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검 – 105화 : 마계의 창조자, 메타트론
마계의 창조자, 메타트론
시간은 모두를 변화시켰지만 장삼봉 진인만은 그런 것 같지가 않다. 그에겐 시간도 비껴가게 할 수 있는 비결이라도 있음직하다. 함께 자리를 하고 앉았지만 오랜만의 반가움을 나눌 사이도 없이 금세 좌석의 분위기는 어색함과 당황스러움으로 물결치고, 누구도 섣불리 입을 열려 하지 않는다.
깨트려서는 안 될 침묵을 서로에게 강요하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렇게 우리는 입을 다물고 있다. 모두는 암묵적으로 이런 분위기에 동조한다. 이 모두는 진인이 내게 던진 물음때문이었다. 천마가 우리 두 사람 사이의 어색함을 깨트리며 조금은 과장된 몸짓과 함께 말했다.
“진인께서는 농을 즐겨 하시지 않는 걸로 알았는데 이제보니 그런 것 같지 않구려. 혹시 너무 오랜만이라 쑥스러워서 그러신 것이오?”
웃음과 함께 던진 물음이었으나 장삼봉은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럴 리가 있겠소. 파천에 대한 정은 그 누구보다 깊다, 내 자부 할 수 있소. 그렇지만 이건……피해 갈 수 없는 그의 숙명이오. 힘겨워도 지고 가야 할 그의 짐인게요.”
분위기가 더 침잠된 것에는 아랑곳없이 진인은 날 직시하며 의사를 개진해 갔다.
“내가 네게 이런 말을 하는 게 야속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따지고 보면 이 모든게 피해갈 수 없는 네 일이기 때문이다. 왜냐고는 맏지마라. 나 또한 알지 못하니……. 나와 함께 대륙을 종단했던 때를 기억하느냐?”
어찌 그 시절을 잊을 수 있겠는가. 한 평생 살다보면 누구에게나 그런 기억이 있겠지만 그 때의 시간은 내 삶에 잊을수 없는 진한 향기를 선사해 주었다. 그때를 떠올리면 아직도 진득한 향내가 배어나는 듯 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일대 변화를 일으키게 했던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그 때 너는 뭐라고 했더냐. 세상이 날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내가 할일이 거기 있다면 기꺼이 하지 않겠다 하지 않았더냐? 널 데려 가야 하는 이유를 나 또한 알지 못해 애석하다. 난 지금 내 할일을 하고 있을 뿐이야. 선택은 네게 달린 것이지만 난 네게 이렇게 말하고 싶구나, 때로 아무 유익이 없고 마음이 내키지 않아도, 스스로 손해라 생각 되어도, 불합리 하다 여겨져도 해야 하는 일은 있는 거라고. 그 것이 특히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한 일일때는 말이다. 모든 의문은 접어 두고 나를 따라 나서거라. 가면 알게 될 일이다.:
달리 들으면 조금은 억지스런 말일 수도 있지만 나는 반응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 모두는 내 얼굴을 주의 깊게 살피고 있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것일 테지. 오히려 난 담담해졌다. 이 순간 머릿속은 빠르게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며 먼지 가득한 기억의 단편들을 꺼내 하나로 엮어가고 있었다.
일반적인 잣대로 재자면 내 삶은 순탄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전혀 다른 상반된 환경과 조건 속에서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삶이라 스스로를 위로한 적도 있지만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젊은 날의 초상은 한껏 비틀려져 있다. 지금 까지도 정신을 아득한 나락으로 빠트리거나 한없는 자책에 시달리게 하는 일이 어디 한두 가지이던가. 지금 다시 그 상황이 온나면 다른 결정을 했을 거란 생각이 드는 건 당연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잘못인 줄 알고 있다 해도 어쩌면 선택엔 변함이 없을 거란 생각도 같이 든다.
무림의 혈난이 종결지어지고 태산에 칩거한 이후의 세월은 내 의식에 놀랄만한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는 산중 생활의 호젓함이 예전엔 누리지 못했던 여유를 선물했고, 그 가운데 좀더 자세히 그리고 깊이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적인 의미로 다가왔던 것조차 지금 나에겐 늘 새롭고 벅찬 감동을 준다. 새벽 미명의 하늘도, 대지도 잠든 시간에 흘러 깨어 떠오르는 해를 기다리는 심정조차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행복한 순간들이다. 모든 일이 감사했고 눈에 비치는 세상의 모양 모두가 아름답게만 느껴졌다.
외부로 향한 시선을 단지 내 스스로에게 던진 변화 치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 가운데 이 평화로움이 깨질 것 같은 불안감이 내재되어 있었음은 당연했다. 그 동안 주변에 일어났던 사건들의 의미가 간단치 않았고, 그 결말이 어딘가 미진한 부분이 있어 늘 상 마음 한쪽에 불안감으로 엉켜 있기도 했다. 알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 컸기 에 그에 대한 생각으로 잠 못 이뤘던 적이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언젠가는 또다시 불어 닥칠지 모를 거부할 수 없는 검은 운명의 그림자는 내 삶 곳곳에서 지워지지 않은 채 숨결을 고르고 있을 것이다.
그 예감은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날 자유롭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마땅히 어찌 하여야 할지 모르는 상황 가운데서도 나는 본능적으로 준비를 해왔었다. 준비라고 해봐야 무어 특별할 것 없는 심정적인 것에 불과 했지만,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현재의 나에게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생애 처음으로 맛보는 이 행복감이 깨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다. 곁에 있던 천마가 심각한 어조로 입을 연다.
“진인, 그리 막무가내로 재촉할 것이 아니라 자초지종을 상세히 털어놓아 보시오.”
내게 고정되어 있던 장삼봉의 시선이 다시금 천마를 향한다.
“상황이 이리 급박하게 돌아갈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소. 선계에서는 지금껏 마계의 동향을 감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계의 변화를 감지하는데 주력해 왔소. 마계가 인간계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했다손 치더라도 설마하니 이렇게 전격적으로 움직일 줄은…… 실로 예상 밖이었소.”
“그럼 마계가 또다시 인간계에 관여하기 시작했다는 말씀이시오?”
“그렇소, 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소.”
두 사람이 주고받는 대화는 나와 무관할 수 없는 심상치 않은 내용이었다.
단지 마계의 사주를 받은 꼭두각시들만으로도 세상은 몸서리치는 혼란을 겪어야 했는데 마계의 직접개입이라니. 환아와 천아를 제외한 장내의 모든 인물들은 전신이 얼어붙는 듯한 긴장감에 휩싸인 듯 암울한 표정을 짓는다.
설란이 환아를 품속 깊숙이 끌어안는 게 내 눈에 비쳤다. 그녀의 두 눈동자는 불안을 감추지 못하고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걸 보고 있자니 마음은 더욱 무거워 져만 간다.
세월이 내게 가져다 준 가장 큰 변화는 뭐니 뭐니 해도 설란과의 사랑이 맺은 결실이다. 내 분신이 가져다 준 삶의 의미는 지금껏 지니고 있던 그 어떤 가치보다도 우월했고 우선되었다. 이럼 심정과는 관계없이 진인의 말은 계속 이어진다.
“그들의 지난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잠시 조용 한 듯싶었소. 바라기는 이대로 그들이 야욕을 접어주었으면 했더랬지. 그러나 그들은 그리 쉽게 포기하지 않았소. 차원의 벽에 직접 충격을 가하기 시작했다는 걸 얼마 전에야 알게 되었소. 머지 않아 균열이 시작될 것 같소.”
천마는 의문을 드러낸다.
“차원의 벽을 힘으로 무너뜨린다는 말이오? 어찌……. 어찌 그럴수 있소? 그게 가능한 일l이오?”
“가능하오.”
나또한 다른 질문이 고개를 들었다.
“차원의 벽이란 게 그리 허술하오?”
“마계와 인가계의 접점은 땅 속 어딘가에 있다. 그들이 차원의 벽을 허물고 있었던 건 오래 전부터 진행되어 왔던 일이었지만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차원의 벽이 허술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지닌 힘이 막강해서다. 차원의 벽이 허물어지면 곧바로 마계가 인간계에 유입되기 시작할 게다. 제일 먼저 쏟아져 들어오는 건 마수들이겠지. 그 뒤를 이어 마신들이 등장하면 이 세상은 마지막을 고하게 되고…..”
침묵이 찾아 왔다. 아무도 선뜻 입을 열어 이 답답한 상황을 바꿔보려 하지 않는다. 모두는 자신만의 생각 속으로 빠져들어 입을 여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내게는 ‘마지막’ 이란 말의 의미가 모호하게만 들렸다. 사실 죽음이란 의미조차 아직은 낯설지 않던가?
난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삶에 미련이 있는가? 없다. 아니 있다. 환아는 아직 어리다. 기회를 줘야 한다. 더 넓은 세상을 보고 느끼고 경험하게 해줘야 한다. 삶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해줘야 하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그 가운데 갈등하게 해줘야 한다. 이대로 삶의 터전을 빼앗길 수는 없다. 지키리라. 날 위해서가 아니라 내 사랑하는 아이를 위해서.
그렇지만 난 두렵다.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될지도 모를 스스로의 무력감이 두렵기만 했다. 그들이 얼마만한 힘을 지녔는지 현재로서는 겪어 보지 않아 알 수도 없다.
“어찌할 거냐?”
“모르겠소. 내게 좀더 생각할 시간을 주시오.”
어찌 그리 짧은 시간 안에 결정할 수 있겠는가. 예상한 반응이었던지 아니면 의외여서 그런 건지 모르지만 진인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고서는 등반이 상체의 무게를 실어 갔다. 그의 그런 모습은 내게는 좀 특별하게 비쳤다. 그와는 많은 나이차에도 불구하고 친구 같은 느낌을 지니고 있었다. 내게 친구란 건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렇겠지. 그리 쉽게 결정할 수는 없을 게야. 그럼 좀더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아라. 하지만 알아야 할 게 있다. 그 어느 쪽이든……신속하게 결정하거라. 그리 여유가 없을 테니. 지금 이 순간에도 벽은 점차 얇아지고 있다는 걸 명심하고.”
“알겠습니다.”
이 날 이후로 진인은 태산에 우리와 함께 머물게 되었다. 제갈초홍 등도 결과의 추이를 알고자 산을 내려가지 않았다.
난 다음날 동트기 전에 집을 나섰다. 머릿속은 몇 가지의 상념으로 가득 차서 정리되지 않고 이리저리 뒤엉켜 있었다. 붙잡으려면 저만치 달아나는 추상적인 의미의 나열이 아닌, 지금 바로 내삶의 중심에 살아 꿈틀거리며 약동하는, 현재에 대한 끈질긴 반문들이었다. 대체로 그 물음은 이랬다.
지금의 삶과 이후의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가에 대한 것과 내 삶의 형태를 결정적으로 변화시킬 연재의 선택을 어떤식으로 방향 지을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답은 나오지 않는다. 아니 이미 답은 내 가슴스고 깊은 곳에 너무도 굳건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사실 고백하자면 지금의 내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가 하는데는 그리 큰 관심이 없다. 만약 누군가 어찌 당신은 그리 세상에 무관심하냐고, 이기적이라며 비난하고 욕한다면 그냥 웃음 한 자락으로 답을 대신할 것 같았다.
