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검 – 170화 : 하룬의 침입자
하룬의 침입자
지금껏 그들이 부순 인공적인 형태의 건축물만으로도 하나의 세계를 조형할 수 있을 정도라고 하면 과장일까? 긴장감 없는 무언의 폭력, 그 대상이 의식 없는, 반응 없는 사람의 조형물이라니.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 지시하는 이도 없다. 그냥 습관처럼 무언가가 보이면 하나가 나서서 부술 뿐이다.
슬슬 짜증이 치미는 건 그 일을 하고 있는 대마신들만이 아니었다. 지켜보는 메타트론은 의아함을 넘어서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되고 만다. 아무리 질기게 질문을 달아봐도 납득할 만한 답이 돌아오지 않으니 답답할 수밖에.
그때 곁에 있던 어둠의 천사 하나가 자진해 나서며 새로운 제안을 했다.
“왕이시여! 진노를 거두시고 제 의견에 귀를 기울여주소서.”
“뭔가?”
“이 이상 저들의 조롱거리가 될 수는 없나이다.”
메타트론의 얼굴이 확 일그러지는 걸 발견한 어둠의 천사가 재빨리 다음 말을 이어 갔다.
“과연 이 세계에서도 통할지는 알 수 없사오나 저희들은 어둠이 잇는 곳이면 그 어디든 갈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가지 못한다하여도 보거나 듣는 것은 가능합니다. 왕의 도우심이 있다면 그들의 흔적을 즉시 찾아낼 수 있으리라 자신하나이다.”
메타트론은 어둠의 천사가 하는 말은 곰곰이 되짚어보았다.
‘하지만 이곳엔 내가 처음 대하는 묘한 성질의 힘이 존재한다. 영혼의 술법은 자칫 잘못 시도하면 돌이킬 수 없는 화를 입을 수도 있다. 위험천만한 시도인데 … .”
지금껏 그가 알면서도 망설였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마냥 진을 빼면서 싸돌아다니는 것도 슬슬 지겨워 오던 참이었다. 어찌할 텐가?
“좋다. 해보자.”
루시퍼가 다급한 표정으로 메타트론을 말리고 나섰다.
“적절치 않은 결정입니다.”
“번복은 없다.”
“이곳 세계는 우리의 세계와 다른 곳입니다. 파악되지 않은 곳에서 영혼의 술법을 사용하기엔 위험부담이 너무 큽니다. 만약 … .”
“만약?”
“역으로 당하기라도 하면 손실이 큽니다. 더군다나 저들을 살펴볼 수 있으나 이쪽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모든 걸 노출시키면서까지 시도하기엔 성공에 대한 확신이 너무 미약합니다.”
메타트론의 굽힐 수 없는 자존심이 루시퍼의 현명한 지적을 묵살했다.
“내 능력을 의심하지 마라. 감히 누가 있어 내 마력의 권위를 넘볼 수 있단 말이더냐!”
이 정도까지 진전된 이상엔 누구도 메타트론의 고집을 훼손시킬 수 없다.
어둠의 천사들 셋이 차출되었다.
그들은 나란히 서서 두 손을 하늘을 향해 뻗고 눈을 감았다.
뒤에 선 메타트론이 마력을 일으키기 시작할 때 루시퍼와 대마신등이 재빨리 주변을 경계하며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외부로부터의 위협을 차단시켰다.
메타트론의 마력이 어둠의 전사들에게 전이된다.
그 위력이 점차 커지기 시작하자 어둠의 천사들에게서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쿠오오오
검은 바람아 휘몰아친다. 소용돌이치는 마력이 그들 셋을 하늘 높이 떠오르게 했으며 그들 사이로 번개의 형상을 한 빛줄기가 빠지직 소리를 내며 하나로 이어졌다.
크아아아
셋 중 가운데 있는 어둠의 천사에게서 막대한 양의 검은 기류가 흘러나와 하나의 형상을 만들어 갔다. 하늘을 한 번에 가려버릴 정도로 거대한 검은 날개가 출현했다.
“자, 가라.”
메타트론의 외침이 터진 순간이었다.
쿠르르릉
하늘이 열리며 일제히 고함을 지르기라도 하는 듯한 큰 소리가 공간을 떨어 울렸다. 그 순간 어둠의 천사 셋은 그 자리서 사라져버렸다.
