 엄격해지려고 노력했거든요. 그래서 어린 유리는 큰언니를 보며 겁먹을 때도 있었지요. 하지만 룸 언니는………..”
즐겁게 재잘거리던 유리의 눈동자는 마치 꿈꾸는 소녀 같은 빛을 띄었다. 그 모습을 보던 오스발은 당분간은 듣기 싫은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되겠 다고 생각하며 좋아했다. 그랬기에, 잠시 후 유리의 얼굴이 굳어지자 오스발은 다시 책을 읽는 줄 알고 찔끔했다. 하지만 유리는 책을 들어올리지는 않았다. 오스발은 그녀의 얼굴에 불안이 떠오르는 것을 보곤 약간 놀랐다.
“유리 님?”
“어, 예?”
“불안해 보이는 얼굴입니다만. 무슨 안 좋은 생각이라도 하셨습니까?”
유리는 오스발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곧 힘없이 웃었다.
“아, 말도 되지 않는 생각을 했어요.”
“무슨 생각입니까?”
유리는 대답을 회피할 듯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오스발은 차분히 기다렸다. 유리는 책을 손에 쥔 채 의자에서 일어났다. 창가 쪽으로 걸어간 유 리는 멀리 보이는 피나드 장원의 풍차들을 바라보았다. 저 풍찻간에서 나오는 소득만으로도 피나드 부인은 그럭저럭 집안을 이끌어나갈 수는 있을 것이다. 어쩌면 피나드 부인의 일생에서, 남편의 비극적인 죽음은 인상적이지만 스쳐지나가는 사건에 불과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결국 농장과 밀밭 과 과수원과 풍차가 부인의 일생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유리는 잠시 몸을 떨었다.
“몰라요. 말이 씨가 된다면 난 내 입을 저주할 거예요.”
“예?”
“언젠가 내가 그랬잖아요. 나에겐 불운이 따라다닌다고. 내가 들르는 곳마다 누군가에게 공격당한다고. 내가 탔던 레보스호는 키 드레이번에게 공 격당했어요. 내가 들렀던 다림 역시 노스윈드 해적에게 공격당했고, 그리고 여기 팔라레온은 다벨에게 공격당했어요. 혹시………”
바닥에 앉아 있던 오스발은 한쪽 무릎을 올리곤 그 위에 턱을 얹었다.
“공주님께서 라트랑에 가시면 이루미나 공주님께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우스운 생각이지요? 하지만 내가 도착하자마자 룸 언니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래도 나, 스스로에게 그건 우연이라고 주장해 보긴 할 거예 요. 하지만 그 주장을 거의 받아들이지 못할 것 같은데요.”
잠시의 시간이 미풍처럼 흘러간 다음, 오스발이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무슨 말을 할지도 짐작하실 것 같습니다만.”
유리는 겨우 웃을 수 있게 되었다.
“우울한 생각은 하지 마라.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걱정하지 마라. 쓸데없는 걱정이다. 그건 과잉된 불안 심리를 직관력이라고 믿는 소치일 뿐이 다…………”
“마지막 말은 아닙니다. 생각하지 못했어요.”
유리는 생긋 웃으며 몸을 돌린 다음 창턱에 주저앉았다. 오스발은 잠시 푸근한 얼굴로 역광 속의 유리를 바라보았다. 유리의 얼굴은 부드러웠다.
“자, 그럼 나머지 계속 읽어줄게요. 준비도 해야 하니 부지런히 읽어야겠죠?”
오스발은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새벽부터 내린 비 때문에 해가 언제 떴는지조차 알 수 없는 캄캄한 아침이었다. 어쨌든 하늘은 검정색보다는 회색에 가까웠고 그것으로 미루어보아 해가 뜨긴 뜬 모양이다. 하지만 다케온의 리저드라이더(Lizardrider)들은 아직까지도 밤이 계속되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그들이 보고 있는 악몽 때 문이었다.
“쐐애애애액!”
목도리도마뱀 하나가 두 다리로 일어서며 발작적으로 프릴(Frill)을 펼쳤다. 접혀 있을 때 그것은 리저드라이더들의 예술품과도 같은 갑옷에 잘 어울 리는 화려한 장식이지만, 지금처럼 펼쳐졌을 땐 악마의 사교 파티 입장이라도 가능할 것 같은 모습이 된다. 직경 4피트 가량의 프릴이 부르르 떨리고 그 속에서 붉은 입이 좍 벌어졌을 땐 가장 사나운 야수라도 기겁하지 않을 수 없다. 록소나의 말들이라고 해서 다르지는 않다. 목도리도마뱀 앞쪽에 있던 말들이 기겁하며 발길질을 해댔고 말 위의 기수들은 분노에 찬 비명을 질렀다. 그 틈을 노려 목도리도마뱀은 가장 가까이 있던 말의 머리를 거 칠게 깨물었다. 뼈와 근육이 뒤틀리다가, 뚜두둑. 물안개 속으로 피보라가 튀었다. 두 다리로 일어선 목도리도마뱀의 머리 높이는 10피트를 쉽게 넘 겼고 파라락 떨리는 프릴은 악마의 피리 소리 같은 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그 입에 물린 말머리의 일부분은 선혈을 흩뿌리고 있었다. 록소나의 너무 담대해서 골치 아픈 기사들도 공포에 찬 비명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비 때문에 저런 영웅적인 모습을 보이는 목도리도마뱀은 얼마 되지 않았다. 리저드라이더들은 애원하고, 성내고, 노성을 지르며 자신들의 목 도리도마뱀들을 달래보았지만 그 냉혈동물들은 차가운 빗속에서 활동이 극도로 둔화되어 있었다. 그리고 꿈지럭거리는 목도리도마뱀에 탄 리저드라 이더들은 더 이상 록소나 기사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다케온의 리저드라이더들은 아직까지도 비를 멈추지 않는 하늘을 향해 저주를 퍼부어대었 다.