내 가진 것은 몸뚱이 하나와 사랑과 혈육. 그것이 전부이지 않은가? 신선이 되고프지도 않고 무슨 큰일을 해 이름을 높이고 싶지도 않다. 내가진 것, 이것만으로 나는 충분히 만족한다. 나아가지도 물러서지도 않고 이 자리에 그냥 머물다 소박하게 살다 가고 싶다. 세상이 어수선하면 이도 큰 바람이다. 인간들끼리의 일이라면 피하면 그만이겠지만 이번 일은 그럴 수도 없다.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전체의 일인 것디다.
“역시 여기 있었구나.”
난 돌아보지 않고서도 천마가 왔음을 알았다. 예전 처음 무공을 수련할 때 거처로 삼았던 동굴의 앞 공터였다. 절벽 가운데 위치하고 있어 경치도 그만이었기에 자주 오는 곳이었다.
털썩
내 옆에 나란히 주저앉은 천마는 발 앞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손안에 쥐었다. 만지막거리며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 그만둔다. 일부러 날 찾아 왔다는 건 내게 긴히 할말이 있다는 의미일 거다. 천마는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존재다. 더군다나 지금처럼 불안이 고조되는 때는 더욱 그러했다.
“파천, 생각 나냐? 예전에 절벽을 기어오르며 고생하던 때 말이다. 그때만 해도 철부지 애같이 느껴졌는데…… 이젠 제법 의젓해 졌어. 참 세월이 빠르기도 하구나. 이런 말하고 보니 내가 무슨 부모라도 되는 것 같잖아, 하하하하.”
난 회고조가 물씬 풍기는 천마의 말에 피식 웃고야 말았다, 왜 생각나지 않겠는가. 힘들었지만 그때만 해도 지금처럼 이렇게 삶에 대해 고심할 이유가 없었다. 갑자기 생겨난 힘과 자유. 그리고 천마의 마성으로 인해 내 이성은 뜨겁다 못해 과격하게 뛰놀고 전혀 통제되지 않았다. 이리저리 고민하고 재보는 건 귀찮고 힘들었다. 그래서 모든 걸 즉흥적으로 판단하고 그대로 행동했다. 한참을 웃던 천마가 손에 쥔 돌멩이를 절벽 아래로 힘껏 던진다.
내 고민도 저렇게 던져 버릴 수 있다면.
“까짓 고민 따위는 벗어 버려라. 지금까지 살아왔던 대로 살아가면 그만이다. 네가 하고싶은 대로 해라. 언제나 그랬지만 네 선택에 어떤 결과가 따를지라도 최소한 우리들은 널 원망하지 않을 거다.최악의 상황이 오면 자살이라도 하지, 뭐.”
천마의 그 말은 내게 그냥하는 소리처럼 들리지 않는다.
“파천, 한 가지 약속을 해다오.”
“무슨……?”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어지면 아내 적루아는 괜찮겠지만 천아는, 천아를….. 네 손으로 죽여다오.”
“뭐?”
난 얼굴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얼굴 근육이 제멋대로 경련을 일으켜 갔다. 이 이상 충격적인 말이 또 있을까.
“내 손으로는…… 도저히 죽일 수 없다. 마수들에게 당하는 꼴은 더 더울이나 볼 수 없고……. 부탁한다.”
천마는 벌써 그 정도까지 각오하고 있었던 거다. 일은 내 생각보다는 훨씬 심각한 것일지도 모른다. 불안하다. 그리고 두렵다.
“그리고 덤으로 나까지 부탁하지. 아내와 자식 하나 지켜 주지 못한 놈이 살아 무엇 하겠느냐. 자살을 하게 되면 내 영혼은 안식하지 못하게 되니 어쩔 수 없다. 해줄 수 있지?”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어찌 그런 약속을 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천마의 눈 속을 들여다보고는 난 힘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대답을 하는 순간 환아의 얼굴이 얼핏 떠올랐다 사라진다. 악 걸음아를 떼며 휘청거리는 다리를 간신히 유지한 채 방싯 웃전 모습을 난 지금까지 잊을 수가 없다. 그때 ‘저 아이를 위해서라면 죽을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 동안에 지니고 있던 삶의 모든 가치가 일대 전환을 맞게 되었다.
천마에게도 그건 마찬가지일 거란 생각을 하게 되자 난 더욱 가슴이 쓰렸다. 사랑하는 자식을 죽여 달라는 네 심정이 어떠하겠는가. 너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겠지, 그들의 위력을…….
태산의 십여 년 동안 천마에 대해, 예전엔 모르고 있었던 많은 걸 알게 되었다. 그는 내가 예상하고 있던 것보다는 영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훨씬 큰 거물이었고, 상당히 많은 사연과 비밀을 간직하고 있었다.
“천마.”
“응?”
“마신들이 그렇게 두려운 존재들인가?”
“물론.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무섭다. 마수들은 솔직히 그다지 장애가 안 된다. 마황신이나 대마신들은 말할 것도 없고, 하급마신인 나찰이나 그 상위자들인 아수라들조차도 두렵기만 하다.”
“천상계의 천주나 신장, 아라한은 신이 아니다. 뭐라고 해야 하나, 좀더 완성된 존재들이다. 두 존재들을 비교하자면……. 물리적인 강함만으로 따진다면 우열을 가릴 수가 없다. 허나 마황신이나 대마신은 신장들보다는 강할 거다.”
“그렇다면 전차원계에서 그들을 견제할 존재들이 없단 말이냐?”
“물론 있다. 내가 말한 건 일반적인 경우를 예로 든 거고 천상계나 무한계, 선계, 귀계에도 특별하게 강한 자들은 존재한지. 영의 성숙정도와 물리적인 힘은 반드시 비례하는 건 아니거든.”
“그들을 끌어들일 방법은 없나?”
“없어. 그들은 스스로의 성품에 스스로 제한받는다. 신이 정해 놓은 최소한의 질서는 그들에게 반드시 지켜야 할 묵계다. 그걸 어겨가면서까지 마계를 막아서지는 않을 거다.”
“희망은 그 어디에도 없다는 말인가?”
난 그렇게 중얼거렸다. 절망은 더욱 깊어져 갔다.
“있기는 있지만 기대할 수 없는 일이라…….”
“그게 뭐지?”
“천궁의 천사들이 직접 움직이거나 여래장의 지류 어딘가에 있다는 생명나무 근처에서 광명을 훔치면 가능하다.”
처음 듣는 말에 호기심이 동했다. 그리고 이유는모르겠으나 가슴이 쿵쾅거리고 뛰기 시작했다.
“천궁의 천사들이 움직일 일은 없겠지. 신의 지시가 있지 않는 한은 말이야. 마신들과의 계약은 아직 유효하고 그 때가 차지 않았으니 거의 휘박하다고 봐야겠지. 광명은 검의 형상을 하고 있다. 광명의 검을 누군가 소유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지만 만약 그것만 가질 수 있다면 천상계도 선계도 무한계도 움직일 수 있게 된다. 그 검은 그 정도의 권위를 가지거든.”
“광명니라고? 광명…….광명이라……”
난 불가능하다는 천마의 단정엔 귀 기울이지 않았다. 내 머릿속엔 온통 그 생각만으로 가득 찼다. 낯설지 않은, 어지선가 보고 들은 듯한 느낌을 지울수 없었다.
“방법은? 그곳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은 뭐지?”
다급한 질문에 천마는 괜한 말을 꺼냈다고 후회라도 하는 듯 난처한 표정을 했다. 그리고는 고개를 가만히 저으며 입을 연다.
“생렬이 그곳을 갈 수 있다는 말은 들어 보지 못했다. 갈 수 있다해도 천사들이 지키고 있는데 무슨 수로…….”
말을 하는 내내 절대의 부정이 확신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할 수만 있다면 천마의 부정에서 긍정을 찾아내고 싶었다. 실낱 같은 희망만 있다 해도 전력을 다해 매진해 볼요량이었다.
“그건 잊어버려라. 이제부터 준비를 해야겠지. 두 손놓고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으니 대책을 세워 두자. 그리고 인간계가 차지하는 비중으로 볼 때 다른 차원계에서도 마냥 지켜보고 있지만은 않을 거다. 진인이 널 찾아 온 것도 그런 움직임 중의 하나겠지. 또한 천궁에서도 무슨 대책이 있을 꺼야, 아암.”
“천마, 난 네게 다른 차원에 대해 여러 가지 설면을 들었지만 여태까지 이해가 가지 않는게 있다. 신은 세계를 창조해 놓고 왜 침묵하고 있는 것이냐? 네 말대로라면 마계의 마신 역시나 신의 권한에 있어야 하지 않은가? 왜 그는 자신이 창조해 놓은 세계 내의 질서를 좀 더 강하게 조율하지 않는 거지?”
“나도 잘 모른다. 그 존재를 인지하고 있을 뿐 대면한 적이 없으니 말야. 한 가지 분명한 건 인간의 행과 불행, 바고 죽음, 선행과 악행이 큰 범주인 우주의 윤회 내 질서 가운데서 그다지 특별한 순간이 바로 현생이다. 그 책임은 전적으로 그 개인에게만 주어진다.
너와 나의 삶은 이전에 무수히 긴 세월을 포함하고 있고 앞으로 더 많은 시간을 상정하고 있다. 어찌 보면 지금의 삶이란 좀더 특별한 수련의 장인 셈이지. 각 개체는 스스로 판단하고 움직여 그것이 전진이든 후퇴즌 진행시켜 가고 있는 중이다. 이번 마계의 시도는 기존의 질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있어서 문제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다른 차원계는 부분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인간계에 제한을 가하지 않는다. 신의 의지 역시나 마찬가지겠지.“
“끊임없는 반복이라……그게 무슨 의미를 가지지? 그게 신의 의지라면 내 의지는 가치가 없는 건가? 만약 거부하고 싶다면……이 사슬에서 벗어나고 싶다면…….가능한가?”
“천마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전생의 모든 기억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는 천마로서도 모르는 일이란, 자신이 알고 있다 여기는 것보다 월등하게 많은 것 같다.
“대책을 세우자고 했나? 무슨 대책을 어떻게 세우지? 그들은 일반의 인간들이 보기엔 신과도 같은 권능의 존재인데…..우리가 무슨 힘이 있어 대항할 수가 있겠느냐. 네가 나에게 그랬던가. 넌 인류 역사상 가장 강한 인간일 거라고. 그런 나를 잘 봐라. 이 초라한 꼴을. 다가올 순간이 두려워 오들오들 떨고 있는 나를. 그리고 장차 영문도 모른 채 소용돌이에 휩쓸려 들어갈 저 많은 인간들은……누가 책임질 거냐. 그들의 능력을 제한한 신에게 물을까? 아니면 완전해지지 못해 또다시 현생을 되풀이해야 하는 저 무능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물을까?”
난 성난 얼굴로 벌떡 일러섰다. 지금의 상황이 너무도 기가 막히고 화가 났다.