메타트론의 눈이 검게 물든 것을 시작으로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동일한 모습을 했다. 그들의 눈은 많은 것을 보고 있었다. 공간이 빠르게 사라지고 나타나길 여러 번. 거대한 성채가 빠른 속도로 확산됐다. 문을 지나쳐 복잡한 미로를 방불케 하는 복도를 지나 어두컴컴한 석전을 거쳐 간다. 순식간에 그들은 성채를 샅샅이 살피고 다른 공간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이런 일이 여러 번 되풀이됐다.
“어디 숨어 있느냐. 이제 그만 모습들을 보여라. 숨는다고 해서 찾아내지 못할 것 같은가?”
메타트론의 입가에 득의의 웃음이 걸렸다. 지루한 시간이 흘러갔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빠르게 이동하던 움직임이 갑작스레 느릿하게 변했다.
거무튀튀한 기암괴석들이 즐비한 산봉우리에 우뚝 솟은 성채는 지금껏 보아 왔던 것들과는 사뭇 형태부터가 달랐다. 그것은 짐승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묵광으로 번들거리는 사지를 벌떡 일으켜 세우고 포효하고 있는 짐승은 창끝처럼 뾰족한 날개를 퍼덕이며 전면을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제 몸 길이만큼이나 기다란 꼬리가 빳빳하게 허공을 찌르며 세워져 있다. 쩍 벌린 입 안에서 검은 기류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루시퍼는 섬뜩한 느낌이 들었는지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메타트론이 작게 주문하듯 중얼거리는 소리가 주변의 공기를 진동시켰다.
“가라, 안으로. 들어가서 모든 걸 내게 보여라. 놈들이 느껴진다. 바로 그곳이다.”
무엇에 방해라도 받는 듯 움직임은 느리기만 했다.
“신속하게 움직여라.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희와 함께 함을 잊지 마라.”
어둠의 천사들이 느끼고 있는 두려움이 고스란히 메타트론에게 전달돼 왔다. 그것조차 메타트론을 자극했다.
‘저들이 두려움의 감정을 갖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저곳이다. 놈들이 저곳에 모여 있음이 틀림없다.’
메타트론의 말에 용기를 얻었는가? 움직임이 한층 빨라졌다. 짐승의 입 안으로 쑥 들어간 어둠의 천사들에 의해 내부의 전경이 일목요연하게 메타트론과 그 수하들에게 전달되었다.
붉거나 푸른 연기가 여기저기 뭉쳐 있다가는 무엇에 놀란 듯 사방을 향해 거세게 뿜어지는가 하면 바닥에서 걸쭉한 검은 액체가 부글부글 소리를 내며 끓어오른다.
짐승의 형상을 한 성채는 실제로 살아 있는 괴수의 몸 안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음산하며 기괴했다. 정돈되지 않은 울퉁불퉁한 벽면도 눈에 거슬렸고 방향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다는 것도 신경 쓰였다.
여태껏 비밀차원에서 이런 분위기의 장소를 본 적이 없었다는 점도 의아하긴 마찬가지. 메타트론은 단 하나라도 놓칠세라 펼쳐지는 전경에 집중했다. 어느 정도 분위기에 익숙해졌는지 어둠의 천사들의 움직임이 기민해져 갔다.
스스스
파파팍
장면이 빠르게 전환되고 있었다. 반드시 목표한 대상을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듯이 성채 깊숙한 곳을 휘젓고 다니던 움직임이 어느 순간 언제 그랬던가 싶게 경직되며 멈춰 서버렸다.
장방형의 석실이었다. 사물을 분간할 정도의 빛도 존재하지 않는 어둠 속의 정적. 그렇지만 어둠은 그들에게 아무런 장애도 되지 않는다. 그 어둠보다 더 깊고 음침한 공간이 석실 바닥 가운데 수직으로 뻥 뚫려 있었다. 단순히 움푹 꺼진 구멍이라고만 생각되지 않는 사악한 기운이 그곳으로부터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메타트론의 의지에 따라 어둠의 천사들은 그 자리에서 못 박힌 듯 멈춰 섰다. 공간의 표면에 맺혔다가 사라지는 동심원의 형상은 또 뭐란 말인가? 그곳에 물이라도 고여 있는 것일까? 긴장한 것은 어둠의 천사들과 메타트론뿐만이 아니었다. 모두가 거의 비슷한 감정 상태를 경험하고 있었다.