하지만 록소나의 거친 말들 역시 진구렁이 된 전장에서 기수를 낙마시키는 헛발질을 하기 일쑤였다. 튀어오르는 진흙덩이들 속으로 검광이 나부끼 고 물구덩이에 떨어진 시체는 전우들에게 물벼락과 피벼락을 뒤집어씌웠다. 땀에 젖은 말과 기병들은 안개 같은 수증기를 피워올리고 있었고 그 사 이로 기진맥진한 목도리도마뱀들이 낮에 나온 유령처럼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전장은 축축하고 시끄럽고 잔인했으며… 모든 의미에서 엉망진창이 었다. 이곳에서 인간의 존엄성 어쩌고 하는 말은 삼류 코미디가 되고 있었다. 상당히 거창한 규모로, 그리고 비가 오는 가운데에도 리저드라이더의 출동을 명령할 수밖에 없었던 다케온군의 지휘관은 다시 한번 불가항력의 명령을 내려야 했다.
“후퇴하라!전원, 후퇴!”
지휘관은 벌써 몇 번이나 기수가 바뀌었던 군기를 손수 휘두르며 목이 터져라 외쳤다. 리저드라이더들은 각자 고삐를 잡아당기며 자신의 목도리도 마뱀을 돌렸다. 그러나 많은 리저드라이더들은 안장에서 뛰어내려 상처 입은, 혹은 추위 때문에 행동이 둔화된 자신의 목도리도마뱀을 끌어당기며 울부짖고 있었고 록소나의 기사들은 그런 리저드라이더들의 몸에 온갖 종류의 엣지와 블레이드와 그들 자신의 적개심을 박아넣었다. 모든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기는 일, 즉 저 냉혹한 파충류와 리저드라이더 사이의 이 이상한 애정도 록소나의 기사들에게는 고려할 필요성이 없는 사소한 일인 것 같 았다.
파파파 – 밧.
물방울이 사방으로 튀어올랐다. 쏟아지는 비는 모든 점에서 리저드라이더들에게 가혹하게 작용하고 있었지만 한 가지 점에서만은 리저드라이더들 에게 우세로 작용하고 있었고, 다케온의 지휘관은 그 사실에 우울한 만족감을 느꼈다. 목도리도마뱀의 독특한 보행 수법 때문에 물방울이 굉장히 높 이 피어올랐다. 뒷다리만으로 서서 두 다리를 수레바퀴처럼 힘차게 돌리며 달리는 목도리도마뱀들의 주위로는 물방울의 구름 같은 것이 만들어졌다. 그래서 그 뒤를 추적하는 록소나의 기사들은 폭포 속으로 뛰어든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숨막혀 해야 했다. 맹포한 물보라를 일으키며 달려가는 목도 리도마뱀들의 모습은 세상에서 그 짝을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며, 사무이다크의 들소떼가 일으키는 수마일 반경의 장대한 흙먼지가 겨우 이에 비교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불행과 불운으로 점철된 전투의 끄트머리에서 다케온의 지휘관은 한번 더 자신들만의 장점을 살리기로 결심했다.
“호수로-!호수로 – !”
리저드라이더들의 선두에서 지휘관은 물에 젖은 군기를 펄럭거리게 하려 애쓰면서 방향을 바꿔나갔다. 전장 한편에 펼쳐진 넓은 호수가 그들의 시 야에 들어온 것이다. 모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휘관의 뒤를 따르는 리저드라이더들의 눈에도 불안한 눈빛이 흘러내릴 정도로 고였다. 그 뒤를 추적하는 록소나의 기사들은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호수에 닿기 전에 잡아야 해. – !”
“제기랄, 갈 수 있다면 가보시지!”
록소나의 말들 역시 빗속의 전투 때문에 온몸에서 수증기를 무럭무럭 피워올릴 정도로 지쳐 있었지만 사랑하는 기수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다시 한 번 저력을 발휘했다. 물방울의 아우성과 비명, 그리고 홍수 같은 철벅거림이 숨막힐 듯 지나가고, 마침내 다케온의 지휘관은 호숫가에 도달했다. 그 의 눈 속에도 불안은 있었다. 호수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비에 젖어 체온이 떨어진 목도리도마뱀이 과연 할 수 있을 것인가? 점차 다가오는 호 수를 보며 리저드라이더들도 이를 악물며 명령을 기다렸다. 반전하여 싸운다. 최후의 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 싸운다………… 차라리 그것이 낫지 않은가. 빗방울에 유린당하고 있는 저 회색의 호수 속에
“다케온 만세! 앞으로!”
군기가 드디어 펼쳐졌다.
격렬한 도약 때문이다. 다케온의 지휘관은 호반을 향하여 그 어떤 목도리도마뱀도 해내지 못한 격렬한 도약을 해내었고 그 순간 리저드라이더들의 군기가 찢어질 듯 펼쳐졌다. 목도리도마뱀의 두 발이 수면에 닿는 그 순간 다케온과 록소나의 병사들 모두가 짧은 순간 침묵했다.
곧이어 환성이 터져나왔다.
다케온의 리저드라이더들은 호수를 향해 뛰어들었다. 그러고는 저 앞쪽을 달려가고 있는 그들의 지휘관을 향해 격렬한 속도로 달려갔다. 호수는 어 이없다는 듯이 리저드라이더들에게 물벼락을 뒤집어씌우고 목도리도마뱀의 발을 잡아당겼지만 목도리도마뱀은 그 모든 것을 뿌리쳤다. 모든 분야의 마이스터가 펼치는 신묘한 재주 중에서도 최고에 속하는 절기는 유감없이 펼쳐진 것이다.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물보라를 일으키며, 리저드라이더들은 수면 위를 달려갔다.
그 모습에 매료된 몇몇 록소나 기사들은 말의 컨트롤을 잃어버렸고 그 말들은 자신의 기수를 호수에 메다꽂았다. 당황 속에 말을 멈춰 세운 나머지 기사들도 욕지거리를 뿜어대기에 앞서 경의 어린 침묵과 한숨을 보내었다. “이렇게 추운 날씨에………… 저렇게 넓은 호수를…………?” 조금 전까지만 해도 목숨을 걸고 쫓고 쫓기는 입장들이었지만, 이제 록소나의 기사들은 차라리 빠지지 말라고 외쳐주고 싶었다. 따라서 다케온의 리저드라이더들이 넓은 호수를 가로질러 까마득히 떨어진 반대편 만에 도달했을 때 록소나의 기사들이 환성을 질렀다는 것도 이해해 줄 수는 있는 일이었다.
