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처 워커 2권 – 3장 시간속에 던져진 파멸의 닻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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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 공주는 당혹한 표정으로 팬지꽃을 내려다보았다. 사실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조금 덥다 싶은 날씨 때문에 팬지꽃들은 시들어가고 있었다. 벌써 며칠 째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노련한 정원사의 입장에서 볼 때 데미 공주는 이 꽃 들이 죽을 거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다시 싱싱해질 것인가? 데미 공주는 확신을 가질 수가 없었다. 결국 데미 공주는 소극적인 자세를 떠올리게 되었다.
‘그냥 놔둬 볼까’
데미 공주는 우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팬지꽃을 심어둔 곳의 오른쪽으로 우거진 관목에 눈길이 닿는 순간 데미 공주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 다. 소담스럽게 어우러져 있는 관목은 장미나무다. 데미 공주는 손가락 끝에 전정가위를 끼워 빙글빙글 돌리면서 장미나무를 향해 걸어갔다. 장미나 무의 군락 앞에 선 데미 공주는 흐드러진 녹색 가지들을 비난하는 눈길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너희들, 정말 이렇게 나 속상하게 할 거야?’
데미 공주의 취미가 가장 완성된 형태로 나타난 화훼 중에서도 눈앞의 장미는 독특한 것이었다. 무수한 실험과 잡종 교배, 그리고 접붙이기를 통해 완성시킨 이 장미는 얼핏 보기에 하이브리드 티의 한 아종처럼 보인다. 하지만 풍성하고 화려한 모습을 가졌으면서도 이 장미는 플로리번다 계열처 럼 세 송이의 장미가 어울려 피어난다. 그 찬란한 붉은색을 본 데미 공주는 별 생각 없이 데미스 선셋이라는 일견 무성의하게까지 보이는 이름을 붙 였지만, 이 데미스 선셋의 재배 비법을 알기 위해 무수한 화훼상과 화훼 재배 농가가 쏟아부은 정열은 말도 못할 지경이다. 그러나 데미 공주는 어깨 를 으쓱했을 뿐 그 재배 비법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고 뿐만 아니라 화훼상에 팔지도 않았다. 다만 매년 봄이 찾아오면 데미 공주는 데미스 선셋을 가득 재배해서는 일스로 보내는 것을 유일한 효용으로 삼았다. 간략한 쪽지 하나를 동봉해서.
‘바이서스의 데미가 일스의 저스티스 기사단에 우정으로 보내드립니다.’
국가 간에 오가는 공식 문서라고는 죽었다 깨어나도 주장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저스티스 기사단은 이것을 사실 그대로의 현상으로, 즉 이웃 나라의 공주님께서 용맹한 기사단에 보낸 장미로 받아들였고 자랑스럽게 그것을 셔츠나 의전용 갑옷에 부착했다. 저스티스 기사단은 장미와 정의의 오렘을 따르는 일종의 신성 기사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은 매우 어울리는 행위이며 국가 간의 외교로는 퍽이나 아름다운 축에 속하겠다 하겠다. 그리고 저스티스 기사단의 기사들 상당수가 얼굴도 모르는 이웃나라의 공주인 데밀레노스 공주를 기꺼이 자신의 레이디로 여기고 있다는 점은 그 기사단의 재미있는 전통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데미스 선셋이 피어나질 않는 것이다. 팬지가 시들 정도로 강렬한 봄 햇살이 있으니 일조량이 부족한 것은 아니다. 데미 공주는 자신의 자 존심을 걸고 토질에 대한 시비나 접목 기술에 대한 비판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질병이나 해충의 영향은 전무했다. 한 마디로 아무 이유가 없다 고 할 수 있으며 그래서 데미 공주는 속이 상했다.
‘왜 안 피어나는 거니, 응?”
데미 공주는 마치 위협하듯이 전정가위를 들이대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꽃들이 ‘으악, 잘못했어요!’하며 피어날 리는 없다. 그녀는 스스로의 행동을 재미있어하며 고개를 돌렸다.
멀리 담쟁이덩굴이 가득 매달린 퍼걸러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는 칼과 샌슨이 열심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데미 공주는 이번엔 그쪽을 향해 잔잔한 눈길을 보내었지만 두 사람은 데미 공주의 눈길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들은 모든 종류의 훔쳐보는 시선에 대해 극도의 주의를 기울였지만 데미 공주의 시선에는 이제 신경을 쓰지 않게 된 것이다. 그래서 데미 공주는 약간 공허한 미소를 띤 채 그들의 격론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귀족들을 밟아 뭉개서 시민들에게 자유를 줄 건가요? 지골레이드를 움직여서 전쟁을 끝장내고 만민에게 평화를 주실 거예요? 우리 사는 세상의 모 습을 뜯어고치고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법을 개척하실 건가요? 우주를 움직이는 원리를 찾아낼 건가요?
이 장미나 좀 피어나게 해주세요. 신경질 나요.
데미 공주는 이제 자신의 생각에 재미있어하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가서 전설을 만들어요. 일출의 수평선에서 일몰의 지평선까지 모든 사람들이 경 탄하며 이야기할 전설을 그들이 기꺼이 그들의 손자에게 들려주고, 그 손자들이 다시 그들의 손자에게 들려주어 영원히 노래될 전설을.
하지만 난 장미나 볼래요.
속상해! 좀 피어나란 말이야!
“데미 공주님이 저기 있었군.”
칼은 잠시 피로한 눈을 비비며 고개를 돌리다가 데미 공주의 모습을 발견했다. 칼의 목소리에는 아무런 경악도 없었고 그 소식을 전해들은 샌슨 역 시 별다른 놀람 없이 고개를 돌렸다. 어쨌든 ‘꽃과 나무에 대한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공주님’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 데 있어서 두 사 람은 임펠리아의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였다.
“음. 신경을 많이 쓰시나 보군요. 팬지가 안 좋다고 말씀하신 것 같은데. 궁내 부원들의 손을 좀 빌리면 좋으실 텐데 왜 저렇게 혼자서 아름다운 프 림 블레이드를 찬양………….., 하아아압! 정신 집중! 혼자서 저렇게 고생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저건 공주님의 취미잖은가. 일이 아니라고.”
“하긴 그렇군요.”
“그래. 서커스 쪽의 움직임은 어떤가?”
“음. 그게 좀 그렇습니다. 대개들 무반응이었고 몇몇 서커스단은 스스로 민영화에 대한 찬반 투표를 가졌답니다. 하지만 찬성이 나온 곳은 한 군데 도 없군요. 투표를 가졌던 곳들도 모두들 저는 오거라는 결론을…………, 으아아! 귀족 아래 남아 있기로 결정했답니다!”
칼은 실망하지 않았다. 어쨌든 체제의 변화는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다. 광대들이라고 해도 그건 마찬가지이며, 귀족의 휘하에 있는 것이 훨씬 안전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 것은 당연하다.
“좋아. 몇몇이라도 투표를 해봤다는 것이 중요해. 난 당대에 모든 것을 얻기를 원하지는 않네. 내가 만들고 싶은 것은 경향성일 뿐이고, 그 경향성만 구축된다면 우리들의 사후에라도 우리들의 목적은 달성되겠지.”