루시퍼가 불길함을 떨쳐내며 메타트론에게 하는 말인 듯 떠듬떠듬 입을 떼었다.
“저것 … 이 뭘 … 까요?”
지금껏 단 한 번도 이런 류의 불쾌감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루시퍼는 그 공간으로 자신의 전부를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을 떨쳐내며 그렇게 물었다.
메타트론도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둠의 천사들을 그 안으로 밀어 넣어도 좋을지조차 언뜻 판단 내릴 수 없었다. 하지만 의문은 풀어야만 했다.
“전진하라.”
망설임은 잠시, 죽음처럼 느껴지는 어둠 속으로 진입해들었다.
“크아아악!”
“으, 으아아악!”
“끄으으억. 사, 살려줘, 끄악!”
처절한 비명소리와 함께 무엇인가가 폭발하는 소음 그리고 하늘을 단번에 찢어버리는 거대한 빛줄기가 비밀차원 내를 한동안 떠들썩하게 했다.
콰콰콰쾅
번쩍
그러기를 얼마였을까? 메타트론도 루시퍼도 할 말을 잊은 채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대마신들도, 어둠의 천사들도 큰 충격을 받은 듯 눈의 초점조차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 비밀차원을 뒤흔드는 뇌성과 번개는 그 후에도 한참이나 지속됐다.
“방금 우리가 본 게 대체 뭐였지?”
메타트론이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을 때 서로 머리를 맞대고 한참 숙의 중이던 파천과 아퀴나스가 동시에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파천이 먼저 외쳤다.
“놈이다.”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그곳에서 자취를 감춰버렸다.
파천과 아퀴나스가 본 것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떤 형체를 이루고 있었을 무언가의 시체였다. 갈가리 찢겨져 그것이 과거에는 무엇으로 불렸는지조차 파악할 수 없었다.
파천과 아퀴나스는 그 뒤로 한참 동안이나 내부를 뒤지고 다녔지만 어떤 단서도 발견하지 못했다. 어둠이 넘실대던 공간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초라하고 볼품없는 움푹 꺼진 구덩이로 돌아가 있었고, 약간 한기가 스며 나온다는 것 이외에는 주목할 점도 없어 보였다. 파천이 의문을 표했다.
“이 정체불명의 성에 대해서 아는 게 없나?”
누가, 언제 이런 곳을 만들었냐는 물음이었다.
“나도 누군가에게 묻고 싶은 심정이다.”
사실이었다. 비밀차원이 얼마나 넓고 광활한가를 따지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버려진 공간만도 그 얼마며 쓰다 방치된 성채만도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파천은 찢어진 조각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회백색의 푸석푸석한 가루를 보고 어찌 어둠의 천사들이 마지막으로 남긴 흔적이라고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손끝으로 슬쩍 건들자 곱게 부서지며 가루가 되어버린다.
“놈이 이렇게 만든 건 분명한데 대체 무엇이었을까? 우연하게 이곳을 발견했다 봉변을 당한 거로군.”
그렇게 생각할 밖에. 단순히 그렇게만 생각하기에도 뭔가 찜찜했다.
“아퀴나스, 넌 분명히 다른 이들을 잊혀진 공간에 가뒀다 하지 않았나?”
그랬었다.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그렇다면 현재 이 넓은 비밀차원에 살아있는 생명체라고는 파천이 데려 온 자들과 비밀차원의 여섯 지도자가 전부여야 한다.
아퀴나스가 당연하다는 듯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도 … 너희들 쪽에서 희생자가 난 것 같다.”
파천은 그러냐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런 … 가? 너희들 여섯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남겨두지 않았나?”
다시 한 번 확인해 봐도 돌아오는 대답은 달라지지 않는다. 파천은 불안했지만 애써 태연함을 가장하며 말했다.
“어쨌든 … 놈이 조금 전까지 이곳에 있었다는 걸 안 것만 해도 큰 소득이었다. 비밀차원을 벗어나지 않았으니 고맙다고 해야 하나. 대체 놈은 여기서 뭘 하고 있었던 거지?”