6월 1일. 괴상망측한 서한을 남발하고 있는 휘리 노이에스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몰랐기에 일단 팔라레온과의 접경 지역으로 병력을 이동시켰던 다케온은 북쪽으로부터 록소나의 기습을 당하고는 비명을 질렀다. 전투가 벌어진 곳의 이름을 딴 시메리우스 평원의 전투는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결판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케온의 막대한 부를 상징하는 리저드라이더 부대를 약화시키기 위해 공격은 비 오는 날을 기다려 실시되었다. 치명적 인 계획이었다. 무시무시한 프릴과 파충류의 경이적인 속도, 그리고 날카로운 이빨로 무장되어 있는 목도리도마뱀들도 추위 속에선 어쩔 수 없는 냉 혈동물이었다.
그러나 전투의 종결에서 다케온의 리저드라이더들은 이제껏 어떤 리저드라이더도 해내지 못한 일, 즉 90로드나 되는 수면을 달려가는 전무후무한 묘기를 성공시켰다. 그것도 악천후를 뚫고서. 그것으로서 리저드라이더들은 패배한 전투가 패배한 전쟁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을 아슬아슬하게 차단 시켰다. 록소나로서는 만족스러울 수 있었던 초반 전투에 끼얹혀진 진흙 세례였고, 다케온은 이로써 간신히 숨 돌릴 틈을 얻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다케온의 네그리파 다케온 백작은 마왕 빌레스에 대해 분노하기 시작했다. ‘신의를 기반으로 이루어진 양국 관계를 나락으로 추락 시킨 최악의 불상사이며 만인의 우려를 사기에 부족함이 없는 치명적 실수’라는 다케온의 항의 서한에 대해 마왕은 짧은 답신을 보내었다. ‘양국 관 계? 다케온은 국가가 아니다. 그곳에는 흙투성이 광부들과 백작인 척하는 광부 우두머리가 있을 뿐.’
네그리파 다케온 백작은 이 답신을 씹어먹을 뻔했다 한다. 백작을 위시하여 모든 다케온 사람들은 무례한 마구간지기 – 물론 마왕을 빗댄 말이다 에게 예의를 가르쳐주기로 결심했다. 마왕의 버릇을 고쳐주기 위해선 팔라레온에서 정신 나간 서한을 보내고 있는 휘리 노이에스를 먼저 침묵시 켜야 된다고 판단한 다케온은 팔라레온과 다벨로 특사를 파견시켰다.
그리고 펠라론에서는 퓨아리스 4세가 슬픔에 빠져 있었다.
“이 모든 것을 야기한 것이 뭔지 아는가, 플로라?”
“술 때문입니다.”
“응? 아니…”
내가 이렇게 대낮부터 취해서 추한 모습으로 넋두리를 늘어놓는 이유 말고, 다벨과 록소나가 벌이고 있는 이 횡포 말이다. 그게 뭣 때 문인지 아는가?”
플로라는 대답하는 대신 발을 담그고 있던 물통에서 조심스럽게 다리를 들어올렸다. 법황 집무실의 화려한 카펫을 적시지 않기 위해 발을 말끔히 닦 아낸 플로라는 가운을 어깨에 걸친 다음 법황에게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법황의 테이블에서 술병과 잔을 들어올렸다.
“진심으로 경고하는데, 그거 치우면 나 울어버릴지도 몰라.”
“법열이라 생각하겠습니다.”
법황은 투덜거리고 구시렁거리고 위협 삼아 우는 소리까지 내어보았지만 플로라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술병과 잔을 장식장 속에 집어넣은 플로라는 한결같은 속도로 돌아와서는 의자에 앉았다. 법황은 달아오른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록소나에도 성무 금지 처분을 내리실 건가요, 성하?”
“더 이상 성무 금지 처분을 조롱거리로 만들 수야 없지. 휘리 자식이 그렇게 만든 것만 해도 충분해. 마왕까지도 성무 금지에 대해 코방귀를 뀐다면 난 펠라론 게이트에 머리를 집어넣고.”
“예. 알겠습니다.”
플로라는 황급히 법황의 말을 가로챘다. 저 뒤에 생략된 말은 ‘세상을 향해 천국의 방귀를 뀌겠노라’이다. 여러 가지 활용법이 있지만 주로 세상에 대해 좌절한 사람이 사용했을 때 그 독특한 의미가 잘 살아나는 펠라론식 농담이다. 그리고 아무리 취했다 한들 법황이 입에 담기엔 신성 모독적인 말이기도 하다. (물론, 속되기도 하다.) 퓨아리스 4세는 우울한 얼굴로 천장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럼, 다시 이게 누구 때문인지 아는가?”
플로라는 대답하지 않음으로써 대답했다. 하지만 퓨아리스 4세는 말하고 싶었다.
“그래, 그렇다고, 하이낙스, 하이낙스! 젠장. 하이낙스 그 놈 때문이야!”
플로라는 상심한 얼굴을 감추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법황은 그녀 앞에서는 한번도 하이낙스를 비어로 부르지는 않았다. 플로라는 조심스럽게 고 개를 숙인 다음 하이낙스가 그렇게 불렸다는 사실과 동시에 퓨아리스 4세의 자기 절제가 깨진 것에 대해 슬퍼했다. ‘얼마나 힘드셨으면.’
“레프토리아에서 쓰러진 건 하이낙스의 육신뿐이야. 그 우라질 놈의 망령은 아직까지도 골빈 놈들의 머릿속에 들어가 똬리를 틀고 앉아 있어. 곳곳 에서 놈의 악취가 풍겨! 내 집무실에서까지…………!”
술에 취해 있던 퓨아리스 4세도 자신이 내뱉은 말에 대해 놀라 입을 다물었지만 이미 늦었다. 플로라는 총명해 보이는 이마에 슬픔을 가득 담고 고 개를 옆으로 돌렸다.
“용서하십시오. 성하.”
“아냐, 이런. 아니라고. 너를 빗대어 한 말이 아냐, 플로라, 그건, 그건 그러니까 비유적으로 한 말일 뿐이지. 그렇다고. 이런 빌어먹을! 술 때문에 아 무 생각 없이 한 말이었어. 그래.”
“네. 성하.”
