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1633화
1633화. 모두 사라져 버리기 전에. (3)
“…….”
“…….”
“…….”
세 사람이 말없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한 사람은 명문이라는 말에 부족함이 없는 문파를 흔들림 없이 이끌어 온 수장.
또 한 사람은 그의 곁을 지키며 묵묵히 보좌해 온 이.
그리고 마지막 한 사람은…….
꿈틀.
그 마지막 한 사람을 바라보던 ‘보좌인’의 눈썹이 살짝 뒤틀렸다. 그 송충이처럼 굵은 눈썹의 요동을 본 마지막 사람의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잘도…….”
뭔가 갈아붙이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항상 당당하게 펴졌던 어깨가 절로 쪼그라든다. 이 순간만큼은 평소의 그 헌앙하던 얼굴도,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게 만들던 우아함도 전혀 힘을 발하지 못했다.
“크흠.”
못마땅하다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눈빛으로 백천을 쏘아보던 진초백이 불편한 헛기침을 뱉어 냈다. 그 헛기침에 백천의 어깨가 조금 더 쪼그라든다.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던 종리곡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만하게나. 이리 불편해하지 않는가?”
“…….”
“자네가 이리 나오면 내가 민망해지네. 내 입장도 생각을 해 주게.”
도무지 표정을 풀 생각이 없어 보였던 진초백이 그제야 한숨을 푹하고 내쉰다. 진초백의 얼굴이 조금 풀린 것을 확인한 종리곡이 백천을 돌아보며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미안하군. 급히 만나게 되면 어색할까 싶어 만든 자리건만, 괜히 더 불편하게 만든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네.”
장문인? 그런 것 치고는 무척 재미있어하시는 표정 같으신데요? 장문인 입꼬리가 그렇게 실룩거릴 수 있는 거였습니까?
“대답.”
“예?”
반사적인 백천의 반문에 진초백의 이마에 핏대가 다시 돋는다.
“……어른이 말을 하시면 대답을 해야지! 어디 입을 꾹 다물고!”
“지, 진정하게.”
“사람이 명성을 얻었으면 그에 걸맞은 몸가짐도 익혀야지! 대체 화산에서 뭘…….”
진초백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아마도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화산에서 뭘 배워 처먹은 것이냐?’라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걸 참아 내고 있는 중이겠지.
“후…….”
진초백이 거친 숨을 토했다.
그의 눈이 겁먹은 강아지……. 아니, 겁먹은 범 같은 백천을 훑는다.
복잡하다. 너무 복잡해서 대체 이 마음을 뭐라 말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참 아픈 손가락 같은 자식이었는데, 그 자식 놈이 대성하여 이리 천하에 명성을 떨치고, 강호 제일의 후기지수 중 하나로 꼽히고, 저 화산의 장문대리 자리까지 떡하니 차지했다.
그를 보고 있자니 참 뿌듯하기도 하고…… 또 그만한 능력이 있는 놈이 왜 하필 화산에서 저러고 있는지 답답하기도 하다. 아비로서는 자랑스럽지만, 종남의 장로로서는 이가 갈리는 그런 상황일 수밖에 없었다.
“일전에도 말했지만.”
두 사람을 묘한 눈으로 바라보던 종리곡이 담담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물론 그 담담한 어투에 미묘한 웃음기가 섞여 있다고 느껴지는 건, 지금 백천이 예민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진 장로는 나의 장자방과 같은 사람일세.”
“…….”
“필연적으로 부당주인 자네와는 얽힐 일이 많겠……. 자네 어디 아픈가?”
“……아니요. 멀쩡합니다.”
“얼굴이 허옇게 질렸는데?”
“원래 좀……. 하얀 편입니다.”
“그래? 자네 형도 하얗긴 하지만, 지금처럼 창백하지는 않던데. 하긴 형제라고 다 같지는 않을 테니.”
쿡쿡 웃는 종리곡을 보며 백천이 보이지 않게 이를 갈았다. 이 인간 지금 분명히 즐기고 있다.
“여하튼.”
그 순간, 종리곡이 정색하며 말투를 바꾸었다.
“자네들이 원래 어떤 관계였는가는 중요하지 않네. 아니, 지금 어떤 관계인가도 중요하지 않다네. 중요한 것은 자네들이 과거의 모든 것을 접어 두고 협력해야 한다는 거지. 강호의 수호라는 하나의 목표를 위해. 알겠는가?”