“어깨가 좀 움츠러드는 기분입니다. 사후니 뭐니 하시니까.”
“하하, 그런가.”
칼은 말을 마치며 일어서려는 자세를 취했다. 그래서 샌슨은 그때까지 꺼내야 할 것인지 말아야 할 것인지 고민하던 말을 꺼냈다.
“저, 칼.”
“응?”
“어, 저, 오늘 오전에 자크의 가게에 들렀습니다. 지골레이드에 대한 전갈을 보내려고요. 그런데 거기서 이상한 소문을 하나 듣게 되었습니다.”
“이상한 소문이라니, 무슨 말인가?”
“그러니까…………, 헛, 참. 이걸 믿어야 될지. 저기 남쪽에서 올라온 소식인데요. 그러니까 사우스그레이드 말입니다.”
“왜, 데스나이트들이라도 부활했다던가?”
샌슨은 겁에 질린 얼굴이 되었다. 그는 숨 막히는 표정으로 칼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이번엔 칼이 숨막혀해야 할 차례였다. 칼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샌슨을 보며 말했다.
“아니, 무슨 말인가. 정말 그런 소문이 있다고?”
“윽. 예……………. 그렇습니다. 남쪽에서 그런 소문들이 올라오고 있답니다. 콜로넬 수원에서 데스나이트들이 다시 일어나서 켄턴을 급습했다고…………”
“이봐, 퍼시발 군. 그런 우스꽝스러운 소문을 믿을 수도 없거니와, 정말 그렇다면 그건 당연히 내 귀에도 들어오게 되어 있네. 켄턴의 시장이 국왕 전하께 그 사실을 보고할 거 아닌가. 그런 급박한 소식이라면 분명히 전령이 달려와서는……………”
“급보요!”
‘라고 외치겠지.’ 칼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 되어 뒷말을 삼켰다. 샌슨은 그와 거의 일치하는 표정을 지은 채 몸을 일으켰다. 두 사람은 곧 아무런 말 없이 궁성의 정문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도착했을 때 이미 전령은 말에서 뛰어내려 부복하고 있었다. 칼은 전령의 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먼지는 전령의 상체를 가득 뒤덮 어 옷 색깔을 회색으로 바꿔놓았고, 전령이 타고 온 것으로 짐작되는 말은 탈진 직전의 모습으로 궁성 경비 대원들에게 이끌려가고 있었다. 칼과 샌 슨은 조금 떨어진 위치에서 기다렸다. 잠시 후 정문으로 궁성 경비대장 조나단 아프나이델이 황급히 달려 나왔다. 조나단은 전령의 모습을 보더니 곧 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말하라.”
전령은 숨을 몰아쉬며 쥐어짜내는 목소리로 말했다.
“켄턴 시장 주리오 추발렉이 헌신과 충성으로 바이서스의 국왕 닐시언 전하께. 콜로넬 계곡의 데스나이트가 부활했습니다!”
“뭐라고?”
주위에 서 있던 경비 대원들과 조나단, 칼, 샌슨은 모두 감당할 수 없는 경악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가장 먼저 경악에서 깨어난 칼은 갑자기 앞으로 나섰다. 그는 조나단을 흘긋 보았지만 곧장 전령에게 질문했다.
“잠깐, 그렇다면 켄턴은, 켄턴은 어떻게 되었소?”
조나단은 칼의 무례함을 꾸짖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전령의 대답을 기다렸다. 전령은 어깨로 숨을 쉬며 잠시 이상스럽다는 듯이 칼을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켄턴은 무사합니다.”
“그럼, 그럼 이파실이 공격당했소?”
“아니오. 데스나이트들은 켄턴을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켄턴은 아직까지는 무사합니다. 적어도 제가 출발할 때인 엊그제 새벽녘까지는.”
칼은 완전히 혼란에 빠져버렸다. 그래서 칼은 그 스스로도 믿을 수 없는 일에 대한 대답을 전령에게 요구했다.
“어떻게. 켄턴이 데스나이트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단 말입니까?”
“아니오. 데스나이트의 부활과 동시에 한 마법사가 나타나 그들을 저지하고 있습니다.”
“마법사?”
전령은 갑자기 두 손으로 땅바닥을 짚었다. 그는 그렇게 땅을 바라보며 외쳤다.
“저는 미치지도 않았고 허튼소리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주리오 추발렉 시장님의 말을 그대로 전하는 것입니다. 단신으로 100명의 데스나이트들로 부터 켄턴을 지키고 있는 그 마법사는………… 무지개의 솔로처로 짐작됩니다!”
켄턴으로부터 아무도, 심지어 그 스스로도 믿을 수 없는 전갈을 가지고 달려온 전령이 궁성 임펠리아에 뛰어든 그 시각,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대폭 풍의 신전 그랜드스톰에서도 매우 기묘한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선두에는 꿋꿋한 모습으로 일행을 이끌고 있는 드워프들의 노커가 서 있었다. 수련사들의 많은 수가 위대한 드워프들의 노커 엑셀핸드 아인델프의 얼굴을 알고 있었지만, 그중 누구도 엑셀핸드의 이런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그 화려한 턱수염이 먼지와 땀에 범벅이 되어 밧줄처럼 엉켜 있는 데다 가 지쳐 쓰러질 듯한 발걸음으로 그랜드스톰의 입구에 나타난 엑셀핸드의 모습을 본 순간, 수련사들은 드워프들의 사회에서 반역이 일어난 것은 아 닐까 하는 우습지도 않은 생각을 떠올렸다. 게다가 엑셀핸드가 꺼낸 말은 수련사들을 더욱 당황하게 만들었다.
“너희들, 침대 밑에 숨겨둔 술병 빨리 꺼내와 수련사들이니까 당연히 그런 게 있겠지? 내가 책임지고 하이 프리스트께 말할 테니까….”
그리고 그 뒤로는 격심한 피로로 손끝을 계속해서 떨고 있는 창백한 마법사가 서 있었다. 마법사의 몰골 역시 드워프의 몰골과 그다지 다를 바 없었 다. 만일 쓰러지기라도 한다면 자기 힘으로는 절대로 못 일어날 것 같은 모습의 그 마법사는 한 블론드 소녀의 부축을 받아 간신히 쓰러지지 않고 있 었다. 아프나이델과 아일페사스였다.
아일페사스는 멍한 얼굴을 하고 있는 수련사들을 쏘아보다가 날카롭게 말했다.
“구경하느라 바빠요?”
“예에……………?”
“안 바쁘시면 저 좀 도와줘. 그렇게 인정머리들이 없니?”
수련사들은 당황하며 달려와서는 사양하는 아프나이델을 부축했다. 비록 입으로는 사양하고 있어도 아프나이델은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한 발자 국도 움직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아프나이델을 수련사들의 손에 넘긴 아일페사스는 고개를 돌려 일행의 맨 뒤에 서 있는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제레인트는 후치와 센추리온, 그리고 세레니얼의 고삐를 거머쥔 채 거기 있었다. 가혹한 질주 끝에 녹초가 되어버린 말들을 위해 일행은 말에서 내 려 걸어왔고 제레인트가 그 말들을 끌고 왔다. 겉으로 보기에 제레인트는 일행 중 가장 말짱한 모습인데다가 자세도 곧았다. 하지만 아일페사스는 겁 먹은 표정으로 제레인트를 향해 걸어갔다.
