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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704화


윤종의 두 눈이 흔들렸다.

“사숙……?”

그는 지금 백천이 제정신인지 의심이 들 지경이었다.

적은 강대하다.

무위라는 것이 단순히 위력과 내공만으로 좌우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도 태양궁주의 힘은 지금껏 그들이 거의 경험한 적 없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그런 이를 상대하겠다고? 제 실력의 반도 내지 못하는 지금의 백천이?

“어…….”

조걸은 저도 모르게 백천의 등을 향해 손을 뻗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백천의 몸이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모두의 우려를 받으면서도 백천은 흔들리지 않는다. 절벽에 홀로 뿌리 내린 한 그루의 노송처럼.

앞으로 함께 나서려던 조걸은 마음과 달리 순간 주춤했다. 앞에서부터 밀려오는 열기에 몸이 절로 움츠러든 것이다.

그렇기에 더욱 기함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나설 수 있는가.

언제나, 어떤 전장에서나 두려워하지 않고 내달리던 화산의 검수들이 하나같이 섣불리 나서지 못하는 상황이다. 그런데 백천은 어찌 저리 나설 수 있단 말인가.

백천을 좇는 조걸의 눈빛에 복잡한 감정이 일렁였다.

한없이 당당하지만, 또한 더없이 위태로운 그 등을 조걸은 망연히 지켜보았다.

뜨겁다.

피부가 끓는 것 같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가 타들어 가는 것 같은 고통이 엄습한다.

당장이라도 물러서고 싶다.

알고 있다. 지금 물러난다고 해도 누구도 그를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현명한 결정이었다며 그를 두둔해 줄 것이다.

그러나 백천은 물러서지 않았다.

설령 이 자리에서 머리카락 한 올 남기지 못한 채 녹아내린다고 해도 물러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입바른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잘난 듯이 지껄이는 것도 누구나 할 수 있다. 진정으로 어려운 건, 그리 지껄여 댄 말을 스스로 관철할 수 있느냐다.

발끝에 힘을 준다. 나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물러서지 않기 위해. 검을 잡은 손에 힘을 밀어 넣는다. 적을 베기 위해서가 아니라 꺾이지 않기 위해.

이건 지금껏 백천이 해 온 것과는 다른 싸움이었다.

모든 것이 흔들리고 있다. 검을 쥔 손도, 몸을 지탱하고 있는 다리도. 굳건한 그의 육신, 심지어 기다란 머리카락마저도.

하지만 두 눈만은 흔들리지 않고 맞은편의 태양궁주를 똑바로 응시했다.

태양궁주는 황당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지금, 네가 나를 막겠다는 것인가?”

이는 태양궁주 진평이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기이함이었다.

물론 그에게 항거하려 한 건방진 놈들이 존재하기는 했다. 주제도 모르는 것들이 없을 리 없으니.

하지만 누구도 감히 그의 앞에 이리 맞서지는 못했다. 그가 없는 곳에서는 항거를 논할지언정, 면전에서는 납작 엎드려 오들오들 떨기 바빴다.

역사(力士)라 불린 이, 영웅이라 불린 이,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희망이라 불렸던 이들마저도 모두 똑같았다.

그런데 이역만리 중원의 한 천한 이가 그의 앞을 당당히 막아서고 있다. 장일소와는 또 다르다. 이건 태양궁주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눈빛이었다.

“금방이라도 정신을 잃을 것 같은데?”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저자의 상태는 정상이 아니다. 단순히 약한 게 아니었다.

한때는 지금보다 훨씬 강했을 터. 하지만 지금 저 몸에 남은 것은 그저 화려했던 영광의 잔재(殘滓)뿐이다.

“그런데도 물러서지 않겠다?”

태양궁주의 입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그는 놓치지 않고 포착했다. 그의 위력에 질려 주춤주춤 물러나던 이들이, 저자가 나서는 것과 동시에 그 자리에 다시 멈춰 섰다는 걸.

우스운 일이다.

누구도 저자가 감히 태양궁주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지 않을 것이다. 반편이가 되어 버린 이가 그를 쓰러뜨릴 거란 기대 따윈 누구에게도 없을 테다.

그럼에도 저들은 물러서기를 멈췄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음에도 무언가 바뀐 것처럼.

그 점이 태양궁주 진평의 신경을 긁었다. 그의 두 눈에서 이글거리는 금빛 안광이 솟구쳤다.

