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1264~1265화
1264화. 살려 보내지 않는다. (4)
소란하던 전장에 침묵이 내려앉은 건, 괴이한 일이라 봐야 할 것이다.
서로 물어뜯고 검을 휘둘러 대던 이들이 한 사람의 존재와 한마디 말로 인해 멈추는 상황이 말이다.
‘저래도 되나?’
그리고 곽환소는 이 상황뿐만 아니라, 청명의 말에 큰 충격과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호가명이 누구인가? 저 만인방의 군사이자, 명실상부한 만인방의 이인자다.
아니, 지금 시점이라면 살짝 과장 보태서 저 강남을 지배하고 있는 사패련의 이인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사람이다.
천하에 아무리 많은 명사가 있다지만, 전 강호를 통틀어 그 중요도를 따지면 열 손가락 안에는 못 들어도 스무 발가락 안에는 응당 들어갈 수밖에 없는 사람이란 의미다.
그런데 뭐? 누구?
‘진짜 저 양반 제정신인가?’
아무리 괴상한 인간이라 해도 꾸준히 지켜보다 보면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되는 게 정상일진대, 저자는 볼수록 더 알 수가 없었다.
“…… 안면은 있는 것 같은데.”
이젠 아예 호가명을 바라보며 고개를 연신 갸웃대고 있었다. 그런 청명을 보고 있자니 문득 ‘이해’라는 게 무엇인지에 대한 근원적이고 근본적인 의문이 들 지경이었다.
“그…… 청명아.”
싸늘해진 분위기 속에서 슬금슬금 다가온 윤종이 목소리를 낮추며 청명에게 귀띔했다.
“호가명이잖아, 호가명.”
“…..…호, 뭐?”
“호가명!”
“그게 누군데?”
윤종의 얼굴이 괴이하게 뒤틀렸다.
“호가명! 이 새끼야! 호가명! 우리 회의할 때마다 나왔던 이름이잖아! 만인방의 군사 호가명!”
“아!”
청명이 눈을 빛내며 손뼉을 짝 쳤다.
“나 쟤 누군지 알아!”
“드디어 기억났냐?”
“장일소 그 새끼 졸졸 따라다니면서 수발드는 새끼!”
“……”
윤종이 순간 한 손으로 제 눈을 턱 덮었다.
‘그래. 그렇게라도 알아서 다행이다.’
모르는 것보다는 낫지.
그게 어디냐, 그게……
“아아, 미안.”
청명이 피식 웃으며 호가명에게 너스레를 떨었다.
“내가 사람 얼굴을 기억 못하는 편은 아닌데..….”
“못하는 편이야.”
“많이 못하는 편이다. 청명아.”
“아닙니다. 저 새끼는 사람 얼굴은 잘 기억해요. 저런 인간들을 사람으로 안 치는 거지.”
“..….그것도 일리가 있는 말이네.”
옆에서 뭐라고 하건 말건 청명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볼 때마다 워낙 눈에 띄는 놈이 같이 있어서 말이야. 미안하게 됐네.”
“……”
“솔직히 말이야 바른말이지. 화장한 사내새끼가 앞에서 깨춤을 추고 있는데, 쟤가 눈에 들어오기나 하겠냐고. 이건 내 탓이 아니지.”
또다시 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 뭐랄까 굉장히 잘못된 말 같기는 한데……
‘납득 간다.’
‘그건 솔직히 장일소 잘못이 맞다.’
‘수수한 게 죄는 아닌데……’
청명이 히죽 웃으며 호가명을 보았다.
“장일소 없이 따로 다니시기도 하는 모양이네. 괜찮겠어? 혼자서?”
모두의 시선이 호가명에게로 쏠렸다.
사실 저건 굉장히 굴욕적인 말이다. 호가명은 누가 뭐래도 확고부동한 만인방의 이인자다. 그런 이에게 저 말이 모멸감을 주지 않을 리 없다. 면전에 퍼붓는 모욕이나 다름없었다.
특히나…… 무위가 무엇보다 중요한 사파의 세계에서 무위가 그리 뛰어나지 않은 호가명이 지금의 위치에 오른 것은 장일소의 절대적인 비호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도 사실.
몇 마디 되지 않으나 청명의 말에는 ‘너는 장일소라는 범 덕분에 호가호위하는 여우에 불과하다’는 비하마저 담겨 있었다.
따지고 보면 그 말이 그리 틀리지 않기에 호가명이 느끼는 굴욕감은 더욱 클 것이다.