“난 인간이다. 내 의지로 내 삶을 결정하겠다. 더 이상은 저들이 짜놓은 극 속으로 날 내던지지 않는다. 재게 만약 신의 권능을 부여해 준다 해도 거부하겠다. 그리고 인간으로 마지막까지 저들과 싸우겠다. 그것이 바로 내 의지의 유일한 표현이다.”
내가 이리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건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천마에게서 등을 돌려 발걸음을 옮겼다. 설란과 환아가 있는 곳, 내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였다. 결심은 이제 굳어져 가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파천, 넌 누구지?”
몸을 정지했다. 아니 온몸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급작스런 그의 질문. 왜 그가 그런 질문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넌 달라니기 시작했고, 그런 넌 내게 너무도 낯설게 느껴졌어. 넌 무언가 알고 있다. 부정하려 들지 마라. 넌 누구냐? 그 무엇이 너로 하여금 달라지게 했지? 왜 네 고민을 나와 나누려 하지 않는 거냐? 설란에게 들었다. 밤에도 잠을 이루지 못하게 된 게 5년이 넘었다고. 내게 말해주면 안 되겠나?”
천마, 나도 내가 누구인지 싶다네. 이후 내 입에서 흘러 나간 소리는 나조차도 흠칫할 정도로 차갑기만 했다.
“천마…… 무슨 소리냐? 난 네가 알고 있는 파천일 뿐이다. 네가 그렇게 느꼈다면 다른 이유에서겠지.”
또다시 옮겨 가는 발걸음을 고맙게도 천마는 붙들지 않았다.
집에 돌아 왔을 때는 한바탕 난리가 나 있었다. 천아는 울고 있고 파천과 잔삼봉을 위시한 모두가 적루아의 침상 곁에 서 있었다. 무슨 일인지를 알아 보는 동안 천마가 내뒤를 따라 들어왔다. 그는 황급하게 뛰어 들며 소리 질렀다.
“무슨 일이냐, 무슨 일이지?”
사람들을 헤치고 적루아의 곁으로 다가선 그는 재빨리 그녀의 상태를 살핀다. 내 손은 자연스럽게 천마의 어깨를 잡아 갔다.
“또다시 시작된 것 같다.”
“…:”
“별일 없을 테니 너무 걱정 마라., 예전에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일어나지 않았느냐?”
적우라의 몸은 불덩이 그 자체인 것처럼 보였다. 얼마나 땀을 흘리는지 침상이 푹 젖어 있을 정도였다. 단지 증상은 그것 뿐이었다. 간혹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거나 상한 성대로 알아들을 수 없는 기성을 발한다.
천아는 제 엄마의 이런 모습을 처음 대해서인지 겁에 질린 채 아버지 천마의 옷자락 붙듥 늘어진다. 옆에서 소군과 제갈초홍이 달래 보아도 쉽게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 .광마존과 자운을 비홋한 다른 사람들 역시나 달리 방도가 없기는 마친가지인지라 그냥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을 따름이었다. 설란은 연신 찬물에 담근 수건을 갈아 주느라 분주했다. 초절정의 무공을 익힌 적루아가 열병을 앓는다는 건 일반의 경우에서는 잘 설명되지 않는 일이다. 이런 일은 전에도 몇 번인가 있었다. 그녀는 곧 죽을 듯이 앓다가도 아무 일 없다는 듯 툭툭 털고 일어서기 일쑤어였다. 주변 사람들이 얼마나 놀라고 걱정했는지는 아랑곳없이 여속하게도 그녀는 아무런 곳도 기억하지 못하곤 했다. 한참을 더 있다 우리는 자리를 옮겼다. 자리를 잡자마자 장삼봉 진인이 천마에게 묻는다.
“저런 열병을 앓고 나서 기이한 예언을 한단 말이오?”
“네”
“흐음, 그렇다면 혹시……”
“네, 진인이 생각하는 바가 맞을 겁니다.”
“허, 참으로 드문 경우이군요.”
“그렇지요, 더군다나 그녀의 영력은 저도 놀랄 지경입니다. 여러 증상이나 말하는 걸루 미루어 아마도 칠성(七星) 가운데 하나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칠성이 인간으로 환생을……. 그것이 사실이라면 놀랄 만한 사건이군요.”
“그런가요?”
“듣기로도 현 인간계에 상당한 고급영자들이 환생해 있다 하더이다. 누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쩌면 인간계로 보면 다행한 일이지요.”
그 말이 왠지 낮설게 들린다. 진인 자신은 인간이 아니라는 투로 말하고 있다 느끼는 건 마만의 지나친 억측일까. 그것을 확인이라도 하고 싶었는지 압 밖으로 툭 쏟아져 나왔다.
“진인은 마치 인간이 아닌 것처럼 말씁하시는군요.”
“내가 말이냐?”
장삼봉은 돌연한 내 말에 놀란 듯했다. 내 입은 속뜻과는 달리 다른 말을 만들어냈다.
“하긴 진인의 현 상태는 반인반선이시니 그럴 수도 있겠지요.”
“내가 말이냐?”
장삼봉은 돌연한 내 말에 놀란 듯했다. 내 입은 속뜻과는 달리 다른 말을 만들어냈다.
“하긴 진인의 현 상태는 반인반선이시니 그럴 수도 있겠지요.”
“허허, 그리 들렸더냐? 어찌 내가 인간이 아니라 할 수 있겠느냐? 그리고 한 번이라도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았던 영자가 전차원계를 통틀어 얼마나 된다고. 모두 인간이었지.”
장삼봉이 말하는 ‘인간’이란 의미가 현생인류를 의미한다는 걸 모를 리가 없었지만 계속되는 어조 가운데 느낀 솔직한 심정은 그와 나 사이에 알지 못할 은연의 간극이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예전부터 지니고 있던 질문을 진인에게 던져 보기로 작정했다.
“천마에게 듣기로 천상계뿐만 아니라 모든 차원계가 인간계를 천시하거나 깔보는 경향이 있다고 하더이다. 사실입니까?”
“흐음……물론 그런 풍조가 있기는 하지만 대다수가 그런 건 아니다.”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군요. 마계야 그 연원부터가 다르니 그렇다 쳐도 다른 차원계 영자들은 모두 인간으로 창조된 존재들이지 않습니까? 그런 그들이 어찌 인간들을 깔본단 말입니까? 그리고 실제로 고급영자들 또한 인간으로 환생하지 않습니까?”
“으음, 네 말이 모두 옳구나. 그러니 아직 불완전한 존재들이지 않은가. 천상계 33천의 천주들 역시나 아직은 불완전한 존재들이니 더 이상 말해 무엇 하겠느냐.
물론 고급영자들의 대부분은 일반의 경우보다는 윤회의 사슬에서 비교적 자유롭고, 그 구속격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동일한 차원계 내에서 태어나는 경우가 빈번하니, 이런 생각들이 자연스럽게 뿌리내렸지 않나 싶다.
이를테면 귀계가 영계 가운데서도 가장 천시받는 이유 또한 이런 경우겠지. 귀계와 선계가 천상계버다 하급인 양 인식되어 있는 건 인간계와의 관련성 때문이니 말이다. 그런가 하면 천상계의 천주들 가운데서도 더 높이 존경받는 이가 있고 귀계의 칠성보다 못하게 여김받는 이도 있으니 꼭 그렇게 볼 수만도 없다.
이 세상 사람이 다 제각각이듯 영자들 또한 받아들여지는 존재감이 각기 다른 건 어쩔 수 없는 일인 듯하구나. 그리고 이런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겠지. 여기 전신이 칠성이신 분도 계시지만…..그 위를 온전히 되찾기 전에는 그 분을 칠성으로 대하지는 않는다. 만약 그럴 경우 어찌 내가 그 분 앞에 고개를 숙이지 않울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은 이치이다.“
천마는 장삼봉의 말에 동감한다는 표시로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난 마땅치 않았다.
“영계 또한 존재에 대한 차별이 심하니 인간계와 별반 다를 게 없군요. 그들이 무슨 근거로 그런 우월 의식을 지니고 있으면 그 권한은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꼬인 듯한 심사가 그대로 드러나는 말에 장삼봉은 웃음으로 대신할 뿐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한참을 있다가 장삼봉이 이런 말오 자신의 생각을 드러냈다.
“네 말에도 일리는 있다만 그건 네 생각처럼 단순히 편견에서 비롯되는 폐단은 아닌 듯싶다. 영자들의 높음과 낮음은 계급이나 서열이라기 보다는 존경의 의미가 더 강하며, 그들이 그런 위치에 오를 수 있는 건 그 동안에 쌓아 온 공덕에 의해서다.
영격은 하루아침에 생성되기보다는 오랜 세월을 통해 이룩된 것이지. 그만한 희생이나 수행이 없이는 가능치가 않다. 그들이 스스로 지닌 바 능력이나 위치로 다른 영자들을 역압하거나 강제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모범을 보이고 가르치고 이끌어 주니 이 또한 선업이 아니더냐. 마땅히 그럴 만하니 그런게야.“
“파천, 진인의 말씀은 하나도 틀리지 않다. 너또한 지금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지만 죽어 네 영격을 찾게 되면 당연히 그런 생각이 들 거다. 이건 틀림없는 사실이야.”
난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입을 꾸욱 다물었다, 처음에 내가 겪은 혼란은 이만저만 큰 것이 아니었다. 지금에 와서야 어느 정도 납득이 가고 이해가 가지만 처음 듣고 겪을 때만 해도 도무지 그런 세상이 죽음 너머에 존재한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태산에서 혜는을 통해 기이한 만남을 가졌던 존재도 처음엔 어떤 신비한 영적 존재로, 다음엔 의식의 다른 작용으로, 나중엔 이도 저도 아닌 환상쯤으로 단정내려가고 있을 때 천마를 통해 많은 걸 듣게 되었다. 적루아에게 일어나는 신비한 현상을 본 이후 끊임없이 대화를 나눈 ‘그’와의 계속되는 만남으로 인해 점차 생각은 방향을 선회해 갔다.
물론 처음 혜능과 천마의 유입을 겪고 나서 영혼이 존재한다는 건 애초부터 믿게 되었지만 그 정도로 분명하고 확실한 또 다른 세상이 실재한다는 건 눈으로 보지 않고서는 부정하고픈 심정이었다.
더 많은 걸 보고 느끼며 점차로 확신에 젖어 가는 자신을 깨닫게 될 때마다 그만큼 스스로는 초라해지고 보잘것없어지고, 이 삶이 덧없다는 걸 인정하는 것같아 애써 삐딱한 태도로 일관해 왔었다. 적어도 내게는 현제의 삶이 가장 소중하고 위대하며 있다는 걸 스스로게만은 납득시키고 이해시킬 수 있어야 했다.
내세를 인정하는 것이 현재의 삶에 대한 가치 절하와 결부되지는 않을 텐데도 난 계속되는 혼란속에서 거듭 흔들려 가곤 했다. 사실 내가 이렇게까지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게 된 데는 ‘그’와의 대화가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이다.