“…….”
“…….”
“내 말이 들리지 않는가, 진 장로?”
종리곡의 채근에 진초백이 한숨을 푹하고 내쉬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장문인.”
안정을 되찾은 눈으로 백천을 일견한 그가 말을 이어 간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대계를 그르칠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저 제 아들놈이 어울리지도 않는 부당주의 자리에 올라 장문인께 폐를 끼쳐드리지는 않을지…….”
“내 말을 이해 못 했군, 진 장로. 아니. 진초백.”
종리곡의 입에서 서늘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그 목소리를 들은 진초백이 자신도 모르게 자세를 바로 했다.
“지금 자네의 앞에 있는 사람은 자네의 아들인 진동룡이 아니라 대 화산파의 장문대리인 백천일세.”
“…….”
“공과 사를 구분한다는 것은 상대의 사사로운 위치가 아니라, 공적인 위치를 인정하고 존중을 보일 때나 할 수 있는 말일세. 객관적으로 보아 화산의 장문대리는 자네는 물론이고, 나보다도 더 뛰어난 업적을 이뤄 낸 강호의 영웅일세.”
종리곡이 다시 한번 차게 일갈했다.
“자네가 진정 종남의 장로라면, 나를 부끄럽게 만들지는 말게.”
“죄송합니다.”
진초백이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는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장문인께서는 염려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어디까지나 장문인. 아니, 당주님을 보좌하는 역할일 뿐. 부당주님께서는 저보다 상급자이시니, 부당주님의 명 역시 존중할 것입니다.”
그제야 종리곡의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래야지.”
진초백에게서 눈빛을 거둔 종리곡이 고개를 돌려 백천을 바라본다.
“되었는가?”
“제, 제가 은근히 바랐다는 투로 말씀하지 말아 주십시오. 저는 그냥 불러서 온 것 아닙니까?”
“그렇네. 하지만……. 자네가 바랄 것 같아서 말이네. 아무래도 진 장로를 휘하에 두고 부리는 게 좀 껄끄러운 일이긴 하니.”
백천의 이마를 타고 굵은 땀방울이 연신 떨어졌다.
그에게 있어서 종리곡은 길 가다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다. 하지만 아버지인 진초백은 겨우 그 정도가 아니라 꿈에서도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러니 자네에게도 당부하고 싶다네. 사사로운 감정은 접어 두고 자신의 역할에 집중해 주게.”
“…….”
“필요에 따라서는 아비도 부릴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네. 내 말이 무슨 말인 줄 알겠는가?”
그 말에 백천이 반사적으로 진초백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진초백과 눈이 마주친 순간 그의 고개가 본능적으로 아래로 푹 숙여졌다.
진초백의 얼굴에 못마땅한 빛이 어렸다.
저리 죄송스러워할 것이면 뭐 하러…….
“그…….”
진초백이 뭔가 말을 꺼내려는 그 순간이었다.
“사람의 인연이란 그리 쉽게 끊어지는 게 아닐세.”
“……예?”
“특히나 천륜은 더더욱 그러하지.”
종리곡이 초탈한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끊어 냈다 싶으면 다시 붙고, 잊었다 싶으면 다시 떠오르는 게 천륜이지. 그러니……. 이미 끊어졌다 싶은 인연이라 해서 굳이 거부할 필요는 없는 거라네. 혹시 아는가? 인간사에 벌어지지 못할 일은 없는…….”
“아니요.”
그 순간 백천이 고개를 들고 종리곡을 마주 본다. 그 백천의 눈빛을 본 종리곡이 자신도 모르게 흠칫했다.
눈빛이 다르다.
조금 전까지 아비에게 어떻게 혼이 날까 싶어 벌벌 떨던 청년은 어디에도 없다. 지금 이곳에 있는 이는 바로 저 화산의 부흥을 이끌고 있는 젊은 장문대리, 백천이었다.
“인연이 다시 닿는다고 해서 걷는 길이 달라질 일은 없습니다. 저는 화산의 사람이고, 앞으로도 영원히 화산의 사람일 것입니다.”
“…….”
백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사사로운 감정을 개입시키는 일은 절대 없을 것입니다. 그게 아버지가 되었든, 형이 되었든, 다른 종남 사람이 되었든 말입니다. 그럴 이유도 없습니다. 아버지께 죄송한 마음은 있지만, 화산에서 제가 이뤄 낸 것에 자랑스러운 마음이 더 크니까요.”
