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검 – 82화 : 어둠속의 동맹
- 어둠속의 동맹
어둠이 스물 거리며 피어나는 곳에 그 어둠을 살라먹는 미세한 빛 무리가 뭉쳐 있
다. 허공을 부유하는 혼백의 움직임인양 그것은 신비한 감을 불러일으키고 동화되
지 아니하고는 견디지 못할 이질감을 장내에 선사했다. 끈적끈적한 습기는 어디에
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를 불쾌감마저 끌어내니 이런 곳에 사람이 존재하기는 힘이
들어 보였다. 정체도 분명치 않은 메케한 냄새마저 한몫 거들고 있어서 그것은 더
욱 극명하게 분위기를 사이 하게 만들었다.
금면탈의 괴인은 그곳에서 이각을 버티었다. 나무로 대충 짜 놓은 듯한 아귀가 잘
맞지 않는 의자가 삐거덕거리며 비명을 질러댔고 간간이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천장
에 맺힌 물방울들이 물웅덩이에 떨어지는 소리가 전부였다. 그는 전면을 바라보았
다. 분명히 그 빛은 눈앞에서 비치고 있었지만 그것의 정체는 확연하지 않았다. 놀
랍게도 그 빛은 신화경에 이르렀다 자부하는 자신의 무공을 비웃을 만큼 위력적이
었다. 그의 인내심은 남다른 데가 있었기에 심적인 동요를 내색하지 않았으나 그
또한 인간인 바에야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었다. 막 그가 입을 떼어 가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대가 혈마천의 사자인가?”
저것을 사람의 음성이라 할 수 있을까? 고저가 분명치 않고 살아 있는 사람의 것이
라 여겨지지 않는 한기가 감도는 음성이었다. 그럼에도 그 의미만은 분명히 전달되
었기에 금면탈의 괴인은 분명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렇소. 본좌가 바로 혈마천의 사자요.”
“혈마천이 여기에는 무슨 일이지? 대단한 배짱이구나. 아무리 사자의 임무를 띠고
왔다고는 하나 단신으로 여기 올 생각을 하다니…… 그래 무엇 때문에 왔는가?”
“그대의 신분을 먼저 밝혀주시오. 나는 부주가 아니면 상대하지 않소.”
“이제 보니 죽고싶어 찾아 온 자였군. 부주님은 너 같은 애송이를 만나실 분이 아
니시다. 할말이 있으면 나에게 하면 된다.”
“애송이라? 천황부가 이렇게 무례한 곳 인줄 알았다면 나는 오지 않았을 것이오.”
“하하하하 어처구니없도록 대담한 자구나. 좋다. 본좌는 본 천황부의 오황 중 하나
인 암흑마황(暗黑魔皇)이다. 무슨 용건으로 왔는가?”
“으음…… 좋소. 나는 혈마천의 대총사요. 귀부와 본천과의 동맹을 제의하는 바
이오.”
“동맹?”
“그렇소.”
“하하하하하하”
웃음소리는 끊어지지 않을 듯 했다.
“뭐가 그리 우습소?”
“뭐가 우습냐고? 무림에서의 동맹이란 비슷한 세력간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너희
혈마천이 감히 우리 천황부와 동격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냐? 무림에서는 철저히 강
자존의 법칙만이 존재하지. 너희 혈마천이 우리 밑으로 들어오겠다면야 말리지는
않겠지만 감히 동맹이라니…… 일고의 가치도 없는 말이군.”
철저히 무시하는 그 말에도 대총사는 이렇다할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지금 무림의 상황은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고 있을 것이오. 과연 천황부 단일
세력으로 무림을 독패 할 수 있겠소? 중원무림의 저력은 대단한 것이오. 거기다
사사혈교와 사황성, 북해빙궁까지 패권을 노리고 있소이다. 당신들 천황부가 얼마
나 강한지는 모르나 결코 당신들 힘만으로는 두 개의 세력도 감당하지 못할 것이오
. 결국 동맹을 맺지 못하는 세력은 철저하게 무너지고 말 것이오.”
“네 말에도 일리는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직 우리
를 긴장시킬 수 있는 세력이란 전설의 천마교 뿐이다. 그들이 다시 무림에 등장하
지 않는 한은 무림은 우리들 차지가 될 것이다.”
“그렇소? 천황부는 참으로 답답한 곳이었군. 사황성이 이미 중원에 들어와 있음은
알고 있을 것이오. 뿐만 아니라 곧 이어 북해빙궁도 들어 올 것이고 신수궁과 사사
혈교도 잠자코 있지만은 않겠지. 그럼 그들 모두를 천황부 혼자만의 힘으로 상대할
수 있으리라 여기오? 독불장군은 없소. 만약 귀하가 생각하는 것처럼 천황부가 그
리 강하다면 아마도 제일 먼저 제거될 것이오. 그래도 자신 있다면 이 제의는 없었
던 것으로 할 수밖에…… 우리와 동맹을 맺고자 하는 곳은 얼마든지 있으니…..
.”
대총사가 몸을 일으켰다. 그는 한 점 망설임도 없이 몸을 돌려서 발걸음을 떼어갔
다.
“잠깐만 기다려 봐라. 성격이 매우 급한 자군. 동맹의 조건은 무엇인가?”
대총사는 몸을 돌리지도 않고 대답했다.
“동맹할 의사는 있는 것이오?”
“조건을 들어보고 결정하겠다.”
스스로를 암흑마황이라 자칭한 자의 말에 근거하면 그 자의 직위와 권한이 천황부
내에서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님을 알게 해 준다. 이런 중차대한 일을 결정할 수 있
을 만큼……
대총사가 몸을 돌려 세웠다.
“아주 간단하오. 첫 번째는 불가침 협정이오. 무림의 여타 세력이 괴멸 될 때까지
서로를 침범하지 않겠다는 약속이 필요하오.”
“흐음…… 그것은 당연하겠지.”
“두 번째는 공동전선 형성이오. 아, 물론 우리가 동맹하고 있음은 다른 세력에 알
려져서는 곤란하오. 다만 서로의 의견을 조율하여 중원 제패까지의 기나긴 여정동
안 모든 작전은 공동으로 하게 될 것이오. 이를 위해 서로간의 긴밀한 연락이 요구
되오.”
“흐음 그리고?”
“정보 공유요. 적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귀 세력과 본 혈마천의 세력편성까지 서로
가 알 수 있어야 하오.”
“뭐? 그것은 조금 무리가 있지 않나?”
“이것은 서로에 대한 신뢰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요. 서로의 세력 편성에
대해서 알게 되면 상대의 움직임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것이고 그것만이 서로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이어가게 할 것이오.”
“그런가? 좋다. 그 다음에는?”
“마지막으로 모든 적들이 소멸될 때까지 각자 세력의 일부를 상대 진영에 두어야
하오.”
“무엇이라고? 으음…… 그것은 곤란하다.”
“왜, 곤란하다는 것이오?”
“왜, 곤란하냐고? 그것을 몰라서 하는 말인가? 너희가 우리 세력을 먼저 제거하고
우리 쪽에 심어둔 세력을 통해 내부 혼란을 기도한다면 우리로서는 달갑지 않기 때
문이지. 그런 불안을 지니고서야 어찌 동맹관계가 유지될 수 있겠느냐?”
“그것은 피차 마찬가지 아니겠소? 어차피 서로간의 동맹관계는 다른 세력들이 괴멸
되기 전까지는 좋든 싫든 유지해야 할 것이오. 정보공유에도 충분히 이바지 할 것
이고 정기적으로 연락을 취한다면 상대의 급작스런 배신을 경계할 수도 있소이다.”
“으음….. 좋다. 대신.”
“무엇이오?”
“우리도 한가지만 요구하지. 우리가 조사해 본 바로는 중원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사람은 세 명이다.”
“세 명?”
“그렇다. 그 놈들만 제거된다면 무혈입성도 꿈만은 아니지. 어차피 우리 두 세력을
제외하고는 사사혈교나 경계할 만한 상대지. 중원의 무림오천 중의 삼인인 장삼봉
과 옥면신룡, 그리고 천마서생만 제거한다면 중원제패는 훨씬 앞당겨질 것이다. 그
래서 그들 셋을 혈마천이 제거해 준다면 동맹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너희들의 요
구를 모두 수용하겠다.”
대총사는 어이가 없었다. 대체 뭐 하자는 수작이란 말인가?
“그것을 지금 말이라고 하시오? 천마서생은 내가 지닌 정보로는 이미 중원마도를
한 손에 움켜쥐었소. 옥면신룡 또한 정도무림맹의 실질적인 지도자요. 게다가 무당
의 장삼봉 진인은 신룡과 같아서 그 흔적을 찾기조차 쉽지가 않소. 그들 세 명은
중원의 실질적인 힘 그 자체요. 그런 그들을 우리더러 제거하라는 말이오? 그것이
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오? 그것을 그리 쉽게 처리할 정도의 힘을 갖고 있다면
귀부와 동맹 따위를 제안 했겠소이까?”
스스로 생각해도 조금은 무리한 요구라고 생각이 들었는지 암흑마왕은 양보를 했다
.
“그럼…… 셋 중에 하나라도 제거하는 성의를 보여라. 그러면 동맹을 하겠다.”
‘약아 빠진 놈. 좋다. 일단은 네놈들이 하라는 대로 따라주지. 그러나 모든 일이
우리 뜻대로 이루어진 다음에는 네놈부터 죽여주마.’
“좋소. 천마서생을 죽여주겠소.”
“그러면 우리의 동맹은 성립된 걸로 하지. 빠른 시일 내에 천마서생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기대하겠다. 후후후 우리 두 세력의 연합이라면 무림을 집어삼키는 것은
시간 문제 겠군.”
‘어이가 없는 자다. 어느 정도의 자신감을 지니는 것은 모르겠으나 이것은 좋지가
않다. 아직 중원 무림의 진정한 저력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는 듯 하니…… 이것
이 과연 잘하는 짓인가? 사형은 하필이면 이들 천황부와 동맹을 맺으라고 하시는
것인지……’
★
산서성 태원에는 세 명의 유명인사가 있다. 그 하나는 세상의 모든 이치를 꿰고 있
다 하여 만통대로(萬通大老)라 불렸고 또 하나는 그의 손에서 만들지 못하는 것이
없다하여 신장대로(神匠大老)라 하였으며 마지막으로 세상에 모르는 무공이 없다하
여 무불무학자(無不武學者) 만공대로(萬功大老)라 하였다. 이 세 사람은 산서무림
의 자랑이자 정도 무림의 명숙들이기도 했다. 어떤 자리에 간다 하여도 이들에게
상석은 언제나 예비 되어 있을 정도로 그들의 명성은 대단한 것이었다. 이들은 비
슷한 나이에 친구처럼 지내는 사이였는데 언젠가 한날 한시에 은퇴할 것을 결정한
적이 있었고 오늘에야 그것을 실행하기에 이르렀다.
태원에 이렇게 많은 무림인들이 모여 든 것은 처음이리라. 현 무림의 상황이 그리
태평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평소에 이들과 친분이 있는 무림인들이나 문파에서 사람
을 보내왔고 산서에 적을 두고 있는 무림인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앞으로 이들이
은퇴후의 남은 여생을 보내게 될 은현장은 발 디딜 틈 없을 정도로 혼잡했다. 흔히
무림에서 은퇴식을 하는 것은 삼생의 복을 타고나야 가능하다 했으니 이들이야말
로 만인의 축복을 받기에 어색하지 않았다.
은형장의 총관 강호충은 몰려드는 인파에 머리를 흔들었다. 금분세수가 무림에 흔
하지 않은 일이었기에 충분히 예상한 바였으나 이 정도로 성황을 이룰 줄은 짐작하
지 못했기 때문에 당황되었다. 은현장의 수하들이래 봐야 100명을 헤아릴 정도니
족히 3000명을 넘어설 것 같은 군웅들이 몰려들자 그들의 노고가 이만저만 큰 것이
아니었다. 장내, 외에 차양을 치고 자리를 마련하기 바빴고 음식을 조달하기도 벅
찼다.
“총관나으리 음식이 떨어져 가는데요.”
총관은 머리를 짚었다. 시비들의 우두머리 격인 수운이는 평소 그 하는 행사가 치
밀하고 또한 총명하여 총관의 신임이 두터운 아이였다. 그녀는 총관을 빤히 쳐다보
며 신속히 대책을 세워 줄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너는 아이들을 데려가서 성내의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해 오너라. 술이야 얼마든지
조달할 수 있을 거고…… 돈은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 요리사들을 초빙해 오고
식당에서 쓸 음식재료들을 모두 사 오너라. 어서 서둘러라.”
“네, 알았습니다.”
수운이 뛰어 가는 것을 본 총관은 어질어질함을 느껴야만 했다.
‘아직 은퇴식은 두 시진이 더 있어야 시작될 터이고 모르긴 몰라도 밤새도록 잔치
가 벌어질텐데 큰일이군. 게다가 무림대파에서는 아직 도착도 하지 않았으니……
‘
그는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도처에 차양이 쳐져 있었고 자리를 깔고 앉은 무림인
들이 술을 들이키며 왁자하게 떠드는 모습들이 눈에 들어왔다. 바깥 상황도 이에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한쪽에는 방명록을 기재하는 수하들의 모습도 보였지만 이미
등재하는 것을 포기했는지 손을 놓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무림인들이 몰려 온 것이 한편으로는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항상 이
런 은퇴식에는 평소 사이가 좋지 않거나 은원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찾아와서 행패
를 부리기 마련이었고 그것을 잘 수습해야 은퇴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세 장주님이야, 무림에 은원을 쌓은 적이 없으시니 그런 일이야 없겠지만 만
에 하나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한다 해도 하객들이 이리 많으니 잘 무마가 되겠구나
.’
총관은 또 다시 바쁘게 뛰어 다녀야만 했다.
은현장 유일의 대전이라 할 수 있는 경천전(敬天殿)에는 산서무림의 중소 문파들의
문주들이 자리해 있었다. 기껏해야 10명이 채 안 되는 수였기에 대전이라 하기에
조금은 비좁은 곳이지만 그리 썰렁해 보이지는 않았다.
“이렇게 은퇴식을 축하 해 주기 위해 왕림해 주셔서 저희들은 몸둘 바를 모르겠군
요. 아무쪼록 마음껏 즐기시기를 바랍니다.”
만통대로 기문선의 훌렁 벗겨진 대머리가 오늘따라 유난히 빛을 발했다. 인자한 두
눈에는 흡족함과 함께 어딘가 불안한 기색이 엿보이고 있었다. 두 사람과 나란히
앉아 있는 두 명의 장주 역시 마찬가지인 듯 했다.
덜컹
문이 심하게 요동치며 열렸고 그 사이로 총관이 다급한 신색으로 들어서자 만통대
로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이냐?”
총관은 숨을 고르며 무슨 말인가를 하려 했지만 터지느니 거친 호흡소리뿐이었다.
이를 본 만통대로의 꾸짖음이 있고 나서야 그는 말문을 틔었다.
“지금….. 밖에…… 괴인들이 와서 난동을 부리고 있습니다. 장주님들을 데려
오지 않으면 이곳을 쑥밭으로 만들어 버리겠다며……”
“무엇이라고?”
만통대로는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이었고 총관의 말에 반문을 한 이는 옆의 만공대로
추자승이었다. 세 명의 장주들은 빠르게 시선을 교환했다. 이런 그들의 모습을 살
피던 장내의 귀빈들의 얼굴에는 의아함이 가득했다.
산서 무림의 기둥 중 한곳인 철혈장 장주인 호아검(虎牙劍) 진표율이 앞으로 나섰
다. 그는 자신의 허리에 매어진 검 자루를 한번 툭치며 점잖은 음성을 발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별일 아닐 겁니다. 여러분들은 여기 계십시오. 저희들은 어찌 된 연유인지를 알아
보고 오겠습니다.”
세 명의 장주는 총관의 뒤를 따라 바깥으로 사라져갔고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한 호
아검도 그들의 뒤를 따랐다. 그들이 밖에 나와보니 은현장 바깥에서는 팽팽한 긴장
감이 흐르고 있었다. 삼십여명은 족히 될 인원들이 윤기가 흐르는 흑마에 올라탄
채 기세등등하게 군웅들을 쳐다보고 있었고 많은 수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기세가
워낙에 흉험했는지라 아무도 그들을 제지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들 앞에
는 은현장의 호장무사들이 문 앞을 지키고 서 있었지만 볼품 없는 모습들이었다.
[자네의 점괘가 오늘도 적중했군. 나는 오늘만이라도 틀리기를 바랬건만……]
만통대로에게 전음을 보낸 이는 은현장의 세 장주 중의 일인인 신장대로 호만득이
었다. 그의 전음에 얼굴에 수심을 드리운 만통대로가 전면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장내에 나타나자 중인들이 한 쪽으로 길을 틔어 주었다.
만통대로는 눈앞을 쳐다보았다. 인원은 서른 명에 불과 했으나 그들이 내 뿜는 기
운은 삼백 명 이상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무리 중 최선두에
서 있는 젊은이에게 가서 멎었다. 분위기로 보나 그들이 서 있는 위치로 보나 그가
저들 무리의 수장으로 여겨졌다. 흑마보다 더 짙은 흑의무복에 눈빛이 날카로운
자였다. 전체적으로 한 자루 날선 칼을 보는 듯한 예리한 기도를 풍기고 있었다.
그는 오만한 시선으로 세 명의 장주를 쓸어 보았다.
“그대들이 이곳의 장주들인가? 오늘 은퇴식을 한다는…..”
군더더기가 없는 음성이었다. 인간의 정이 느껴지지 않는 무미건조함이 어떠한 것
인지를 보여주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무례하구나. 감히 무림 말학 주제에 대 선배에게 이 따위 버릇없는 언사를 하다니
……”
철혈장주의 호통소리였다. 그의 말에 호응하는 소리들이 군웅들에게서 터져 나왔다
.
“어서 말에서 내리지 못할까?”
“어디서 굴러먹던 놈들이냐? 정체를 밝혀라.”
말 위의 흑의 사내는 그런 군웅들의 반응에 그저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을 뿐이다.
그런데도 장내는 급작스럽게 조용해져 버렸다.
만통대로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그렇소이다. 우리들이 이곳 은현장의 세 장주요. 그러는 귀공은 대체 누구시오?
그리고 이곳에는 무슨 용무로 오셨소?”
“알 것 없다. 우리는 먼길을 왔다. 우연히 이곳에서 은퇴식을 한다기에 찾아 왔을
뿐이다. 우리 일행들이 쉴 곳을 마련하고 접대를 해라.”
그 말을 들은 장내의 모든 인물들에게서는 하나같이 잘못 들었지 않나 하는 의문이
떠올랐다.
‘저 자는 항상 명령만을 내려오던 자다. 그리고 멀리서 왔다는 것을 보니 새외의
인물이기 쉽다. 오늘은 길보다는 흉이 많겠구나. 오늘 처신을 잘못하면 큰 어려움
을 겪게 되리라.’
만통대로는 조심스럽게 사내를 올려다보며 입을 떼어갔다.
“들어오시오. 그 정도야 못하겠소? 원래 잔치 집에는 손님이 많을수록 좋은 법이니
…… 총관. 어서 안내하거라.”
“네, 장주님.”
“잠깐.”
이번에는 또 뭐란 말인가? 세 장주의 얼굴에 불안이 스쳐갔다.
“나는 번잡한 것을 싫어한다. 장내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내 보내거라.”
그 말은 분명 억지였다. 이런 말을 태연하게 뱉어내는 사람에게 좋은 낯으로 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통대로의 얼굴은 변화가 없었고 침착하게 대응했다.
“오늘은 우리 세 늙은이들의 은퇴식이오. 그리고 여기 계신 분들은 부족한 저희들
의 은퇴를 축하해주기 위해 오신 분들이오. 이런 분들을 나가라 할 수는 없소이다.
그러니 귀하께서 양보를 해 주셨으면 좋겠소.”
그가 이렇게 까지 저자세로 나오는 이유를 사람들은 이해 할 수 없다는 표정들이었
다.
“좋아. 내가 양보하지. 은퇴식은 내일로 미뤄라. 우리는 하루만 이곳에 있다 가겠
다.”
“이런 발칙한 놈. 네 놈이 뭐 하는 놈인지는 모르겠으나 참으로 오만함이 하늘에
미치는 놈이구나.”
철혈장주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대로하여 외쳤다. 흑의사내의 시선이 그에게 머물
렀다.
“죽고 싶은가 보군.”
그 한마디가 전부였다. 순식간에 장내는 차가운 살기가 피어나고 삼십여명의 무사
들의 눈이 차갑게 빛나기 시작했다.
“장주. 이 놈들을 그냥 놔 둘 참입니까?”
철혈장주의 말이었다. 그는 상대들의 기세가 만만치 않자 이렇게 말을 돌린 것이다
. 그러나 여전히 그 또한 기세를 죽이지 않고 마주 쏘아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세 명의 장주는 참으로 난감했다.
‘이 일을 어쩐단 말인가? 만약 저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저들은 살수를 펼칠
것이고…… 저들은 결코 만만한 자들이 아니다. 이 많은 군웅들 앞에서도 한치
의 흔들림도 없는 것만 봐도 저들이 어떤 자들인지는 알 수 있다.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이제 하루만 지나면 무림과의 연을 마치고 여생을 편히 지낼 수도 있겠건만 하필이
면 마지막에 이런 일이 벌어진단 말인가? 그들이 어떤 대답을 하느냐에 따라 장내
의 분위기는 달라 질 것이다. 흑의인들의 요구를 들어 준다면 은퇴를 축하해주기
위해 이곳에 모인 군웅들에게서 비겁한 자로 낙인찍힐 것이고 자존심을 세우고 강
경하게 대한다면 이곳은 금새 피바다가 될 것이 분명했다. 어느 쪽도 그들이 원하
는 것은 아니었다.
[어떻게 할 참이냐?]
만공대로가 만통대로에게 물어오는 전음이었다.
[무인으로서의 자존심을 지키자.]
이것이 만통대로의 최후의 결정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억지요. 안 되겠소. 그냥 돌아가 주시오.”
만통대로의 그 말에 장내의 군웅들의 얼굴에 떠 오른 것은 당연하다는 표정들이었
다. 이제는 과연 그들이 어떤 태도를 보일 것인가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어리석은 자로군. 그깟 자존심 때문에 죽음을 자초하다니…… 얘들아 장내를 정
리해라.”
“존명”
“존명”
삼십명의 흑의무사들이 동시에 대답을 하는가 했더니 허리에 차여져 있는 도를 뽑
아들고는 산지사방으로 튀어나갔다. 그들은 순식간에 무리 중에 섞여 들어갔고 그
들의 도는 불을 뿜었다.
“끄악”
최초의 비명성이 터져 나온 이후 연이어 여기저기서 비명성이 이어졌다.
“이 놈들.”
철혈장주가 그런 흑의인들 중 한 명에게 검을 빼들고 덤벼들었다. 세 명의 장주와
은현장의 수하들도 무기를 빼들고 달려든다. 장내는 일 순간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
다.
그 동안 연재가 되지 못한 점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앞으로 일주일간 잠시 연재 중단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빠른 시일 내에 연재를 속개 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출판본 수정작업을 하는 가운데 마음에 들지 않은 점이 발견되어 전면수정에
들어갈 생각입니다. 앞으로 일주일 정도면 완전히 끝나지 않을까 생각중입니다.
이후 4월초나 되어야 1.2권 출판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니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번 글도 공지를 위해 급하게 써서 올립니다. 다음에 찾아 뵐 때는
연참(!)으로 찾아 뵙겠습니다.
한가지 알려 드릴 것이 있습니다.
다른 것이 아니고 제가 다음에 카페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주위의 아는 동생들을 중심으로 해서 팬클럽의 성격이 짙었으나
카페의 성격을 전환하여 무협과 판타지를 쓰시는 신인(기성도 있습니다만.)작가분
들의 글을 올리거나 처음 소설을 쓰시는 분들이 글을 올리고 서로 비평하고 도움을
주는 카페입니다.
이후 저도 시간이 나면 일일이 읽고 비평을 할 생각이고 다른 소설이나 설정같은
것도 공개할 생각입니다. 소설을 쓰거나 읽는 것을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한번 오셔
서 보십시오. 아직은 시작 단계라 그리 활동이 활발하지는 않지만 장차 이곳에서
많은 분들의 꿈이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현재는 나우에서 활동하시는 작가분들과 인터넷에서 활동하시는 작가분들이 회원으
로 가입하셨습니다. (천검,무적검객,백무잠,일심,권오단님,가위님 등)
주소는 www.cafe.daum.net/logos333
이나 다음카페에서 ‘황제의 검’으로 검색하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황제(皇帝)의 검(劍)-
83. 사황성의 도발!
흑의인들은 평화로이 풀을 뜯는 양떼 무리에 뛰어든 한 무리의 늑대와 다름없었다.
한번씩 검을 찌르거나 휘두를 때마다 어김없이 터져 나오는 단발마의 비명은 언제
나 군웅들의 것이었다. 검법은 기이하도록 빠르고 악랄했다. 철혈장주는 막 한 명
의 심장에서 검을 뽑아드는 흑의인의 배후를 노렸다. 검기가 상대에게 뻗치자 그
자는 어느새 그것을 느끼고 뒤로 검을 쳐 올려왔다.
챙
“허억”
철혈장주는 검을 통해 전해지는 충격에 하마터면 검을 놓칠 뻔하였다. 그의 손아귀
는 어느새 찢어져 있었고 뒷걸음치며 물러서는 그를 흑의인은 따라붙으며 악랄한
초식을 전개했다.
‘대체 이놈들이 누구기에 일개 수하마저 이 정도란 말인가?’
그의 놀람은 당연했다. 물론 중원무림 최 고수들의 집단이라 할 수 있는 무림맹의
고수들에게야 비견할 수 없다지만 산서 무림에서 한 소리 한다 할 수 있는 자신이
고 보면 상대의 강함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기도 했다. 철혈장주는 뒤로 물러서
며 알 수 없는 적에 대한 공포심을 지녔다. 흑의인의 검이 재차 중단을 향하여 찔
러 들자 감히 태만하지 못하고 전력을 기울여 막아갔다.
챙
챙
“으음”
역시나 상대의 검기는 자신으로서도 감당하기 벅찰 정도였다. 거대한 철벽을 두드
리는 듯한 타격이 전해져 왔다. 불안이 엄습했다. 도저히 건드려서는 안될 사신들
을 맞닥뜨린 것 같았다.
“이놈”
한소리 노호성을 발하며 몸을 빼어 올렸고 전신내공을 검에 집중했다. 석자에 달하
는 검기가 피어나고 호아검은 이내 상대의 심장을 노리고 삼 검을 격출했다. 이번
에야말로 적에게 손해를 입힐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그러나 그의 기대는 너무나
어이없이 허물어지고 있었으니, 어느새 그의 전후 좌우에서 네 명의 흑의인들이 몰
려들며 검을 뻗어 온 것이다.
“끄억”
믿을 수 없었다. 호아검의 심장과 목과 등, 그리고 복부에는 네 자루의 검이 들어
왔다 빠져나가고 그곳에서는 도랑을 흐르는 물줄기처럼 세차게 피가 쏟아져 나왔다
. 점점 의식은 흐려지고 몸이 무너진다 여겼다. 그것이 끝이었다. 흑의인들의 공격
은 끊임없이 군웅들을 휩쓸어갔지만 누구하나 그들을 제지할 만한 고수는 없었다.
군웅들 역시 한 자루 검에 인생을 맡겼으니 만큼 저항이 만만치 않았으나 그것은
공연한 몸부림에 지나지 않았다. 점차로 비교적 격전지에서 먼 곳으로부터 도주하
는 자들이 속출했다. 삼 천명 대 삼십명의 싸움이건만 그들은 그 무엇보다 자신들
의 생명만이 소중했고 자신이 죽은 이후에 찾아올 승리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는 자
들이었다. 끝까지 물고늘어진다면 자신들의 승리가 분명하겠지만 그들이 느끼는 공
포심은 이를 떨쳐버리는데 탁월했다.
“하하하하 모두 죽여라. 중원의 잡것들을 하나도 살려 두지 마라.”
여전히 말에 탄 채 허리를 젖혀가며 웃는 흑의인을 향해 은현장의 세 장주는 서로
의 시선을 부딪히며 맹렬히 몸을 날려갔다. 그들의 공격은 그 분노만큼이나 거센
것이었지만 흑의인은 단지 흘끔 시선을 주었을 뿐이다. 그의 시선은 냉막함을 유지
하며 마치 벌레를 쳐다보듯 경멸을 담고 있었다. 만통대로는 한자에 불과한 판관필
을 꺼내 들었고 만공대로의 손엔 단창이 쥐어져 있었다. 셋 중에 가장 빠른 신법을
지닌 신장대로는 검을 쥐고 어느새 상대 가까이 도달했다. 머리위로 솟구친 검극
을 몸을 허공에 띄운 채로 아래쪽으로 힘껏 내리그었다. 신장대로는 비웃음을 흘리
는 상대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말 위에 오만하게 앉은 청년은 자세도 흐
트러뜨리지 않고 한 손을 쳐들었다. 손안 가득 붉은 기운이 스미는가 했더니 공기
를 찢는 파공성이 터져 나왔다.
팡
“꺽”
신장대로는 속절없이 퉁겨갔다. 그러나 그는 역시 노련했다. 허공에서 몸을 뒤집으
며 자세를 바로 하고 땅에 착지하는가 싶더니 곧 바로 상대에게로 짓 쳐간다. 그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만통대로의 판관필과 만공대로의 단창이 상대의 장력에 격
퇴되어 뒤로 물러나고 바로 그 순간 상대의 몸이 흐릿해지며 시야에서 사라짐을…
… 그는 고개를 돌리며 상대를 찾았다. 만통대로와 신장대로 역시 한곳에 떨어져
몸을 겨우 가누며 흑의사내를 찾고 있었다.
‘이 놈이 대체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신장대로는 빠르게 주위를 훑어보았다. 주위에 늘려 있는 시체들은 하나같이 자신
들의 은퇴식을 축하해주기 위해 온 하객들이었다. 서른명의 흑의인들은 도주하기
시작한 군웅들을 따라 붙으며 도륙하고 있었다.
“중원의 버러지들. 내가 너희에게 진정한 하늘이 어떠함을 알려주마. 지옥에 가서
염라대왕이 누가 보냈느냐고 묻거든 혈수천자(血手天子)님이 친히 손을 쓰셨다 하
거라.”
세 사람은 소리의 출처를 향해 빠르게 고개를 들었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허공
중에 떠 있는 흑의사내에게로 몸을 솟구쳤다. 그는 허공을 밟고 두 손을 하늘로 뻗
고 있었는데 손안에는 태양을 방불케 하는 륜이 빛 무리를 끌고 맹렬히 돌아가고
있었다. 그는 아래쪽을 향해 가볍게 손을 떨쳤다. 그러자 손안에서 회전하던 두 개
의 륜이 기이한 소음을 동반하고 각각 만통대로와 만공대로에게 쏜살같이 달려오
는 것이 아닌가? 만공 대로는 빛 무리를 창으로 갈랐다 여겼고 만통대로 또한
판관필로 쳐내었다 생각했다. 그런데 현실은 그들의 생각을 여지없이 배반하고 창
이 부서지고 머리통이 갈라졌으며 심장을 관통하여 등짝이 박살났다.
두 사람은 비명도질러보지 못하고 호흡을 놓아버렸다. 신장대로는 혼신의 기력을
짜내어 흑의사내에
게로 검을 찔러갔다. 필살의 의지가 실려 있으니 만큼 그 위력은 만만치 않았지
만 상대는 여전히 비웃음으로 무참히 그의 내심을 갈가리 찢어 놓았다.
“으악”
만통대로와 만공대로를 관통한 두 개의 륜은 어느새 호선을 그리며 신장대로의
어깻죽지를 스쳤고 두 팔은 검을 쥔 채로 몸에서 분리되어 버렸다. 그는 땅 바닥을
구르며 버둥거려보았지만 그럴수록 피는 더욱 빠른 속도로 몸 안에서 빠져나갔다.
마지막 부여잡고 있던 의식의 끈을 더욱 조여보았으나 소용없는 짓이었다. 옆으로
가로누운 그의 시선에는 지난 세월을 함께 한 두 친우의 처참한 주검이 비치고 그
앞에는 그 보다 오랜 세월을 함께 했던 자신의 두 팔이 검을 꽉 쥔 채로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고통이 밀려왔다. 그 고통보다 더 강하게 그를 이끄는 것은 억
울함이었고 흐려지는 시선을 가리는 것은 눈물이었다.
‘이렇게 가야 하다니…… 인생이 이리도 허무한 줄 알았다면 나는…… 검을 잡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지금껏 한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무엇을 위해 검을 쥐었고
무엇을 위해 그리도 처절하게 투쟁을 하였던가? 이런 처참한 죽음을 맞기 위해서라
면…… 후후후’
“후후하하하하하”
생명을 유지하는 마지막 기력을 그는, 한 움큼의 웃음으로 소비하고 있었다. 그의
곁으로 다가선 혈수천자는 그런 그를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그의 입가엔 경멸의 미
소가 떠나지 않고 매달려 있었다.
“미친 놈. 너희들 같은 쓰레기들을 치우기 위해 내가 친히 나서야 하다니…… 이제
중원은 깨닫게 될 것이다. 하늘은 마냥 푸르지만은 않고 하늘이 분노하면 어떤 저
주가 내리는지를…… 내가 곧 하늘이니.”
그는 발을 들어 신장대로 머리위로 갖다 대었다. 그리고는 지그시 힘을 주며 입
을 열었다.
“하늘의 위대함을 너희는 뼈저리게 느끼게 될 것이다.”
빠각
또 하나의 고귀한 생명이 사라져 감을 알리는 소리였다. 머리가 터져 뇌수가 흘러
나오자 혈수천자는 신발바닥을 만공대로의 옷에다 쓱쓱 문질러 닦았다. 그는 시선
을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시체들 사이로 흘러내린 피가 바닥을 적시고 불어오는
바람결에 비릿한 혈향이 섞여 요동을 친다. 시선의 끝에는 그의 수하들이 보이고
그들은 피 묻은 검을 들고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혈수천자는 말에 올랐다.
바로 그때였다.
두두두두두
주위에 늘어선 흑의인들은 경계를 하며 고개를 들어 지평선 쪽을 쳐다보았다. 족히
삼백 기는 넘을 기마대가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한 호흡으로 질러대는 소리 마냥
말발굽 소리는 듣기 좋은 박자감을 지녔다. 그들이 가까이 다가오자 흑의무사들의
경계가 오히려 풀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제각기 말에 올라 혈수천자의 뒤로
도열했다.
“사형의 수족들이군.”
잔잔하게 흘러나온 말은 눈앞에 다가오는 기마대가 결코 외인이 아님을 설명해주었
다. 무리 중에서 한 명이 혈수천자 앞으로 나서고 말에서 뛰어내리며 한쪽 무릎을
땅에 대었다.
“이공의 중원 입성을 경축 드립니다.”
“사형이 보내서 왔나?”
“네, 그렇습니다.”
“괜한 수고를 했구나. 나는 당분간 중원을 홀로 주유할터이니 너는 신경 쓰지 말고
돌아가거라.”
흑의경갑을 멋들어지게 걸친 중년무사는 고개를 들며 혈수천자를 쳐다보는데 그 눈
에는 난색을 표하고 있음이 금방 드러났다.
“안 됩니다. 태공(太公)께서 이공(二公)을 꼭 모시고 오라 하셨습니다.”
혈수천자의 눈이 꿈틀거리는가 했더니 그의 전신에서는 마주보기 힘들 정도의 살기
가 피어나며 상대를 압박했다.
“네가 언제부터…… 내 말에 토를 달았나? 감히 너 따위가 나에게 그런 말을 하다
니…… 죽고 싶나?”
중년무사는 고개를 더욱 깊이 숙이며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그것이 아니오라…… 태공의 명에 의하면 혈마천과의 동맹 건으로 이공을 꼭 모시
고 오라 하셨습니다. 이것은 천황의 명이기도 합니다.”
혈수천자의 살기는 잦아들고 의문을 드러내었다.
“사부께서? 으음…… 혈마천과 동맹이라고? 어이가 없군. 그 따위 쓰레기들하고 동
맹을 했다는 말인가? 좋다. 가자. 지금 사형은 어디 있나?”
“태공께서는 낙양에 머물고 계십니다.”
“낙양? 흥…… 금방 중원을 접수할 것처럼 큰 소리를 치더니 지금껏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모르겠군. 아무리 사형이라고는 하나 직무유기가 발견된다면 그 또
한 용서할 수 없는 일. 사형 내 그대의 오만한 얼굴에 언젠가 비굴한 웃음이 떠돌
게 해주지.”
그는 눈앞의 사내는 전혀 의식하지 않고 이 말을 뱉어내었고 많이 보아왔던 일을
대하는지 중년무사 역시 별다른 기색이 없었다. 혈수천자는 300기마대의 호위를 받
으며 남쪽으로 말을 몰아갔다.
★
사천성 송번에 웅크리고 있던 사황성이 행동을 개시했다. 그들은 오천 기마대를 끌
고 사천성 성도로 진격해 들어갔다. 그들의 최선두에는 사황성의 중원무림 제패의
야심의 결정체이자 회심의 걸작인 제혼혈강시(制魂血畺屍) 500구를 앞세웠다. 금방
피구덩이에서 건져 올린 듯 붉은 색으로 물들어 있는 혈강시들은 보기만 해도 전
의를 상실케 하는 사이함을 풍겼다. 이미 무림에서 강시가 사라진지는 오래 되었다
. 워낙에 그 제조방법이 까다롭고 그런 것에 비해서는 큰 효과를 볼 수 없기 때문
이었다.
강시란 특이한 술법이나 약물로 제조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례이고 그 피부와 뼈가
보통의 인간들보다는 강하다. 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고통을
느끼지도 않는다. 이런 이유로 예전에는 곧잘 사용되기도 했으나 지금은 대부분
사라졌다 할 수 있었다. 가장 큰 이유는 무림인들의 일반적인 내공의 증진에 있었
다. 강시가 견딜 수 있는 한계는 검기 정도였으므로 검강을 시전 하는 고수에게는
한낱 팔딱거리는 허수아비나 다름없었다. 공격목표를 향해 저돌적으로 달려들기는
하지만 스스로 판단하여 공격을 변환하거나 수비를 하는 등의 꾀를 부리지 못하기
에 돈만 많이 들었지 그 효용성에 있어서는 영 젬병이었다.
그러나 두 종류의 강시만은 지금도 공포의 대상이었으니. 그 하나는 한때 마교에서
사용한 적이 있다는 묵혈강시(墨血薑屍)이고 또 하나는 배교에서 창안한 제혼혈강
시다. 이 두 강시는 다른 것들과 달리 살아 있는 인간의 의식을 제압하여 강시로
만든 것이기에 그 활용에서 탁월한 점이 있었다. 더군다나 원래 지니고 있던 무공
을 그대로 사용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판단을 내리기도 하며 일반 강시에 비해서
피부의 견고함이 극히 뛰어나 검강을 시전 하는 고수라도 단번에 처리하기는 힘들
었다. 이런 제혼혈강시가 무려 500구나 된다는 것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절정
고수 500명을 앞세운 거나 다름없었다.
역시 그 효과는 금방 드러났다. 오련회의 제선분타는 송번에서 성도로 가기 위한
첫 번째 관문이었다. 그런 이유로 사황성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고 있던 오련회
측에서는 전력의 일할을 배치시켜놓았다. 지금 성도에 집결한 오련회를 주축으로
한 무림맹 전력은 거의 2만에 육박하고 있었고 여기에다 사천성 각지에서 몰려든
중, 소문파들까지 하면 3만을 훌쩍 넘겼다. 제선분타의 삼천 고수가 사황성의 5천5
백 명에게 초토화 된 것은 고작 반 시진하고도 이 각에 불과했다. 칼과 검을 퉁겨
내는 혈강시들은 평생을 피 튀기는 격전장에서 잔뼈를 키워온 강호인들 마저 공포
감을 느끼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삼천 고수들이 펼친 구궁멸혼진(九宮滅魂陣)
은 500 혈강시들이 휘두르는 손속에 너무나 어이없이 무너지고 그들이 최후까지 저
항을 포기하지 않았음은 오로지 대지를 적시며 흐르는 혈하만이 말해 주고 있었다.
“그게 무슨 소린가? 반 시진만에 제선분타가 괴멸되었다니?”
오련회주 창천신검 남궁휘의 외침은 너른 전청을 빠르게 오가며 울려나왔다. 모두
의 심정은 동일하게 불안으로 뒤덮여가고 초조감이 빠르게 의식을 지배해오기 시작
했다. 그런 차에 남궁휘의 외침소리가 이런 그들의 심경을 더욱 압박해오며 지금의
당면한 현실이 얼마나 심각함을 일깨워주고 있었으니…… 팽가가주이자 오련회 장
로이기도 한 붕산신권 팽호우가 앞으로 나서며 불같은 성격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
대로 드러내었다.
“회주. 이 이상 지체하다가는 한 번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사천성을 내주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차라리 분타의 전력을 후퇴시켜 일전을 결하는 것이 나을 듯 합
니다.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최후의 순간까지 놈들과 생사를 결해야 합니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모용세가주인 신산귀검 모용중일이 앞으로
나서며 배배꼬인 수염자락을 비틀어가며 어렵게 입을 떼어갔다.
“제선 분타가 그리 쉽게 허물어 진 것은 제혼혈강시 때문이라 합니다. 마땅한 대책
이 없는 한은 전면전을 벌인다 하여도 승산이 없습니다. 차라리 사천성을 내주는
한이 있더라도 확고한 대책을 세운 연후라야 싸움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신중을
기하여야 할 것이오.”
팽장로는 모용가주의 평소 신중한 성격을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지금의 그 말은 듣
고 있자니 울화가 치밀게 할 만큼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모용가주. 대체 지금 사천성을 내주자는 말이 그리 쉽게 나오시오? 이곳을 내주고
물러서면 우리가 어디로 간다는 말이오? 어차피 상대해야 할 적이라면 이곳에서
승패를 결해야 할 것이오.”
팽장로의 시선은 모용중일에게서 떠나 남궁휘에게로 전해졌다.
“회주. 망설일 시간이 없습니다. 제선분타가 무너졌다면 곧 바로 조양입니다. 그
다음엔 공지와 천면, 이후엔 이곳까지 몰려 들것입니다. 그러니 분타의 전력들을
천면분타까지 후퇴시켜 장우평이나 함량산에서 저지해야 합니다. 어차피 무림맹에
서는 더 이상의 지원이 불가능하다는 전갈이 왔고 우리를 도와줄 만한 다른 조력자
들은 전무한 실정입니다. 회주! 용단을 내리십시오.”
전청에 모인 오련회 소속 문파들의 수장들은 회주 남궁휘가 어떤 결정을 내릴 지에
주목했다. 그들의 심정 또한 두 사람의 장로의 의견에 별반 다르지 않았고 비슷한
비율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런 그들의 눈을 바라보며 남궁휘의 입이 벌어졌다. 고
른 치아가 드러나며 말을 만들어가고 있다.
“지금의 우리들의 전력이라면 그들을 막아낼 수 있소. 그러나…… 우리 또한 타격
이 극심할 것이오. 모용가주의 말처럼 우리는 현명한 선택을 해야 하오. 사천성을
내주는 것쯤 그리 문제될 것이 없소. 크게 보고 길게 보아야 하오. 작금의 무림 상
황으로 봤을 때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고 우리가 상대해야 할 적은 도처에 도사리고
있소. 5500의 사황성의 전력 또한 그들의 전위에 불과하오. 그런데 그런 그들을
막고자 오련회 전체의 힘을 소비한다면 후세의 무림사가들은 우리를 비웃을 것이
틀림없소이다. 분하고 억울하지만 일단은 후퇴하며 방법을 찾아봅시다. 당문주!”
남궁휘의 눈이 빠르게 사천당문주 독수만리 당천익을 찾아간다. 그는 한 걸음 나서
며 회주의 부름에 답했다.
“네.”
“제혼혈강시의 약점이 무엇이오?”
사천당문은 독술과 암기술에 있어서는 중원최고의 문파라 할 수 있었다. 여기에 더
해서 강시제조에 대한 식견 또한 풍부하기에 회주가 물어본 것이다. 그는 머뭇거렸
다. 몇 번이나 자신을 바라보는 좌중의 시선을 부담스런 눈길로 마주 대하다가는
한 숨을 토해내며 그들의 기대를 깨뜨리는 것이 죄스럽다는 표정으로 이어지고 만
다.
“회주, 안타깝게도 제혼혈강시는 약점이 없습니다. 최소한 삼갑자 이상의 내가고수
가 전력을 기울여 타격을 가한다면 신체를 훼손시킬 수 있을 뿐입니다. 결국은 사
지를 잘라내어 대항하지 못하게 만드는 방법뿐입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리고 만다. 남궁휘는 몸을 젖히며 천장을
쳐다보았다.
“삼갑자 이상의 고수라? 후후 정말 어이없을 정도로 강한 물건이군. 결국은 방법이
그것뿐이라면…… 모두 잘 들으시오. 순간의 울분을 참지 못하고 맞대응 하다가는
대세를 그르칠 수 있소. 지금 이 시간 부로 오련회의 전 주력은 성도를 버리고 중
경으로 물러날 것이오. 분타에 즉각 연락을 취해 필요 없는 손실을 최소 화 하시오
.”
팽장로는 당치않다는 표정이었으나 그 또한 어쩔 수 없음인지 수긍을 하는 것 같았
다. 그는 회주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중경까지 물러섰음에도 그들이 진격을 멈추지 않으면 어쩌실 참입니까? 더군다나
중경은 배후에 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잘못하면 떼죽음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들이 멈춤이 없이 우리를 따라 붙는다면 우리 또한 죽음으로 그들을 저지
할 것이오. 그곳이야말로 우리가 물러설 수 있는 한계지점이 될 것이니 모두 그렇
게 각오를 다지시기를 바랄 뿐이오. 회의는 이것으로 마치고 즉각 준비를 서둘러
주시오. 한 시가 급합니다.”
“알겠습니다. 회주.”
“존명.”
그들은 빠르게 흩어져 갔다. 전청을 빠져나가는 인물들의 부산한 움직임을 주시하
며 남궁휘의 입에서는 그만이 들을 수 있는 작은 한 숨이 새어나왔다.
“후우…… 좋지가 않다. 모든 것이 우리의 예상보다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어. 더군
다나 이제 시작이니, 한바탕 혈풍이 몰아친 뒤에도 과연 정도무림은 명맥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그의 내심은 이 순간 형언할 수 없는 불길함에 몸서리치고 있었다. 아득한 지경에
서 일시에 몰려든 먹구름은 앞뒤를 분간치 못하게 만들었고 스스로 우월함에 사로
잡혀 마도를 짓밟아 오던 자신들의 행태를 비웃기라고 하는 듯 지난 세월에 대한
회한이 밀려들었다.
★
오련회 제선분타의 괴멸과 무림맹 서부세력의 후퇴에 대한 소식은 전 무림에 급속
히 퍼져갔으며 한번이라도 검을 잡아본 자라면 가슴을 두드리는 긴장감에 안, 팎을
단속하기에 이르렀다. 죽음을 직감하는 인간은 항시 주위를 둘러보기 마련이다.
이런 점에서 이 시대의 무림인들은 불행한 자들이었다. 식솔을 둔 자들은 그들에게
화가 미칠까봐 조바심을 내었고 떠돌이 낭인이라 할지라도 평소와는 다른 기색들
을 보였다. 한 가지 공통된 분위기라면 모두의 마음속에 중원을 지켜내어야 한다는
절박감이 빠르게 확산되어 가며 사소한 이익을 위해서도 서로 반목하던 문파들 간
에도 하나라는 동질감이 모두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한가지 다행이라면 사황성의
진격은 성도에서 더 이상 이어지지 않고 소강상태를 맞이한 것 정도였다.
★
광마존은 하루 종일 울적해 있었다. 지존의 명에 의해 존마전에 갔다 온 이후로 마
음은 더 무거워져만 갔다. 자신의 처소로 향하던 발길을 멈춘 광마존은 걸음을 돌
려 군사의 처소로 다가갔다.
“아니 웬 일이세요?”
군사 제갈초홍은 급작스런 광마존의 방문에 의아함을 드러낸다. 자리를 권하고 차
를 따라준 이후에도 그녀의 맑은 두 눈은 분명한 목적을 지니고 왔을 광마존의 내
심이 궁금하여 뚫어지게 쳐다본다. 광마존은 찻잔을 들어 몇 모금을 들이킨 이후에
도 여전히 망설이며 입을 떼기에 주저하고 있었다.
“말씀하세요. 제게 하문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 지?”
광마존은 용기를 내어 제갈초홍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군사.”
“네.”
“다른 게 아니라, 한가지 알고 싶은 것이 있어서 이렇게 왔소이다.”