극심한 갈등이 초래된 건 나와 그 사이에 벌어진 도저히 좁힐 수 없는 견해 차이 때문이었다. 너무도 다른 입장의 차이는 그와 내가 다르다는 것만큼이나 분명했다.
‘그’가 지닌 논리와 견해와 가치는 스스로 저항없이 받아들이기엔 무리가 있어싸. 끝없는 논쟁은 더욱 혼란스러움으로 날 이끌었고. 그를 더욱 강하게 몰아네게 만들었다. 결국 ‘그’는 ‘네 생각이 달라지면 나를 불러라’ 는 말로 끝맺음하며 내 곁을 떠나 갔다. ‘그’를 부정한 3년 전부터 그는 나타나지 않았으며, 그때부터 내적 갈등은 오히려 더 깊어만 가고 있었으니 이 또한 모를 일이었다.
열병에 시달리는 적루아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일도 없이 며칠이 흘러 갔다. 그러던 어느 날 모든 사람이 적루아의 방에 또다시 모이게 되었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두 눈을 떴으나 사물을 분간하지 못하고, 열이 내렸지만 듣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아이들이 혹여 보게 되면 충격을 받을 것을 우려해 설란이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모두는 침상에 일어나 앉은 적루아의 곁에 모여 섰다.
“괜찮소? 정신이 좀 드오?”
천마의 말에도 그녀는 의식을 차리지 못했다. 잠시 뒤, 어떤 일이 벌어질지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아니다 다를까, 그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다. 소군과 제갈초홍 등은 처음 대하는지라 잠시 놀란 듯 기이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적루아의 눈은 점차 붉은 빛을 담아 가더니 급기야 머리칼리 곤두서기 시작했다. 침상에서 내려와 북쪽을 향해 서도는 두 팔을 벌린다. 그녀의 옷은 점차 부풀어 파드득, 소리를 내며 휘날렸다. 돌연히 실매네 바람이 몰아쳤는데 신기하게도 그녀 한 자 주변 밖으로는 빠져 나오지 않는다.
그녀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던 방삼봉 진인은 침으마며 작게 중얼거렸다.
“진정 칠성의 환생이란 말인가?”
나직한 독백이었지만 모두는 분명히 들을 수 있었다. 그녀의 비어버린 동공에서 더욱 붉은 불꽃이 스며 나오며 장내에 있는 인물들을 하나하나 훑어본다.
“날 알아 보겠소?”
천마는 자신에게 시선이 멎었다고 생각하자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대한 듯 차갑게 고개를 돌려 버린다. 그러더니 그녀의 입에서 웅얼거리는 소리가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어이 할꼬. 어이 할꼬.”
그녀의 음성은 너무도 또렷했다. 그녀가 말을 하지 못한다는 건 여기 있는 사람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소군은 조금 섬칫한 감을 느꼈는지 내 옆으로 바싹 다가셨다. 그 사이에도 적루아의 말은 계속되고 있었다.
옛 용의 반란이 있던 날, 천지가 암흑에 갇혀 그 빛을 잃고,
허덕이는 영혼들은 갈 길을 잃어 빛을 찾아 헤맨다.
광명은 씨앗이니 마음에 심기었고 자라 더큰 빛으로 화했으나
우리네 영혼들은 이를 모르고 연신
‘빛은 어디 있느냐‘ 허망한 소리만 하누나.
빛이 어둠을 살라먹고 어둠이 빛을 삼켰으니
또다시 세상은 지옥으로 화하도다.
일신의 뜻이 어디에 있느뇨,
마음자리를 살필지라.
육신의 사슬은 이리도 직기고 무거우니
누가 있어 참 길을 열겠느냐.
마성이 오히려 빛을 발하니
세상이 불길에 휩싸여 춤을 춘다.
아비가 자식을 찌르겠고
자식이 어미를 베니
하늘이 닫히고 땅이 애통한다.
돌연히 어린아이가 말문을 열 듯이
사람들 가운데 큰 소동이 있어
영안이 열리고 권능을 입겠으나
‘내 힘이 어디에 미치리요’ 하느니라.
모두 한 소리로 말하고 하나로 들으며
천지 사방에서 모여들어 힘을 더하고 더하더라.
적은 사방에 두루 미쳤고
그 힘은 태초부터 있었던 것이니
일신으로 비롯된 것이라
가장 강성하매 누가 꺾을 것인가.
또 하나의 검이 아니겠느뇨.
전신에 륜을 둘렀고 광명을 지녔으니
이 큰 자가 누구뇨.
그가 힘을 더하니 이기고 이기더라.
여기까지 말하고서는 잠시 멈추고 있자 장삼봉이 그녀에게 묻기 시작했다.
“당신은 칠성 중 한 분이십니까?”
“칠성이 어둠을 입었으니 육좌가 칼을 들이대리라.”
질문과는 전혀 상이한 대답임에도 불구하고 장삼봉은 약간의 흥분마저 보인다.
“그 말씀은 귀계의 면절을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반란은 있겠으나 광명이 있어 안전하다.”
“광명검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광멍은 두루 퍼졌으니 어디엔들 없겠는가.”
두 사람의 기이한 대화는 계속되고 있었지만 도무지 무슨 소리들인지 알 수가 없었다.
“마계의 힘을 저지할 방법은 있는지요?”
“어린 아이가 어미를 그리워하듯 용은 울부짖고 큰 슬픔을 감내하지 못해 춤을 추는구나. 어디에 안전이 있을꼬. 그 어디에도 없도다. 한 차례 폭풍이 불어치니 몸을 맡기는 수밖에 없으리라. 큰 대지가 있으니 그곳이면 안전하나, 갈 수가 없도다.”
“그 곳은 어디며 왜 가지 못합니까?”
장삼봉은 적루아에게 계속 말을 시켰다. 천마나 난 적루아가 이런 현상을 보였을 때 단 한 번도 지금의 장삼봉처럼 하지 않았다. 가만보니 그는 무엇인가를 알아내려 하는 것 같았다.
천마의 말을 빌리면 귀계의 수장들인 칠성들은 그 강성한 힘만큼이나 예지력이 강한 존재들로 알려져 있다고 했다. 적루아가 칠성의 현신이라면 그녀에게서 꽤나 많은 걸 알아낼 수도 있을 듯 싶었다.
“가고 싶으나 자격이 없도다. 우주에 그만한 위격을 지닌 이가 누가 있겠는가. 과거세의 모든 완전자들이 그곳에 있으니 광명세라 하더라.”
“마계의 환란을 피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습니까?”
“…..”
처음으로 적루아가 말문을 닫았다.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고 저 멀리 먼 데를 바라보는 것도 같았다. 장삼봉이 그녀를 유도했다.
“전신에 륜을 두르고 광명을 지닌 자가 관련되어 있군요.”
“그는 태초에 처음 일신으로부터 비롯된 존재, 강하고 순결하며 그 모습은 아름답기 그지없도다. 그는 둘이며 하나니 서로를 그리워 한다, 하나는……하나는…….”
“하나는?”
진인이 그녀의 다음 말을 재촉했다.
“두텁고 무겁다. 알 수가 없다.”
그리고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주절대기 시작했다. 마치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다. 장삼봉도 천마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인 듯 물끄러미 쳐다보고만 있다.
넋두리인 양 시작된 중얼거림은 이후 한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다가 그녀가 여전히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난 슬쩍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였다.
“여기 섰는 사람들의 내력에 대해서 알 수 있소?”
적루아가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아니면 뜻밖의 질문이었는지 가만히 날 주시한다.
“그대 나그네여, 무엇이 궁금한가?”
왜 내게 나그네라 하는 거지? 하긴 사람은 모두 나그네지. 왔다 가는 존재. 머물지 않는 존재. 가버린 이후엔 잊혀질 존재.
“말 그대로요. 여기 있는 자들의 내력에 대해 듣고 싶소.”
사실 내가 진정 하고 싶은 얘기는 다른 것이었다. ‘내가 누구요?’ 라고 묻고 싶은 걸 이렇게 돌려 말한 것이었다.
이어 적루아의 입에서 내실에 서 있는 자들의 전생에 대한 얘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광마존과 자운은 천상계의 천인들이라 했다. 그들은 전생에 세 번에 걸쳐 부부가 되었는데 단 한 번도 행복하지 못했다. 아니 불행했다.
처음은 광마존이 일찍 죽는 바람에 두사람은 헤어져야 했고, 두 번째는 전쟁으로 그리 되었으며, 세 번째는 광마존이 자운을 버려두고 떠났다는 것이다. 두 사람의 얼굴은 적루아의 말이 이어짐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변해 갔다. 그 세 번의 만남 동안 이루지 못한 걸 이번 생에 다 이루려 한다는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한 사람, 한 사람 지목하여 말을 쏟아내기 시작하자 모두는 놀람을 금치 못했다. 소군은 무한계의 요령족이었고, 율극은 무한계의 거신족의 일원이라 했다.
이런 말을 들으며 솔직히 내 마음속에 불 일듯 생겨난 의문은 영계도 이 땅과 다름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 땅에 여러 민족, 여러 나라가 있듯 그들도 그런 것을 보면 말이다. 제갈초홍과 사라는 천계의 33천 중 한 곳의 출신이라니 놀랍기만 했다. 그녀들 역시 광마존, 자운과 같이 천인들이라는 것이다.
장삼봉을 가리키며 선계의 팔선중 하나라 했을 때는 다들 ‘역시 그랬군’ 하는 표정들이엇다. 적루아의 얼굴이 천마에게로 향했을 때는 모두 약간 긴장하는 것 같았다. 난 이미 그의 전생에 대해 익히 들은 바가 있었으므로 그다지 흥미롭지 않았다.
“인간으로 마성의 일곱 검 중에 하나가 된 자여. 그대 이름은 온 우주에 널리 퍼졌고 그대의 능함은 모든 족속이 두려워함이다. 강성한 힘으로 오히려 천사들을 누르니 그 이름이 찬란했도다. 천상의 빛을 얻어 그 마음을 돌이켰으니 이제는 어이할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구나. 대마신의 이름이 어찌 그대에게 가당키나 하겠는가.
그대의 길을 가라. 어려움을 이기고 나면 능히 어둠에 빛나는 밝은 별이 될 것이라. 또한 마지막 때에 그대는 또다시 현세해야 함이니 그 모습이 군사를 거느리는 장수의 위용이라. 그대를 치는 자들이 누구인고. 가만 보니 어둠의 천사들이다. 그대를 포위하고 칼과 검으로 위협하나 그 뜻을 꺾지는 못하리라.”
천마에게서 들은 말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 한때는 마계의 7대 대마신 중 하나였던 천마. 천상계의 한천주에게 감명을 받아 마음을 돌이키게 되었고, 무한계에 정착했다. 원래가 무한계는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비교적 자유로운 영혼들의 거지주였다. 전 우주에서 가장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으며 가장 많은 수의 영자들이 머물고 있다.
그는 그곳에서 다시금 인간으로 태어날 날을 손꼽아 기다렸으며 세상을 위해 제 몸을 내어 주겠다 서원하기까지 했다. 골수에 미친 마성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 법. 그에게 인간으로 환생할 기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다. 그때 천상계의 한 천주가 그에게 제안을 해왔는데 천마는 두말없이 수학하게 된 것이다. DURLrk지가 내가들은 천마의 전생 내력이엇다.