플로라의 대답을 들으며 퓨아리스 4세는 자신이 취했음을 확실히 깨달았다. 이런 쓸데없는 변명을 하고 있다니. 주여. 미욱한 작자를 후임 법황으로 만들어버린 퓨아리스 3세에게 벼락 한 세트 동봉하여 제 소식 좀 전해 주십시오. 지금 그 후계자는 비뚤어진 시기심을 안주삼아 대낮부터 술을 퍼마 시며 세상에서 가장 희귀한 종족에게 상처를 입히고 있다고. 그리고 퓨아리스 3세께서 후계자에게 벼락을 던지려 하실 땐, 옆에서 기술적 조언도 좀 해주십시오.
“성하?”
플로라의 목소리에 퓨아리스 4세는 고개를 들었다. 플로라는 수심 어린 표정으로 법황을 바라보고 있었다. 법황은 자신이 참 황당한 공상을 하고 있 었음을 깨닫곤 멋적게 웃고 말았다.
“응, 플로라?”
“성하. 저에 대해 염려해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성하가 모든 신도들의 안녕을 염려하셔야 하는 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불쌍해 보이지는 않나? 신도들이 벌이고 있는 저 분쟁을 해결해 줄 생각은 못한 채 좌절하고 화내며 술을 퍼마시고 있는 법황이?” 플로라는 빙긋 웃었다.
“성하. 저는 성하께서 로데인 백작이셨을 때부터 성하를 알고 있었습니다.”
“으음?”
“사태를 분석하고 타개책을 모색할 절실한 필요가 있을 때, 어떤 이는 주위를 조용히 하고, 어떤 이는 방안을 서성거리지요. 그리고 성하께서는 약 주를 드십니다.”
퓨아리스 4세는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럼 왜 술 치운 건가. 나라는 인간은 위 속에 술을 때려부어 목 아래를 마비시켜야 머리가 잘 돌아간다는 것 잘 알면서.”
“저는 성하의 습관 한 가지를 더 알고 있지요. 아무 말 없이 약주를 드시던 성하께서 입을 열면, 그건 생각의 정리가 끝났다는 증거입니다.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퓨아리스 4세는 두 손 들어보이는 제스처를 취해서 그의 꽃을 미소 짓게 했다. 손을 내린 법황은 진지한 태도로 말했다.
“아무것도 안 해.”
“예?”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노병의 도끼가 어디를 내려치는가를 확인할 때까지는 난 조그만 펠라론에 갇혀서 대륙 전체를 향해 울화통을 터뜨리고 분노하고 히스테리를 부리는, 사람들이 이해하기 쉬운 법황이 될 생각이야. 술이 많이 필요해질 거야.”
플로라는 알아들을 수 없는 전반부의 말보다는 후반부의 말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녀는 법황이 뭔가 그럴 듯한 말을 하면서 술 마실 핑계를 만드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을 뿌리치기 어려웠다. 그때 법황이 지나가는 말처럼 말했다.
“새로 생긴 네 동생의 이야기나 하지. 플로라.”
“예? 아. 다림의 그녀 말입니까?”
“그녀라고? 역시 여성형으로 리포밍된 모양이군.”
“그렇습니다, 성하. 당연하잖습니까? 해적선엔 여자가 없습니다.”
플로라의 눈은 ‘따라서 키 드레이번에 의해 리포밍되었다고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법황은 그 의미에 잠깐 집중했다. “그럼, 좋아. 연락은 할 수 있나?”
플로라는 갑자기 난처한 기색을 떠올렸다.
“그게, 좀 이상합니다.”
“이상하다니?”
“그녀에게 몇 번이나 말을 걸어보았습니다. 하지만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전달되지 않은 것 아냐?”
“성하. 성하께서 누군가에게 말을 걸었을 때 상대방이 대답하지 않는다고 해서 자신이 벙어리일 거라고 생각하시긴 어렵겠지요. 그와 같습니다. 제 의사는 확실히 그녀에게 가 닿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마치 귀머거리인 것처럼 반응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 왜 그럴까.”
“생각해 볼 수 있는 건………… 그녀가 뭔가 이상한 모습으로 리포밍된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녀가 만일 상대방의 말을 듣지 않는 남자에 의해 리포 밍되었다면…..”
“키 드레이번처럼?”
법황의 말투는 사나웠지만 그 자신은 그것을 잘 인식하지 못하는 듯했다. 플로라는 조용히 심호흡을 한 다음 되도록 평온하게 들리도록 말했다.
“알 수 없습니다. 성하.”
자유호의 갑판장 라이온은 타인의 관심을 자신에게 집중시키는 데 어려움을 겪어본 적이 없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자유호의 일항사 식스가 명예를 걸고 보증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식스 일항사는 결코 유쾌한 방법만 사용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긴 할 것이다.)
그렇기에 라이온이 현재 처해 있는 상황은 그로 하여금 자부심에 심각한 손상을 입히게 했다.
“레이디. 제발, 한번만 쳐다봐 줘요. 원래 계획은 뺨에 키스받는 것이었지만 그건 30분 전에 폐기 처분했어. 그 다음은 날 보고 미소지어주는 것이었 지만 그건 10분 전에 종말 처리했고. 그러니, 제발 한번 쳐다봐 주기만이라도 해달란 말이에요!”
라이온의 안달과는 별개로 검은 소녀는 무관심하게 서 있었다. 그것은 정녕 놀라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셔츠를 벗어 손에 들고 그것을 머리 위에서 빙글빙글 돌리며 가지런히 선 자유호의 노 위를 겅중겅중 뛰어다니고 있는 라이온을 보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해적들과 노 잡이 노예들까지도 모두 박수와 환호를 보내고 있었고 이마를 짚은 채 괴로워하고 있던 식스 일항사는 손에 들고 있던 양각기를 집어던지고 싶은 강 한 유혹을 느꼈다. 하지만 검은 소녀는 오른손으론 키의 옷자락을 쥔 채 초점 없는 눈으로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실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봐, 일항사, 저렇게 원하는데, 자네가 라이온에게 키스해 주지 그래?”
노 위를 뛰어다니고 있던 라이온은 발을 헛딛고는 바다에 빠졌다. 풍덩! 그리고 식스는 양각기를 발등에 떨어뜨리고는 펄쩍펄쩍 뛰었다.
