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1664화
1664화. 그곳이 어디든. (4)
백안암(白顔巖). 무당산 중턱의 유독 도드라지는 새하얀 절벽. 그 위로 도사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장로님!”
연통을 받고 합류한 무당의 검수들이 백안암 위에 올라 있는 허공을 보며 외쳤다. 그들의 무복 곳곳에 묻은 그을음이 그들이 겪은 고초를 말해 주는 것만 같았다.
허공에게 무언가 말을 하려던 이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이렇게 백안암까지 오르니, 불타는 무당산의 정경이 너무도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지옥도가 따로 있으랴.
붉게 이는 화염 속으로 검게 타 버린 나무들이 엿보인다. 불길이 만들어 낸 광풍에 탄 나무가 흔들리는 모습은 흡사 지옥 불에 타는 이들이 고통에 겨워 몸을 떠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도가의 성산인 무당산이 어쩌다 이런 꼴이 되어 버렸을까.
으득.
무당의 검수들이 희게 질리도록 주먹을 움켜쥐었다.
단순히 사는 곳을 잃은 정도의 타격이 아니다. 삶 전체와 함께해 온 터전이다. 그런 곳이 이토록 삽시간에 불타는 광경을 지켜만 보고 있자니 그 심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참혹했다.
아마도 무당은 이 전쟁이 끝나고도 수년⋯⋯. 아니, 족히 수십 년은 제 모습을 되찾지 못하게 되리라. 이 전쟁의 상흔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고 또렷하게 남아 그들을 괴롭힐 게 분명했다.
“정신 차리고 진형을 갖춰라.”
“⋯⋯예, 사숙!”
이를 갈며 분기탱천하던 이들이 허공의 한마디에 이를 악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허공의 말이 옳다. 지금은 분노에 몸을 맡길 때가 아니라 냉철함으로 저들을 응징해야 할 때다.
“놈들은?”
“불길과 함께 전진하고 있습니다.”
허공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아무리 불이 한번 훑고 지나간 곳의 화마는 약해진다지만, 그렇다고 해도 저만한 열기를 뒤따르면서 희생자가 안 나오진 않았을 터.
얼핏 보기로는 사파 놈들이 무당을 철저하게 유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사파 놈들만 희생자를 내고 있다는 의미다.
‘그런데도 상관없다는 건가?’
그의 눈썹이 불편하게 꿈틀댔다. 대체 사람의 목숨을 뭐라 생각하는 것인가.
하지만 그는 이내 짧게 심호흡하여 들끓는 속을 가라앉혔다. 사파인들의 목숨까지 생각해 줄 여유는 없으니까.
“그렇다면 곧 도달하겠군. 아직 이곳으로 집결하지 않은 이들은?”
“이, 이탈이 늦어 포위된 이들이 있는 모양입니다. 희생이⋯⋯.”
“그럼 구해야지! 무엇을 하고 있느냐?”
“이 상황에 구하러 갔다가는 구출조마저 포위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럼 전투가 커지게 됩니다.”
이 말인즉, 백안암 위쪽을 점거하는 그들의 전략 자체가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리라. 즉각 이해한 허공이 입술을 살짝 짓깨물었다.
“그들 역시 무당의 제자들입니다. 마음은 알겠지만⋯⋯.”
“알겠다.”
허공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려는 그 찰나였다.
“허공!”
등 뒤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한 목소리에 반응한 허공이 공손히 몸을 돌렸다. 무당의 임시장문직에 올라 있는 허산자가 굳은 얼굴로 빠르게 날아들고 있었다.
“장문인을 뵙습니다.”
허공이 정중히 예를 표했지만, 허산은 그 예를 받지도 않고 소리쳤다.
“정녕 이곳에 진을 친 것이냐? 어째서!”
“⋯⋯적을 맞아 상대하기에 적절한 곳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절벽이기에?”
“예.”
“이런⋯⋯! 이곳은 절벽이기는 하나, 후위로 돌아올 길이 열려 있지 않더냐? 까딱하다가 뒤를 점령당한다면 우리가 절벽을 등에 두고 공격을 당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해 보지 않았더냐?”
“⋯⋯.”
“당장 진을 물려라, 당장! 여기서는 안 된다!”
하나 허산자의 외침에도 허공은 담담히 되묻기만 했다.
“상관없지 않겠습니까?”
“⋯⋯뭐?”
허산자는 한 대 맞기라도 한 사람처럼 멍하니 허공을 마주 보았다.
