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검 – 150화 : 진통을 겪는 영계의 연합
진통을 겪는 영계의 연합
천상계와 선계의 잔여 병력이 마계의 추적을 뿌리치고 무한계 중부권으로 진입하려는 바로 그 시점, 하룬에 대한 아바돈의 침공도 개시되었다.
이미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기다리고 있던 무한계는 칠대부족을 선봉으로 용기백배하여 그들을 맞아들였다.
이번엔 무한계의 수뇌부들까지 총동원되었다. 로메로가 사전에 지시한 병력 운용에 따라 수뇌들은 침착하게 군대를 지휘했다.
불칸과 몰간은 최정예 전사들 5백을 거느리고 하룬 서북부 최전선에 배치되어 있었다. 그들의 후면과 좌, 우 측면에도 상당한 병력이 보충되어 있었고, 그 부대들마다에는 칠대부족원들이 적절하게 포함되었다.
불칸은 눈앞을 새카맣게 뒤덮으며 다가오고 있는 아바돈의 진군을 남의 일이라도 되는 양 무덤덤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곁에 선 몰간이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동안 왜 꾸물거리고 있었는지를 모르겠군.”
그가 한 말은 ‘처음과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는 뜻이었다. 불칸도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군. 저놈들이 정말로 아바돈의 정예란 말인가?’
도저히 그렇게 보이지가 않는다. 처음에 아바돈과 마주쳤을 때만해도 선봉에서 질주해 들어오는 놈들 중에는 꽤나 강해 보이는 강자들이 간혹 섞여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전과 기세부터가 다른 것 같았다.
‘마신들도 보이지 않는다.’
막상 시작된 의문은 이것저것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그런 거나 따지면서 여유를 부릴 때도 아니었다. 불칸의 손이 앞으로 향했다. 공격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전사들은 단 한 번의 망설임도 주저함도 없이 몸을 던졌다.
이런 상황들은 전선이 형성된 곳곳에서 동시에 벌어졌다. 무한계는 이번에야말로 아바돈이 전력을 집중시킬 것이라 여겼으며 그에 대비해 최강자들을 선두에 골고루 배치했다. 그런데 상황은 로메로의 예측과는 전혀 딴판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비교적 접전 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하룬 동부 정중앙에는 거대한 망루가 설치되어 있다. 그곳에서 로메로는 전황을 살피며 급하게 들어오는 소식들을 근성으로 흘러들었다. 굳이 그 소리들이 아니어도 한눈에 포착되는 전황만을 대충 훑어봐도 대략적인 판세를 짐작하기에 충분했다.
로메로의 곁에 있던 롬멜이 의문 가득한 시선을 전황에 둔 채 말했다.
“뭔가 이상한 듯하군요.”
대수련자 바소름과 벵골도 고개를 끄떡이며 롬멜의 지적에 동의한다. 로메로는 아직 진단이 끝나지 않았는지 가만 지켜보고만 있었다.
바소롬이 한 손으로 어딘 가를 가리켰다.
“아난다 수련자가 맡은 저곳과 페리칸이 맡은 저 곳, 두 곳은 선봉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지역인데…… 저렇게 맥없이 뚫리다니…… . 이상하긴 이상하군.”
너무 일이 잘 풀려도 불안한 법이다. 뭔가 함정이 있지 않을까, 이런 걱정이 드는 게 당연했다. 문제는 침투한 적의 규모였다. 그 수는 하룬의 무한계 병력에 비하면 상당히 적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꽤나 많은 수였다. 로메로는 심사숙고했다.
‘저 수가 아바돈의 전부인가?’ 그렇다 해도 저렇게 약하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여기엔 뭔가 모종의 필연적인 이유가 있다.‘
분면 전선은 여기저기 맥없이 무너지고 있었지만 그 속도는 그리 빠르다 할 수 없다. 전체의 작전을 지휘하는 사령부로부터 적극적인 진격 명령이 하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밀어붙여도 무방할 듯합니다.“
롬멜의 판단이었다. 바소롬은 뭔가 속는 듯한 기분이 들었는지 극구 반대했다.
“아직은 좀더 상황을 지켜봐야 할 듯싶군요. 지금 아바돈은 마치 지도부가 없는 오합지졸 같지 않습니까?”
로메로는 바소름의 그 말이 그 말이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군요. 수는 많으나 핵심 전력이 빠진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공격을 하는 걸까요? 아무런 소득도 없이 막대한 전력 피해를 감수하면서까지…… .”
그 부분에 대해 설명이 뒤따르지 않고서는, 그 부분이 파악되지 않고서는 섣불리 진격 명령을 내릴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로메로는 결정을 내렸다. 적들의 움직임을 파악하기 위해 그는 전진이 아닌 후퇴를 선택했다. 그의 이런 결정은 빠르게 각 진영으로 전달되었고, 이후 일사불란한 퇴각이 이뤄졌다.
그러자 아바돈은 언재 수세였던가 싶게 그들을 바짝 조여 왔다. 투지는 전혀 감소되지 않고 여전하기만 했다.
“허 참.”
바소름도 상황 판단이 쉽지 않았던지 난처한 기색을 보이며 한참동안 이나 멀리 전선의 상황만 살피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바돈의 적 진영에 세 명의 하기오스가 보이지 않는다는 정보가 무한계 사령부에 접수되었다.
뿐만 아니라 전쟁을 지휘하는 수뇌의 수가 턱없이 부족해 보인다는 전갈도 함께 전해졌다. 로메로는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다. 아바돈의 전력이 얼마나 되는지, 수뇌로 분류될 수 있는 그노시스급 이상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에 대해서 무한계가 갖고 있는 정보가 거의 전무하다시피 한 게 사실이었고, 저들이 무엇을 노리든 간에 한번 잡은 승기를 늦출 수는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로메로의 진격 명령이 떨어졌다.
그러자 잔뜩 움츠린 채 수세를 유지하던 무한계의 전 병력이 일제히 하룬 외곽 지역에서부터 아바돈을 압박해 갔다.
거대한 물결이었다. 바싹 마른 갈대숲에 불을 지펴놓은 것과 같이 걷잡을 수 없는 기세였다. 현재 아바돈의 삼군을 총지휘하는 자는 에레츠의 바시류스였다. 그는 에레츠의 하기오스가 지시했던 말을 다시금 떠올리고 있었다.