그녀는 광마존의 다음 말을 침묵으로 재촉했다.
“군사는 모든 정보를 총괄하지 않소?”
“그렇죠.”
“혹시……”
다시 찻잔을 잡아가는 광마존의 손길은 그가 하려는 말이 얼마나 뱉어내기 힘든 것
인지를 여실히 나타내고,
“남도맹을 빠져나온…… 천향옥봉의 소식을 알고 있소?”
전혀 의외의 질문이 광마존의 입을 빠져나오자 일시지간 제갈초홍은 분명치 않은
심경을 얼굴에 새겨갔다. 천향옥봉의 성격은 항시 상대의 말이나 태도에서 그 사람
의 진의를 캐내는 데에 익숙해져 있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로 이런 그녀의 습성이 발
동된 것이다.
‘이 분에게 이런 면이 있었던가? 극히 잔인하고 차가운 사람이라 여겼는데……’
그녀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는 호기심보다 같은 여자로서 느끼는 흐뭇함에 절로
가슴이 따뜻해져 왔다.
‘설마, 사랑…… 이라는 건가? 이 무시무시한 괴물 같은 사내가 천향옥봉을?’
“알고 있어요.”
그녀는 순순히 인정했다. 이후의 일이지만 대공이 천향옥봉의 위기를 일부러 외면
했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는 그녀였지만 왠지 눈앞에서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사내
의 눈을 보고 있자니 도저히 감출 수가 없었다. 원래가 혈마천의 소속이었던 그녀
인지라 천향옥봉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마도련의 군사라는
위치에서 얻어지는 정보 중에는 그녀에 대한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내게 가르쳐 줄 수 있소?”
제갈초홍은 고민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녀의 입은 순순히 열리고야 만다. 이
후 대공의 질책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마저 감수하게끔 하는 강한 설득이 그녀를
끌어 당겼다.
“그녀는 지금…… 천황부의 중원 세력에 납치되어 있어요. 좀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대상벌의 본거지에 있는 셈이죠. 그렇지만 그녀의 현 상태가 어떤지는 전혀 알 수
가 없습니다.”
“납치…… 라고 했소?”
“명확하지는 않지만 그들과 함께 사라진 것은 분명해요.”
“으음…… 그럼, 대상벌의 본거지는 어디요?”
“낙양입니다. 사실상 대상벌이란 세력 역시도 천황부의……”
그녀의 말은 이어지고 있었지만 광마존의 귀는 그것을 포착하기를 허용하지 않았다
. 홀로 생각에 잠겨 있었으며 이내 몸을 일으키고야 만다.
“고맙소. 이만 가 봐야겠오이다.”
“네에? 네. 그러세요. 살펴가세요.”
제갈초홍은 돌아서 나가는 광마존의 등에서 자신만의 착각인지 모르지만 사내의 진
한 고독과 슬픔을 읽고 있었다. 그가 완전히 실내에서 모습을 감춘 뒤에도 형용할
수 없는 잔잔한 감동에 그녀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상대가 다름 아닌 광마존이
었기에 그것은 더욱 더했다.
- 황제(皇帝)의 검(劍) -
84.누가 포로인가?
파천과 천마는 머리를 맞대고 무엇인가를 숙의하고 있는 중이었다. 둘 간에 오가는
대화의 내용이 무엇인지 천마는 그답지 않게 심각한 표정으로 일관했다.
“흐음. 그것도 좋은 생각이긴 한 것 같은데…… 글쎄다. 만약 네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을 경우엔 시간만 낭비하는 꼴이 아니냐?”
천마의 말에 파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지.”
“그렇지만 한 번쯤 시도해 볼만은 하겠다. 좋다. 본교의 아이들이 들어오면 시작해
보자.”
“그래. 마음껏 한 번 휘저어 봐라. 이것은 순전히 네가 있기에 가능한 작전이다.”
파천은 천마를 한껏 추켜세웠고 그 말에 천마는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빳빳이 세
운다.
“그야 당연하지. 까짓 것 한번에 쓸어버려도 되지만 네 뜻이 그렇다면 따라주지.
그럼 무림맹과 마도련의 연합도 어쩌면 조만간 이루어질지도 모르겠구나.”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야지. 사황성이 이미 행동을 개시했고 천황부와 혈마천 또한
무림에 들어와 있다. 이제 남은 건 사사혈교와 북해빙궁 그리고 신수궁이군. 그들
마저 들어온다면 무림의 산하(山河)는 하루도 피가 마를 날이 없겠군.”
“어찌 보면 너무 오랜 기간 무림은 피를 흘리지 않았다. 이제 새로운 피로 수혈할
때가 온 게야. 강하지 못한 자들은 도태되고 경쟁력이 없는 세력 또한 살아 남을
수가 없는 거지. 시대가 새로운 물결을 요구하고 있는 거다.”
“그만 무림맹으로 가야겠다. 그쪽 일도 시간을 다투는 상황이니 더 이상 지체하면
시기를 놓치게 된다. 군사와 광마존 등을 만나보고 곧바로 떠나야겠다.”
“누굴 데리고 갈 셈이냐?”
파천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광마존을 제외하고 무영존과 율극을 데려가야지. 너는 개봉까지 함께 갔다가 그곳
에서부터 따로 행동하던가 하고 일단은 우리와 함께 가자.”
“그러지.”
★
황하(黃河)의 지류인 하남성 서부 낙하(洛河) 유역에 위치하는 낙양은 중국의 7대
고도(古都)로 꼽히며, 낙하 연안의 소분지로, 예로부터 화북평원(華北平原)과 위수
(渭水)분지를 잇는 교통의 요지로 번성했다. 주(周)나라 성왕(成王)이 동방경영의
기지로 축성한 데서 비롯되며, 당시에는 낙읍(洛邑)이라고 불렸다. 그 뒤 주왕조가
낙읍으로 천도한 뒤 동주(東周)의 국도로 번영하였고, 후에 후한(後漢), 삼국(三
國)의 위(魏)·서진(西晉)도 이곳에 도읍하였는데, 후한 때부터 도성의 규모가 남
북 9화리(華里:1화리=0.5km), 동서 6화리였기 때문에 구륙성(九六城)이라고도 불렸
다.
이후 전한(前漢) 때에 낙양으로 칭해지다가, 후한이 국도로 정하면서 현재 명칭인
낙양으로 고쳐졌다. 후에 북위(北魏)가 화북을 평정하자, 효문제(孝文帝)가 산서(
山西)의 대동(大同)에서 이곳으로 천도하여, 구륙성을 중심으로 시역(市域)을 동서
20화리, 남북 15화리로 확장하였다. 수(隋)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자, 병란으로 황
폐한 북위의 낙양성 서쪽 40리(32화리) 지점에 거의 같은 규모(주위 69화리)의 새
로운 성을 건설하고, 장안의 부도(副都)로 삼아 동도(東都)라고 불렀는데, 현재 낙
양의 전신이다. 낙양은 경제도시로 대운하를 따라 수송되는 강남의 물자 집산지로
번영하였다. 그러나 안사(安史)의 난(亂)이 일어난 뒤부터 쇠퇴일로를 걸어 쭉 지
방도시로 일관하다가 최근에 와서 대상벌이 본거지를 잡으므로 해서 중원 상계의
폭풍의 핵이 되어가고 있었다.
대상벌은 중원거상들의 연합체였다. 그들은 원래가 하나로 뭉치지 못하는 상인들의
특성상 서로가 경쟁의 관계에 있었지만 무림맹의 상권침투에 대항할 목적으로 연
합을 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최근에는 낙양으로 본거지를 옮김으로 개봉에 위치하
는 무림맹과 치열한 대결구도를 보이고 있었다. 예로부터 밥그릇 싸움만큼 처절하
고 원색적인 것은 없었다. 처음에는 드러나지 않는 가운데 상도를 지켜가며 정상적
인 경쟁을 벌이는가 했더니 작금에 와서는 드러내놓고 무력시위도 불사했다. 물론
그것은 은밀한 가운데 이루어지는 일인지라 일반인들이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호오, 이것 대단한 규모군. 이리도 호화로운 곳에 틀어박혀 온갖 영화를 다 누리
고 살았나 보군.”
스스로를 혈수천자라 칭한 흑의 사내가 뱉어낸 말이었다. 그는 대상벌의 내원으로
들어서고 있는 중이었으며 그 앞서 인도해 가는 이는 예의 흑의경갑을 걸치고 있는
중년사내였다. 등에 독수리가 그려져 있는 것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수하들은
외원에 머물게 하고 내원에 들어서며 걸어 들어오는데 그 규모가 눈길이 미치지
못할 정도로 넓었고 복잡하기까지 했다. 보이는 전각들은 하나같이 크고 웅장해 보
는 이를 주눅들게 할 정도였다. 앞서가던 중년사내는 뒤를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
갈 길을 재촉해갔다. 혈수천자는 주변을 둘러보며 그 뒤를 따랐다. 가장 안쪽이라
생각되는 전각에 맞닥뜨린 중년사내는 뒤를 돌아보며 혈수천자에게 공손히 말했다.
“이곳에 천무태공께서 계십니다. 들어가시면 시비들이 안내를 할 것입니다.”
혈수천자는 고개를 오만하게 끄덕이는가 했더니 주저함 없이 안으로 들어선다. 그
가 사라지고 난 뒤 홀로 남은 중년사내는 나직한 한숨을 토했다.
“이공의 오만한 성격은 여전하구나. 대공께서 이공을 아끼시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
았다면…… 오래 전에 생명을 잃었을 것이다.”
그는 할 일을 다 하였다는 듯이 가벼운 걸음으로 모처로 사라져갔다.
“태공, 이공께서 당도하셨습니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시비의 소리 뒤로 또 하나의 소리가 도발적으로 울려 나왔다.
“비키거라.”
쾅
문을 힘차게 밀어젖힌 사내는 안에 누가 있건 상관하지 않고 거침없이 들어선다.
혈수천자는 안으로 들어서서는 당연하다는 듯이 탁자 앞에 놓인 의자에 몸을 싣고
거만한 자세로 두 발을 탁자위로 걸쳐놓았다. 이어 등을 돌리고 있는 사내를 향해
말했다.
“난초를 돌보는 버릇은 여전하군. 사형, 나를 부른 이유가 뭐지?”
사형에게 반말을 하는 경우란 흔치않다. 오래 전부터의 습관인 듯 그의 입에서는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니 둘의 관계가 어떠했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
다. 혈수천자의 말에 뒤를 돌아본 사내는 다름 아닌 초량이었다. 혈마천의 대총사
에게서 천향옥봉을 빼내어 갔던 신비인 초량이 혈수천자의 사형이었던 것이다. 그
는 천천히 발을 떼어 혈수천자에게로 다가 왔다. 여전히 그때와 마찬가지로 그의
입 주위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고 꿈결처럼 머물렀다.
“먼길에 고생했다. 내가 너를 부른 것은 사부님의 명을 전하기 위함이다.”
“사부님의 명이라고? 내가 떠나올 때만 해도 아무말씀도 없으셨건만 대체 무슨 명
이란 거지?”
초량은 탁자에 올려진 혈수천자의 발을 슬쩍 손으로 밀쳤다.
“혈마천과 우리가 동맹했다는 전갈이다.”
“미쳤구먼. 혈마천과의 동맹이라니…… 중원을 혼자 먹어치워도 양에 차지 않는
판에 둘이서 나눠 먹자는 것인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결정을 내린 거지?”
초량은 탁자에 놓여 있는 차주전자를 들어 찻잔에 따랐다. 그리고 하나는 혈수천자
의 앞으로 또 하나는 자신의 앞에 놓는다. 그의 섬세한 손짓은 여자의 것을 방불케
했다.
“우리는 그런 것을 알 필요가 없다. 단지 내려진 명에 충실하면 그 뿐이다. 너에게
사부님의 명을 전하마.”
혈수천자의 눈 꼬리가 살짝 위로 치켜지며 미세한 떨림을 보였다.
“너는 이후로 내 명령에 따라 중원 상권을 장악하는 일에 일조를 해야 한다. 만약
에 명을 어길 시에는 즉시로 부로 소환된다.”
혈수천자는 초량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몸을 일으키는가 했더니 그를 향해 불타
는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 내가 너의 명을 들어야 한다고? 나는 본부의 모든
제자들을 감찰할 수 있는 순찰 총영주야. 그런 내가 너의 명을 들어야 한단 말이
냐? 믿을 수 없다. 사부님이 그런 명을 내렸을 리가 없다.”
초량은 느긋한 자세를 잃지 않고 한 모금의 차를 들이키고는 한 점의 흐트러짐도
없이 찻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물 흐르듯 자연스런 태도였다. 그의 시선은 일
어서서 으르렁대고 있는 혈수천자에게로 향했다.
“한치의 틀림도 없는 사실이다. 사부님의 인장이 찍힌 명령서를 보여 주어야 믿겠
느냐?”
혈수천자는 알고 있었다. 사형이 저렇게 말할 때는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사형은 거짓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지랄……”
혈수천자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털썩 자리에 앉고 만다. 초량의 잔잔한 음성은 계
속 그의 신경을 괴롭혔다.
“이후 무림맹과의 싸움은 은밀하게 진행될 것이다. 먼저 우리가 노려야 할 것은 우
선적으로 중원의 상권 장악이다. 이후에야 무림패권에 뛰어든다. 항시 이것을 잊지
말아라. 우리의 최종목표는 무림에만 있지 않다는 것을…… 그래서 너의 힘이
더욱 필요하다. 이후 너는 이곳에 머물며 무림맹의 상권을 와해시키는 일에 주력해
야 한다. 아이들을 붙여 줄 테니 무림맹 하부조직을 쳐봐라. 현재 무림맹은 지부
중심으로 상권에 개입하고 있으니 문제가 있는 지역이나 경쟁이 치열한 곳에 우선
적으로 투입될 것이다. 어떤 불만도 의문도 용납하지 않는다. 지금까지는 사형으로
너를 대했지만 이후에는 상관으로서 너를 대할 것이다. 그러니 너도 착오가 없었
으면 한다. 그만 나가봐라.”
초량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언제 그랬느냐 싶게 태연한 신색으로 다시 난초를 향
해 다가섰다. 혈수천자는 그런 그를 향해 증오가 담긴 시선으로 전신을 태워 버릴
듯이 노려보았다. 그는 어금니를 물며 자리에서 일어섰고 아무소리도 하지 않고 몸
을 돌려 세웠다.
“태공. 자운소저를 모셔 왔습니다.”
밖에서 들려오는 시비의 목소리는 어색한 침묵을 갈라놓았다. 초량은 공식적으로는
천무태공이라 불렸고 그와 친분이 있는 몇몇은 대공이라 불렀다. 문이 열리며 한
명의 아리따운 여인이 실내로 들어선다. 수심이 가득한 얼굴에 조금은 초췌한 듯도
보이지만 여전히 자태가 고운 천향옥봉의 모습이 거기에 있었다. 그녀가 들어서자
초량의 얼굴이 저절로 환하게 밝아지며 부드러운 미소가 묻어났다.
“어서 오시오. 같이 식사라도 할까 해서 오시라 했습니다.”
초량의 음성에는 상대에 대한 숨길 수 없는 호감이 드러나고 있었다. 순간 혈수천
자의 얼굴은 묘하게 꿈틀대었다. 그는 안으로 들어서는 천향옥봉 쪽으로 다가가더
니 그녀의 앞을 막아서고 전신을 샅샅이 살폈다. 그의 입은 비틀어지며 묘한 여운
을 남겼다.
“이 년은 또 뭐야? 훗, 이제 보니 사형의 취미가 그새 한가지가 더 늘었나 보군.”
혈수천자의 냉랭한 비웃음 섞인 말에 초량은 당황하여 급히 그에게로 다가서고 자
운의 얼굴 또한 상대의 지나친 언사에 곱게 찡그려졌다.
“너, 이게 무슨 짓이냐?”
초량의 손이 혈수천자의 어깨를 움켰지만 그는 손길을 뿌리치며 할말을 마저 하고
있었다.
“사매의 마음이 사형에게 가 있는 것을 알면서 중원에서 계집이나 끼고 있단 말이
지? 이 짓을 하느라 소식 한 장 못 전한건가? 빙화(氷花)가 이것을 알면 어떤 표정
일지가 궁금하군. 그년 미색하나는 일품이구나.”
휙
천향옥봉이 손을 들어 눈앞의 무례한 사내의 뺨을 쳐갔다. 그러나 여지없이 그 손
은 우악스런 사내의 손에 사로잡히고 그는 그 상태로 싯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비웃
음을 흘렸다.
“네 년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기막힌 선택을 했다. 천무태공을 품안에 품는다면 세
상 부러울 것이 없겠지. 하하하하”
“이 무례한 놈. 당장 그 손을 놓지 못하겠느냐?”
천향옥봉의 손목을 낚아챈 혈수천자의 손목을, 다시금 초량이 움켜쥐었다. 초량이
힘을 주자 혈수천자의 손이 슬며시 풀려가고 그제야 천향옥봉은 손을 빼낼 수 있었
다. 그녀는 아픔 때문인지 모욕 때문인지 아미를 찡그렸다. 혈수천자는 여전히 손
목을 사형에게 붙잡힌 채 뒤로 돌아서며 초량을 마주 보았다.
“사형. 다른 것은 다 용서하지만…… 한 가지만은 용서할 수 없어. 빙화를 울린
다면 내가 널 죽일 거야. 이것은 결코 농담이 아니니 명심해 두는 것이 좋을 거다.
흐흐흐”
초량은 사제의 손목을 풀어 주었다. 그의 두 눈에는 의미조차 분명치 않은 아픔이
잠깐 머물다, 그 순간보다 빠르게 사라졌다.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 시
선에는 복잡한 그들의 심경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고 그것은 당사자들 외에는 파악
하지 못할 색깔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혈수천자는 문을 박차며 밖으
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살핀 초량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자운을 바라봤다. 자운
은 그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탁자로 다가섰다. 그녀가 자리에 앉고 나자 그 또한
그녀의 앞에 마주 앉는다. 채 융화되지 못한 침묵이 둘 사이를 무겁게 짓누르고
그것은 이내 묘한 심경으로 자극을 준다. 견디지 못한 천향옥봉이 먼저 입을 떼었
다.
“공자의 배려에 소녀는 감사할 뿐입니다.”
“저야 좋아서 하는 짓이니 너무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초량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반응을 살펴갔다. 담담한 눈빛을 떨구고는 비어
있는 찻잔에 공연히 머물고 있었다. 초량은 어색한 분위기를 바꿔 보려 다시금 입
을 열었다.
“이것도 모두 비급에 대한 대가이니 너무 부담 갖지 마십시오.”
“그런가요? 공자께 한가지 청이 있습니다.”
의외로 그녀가 자신을 직시해오자 초량은 기쁨을 담고 마주 보았다.
“무엇이든지 말씀하십시오. 불편한 것이 있다면 바로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이제 절 그만 보내 주십시오.”
그의 얼굴은 확연하게 빛을 잃고 입술을 열어제치고 흘러나온 목소리는 묵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왜…… 이곳이 불편하십니까?”
“아뇨. 지나칠 정도로 편합니다. 저는 이곳에 있기가 부담스럽고…… 그것보다
더 큰 이유는 저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으음…… 소저는 이곳을 나가는 즉시 혈마천의 촉수에 걸리게 될 겁니다. 신변
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도 가시겠습니까?”
그녀는 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그리고 당찬 일성을 토해낸다.
“가야 하는 길이라면 가야지요. 이미 한번 죽음을 각오했던 몸. 더 이상 미련 따위
는 없습니다. 죽어서라도 이 두 눈에 담아두고 싶은 사람이 있어…… 그래서 그
렇습니다. 염원이 지나쳐 마음이 타 들어가니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것 같지가 않
습니다. 오히려 지나친 환대가 불편하기 그지없습니다.”
초량은 실망하는 기색이었다. 스스로도 이런 심경의 상태를 이해할 수 없었다. 지
금껏 그가 추구하는 가치란 오로지 무공에 대한 성취감 이외에는 없었다. 하나밖에
없는 사매가 연정의 눈길을 보내도 그는 담담하게 외면할 수 있었다. 수많은 미모
의 여성들을 대했지만 그의 마음이 흔들린 적은 맹세코 단 한번도 없었다. 마음이
란 것이 차가운 이성으로도 묶어 둘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괴로움은 더 지극했다.
손만 뻗으면 닿으리라 여겼고 언젠가는 품속에 안겨오리라 생각했는데 그것은 스
스로의 착각에 지나지 않았다. 운명이라 여겼기에 그의 기다림은 지루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었다. 언제가 될지 모르나 막연한 순간은 반드시 오리라 기대했
건만 이 모든 것이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한바탕 꿈에 불과하단 말인가? 기대는
아픔으로 허물어지고 심장은 요동치는 혈맥의 압력도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그
저 바라만 보아도 마음이 푸근했기에 그는 난초를 기르듯 그녀의 자태를 곁에 두고
싶었다. 이 순간에도 그는 그녀의 시선이 전하는 언어를 무시하고 싶었다.
“저는…… 결코 보내드릴 수 없습니다.”
초량은 열망의 시선을 외면하며 겨우 이 말을 꺼내놓았다. 보지 않아도 그녀의 실
망하는 모습이 뚜렷하게 눈동자에 각인될 듯 했다.
“소저의 안전이 보장된다면…… 그때는 미련 없이 보내 드리죠. 그렇지만 지금은
…… 안 됩니다.”
천향옥봉의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꽃잎을 떨군 가지가 힘없이 내려앉듯 그녀의 고
개는 한없는 애처로움을 지녔다. 초량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스스로
죄를 지은 것 같아 마음이 아프고 쓰렸다. 그럼에도 그는 마음을 모질게 먹었다.
‘아직은 그대의 마음에 나라는 존재가 아무런 비중도 차지하지 못하겠지만 머지 않
은 장래에 그대는 알게 될 것이오. 내 사랑이 결코 그대의 그리움에 못지 않음을..
…. 그래도 떠나겠다면 붙잡지 않으리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나는 그대를 보내줄
수가 없소. 이대로 그대가 떠나버린다면 난 견디지 못할 것 같구려. 미안하오. 자
운.’
서로의 감정에만 몰입되어 있는 둘을 밖에서 들려온 소리가 끌어내었다.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초량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자운을 이끌었다.
“식사를 하러 갑시다. 때로는 맛있는 음식이 모든 것을 잊게 해 주기도 한다오.”
그는 자신의 말이 얼마나 상대에게 공허하게 들리는지를 알고 있었다. 초량과 자운
은 아직 풀어지지 않은 매듭의 자락을 끌고 실내를 나섰다.
- 황제(皇帝)의 검(劍) -
85. 돌아온 파천.
개봉에 온 파천 일행은 곧 바로 개방의 총단으로 찾아갔다. 그는 혈마천의 제갈초
홍에게서 건네 받은 무상지독을 의노에게 주며 성분을 조사하여 해약을 만들 것을
명했고 곧 이어 환노와 개왕과 마주 앉았다. 실내에는 파천과 천마, 환노, 개왕만
이 보였다. 파천은 그 간의 사정을 간략히 설명하며 이후의 일을 그들과 함께 의논
했다. 그들은 그에게 있어 수하라는 의미보다는 잃어버린 과거와의 유일한 연결점
이자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특별한 존재들이었다.
“천마교의 마황검위대 1600명이 중원에 들어와 있습니다. 지존의 특별한 명이 있기
전이라 낙양근교의 장원에 거처를 주었습니다.”
파천과 천마는 서로 의미심장한 시선을 나누었다.
“단장화가 그들을 무사히 중원까지 끌어내었군. 이동하면서 별다른 충돌은 없었겠
지?”
개왕은 파천을 쳐다보며,
“그렇습니다. 그들은 십 여명 씩 소수단위로 움직여 왔습니다. 주로 야산이나 인적
이 뜸한 곳을 택해 이동해 왔기에 흔적을 남길만한 요소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본
방의 낙양분타주의 보고에 의하면 그들이 중원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강한 마기
를 풍긴다는데, 이 점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립니다. 전면전이 아닌 시점에 그들을
불러들이신 데는 지존의 다른 복안이 있으시겠지만 아무래도 그 활용에 있어서 난
감한 점이 있을 것 같습니다.”
개왕의 지적은 정확한 것이었다. 파천도 이를 알기에 고개를 끄덕여 수긍함을 나타
내었다.
“풍노.”
“네. 지존.”
“중원에 살수조직이나 용병조직은 어떤 곳이 있소? 그리고 표국에 대해서도 알고
싶은데.”
환노와 개왕 풍천호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풍천호는 파천을 마주보며 그가 아는 한
도 내에서 비교적 자세하게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살수조직이라면…… 마도에는 살막이 있지만 그들은 마도련에 합병되며 살수조
직 특유의 특성을 잃어버린 것과 진배없습니다. 이 외에 몇 개의 군소조직들이 있
으나 대부분이 그 전력이 그다지 뛰어나지 못합니다. 결국 이렇다할 살수조직이란
무림에 거의 전무한 실정입니다. 오로지 야림이 있기는 합니다만……”
“야림?”
“그렇습니다. 그들은 무림에 속해있지는 않고 독자적인 길을 걷고 있는 특이한 집
단입니다. 굳이 따지자면 낭인들의 세계라고나 할까요? 그들은 무림의 일에 관여하
지 않고 무림 또한 그들을 동류로 여기지 않습니다. 이런 이유로 서로 왕래가 없는
실정입니다.”
파천은 개왕의 말에 강한 호기심을 드러내었다.
“그들의 전력은 어느 정도요?”
“글쎄요…… 자세히는 알 수가 없습니다. 대부분 낭인무사들이나 살수, 용병, 무
림의 공적으로 도피중인 자들이 대부분인지라 그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는 알지 못
합니다. 십여 년 전인가 북검회와 충돌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700에 달하는 북검회
고수들이 하룻밤 새에 전멸을 당했었습니다. 이후 야림주가 사과의 표시로 황금
세 수레를 보내오고 일단락 되었지만 따지고 보면 북검회가 물러섰다고 보는 것이
정확합니다. 그들과의 분쟁은 무림의 그 어떤 문파도 기피할 정도이고 보면 그 전
력을 대충이나마 짐작하실 수 있을 겁니다.”
“호, 그 정도란 말이지?”
“그런데 살수조직은 왜 물어보시는지?”
“그럴 일이 있소. 그럼 표국의 상황은 어떻소?”
“표국이라면 무림맹에서 4할을 관장하고 있습니다. 예전부터 북검회가 주력하던 것
이 표물운송이었습니다. 그들은 기존의 표국들을 흡수하여 방대한 규모를 자랑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들과 경쟁관계에 있는 곳이라고 해봐야 대상벌 산하의 대하표
국 정도입니다. 이외에도 일개성을 벗어나지 않는 작은 표국들이 산재해 있지만 그
규모는 매우 작다 할 수 있죠.”
“그래?”
파천은 두 눈을 지그시 내리 감으며 홀로 깊은 생각에 잠겨 들었다. 일 다경 쯤 지
났을까 그의 눈이 열리며 빛을 발했다. 심중의 생각을 정리한 뒤에 나타나는 파천
의 버릇 중에 하나였다.
“좋소.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으시오.”
파천의 입에서 한마디씩의 말이 토해질 때마다 천마를 비롯한 삼인의 얼굴은 급변
을 하며 시시각각 달라졌다.
★
옥면신룡이 돌아왔다는 소식은 가뭄 뒤에 찾아온 단비와도 같이, 가라앉아 있던 무
림맹을 촉촉이 적시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그는 무림맹에 홀로 들어섰으며 특별히
부상을 당하거나 이상이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곧바로 신검각에 위치하는 맹주전
에 들어가고 그가 돌아 왔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사람들은 신검각 8층의 의사청
인 태의전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지존을 뵙습니다.”
무림맹주 잠룡대제 독고정이 파천에게 머리를 숙이며 절을 했다. 파천은 그를 일으
켜 세우며 두 손을 마주잡았다.
“그 동안 노고가 크셨소. 자, 저기 앉읍시다.”
파천이 그의 손을 이끌어 자리로 인도했다. 둘은 마주앉아서 서로를 쳐다보았다.
잠룡대제의 얼굴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동안 몰라보게 수척해져 있었다. 그 동안
의 그의 심정이 어떠했는지를 알게 해 주었다. 잠룡대제는 자신의 손자인 독고무가
지존과 함께 동행하지 않았다는 사실에도 그것을 묻지 않았다. 그러나 파천은 알
고 있었다. 그가 무엇보다 손자의 안위를 궁금해하고 있지만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스스로를 자제하고 있다는 것을……
“맹주. 그 동안 수고했소이다. 그대가 있었기에 내가 마음놓고 자리를 비울 수가
있었소.”
“저야 하는 일이 있어야지요. 그저 지존의 명만을 따를 뿐입니다.”
파천은 잠룡대제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분명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사실은 그대에게 좋지 못한 소식을 전해야 겠소이다.”
잠룡대제는 별반 놀라지 않았다. 그저 담담한 얼굴로 일관하며 파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대의 손자 독고무가…… 유명을 달리했소.”
파천은 힘겹게 말을 끝내놓고는 그의 표정을 살폈다. 잠시 얼굴에 경련을 일으키는
가 싶더니 평상시의 모습으로 빠르게 돌아갔다.
“그……렇습니까? 이미 벌써 죽었어야 할 생명이니 안타까울 것도 없지요. 모두
제 놈이 타고난 운명인 것을……”
파천은 그 간의 사정을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했다. 그가 어떻게 죽었으며 지금은
어떤 상태인지를…… 그의 설명이 끝나고 나서도 잠룡대제는 침착하게 파천을 쳐
다보았다.
“그럼 난 이만 나가보겠소. 당분간 설란에게는 비밀로 하겠소. 맹주는 이곳에 있으
시오. 맹내의 일은 당분간 내가 알아서 하리다.”
파천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그도 따라 일어선다. 배웅하며 파천을 향해 환하게 웃어
주기까지 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파천은 되려 마음이 무거워져 왔다. 그를
마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너무나 힘겹고 어려웠다. 파천이 실내에서 사라지고 나자
잠룡대제는 몸을 돌려세웠다. 좀 전까지 앉아 있었던 의자를 향해 걸어가는데 발
을 떼어 가는 두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는가 했더니 힘없이 꺾어지고 만다. 그는 바
닥에 털 푸덕 앉아서 멍하니 전면을 응시했다. 그의 노안에 뿌연 습막이 차 올라왔
다. 참았던 눈물이 이제야 터져 나온 것이다.
“네가…… 네가 그렇게 갔더란 말이냐? 아들도 보내고 하나밖에 없는 손자녀석마
저 비명에 갔으니…… 이제 내게 무슨 희망이 있단 말인가?”
금방이라도 환하게 웃으며 품에 안겨올 것 만 같은 환영은 손자 독고무의 어린 시
절 모습이었다. 유난히 자신을 졸졸 따라다니기를 좋아했던 손자를 그 또한 지극히
아끼고 사랑을 주었었다. 지난 세월에 묻어 있는 추억이라고는 손자가 장성하는
모습을 대견해 하며 바라본 것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건만, 그런 그가 늙은
할애비를 두고 먼저 간 것이다.
“허허허허…… 차라리 내가 평범한 촌부였다면 너에게 이런 비극은 없었을 것을.
….. 모든 것이 내 불찰이다. 날 원망하거라. 부디 모든 은원을 저 세상까지 지고
가지 말기를.”
★
간만에 무림맹 고수들의 얼굴에 활기가 넘쳐 났다. 옥면신룡이란 이름이 가져다 주
는 변화였다. 그들에게 있어 이제 대령사는 무림맹의 2인자라는 위치 이상의 의미
를 지니게 되었다. 그가 있는 한 그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마지막 희망을 버리지 않
을 것이다.
“그 동안 수고들 하셨소. 그대들의 얼굴을 보니 이제야 안심이 되는구려. 그 간의
무림사정에 대해서는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으니 생략하기로 하고…… 신안전주
!”
“네, 대령사.”
신안전주이자 무림맹의 군사 역할을 하고 있는 삼안천뇌 소천악이 파천의 부름에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는 대령사의 질문이 무엇일지 짐작하고 있었다.
“사천성의 현 상황을 간단하게 설명해 보라.”
“존명.”
역시나 그의 물음은 사황성의 중원 침입에 대한 것이었다.
“사황성은 현재 사천성 성도의 오련회 총단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꼼짝 하지 않고 있으며 총단을 버리고 퇴각한 본맹의 세력은 중경에서 배수의 진을
치고 있는 실정입니다. 사황성의 전력은 5000기마대와 500제혼혈강시인 것으로 알
려져 있습니다. 본맹의 부맹주이신 오련회주께서 보내신 전갈에 의하면 제혼혈강시
를 막아낼 방도가 서지 않아 필요 없는 희생을 줄이고자 퇴각한다는 내용이었습니
다.”
“으음…… 그들이 성도에서 더 이상 전진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나?”
소천악은 망설임 없이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제가 판단하기에 그들의 현 전력은 사황성 전체전력의 전위부대 정도일 것입니다.
아마도 본단으로부터의 병력 증원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처음부터 그들의
의도가 사천성에 교두보를 마련하는 것이 이번 출정의 목적이 아니었나 하는 분석
을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진격을 한다면 중경에 진치고 있는 본맹의 세력이 워낙에
월등한 수적인 우위를 보이니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감수해야 할터이고 그렇게
되면 청해와의 거리상 전멸을 각오해야 한다는 이유로 더 이상의 움직임이 없는 것
으로 사료됩니다.”
“내 생각도 전주와 동일하다. 그렇다면 그들의 이후 움직임과 우리의 대처방법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청해에서부터 병력이 증원되는 것이 그들의 움직임이 예상되는 시점일것입니다.
우리는 그 전에 제혼혈강시에 대한 대책을 수립하고 오히려 성도의 배후인 송번을
장악함으로 그들의 보급로를 끊어버리고 고립시키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최상책입니
다.”
“그럼 우회해서 송번에 진을 치고 양쪽에서 협공하잔 말인가?”
“그렇습니다. 문제는 제혼혈강시에 대한 대책인데…… 지금으로서는 뚜렷한 방법
이 없습니다. 폭발물을 사용할 수도 있지만 그들의 정확한 이동경로를 예측하지 못
할 경우엔 무용지물이고 그들 또한 여기에 대한 대책을 수립해 놓았을 것이므로 그
다지 기대할 것은 못됩니다. 그렇다고 맹에서 더 이상의 병력지원도 할 수 없기에
지금으로서는 난감한 실정입니다.”
파천의 입이 다시 열렸다.
“그들도 우리의 이런 사정을 미루어 짐작하고 있을 텐데 사황성의 본대가 우리 예
상보다 빠르게 증원된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 것 같나?”
소천악은 망설이다가 결국은 이런 말을 한다.
“그때는 피할 수 없는 일이므로 맹에서의 병력 지원이 불가피 할 것입니다. 사천을
그들에게 내 준다 하여도 그들은 여전히 진격을 멈추지 않을 테니 피할 수 없는
선택입니다.”
“그런가? 내 생각은 조금 다르네. 그들의 본대는 그리 쉽게 들어오지는 않을 거야.
그 이유는 자네 말대로 교두보를 확보하는 것이 이번 출정의 목표니 당연한 거고
또한 우리와 마찬가지로 그들도 다른 세력들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지. 본대가
증원되고 진격을 하게 되면 우리가 전력을 강화하여 대항할 것이라 여기기에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다른 세력들에게 어부지리를 주지는 않을거란 말이지. 만
약 그들이 그런 결정을 한다면 우리는 지체하지 않고 중경에 있는 세력을 퇴각시켜
야 하네. 그럴 경우 그들은 사천성에서 더 이상의 진격은 포기하고 사태를 관망하
겠지. 어떤가 내 생각이 그럴 듯 하지 않은가?”
삼안천뇌 소천악은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하는 기색이었다.
“대령사의 말씀을 듣고 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역시 자네는 북검회 군사 이상은 힘든 인물이야. 그 정도 생각도 하지 못하니 이
큰 세력을 어떻게 그대의 두뇌에만 맡겨두겠는가?’
“그래서 말인데 섬서성 서안에 있는 세력들을 한중으로 밀집시켜 놓도록 지시하게.
아무래도 지리상 언제든 그들의 도발이 있을 시에 급히 증원시키겠다는 우리 쪽의
의사를 그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곳이니 말이야. 그리고 섬서성의 서쪽 세력들은
될 수 있으면 청해에서 사천으로 이르는 지점을 압박하지 말도록 지시하고, 자칫하
면 그들이 포위된다는 불안감을 느끼고 도박을 하게끔 해서는 안 되지.”
“존명.”
“그럼, 사천성 문제는 그것으로 일단락 짓고, 제혼혈강시에 관한 대책은 이후 수립
하여 보고하도록.”
“존명.”
지금까지 그들이 그렇게 대책을 수립하느라 고심한 문제를 옥면신룡이 너무나 쉽게
정리를 해가자 좌중은 다소 놀라는 눈치들이었다.
“지금 오당중 천무당이 사천에 나가 있는가?”
“그렇습니다.”
부맹주인 소림방장 지우대사의 대답이었다. 같은 부맹주의 직위를 함께 하고 있는
남도맹주는 마도련의 침입에 생명을 잃었고 또 한명인 오련회주는 사천에 나가 있
어 그 홀로 맹을 지키고 있는 셈이었다.
“대상벌의 움직임에 대해서 말해보라.”
역시 정보를 책임지고 있는 신안전주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일어서더니 대령
사에게로 다가와서 두툼한 서류뭉치를 건넸다. 그리고는 몇 걸음 물러서서 보고를
했다.
“그것을 보시면 근래의 대상벌의 움직임에 대한 것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습니다. 낙양에 본거지를 두고 우리와 첨예하게 대립
하고 있고 최근에는 대하표국에 전력을 강화하여 표물경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리고 또한 농산물을 산지에서 무차별 매입하고 있으며 숙박업
소와 주루와 기루등을 대거 매입하고 있습니다. 특히 절강성과 하남성에서 그들과
의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뿐만 아니라 감히 우리에게 대항할 엄두도
내지 않던 지역의 중, 소 상인들마저 힘을 합치고 대항하는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
습니다. 아마도 배후가 있는 듯 합니다.”
‘후후 쌍노가 잘하고 있군.’
“그래. 자네 생각은 배후가 어디라고 생각하는가?”
“여러가지를 고려할 때 대상벌이 유력하지만 제 삼의 세력일지도 모릅니다. 이를테
면 세외삼세나 사패중의 다른 세력일지도 모릅니다. 아무래도 이것은 신중하게 대
처하지 않으면 큰 낭패를 당할 중요 사안이라 생각됩니다.”
“그건 그렇고…… 자네는 우리나 대상벌의 상권의 주축을 이루는 근간이 뭐라고
생각하는가?”
“그야 자금과 인력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그와 더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물자유통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표물운송
이겠지. 그들과의 승부는 거기서 결정될 것일세. 그들도 그것을 알기에 대하표국에
힘을 싣는 것일 거고. 이것을 달리 해석하면 표물운송에 차질을 빚으면 막대한 손
실을 입힐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지. 우리나 그네들이나 자체 물자뿐만 아니라 중
원에서 유통되는 모든 물류를 표국에 의지하고 있네. 앞으로는 대등한 조건에서 서
로의 손실을 좌우하는 것은 속도가 될 것이네. 물자를 빠른 시간에 정확하게 유통
시키는 세력만이 상권을 장악할 수 있겠지. 그래서 말인데…… 때로는 편법이 동
원되어야 할 때도 있는 게야. 천무당을 제외한 4당과 5단에서 인원을 차출하여 백
호전의 지시 하에 이 일을 담당시키게. 상세한 명령은 내리지 않아도 되겠지?”
삼안신뇌 소천악은 대령사가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고는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답을 대신했다.
“백호전은 당분간 표국 일에만 전념하도록 하고 필요한 인원을 4당과 5단에서 차출
해 가도록 하라.”
백호전주 진천벽검 주자기의 우렁찬 대답이 이어졌다.
“존명.”
“이후 다른 사안들은 각 조직별로 따로이 결제를 맡도록 하고 이만 해산하라. 한가
지 첨가할 부분은 정도사령대는 이후 다른 모든 공무에서 제외하고 별도의 명을 기
다리도록 하고 신안전과 숭의전은 다른 새외 세력들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예의 주시하라. 또한 각 지부를 순찰하여 기강을 세우는 일에 주력해야 할 것이다
. 이후 무기한 비상을 선포하고 당분간 맹의 모든 대소사는 맹주님을 대신해 내가
결정하겠다. 다른 의견이 있는가?”
부맹주인 소림사 지우방장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령사께 한가지 청이 있습니다.”
“청? 무엇이오?”
“제가 잠시 본사에 다녀와야 할 듯 합니다. 허락을 해 주시길 바랍니다.”
“왜, 소림사에 무슨 일이 있소?”
“자세히 아뢰지 못하는 것을 용서하십시오.”
따지고보면 옥면신룡 문윤은 소림사 쪽에서 보더라도 외인이 아니었다. 육조 혜능
의 진전을 이어받았으므로 그들에게는 사숙조가 되는 셈이었다. 그런 그에게조차
말하기를 꺼려하는 것은 아마도 공개된 자리에서 발설하기 곤란한 문파의 중요사안
으로 보였다. 파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하도록 하시오. 정도사령대 청운학 부령사와 10여명의 사령들을 동행케 할
테니 다녀오도록 하시오.”
“사숙조님의 배려에 감사합니다.”
그는 일부러 대령사라는 공식적인 호칭을 쓰지 않고 사숙조라고 하였다. 파천은 대
체 무슨 일인지 호기심이 일었지만 더 이상 묻지는 않았다.
“자, 모두 자신들이 맡은 일에 충실하도록 하시오. 이만 회의를 마치겠소.”
정말 오랜만이군요.
그 동안 올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내일 자정에 두 편을 더 올리겠습니다. 이후 연재는
87편에 밝히겠습니다.
그럼. 좋은 하루 되세요.
무성 올림.
- 황제(皇帝)의 검(劍) -
86. 눈물의 의미!
파천은 독고설란의 처소인 수화전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호수 주위로 은잠하고
있던 매복자들의 책임자들이 그가 다가서자 모습을 드러내며 인사를 했다. 파천은
건성으로 그들의 인사를 받으며 호수를 가로지르는 수상교위를 걸었다. 맑은 하늘
이 그대로 담겨 있는 호수는 그림 같은 전각과 어우러져 한 폭의 수채화를 보는 듯
했고 그 안에 기거하는 인물이 주는 의미가 더해져 파천에게 신선한 감흥을 불러
일으켰다. 혈마천의 음모에 걸려 어쩌면 죽었을지 모를 위험 속에서 그는 그녀를
떠 올렸었다. 파천이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낀 유일한 존재. 독고설란이
있는 곳으로 그가 가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의 생명이 혼자만의 것이 아님을 이번의 위기를 통해 절감했다하면 스스로의
착각에 불과할까?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최소한 눈앞의 여자만은 한 사람을
빼놓고 삶을 이야기하기에 그 존재의 무게는 가볍지가 않았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바깥으로 통하는 작은 창문을 열어제치고 그곳을 통해 세상을 보고 있었다. 작은
세상, 그곳의 거의 전부를 차지하고 있는 사내는 오늘도 그녀 앞에서 미소를 짓고
있건만 그녀의 마음은 이리도 무거우니…… 독고설란은 오늘도 창문을 열어놓고
파천을 생각하고 있었다. 마음의 깊이가 작아서인지 그를 향한 생각만으로도 가득
차 버려 더 이상의 공간이 없었다.
“후유…… 오늘도 천랑은 오시지 않으시려나?”
그녀가 파천을 부르는 호칭은 일정하지가 않았다. 처음에는 공자라고 부르다가 언
젠가는 또 가가라 하더니 이제는 천랑이라 했다. 그녀 입장에서 본다면 호칭이야
아무래도 좋았다. 언제나 자신은 안중에도 없고 바깥일로 분주하기만 한 파천이 야
속하기도 했지만 그 모든 것이 수많은 사람의 안위와 직결되는 일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얼마 전부터 소식마저 끊어졌다는 말을 듣고는 매일을 눈물과 한숨으로 보내
고 있는 중이었다. 아무것도 이런 그녀의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이런 그녀였지만 수화전에는 그녀가 돌보아야할 사람이 또 하나 있었다. 바로 환사
였다. 그녀는 하루 한번씩 환사의 방으로 찾아갔다. 그곳에서 넋두리 마냥 혼자서
파천의 얘기를 하다가 돌아오곤 했다. 그녀는 의노 덕분인지 이제는 모든 것이 정
상으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아무 말도 없었고 눈은 허상을 좇기라도 하는 듯이 공허
하기만 했다. 그런 그녀가 잠깐이지만 관심을 드러내는 때가 있었으니 설란이 파천
의 얘기를 할 때였다. 그것을 아는 그녀인지라 일부러 환사 앞에서 그의 얘기를 하
고는 했다.
“후우……”
“설란.”
그의 달콤한 음성이 들리는 듯 했다. 설란은 고개를 창틀에 놓여 있는 두 팔 위로
묻었다.
“설란.”
너무나 또렷이 들리는 환청에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눈물은 흘러 얼굴을 적시고
팔을 감싸며 창틀에 고여갔다.
“설란. 나요. 내가 왔소.”
‘이, 이것은…… 설마.’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뒤를 돌아다 봤다. 저 미소……
“아……”
독고설란은 그렇게도 보기를 원했던 파천을 눈앞에 두고도 움직이지 못했다. 마치
그녀가 함부로 움직이면 환영처럼 흩어질 것이 두려웠다.
“정말…… 천랑이신가요?”
“그렇소. 나요.”
파천이 두 팔을 벌리고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천랑.”
독고설란은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꿈에서도 그리던 정인의 품속으로 뛰어들었다.
파천은 그녀를 힘주어 안았다. 두 사람은 이 순간이 다시는 오지 않기라도 하는 듯
이 한참을 그렇게 부여안고 서 있었다. 말조차 두 사람 사이에는 필요하지 않았다.
서로의 시선을 다시금 확인하고 그 안에 서로의 사랑이 숨어 있음을 느끼며 둘은
입술을 포개었다. 깊고 따뜻한 체온이상의 느낌이 서로를 빠르게 인도해갔고 다시
는 떨어지고 싶지 않은 마음을 마음껏 표현해 내었다. 서로의 감정을 공유한다는
느낌보다 더 안락감을 선사하는 것은 드물다. 그것이 사랑이라는 공통분모를 지녔
을 때는……
두 사람은 찻잔을 사이에 두고 앉아 있었다. 독고설란의 눈은 언제 그랬느냐싶게
휘황한 빛을 발하고 얼굴은 화사한 꽃잎이 되었다. 그냥 바라보고만 있어도 좋은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녀에게 무한한 행복감을 선사했다.
“천랑, 그동안 제가 얼마나 상심이 컸는지 아시나요?”
파천은 조금은 무뚝뚝한 어조로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
“그랬나?”
“그런데 정말 그 동안 어디에 계셨어요? 천랑은 이제 많은 사람에게 의미 있는 존
재가 되었단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거예요. 마음졸이며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요.”
“……”
“오빠는 함께 오지 않았어요?”
“응? 으응.”
파천은 그녀의 물음에 내심 뜨끔했다. 그녀의 하나밖에 없는 오빠인 독고무가 죽었
다는 소식을 아직은 그녀는 몰라야 했다. 그 소식을 듣고 가슴아파하는 모습은 그
에게 또 다른 짐을 지울 것이 틀림없었다. 어차피 알게 될 사실이긴 하지만 늦출
수 있는 만큼 늦추고 싶었다.
“천랑께 드릴 말씀이 있어요.”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설란의 모습은 진정 아름답다 여겨졌다. 그녀의 빛나는 저
눈이 슬픔을 담는다면 그 모습을 보기가 심히 힘에 겨울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뭐지?”
“천랑을 기다린 사람은 저 하나뿐이 아니었어요. 또 한사람 간절히 기다린 사람이
있어요.”
파천은 무슨 의미인지를 채 깨닫지 못해 설란만 쳐다보았지만 그 얼굴에서 알아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환사를 만나 보세요.”
“환사?”
“네…… 지금 그녀를 예전의 모습으로 돌려놓을 사람은 이 세상에 오직 한 사람,
천랑 밖에는 없을 것 같아요.”
“내가?”
“네. 그녀는 아직 심적인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어요. 그녀의 절망의 깊이
는 천랑으로 인해 더 깊어 진 것 같아요.”
“대체 무슨 말이지?”
파천은 진정으로 그녀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지 못했다. 독고설란은 그런 그
를 바라보며 대뜸 한다는 소리가,
“그녀를 만나보면 모두 알 수 있어요. 그리고 만약…… 그녀를 예전으로 돌려놓
지 못하면 전, 천랑께 실망할지도 몰라요.”
‘이게 무슨 소리야? 뭔가 알아야 개죽을 쑤든 밥을 짓든 할 것 아닌가?’