드러난 단편적인 정황만으로 현재의 진행 상태를 추리해내기란 아무래도 무리였다. 둘은 음산한 짐승의 성채를 빠져나와 다른 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한편 충격 중에 빠져 있는 수하들을 진정시킨 메타트론은 무리를 이끌고 성채를 찾아 나서는 중이었다. 어둠의 천사들이 움직였던 곳을 하나하나 되짚어 가며 가는 길인지라 움직임이 굼떴다.
‘그렇게 쉽게 당하다니. 그런데 대체 그놈은 뭐였을까?’
의문을 풀길이 없다. 비밀차원의 지도자 중 하나라고 보기엔 뭔가 께름칙하고, 달리 다른 존재라고 보기에도 미심쩍었다. 잠깐이지만 모두는 놈의 눈동자와 마주섰었고 그 경험은 지금까지도 마음을 무겁게 할 정도로 섬뜩하기만 했었다.
짧은 순간이었던지라 절반의 형체도 파악되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공포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메타트론은 어둠의 천사들이 가졌을 마지막 감정을 고스란히 전달받았다. 그래서 그의 마음은 더욱 차갑게 얼어붙어 갔다.
‘무엇이든 간에 네 종말은 그들보다는 더 비참할 것이다.’
수호자와 선발대도 뇌성과 번개를 보았다. 그리고 심상치 않은 기운이 천지사방을 휘몰아친다는 것도 감지할 수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수호자였다.
수호자의 얼굴일 딱딱하게 굳어 가며 더운 콧김을 뿜어내는가 싶더니 이마에 작게나마 땀방울이 맺히는 걸 모두는 분명하게 보았다.
선발대는 수호자의 다음 지시를 기다렸다. 아난다가 물었다.
“괜찮은가요?”
무엇이 수호자를 저렇게도 긴장시킬 수 있단 말인가? 모든 것이 낯설고 헤아리기 힘든 상황들뿐인지라 선발대의 마음은 무겁기 한량없었다.
그런 그들의 심정을 알고 있다면 앞서 행하는 수호자가 저런 모습을 보여서는 곤란하다. 그렇지 않아도 불안한 심정이 더 압박을 받을 건 뻔했다. 차라리 속 시원하게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맞붙어 싸웠으면 좋겠다는 심정은 선발대 모두가 느끼는 감정이기도 했다.
라미레스가 불만을 표했다.
“이래서야 어디 싸움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싶다. 우리가 여기 싸우러 온 건 맞지? 하긴 뭐 싸우지도 않고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을까마는 이거야 원 영 성미에 맞지 않아서 … .”
지나가는 투로 하는 말이긴 했지만 당장에 수호자를 채근하는 의미도 다분했다. 왜 그러고 있느냐, 속 시원하게 얘기나 해봐라, 라는 의미였다. 수호자가 선발대를 돌아보며 아직도 긴장을 풀지 않고서 말했다.
“파천이 말했던 바로 그, 기이한 존재의 일부나마 … 느낄 수 있었다.”
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란 말인가?
쿠사누스들의 사실상 지도자라 할 수 있는 유스티안, 즉 아난다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어떻게 느낄 수 있었느냐, 라는 부분에는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다.
“어떤 존재입니까?”
수호자는 메타트론의 충격을 통해 일부나마 정보를 갖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럴까? 그가 느끼는 감정 상태는 메타트론보다도 더 복잡한 것이었다. 자신이 직접 보고 느낀 것이 아니어서 더 그럴는지도 모른다.
“글쎄 … .”
수호자가 애매한 반응으로 뜸을 들이자 라미레스가 다그쳐 물었다.
“거 참 분위기 그만 잡고 속 시원하게 털어놔보시오. 대체 그놈의 정체가 뭡니까? 대체 어떤 놈이기에 파천이 저렇게 태도가 확 돌변해서 돌아가라 마라 하는 겁니까?”
“내가 본 건 … 확실하진 않아. 그걸 붉다고 해야 하나 검다고 해야 하나? 하여간 눈이 빨려들 듯 강렬했어. 내 모든 게 그 앞에서 발가벗겨져 있는 기분. 그래, 그리고 한없이 위축시키는 강력한 기운. 죽음의 냄새. 모든 것이 불확실한 혼돈. 그리고 … .”