적루아가 마지막 남은 날 주시해 왔다. 긴장되었다. 드디어 내 지닌 의문을 풀게 되었다 생각하니 약간의 흥분감마저 생겨났다. 그녀의 음성은 성대를 다친 사람답지 않게 또렷하고 분명한 아름다릉ㄴ 여서의 것이었다.
“그대는 나그네다. 기나긴 모험을 하며 큰 세 가지를 얻고 큰 세가지를 잃을 것이다.”
그것이 전부인가? 그녀의 말을 더 기다렸지만 그 이상은 들을 수가 없었다. 이대로 물러설 수도 없었다, 들어야 했고 확인해야만 했다.
“천상계의 천인이었고?”
“아니다.”
“그럼 귀계의 귀령이오?”
“그도 아니다.”
“그럼 무한계구려.”
“아니다. 그대 발자취는 그곳에서 느껴지지 않는다.”
이제 남은 건 단 하나. 난 말할 수 없는 충격을 느꼈다. 내가 마계출신이란 말인가? 그랬던가? 어쨌든 확인을 해봐야 하는 것이다.
“그럼 마계란 말이오?”
“그건 더더욱 아니다. 알 수가 없다. 그대는 뭐라 규정할 수 없는 자. 그대는 그 어디에서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대는 누구인가?”
되려 그녀가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나는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녀의 부정이 오히려 반가웠던 한편으로, 그 재질문에는 허탈감을 감출수가 없었다. 난 힘없이 이렇게 물었다.
“그럼, 인간이긴 한 거요?”
“그대는 인간. 인간이다.”
“그럼 된거요.”
무엇을 기대했던가. 그래, 난 참사람이고 싶을 뿐. 내 전생이 무엇이었던가는 중요하지 않다. 내심을 괴롭혀 왔던 스스로에 대한 의문은 칠성의 환생이란 적루아의 영력으로서도 풀지 못한 셈이다. ‘그’ 역시나 마찬가지였다. 언제나 이 질문에 대한 답만은 피했다. 단지 ‘너는 나다’ 라는 말만 되풀이했을 뿐이었다.
그때의 일을 상기하자 씁쓸한 미소가 입가에 매달렸다. 이어 장삼봉과 천마의 질문이 한동안이나 계속되었지만 그다지 별다른 건 없어서인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적루아가 본 모습으로 돌아온 건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할 무렵 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그랬듯 스스로가 한 말을 전혀 기억해내지 못했다. 모두는 한바탕 꿈이라도 꾼듯한 표정을 지었다. 발길을 돌리기엔 뭔가 아쉬운 구석이 많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음을 기약해 보는 수 밖에.
모두에게 며칠은 마치 몇 년과도 같은 긴장감을 주었다. 절망을 품고 매일 떠오르는 해를 보며 안도해야 한다는 건 어찌 보면 더 이상 처절할 수 없을 불안을 내재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래서 일까, 우리들은 항시 모여 있었고, 되도록 많은 대화를 나누려 했다.
내실에 모여 있는 사람들의 얼굴은 그리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았다. 천마가 내게 말했다.
“이제 어떻게 할 셈이냐?”
결정은 네가 해라, 라는 의미임을 왜 모르겠는가. 내 얼굴을 뚫어져라 주시하고 있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자세히 뜯어 보았다. 어느 누구 하나 정겹지 않은 얼굴이 없었다. 모두가 소중한 사람들이었다. 함께 어려움을 헤쳐 나왔고, 앞으로도 함께 할 사람들의 얼굴이었다. 그들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하다, 그래서 더욱 가슴이 아프다.
“진인, 이미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전 가지 않습니다.”
장삼봉은 그저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였을 따름이다. 이미 내 결심이 흔들림 없이 굳어졌다는 건 감지하고 있는 터였던지 별다른 반박이나 토를 달지 않는다. 그것이 또한 고마웠다.
“마계의 마인들을 상대할 힘은 현재 저희에게 없습니다. 승산 없는 싸움이 되겠지요. 상대가 되지 않을 걸 뻔히 알지만….. 저항은 치열할 겁니다. 무림맹과 천마교를 중심으로 힘을 모을 겁니다.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는 데까지는 해 봐야겠지요. 소군과 맹주는 산을 내려가는 즉시 비상체제로 돌입하고 언제든 전력을 규합할 준비를 해다오.”
“네.”
두 사람은 공손히 대답하며 머리를 숙여 보였다. 이때 광마존이 마음에 담아 둔 채 궁금해 했던 것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어 말했다.
“지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해라.”
“어차피 상대가 되지 않는다면…… 차라리 죽음으로써 원래의 자신을 찾는다면 오히려 낫지 않겠습니까? 그 뭣이냐……칠성인가 하는 분의 말씀대로라면 우리들은 저쪽세상에서 모두 한 가닥한다는 얘기 아닙니까?”
광마존이 쑥스러워하며 제 논리로 지어 본 말을 하자 모두는 웃음을 짓고만 있었다.
“그러니 죽어 원래의 힘을 되찾아 마계를 상대하면 훨씬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드는군요.”
들어보니 그럴 듯했다. 그러나 그건 되도 않은 소리임이 천마의 말로 드러난다.
“죽어 영계로 돌아가면 다시 인간계로 돌아오지 못하는데 말이냐?”
“그런……겁니까?”
제갈초홍이 살풋 웃는다. 그녀는 두 눈을 반짝이며 그다지 염려하지 않는다는 투로 말했다.
“전 오히려 예전 일월교 때보다도 마음이 가벼운걸요.”
“무슨 의미지?”
그녀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이미 승부는 결정되어 있으니 집착할 필요가 없고, 기껏해야 죽기밖에 더 하겠어요? 죽으면 끝이 아닌 내세의 삶이 계속된다는 걸 알았으니 죽는게 무슨 두려움이 있겠어요? 그러니 마음을 비우고 홀가분하게 대항하다 가면 그만이죠.”
“허허허”
“그런가?”
공허한 웃음이 실내를 가득 채운다. 이때 천마가 그런 좌중에게 경고를 잊지 않는다.
“한 가지 명심할 건 마수들에게 당해서는 안 된다. 차라리 죽은 자들은 다행이겠으나 그들의 의도가 인간들 모두를 죽이려 하는 게 아니니 필시 자신들의 꼭두각시를 만들려 할 거다. 아마도 못 볼꼴 많이 보게 될지도 모른다.
인간이 죽으면 현생에서의 모든 행위에 대해 값을 치르게 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자살은 가장 무겁게 처리된다. 영격에도 이만 저만 손해가 아니고. 아마도 그들은 이런 점을 교묘히 이용하게 될 거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그런 사실을 모르잖아요? 그러니 고통을 당할 바에 s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지 않겠어요? 어차피 막을 수 없는 일인 것 같아요.”
소군의 말에 율극이 맞장구를 친다.
“듣고 보니 그렇군. 여기 있는 우리들을 제외하고 마계가 인간계에 유입될 거란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도 전무하지 않습니까? 정말 이 세상에 지옥이 열린다면…… 누군들 제 목숨을 이어가려 하겠습니까?”
듣고만 있던 장삼봉이 율극의 말을 부정했다.
“마계가 유입되면 인간계에 제일 먼저 야기되는 변화가 무엇인지 아느냐? 칠성의 예언에서도 드러났듯 인간들은 어느 정도는 영성을 회복하게 된다. 모두 하나로 듣고 한 가지로 말한다는 걸 생각해봐라. 만국이 언어가 다른데 어찌 가능하겠느냐? 결국 민족과 나라 간에 말이 달라도 서로 알아들을 수 있게 된다는 의미겠지.
원래 인간들은 동일한 한 가지 언어를 지니고 있었으니…… 영성의 회복으로 서로 간에 의사 소통이 원활하게 된다는 뜻일게다.
영성을 회복하게 되면 몰랐던 많은 걸 알게 된다. 물론 그 정도의 차이도 있고 시간 소요도 많이 걸리겠지만. 그런 그들이 쉽사리 자살을 선택하지는 못하지. 결국 마계가 강제하는 대로 따를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초래되겠지. 그래서 막아야 한다는 게다.“
“진인, 전에 선계는 반쯤 인간계에 발을 걸치고 있고 차원의 벽이 없는 유일한 세계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렇다면 선곙[서 도움을 주면 되는 것 아닙니까?“
이런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언젠가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는 걸 난 과거의 기옥 속에서 찾아낼 수 있었다.
“선계 역사나 천상계나, 귀계, 무한계와 마찬가지로 질서에 순응해야 한다. 어느 정도의 선을 지킨다면 모를까, 전면적인 대응은 기대할 수 없다.”
그때도 이런 대답을 들었던 것 같다. 제갈초홍이 곧바로 장삼봉에게 물었다.
“이 땅에 은자천 말고도 선맥이 두 곳이 더 있다고 했던 것 같은……그들은 어떻죠?”
“그들이야 이 땅을 밟고 사는 인간들이니 당연히 포함되지. 은자천도 마찬가지고, 선계의 맥을 이었지만 아직 그들은 인간의 몸을 지니고 있다. 결국엔 그 한계가 분명하고 그다지 큰 도움은 되지 않을 게야”
그건 여기 있는 천마나 장삼봉도 예외는 아니었다. 보통의 인간들과는 분명 다른 경우여서 전생의 모든 기억을 지니고 있다지만 육체가 지닌 한계는 극복하지 못했다. 천마가 만약 자신이 지닌 본래의 힘을 사용할 경우 영혼을 담고 있는 연약한 육체는 그 강한 힘을 견디지 못한다고 했다. 그럴 경우 죽음이 아닌 소멸이란 극단의 결과에 봉착하게 된다. 이러니저러니 아무리 많은 대화를 나누어 보아도 속 시원한 대책이 나올 리는 없다. 그러 짓눌려 있는 답답함을 다소 해소하는 위한거리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누군들 심사가 편할 수 있겠는가. 이때 약간은 절망의 무게를 덜어내는 말이 장삼봉에게서 나왔다.
“노근께서는 파천, 네가 거불할 거라 이미 예견하고 계셨다.”
“노군이라면…..”
“천상계에 천주들이 있고 귀계에 칠설이 있다면 선계엔 태상노군과 8선이 지도자로 존재한다.”
8선이란 존재들이 그 정도로 선계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딘 말인가. 그럼 진인도….
“그분이 말씀하시길 차원의 벽이 허물어지고 마계가 유입되고 나면 환생중인 고급 영자들이 어느 정도의 각성이 이루고 저마다 마계의 힘에 대항할 거라 하셨다. 물론 역부족이겠지만 그 대항 자체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하셨지. 그들은 각 차원의 중요 위치에 있는 자들이기에 만약 계기가 주어진다면 전차원이 마계를 상대로 포화를 열 것이라 하더구나. 그 계기가 무엇인지는 말씀이 없으셨지만… 그리고 이건 여담이다만 넌 꽤니 유명해졌더라.”