“진격하다 최대한 전력을 보유한 채 도주하라. 진격 전에 수하들에게 미리 도주로를 숙지시켜 혼란이 없게 하라. 그리고 이왕이면 서둘지 말고 최대한 많은 단위 부대로 나누어 도주시켜라.”
그때 바시류스는 사령관 하기오스가 잠시 정신이 어떻게 된 것이 아님가 하고 의심했었다. 제대로 싸워보기도 전에 패주를 지시하는 지휘관이 어디 있단 말인가?
비시류스는 그런 의문이 들었음에도 감히 항명하지 못했다.
‘그들은 우리를 버렸다. 전력을 유지하라고 했지만 그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우리는 아바돈의 영광을 위해 희생물로 선택되었다. 그렇지만 너무 억울하다. 차라리 싸우다 전멸을 택하라는 명령이었다면 이렇게나 억울하지는 않았을 것을.’
마령의 본주가 하기오스들에게 명한 건 일부의 핵심 전력을 제외 한 모두의 전멸이었다.
하기오스들은 결국 그 명령에 따랐다. 하지만 마령의 본주의 의도와는 사뭇 다른 형태로 전달되었다. ‘싸우다 모두 죽게 하라’에서 ‘조금이라도 남겨라’로 변경된 것이다.
하기오스들은 조금이라도 살아남아 주길 기대했다. 그래서 내린 명령이 오히려 적에게 손실조차 입히지 못한 허무한 전멸로 이어질지는 그들로서도 짐작치 못한 일이었을 것이다. 아바돈의 괴멸은 너무도 싱겁게 이뤄졌다. 극소수가 살아남아 도주하는 데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그 수는 전체에 비한다면 극히 미미한 수준이었다.
아바돈의 후방에 처져 있던 대적자들은 전세가 불리해지자 은근슬쩍 꼬리를 감추고 사라졌다. 그들의 실종은 아바돈에게도 무한계 진영에서도 그다지 큰 관심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뜻밖의 대승을 거둔 무한계 진영의 사기는 욱일승천했다. 마치 모든 적을 깡그리 궤멸시키기라도 한 것처럼 그들은 들떠 있었으며 조금은 긴장이 풀린 느슨한 감도 없지 않았다.
대부분의 영자들이 이런 기분을 만끽하고 있을 때 수뇌들은 반대로 긴장했다. 수뇌들의 연석회의는 끝을 모르고 계속 이어졌다. 그들이 이번 승리의 결과에 대해 얼마나 미심쩍어 하는지를 알게 해주는 대목이었다.
마계에 패퇴한 천상계와 선계의 주력이 하룬에 당도했다. 그들을 하룬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맞아들였다.
처음엔 하나였지만 지금은 너무도 다른 길을 걷고 있는 그들이었으나 영계를 지켜내야 한다는 목적은 동일했으며, 그 이유 하나만으로 얼마든지 뜻을 함께 할 수 있었다.
무한계의 전사들과 수련자들과 칠대부족원들은 하룬으로 들어서는 천인들을 바라본다. 그들은 지쳐 보였다. 육체의 피로를 느끼지 않는 영자들이고 보면 그들의 그런 모습은 심적 충격을 다스리지 못한 데서 기인하는 듯 보였다.
열렬한 환영을 보내지도 따가운 눈총을 주지도 않고 그저 묵묵히 바라볼 뿐이다. 한때는 영계 최고의 신분을 지녔던 서른세 명의 천주들. 그들에게로 향한 시선이 가장 많았다.
저런 초라한 모습을 보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던 일이다. 언제까지나 최고일 줄만 알았던 그들이 저런 처량한 처지가 되었다는 건 무한계의 영자들에게도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충격이었다. 사방이 고요한데 발자국 소리만 울린다. 하룬의 중심지를 향해 안내되어 가는 자들 중에는 치명적인 부상자도 보였다. 몇몇의 수련자들이 그들을 안아들었다. 선인들도 아라한들도 그들의 손길을 뿌리치지 않고 몸을 맡겼다.
제석을 비롯한 서른세 명의 천주들과 노군과 8선이 한쪽에 앉았고 반대편에는 무한계를 대표하는 수뇌들이 자리했다. 오대전사단주, 칠대부족장, 수련자들을 대표한 바소름과 카포, 치앙마, 마지막으로 로메로와 불칸, 몰간이었다.
“아바돈이…… 전멸했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구려.”
노군은 정말이지 믿고 싶지가 않았다. 그들은 마계군에게 쫓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앞을 막을지도 모를 아바돈으로 인해 근심하며 하룬으로 향했었다. 그런데 막상 아무도 막아서는 적이 없자 의아해 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아바돈은 자신들이 하룬에 오기 전에 모조리 전멸했다니 않은가?
자신들은 마계 전력의 일각조차 감당하지 못하고 패주한 시점인지라 승패는 서로의 처지를 더욱 극명하게 대조시켰다.
아바돈의 전멸을 환영하고 반겨야 할 천상계와 선계의 수뇌들은 되려 무거운 표정을 풀지 못했다. 자기들 아래라고 생각했던 무한계가 이처럼 막강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로서는 쉽게 인정할 수 없었으므로.
야마천주가 조심스럽게 입을 떼는데 이런 내심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혹시 아바돈의 전력…… 일부일지도 모르는 일 아닙니까?”
치앙마가 발끈하고 나섰다.
“그들의 전력이 모두 밝혀진 적은 없지만 결단코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그들의 수는 2만을 넘어서는 대병력이었습니다.”
2만 명이 모두 정예라면 엄청난 병력이다.
태선이 고개를 끄떡이며 마치 아랫사람의 공로를 치하하는 듯이 말했다.
“참 수고들 하셨습니다. 무한계가 이렇게 훌륭하게 일각을 담당해주니 무척 안심이 되는군요. 이제 우리가 힘을 합하면 마계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불칸의 입 꼬리가 슬쩍 말려 올라간 것이 그때였다.