그는 독고설란의 손에 이끌려 환사가 머물고 있다는 방 앞까지 끌려오고 말았다.
그녀는 그를 다시 한번 끌어안더니 의미 있는 시선을 주며 복도 끝으로 사라져갔다
. 그런 그녀의 모습에 파천은 고개를 갸웃했다.
‘대체 내가 무슨 재주로 환사를 예전으로 돌려놓을 수 있다는 거지? 여자들이란…
…’
그는 환사의 상태가 궁금하기도 했으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그의
예상과는 달리 침상에 누워있지 않았다. 침상 정면 벽에는 커다란 산수화 한 점이
걸려 있었고 그녀는 의자에 앉아 그것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가 들
어서는 기척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파천은 일부러 몇 번인가
헛기침을 해 보았으나 그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는 한쪽에 놓여 있는 빈 의
자를 당겨 그녀의 뒤쪽에 가서 앉았다. 그리고는 그녀가 무얼 그리 유심히 보는지
궁금하여 시선을 같이했다.
높은 산자락에 떨어지던 해가 걸려 있고 골짜기를 흐르는 물줄기가 끊어질 듯 이어
지며 화폭을 수놓았다. 희미한 운무가 자욱히 번져 있는 사이로 사람이라 여겨지는
자가 운무를 손으로 젖히며 산을 오르고 있었다. 흔하게 볼 수 있는 그림이었고
그다지 명화라 여겨질 만한 것도 없는 지극히 평범한 그림 한 점에 그녀의 신경을
온통 잡아 놓을 만한 요소는 없어 보였다. 파천은 고개를 갸웃했다.
“환사.”
파천이 나직한 음성을 발해 흩어져있는 환사의 혼을 일깨웠다. 그녀는 그의 부름에
도 대답이 없었다. 파천은 다시 한 번 힘을 주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환사.”
환사의 어깨가 움찔 떨려오는 것이 보였다. 짙은 갈색의 머릿결이 잔잔한 물결을
이루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환사”
파천은 다시 한 번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어깨를 잡았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며 어
깨에 얌전하게 놓여 있는 파천의 손을 매정하게 뿌리쳤다. 그리고는 파천쪽으로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서는가 했더니 침상 속으로 가서 드러눕는 것
이었다. 그녀는 한쪽 팔을 눈이 부신 듯 얼굴 위로 올려 가렸고 그 상태로 잠이 든
듯 미동도 없었다. 파천은 그녀의 태도에 조금 당황되었다.
‘쳇, 쟤가 왜 저래? 내가 뭘 잘못 했다고 저런 태도를 보이는 거지?’
파천은 망설였다. 이대로 방에서 물러나야 하는 건지 아니면 손상된 체면에도 불구
하고 다시 한 번 그녀에게 친근한 대화를 시도해 봐야 하는지 감이 오지 않았고 쉽
사리 결정할 수 없었다. 파천은 왠지 억울한 생각도 들었다. 왜 자신이 이런 곤경
을 당해야 하며 이런 푸대접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더군다나 자신은 환사의 입장
에서 보면 생명의 은인인 셈이지 않은가? 파천은 지극히 정상적인 생각에 몰입했다
. 독고설란의 당부가 그때 떠오르지 않았다면 어쩌면 그는 방에서 나왔을 것이고
다시는 환사를 찾지 않았을 지도 몰랐다.
‘에구, 그래. 내가 참는다. 너야 원래 처음부터 나를 무시했으니 이제 와서 새삼스
럽게 서운할 것도 없지.’
“야, 환사. 너 이따위로 행동할거야. 어서 빨랑 못 일어나. 벌건 대낮부터 말만한
처녀가 방바닥을 뒹굴어서야 어디 써먹겠냐?”
파천의 그 말은 예전의 환사를 대하던 모습 그대로였다. 단지 호응을 해야 할 환사
의 모습이 예전과 달라졌을 뿐이다.
“이게, 좋게 대해 주니깐 내 말을 아주 우습게 여기네. 야. 환사. 당장 볼기를 치
기 전에 못 일어 나냐? 너 언제까지 놀고 먹을래. 큰소리 팡팡 치던 계집이 이제
보니 이것 밖에 안 되었나?”
파천은 침상으로 다가서더니 환사의 몸을 덮고 있던 이불을 한 손에 움켜쥐고 바닥
으로 팽개쳐버렸다. 그녀는 그런 파천의 태도에도 미동도 없이 그 상태로 누워 있
었다. 얇은 침의는 그녀의 몸의 굴곡을 그대로 드러내며 환상적인 몸매를 파천에게
마음껏 뽐내고 있었다. 파천은 얼굴을 가리고 있던 환사의 팔을 거머쥐며,
“환사. 내 말이 말 같지……”
그는 더 이상의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환사의 아름다운 푸른색 눈은 촉촉이 젖어
있었고 그 큰 눈에도 다 담아둘 수 없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빤히 올려다보는
환사의 푸른 눈은 많은 것을 말하고 있었지만 파천이 그런 것을 느낄 만큼 예민하
지는 못했다.
“너…… 왜 울지?”
‘이런 빌어먹을……’
파천은 환사의 팔에서 힘을 빼었다. 환사의 눈을 보고 있자니 이유모를 슬픔에 스
스로 빠져드는 듯 했고 그런 기분이 파천은 싫었다.
“후우.”
파천은 의자를 끌어당겨 침상 앞에 앉았다. 그리고는 한참을 말도 없이 그녀의 얼
굴만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흘러 나온 말.
“너, 지금 보니 무지하게 예쁘구나. 이것 잘못하면 무림삼미라는 말이 생겨나겠는
데……”
환사는 몸을 돌려 파천의 반대쪽으로 돌아누웠다.
“참 가지가지 한다. 이유가 대체 뭐야? 세상에 그 오만하고 무례하고 세상에 두려
울 것 없던 계집이 이렇게 변해버린 이유가 뭐냐고? 그리고 울긴 왜 울어? 갑자기
없던 아버지가 돌아와서 죽기라도 했냐? 말 좀 해봐라.”
파천은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대었다. 그것은 환사에게라기 보다는 스스로에게 하는
소리였고 그녀의 불행을 막아주지 못한 자책감을 표현하는 소리이기도 했다. 파천
은 돌아누운 환사의 두 어깨를 우악스럽게 움켜쥐며 몸을 자기 쪽으로 돌렸다. 그
의 눈은 환사의 눈을 정면으로 직시하였고 그의 입에서는 나직하나 힘있는 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까짓 일 모두 잊어 버려. 뭐가 달라졌지? 너는 여전히 예전의 네 모습 그대로야
. 달라진 것은 오직 네 생각뿐이고…… 잘 들어라. 나는…… 예전의 환사가 훨
씬 좋다. 천방지축에 예의 없고 건방진 계집이었지만 오히려 그때의 네 모습이 훨
씬 좋았던 것 같단 말이다.”
파천은 침상에 걸터앉으며 환사를 힘으로 일으켜 앉혔다. 환사는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다.
“환사. 내 말 잘 들어. 너는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훨씬 많아. 계속 이런 모
습으로 살아갈 거면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낫다. 그렇지 않을 거면 툭툭 털고 일
어서. 그리고 보라는 듯이 살아가는거야. 네가 원하는 것을 쟁취하고 하고 싶은 일
을 하며 살란 말이다. 그렇게 살아도 짧은 인생을 허비하지 말고……”
채 정리도 되지 않은 말들이 파천의 입에서 거침없이 쏟아졌다. 그가 이렇게 까지
냉정을 잃은 적은 많지가 않았다.
“놔.”
처음으로 환사에게서 뱉어진 말이었다.
“놔. 놓으란 말이야. 네가 뭘 알아? 그 개자식들이 내 몸 위에 올라타고 헉헉대던
기억이 이렇게 생생한데 네까짓 사내자식이 그것을 알기나 해? 비켜. 어줍잖은 충
고는 네 부하들 놈에게나 해. 빌어먹을 사내자식들. 하나같이 이기적이고 하나같이
제멋 대로지. 너도 틀리지 않아. 알아?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
고 야비하고 비열한 짓을 하고서도 양심의 가책하나 느끼지를 않아. 그러고서도 야
망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남자의 일생이니 어쩌니 하면서 잘난 체를 하지. 흥.
빌어먹을 사내족속들! 다 똑같아. 비켜. 나가. 나가란 말이야. 흑.”
그녀는 무릎을 세우며 얼굴을 묻고 말았다.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느라 그녀의 두
어깨가 들먹거리고 있었다. 파천의 얼굴은 느닷없는 환사의 외침에 얼이 빠져 있었
다.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나라는 놈도 별다른 것이 없지. 아니, 오히려 나라는 놈
은 내가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그 보다 더한 일도 서슴없이 저지를 수 있는
놈이다. 그래. 맞아. 그런데 문제는 말야…… 너 또한 내가 가진 것 중에 포함
되니 이를 어쩌면 좋지? 네가 이러고 있는 모습은 상대도 분명치 않은 적에게 내가
패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다지 유쾌하지가 않아. 큿큿 그래. 나도 남자가 분
명하고 네가 말하는 그 범주에 속하겠지. 그렇지만 이것 한가지만은 분명해. 적어
도 나라면 내게 상처 입히고 괴롭히고 우롱했던 놈들이 좋아할 짓은 하지 않아. 차
라리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일어나서 놈들에게 복수하는 길을 택하겠어. 그리고
다시는 나를 괴롭히지 못하게 힘을 기를 거야. 세상을 모두 뒤집어엎고서라도 잘못
된 것이 있다면 바로 잡을 거다. 그것이 내가 살아가는 이유거든. 만약 그것마저
하지 못한다면 죽는 게 낫겠지. 빌어먹을…… 대체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모르겠군. 그래 나가마. 네 말대로 내 모습이 꼴 보기 싫고 역겹다면 나가주지.”
파천은 몸을 일으키더니 방문 쪽으로 다가섰다. 왠지 그의 걸음은 힘이 없어 보였
다. 그는 걸음을 멈추더니 한 마디를 잊지 않았다.
“그러나…… 최소한 나는 널…… 친구라 여겼는데, 너는 그렇지 않았나 보지?
다시 오겠다. 진정한 너를 찾기를 바라마. 어떤 어려움에도 퇴색되지 않는 네 본모
습을……”
파천의 모습이 밖으로 사라지자 그녀는 참고 있던 울음을 토해내었다. 무엇이 그리
서러운지 멈춤이 없이 이어졌고 그 바람에 수화전은 더욱 무겁게 내려앉고 말았다
.
- 황제(皇帝)의 검(劍) -
87. 금와전장의 표물!
“이게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이냐?”
군사 제갈초홍이 시비를 향해 하는 말이었다. 시비는 그녀 앞에서 몸 둘 바를 모르
겠다는 태도였다.
“광마께서 언제 이곳을 나가셨지?”
“저…… 그것이…… 저도 모릅니다.”
제갈초홍은 눈앞의 서찰을 보며 손을 떨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그 서찰을 읽어갔
다.
(군사에게
나는 그녀를 구하러 가오. 지존께는 알리지 말았으면 좋겠소이다. 내가 그녀를 구
해서 돌아온다면 모를까? 그렇지 못할 경우엔 지존께 이 서찰을 보여도 무방하오.
많이 고민하고 망설였지만 어쨌든 그녀는 나의 유일한 내자요. 그녀의 어려움을 몰
랐다면 모를까, 알고 있는 이상엔 어쩔 수가 없었소. 이대로 수치를 안고 살아갈
바엔 죽는 것이 낫겠다 여겼소. 이미 내 생명은 지존의 것이니 이런 나의 선택이
불충인줄은 아나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 자신이 아닌 내가 책임져야 할 사람을 위해
생명을 걸고자 하오. 지금 생각하니 그 동안 지존께서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길을
걷고 계셨나를 조금은 알게 된 것 같소. 책임져야 할 사람이 많다는 것은 때로 죽
음보다 더 힘든 고통을 주는 것인가 보오. 운이 좋다면 살아서 다시 만날 수 있겠
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라면 죽어서도 지존께 죄를 청하겠소. 그대를 믿고 떠나오.
지존께는 알리지 말았으면 좋겠소. 그대가 우리 사람이 되었음이 나는 자랑스럽소.
그럼. 나중에 봅시다. 지옥이든 이 땅에서든……
광마존)
제갈초홍은 얼마 전 파천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고 그 대가로 그는 파천의 실체를
어느 정도나마 알게 되었다. 이것은 어느 정도는 그녀가 파천의 사람으로 인정을
받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가 천마서생이자 옥면신룡이며 무림을 도모하는 일을
벌이고 있다는 것을, 물론 그녀가 아는 것은 이것 외에도 많았지만 그가 천마교의
지존임은 알지 못했다. 그녀는 진정으로 파천을 주군으로 섬겼고 광마존을 상관으
로 받들었다. 그녀의 내심은 지극한 혼란으로 수습이 되지 않았다. 지금의 사태가
광마존에게 일러 준 천향옥봉에 대한 정보 때문이라 생각하니 스스로를 자책하는
마음이 불 일 듯 일어났지만 지금에 와서 후회해 본들 소용이 없었다.
‘대공께 알려야 한다. 그곳에 혼자 침입해서 천향옥봉을 구해내서 살아 올 가능성
은 전무하다. 광마존님의 무공이 아무리 고강하다 해도 그곳은 역시 용담호혈! 결
코 단신으로 생명을 장담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빨리 알려야 한다. 만약 그 분에
게 무슨 일이 있게 된다면 천추의 한을 남기게 된다.’
그녀는 빠르게 실내를 벗어났다.
★
낙양의 교외에 자리한 허름하나 거대한 장원은 사람들에게 현천장(玄天場)이라 알
려진 곳이었다. 송시대의 거유(巨儒) 중 하나인 담사우라는 학자가 당대의 정권을
주물럭거리던 거물들의 음모에 희생되어 낙향하게 되고 그는 이상을 펼치지 못하는
자신의 시대를 한탄하며 스스로 칩거하여 이곳에서 인재를 길러내는 일에 전력을
경주하게 된다. 이후 현천장은 낙양 뿐만 아니라 근처의 천리이내의 인재들이 모여
드는 이름난 서원이 되었고 그 명성을 드날렸었지만 지금은 그 이름뿐이 전해지고
있는 낡은 장원에 불과했다. 한때 하남성의 거상 중에 하나인 송백유가 담사우를
흠모하고 기리고자 현청장을 인수하여 그의 거처로 삼은 적도 있었지만 가세가 기
울면서 금와전장에 담보로 잡힌 것이었다.
이곳은 현재 천마교 마황천위대 1600명이 머무는 마의 성지로 화해 있었다. 그런
이곳에 세 사람이 들어섰다. 그들이 들어서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자 그곳 장원은
겉으로 보기엔 달라진 것이 없었으나 하늘을 충천하는 마기가 일시지간 하늘을 진
동했으니 그들은 다름 아닌 천마와 무영존, 그리고 율극이었다.
천마의 시선은 줄곧 흔들림 없이 고정되어 좌중을 압박했다. 전설의 천마조사를 맞
대면하고 있는 천마교의 제자들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있었다. 율극은 여전히 천마의 뒤에서 제멋대로의 자세로 한 손가락을 코에 넣었다
빼었다를 반복했다. 12마공자 중의 대형인 무영존만이 천마의 뒤에 시립해 있었고
마황천위대의 소대장격인 12마공자의 나머지 인물들과 단장화를 비롯한 사화 역시
나 맨땅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바닥과 눈과의 거리가 한치를 벗어나면 큰일이라도
날 듯이 움직임에 변화가 없었다. 천마가 흐뭇한 미소를 지우지 않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
“모두 고개를 들라.”
그의 명이 있고나서야 간신히 고개를 들어 전면을 바라보지만 그들의 시선에는 여
전히 숨길 수 없는 두려움에 묻어나 존경심이 마음껏 발산되고 있었다. 청면(靑面)
에 적발(赤髮), 거기다가 외팔이란 외형상의 두려움뿐만 아니라 만마를 앙복케 한
다는 패도적인 기세에 그들은 침을 삼키는 것조차 조심스러워했다. 그런 그들을 향
해 천마가 입을 열어 위엄스런 모습을 보였다.
“너희들은 자랑스런 나, 천마의 후예들이다.”
자신이 자랑스럽다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후예들이 자랑스럽다는 것인지 모호한
말로 일장연설을 시작했다.
“이 하늘아래에서 너희들을 곤란하게 할 자들은 많지가 않다. 이제 너희들과 나는
비밀리에 한가지 임무를 수행케 될 것이다. 내 명령에 따라 한치의 오차도 없이 일
사불란하게 움직여 줄 것을 다시 한 번 당부하며 만약…… 명령을 무시하고 개인
행동을 하거나 실수가 보일 시에는 가차없이 그 책임을 묻겠다. 너희들은 생각 따
위를 할 필요도 없고 명령에 따라 움직이기만 하면 된다. 필요 없는 살생은 피하되
맡겨진 임무를 위해서는 이 땅의 천자라 하더라도 망설임 없이 죽일 수 있어야 한
다. 한 시도 잊지 마라. 너희들은 천상천하 유아독존인 천마교의 제자들임을.”
“존명.”
“무영존을 비롯한 16명의 소대장들은 즉시 회의실로 집결하라.”
“존명.”
★
어둠 속에서 입을 떼어 말하는 이의 음성은 나지막했지만 사충길은 결코 그렇게 생
각할 수 없었다. 그는 한마디라도 놓칠 새라 주의 깊게 들었으며 그의 얼굴엔 숨길
수 없는 비장감이 표출되고 있었다.
“너를 빼내는데 들어간 돈은 무려 금300냥이나 된다. 이 일이 우리가 의도한대로
무사히 끝난다면 남겨진 네 가족들에게 금1000냥이 돌아갈 것이다. 물론 잘 할 수
있겠지?”
사충길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호언장담을 했다.
“염려 마십시오. 지금껏 나로 인해 가족들이 당한 고통을 이 정도로나마 보은할 수
있다는 것이 저로서는 기쁘기 한량이 없습니다. 어차피 사형수로 죽음을 앞두고
있던 놈이 가족들을 위해 죽을 수 있다면 뭐든 마다하겠습니까? 염려 마십시오. 나
으리.”
“그래. 일이 끝나는 즉시 가족들에게 돈이 지급될 것이다. 너는 아무런 걱정하지
말고 일을 잘 마무리짓도록 해라.”
“알겠습니다요.”
★
대하표국(大河驃局)은 무림맹이 상권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기 전만 해도 명실공히
중원최대의 표국이었다. 중원 12개성에 24개의 분국을 거느리고 총 칠천명이 넘는
표사를 거느린 거대조직이었다.
표국이라 함은 표물을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운송해주고 그에 대한 대가를 받는 집
단을 말한다. 험난한 강호에서 표국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무력이 요구되고
이런 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막대한 자금을 들여서 고수들을 확보해 두어야만 했다.
보통의 중, 소 표국의 경우에는 국주 밑에 총표두 하나와 대표두 둘, 표사 30에서
60명이 일반적인 수준이었고 이외에 물건을 나르거나 험한 일을 도맡아 하는 쟁자
수들이 수십 명 정도가 있을 뿐이었다. 이에 비해 대하표국은 분국만 해도 분국주
밑에 총표두가 하나 대표두가 열명 표사가 200명이나 되었다. 쟁자수는 보통 표사
의 두배의 숫자였다. 그러니 분국의 인원만 해도 쟁자수까지 포함한다면 육백명이
넘는 대인원이었다. 이런 분국이 중원각지에 스물네곳이나 있으니 그 거대함은 말
할 나위가 없었다.
대하표국의 총국주는 한때 무림의 초절정 고수였던 청룡검객(靑龍劍客) 구기자(歐
企仔)라는 인물이었다. 지금 나이 칠십을 바라보는 그는 서른 살 때부터 40년 간
대하표국을 지금의 성세로 키워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대하표국은 중원 거상들
의 연합체인 대상벌과 불가분의 관계 가운데 있었다. 원래가 여러 명의 거상들이
출자한 자금으로 세워진 곳이었고 지금에 와서도 대상벌의 물자유통과 호송을 책임
지는 그들의 발 노릇을 하고 있었다. 무림맹이 중원 각지에 흩어져 있는 지부의 인
력을 동원하거나 중,소 표국을 흡수한데 비해 대하표국은 그 체계가 비교적 잘 잡
혀 있는 곳이라 할 만 했다. 특히 최근에는 마도련이 강남을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무림맹의 표물운송에 차질이 빚어지고 있었기에 그들의 활동영역은 더욱 확대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대하표국 광동성 광주분국주 추혼살검(追魂殺劍) 반백수(潘白手)는 이번 표행을 준
비함에 있어 만전에 만전을 기하였다. 그가 대하표국의 분국주가 된 이후로 지금처
럼 거액의 표물운송은 처음이었고 그런 만큼 분국의 절반의 인원이 동원된 적도 처
음이었다. 그가 친히 표물운송을 진두지휘하고 총표두와 대표두 다섯명에 표사 백
명, 쟁자수 스무명이 동원되었다. 그들이 운반하는 표물은 금와전장 광주지점에서
선금으로 금 오백냥이나 주고 의뢰한 것으로 표행이 무사히 끝나고 나면 나머지 금
오백냥을 완불하기로 계약이 체결되었다.
합계 황금 천냥의 표행은 흔한게 아니다. 분국주 반백수가 생각하기에도 지금까지
그가 광주의 분국주로 있은 이후 최고의 금액이 금 300냥이고 보면 그가 친히 나서
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들이 운송하는 표물은 사방이 밀폐된 검은 마차 다섯
대였다.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원래는 계약을 체결할 때 표
물의 내용물을 명시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이번에는 금와전장 측에서 내용물을 밝
힐 수 없다는 단서를 다는 바람에 반백수는 흔쾌히 승낙을 하고 말았다. 만약 그럴
일이야 없겠지만 불상사가 생겨 마차를 탈취 당하게 되면 그 배상액으로 금 이천
냥을 물어주게 되어 있었다. 그 내용물이 그 정도의 가치가 있거나 그렇지 않은 것
은 하등 이유가 될 수 없었다. 계약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고 계약을 했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표행을 성공시키면 되는 것이다. 다행인
것은 광동이나 복건성에서는 그들의 표행에 위협이 될만한 요소는 거의 전무한 실
정이었기에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금와전장에서 파견된 두 사람이 그들과 동행했다. 중요 표물일 경우엔 의뢰자도 동
행하는 것이 보통의 경우였다. 그들은 분국주와 말(馬)머리를 나란히 하고 이런 저
런 대화를 나누었다. 분국주 반백수는 표물이 무엇인지 궁금하여 그들을 유도해 봤
지만 입에 자물쇠라도 채워 놓았는지 한 마디도 들을 수 없었다. 다섯 대의 마차를
앞뒤로 감싸고 표사 100여명이 주위를 경계하며 전진했고 쟁자수 스무명은 다섯
대의 마차와 그들의 표행기간동안 필요한 물자를 싣고 있는 수레를 모는 마부가 되
어 있었다. 이번 표행의 특징이라면 짐을 부릴 필요가 없었으므로 쟁자수의 숫자가
스무명 밖에는 되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이번 표행은 비교적 수월한 것일 수도
있었다. 복건성 건영까지는 지금과 같은 속도라면 이틀을 꼬박 달려야 할 거리였다
. 반백수는 일행을 독려하며 속도를 높였다.
‘이번 표행이 끝나면 향월이를 데리고 항주쯤이나 가서 유람이나 해야겠다. 흐흐
이 계약의 금액이 얼마인지는 오직 나만이 알고 있으니 금 백냥 정도를 내 수중에
넣어도 아무도 모르리라. 연이어 이런 일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반백수는 만면에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아침 일찍 떠난 일행은 늦은 중식를 숲에
서 하게 되었다. 이번의 표행은 그다지 먼 거리가 아니었으므로 음식과 물을 분국
을 떠나며 준비해 왔다. 그들은 마차를 한곳으로 몰아 놓고 그 주위에 둘러앉은 채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식사 중에도 10여명의 경계병력을 세워둠을 잊지 않았다.
반백수는 두 사람의 금와전장 인물들과 함께 식사를 하며 넌지시 운을 떼어 보았다
.
“근데 한가지 물어 봅시다. 금와전장은 웬만한 표물들은 자체 해결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대체 저것이 무엇이길래 우리에게 의뢰를 한거요? 뭐, 우리야 이런
거액의 표행을 해서 좋지만…… 궁금해서 그럽니다.”
금와전장에서 파견 나온 두 사람은 분국주 반백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 중에
하나가 입을 떼었다.
“알려고 하지 마시오. 우리도 모를뿐더러 알아도 대답을 드릴 수 없소이다.”
‘쳇, 혹시 저 안에 금덩이라도 가득 들어 있는 것 아니야? 하긴 금와전장에서 이
정도의 대규모 표행을 작정했다면 그럴 공산이 크긴 하지만…… 저 안에 정말 금
덩이가 가득하다면 마차 다섯 대분이면…… 후유 이것 살 떨리는군.’
반백수는 침을 삼켰다. 한 때 그는 젊은 시절 녹림에서 활동하던 때가 있었다. 물
론 그 당시에는 하급무사에 불과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가 좋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가 대하표국의 광주분국주를 맡으면서부터는 표물운송비의 일부를 은밀
히 착복하여 적잖은 재산도 모을 수 있었다. 지금의 그의 생활은 남부럽지 않았다.
광주에서만은 그 또한 유명인사였고 적잖은 재산으로 행세 깨나 하며 풍족하게 살
고 있었다. 나이가 들수록 재물에 대한 집착이 강해져 근래에는 분국의 운영비에서
도 어느 정도는 그의 호주머니로 들어오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런 그이고 보면 이
번의 표행에서 얻어지는 대가는 근래에 보기 드문 큰 덩어리이고 그의 생활을 더욱
윤택하게 해 줄 것이 틀림없었다. 그가 이런 생각에 골몰해 있는 동안 표사들의
식사가 어느 정도 끝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금와전장의 두 사람은 어느새 식사를
다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그 모습이 표행을 재촉하는 것 같아 반백수는
기분이 언짢았다.
“자, 모두들 빨리 먹고 갈 채비를 서둘러라.”
반백수의 외침이 있자 총표두와 대표두들이 분주히 표사들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또 다시 표행을 서둘렀다. 최소한 오늘밤에는 광동의 끝자락쯤에 위치하는
조주까지는 가야했기 때문이다.
표행은 순조로웠다. 지금쯤이면 언제나 그렇듯 표행이 시작될 때 가지게 되는 불안
감은 어느 정도 떨칠 수 있었다. 하긴 지금과 같은 대규모 표행에서 곤란한 일을
겪을 리는 없었다. 녹림도들이 마도련에 합병된 이후로는 표물을 탈취 당할 위험요
소는 상대적으로 줄어들었고 기껏해야 표물 의뢰자와의 이해관계에 있는 자들이 공
격을 하는 정도였다. 금와전장이 의뢰하고 대하표국이 운송하는 표물에 손을 댈 만
큼 간덩이가 큰 조직은 강호를 통틀어도 그다지 많지는 않을 것이다. 두 곳 다 무
시할 수 없는 힘을 지닌 곳이기에 공개적으로 표물을 노리지는 않을 것이고 정체를
감춘다하여도 그 정도의 무력을 동원할 수 있는 곳이라고는 무림맹과 마도련 정도
일 것이다. 두 곳 모두 표물을 털 정도로 궁핍하지는 않으니 이번 표행은 이미 안
전성을 확보해 놓고 있는 셈이었다.
‘마도련과 무림맹이 치열한 대결구도를 보인 이후로 차라리 표행은 더 순조로웠다.
지금과 같은 예민한 시기에 주위의 시선을 집중시킬 행동들은 자제하기 마련이고
이도 저도 아닌 낭인들이나 이름도 없는 문파들 따위는 감히 우리 표물을 노리지는
않는다.’
그들은 추호도 걱정을 하지 않았기에 신경이 느슨해져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이들의 모든 시선을 한 곳으로 잡아두는 일이 발생했다. 흔히들 표물을 노리는 자
들이 나타나기 전에 가장 흔하게 보이는 조짐이 길에 장애물이 놓여 있을 때였다.
반백수는 손을 쳐들었다. 그의 신호에 따라 표사들은 한 동작으로 표물 주위를 더
욱 엄밀히 감싸며 주위를 경계해갔다. 위로 쳐든 손을 앞으로 몇 번인가를 기울이
자 뒤에 있던 대표두 하나와 표사 다섯이 눈앞에 보이는 장애물 쪽으로 기민하게
움직여갔다. 길을 막고 있는 것은 통나무들이었다. 그것들은 전면을 통째로 막아서
있었고 누가 봐도 누군가 의도적으로 길에 놓아두었음을 알게 해줬다. 일행과 떨
어져 앞서 나갔던 여섯 인물들은 통나무와 그 주위를 조사하고 일행 중에 몇은 길
가로 경사지게 올라간 비탈위로 뛰어 올라갔다. 사방을 살펴가는 그들의 움직임은
오랜 표행으로 다져진 익숙한 동작들이었다. 그들의 하는 양을 살펴가던 반백수는
조진천 대표두의 이상이 없다는 수신호에 따라 손바닥을 안쪽으로 해서 바깥으로
까딱거렸다. 빨리 장애물을 치우라는 의미였다. 표사들은 내공을 운기해 통나무들
을 한쪽으로 밀어붙였다.
‘이상하군. 분명히 누가 의도적으로 한 일일텐데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것이……
이것 꼭 소시 적에 내가 써먹던 방법 같아 찜찜하군.’
그들은 또 다시 길을 재촉했다. 한 참이 지나가자 조금 전까지 지니고 있던 긴장감
은 흔적 없이 소멸되고 일행가운데는 또 다시 느슨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모두 멈춰라.”
반백수가 또 다시 손을 쳐들며 하는 말이었다.
“대체 어떤 놈들이 이런 장난질을 치는 거냐?”
그는 어이가 없었다. 이번에는 그다지 크다 할 수 없는 작은 바위들을 길 복판에
수북히 쌓아 둔 것이 아닌가? 그는 또 한번 주위를 조사케 해 보았으나 아무런 흔
적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짧지 않은 시간동안 여러 번의 장애물을 만나야
만 했다. 그렇다고 그 장애물이 그들이 치우기 곤란할 정도로 대단한 것도 아니어
서 금방 일행은 전진할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몇 번인가 반복되자 그들은 은근히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조주까지는 40리쯤을 남겨 둔 지점이었다. 어느덧 날은 어
둑어둑해지고 있었기에 일행의 움직임은 좀더 빨라지기 시작했다. 눈앞을 어지럽게
이어져가던 길은 나지막한 언덕배기를 힘겹게 걸치고 있었다. 저곳을 넘어서면 저
멀리 조주가 보일 것이다. 그들은 힘을 내었다.
푸확
촥
느닷없이 땅바닥이 갈라지며 흑의 복면인들이 튀어나온 것은 반백수가 하품을 하며
찔끔 흘러나온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 낼 때였다.
히히히힝
“으악”
“꺽”
순식간에 복면인들은 표사들을 아래에서 위로 양단해 버렸다. 숫자는 오십여명에
불과했지만 그들의 움직임은 너무나 의외의 순간에 치러진 급습이었는지라 채 방비
하지 못하고 쓰러져 갔다. 반백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모두 마차를 보호하라.”
그의 외침이 있기도 전에 총표두를 중심으로 대표두들과 표사들은 마차 주위로 몰
려들며 수비진형을 갖춰갔다. 그러나 이때는 서른명정도의 사상자를 낸 이후였다.
무엇보다 반백수를 놀라게 한 것은 상대들의 무공이었다.
‘이 놈들. 보통내기들이 아니다.’
그는 생각을 채 마무리짓지도 못하고 적들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챙
챙
“으악”
여기저기서 터지느니 표사들의 비명성이었다. 금와전장의 인물들 또한 생각지도 못
한 기습공격에 적이 당황하는 눈치였다.
“모두 전력을 다하여 상대해라.”
반백수의 핏대 올리는 명령이 없어도 그들은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문제는 적들이
그들보다는 더 강했다. 그들 중의 일부가 몸을 허공 중으로 날리는가 했더니 마차
의 마부석으로 곧장 다가갔다. 그것을 본 반백수는 다급해졌다.
“이놈들.”
그 중의 몇을 향해 청강검을 휘둘렀다. 검기가 치솟으며 적의 목을 그어갔지만 그
의 검을 맞아들인 것은 상대의 목이 아니라 등이 안쪽으로 굽은 기형도였다.
“이제보니…… 너희들은.”
그는 그 도를 보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빌어먹을, 이 놈들은 마도련 놈들이구나. 저 월도는 녹림의 일파인 적월파의 독문
병기다. 저들이 왜?’
그는 상대가 마도련의 고수들이라는 것과 더군다나 그가 옛날에 몸을 담기도 했었
던 녹림의 인물들이라는 점에 크게 놀랐다. 일류고수라고는 할 수 없으나 시시껄렁
한 일반 녹림도보다는 강한 표사들도 녹림의 정예 중에 하나인 적월파의 고수들에
게는 속수무책이었다. 그것을 본 반백수는 노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 놈들. 마도련의 고수들이 표물을 노린단 말인가?”
괜한 소리에 불과했다. 이미 시작한 살행은 멈춤이 없었고 이대로 가다가는 전멸이
불을 보듯 뻔해 보였다. 그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이대로 가면 표물을 탈취당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전멸을 당하게 된다. 그는 선택을 해야만 했다. 끝까지
표물을 지키다가 허무하게 죽어갈 것인가? 아니면 하나뿐인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
도주라는 의미 있는 결단을 실행할 것인가? 역시 그가 광주에 남기고 온 것은 이럴
때 긴요하게 작용되었다. 그는 삶에 아쉬움과 미련이 많은 사람이었다.
“모두 표물을 버려 두고 퇴각하라.”
반백수의 용기 있는 결단이 끝나고 고함을 쳐대는 순간, 이미 쟁자수는 모두 죽었
고 총표두와 대표두 다섯 중에 넷 표사 스무명만이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그의 지시가 이렇게 반가울 때가 또 있었을까 싶게 그들은 신속하게 격전장을 빠져
나갔다. 의외로 녹림도로 여겨지는 적들은 그들의 앞길을 막아서지 않았다. 마치
도망가기를 바란다는 듯이 지켜보고만 있었다. 반백수는 도망을 가는 와중에도 고
개를 돌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에는 한 명의 복면인이 허공으로 쳐든 도로
금와전장의 인물들을 단칼에 베어 넘기는 장면이 크게 부각되었다.
‘멍청한 놈들.’
그는 금와전장의 두 인물을 속으로 비웃었다. 아무리 임무도 좋고 재물도 좋다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살아 있을 때의 문제였다. 죽고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표국의 특징이 일반 무림인들과 다른 점은 여기에 있었다. 표행 도중 만나는 적들
중에는 표사들로서는 도저히 감당하기 벅찬 상대들도 있기 마련이다. 이럴 때 그들
은 순순히 표물을 포기하고 물러선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의 생명이 표물보다 중
요해서라기 보다는 최소한 손실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적들이 더 강하다면 이미 어
떻게 해도 표물은 그들의 것이 된다. 그럴 바에는 표사들의 생명이라도 건져 표국
에 이익이 돌아가게 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잃어버린 표물의 배상액은 표국에서
하게 되지만 이것은 차후 그 표행에 참여한 표사들의 녹봉에서 일정부분을 제하기
도 한다. 이런 일이 빈번하지는 않지만 간혹 일어날 때는 표물을 강탈한 곳을 아는
경우 일정액을 헌납하고 표물을 되받아 오거나 그도 아니면 다른 대가를 지불하여
원만하게 해결하면 되는 것이다. 만약 상대를 모를 때는 그야말로 고스란히 배상
액을 물려주게 될 판이다. 이런 이유로 전체 표국의 년간 순이익의 이할 정도는 언
제나 배상준비금으로 예비 되어 있었다. 대하표국의 표사들이 꽁지가 빠지게 장내
를 도망가고 나자 장내에 있던 오십여명의 인물들은 마차를 몰아서 장내를 빠져나
갔다. 그들은 한 참을 달려가다 양 갈래길이 나오자 조주 쪽이 아닌 다른 곳으로
방향을 잡았다.
“후하하하 역시 우리는 이게 천성에 맞아. 녹림도의 본분은 어디까지나 남의 물건
을 강탈하는 것이지. 이 얼마 만에 느껴보는 희열감이란 말인가?”
제일 앞서가는 마차에 타고 있던 인물에게서 터져 나온 소리였다. 그의 옆을 달려
가던 복면인이 그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조장, 정말 저 마차에 금괴가 가득 들어 있을까요?”
그의 눈자위엔 숨길 수 없는 탐욕이 번들거렸다. 조장이라 불린 사내는 그를 바라
보며 심드렁하게 대꾸한다.
“그야 모르지. 우리야 시키는 대로 하는 것뿐이니.”
“헤헤 저 중에 일부를 슬쩍해도 별로 표도 안 날것 같지 않습니까?”
“이런 썩을 놈이 있나. 허튼 소리 마라. 만약 발각 나는 날에는 우리는 모두 죽은
목숨이다. 네 목숨하고 금괴를 바꾸고 싶다면 그렇게 하던가.”
“워워..”
“히히히힝”
“뭐야?”
조장의 옆에서 말을 몰아가던 복면인이 말고삐를 당기고 마차를 끌던 두 마리의 말
이 앞발을 들며 급정거를 하고 조장이란 사내의 입에서 다급한 외침이 터져 나온
것은 한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자욱한 먼지가 피어오르며 그 사이로 보이는 것은
검은 장포를 바닥까지 늘어뜨린 괴인들의 모습이었다.
“뭐, 뭐냐? 저것들은?”
길을 가로막고 있는 사내들은 십 여명에 불과했으나 그 풍기는 분위기들은 예사롭
지가 않았다.
“비켜라. 웬 잡것들이 감히 마도련의 앞을 막아서는 게냐?”
그는 간담이 서늘해져 와 엉겁결에 마도련의 이름을 내세우고야 말았다. 이곳은 강
남이고 적어도 강남에서는 마도련의 이름 앞에 꼬랑지를 빳빳이 세우고 덤빌 놈들
은 많지 않을 것이었다. 때때로 일반적인 통념이 통하지 않는 경우란 비일비재한
법이다. 그런 점에서 눈앞의 괴인들은 복면인들의 조장에게는 의문스런 인물들이었
다. 나이가 몇인지 뭐 하는 놈들인지 어디 문파 소속인지도 분명치 않은 인물들은
자기들처럼 복면 따위로 얼굴을 가린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가 보기에 그들은
모호하게만 느껴지니 그 이유가 분명치 않았다.
“누, 누구냐?”
괴인들의 무리 중 한 명에게서 스산한 음성이 발해진 것은 조장의 말이 막 끝났을
때였다.
“모두 죽여라.”
촤악
마치 날개를 접고 웅크리고 있던 독수리가 날개를 펼치고 비상을 하는 듯한 동작들
을 보이며 그들은 순식간에 다가왔고 다가왔는가 하고 느꼈을 때는 공격이 시작되
고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모두 쳐라.”
조장 또한 몸을 날리며 월도를 휘둘렀다. 상대는 검은 손을 쳐들어 도와 부딪혀 왔
다.
촹
“꺽”
그는 그 순간 가슴이 답답해져 오며 하체에 힘이 쭉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
그는 끝끝내 어떻게 된 상황인지도 알지 못하고 지옥으로 달려가고 말았다. 맨손과
부딪히는 순간 도는 산산조각나 깨어졌고 그 순간 푸르스름한 강기가 허리를 잘라
버린 것이다. 상대는 그가 상상한 수준의 고수가 아니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소
리 없는 침묵을 한 겹 두른 괴인들은 기이한 공격으로 녹림의 고수들을 길가에 흔
들리는 갈대처럼 손쉽게 꺾어가고 있었다.
“으악”
“사, 사람도 아니다.”
“꺽”
팡
손에서 장력이라 여겨지는 검은색을 띈 묵장이 파공성을 동반하고 몰아치는가 하면
낫같이 생긴 괴병기를 휘둘러 목을 자르고 분명히 돌이나 쪼면 딱 좋을 정으로 골
수를 헤집는가 하면 형체도 분명치 않은 유령같은 자가 흡반처럼 몸을 조여 뼈들을
부셔놓고 있었다. 그들의 무공은 도저히 자신들이 감당할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
이들의 싸움은 일방적이었고 대하표국의 표사와 다른 점이라면 한 명도 살려두지
않으려 한다는 것과 녹림고수들 역시 단 하나도 도망치려는 사람이 없다는 정도였
다. 어쨌든 순식간에 열 명에게 오십명은 마치 유흥거리라도 제공하는 듯이 너무나
쉽게 목숨을 헌납하고 말았다.
“흔적을 지우고 마차를 끌고 간다. 이것 너무 실망인데…… 중원의 고수들이 이
정도 수준이라면……”
“모두 가자.”
두두두두두
그들은 정적만을 장내에 남겨두고 순식간에 장내에서 사라져갔다.
안녕하세요?
앞으로의 연재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다음편은 다음주 화요일 새벽에 시작됩니다.
앞으로의 연재주기는 한 달을 절반으로 나눠서 중순이후에는 연재를 하고 5-15일
정도는 수정작업을 하게 됩니다. 수정작업이 다소 늦어질지도 모르지만 대략 이런
주기를 보일 것 같습니다.
4월 3일부터 6일이나 7일까지 100회까지 연재를 하겠습니다. 이후 연재는 마지막
연재일에 밝히겠습니다. 자주 올리고 싶지만 그럴 수 없어 저도 안타깝군요.
그럼, 즐거운 하루 되세요.
- 황제(皇帝)의 검(劍) -
88.괴이한 사공
중원의 도처에서 거의 동시라 할 만큼 일어난 사건은 일파만파로 전 중원을 휩쓸어
버렸다. 몇 가지 점에서 이 사건은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먼저 그 하나는
이 사건의 중심에 금와전장과 대하표국이라는 당대의 거대세력이 연관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금와전장에서 무슨 이유인지 모르나 스물 네 곳의 분국에 동시에 표행을
의뢰했고 그 대가는 동일하게 황금 천냥짜리들이었으며 그 모두는 한곳만 제외하
고 탈취 당했다. 다섯 대의 마차를 운송하는 것도 동일했고 대가도 동일했으며 탈
취 당한 것도 동일했다.
탈취의 수법이나 사용한 무공은 제각각이었지만 살아 남은 증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들은 무림맹이나 마도련의 고수들이었다고 하니 이것이 또한 무림에 큰 충격을
던져 주었다. 단 한곳 실패한 곳은 산동성 제남분국에서 출발한 표행으로 그들을
공격했던 자들 역시 무림맹의 고수들로 추측된다고 했다. 마차는 그들의 공격에 부
서졌고 이로 인해 안의 내용물이 공개되고야 말았다. 사람들의 예상대로 그 안에는
마차를 가득 메울 정도의 금괴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 소식은 금세 전
무림에 떠돌았고 저마다 구구한 억측을 낳으며 각기 다른 입장에 있을 무림세력들
의 입장을 난처하게 하거나 때로는 의미심장한 시선을 던지게 만들고야 말았으니
과연 이 사건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지 아직은 모를 일이었다.
“태공.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저로서는 난감할 따름입니다.”
대하표국의 총국주인 청룡검객 구기자는 천무태공 초량의 처소에 와서는 죽을상을
하며 아뢰었다. 그가 이곳에 온 지는 벌써 한 시진이 지나고 있었지만 말하는 사람
은 오직 그 뿐이었고 초량은 여전히 난초를 바라보거나 때로는 난초의 잎을 마른
수건으로 닦아내는 일에만 몰두했다. 구기자는 그런 그를 보며 작금의 일이 난초를
돌보는 일보다 더 가치가 없는 일인지 의문이 들 정도로 부아가 치밀어 올랐지만
아무 소리도 못하고 입만 나불대고 있었다.
“태공. 이 일은 많은 점에서 의문을 낳게 합니다. 이것은 우리 대하표국의 사활을
걸고 치밀하게 조사를 해야 할 중요사안일 것 같습니다.”
그가 뭐라 그러던 말든 초량은 그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난초만을 바라보고 있었
다.
“태공. 뭐라고 말씀을……”
“한심한 작자.”
처음으로 초량의 입에서 나온 말은 구기자의 체면 따위는 안중에도 두지 않는 것이
었다. 구기자는 어이가 없었다. 물론 그의 생애를 통 털어 스스로 한번도 한심하다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한 시진만에 들은 말이 겨우 그 한마디라는 것이
너무 억울하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래. 무엇이 의문이 간다는 건가?”
역시나 그는 돌아서지 않고 있었다. 마치 그 모습은 자신은 마주보며 대화를 나눌
가치도 없다는 태도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구기자는 그의 물음에 대한 대답
을 준비해야만 했다.
“먼저 금와전장이 한꺼번에 표물을 맡겼다는 것과 그럴 것이면 총국에다 의뢰하지
않고 분국단위로 의뢰를 했다는 것이 첫 번째 의문입니다. 두 번째는 무림맹과 마
도련이 우리를 동시에 공격했다는 점입니다. 저는 지금도 이것을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립니다. 도저히 연결점이 없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발생했기 때문입
니다. 세 번째는 그들의 시체입니다. 마도련과 무림맹의 인물들이라 여겨지는 자들
의 시체입니다. 대부분 표물을 탈취 당한 곳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발견되
었습니다. 네 번째는 그들의 시체에 나 있는 무공들의 흔적입니다. 중원 마도, 정
도의 각 문파의 무공과 심지어 새외의 무공들이 총망라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는……”
“되었다. 그대의 의문은 홀로 풀어라.”
“네? 그것이 무슨 말씀이신지……”
“말 그대로다. 그대의 의문을 풀어주는 것 따위는 우리에게 하등 유익이 없기 때문
이지. 이미 일은 벌어졌고 그대는 이후 수습책을 마련하기도 벅찰 것이야. 그래.
자네의 생각은 누구의 짓이라 생각하나?”
구기자는 칠십노구를 빳빳이 세우며 자신 있게 말했다.
“무림맹과 마도련의 합작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현실 가능성은 없지만 정황으로
봐서는 그것 이외에는 달리 설명할 수 없습니다. 처음에는 금와전장의 자작극이 아
닐까 하는 의문을 가져 보았지만 그것은 여러 가지 점에서 납득이 가지 않았습니다
.”
“그것이 무엇이지?”
“네? 네…… 그것은 이 모든 것이 그들의 짓이라면 그들이 이렇게 복잡한 절차를
통해서까지 우리 표국에 손해를 입혀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 이런 일을
해봤자 금와전장에는 아무런 이득이 없다는 점입니다. 두 번째는 현장에서 금와전
장에서 파견된 인물들은 대부분 살해되었습니다. 세 번째는 그들에게 무림맹과 마
도련의 고수들을 제거할 만한 세력이나 고수들이 있다고는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
다. 마지막으로 그것을 모두 인정한다고 해도 마도련과 무림맹을 한꺼번에 움직일
만한 권한이 금와전장에 있지는 않습니다. 아니 무림의 그 어떤 세력도 그들을 한
꺼번에 움직이게 하기엔 벅찹니다.”
구기자는 습관적으로 손가락으로 심중의 생각을 정리하는 버릇이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내려진 결론이 무림맹과 마도련의 결탁이라는 건가?”
“네. 그렇습니다. 지금으로서는 가장 무리가 없는 판단으로 사료됩니다.”
“참 신기하군.”
구기자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었다가 제자리를 찾았다.
“뭐가 말입니까?”
“그 정도의 머리로 어떻게 대하표국을 중원제일로 만들었는지 신기하단 말일세.”
‘정말 밥맛 떨어지는 놈이야. 상관만 아니라면 저걸 그냥……’
“왜. 내 말에 기분이 나쁜가?”
구기자는 두 손을 쳐들어 황급히 휘저었다.
“아닙니다. 그럴리가요.”
초량은 난초에 머물러 있던 시선을 돌려 구기자를 쳐다보았다. 습관처럼 입가에 머
물던 미소를 거두고 그는 지겹다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상황을 정리해보면 이렇군. 금와전장에서 24개분국에 동시에 표물의뢰를 했다. 그
표물을 강남에서는 마도련이, 강북에서는 무림맹으로 보이는 고수들에게 강탈당했
고 그들은 얼마 가지도 못하고 전원 살해되었다. 물론 그 전에 금와전장의 인물들
역시 무림맹이나 마도련의 고수들에게 죽음을 당했고 그들 중에 살아 남은 사람은
극소수다. 유일하게 탈취 당하지 않은 곳이 한군데며 그곳에는 마차가 파손되어 금
괴가 들어 있음이 확인되었다. 우연의 일치인지 그곳에는 정체불명의 신비인들도
나타나지 않았고 말이야. 후후. 참 재미있군. 누군지 모르지만 여러 가지 목적을
지닌 자군.”