종리곡이 미소를 지으며 백천을 바라보았다.
“그런가?”
“예.”
백천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해야 할 일이 많은 터라 먼저 물러나 보겠습니다. 장문인, 그리고 장로님. 보중하십시오.”
백천이 포권을 하자 종리곡과 진초백도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포권을 받았다. 그러자 백천이 더없이 당당한 얼굴로 그들을 보고는 몸을 돌려 문을 향해 걸어 나갔다.
“그럼.”
“이보게, 장문대리.”
“또 무슨 말씀을…….”
“검 두고 갔네.”
“…….”
백천의 고개가 획 돌아간다. 그의 눈에 탁자 위에 올려져 있는 그의 검이 선명하게 들어온다.
“히익!”
백천이 기겁하며 달려와 탁자 위에 놓인 겁을 잽싸게 챙긴다.
“이, 이게 왜 여기.”
비 오듯 흘러내린 땀으로 얼굴을 흠뻑 적신 백천이 연신 진초백의 눈치를 살피다가 부리나케 문 쪽으로 달려갔다.
“다시 뵙겠습니다.”
“살펴 가시…….”
쿵!
문이 부서질 듯 닫히는 순간, 진초백이 쯧쯧 혀를 차 댔다.
“저런 저런……. 저리 급해서야.”
그새 자리에 앉은 진초백이 자신의 얼굴을 양손으로 부벼 댔다.
“괜찮은가?”
“어쩌다 저런……. 하아…….”
진초백이 다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도무지 믿음직스럽지 않으니…….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비가 보는 자식이란 다 그런 법이지.”
“장문인……. 아무리 긴장했다 한들 제 검을 놓고 다니는 검수가 어디 있습니까? 저런 면 때문에 걱정했던 것인데, 그걸 못 받아들여 집을 나가 버리니.”
“나는 되레 좋게 보이던데?”
“예?”
진초백이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알지 않는가? 이제 저 아이의 실력과 명성이 자네를 뛰어넘었다는 것을.”
“…….”
“그럼 보통은 과시하려 드는 법이지. 내가 이만큼 잘나졌다. 내가 형을 넘지 못할 거라 여겼던 아버지가 틀렸다. 어디 말이나 한번 해 보시라고 말이네.”
“그런…….”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런 마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긴장하지 않는가. 또 죄송스러워하지 않는가. 그건 자신의 입지보다 아들이 화산에서 명성을 떨치는 걸 지켜보는 자네의 마음을 먼저 생각한다는 것이겠지. 저건 타고난 천품일세. 노력으로는 바꾸기 힘든.”
“…….”
진초백이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다시 내쉬었다.
그가 조금만 더 관대했었더라면…….
“훌륭한 인재지.”
“…….”
“어쩌면 금룡이보다 더.”
그 말에 진초백이 조금 놀란 얼굴로 종리곡을 바라본다. 아까부터 자꾸 하나가 마음에 걸린다.
“장문인……. 설마?”
“그저 생각일 뿐이라네. 그저.”
“…….”
빤히 종리곡을 바라보던 진초백이 고개를 내젓는다.
“녀석은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화산의 제자가 아닙니까?”
“아직 어리네. 저 나이라면 모든 것을 버리고 다시 시작해도 종남제일의 고수가 되기에 그리 늦은 나이는 아니지. 설마 저 화산이 탈속하는 제자의 사지근맥을 끊을 것도 아니고.”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녀석은 애초에 종남으로 올 마음이 없습니다.”
“마음이 문제가 아닐세. 상황의 문제지.”
“예?”
진초백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비고(秘庫)는 여전히 잘 닫혀 있지 않은가?”
“비고…… 말씀이십니까?”
“그렇네. 그 안에 상천약수(上天藥水)도 한 병 남아 있겠지. 무가지보나 다름없는 그 영약 말이네.”
“……약수 말씀이십니까? 예. 분명 한 병 남아 있을 것입니다. 최근 백 년간은 그 약수를 써야 할 만큼 큰 부상을 입은 이가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지금 그 이야기를 어째서?”
“곧 알게 될 걸세.”
그의 눈이 백천이 열고 나간 문으로 향했다.
“선의(善意)와 이익(利益)이 같은 길에 있다면, 굳이 그 길을 걷지 않을 필요가 없다는 걸 말일세.”
종리곡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