“조금만 더 버티고 있었으면 우리가 밀고 올라갔을 것을 굳이 수고를 하실 필요는 없었는데 말입니다.”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고운 법이다. 삐딱한 태선과 야마천주의 태도에 그리 성격 좋다고 할 수 없는 불칸이 걸고넘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화근이었고 불화의 조짐이었다. 지국천왕이 불칸을 향해 대뜸 고함을 질렀다.
“불칸! 예나 지금이나 네 놈의 오만 방자함은 여전하구나. 어느 안전이라고 함부로 입을 놀리느냐!”
불칸도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지국, 너야말로 성질머리가 여전하구나. 예전 카란님께 그렇게 혼나고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거냐?”
일이 이쯤 되고 보니 분위기가 좋길 바라기는 애초에 글러먹었다. 천주들의 낯이 찌푸려진다. 로메로가 급히 사태 수습에 나섰다.
“불칸, 말을 함부로 하지 마라. 사소한 감정으로 큰일을 그르칠 참이냐?”
사실 무한계의 초기시대를 연 강자들과 천상계 천주들과는 묵은 감정의 골이 깊었다. 메테우스와 카란이 무한계를 열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천주들의 불합리한 억압과 강제적인 지배에서 자유를 찾아 나선 것이었지 않던가.
순리대로라면 당시 대다수의 영자들이 원했던 것처럼 메테우스가 천상대 대천주가 되었어야 옳았다. 그랬다면 굳이 자유를 찾아 무한계를 확장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이런 오래된 감정의 앙금을 일순에 해소할 수는 없었다. 제석이 굳게 다물었던 입을 그제야 뗀다.
“예전 일을 들춰내 서로의 감정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될 것이오. 서로…… 조금씩 양보해 목전의 위기를 먼저 극복하는 것이 현명한 일입니다. 모두…… 지혜로우신 분들이니 이 정도에서 자중해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천상계 대천주의 입에서 부탁이라는 말이 나왔다 그 말을 들은 무한계측의 수뇌들은 의외라는 표정들이었다. 로메로도 놀란 눈치였다.
‘이번 일이 꽤나 충격적이었던가 보군 아무리 수가 모자란다고는 하지만 저들은 영계 최강자들로 분류할 수 있건만…… . 그런데도 이리 쉽게 무너졌단 말인가?
마계의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 솔직히 로메로도 감이 오지 않았다. 그리고 현재까지도 천상계나 선계에서 마계 전체 전력의 3할에 불과한 2개 군단을 막지 못했노라고 솔직하게 고백하는 이는 단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무한계의 수뇌들은 당연히 마계ㅢ 전 병력과 전면전을 벌였으리라 추측하고 있었다.
제석이 또 입을 열었다.
“마계가 들이닥치기 전에 전력을 재편하고 전략을 수립 해 두어야할 것입니다. 그러니 쓸데없는 일에 심력을 낭비하지 말고 속히 주요 안건을 다루었으면 좋겠군요.”
제석은 더 이상 천상계의 지배자로서의 위신을 내세우지 않았다. 그때 충선이 나서며 입을 열었다.
“파악된 바로는 마계는 대마신 일곱이 각기 한 개 군단씩을 맡고 있고, 중앙에 한 개 군단의 예비 병력이 있는데 그들이야말로 핵심인 듯했습니다.
거기다 귀계의 귀령 일만까지 가세해 막강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한 개 군단은 다시 십여 개의 단위 부대로 나눠지며 대략적으로 일만 명 내외인 듯 보였습니다.
중앙에 위치한 핵심 전력은 적게는 3만에서 많게는 5만까지도 추측되는 대군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대략…… 11만에서 13만 정도로 보면 되겠군요.”
롬멜의 언급에 충선은 동의했다.
“네, 그 정도 되는 듯했습니다. 문제는 천상계와 선계의 연합군이 그들 중 2개 군단조차 막아내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아무도 언급하지 않던 치부를 충선이 고백하듯 털어놓았다. 그의 얼굴에도 숨길 수 없는 수치심이 옅게나마 묻어 나왔다.
로메로 뿐만이 아니었다. 듣고 있던 무한계의 수뇌들 모두의 입에서 신음과도 같은 놀람의 탄성이 흘러나왔다. 천상천의 몇몇 천주들의 얼굴은 보기 민망할 정도로 일그러졌고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황망해하는 자들도 속출했다.
충선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지나치게 자세하다 싶을 정도로 당시의 상황을 조목조목 짚으며 설명했다. 그러다 보니 대마신 발리와 다문천왕의 맞대결과 후에 퇴각의 여유를 가지기 위해 발리와 찬드라를 여섯의 천주들이 합공했던 일까지 들춰졌다.
그러고서도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는 부분에 이르지 불칸이 고개를 저으며 탄식한다.
“그들이 그토록 강해지는 동안 우리는 과연 무엇을 했단 말인가?”
천주들을 조롱하거나 비웃기 위해 한말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런 효과를 발휘했다. 그 대결에 참가했던 천주들은 낯을 들지 못하고 모조리 고개가 바닥을 향해 떨궈졌다. 그들은 가능하다면 그 사실만은 끝까지 감춰지기를 바랐다. 하지만 충선은 가차 없었다.
그가 이런 사실은 밝히지 않았다면 무한계측 수뇌들은 마계에 대해 피상적인 추측으로 대응했을 터이고, 그랬다면 천상계와 선계 연합군이 걸었던 길을 그대로 답습하게 된다. 이런 점엣 마계에 대한 것이라면 사소한 것이라도 말해두는 게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는 충선의 생각은 지극히 타당했다.
그는 나찰과 아수라에서부터 귀계의 구령들에 이르기까지 소소한 것도 놓치지 않고 파악한 모든 사실들을 자세하게 설명하려 애썼다. 충선의 설명을 모두 듣고 나서도 무한계측의 수뇌들은 영 실감이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지금껏 생각해 왔던 마계와의 전력은 실제와는 너무도 차이
가 있었던 것이다. 충선의 분석대로라면 전 영계의 힘을 하나로 모은다 해도 전면전은 피해야 한다는 결론 밖에는 나오지 않는다. 부족한 수를 무한계에서 채운다 해도 전력 차는 좁혀지지 않는다는 데 수뇌들은 견해의 일치를 보았다.