“비천한 놈이 감히!”

우우우우우웅!

양손에서 뻗어 나온 열양장력이 백천의 정면을 향해 허공을 갈랐다.

태양궁주는 확신했다. 이 장력이 저자를 새까만 숯덩이로 만들어 버리거나, 아니면 저 어설픈 당당함을 무너뜨려 땅을 구르게 할 것이라고.

그런데 잠시 후 펼쳐진 광경은 예상과 크게 달랐다.

파라라락.

무언가가 흔들리는 듯한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다 점차 커졌고, 검수의 검 끝에서 붉은 검기가 피어오른 것이다.

‘……꽃?’

유약한 꽃잎과 닮은 검기였다. 심지어 완전하지도 않았다. 뭉개지고 이지러진 꽃잎처럼 모자라고 불완전했다.

저런 검기로 이걸 막아 내겠다고?

설령 완전하다 해도 저 가녀린 검기로는 그의 거대한 장력에 맞서기가 불가능할진대, 저따위로 채 피지도 못한……. 아니, 이미 시들어 버린 꽃잎들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우우우우웅!

아니나 다를까, 꽃잎은 열양장력에 닿는 순간 부서지고 흔적도 없이 녹아내렸다.

그러나…… 다시 피어났다.

다시. 또다시. 거듭, 그리고 또 거듭.

태양궁주가 살짝 눈을 치켜떴다. 피어난 꽃잎들이 만발하여 커다란 매화의 숲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이런 검이 있다고?’

그가 보기엔 실로 괴이하기 이를 데 없는 검이었다.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주제도 모르는 것!”

태양궁주가 장력에 힘을 배가했다. 그가 날린 장력이 직격하며 백천이 만들어 낸 매화 숲을 통째로 날려 버렸다.

콰아아아아아!

매화 검기가 붉은 불길에 휩싸였다. 태양궁주는 코웃음을 치며 검기가 잦아든 자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두 눈이 커졌다.

백천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검은 숯덩이가 되지도, 추레하게 바닥을 구르지도 않았다.

“이놈이…….”

물론 그의 장력이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 건 아니다.

백천의 검은 화로에 넣었다 뺀 것처럼 시뻘겋게 달아올랐고, 그 검을 잡은 손은 화상을 입어 피부가 손잡이에 들러붙었다. 무복 어깻죽지는 타서 너덜거렸고, 검을 쥔 팔도 곳곳이 그을려서 척 보아도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머리카락 끄트머리도 타들었고, 왼쪽 턱부터 광대뼈 아래까지 화상을 입어 수포가 올라왔다.

그러니 태양궁주의 장력은 확실히 눈앞에 선 무엄한 자를 응징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욱더 큰 노화(怒火)가 치밀었다.

물러서지 않는다고? 저 꼴이 되어서도?

처음과 달리 온몸에 상처를 입었는데도 백천의 두 눈은 처음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입으로는 피를 게워 내면서도 눈만큼은 또렷하게 태양궁주에게 맞섰다.

“이놈이…….”

태양궁주의 속에서 천불이 일었다.

“감히 네놈도 나를 무시하는 것이냐!”

콰아아아아아아!

가공할 장력이 터져 나왔다. 이번에야말로 백천을 숯덩이로 만들 심산이었다. 내력을 한껏 실은 열양장력이 무섭게 쇄도했다.

백천이 반쯤 녹은 손으로 검을 꽉 움켜쥔 순간.

“이 미친 인간 같으니라고!”

“제기랄!”

그의 앞으로 두 사람이 날아들었다. 머리 위까지 포함하면 셋……. 아니, 그의 등을 받치는 이까지 모두 넷.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으아아아아아압!”

조걸과 윤종, 유이설의 검이 붉은 검기를 줄기줄기 뿜어냈다.

“오오오오!”

이윽고 백천의 어깨를 받친 혜연이 뿜어낸 권력이 사방으로 퍼진 꽃잎과 조화를 이루며 태양궁주의 열양장력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콰아아아아아!

끔찍한 열기가 사방으로 터지듯 뿜어졌다.

전신이 삽시간에 벌겋게 달아올랐지만, 백천을 호위하듯 감싼 네 사람은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끄윽…….”

윤종의 입에서 끝내 참지 못한 신음이 쥐어짜듯 새어 나왔다.