모두가 호가명의 반응을 살폈다. 그가 어떻게 분노를 표출할지 궁금했던 것이다.
하지만 모두의 시선 속에서도 호가명은 여전히 표정 하나 없었다. 평소처럼 서늘한 눈으로 전황을 살핀 호가명의 입술이 무심하게 열렸다.
“굉장히 무례한 말이지만…… 상대가 화산검협이라면 무례가 무례일 수 없겠지.”
나직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귀에 박히는 목소리였다. 청명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호가명이 담담한 얼굴로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오히려 천하의 화산검협이 내 얼굴을 기억해 준 게 영광이지.”
그의 목소리엔 비꼬는 기색이라고는 없었다. 청명의 도발을 그저 담담히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이 이곳에 있는 이들로 하여금 화산검협이라는 이를 다시 보게끔 했다.
저 만인방의 군사. 아니, 이제는 사패련의 군사라 불러야 할 호가명이 청명이 자신을 알아주어 영광이라 말하고 있지 않은가? 새삼 그들과 함께 서 있는 이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절감하게 만드는 말이었다.
“하지만…… 조금 놀랍기도 하군.”
호가명의 시선이 청명에게서 떠나 천우맹의 다른 명도를 하나하나에게 닿았다. 흡사 꿰뚫는 듯한 눈빛이었다.
“무슨 생각으로 이 먼 남해의 땅까지 오셨는지 말이야.”
공기가 삽시간에 싸늘히 식었다. 청명이 쯧 하고 혀를 찼다.
“재미없는 새끼네.”
살짝 흔들어 봤지만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
청명은 알고 있다. 경험상 이런 유형이 상대하기 가장 껄끄럽다는 것을.
“놀래는 맛도 없고.”
“아니.”
의외로 호가명이 고개를 내저었다.
“굉장히 놀라는 중이다. 이곳에서 그대들을 만나게 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으니까.”
“……”
“련주께서 하신 말씀이 틀리지 않았군. 진짜 무서운 건 강자가 아니라 광인이라더니……”
이해를 할 수가 없다. 이 상황도, 천우맹의 의도도.
아니. 의도를 이해 못 한다는 건 조금 틀린 말이다.
의도는 이해한다. 해남을 구하고 싶었겠지. 협의를 위해서든, 추후에 사패련을 상대할 전력을 조금이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서든.
호가명이 이해하지 못하는 건 그런 부분이 아니다.
“하나 물어도 되겠나?”
“얼마든지.”
“구파일방 중 하나인 해남, 물론 중요한 문파겠지. 하지만…… 그대들은 정말 이곳에 있는 그대들의 목숨이 해남보다 중하지 않다고 여기는 건가?”
그 말에 몇몇 이들의 안색이 변했다.
담담히 물어와서 오히려 더욱 폐부에 박히는 질문이었다.
“실수를 저지르지 않아야 한다는 말은 냉정히 말하면 틀렸다. 사람이란 그게 누구라도 실수를 할 수밖에 없으니까. 중요한 건 실수하지 않는 게 아니라,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지 않는 거지.”
“……”
“내 생각에는 지금 그대들이 저지른 짓이 그 치명적인 실수에 해당하는 것 같은데. 어찌 생각하지?”
놀라지 않았느냐고?
천만에 호가명이 한 말 중에 거짓은 없다. 이렇게까지 당황해 본 게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다.
뒤에서 신호가 터졌을 때도 보나 마나 해남 놈들이 잔재주를 부리고 있는 거라 생각했는데, 설마 이곳에서 저 천우맹 놈들과 화산검협을 보게 될 줄이야.
하지만 놀라는 건 한순간이면 충분하다.
“나는 이런 말을 딱히 좋아하지는 않지만.……”
호가명의 입가에 처음으로 옅은 미소가 어렸다.
“예상도 못 한 소득을 얻는다는 건 이럴 때를 두고 하는 말이로군. 설마 해남 같은 잔챙이를 처리하러 와서 그대들을 보게 될 줄이야.”
백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호가명…… 장일소의 군사.’
분명 크게 놀랄 거라 생각했다.
이곳의 전황을 보자마자 기겁하며 공격해 올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호가명은 그 대신 느릿하게 전장을 멈춰 세우고 그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 사실이 백천에게 이제까지와는 다른 압박을 주었다.
장일소는 변덕스러운 짐승이다.
그리고 마교는 광기에 젖은 야수다.