그 정도로 마계는 막강하다는 게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선계나 천상계의 기대대로 현재 무한계의 병력은 매소 하나를 꽉 채울 정도였다. 그렇지만 정예로 분류하기엔 미흡한 자들의 비율도 꽤나 되었다.
정예화 되지 않아다는 것과 실력의 편차가 심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칠대부족이나 전사단 같이 조직 단위로 참가했기 때문에 당연한 일 이었다
특히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는 전사들은 일정 수준을 기준으로 자원하면 누구니 받아들여 준 것이 현 하룬의 특징적인 면이었다.
“수적인 우위만으로는 전쟁을 치를 수는 없습니다. 마계에 맞춰 새롭게 우리 측의 편제를 재조정해야 합니다.
가능하다면 차원계의 구분 없이 통합하는 안도 고려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 전력은 재편성하든 지금 조속히 결정해야 합니다.”
안건의 초점이 흐려지고 구체적인 결정은 지연되고 언왕설래만 반복되자 보다 못한 로메로가 한 말이었다.
꽤나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뭐 하나 제대로 논의된 것이 없으니 그럴 만도 했다. 조정자의 역할을 해야 할 노군과 제석도 가만히 입을 다물고 지켜보고만 있으니 뚜렷한 결정이 더뎌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선계는 이도 저도 아닌 중도적인 입장이었고 천상계는 주도권에만 집착했으며 무한계는 실질적인 걸 따지고 들었다.
지금의 체재를 그대로 인정한 상태에서 비교적 유연한 편성을 주장하는 이도 있었고, 소속의 구분 없이 전력은 극대화할 수 있는 편제를 갖춰야 한다는 견해도 분분했다. 전자는 주로 천상계의 입장이었고 후자는 무한계측 인사들의 주장이었다.
노군이 넌지시 로메로의 생각을 물었다. 로메로가 무한계의 실질적인 지도자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두 가니 방법 모두 나름대로의 장단점이 있습니다. 지금의 편제를 그대로 가져간다면 지휘 체계에 혼선을 빚을 우려가 있어 효과적인 전쟁 수행은 무리입니다.
반면에 현재의 조직을 무시하고 새롭게 편성한다 해도 서로 간에 신뢰가 없다면 결속력을 기대할 수 없어 지니고 있는 힘도 발휘할 수 없겠지요. 두 가지를 절충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식일 듯합니다.”
노군은 구체적인 방법까지를 요구했다.
“어느 정도 선까지를 이르시는 건지요?”
“최소 단위의 조직은 그대로 두고 지휘부대만 개편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칠대부족을 토대로 전사단을 적절하게 배치하고 거기다 메덴의 수련자들과 선인들을 적당히 분배하는 것이죠.
마계가 7군단이니 우리 또한 7개부대로 나누고 지원 부대를 하나 정도 더 두는 선에서 말 입이다.
중요한 것은 여기 계신 분들 간의 지휘 계통을 결정하는 것이 우선 되어야겠지요. 단일 차원계 내에서야 어떤 식으로든 결정이 가능하지만 합일된 상태에서 모두가 만족할 만한 지휘부를 구성하는 게 쉽지는 않은 일이리라 봅니다.”
그의 말 대로였다 각 차원계는 나름대로 자존심을 내세우고 있는 상태였고 모두가 인정할 원만한 결정이란 사실상 있을 수 없었다.
특히 천상계의 천주들이 가장 심해서 전사단주나 수련자들의 수하로 들어가는 것은 절대로 용납하지 않을 기세였다. 그렇다고 그들만으로 지휘부를 짤 수도 없는 일이다. 로메로는 노골적으로 사안의 핵심을 파고들었다.
“서른세 분의 천주님들이 먼저 양보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된 지휘부를 구성하기란 불가능합니다. 설사 지휘부가 구성되었다 해도 과연 진심으로 수뇌부의 통제에 따라줄지도 사실은 좀…… 의문스럽습니다.
지금에 와서 통합의 필요성을 새삼 논의할 필요는 없습니다. 천주님들께 묻겠습니다. 최종적으로 결정된 사한에 대해서 무조건적인 복종을 하실 수 있겠습니까?”
누구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퇴각 중에 가장 늦게 합류한 균천주 설란이 회의에 참가한 이후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당연한 것 아닌가요? 선후를 구분하지 못하고 지존심만 내세울 만큼 지각없는 분이 있다고는 믿고 싶지 않네요. 로메로님의 말씀처럼 어떤 식으로든 여기서 지휘부가 결정된다면 모두는 진심우로 승복하리라 봅니다.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될 듯합니다.”
때로 너무도 당연한 일이건민 지켜지지 않는 것이 또한 현실이다. 대범천주가 로메로에게 물었다.
“누구나 인정할 정도로 지휘부가 구성될 수 있다고 법니다. 그리 어렵지 않을 듯싶습니다만…… .”
대범천주의 그 말에는 당연히 자신들 천주들이 지휘부의 상층부를 구성함이 마땅하지 않느냐는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수련자 카포가 혀를 차며 혼잣말은 하듯이 뇌까렸다.
“언제까지 이러고만 있을 셈인지…… 거 참…… .”
“좋습니다. 그럼 먼저 제가 제안을 하겠습니다.”
이번에도 로메로였다. 누구도 선뜻 자신의 의사를 밝히길 꺼려하는 분위기 중에서도 그만은 당당하기만 했다. 그의 위치가 그랬다. 무한계에서야 누구나 그의 지휘를 인정해 주는 분위기인 게 당연했고, 천상계와 선계에서도 그를 특별하게 보고 있었다.
메테우스와 카란 정도는 아니겠지만 그들을 뒷받침하는 참모로서 예전부터 웬만한 천주들과는 고하를 논할 수 없을 정도로 동격으로 치부되는 것이다.
“사령부는…… .”
로메로는 사령부에 대천주 제석과 태상노군, 장차 합류할 것이라 확신하고 있는 메테우스와 카란을 언급했다.
7개 군단을 진두지휘할 적임자로는 천상계에서 야마천주와 도솔천주, 선계에서는 태선과 충선을 꼽았고 나머지는 무한계의 몫이었다.
칠대부족을 대표해 용족장이 하나의 군단을, 수련자를 대표해 바소름이, 전사들을 대표하는 불칸으로 군단지휘관을 추천했다.