“아이고, 내 발!”
키는 자신의 고급 선원들을 한꺼번에 처리해 버리는 세실을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세실은 키의 코트 자락을 쥔 채 가만히 서 있는 소녀를 돌아보았 다.
“그 애에겐 키 당신이 물수리호 대신인가 보군. 아니면 알버트 선장 대신인가? 머리도 한번 안 쓰다듬어주는 당신 같은 작자에게 그렇게 달라붙어 있는 건 다른 의미론 해석할 수가 없는데.”
키는 별 반응 없이 여전히 바다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옆의 검은 소녀 역시 한손으로 키의 옷자락을 꼭 쥔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선교 위에 서 있는 둘의 모습은 인형으로 착각될 지경이었다. 세실은 두 손을 들어올리는 전통적인 제스처를 취해 보였다.
“이 선단에 있어서 가장 시급한 현안은 의사소통의 개선이야. 그렇게 아무 말도 안할 거라면 그 애는 왜 데리고 나온 거야?”
대답을 기대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키의 대답은 세실을 놀라게 했다.
“보여줄 것이 있다.”
“뭐? 보여줄 거? 뭐 말하는 거야?”
“저것.”
키가 바라보는 방향을 바라보던 세실은 미심쩍은 어투로 질문했다.
“수평선?”
하지만 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세실 역시 키가 물수리호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수평선을 소녀에게 보여주고 싶어했다고는 생각되지 않 았다. 그래서 세실은 키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세실은 키와 똑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키와 똑같은 인상을 썼다.
발등을 움켜쥐고 있던 식스도, 건현을 기어올라오던 라이온도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 그곳을 바라보았다. 바다와 하늘이 맞닿는 한없이 멀고 한없 이 가깝고 존재하지 않지만 보이는 선.
세실은 순간 눈을 크게 떴다.
뭔가가 움직였다. 세실은 다시 눈을 가늘게 뜨고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뭐였지?’ 그녀가 잘못 본 것이 아닌가 의심할 때쯤 다시 뭔가가 움직였다. 세실은 키를 한번 돌아보았다가 배의 고물 쪽으로 걸어갔다. 라이온 역시 젖은 셔츠를 옆으로 던지고는 몸에서 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세실 옆에 가 섰다. 그들이 똑같이 인상을 찌푸렸을 때, 수평선에서 다시 뭔가가 움직였다.
“나왔다.”
“들어갔다.”
“나왔다………… 뭐야, 저게?”
“들어갔다…… 나왔다? 들어갔다.”
퍽이나 바보 같은 대화를 주고받는 세실과 라이온을 불쌍히 여긴 식스는 정중한 동작으로 망원경을 건네었다. 하지만 곧 식스는 더 큰 한숨을 내쉬 어야 했다. 세실과 라이온은 서로 망원경을 잡아당기며 거친 언사로 고함을 질러대었기 때문이다.
그때쯤 다른 배에서도 수평선의 이상한 움직임을 발견한 선원들을 중심으로 조금씩 소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라이온이 다른 배들 쪽을 흘끔 바라 본 순간, 세실은 강펀치로 라이온의 턱을 올려친 다음 선교 위에 납작하게 뻗은 라이온의 등을 밟고 서서 수평선을 향해 망원경을 들이대었다. 식스 는 왠지 모를 즐거움을 느끼는 자신을 꾸짖으며 세실에게 질문했다.
“뭡니까, 마법사 세실?”
“뭐가 이쪽으로 오고 있어. 이상하네. 배라면 저러지는 않을 텐데. 물 속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하면서 오는 것이 배일 리는 없잖아. 하얀색의………… 모 두 세 개인 것 같은데. 그리고 — !”
세실은 말문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자신이 그때까지 세 개의 물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하나의 물체와 그 양쪽으로 솟아오르고 있는 물보라임을 깨달았다. 그 하얀 물체가 내고 있는 무서운 속력에 의해 물살이 양쪽으로 쩍쩍 갈라지고 있었다. 세실은 황급히 식스에게 망원경을 넘겼 다.
“젠장! 들여다보고 어떤 대책이든 세워! 왠지 모르지만 그런 게 필요할 것 같은걸.”
식스는 고개를 갸웃하며 망원경을 받아들었다. 그가 망원경을 들여다보았을 때 그 물체는 훨씬 더 커져 있었다. 노련한 뱃사람의 눈에 순간적으로 측정된 파도의 높이는 8피트가 넘었고 그 속도는 최소한 20노트였다. 양쪽으로 날개 같은 물살을 일으키며 수면을 가로질러 빠르게 다가오는 물 체…………. 식스는 망원경을 꽉 움켜쥐었고, 그래서 하마터면 그 중요한 항해용품을 부러뜨릴 뻔했다.
“전투 태세! 서펜트 다!”
식스의 목에서 쥐어짜는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선원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선창 아래에서는 노예들의 찢어지는 비명이 터져나왔다. 노잡이 노 예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서펜트의 습격이다. 서펜트는 노예 장사를 하지 않는다. 서펜트는 배를 휘감아 그냥 가라앉혀버릴 뿐이고, 따라서 노예들은 산채로 수장당하는 것이다. 비명과 달음박질치는 발자국 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식스는 두 팔을 휘두르며 얼굴이 벌겋게 되도록 고함을 내질렀다.
“부두에 신호를 보내라 ―!서펜트 급습이다! 서펜트 급습이다! 포수장들은 준비되는 대로.”
“일항사의 입에다가 포환이라도 안겨줘라.”
“알겠습니다, 선장님! ……예?”
포수장은 눈을 껌벅거리며 키를 쳐다보았다. 식스는 숨이 막혀 컥컥거리며 그의 선장을 바라보았지만 키는 그에게 찡그린 시선만을 보내주었다. 그때 세실이 입을 열었다.
“저걸 기다리고 있었어?”
키는 행동으로 대답했다. 키는 라이온에게 짤막한 손짓 하나를 보낸 다음 고물 끝을 향해 걸어갔고 그의 옷자락을 쥐고 있던 검은 소녀는 끌려가듯 그 뒤를 따랐다. 키의 손짓을 본 라이온은 황급히 깃발을 잡아들어 다른 배에 신호를 보내었고 발포 준비를 서두르던 각 선박은 재빨리 발사를 중지 했다. 그 사이, 수평선에서 물보라를 일으키며 무서운 속력으로 다가오던 것은 마침내 맨눈으로 식별 가능한 정도까지 커졌다.