“제리? 괜찮아요?”
제레인트는 곧게 선 자세와 엄숙한 얼굴 그대로 아일페사스를 바라보며 비명을 질렀다.
“아아아아주 안 괜찮아! 크핫하하!”
“제리, 제리. 정신 차려. 그랜드스톰이에요. 다 왔다고.”
“그래애애앤드스토오옴?”
“예. 그래요. 제리. 그러니까 정신 좀 차리라고!”
아일페사스는 이 가련한 생물의 정신 구조에 혐오감을 느꼈다. 이렇게 연약하고 가늘단 말인가. 하지만 동시에 인간 속에서 자란 아일페사스는 울음 을 터뜨리고 싶어졌다. 이들 일행이 켄턴으로부터 이곳까지의 말도 되지 않는 여정을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엑셀핸드와 아일페사스의 굴하지 않는 성격 덕택이지 절대로 제레인트와 아프나이델의 디바인 파워나 마법의 영향이 아닐 것이다. 아일페사스는 다시 한번 제레인트를 위해 자신의 참을성을 나눠주기로 결심했다.
“제리? 제리. 괜찮아요. 이제 그랜드스톰이잖니. 그러니까……………”
“이루릴!”
제레인트는 갑자기 고함을 질렀다. 깜짝 놀란 아일페사스는 말을 잊은 채 제레인트를 바라보았지만 제레인트는 아일페사스가 눈에 안 들어온다는 듯이 그녀를 밀어붙였다. 아일페사스가 주춤거리는 사이에 제레인트는 이미 수련사들도 밀어붙이며 쓰러질 듯한 걸음으로 그랜드스톰으로 뛰어들었 다.
아일페사스는 배신감 비슷한 감정을 느끼며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힘없이 말들의 고삐를 주워모았다. 잠시 말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그녀는 나직 하게 말했다.
“바보 같은 동물들아. 수고했어요.”
그랜드스톰으로 뛰어든 제레인트는 멱살을 잡을 수 있는 첫 번째 사람의 멱살을 주저없이 붙잡았다. 기막힌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상대를 힘 있 게 끌어당기며 제레인트는 데스나이트와 비슷한 표정으로 외쳤다.
“이루릴은 어디 있어! 빨리 말해!”
“어, 당신 누구요? 혹시 이 옷은, 당신 제레인트 침버입니까?”
“나는 제레인트 침버고 제레인트 침버는 지금 당장 이루릴을 만나길 원해. 이루릴 어디 있어!”
그제서야 수련사들과 프리스트들은 제레인트를 뜯어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 사람에게 동시에 손을 뻗을 수 있는 사람의 숫자는 제한되어 있으며 제레인트는 그 제한적 숫자로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심하게 발악하며 고함을 질러대었다. 제레인트의 이런 광란스러운 행동의 제물인 프리 스트는 멱살이 붙잡힌 채로도 어떻게든 ‘대화’라는 것을 시도해 보고자 했다.
“난 도스펠이라고 하오. 그러니까…………”
이 인내심 깊은 인사말은 완벽한 무시를 당했다.
“이이익! 도스펠이 이루릴의 가명이 아니라면 당신에게는 볼일 없어! 이루릴을 내놓으란 말이다!”
수련사들과 프리스트들은 제레인트를 제자리에 서 있도록 만드는 데만도 죽을힘을 다해야 했다. 미쳐 날뛰던 제레인트가 잠잠해진 것은 도스펠의 등 뒤에서 거대한 체구의 프리스티스가 나타났을 때였다. 도스펠을 쥐고 흔들던 제레인트는 갑자기 손놀림을 멈추고는 넋 나간 얼굴로 그 프리스티 스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에델린!”
에델린은 뭐라고 말하려다가 그대로 제레인트에게 다가섰다. 그러자 제레인트는 도스펠의 멱살을 놓아주고는 에델린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 담긴 억울함, 슬픔, 공포를 바라보던 에델린은 천천히 두 팔을 펼쳐 제레인트를 포옹했고 그러자 제레인트의 헐떡거림은 잦아들기 시작했다. 제 레인트는 그렇게 작은 편은 아니었지만 에델린의 품에 안겨 있는 그의 모습은 어머니의 품에 안긴 아들의 모습과 비슷했다. 그리고 그의 정신 상태 역시 모자상을 연출하는 데 있어 모자람이 없었다. 에델린은 속삭이듯이 말했다.
“제레인트, 진정하세요. 괜찮을 겁니다. 진정하십시오.”
“에, 에델린……. 에델린.”
제레인트는 말하려다가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제레인트는 에델린에게 안긴 채 오래 전에 잊었던 안락함과 행복을 되새기 며 가만히 눈물을 흘렸다.
감화력을 사용하여 제레인트를 진정시킨 에델린은 그의 등 뒤로 걸어오던 아프나이델과 엑셀핸드, 그리고 아일페사스를 바라보며 슬픈 표정을 지었 다. 에델린은 고개만 끄덕여 일행에게 인사를 보낸 다음 다시 제레인트를 꼬옥 껴안았다.
잠시 후 제레인트는 한숨을 쉬며 에델린을 부드럽게 밀어내었다.
“이제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다행입니다.”
제레인트는 씁쓸하게 웃었다.
“다행이라고요? 당분간은 그 말을 아껴두셔야겠습니다. 나는 진심으로 다행이라고 말할 수 있을 때가 찾아오기를 애타게 바라고 있습니다만 지금은 전혀 그런 말을 쓸 상황이 아니군요.”
에델린은 놀란 표정으로 제레인트를 바라보았지만 제레인트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옆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던 도스펠은 그제서야 제레인트와 인간적인 대화가 가능하겠다고 판단하고는 다시 인사를 건네었다.
“바람 속에 흩날리는 코스모스를. 반갑습니다, 테페리의 지팡이여.”
“마음 가는 길은 죽 곧은 길. 조금 전엔 실례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도스펠은 괜찮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엑셀핸드와 아프나이델, 아일페사스와 인사를 나누었다. 엑셀핸드는 그랜드스톰의 하이 프리스트 의 안부에 대해 품위 있게 질문했다.
“다락귀신 녀석은 어디 있어? 얼굴도 안 비치는군.”
“하이 프리스트께서는 지금 몹시 중요한 종단의 일을 수행하고 계시느라 엑셀핸드님을 뵙지 못하는군요. 제가 여러분들을 성심 성의껏 모실 겁니 다.”
도스펠은 빙긋 웃으며 대답하다가 아프나이델의 모습을 보고서는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원로에 수고가 얼마나 많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들어가셔서 일단 여독을 푸시고…………”
“아니, 먼저 이루릴 양을 만나고 싶습니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흰 시트 위에 던지고 더도 말고 세 시간만 잠들 수 있다면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내주어도 아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에, 아프나이델은 조금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제레인트의 태도는 단호했다. 도스펠이 조금 곤란스럽게 일행을 둘러보자 아일페사스가 그 를 거들듯이 말했다.