나머지 예비군단을 지휘할 적임자로 그는 라미레스가 최적이라고 했다.
“후에 메테우스님과 카란을 제외하고도 봉인한 무한계의 강지들이 등장한다 해도 변동이 없어야 합니다.”
비교적 적절하게 각 차원계를 안배했다고도 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만의 소리는 있었다. 낙변화천주가 말했다.
“결국 지휘관이 속한 차원계의 수뇌들은 다른 곳으로 배치하는 건 그 제안대로라면 불가능하겠습니다만…… .”
다른 차원계의 수뇌가 지휘하는 곳에 수하로 갈 수 없단,s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낙변화천주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선계의 8선이나 무한계측에서는 불만을 가지지 않는데 비해 천상계의 천주들 얼굴은 그다지 밝지가 못했다. 그들 모두를 야마천주와 도솔천주가 이끄는 군단에 죄다 편성할 수는 없는 일. 역시 쉽게 통과될 리가 없었다.
로메로는 속으로 분통을 터트리고 있었지만 결코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한심한 자들. 그렇게 당하고서도 아직 정신을 치리지 못했다니.’
“그럼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지…… 낙변화천주님의 의견을 들어보죠.”
낙변화천주는 말문을 트지 못하고 망설였다.
그걸 보다 답답했던지 지국천왕이 참견하고 나섰다.
“7개 군단의 지휘자를 우리 측에 배정하고 그 다음 위치를 두 차원계에서 공평하게 나눠 갖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렇게 한다면 우리 측은 아무런 문제 제기도 하지 않겠습니다만…… .”
로메로는 굳이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생각에 가만있었다. 그가 아니어도 나변화천주의 말에 발끈할 이는 많았다.
칠대부족장 중 하나인 발락이 대뜸 고함을 치며 흥분해서 일어섰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들어주지. 지금 뭐 하자는 것이요? 연합을 하자는 거요, 아니면 알아서 기어 들어오라는 소리요? 아니지, 이 참에 천상계가 다시 영계를 지배해 보자는 속셈이오? 그런 거요?”
발락에게 선수를 빼앗긴 전사단주 엑크하르트와 옥캄이 거의 동시에 입을 열었다.
“아예 연합할 의사마저 싹 사라지게 하는 말이군.”
“원, 말이라고 다 말인가? 허, 참.”
선계의 8선들도 입은 다물고 있었지만 속내는 그리 좋지 않은 모양들이었다.
여기저기서 한꺼번에 공박을 받게 된 낙변화천주는 싸늘한 시선으로 장본인들은 훑어본다.
그 눈길엔 터져 나오는 분노를 애써 억누르는 기색이 가득했다. 그렇다고 해서 곧바로 쳐 받지는 않았다. 어느 정도는 예상한 반응이기도 했다.
하룬에 들어온 제왕은 로메로와 바소름 등을 만나 제왕의 군대가 곧 무한계로 들어설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전하고 포로로 잡혀 왔던 서른셋의 쿠사누스들을 찾을 방도를 논의했었다.
그는 여러 방안을 모색해 봤지만 결국엔 아난다를 제외하고는 각성하지 못한 쿠사누스들을 찾아내기란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하단 판단에 이르렀다.
달리 가야 할 곳도 없던 그는 아예 하룬에 머물고 있으면서 영계의 상황을 주시하며 앞으로의 길을 타진해보기로 했다. 그런 한편으로 다른 제왕들이 무한계로 와 합류하게 될 때를 대비해 영계와의 연대를 원활하게 하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무한계측 수뇌들만 제한적으로 접촉했으나 앞으로는 천상계나 선계의 수뇌들과도 만나볼 요량이었다. 그러던 차에 천상계와 선계가 하룬으로 도망쳐오자 그는 영계힘이 생각했던 것보다도 약하다고 판단해 실망을 감추지 않았다.
칠성대덕을 찾은 제왕은 이런 심중의 뜻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마계의 전력이 그처럼 막강하다면 만약…… 제왕의 군대와 힘을 합하기라도 하는 때엔 쿠사누스들을 찾는다 해도 어려울 것 같군요. 영계연합의 전력이 내 기대에 미치지 못함이 매우 실망스럽습니다.”
칠성대덕은 제왕의 눈길을 부드럽게 감싸 안으며 빙그레 웃고만 있었다. 제왕은 또 말했다.
“예전 제왕 중 하나와 루시퍼가 만난 적이 있었지요. 그때는 쿠사누스의 반란이 표면위로 떠오르기도 전이었습니다.
당시 루시퍼를 만났던 제왕은 지금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반란이 일어났을 때 불운하게도…… 처형당했죠. 그는 루시퍼를 만나고 나서 이런 내용의 말을 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루시퍼의 야망은 영계에 대해서만이 아니다. 만약 그가 영계를 정복하고 나면 우리의 대지도 수중에 넣으려고 할 것이다.’라고 말이죠.
그처럼 그자는 위험합니다. 제왕이었던 자의 입에서 나온 경고는 이제 현실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제왕도 루시퍼와 모종의 밀약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둘은 메티트론이라는 통로를 통해서 결속할 여지가 많습니다 . 둘의 공통점은 아직은 의지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는 점일 겁니다.
그런 한편으로 제왕은 파견자들을 보내 대적자들과 꾸준히 접촉을 해왔습니다. 다른 속마음이 있었던 거겠죠. 어찌됐든 우리는 최악의 경우 그들 두 세력의 연합된 힘과 싸워야 할지도 모릅니다.
솔직히 말해 지금의 영계연합군 전력으로는 필패라고 봐야죠. 달리 대안이 없으니 최선을 다해보긴 해야겠지만…… .”
칠성대덕은 가만 고개를 젓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는 겁니까? 이곳 영계에 내가 아직 파악치 못한 강력한 힘이라도 있단 말입니까?”지혜로운 눈이 더욱 빛을 내며 반짝인다.
“결과는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어떤 경로를 거치게 될지 어떤 모양으로 흐르고 뭉칠지 알 수 없지요. 영계에는 하룬에 모인 영자들만 있는 게 아닙니다. 이들의 의지만이 전부가 아니죠. 더 강한 염원이 모이고 더 많은 영혼들이 하나가 될 때 영계는 일부의 영자들이 어찌할 수 없는 곳이 됩니다.