대체로 그랬다. 지금껏 그들이 상대한 이들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기에 두려운, 평범한 사람의 상식으로는 재단할 수 없는 이들이었다.
하지만 호가명은 다르다.
저 차갑게 가라앉은 눈에는 장소나 주교에게서 엿보이는 광기 따위가 일절 어려 있지 않다.
보이는 거라곤 그저 냉철한 지성과 소름 돋을 만큼 대단한 침착함뿐이었다.
‘……사냥꾼이라는 건가?’
등 뒤에서 굶주린 짐승이 쫓아오는 건 실로 두려운 일이다.
하지만 등 뒤에서 자신을 사냥하려는 자가 쫓아오는 건 또 어떤가?
과연 그게 굶주린 짐승에게 쫓기는 것보다 낫다고 할 수 있을까?
이곳에 온 이가 호가명이란 사실이 어쩌면 더없는 불행일지도 모른다고 백천이 생각하던 그때였다.
“실수?”
삐딱한 청명의 목소리가 울렸다.
“뭐, 그럴 수도 있지.”
그는 피식 웃으며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런데 네가 하나 모르는 것 같은데.”
“음?”
“실수라는 건 말이야.”
청명의 입술이 살짝 벌어지며 새하얀 이가 드러났다.
“그걸 짚어 내고 이용할 능력이 있는 놈에게나 의미가 있는 거지!”
파아아아아아앗!
순간 청명의 암매검이 벼락처럼 휘둘러졌다. 선혈처럼 붉은 검기가 허공에 피어났다.
쇄애애애애애액!
검기가 어마어마한 속도로 호가명의 목을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들었다. 하지만 호가명은 피할 생각도 없이 자신에게 날아오는 검기를 차게 바라보았다.
“하!”
그때, 들뜬 듯한 목소리와 함께 호가명의 지척에 있던 이 하나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뛰어올랐다.
그가 호가명 앞을 가로막은 순간.
콰아아아아아앙!
검과 검기가 충돌하며 붉은 검기가 폭죽처럼 사방으로 비산했다.
“달려!”
“알았다!”
정신이 번쩍 든 백천은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해남 제자 하나의 멱살을 잡으며 뒤쪽으로 밀쳤다.
“승선하십시오! 당장!”
“예? 아…… 예!”
그제야 덩달아 정신 차린 해남의 제자들은 전력을 배를 향해 달렸다. 화산의 제자들은 청명이 검기를 날린 그 순간부터 이미 앞을 가로막은 이들을 뛰어넘고 찌르며 배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놓치지 마라!”
“예!”
어디선가 들려온 고함에, 만인방의 본대 역시 힘껏 땅을 박차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고요하던 전장이 순식간에 다시 끓어올랐다.
혈검단주 괴양은 달려가는 청명의 등을 조용히 바라보며 제 손목을 까딱까딱 털었다.
“……화산검협이라.”
나직이 중얼거리자, 이내 귓가에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쿡쿡쿡.”
괴양이 웃음을 흘렸다.
그는 만인방의 단주다. 장일소가 아니라면 천하의 누구를 상대로도 이런 말을 들을 이유가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기분 나빠하기는커녕 오히려 즐겁다는 듯 웃었다.
“그럴지도 모르겠군. 괴물이야.”
손목에서 시큰하게 느껴지는 통증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장난처럼 뿌린 검기와 전력으로 휘두른 검이 충돌했는데, 손해를 입은 쪽은 오히려 그다. 물론 그것만으로 무학의 고하를 논하기는 어렵겠지만, 상대가 얼마나 강한가를 말해 주는 데는 충분했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도 없지.”
괴양이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범도 승냥이 떼에 찢겨 죽는 법, 우리가 하는 건 승부가 아니라 사냥이니까.”
그 말에 호가명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하다.”
무슨 수를 써도 상관없다.
이곳은 해남, 중원의 최남단이다. 범이 아니라 용이라 해도…… 아니, 용을 뛰어넘는 그 무언가라 해도 이곳에 발을 들인 이가 맞이할 운명은 단 하나밖에 없다.
“반드시 죽여라.”
“련주께는 보고하지 않나?”
“…… 죽인 뒤에 보고해도 늦지 않다.”
그 말에 혈검단주가 괴이한 웃음을 보였다.
“책임을 져 준다면 나야 환영이지.”
고개를 돌려 청명을 바라보는 그의 두 눈에 살기가 들끓어 올랐다.