“제리, 저 무지무지하게 졸리고 피곤하고 아프고 짜증난단 말이야. 침대로 가게 해줘. 그렇잖으면 브레스를 확 뿜어버릴 거예요!”
“웃기지 마라. 네가 무슨 브레스를.”
말한 것은 엑셀핸드였다. 아일페사스가 속여넘기기에는 일행의 지식수준이 퍽이나 높았지만 아일페사스는 왜 이들이 속지 않는가에 대해 놀라버렸 다. 도스펠은 잠시 흥미로운 표정으로 아일페사스를 바라보았지만 에델린이 그의 귓가에 대고 귓속말을 하자(“드래곤 로드의 자녀 되십니다.”) 두 눈을 홉 뜬 채 아일페사스를 노려보는 매우 실례되는 행동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러나 제레인트는 도스펠만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랜드스톰이 이루릴 양을 감금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경악했습니다. 하지만 지난 닷새를 보내고 난 지금의 나는 세상의 그 누구보다 도 먼저 이루릴 양을 붙잡고 물어보고 싶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로 휴식을 취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안내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고공을 휘몰아치는 바람은 구름을 길게 찢어내었다. 그래서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기다란 흰 리본 같은 구름이 생겨났다.
그랜드스톰의 창문을 통해 이루릴은 구름을 바라보았다.
‘구름의 결을 살핀다.’ 엘프들의 말에는 인간의 말로 번역할 때 대충 이렇게 번역되는 말이 있다. 이루릴은 구름의 결을 바라보며 상공을 휘젓고 다 니는 실프들의 질주를 가늠할 수 있었다. 내일 오후쯤 비가 올 것 같아.
“내 말을 듣고 있는 겁니까.”
이루릴은 고개를 돌려 다시 방 안을 바라보았다. 의자에 푹 빠져버린 듯한 자세의 제레인트가 잔뜩 쉰 목소리로 말했다.
“이루릴. 제가 거론한 이름을 이해하신 겁니까.”
“네.”
이루릴은 그렇게 대답했지만 사실 그녀는 제레인트보다는 도스펠과 에델린의 얼굴을 바라보느라 더 바빴다. 제레인트가 들려준 일행의 모험은 도스 펠과 에델린으로 하여금 호흡을 거의 잊게 만들었다. 도스펠은 결국 더 참지 못하고 외치고 말았다.
“데스나이트라고 하셨습니까!”
제레인트는 피로한 눈을 돌려 도스펠을 바라보며 말했다.
“예. 데스나이트입니다. 좀 억지를 부린다면 저와 제 동료 세 분이 모두 미쳤다고는 말씀하실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저 하나가 미쳤다고는 말씀하 실 수 없어요. 다른 분들도 모두 그 눈으로 보신 것이니까요.”
엑셀핸드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고 아프나이델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아일페사스는 직접 입을 열어 제레인트의 말을 매우 열성적으로 확인해 주 었다.
“그래. 저랑, 엑스 오빠, 나이드, 제리 전부 다 보고, 센추리온도, 세레니얼도, 후치도, 레틴드롤스도 보고, 주리오인가 하는 그 시장님과 히든보리라 는 사집관에……….”
· 꽤 많은 숫자가 확인했습니다. 그만해, 펫시.”
아일페사스는 제레인트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말하려 했다. 자신이 심통이 난 상태라는 것을 강조해 보이는 것에서도 그녀는 인 간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며 아프나이델은 근엄하게 말했다.
“그만해, 아일페사스.”
“그렇게 부르지 말랬잖아!”
아일페사스는 곧 아프나이델을 괴롭히는 데 더 많은 신경을 쓰게 되었고 그래서 제레인트는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켄턴 시로 피신하게 되었습니다. 콜로넬 협곡에서 데스나이트들에게 만 하루 동안 쫓긴 다음 우리들은 간신히 켄턴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그곳에서부터는 더 이상 쫓기지 않았습니다.”
“왜지요.”
이루릴은 차분하게 질문했지만 제레인트는 짓눌린 음성으로 대답했다.
“솔로처가 나타났으니까요.”
“그런가요.” “뭐라고요?” “맙소사, 에델브로이여!”
“저랑, 엑스 오빠, 나이드, 제리, 센추리온, 세레니얼, 후치, 레틴드롤스, 주리오 시장, 히든보리 사집관.. “예. 모든 사람들이 무지개의 솔로처임을 확인했습니다. 그만해, 펫시.”
거의 동시 다발적으로 폭풍 같은 대화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남겨진 것은 넋이 나가버린 도스펠과 에델린의 모습이었다. 이루릴은 이 놀라운 말에 도 침착함을 전혀 잃지 않았고,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서인지 제레인트 역시 그랜드스톰으로 들어올 때의 흥분을 많이 잊고서 침착하게 말을 나누고 있었다. 에델브로이의 프리스트와 프리스티스는 이 비정상적일 정도로 차분한 대화를 들으며 매우 혼란스러웠다.
“잠깐, 잠깐만. 제레인트, 솔로처라고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켄턴의 입장에서는 매우 다행한 일이라 하겠습니다만……………”
“어떻게 말입니까! 저 데스나이트들이라면, 그들은 어둠의 세력이니만큼 생사의 율법을 뛰어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솔로처는 인간입니 다! 그렇다면.”
‘그렇다면’이후에 도스펠의 뇌리를 스친 생각은 그의 입을 얼어붙게 만들 정도로 충격적인 것이었다. 도스펠은 아니라는 대답을 기대하며 질문했 다.
“서, 설마 무지개의 솔로처가 리치가 되었다는……………”
“모르겠습니다.” “예?”
“모르겠다고요. 확인할 시간도, 방법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단신으로 100명의 데스나이트들을 공격하고 있던 한 마법사의 모습뿐입니다. 그것도 아주아주 먼 거리에서였지요. 접근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 화염과 폭발, 그리고 쏟아지는 눈보라와 비바람, 그리고 찢어지는 땅 속에서 분출하는 용암을 뚫고 그에게 접근하는 것은……………, 글쎄요. 아무리 춥다고 해도 화산에 뛰어들 수야 없잖습니까.”
제레인트의 이야기를 들으며 엑셀핸드는 그때, 켄턴의 성문을 빠져나오며 바라본 데이든 평야의 모습을 떠올리며 진저리쳤다. 온통 보랏빛으로 물 든 밤하늘에서는 불덩어리와 눈보라가 쉴 새 없이 쏟아져내렸고 땅은 끔찍한 비명을 토하며 산산조각나고 있었다. 허공에서는 기괴한 광채가 흘러넘 쳤고 똑바로 바라보기도 어려울 정도의 섬광이 숨 쉴 새도 없이 번득였다. 엑셀핸드는 자신도 모르게 턱수염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하지만 제레인트 는 도발적일 정도로 태평하게 말했다.
“뭐, 그 모든 관문을 통과했다 하더라도 그를 확인하는 것은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그 마법사는 도무지 땅에 서 있지를 않았으니까요.”
“예?”
“새보다 더 잘 날더란 말입니다. 그리고 번개보다 빠르게 움직였고요. 하아. 저는 절정에 달한 마법사가 어떤 것인지 보았습니다. 제가 마법사에 대 해 말한다면 우습게 생각하실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이 말은 아프나이델이 말해 준 것이지요.”