“그리고요?”
“그건 바로 … 나의 또 다른 모습이었어.”
한참 호기심에 끌려 귀를 기울이고 있던 선발대원들은 너무나 황당하고 어이없는 수호자의 말에 두 눈만 끔벅거리고 있었다.
그들 중 카이로가 큰 손으로 머리를 벅벅 긁으며 히죽 웃었다.
“뭐,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렇게 느낄 수도 있는 거지요, 흐음. 그렇지, 아암 때로 착각을 할 수도 있는 거니까.”
라미레스가 그때 뭔가가 짚이는 부분이 있었던지 혼자 심각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아난다가 그걸 놓칠 리가 없었다.
“왜 그러십니까?”
라미레스가 곁눈질로 아난다를 슬쩍 쳐다보더니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모두가 흥미를 가질 만한 얘기를 꺼내놓는다.
“예전에 말야, 옛용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상대하기 까다로운 게 있다면 그건 마음을 쓰는 수법이다. 메타트론의 최강의 마력도, 완전자들의 절대적인 능력도, 천사들의 힘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이 마음을 쓰는 비결을 바탕에 두고 있지.
수호자님이 봤다는 그놈도 아마 … 그런 종류의 능력자인 것 같은데 … 참 구질구질한 놈일 것 같단 말야.”
수호자는 그 순간 투명검에 생각이 닿았다.
‘그것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래, 그 말은 맞는 말이다. 어떤 물리력보다도 강한 것이 바로 마음을 굴복시키는 힘이다. 그건 모든 힘보다 우원한 차원에 있다.’
라미레스가 자신의 처지가 한심하다는 듯이 또다시 투덜댄다.
“생각할수록 답답하군. 여기서 우리가 할 일이 없다면 차라리 마계 놈들이라도 때려잡으러 갈 걸 그랬나?”
선발대는 파천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를 만난 이후라야 어떤 식으로든 결론이 난다. 누구와도 부딪쳐선 곤란하기에 더디게 움직이는 것이지만, 이 무한한 비밀차원에 그들이 마주설 자들이 단지 여섯에 불과하단 사실을 알고 나면 과연 어떤 표정들을 지을까?
수호자는 파천에게 영언을 전달했다.
[파천, 나다. 대체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 .
한참을 기다려도 파천에게서 응답이 없었다. 몇 번을 더 시도해 봤지만 마찬가지였다. 수호자는 그때 새로운 사실에 주목하고는 머리를 짚었다.
‘영언이 전달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위치를 전달해줄 방법이 없다는 건데 … .’
이어 메타트론에게도 해봤지만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수호자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처럼 밝고 환하기만 한데 어찌 … .’
파악할 수 없는 종류의 힘이 흐르고 있다는 걸 그제야 확신할 수 있었다. 수호자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그가 할 수 있는 조치는 단 한 가지뿐이었다.
“다시 돌아간다.”
또 돌아가? 라는 표정들이다. 라미레스가 말했다.
“어디로 말입니까?”
“파천과 헤어졌던 곳.”
“거긴 또 왜요?”
“영언 전달이 안 된다.”
이건 또 무슨 해괴한 소리란 말인가? 라미레스도 아난다도 금방 확인을 끝내고서는 얼굴을 찌푸렸다.
정말이다.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나 파천과 다시 만나려면 그 수밖엔 없다. 그래서 그들은 왔던 길을 되짚어 가야만 했다.
돌아가는 내내 선발대의 표정은 세상시름을 혼자 않고 있다고 시위라도 하는 것처럼 무거워 보였다. 이제야 파천의 경고가 진실로 마음에 와 닿았던 것이다. 모두가 실감하기 시작한 것이다.
파천과 아퀴나스는 마주보고 섰다. 서로의 영역으로 돌아가 제 역할을 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아퀴나스가 당부했다.
“내가 그들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으리란 기대는 버려라. 어떤 위험이 네 동료를 불시에 찾아가도 날 원망 마라.”