“무슨 말씀이신지……”
“몰라도 된다. 자네는 그것이 무림맹과 마도련의 짓이라는 건가본데 내 생각은 전
혀 달라. 금와전장의 인물이 죽었다는 것은 오히려 그들의 짓일 가능성이 더욱 짙
다는 것을 반증하는거로 볼 수도 있고, 단 한곳에서 드러난 금괴, 그리고 그곳만
탈취 당하지 않았다는 것 역시나 금와전장이 의심 가는 대목이며 무엇보다 이 일의
발단이 그들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결정적으로 그들의 소행이라는 것을 힘주어
증명하고 있어. 중요한 것은 누구의 짓이냐가 아니라 그들이 무엇을 노리는가 하
는 거겠지. 그리고 우리들은 금전적인 손해와 여태껏 쌓아온 신용에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되는 거고 당분간 표국 운영에 차질이 빚어질 거야. 이것만해도 우리 쪽에서
본다면 대단한 손실이지. 그러나…… 이것만이 전부는 아닐 거야. 우리는 이번
사건에서 아주 중요한 점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우리의 경제적인 손실을 만회하고
도 남을 만큼 큰 것이지.”
“네?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구기자를 초량은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표정만으로는 도무지 그가 무슨 생각을 지
니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금와전장의 소행이라고 단정할 경우 그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거대한
힘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지.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세력이지만 이제 모든 세력들
의 시선은 금와전장을 주시하고 있을거야. 만약 그들의 짓이 아니고 다른 세력이
움직인거라면 일은 더 복잡해지지. 그도 아니고 금와전장의 배후에 누군가가 있다
면 그것은 더 복잡해지고…… 어쨌든 어둠 속의 인물은 대단한 자임에는 틀림이
없군. 이 한번의 사건으로 현 국면을 자신이 의도하는 바대로 이끌어가게 되었으니
말이야. 만약…… 만약에 금와전장에 배후가 있고 그 세력이 무림맹과 마도련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면 우리의 계획은 처음부터 재수정 되어야
한다. 또 하나 무림맹이나 마도련이 공개적으로 우리의 표물을 노리고 더군다나 살
인멸구를 하지 않은 것은 공개적으로 선전포고를 한 것이나 다름없지. 어둠 속에서
한 대씩 주고받던 것으로는 양에 차지 않는다는 말인 게야. 거기다 무림맹과 마도
련의 고수들을 모두 죽였다는 대목에서 이 일을 주도한 자와 그들의 관계를 판단할
단서가 발생하는 거지.”
그가 혼잣말을 하듯이 토해내는 내용 중에 구기자가 이해한 부분은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속시원하게 심중의 생각을 털어놓으면 시원하겠건만 눈앞의 사내는 그리하
지도 않았고 그렇게 할 생각도 없는 듯 했다.
‘그래. 너는 난 놈이고. 나는 그런 네놈의 발바닥이나 핥아야 할 놈이다. 빌어먹을
…… 천황의 대제자라고는 하나 나한테 이래도 되는거야?’
“그럼,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별로 기대도 하지 않는다는 듯이 아무렇게나 뱉어내는 말이었다.
“그걸 몰라서 묻나? 금와전장에 배상을 해 주면 그만이다.”
“네? 그들의 짓일지도 모르는데…… 조사도 안 해보고 배상을 해주라는 말입니까
?”
“그들이 원하는대로 움직여야 한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줄 것은 주고 얻을 것은
얻는다. 자네는 아무것도 생각지 말고 표국운영에만 신경 쓰도록 하게나. 아마 당
분간은 이런 일이 없겠지. 자네가 하고 싶어하는 일은 할 사람이 이미 정해져 있어
. 그러니 자네는 가서 애첩의 엉덩이라도 두들기고 있으면 돼.”
구기자의 얼굴은 심각하게 구겨졌다. 주름진 노안 사이로 벌겋게 충혈된 두 눈이
비치고 있는 것만 봐도 그가 얼마나 내심으로 격동하고 있는지를 알게 해 준다. 초
량의 몸이 다시 난초로 돌아서자 구기자는 그것이 방에서 나가라는 의미임을 깨닫
고는 입가를 씰룩이며 돌아섰다. 아무소리도 않고 인사조차 하지 않고 문을 나서는
그의 심경은 참혹한 것이었다.
“후후 금와전장! 그들의 실체는 뭘까? 그리고 진정으로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일
까? 항상 사건의 배후에는 그 일이 발생함으로써 가장 큰 이득을 보는 사람이 연관
되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는 분명 무림맹이 되겠지만 이것은 그리 단순하
게 생각할 성질이 아니다. 여기에는 먼저 마도련이 함께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 결
정적으로 이 단순논리를 뒤집어 버린다. 그들은 어쨌든 현재까지는 적대적 관계에
있기 때문에 그럴 가능성은 거의 전무하다. 그렇다면 단순히 우리를 곤경에 빠뜨리
거나 그도 아니면 현 국면에 혼란을 주기 위해서? 으음…… 무림맹과 마도련은
단지 배후세력에 이용당한 것인가? 아니면 어떤 식으로든 연결이 되어 있는가? 아
무래도 전자 겠군. 어쨌든 지금 시점으로서는 아무것도 확실한 게 없다. 내가 쥔
패는 최악이로군. 그러나 이것 한가지만은 분명하다. 항상 판은 끝나봐야 결과를
알 수 있고 승리는 언제나 힘이 있는 자에게 돌아간다는 것.”
그의 시선은 난초에 머물고 있었지만 그의 생각은 복잡하게 얽혀진 현 상황을 풀어
가느라 분주했다.
혈수천자가 사형 초량의 부름을 받고 그의 처소로 들어갔다 나온
뒤, 일단의 무리들을 이끌고 장원을 나선 시각은 중천에 떠 있던 해가 가파르게 서
녘으로 기울어가던 시점이었다.
★
파천은 수행인 하나 대동하지 않고 무림맹을 비밀리에 빠져나왔다. 그는 조금전의
태의전의 상황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보았다.
“대하표국의 대규모 표행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 곳은 12군데 였습니다. 이번이 그
들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 적기라 판단되어 신안전주와 더불어 의논했고 곧 바로
대령사의 재가를 얻어 표행을 탈취케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 11군데에서 표물을
탈취하는데 성공했지만 아쉽게도 신비인들에게 전원 살해되고 말았습니다. 이와
동일한 상황이 강남의 12군데에서도 일어났으며 놀랍게도 그들은 마도련이었습니다
.”
백호전주는 아직도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그다지 조리있다 할 수 없는 상
황보고를 했다. 그의 말을 신안전주가 이었다.
“우리가 정보를 얻어 낸 출처는 대하표국에 심어 놓은 첩자로부터입니다. 그가 준
정보는 정확한 것이었지만 한군데만은 표행의 규모가 정보와는 달리 그 두 배에 이
른 것으로 여겨집니다. 문제는 우리들을 친자들이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대하표
국이 표물을 노리고 자작극을 벌였다고는 보기 힘들고 그렇다고 금와전장이 그만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도 보이지 않습니다. 아마도 제 생각에는 혈마천을 비롯한 새
외의 세력 중 한곳으로 추정됩니다. 이번 일로 그들의 정보력이 이미 중원 곳곳에
뻗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후에는 각별한 주의가 요망되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우리에게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에 대한 대비책을 세
워 둬야 할 것 같습니다.”
파천은 삼안천뇌 소천악의 말을 떠올리며 실낱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가 움직여 가
는 방향은 개방이었다. 공중을 갈라가는 그의 움직임은 어둠에 가려 분간이 가지
않았다.
★
“역시 지존의 예상대로 대상벌에서 사람이 나왔습니다. 이미 천마님께 연락을 취해
두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생애 가장 지독한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개왕 풍천호는 생각만 해도 신난다는 표정이었다.
“좋아. 이제는 하군표에게 연락을 하게. 행동개시하라고…… 그리고 쌍노!”
“네. 지존.”
“이제 자네들도 움직일 때가 온 것 같군. 준비한 세력을 움직여도 될 것 같아. 그
리고 이후의 지시는 풍노를 통해 할테니 그렇게 알도록 하고.”
“존명.”
“이제 중원은 한바탕 악몽을 꾸게 될 것이다. 새외의 세력들 역시 더 이상 기회만
을 보고 있지만은 않을 거다. 그렇다고 전면전으로 가는 것도 아니지. 모두 어쩔
수 없이 싸움판에 끼어 들게 만들어야 한다. 서로를 경계하느라 전면전으로 나오지
는 못하고 그렇다고 손놓고 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 사이를 비집고 흙탕물을
일으켜 놓으면 우리가 얻을 것은 많을 거야.”
파천의 미소를 대한 쌍노와 개왕은 내심으로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고야 말았다.
마치 함정을 파 놓고 앞으로 닥칠 상황을 즐기고자 하는 악동의 만족한 모습을 보
는 것도 같았기 때문이다. 파천은 화제를 돌렸다.
“소군이랑 소왕은 잘 있나?”
“네. 지존. 소군은 지금 지하연무관에 폐관수련중입니다. 역시 그녀의 재질은 천에
하나 있을 정도로 뛰어난 것이었습니다. 그것보다 더 놀라운 것은 무공에 대한 집
념이 보기 드물 정도로 탁월합니다. 내 지금까지 이렇게 지독한 계집아이는 처음
봅니다.”
의노의 말에 파천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럴테지…… 그 녀석의 집념은 나조차 감탄한 것이야. 앞으로 빠른 성장을 보
일 거야. 이후 이 시대를 호령하는 여제가 탄생할지도 모르겠군.”
★
혈수천자는 말을 몰아가며 사형인 천무태공이 한 말을 떠 올렸다.
“배후를 캐 보아라. 그리고 이후 너는 각지에 흩어져 있는 우리 세력들을 적절히
이용하여 닥치는 대로 휘저어라. 무림맹이든 마도련이든 이곳 중원의 모든 무림인
들은 어차피 우리의 적이다. 현재 우리의 동지는 혈마천 외에는 없다고 생각해라.
무림맹의 조직을 중심으로 두드리되 전면전이 될 소지는 없애야 한다. 이를테면 무
림맹 각 지부의 산하조직들은 치되 그들을 직접 치는 행동 따위는 안 된다는 말이
다. 알겠나?”
‘빌어먹을 새끼! 그래 지금은 네가 내게 큰 소리를 치지만 언제까지 가나 보자. 사
부님의 명이라니 일단은 내가 참는다. 그렇지만 내 언젠가는 네 놈의 그 시커먼 속
을 낱낱이 드러내게 하고야 만다. 빙화의 부탁이 아니었다면 이미 내 륜은 네 목을
갈라놓았을 것이다.’
그가 거느린 기마대의 수는 삼백기에 불과했지만 그들의 기세는 만만치 않았다. 그
의 바로 뒤에는 항상 그를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는 서른명의 검수가 함께 했다. 그
들은 현재 황하를 따라 동진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들의 최종목적지는 제남이었다.
유일하게 탈취당하지 않은 대하표국의 제남분국을 찾아가기 위함이었다. 황하를
따라 가다보면 무림맹의 총단이 있는 무림맹에 맞닥뜨리게 되기에 함포에서 황하를
건널 생각이었다.
두두두두
기마대의 속도는 상당히 빨랐다. 선두에서 휘날리는 말갈기와 짝을 이루며 바람결
에 춤을 추는 옷자락은 휘영청 솟은 달의 비추임을 따라 멋진 광경을 연출했다.
함포에 도착한 일행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작은 나루였고 밤이었기에 사공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의 생각과 달리 저 멀리 어렴풋이 인영이 보였다. 그는 강 쪽으
로 돌아앉아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중이었다.
히히히힝
‘팔자 편한 놈이군. 이 야심한 밤에 홀로 낚시나 하고 있으니……’
큰 삿갓을 눌러쓴 사람은 삼백기의 기마대가 자신의 뒤에 요란스럽게 당도했는데도
뒤조차 돌아보지 않았다. 혈수천자의 얼굴에 의문이 떠오른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봐. 너 이곳의 사공인가? 돈은 원하는 만큼 줄 테니 우리 모두 강을 건너게 해
라.”
명령조였다. 혈수천자에 의해 사공이라 단정지어진 인물은 넓은 등판에 달빛을 적
시고 미동도 없이 낚싯대에만 시선을 주고 있었다. 그가 여전히 반응이 없자 혈수
천자에게서 살기가 뿜어졌다.
“이런 촌 무지렁이 놈이 감히 이 어르신이 말씀하시는데 고개조차 돌리지 않는단
말인가?”
그가 살기 어린 음성을 토해내며 위협해 보았지만 그 사공은 역시나 석상이라도 된
양 꼼짝하지 않는다. 혈수천자는 기이함을 느꼈다. 그는 주위를 빠르게 살펴갔다.
자신들 일행과 귀머거리일지도 모를 사공 외에는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이 분명했
다. 그는 자신의 느낌을 확신했다. 혈수천자는 뒤를 돌아보며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 그의 신호에 따라 한 명의 수하가 사공에게로 다가섰다. 지척까지 다다른 흑의사
내는 돌아앉은 사공을 향해 입을 열었다.
“죽고 싶은가? 당장 일어나서 배를 대지 않으면 너를 죽이겠다.”
의도적으로 내공을 실어 상대에게 전하고는 의기양양해서 그 반응을 살폈다. 그러
나 그는 곧 어찌 된 영문인지를 몰라 어리둥절해지고야 마니, 사공은 그의 기대와
는 달리 멀쩡했으며 오히려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나서 뒤
돌아서지 않는가? 달빛에 드러난 그의 용모를 대하는 순간 흑의무사는 흠칫 놀라며
자기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서고야 말았다.
늦었습니다. 오늘은 이것 한편입니다.
좋은 소설 하나 추천을 하겠습니다.
이곳 시리얼에 올라오고 있는 ‘대륙의 한’이란 무협소설입니다.
좋은 글입니다.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읽어보시면 압니다. 상당한 분량이 올라와 있는데 저도 시간이 없어 많이 보지 못
했지만 인내심을 가지시고 꾸준히 읽으신다면 흠뻑 빠져드시리라 믿습니다. 그럼
좋은 하루 되세요.
황제(皇帝)의 검(劍)-89
달빛에 드러난 삿갓 괴인의 용모는 한 자루 검에 목숨을 걸고 있는
흑의무사마저 두려움에 젖게 할 만큼 공포스런 것이었다.
삿갓 아래로 드러난 턱은 달빛에 반사되어 청광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얼굴을 감싸며 흘러내린 머리털은 핏빛이 분명했다. 어찌 인간의 얼굴이
푸르고머리털이 붉을 수 있단 말인가? 흑의 사내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지척간이라 잘못 본 것은 분명 아니었다. 더군다나 괴인의 한쪽 소매는
간간이 스치는바람결에 몸을 맡기고 펄럭이고 있었는데 그것이 더욱 상대에
대한 공포를 가중시켰다.그는 뒷걸음치며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나
변함없는 믿음을 주던 주군을 향하는 눈길엔자신으로서는 감당하지 못할
한계상황에 직면한 구원의 의미가 담겨 있었지만 이내 그는그 생각을 포기해야만 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변하지 않을 것 같던 주군의 얼굴이 평소와는 분명히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었고 자신의 짧지 않은 생애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저것은
공포의 표정이 분명했다. 세상에 무서울 것 없어 보이던 혈수천자의
이런 태도는 대체 무슨 연유란 말인가?
‘헉…… 저자의 용모는 바로 혈마천의 이총사가 사형에게 주의를
주었다는 바로 그……’사형은 그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혹시라도 중원에서 얼굴이 푸르고 머리털이 붉고 외팔이인
괴인을 만나게 된다면 무조건 도망쳐라.
혈마천 이총사의 말을 종합해 보면 그 자는 본 천황부에서 사부님을 제외하고
우리들 중 그 누구도 상대할 수 없는 괴물임이 분명하다. 괜히 체면 따위를 생각하다
헛되이 생명을 잃지 말고 내 충고를 깊이 새겨두는 것이 좋을 게다.
혈수천자의 눈은 더 이상커질 수 없을 정도로 확대되었고 그의 입은 슬며시 벌어지고 말았다.
너, 너는 대체 누구냐? 스스로의 음성이 떨려 나오고 있음은 추호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 같이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인물이 이 정도로 망가지는 모습을
보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설사 죽음의 위기가 닥친다 하더라도 생명을
구걸하기 위해 고개를 숙이지 않을 위인이 바로 이런 류의 유형이었고 적어도
외견상으로는 그렇게 비쳐지고 있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그의 음성이 절로 떨려
나옴은 실로 의외라 할 수 있었다. 이런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삿갓 괴인은 태연히
발을 떼어 다가오고 이것만으로도 다소 거드름을 피우며 괴인에게 나섰던 흑의 무사를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얼어붙게 만들고야 말았다. 흑의 무사는 어떻게 해서든지 뒤로
물러서고 싶었다. 자신의 의지에 반하는 본능적인 두려움이 신체의 신경마저 한순간에
장악해 버렸음을 뒤늦게 깨달아 본들 스스로에게 돌아오는 유익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겨우 그의 입에서는 자신의 이런 상태를 모두에게 알리는 한 소리 신음성이
들릴 듯 말 듯 새어 나오니,으……으으말을 처음 배우는 어린아이도 아니고
듣지 못하여 말하지 못하는 벙어리도 아닐진대 그의 혀는 석고를 물어
굳은 듯 움직이지 못했다. 이것으로 보아 이는 단순히 상대에 대한 거역할수
없는 두려움 때문만은 아닌 듯 했다. 사실이 그랬다. 흑의 무사의 눈앞에서
다가서고 있는 삿갓괴인의 몸에서는 설명할 수 없는 기운이 뻗치고 있었고
그것은 의도된 작용으로 흑의무사의 몸을 옭아매었던 것이다. 적어도 이런 점에서
말(馬)에 기품 있는 자세로 적당히 거만을 떨면서 앉아 있어야 당연할
혈수천자는 자신의 수하보다는 조금은 나은 처지라 할 수 있었다. 그가 탄 말이
주인의 뜻을 거부하지 않고 뒷걸음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의 이런 행동이
신호라도 된 듯이 삼백삼십명의 인영들과 한 그림자를 이루고 있는 말들이
동시에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서고 있었다. 이 상황은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것이기에
당사자들인 일행들에게 극히 낯설고 이질적일 수 있었다.
묘한 긴장감이 강물의 흐름과 보조를 맞추며 사람들의 발 밑을 흘러다니고 있었고
그것은 불현듯 그들에게 무사로서의 자존심과 오기를 한 여름밤의 악몽처럼 일깨우고야 말았다.
이이…… 모두 멈춰라. 그리고 너, 너도 거기서 멈추어라.
흐흐흐흐삿갓괴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낮은 흉소는 불같이 일어섰던
일행들의 투기를 어렵지 않게 으깨어 버렸다. 모두 쳐라. 놈을 죽여라.
악을 써대며 명을 내리는 혈수천자의 모습은 언제나 당당하던 예전의 것이 아니었고
이것은 그를 아는 수하들에게도 동일하게 비쳐지고 있었다. 처음에 앞으로 나섰던
흑의무사는 정말이지 자신의 주군이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 없었다. 어느새 다가선
괴인은 어깨를 잇대고 한 선으로 숨쉬고 있었는데 감히 옆을 쳐다보아 알 수는 없으나
분명 그곳엔 마주치지 못할 두려움의 원천이 불을 밝히고 있을게 분명했다.
숨죽여 호흡을 끊어 가는 흑의 무사의 목에서는 거칠게 걸려서 넘어오는 투박한 숨이
토해지고 심장은 요동쳐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나는 너희들 같은 피라미들에게는 관심도 없지만 내 친구는 그렇지가 않거든……
스스로 운이 없음을 한탄해라. 내 손에 피를 묻히기 싫으니 모두 자결해라.
흑의무사의 오른쪽에서 들려오는 그 소리는 삼백명이 넘는 자신들의 일행들에게
하는 말이 분명해 보였다. 모두 저 자를 포위하라.자랑스런 주군은 기껏
그런 명이나 내리고 있었기에 흑의무사의 낙담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한 번의 손짓으로 상대를 두쪽내던 주군의 륜은 더 이상
절대의 믿음을 약속하지 못했다. 헉……흑의 무사의 어깨에 괴인의
하나밖에 없는 손이 놓여지자, 헛 바람을 삼키며 기함하고야 만다.
한심한 놈들이군. 너희들에게 더 이상의 시간을 소비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겠군.
지루하니깐 될 수 있으면 빨리 끝내자. 세상에 이 정도로 오만한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그는 진정 눈 앞에 보이는 삼백 기의 기마대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아무렇게나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땅바닥을 굴러다니는 돌멩이쯤으로 보인단 말인가?
그도 아니라면 스스로를 신으로 여기는 실성한 사람이라도 되는 것인가?
어쨌든 상관은 없어 보였다. 혈수천자의 손이 들리는가 싶었더니
앞으로 힘차게 뻗어가자 뒤의 기마대는 언제 그랬느냐 싶게 용맹스럽게
말을 몰아 괴인의 사방을 에워쌌다. 동작은 빠르게 취해졌지만
그들의 표정만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삿갓괴인의 태연한 신색을 확인하자
그들의 표정엔 불안감만이 기승을 부리며 표면으로 떠오르고 있을 뿐이었다.
달빛도 숨을 멈추었고 바람도 잠잠해 졌다. 삿갓괴인은 흑의무사의 어깨에
올려져 있던 손을 이동하여 삿갓의 끝을 움켜쥐었다.그가 움직임을 보이자
흑의무사들은 한 동작으로 무기들을 빼어 들었다. 그들이 토해내는 거친 숨결과
그들의 검과 도에서 뿜어지는 빛들이 어우러져 장내에 긴박감을 더할만한
긴장을 일층 무겁게 얹어 주었다. 모두의 시선은 괴인의 손에 머물렀고
이를 즐기기라도 하는 듯이 괴인의 손은 느릿하게 삿갓의 끝을 들어올리며
가려있던 얼굴을 달빛아래 확연하게 드러내었다. 완전히 드러난 괴인의 얼굴은
마주보기가 두려울 정도로 괴이한 것만은 틀림이 없었다. 만약 어둠 속에서 불현듯
홀로 마주쳤다면 심장이 멈추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전혀 없는 그런 용모였다.
그는 천마였다. 천마교의 창시자이자 무림사 최고의 고수라고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는 전설,
그 자체의 인물인 것이다. 이런 것을 알리 없는 흑의무사들은
자꾸만 움츠러드는 마음을 다잡아 일으키며 투기를 불태웠다.
혈수천자의 명이 떨어지면 언제든 공격을 감행할 수 있는 준비를 마쳐놓고 있었고
그들이 내뿜는 기운으로 장내의 공기는 한껏 팽팽하게 고조되어 갔다.
천마의 옆에 서 있는 인물은 사건의 중심에 있음에도 마치 방외자라도 된 듯
어떤 움직임도 없었다. 아니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었다.
손가락 하나라도 꼼짝하는 날에는 더 이상 숨쉬는 행복을 보장받을 수 없으리라 여겨졌다.
쳐라.드디어 혈수천자의 입에서 공격명령이 토해졌다. 누구도 기다리지 않았던 순간이기도
했으므로 그들은 순간 흠칫거렸고 그 순간, 천마의 손에 들려 있던 삿갓이 허공을 향하여 쏘아졌다.
순식간에 삼십여장까지 이른 삿갓이 불을 뿜으며 터져 나갔다. 이런…… 신호탄이었나?
그렇다면……혈수천자는 멍하니 그것을 쳐다보며 빠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촤촤촤기이한 소리가 밤의 적막을 찢어오며 묘한 여운을 남기고 있었고 그 방향은 강 쪽이었다.
괴인은 느긋하게 허공의 한 점에 시선을 둔 채 움직이지 않았으며
혈수천자의 공격명령을 수행해야 할 수하들도 몸을 정지하고 소리가
난 쪽을 쳐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강 위엔 무엇인지 모를 그림자들이 빠르게 이쪽으로
이동해 오고 있었다. 세상에 그러고 보니 그것들은 물위를 스치듯이 밟고 오지 않는가?
‘세상에.’혈수천자는 놀라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육안으로 구분이
가능한 지점까지 다가온 그것들은 분명히 사람의 형체를 하고 있었고
물경 100을 헤아리고 있었다. 그가 이렇게 놀라는 이유는 물을 밟고 몸을 띄우는
경지라는 무력답수(無力踏水)나 물을 밟고 빠르게 뛰어가는 등평도수(登萍渡水)의
절정경신법을 펼쳤기 때문만은 결코 아니었다.
자신 또한 저 정도의 경공이라면 손쉽게 펼칠 수가 있다. 문제는 그 숫자에 있었다.
100여명이나 되는 인원이 너무나 능숙하게 물위를 스치듯이 뛰어오지 않는가?
대체 어떤 집단이 내공 100년 이상이 아니면 흉내조차 불가한 절정경신법을 익힌 고수들을
이리도 많이 보유하고 있단 말인가? 그의 생각은 당연히 무림맹이나 마도련에
머물 수밖에 없었지만 눈앞의 괴인을 다시금 쳐다보고는 고개를 젓고 말았다.
어쨌든 자신들은 지금 함정에 빠진 셈이었다. 비록 인원이 적들의 세배에 이른다지만
자신이 알기에도 강 위를 뛰어오는 고수들 정도는 직속수하들 30명을 제외하고는 없다고
할 수 있으니 위험을 쉽사리 벗어나지는 못할 것임을 절절히 직감하고 있었다.
다가오는 인물들 중 선두에 있는 자들이 물을 박차고 허공 중으로 뭣들 하는 거냐?
정신들 차려라. 모두 수비대형으로……혈수천자의 다급한 명은 채 이어지지 못했다.
어느새 십 여명의 적들이 무리 중에 뛰어드는 것이 눈에 잡혔기 때문이다.
천마는 느긋하게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고 속속 나머지 인원들이 합류하며
흑의무사들을 핍박해갔다. 그들 역시나 흑의를 입고 있었는데
가슴에 붉은 혈룡을 수놓고 있었다. 천마의 옆으로 한 사람이 사뿐히 내려섰다.
황제(皇帝)의 검(劍)-90
[조사를 뵙습니다.]천마에게 전음을 보내며 고개를 깊숙이 숙이는 자의
얼굴은 너무나 준수했다. 달빛을 받아 더욱 신비스럽게 보이는 자는 다름 아닌
옥기린 야율정혼이었다. 그는 마황검위대 16명의 소대주중 일인이기도 했고
그와 함께 장내에 나타난 인물들 역시 마황검위대의 대원들이었다.
한 놈만 빼고 모두 죽여라.천마의 명이 있자 옥기린도 격전 중으로 합류해 갔다.
그의 입가에 매달린 미소가 더욱 진득한 살기를 느끼게 했다. 혈수천자는 다급해졌다.
예상을 못한 바는 아니었지만 자신의 수하들은 정체모를 적들에게는 역부족이었다.
그나마 비슷한 수준을 보이는 자들이라곤 직속수하들 삼십인 정도였고
그들 역시 힘에 벅찬지 연신 물러서기 바빴다. 적들은 잔인했고 망설임이 없었다.
일 검에 목이 달아나는가 하면 허리가 두 동강이 나 바닥에 엎어졌고
무기마저 산산이 부서져 버리는 예가 빈번했다. 마황천위대는 천마교에서도
40대 미만의 비교적 젊은 층들 중에서 가장 강하다 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
그런 그들이고 보면 지금과 같은 현상은 지극히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혈수천자는 속속 쓰러져가는 수하들을 돕기 위해 몸을 솟구치려 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생각에 불과했고 당장에 그에게 다가서고 있는
적을 경계해야만 했다. 조금전 당도한 무리들 중의 수장으로 보이는 자!
자신의 사형만큼이나 잘 생긴 사내가 다가오고 있었고 다가서고 있다
판단한 순간 혈수천자는 두 개의 륜을 꺼내었다. 양쪽에 나누어 잡은 륜의
촉감이 서늘하게 정신을 일깨워갔다. ‘속전속결이다. 어차피 저 뒤에 있는 놈은
인정하기 싫지만 나로서도 감당할 수 없는 고수다. 그렇다면 이 놈을
최대한 빠른 순간에 죽이고 도주하는 편이 상책이다.’혈수천자는 그 짧은 순간에도
살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미 대세는 기울어가고 있었다.
수하들을 구해내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그럴 바에는 자신이라도 살아남아 복수하는 편이
나으리라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었다. 옥기린은 지극히 평범한 신법으로
혈수천자가 탄 말을 향해 다가섰다. 둘의 간격은 오장!
한번의 도약으로 다가설 수 있는 거리임에도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그 또한 상대가 결코 만만한 놈이 아님을 직감한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의 성격자체가
일을 함에 있어서 느긋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의 손에는 흔한 쇠 조각 하나
들려져 있지 않았기에 혈수천자는 상대가 육장을 주로 사용하는 자임을 간파할 수 있었다.
둘이 차차 간격을 좁히는 모습을 쳐다보던 천마는 홀로 격전을 감상하고 있었다.
여전히 그의 옆에는 처음에 나섰던 흑의 무사가 꼼짝하지 못하고 서 있는 중이었다.
천마의 시선이 슬쩍 그에게 머물자 그는 온몸을 경직시키고야 말았다.
천마의 고개가 적들을 주살하고 있는 마황천위대의 몸짓을 쫓아 움직여 갔다.
‘그럭저럭 훈련들은 되어 있는 것 같군. 저 정도면 어떤 일을 맡겨도 마음졸일 일은 없겠군.
그러나 뭔가 부족하다.’그가 내린 판단의 의미는 무엇일까? 대체 무엇이 부족하단 말인가?
삼백삼십명대 백명의 싸움이건만 마황검위대는 거침없이 적들을 쓸어 넘기고 있었는데도
부족한 것이 있단 말인가? 옥기린과 혈수천자의 간격이 이장에 다다랐을 때였다.
혈수천자는 말 등에서 몸을 솟구치며 허공 중으로 비호같이 떠올랐고 그의 양손에서는
황홀하게까지 여겨지는 빛 무리가 충만되어갔다. 그는 양손을 교차하며 가슴 앞에서
모으는가 했더니 다가서는 옥기린을 향해 홱 뿌렸다. 륜은 빛 무리를 이끌고는
어둠을 가르며 기이한 소음과 함께 곧장 옥기린을 쪼개갔다. 지극히 평범한 직선을 택해
다가오는 두 개의 륜은 어찌 방비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강하고 빨랐다.
옥기린은 두 손을 펼쳐 벽이라도 문지르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쾅허공 중에 있던
혈수천자는 공간이 터져 나가는 압력에 더욱 위로 떠올라 갔고
옥기린은 곧장 땅으로 떨어져 버렸다. 어느새 새하얀 소수를 지닌 옥기린은
좀 전의 격돌에도 아무런 상처도 없이 멀쩡했다. 그는 땅위에 지천으로 널린 풀잎을
지르밟고 또 다시 몸을 솟구쳤다. 여전히 그의 손은 새하얗게 변색되어 있었는데
핏줄이라도 비칠 듯이 점차로 투명해지기까지 했다. 옥기린의 수강과 부딪힌 륜은
다시금 혈수천자의 손안으로 회수되었다가 공간을 찢으며 재차 날아왔다.
순간 옥기린은 열 개의 길고 가늘기까지 한- 어찌 보면 여자의 것 같은 손가락을
바닥 쪽으로 오므리며 손바닥의 중심을 돌출 시켜 내밀었다. 그리고는 곧장 하늘을
떠받들기라도 하려는 자세로 허공에 무수한 원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윙윙대는 소리와 함께 손 그림자들이 불어나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때였다.
순식간에 삼십여개로 불어난 듯한 손바닥이 아까 와는 달리 새끼줄이라도 꼬는 듯
기이한 궤적을 그리며 짓 쳐드는 두 개의 륜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저, 저 수법은 대체 뭐냐?’아무리 촘촘한 채라도 물을 담아낼 수는 없는 법이다.
그것은 마치 물과도 같았다. 수 십 개나 되는 환영을 끌고 쏘아지는 손 그림자들은
그냥 내버려두어도 전혀 타격을 주지 않을 것이란 생각마저 들 정도로 실체를 비껴가고 있었다.
더군다나 목표점이 분명한 몸뚱이마저 회전을 일으키며 희미해져버리자 두 개의 륜은
공간만을 긁어대며 땅위를 낮게 스쳐가야만 했다. 두 개의 륜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곧장 방향을 꺾어 혈수천자의 곁으로 다가오기 위해 선회했다. 그러나 그 전에 그는
자신에게 다가서고 있는 손 그림자를 해결해야만 했다. 이럴 때는 피하고 보는 게 상책이다.
그는 곧장 허리를 비틀며 좌로 이장이나 몸을 이동했고 그것도 모자라 두 발을 휘두르며
위로 일장이나 더 떠올랐다. ‘이, 이놈이’여전히 자신에게 다가서던 손 그림자는
멈춤이 없이 전진해오고 있었다. 그 뒤를 두 개의 륜이 따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무의식 중으로 두 손을 뻗쳐 장력을 발출 했다.펑가죽 북 터지는 소리와 함께
발출된 장력은 당연히 눈앞의 손 그림자를 잔가지 치듯이 꺾어버려야 했다.
팡억혈수천자의 몸이 동그랗게 말리더니 허공 중에서 연속적으로 맴돌고 만다.
그는 자신의 장력이 상대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자 몸을 웅크리며 두 팔을 오므려
상대의 공격을 호신강기를 일으켜 막으려 했던 것이다. 어차피 자신을 공격하는
그 순간 상대 역시나 륜의 공격에서 제외될 수 없다는 계산에서 살을 주고 뼈를
가르겠다는 나름대로의 회심의 계산이 깔린 선택이었다. 그러나 그가 받은 타격은
호신강기를 일으키고 거기다가 두 팔로 막았음에도 적다 할 수 없는 것이었고
타격 당하는 순간, 충격의 여파로 회전을 한 것이다. 그는 오장이나 뒤로 날려가며
땅에 간신히 내려섰다. 착그의 양손으로 돌아온 륜을 주의 깊게 쳐다보던
그는 상대에게 아무런 상처조차 주지 못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정말이지 그가 이런 경우까지 당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는 예전부터 중원의 무공을 은근히 깔보는 버릇이 있었다.
비록 천황부내에서는 10위 내에 간신히 들어가는 실력이지만 중원에 나가기만 하면
감히 자신의 앞을 막아 설 수 있는 자는 없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저 눈앞의 인간 같지도 않은 괴물도 아닌 그의 수하쯤으로 여겨지는 놈에게조차
자신이 밀린다고 생각하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빨리 이곳에서 도망가야겠다는
애초의 계획은 벌써 잊어버리고 말았다. 어떻게 해서든 지금 당한 치욕을 상대에게
돌려주지 않고서는 이곳에서 살아난다고 해도 전혀 기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는 빠르게 상대를 살펴갔다. 역시나 상대는 아무런 상처도 없이 멀쩡하게 서 있었고
그를 주시하고 있었는데 그 시선에는 일말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왠지 스스로가
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뒤에 있던 괴인이 입을 열었다.지루하군.
너 지금 뭐 하는 거지?자신의 수하에게 말하는 것 같았다. 옥기린은 천마조사가
하는 말 뜻을 알고서는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빨리 끝내겠습니다.
하긴 오랜만의 실전을 싱겁게 끝내긴 싫겠지. 그렇지만 이건 비무가 아니다.
전력을 사용하면 오 초식 안에 끝낼 수 있는 놈에게 너의 그런 행동은 오히려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빨리 끝내거라.존명.’저, 저놈들이 지금 뭐라고 지껄이는 거냐?
나를 오 초식 안에 끝낼 수 있다고? 이런 똥물에 튀겨 죽일……
‘혈수천자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자신이 자부하기를 천하제일 방파인
천황부에서도 자신보다 강한 인물은 일곱 정도에 불과하다. 그런데 저 놈들이
지껄이는 말들은 자신 따위는 안중에도 두지 않는 오만방자한 말이지 않는가?
물론 좀전의 격돌로 상대가 자신에 뒤떨어지지 않는 실력자라는 것은 인정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스스로 전력을 기울인다면 결코 상대가 자신을 능가하지 못할것이라
자신하고 있었기에 자부심에 상처 입은 그의 분노는 금세 주체하지 못할 살기로
화해 이성을 마비시키고야 말았다. 아니다. 물러서거라. 지켜보기도 지루하니
내가 손을 써야겠다.막 앞으로 돌진해 가려던 혈수천자는 괴인의 그 말에 등줄기가
싸늘해짐을 느꼈다. 이제야 상황판단이 선 것이다. 그가 잠시나마 잊고 있었던
두려움의 원천인 괴인이 직접 나선다는 말은 그에게 현 상황을 새롭게 인식케 하기에
부족하지 않았고 여기서 죽을 수밖에 없다는 절망감을 빠르게 그에게 요구하고 나섰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도망가도 모자란 판에……
‘그는 그제야 주변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삼백이 넘던 수하들 중에 살아
남아 있는 자들은 백 명도 채 안되었다. 그 짧은 시간동안 그 많은 수의 수하들이 죽음을
맞았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오금이 저려왔다. 적들은 그의 예상보다도 훨씬 강했던 것이다.
모두 뒤로 물러서라.천마는 내공을 실어 큰 소리를 발했다. 그의 외침소리가 있자
마황검위대 일 백 검사들은 순식간에 뒤로 물러서며 공간을 벌리고 섰다.
그들의 일사분란한 퇴각에 살아 남은 천황부 백여명의 무사들은 어찌된 영문인지를 몰라
어안이 벙벙해 있는가 하면 지금까지 스스로가 살아 있음에 감격해 하는 놈들도 보이는 것 같았다.
대체로 살아 있다고는 하나 여기저기 입은 가볍지 않은 상처로
두 발로 땅을 딛고 서 있는 것조차 버거운 상태들이 태반이었다.
천마의 시선이 옆에 있는 흑의무사에게 고정되었다.
그의 하나밖에 없는 손이 상대의 어깨에 다시 슬그머니 자리를 잡자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놈의 전율이 느껴졌다. 온 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어대는 사내를 향해
그는 나직한 음성을 토했다.너는 이미 죽었다. 무사로서의 자부심은 어디 가고
이리 처량한 모습을 보인단 말인가? 살아 있어도 가치가 없으니 차라리 죽거라.
죽음에 대해 이리도 가벼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흔하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그 말이 한 사람에게만은 그 무엇보다 절실한 박탈감을 줄 것이지만 이 또한
다른 사람에게는 그다지 대단하지 않은 일상의 흔한 일처럼 여겨지는 듯 했다.
천마의 손이 순간적으로 붉어진다 여겨지고 빛은 천마의 손을 통해 흑의무사의
어깨와 가슴과 옆구리를 직단으로 가로지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푸확사내의 반대쪽 옆구리가 몸 속의 내용물을 남김없이 쏟아내며 터져 나갔다.
피와 살과 조각난 뼈…… 한 사람의 삶이 지닌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애처롭게 허물어지고 있었다.
천마는 자신에게 무슨 권한을 부여받고 이런 살행을 저지르는지를
설명할 생각 따위는 애초에 없는 인간! 그가 하는 일은 언제나 정당하며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기준이야말로 세상을 움직이는 질서의 유일한 근거라고
믿는 사람이지 않은가? 그것으로 족했다. 그는 자신의 뒤로 물러서 있는
마황천위대의 기대에 찬 시선의 배웅을 받으며 지독하다 싶을 정도의 잔인한 살수 앞에
기가 죽어 있던 살아남은 천황부 인물들을 향해 죽음의 집전을 행하고자 발길을 떼어갔다.
세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할 사람들이 거기에 있었다. 죽음을 도외시하고 끝까지 투쟁하다
죽는 것과 조롱과 멸시가운데서도 살아날 가능성은 없지만 도주를 취해보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모든 희망을 접고 조용히 죽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어느 것 하나 그들에게 충분한 만족감을 주지는 못하지만 그들은 이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고 그것을 결정할 사람은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저 자는 인간이 아니다.
도저히 측정조차 하지 못할 정도의 극강한 고수가 분명하다.
더군다나 저 잔인함은 인간의 심성이라 여겨지지 않을 정도이다. 빌어먹을……
여기서 내 인생이 끝나야 한단 말인가?’
정말 오랜만이죠?이제야 제가 연재할 공간이 생겨났네요.
이 홈은 앞으로도(황제의 검이 끝난 이후에도) 계속 사용할 홈입니다.
앞으로 당분간은 매일 연재하도록 하겠습니다.
비축분이 있냐고 물으신다면………….없습니다.그 동안 뭐했냐고요?
놀진 않았습니다. 삼권 수정하고 앞으로의 전개를 다시 한번 검토하고
세밀하게 짜는 등을 했습니다. 저는 원래가 연재하지 못하면
글을 빨리 진행시키지 못하고 써 놓으면 연재 안하고는 못 배깁니다.
그래서 부득이 이렇게 되었습니다. 당분간은 연재에만 신경쓰도록 하겠습니다.
(사권 수정들어가기전까지)감사합니다. 도깨비 배상.
황제(皇帝)의 검(劍) – 91
며칠 전 만해도 그의 입장은 항상 반대쪽을 점하고 있었다.
운명은 이리도 손쉽게 위치를 바꾼 채 인간을 조롱한단 말이었던가?
혈수천자는 손안에 쥐고 있는 두 개의 륜을 힘주어 잡았다.
죽음이 두렵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못내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기에
거부할 수 있다면, 비참한 삶일지언정 구걸하여 생명을 연장할 수 있다면
그리하고 싶었다. 그의 입을 비집고 메마른 웃음이 흘러 나왔다.
푸흐흐흐자신이 지금껏 죽여왔던 사람의 수 역시나 결코 적다 할 수 없었다.
그는 이런 행위자체를 지극히 당연시 해 왔다. 그가 가장 경멸하는 것 중에
하나가 나약함이었고 스스로를 지킬 힘도 없어 당하는 고통과 고난이라면
언제든 스스로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었다. 정작 자신이
그런 입장이 되고 보니 죽어가던 자들의 눈빛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것도 같았다.
잠시의 감상이 그를 이 위기에서 구출해주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는
그의 입에서는 마지막 죽음의 형태를 결정짓는 명령이 터져 나왔다.
천황부의 전사들이여! 장렬하게 산화하자.저 놈을 죽여라!
라는 따위의 말은 할 필요도 없었다. 그 정도로 눈앞의 괴인은 도저히 파괴할 수 없는
철벽처럼 여겨졌고 그것은 극복할 수 없는 한계상황으로 다가왔다.
그의 명이 떨어지자 지금까지와는 다른 도저히 조금 전까지 두려움에 젖어
어찌할 수 없어하던 무기력한 자들의 눈빛이 아닌, 죽음마저도 초월한 듯한
맹렬한 살기와 투기가 힘차게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천마를 향해 몸을 솟구쳐왔다. 검과 도를 하나로 하여
전력을 내뿜는 그들의 기세는 사뭇 대단한 감이 없지 않았다.
천마는 조롱이 아닌 감탄의 표정을 지었다. 호, 이제야 조금 무사들답구나.
너희들의 마지막을 나 또한 성의를 다하여 장식해주마.지금의 상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나직한 웅얼거림이 천마의 입에서 흘러나옴과 동시에
그의 몸이 모로 서는가 했더니 손을 앞으로 쭈욱 내 뻗었다.
그의 손은 점차로 커지고 있었다. 아니 그것은 단지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었고
실제로는 그의 손을 감싸고 강기가 물고기의 비늘처럼 벗어지고 있었다.
눈앞으로 쇄도해 들어오는 천황부의 고수들을 향해 천마의 손에서 비롯된
수강은 소리도 없이 그들 모두를 한꺼번에 쓸어갔다. 셀 수도 없이 많은 빛의
정령들이 한꺼번에 출몰하기라도 한 것 같았다. 퍽퍽퍽닿는 것은
그 무엇이든 뚫어버리는 위력은 보아도 믿기지 않는 것이었다. 피할 수도 없는 것이
자신들을 향해 전 방위를 메우며 쏟아지고 있었으니 어디로 몸을 빼낸단 말인가?
결국은 더 강한 힘으로 뚫고 나가는 수밖에 없었으나 안타깝게도 자신들에게는
그런 힘이 없었다.으악꺽처절한 비명을 토해내는 흑의인들의 몸은 터지고 갈라져
처참지경을 연출했다. 혈수천자와 천마의 뒤에 시립해 있던 일백 마황검위대
검사들 역시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눈앞의 흑의인들 중 온전히 고개를
들고 서 있는 자는 하나도 없었다. 천마는 별일 아니라는 듯 태연하게
혈수천자에게로 시선을 고정해 갔다.어서 덤비지 않고 뭐 하는 거냐?
자신에게 한 말이 분명하건만 그는 마치 딴 세계에서 울려 나오는 그래서 자신과는
하등 상관없는 것으로 여기고 싶었다. 정말이지 저런 사람이 존재하는 것도 못 마땅했고
하필이면 이런 자리에서 맞닥뜨린 것도 불운이라 여겨졌다. 이제 살아 남은 자라고는
자기 하나밖에 없음을 절감하는 것이 왜 이리 힘이 드는 일인지.
그때 문득 아까 괴인이 뱉어내었던 말이 섬광처럼 뇌리에 떠 오른 것은 정말이지
그가 생각해도 천운이라고 생각되었다.한가지 묻겠소.혈수천자의 침착한 음성은
모두에게 뜻밖으로 여겨졌다.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며 공격해오리라 생각했건만
그는 의외로 태연했으며 마치 오랜 지기에게라도 하는 듯한 대화를 시도하고 있지 않은가?
뭐냐?천마는 귀찮다는 듯이 짧게 내 뱉었다.아까 분명히 하나만 빼고 모두 죽이라고……
하지 않았소?천마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놈의 의도를 알았기 때문이다.
‘이 놈도 쥐새끼였군. 어떻게된 게 진정한 무사를 보기가 이렇게 힘이 드나?
죽는 것이 두렵다면 이 거친 세계에 발을 들여놓지 말 것이지……
에잉 마음에 안 드는 것들이야.’그랬던 걸로 기억하는데……
왜?지금 이 중에 살아 남은 사람은 나 하나인데…… 그럼 날 살려주겠단 말이요?
원래 천마가 하나만 빼고 모두 죽이라고 한 것은 한 놈을 살려 알아볼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랬던 것인데 놈은 용케도 그 말을 걸고넘어지며 생명을 구걸하고 있는 셈이었다.
천마의 푸른 얼굴이 꿈틀거리며 요동쳤다. 살고 싶나?
세상에 죽음을 앞에 두고 살고 싶다는 생각을 갖지 않는 사람이 있겠는가?
그런 점에서 혈수천자 역시 지극히 평범한 보통사람에 지나지 않았고
그의 입에서는 당연히 그의 내심을 반영하는 말이 다급하게 흘러 나왔다.그렇습니다.
살고 싶습니다.상대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필사의 노력을 금세 뒤바뀐
그의 어투에서 쉽게 알 수 있었다. 천마는 경멸의 눈빛으로 혈수천자의 아래위를 훑어보았다.
너는 나에게 복수를 하고 싶지 않나? 기회를 주지. 네 수하들의 죽음을 이대로 묻어 버린다면
아마도 원혼이 되어서라도 너를 괴롭힐 것 같은데……절 살려 주십시오.
전…… 할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번 뱉은 약속은 지키실 분이라 여겨지는군요.
허…… 천마의 뒤에 시립하고 있던 옥기린 역시나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었다.
삶을 구걸하다니……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었고 그것을 보자
더욱 상대를 죽이고 싶어졌다. 조사님만 아니라면 저 놈을 당장 쳐죽여 버리고 싶었다.
좀 전의 격돌 때 사정을 보아 줬던 것이 이제야 후회되기 시작했다. 좋다. 살려주지.
천마의 그 말에 각기 다른 반응들이 표출되었다. 혈수천자의 얼굴은 희색이 만연했으며
옥기린 등의 천마교 고수들의 얼굴엔 의외라는 눈빛과 말도 안 된다는 심경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대신, 너를 그냥 보낼 수는 없다. 너의 생명을 살려주는 대신 넌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그래도 하겠느냐?생각할 것도 없었다. 살아나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지상최대의 목표였으니……하겠습니다. 제가 어찌하면 됩니까?
그의 얼굴에는 이제야 살아 날 수 있다는 안도감에 겹쳐 상대가 어떤 요구를 할지
모르는 불안감이 새롭게 피어난다. 아주 간단하다.
내가 묻는 질문에 답하는 것과 하나를 두고 가면 된다.그야 어렵겠습니까?
어서 질문해주십시오.대체 천마는 혈수천자에게서 무엇을 알아내려는 것인가?
눈앞에 있는 놈의 태도로 보아서는 어떤 얘기라도 술술 잘 털어놓을 것만 같았다.
천황부의 중원세력과 너희들의 본진의 전력을 읊어 보아라.혈수천자는 난색을 표명했다.