의자에 기대어 반쯤 졸고 있던 아프나이델은 이름이 거론되자 힘들게 몸을 일으켰다.
“예. 그것은 클래스 9의 마스터가 아니고선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확인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만일 그런 재주를 보여줄 수 있다면 그 건 솔로처이거나, 아니면 핸드레이크일 것입니다. 하지만 일단은 솔로처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데스나이트들을 상대하고 있었으니까요.”
제레인트는 동상처럼 굳어버린 도스펠을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이루릴을 보았다. 이루릴은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약간 촉촉한 눈빛에서도, 그리고 정갈하게 닫힌 입술에서도 이루릴이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증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제레인트는 그 무표정에 괴로 워하며 말했다.
“이것이 제가 본 것입니다. 이루릴.”
“고생하셨군요. 피로해 보입니다.”
제레인트는 이 호의에 대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그래서 눈을 질끈 감았다. 잠시 그런 자세로 앉아 있던 제레인트는 고개를 들어올려 의자 등받 이에 뒤통수를 얹었다. 그는 그렇게 무례한 자세로 도스펠을 거꾸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그랜드스톰에서 이루릴 양을 감금하신 이유를 말씀해 주십시오. 저는 말입니다, 그랜드스톰에서 이루릴 양을 감금한 직후 이 웃기지도 않는 사태가 일어난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그것도 엄청나게.”
데스나이트의 부활, 그리고 솔로처의 부활이라는 꿈에서도 떠올릴 수 없는 이야기 때문에 극도의 혼란에 빠져 있던 도스펠은 에델린의 눈짓이 있고 서야 간신히 말을 할 기운을 되찾았다. 그는 띄엄띄엄 이야기했고 출생률의 하락과 엘프들을 연관지어 생각해 본 것이라는 설명은 제레인트의 비웃 음을 사게 되었다.
“고맙습니다. 이젠 피로를 잊었습니다, 도스펠 님.”
“예?”
“농담은 지친 심신에 활력소가 되어주겠지요.”
도스펠은 이 모욕에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그를 변호해 준 것은 아무도 예상치 못한 자였다. 이루릴은 얌전하면서도 우려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제레인트? 도스펠 씨는 농담을 하신 것이 아닌데요.”
이루릴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들에 담긴 감정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이루릴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농담 맞나요?”
“우으으음!”
엑셀핸드는 끔찍한 신음 소리를 내뱉었고 아프나이델은 의자에 몸을 깊숙이 파묻어서 세상의 그 누구와도 이야기하지 않겠다는 듯한 자세를 취했 다. 그리고 제레인트는 킬킬거리기 시작했다.
“우킬킬킬! 이루릴, 아뇨. 하하, 그건 농담이 아닙니다. 예. 음. 뭐라고 설명해야 되나. 아, 그러니까 제가 도스펠 님의 말이 말도 되지 않는다고 주장 하는 것입니다.”
“왜지요? 저는 그것이 사실 여부와 관련 없이 그럴듯한 추리라고 생각하는데요.”
“전혀 그럴듯하지 않아요! 당신은 스스로의 존재도 모릅니까, 이루릴?”
“예?”
“당신들은 엘프와 순결의 그랑엘베르의 충실한 신도이기에 앞서 유피넬의 어린 자식이란 말입니다. 조화의 유피넬, 유피넬의 어린 자식이라고요. 그래서 당신들의 모든 행동 원리는, 의도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그분의 뜻을 실현하게 된단 말입니다. 따라서 당신들은 출생률을 낮추거나 할 수는 없어요.”
“어째서죠?”
제레인트는 이만큼 명쾌할 수도 없다는 듯이 간단하게 말했다.
“출생은 남녀의 조화의 결실이니까요.”
따악! 다른 사람이 아니다. 에델린이 그 엄청난 주먹을 휘둘러 자신의 이마를 친 것이다. 그랜드스톰의 장엄한 건물은 에델린에게서 나온 소리를 중 후하게 증폭시켰고 그래서 아일페사스는 감탄한 표정으로 에델린의 이마를 바라보며 천연덕스럽게 생각했다.
‘아마 금 갔을 거야.’
에델린은 아일페사스의 이런 우려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말했다.
“그렇군요, 그래요! 유피넬의 어린 자식인 엘프가 남녀의 에, 으흠, 그 조화를 깨버릴 수는 없지요!”
제레인트는 도스펠을 바라보며 훨씬 직설적인 단어로 말했다.
“그러니까 엘프들이 불능이나 불임을 야기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그건 전혀 조화롭지 못한 가정을 약속하게 될 겁니다.”
“왜?”
물어온 아일페사스를 상대하기 위해 아프나이델은 진땀을 흘려야 했다. 아프나이델은 무수히 아일페사스의 풀네임을 불러대어야 했고 그 대가로 무 수히 꼬집혔다. 아프나이델의 이런 희생정신은 많은 이를 감동시켰다. 이루릴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 그렇군요. 그 생각을 떠올리지 못했어요.”
불쌍한 도스펠은 이제 졸도할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당신들의 소행이 아닙니까?”
“예.”
“그럼 왜 그렇다고 주장하지 않았습니까! 왜 내가 계속해서 당신을 의심하도록 내버려두고…………”
“알고 있었으니까요.”
“예?”
“저 역시 출생률이 떨어지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물론 저희들 스스로의 출생 숫자로 알아차린 것은 아니지요. 엘프들은 출생률이 상당히 낮은 종 족이니까요. 하지만 나무 그늘 아래를 오가는 많은 동물들과 그 위를 날아다니는 많은 새들의 출생률은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도스펠 씨의 설명을 듣게 되자 그것이 그럴듯하다고 생각되더군요.”
“설마, 내 말이 그럴듯하다는 이유로 자기변호를 안했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지요?”
이루릴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려 도스펠을 외면했다. 고개를 돌린 그녀의 눈에 엑셀핸드의 모습이 들어왔다. 순 간, 엑셀핸드와 이루릴의 눈이 마주쳤다.
‘자네들도?”
‘그렇습니다. 슬프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알았네.’
세상의 패권을 쥔 종족이 아니라는 그 공통점 때문에, 가장 이해하기 어려울 것 같은 종족이 이루릴의 행동을 이해해 버리는 진귀한 사태가 벌어졌 다. 엑셀핸드는 느리지만 틀리지는 않는 그 노회한 사고 활동을 통해 이루릴의 행동을 천천히 이해해 들어갔다.
인간들에 의해 세상이 잠식당하는 것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사실로 굳어가고 있다. 그러나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사태가 도스펠의 설명대로 그랑엘베 르의 행사함이었다면, 그 결과도 도스펠의 설명대로 될 것이다. 선대의 업적을 후대에 이어 불사성을 구가하는 인간들이 더 이상 자손들을 가질 수 없게 된다면, 그들은 세상의 무대 중앙에서 물러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엘프들이 그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지만, 사실이 그렇다면 어떨까요.’