방파제를 옆으로 돌았을 때 선원들은 그것이 일으키고 있는 물보라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깨달았다. 방파제 위에 물을 끼얹고 내항으로 들어왔을 때 에야 그것은 속력을 줄였다. 내항 안쪽에 있던 어선들과 선박들에서 터져나오는 비명이 항구를 떠들썩하게 했지만 노스윈드 선단 소속의 선박들은 침묵한 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물보라가 가라앉은 다음, 그것은 정확히 자유호를 향해 헤엄쳐 왔다.
그랜드머더호와 그랜드파더호의 선원들은 뱃전 너머로 몸을 내민 채 자신들의 배 옆을 지나치는 그 모습을 보며 숨을 죽였다. 수면 바로 아래서 헤 엄치는 길고 흰 동체는 맑은 바닷물 속에서 연녹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자유호의 고물 쪽에 도달했을 때, 그것은 천천히 수면 위로 커다란 머리를 들 어올렸다.
쏴아아아!
그 머리를 타고 폭포수 같은 물줄기가 쏟아져내렸다.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 속에서 그 흰 몸은 진주처럼 빛나고 있었다. 고개를 휘젓던 그것은 키를 발견하고는 똑바로 머리를 든 채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라이온은 조금 전부터 자신의 옷깃을 쥐어뜯고 있던 식스를 위해 그 이름을 말해 주었다.
“대사(Grand Snake)입니다. 철탑의…..”
그때 대사가 천천히 몸을 들어올리더니 자유호의 고물 너머로 기어올라왔다. 갑판원들은 자신도 모르게 주춤하며 뒤로 물러났지만 키와 검은 소녀 는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상체를 고물 위로 얹는 순간부터 대사의 모습이 스윽 변했다.
대사는 여인의 모습으로 변했다.
부두 저쪽에서 일어나는 소란이 아스라하게 들려왔지만 자유호의 선원들은 숨죽인 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하얀 옷을 입은 하얀 여인의 모습이 된 대사는 키의 앞에 똑바로 섰다. 대사는 검은 소녀를 잠깐 바라보았지만 곧 키를 향해 말했다.
“오래간만입니다. 키 드레이번.”
“반갑군. 바라미.”
“예. 보내주신 연은 잘 받았습니다. 대단한 조연사가 있나 보지요? 다림에서 그곳까지의 거리는 만만찮은 것인데.”
키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조금 전과는 다른 이유로 얼굴이 벌겋게 되어 있는 식스를 불렀다.
“일항사. 갑판의 지휘를 맡아라. 난 선장실로 내려가겠다.”
“아, 알겠습니다. 선장님.”
키는 몸을 돌렸다. 그때 모든 사람들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검은 소녀는 키의 옷자락을 놓고는 바라미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바라미는 자신의 가슴팍에나 올까 말까 한 소녀를 내려다보며 살짝 웃었다. 검은 소녀의 무표정한 얼굴은 그대로였지만 그녀가 한 사람을 이렇게 바 라보는 모습을 처음 본 해적들과 세실은 크게 놀랐다. 그때 바라미가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세실은 숨을 죽였다. 그럴 리가 없어. 대사 당신은 완전히 흰색이라고. 그녀가 받아들일 리가 없어……………
검은 소녀는 손을 들어올렸다.
하얀 손이 검은 손을 쥐었고, 바라미는 소녀를 이끌며 키를 뒤따랐다. 희고 검은 두 여인이 키를 따라 승강구 아래로 사라지자 갑판에 서 있던 사람 들은 그제서야 멈추고 있던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리고 그들은 두 명의 좌절한 사내들을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물론 자신이 경멸하는 경거망동을 스 스로 일으켜버린 식스와 눈앞에서 자신이 끝끝내 실패했던 일 – 검은 소녀의 관심을 끄는ᅳ을 간단히 성공한 바라미를 보게 된 라이온이었다. 어 쨌든 식스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식스는 자신을 가장 심하게 놀려댈 인물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고, 그 인물이 그렇게까지 심한 좌절에 빠져 있 어서 놀릴 생각을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했다.
다림의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노스윈드 선단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해석을 붙이지 않기로 결의한 것 같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생에 몇 번 경 험하기도 힘든 일을 계속해서 펼쳐보이는 그들을 질린 눈으로 바라보곤 했다. 오후 늦게 자유호의 갑판에 설치된 천막을 방문한 폴라 대사 역시 그 점을 지적해 보였다.
“제국의 공적 제1호, 너무 빨리 끝나버려서 당한 사람조차 잘 모를 정도의 다림 정복, 다림의 모든 선량한 아내들로 하여금 그들의 남편이 미치지 않았나 의심하게 만든 그 노래, 그리고 이젠 백색 서펜트를 불러들여 이야기를 나누는 선장인가요? 그 서펜트는 어디 있죠?”
식스 일항사는 얼굴을 붉히는 자신이 싫었다.
“서펜트가 아닙니다.”
“서펜트가 아니라고요? 그럼 뭐죠?”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토론이 어긋나는군요.”
폴라 대사는 토론이라는 말에 작게 웃었다. 몸값 협상도 양자가 합의할 수 있는 결론을 도출해 내는 과정이라는 점에선 토론이랄 수도 있을 것이다. 폴라 대사는 손가락으로 책상 표면을 딱딱 치며 말했다.
“아시겠지만 라스 법무대신은 왕족이에요. 카밀카르의 왕가에선 길사와 흉사를 한꺼번에 처리하지는 않는다는 것 잘 아시죠.”
테이블 건너편의 덱체어에 앉아 있던 식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법무대신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왕가의 원로로서 공주님이 안전하게 검독수리의 성채에 도달하기 전까진 풀려날 생각은 별로 없다시더군 요. 제가 보기에 그분이나 슈마허 경 모두 자신들이 겪는 고통이 공주님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벌이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만, 그렇게 즐긴다 면 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즐기다?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자신이 원해서 받는 벌이라면 벌이 아닐지도.”