“등 뒤에서 불길이 이는 것보다는 절벽이 자리한 게 낫지 않겠습니까? 절벽은 적어도 우리에게 다가오지는 않을 테니까요.”
순간 허산자의 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지, 지금 그게 제정신으로⋯⋯.”
“장문인.”
허공은 여전히 차분한 얼굴로 불타는 무당산을 응시했다.
“지금 여기에 상식은 없습니다.”
“⋯⋯.”
“스스로 퇴로를 끊어선 안 된다는 평범한 진리에 따르다가는 손써 보지도 못하고 패퇴할 뿐입니다. 설령 삼면이 적과 불길로 뒤덮이는 한이 있더라도, 등 뒤 한 군데만이라도 지켜 낼 수 있다면 싸울 수 있습니다.”
허산자는 차마 반박하지 못했다.
이곳에서 물러난다고 해도 더 나은 요충지를 찾기 어렵다는 사실쯤이야 그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허공.”
“퇴각일랑 아예 말씀하지 마십시오. 배수진이 어떤 의미인지 아시는 분이라면 그런 말로 제자들의 각오를 더럽히지 않으실 거라 믿습니다.”
허산자의 두 눈에 지우지 못할 안타까움이 어렸다.
배수의 진을 논하고 나아가 죽음까지 논한다.
아직 제대로 된 전투가 벌어진 것도 아니거늘, 이들은 이미 제 죽음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두려움보다는 사패련에 대한 복수심으로 들끓고 있다.
‘장강에서 받은 상처가 대체 얼마나 컸단 말인가?’
이는 명백히 허산자의 실책이자, 허도진인의 실책이었다.
결정권자로서 짊어져야 할 무게만 생각했지, 그 선택으로 말미암아 제자들이 받았을 상처는 조금도 헤아리지 못했다. 그저 그들의 용단으로 목숨을 구했으니 다행이라 여기지 않았던가.
이제는 돌이키기에 늦은 그 착오가 이 사태까지 초래했다 생각하니 마음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여기라면 된단 말이더냐?”
“백안암으로 오르는 길은 가파릅니다. 절벽을 오르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허공은 서늘한 눈으로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워낙에 가파르다 보니 불길도 쉽사리 침범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다른 것에 신경 쓰지 않고 적들을 상대할 수 있습니다.”
“허공.”
“그리고 무당의 검수들에게는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허공이 제 허리춤에 매달린 검을 가볍게 움켜잡았다.
그를 가장 고통스럽게 했던 것 중 하나는, 그 장강의 절벽에서 평생 갈고닦았던 검술을 제대로 펼쳐 보지조차 못했다는 점이다.
실력의 부족함으로 말미암은 패배는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다. 힘이 모자라 당하는 죽음은 납득할 수 있다.
하지만 싸워 보지도 못하고 패배하거나 죽어야 하는 것만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아마 이곳에 어깨를 맞대고 선 다른 무당의 검수들도 같은 생각일 것이다.
“허공아. 나는⋯⋯.”
“압니다. 장문인도⋯⋯ 허도진인께서도 결코 우리를 무시하셔서 그런 말씀을 하신 게 아니라는 것을. 오히려 우리를 아끼기에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도.”
허공이 담담히 말했다.
“하지만, 장문인. 무당의 모두는 당신들의 제자이기 이전에 무당의 도인이고, 또한 한 사람의 검수입니다. 누군가의 전략을 이행하는 장기짝으로써 삶의 가치를 찾고 싶지는 않습니다.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이 말에는 허산자도 결국 더 말릴 도리가 없었다.
정말 돌이킬 수 없기 전에 단 한 번 마지막으로 허공을 설득하기 위해 준비했던 말 역시 꺼내 볼 수조차 없었다. 그 어떤 말이든 지금의 허공에게는 모욕이 될 뿐이리라는 사실을 직감했으므로.
“네가 틀렸다 여기지 않는다, 허공아. 그래서⋯⋯ 그래서 더 속이 타는구나.”
진심이 묻어나는 목소리에, 허공은 그저 고개를 내저었다.
하고픈 말이야 많다. 그러나 지금은 한가로이 환담을 주고받을 때가 아니다. 이러고 있는 동안에도 산을 태우는 불길이 새하얀 백안암을 향해 넘실넘실 접근하고 있었으니까.
“사숙! 준비가 끝났습니다.”