이루릴은 수동적으로 행동함으로써 능동적인 결과를 유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인간들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음으로써 인간들이 오판하게 만들고, 그 동안 그랑엘베르의 행사가 계속 진행되도록 내버려둔다. 엘프들이 무고한 것을 알게 된다면 인간들은 사태의 진상을 찾아낼지도 모른다. 이루릴은 물론 그 진상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도스펠의 예상대로 정말 그랑엘베르의 행사함이라면………………
‘차라리 내버려두고 싶었어요.’
‘하지만 그게 옳은 일일까요?”
그것이 정말 그랑엘베르의 행동이기를 바라는 마음과 그것을 거부하는 마음을 동시에 키워가면서, 이루릴은 그 양자 중 어떤 것도 선택할 수 없었 고, 그래서 입을 다물었다. 여기에 만연한 것은 세상의 흐름에서 떨어져나가는 종족의 슬픔과 비극뿐이다. 이런 수동성이, 사물의 이유와 원리를 찾 기보다는 되는 대로 내버려두고 싶어 하는 수동성이 이 아름다운 종족으로 하여금 세상의 흐름에서 떨어져나가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엑셀핸드는 주섬주섬 파이프를 꺼냈다.
도스펠은 도저히 이루릴의 설명을 받아들이기 못하겠다는 듯이 씨근거리며 그녀를 재촉했다. 하지만 이루릴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도스펠이 먼저 지쳐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제레인트가 그의 말을 자르면서 질문했기 때문에 도스펠은 더 이상 이루릴을 닦달할 수가 없었다.
“이루릴 양, 그럼 엘프들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는 말입니까?”
“예. 우리는 정원사일 뿐입니다. 꽃과 풀을 보살필 수는 있지만, 땅을 파헤치고 계곡을 메우고 강물의 흐름을 뒤바꾸지는 않습니다.”
“당신들이 아니었단 말이군요……………. 이런, 제길! 하긴 그게 당연하지!”
이루릴은 고개를 갸웃하며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제레인트는 머리를 감싸며 말했다.
“나는 가설을 하나 세웠습니다, 이루릴. 하지만 그 가설을 사실로 만들려면 드래곤의 힘이나, 최소한 엘프들의 힘이 필요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신의 도움도 필요없는 드래곤이거나 아니면 유피넬의 어린 자식인 당신들이 아니고서는 그런 계획을 세울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드래곤의 경 우라면, 펫시가 우리들에게 말해 줄 수 있었을 겁니다. 물론 어린 웜링이라서 다른 드래곤들이 그녀를 드래곤으로 취급하지 않을……………”
“한 번만 더 말해 봐!”
아일페사스는 눈꼬리를 치켜올리며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아무도 무섭게 만들지 못했고 엑셀핸드는 심지어 웃기까지 했다.
“라자도 없이 우리랑 있는 주제에. 까불지 마.”
“엑스 오빠, 너!”
아일페사스는 팔짝팔짝 뛰면서 분노했지만 제레인트는 그 분노 때문에 자신의 말을 멈추지는 않았다. 제레인트는 의연하고도 직설적으로 말했다. “어쨌든 최악의 경우 아일페사스가 인질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드래곤이 그런 행동을 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럼 제 가설을 가능하게 만들 수 있 을 정도의 종족은 엘프 정도가 남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엘프들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고 말했지요?”
“예.”
“그렇다면・・・・・・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도무지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된 것인지.”
“그 가설이란 무엇입니까?”
이루릴의 질문은 그녀의 궁금함뿐만 아니라 방 안에 있는 모든 종족들의 궁금함을 대변하고 있었다. 심지어 아일페사스마저도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제레인트의 말을 기다렸다. 머리를 감싸 쥔 채 고민하던 제레인트는 그 시선들을 느끼고는 힘없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가설이 뭐냐고요? 간단하지 않습니까? 아이는 태어나지 않고, 과거는 돌아오고 있습니다.”
“장미는 피지 않고, 과일은 썩지 않지요.”
무척 떨리고 있는 이 음성은 이루릴의 것이 아니었다. 일행들이 바라본 곳에는 문을 열고 들어서는 두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아프나이델이 반갑게 외쳤다.
“칼! 샌슨!”
켄턴으로부터의 전령이 가져온 전갈을 받자마자 칼은 곧장 샌슨을 동반하여 그랜드스톰으로 달려왔다. 솔로처의 이야기는 믿을 수 없지만, 데스나 이트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그랜드스톰의 도움이 있지 않고서는 대응하기가 어려울 거라는 판단 하에서의 행동이었다. 이유에 대한 탐구보다는 그 대응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칼은 궁성 안의 고관대작들과 구별되는 민첩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입구에 도착한 그 둘에게 수련사들 이 그들의 옛 친구들이 와 있다는 사실을 들려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샌슨은 반가운 이들이 한자리에 몰려 앉아 있는 것을 보고, 특히 이루릴의 모습을 보고 크게 기뻐했다. 그들은 모두 드래곤 슬레이어 길시언이 크라 드메서를 물리칠 때 한자리에 있었던 동료들이었다. 하지만 칼은 그런 감회에 젖을 여유도 없이 곧장 말했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하지만 사태가 사태니만큼 모든 예절은 잠시 보류하겠습니다. 침버 씨, 당신의 가설은 무엇입니까?”
“반갑군요, 칼. 그런데, 장미는 피지 않고 과일은 썩지 않는다고 했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임펠리아의 후원에서 벌써 피었어야 할 장미들이 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이서스 임펠의 과일 가게의 과일들은 도통 썩 지를 않는군요. 나타나야 할 것은 나타나지 않고, 사라져가야 할 것들은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조금 전에는 켄턴으로부터 달려온 전령이 말하길……”
“우리들도 거기서 달려왔습니다.”
“맙소사, 그럼……, 사라졌던 것들이 돌아온다는 점도 추가해야겠군요. 그렇다면 그 가설이란..”
제레인트가 대답하기에 앞서 다른 목소리가 칼의 질문에 대답했다.
“시간이 느려지고 있는 것 같군요.”
바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제레인트와 칼,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고 있던 모든 사람들과 드래곤, 드워프, 트롤의 눈이 엘프에게로 돌아갔다. 엑셀 핸드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시, 시간?”
“예. 유피넬과 헬카네스의 딸이자 두 분이 공존할 수 있는 하나의 요건인 시간. 만일 시간이 없다면 유피넬과 헬카네스 모두 존재할 수 없어요. 아시 “나요?”
“그럼! 당연히 알지. 그런데?”
“현재의 시간이 느려지고 있는 것 같군요.”
제레인트와 칼, 그리고 아프나이델의 얼굴이 시퍼렇게 변했다. 이루릴은 그들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손을 들어올렸다. 그녀는 허공에서 마치 뭔 가가 흐르는 듯한 손짓을 하며 엑셀핸드에게 말했다. 엑셀핸드가 이해하면 모든 종족들이 이해할 거라는 확신이 있는 모양이었다.
“시간이라는 것을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엑셀핸드. 기나긴 강. 그리고 그 강에는 수많은 보트들이 강물을 따라 흘러내려 가고 있어요. 엑셀핸드 역 시 그 배 중의 하나에 타고 있어요. 상상하실 수 있지요?”