그리고 폴라 대사는 식스를 바라보며 손만 움직여 종이 위에 글자를 썼다. 식스는 그것을 흘끔 내려다보곤 말했다.
“유익한 토론이었습니다. 폴라 대사님.”
폴라 대사는 입술을 조금 비죽거린 다음 조금 전에 썼던 글자 아래쪽에 다시 다른 글을 휘갈겨썼다. 식스는 그제서야 조금 웃었다.
“누군가는 만족할지도 모르지요. 제가 그 누군가가 아니라는 점이 아쉽군요.”
폴라 대사는 씩 웃었다. 그녀는 조금 전에 썼던 글의 일부분을 지운 다음 자연스럽게 펜을 내려놓았다. 식스는 그 펜을 집어들었지만 뭔가를 쓰기에 앞서 폴라 대사 뒤쪽에 서 있던 대사관 무관을 흘끔 바라보았다. 무관은 헛기침을 하고는 하늘을 나는 갈매기를 참으로 신비하다는 듯한 눈으로 쏘아 보기 시작했다. 식스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고, 폴라 대사의 오른쪽 눈썹이 조금 꿈틀거렸다.
조금 후 대사는 테이블 한편에 놓아둔 술잔을 들어올렸다. 식스 역시 술잔을 들어올렸고 두 사람은 잔을 가볍게 부딪혔다. 폴라 대사는 술을 마시진 않고 그대로 잔을 내려놓으며 일어났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종이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폴라 대사는 뱃사람처럼 인사했 다.
“굿 세일.”
“굿 세일.”
식스 역시 뱃사람처럼 대답했다. 폴라 대사는 호위병들과 함께 부두로 내려갔다. 그녀를 배웅한 식스는 다시 테이블로 돌아와서는 덱체어에 앉아 테 이블 위에 발을 얹었다. 그러곤 유쾌한 마음으로 술잔을 들어올려 서쪽으로 지는 태양을 향해 건배했다.
그때 라이온이 슬금슬금 다가와서는 폴라 대사가 앉아 있던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라이온은 폴라 대사의 잔을 들어올리며 질문했다.
“어떻게 됐습니까?”
“만족할 정도로.”
라이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의 설명을 요구해 보는 것은 그의 순수한 가학적 취미를 만족시키는 면은 있겠지만 본질적으로 쓸모없는 일일 것 이다. 식스가 만족했다면, 그도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만족할 것이다.
라이온은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주승강구 쪽을 바라보았다.
키와 대사, 그리고 검은 소녀는 오후가 다 지나가도록 선장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정규 명령을 내리는 데 사용하는 수기 신호 대신 무수한 손짓 오닉스제(?)이 자유호로 날아들었지만 라이온은 그 손짓들에 전부 부정적 대답만 보내주었고 그 때문에 팔이 아플 지경이었다. 술잔을 내리는 그 의 눈에 또다른 손짓이 들어왔다. 라이온은 귀찮다는 듯이 손을 들어올렸다. ‘아직 안 나왔습니다. 두캉가 선장님.’
“식-.”식스의 얼굴에 떠오른 살기를 본 라이온은 재빨리 말을 삼켰다. “일항사님. 선장님은 왜 대사를 이곳으로 불러들인 걸까요?”
“선장님이 하시는 일이야. 끝.”
“저도 일항사가 될 수 있을 것 같군요. ‘선장님 명령이야, 끝’이라고요? 거 참 쉽군요.”
식스는 의외로 빙긋 웃었다.
“자넨 바로 그걸 못할걸. 그러니 아직 갑판장이지.”
“뭔 말씀이죠?”
“갑판원의 대장은 되더라도 선장의 부하는 못 될 거라는 일항사님의 말씀이지. 배고프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식스는 유쾌한 기분으로 몸을 일으켰다. 어쨌든 그는 그날 오후 한 장의 종이를 배로 삼고 펜 하나를 대포 삼아 50만 데리우스를 해적질했다. 그래 서 식스는 휘파람을 부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라이온이 급히 성호를 긋는다 해도 용서해 줄 수 있을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용서하지는 않았 다.
트로포스 선장은 자유호에서 식스와 라이온이 벌이고 있는 숨바꼭질을 보며 껄껄거리다 잠이 들었다.
짧은 꿈이 그를 찾아들었다.
무슨 꿈인지 내용도 알 수 없는 꿈이었지만 트로포스는 지독한 추위 속에서 서럽게 울고 있는 자신을 볼 수 있었다. 추위는 가학 취미적인 이빨과 무 한한 공격 성향으로 무장한 맹수처럼 다가오고 있었고 손뻗쳐 만져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 중에서도 트로포스가 가장 견딜 수 없는 것은 자신의 옷에서 나는 바스락거림이었다. 옷에서 나는 소리 때문에 트로포스는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꿈속에서는 때론 가장 쉬운 행동조차 불가능하다. 그래서 트로포스는 그 바스락거림을 사랑하려 했다……….
트로포스는 어지러운 눈을 들어 자신의 일항사를 올려다보았다.
“뭐냐?”
일항사는 미안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선장님. 주무시는데 깨워서 죄송합니다만 키 선장님이 승선을 요청하십니다. 그리고 다른 배의 선장님들도요. 본함에서 회의를 하시고 싶다고 하시는데요.”
“뭐? 여기서?”
“예. 선장님이 움직이시기 힘드니까 이곳으로 오시는 모양입니다.”
트로포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상체를 일어났다. 몸이 불편한 자신을 위해 일부러 질풍호로 모인다면 그것은 선장들 전원이 참석해야 되는 회의일 거 라 짐작하며 트로포스는 조금 긴장했다. 잠시 후 키 선장을 선두로 노스윈드 선단의 선장들이 선교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키는 별말 없이 그의 어깨를 한번 두드려주었고 오닉스 나이트는 언제나처럼 약간 소외된 듯한 위치에서 근엄하게 멈춰 섰지만 다른 선장들은 모두 각자의 방식대로 트로포스에게 안부를 물었다. 잠깐 동안의 인사가 끝나자 선장들은 갑판 바닥이나 덱체어, 선교 난간, 뱃전 등에 편한 자세로 앉았 다.
두캉가 선장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고는 방긋 웃었다.