“무슨 말씀이신지…”
“지난 혈난 때의 일을 말하는게다. 마계의 힘을 전해 받은 그들이 설마하니 인간에게 무릎을 꿇게 될 줄이야 그 누군들 예상했겠느냐. 조금 충격이 컸나 보더라고. 그 바람에 파천, 너는 일약 영계의 호기심 어린 관심의 대상이 된 거지.”
“햐, 우리 사부님 유명 인사 되셨네요. 더군다나 전 우주에서 말이에요”
소군의 너스레에 한층 분위기는 밝아져 갔다.
“좀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네가 그들을 이겨서라기보다는 네가 만든 오행구슬 때문이다. 그건 어떤 측면으로 본다면 새로운 물질을 창조해낸 것이다. 어찌 놀랍지 않았겠느냐.”
그의 얘기를 듣고 있다 보니 한 가지 의문이 번뜩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고 보니 이상한데요.”
“뭐가 말이냐?”
“일원교주 등이 마계의 마신들이 입는다는 마신갑을 어떻게 전달 받았죠? 어떤 경로로…”
“그들이 마계로 들어갔다 왔으니 가능하지.”
“그럼 인간은 차원을 드나들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런 셈이지. 물론 그만한 능력이 있어야 하지만.”
더욱 설득력이 없는 말이었다. 일월교주 등이 마계를 드나들 수 있을 만큼 능력이 뛰어났다고는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능력의 기준이 뭔지가 궁금했다. 장삼봉은 묻지도 않았건만 내 속을 훤히 꿰뚫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질문에 앞서 입을 열었다.
“물론 그 능력이란 게 마계로부터 전해 받은 것이겠지만. 그럼 또 이런 질문을 하겠구나. 그럼 마신갑은 어떻게 가지고 들어왔냐고. 마신갑은 영물이다. 네가 만든 오행신주처럼 말이야. 그런 영물들은 차원을 드나드는 데 아무런 제약도 없다.
이건 다른 얘기이긴 하지만, 한 가지 설명하자면, 영자들을 특별한 존재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육체가 없는 순수하게 영적인 상태는 아니다. 처음 인간이 죽음을 당하고 영계에 발을 들이게 되면 육신이 없는 순수 영의 상태가 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신체를 지니게 된다. 물론 현생인간의 몸과는 다르긴 하지. 영계에서도 나고 죽고 한다. 거기에서의 죽음은 영체의 소멸이고, 새로운 영체를 지니게 되는 것이 다를 뿐이지.
인간이 영계를 다녀오는 일은 자주 있지는 않지만 간혹 있어 왔던 일이다. 거의 육신은 이 땅에 두고 영혼만이 다녀간 일이 대부분이지만 때로 육신을 입은 완전한 인간의 상태로 다녀간 일도 있었다. 이런 경우는 아주 특별한 경우이지.”
그들이 차원을 넘나들 수 있었다면 나도 가능하단 말이지 않은가?
“그럼, 그렇다면 여래장이란 곳에 인간이 갈 수도 있겠군요.”
“뭐? 그건 좀 다른 얘기다. 그곳은 천궁의 공간 중 하나이기 때문에 천상계의 천주들도 임의로 갈 수 없는 곳이다. 인간계와 영계의 격차만큼이나 간격이 큰 곳이라고 보면 된다. 그런 곳을 생령인 인간이 간다는 건…….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글쎄다.”
역시 어렵다는 말인가? 그곳만 갈 수 있다면……. 그래서 광명으로 다른 차원계를 움직일 수만 있다면……. 난 미련을 버릴 수 없었다. 생각하기에 그것만이 유일한 방법으로 여겨지는데 어찌 포기할 수 있겠는가. 어차피 인간의 힘으로 가능하지 않은 현 상황에서 다른 차원의 개입이 있지 않고서는 마계를 물리칠 수 없다. 그렇다면 그들을 끌어들여야 하는데 그 유일한 방법이 광명을 지니는 것이라지 않는가.
천마나 장삼봉이 불가능하다 단언했으나 난 결코 그 생각을 단념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며, 오히려 마음속에 더욱 굳게 자리 잡고 더욱 강한 열망으로 자라나기 시작했다.
다음날 장삼봉은 태산을 떠났다. 그는 떠나며 ‘언제든 마음이 바뀌면 얘기해 다오’ 라는 말로 일말의 가능성을 열어 두었다. 그리고 ‘행운을 빈다’ 는 조금은 어색한 말도 함께 했다. 소군과 제갈초홍 등도 산을 내려갔다. ‘곧 뒤 따라 가겠다’ 는 내 말을 안고서. 나는 광마존을 따로 불러 한 가지 지시를 내려두었다. 천마와 내 가족이 함께 살 장원을 천마교 근처에다 하나 구해 두라고 했다.
그들 모두가 떠난 뒤에 우리들도 하산할 준비를 서둘렀다. 아이들은 마냥 좋아했다. 처음으로 산을 떠나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간다는 게 너무도 설레는 일인 것 같았다. 녀석들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했던 중원의 풍경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게 그렇게도 좋은 일인 모양이었다. 하긴 왜 그렇지 않겠는가. 나도 예전에 그러지 않았던가. 이런 생각이 언뜻 들었다. 난 지금껏 내 욕심으로 아이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제한한 것은 아닌가, 하고.
어찌 보면 아이들의 이런 즐거운 기대는 잠시 뒤 이어질 파탄과 맞닿아 있기에 더 아름다운 것일지도 모른다. 마지막 순간. 어찌 보면 현 세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그 가중된 고통으로 인해 더 행복한 것일 수도 있었다. 그 누가 있어 제 마지막 때를 알고 삶을 살았던가. 적어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머지않아 다가올 종말을 너무도 확고히 알게 되겠기에 삶을 더욱 살찌고 아름다운 것으로 꾸밀 수 있지 않겠는가.
다 쓸데없는 생각이다. 누구나 태어난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죽는다는 걸 알고 있다. 그 세월의 길고 짧음이 다를 뿐 알고 있는 건 마찬가지이지 않은가. 매 순간을 다음 순간 죽을 수도 있다는 기분으로 살아간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가장 완전에 가까울 것이다.
후후, 그런 삶의 긴장은 차라리 지옥이겠군. 이런 저런 쓸데없는 생각들을 하며 정원을 이리저리 들쑤시고 다니는 아이들의 행적을 뒤쫓고 있으려니 설란이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그녀는 여전히 젊고 아름다웠다. 세상의 어던 보석이 저런 휘황한 빛을 발하려는가. 그녀는 내게 있어 여신이었으며 삶을 아름답게 채색하는 희귀한 물감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고 있어요?”
그녀의 눈망울에는 근심도 걱정도 담겨 있지 않다. 내 앞이라서 그런 것일까? 여자란 사랑하는 남자 앞에서는 모든 것을 망각하는 존재이기라도 한 것인가? 아니면 모든 것을 이길 힘이라도 얻게 되는가?
“아니, 별로. 하산하는 심정이 어떻소?”
“저도 별로예요.”
생긋 웃자 하얀 치아가 고스란히 눈앞에 드러났다. 어렸을 때부터 부족함 없이 자란 그녀였던지라 처음엔 산중 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을지가 걱정되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이런 내 우려를 말끔히 씻어내면 당당하고 활기찬 모습으로 일관했다.
설란을 어떤 말로 규정지을 수 있을까? 부드러운 여자. 아니,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타고난 것인지 아니면 후천적으로 가꾸어진 것인지 그녀는 작위적이지 않은 품위가 엿보였다. 그런 반면 나보다도 더 강한 삶의 열정을 보일 때도 있었다. 그 열정이 내게 열정으로 보이게끔 만드는 건 그녀의 진솔한 삶의 태도 때문이었다.
있는 그대로 본다는 건 때론 그 무엇보다 힘든 경우가 많다. 어제 밤만 해도 그랬다. 걱정 때문에 잠 못 이루고 뒤척이고 있는 날 그녀는 뒤에서 꼭 안으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저와 환아 때문이라면 너무 걱정 마세요. 내일의 걱정 때문에 오늘을 허비한다는 건 너무도 어리석은 짓이죠. 순간을 향유할 수 없다면 일생은 후회만으로 가득할 거예요. 현재의 나와 환아는 당신을 신뢰하고 자랑스럽게 여길 뿐만 아니라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랑해요.”
그렇기 때문에 난 더 번민하는 것이라 변명하고 싶었지만 입을 열어 표현하지는 않았다. 그녀의 따뜻한 말 한마디 덕분이었을까, 난 어젯밤 오랜만에 단잠을 잤었다.
“설란.”
“네.”
“뱃속에 있는 아이가 세상을 보지도 못하게 된다면 그대는 어떻겠소? 그 슬픔을 이길 수 있겠소?”
그녀는 잠시 아이들이 노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숨을 고르며 생각에 잠긴다. 그 모습을 난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다시 날 향해 고개를 돌린 설란은 작은 입술을 열어 부드러운 음성을 흘렸다.
“내 슬픔은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아요. 그 아이는 어떨까요?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 것과 태어나는 것 어느 쪽이 더 다행일까요? 제 슬픔은 제가 이기면 그만이거든요. 그건 내 몫이니까. 만약 그 아이가 고통만이 있는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걸 다행이라 여긴다면, 기뻐한다면…… 나 또한 함께 기뻐해야 할 것 같아요. 부모의 역할이란…… 그런 것 같기도 해요. 아이가 자라서 스스로 슬픔을 이길 나이가 될 때까지 그 슬픔으로부터 고통으로부터 방패막이가 되고 버팀목이 되어 주는 것.
물론 새로운 생명이 채 피어 보지도 못하고 꺾인다는 건 슬픈 일이죠. 아마 한참 동안 난 아무것도 먹지 못할지도 몰라요. 모르겠어요. 그때가 되어 봐야 알죠. 그렇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거예요. 그렇게 믿고 싶어요.”
어디서 이런 강한 모습이 나오는 걸까? 그녀 역시 최근 일 때문에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일 거다. 그런데도 설란은 단 한 번도, 단 한 순간도 스스로의 흔들림을 밖으로 내비치지 않았다. 어머니여서일까?
“파천, 언제 내려갈 생각이냐?”
천마와 적루아였다.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천마는 두 손바닥을 마주치며 기재개를 한껏 켰다. 그리고는 하늘을 쳐다보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오라질! 날씨 더럽게 좋구만.”
“내일 내려가자.”
“내일? 그러지 뭐.”
뒤쪽에 있는 탁자에 두 팔을 대고 뒤로 한껏 몸을 젖힌 후 천마는 무엇이 생각난 듯 내 쪽으로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아 참, 그러고 보니 소군에게 그 얘기를 안 한 것 같아. 우리 거처말이다. 그냥 천마교에서 머물 거냐?”
내가 이미 광마존에게 일러 둔 것을 천마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광마존에게 말해 두었다. 천마교 밖에다 작은 장원 하나를 알아두라 했다.”
“그래? 잘했군. 그게 낫겠지. 살벌한 천마교의 분위기는 애들한테 안 좋을지도 모르지. 그냥 평범한 일상을 경험해 보는 것도 좋을 거야.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니 말이다.”