그 잠재력의 끝이 어디까지라고 속단하는 것은 이 우주의 광대함이 어디까지 미쳐 있는지를 가늠해 보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일이죠.”
제왕은 믿을 수 없었다.
“최강의 두 세력이 합쳐진 힘은 천궁이 아니고서는 막지 못합니다. 신이 나서지 않고는 그들의 진군을 멈추게 할 수 없을 겁니다.”
“신은 이번 전쟁에 개입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게 단정 짓는 거죠?”
“신의 의지는 의외로 매우 단순합니다. 영지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모든 일에 신의 간섭이 있어 왔던 것이 아니죠. 최대한의 자유를 보장해주고 순리를 순리이게 유도할 뿐이죠. 신은 끝까지 침묵할 따름이죠. 그것을 우리의 판단처럼 침묵으로 볼 수만은 없겠지만…… .”
“그럼 대체 뭘 기대하는 거죠? 어떤 힘이 있어 그들을 막을 수 있다고 믿는 거죠? 혹시 예전 무한계의 지도자들이었다는 메테우스와 카란을 믿는 것인가요? 그도 아니면 용천에 갇혀있는 옛용의 도움인가요?”
가만 고개를 젓고만 있는 대덕에게 더 이상 제왕은 질문하지 않았다. 대신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영자들의 전생을 들여다보는 능력이 탁월하다고 들었소. 날 좀 도와주시겠소?” “잃어버린 쿠사누스들을 찾는 일을 말함인가요?”
“그렇소. 그들을 찾는 일은 비단 내게만 유익한 것은 아닐 거요. 여기 모인 이들 중에 그들이 혹여 하나나 둘 아니면 그 이상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 그들을 찾게 도움을 주신다면…… .”
“그들을 찾은 뒤에는요?”
제왕은 망설이지 않고 곧장 대답했다.
“기억을 되찾게 한 다음 함께 싸울 것이오. 잃어버린 우리 것을 되찾아야지요.”
“그들의 의사와는 상관이 없는 결정이겠지요.”
“무슨 뜻이요?”
“그들이 원치 않는다면…… 그때는 어쩌시겠습니까? 무리한 방법으로 그들의 기억을 되돌린다면 그들이 받을 정신적인 충격은 어찌할까요?”
“아니오. 그들은 분명 옛 영광을 회복하는 일에 기꺼이 동참할 것이며…… 다시 기억을 되찾게 된 것을 좋아할 게 분명하오.”
“확신하시나요?”
“그렇소. 확신하오.”
“과연…… 그럴까요?”
“찾을 수 있겠소? 도와주시겠소?”
제왕의 간절함을 어찌 대덕이 모르겠는가. 무상의 권좌에서 쫓겨나 낯선 곳을 전전하며 옛 영광을 되새겨야하는 그의 심정을 모르는바 아니었다. 그 또한 빼앗긴 자였고 그로 인해 복수심에 불타는 한 명의 방랑자에 불과했던 것을.
“모르겠어요.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를.”
대덕이 눈을 감는 건 어려운 결정을 앞둔 습관적인 행동이었다.
그녀가 염려하는 건 대체 뭘까? 누가 보아도 할 수만 있다면, 진정 가능하다면 그 방법이야말로 영계연합군의 전력을 일시에 극대화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제왕은 그녀가 무엇을 염려하고 저어하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감겨졌던 눈이 떠졌을 때 제왕은 직감적으로 대덕이 결단을 내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결정하시었소?”
“네.”
“물론 도와주시겠지요?”
“아뇨, 순리에 맡기기로 했어요.”
제왕은 완강한 어조로 부정했다.
“어찌 순리에 어긋난다 하시오? 대체 그것이 왜 순리에 어긋난다는 말씀이오?”
“절 속이려 애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왕의 불멸이 어찌 순리고 생겨난 것은 다시 사라짐이 마땅하지요. 그 기한이 다 차서, 그 생면이 다해 소멸하는 것이 순리라면 제왕의 불멸은 그런 자연스러움에 만하는 의지지요.”
제왕은 애써 태연함을 가장하고 있었으나 대덕의 눈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을 완전하게 떨쳐내지는 못했다. 심령을 부드럽게 감싸는 듯한 그 기운에 항거한다는 건 어리석은 일처럼 생각되었다.
“영자들에게 기억과 육신의 소멸은 다른 형태의 죽음. 거부할 일도 아니고 거부해서도 안 됩니다. 그것을 인위적인 방법으로 돌이킴은 그 영혼에게 아무런 도움도 외지 않습니다. 제왕 중에 완전자가 나옴과 끊어짐도 이와 같은 이치에서 비롯된 일이 아닙니까? 그걸 알고서도 제왕을 도울 수는 없습니다.”
그녀의 의지는 확고부동해 보였다. 잠시 갈등한 건 그녀 역시 지금의 위기를 해소함이 지난한 일임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작은 도움이라도 절실한 마당에 서른셋의 쿠사누스의 능력이란 더할 수 없는 유혹이 아닐 수 없었다. 제왕은 한숨을 내쉬며 한탄했다.
“그렇소. 그대 말이 맞소. 하지만…… 변명하자면 그 유혹을 이기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소. 아니…… 불가능한 일이었소. 부끄럽지만…… 그대의 말이 모두 맞소. 현재의 어려움은 과거의 과오에서 비롯된 일. 어찌 남 탓을 하겠으며 이해해 주지 않는다 해서 원망할 수 있겠소, 허허. 허나 이것만은 말해두고 싶소. 결과적으로는 그런 선택을 하게 됐지만…… 불가항력이었소. 그리고 우리의 어리석은 선택이 더 이상 큰 불행으로 번지는 것만은 막고 싶소. 이건 진ㅅㅁ이오. 이 이상은 우리 같은 비극적인 영혼들이 나오지 않기를 바랄 뿐이오. 그래서 더욱 절실했소. 야욕을, 그들의 무분별한 포획을 이쯤에서는 중지 시키고 싶었소.
그것…… 뿐이오.”
제왕은 깊은 화한을 드러냈다.