1265화. 살려 보내지 않는다. (5)
전장이 다시 들끓어 올랐지만, 곽환소는 아직 갈피를 못 잡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앞에는 만인방의 배가 있고, 뒤쪽으로는 만인방의 본대가 밀려오고 있다. 그가 일개 해남의 제자였다면 고민할 것도 없이 배를 탈취하러 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해남의 대제자다. 밀려오고 있는 만인방의 본대를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막아야 하나?’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지 갈팡질망하는 그 순간, 누군가 그의 어깨를 붙잡고 확 끌어당겼다.
“배, 백천 대협?”
“뭐 하는 겁니까!”
“저, 저도 돕겠…‥”
“뒤쪽은 저희가 막을 테니, 당장 배로 가십시오! 배 안에도 적이 있을 겁니다!”
곽환소가 그제야 아차 하며 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백천의 말이 맞다. 저 배 안에 만인방도들이 남아 있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그럼 누군가는 배 위에서 해남을 지휘해야 한다.
“제자들을 이끌고 배를 모두 탈취하십시오! 남김없이 승선하면 기다릴 것 없이 바다로 나가시면 됩니다!”
“그, 그럼 대협들은?”
“어서!”
백천이 다시 한번 곽환소의 어깨를 꽉 틀어쥐었다.
“우릴 살리고 싶으면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움직여요!”
백천은 대답을 들을 것도 없이 곽환소를 떠밀었다. 획 밀려난 곽환소의 눈에 사방에서 날아와 그의 앞을 채우는 천우맹의 맹도들이 보였다.
“어딜 기어와!”
파아아아앗!
조걸은 띄워 올렸던 몸이 채 착지하기도 전에 허공에서 검기를 날려 댔다. 검 끝에서 분열하듯 퍼져 나간 검영이 흡사 비처럼 만인방도들을 향해 쏟아졌다.
곽환소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검에서 쏟아져 나간 검영이 내리쬐는 남해의 뜨거운 햇빛을 갈라 버리는 것만 같았다.
“큭!”
“이, 이놈이!”
본대의 등장에 용기백배하여 공격해 오던 창귀대원들이 그 빛살과도 같은 검기에 주춤대며 뒤로 물러났다.
그런 조걸의 등 뒤로 또 한 사람이 그림자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라락!
낙화(落花).
조걸의 머리 위로 치솟은 검에서 붉은 꽃잎이 만발했다. 뜨거운 한낮을 한순간 봄의 정취로 뒤덮어 버린 꽃잎들은 남해의 하늘을 수놓으며 분분히 떨어져 내렸다.
“크, 크윽!”
겉으로야 한없이 가녀려 보이는 꽃잎이 하늘거리는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 검을 상대하는 이들은 알 수밖에 없다. 저 가녀린 꽃잎 하나하나가 얼마나 날카롭고, 또 얼마나 위험한지.
조걸의 검영과 유이설의 검기가 만인방의 기세를 단숨에 꺾어 놓는 순간.
“타아아아압!”
“오오오오오오!”
눈 부신 백광과 상서로운 불광이 동시에 솟구쳤다.
남궁도위와 검강과 혜연의 아라한신권(阿羅漢神拳)이 뭉쳐 달려드는 이들의 한가운데로 여지없이 떨어졌다.
콰아아아아아앙!
백광과 불광이 뒤섞여 폭발하는 소리에 터져 나오던 비명조차 완전히 뒤덮여 버렸다.
하지만 괜히 만인방이 아니다. 동료들이 육편이 되어 터저 나가는 와중에도 그들은 쉬이 기세를 놓치지 않았다.
“크하하아아아앗!”
만인방도들은 짐승 같은 기합을 지르며 아래로 착지하려는 조건과 유이설을 노렸다. 그런 그들 앞으로 누군가가 달려와 가로막고 섰다. 어느새 전위까지 단숨에 달려온 백천이었다.
쾅!
땅을 터뜨릴 기세로 전각을 내밟은 백천이 가공할 기세로 검을 휘둘렀다. 붉은 검기가 달려드는 이들을 단숨에 양단했다.
파아아앗!
뜨거운 피가 얼굴을 뒤덮었지만, 백천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소리쳤다.
“지켜라!”
실로 간결한 명이었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이미 백천의 수족처럼 움직이는 데 익숙하니까. 당연히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로 빠르게 이동해 검을 휘두른다.
“으아아아아! 오른쪽! 오른쪽! 제기랄, 오른쪽이 비잖습니까! 당 소주님 뭐 하는 겁니까! 밥은 어디로 처먹……. 아니, 씨! 밥 대신 독을 처먹어서 그런가? 빨리 가세요, 빨리!”