들려오는 목소리에 허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허산자가 있지만, 보고하는 대상도 자연스레 허공을 찾았고 허공 역시 이를 당연히 받았다. 이 모든 광경이 현 무당의 흐름을 직관적으로 보여 주고 있었다.
“대비해라. 곧 올 거다.”
“예!”
서슬 퍼런 긴장이 절벽 위를 타고 흘렀다.
처한 입장은 완벽하게 반대가 되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무당의 제자들은 절절히 느껴야 했다. 대비하고 적을 기다리는 입장도 그리 속이 편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말이다.
뱃속을 바늘로 깔짝깔짝 긁는 듯한 감각에 자꾸 온몸이 움찔거렸다.
“사형⋯⋯.”
“쉿.”
누군가가 불안함을 이기지 못하고 입을 열려 하자, 즉각 만류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행여나 흔들리는 목소리가 다른 이들의 각오조차 흔들까 봐서다.
미미하고도 묘한 요동을 눈치챈 허공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강호는 장강을 기억한다.”
뜬금없는 말이 모두의 귀를 파고들었다.
“우리가 모두 죽어도, 세상에서 사패련과 장일소라는 이름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는⋯⋯. 아니, 어쩌면 무당이라는 이름이 사라지기 전에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한번 벌어진 일은 되돌릴 수 없으니, 우리는 영원히 그 기록을 씻어 낼 수 없다.”
치욕의 역사다. 무당이라는 빛나는 이름을 더럽힐, 그리고 그 제자인 모두를 영원히 오욕의 구렁텅이에 빠뜨릴.
“하지만 또한 강호는 오늘 역시 기억할 것이다.”
허공의 목소리가 내력을 싣고 점점 넓게 퍼져 나갔다.
“과거의 장강을 기억하는 것처럼, 오늘의 불타는 무당도 기억할 것이다. 검수는 제 가치를 삶이 아니라 죽음으로 증명하는 법. 내가 묻건대, 너희는 어떤 죽음을 원하더냐?”
동요로 흔들리던 눈들이 다시 차분하고 고요해졌다.
그리고 그중에는 무진과 진현 역시 끼어 있었다. 그들의 마음 역시 지금의 허공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채앵.
허공이 검을 뽑아 들었다.
“나는 오늘 싸우는 게 아니다. 기억을 남길 것이다. 무당이 비겁하지 않았다는 기억. 내가 비겁하지 않았다는 기억. 그 기억으로써 우리가 저지른 잘못이 비겁과 나약함의 증거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증명할 것이다!”
채앵!
무당 검수들의 검이 일제히 뽑혀 나왔다.
바로 그 순간.
마치 화답이라도 하는 듯, 무당을 집어삼킬 듯 타오르던 불길이 마침내 백안암에 도달했다.
화르르륵.
솟구친 화염이 드높은 백안암을 미처 넘지 못하고 요동쳤다. 마치 흉포한 야수가 발톱 끝이 닿지 않는 곳에 올라선 사냥감을 보며 굶주림에 포효하듯.
마음을 다잡은 무당의 검수들조차 그 광경에는 순간적으로 흠칫했다.
하지만 그들이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건 따로 있었다.
우우우우웅!
산이 불타는 소리가 마귀의 포효처럼 울려 퍼졌다. 웅장하고도 섬뜩한 소리에 또 다른 소리가 겹쳐지기 시작했다.
비명과도 같고, 한편으로는 울부짖음과도 같으며, 또 얼핏 울음소리 같은 무언가.
솟구치던 불길이 절벽을 끝내 넘지 못하고 사그라든다. 그리고 그 붉은빛이 명멸하다 흐려진 곳으로부터 또 다른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얼핏 불길이 남긴 그을음, 혹은 그림자로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 점차 형태를 갖추어 갔다.
그 검은 그림자들은⋯⋯ 쉴 새 없이 움직이며 흰 절벽 면을 타 오르고 있었다.
“온다아아아아아아!”
충격적이게도, 절벽을 타고 오르는 거대한 검은 물결의 정체는 개미 떼처럼 절벽에 들러붙은 사람이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
반쯤 그을린 무복 차림으로 사패련의 무인들이 악을 쓰며 절벽을 기어올랐다. 그들의 두 눈은 공포와 광기로 희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무조건 타고 올라라! 위에 있는 놈들을 모조리 잡아 죽여!”
치솟는 불길을 아래에 두고 꾸역꾸역 밀려드는 독기 오른 무인들.
무당을 피로 물들일 격전이 새하얀 절벽을 배경으로 그 막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