“그건 … 나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우리 둘의 의지가 상대를 거꾸러뜨리기 전에 서로를 먼저 해치게 되는 상황을 맞게 될지도 모르지. 행운을 비마. 모든 게 원만하게 해결되길 바라겠다.”
“너에 의해 모든 걸 잃게 된다 해도 널 원망하진 않겠다. 그것 또한 내게 주어진 길이라면 묵묵히 감당하겠다.
그렇지만 한 가지 … 내가 널 기억했듯이 너 또한 날 기억해주길 … 바란다.”
파천은 대답하지 않았다 부정의 의미가 아니라 한마디 말로는 충분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둘은 한참을 그렇게 서서 서로의 눈길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돌아섰다. 그들 간에 오갔던 대화들을 가슴에 묻은 채 그들은 각기 제 앞에 놓인 길을 걸을 것이다.
그들 사이에 밀약이 있었다. 그리고 밀약은 서로의 원함을 절충한 선에서 이뤄졌다.
한 자리에 모여 있는 마계전사들은 보기만 해도 숨이 벅찰 정도였다.
끝이 가물가물할 정도로 거대한 광장에 눈을 감은 채 질서정연하게 좌정하고 있다.
마신들이 그 주변을 철통같이 에워싸고 외부인의 드나듦을 철저하게 차단시키고 있었다.
이곳의 책임자인 라아그가 다가왔다.
“결정은 내렸어?”
“아니. 아무것도.”
“너는 확신할 수 있니?”
헤르파의 시선이 의문을 담고 라아그를 찾았다.
“무슨 뜻이지?”
“이들과 함께라면 하룬을 공략할 수 있으리라고 확신해?”
“전쟁은 때로 승리에 대한 확신이 없어도 해야 할 때가 있다. 하룬과 우리의 싸움은 어느 쪽의 전력이 더 우세하냐에 따라 판가름 나지는 않을 거야.”
“그럼?”
“전쟁에서는 졌지만 이기는 싸움을 할 수도 있지.”
“너는 말하는 것이 어째 점점 아버지를 닮아 가지?”
라아그가 말하는 아버지는 루시퍼였다. 라아그는 마계전사들에게로 시선을 둔 채 힘없이 중얼거렸다.
“요즘 이런 생각이 든다. 이 전쟁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아버지의 말씀처럼 이 전쟁의 결과가 어떤 것인가를 입증할 수 있을까? 그 모든 것이 허무하고 무의미해 보인다.”
평소 같았으면 라아그를 심하게 질책했을 헤르파가 반응이 없었다.
“시답잖은 소리 말고 군영이나 다시 한 번 둘러봐라.”
어깨를 늘어뜨리고 힘없이 돌아가는 라아그를 헤르파가 불러 세웠다.
“헤렘은 어디 갔지?”
헤렘은 근래 자주 본진을 떠나 하룬 근처까지 갔다 오곤 했다. 그걸 알고 있었지만 라아그는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헤렘의 그런 행동은 순수한 호기심 이상의 의미가 아니란 걸 알기 때문이었다. 괜한 얘기를 꺼내 그렇지 않아도 복잡할 헤르파를 괴롭힐 필요는 없었다.
“어딘가 처박혀 수련 중이겠지.”
마계의 본진에서 하룬 쪽 방향으로 가다보면 몇 개의 소부대가 진을 치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이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하룬의 동태를 살피는 것이었으나 기실 하룬까지 가서 살펴보는 건 대단히 위험천만한 일이기에 근처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게 고작이었다. 더군다나 최근엔 제왕들이 하룬의 외곽을 감시하고 있는 실정이어서 진의 위치마저 본진에 가깝게 재조정할 정도로 조심스러웠다.
진의 책임자인 아수라가 부하들인 나찰들을 괜히 닦달하고 있었다.
“아직 소식이 없나?”
“네.”
머리를 숙이고 눈치만 보는 나찰들은 사실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목소리가 기어 들어갔다.
“이런, 이런 … . 이걸 어찌 해야 한단 말이냐? 본진에 이 소식을 알려야 한단 말인가?”
나찰 하나가 다급하게 말리고 나섰다.
“그랬다가 그 책임을 어찌 지려고 그러십니까?”