마치 그것만은 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천마는 그의 그런 얼굴 표정을 살피더니 실소를 머금었다.하기 싫으면 말아라.
굳이 듣고 싶지도 않다. 전혀 쓸모도 없는 놈을 살려둘 만큼
난 자비롭지 못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혈수천자는 손을 쳐들며 빠르게 휘저었다.
그리고 무슨 말인가를 하고 싶어하는데 말이 되어 나오지는 못했다.
생명에 대한 애착이 보기보다 집요하지 못한 놈이었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놈들을 보면
난 개인적으로 아주 좋아한다. 그런 점에서 네게 죽음을 선사할 수 있게 되어 무척 기분이 좋구나.
그래 그것도 괜찮겠지. 자기가 속한 조직에 대한 충성과 의리를 지니고
사라져 가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겠지.
천마의 그 말에 혈수천자의 얼굴색은 점점 누리끼리해져갔다.
내, 내가 언제 말을 안 하겠다고 했습니까? 잠시 생각할 시간을……되었다.
갑자기 별로 듣고 싶지가 않아졌어. 흥미가 사라졌어.
그 딴 것 들어봐야 별 소용도 없고 말이다.대체 한 입으로 두 말을 할 수가 있는 겁니까?
너 또한 두 말을 하는데 나라고 지켜야 할 이유가 있겠느냐?말하겠소. 말하면 될 것 아니요?
‘정말이지 내가 어쩌다 이런 지경까지 처하게 되었단 말인가?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아야 한다.
내가 살아있고 나서야 모든 것이 의미가 있다. 죽은 뒤에 내 충성심을 알아 줄 사람들은 아무도 없다.
알아줘 본들 내게는 아무런 유익이 없지 않은가?
‘혈수천자의 얼굴은 내심의 결정을 보여주듯 빠르게 경직되어 갔고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의 입이 한참이나 지나서 힘겹게 열렸다. 본 천황부의 중원 세력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대상벌에 상주하는 인원은 이천을 넘지 않고 나머지는 현지인들이 대부분이며
그들은 우리의 존재를 알지 못합니다. 천황부의 본진의 전력은…… 으음……
사실상 우리들은 무림의 모든 세력들의 전력을 파악하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죠.
객관적으로 판단해 봤을 때 혈마천과 사사혈교가 우리와 비슷한 전력을 지니고는 있지만
엄밀하게 말해서 우리들보다 떨어진다 할 수 있습니다. 사사혈교는 숫자적인 면에서는
가장 많으나 절정고수의 수에서 뒤지고 혈마천 또한 우리보다 수적인 우위에 있지만
절정고수의 비중으로 따지면 우리보다 못합니다.
또한 자본력에 있어서는 무림맹도 우리의 상대는 아닙니다.
이런 모든 점을 감안한다면 객관적인 전력에서는 본 천황부가 최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말을 하고 있었지만 실제적인 정보는 그다지 많지가 않았다.
천마의 낯이 찌푸려지는 것 같자 혈수천자는 얼른 말을 바꿔 자세한 설명을 덧붙이기 시작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은 하나같이 도저히 적에게 알려져서는
곤란한 기밀에 속하는 것들이었고 그 자신도 이런 것을 알기에 말하는 내내 편치 않은 표정이었다.
‘참으로 한심한 놈이군. 부주의 제자라는 놈이 제 한목숨 부지하고자 조직의 기밀을 누설하다니.
이것만 보면 천황부란 곳도 한심한 곳이군.’그렇지만 그가 하는 말들은 결코 가볍지 않은 것들이었다.
특히 천황부 전력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오황의 세력은 실로 대단하다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들이 무림에 나타나야만 천황부의 진정한 실체를 볼 수 있을것이라는 말로
혈수천자는 설명을 끝내었다. 천마는 그의 설명이 끝나고 나자 흡족함을 얼굴 가득 나타낸다.
그것을 본 혈수천자는 자신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눈앞에 있는 괴인의 기분이 좋아진다면 약속 이행을 할 확률이 그 만큼 높아지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직까지도 괴인의 약속을 온전히 믿지는 않고 있었다.
그 만큼 무림이란 세계에 대한 불신감이 뿌리깊이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좋다. 살려주지. 어쨌든 약속은 약속이니깐…… 이제 하나를 남겨두고 떠나도 좋다.네? 하나라니요?
황제(皇帝)의 검(劍) – 92
혈수천자의 얼굴엔 풀길 없는 의문에 대한 궁금함과 불안함으로 가득 찼다.
분명히 처음에 그가 그런 말을 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별다르게 주의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대체 무엇을 놓고 가란 말인가?
혈수천자는 그의 궁금증을 풀어줄 괴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천마의 입 꼬리가 슬쩍 위로 말려 올라가는 듯 싶더니 묘한 시선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하는 말,난 원래가 적이라고 판단되는 자들을 여태껏 살려준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한번 한 약속을 번복한 적도 없었지. 결국 이 두 가지 요구를
모두 충족시키려면 그 만한 대가를 치러야 마땅하겠지.’그래서 뭘 어쩌란 건가?
죽이겠단 말이냐? 살려주겠단 말이냐? 이런 빌어먹을……’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어이없는 지금의 상황 앞에 그는 튀어나오려는 울화를 삭혀야만했다.
아직은 성급하게 희망을 포기해야 할 단계는 아니었다.
그래서…… 너의 신체 중 일부를 여기다 두고 가면 된다. 어느 곳이든 상관없다.
목을 두고 갔으면 좋겠지만 네가 거부할 것이고…… 팔이나 다리나 어디든 상관은 없다.
헉…… 그, 그게 진심으로 하는 소리요?
그럼 지금 내가 네놈과 농담이나 주고받고 있다고 생각하나? 빨리 해라.
네놈 얼굴 마주보기도 슬슬 지겨워온다.’그건 나도 마찬가지요.
아니, 오히려 내가 더하오. 꿈에서라도 볼까 두려운 그 상판때기를 마주보아야 하는
괴로움을 애써 견디고 있건만……’뭐하고 있는 거냐? 내가 잘라줄까?
한가지 네가 알아두어야 할 것은 가끔 나는 과도하게 힘을 쓰는 버릇이 있다.
이를테면 팔 하나를 잘라내려다 상체전부를 떡으로 뭉개버릴 수도 있다는 말이지.
헉혈수천자는 어쩔 수 없음을 절감하고 말았다. 어찌 스스로 자신의 몸의 일부를
잘라낼 수 있겠는가 만은 그렇게 해서라도 살아날 수 있다면 그것이 최선이라 생각되었다.
그는 염두를 굴렸다. 결국 양쪽 팔 중에 하나를 자르는 수밖에 없을 것이라 판단되었다.
‘둘 중에 비중이 약한 왼쪽 팔을 자르는 수밖에……
‘그의 눈은 어두움도 태워버릴 듯이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몸의 일부를 스스로 잘라내어야 한다는 비애감, 이런 일을 강요하는 상대에 대한 적개심,
스스로의 무능에 대한 분노까지…… 복잡한 심경을 담은 눈빛은 쉬이 꺼질 것 같지 않았다.
어금니를 꽈악 다져 무는 혈수천자의 시선 깊은 곳에서는
그 모든 감정을 앞서는 안타까움이 물결치고 있었다. 자신의 왼팔을 다시 한번 쳐다보고 나서
고개를 들어 천마의 시선과 조우했다.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강하게 맞섰다.
기억해 두시오. 내가 지금은 힘이 없어 이런 수치를 당하지만…… 분명 이 빚은 갚고야 말겠소.
당신의 하나밖에 없는 팔을 내 언젠가는 몸통에서 분리시키고야 말 것이오.말을 하는 말미에
그의 오른손에 쥐어져 있던 륜이 왼쪽 어깨쪽으로 대어졌다. 힘만 주면 팔은 잘려져 갈 것이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천마의 눈은 아무런 감정도 배어있지 않았다. 웃기고 있군.
그런 짓을 하고서 겨우 목숨을 구걸 받는 주제에 할말은 다 하고 있군.
그런다고 수치가 가려지나?천마의 뒤에 있던 옥기린이 장난처럼 뱉어낸 혼잣말이었지만
그것은 혈수천자에게 너무나 큰 충격으로 되새겨졌다.그래 나는 비겁자에 배신자에
이 세상에 살아있을 가치도 없는 놈이다. 그렇지만 복수는 내 생명이 남아 있는 한 분명히 할 것이다.
네 놈의 아가리도 내 잊지 않고 찢어발겨 주마. 흐흐 다시는 그 입으로 음식을 처먹지 못하게 해주겠다.
죽는 그 날까지 날 기억할 수 있도록 처참하게 짓이겨주겠다.그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스스로의 팔을 잘라내야 한다는 두려움과 분노 때문에
그는 자신이 어떤 상황 중에 있다는 것도 잊은 것 같았다. 천마의 눈이 번쩍 빛을 발했다.
‘저 녀석 죽여버릴까?’그 자식 더럽게 시끄럽네. 팔 하나 자르는데도 별 거지같은 소리를 다 하는군.
아가리를 찢든 팔을 잘라 내든 차후의 일이니 어서 서둘러라.
사내자식이 그것하나 하는데 오도방정을 떨어대니……
셋 셀 동안 하지 않으면 네 놈을 세로로 찢어 죽이고야 말겠다.
하나.팍헉, 혈수천자의 무릎이 땅에 잇대어졌다. 그의 륜은 너무나 간단히 왼쪽 팔을
어깨에서 분리해버린 것이다. 땅위로 떨어진 팔은 펄떡거리고 있었고 그것을 바라보는
혈수천자의 눈은 극도로 충혈 되어 터져 나갈 듯 했다. 피가 샘솟듯 쏟아져 나왔지만
그는 지혈할 생각도 없이 말 위로 당당히 올라탔다. 다시 한번 주변을 돌아보더니
마지막 시선은 역시나 천마에게로 주었다.기억해라. 나는 반드시 네놈들에게 복수하겠다.
내 팔이 썩어 대지와 동화되기 전에 이 복수는 꼭 이루고야 만다.
이랴.히히히히두두두두하나밖에 없는 손으로 말고삐를 채어 자신이 왔던 방향으로 내달렸다.
급하게 달려가는 말을 쳐다보며 천마는 고개를 갸웃했다.나 같으면 지혈부터 하겠다.
역시나 예측할 수 없는 놈이야. 곧 죽어도 큰 소리를 치고 가는군. 멍청한 놈.
그런다고 내가 널 멋있게 볼 줄 알았다면 큰 착각이다 이 놈아. 아마 얼마 가지 않아
현기증으로 쓰러질지도 모르겠군. 클클클천마의 중얼거림에 옥기린은 입가에 미소를 달았다.
그의 눈 역시나 장내에서 사라져간 혈수천자의 자취를 쫓고 있었다.
‘저런 놈은 위험한 법인데…… 대체로 저런 성격의 소유자는 어떤 야비한 짓도 서슴지 않고
그래서 적이 되었을 때는 기회가 포착되는 즉시 죽여야 한다. 그것을 모를 리 없는
조사께서 무슨 이유로 놈을 살려두었단 말인가?’옥기린.하명하십시오.너는 지금 즉시 사천에
있는 마황검위대 삼개조와 합류하도록 해라. 그곳에 가면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게될 것이다.
존명.하늘이 부여한 삶의 기회를 박탈당한 시체들이 주변에 어지럽게 늘려 있었다.
그들이 흘린 피를 가슴으로 머금은 대지는 더 이상 강할 수 없는 어조로 항변하고 있는 듯 했다.
언제까지, 언제까지 죽고 죽이고를 반복할 것인가?
언제까지 이 땅을 너희들의 추악한 욕망으로 더럽힐 것인가? 라고.
하늘은 푸르고 물빛도 고와 발을 담그고 발바닥을 차노라면 나무와 하늘과 아름다운 전각,
수면에 새겨진 그 모든 것이 새롭게 묻어나며 형태를 바꾼다.
둘의 손이 서로를 느끼고 있은 지는 꽤 오래 되었다.
시선은 전면을 향하고 온 몸의 신경은 서로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다.
작은 호흡마저 놓치지 않으려는 세심함이 서로의 체온으로 전해졌다.
파천은 정말이지 오랜만에 갖는 여유로움을 온몸으로 만끽하고 있었다.
옆에 독고설란을 두고 있어 그 마음은 더 아늑한 지도 몰랐다.
처음 독고설란이 호수에 발을 담그자는 제안을 했을 때만 해도 파천은 망설여야만 했다.
그의 현 위치나 그가 지금껏 보여준 모습이나 현재의 무림정세의 긴박함에 비추어 볼 때
자신의 이런 행동은 어딘가 어색하고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고 이런 것보다
더 결정적으로 그를 망설이게끔 한 것은 왠지 모를 쑥스러움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이성적인 판단은 결코 사랑하는 여인의 끈질긴 요구보다 강하지 못했다.
스스로의 결정을 허물어뜨리면서 이렇게 행복해 본 것은
그의 생애에 처음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설란이 좋아하는 모습을 본다는 것은
그에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또 다른 만족감을 주었다. 그것이 어디서 기인하는지는 몰랐다.
아니, 몰라도 좋았다. 하하 그래서 나와 함께 시진에 나가보자는 건가?네…… 왜 안되나요?
독고설란이 살며시 고개를 들며 수줍게 물어오자 파천의 만면에는 흡족함이 피어나더니 금세
얼굴전체를 장악해버린다.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코를 찡긋거리는
파천의 반응에 설란은 안도의 표정을 보였다. 그녀는 자세히는 알지 못하지만
맹내의 분위기가 그리 썩 좋지 않다는 것 정도는 느끼고 있었다. 그랬기에 자신의 요구가
다소 무리하다 여겨진 것도 사실이었고 파천이 이런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가 염려스러웠던 것이다.
뭐, 안될 거야 없지만…… 지금은 시기가 좋지 않은 것 같으니깐, 나중에 가면 안될까?그래요?
그럼…… 할 수 없죠. 대신 나중에는 꼭 설란을 데려가신다고 약속해줘요.후후 그러지.
독고설란이 손가락을 내미는 것을 바라보며 파천 또한 손가락을 내밀었다.
둘의 손가락은 서로의 몸을 꼬아갔다. 둘은 이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공동의 운명을 가졌다.
둘의 이런 상황과 마찬가지로 두 개의 손가락은 하나로 얽혀 들었다.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 속에는 서로에 대한 믿음만이 가득했다.
응?후닥닥파천이 갑자기 물 속에 들어가 있던 발을 꺼내놓으며 벌떡 몸을 일으키자
그녀는 영문을 몰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파천은 난처했다.
저쪽에서 누군가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자신의 하고 있는 모양을 내려다보고는 두 손을 펼치며 잠시 어쩔 바를 몰라했다.
‘이게 무슨 망신이람.’그는 어차피 들킨 것 딴청을 부리기 시작했다.
가까이 다가온 사람은 다름 아닌 개방의 태상방주이자 무림맹의 장로원주이기도
한 개왕 풍천호였다. 흠흠…… 풍노가 여긴 웬일이오?역시 평소에 하지 않던 짓을 하다
들킨지라 어색함을 모면하고자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돌아서 있었다.
보지 않아도 그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짐작이 갔다.
[지존. 큰일났습니다.]갑자기 풍천호의 전음이 들리자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려 세웠다.
그의 얼굴은 어느새 얼음장을 한 겹 씌운 것처럼 차갑게 굳어 있었다.
개왕의 성격을 익히 아는지라 그가 이렇게도 다급하게 위기를 알릴 일이라고는
그다지 많지 않았고 그것이 파천의 얼굴을 빠르게 경직시킨 이유가 된 것이다.
[대체…… 무슨 일인데 호들갑을 떠는 건가?]
[이…… 서찰을 보십시오.]
풍천호의 손에는 땀에 흠뻑 젖은 서찰이 여러 겹으로 접혔다 펼쳐진 흔적을
지닌 채 파천의 손으로 들어왔다. 파천은 서찰을 찢듯이 펼쳐들었다.
한참을 읽어 내려가던 파천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이, 이…… 미련한 놈!
파천의 얼굴엔 분노와 다급함이 함께 피어났고 그것을 확인한 풍노는 어찌해야
할지를 몰라 파천의 반응만 살피고 있었다. 대체 무슨 내용이 길래 파천이 이 정도의 반응을 보인단 말인가?
황제(皇帝)의 검(劍) - 93
파천의 손에서 서찰은 여지없이 구겨져 버린다. 파천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창은 열려져 있지만 영상은 맺히지 않았다. 눈 속에서는 하늘을 흘러 다니는 구름만이 의미 없이 비치고 있을 뿐이었다. 파천의 얼굴은 좀체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의 이런 모습을 대한 독고설란은 영문도 모른 채 불안한 가슴을 쓸어안아야만 했고 개왕 역시나 그리 편치 않은 모습이었다. 머리 위를 흐르던 구름이 시야 끝에 간신히 걸쳐져 갈 때까지도 장내엔 어색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바보 같은…… 내 그리도 마음을 주지 말라 했건만, 대체 어쩌자는 것인가?’
파천의 눈 속에서 꿈틀거리는 기운은 분명히 안타까움의 색깔이었다. 그는 자신을 애타게 주시하고 있는 독고설란을 마주 보았다. 설란의 눈은 염려로 가득했고 그것은 가식이 없는 진실 된 것이었다. 파천은 그녀의 마음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기에 더욱 가슴이 답답했다.
‘만약…… 설란이 그와 같은 처지에 있다면…… 후우, 그래 광마존! 그것이 네가 선택한 길이라면 나 또한 나무라지는 않겠다. 그렇지만 왜 그리 바보같이 성급하단 말인가? 최소한 내게 도움을 구했다면 내가 반대하리라 생각했던가?’
물론 파천은 반대했으리라. 그렇지만 어떤 식으로든 광마존이 납득할 수 있는 대책을 내 놓았을 것이다. 광마존 역시나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왜 그는 힘겨운 길을 선택했을까?
‘이것이 너 자신만의 일이라 여겼겠지. 이런 일로 내게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았을 거다. 광마존이라면 그런 생각을 하고도 남을 위인이지. 그러나 너는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다. 내게는 목적을 이루는 것보다 더 중한 것이 있다. 내게 속한 자들을 잃고 싶지 않다는……’
[지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무슨 조치를 취할까요? 아니면 그냥 무시하실……]
차마 그 다음 말을 잇지 못하는 개왕의 표정만 봐도 그 역시 지금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움에 휩싸여 있음을 알게 해 준다. 파천의 눈이 개왕에게로 향해졌다.
[지금 낙양에서 동원할 수 있는 전력은 얼마나 되지?]
[마황검위대 오개조 오백명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그들이라면 대상벌을 휘저을 수 있을 겁니다. 이틀 이내에 증원될 수 있는 전력은 나머지 마황검위대 고수들을 포함하여 오천명 정도가 됩니다. ]
[……]
파천의 이마에 주름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잠시 판단을 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것 같았다.
‘마황검위대를 움직여서 대상벌의 본거지를 치게 되면 결국엔 전면전으로 갈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천황부와 혈마천의 촉수에 본교의 움직임이 노출되는 것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아직은 시기상조다.’
[광마존이 살아 나올 수 있을 가능성은 어느 정도로 보이나?]
[그들의 드러난 전력을 감안할 때 그 혼자 만이라면 충분합니다만, 동행이 있다면……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들 역시나 마냥 허수아비는 아니기에……]
‘그렇겠지. 그럼, 결국 방법은 단 하나밖에는 없군. 어쩔 수 없다.’
[개왕 지금 즉시 ……]
파천은 한참동안이나 개왕에게 전음으로 무엇인가를 지시했다. 파천의 전음이 끝나자 개왕은 서둘러 장내에서 사라져갔다. 경신술을 펼치며 멀어져 가는 개왕을 쫓는 시선엔 복잡한 심경이 맺혀 있었다.
★
어둠은 어디나 늘 존재하기 마련이다. 빛이 머물다 간 자리에도 어둠은 여전히 남겨져 있다. 항상 반대쪽을 점유하고 결여된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두꺼운 천으로 가려진 방안은 어둠만이 가득한 듯 했다. 그 안에서 상처 입은 짐승의 울부짖음과도 같은 나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크……”
어찌 들으면 고통을 참지 못하고 흘리는 신음과도 같이 들렸으며 또 다르게 들으면 감내할 수 없는 절망을 이기지 못해 토해내는 영혼의 웅얼거림도 같았다.
콰당
문이 활짝 열리며 누군가 실내로 들어섰고 그와 함께 어둠이 한쪽으로 다급하게 숨어버렸다. 그러나 아직은 어둠이 빛보다는 우세했으므로 방안의 전경이 확연하게 드러나지는 않았다. 단지 중앙에 커다란 의자가 있고 그곳에 사람이라 짐작되는 형체가 웅크리고 있는 것이 보였을 뿐이다. 활짝 열려진 방문으로 쏟아져 들어온 빛을 피해 괴영은 온몸을 경직시키며 움찔거렸다.
“한심한 놈. 대체 이곳에서 뭐하고 있는 거냐? 언제나 당당하고 오만하던 놈이 단 한번의 실패를 이기지 못하고 이런 추한 꼴을 보이다니…… 어서 일어서거라.”
빛을 등진 사내에게서 흘러나온 다그침에도 괴영은 움직일 생각이 없는 듯 했다. 그렇다고 특별한 반응을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잘 들어라. 네가 아니라…… 나라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누구라도 그런 자를 만났다면 불가항력이다. 그러니 너무 스스로를 자책하지 말거라.”
마치 후광처럼 빛을 거느리고 선 자는 초량이 분명했다. 그는 웅크리고 있는 괴인의 왼쪽 어깨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이 잠시 흔들렸다고 느껴지는 것은 착각이었을까? 언제 그랬느냐싶게 그의 입술을 비집고 쏟아져 나온 음색은 냉랭했다.
“본부에서 장로들이 오셨다. 그리고……검황께서도 함께 오셨다. 이미 너의 일을 알고들 계시니 어서 그 분들을 뵙도록 해라. 이렇게 마냥 있는 다고 달라질 것은 없다. 무사는 패배를 당할 수는 있으되 절망하면 안 된다. 우리가 가는 험란한 과정은 언제나 승리만 존재하지는 않지. 패배가운데 스스로를 일으키지 못하는 자는 결국 도태되고 만다. 아직 너에게는 기회가 있으니 어서 일어서거라.”
웅크리고 있던 괴인이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저것을 과연 사람의 얼굴이라 할 수 있을까? 흉측했다. 두 눈만을 제외하고 얼굴의 전 부분은 깊게 도랑이 파여져 있었다. 이마에서 시작되어 턱에 이르기까지 칼로 그어 내린 듯한 상처가 세로로 깊게 패여 져 있었던 것이다. 얼굴 전체를 뒤덮을 정도의 무수한 선이 틈도 없이 엉겨붙어 있었다.
“사형…… 나를 이대로 놔두면 안될까?”
사형이라고? 그렇다면 그는 혈수천자란 말인가? 그러고 보니 그의 왼쪽 어깨에 달려 있어야 할 팔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혈수천자가 분명했다.
“검황께는 죄송하다고 전해줬으면 좋겠어.”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상대하기도 싫다는 듯이 고개를 숙여버린다. 그런 그를 쳐다보는 초량은 처음과는 달리 아무런 말도 없이 뒤 돌아서더니 밖으로 나가버렸고 다시 문은 굳게 닫혔다. 다시 활보하기 시작한 어둠은 금세 실내를 깊은 안식으로 끌어 내렸다.
“결단코 세상을 용서하지 않으리라. 내게 이런 절망을 준 세상, 사매를 뺏어간 세상, 모두 모두 멸망시켜 버리겠다. 크크크 어둠만이 지배하는 파멸을 보여주고야 말겠다. 크하하하하”
깊은 절망만큼이나 웃음은 설명할 수 없는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찌 들으면 세상을 조롱하는 광인의 웃음 같기도 했다. 혈수천자! 간신히 생명만을 건져서 도주한 그는 말을 타고 오는 것도 힘겨울 지경이었다. 지혈을 제때 하지 못해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도 있었지만 심적인 충격이 그가 견딜 수 있는 수위를 넘어서 버렸기 때문이었다. 대상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기 때문에 그는 죽지 않고 돌아올 수 있었다. 그가 초량에게로 인도되었을 때 그의 몸은 만신창이였다. 왼팔은 어깨에서부터 깨끗하게 절단되어 있었고 얼굴은 륜으로 긁어내린 듯 보기 흉하게 얼룩져 있었다. 이 상태로 살아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초량은 그를 치료하는 내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했다. 그의 손은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켰고 입술은 굳게 다물려 열릴 줄을 몰랐다. 보다못한 초량의 수하들이 대신 치료를 하겠다고 나섰으나 그는 허락하지 않았다. 끝내 그는 혈수천자의 상처를 홀로 묵묵히 치료했다. 그러고는 아무 말도 없이 자신의 처소로 사라졌고 혈수천자는 내실에 어둠만 머물게 하고서는 홀로 웅크리고 있었던 것이다.
★
“죄송합니다.”
“태공께서 그런 말씀을 할 이유야 있습니까? 그나저나 큰일이군요. 중원무림에 그렇게나 강한 고수가 존재한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정보를 종합해 보면 결코 정도의 인물로 여겨지지 않건만 그럼 마도련의 고수라도 된단 말입니까?”
초량은 공손한 어조로 눈앞의 노인에게 대답했다.
“그것도 아닌 것 같았습니다. 혈마천 이총사가 준 정보에 의하면 그자는 위기에 빠진 천마서생 파천을 구해간 자이며 그가 사용한 무공은 괴이한 마공이라 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천마서생과 연관은 있어도 마도련과 직접적인 관련성은 없으리라 여겨집니다. 그 정도의 초극고수가 마도련에 존재했다면 이미 전 무림에 알려져 있었을 겁니다.”
“그럼 태공은 그가 누구라 생각하십니까?”
“제 생각에는 천마서생이라는 자 역시나 그 사문이나 소속이 애매한 자입니다. 아마도 그의 실제적인 출신을 가름할 수 있는 열쇠를 지닌 자이겠지요.”
“으음…… 무림에 우리가 모르는 또 다른 신비세력이라도 존재한다는 말씀이시오?”
초량은 눈앞의 현의 노인을 깊숙한 시선으로 마주보았다.
‘오황 중 일인이자 사부님과 혈황을 제외하고 가장 강한 자! 부내의 대소사에는 관심이 없지만 무공에는 병적일 정도로 집착을 보이는 자다. 그렇지만 나는 당신의 음흉한 속셈을 오래 전부터 감지해 오고 있었다. 이번의 혈마천과의 혈맹도 사실상 이자에 의해 결정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살황은 검황의 들러리에 불과하다. 아마도 혈마천주와 모종의 묵계가 있었겠지. 그러나 잊지 마라. 내가 있는 한은 당신 뜻대로 이루어지지는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심중의 생각과는 달리 초량의 얼굴에는 춘풍과도 같은 훈훈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검황 역시나 속에 어떤 생각을 지니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자애한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다.
“글쎄요…… 그럴 수도 있겠지요. 사제의 일도 그렇고 표물 탈취 건도 그렇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겠지요. 그들의 행사가 워낙에 은밀한데다가 또한 측정불가의 고수들인지라 집중적인 견제가 필요한 것만은 사실입니다.”
“흐음…… 이것 생각 외로 무림통일의 시기가 멀어지는 것 아닙니까? 혈마천과의 혈맹으로 거칠 것이 없으리라 여겼건만…… 역시나 무림의 저력은 무시할게 못되는군요.”
초량은 속으로 그런 그를 비웃었다.
‘멍청한 자들! 중원무림의 저력은 아직 채 드러나지도 않은 상태다. 당신들이 판단하고 있는 전력은 진정한 힘의 오할도 채 되지 않을 것이다. 혈마천과 본부의 힘을 전부 쏟아 붓는다고 해도 솔직히 이긴다는 보장이 힘들건만……’
“그렇지요. 중원무림의 저력은 엄청나지요. 우리가 전력을 기울인다고……”
“그래 보았자지요. 솔직히 본부의 전력만으로도 중원무림정도야 얼마든지 깨부술 수 있지 않겠소?”
초량의 말을 끊어버리는 검황의 말은 확신에 가까운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번에 그가 데려온 인원은 장로들 중에 7명과 이천에 달하는 검황전의 고수들이었다. 이들은 오황들의 친위 세력 중에서도 가장 용맹스럽다 인정되는 천황부의 정예들이기도 했다. 보아하니 검황은 지금의 힘만으로도 중원을 얼마든지 유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이런 그의 생각은 초량이 보기에 한심한 것이었으나 애써 그 생각을 밖으로 드러낼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부딪혀 보면 알 것이 아니었던가?
“이번에 내가 온 것은 태공도 아시다시피 혈마천과의 공조를 위해서요. 그 쪽에서는 이총사란자가 책임자로 파견될 것이오. 먼저 무림맹을 한번 두들겨 볼 참이오. 그 다음엔 마도련이 되겠지요. 우리가 먼저 시작하면 이미 들어와 있는 사황성이나 사사혈교에서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고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원하는 혼란의 시대가 아니겠소? 흐흐 그 틈바구니에서 우리의 세력을 구축하고 본진의 세력이 들어오면 감히 그 누가 우리를 막을 수 있겠소? 그렇지 않소?”
‘망령난 늙은이 같으니라고……’
“그렇겠지요.”
정말이지 초량은 더 이상 검황과 대화를 나누기가 싫을 지경이었다. 상황판단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늙은이와 무슨 얘기를 주고받을 수 있겠는가? 그는 잠자코 있었다. 그가 입을 다물자 검황의 입에서는 중원무림을 오합지졸로 몰아가는 신랄한 비난과 조소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가 하는 말들을 하나로 종합하면 항상 요지는 자신이 잘났다는 말이었다. 초량이 참는데도 한계가 있었다. 그가 지금까지 발휘한 인내력만으로도 범인은 상상할 수 없는 초인적인 것이었다.
“저는 이만 연공 시간이 되어서 나가 봐야겠습니다.”
초량의 말에 검황은 두 눈에 의문을 담았다.
“아, 그러십니까? 뭐, 특별한 무공이라도 수련하시는가 보죠? 제가 듣기로 태공의 무공은 상상할 수 없을 경지에 이르렀다던데 또 다른 무공을 연구하시기라도 하십니까?”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제가 맡은바 직무에 비해 너무 부족해서요. 그래서 지닌 무공을 다시금 다듬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럼 나중에 장로들과 함께 뵙지요.”
초량이 일어서서 나가려 하자 검황 역시나 일어서서 마중을 했다. 그가 내미는 손길을 마주잡은 초량은 왠지 서늘하게 여겨지기까지 했다. 초량이 나가고 나자 검황은 자리에 앉아 홀로 사색에 잠겨갔다.
“사류검.”
“부르셨습니까?”
땅에서 갑자기 솟아오르기라도 한 것처럼 하나의 인영이 검황 앞에 부복했다. 그는 고개도 들지 않고 바닥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태공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
“위험한 인간이야. 천황의 대제자란 신분이기는 하지만 그 속을 알 수가 없어. 더군다나 진실 된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도 알 수가 없으니…… 전혀 드러나지 않는 그 눈빛도 기분이 나쁘고 말이다. 마주 앉아 있으면 내 속내를 모두 들키는 것 같단 말야. 태공을 미행할 자신이 있느냐?”
“불가능한 명이십니다. 그렇지만 주군께서 원하신다면 속하…… 시행하겠나이다.”
“하긴 저 놈 주위엔 항상 그림자들이 붙어 다니지…… 아직은 부딪힐 이유가 없겠지. 그래 알았다. 너는 대상벌 주위를 다시 한번 꼼꼼히 살펴보아라. 전력배치도 염두에 두고……”
“존명!”
황제(皇帝)의 검(劍) - 94
낙양의 시진 가운데를 관통하는 번화가인 청향로(淸香路)에는 인간세에 존재하는 모든 상업형태가 존재한다. 이곳에서 구할 수 없는 것은 다른 곳에서도 보기 힘들다 단언해도 과하지 않을 정도였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어서 채워도 채워도 바닥을 모르는 법이다. 재산이 풍부한 사람은 그 사람들 나름대로, 또 상대적으로 빈곤한자들도 최소한의 소비는 하기 마련이었고 낙양 인근에 사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이곳 청향로에 와서 욕망의 끈을 풀었다. 밤낮이 없다시피 사람들로 가득했지만 청향로를 따라 북으로 조금만 가다보면 인적이 드문 고택들이 즐비하게 자리잡고 있으며 그 가운데 지나치게 큰 장원하나가 퍼질러 앉아 있다.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것은 거대한 장원의 규모만은 아니었다. 대문상단에 자리하는 빛 바랜 현판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천하제일가(天下第一家)
칠마저 벗겨져 허름하기 그지없는 대문만 보더라도 이곳이 그리 대단한 곳이 아님은 쉽사리 알 수 있을 것만 같은데 그 의미만은 간단치가 않은 것이었다. 대체 어떤 곳이 길래 천하제일가라 자칭한단 말인가?
삐이이익
괴이한 소음을 동반하고 힘겹게 열린 대문사이로 허름한 현의(玄衣)를 걸친 육십대나 되었음직한 노인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오척단구(五尺短軀)에 대머리가 훌렁 벗겨졌고 눈은 떴는지 감았는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작았으며 코는 끝이 비뚜름한 매부리코에다가 입술은 두툼했다. 그는 뒷짐을 지고 밖으로 나오더니 곧장 번화가 쪽으로 방향을 잡고 오리가 뒤뚱거리는 듯한 걸음걸이로 이동해 갔다. 한 번도 주위로 시선을 주지 않고 오직 앞만 보고 걸어가고 있었다. 한참을 가니 사람들이 버글거리는 곳에 당도하게 되었고 그의 작은 키는 금세 오가는 행인들에 가려 잘 보이지도 않을 지경이었다.
“노대야(老大冶) 그 동안 안녕하셨는지요?”
용케 사람들 틈에서 그를 발견한 화복차림의 사십대 중년인이 그에게 하는 인사였다. 그는 고개를 슬쩍 소리나는 쪽으로 돌리더니 가볍게 끄덕였다.
“그래, 장사는 잘되고?”
“그럼요. 이 모든 것이 대야께서 신경 써 주신 덕이지요.”
화복중년인은 노대야라고 불린 볼품 없는 노인에게 지극한 존경의 념을 담은 눈빛을 한 채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근처에서 포목점을 운영하는 장노육과 철기점을 삼대 째 운영하는 왕일구까지 나와서 머리가 땅에 닿을 듯이 인사를 해댔다. 노인은 그들이 하는 인사에 일일이 답하며 거리를 빠르게 지나쳐갔다. 대체 그가 누구 길래 낙양에서 행세 깨나 한다는 상인들이 하나같이 공손하게 대한단 말인가? 그에게 인사를 하는 사람들은 청향로에 번듯한 점포를 지닌 상인들만이 아니었다. 거리 곳곳에 자리하는 노점상들 역시나 그에게 대하는 태도가 유별났다. 그들이 그를 대하는 것은 하나같이 상대에 대한 존경심이 묻어나 있어 더욱 그의 신분이 무엇일지 궁금함을 자아내게 했다. 잰걸음으로 빠르게 지나쳐가던 노대야의 걸음이 한곳에서 움직일 줄 모르고 멈추었다.
운경다루(雲鏡茶樓)
삼층으로 지어진 다루는 이곳 낙양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는 곳이었다. 노대야는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가 들어서자 다루의 점원으로 보이는 사내가 쪼르르 달려와서는 요란한 인사를 건네었다.
“어서 오십시오. 대야. 이 누추한 곳을 다 찾아주시고……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그런 그를 향해 노인의 두툼한 입술은 충실한 답변을 보낸다.
“너도 잘 있었느냐? 이제 장가갈 나이도 되지 않았나? 그래 마음속에 담아둔 여인이라도 있느냐?”
“헤헤, 저 같은 놈에게 누가 시집이나 오겠습니까?”
그는 씁쓸한 웃음을 짓고 있었는데 그런 그를 보며 노인은 혀를 끌끌 찼다.
“쯧쯧. 너 자신의 가치는 스스로 만드는 거다. 그런 생각으로 세상을 살아간다면 천년, 만년을 산들 발전이 없을 거다. 사내란 모름지기 야망이 있어야 하는 법이거늘…… 그도 없다면 오기라도 있어야 한다. 잊지 말거라.”
“네, 대야.”
“명아는 와 있느냐?”
“네. 공자께서는 지금 죽실(竹室0에 들어 계십니다. 어서 가시지요.”
“그래 앞장서거라.”
운경다루는 총 삼층으로 되어 있었는데 일층과 이층과는 달리 삼층은 독립된 내실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이층의 층계를 막 돌아 삼층으로 돌아서던 노대야의 눈이 번쩍 빛을 발했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창가에 홀로 앉아 차를 들고 있는 삼십대 초반의 사내가 있는 곳이었다. 그는 의미심장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한참동안이나 사내를 주시하고 있었다. 마침 그 사내도 시선을 노인에게로 향하던 차라 두 사람의 시선은 자연히 마주치게 되었다. 그 사내 또한 노인을 향한 시선을 좀체 거두지 않았다. 잠깐의 시간이 지리 한 듯 느껴질 즈음에야 노인은 발길을 떼어갔다. 그가 이층에서 사라지자 사내 또한 시선을 창 밖으로 돌려버렸다. 죽실이란 곳으로 들어서자 세 사람이 황급하게 일어서며 노인을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할아버님.”
굵직한 사내의 음성은 듣기 좋은 저음으로 실내를 울렸다. 노인은 내실의 가장 안쪽으로 가서 앉았다. 엉덩이를 의자에 대자마자 그는 입을 열기 시작했다.
“명아야. 그래 알아본 것은 어찌 되었느냐?”
내실에 있던 사내 중 가운데 있는 인물을 향한 물음이었다.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인상이었으나 전체적으로 한 마리 웅크린 곰을 연상시키는 사내였다. 특히 굵은 눈썹은 칼로 잘라놓은 듯 끝이 뭉턱 했는데 그것이 또한 더욱 사내답게 보이게 했다.
“지금 대상벌에는 상당한 수의 전력이 증원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천황부에서 서두르고 있는 듯 여겨집니다.”
이들이 대체 누구기에 무림에 극소수만이 알고 있는 천황부의 실체를 입에 올린단 말인가?
“혈마천의 움직임은 없었느냐?”
“네. 수집된 정보에 의하면 천황부와의 동맹으로 그 둘이 함께 움직일 가능성이 많사오나 낙양에 그들의 모습이 보인 적은 없습니다.”
노대야는 작은 눈을 더욱 가늘게 뜨며 자신의 손자를 쳐다보았다. 언제나 믿음직하게 여겨지는 하나밖에 없는 손자였기에 그에 대한 기대는 남다른 데가 있었다.
“조만간 그들마저 이곳 낙양에 나타날 거다. 무림맹은 아직 대상벌의 실체에 대해 자세하게 알지는 못하고 있는 듯 여겨진다 만은 그들이 상권장악에 대해 지닌 집념으로 볼 때 조만간 이곳 낙양지부에 더 많은 숫자가 증원 될 것이다. 좋든 싫든 그들의 충돌은 불가피 할 것이고 이에 대한 대비를 우리 또한 해 두어야 한다.”
명아라 불린 사내가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심려 마십시오. 설사 이곳에서 그들간의 전면전이 벌어진다 해도 피해가 없도록 하겠습니다.”
노대야는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단숨에 목안으로 밀어 넣었다. 적당히 식은 차는 마시기 좋을 정도였다.
“이층에 있는 자를 보았느냐?”
“누구를 말씀하시는지?”
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아니다.”
‘그 자.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자였다. 내가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초극고수가 분명하다. 대체 누구일까? 낙양에 온 것으로 보아 대상벌이나 무림맹과 관련이 있는 자인가? 모르겠군.’
그는 다시 채워지는 찻잔을 들여다보며 홀로 사색에 잠겨 있었다.
“명아야.”
“네 할아버님”
“아무래도 우리 생각보다 빠르게 무슨 일인가 벌어질지도 모르겠구나. 그러니 너는 지금 즉시 비상령을 하달하고 아이들을 대기시켜 놓도록 해라.”
“갑자기 왜 그러시는지요?”
“으음…… 너는 시키는 대로만 하거라. 그리고 대상벌에 대해서도 한시도 시선을 늦추어서는 안 된다. 명심하거라.”
“네.”
★
광마존의 시선은 창밖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가 이곳에 도착한 것은 어젯밤이었다. 그는 이미 대상벌에 대해 한차례 조사를 마친 뒤였다. 그의 두 눈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과연 자운을 무사히 구출해 낼 수 있을까? 힘들겠지. 더군다나 내가 알고 있던 대상벌의 전력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그곳은 알려진 것과는 달리 용담호혈이었다. 결코 나 혼자서 자운을 구해오기란 쉽지가 않다. 발각되지만 않는다면 가능하겠지만 그것은 천운이 따라야만 한다. 천향의 처소는 가장 깊숙한 곳에 있고 주위로는 인의 장막이 펼쳐져 있다. 더군다나 그녀는 이미 무공을 상실한 듯 보여졌고…… 그렇다면 결론은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얘긴데…… 후우, 과연 가능할까?’
그는 마음이 점점 무거워져 옴을 느꼈다. 그가 마음먹어 침투하거나 빠져나오지 못할 곳이란 거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무공경지를 봤을 때 그의 앞을 당당히 막아설 수 있는 자라고는 세상천지에 몇 명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천향옥봉이었다. 무공마저 상실한 그녀를 데리고 나오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작은 실수에도 침입은 알려질 테고 그렇게 될 경우엔 대상벌에 있는 모든 고수들이 벌떼같이 덤벼들 것이 분명했다. 이런 생각을 하니 마음이 답답해져 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죽음은 두렵지 않다. 단지…… 내 목숨은 이미 내 것이 아니기에 지존께 심려를 끼침이 두렵고 죄스러울 따름이다. 지금 나의 행동에 후회는 없다. 오늘 밤, 내 생명이 다 한다 할지라도 나는 웃으면서 죽을 수 있다.’
그는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아먹었다. 그는 좀 전에 자신과 시선이 마주쳤던 노인을 떠 올렸다.
‘대단한 자였다. 이런 곳에 그 정도의 고수가 있다니…… 의외로군. 역시 세상은 넓은 것인가? 더군다나 낙양 전체에는 대상벌도 아니고 무림맹 고수들도 아닌 신비의 고수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었다. 허름한 모습으로 위장했으나 내 눈을 속일 수는 없다. 대체 그들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들이 이곳 낙양에 있는 이유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결국 대상벌을 노리는 자들인가? 그도 아니면…… 모르겠군. 어차피 나와는 상관없는 자들이니 신경 쓸 일도 아니군.’
그는 차를 음미하며 날이 어둡기만을 기다렸다. 과연 그는 무사히 천향옥봉을 구해낼 수 있을까?
★
혈수천자가 방을 나선 것은 어둠이 자락을 풀어낼 때였다. 그는 처소에서 나오자 바로 자신의 사형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얼굴은 낮과는 달리 붕대로 칭칭 동여매어져 있었고 그 사이로 두 눈만이 암울하게 빛나고 있을 뿐이었다. 그가 한쪽 소매를 펄럭이며 복도를 지나는데 마주 오던 시비들과 맞닥뜨렸다. 그녀들은 고개를 숙이며 전신을 경직시키고 있었다. 그것을 본 혈수천자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가 갑자기 멈추어 서서 자신들을 주시하고 있자 두 시비는 어쩔 줄을 모르고 바들거리며 몸을 떨어대었고 그것이 또한 혈수천자의 심기를 건드렸다.
“이, 이것들이……”
와락
“꺅”
시비의 머리채를 움켜쥐어 들어올리자 그곳에는 두려움에 절어 있는 이제 스물이나 되었음직한 여자아이의 얼굴이 보였다.
“크크 왜 내가 징그러우냐? 내가 무서워? 너희들도 내가 우습게 보이는 거냐? 킬킬킬킬 그렇겠지. 수하들을 모두 잃어버리고 혼자 살아 온 놈이니 너희들 같은 시비들도 날 우습게 보는 건 당연하겠지.”
“그, 그렇지가 않사옵니다.”
“어디서 말대답을.”
“꺅”
머리털을 뽑아버릴 듯이 잡아당기며 한쪽으로 홱 끌어당겼다. 그러자 그녀는 있는 대로 비명을 뽑아 올리며 한쪽으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또 한 명의 시비는 그것을 보고서는 자기도 모르게 바닥에 덜퍼덕 주저 않고 말았다.
“에이…… 빌어먹을”
혈수천자는 아무것도 모르는 시비들에게 화풀이를 해대는 자신이 초라해졌는지 빠르게 그곳을 벗어나고 있었고 그때까지도 두 시비들은 얼이 빠져 꼼짝 하지 않고 있었다.
콰당
거칠게 문을 박차며 안으로 들어선 혈수천자는 내실에 아무도 없자 의아해졌다.
“대체 어딜 간 거야? 혹시 또 연공실에?”
그는 사형인 초량이 간 곳을 나름대로 생각해보고는 밖으로 사라져갔다.
황제(皇帝)의 검(劍) - 95
초량의 얼굴엔 수심이 가득 차 있었다. 언제나 자신감으로 충만하던 그였던지라 지금의 모습은 왠지 낯설게만 느껴지기도 했다. 망망한 대해에서 암초를 만난 자와도 같았다.
“후우……”
그의 입에서 그의 심정만큼이나 어두운 빛깔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지금 그가 좌정하고 앉은 곳은 그만의 연공실이었다. 이곳은 허락이 없는 한 대상벌에 거주하는 그 누구도 접근 할 수 없는 곳이었기에 그 홀로 넓은 연공실을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사방 일장은 됨직한 석대에 포단을 깔고 앉았는데 앞에는 한 권의 서책이 펼쳐져 있었다. 그의 시선은 그곳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정면의 아무것도 없는 회벽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검황을 비롯한 오황은 나로서 견제하기가 벅차다. 사부님의 의제들이긴 하지만 그 야심들이 너무나 위험하다. 그들은 중원을 피로 물들이기를 원하고 있고 이미 안정기에 접어든 명을 무너뜨리려고 한다. 과연 이것이 옳은 일인가? 역사는 결코 몇 사람만의 의지로 돌이키지 못하는 것임을 모른단 말인가? 그들의 이런 생각에는 사실 무림일통이라는 것보다는 제국의 권력에 더 향수를 느끼고 있음이 분명하다. 과연 그들의 의도대로 흘러가게 내버려두어야 하는가? 아니면 사부님을 설득해서라도 그들을 견제해야 하는가? 나에게는 명분도 없고 힘도 부족하다. 만약 내가 그들을 직접적으로 견제하기 시작하면 그들은 힘을 합해 나를 먼저 칠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이 혈영뇌전도법이 더욱 절실했던 것이었는데…… 후후 이것은 도저히 무공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니……’
무슨 뜻일까? 천마의 무공에 필적할만한 무공중 하나라는 고금최고의 도법을 초량은 무공이라 할 수도 없다 단언하고 있었으니 그 연유가 궁금할 뿐이었다.
‘8성이 한계다. 더 이상의 수련은 인간에서 악마가 됨을 의미한다. 피와 파괴만을 그리워하는 악마가 되어서야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결국 이것은 내게 휴지조각이나 진배없는 셈이다.’
그는 안타까웠다. 처음에 이것을 천향옥봉에게서 건네 받았을 때 그는 하늘을 날 듯이 흡족했었다. 현재의 그의 무공만 해도 부족한 것이 없다 할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지만 오황 중 가장 약한 독황(毒皇)보다는 강하지만 검황(劍皇)이나 혈황(血皇)에 비하면 강하다 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그들은 항상 어느 정도의 실체는 감추는 영악한 위인들인지라 그들의 진정한 무위가 어느 정도인지는 초량조차 감지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천황부의 힘은 막강하다. 혈마천과의 동맹이라면 천하를 유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막강한 힘이 오황같은 위험천만한 인물들에 의해 휘둘러진다면 세상은 지옥이 되어 버릴 것이다. 패도에도 격식이 있어야 하고 질서가 있어야 한다. 세상은 명분으로 다스리는 것이다. 중원이 힘만으로 장악할 수 있을 정도로 만만한 곳이 아니기에 그들의 방법은 잘못된 것이다. 후우…… 검황이 중원에 나타났다는 것은 이제부터 그들이 직접 움직이겠다는 암시나 마찬가지. 이제 곧 나머니 사황들 마저 중원에 들어올 테고 사부님마저 오신다면 나로서는 막을 수 없다. 진정 어찌해야 하는가?’
그의 고민은 그 혼자만의 것이었기에 더욱 외롭고 처절한 것이었다.
“누구냐?”
초량은 고개를 들어 입구 쪽을 바라보다가 들어서고 있는 인물이 누구인지를 알게 되자 경계를 풀었다.
“네가 여기는 웬일이냐?”
초량의 말에 안으로 들어선 이가 답했다.
“사형! 물어볼 것이 있다.”