‘이걸 혼자서…….’

육신 속 모든 액체가 끓어오른 것만 같다. 땀이 흘러나오기 무섭게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새하얀 증기로 기화했다.

“으아아아아압!”

하지만 그는 이를 악물었다. 그러고는 오히려 악을 쓰며 검격에 박차를 가했다.

터어어어엉!

태양궁주의 장력이 비산하며 흩어졌다. 지독한 일격을 막아 낸 윤종의 무릎이 절로 꺾였다.

“큭!”

땅에 검을 박아 넣는 것으로 순간적인 탈력(脫力)에 대처한 윤종이 이를 갈며 백천을 돌아보았다.

“그냥 아예 죽어 버리려고 작정했습니까?”

“…….”

“몸도 성하지 않은 양반이 대체 뭘 어쩌려고……!”

“있잖느냐.”

“예?”

“……너희가 있잖느냐.”

말문이 막힌 윤종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그러나 놀람은 이내 더 큰 분노로 변해 갔다.

무모한 백천에 대한 분노가 아니다.

백천보다 먼저 나서지 못한, 그러면서도 백천을 뛰어넘겠다고 생각했던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였다.

“그러다 정말 잘못되기라도 하면…….”

“알게 된 것뿐이다.”

백천이 만신창이가 된 손아귀에 힘을 주어 검을 들었다. 그 끝이 다시 한번 태양궁주를 겨누었다. 사형제들이 지키러 왔음에도 선봉에서 물러날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다는 듯.

“여기서 물러나면 나는 정말 입만 산 놈이라는 걸.”

일렁이던 윤종의 눈빛이 이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그 눈빛에 스친 살의는 앞을 막아선 태양궁주에게로 향했다.

탁.

그 마음을 이해했는지, 아니면 이미 모두가 같은 마음이 된 것인지, 윤종의 옆으로 조걸과 유이설이 서서 함께 검을 겨눴다.

윤종이 태양궁주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조걸.”

“예, 사형.”

“놈을 죽이고 길을 연다.”

조걸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 당장이라도 달려들고 싶어 심장이 요동치고 있으니까.

이런 화산의 검수들을 보며 태양궁주의 얼굴은 분노로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저놈들이…….’

조금 전만 해도 달아날 길을 찾던 놈들이 먹잇감을 찾은 맹수처럼 그를 향해 이를 드러내고 있다. 아니,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철천지원수를 보는 듯도 했다.

‘잔재(殘滓)…….’

저 앞에 선 자는 분명 다 타 버리고 남은 찌꺼기일 뿐이다. 그런데…….

‘그 속에 불씨가 있다는 건가?’

다시금 무언가를 타게 할 불씨가?

“이…… 같잖은 것들이 감히!”

태양궁주의 목소리에 커다란 진노가 어렸다. 내내 쌓여 있던 분노가 이제 막을 수도 없이 흘러넘쳤다. 저 벌레만도 못한 놈들마저…….

파아아앗!

하지만 그 분노는 채 다 터져 나올 수 없었다. 그의 목소리가 천지를 울리기 전에 달아오른 검들이 쇄도해 왔기 때문이다.

“열어라!”

시위를 한껏 당긴 활이 쏘아지듯, 화산의 검수들이 수십 개의 화살이 되어 돌진했다.

자책과 부끄러움, 분노와 의지를 담은 채.

서로 말로써 뜻을 나누진 않았지만, 굳이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저 달리면 된다. 기꺼이 앞에 선 이가 열어 낸 불길을 향해.

카아앙!

태양궁주의 손이 날아드는 조걸의 검을 쳐 낸다.

“이……!”

파라라락!

그 순간 윤종과 유이설이 그려 낸 수백의 매화 잎이 태양궁주의 전신을 휘감았다.

“이놈들이!”

파핫!

시야가 가로막힌 태양궁주가 이를 악물며 움직이려는 순간, 눈앞의 매화 잎이 들썩였다. 그리고 그 사이로 누군가가 태양궁주를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들었다.

‘네놈은……?’

한쪽 뺨 절반가량이 화상으로 익은 백천의 얼굴이 빠르게 가까워졌다.

이 와중에도 여전히 변치 않은 눈빛을 본 순간, 태양궁주의 분노가 마침내 화산처럼 폭발해 버렸다.

“으아아아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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