아수라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렇다고 이대로 있다가 정말 무슨 일이라도 벌어진다면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하지만 … 아직 확실한 건 아니고 또 … 전에처럼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나타나실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좀더 기다려보시는 것이 … .”
다른 나찰들도 같은 의견이었다.
“네, 맞는 말입니다. 지금 보고를 올렸다간 지난 일까지 들춰져 책임을 면키 힘듭니다. 좀더 기다려 보시는 것이 최상책입니다.”
모두 두려움이 가득한 얼굴들이었다. 아수라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휴우, 설마하니 하룬으로 침투해 들어간 것은 아니겠지?”
이때 막사 안으로 서너 명의 나찰들이 뛰어들어 왔다. 반색하며 자리에서 일어선 아수라가 급하게 물었다.
“어찌 되었느냐?”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헤렘님의 흔적은 보이지 않습니다. 아마도 … .”
다른 나찰이 뒷말을 이었다.
“이번엔 하룬으로 들어가신 듯합니다.”
드디어 우려하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아수라의 얼굴일 벌겋게 달아올랐다.
“제왕은? 하룬으로 들어가자면 그들의 눈을 피해야 하거늘.”
“별 소동이 없는 걸로 봐서 무사히 침투에 성공한 듯 보여집니다.”
“허 …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아수라는 고민을 거듭하다 결국엔 본진에 보고를 해야겠다고 결정을 내린다. 지금이라도 보고를 올리는 것이 그나마 무거운 형벌을 면할 길이라 판단했다.
나찰의 우려처럼 헤렘은 하룬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마계의 인물이라 해서 금방 눈에 뛸 정도로 특이한 점을 지니고 있지는 않다. 단지 풍기는 분위기가 좀 독특한 뿐인데 이도 숨기면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한 알아내기 힘이 든다.
더군다나 헤렘 정도의 능력자가 의도적으로 감춘 기운을 구별해 내기는 거의 불가능 했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그녀의 미모가 워낙에 특별했기에 다른 이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된 것이다.
그녀는 시침 뚝 떼고 태연하게 행동했다. 대로를 거니는가 하면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돌아다녔다. 그녀는 궁금했던 것이다. 하룬의 내부 사정을 알아볼 양으로 큰 맘 먹고 들어오긴 했지만 막상 침투하고 보니 여간 신기한 게 아니었다.
그 전에도 영자들을 보았으나 그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이곳이 정말 전쟁을 앞두고 있는 진영의 중심일까 싶을 정도로 평화로운 것도 기이했고 사람들의 얼굴이 어쩜 저렇게 밝을 수 있을까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 헤렘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시선들이 있었다. 제왕들 중 둘이었다. 헤렘은 제왕들의 감시를 따돌렸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제왕들은 헤렘을 은밀하게 뒤따르며 관찰하고 낼 요량이었다.
이런 것도 모르고 헤렘은 점차 하룬의 중심부 쪽으로 접근해 가고 있었다.
헤렘의 눈에 일단의 무리들이 모여서 왁자하게 떠드는 장면이 포착되었다. 궁금했던 나머지 무리에 가까이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가운데 몇 사람이 떠들고 있었고 주변을 여러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는데 한참 뭔가에 대해 토론을 벌이는 중이었다.
“핵심은 그게 아니지 않소? 죽음과 소멸이 같지 않다는 점에는 동의하지요?”
“그건 일단 그렇다고 해둡시다.”
“죽음은 단지 육신이 그 기능을 다하는 것, 다시 말해 그릇이 깨지는 것에 비유할 수 있겠지요. 이 경우에 영혼은 육신을 벗어나 새로운 육체를 입기 위해 대기합니다.
하지만 소멸은 영혼까지 완전하게 사라지는 것이오. 그러니 엄밀하게 말해 우리가 이번 싸움에서 죽게 되더라도 영혼까지 소멸 되는 건 아니란 거요. 그러니 소멸당한다고 하는 건 맞지가 않는 겁니다.
“어허, 이 사람이 끝까지 고집을 부리네. 그렇다면 고민할 게 무어요. 모조리 보호막 밖으로 나가 한바탕 싸우고 죽든 살든 하면 될 것을. 지도부의 높으신 분들이 고민하는 게 무언지 그렇게도 모르겠소? 이번 경우는 다르다는 거요.”