“물어볼 것? 뭐지?”
초량의 앞으로 다가선 인물은 다름 아닌 그의 사제인 혈수천자였다. 초량의 곁에는 항상 열 명의 그림자들이 한시도 떠나지 않고 붙어 다닌다. 7남3녀의 그림자들은 어둠 속에 웅크리고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살수에 대비해 항상 자신들의 주인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무공은 천황부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을 정도로 고강한 것이었다. 그들이 초량의 곁으로 다가서는 인물들 중 경계하지 않는 세 사람이 있었으니 초량의 사부인 천황부주와 사제 혈수천자, 그리고 사매인 빙화였다. 이들 삼인 만은 자신들이 섬기는 주군의 명에 의해 제지를 받지 않고 다가설 수 있었다.
“내게 사실을 말해 주시오. 삼년 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요?”
혈수천자는 처음으로 초량에게 존대를 하고 있었다. 그것을 느껴서일까? 초량은 지나치게 흥분하며 냉정을 잃고 있었다.
“……”
“사형은 알고 있지 않소? 내게 그때 일을 말해 주시오. 사형…… 제발 부탁이니 진실을 알려 주시오.”
혈수천자의 무릎이 땅에 닿았다. 그의 눈은 염원으로 가득 차 있었고 눈빛이 너무나 집요한지라 초량은 그 눈을 마주볼 수가 없었다. 그는 고개를 돌리며 차갑게 말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어서 돌아가거라.”
“사형.”
혈수천자의 애타는 부름에 초량은 흠칫했다.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울먹임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사매가 왜? 왜 그렇게 되었냐고 묻고 있잖아. 사형은 알고 있어. 알고 있다고…… 대체 왜 내게 가르쳐 주지 않는 거지? 내가 알면 안 되는 일인가?”
초량은 돌아앉았다. 그를 마주보기가 겁난다는 듯이……
“삼년 전…… 사부님의 명을 받아 떠났던 내가 부로 돌아왔을 때 사매는 보이지가 않았어. 나는 바로 사형을 찾아갔었지. 사매가 어디 있냐고 물었을 때 사형은 모른다고 했어. 그녀의 처소는 파괴되어 있었고 불길에 그을려 있었어. 난 그녀를 찾아 천황부내를 이 잡듯이 헤매고 다녔고 결국 그녀를 발견해 내었지…… 그런데……빙화는…… 크크크크 발가벗고 온몸에 가시넝쿨을 감고는 옥에 들어가 있었어. 크크크크 나는 사부님을 찾아가서 빙화를 왜 가두었냐고 물었지만 사부님은 모르겠다는 말씀뿐이셨어. 그녀는 이미 제 정신이 아니었어. 빌어먹을 그녀는 갇힌 게 아니라 스스로 감옥으로 자진해서 들어갔음을 후에 알고 나 또한 미치기 일보직전까지 갔었지. 그리고 벌써 삼 년이 지났어. 알아? 빙화가 웃음을 잃은 지가 벌써 삼 년이 지났다고…… 예전의 그녀는 이미 죽었단 말이야.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이제는 나도 알 때가 되었잖아? 말해. 말하란 말이다.”
혈수천자의 고함소리는 연공실의 벽에 사로잡혀 몸부림치고 있었다. 초량은 두 눈을 감았다. 사제의 소리를 듣지 못했다는 듯한 태도 속에서도 전신을 흐르는 전율만은 그 또한 어쩔 수 없었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깔려갔다. 초량의 무너질 것 같지 않던 어깨를 바라보는 혈수천자의 눈은 이미 벌겋게 충혈 되어 있었고 금세 눈물이라도 쏟을 듯 했다. 그런 그를 향해 극도로 감정을 절제한 초량의 나직한 음성이 혈수천자의 귓가를 맴돌며 들어왔다.
“잘…… 들어라. 때론…… 알고 있어도 모른 척 해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네가 알아보았자 아무런 유익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괴로움만 더하기 때문이다. 네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더 이상 알려고 하지 마라.”
“말해. 말하란 말이다. 나 또한 알 권리가 있어. 난 빙화를…… 빙화를……”
혈수천자의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가 풀어지며 어깨마저 축 늘어지고야 말았다. 그가 하고 싶었던 얘기는 무엇이었을까?
‘너는 유난히 빙화를 아꼈지. 그렇기 때문에 네게 말 못하는 거란다. 네가 그것을 알 경우 취할 행동이 뻔하기에…… 너의 방황이 그 애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기에 난 네게 말하지 못하는 것이다. 언젠가는 몰론 알게 될 일이지만 내가 바라기는 영원히 너만은 몰랐으면 좋겠구나. 나 하나로도 족하다. 이것은 내가 풀어야 할 숙제이니 말이다.’
혈수천자는 고개를 숙이다 발작적으로 다시 쳐들었다. 돌아서 앉아 있는 사형의 등은 그로서는 넘어설 수 없는 너무나 거대한 것이었다. 그가 지닌 고독, 괴로움, 아픔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가 자신이나 빙화에게 지닌 애정만은 그 또한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홀로 감당하려 하는 사형이 이해되지 않았고 또한 그런 모습이 역겨울 정도로 싫었다. 왜 그래야만 한단 말인가? 어린 시절 사형은 그에게 있어 사부보다도 더 의지가 되는 존재였다. 그는 부모였고 형이었으며 때로는 친구가 되어 주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 지금의 이런 태도를 보이기 시작한 것도 따지고 보면 삼년 전의 그 날부터였다. 그로서는 마땅히 화살을 돌릴 데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으나 빙화의 불행을 막아주지 못한 사형에 대한 미움과 실망이 더욱 큰 것이었다.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멈칫거리는 그에게 사형의 등뒤에 활짝 펼쳐져 있는 책이 들어왔다. 그는 손을 펼쳤다. 그러자 책은 어렵지 않게 그의 손아귀로 들어오고야 말았다.
“이건 뭐지?”
혈수천자의 그 말은 그때까지만 해도 심중의 격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힘겹게 싸우고 있던 초량을 돌아서게 하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그는 방금 전까지 자신이 보았던 비급이 사제의 손에 들어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서는 놀람을 나타내었다. 그는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웠으며 곧 바로 혈수천자를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 앞표지를 빠르게 살펴가던 혈수천자의 얼굴에는 놀람의 기색이 역력했다.
“이, 이것은……”
초량의 얼굴은 참혹하다 싶을 정도로 구겨졌으며 당황하고 있었다.
“혈영뇌전도법…… 이라고? 어찌 이것이 사형의 손에?”
그 또한 혈마의 전설에 대해 들은 것이 있었기에 그 놀람은 진정 큰 것이었다.
“그것을 다오. 그것은 익혀서는 안 될 악마의 도법이다. 그러니 어서……”
“호, 이제 보니 이것을 익히느라고 연공실에 틀어박혀 있었던 거군. 이 사실이 알려지면 반응들이 굉장하겠는걸. 사부님이나 오황이 이 사실을 알면 과연 어떤 반응들을 보일까? 후후 이것을 알리지 않고 홀로 익히고 있었던 이유가 궁금해지는군.”
초량은 어느새 침착함을 되찾고 있었다. 그는 불타는 시선으로 사제인 혈수천자를 응시했다.
“네 말대로 난 그것을 익히고 있었다. 그렇지만 더 이상의 수련은 의미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악마가 되어봐야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혈수천자의 감겨진 붕대사이로 뻐끔 드러나 있는 입술이 꿈틀거리며 찌그러져 갔다.
“흥, 좋아. 그럼 이것은 내가 접수하지. 사형에게는 필요 없는 것이니깐 내가 가지겠어. 물론 이의는 없을 거라 생각되는데 어때?”
“뭐라고? 그것만은 안 된다. 어찌 네가 망가지는 모습을 나더러 보고만 있으란 말이냐? 어서 다오. 그것을 익혀봐야……”
초량의 다음 말을 막아서며 혈수천자의 말이 뒤를 이었다.
“이것을 익히면 빙화를 그렇게 만든 놈에게 복수 할 수 있겠지. 난 그걸로 만족할 수 있어. 흐흐흐 역시 죽으란 법은 없군. 그 다음에 내가 악마가 되더라도 난…… 후회 따위는 안 할거야. 되었지? 사형이 익힐 생각이 없다면 내가 익히겠어. 받은 데로 돌려주고야 말겠어. 그 상대가 누구든 간에……”
황제(皇帝)의 검(劍) - 96
“과연…… 빙화가 그것을 원할까? 그리고 네가 악마가 되어버린다면 빙화를 해치려 들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원하느냐? 빙화에 대한 너의 감정이……”
“입 닥쳐. 더 이상 얘기하지마. 어차피 지금처럼 벌레같이 살아갈 바에야 악마가 되는 게 더 나아. 내 길은 내가 선택한다. 그러니 사형이라도 내 앞을 막아선다면 용서하지 않아. 날 도와줄 수 없다면 잠자코 있어. 내가 어떻게 하는지 보고나 있으라고.”
혈수천자는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려 세웠다. 밖으로 나가려는 것 같았다. 막 발을 떼어가던 그를 향해 토해진 초량의 말이 그의 발목을 움켜쥐었다.
“역시나 넌 어리석구나. 그 비급이 네게 있다는 것이 알려진다면 과연 네가 무사할 수 있을까? 바보 같은 놈.”
“뭐, 뭐라고?”
그러고 보니 초량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좋다. 네가 정녕 그것을 익히고자 한다면 나도 말리지는 않겠다. 대신 나와 한가지만 약속해 다오.”
혈수천자는 돌아서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초량의 당부가 이어졌다.
“무슨 일이 있어도 8성 이상은 익히지 않겠다고 약속해다오. 그렇게 하겠다면…… 이 연공실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해 주마.”
진정 의외의 제안이었다. 끝까지 막아서리라 짐작했던 사형이 그런 제안을 해 오자 혈수천자는 한참을 망설였다.
‘하긴 어차피 다른 곳에서는 검황의 눈을 피하기는 힘들 거다. 이곳이야말로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않고 도법을 수련할 수 있는 안전지대일지도……’
“좋아. 그렇게 하도록 하지.”
혈수천자는 돌아섰다. 사형을 쳐다보는 그의 눈에는 복잡한 심경이 드러나 있었다. 초량은 한 숨을 내쉬었다.
‘결국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단 말인가? 저 녀석은 빙화의 일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이 어떻게 되는 것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어떻게 해서라도 도법을 완성하려 할 것이다. 이왕 피할 수 없는 길이라면 차라리 내 품 아래 두는 게 나을지도……’
★
어둠을 틈타 대상벌 안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그림자의 몸놀림은 바람인 듯, 흘러 다니는 안개인양 그 형체가 분명치 않았다.
스스스스
과연 누가 있어 이것을 사람의 움직임이라 하랴?
‘으음…… 자운에게 접근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문제는 그녀를 어떻게 데리고 나오느냐는 거다. 그녀를 구출해 나오기 위해서는 우선 그녀를 감시하고 있는 눈길들을 잠재워야 한다. 전각을 빠져 나오는데 까지 최소한 서른 명 이상은 죽여야 할지도 모른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들키지 않았을 때의 계산이다. 만약 들킨다면 생명은 장담하지 못한다.’
광마존은 극도로 긴장했다. 한 번의 실수로 자신은 물론이요 천향옥봉의 생명까지 위험해 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어제 이미 들어와 조사를 마친 이후였던지라 헤매지는 않았다. 곧장 목표한 지점으로 이동해 갔다. 역시 매복자들은 도처에 도사리고 있었지만 그들이 광마존을 발견해 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천마잠형술을 극성으로 전개하며 전각의 음영만을 골라서 이동해 갔다.
‘매복하고 있는 놈들의 위치가 어제와 별반 다르지 않군. 그나마 다행이구나.’
전각 내로 스며들어간 광마존은 긴 복도를 따라 천장을 타고 이동했다. 그의 밑으로 이 전각에 배속된 시비들로 보이는 여자들이 지나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시비들이 지나간 뒤에도 한참이나 앞으로 전진해갔다. 그가 몸을 멈춘 곳은 복도의 막다른 면을 차지하고 있는 방문 앞이었다. 여전히 그는 천장에 몸을 붙인 채 안의 동정을 살폈다.
‘지붕 위에 다섯 놈! 천장에 두 놈! 벽면의 공간 안에 두 명, 바닥에 세 명이 숨어 있군. 역시 그녀는 철저하게 감시를 받고 있구나.’
그는 어떤 식으로 그녀를 구출해 낼지 다시 한 번 꼼꼼하게 되짚어 보았다. 한치도 어긋남이 없이 신속하게 처리해야 그나마 가능성을 높일 수 있었다.
‘반각 안에 그녀를 데리고 전각을 빠져나가야 한다. 그리고 대상벌을 벗어나는데 일각…… 문제는 처리한 시체들이다. 저 감시하고 있는 놈들을 죽이지 않고는 그녀를 데리고 나갈 수 없다. 만약 시체들이 생각보다 빨리 발견된다면 일은 걷잡을 수 없다. 후우……’
그는 내심으로 다시 한 번 호흡을 가다듬었다. 바로 그때였다. 저쪽 복도 끝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인기척이 포착되었다.
‘이런 제길……’
시비 둘과 한 명의 흑의무사였다. 그들은 곧장 방문 앞까지 오더니 그들 중 한 명의 시비가 입을 열어 안에 있을 천향옥봉에게 고하고 있었다.
“소저, 잠시 들어가겠습니다.”
안에서 별다른 응답이 없자 시비는 문을 열었다. 그리고 삼인은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문을 닫고 사라져 가는 모습을 광마존은 멀건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빌어먹을…… 하필이면.’
그는 청각을 돋우어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했다.
“소저. 잠시 저와 동행 하셔야 겠습니다.”
흑의무사의 목소리인 듯 했다. 그러자 그 뒤를 이어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를 동행하자는 거죠?”
“가보시면 압니다.”
“누구의 명으로 온 것이죠?”
그녀는 집요하게 질문했다.
“저를 따라 가시죠. 소저를 만나기를 원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전…… 태공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만나지 않아요. 그 분이 보냈나요?”
잠시 말이 끊어지는 듯 했고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것 같았다. 광마존은 어찌할까를 망설였다. 놈을 해치우고 주변에서 감시하는 놈들도 한꺼번에 죽일 수는 있었다. 단지 그렇게 할 경우 약간의 소란은 피할 수 없을 테고 단지 그것만으로도 발각될 가능성이 많았다. 그래서 그는 하는 수 없이 좀더 기다리기로 했다.
“태공께서 보내신 것은 아닙니다만……”
“그럼, 저는 갈 수 없어요. 가서 태공의 허락을 맡아서 오세요.”
그녀는 포로의 신분이었음에도 여전히 당당한 태도였다. 광마존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
“가셔야 합니다. 저로서는 소저를 완력을 동원해서라도 모셔 가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태공께는 나중에 보고를 올리도록 하죠.”
또 다시 침묵이 감돌았다. 광마존은 그녀가 따라가지 않기를 빌었다.
“좋아요.”
‘이런. 일이 복잡해지는데……’
잠시 후 문이 열렸다. 그 사이로 좀 전에 들어간 세 명과 또 한 명의 모습이 보였다. 광마존은 너무 반가운 나머지 하마터면 그녀의 이름을 소리내어 부를 뻔하였다. 그는 그들이 가는 방향을 따라 천장을 타고 조심스럽게 이동해갔다.
[자운. 나요.]
부르르르
“소저 왜 그러시는지요?”
천향의 옆에서 그녀를 시중들며 따르던 두 명의 시비 중 하나가 급작스럽게 걸음을 멈추며 그녀가 몸을 경련하며 떨자 놀라 물은 것이다. 그녀는 그러나 역시나 노련했다.
“아니에요. 그냥 몸이 안 좋은지 한기가 느껴져서요.”
[자운. 지금 나는 근처에 와 있소. 현재 그대가 내공을 모두 잃어버려 전음을 펼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소. 지금 당신을 구출하겠소. 그 동안 고생이 심했겠구려.]
천향옥봉은 정말이지 눈물이라도 쏟을 듯 했다. 꿈에서라도 듣기를 희망하던 정인의 목소리가 환청인양 들려왔고 그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 사지에 들어선 것이 결코 꿈이 아닌 현실의 일이란 것을 알게 되자 감격에 겨워 복받쳐 왔다.
“잠깐만요.”
자운이 갑자기 흑의무사를 불러 세우자 그는 의아하여 돌아섰다.
‘아니? 왜 그러지?’
놀라기는 광마존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몸이 좋지 않군요. 다른 때에 가면 안 될까요? 금방 좋아질 듯 한데……”
“소저 갑자기 왜 또 이러십니까?”
“아, 알았어요. 그냥 가죠.”
‘저 말은 나더러 들으라는 소리가 분명하구나.’
[알았소. 자운. 혹시 그대의 말은 지금보다 더 나은 기회가 곧 있을거란 말이오?]
천향옥봉은 걸어가는 중에 미세하게 고개를 까닥거렸다. 그녀의 그런 모습을 보고 이상히 여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으음. 알았소.]
할 수 없이 광마존은 그들 일행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전각을 벗어나자 전각사이를 이어주는 청강석으로 된 길을 따라 일행들은 이동해갔다. 광마존은 주위를 세심히 살폈다. 전각을 완전히 벗어났다 여겨지자 매복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흑의무사는 꽤 먼 곳을 택해 가는지 바로 근처에 보이는 전각 쪽이 아닌 다른 곳으로 이들을 안내해 갔다. 광마존은 조심스레 그들을 따르며 자운이 신호를 보내주기만을 기다렸다.
[자운. 그대는 이곳의 상황을 잘 알 터이니 적당한 곳이 나오면 바로 신호를 보내주시오.]
역시 그녀는 또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성미 급한 광마존의 평소 성격에 비추어 지금의 상황은 대단히 조심스런 결정이었다. 무턱대고 일을 저지르고 보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유리한 상황에서 탈출의 가능성을 높이고자 하는 것이리라. 하나의 전각을 끼고 돌아가는 곳이었다. 다른 곳에 비해 반대쪽이 작은 숲으로 되어 있었고 인적이 상대적으로 드문 곳이었다. 천향옥봉의 눈에서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바로 지금이에요.”
두 시비와 앞서가던 흑의무사는 느닷없는 그녀의 말에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나 그런 감정은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픽
세 명은 거의 동시라 할 만큼 옆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이내 장내에는 광마존의 모습이 드러난다. 그는 해후를 만끽할 생각은 애초에 없는지 서둘러 그들을 숲 속으로 던져 놓기 바빴다.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몰라요.”
급히 그녀 곁으로 다가선 광마존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나도 다 알고 있소. 지금은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먼저 여기를 빠져나갑시다.]
“전……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군요.”
[무슨 소리요? 죽다니……]
황제(皇帝)의 검(劍) - 97
[앞으로는 내가 지켜주겠소.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소. 그 동안 고생했소.]
둘은 손을 마주 잡았다. 지금이 얼마나 긴박한 상황인지도 모르는 철부지 어린 연인들 같았다. 잘 어울리는 철석간담의 한 쌍이었다. 상황이야 어떻든 천향옥봉은 눈가에 차 오르는 눈물만은 감추고 싶지 않았다. 가슴 뭉클함이 이내 전신을 휩싸고 돌았다.
‘사랑해요. 앞으로의 삶은 당신을 위해서 살아가겠어요.’
자운의 마음속의 말들은 언어가 되어 전해지지는 않았으나 마주잡은 손길로도 광마존은 그녀의 마음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소. 어서 빠져나갑시다.]
광마존의 튼튼한 두 팔이 그녀를 품안에 안아 들었다. 그녀는 고개를 광마존의 튼실한 가슴팍에 깊이 묻었다. 이대로 잠이라도 잤으면 좋으련만 그녀 또한 조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단지 사랑하는 정인과 함께라는 이유만으로 광마존보다는 마음의 여유가 있을 뿐이었다.
광마존은 반대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가 빠져나가기로 작정한 곳은 대상벌의 내원을 거의 직단으로 가로지르는 방향이었다. 사실 그녀를 안고서는 천마잠형술을 펼쳐보아도 별 효과가 없었다. 그럴 바에야 최대한 신속하게 움직이는 것이 나을 것이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는 한 발을 구르며 위로 몸을 솟구쳤고 전각위로 사뿐히 올라섰다. 그는 사방을 빠르게 살폈다. 현재 자신들이 있는 위치는 대상벌의 내원 중에서도 심처라 할 수 있는 지역이었고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내원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가장 거대한 전각을 거쳐야만 했다.
[자운. 저 큰 전각은 누구의 처소요?]
그는 습관처럼 전음을 사용했다. 그녀는 여전히 광마존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조용히 뇌까렸다.
“봉신전(奉新殿)이라는 곳으로 이곳의 책임자격인 천무태공의 처소이자 집무실이 있는 곳입니다. 가장 경계가 치밀한 곳이죠.”
[저곳을 통과하지 않고는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하오?]
“이곳의 구조자체가 일종의 진식으로 구성되어 있고 후면으로는 각종기관이 설치되어 있는지라 소동 없이 나가려면 차라리 정면을 택하는 것이 낫습니다.”
[그 또한 지키는 자들이 많다면 마찬가지가 아니오? 더군다나 이런 모습이라면 발각되는 즉시 비상이 쳐질텐데……]
이래저래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둘 다 그것을 아는지라 입을 꾸욱 다물었다. 어차피 거쳐야 하는 관문이라면 당당하게 뚫고 나가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냐만은 그런 객기만으로 해결될 일은 아니었다.
[좋소. 정면을 택해 조심스럽게 빠져나가 봅시다. 설마하니 죽기야 하겠소?]
광마존 나름대로는 천향옥봉을 안심시키려고 가볍게 건넨 농담이었지만 지금의 상황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죽음이란 단어가 그다지 낯설지 않게 여겨지는 것은 왜 일까? 가까운 곳에서 자신들을 채가기 위해서 몸을 낮추고 도사리고 있는 것처럼 여겨졌고 그 덫은 멀지 않은 곳에서 아가리를 벌리고만 있을 것 같았다. 불길한 생각은 꼬리를 물고 그들의 뇌리를 떠나지 않고 괴롭혀 왔다. 천향옥봉은 광마존을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죽어도 좋다고 소망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를 만난 지금 그녀는 진실로 살고 싶었다. 여기서 생을 마감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광마존은 곧장 어둠을 택해 동화되어 가려고 노력했다. 지붕을 가로질러 잇대어져 있는 전각을 건너뛸 때마다 가슴이 쿵쾅거리며 함께 뛰었다. 그는 나름대로 시간을 측정해보았다. 천향옥봉을 데리러 온 무사가 돌아갈 시간은 이미 지났다. 그런 점에서 누가 보냈는지는 모르나 재차 명이 떨어졌을 것이고 지금쯤 그들은 천향옥봉이 있던 처소로 들어서고 있을지도 몰랐다. 이런 생각에까지 미치자 마음이 조급해져 그는 가일층 속도를 배가했다. 어둠 속에서 어른거리는 인영들의 움직임이 있을 때마다 그는 움직임을 죽이며 건물의 벌어진 공간을 찾아들어야만 했다. 그 혼자라면 천마잠형술을 펼쳐 몸을 감출 수 있지만 천향옥봉을 안고 있는 이상에야 그것은 무용했다. 또 하나의 인영을 감지한 광마존이 전각의 지붕에 바짝 엎드리며 속으로 툴툴대었다.
‘빌어먹을 새끼들, 잠도 없냐? 이 시간에 무슨 침입자가 있다고 눈에 불을 켜고 있나 그래? 내 오늘 여기서 나가게 된다면 반드시 또 한번 들리마. 밤에 잠 안자고 설치는 것들의 목을 따놓고야 말리라.’
그의 손이 빠르게 앞으로 뻗어갔다.
쉭
털퍽
하나의 인영이 바닥으로 쓰러지는 모습이 보였다. 그가 던진 것은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가져온 침이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사용하는 침이 그의 손에서 암기로 화하는 순간이었다.
‘이제는 어쩔 수 없다. 시체가 발견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이미 자운이 사라진 것은 알려졌을지도 모를 일. 시간을 지체해서는 득 될 것이 없다.’
지붕 위를 스치듯 뛰어가는 광마존의 모든 감각은 주위의 움직임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의 움직임은 흔적도 그렇다고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러나 시야에 뻔히 보이는 것은 사실이었기에 그는 최대한 몸을 낮추었다. 하나의 전각을 건너 뛸 때마다 품속의 자운을 더욱 힘주어 안았다. 그가 목표로 잡은 커다란 전각, 봉신전이라 불린다는 그 전각의 주위는 다른 곳에 비해 유달리 밝았다. 대충 가늠해 보기에도 수 백 명의 호흡이 느껴지고 있었다. 지붕에만도 스무 명이 넘는 놈들이 드러누워 있는 듯 했다.
‘이런…… 저 놈들을 어떻게 따돌리지? 할 수 없지. 모두 흔적 없이 죽이는 수밖에……’
[자운. 지금부터는 숨도 크게 내쉬면 안되오. 여기 잠시만 있으면 저 놈들을 모두 처치하고 돌아오리다.]
그는 봉신전이 바라보이는 전각의 지붕에 천향을 내려놓는다. 다행인지 그곳은 지붕의 높낮이가 틀려 그녀가 몸을 숨길 곳이 있었다. 광마존은 그녀의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이 곧장 천마잠형술을 전개해서 사라져 버렸다. 천향옥봉은 눈앞에서 사라져 가는 정인을 눈 동자에 담아두기라도 하려는 듯이 애틋함을 담고 바라보고 있었다.
‘이 놈들! 미안하지만 이제 그만 쉬려무나.’
그의 손에서는 은침 수 십 개가 어둠 속에서도 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는 소리도 없이 전각의 지붕 위에 은신하고 있는 놈들을 찾아내었고 어김없이 그의 손에 들린 침들이 그들의 사혈에 틀어박혔다. 신음도 없었기에 들킬 염려는 없었다. 그들은 오랜 시간의 잠복을 위해 대부분 고정된 자세를 취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생명이 다한다고 해서 별다른 자세의 변화는 없었다. 그는 전각의 처마 밑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도 몇 놈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 놈들은 죽이면 안되겠군. 빌어먹을……’
그는 빠르게 다시 천향옥봉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그녀를 품에 안아들고 또 다시 움직였다. 드디어 그는 내원의 최 중심에 도달한 것이다.
‘여기만 벗어나면 된다. 최소한 백장만 벗어나도 설사 발각된다 해도 빠져나갈 수 있다.’
그는 자신했다. 자신의 경공을 능가할 놈이 이곳에는 없을 것이고 한 두 놈 따라 온다고 해도 유인해서 얼마든지 해치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그가 거쳐온 곳이라 여겨지는 방향에서 전각 쪽으로 달려오는 놈들이 보였다. 그들은 뭐가 그리 다급한지 곧장 전각 안으로 사라져갔다. 그런 그들을 보며 광마존은 내심 짚이는 것이 있어 더욱 조급해졌다.
‘이제는 어쩔 수 없다.’
그는 몸을 엎드리며 전각의 지붕을 박찼다. 그가 속도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이판사판이라는 식으로 몸을 드러내며 달려갔다. 그가 움직여 가는 속도는 굉장한 것이었지만 육안으로 잡아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고 여기저기서 고함소리가 빗발쳤다.
“저기 침입자다.”
삑
호르르륵
별의별 호각소리가 동시에 조용한 하늘을 요란스럽게 울려갔다. 어둠가운데 잠들고 있던 대상벌이 갑자기 소란스러워 지는가 했더니 여기저기서 횃불이 밝혀지고 더 많은 고함소리가 하늘을 수놓았다.
‘들켰다.’
광마존은 반사적으로 품속의 자운을 더욱 힘주어 안으며 힘차게 바닥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 올랐다. 이제는 그를 모든 대상벌의 고수들이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저기다.”
“저쪽이다. 막아라.”
소리가 아래서 들려오는 것을 들으며 몸을 허공 중에서 뒤집으며 다시 한번 재 도약했다. 그러나 그는 앞으로 전진해갈 수는 없었다. 사방에서 그를 향해 쏘아진 화살 때문이기도 했으며 맞은편에서 거의 날아오다시피 다가오는 일단의 고수들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한 손을 펼쳐 날아오는 화살들을 쳐내었다. 쏘아지던 것만큼이나 빠르게 재차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 버린다. 활을 쥐고 있던 궁수들 중에 몇몇은 자신이 날린 화살에 몸을 관통 당한 채 신음을 발하고 있었다. 광마존은 바닥으로 내려섰다. 그리고는 몸을 비호처럼 날리며 포위해 오는 무리들의 일각을 뚫어갔다.
“죽어라 하루살이들.”
그의 손에서는 백옥마강이라 불리는 강기가 뽀얀 몸체와는 달리 위력적으로 무리들을 강타했다.
쾅
“으악”
“케엑”
별의 별 괴이한 비명을 질러대며 그들은 격전의 권역에서 퉁겨나갔다. 정통으로 맞았건 스쳐 맞았건 간에 그들은 피 떡이 되어 뭉개졌으며 파편들이 밤하늘로 비산했다. 저것을 아름답다 여길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그렇지만 광마존은 순간 어울리지 않게 그 광경이 너무나 아름답다 여겨졌다. 순식간에 죽어나가는 동료들을 보면서도 그들은 주춤거리지도 않고 길들여진 본능대로 적을 향해 검을 꼬나 쥐고 달려들었다. 마치 성난 개떼들 같기도 했다. 이것만 보아도 그들의 본능은 사육된 것이 분명해 보였다. 광마존이 이런 그들의 모습을 보고서는 한 손을 풍차처럼 휘두르며 강기를 쏘아냈다. 그의 삼 장 방원 내에는 아무도 들어서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 역시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무너진 일각은 또 다시 다른 놈들로 순식간에 채워진다.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허리춤에 매어져 있는 검을 빼어 들었다. 기수식으로 멋을 부릴 생각은 애초에 없었기 때문인지 곧장 적들을 향해 검강을 시전 했다. 위에서 아래로 내리긋는가 하면 중단에서 좌우로 회전하며 뿌렸다.
콰쾅
“끄악”
직단으로 내리긋는 동작에 그의 정면으로 다가서던 놈들과 주위에 있던 놈들이 무더기로 터져 나가며 뒤로 몰려들고 있던 놈들까지 쓰러뜨리며 퉁겨졌다. 땅에는 검강의 위력으로 깊이 반 자는 족히 될 흔적이 뚜렷이 패여져 있었고 7장은 떨어져 있을 고목이 반으로 쫘악 갈라지며 좌우로 넘어가고 있었다. 광마존의 앞에서 비롯된 흔적이 그곳까지 이어져 있음을 발견한 무리들은 그제야 동요하기 시작했지만 그것은 이내 독려하는 소리에 부추겨 흩어져 버렸다.
“놈은 단지 하나일 뿐이다. 겁먹지 말고 죽여라.”
광마존은 소리치는 놈이 너무나 얄미웠다. 놈을 먼저 죽여놓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 놈은 인의 장막 저 뒤에서 소리만 지르고 있었기에 마음으로만 놈을 잘게 부수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점차로 몰려드는 숫자는 늘어나고만 있었다. 다른 곳의 경비를 맡고 있던 놈들이나 꽤나 지위가 높아 편하게 자기처소에서 잠을 퍼 자던 놈들도 급작스런 소란에 몽땅 뛰쳐나왔기 때문이다.
‘이것 이러다 꼼짝못하고 여기서 당하게 생겼구나. 할 수 없다. 모험을 해 보는 수밖에’
황제(皇帝)의 검(劍) - 98
그는 다가오는 놈의 머리통을 오른발로 짓밟으며 몸을 띄우는가 했더니 곧장 허공으로 도약하며 직선으로 공간을 이동해갔다. 이것은 위험천만한 방법이었다. 포위망이 단지 한 겹에 불과하다면 손쉽게 빠져나갈 수 있겠으나 지금의 포위망은 어디까지 이어졌는지도 모를 정도로 넓었다. 그런 그들의 위로 뛰어 넘어가 봤자 공격은 피할 수 없고 아래에서 올라오는 공격에 대해 거의 무방비 상태나 마찬가지일 뿐만 아니라 방어하기도 수월치 않은 법이다. 그럼에도 그는 더 이상 시간만 허비하며 망설이고 있을 수가 없었기에 이 방법을 택한 것이다. 갈라진 고목의 옆에 있는 또 하나의 나무위로 쏜살같이 올라섰으며 가지 끝을 밟고 또 다시 도약해갔다. 그런 그에게 쏟아지는 것은 화살이나 암기들이었지만 그다지 위력이 없었기에 손을 한 두 번 휘젓는 것으로도 방비할 수 있었다.
피융
뒤통수 쪽에서 느껴지는 살기를 감지하자 광마존은 습관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챙
‘으음?’
그는 손아귀에 은은하게 전해지는 충격을 느끼고는 심중에 놀람을 나타내었다. 대체 어떤 놈이 이 정도의 위력을 지닌 화살을 날린단 말인가? 그의 눈은 빠르게 그 놈을 찾아갔다. 저 멀리서 몇 명의 노인들이 바람을 가르며 공간을 단축해 오는 것이 비치고 있었다. 광마존은 개의치 않고 허공에 멈추었던 몸을 재차 뽑아 올렸다.
파앙
“이것은?”
이번엔 앞쪽이었다. 그가 한 눈 판 사이에 다가선 것으로 짐작되는 세 명의 늙은이들이 다짜고짜 공격을 해 댄 것이다. 검을 수직으로 세워서 황급하게 내리쳤다. 검강이 앞으로 쭉 뻗어가며 그들의 장력과 부딪힌다.
쾅
광마존의 몸이 움찔하며 뒤로 날려갔다. 그래봤자 몇 장에 불과했지만 아무리 불의의 기습에 미처 대비하지 못해서였다지만 그로서는 보기 드물게 만나는 강자들이었다.
‘호, 이것 봐라. 역시 물렁하지만은 않다는 말인가?’
정말이지 품안에 천향옥봉이 없다면 저런 놈들은 일 검에 도륙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는 신중을 기하려 그들의 존재감을 인정하기로 했다. 그는 더 이상 허공에 있지 못하고 바닥으로 내려서야만 했다. 그가 떨어져 내리자 주변에 있던 놈들이 벌떼같이 위로 솟구치며 공격해댔다. 광마존의 얼굴에 비웃음이 서린다.
“이놈들. 역시 네놈들은 개떼습성이 있는 놈들이었구나. 좋다. 이 놈들 모조리 쓸어버리겠다.”
순간 그의 검이 손을 떠났다.
“이기어검이다. 피해라.”
누군가의 입에서 토해진 소리가 아니어도 눈이 있으니 모두 보았을테고 자신들로서 감당하지 못한다고 판단한 놈들이라면, 더군다나 하나밖에 없는 목숨이 아깝다면 물러설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한치의 물러섬도 없었다. 진정 그들은 죽음마저 도외시하는 기계적인 감정의 소유자들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저런 무모한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광마존의 검이 빛에 휩싸여 빛을 이끌고 빛처럼, 자신을 향해 튀어 오르는 인영들을 갈라버린 것은 짧다고만 할 수는 없을 지리한 장면을 연출하는 듯도 했다. 그 모든 찰나의 순간들이 시간 안에서 일시적으로 정지한 듯한 모습들 가운데 무리들의 머리와 배와 몸통과 허벅지를 한 순간에 꿰뚫어버렸고 폭죽이 터져 나가듯 그들의 몸은 파편이 되어 대지에 흩어져 갔다. 피가 튀고 살이 터지며 뼈가 바수어지는 광경인지라 참혹하다는 말로는 설명이 힘들 지경이었다. 비명도 터져 나오지 않았다. 얼마나 흉폭하고 빠른지 지나쳤다고 느낀 순간 의식마저 빼앗아 가버린 것이다. 비명은 언제나 산 자의 것이다. 죽은 자는 더 이상 아픔을 호소하지 못한다. 육신이 있고서야 비명을 지를 수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 않겠는가?
“저, 저것은 혹시 검폭?”
가까이 다가온 노인 중 하나가 부지불식간에 터트린 감탄성인지 신음성인지 성격이 분명치 않은 말이었다.
“검폭이 분명하다.”
이기어검으로 펼치는 검폭이라면 그들로서도 감당할 수 없다. 막무가내로 덤벼드는 수하들보다는 좀더 신중하고 영악하고 자신의 목숨이 언제나 최고덕목의 가치로 자리잡혀 있는 자들은 때로는 더 강한 자 앞에서 물러설 줄도 아는 위인들이었다. 그들은 누가 시키기라도 한 듯이 훌쩍 공간을 넓히며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그 사이를 충성심만으로 무장한 충실한 수하들이 메우고 있었다. 광마존의 손이 그들을 가리키자 검은 여전히 빛에 휩싸인 채 그를 중심으로 큰 원을 거리며 돌아갔다. 점점 그 원은 커져 갔으며 그런 가운데 사육된 본능에 충실했던 대상벌의 수하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낙화하고야 말았다. 부서져 가는 영혼들은 구천을 맴돌다 어디로 떨어질 것인가? 또 다시 우매함에 미련이 남아 인간으로 환생할 것인가? 그것은 누구도 모를 일이었지만 광마존은 언뜻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스스로도 죽을 것이기에 그들의 죽음 앞에 기쁘지도 그렇다고 안타깝지도 않았다. 현실은 그들을 적으로 불러주었고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는 관계로 설정해 놓았기에 그 역시나 자신의 역할에 충실할 따름이었다.
검이 광마존의 손에 안착하자 적이란 이름을 지닌 대상벌의 수하들은 잠시의 순간에 느꼈던 절망감 앞에 몸서리치며 떨고 있었다. 스스로 검을 쥐었기에 누굴 탓할까 만은 노력으로도 넘을 수 없는 절대의 위력 앞에서 절망함은 당연했다. 그들의 상식선을 넘어 서 있는 무공은 그들이 보기에 천신이 하강한 듯 악마가 세상을 어지럽히려 내려온 듯 여겨졌기 때문이다. 눈앞에 있는 저 자가 정말로 인간이라면 자신들의 보잘것없는 무공이 너무나 천박하게 여겨지지 않겠는가?
“당신은 대체 누구요?”
노인 중 하나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광마존은 자운을 품에서 내려 앞쪽으로 세웠다. 여전히 그의 품에 반쯤 안기다시피 하고 있었다. 광마존을 좀더 넓게 포위한, 아니 사실은 좀더 멀찍이서 포위하고 있다는 말이 어울릴 그 들 무리중의 하나가 천향옥봉의 얼굴을 보고는 부르짖듯 말했다.
“그대는 바로 혈마천의 배신자……”
노인 중 하나가 눈썰미 좋은 녀석의 말을 받았다.
“저 년이 그럼 포로로 있다는 그 년……”
말하다 말고 다물어 버림은 그 역시나 본능에 충실하기 위함이었던가? 광마존의 시선이 자신에게 머문 것을 느끼고서도 끝까지 그 말을 이어나갈 자신은 없었다. 광마존은 너무 시간을 지체했다 여겼다.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개들은 늑대를 포위하는 짓은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굶주린 개떼들은 늑대를 공격하고 그들의 비어버린 속을 채우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대상이 호랑이라면 얘기는 틀려지는 것이다. 개떼들이 아무리 굶주렸다고 한들 호랑이를 공격할 정신나간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굶주림 이전에 호랑이가 지닌 범접치 못할 위압감에 굴복 당하는 것은 개로서 지닌 본능이자 자연의 법칙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을 인간사회에 적용시킨다 함은 무리가 있겠으나 지금의 상황은 분명 그런 현상을 보이고 있었다. 수천 명의 무사들이 한 명의 호랑이 같은 고수 앞에서 감히 공격하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으니 말이다. 지금의 상황은 최소한 표범 정도의 조력자가 나서지 않는 한 이들의 얼어붙은 심장을 녹이지는 못할 것 같았다. 이런 점에서 어쩌면 표범 이상일지도 모르는 두 마리, 아니 두 명의 인물이 등장하고 있었으니,
화르르륵
옷자락을 날리며 장내에 떨어져 내리는 두 명의 인물이 있었다. 각기 다른 방향에서 출발했으나 한곳에 떨어져 내렸다. 그들은 초량과 검황이었다. 이곳 대상벌에서 최고의 지위를 지니고 있는 두 명이 동시에 장내에 나타난 것이다. 그들이 장내에 나타나자 광마존도 경계를 하기 시작했다.
“자운! 그대가 왜 거기에 있소?”
초량의 음성은 여전히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듣는 사람 중에 백이면 백 누구나, 사랑하는 연인사이에서나 할 수 있는 어조로 생각할 정도였다. 천향옥봉은 초량을 똑바로 응시했다.
“저는 태공께 분명히 말씀드린 적이 있어요.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죽음을 각오하고서라도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고요. 그 분이 절 데리러 오셨군요.”
“하하하하하하”
초량의 웃음은 티 한 점 묻어 있지 않은 맑은 공명을 보이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내면을 헤아릴 줄 아는 이들은 그가 얼마나 괴로워하는 지를 단박에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소? 그럼, 지금 무척 행복하겠구려.”
“네 그래요. 전 행복해요. 세상에 나보다 행복한 여자는 드물 거예요. 어떤 여자가 목숨을 건 사랑을 받아보았겠어요? 그런 점에서 저는 무척 행복하답니다. 그리고 이 분이 제 남편이란 사실이 너무나 자랑스럽군요.”
그녀의 한마디 한마디는 초량의 가슴을 후벼파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얼굴은 훈훈한 춘풍이 불어오고 불어갔다. 그리고 진심으로 그녀의 행복을 축하한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태공 대체 뭐 하는 겁니까? 저 년이 보아하니 혈마천의 배신자란 계집이 분명한 것 같건만……”
그는 더 이상 말을 꺼내놓지 못했다. 초량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는데 상처 입은 야수의 눈이 저러할까?
‘저, 저놈. 어떤 짓도 저지를 수 있는 눈이다. 괜히 성미 돋우었다가는 나랑 붙자고 덤빌지도 모르겠군. 저 침착하기 그지없는 놈이 저런 모습을 보일 때도 있다니, 그저 이럴 때는 입다물고……’
“흠흠…… 태공께서 할 말이 많으신가 보구려. 마저 하시구려.”
초량은 그에게 감사한다는 표시로 고개를 까닥거려 주었다. 그리고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천향옥봉을 더욱 깊숙한 시선으로 주시하기 시작했다.
“먼저 축하드리오. 그대가 그토록이나 기다리던 정인을 만났으니 나로서도…… 기쁘기 한량없소이다. 그러나…… 내 개인적으로야 얼마든지 소저와 공자를 축하해주고 싶고 보내드리고도 싶으나…… 공과사는 구분해야 하는 자리에 있는지라…… 미안하오. 이것은 진심이오.”
천향옥봉은 그의 진심을 알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가 진정 그의 마음을 안다고 한다면 그것은 어줍잖은 동정에 지나지 않는 것이요. 뻔한 거짓말에 불과하다. 어찌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자들이 서로의 입장을 알 수 있겠는가? 서로를 향해 서지 않고서는 바로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겠지요.”
자운의 말에 이어 광마존이 나섰다.
“그래서 내 앞을 막겠다는 것이냐?”
다짜고짜 반말을 해대는 광마존을 초량은 쳐다보지 않았다. 여전히 그의 시선 속에는 자운이라 불리는 천향옥봉의 모습만이 그득 차 있을 뿐이었다.
“당연하지. 이곳이 네 놈 맘대로 왔다가 맘대로 갈 수 있는 곳이라 여겼단 말인가? 내 분명히 확언하건데 네 놈은 이곳에서 반드시 죽을 것이다.”
더 이상은 인내력의 한계를 느낀 검황이 나서며 한 말이었다. 광마존은 주위를 다시 한 번 돌아보았다. 좀 전에 미친 듯이 덤벼들던 놈들 뒤쪽으로 또 다시 수 천 명의 인원들이 증원되어 있었고 그들은 결코 좀 전에 그에게 손쉽게 당하기만 하던 무리들과는 다른, 제법 그럴싸한 기도를 풍기는, 고수라고 불릴 만한 놈들이었다. 그런 점에서 그가 탈출할 수 있는 확률은 그 만큼 줄어든 셈이었다. 결국은 이들의 대가리인 것 같은 저 두 놈을 해치우지 않고서는 엄두도 내지 못할 것이었다. 그는 속으로 한숨을 내 쉬었다. 그렇지만 자운이 실망할 것이 두려워 감히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했다. 여전히 초량의 시선은 자운에게 못 박힌 채 움직일 줄을 몰랐다. 광마존은 기분이 그리 썩 좋지는 않았다. 자신의 여자인 자운을 쳐다보는 것도 부족해 자운이 스스로 남편이라 했음에도 자신은 안중에도 없이 그녀만을 뚫어질 듯이 쳐다보고 있지 않은가?
‘뭐, 저런 놈이 다 있지?’
그는 분위기로 보아 새로이 장내에 나타난 두 놈이 대등한 지위에 있거나 늙은 놈이 젊은 놈을 어려워한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지금과 같이 자신이 불리한 입장에 있을 때는 결국 적진의 수장을 베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되었고 그런 판단이 서자 곧 바로 움직였다. 그는 무릎도 굽히지 않고 순식간에 앞으로 돌진해 갔다. 그러나 그는 곧 바로 뒤로 퉁기듯 물러나야만 했다. 기분 나쁜 늙은 놈이 그가 움직이자 곧 바로 천향에게로 다가서는 듯한 몸짓을 취했기 때문이다.
‘저 놈은 아주 야비한 놈이다. 그렇지만…… 전세를 이용할 줄 아는 영악한 놈이기도 하다. 이것 어려운 싸움이 되겠구나.’
결국은 자운이 있는 한 그는 섣불리 공격하거나 피할 수도 없다. 그녀를 품안에 안고서 저 둘을 한꺼번에 상대하기는 그 조차 벅차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직접적으로 부딪혀 본 것은 아니지만 그 둘은 지금까지 상대한 그 어떤 자들보다 강한 놈들이 분명했다. 비교적 격전장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일곱 늙은이들더 어느새 초량과 검황 옆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들은 천황부의 장로들 중에 이번에 검황이 데려온 7인들이었다. 그들 역시나 그리 만만치 않은 자들이었으나 광마존의 극강한 무위에 눌려 있는 셈이었다.
-황제(皇帝)의 검(劍)-
71.일어서는 마도련!
사천성도를 중심으로 해서 사천성 전역에 비상이 걸렸다. 요 근래의 괴사의 흉수가
오련회 총단을 침투했다가 부상을 입고 도주한 사실이 알려졌고, 이것 때문에 수
상한자들이다 싶으면 검문을 하고 말을 듣지 않거나 도주하려는 낌새가 보이면 체
포되고는 했다. 이 바람에 지방관청에서 수배한 흉악범들이 여럿 잡히는 일까지 발
생했으니, 단 몇 시진만에 일어난 일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신속한 움직임
이었다.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어둑어둑했다. 습기가 느껴졌고 여기저기 치솟은 돌들
이 제각기 기이한 모양들을 하고 어지럽게 늘려 있다. 그 사이로 이름도 분명치 않
은 곤충들이나 때로는 징그러운 뱀들도 보였고 천장에는 물방울이 맺혀서 땅으로
떨어진다. 한 쪽에는 마른 풀을 뜯어 뭉쳐놓은 자리가 보이고 그곳에 한 명의 소녀
가 누워 있었다.
“아……헉헉”
그녀를 내려다보는 소년이 있었다. 그는 윗옷을 걸치지 않고 있었는데 옆구리를 붕
대로 칭칭 감고 있었고 함빡 피에 젖어 있었다. 그는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누워 있
는 소녀를 쳐다본다.
“괜찮겠어? 의원이라도 하나 잡아올까?”
“됐어. 그만둬. 이까짓 상처쯤이야.”
소년보다는 소녀의 상처가 큰 듯 했다. 한쪽다리의 허벅지는 역시 붕대로 감겨져
있었으나 그곳에서는 지혈을 했음에도 피가 스며 나오고 있었다. 이미 상당한 피를
흘렸기에 어지러움을 느꼈다. 소년은 품에서 무엇인가를 꺼내었다.
“이것이라도 먹어 둬라. 지혈은 했지만 뼈까지 다친 상황이라 고통이 심한 것이다.
다행히 신경은 손상이 없지만…… 제대로 치료하지 않으면 위험하다. 더군다나
내상조차 심하니……”
그는 손에 들린 약병에서 노란 환약을 꺼내 소녀의 입에 넣어 주었다. 그녀는 이내
눈을 감고 조용히 잠들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소년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빌어먹을…… 이것이 아닌데, 우리가 너무 경솔했다. 오련회주라 했던가? 그 놈
! 이 수모는 반드시 되돌려 주고야 만다. 이 사실을 사형들에게 알려야 하는데….
..”
그도 피곤한지 한쪽에 몸을 눕혔고 이내 잠에 빠져 들어갔다.