‘그러나 내게 또다시 그런 선택의 기회가 온다 해도…… 난 거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겠지. 어쩔 수 없는 일이야.’
포기한다는 건 비참한 일이다. 특히 스스로를 존중함을 포기하는 심정은 더욱 그러하다.
“그대처럼 희망만을 보고, 말하고, 그렇게 믿는 일이란 게 얼마나 어려운 줄 아오? 그대의 그런 희망이 근거 없는 것이 아니었으면 좋겠구려, 허허허.”
제왕은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내가 진정으로 허전함을 달랠 수 없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건 뭘까? 대체 무얼 바라는 게지? 알 수 없구나. 참으로 알 수 없구나.’
하룬에 있는 선발대원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그들은 지금 한창 진행되고 있을 영계연합이 어떤 형태로 결정지어질지 그 결과에 온통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다.
최초의 영계연합은 선발대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천인과 선인과 무한계의 영자들이 골고루 섞여있는 선발대는 그럼에도 서로 간을 구분하거나 경계하거나 홀대하거나 무시하지 않았다.
물론 삐걱거림이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서로를 존중해주려 애써왔다. 지금에 와서야 파천의 부재로 인해 그 의미가 많이 퇴색되었지만 한시적인 구성은 지금까지 해체되지 않고 있었다.
선발대원들이 수뇌회의에 관심을 기울이는 건 다른 영자들의 관심과는 방향성이 달랐다. 다른 영자들이야 주도권에 더 집중하고 있겠지만 이들은 그렇지 않았다. 결정의 방향에 따라 선발대의 존립마저 영향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선발대는 파천의 중간계 진입 이후 모든 영자들로부터 특별한 관심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관심권 밖이다 보니 지금까지 별다른 변동 없이 유지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역할이 사라진 대원들은 이제 기다리는 일만이 전부가 되었다. 뭔가 작은 보탬이라도 될까 싶어서 나서보면 차가운 시선이 먼저 반긴다. 현재의 선발대원들은 소속마저 잃어버렸다. 그들은 더 이상 선계의 선인도 천상계의 천이도 아니었다. 굳이 전사로, 칠대부족원으로, 수련자로서의 위치를 주장할 필요도 없었다.
그들은 습관적으로 아니면 본능적으로 서로를 찾았고 한자리에 모여들었다. 그러지 않으면 불안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존재 이유를 스스로에게 설득시키려는 방어적인 선택이었다. 파천을 기다린다. 이것만이 지상과제가 된 것이다.
사실 지금은 아무도 파천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수뇌들의 회의에서 단 한번도 언급되지 않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들은 더 이상 선발대를 중요한 화두로 인정하기가 싫은 건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선발대는 현재까지도 그 상태로 남아 있었고 거기 속한 대원들 역시 여전한 모습으로 당당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전체에서 인정을 받는 위치에 있건 그렇지 않건 간에 그들 모두는 우선적으로 선발대원이기를 자처했다.
“아바돈의 괴멸에는 뭔가 냄새가 난단 말이야.”
도나투스와 아난다, 브라함과 페드로가 비교적 가깝게 앉아 있었고 그 곁에 페리칸과 카이로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벽에 등을 기대고 있다.
도나투스의 눈이 작아지는 걸 보며 저 멀리 앉아 있던 권터가 심드렁하게 입을 열었다.
“무슨 냄새가 난다는 거요?”
“너무 싱겁게 끝났잖아. 그렇게 쉽게 끝장날 놈들이 아니란 거지.”
“윗대가리들이 멍청하니 그렇잖습니까. 자기들 전력은 생각지도 않고 밀어붙이다 당한거지 거기에 무슨 특별한 사연이라도 있을 것 같소?”
“아니라니까, 분명 뭔가 있어. 그리고 이번엔 마신들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었어.”
“만들어 놓은 놈들을 다 썼나 보죠. 생각해 보십쇼. 어떤 미친놈들이 그 어마어마한 병력을 몽땅 쏟아 부으면서 수작을 부리겠습니까?”
“나도 그 점이 의혹이긴 한데……. 아냐 분명 뭔가 있어. 아난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확신은 들지 않지만 자네와 비슷한 생각을 하던 참이야.”
도나투스는 아난다의 동의가 반가웠던지 헤벌쭉 웃으며 유난스럽게 굴었다.
“그렇지, 내 생각이 맞지? 거 봐, 분명 뭔가 있어.”
권터는 제 머리를 긁적이며 도무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대체 그런 짓을 하면서까지 노리는 게 대체 뭐란 말이요?”
도나투스는 얼른 대답을 못하고 슬쩍 얼버무렸다.
“그거야 뭐……더 좋은 기회를 엿보는…….”
무릎을 세우고 그 사이에 얼굴을 묻고 있던 너울이 그 상태로 말했다.
“그런 게 뭐 그리 중요합니까? 무슨 작당을 하든 어차피 붙을 놈들과는 붙는 거고, 영영 마주치고 싶지 않으면 그러면 되는 거고…….”
아레나도 너울과 비슷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잔머리 굴리는 놈들은 짜증이 나. 꼭 뒤통수를 쳐서 이기려 한단 말야.”
그때다. 아난다와 도나투스가 동시에 외쳤다.
“그렇군.”
“바로 그거야.”
실내에 있던 대원들 모두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들이었다.
도나투스가 신이 나서 떠들기 시작했다. 무슨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듯이 의기양양한 모습이었다.
“그놈들은 전멸을 가장하고 뒤통수를 치려는 게 분명해. 초반부터 모습을 드러냈으니 이대로 가다가는 영계의 주력과 제일 먼저 부딪히게 되고 그렇게 되면 이긴다 해도 전력 감소가 심각할 거 아냐.”
권터가 뒷말을 빠르게 이었다.
“그래서 살짝 빠져나가 구경이나 하다가 마지막에 뒤통수를 치겠다는 뭐 이런 의도란 말입니까?”
“그렇지. 바로 그거야. 그래서 마신들이 보이지 않았던 거지. 주력은 살짝 빼놓고 전멸한 것처럼 보이게 한 거지. 이 상태로 간다면 분명 마계와 우리가 붙게 되거든. 어느 쪽이 이겨도 그땐 해볼 만할 거 아냐.”