“뭐가 말입니까? 죽는 건 매 일반인데 다를 게 뭡니까?”
“자, 내 말을 잘 들어보시오. 이건 단지 예일 뿐인데, 만약에 말이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이 한꺼번에 죽게 된다면 세상은 어찌 될 것 같소?”
“그야 … 별일이야 있겠소? 그냥 텅 비어버리겠지.”
“허 이렇게 답답할 수가. 이 세계는 약속에 의해 존재하는 겁니다. 우리들의 의식과 이 세계 간의 약속이란 말입니다. 물론 그 관계는 안 에는 나로서는 설명하기 힘든 복잡한 것들이 있겠지만 하여튼 모든 현존재들이 사라지고 나면 이 세계도 공멸하게 됩니다. 사라지는 것이요.”
“그럼 영혼은 어찌 되는 거요?”
“그것까지는 나도 모르겠소. 아마도 신에게로 환원되지 않겠소?”
“그러니 당신 말이 틀렸다는 거지요.”
“무슨 말이오?”
“마계가 승리해서 우리가 싹 다 죽었다고 칩시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고 어떤 경우이든 살아남은 자들이 있기 마련인데 그런 걱정은 쓸데없는 게 아니겠소?”
“그것도 틀립니다.”
“그건 또 왜 그렇소?”
“전에 대수련자 중 어느 분한테 들은 것인데 이 세계를 유지하는 관념은 대립하고 상호교감으로써 균형을 맞추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 균형이 무너지면 세계는 기능을 상실하게 되고 변형되기 때문에 사람들 간의 큰 대립이 있을 때엔 그것을 조절하고 균형을 맞출 존재가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만약 그렇게 되지 못하고 메타트론에 의해 이 세계가 장악되면 신은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해 이 세계를 처음의 상태로 돌려놓은 것이라 했습니다.”
헤렘은 그들의 얘기에 흥미가 없었던지 발길을 돌렸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쓸데없는 일에 관심을 가지는 걸 좋아하는군. 어떻게 하면 더 강해질 수 있을까를 고민해도 모자란 시간에 한심한 작자들이군.’
헤렘의 눈앞에 큰 궁성의 문이 나타났다. 문 앞엔 지금까지 본 자들과는 분위기부터 다른 절도 있는 강자들이 도열해 있었다.
‘이곳이 하룬의 사령부인 것 같군. 여길 들어가 봐야 소득이 있을 것 같은데 경계가 삼엄한 것이 쉽지는 않겠어. 하지만 … .’
헤렘은 성벽을 타고 옆으로 걸어갔다. 성문뿐만 아니라 성루 곳곳엔 감시의 눈길이 번뜩이고 있었다. 게다가 저 멀리엔 높은 망루가 몇 개나 세워져 있었고 하룬의 전체를 감시할 수 있는 적당한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다.
헤렘은 성벽을 따라 한참을 걸어가다가 남서쪽의 한 경계에까지 이르렀다. 그녀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신을 주시하는 눈길들이 여기저기에서 포착된다.
‘이거 만만찮은데. 그렇다면 할 수 없지.’
그녀는 성벽을 뒤로하고 물러 나왔다. 그러자 금세 주시하는 기운들이 거둬진다. 바로 그 찰나를 헤렘은 놓치지 않았다.
스스스스
연기가 흩어지듯 그 자리에서 종적을 감춘 헤렘은 실상 지하로 스며들어 있었다. 그녀는 그 상태로 좀더 깊이까지 내려갔다. 그리고 천천히 움직였다. 믿을 수 없게도 지하에조차 감시의 기운이 거미줄처럼 빽빽하게 쳐져 있었다.
헤렘이 사라진 곳에 두 명의 제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중에 하나가 말했다.
“예사롭지 않은 자가 나타났군. 사령부에 알려서 잡아들이게 해야겠어.”
“내가 갔다 오지. 자네는 어서 본래의 위치로 돌아가게. 너무 오래 비워뒀어.”
“그러지. 그럼 자네가 처리하게. 보아하니 마께의 수뇌 중 하나인 것 같으니 신경 써서 잡아들여야 할 거야. 피해가 없도록 각별하게 조심하고.”
“알았어. 심려 말고 내게 맡겨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