키 선장은 선교 난간에 앉은 채 트로포스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킬리 선장은 이곳에서도 역시 조금 작아 보였고, 돌탄 선장은 코를 벌름거리 며 자유호 쪽을 흘끔 바라보았다. 하리야 선장의 얼굴은 약간 피로해 보였다. 아마도 이중에선 현재 가장 많은 일을 하고 있는 선장일 것이다. 다림시 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이 노스윈드의 해적들 역시 하리야 선장의 건국 프로젝트를 정식으로 듣지는 못했다. 하지만 모두들 알고 있었다. 재미있는 일처리 방식이었다. 그리고 오닉스 선장은 누군가 가져다놓은 석상처럼 트로포스 선장의 의자 뒤쪽에 우뚝 서 있었다. 알버트 선장을 제외한 노스윈 드의 선장들 전원 참석. 두캉가 선장은 이렇게 말해 보고 싶었다. 뭐든 덤벼봐!
“그럼 ᅳ.”
키가 입을 열자마자 모든 선장들의 얼굴이 키에게 집중되었다. 키는 그 시선들을 보며 잠시 입을 다물었고 선장들의 얼굴엔 미소가 번졌다.
“여러분들에게 할말이 있다. 다림에서의 정박이 길어지고 있지만 여러분들 중 아무도 불평하지는 않고 있다. 아마도 다림에 대한 공격도 성공시키 고 레보스호의 화물도 정리해서 모두들 느긋해진 기분인 것 같군. 그래서 평소에 볼 수 없는 행동들을 일삼고 있는 것일 테고. 나는 요즘 우리 함대에 서 서로 눈치를 보며 누군가 나서서 말해 주길 기다리는 일이 있음을 알고 있다. 여러분들을 만난 이후로 처음 보는 모습이군.”
선장들은 약간씩 당황했다. 키는 그들이 기다리던 설명, 즉 대사가 이곳으로 찾아온 이유에 대한 설명을 하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선장들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키는 검으로 베듯 말했다.
“그래서 내가 말하겠다. 이곳에 나라를 세운다.”
선장들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돌탄은 손바닥을 딱 소리나게 쳤고 킬리는 휘파람을 휙 불었다. 트로포스의 경우엔 침대에서 뛰어오를 것 같았다. 기 뻐하는 선장들 사이에서, 하리야는 조금 더 준비가 무르익었을 때 말했다면 더 나았을 거라고 생각하며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그때 키가 하 리야를 바라보았다.
“하리야 헌처크 선장.”
“아, 예. 키 선장님.”
“국왕이 된 것을 축하한다.”
충격은 약간 느리게 찾아왔다. 환호를 지르거나 박수를 치려 했던 선장들은 모두 당황하여 키와 하리야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괴괴한 침묵 속에서 하리야는 뭐라 외칠 듯이 입을 벌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키는 하리야의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보며 차갑게 말했다.
“네가 하고 있는 장난은 잘 알고 있다. 책임도 네가 지길 바랐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통치, 재미있기를 바란다.”
“키, 키.. 선.. — !”
“내 말 끝나지 않았다.”
키는 찢어 죽일 듯한 눈으로 하리야를 쏘아보아서 그를 침묵하게 만들었다. 하리야는 아래턱을 딱딱 부딪히며 두캉가 선장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두 캉가 선장은 굵은 목을 부르르 떨며 하리야 선장을 마주보았다. 오늘따라 그의 커다란 몸이 이상하게 왜소해 보였다. 키의 말은 계속되고 있었지만 하리야는 그의 말을 거의 듣지 못했다. 아니, 듣기는 했지만 제대로 이해하지를 못했다.
“……돕든 자기 몫을 챙겨 어딘가로 은퇴하든 자의에 따라 거취를 정하도록. 하지만 될 수 있으면 하리야를 도울 것을 권한다. 킬리, 돌탄, 오닉스 선 장은 목에 걸린 현상금이 너무 크니까, 이곳에서 그를 도우며 동시에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 좋겠지. 트로포스와 두캉가 선장의 경우 현상금은 크지 않지만 둘뿐이라면 힘들 것이다. 어쨌든 모두들 이전보다는 구두가 더 커졌으니까. 이 대륙과 이 바다에서 너희들을 환영해 줄 곳은 하리야의 나라뿐 일 테지. 그러니 동료 곁에 있을 것을 권한다. 물수리호의 경우 알버트 선장이 결정할 테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이다.”
선장들을 주욱 노려보며 말하던 키의 눈이 다시 하리야에게 돌아왔다. 하리야 선장의 얼굴은 이제 창백하다는 말도 모자란, 아주 새파란 얼굴이 되 어 있었다. 윙윙거리는 이명 때문에 키의 목소리는 그에게 이상하게 들렸다.
“대사가 너를 도울 것이다, 하리야. 나에게 약속했다. 그녀를 돕고 그녀에게 도움받도록. 자유호는 이곳에 두고 갈 테니, 내 배를 부탁하겠다.”
하리야는 다시 충격을 받았다. 간다고? 키는 자유호를 돌아보았다.
“네가 필요하다면 저 배를 사용하는 것은 허락한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까지나 내 배다. 잊지 말도록. 매각하거나 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자유호 의 선원들은…………… 그들의 거취를 스스로 정하도록 도와줘.”
“가, 가시다니, 어디로 가시, 가신다는……?”
“내일 떠날 것이다. 미노 만에서처럼 따라오는 것은 용납하지 않는다.”
“어디로 가신단 말입니까!”
하리야의 외침은 숫제 비명이었다. 키는 이를 드러내며 하리야를 쳐다보았지만 곧 침착하게 말했다.
“함께했던 시간들의 무게로, 그 정도는 요구할 수 있겠지. 나는 오스발과 율리아나 공주를 추적하기 위해 떠난다.”
오스발? 두캉가 선장은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키는 조용히 마지막 말을 꺼내었다.
“나는 오늘부로 이 함대에서 탈퇴한다.”
마지막 말이 결정타였다. 선장들은 얼어붙은 모습으로 키를 바라보았지만 할말을 끝낸 키는 경악한 선장들을 내버려둔 채 그대로 몸을 돌려 선교 계 단 쪽으로 걸어갔다.
“키 선장님!”
트로포스가 약간 늦게 비명처럼 고함 질렀다. 하지만 키는 트로포스의 외침을 무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