“.……언젠가 꼭 둘이 봅시다. 녹림왕.”
당패가 이를 갈아붙이며 임소병이 가리킨 쪽으로 재빠르게 달려갔다. 신경질적으로 휘두른 손끝에서 발출된 독질려가 성난 물소처럼 뛰어오는 만인방도의 앞에 흩뿌려졌다.
콰득!
“끄윽!”
발을 꿰뚫고 들어온 강침에, 만인방도가 입술을 짓깨물었다. 통증이 상당했으나 그 정도쯤은 무시하고 앞으로 달렸다. 아니, 달리려 했다. 몸이 그 자리에 쿵 엎어지지만 않았다면 그랬을 것이다.
상처를 통해 삽시간에 침투한 당문의 독이 몸을 순식간에 마비시킨 것이다!
“간격 더 벌리라고, 간격! 좌우로 빠져나가는 놈들을 막아요!”
“저, 저는 어디로 갑니까, 녹림왕!”
어디선가 날아든 질문에 임소병이 획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검을 꽉 잡고 입술을 질끈 깨문 설소백의 모습이 보였다.
“궁주께서는!”
“예!”
“..…..어디 쓰지?”
“..….예?”
임소병이 부채로 뺨을 꾹꾹 누르며 급히 머리를 굴렸다.
“어…… 일단 그…… 저 뒤쪽에 어……”
“당 여협! 위험합니다!”
그 순간 설소백이 임소병의 지시가 떨어지기도 전에 당소소 쪽으로 전력을 다해 달려가 버렸다.
황당한 얼굴로 그 모습을 보던 임소병은 이내 피식 웃었다.
“..…누구한테 배웠는지, 원.”
그걸 말해 뭐 하겠는가? 뻔한 일이지.
그리고 그때, 그들이 만들어 낸 방어선에 한 무리가 합류했다.
“장문 대리를 도와라!”
“가자!”
해남 장문인 금양백을 비롯한 해남의 장로들이 방어선에 합류한 것이다. 그들은 눈에 불을 켜며 이를 갈았다.
“이 악적 놈들!”
“내 이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위야 둘째치고, 사패련과 만인방에 대한 악감정이라면 화산에도 뒤지지 않을 이들이 해남이다.
처음으로 만인방을 향해 마음껏 검을 휘두를 기회를 얻은 해남의 장로들은 노한 파도와도 같은 검을 쉴새 없이 뿌렸다.
“아이고, 영감님들. 힘도 좋으시지!”
“장로님들이셔, 이 미친놈아!”
“……사형. 요즘 저를 너무 막 대하시는 것 같은데.”
“네가 인간이 막돼먹은 거야!”
“……말 너무 심하시네.”
조걸이 윤종에게 받은 상처를 애꿎은 만인방에 풀겠다는 듯 검을 찔러 댔다.
“자, 와……”
“와 봐! 이 새끼들아!”
“……”
목소리가 끼어든 곳을 향해 조걸이 멍하니 고개를 돌렸다. 악귀 같은 얼굴로 검을 무자비하게 쑤셔 넣는 당소소가 보였다.
조걸은 눈을 내리깔고 조용히 고개를 원위치시켰다.
쾅!
땅을 박찬 순간 모래가 거세게 튀어 올랐다.
“더 빨리 달려!”
“으아아아아아아!”
곽환소가 이를 악물었다.
만인방의 본대가 주는 압박감은 상상을 초월했다. 지금도 이를 악물고 있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손이 덜덜 떨릴 정도였다.
“가자!”
“예!”
그런 곽환소를 움직이게 하는 건 바로 등 뒤에서 들려오는 커다란 고함 소리였다.
머리가 생각하기 전에 몸이 먼저 움직인다는 건 바로 이런 때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이 순간에도 치열한 격전으로 인한 굉음이 연신 터지고 있었다. 곽환소의 몸이 절로 앞으로 쏘아져 드높은 선박의 뱃머리를 단숨에 박차고 올랐다.
“으아아아앗!”
머리끝까지 차오른 혈기를 굳이 참을 것 없이 발산하며 선상으로 뛰어오른 곽환소의 눈에, 배를 지키고 있던 몇몇 만인방도들의 모습이 보였다.
“제압해라!”
범이 울부짖듯 포효한 곽환소는 대답을 기다릴 것 없이 앞으로 달려들었다. 그의 검기가 성난 해일처럼 적에게 쏟아졌다.