적루아가 곱게 얼굴을 찡그린다. 나 또한 듣기 싫은 소리였다. 그렇지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 않은가. 아이들이 아무 일 없이 장성하기를 바란다는 건 욕심일 테지. 그럴 확률은 거의 희박한 것이고,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사실인 바에야.
아이들은 우리들이 자신들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에는 개으치 않고 자기들만의 세계에 깊이 몰입되어 흙장난을 하고 놀았다. 저 아이들의 세계는 어른들이 보기엔 유치할 따름이었지만 저네들은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이들을 이해하려면 그 눈높이를 맞추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이런 생각을 하다 문득 영계에까지 생각이 미쳤다. 어쩌면 그들도 인간계를 유치하고 수준 낮은 아이들의 놀이쯤으로 단정하고 있지는 앟을까 하는 생각. 그런데 그들은 아이들의 세계를 부정하고 어른들인-정말로 그런지는 알 없지만-자신들의 눈으로 판단하고 재단하려 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원하는 세계로 끌어올리겠다는건지, 아니면 자신들이 아이가 되어서 골목대장이라도 하겠다는 건 지는 지켜보면 알 일이었다.
아이들이 어떤 기준에서 이른들보다 격이 낮다고 말할 수 있는지 조차 분명하지 않은 일이지 않던가. 어쩌면 커가면서 인격은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훼손되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이들은 좋은 것과 싫은 것이 분명하고 배가 고프면 울고 아프면 호소한다. 지나치게 어떤 대상에게 미움을 가지지도 지나치게 어떤 것을 독점하려 하지도 않는다. 물론 이건 내 아이를 보고서 느낀 것이 불과하다.
우리들은 오후 내내 짐을 꾸리는 데 시간을 할애했다. 내려가면 왠만한 건 다 갖추어져 있을 테니 그 동안 사용하던 개인 물품이나, 꼭 가져 가고 싶은 것만 챙겼다. 나는 별로 할 일이 없었다. 내 개인 물품이라고 해봐야 얼마 되지도 않는다. 몇 권의 책과 그 동안 틈틈이 적어 왔던 일기책, 천마검고 kths에 낀 천마환이 전부였다. 옷가지들은 설란이 챙기고 있으니 신경쓸일도 아니었고, 다른 물품은 사실 가져 갈 이유도 없었다.
아이들은 여전히 밖에서 놀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설란에게도 울 것이 없냐고 했다가 오히려 훼방만 된다고 핀잔아닌 핀잔만 들었다. 할 일어 없어 무료함을 달래고자 밖에 나오 보니 천마가 보였다. 날 보면 멋쩍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너도냐?”
“뭐, 그렇지.”
우리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혈로 향했다. 비밀 이야기를 하거나 여자들 몰래 술을 마시고 싶을 때면 주로 이용하는 장소였다. 우리 둘은 동굴 안으로 들어서다 안에서 들려 오는 말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아이들의 소리였다. 두 녀석이 먼저 와서 차지하고 있었던 거다. 그런데 들려오는 말의 내용이 심상치가 않았다. 환아의 목소리였는데 그 어조가 사뭇 진지하고 비감하게까지 느껴졌다. 열 살밖에 안 된 아이의 말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그래, 임마. 그러니까 너도 아무런 내색하지 말란 말야. 부모님들은 우리가 걱정하는 걸 싫어하신다고. 괜히 우리까지 걱정 끼쳐 드릴 필요 없잖아.”
“그런데 환아야.”
“왜?”
“네 말 정말이니?”
“그래, 정말이야. 어쩌면 우린 얼마 안 있어 죽어야 할 지도 몰라.”
“치, 나 죽는 것 싫은데.”
“아빠가 힘이 세니까 분명 지켜 주실 거야. 엄마도 그랬단 말야. 세상에 어떤 나쁜 사람도 아빠를 이길 수 없다고.”
“그건 이 세상 얘기고, 어른들 말로는 이번엔 아빠도, 외숙부도 어쩔 수 없다고 하는 것 같았어. 무슨 마신 어쩌구는…… 잘 모르지만 귀신같은 거야.”
“귀신 나 하나도 안 무서운데.”
그런 귀신 말고.“
“그럼 나 산 안내려갈래.”
“이게 아직 말귀를 못 알아듣고. 그렇지만 잘 생각해봐. 너하고 나하고 산 아래 내려가 보는 게 소원이었잖아. 소원이라도 풀고 죽어야 덜 억울하지, 안그래?”
“그런가?”
“언제일지 모르지만 그때까지는 신나게 놀다가…… 그 다음엔 뭐……치.”
“그럼 아빠 엄마도 함께 죽는거야?”
“그렇겠지. 우리가 제일 마지막에 죽지 않겠어? 몰라 나도. 하여튼 너 명심해.티 내지마. 만약 울거나 뭐 그러면…… 너 다시는 안 볼거야. 자, 빨리 손가락 걸고 약속해.”
“그래, 약속할게, 자!”
나는 더 이상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천마도 마찬가지였던지 내 뒤를 따라나섰다. 잠시 뒤, 우리들은 태산의 정상에 섰다. 아이들의 말 하나하나가 마음에 아로새겨져 있었다. 마냥 철부지 애들인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그렇지가 않았다. 그들은 나름대로의 위기감을, 불안감을 그들 식으로 해소하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다 어른들한테 들키지 않으려고 얼마나 애썼겠는가. 갑자기 눌물이 왈칵 쏟아지려 했다. 두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다는 새로운 각오가 전보다 배는 강한 투지가 일어났다.
마음이 통했음인가, 둘의 시선은 한데 뒤엉켰다. 천마가 입 주위를 씰룩거리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제길, 한번 해 보는거다. 너와 내가 힘을 합친다면…… 그놈들이라도 한번 해볼 만하다. 치고 빠지면 얼마든지 버틸 수 있을 거다. 그러다 다른 변수라도 생기면……그래서 응원군이라도 생긴다면……막판 역전도 노려볼 만하지 않겠어?”
“그래…… 한번 해 보자.”
우리 둘의 손이 허공에서 힘껏 쥐어졌다. 그 상태로 찬마가 예전에 들려 줬던 얘기를 다시 꺼냈다.
“대마신 중에 어떤 놈들이 있는지 기억하고 있지?‘
“물론.”
“그놈들만 피해 다니면 …… 아수라나 나찰은 해볼 만할 거다. 물론 마인들인 마라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 치고 빠지는 거지, 뭐. 그리고 장삼봉의 말대로라면 꽤나 많은 강자들이 이 땅에 버글거린다니까. 절망적이지만은 않을 거다.”
그의 말대로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찬마와 나는 알고 있었다. 결코 그게 말같이 쉽지 않은 일임을. 산을 오르는 일 정도는 튼튼한 두 다리와 포기하지 않는 의지라면 가능하지만 하늘을 오르는 건 얘기가 다르다. 어쩌면 그것보다 어려울 지도 모른다. 우리는 지금 요행을 바라는 것일 수도 있다. 천마가 슬쩍 손에서 힘을 풀었다. 그리고는 전면을 향해 시선을 돌린다.
“크크,네 아들놈 솔직히 천아보다는 멋진 구석이 많단 말이야. 어찌 된게 천아는 왜 그리 순둥인지. 마치 환아 졸개 같잖아.”
“그야 아비가 시원찮으니 그렇지.‘
“뭐야? 아마도 제엄마를 닮아서 그럴 거다. 설란이야 보통내기가 아니었으니.”
“너 지금 내 어부인을 험담하는거냐?”
“관두자. 그래도 내 아들 녀석이 환아보다는 더 순수하잖아. 눈망울도 선하고.”
“그래, 네 아들 잘났으니 그만 하자.”
우리 둘은 답답한 심사를 이런 하잘 것 없는 농으로 풀어 보려 했지만 금방 시들해지고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냥 집으로 가자.”
내 제안에 천마는 묵묵히 뒤를 다랐다. 집에 가보니 아이들이 아직 오지 않았다 했다. 그러고 보니 즞을 때마다 어디 갔다 왔느냐 물으면 꼭 천아랑 무슨 의식인가를 치르고 왔다더니 그 동안 두 놈들은 동혈을 드나들었던 모양이었다.
난 갑자기 피곤이 엄습해 오는 것을 느끼고는 서재로 쓰는 방으로 들어갔다. 의자에 앉아 차를 한 잔 따라 먹고 있으려니 별의별 생가들이 다 들었다. 오히려 멍한 상태라고 할 만큼 한 가지 생각에 집중하지 못하고, 산만하고 잡다한 생각들이 자리를 잡았다간 쓸려 가고, 새로운 생각들이 또다시 또아리를 튼다.
묶어 두었던 보따리를 풀어 그 안에서 몇권으로 된 일기책을 꺼냈다. 지난 십 년 간의 체취가 온전히 묻어 있는 것이었다. 아내 설란조차 보지 못하게 한 나만의 비밀이 당시의 감정을 고스란히 입고서 얌전히 담겨 있다.
기분 내키는 대로 한곳을 들춰 보았다 내심의 갈등이 마음껏 휘갈겨진 듯 글씨는 정돈되지 못한 채 어지럽게 눈앞을 오갔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만은 바래지 않고 전해져 당시의 상황으로 인도해갔다.
그날도 난 불청객의 방문을 받고는 불쾌한 심정으로 서재 안으로 들어왔던 것 같다. 며칠째 계속된 논쟁으로 몸과 정신은 피폐해져 있어 휴식이 간절히 필요했지만 자려고 눕기만 하면 어느새 더욱 맑아지는 정신 상태를 난 통제할 수가 없었다. 불면에 시달린다는 건 꽤나 고통이란 사실을 그 때 처음 안 것 같다.
그 이후로 자주 그런 일이 있었지만 그때만큼 심한 적은 없었다, 불면의 이유는 물론 ‘그’와의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진행되었던 논쟁 때문이었다.
그와의 대화는 때로 유익한 점이 많았지만 대부분이 나로서는 방아들일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이 태반이었고, 내가 그토록이나 거부감을 느꼈던 건 내 삶을 자신의 의지 안에 두려하는 그의 독선적인 태도 때문이었다. 지나고 생각해 보면 그의 말이 틀린 구석은 그다지 많이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엔 그가 내 삶에 개입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참을 수 없는 거부감이 들었다.
태산에 올라왔을 때 그가 처음으로 내게 한 요구가 천부경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라는 거였다. 그렇지 않아도 틈틈이 해보려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가 상기시켜 주어서인지 한동안은 그의 지시와 두움으로 어느 정도의 진척을 보여갔다. 그때만 해도 그와는 멸 마찰이 없었다. 내 삶의 일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그와의 대화는 날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한 세계로 빠르게 인도해 갔다.
그는 때때로 내가 알아야 할 상식적인 것들-대부분이 영계에 대한 것들이었다-을 성실한 가정교사라도 되는 양 찬찬히 습득시켜 갔다. 당시엔 너무도 흥미로웠던 탓에 왜 내가 그것들을 알아야 하는지, 당연히 가질 수 있음직한 의문을 애써 부인했다.