모든 종족들의 머릿속에 각자의 강과 각자의 보트가 흐르기 시작했다. 일스 출신인 제레인트의 경우에는 대형 범선이 떠올랐고 아프나이델의 머릿 속에는 작은 보트가 떠올랐으며 아일페사스의 머릿속에는 매우 모호한 형태의 나무 조각이 강물을 따라 흐르는 모습이 떠올랐다. 엑셀핸드는 보트라 는 말에 눈썹을 조금 찌푸렸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예. 모든 보트들은 강물을 따라 흐르기 때문에 속력이 똑같아요. 그리고 보트가 강물을 따라 흘러내려 가는 동안 엑셀핸드께서는 강변의 모습들이 바뀌는 것을 보실 수 있을 거예요.”
“음음. 좋아. 이해했네.”
“예. 그런데 엑셀핸드가 탄 보트가 갑자기 느려지면 어떻게 될까요?”
“느려져?”
“멈췄다고 해볼까요. 엑셀핸드께서 탄 보트가 갑자기 닻을 내리고 멈췄어요. 그렇다면 어떻게 될까요. 계속 바뀌던 강변의 모습은 갑자기 정지해 버 릴 거예요. 그리고 그 강변에는 많은 보트가 함께 떠내려가고 있다고 했지요? 엑셀핸드의 뒤를 따라오던 보트들은 갑자기 엑셀핸드의 옆으로 나타나 게 될 거예요. 그리고 엑셀핸드의 앞을 달리고 있던 보트는 갑자기 멀어지게 될 테고. 이해가 되시나요?”
“간단하군. 이해했네. 그런데 그게 왜?”
아일페사스는 엑셀핸드가 정말로 이해했는지 의심스러웠지만 그 의심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대화를 주고받고 있는 두 비인간 종족들은 깨 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방안에 있던 다른 인간들과 다른 종족의 얼굴은 시커멓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이루릴은 조용히 말했다.
“그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인 듯하군요.”
“응? 무슨 말인가?”
이루릴은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기며 평온하게 말했다.
“우리가 타고 있는 보트가 멈춰 선 거예요. 그 보트의 이름은 ‘현재’. 현재라는 보트가 멈춰 서자 우리 뒤를 따라오던 보트는 갑자기 우리 옆으로 나 타나게 된 거죠. 그 보트의 이름은 ‘과거’, 그리고 우리 앞을 달리던 보트는 갑자기 멀어지게 되었어요. 그 보트의 이름은 ‘미래’. 과거는 갑자기 우리 에게 다가오게 되고, 미래는…………, 글쎄요. 아마도 점복가들이나 무녀들은 이제 미래를 보는 것이 예전과는 달리 힘들어지게 되었다는 것을 느끼게 되 겠지요.”
이루릴의 평온한 목소리 때문에 엑셀핸드는 이루릴의 말이 실제로 전하는 의미보다 훨씬 온건한 의미밖에 전달받지 못했다. 그래서 이 경악할 말을 들은 순간 드워프들의 노커 엑셀핸드는 그의 상상 속의 배가 닻을 내리고 멈췄다는 사실에만 안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루릴의 말이 전하는 실제적 인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받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렇게 된 겁니까……?”
엑셀핸드는 고개를 돌렸고, 순간 눈을 꿈틀거렸다. 제레인트의 얼굴에는 죽은 자가 보여주는 만큼의 생기도 없었다. 엑셀핸드는 당황스러운 눈빛을 여러 군데로 보내었고 그 눈빛이 닿는 곳마다 경악으로 일그러진 얼굴들이 들어오는 것을 깨닫고는 놀랐다. 제레인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까? 내 가설이 맞다는 말입니까?”
“그렇게 추측되는군요. 나타나야 할 것들은 나타나지 않고, 사라져야 할 것들은 사라지지 않고, 이미 사라졌던 것들은 다시 나타나고 있으니…………. 미 래는 오지 않고, 현재는 그대로 있으며, 과거는 되돌아오고 있다는 말이로군요. 그렇다면 현재가 멈춘 것이겠지요.”
“우리가 파멸한다는 말입니까!”
제레인트의 외침 소리는 인간이 내뱉었다고 믿기 어려운 것이었다. 아일페사스는 턱이 완전히 빠져버린 얼굴로 제레인트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아일페사스는 손을 들어 입을 막고 말았다. 제레인트는 울고 있었다. 그는 흐느껴 울면서도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을 전혀 알아차 리지 못한 채 이루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그래서 과거가 우리를 따라잡은 것이군요. 100명의 데스나이트가 우리를 따라잡았고, 솔로처가 우리를 따라잡은 것이군요. 영원히 다가오 지 않을, 그래서 안전한 과거가 이젠 더 이상 안전한 것이 아니게 되었군요. 과거가 직접 우리에게 횡포를 부리게 되었어요. 그렇게 된 것이군요!” 이루릴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제레인트를 바라보았지만 제레인트가 갑자기 허물어져버렸기 때문에 질문을 하진 못했다. 털썩. 제레인트는 무릎을 꿇었다. 제레인트는 그렇게 의자에 앉은 이루릴의 발치에 무릎을 꿇은 채 하염없이 울면서 이루릴을 올려다보았다. 급격한 동작 때문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그의 얼굴을 뒤덮었지만 제레인트는 머리카락을 추스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이루릴만을 올려다보았다.
“시간이……”
제레인트는 말을 잇지 못하고 꺽꺽거렸다. 뭔가 말을 꺼내려던 이루릴은 입을 다물고는 의자에서 내려서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제레인트의 얼굴을 똑바로 들여다보다가 천천히 팔을 들어올렸다. 제레인트의 어깨에 부드럽게 손을 올려놓은 이루릴은 천천히 그를 끌어당겼다. 제레인트는 아 무런 힘도 없는 것처럼 이루릴에게 안겼다. 이루릴은 제레인트의 머리를 감싸 안으며 속삭이듯이 말했다.
“제레인트……”
제레인트는 이루릴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채 크게 흐느끼며 말했다.
“우리가 추억으로 보듬고 치장하고 감싸왔던, 우리 추억의 감옥 속의 영원한 죄수일 거라 믿었던 그 과거가 시퍼런 날을 번득이며, 우리를, 우리 를……………. 으흑!”
이루릴은 두 팔을 크게 벌려 제레인트의 넓은 어깨를 모두 감싸 안으려 노력하며 작게 속삭였다.
“난……, 당신의 슬픔을 모르겠어요, 제레인트. 과거가 무서우신가요.”
제레인트는 이루릴을 끌어안으며 외쳤다.
“과거가요? 물론 과거는 무섭습니다! 과거는 추억 속에 있어야 해요! 흑, 크흑! 추억 속에 있는 것은 아름답습니다. 추억은 미화되고 꾸며집니다. 그 것이 다시 돌아와서, 내가 기억하는 추억과 다른 실제의 모습을 보여준다면, 그렇다면 내 추억은 산산이 부서지겠지요. 추억 위에 살고 있는 나 역시 부서지겠지요. 아버지는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개망나니일지도 모르지요. 돌아가신 어머니는, 아아, 사람들이 어머니를 어떻게 부를지 모르겠 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아프나이델은 엑셀핸드의 어깨를 빌려야 했다. 엑셀핸드는 불안한 표정으로 돌아보았고 아일페사스는 끙끙거리듯이 그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겼지만 아프나이델은 알아차리지 못한 채 이루릴과 제레인트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직까지 알아차리지 못한, 그러나 이제는 분명히 돌아오고 있을 그의 과거를 떠올리며 진저리쳤다. 테페리의 프리스트가 알아차린 것은, 그가 무서워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런 것들이었는가.