“크윽!”
곽환소의 검에 어깻죽지를 길게 베인 만인방도가 억눌린 신음을 토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런 만인방도를 향해 다른 해남 제자 하나가 빠르게 달려들었다.
“죽어라!”
쇄애애애액!
그건 곽환소가 보기에도 흠잡을 데 없는 일검이었다.
그렇기에 무언가 잘못됐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어깨를 베인 만인방도가 두 눈으로 살기를 뿜으며 도를 휘두르기 전까지는 말이다.
촤아아아악!
섬전처럼 날아든 만인방도의 도가 해남 제자의 가슴을 길게 베고 지나갔다.
“좌, 좌공!”
“사제!”
곽환소가 악을 쓰며 만인방도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연이어 그의 사형제들이 날린 검이 만인방도의 전신을 꼬치 꿰듯이 꿰어 버렸다.
“으아아아아아! 이 애송이 놈들!”
하지만 만인방도는 전신이 꿰뚫리고도 오히려 그들을 향해 달려들며 무서운 기세로 도를 휘둘렀다.
콰앙!
막아내려는 검을 두 동강 낸 도는 몇몇 해남 제자들을 더 베었다. 붉은 피가 울컥울컥 사방으로 뿌려지고, 비명이 울려 퍼졌다. 순식간에 갑판 위가 지옥도로 돌변했다.
“이 개자식아아아아아!”
이자양이 거칠게 달려들며 만인방도의 가슴에 검을 쑤셔 박았다. 곽환소도 뒤지지 않고 단숨에 뛰어들어 만인방도의 목에 검을 찔렀다.
콰득!
“꼬르륵……”
만인방도의 입에서 피가래가 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너희는……”
“……”
“모두 죽는..….”
아무리 독기 가득한 인간이라 해도 목을 꿰뚫리고는 버틸 수 없었는지, 몸이 이내 축 늘어졌다.
숨이 끊기고도 여전히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곽환소의 손끝은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좌공! 괜찮으냐?”
“비, 빌어먹을! 대사형! 채욱이 놈이 크게 다쳤습니다!”
“피, 피가 계속 나옵니다. 사형!”
“후욱……”
곽환소는 소매로 얼굴에 엉망으로 튄 피를 문질러 닦았다. 귀가 먹먹해서 그 어떤 소리도 제대로 들리질 않았다. 심장이 목으로 튀어나올 듯 쿵쾅대는 소리만이 크게 울렸다.
“대사형!”
다시 한번 재촉하는 소리가 쏟아지자 곽환소가 주먹을 콱 움켜쥐었다.
“진정 못 하겠느냐!”
크게 고함치는 소리에 호들갑 떨던 이들이 움찔했다.
“각오하고 온 게 아니냐!”
“……”
“밑에서는 천우맹 분들이 목숨 걸고 저들을 막아 내고 있다. 그런데 상처 좀 입었다고 뭣들 하는 짓거리야!”
“사, 사형……”
“몇은 남아 부상자를 돌보고! 남은 이들은 빨리 배를 모두 장악해라! 어서!”
“예!”
“자양!”
“예, 사형!”
“조타실로 가라! 배를 움직여야 한다!”
“예!”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자 곽환소는 그제야 쓰러진 이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고락을 함께 나누었던 그의 사형제들이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눈빛은 어느새 반쯤 빛을 잃었다.
그 모습을 보는 곽환소는 날카로운 강침에 찔리기라도 한 듯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되레 눈을 한차례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이건 당연히 감수해야 할 일이다!
“빨리 움직여라! 아래에서 버티고 있는 분들이 쓰러지기 전에!”
“예!”
곽환소는 검을 꽉 움켜잡고 몸을 날렸다.
우선은 맡겨진 역할을 해낸다. 슬퍼하는 것도, 분노하는 것도 그다음 일이다.
‘이게 전쟁!’
흡사 꿈을 꾸는 듯 멍했던 것이 가시니 갑자기 피비린내가 코로 확 밀려들었다. 그 냄새가 이게 현실임을 실감하게 했다. 지금 그는 전장의 한중간에 있는 것이다.
“으아아아앗!”
곽환소가 선실에서 뛰쳐나오는 만인방도를 향해 검을 내질렀다. 검 끝이 살을 가르는 감각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곽환소의 눈에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악의 여린 살기가 어렸다.
“모조리 쳐 죽여라! 해남 땅을 밟은 것을 지옥에서 후회하도록!”
전장의 광기가 또 하나의 검수를 집어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