천마에게서 들은 얘기들과 그에게서 들은 지식들을 서로 비교해가며 하나하나 알아 가면 갈수록 더 많은 의문이 들었다. 이 세계가 그의 말대로 그러 과정을 통해 형성된 것인지, 그 이면에 그의 설명처럼 그런 복잡한 관계가 숨어 있는지조차 의문이 갔다. 이를테면 마계의 형성 배경 같은 것이었다.
그의 얘기를 빌리자면 태초에 신의 의지에서 파생된 최초의 존재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이후에 천궁의 최강의 천사로 불려졌던 메타트론이다. 그는 신의 선한 의지와 결여된-악한-의지가 공존하는 존재였으며, 인간의 원형이 되었던 자였다. 그는 천사들 가운데서도 가장 지혜롭고 완전하며 강한 존재였으므로 모든 천사들을 다스리는 위치에 있었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신의 곁에 머물며 찬양하고 경배하는 일을 담당했고, 그 일을 하는 것에 거부감을 지니지 않았다.
그는 때때로 신의 창조를 흉내내 새로운 물질이나 존재들을 만들어 내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실패로 돌아가고는 했다. 그럴수록 신에게로 향한 흠모는 커져만 갔다. 그때 그의 이런 성향에 일대 변화를 주는 사건이 발생하니 그것은 그에게뿐만 아니라 우주적인 차원에서도 대변혁이라 할 만한 일대 사건이었다.
인간의 창조. 가장 완전한 천사인 메타트론을 원형으로 해서 만든 인간은 신의 형상을 본뜬 것이기도 했다. 형상을 지녔다는 의미는 단순히 외형적인 것에만 그치지 않고 성향적으로 성품적인 면 역시나 그러하다는 말이었다.
처음에 메타트론은 이를 무척이나 기뻐했고 이 변화에 고무되었다. 지음 받은 인간을 보니 시샘이 날 정도로 아름답기까지 했다. 그는 신에게 물었다.
‘이 존재는 무엇을 위해 만들어졌습니까?’
신의 창조에는 반드시 목적이 수반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던 그였기에 이는 당연한 질문이기도 했다.
신이 그에게 이르기를, ‘내게 영광을 돌릴 존재다. 그리고 장차 존귀와 영화로운 자리에 나와 함께 할 자니라.’
메타트론은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다. 잘못 들은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최초로 신의 뜻에 의심을 가지게 된 때이기도 했다.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신의 분명한 뜻을 알게 되었다. 인간은 자기들 천사들보다도 신의 의중에 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현재 연약하나 그 가능성은 무한대에 가깝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는 점차 시기와 질투의 시선으로 인간들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는 그런 것을 내색할 수가 없었다. 존경과 사랑만으로 신을 대했지만 이제는 두려움으로 신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신에게 요청했다.
‘저 인간을 제게 주십시오.’
신은 단호하게 거부한다.
‘너는 그럴 자격이 없다. 장차 너와 천사들은 그들을 섬겨야 할 것이다.’
그는 더 이상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었다. 충격을 다스릴 수 없었던지 단숨에 우주를 날아 제 아름다움과 힘을 뽐내기에 이른다. 이때 그에게 접근한 존재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옛 용이다.
천사들 중 대천사에 해당하는 각 군의 천사장들과 치천사들은 용과 관련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또 하나의 모습인 용의 형상을 내면에 지니고 있었다.
옛 용은 그에게 이르기를, ‘너의 지혜와 힘과 용기는 이 우주에서 당할 자가 없다’ 라고 한다. 메타트론은 그의 말이 당연하다 여기는 중에도 인간을 향한 시기와 질투를 더욱 강하게 불태웠다. 이런 내심의 변화를 눈치 챈 옛 용이 메타트론을 부추기기 시작했다.
‘모든 천사의 왕인 네 힘을 누가 두려워하지 않으랴. 너라면 신과 같이 될 수 있다.’
예전 같으면 이런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겠지만 그는 질투심에 눈이 멀어 옛 용의 부추김에 넘어가고야 만다.
옛 용이 이르기를, ‘내가 인간을 타락시켜 죄의 사슬로 묶을 테니 너와 내가 힘을 합쳐 신을 보좌에서 끌어내리자. 우리가 새 왕국을 건설해 영원토록 우주를 다스리자’ 라고 한다.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이지는 않았다. 단 한 번도 그는 신의 진정한 힘을 보지 못했다. 어쩌면 옛 용과의 합작이라면 신을 이길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메타트론은 그러나 신중했다. 그리고 한 가지 제의를 하기에 이른다.
‘내가 네 태 속에 새로운 존재를 잉태시킬 테니 그로 하여금 모든 천사를 다스리게 하자.’
이후 긴 시간이 흐른 뒤 옛 용의 태 속에서 새로운 존재가 태어나니, 그는 불을 든 자, 루시퍼였다. 옛 용은 이제 결행하자고 하지만 메타트론은 핑계를 대며 계속 망설인다. 그러던 그도 결국엔 옛 용의 유혹에 넘어가 그를 따르는 천사들과 함께 신에 대한 반역을 시도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몰라도 너무 몰랐다. 몇몇을 제외한 대부분의 천사들은 메타트론의 명령을 거부하고 오히려 그에게 대항하니, 이들은 신에게 이르기도 전에 사로잡히는 신세가 된다. 그러나 메타트론은 진정 강했다. 그르 따르던 천사들과 루시퍼를 천사들의 감금 속에서 무사히 구해낸다.
그러나 이 때 옛 용만은 지금은 용천이라 불리는 금역에 갇히는 신세가 되니, 그곳을 지키는 자들은 메타트론으로서도 부담이 되는 대천사들이었다.
결국 이들 몇몇만이 천궁을 빠져 나와 새로운 곳에 정착하게 된다. 거기가 바로 마계이며, 그곳을 다스리는 마황신은 타락한 천사들의 왕으로 추대된 루시퍼였다.
물론 그의 수하들인 일곱 중 여섯의 대마신들은 메타트론의 반역에 참여했던 타락한 천사들이었다. 지금도 메타트론은 우주의 어느 곳을 방황하며 그날의 일을 곱씹고 있다고 했다. 언젠가 될지 모르지만 그는 또다시 신에 대한 반역을 도모할 것이며, 그 준비를 착실히 하고 있다고도 했다.
그가 내게 들려 주는 얘기들은 대부분 이런 것들이었다. 이런 영계에 대한 얘기들과 더불어 자꾸만 자신의 의지를 주입시키려고 했다. 전혀 생소하고 낯설어 공감할 수 없는 사실들을 인정하는 것만도 벅차건만 무엇인가를 바라는 그의 의지를 고스란히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오히려 어떤 측면에서는 메타트론이 주장한다는 입장과 견해가 일견 공감이 가기도 했다. 이러 걸로 시작된 그와의 다툼은 시간이 갈수록 잦아졌고 골은 깊어만 갔다.
“식사하세요. 뭘 생각하길래 그렇게 얼이 빠져 있는 거예요?”
“뭐라고?”
어느새 다가왔는지 설란이 내 앞에 서 있었다.
“아까부터 계속 불렀는데……. 어서 와서 식사하세요.”
“그러지. 참, 환아는 들어왔소?”
“네, 식탁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알았소, 곧 가리다.”
설란이 방 안에서 나가고 나자 난 펼쳐 읽고 있던 일기장을 덮었다. 마지막 줄의 한 글귀가 눈에 언뜻 들어왔다.
메타트론은 인간을 윤회의 사슬에서 해방하고자 한다. 그야말로 구원자가 아닐까? 아직은 알 수가 없구나.
아침이 밝아 오자 우리들은 한자리에 모였다. 산에서의 마지막 만찬을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율극과 사라도 말이 없다. 묵묵히 식사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산중 생활이 그들에게는 무료하고 따분했을터인데도 어느새 정이 들었는지 산을 내려가는 일이 그리 반갑지 않다는 표정들이었다.
“다들 왜 이리 힘들이 없어? 말도 없고.”
내 말에 천마가 한 입 가득 밥을 우겨 넣은 뒤 밥알을 튀기며 말했다.
“먹기 바쁜 데 말할 정신이 어디 있냐. 꺼억, 잘 먹었다. 여기 물.”
손만 까닥거리는 그에게 적루아는 물을 떠다 바친다. 지겹도록 보아왔던 장면인데도 아직까지 잘 적응이 되지 않았다. 녀석은 자기 집안에서만은 황제 부럽지 않은 호사를 누리고 있었다. 그에 비하면 난 자상하고 세심한 가장인 셈이지. 아암, 되려 내가 물을 떠다 바칠 형편이지 않은가. 여러 가지 점에서 천마네와 우리 집안 분위기는 차이가 났다.
가장 특징적인 모습은 역시 천마의 가장으로서의 절대적인 권위였다. 적루아의 성품 자체가 워낙에 유순하고 자상하며 나긋나긋……. 으음 이건 아니군. 어쨌든 그녀는 천마의 말에 절대적으로 순종한다. 그렇다고 해서 설란이 내게 함부로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녀와 나는 어느 모로 보나 모든 면에서 대등하고 평등했다.
아이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천마와 나는 차이가 난다.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만, 처음 천아가 막 걸음마를 하고 말이 트이게 되었을 때만 해도 어찌 어린애를 그렇게 가혹하게 다룰까 싶을 정도로 천마는 아들에게 냉정했다. 머리를 쓰다듬거나 안아 준다는 건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쯤으로 알고 있었다.
어느 정도 자라 뛰어다닐 정도가 되고 서로의 집을 왕래하며 놀때까지도 거기에는 변함이 없었다. 환아가 천아의 집에서 놀다올때면 매번 울고 오기 일쑤였다. 자세한 내막을 들어 보면 어른에게 버릇없이 굴었다는 이유로 벌을 세웠다는 건데, 그 강도가 무림 고수들이나 견딤직한 정도였으니 어땠겠는가.
천아는 천마의 기대와는 달리 씩씩하고 남자다운 아이로 자라기보다는 주눅이 들어 제 의견도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아이가 되어 갔다. 내 끊임없는 충고 때문에 천마가 조금씩 변해 간 탓인지, 적루아의 따뜻한 보살핌 때문이었는지 아이가 비뚤어지는 건 피할 수 이었지만, 이런 점에서 천마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고지식한 면이 많았다.
율극이 자리에서 일어서는 게 보였다.
“왜, 어디 가려고? 곧 떠나야 하는데.”
“아뇨, 그냥 여기저기 좀 둘러보려구요.”
그 말을 하고서는 밖으로 나갔다. 여자들도 마지막 짐 정리를 해야 한다며 일어섰다.
아침식사하고 곧바로 떠나려 했던 우리는 두시진이 더 지나서야 산을 내려갈 수 있었다. 짐을 꺼내 모아 놓고 보니 이건 들고 가기엔 벅찰 정도로 부피가 만만치 않았다. 물론 무게는 전혀 상관이 없지만 몸에 지니고 다니기엔 좀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결국 금응을 불러 짐을 둥에 묶고 율극을 먼저 태워 보내기고 했다. 나머지는 천천히 유람이라도 하면서 개봉까지 가기로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