듣고 보니 그럴 듯해 보였다. 그렇지만 반대 의견도 있었다.
“그렇지만 과연 아바돈이 그 정도의 여력을 가지고 있을까요? 이번에 전멸한 숫자가 만만찮았다던데.”
“이것 봐, 아레나. 이번 전쟁은 전사단들 간의 소규모 전투가 아냐. 영계에서 싸움 좀 한다는 놈들은 모조리 참가하는……그야말로 절대자들 간의 싸움이지.
아직은 별 움직임들이 없어서 이렇다 할 격돌은 없었지만 좀 있어봐. 수가 많고 적은 건 문제가 안 될 거야. 지금이야 세를 뽐내는 수준이고 막상 본격적인 싸움으로 돌입하면 머리 굵은 놈들끼리 붙어서 결정 볼걸.
그러니 그 악독한 아바돈 놈들이야 수하들을 모조리 소모하고서라도 일단은 관심권 밖으로 밀려나 있는 게 유리하다고 판단했겠지. 너처럼 그렇게 생각해주길 바라면서 말이지.
그리고 싸움을 지켜보면서 최종적으로 남는 놈이랑 붙어서 도저히 승산이 없다고 판단되면 그놈들 장기 있잖아. 어딘 가로 숨어 버리는 거지.”
아레나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겨났다.
“그런 의도쯤 이미 파악하고 있지 않을까요? 마계나 이쪽 지휘부에서도.”
“짐작하고 있어도 소용없지. 숨어버린 놈들을 찾기 위해 당장 눈앞에 있는 적과 싸우지 않을 수도 없는 거고. 그리고 그놈의 쓸데없는 자존심들은 좀 높아? 해볼 테면 해봐라……이런 식이니까 신경도 안 쓰겠지. 히야, 그놈들 정말 그런 의도로 숨은 거라면……그리고 그걸 위해 귀찮은 꼬리를 잘라버린 게 이번 싸움이라면……. 정말 지독한 놈들이야.”
아난다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바돈은 경계의 대상이지만 막상 단 한 번도 실체를 완전히 드러낸 적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막상 경계심을 가지고 대책을 수립하느라 부산을 떨면 어느새 종적마자 묘연해지고 만다.
‘확실한 승산이 서지 않는 한 그들은 함부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이번의 등장은 너무 이른 감이 있었어. 그리고 그들이 실제로 전력을 모두 드러냈다면 필승의 확신이 섰을 때일 테니 그때 그들을 경계하는 건 너무 늦다.
가장 불안한 적. 그들은 그런 부류다. 그 힘의 근원이 그래서일까? 그렇겠지.’
아난다는 로메로를 상당히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그라면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을 거야. 그렇지만 도나투스의 지적처럼 상황이 그러니 알고서도 어쩔 도리 없이 끌려갈 것이다. 마계와의 싸움은 모든 걸 쏟아 붓고도 이긴다는 보장이 없으니 다음의 행보까지 염두에 두기엔 무리가 있겠지. 벼랑 끝에 선 심정으로 사투를 펼치는 수밖에 달리 무슨 복안이 더 있을 수 있겠는가? 무척인 힘들겠어.’
아난다의 예상처럼 지금 로메로의 머릿속은 터질 것만 같았다. 어느 정도 각오는 했지만 천주들의 아집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자리를 지켜주는 무한계 인물들이 고맙게 여겨질 정도였다.
그는 아까부터 제석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나서주길 기대했다. 제석은 의도적인지 로메로와 눈길을 마주치지 않았으며 고정된 듯 회의장 구석진 곳에 시선을 못박아두고 있었다.
‘절대로 양보할 수 없다는 건가? 그렇다면……좋다. 원한다면 극약 처방을 내려주지.’
로메로가 굳은 결의를 다지고 일어섰다. 그는 천주들을 하나하나 훑어가며 강경한 어조로 말했다.
“정 그러시다면 할 수 없는 일이죠. 영계연합은 없었던 일로 하겠습니다.
상황인식이 부족하신 분들과 이 이상 소모적인 언쟁을 계속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천주님들께서는 따로 마계를 상대할 방도를 강구하시길 바라겠습니다. 아무쪼록 최후까지 생존하시길 진심으로 빌겠습니다. 행운이 함께 하길.”
좀 놀라긴 했지만 무한계 인물들은 차라리 홀가분하다는 표정들이었다.
그에 반해 선계와 천상계는 얼어붙은 듯 별다른 말도 꺼내지 못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아쉬워서 찾아온 건 자신들이었다. 무한계의 힘을 빌리고자 하룬으로 조기합류하기로 결정을 내리기까지 그 얼마나 고심참담했던가!
자존심은 잠시 접자고 각오하고서도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고개를 빳빳이 세웠으니 이런 파탄도 예상했어야 했다.
그런데 그들이 이렇게까지 뻗댈 수 있었던 건 무한계가 결국엔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고분고분 따라 오리라는 확신에 가까운 판단 때문이었다.
강자들의 부재. 무한계를 대표할 만한 강자들 중 현재 하룬을 지키고 있는 이는 몇 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강자들은 메테우스와 카란의 실종 이전과 후, 스스로를 봉인시켰다. 그래서 무한계는 절실한 필요에 의해 자신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고 수하로 자진해서 들어오는 것도 당연한 일이어야만 했다.
이런 판단이 착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천상계 천주들의 뇌리를 강렬하게 두드려댔다.
이제 급해진건 천주들 쪽이었다. 느긋한 표정을 회복한 로메로가 짧게 말을 자르며 할 말을 마저 마친다.
“연합이 사실상 결렬되었기에 여러분들은 더 이상 이곳 하룬에 머물 이유가 없겠군요. 참으로 아쉽습니다.
최초로, 정말 최초로 영계의 전력이 하나로 결집되나 했는데……역시나 서로의 입장이 이렇게도 다르니 어쩔 수 없나 봅니다. 좁힐 수 있다고, 일치점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건 어리석은 오만이었습니다. 그럼 행운을 빌겠습니다.”
그리고는 자리에 앉아버렸다. 축객령이나 다름없었다.
제석의 시신이 그제야 로메로를 찾았다. 진심으로 그런 말을 하느냐? 이런 질문을 던지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