그가 눈을 뜨니 소녀는 이미 깨어나 있었다. 그녀는 벽에 상체를 기대고 앉아 있었
다. 그 모습을 보니 반갑기 그지없었다.
“소소. 이제 좀 견딜만하니?”
“응. 그런데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모르겠다. 젠장. 설마 우리가 이런 꼴이 될 줄이야.”
“이렇게 되면 우리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어지는데…… 무림정세에 대한 조사도
채 마치지 못했잖아?”
“신경 쓰지 마라. 어차피 이렇게 된 것, 사형들이 들어오실 때까지 기다려 보는 수
밖에……”
“그자. 굉장히 강했어. 중원을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될 것 같아.”
“후후 그야 당연하지만, 문제는 그자가 제일 강한 자가 아니라는 거지. 그자는 무
림칠기의 말석에 겨우 위치하는 자야.”
“무림오천이란 자들은 얼마나 강할까? 이제야 사부님이 예전에 마도련주와 동맹하
려 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아.”
“나도 이제야 그것을 알겠다. 섣불리 대들다가는 일패도지(一敗塗地)하기 십상이지
. 차라리 기회를 보고 있다가 다른 세력들이 지쳤을 때 공격하는 것이 나을 것 같
은데……”
“대사형은 그렇게 하지 않을걸. 사부님도 이미 전권을 대사형에게 넘겼으니……”
소랑은 몸을 한쪽에 눕히며 한 숨을 쉬었다.
“후우. 대사형의 불같은 성격을 누가 막겠느냐? 사부님 조차 안중에 두지 않으니..
…. 앞으로의 상황이 염려스럽다.”
“너 가서 빨리 소식이라도 전하고 와라. 밑에 애들이 걱정하고 있겠다. 우리가 한
마디 말도 없이 사라졌으니, 혹시라도 사형들에게 이 소식이 들어가면?”
“놔 둬. 그러면 좀더 중원에 빨리 들어오겠지. 이 기회에 푹 쉬고 몸조리나 하자.”
“으음……”
소소는 걱정스러운 듯 고개를 푹 숙인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소랑도 착잡하기는
매 한가지였다.
★
악양의 모습은 겉으로야 달라진 것이 없는 매일의 모습과 마찬가지였으나 적어도
무림에 적을 두고 있는 자들만은 달랐다. 특히 무림맹 악양지부는 술렁이고 있었고
잔뜩 흥분되어 있었다. 악양지부가 생긴 이후로 최고의 귀빈이 머물고 있기 때문
이었다.
정도 사령대가 악양지부에 도착한 것은 오시가 넘긴 시간이었다. 그들은 악양의 동
부로에 위치하는 지부에 들어가자마자 이 지역의 모든 무림방파들의 수장들을 불러
들였고 그들에게 모종의 지시를 내렸다. 이곳에서는 힘깨나 쓴다는 그들도 감히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게 만드는 자! 그야 물론 정도사령대의 대령사
인 옥면신룡 문윤 대협이었다. 무림맹 제2인자라는 그의 직위보다도 무림오천이라
는 그의 명성과 무림의 최고배분자라는 그의 신분이 빚어낸 현상이었다.
정도사령대의 사령들을 바라보는 파천의 시선은 고요하기만 했다. 대전을 비워주고
밖으로 나가 대기하고 있는 지부장은 감히 이 자리에 끼지도 못하고 있었다.
“지금부터 전 사령들에게 명한다. 이곳 악양을 중심으로 삼일간 지부 괴멸에 대한
단서를 포착한다. 이번의 임무는 순전히 두 가지에 집중된다. 그 하나는 무림지부
괴멸을 주도한 마도련 세력의 이동경로를 포착하는 것! 또 하나는 그들의 본거지를
알아내는 것! 분명히 밝히는데 이번의 임무는 조사에 불과하니 필요 없이 정도를
지나쳐 무리하는 일이 없도록. 만약 단서를 포착한다하더라도 결코 혼자서 처리하
겠다는 생각은 버리도록, 알겠나?”
“존명”
사령들 200명이 질러대는 소리가 대전을 쩌렁쩌렁 울렸다.
“5인 1조로 행동을 같이 하고 필요하다면 지부의 힘을 빌려도 된다. 이곳 악양 뿐
만 아니라 항주, 소주, 무창, 등지까지 상세하게 살피도록 한다. 이후 삼일 뒤에
이곳 악양으로 재집결하도록. 그리고 만약에 신변에 무슨 일이 있거나 도저히 제
시간에 모일 수 없어서 늦어지겠거든 개인적으로 무림맹으로 가서 대기한다. 중간
에 마도련의 세력을 발견하더라도 섣불리 도발하는 어리석음은 범치 않기를 바란다
. 그런 실수는 한 번으로 족하니깐……”
곽운성이 파천의 그 말에 고개를 떨구었다.
“부령사들은 조를 지정해 주고 그대들은 이곳 지부에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
도록 해라.”
“존명.”
“존명”
“이상. 질문있나?”
★
“대령사께서는 마도련 총단에 들어가실 참이십니까?”
“후후 알면서 뭘 묻나?”
방안이었다. 독고무와 파천은 탁자를 사이로 마주 앉아 있었고 그들 앞에는 질 좋
은 화운(火運)산 도자기의 찻잔이 놓여 있었다.
독고무는 천마를 통해 파천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지니고 있었다. 파천을 보고 있
자면 혼란에 빠져들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한다. 처음의 파천에 대한 판단은
천하를 삼키려는 마황 정도로 여겼었다. 그런데 그를 곁에서 겪어본 바로는 단순히
그렇게만 말할 수 없는 인물이라 여겨졌고, 또 어떨 때는 자신의 그런 판단이 옳
다고 여겨지기도 하니, 어느 것이 저 자의 진정한 실체란 말인가?
“마도련의 마도대공이 대령사임을 알게된다면 과연 정도인들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요?”
“말해 무엇하겠나? 날 무림공적쯤으로 몰아 놓고 처단하려 하겠지. 믿음이 큰 만큼
배신감도 클 테니…..”
천연덕스럽게 평가를 내리기까지 하는 파천! 독고무는 그런 그를 보며 실소를 흘린
다.
“장차 그들의 표정이 어떻게 변할지 궁금해지는군요.”
“그럴 일은 없을 거다. 그 사실은 영원히 밝혀지지는 않을 테니 말이야.”
“후후 세상에 절대적으로 장담할 일이란 없지요. 혹시 압니까? 내가 어느 날 마음
이 바뀌어 실토할지……”
“하하하 그것도 좋겠지. 한가지 알아두게. 그렇게 되면 그들에게 좋아질 것은 하나
도 없지. 먼저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자들은 내 손에 먼저 죽을 것이고 무림 또한
전대미문의 혈겁을 감당해야 할 테니 말이다. 천마교의 세력은 전 무림을 상대로
일전을 결할 정도는 되지.”
할말을 잃어버리는 독고무다.
“율극 들어와라.”
드르륵
문이 옆으로 밀려나더니 사라의 오빠인 율극이 들어섰다. 그는 지금껏 밖에서 대기
하고 있었던 것이다. 흐리멍덩한 눈빛하며 고개를 좌우로 까딱거리는 꼴이 영락없
는 백치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잘 씻겨놓고 검은 무복으로 갈아 입혀 놓자 보아줄
만은 했다. 그는 파천을 두려움과 존경(?)이 담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이미 그의
여동생인 사라는 떠난 뒤였다. 그녀는 파천이 써 준 서찰을 들고서 북해빙궁으로
떠난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무림 정세에 한 가닥 변수가 될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너, 나와 함께 갈곳이 있다. 앞으로 내 특별한 지시가 있기 전에는 함부로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 알겠느냐?”
“히히 주인아. 알았다.”
머리가 지끈거려 왔다. 저 백치를 데리고 다닐 수 있을까? 그렇다고 떨어뜨려 놓으
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장담을 못하니. 아마 모르긴 몰라도 악양지부 뿐만 아니라
근처의 사람들은 눈에 띄는 족족 죽이려 들지도 몰랐다. 적어도 그의 무공만큼은
가공한 것이니 속절없이 죽음을 맞아야 하리라.
어떻게 된 것이 천마섭혼술이 제대로 먹혀 들어간 것 같았는데도 튀어나오는 말들
은 하나같이 반말이었고 가끔씩은 사리에도 맞지 않는 말들을 뱉어내기도 했다. 어
찌 보면 네 다섯 살 어린아이를 보는 듯도 했다. 그렇다고 그의 말을 거역하거나
토를 달지도 않았고 비교적 잘 순종하는 편이었다.
“저 놈을 데리고 들어가기도 그렇고 내 버려 두자니 더 불안하고…… 할 수 없지
. 이것도 다 내 팔자려니 해야지. 천마의 꼬드김에 넘어간 내 자신을 한탄 할 수밖
에……”
파천은 부령사들을 불러 몇 가지 지시를 내린 뒤에 악양지부를 벗어났다. 그의 뇌
리에는 조금 전 부령사가 전해준 말이 맴돌고 있었다.
“개방에서 들어온 소식에 의하면 무창근처에 있는 화룡림에서 일단의 무사들이 대
치를 하다 사라졌다 합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남도맹의 천향옥봉 소저가 있었고
일단의 무리들에게 끌려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11명이었으며 하나같이 젊은 무사
들이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수하로 보이는 천 여명의 기마대도 있었다
합니다.”
결국 그 개방도는 천향옥봉이 끌려 간 것으로 보고를 하였나 보다. 파천은 예상과
는 다른 보고에 일시 의문을 가진다. 누가 그들과 대치를 하였다는 말인가? 제 삼
의 세력이 개입을 했다는 말인데? 그 중에 어느 쪽으로 천향옥봉이 끌려간 것인가
? 그녀의 가치가 무엇이기에 다른 세력이 개입을 했지? 그리고 큰 충돌조차 없이
무마가 되었다니 그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제길 이럴 줄 알았으면, 일단 그녀를 구해놓고 보는 건데?’
후회해도 이미 늦어 버렸으니, 무엇이든 자신의 생각대로 일을 추진해오던 파천에
게 근래의 일은 여러 가지로 순탄치 못한 결과를 그에게 보일 때가 많았다.
“야, 너희들 이제 얼굴들 바꿔”
동정호 근처에 도달한 파천이 뱉어 낸 말이었다.
★
마도련은 갑자기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마도대공이 돌아오신 것이다. 그 동안 칙
칙한 안개 속을 헤매는 것 같던 분위기는 일시에 화창한 햇빛아래 드러나고 모두의
가슴에는 뿌듯한 안정감이 차 오르니, 그에 대한 불만이 있든 없든 간에 그의 비
중과 위력만큼은 지대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존마전의 태사의에 앉아 있는 파천에게 광마존과 군사가 돌아가며 보고를 했다. 그
동안 마도련에서 있었던 사건들이 주된 보고였고 이후 무림정세에 대한 일부정보
와 무림맹의 움직임, 특히 정도사령대가 악양에 머물고 있다는 보고까지 올라왔다.
“좋아. 그만하면 대충 알겠군.”
그는 고개를 들어 좌중을 돌아보았다. 마도련 전 지도부가 소집되어 있었다. 그들
은 아래쪽에 포단을 깔고 앉아 있었는데 파천의 시선이 자기 쪽으로 오자 얼른 고
개를 숙이는 모습들이었다.
“이 한심한 군상들아!”
첫마디가 그것이었다.
“흑호문의 단야적풍이 죽어? 뭐, 그럴수도 있겠지. 약한 놈은 강한 놈에게 죽기 마
련이니…… 문제는…… 그런 일이 벌어졌음에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하고
있다는…… 그 한심한 작태가 문제로군. 정도타도라? 어느 세월에? 그 정도 문제
도 해결하지 못하고 표류하는 작자들이 어느 세월에 정도타도를 하시겠냐고? 응?
좋다. 다 좋다. 어떤 놈이 숨어서 그 따위 짓을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분명히 이곳
어딘가에 있단 말이지?…… 군사!”
“네. 대공”
“수사진척 상황은?”
“아직 아무런 단서도……”
“한심하기는, 언제까지 그 놈의 단서타령이나 하고 있을 건가? 간단하게 생각하라
고……”
“무슨 말씀이신지”
“셋 중에 하나일거야. 첫 번째는 이 중에 누군가가 제 실력을 감추고 있거나, 그것
은 거의 희박해. 내가 보기에 그 정도로 똘똘해 보이는 자들은 없으니……”
파천의 그 말은 그들 모두를 모욕하는 말일 수도 있지만 그들은 일언반구도 못하고
고개만을 조아리고 있었다.
“두 번 째는 간부진을 제외하고 그 정도의 고수가 숨이 있는 경우. 상당히 가능성
이 있지. 세 번째는……”
말을 일시 끊고는 군사를 쳐다본다.
“무엇일 것 같나?”
“혹시?”
“말해봐.”
“대종사를 의심하시는?”
“그렇지. 세 번째는 바로 그것이다. 가능성이 가장 높다. 문제는 확인할 길이 없다
는 것이 문제지만…… 어쨌든 지금 상황에서 그것도 중요하겠지만 일단은 그 문
제는 덮어둔다. 더 이상 흉수를 찾는 일에 매달리고만 있을 시점은 지났다. 이제는
본련이 물위로 떠오를 때다.”
모두의 시선이 격동을 보였다.
“더 이상 지하에서 움츠리고 있지 않겠다는 말이다. 내가 살펴본 무림정세에 의하
면 더 이상 머뭇거리다가는 선기를 빼앗기고 만다. 한번 힘조차 써보지 못하고 물
결 뒤로 밀려 나 버릴 수도 있다는 말이다. 여기저기서 세외세력의 움직임들이 포
착되고 있고 일부는 중원 깊숙이 들어 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 징후들이 보인
다. 그러니 우리가 먼저 움직인다.”
군사 제갈초홍이 파천의 다음 말을 끊어버렸다.
“그렇지만 아직은 때가 아닌 듯”
파천이 다시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
“때는 만들면 그만이다. 전 비밀지단과 총단의 전 세력을 한꺼번에 집중시킨다. 그
래서 남도맹을 선두로 한 무림의 남부지역을 일시에 장악한다.”
쿠궁
그 말은 모두의 가슴을 세차게 두드렸다. 심장이 덜컹하고 내려앉는 듯 했다.
‘드디어 시작되는 것인가?’
일부는 묘한 흥분마저 느끼고 있는 듯 했다.
“대공. 다시 한번 재고하심이, 남도맹을 치게 되면 무림맹과 전면전으로 갈 양상이
짙습니다.”
“그래서? 군사는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남도맹을 제외하고 그 아래쪽부터 차근차근 올라오는 것이”
“후후 이상하군. 병법에 대해서 잘 아는 군사가 그런 어리석은 소리를 하다니? 우
리는 세력의 힘으로 봐서는 분명히 무림맹 보다 열세다. 남도맹의 위치가 어디에
있지? 무창이지? 그곳은 장강을 기준으로 해서 남쪽이다. 남도맹이 건재하다는 것
은 무림맹이 언제든 그들의 세력으로 유리한 전략지역을 선점하고 들어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지. 남도맹이 우리 손아귀에 들어오면? 상황은 그와는 다르다. 그들은 남
도맹 정도의 전진기지가 장강 근처에는 없다. 결국은 직접 세력을 정비해 주력부대
가 맹에서 나오는 수밖에 없다.
몇 가지 이점을 우리가 선점하는 것이다. 첫째 시간을 벌 수 있게 해 준다. 아무리
우리가 총력을 펼친다 해도 대강 남부 지역을 장악하려면 상당한 손실이 따르게
된다. 그러니 전력을 재정비할 시간은 필수적이다. 두 번째는 심리적 경계점을 장
강으로 쌍방간에 줌으로서 장기전으로 갈 양상이 많게 된다. 왜냐고? 우리가 남부
아래쪽에 본진이 있다면 당장 남쪽으로 들어오고 보겠지만 장강에 연한 무창과 악
양이 본거지라면 그들은 멀찍이서 상황을 바라보게 된다. 한번에 쓸어버리기 위해
서는 완전한 승리의 확신이 들지 않는 한 장강을 넘어서지는 않을테니……
마지막으로 세 번째, 시간을 벌고 장강이 경계점 역할을 함으로 흩어져 있는 마도
의 세력들을 규합할 수 있다. 이 정도만의 이점으로도 우리는 어쩌면 무림맹과 대
등한 전력을 소유할 수 있다고 보는데 군사의 생각은 어떤가?”
할 말을 잃은 채 멍해진 제갈초홍! 분명히 허점이 많은 얘기임에도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그의 얘기를 듣고 있자면, 송두리째 사람의 마음을 끌어 당겨버린다. 지금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의 시선에는 승리에 대한 확신마저 떠올라 있지 않은가?
그들의 가슴에는 마도인의 피가 절절 끓어오르고 있었고 지금껏 당한 서러움이 돌
파구를 찾아 부딪혀 가고 있었다.
그런 그들 앞에서 무슨 반대를 할 것인가? 제갈초홍은 고개를 숙이며 수긍하고 만
다.
“대공의 말씀을 듣고 보니……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녀의 얼굴은 근심으로 물들었다.
‘후후 계집! 네가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
무슨 의미인가?
“모두 잘 들어라. 정확하게 한 시진 뒤에 다시 한번 이곳에서 모인다. 그전에 자신
이 맡은 세력의 정확한 인원과 세력의 분포를 확인해보고 군사는 지단의 세력분포
를 다시 한번 상세하게 정리해 놓도록. 더불어 마도련 전 총단에 지금부터 무기한
비상을 걸고 아무도 이곳에서 나가거나 들어오지 못한다. 이후는 모든 것을 비상시
의 율에 따라 시행할 것이므로 세심한 배려를 하여 자그마한 실수도 보이는 날에는
그 자리에서 참살하겠다. 이상이다. 모두 나가보라.”
“존명!”
“존명!”
그들의 외침이 오늘따라 더욱 힘차 보였다. 작은 희망을 보았기 때문이었고 어쩔
수 없는 절망감에 몸부림치던 때였기에 더욱 그러했다. 존마전을 빠져나가는 모습
들에는 끓어오르는 무사의 혼을 주체치 못하는 흥분이 엿보인다.
그들이 모두 사라지고 파천은 자리를 옮겼다. 광마존등이 뒤를 따랐다. 광마존은
독고무와 율극을 힐끔거리며 쳐다보았다. 지존이 데리고 온 자들이 누구인지 전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율극은 광마존이 자기를 바라보자 바보같이 헤하고
웃기까지 했다.
‘저 놈 미친 놈 아냐?’
진짜로 미친놈임을 알면 표정이 어떻게 변할까?
★
“그래 어떻게 되었지?”
파천의 질문에 대답하는 광마존은 자신을 향해 누런 이빨을 드러내 놓고 웃는 율극
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네…… 군사 말대로 범인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 각도로 조사해 보았지만
흉수는 이들 중에는 없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지존의 말씀대로 대종사의 짓인 것
같습니다.”
“으음…… 군사에 대한 조사는?”
“의심은 가지만 그녀 또한 아무런 증거가 없습니다. 무영존 네가 말씀드려라.”
“군사의 처소를 은밀하게 조사해 보았으나 별다르게 의심이 가는 점은 없었습니다.
그녀가 살인이 일어나던 당시에 처소를 비웠다는 증언을 확보해 두었지만 직접 그
녀를 다그치지 못해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아니라고 하면 그만이니……”
“됐다. 그것은 그 정도로 해라. 어차피 그녀가 관여되어 있다면 어떤 식으로든 우
리에게 수작을 부리겠지. 앞으로 정신들 바짝 차려라. 아차 실수하는 날에는 생명
줄을 놓아야 하니……”
“네”
“대제자 한당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는 듯 하나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지존께서 다
그치시면 대답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가? 후후 하기는 대종사의 짓이라면 그가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우선은
너희들도 무림맹의 세력을 치는데 돕도록 하고 너무 일선에 깊숙이 나서지는 말아
라…… 그리고 단장”
“네.”
“너는 기회를 틈타 금응을 타고 본교에 한번 갔다 와야겠다.”
“네? 본교에요?”
“그래. 가서 마황검위대 1600명을 중원에 침투시켜 놓도록. 미리 쌍노에게 연락을
취해 놓을 테니 은신처를 준비해놓고 떠나도록 한다.”
“존명!”
“드디어 본교의 세력이 들어오는 것입니까?”
“아직은 아니다. 일부만 들어오는 것이지. 너희들도 수련을 게을리 하지 말도록 해
라. 아마 모르긴 몰라도 그 녀석들 엄청나게 강해져 있을 테니 말이다.”
“으음”
“……”
그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자신들이 동분서주하고 있는 사이에 그들은 교에서
무공수련만 하고 있으니, 더군다나 천마비고까지 개방된 마당에야, 그들의 진전은
대단하지 않겠는가? 파천의 그 말에 무영과 단장은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무영
은 12마공자 중 최 고수였고 단장은 4화 중 최 고수였다. 어쩌면 머지않아 누군가
에게 추월 당할지도 모른다.
광마존은 자신과는 상관없는 얘기여서 그런지 시큰둥해서 파천과 동행한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이 두 명은 누굽니까?”
참 빨리도 물어 본다.
“아! 서로들 인사들 하거라. 이쪽은……”
뭐라고 소개를 해야 하나? 파천은 망설이다 그 동안의 사정얘기를 한다. 두 사람에
대한 소개를 받자 세 명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율극도 덩달아 일어났다. 당
연히 독고무 때문에 자신들도 모르게 취한 행동들이었다. 천마조사라니? 파천의 내
면에만 있다던 천마조사가 다른 사람의 몸을 빌어 새롭게 등장한 것이다. 그들이
긴장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큿큿큿, 지금은 천마가 아니라는 말은 듣지도 않고……’
“야, 야 앉아라. 어지럽다. 지금은 잠룡대제의 손자인 독고무일 뿐이니……”
그제야 엉거주춤 자리에 앉는 그들이었다.
“독고무라고 합니다.”
독고무가 자기 소개를 하자 광마존등은 다시 자리에서 일어서며 고개를 숙였다.
“광마라고 부르십시오.”
“전 무영이라고……”
“전 단장이에요.”
“난 율극이다. 히히히”
율극이 함께 자리에서 일어서서 그들을 흉내냈다. 머쓱해진 광마존이 그를 쳐다보
며,
“지존. 이 녀석 정말 바보 아닙니까?”
“바보다.”
“으음”
“난 바보다. 히히 난 율극이고 바보다.”
“되었다. 율극 그만해라.”
모두들 자리에 앉더니 복잡한 심사를 드러낸다. 한명은 천마조사이고 또 한명은 구
음진경을 익힌 초고수라니……
안 그래도 최강의 전력에 그 둘마저 가세했으니…… 장차 이들을 막을 자들이 과
연 몇이나 될까?
★
파천은 마도련의 고수들에게 직접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고 군사가 자세한 중원의
전도를 가져다 놓고 세세하게 설명을 했다. 크게 8개의 세력으로 분산되어 출진하
게 되며 그들을 4공자와 내외당, 천인대와 마안대가 측면 지원한다. 비밀지단의 인
원들까지 하면 총 인원 4만 명에 육박하는 대군이 편성되었고 그들이 장악해야할
지역이 배정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배정된 지역에 위치하는 문파와 무림맹 지부들을 숙지하고 이어
그곳을 어떤 식으로 격파하여야 할 지에 대한 군사의 지시를 들었다. 역시 그녀는
제갈가의 후예다웠다. 한번 시작하니 막힘이 없었고 재삼 재사 숙고하여 짜 놓은
전략을 풀어내기라도 하듯이 완벽하다 할 정도의 세밀한 작전이었다. 그것을 보며
파천도 감탄을 드러냈다. 진정으로 대단한 두뇌가 아닐 수 없었다.
이번 작전은 뭐니 해도 신속함이 절대 우선시 되었다. 빠른 시간 안에 장악을 하고
곧 바로 무창과 악양으로 집결하는 것이 이번 작전의 승패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계속 됩니다.
감사합니다.
『SF & FANTASY (go SF)』 125450번
제 목:[하/펌] 황제의 검 72.급변하는 무림정세.
올린이:armisael(김동호 ) 01/02/04 21:19 읽음:342 관련자료 없음
제 목:[연재] 황제의 검 72.급변하는 무림정세. 관련자료:없음 [62181]
보낸이:임삼열 (logos333) 2001-02-02 22:42 조회:1525
-황제(皇帝)의 검(劍)-
72.급변하는 무림정세!
대륙을 질타하는 영웅도 세월이 흘러 기력이 쇠하면 젊음을 한쪽에 놓아버리고 조
용히 생을 마감할 준비를 한다. 권불십년(權不十年)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했으니 세상을 떨어 울리는 권력도, 제 모습을 온 천지에 뽐내는 화사한 꽃잎도,
세월이 지나면 영락(榮樂)이 쇠하고 그 모습이 참으로 초라해지는 것이다. 달도 차
면 기우는 법이요. 가는 걸음도 끝은 있기 마련이다. 이것이 순리라는 이름으로 운
명지어졌다면 너무 가혹한 일일지도 모르나 그 역시 인간사의 자연스런 이치이니
그 누가 이를 부인하고 거절할 수 있으리요.
그런 점에서 무림이란 세계 역시 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누천년을 이어오는 문파
란 손에 꼽을 정도에 불과하고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것과는 달리 성세를 그 동안
의 세월동안 누리어 오기란 참으로 힘든 일이었다. 시대에 우뚝 선 거대방파도 천
하제일을 외치며 번성을 누렸으나 그들이 지금껏 존재하기란 쉽지 않다. 모가 나면
정을 맞는 것이요. 제일이라 외치니 타도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인간의 욕망은 쉬이 식지 않는 것이어서 하늘 끝까지 치솟아 오르고 싶어하고 올라
간 자를 끌어내리고 싶어한다. 그곳에 서 보는 행운을 누리는 자는 그 또한 생명이
길지 않으니 이 모든 것이 수레바퀴처럼 끊임없이 돌아가는 이치이다. 정상에서
땅으로 곤두박질치고 다시 정상으로 올라가고, 끊임없는 순환을 통해 명맥을 이어
가면 그것이 곧 전통이요, 또한 생존이라는 이름의 저력이 되는 것이다.
적어도 이런 범주에서 전통을 지닌 문파란 무림의 세계에서는 많지가 않으니 정파
의 기둥이라 할만한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마도에서는 세외삼세와 지금껏 존재하는
지는 알 수 없으나 천외의 하늘이라 일컬어지는 천마교 정도이리라. 불같이 일어나
는 왕조 또한 길어야 500년을 넘기기가 힘이 드는 세상이고 보면 천년을 넘게 이어
온다 함 자체만으로도 참으로 위대하다 아니 할 수 없다.
북검회와 남도맹이 수세대만에 이루어진 세력이라면 구정련과 오련회는 기나긴 역
사 속에서 꺾어지지 않는 생존의 저력을 움켜쥔 세력이라 할 수 있다. 현 중원의
정도를 지탱하는 네 축의 한곳인 남도맹이 지금 풍전등화의 급박함을 호소하고 있
었으나 하늘도 바라보지 않고 땅도 헤아리지 않으니 그 누가 있어 그들의 위급을
다스릴련가? 때로는 불요불굴(不撓不屈)의 의지만으로도 되지 않는 일이 세상에는
다반사로 일어나는 것이다.
중원마도중흥의 기치를 내걸고 일어 난 마도련의 기세는 그 탄압의 세월만큼이나
거센것이었고 그들이 암흑의 지저에서 얼마만큼 절치부심(切齒腐心)하며 이날을 기
다려 왔는지를 알게 해준다.
마도8문중 하나인 녹림의 3700명과 천인대 1000명, 그리고 외당의 일부인 1000명,
4개지단의 1000명이 가세한 세력은 순식간에 무창의 남도맹을 짓밟아간다. 그들이
들이닥친 때는 자시가 넘은 시간이었던지라 경비무사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
이 깊은 수면에 잠겨 있었다. 이런 차에 그들의 기습이 이루어졌고 그것은 너무나
시기적절한 것이었다. 게다가 주력 중 상당수가 무림맹에 차출되어 간지라 그다지
저항이 완강하지 못했다.
광마는 파천의 특별한 지시를 수행해야 하기 때문에 선두에서 질주했다. 무영존이
그 뒤를 받치고 있었고 단장화는 이번에 함께 오지 못했다. 이미 그녀는 지존의 명
을 수행하기 위해서 쌍노를 만나러 간 것이다.
“으악”
“꺽”
“막아라.”
여기저기서 참혹한 단발마의 비명소리가 이어졌다. 녹림의 한 고수는 칼을 상대의
뱃속에 찔러 넣고 얼굴을 디밀고는 잔인한 흉소를 흘리기도 했고 천인대원들 중에
서도 적의 수급을 손에 쥐고 앙천광소를 터뜨리는 자들도 보였다. 참으로 아비규환
의 지옥도가 인세에 펼쳐진 것이다. 피에 굶주린 악귀들을 한꺼번에 세상에 풀어놓
은 것처럼 잔악한 행동들이었다. 마도련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는 그들 또한 평범한
한 명의 무사에 불과하지만 밖으로 나오면 얘기가 틀려진다. 스스로의 마성을 억누
르고 있던 울타리가 치워지자 마음껏 발산하는 것이다.
광마는 그런 것에는 아랑곳없이 안쪽으로 날아들었다. 파천의 지시는 그에게 그 무
엇보다 우선 시 된다. 지존이 내린 명을 다시 한번 떠 올려 보았다.
“광마, 너는 다른 것에는 신경 쓰지 말고 사자도왕 만을 챙겨라. 이유야 어찌 되었
든 그자 또한 내 수하다. 그러니 어떤 일이 있어도 사자도왕의 죽음만은 막아라.”
광마존은 조급해졌다. 그가 과연 살아 있을까? 혈마천의 주력은 그 어디에서도 보
이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이곳을 벗어난 것이다. 그들이 어찌 이렇게 신속하게 움
직일 수 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으나 그들이 남도맹 내에 없는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사자전으로 들어가는 그의 심장은 다급함으로 심하게 떨려 나왔다. 사자전의 주위
에 아무도 없었다.
‘이것은 심상치 않다.’
콰앙
문이든 벽이든 앞을 막아서는 것을 모조리 깨부수고 들어갔다. 그리고 예전에 한번
와봤던 사자도왕의 처소를 향해 빠르게 접어들었다.
콰당
문짝이 박살나며 방안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세……세상에”
광마존의 얼굴은 놀람으로 굳어지고 얼른 안쪽으로 들어갔다.
오! 이럴 수가!
사자도왕은 그곳에 있었다. 칼을 가슴에 박고 희미한 웃음을 짓고 있다. 아직 숨이
끊어지지는 않았으나 도저히 회생할 수는 없어 보였다.
“후후 이렇게 끝나야 하다니…… 내 인생에 후회는 없으나, 못내 아쉬운 것이 있
구나. 허허허허 인생을 다시 살수만 있다면……”
죽음을 앞둔 인간의 당연한 마음이리라. 그 누구도 이런 마음이기 쉬울 터! 사자도
왕은 눈을 들어 광마존을 쳐다보았다.
“그대는 마도련의 인물인가? 혈마천에 마도련까지…… 너희들이 가질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 늙어빠진 몸뚱아리가 전부겠지.”
그는 진정 광마존을 알아보지 못했다. 하긴 그가 광마존을 보았을 때는 20대의 청
년의 모습이었으니 몰라 보는것도 당연하리라. 바로 그 순간이었다. 광마존의 얼굴
이 점점 일그러지는가 했더니 일인지하 만인지상객 담대추광으로 변한다. 그것을
보고 사자도왕은 심히 격동을 일으켰다.
“그대는…… 소맹주가 아닌가?”
그랬다. 어쨌든 그는 남도맹의 소맹주의 신분이었다.
“대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유가 무엇이오?”
“허허허 스스로 목숨을 끊어? 난 그렇게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야.”
“그렇다면?”
“놈이 왔다가 갔지.”
“놈이라면…… 누구를 말하는 것이오?”
광마존은 말을 하며 사자도왕의 상세를 살펴보았다. 도를 뽑는 순간 그는 죽을 것
이다. 가망이 없다. 그저 편안하게 갈 수 있게 도와 주는 것이 고작이리라.
“무림맹주 독고한천. 혈마천의 이총사이기도 하지.”
“으음….. 쥐새끼 같은 놈”
광마존이 이빨을 갈아 붙였다.
“천향은 어디에 있소?”
그 말에 사자도왕도 놀란다.
“그 아이가…… 지존께 가지 않았나?”
“뭐요? 여길 떠났단 말이오?”
파천은 광마존에게 그녀에 대한 얘기를 일부러 숨겼다. 그러니 그가 그녀에 대해
모르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 여길 떠났지. 아마도 그 아이도 잡혔나 보군……”
“이런 빌어먹을……”
광마존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지더니 본래의 용모로 돌아왔다. 그가 다급해한
것은 내심으로 그녀의 안위여부가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광마존은 눈앞의 사자
도왕을 측은하게 쳐다본다.
“마지막으로 할말은 없소?”
“…… 지존께 한마디만 전해주게.”
“무엇이오?”
“무림을…… 무림을 살려달라고……꼭 전해주게.”
그는 그 말을 끝으로 고개를 꺾었다. 그의 마지막 말은 무슨 의미였을까? 당금의
무림의 위기를 절감하고 있는 그였기에 무림을 구해달라고 말할 수는 있다. 그가
파천이 어떤 사람인지 완전하게 알지는 못한다 해도 순수한 정파인은 아니리라 여
겼을테고….. 그런데도 구해 달라가 아니라 살려달라? 무림을 살려달라…… 광
마존만의 생각인지는 몰라도 그 말에 다른 의미가 담겨 있는 것처럼 들렸다.
광마존은 밖으로 나왔다. 마음이 무거웠다.
★
무림이 발칵 뒤집혔다. 세상에 이런 일은 결단코 벌어지지 않으리라 여겼던 자들은
그 소식에 할말을 잃고 진위여부를 알아보느라 여기저기 뛰어다니기도 했다.
두 가지 소식!
그것은 표면적으로는 조용한 무림에 일대 경종을 울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첫 번
째 소식은 마도련의 강남무림 장악에 대한 것이었다. 하룻밤 새에 전격적으로 이루
어진 일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4만 명의 마도련 고수들이 8로에 걸쳐 무림맹 지
부와 소속 문파들을 휩쓸어버린 것이다. 그들의 기습은 놀랄 만큼 신속했고 또한
잔인했다. 그들에게 항복하며 투항의 의사를 표시한 문파들의 수장들도 어김없이
목이 잘렸고 대항하는 세력은 모조리 황천행이 되었다. 마치 정도의 씨를 말리기라
도 하려는 듯이 거침없이 휩쓸어버린 그들의 무력에 하늘도 놀라고 땅도 잠잠했다.
그들은 곧바로 무창과 악양에 세력을 정비하여 무림맹의 공격에 대비했다. 그들의
숫자는 삼일이 지나기 전에 6만을 헤아리기 시작했다. 곳곳에 숨어 지내던 마도인
들까지 가세했으며 정파의 허울을 쓰고 지내던 투항한 세력들까지 어울리니 능히
무림맹과 일전을 결할 정도의 세력이었다.
두 번째 소식은 좀더 충격적인 것이었다.
청해 사황성의 사천침략이 그것이었다. 그들은 2만의 무사들을 이끌고 단 하루만에
사천성 서부지역을 거의 장악했으며 송번에 본거지를 두고 호시탐탐 사천성 성도
를 노리고 있다 전해졌다. 그들과 일전을 결하기 위해 사천성의 전 정파들이 성도
에 집결하였다 한다.
이 두가지 소식은 무림에 엄청난 파장을 던져 주었다. 소문으로만 들려오던 세외세
력들의 중원침략이 드디어 사실화되었고 여기에다 정도에 눌려 지리멸렬했다 여겼
던 마도련이 다시금 일어섰다. 이런 혼란은 순식간에 전 무림을 흉흉하게 만들었으
며 곳곳에서 마인들이 출몰하여 인심을 어지럽혔다.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데
도 무림맹에서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하고 있었다.
★
마도련의 본거지가 된 악양, 특히 동정호 일대는 그야말로 용담호혈이 되었다. 6만
을 헤아리는 마도련의 인물들 중 자그마치 4만이 이곳 동정호 일대에 포진하고 있
었다.
파천은 광마존과 무영존 그리고 율극을 마도련에 남겨두고 독고무만을 데리고 마도
련을 떠났다. 그가 떠나며 율극에게 신신당부를 하고 광마존에게도 특별한 관심을
기울일 것을 명했으나 왠지 마음이 가볍지만은 않았다. 악양중심부에 이른 파천은
객점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이미 그의 계획대로 정도사령대의 사령들은 무림맹으로
가고 있거나 이미 도착한 이들도 있을 것이다. 이미 강남이 마도련의 손아귀에 들
어 온 이상 이곳에 어물거리다가는 어떤 봉변을 당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천마서생의 모습을 하고 있는 파천과 30대 장한의 평범한 인상의 독고무가 천평루
로 들어섰다. 정오가 된 시간이었으므로 사람들이 많았다. 무림인들은 거의 보이지
가 않았다. 그는 점소이의 안내를 받으며 이층으로 올라섰다. 파천은 이층에 올라
서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층에는 일층과는 달리 상당수의 무림인들이 보였고 그
들 중 일부가 추태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하하하 그래. 그래. 잘한다. 이 어르신이 너의 생명을 살려 주는 것이니 이정도
재롱이야 당연한 것이지. 그렇지 않은가?”
텁석부리 장한이 주변의 일행들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렇지요. 형님! 이제 우리들 세상이 왔는데 지난날의 수모를 마음껏 풀어야지요.
이놈들이 그 동안 우리들을 못살게 군것을 생각하면 단칼에 베어버려도 성에 차지
않지만…… 우리가 어디 그놈들과 같습니까?”
말을 한자는 쥐눈을 한 호리호리한 장한이었다. 그들의 앞에는 일남일녀가 두려움
에 젖어 떨고 있었고 텁석부리 장한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 중의 이십대 사
내는 옷을 거의 다 벗고 중요부분만을 간신히 가린 모습이었다.
파천과 독고무가 한쪽 구석에 가서 자리를 잡고 간단한 요깃거리를 시켰다. 그리고
는 그들이 하는 짓을 유심히 살폈다.
텁석부리 장한이 다시 말했다.
“네가 생각할 때 우리 어르신들이 잘못을 한다고 생각하느냐?”
“그…..그럴 리가 있습니까? 대협들은 제가 보기에도 광명정대하신 분들…..”
“그래? 후후 그렇다면 너는 우리들에게 무엇으로 보답을 할 참이냐?”
“보, 보답이라니요?”
“허, 이놈이 말로는 우리를 치켜세우면서 정작 행실은 이에 못 따르는 놈일세. 둘
째야.”
“네 형님!”
쥐눈을 한 사내였다.
“나는 낯간지러워 말못하겠으니 네가 대신 얘기해라.”
그 말을 하고는 다시 자신의 자리에 가서 앉는다. 사내는 가까이 다가오더니 벗고
있는 젊은이의 엉덩이를 툭툭 차며 한바퀴 돌았다.
“살이 토실토실한 것을 보니 그동안 호강했나 보군. 네 보기에 우리들이 어떠해 보
이느냐?”
“네? 대협들은 광명정대…..”
“이자식이 틈만나면 그 소리네? 너는 그 말 밖에는 모르느냐? 잘 봐라. 우리는 그
동안 너희들 정파놈들이 핍박을 하는 바람에 못 먹고 못 입어서 여러 가지로 부실
하단 말이다. 그러니 우리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보시를 좀 하거라.”
결국은 돈을 내라는 말이었다.
“물론입지요. 그런 것이라면 얼마든지……”
그리고는 그는 벗어 둔 옷가지 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내어 준다. 은자와 전표였다.
언뜻 보기에도 은 열냥 정도에 전표도 은스무냥짜리가 다섯장은 되어 보이니 상당
한 액수였다.
“후후 보아라. 너는 이렇게 많은 돈을 품속에 넣고 다니는데 나는…… 하나도 없
잖아?”
그리고는 옷을 소리나게 털어 보인다.
“그러니 네가 우리에게 적선을 한다해도 그리 억울해 할 것은 없다. 알겠느냐?”
“네. 네. 대협”
참으로 재수없는 사내였다. 그는 이곳 악양의 정도문파 중 하나인 자경문의 제자였
다. 혈겁에서 다행히 목숨을 건진 그는 장래를 약속한 여자를 데리고 북으로 갈 요
량이었다. 그런데 참으로 우매하게도 먼길을 떠나기 전에 요기라도 든든히 할 생각
을 갖고 천평루에 들어 왔다가 그를 알아보는 사람 때문에 신분이 들통나고 마침
이곳에 있던 마도인들에게 이런 봉변을 당하게 된 것이다. 그는 이들이 자신들을
죽이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 여기고 있었다. 2층의 손님들 중 절반은 무림인들
이었고 그들은 모두 마도인들이었다. 며칠 사이에 이곳 악양에는 마도련에 가입하
기 위해서 찾아오는 마도인들로 북적거렸다. 이들도 그들 중의 일부였다.
“되었다. 그만해라.”
텁석부리 장한이 쥐눈의 사내에게 하는 말이었다. 소득이 있으니 그 정도면 되었다
는 말일 게다. 그럼에도 쥐눈의 사내는 뭐가 아쉬운지 물러서지 않고 두 명을 유심
히 살폈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두명 중 여자의 용모를 살펴가던 사내는 음심
이 동하는지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표정을 통해 그가 무엇을 생각하는지를 알게
된 젊은이는 내심 불안해 져 왔다.
“보아하니 북으로 도망 갈려고 하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안 되겠다. 너를 살
려두면은 또 다시 우리를 향해 칼을 겨눌 것이 아니냐?”
그 말에 젊은이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는 이미 알아 차렸다.
그렇다고 약혼녀를 사내들에게 넘겨 줄 수도 없었다. 이들에게 대항해 보았자 죽음
만을 당할 뿐이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망설이고 있었다.
“그래서 너를 병신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 너를 위해서도 우리를 위해서도 좋을 것
같구나.”
그 말에 젊은 사내도 놀랐지만 그의 약혼녀가 더 놀라는 모습이었다. 병신의 여자
가 되기는 싫은가 보다.
“나으리. 제발 한번만 살려 줍쇼. 저 같은 한심한 놈을 죽여 보았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니……”
“어허 이 놈이 언제 내가 너를 죽인다 했느냐? 병신을 만든다 했지. 그러니 마음의
각오를 해 두거라.”
“제발 나으리. 무림에 다시 발을 들여놓는 일은 추호도 없을 터이니 제발……”
젊은 사내는 울먹이며 호소한다. 그러자 옆의 여자가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본다.
그녀 또한 무림인인지라 그의 이런 모습이 역겹다 여겨졌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
다. 일단은 살아나는 것이 우선이니……
텁석부리 장한은 둘째가 하는 짓을 보고 어느 정도 그의 내심을 알아채었다. 그의
시선도 다시 한번 여자를 살펴보았다. 그다지 뛰어나다 할 수는 없었으나 새하얀
살결과 늘씬한 몸매가 품어봄직한 욕심을 주는 여색이었다. 그래서 그도 말리지 않
고 지켜보고만 있었다. 주변에서 식사를 하는 다른 마도인들도 이들의 행동이 재미
있는지 입가에 웃음을 담고 지켜보고만 있다. 독고무가 파천을 쳐다보았다.
“저대로 두실 겁니까?”
“두지 않으면? 식사나 빨리 하거라. 먼길을 떠나야 하니.”
이들은 곧바로 무림맹으로 갈 셈이었다. 어차피 파천이 있어야 무림맹의 다음 행로
를 결정할 수 있다. 그래서 가는 것이다. 파천도 지금 저들이 하는 행동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말리고 싶지도 않았다. 저들은 저런 식으로 지난날의 울
분을 토해내는 것이다. 그런데, 파천이 보아 넘길 수 없는 장면이 벌어지고 말았으
니……
쥐눈의 사내는 젊은 사내를 쳐다보며 여자를 요구하는 눈치를 노골적으로 보내었다
. 젊은 사내가 그것을 모를리 없었다. 그럼에도 시침 뚝 떼고 엉뚱하게도 울며 불
며 사내에게 매달린다. 살려 달라고……
‘호, 이자식 봐라. 그냥 곱게 봐 줄려 했더니 안 되겠군.’
“그래서 말인데. 우리 형님이 아직 여자가 없다. 보아하니 너는 아직 처자식을 거
느릴 처지도 아닌 것 같고, 또 병신이 되면 그것도 힘들 것 아니냐? 그래서 너를
살려 줄테니 대신 네 여자를 우리에게 넘겨라.”
참으로 수치를 모르는 자의 말이었다. 그 말에 텁석부리 사내는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남자는 난처한 기색이었으며 여자의 안색은 새파래졌다.
구경하는 자들은 일이 점점 흥미로워진다는 듯이 눈에 생기를 담고 쳐다보니 참으
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대협! 제발…… 그것만은….. 제가 가진 것을 모두 드렸는데 어찌 제 여자까지
내 놓으라 하십니까?”
“싫으냐?”
냉랭한 물음에,
“싫다기 보다는……”
말을 흐리는 사내의 말에 여자는 고개를 홱 돌려 사내를 쳐다본다. 어찌 저런 태도
를 보일 수 있단 말인가?
‘옳다구나. 이제 되었다’
“둘 중에 하나만 선택해라. 여자냐? 네 생명이냐?”
뜨거운 여자의 시선을 느끼면서도 사내는 모른척했다.
‘빌어먹을 놈…… 어쩔 수 없지. 여자는 또 만나면 되지만, 생명은 하나밖에 없
는 것이니’
그렇다고 입 밖에 꺼내기가 힘이 들었는지 쭈뼛거리고만 있다. 그의 표정만 보아도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쉽게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결정했으면 어서 가지 않고 뭘 하는 거냐?”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사내는 옷을 주섬주섬 주어 입기 시작하더니 여자 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벌떡 일어선다.
“그럼 소인은 이만……”
인사까지 꾸벅하고는 사라져가려 한다. 여자는 배신감에 온 몸을 떨어 댈 뿐이었고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여자의 눈에 원한의 빛이 떠오르고,
“잠깐만요.”
“응? 왜 그러느냐?”
“저도 한 말씀드리지요. 내가 당신의 여자가 되겠으니 한가지 청이 있어요.”
여자의 말에 텁석부리의 눈이 화등잔만해지며 얼굴에 화색이 돈다.
“그것이 정말이냐?”
“네.”
입술을 꼬옥 깨문다.
“하하 한가지 아니라 두 가지라도 들어주마.”
“저 놈을 죽여주세요.”
이 순간 모두의 얼굴은 놀람으로 굳어지고 장내는 싸늘하게 냉각되어 간다. 그 말
에 가장 놀란 사람은 밖으로 나가려던 여자의 정인이었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
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지만, 이렇게 즉각적으로 돌아 올 줄이야 그도 몰랐을 것이
다.
“다, 먹었으면 그만 가자.”
파천이 독고무에게 하는 말이었다. 독고무 또한 여자의 그 말에 놀라서 입을 벌리
고 있다가 파천의 말에 정신을 되찾는다.
“지금 가시려고요?”
“뭐, 볼 것 있다고 여기서 머뭇거리겠느냐?”
그리고는 일어선다. 독고무는 결과를 보지 못해 아쉽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들이
마악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였다.
“흐흐흐 들었느냐? 죽어줘야겠다.”
텁석부리 장한이 젊은 사내에게 하는 말이었다. 온 몸을 와들와들 떨어대는 그의
모습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겁을 집어먹고 있는지를 알게 해 준다.
텁석부리 장한이 도를 꺼내었다.
스릉
보기에도 섬뜩한 살기가 그를 더욱 공포 속에 몰아 넣고,
파천의 시선이 그들을 다시 한번 쏘아보더니,
“정말 짜증나는군. 그냥 가려고 했더니 꼭 뒤를 안 닦은 것처럼 찜찜하니……”
그러더니 그들에게로 성큼 다가선다. 웬 젊은 놈이 이쪽으로 다가서자 텁석부리
장한의 일행들은 의아하여 쳐다본다.
“야, 너 더 이상 지저분한 짓 하면 죽여 버린다.”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오히려 권태감에 찌들은 듯한 음성이 파천에게서 흘러
나왔다.
텁석부리의 일행인 세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어이없는 웃음을 흘린
다.
“이 녀석 우리가 누구인 줄 알고.”
“네가 누구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정말 짜증나게 만드는군. 마도를 일으켜 세
운 것이 너희들 같은 쓰레기들이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함이 아니었다. 이런?
“
말하기조차 귀찮다는 생각이었는데 그만 상대를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화가 치
밀어 올랐다.
“이런 죽일 놈이”
텁석부리가 도를 휘둘러 왔다. 파천이 슬며시 손을 흔들자 도가 사내의 손에서 빠
져 나오더니 어느새 파천의 손에 들려진다. 그것을 보고 있던 장내의 모든 인물들
은 파천이 가공한 고수임을 그제야 깨닫고 두려움을 나타내었다.