그러나 아프나이델이 받아야 할 충격은 아직 남아 있었다. 제레인트는 비명을 지르듯이 외쳤다.
“나는 우리가 미래를 잃었다는 것이 무섭습니다. 슬픕니다!”
제레인트의 외침 소리가 가져온 충격 속에서 말을 꺼낼 정도의 자제력을 보여준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방 안에 있는 많은 종족들이 경악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 동안, 유피넬의 어린 자식만은 낮게 속삭였다.
“제레인트……”
“미래, 미래는 이제 오지 않는 것이군요. 크흑! 우리가, 우리가 여기서 멈췄으니까. 이제 다시는 아기가, 우리의 2세가 태어나지 않겠군요. 농부가 뿌린 씨는 씨로 남을 것이고, 수확된 과일은 썩지 않겠군요. 이젠 아무도 죽지 않게 되는 겁니까? 그 어떤 자도 나이를 먹지 않는 겁니까? 그렇습니 까!”
이루릴은 엘프다. 따라서 입을 다물 줄은 알지만 자신을 위해서든 상대를 위해서든 거짓말을 하지는 않는다.
“저는 그럴 거라고 생각해요.”
“테페리여…………, 테페리여! 테페리여!”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는 진저리치는 제레인트의 등을 이루릴은 걱정스러운 손길로 쓸어내렸다. 아일페사스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조금 언짢 은 표정을 지었다. 처음 보는 엘프에게 자신의 동료를 뺏긴 듯한 기분을 느끼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위대한 드래곤 아일페사스는 고 개를 돌려 아프나이델을 바라보았다.
아프나이델은 힘겨운 표정을 지었고 엑셀핸드는 아무 말 없이 의자를 끌어와 그를 앉혔다. 칼의 경우에는 이미 의자에 주저앉아서는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있어 그 표정을 볼 수 없었다. 샌슨은 그런 칼을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일페사스는 이들의 공포와 절망을 이해해 보려고 노력하는 대신 아프나이델의 무릎에 올라앉았다. 의기소침한 모습으로 앉아 있던 아프나이델은 무릎을 누르는 묵직한 느낌에 고개를 들어 아일페사 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이드. 시간이 어떻게 되었다는 거죠?”
아프나이델은 아일페사스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대답을 했다.
“파멸이야……”
엑셀핸드는 움찔했다. 아일페사스는 미간을 좁히며 되물었다.
“응?”
“시간이 멈췄으니까.”
“히잉. 멈춘 것이지 아무것도 부서지는 것은 아니잖아? 아무도 안 죽는다면서요? 어, 데스나이트들 때문에?”
“아니, 아니, 그게 아냐. 시간이 멈춘 것, 그게 바로 파멸이야. 파멸이 뭐지, 펫시?”
아일페사스는 아프나이델의 말보다는 그 마지막의 호칭에 더 놀랐다. 그녀는 크게 당황한 채로 말했다.
“모든 것이 파괴되고, 불타오르고, 산산조각나고…………, 그런 거?”
“아니야. 진정한 파멸은 그런 것이 아니란다, 펫시.”
아프나이델은 자신이 사용한 호칭에 어울리는 동작으로 천천히 아일페사스의 머리를 보듬었고 아일페사스는 영문을 모르는 얼굴로 아프나이델의 가슴에 뺨을 댄 채 그의 말을 기다렸다. 아일페사스의 부드러운 블론드에 얼굴을 파묻으며, 아프나이델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파괴되고, 불타오르고, 산산조각나는 것은 진행형이야. 그것 또한 파괴지만, 그 이후에 다시 태어나고, 번성하고, 찬란하게 피어날 것을 약속하는 것이기도 하지. 파괴와 생성은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재된 적극성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동일하다고도 말할 수 있는 것들이야. 세상에는 진 정한 파괴란 없단다. 아니, 그런 것은 없었다고 말해야겠구나. 하지만 우리가 맞닥뜨린 것은 그것들을 모두 무시하는 현상이야.”
아프나이델은 더욱 힘껏 아일페사스를 끌어안았다. 무섭고 답답한 기분에 아일페사스는 칭얼거리고 싶어졌지만 아프나이델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입술을 깨물었다. 아프나이델은 더욱 낮은 목소리로 더욱 높게 절규했다.
“펫시, 펫시! 으흑. 너에게 아름다운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단다. 드래곤 로드께서 기대했던 것보다 더 아름다운 모습들을. 비록 우리 종족에게 필연코 따라다니는 슬프고 아픈 모습들을 보게 되더라도, 그 모습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 뒤에 있는 희망까지 읽어내는 법을 가르치고 싶었지. 그게 너에 게 보여줄 수 있는 우리 종족의 가장 큰 장점이었을 텐데. 그랬는데……
“4015……”
“그래, 기뻐할까? 이젠 슬픔은 영원히 슬픔이겠지만, 기쁨은 영원히 기쁨이겠군. 사랑하는 부모는 절대 우리 곁을 떠나지 않을 테고, 부모는 영원히 귀엽고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있는 자녀를 볼 수 있게 되겠구나. 기뻐할까? 기뻐할까…………, 기뻐할까.”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칼이 갑작스럽게 아프나이델의 말을 받았다.
“그러나 아기를 원하는 부부는 절대로 천진한 웃음으로 집안을 채워줄 아기를 얻지 못하겠지. 사랑하는 남녀는 절대로 결합될 수 없겠지. 그 어떤 농부가 뿌린 씨도 결실을 얻지는 못하겠지. 가장 시시한 병에 걸린 자도 영원히 그 병에 아파해야겠지. 베인 살은 아물지 않고, 다친 마음 역시 아물 수 없겠지…………. 오오! 맙소사, 유피넬이여!”
저주를 전하는 모든 전달자의 음성보다 더 음산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칼은 결국 절규하고 말았다. 샌슨은 어찌할 줄 몰라 당황해했다.
“그렇다면……”
“누굽니까!”
도스펠의 격한 고함소리에 제레인트와 아프나이델마저 고개를 돌렸다. 도스펠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이루릴을 쏘아보며 말했다.
“당신이 아니라면, 당신네들이 아니라면 도대체 시간이라는 강에 파멸의 닻을 던져 우리들의 배, 이 현재를 고정시켜 버린 자가 누구란 말입니까!”
이루릴은 고개를 저었다.
“모릅니다. 하지만 알아봐야겠지요, 더 늦기 전에.”
“더 늦기 전에?”
샌슨은 눈을 껌뻑거리며 이루릴을 바라보았고 엑셀핸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루릴은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일어나서는 제레인트의 손을 붙잡았다. 제레인트는 그 손을 맞잡고 간신히 일어날 수 있었다. 이루릴은 방 안을 주욱 둘러보며 말했다.
“우리의 무지마저도 고정되기 전에, 우리가 영원히 그것을 알아내지 못할 정도로 현재가 멈춰버리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