“너, 너, 너!”
세 명을 차례대로 지명하자, 그들은 움찔하며 놀란다. 그들 또한 상대가 보통의 고
수가 아니라 여긴 것이다. 이들의 눈에도 파천이 조금의 재주를 믿고 까부는 자신
들과는 차원이 다른 고수로 여겨진 것이다.
“네?”
“마도련에 가입하러 왔나?”
“네”
세 명이 동시에 대답했다.
“난 천마서생 파천이다.”
진정 세상에 태어나서 이렇게 놀라 본 기억이 있었던가? 장내에 있던 모든 무림인
들은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절을 해댔다. 그가 마도대공으로 마도련의 전권을 휘두
르고 있음이 이번의 강남무림 제패를 통해 전 무림에 알려진 것이다. 그러니 스스
로 마도인이라 생각하는 그들이 이런 태도를 보임은 당연한 일이었다.
“너희 세명!”
“네. 대공”
그들은 두려움과 존경이 담긴 목소리를 흘려 내었다.
“너희들의 마도련 가입을 허락하겠다.”
그들의 얼굴은 환하게 밝아졌다. 그리고 숨길 수 없는 기쁨이 넘쳐났다. 주변의 사
람들은 그들을 부러움이 담긴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모두 일어서라.”
“존명!”
금새 그들의 목소리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시시껄렁한 삼류 마도인에서 마도련
의 정식 무사가 되는 순간이었으니 어찌 그들의 목소리가 달라지지 않을 손가? 그
들이 일어서자 여전히 귀찮다는 듯이 파천이 뱉어내는 말!
“마도련에는 너희들 같은 쓰레기들은 필요가 없으니 참살하겠다. 마도인으로서의
자긍심을 갖고 이만 죽어라.”
그 말을 하는 순간 그들은 잘못 듣지 않았나 해서 스스로를 의심해 보았으나 그것
이 엄연히 사실임을 깨달아야만 했다. 파천이 손에 들린 도를 슬쩍 그었고 그 순간
벌린 입이 채 다물어지기 전에 그들의 목은 뎅강 잘려져 객점의 바닥을 굴러다닌
다.
쾅
파천이 벽을 향해 도를 집어 던진 것이다. 자루까지 깊숙이 박히며 내는 소리였다.
그리고는 더 이상 용무가 없다는 듯이 몸을 휙 돌려 장내를 빠져나갔다. 그가 사라
지고 나서도 한참동안이나 객점 안은 조용했다. 모든 일이 꿈만 같았다. 마도대공
을 보았다는 사실도, 방금 일어난 살인도, 그러나 그들 눈앞에는 엄연히 그 결과물
이 굴러다니고 있었으니…… 파천이 나가는 모습을 유심히 살피는 인물이 하나
있었다.
젊은 사내와 여자는 함께 그곳을 벗어났다. 그 후 사내와 여자가 어찌 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감사합니다.
오늘은 이것 한편입니다.
이틀 간 올라가지 않습니다. 지난번 미리 말씀 드렸다시피
2차 설정이 끝난 뒤에 월요일부터 올리겠습니다.
이제 곧 세외의 세력들이 등장하고 천마교도 무림에 등장하게 됩니다.
워낙에 많은 세력들인지라 매일 연재하면서 설정을 잡기가 힘에 벅차군요.
그래서 그런 것이니 양해 바랍니다.
안녕히 계세요.
『SF & FANTASY (go SF)』 125523번
제 목:[추천&감상] 황제의 검
올린이:2han (한성희 ) 01/02/05 13:30 읽음:355 관련자료 없음
읽기 시작한 후 60편까지 논스톱으로 읽었습니다^^
읽기 시작한 게 오늘 새벽 한시정돕니다--;
60편 이상 넘어가서도 넘넘 흥미진진 했지만 수마를 이기지 못하야–;
라기 보다는 담날의 즐거움을 남기고자…쿨럭=_=;
처음부터 설정을 정밀하게 잡고 시작한 글은 아닌 것 같지만
필요할 때 설정을 다잡고 쓰시는 것 같습니다…그래서
내용에 무리가 없습니다.
또 캐릭터도 상당히 개성이 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에 또 처음 도입 부분도요^^
마법이나 용사가 나오는 환타지물이 아닌 …무협지에 더 가까운
그런 글이지만 정말 좋은 글이라고 생각됩니다^_^잼있어요…
그나저나 72편까지 다 읽었는데…어떻게 기다려야 할지--; 그럼 행복한 하루 되세요^^
『SF & FANTASY (go SF)』 125681번
제 목:[하/펌] 황제의 검 73.위기!
올린이:armisael(김동호 ) 01/02/06 07:26 읽음:394 관련자료 없음
제 목:[연재] 황제의 검 73.위기! 관련자료:없음 [62382]
보낸이:임삼열 (logos333) 2001-02-05 16:50 조회:958
-황제(皇帝)의 검(劍)-
73. 위 기(危機)!
파천은 악양을 벗어나자 곧장 북으로 방향을 잡는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관도를
피하고 비교적 한적한 곳을 택했음에도 호광(湖廣)평야와 장한(江漢)평야등의 너
른 대평원들이 자리잡은 지형인지라 그다지 빠르게 진행할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마음같아서는 어풍비행술을 극성으로 전개하고는 싶어도 동행하는 독고무가 파천의
속도를 못따라 오니 그도 마땅치 않았다. 곳곳에 호소(湖沼)가 산재하여 그곳을
중심으로 구획들이 나누어져 있는지라 사람들의 이동이 현저한 곳이기도 했다.
비교적 빠르지 않게 이동을 해가던 그들이 어느순간엔가부터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 그들이 진행하는 방향으로 보아서는 아마도 속편하게 형주를 거쳐 양양과 번성의
서쪽지역에 위치한 융중산(隆中山)을 타기로 했나보다. 비교적 서쪽은 산들이 많
아 사람들의 발길이 뜸하니 그들을 주의 깊게 볼 사람들이 없을터였다. 하긴 사람
들이 보아도 상관은 없겠지만 그들의 행로가 드러나는 번거로움은 피하고 싶었나
보다. 정오에 길을 떠났음에도 그들이 워낙에 빠른 경공을 전개했는지라 신시가 넘
어가자 융중산 산자락을 밟을 수 있었다. 이곳은 제갈공명이 한때 은거했던 곳으로
복룡산(伏龍山)이라고도 불린다.
질풍처럼 내 달리던 그들이 산으로 들어서자 곧 바로 속도를 늦추었다. 독고무가
파천을 쳐다보며 넌지시 질문을 던진다.
“대체 왜 이곳으로 오셨습니까?”
그는 파천이 가는 곳으로 따라 올 수밖에 없었기에 오는 내내 지닌 의문을 이제야
털어놓은 것이다.
“후후 가보면 안다.”
파천은 그저 신비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독고무는 의문의 시선을 띤다. 그러고
보니 이상한 것은 또 있었다. 비록 융중산이 대산이라고는 할 수 없어도 흔한 야산
과는 다른 깊은 산이건만 그 흔한 산새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산에 지천으로
깔려 있을 야생 동물들의 종적도 보이지가 않는다.
[혹시?]
[이제야 눈치를 챈건가? 우리가 이곳까지 오는내내 우리 앞을 인도해온 놈이 있었
다. 마치 따라오라는 듯이 말이다. 그러니 따라오지 않을 수가 있느냐? 대체 어떤
놈들인지 확인을 해 봐야겠다.]
독고무는 어이가 없었다. 그렇다고 뻔히 함정일지도 모르는 곳을 무턱대고 들어간
단 말인가?
‘이자에게 이런 면이 있었나? 내가 보아온 그는 쓸데없는 호기심에 쉽게 몸을 움직
이는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지금 그들의 모습은 악양을 벗어날때의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그러니 적이라면 천
마서생을 노리는 자들일것이고 그가 무림오천중의 일인임을 안다면 단순한 함정은
아닐 것이다. 그런것정도 예상하지 못하는 우매한 인물이 아니니 지금 보이는 모습
은 지나친 자신감의 발로인 것 같았다. 세상에 나를 어찌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그래도 그렇지. 왠지 기분이 썩 좋지가 않다.’
독고무의 이런 내심에 더하여져서 주변의 공기가 이를 뒷받침 하고 있는듯도 했다.
파천은 미리 보아 둔 길을 오르기라도 하는 듯이 망설임없이 산을 오른다. 그들이
중턱을 넘어 좀더 울창한 곳을 지나치자 주변의 공기가 급속하게 냉각되고 살을
가를듯한 예기가 사방에서 그들을 압박해온다.
“후후후후”
파천은 낮은 웃음을 흘리며 변함없이 앞으로 전진해 갔다. 그의 뒤를 바짝 뒤따르
는 독고무는 연신 사방을 살피기 바빴다. 그의 시야에 숲속을 어른거리는 그림자들
이 포착되자,
[놈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그만 내려가시는 것이……]
[이곳까지 와서 돌아갈 수는 없지. 대체 어떤 간큰 놈들이 나를 초대했는지 정도는
알아 보아야 할것이 아닌가?]
‘빌어먹을…… 별일이야 없겠지. 하긴 과연 누가 있어, 저 사람을 곤란하게 하겠
는가? 천하의 강자들이 여기에 모두 모여 있지 않는한은 별 위험이 없을 것이다.’
이것은 독고무의 확신에 가까운 결론이었다. 최소한 그가 보는 관점에서 파천의 무
공이란 것은 무림역사상 다섯 손가락에 꼽힐 정도의 가공한 것이었다. 아무리 난측
의 함정을 파 놓고 조밀한 천라지망을 펼쳐두었대도 그에게 있어 아무런 위험도 되
지 않을것이 분명할 것이다. 적어도 그가 아는 파천의 무공이란 것은 무림에 알려
진것보다도 더 엄청나니 말이다.
마치 인공적으로 깎아 놓은 듯한 공지(空地)였다. 거목들의 밑동을 잘라내고 깔끔
하게 치워놓았다. 사방 오십장은 족히 될 넓은 곳이었다. 그 안으로 성큼 들어서는
파천의 얼굴에는 더욱 흐뭇한 미소가 스며 나온다. 자신을 맞기 위해 상당한 준비
를 하여 두었으니 그로서도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공지의 중앙에 선 파천이 사
방을 둘러보며 외친다.
“대체 어떤 자가 나를 이곳까지 초청한것인가?”
내공이 실린 외침이었는지라 산 전체가 쩌렁쩌렁 울린다.
그의 말이 끝나자 사방의 숲에서 검은 흑의의 인물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들은 나
타나는 순간 사방을 물샐틈없이 포위하고는 일정한 진세를 형성한다. 눈 앞에 나타
난 자들 외에도 사방 숲에서 느껴지는 기척으로 보아. 족히 천명은 넘어 보일 듯
했다.
“참으로 의외군. 그대가 정말로 이곳에 나타날줄이야……”
조용한 목소리였다. 특이한 것은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파천의 지나친 반응이었다
. 얼굴을 심하게 구기며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다.
“쳇, 난 또 대단한 놈인줄 알았더니…… 무림맹에서 쫓겨난 놈이었군.”
파천이 단박에 그를 짚어내자 장내에 나타난 무상신검 독고한천이 의아함을 드러낸
다.
“우리가 언제…… 만난적이 있었던가?”
그제야 자신의 실태를 깨달았으나 파천은 여유롭기만 했다.
“그럴 리가 있나? 단지 넘겨 짚어 보았는데…… 사실이라니, 의외로군.”
시침 뚝 떼고 말 하자 상대도 더 이상 의문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독고한천, 아니
혈마천 이총사 상여락이 한걸음 앞으로 나서더니 파천을 호기롭게 쳐다본다.
“네가 천마서생 파천이 맞는가? 내가 듣기로는 마도련의 마도대공이라 들었는데…
… 이곳까지 따라 들어 올 정도로 배짱이 있는 놈인줄은 몰랐군.”
‘저 놈이 나타났다는 것은 이 놈들이 혈마천의 세력이라는 말이렷다. 별 볼일도 없
는 놈들이었군.’
파천은 눈 앞의 상대들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하기야 너 같이 무림맹에서 쫓겨난 놈이 나를 어떻게 알겠느냐? 그래 나를 이곳에
부른 용건은 무엇인가? 설마 나와 드잡이 질을 하자고 부른 것은 아니겠지?”
“후후후후후”
상여락의 눈에서 살기가 흘러 나오고 그는 주변을 포위하고 있는 수하들을 한번 쳐
다보고는 마음 든든하다는 듯이 안심하는 기색이다. 근래 몇 번인가의 의도하던 일
들이 틀어지고 난 뒤 어떠한 경우에도 마음을 놓지 못하는 버릇이 생긴 상여락이었
다. 기분나쁜 살소를 흘려내던 상여락이 파천을 노려보며 말했다.
“물론 너를 죽이기 위해서이다. 더 이상 너는 이 무림에서 살아있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지. 그 동안 네가 해 준 일에는 같은 마도를 걷는 한 사람으로서 고맙게 생
각한다.”
“같은 마도? 하하하하하”
파천의 웃음은 다분히 비웃음의 성격이 강했다. 그것을 모를리 없는 상여락은 기분
이 상했는지 한걸음 더 나서며 파천의 웃음을 끊는다.
“곧 죽을 놈이니 그래…… 마음껏 웃어라. 네가 이 세상에서 토해내는 마지막 웃
음이 될 것이다.”
파천은 순간적으로 웃음을 멈추고는 상여락을 지그시 쳐다본다.
“너 하나뿐이 아닐텐데…… 모두 나오라고 해라. 너 하나로는 양이 안찬다.”
“이, 이런 방자한 놈! 오만함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내 오늘 네놈에게 하늘 밖에
하늘이 있음을 알게 해주마.”
“네놈 같은 하늘은 반갑지 않다. 꼴에 자존심은 있어가지고…… 나 같으면 부끄
러워서라도 고개를 들지 못하겠다. 맹주직에서 쫓겨난 주제에 하늘 밖의 하늘이라?
흥…… 참으로 어이없는 놈이군. 난, 그래도 꽤나 대단한 놈이 날 반길 줄 알았
더니, 너무 실망인데……”
“이, 이 이놈이”
“너무 혈압 올리지 마라. 보아하니 나잇살 처먹은 것 같은데, 혈압올리다 한번 힘
도 못써보고 죽을라”
금방이라도 출수할 듯이 씩씩거리던 상여락이 간신히 마음을 달래더니, 음흉한 시
선을 번들거린다.
“후후 좋다. 네 놈의 입심만큼이나 네 생명도 질긴가 보겠다. 오늘 내, 네 놈의 고
기맛을 보고야 말겠다. 흐흐흐 기대해도 좋다. 마지막 가는 길에 고통을 마음껏 선
사해 주마.”
“헛소리 말고. 네가 가진 수나 꺼내 봐라. 설마하니 인원수를 믿고 까부는 것은 아
닐거고…… 저기 숲속에 있는 노인네들을 믿는 것이냐? 어이 거기…… 빨랑 기
어들 나오시지.”
파천이 손가락만을 움직여 까닥거리자 정말로 그가 가리킨 곳에서 노인들 세명이
걸어 나온다. 그들은 보기에도 나이를 짐작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늙은 노인들이
었다. 백발이 성성하여 길게 늘어뜨리고 수염마저 새하얗게 눈꽃이 붙은 것 같았다
. 파천의 눈에 처음으로 감탄이 보이고 그는 일부러 그것을 감추려 하지도 않는다.
“호오…… 대단한 늙은이들이군. 저 놈보다는 나아 보이는구나. 그대들은?”
새파랗게 어린 놈이 자신들에게 하는 말인데도 분노의 표정은 보이지가 않는다. 그
들중 가운데 있는 노인은 진물이 흘러내리는 눈을 힘겹게 뜨고는 파천을 응시한다.
아무런 감정도 담겨있지 않은 눈이었다.
“이런 곳에서 비명횡사하기에는 참으로 아까운 놈이로다.”
그러자 옆의 노인이,
“사형은 그 또 측은지심이 발동이라도 한 게요? 제놈 상태가 어떤지도 모르는 미련
한 놈인데…… 아까울게 무엇 있소이까?”
마지막 또 한명의 노인이 상여락을 쳐다보며,
“이놈, 여락아! 더 이상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빨리 처리하고 가자.”
“네. 사숙!”
상여락이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하는 말이었다.
‘사숙이라고? 그렇다면 혈마천의 장로쯤 되는건가? 보통의 늙은이들은 아니구나.
저 고요한 신색, 그리고 흔들림없는 시선, 물흐르듯 자연스러운 기도, 어디 하나
나무랄데가 없다.’
파천이 이렇게 까지 감탄해보기는 아마도 처음일 듯 했다.
“좋다. 빨리 끝내자. 나도 갈길이 바쁜 사람이니, 여기서 너희들과 노닥거릴 시간
이 없다.”
파천의 말에 상여락이 비웃음을 흘린다.
“후후후 저런 놈이 어떻게 무림오천이라 불렸는지를 모르겠군. 내공을 운기해봐라.
너는 이미 중독되어 한점의 내공도 모이지 않을 것이다.”
“기껏 준비 해놓은 것이 독이냐? 참으로 안 된 이야기지만…… 나는 이미 만독불
침지체이다. 그러니 독 따위로……”
파천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간다. 바로 그때 파천의 뒤에 있던 독고무가 놀라 외
친다.
“이, 이럴수가?”
독고무는 상여락의 말에 운기를 하다, 그의 말대로 내공이 전혀 모이지 않자 놀란
것이다. 어느새 그는 중독되어 있었던 것이다. 파천의 얼굴이 점차 심각해진다.
“대체 무슨 짓을 한거냐?”
파천의 말은 당황의 기색이 역력했다. 이세상의 어떤 독도 자신을 침범하지 못한다
. 그런데 상여락의 말대로 단전은 마치 텅 비어 있는 것처럼 한줌의 내공도 느껴지
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당황하는 모습을 보며 통쾌하다는 듯이 희열의 외침을 토
한다.
“푸하하하 멍청한 놈! 네가 당한 것은 엄밀히 말해 독이 아니다. 산공독의 일종이
지만 그런것과는 차원이 다르지. 오로지 본교에서만 사용하는 것으로 아무리 만독
불침지체라 하더라도 이것만은 막을 수가 없다. 본교의 비장의 무기인 셈이지. 네
가 첫 번째 희생자가 됨을 영광으로 알아라.”
파천은 극도로 침착함을 보였다. 그는 다시 한번 내공을 일으켜 보았다. 마치 한꺼
번에 내공이 사라지기라도 한것처럼 미약하게도 느껴지지 않는다. 이미 파천의 생
명은 자신의 손아귀에 들어 온것이나 마찬가지였으므로 상여락은 묻지도 않은 말을
술술 털어 놓는다.
“본교의 천년간의 연구가 맺은 결실이다. 네가 이 자리에 들어오는 순간 너는 이미
중독되었다. 느끼지도 못하는 사이에 단전의 내공을 흩어버리지. 적어도 하루가
지나야만 다시 내공을 모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네가 이 자리에서 죽는다는 사
실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상여락이 서서히 파천에게로 다가온다.
“이놈들! 이 따위 추잡한 짓을 하다니…… 너희들을 용서하지 않겠다.”
파천의 분노는 대단한 것이었다. 그런들 어쩌리요? 이미 내공이 상실되었으니 아무
리 높은 무공을 지니고 있다 한들 소용이 없는 것이다. 상여락은 천천히 파천에게
로 걸어오며 잔인한 살기를 흘려내다.
“내가 그랬지? 너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지독한 고통을 줄것이라고….. 설마 네가
이곳에 순순히 나타날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또 한무리의 수하들을 하남성쪽에 배
치시켜 놓았는데 너는 의외로 이곳으로 온 것이다. 참으로 기가막힌 일이지. 네가
움직이는 중이었다면 중독시키기가 힘이 들었을것이고 우리 애들의 희생이 컸겠지.
그런데 너 자신의 자만이 오히려 일을 수월하게 만들었으니…… 너에게 이런 날
이 올줄은 몰랐을거다.”
이제 그와의 거리는 이장에 불과했다.
“대종사가 시킨일이냐?”
“으응?”
상여락은 놀라는 눈치였다.
“역시 그랬군. 대종사가 모든 일의 흉수임은 알고 있었으나…… 이렇게 신속하게
움직일줄이야?”
“호, 그래? 모든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니 억울하지는 않겠군. 너의 수하들 역시 머
지않아 제거 될 것이다.”
‘내가 이런 상황이고보면…… 큰일이구나. 아무리 그들이 강하다고는 해도 이런
식이라면 꼼짝 못하고 당하고 만다. 설사 미리 눈치를 챈다고 해도, 세명으로는 무
리다. 빨리 이곳을 벗어나서 마도련으로 되돌아가야 하는데……’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그는 수하들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서 모든 것을 이용해 오던 파천이었는지라 이런 수하들에 대한 걱정은 참으로 의외
의 모습이었다.
“멍청한 놈이었군. 제놈 상태가 어떤지도 모르고……쯧쯧. 아니 네 놈은?”
혀를 끌끌 차던 상여락이 그제야 파천의 뒤에 서 있는 독고무를 쳐다보고는 놀람의
기성을 발한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파천의 얼굴에 의문이 떠 오른다. 자기도 모
르게 뒤를 돌아보다 그또한 놀람의 표정을 나타낸다. 독고무는 원래의 용모로 돌아
가 있었고 그런 그를 상여락이 알아본 것이다. 자신이 붙잡아 놓고 고문하던 놈이
니 못알아 볼리는 없었다.
“대체 어떻게 네 놈이 천마서생이랑 함께 있는거지?”
상여락의 교활하기까지한 두 눈은 둘을 번갈아보며 의심의 눈초리를 띤다.
“대체 어떻게 무림맹에 있어야 할 저 놈이 너와 함께 있는 것이냐?”
그의 물음에 일시지간 파천은 할말을 잃어버린다. 내공이 사라지면서 독고무의 변
체역용술이 풀린 것이다. 한가지 이상한점은 파천의 역용술은 아직 그대로라는 점
이었다.
한걸음 앞으로 다가온 상여락은 뚫어지게 파천을 노려보더니 피식하고 웃는다.
“뭐, 어차피 모두 알게 될일 조급할 필요는 없겠지. 일이 너무 싱겁게 끝나도 재미
가 없군.”
“그런가? 그렇지만…… 세상일이란 것은 왕왕 제뜻대로만 되지 않을때도 있지.”
파천은 그 말을 하며 싱긋 웃었다. 왠지 그 미소를 대한 상여락은 모골이 송연해짐
과 동시에 온 머리털이 쭈뼛하며 서는 것을 느꼈다. 그는 불안한 심사를 감추기라
도 하려는 듯이 먼저 손을 쓰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완맥을 잡아오는 금나수법은
참으로 고절한 것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파천의 축 늘어져 있던 두 팔이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은어의 몸
짓처럼 교묘하게 비틀어지는가 했더니 상여락의 금나수법을 와해시키며 오히려 그
의 중부(中府)혈을 때린다.
펑
“억”
한소리 요란한 소음과 더불어 신음을 지르는 상여락이 뒤로 삼장이나 격퇴되어 물
러선다.
“컥”
그는 입에서 한사발이나 되는 피를 토해내었다. 순간적으로 호신강기를 발휘했으니
망정이지 여차했으면 바로 황천으로 떠날 뻔한 위험한 순간이었다. 온몸을 무력하
게 하는 고통보다도 파천의 돌발적인 공격에 이해 할 수 없다는 표정과 의문이 더
강했다. 이 의문을 해소하지 않고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을것만 같았다.
“네, 네놈은 중독되지 않았나?”
“후후 그까짓 술수가 나에게 통하리라 여겼는가?”
호기롭게 외치는 그의 모습을 보고 그 누가 중독되었다 생각하겠는가? 그런 생각은
세명의 노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지금 파천의 내심은 참으로 복잡한 것이었다
.
‘빌어먹을…… 단전에서는 내공이 모이지 않는다. 저 놈들이 그것을 눈치채면 모
든 것이 허사로 돌아간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공격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자초지종은 이러했다. 언젠가부터 파천의 경지가 높아지기 시작하면서 각 경맥에서
자체적으로 진기가 일어나고는 했다. 파천은 매일, 매순간 어떤 상황속에서도 운
기행공을 멈춘바가 없었다. 심지어 자면서도 저절로 운기행공이 가능했다. 그러면
서 점차로 각 경맥이 단전에서의 본신내공의 도움이 없이도 저절로 기운을 일으키
기 시작했고 이것은 파천에게 새로운 경지를 열어 준 힘이었다. 지금 파천이 발휘
한 힘은 바로 그 내공이었다. 경맥자체에 남아 있는 힘!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지금 단전은 비어 있는 것처럼 기운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
서 파천은 은밀하게 경맥자체내에서 기운을 일으켜 보았다. 미세하기는 하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서서히 그 힘을 한곳으로 모아들였고 순간적으로 장심을 통
하여 그 힘을 발휘한 것이다. 보통때 같았으면 지금의 공격이면 상여락의 상체가
터져 나가야 정상이지만, 지금 파천이 발휘할 수 있는 힘은 지금정도의 공격이 고
작이었다.
이런 사정을 알리 없는 상여락 일행들은 파천이 중독되지 않았다 여기게 되었고 긴
장하는 기색이었다. 상여락은 몇걸음을 더 물러서더니 노인들을 쳐다보았다. 그들
은 눈짓을 교환하며 서로 전음을 나누는 듯 했다. 그러더니 상여락이 손을 번쩍 치
켜 들었다. 주위를 엄밀하게 포위하고 있던 수하들이 상여락의 손짓에 일사분란하
게 움직여갔다. 그와 동시에 파천은 등뒤에 있는 독고무를 쳐다보았다. 그는 이미
모든 내공을 상실한 범인에 지나지 않았다. 그를 이대로 죽음을 당하게 할 수는 없
었다. 파천의 눈짓에 독고무가 파천의 등뒤로 바짝 붙었고,
“대단한 놈인것만은 내가 인정하지. 그러나…… 오늘 네 놈이 죽는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놈을 죽여라!”
우와와와와
마치 전쟁터에 나간 군졸들이나 지를 함성을 지르며 파천에게 쇄도해 오는 무사들
의 숫자는 물경 천을 헤아리고 있으니, 이변이 없는 한, 살아나기가 쉽지 않아 보
였다.
‘큰일이다. 순간의 방심이 이런 어처구니없는 위험을 자초하다니…… 일단은 여
기서 빠져나가야 한다.’
그는 눈 앞으로 쇄도해 들어오는 혈마천의 수하들을 보며 검을 빼들었다. 그의 얼
굴은 비장감마저 흐르고 있었다. 무림출도후 최고의 위기를 맞은 것이다.
파천은 경맥의 내공을 다시한번 움직여 보았다. 역시 내공의 흐름은 느낄 수 있었
으나 평소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하앗”
파천의 검이 번쩍 하는 순간 이를 드러내며 잔인한 흉소를 짓던 세명이 순식간에
양단되며 갈라지고 그들의 시체가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또 다시 다른 놈들이 몰려
들었다. 독고무를 보호해야 하기 때문에 그의 행동반경은 자유롭지 못했고 적들은
그것을 교묘히 이용하기 시작했다. 파천의 검이 수십개로 늘어나는 듯 하더니 사
방으로 검우를 뿌려대었다.
“으악”
“캭”
“켁”
그들이 질러대는 비명소리는 조용하기만 하던 융중산을 일깨우고 그 뒤를 파천의
기합성이 잇는다.
“하앗, 이 놈들 얼마든지 오너라.”
천마검에서는 검강이 스며나오며 사방을 휩쓸었다. 아예 삼장이내로는 접근조차 힘
들어 보였다. 그런 그를 보며 상여락은 노인들과 함께 무슨 말인가를 나누고 있었
다.
“저놈. 대단한데요?”
“후후 그렇게 보이느냐? 저놈! 중독되지 않았다는 말은 아무래도 허풍인 듯 하군.”
“네? 그것이 무슨 말씀인지……”
“저 놈을 잘 봐라. 설마 저 정도로 무림오천이라 불리겠느냐? 내가 보기에는 그다
지 대단해 보이지가 않는구나.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나 저 놈은 중독이 되었음에도
완전히 내공이 흩어지지는 않은 것 같군.”
“그럴 수가 있습니까?”
“모르겠다. 아무리 무공이 강하다 해도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건만……상식적
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인다. 아마도 독특한 내공심법을 익히고 있나보다.”
그들은 수하들의 죽음에는 아랑곳 없이 파천의 몸놀림만 쳐다보고 있다. 그가 펼치
는 검강의 위력을 살펴가던 노인이 여락에게 명한다.
“수하들을 물려라. 저 정도라면 너 혼자서도 충분하겠다.”
“네. 알겠습니다. 모두 물러서라”
혈마천의 인물들은 상여락의 외침에 일시에 파천에 대한 공격을 멈추고는 뒤로 재
빠르게 빠져 나온다. 달라진 것이라고는 파천의 주위로 널려 있는 수십구의 시체정
도였다. 상여락은 앞으로 나서며 파천을 주의깊게 살핀다. 그의 옷 이곳저곳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물론 파천이 흘린 피는 아니었다.
“무상지독(無上之毒)을 견녀내다니, 참으로 대단한 놈이구나. 네가 진정으로 무림
오천이라 불릴만한지 내 직접 너와 일전을 결하여보리라.”
상대의 위기를 틈타 자신의 위신을 채우려드는 상여락의 모습에는 그 어디에도 대
인다운 풍모가 엿보이지 않는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파천의 내심은 착잡했다.
‘도저히 여기서 빠져나갈 방도가 없다.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지금의 내공수위로
는 저 한놈도 감당키가 벅찰 것이다. 더군다나 저놈 뒤에 버티고 있는 세 늙은이는
결코 저놈의 아래가 아닌 듯 하니……’
어찌 하여야 한단 말인가? 도주하려해도 저들이 순순히 보내주기는 만무하고 더군
다나 독고무 때문에 그리하지도 못한다. 꼼짝없이 여기서 죽음을 맞아야 한단 말인
가?
상여락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파천에게로 돌진해 들어왔다. 그의 허리에는 검이
매어져 있었음에도 육장만으로 공격해 왔다.
“받아라. 마라축융장(魔羅祝融掌)이다.”
상여락의 장심에서는 시뻘건 불길이 치솟으며 뜨거운 열기를 뿜어냈다. 파천은 감
히 태만하지 못하고 전력을 기울여 검을 떨쳐낸다. 삼장에 이르는 검강과 마라축융
장의 열기가 부딪혔다.
콰앙
“으음”
파천은 뒤로 주르륵 밀려나다 독고무와 부딪히고서야 제자리에 몸을 세운다. 그것
을 보는 상여락이 더욱 흉험한 기세를 일으키며 살소를 흘린다.
“흐흐흐 이제 그만 가거라.”
천중에서 떨어지는 불벼락인가? 상여락의 손에서 치솟은 화염은 붉은 색에서 새파
란 색으로 변하더니 일직선으로 파천에게 직격한다.
파천은 검을 아래로 그으며 검강을 일으킨다.
콰앙
“컥”
화염의 일부가 검강의 결을 파해하며 파천에게 쇄도하고 파천은 간신히 몸을 피하
기는 했으나 여기저기 불길에 그을려 있었다. 이미 승기를 잡은 상여락은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빠르게 파천에게 접근한다. 그런데 파천은 오히려 그런 그를 향해
검을 움켜쥐고 뛰어들었다. 마지막 사생결단이라도 하려는 듯, 치열한 몸부림이었
다. 상여락의 몸이 흐릿해지는가 했더니 눈 앞에서 사라지고 순간적으로 상대를 놓
친 파천은 몸을 세우며 좌우를 경계했다.
“하하하하 역시 네 놈은 정상이 아니었군.”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파천이 몸을 돌려 바라보니 어느새 그곳까지 이른 상여
락이 독고무의 뒤에 서서 그의 목줄을 움켜쥐고 있었다.
“이, 비겁한 …… 놈!”
상여락을 향해 치를 떠는 파천을 보며 그는 조롱을 보냈다.
“후후 비겁하다고? 나는 원래 그런 놈이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어
떤 파렴치한 일도 망설이는 법이 없지. 이 놈이 네게 무엇이 그리 중요한지는 알
수 없으나, 내가 이놈 조손놈들 때문에 당한 어려움을 생각하면 뼈를 갈아마셔도
양에 차지 않는다. 독고무 그렇지 않나?”
독고무의 얼굴은 거무죽죽해져 있었다. 이미 한번 죽었던 목숨이라 생각했기에 죽
음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다. 그러나 그 상대가 상여락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아
버지를 죽인 원수이자 수년간 자기와 할아버지를 죽음보다 더한 고통 속에 몰아 넣
었던 자에게 또 다시 자신의 생명이 희롱되어야 한다면…… 차라리 스스로 목숨
을 끊는 것이 나으리라.
“이놈! 내가 네 손에 죽는다 하여도 너만은 귀신이 되어서도 괴롭혀 주겠다.”
겨우 그를 향해 저주를 퍼붓는 것이 고작이었다. 점점 독고무의 목에 힘이 가해졌
다. 피가 통하지 않아 얼굴이 벌겋게 변하더니 호흡조차 곤란해지고 목에 은은한
통증까지 느껴진다.
“후후 네 놈을 어떻게 죽여줄까? 이봐 천마서생. 네놈이 무공을 스스로 폐쇄하고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빈다면 이 놈을 살려주마.”
상여락이 손을 위로 치켜세우자 당연히 그의 손에 목이 잡힌 독고무도 허공으로 딸
려 올라가며 버둥거렸다.
“이놈! 어서 놓지 못하느냐?”
파천이 앞으로 나가려 하자 상여락이 손을 들어보였다.
“어허. 까불지 마라. 네 놈이 그럴수록 이놈의 고통이 심해지니깐……”
파천은 독고무의 얼굴을 보았다. 이제는 숨이 찬지 점차 눈동자에 초점이 흐려지고
있었다. 단숨에 죽일 수 있었음에도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서서히 고통을 주는
것이다. 상여락은 독고무를 잡은 손을 아래로 내리며 목을 슬쩍 놓아주었다. 그러
자 숨통이 트인 독고무가 헐떡거렸다. 파천을 바라보는 독고무의 시선에는 나를 개
의치 말고 도망가라는 간절한 염원이 담겨 있는 듯 했다.
‘제발 나는 어찌 되어도 좋으니, 어서 도망가시오. 대령사가 도망가야 내 복수를
해줄것이 아닙니까? 제발……’
“제발 도망가시오”
독고무의 입에서 터져나온 목소리는 파천을 일깨우기에 충분했다. 그렇다고 그를
버려 두고 떠날수는 없는 일이었고 그럴 만한 능력도 없었다. 파천은 그런 독고무
를 보며 또 한사람을 느껴야만 했다.
‘미안하다. 천마. 너를 지켜주지 못하다니…… 내 자만이 이런 결과를 빚을줄이
야……’
상여락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푸하하하 도망을 가? 어디 가 봐라. 도망가는 사냥물은 사냥꾼에게 더큰 흥미를
주는 법이지. 자, 어서 도망가봐라. 오, 이제보니 이놈 때문에 망설이는 것인가?
듣던 것하고는 많이 다른데? 제 목적을 위해서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다하더니, 그
것이 아니었나? 그렇다면 이것은 어떤가?”
푹
“컥”
상여락의 다른 한손이 독고무의 옆구리 쪽으로 해서 깊숙이 박혀들어 있었다. 그는
피묻은 손을 빼내며 독고무의 옷자락에 문대며 닦아 내었다.
“이놈!”
파천이 고함을 치며 상여락과의 거리를 순식간에 좁혔고 상여락의 비어있는 상체를
향해 검을 찔렀다.
그러나 이미 예상하고 있기라도 한것처럼 옆으로 비켜서며 오히려 독고무를 그쪽으
로 갖다댄다. 파천은 어쩔 수 없이 검을 옆으로 비키며 공격을 회수하고 그 순간
상여락의 장력이 파천에게 격중된다.
펑
“으악”
그는 뒤로 날려가며 피에서 검붉은 피를 토해내고야 만다. 도저히 적수가 되지 못
했다. 독고무의 눈에서 생명의 불길이 꺼져 점차로 꺼져간다. 그는 파천이 뒤로 날
려가는 모습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지존. 당신은 그런 모습을 보이면 안됩니다. 제발…… 나도 이제야 할아버지의
말을 알 것 같군요. 그랬군요. 당신은 이놈 같은 시시껄렁한 악인이 아니었군요.
진정한 마웅!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그런 것 같습니다. 후후 이렇게 가야하
다니…… 너무 억울합니다. 이런 놈들이 횡행하는 중원이란 불행할 수 밖에 없습
니다. 당신이 아니면…… 그 누가 이런 놈들을 쓸어버리죠? 당신이 그런 약한 모
습을 보인다면…… 내 복수는 누가 해줍니까? 할아버지…… 설……란아!’
툭
고개가 꺾어지는 독고무를 보며 바닥에 뒹구던 파천의 입에서 한소리 외침이 터져
나온다.
“독-고-무!”
죽은 것이다. 너무나 어이없게…… 자신의 실수로 인해 죄없는 그가 죽은 것이다
. 너무 분했다. 억울했다. 심장이 터져나갈 것 같은 분노가 치밀건만 힘이 없는 자
신이 저주스러웠다. 또 다시 이런 심정을 느껴야 하다니…… 싫었다. 이런 자신
이 싫었고, 세상이 저주스러웠다. 죽인다. 모두 죽인다.
상여락은 고개를 떨구는 독고무를 보며 바닥에다 던져 버린다.
“클클 한놈은 갔고, 이제 네 놈만 남은건가? 너도 곧 저놈 뒤를 따르게 해주마”
그때였다. 한쪽에 서 있던 세명의 노인중 하나가 상여락을 향해 말했다.
“여락! 장난질 그만하고 빨리 끝내거라. 대체 뭐하는 짓이냐?”
‘빌어먹을 노인네! 장난질이라고? 너한테는 이것이 장난질인지는 몰라도 나에게는
중요한 것이다. 좋아 빨리 끝내주지.’
파천은 고개를 숙이고 있다 서서히 고개를 든다. 그의 눈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
다.
“아니?”
순간 파천쪽으로 다가서던 상여락은 흠칫 놀래며 다가서던 걸음을 멈추고야 만다.
얼마나 심적인 격동이 심했으면 동공의 핏줄이 터져나왔겠는가? 피눈물이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인가?
“후후후후후 그래 복수해주마. 세상을 모두 뒤집어 엎어서라도 네 복수만은 내가..
…. 분명히 해주마. 날 저주해라. 미안하다……”
그가 일어서고 있었다. 눈에서 피를 흘리며 상여락을 쳐다본다. 상여락은 그런 그
를 바라보며 왠지 소름이 끼침을 느꼈다.
‘저 놈! 참으로 불길한 놈이다. 재수없는 놈이야. 빨리 죽여버려야 안심이 될 놈이
다.’
그의 결론은 참으로 간단했다. 죽이면 그 뿐이다. 파천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독고
무를 다시한번 쳐다보았다. 그의 눈은 말하고 있는 듯했다. 빨리 도망가라고……
‘그래 가마.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를 위해서 이 자리를 벗어나마. 너를 죽인놈
들에게 죽음을 내리기 위해서도…… 난 살아 남을 것이다.’
슬럼프가 오는 것인가? 글이 허접이죠?
조금 힘드는군요.
사실은 꽤 되었는데 오래 가는군요. 더군다나 날이 따뜻해져 오니
더욱 심해지겠군요.
하루에 두 편이 되면 기다렸다 올리거나 도저히 불가능하겠다 여겨지면
한편이라도 올렸는데…… 이제는 연재 방법을 바꾸겠습니다.
한편이 완성되면 아무 때나 올립니다.
하루에 한편이 될 수도 있고 두 편, 또는 세 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한편의 양이 짧을 수도 있고 길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제목은 가급적 붙이지 않겠습니다. 73편 위기까지만 붙이고
앞으로는 제목이 없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잡담란을 2부의 설정에 따른 제 의견을 전하는 곳으로
활용하는 방안도……(아직은 아닙니다.)
근래 비평해 주시는 분들이 뜸해졌는데, 그래서 그런가요? 하여튼 열심히 하겠습니
다.
감사합니다.
그럼……
『SF & FANTASY (go SF)』 125682번
제 목:[하/펌] 황제의 검 (74)
올린이:armisael(김동호 ) 01/02/06 07:27 읽음:436 관련자료 없음
제 목:[연재] 황제의 검 (74) 관련자료:없음 [62396]
보낸이:임삼열 (logos333) 2001-02-05 19:37 조회:844
- 황제(皇帝)의 검(劍)- [74]
파천과 시선이 마주친 상여락은 온 몸에 소름이 돋아남을 느낀다.
‘죽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
본능적인 느낌이었다. 지금의 파천이라면 그가 죽이기에는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까지 그들을 슬슬 농락하며 지금까지 쌓아왔던 울분을 풀고자 했던 것
이다. 그런데 지금 저 놈의 눈길은 그것조차 불안케 만들었다. 바로 그때다. 순간
적으로 딴 생각에 몰입해 있던 상여락에게 파천이 검을 곧추세우고 진격해왔고 그
런 그를 향해 상여락의 장심에서 불이 뿜어져 나간다. 검강으로 공격을 할 줄 알았
던 파천이 오히려 검막을 발동하며 수비자세로 돌아서고 상여락이 발출한 장력은
고스란히 파천의 검막에 격중된다.
콰앙
파천은 그 힘을 빌려 뒤로 퉁겨가며 몸을 솟구쳤다. 번개처럼 민첩한 몸놀림이었다
.
“아니, 저 놈이?”
그가 도주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상여락이었기에 한동안 대처를 하지 못하고 바
라보고만 있었다. 순간 놈의 마지막 눈길이 떠오르자 그는 다급해졌다.
“저, 저놈을 놓치면 안 된다.”
이미 사방은 포위된 형국이었기에 파천이 아무런 저지없이 도주하기란 불가능했다.
교묘하게 공격을 피하며 포위망을 뚫어 보았으나 그 또한 쉽지는 않았다. 게다가
이미 바짝 뒤를 따르는 상여락의 모습이 보였음에야.
“이놈!”
달리던 걸음을 늦추지 않으며 상여락이 발출한 장력을 또 다시 검으로 막았다. 파
천은 그 힘을 빌려 더욱 빠른 속도로 도주하고……
상여락은 머리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 날 정도로 대노했다. 놈의 경신술은 워낙에
교묘하고 또한 신속했다. 아무리 앞을 막으려 해 보았으나 그때마다 방향을 틀어가
며 다람쥐처럼 빠져나가는 것이다. 그나마 앞에서 수하들이 조금이라도 그를 몰아
붙여주니 다소 속도가 늦추어져서 그렇지, 그러지 않았다면 그를 잡기가 쉽지 않을
듯 여겨졌다. 내공의 수위에 비해 파천의 경신재간은 뒤를 좇는 상여락을 놀라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어느덧 날이 어둑어둑해지자 상여락은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완전히 어두워지면 어
쩌면 그를 놓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해 온 것이다. 산을 벗어나서 평원 쪽
으로 내달리던 파천이 멈추어 선 것은 어쩔 수 없는 장벽을 만났기 때문이었다. 세
노인들이었다. 그들은 어느새 이곳까지 와서 그의 도주로를 봉쇄하고 있었던 것이
다.
“후후 여기까지다. 천마서생이라 했나? 감히 외호에 천마라는 이름이 들어가는 놈
치고는 대단치 못한 놈이군. 기껏 생각해낸 것이 도주라니 말이다.”
세 명의 노인은 둥그렇게 파천을 포위하고는 점차로 간격을 좁혀 온다. 그제야 장
내에 당도한 수하들이 상여락의 명령에 따라 주위를 엄밀히 포위했다.
“이제 포기하고 그만 목을 늘어뜨려라. 순순히 죽음을 당하는 것이 그나마 꼴사납
지 않고 품위가 있지 않겠는가?”
“모두 죽인다. 이 간악한 놈들, 그 따위 치졸한 암계 따위나 쓰는 놈들은 무인이라
할 수도 없다. 모두 죽여주마.”
파천이 흥분하여 외쳤다. 평소의 지나칠 정도로 냉정한 그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세 노인 중에 한 명이 품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낸다. 그것은
금척(金尺)이었다. 길이가 한자 반 정도나 될까한 것으로 보통의 무림인들이 병기
로 사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후후 내가 너의 거친 입을 다물게 해주지. 어르신네의 손에 죽음을 맞는 것을 영
광으로 알아라.”
말을 하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선다. 꾸부정한 허리가 우두둑 소리와 함께 곧게 펴지
고 흐리멍덩한 눈에서도 언제 그랬느냐 싶게 예기가 뻗쳐 나온다. 그는 금척을 파
천에게로 향해 세우더니 희미한 미소를 배어 문다.
“클클 이것은 본좌의 독문병기이지. 이른바 사망금척(死亡金尺)이라는 것이다. 네
가 몇 수까지 피하는지 볼까?”
그리고는 아무런 예비동작도 없이 허공으로 던져버렸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금척은
점차로 그 속도를 배가하더니 나중에는 원반처럼 보이기 시작하고 그 속도가 절정
에 달하자 파천을 목표로 쏘아진다.
파천은 검을 들어 전면에 세우고 뚫어지게 금척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너무나 빠르
게 돌아가는지라 파공성이 공간을 찢어발기고 그 움직임도 신묘막측하여 감히 그
경로를 예상하기가 쉽지 않았다.
고오오오
캉
검을 들어 막기는 했으나 여지없이 격퇴되어 뒤로 물러서는 파천이었다. 땅을 딛고
있는 발에 힘을 주어서인지 땅이 패이며 도랑을 파 놓는다. 그러나 이제 시작이었
다. 금척은 잠시도 쉬지 않고 곧 바로 파천의 상체를 휩쓸었다.
캉
“억”
얼마나 위력이 큰지 검을 쥐고 있는 손목이 시큰거렸다. 금척이 다시 노인의 손으
로 들어가더니 이번에는 낮게 바닥에 깔려서 날아왔다. 파천은 금척이 곁에 이르자
슬쩍 옆으로 비켜섰고 바로 그때, 위로 솟구치며 어깨를 스친다.
팍
“으음”
파천은 신음을 토해냈다. 금척이 핥고 지난 자리는 찢어져 순식간에 피로 젖어든다
. 점차 들고 있는 검조차 무겁다 여겨지니, 지금의 그로서는 도저히 막아낼 성질의
공격이 아니었다.
회수된 금척을 들고 있는 노인은 오만한 표정으로 파천을 비웃고 있었다.
“무림오천이라 불리는 놈들이 하나같이 너처럼 약하다면, 중원을 제패하는 것도 그
리 어렵지 않겠군.”
분노 이전에 짜증이 났다. 저 놈들은 어떻게 된 것이 암계로 우위를 점한 사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일언반구도 없고 오히려 정상적인 파천을 제힘으로이기고 있다는
듯이 당당하게 말하지 않는가? 부끄러움이라고는 아예 모르는 자들이라 여겨졌다.
하긴 그런 빌미를 제공한 자신을 탓해야지 누굴 원망하겠는가?
파천은 대꾸조차 귀찮은지 반응조차 없었다. 단지 이글거리는 분노와 약간의 권태
감이 내비칠 따름이었다.
“이제 더 이상 살기 귀찮은가 보구나. 좋다. 죽여주마.”
사위는 어둠에 뒤덮여 있었고 그곳 허공 중으로 다시 금척을 세워든다. 또 다시 금
척은 파천을 괴롭힐 것이다.
“이번에는 조심해야 할 것이다. 순식간에 생명을 뺏어갈테니……”
팽
그 말을 끝으로 금척은 또 다시 날아온다. 그의 말대로 허공을 선회하지도 않았고
직선으로 쏘아져 왔다. 파천은 검자루를 굳게 잡았다. 이번에는 그도 금척을 쳐내
며 앞으로 뛰어가리라 다짐했다.
“오너라”
입술을 잘근 씹어 뱉는 말이 파천의 입에서 흘러나온 바로 그 순간이었다. 금척이
맹렬하게 돌아가는 곳에서 또 하나의 금척이 분리되더니 순식간에 파천의 두 군데
를 노리고 쏘아진다. 워낙에 지척지간에서 분리되었는지라 하나는 도저히 막을 수
없어 보였다.
캉
“꺽”
털썩
파천은 검으로 땅을 짚으며 쓰러지는 몸을 간신히 지탱했다. 하나의 금척은 다행히
쳐내는데 성공했다. 또 하나의 금척은 옆구리를 한웅큼이나 뜯어내며 지나갔다.
손으로 틀어막아 보았지만 흘러내리는 피를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순간적으로 혈
도를 짚어 지혈을 하려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점차 맥이 빠지고 눈 앞이 흐려왔
다.
정신은 분노로 말짱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이니 자신의 의지로는 어찌 할
수 없는 한계까지 도달한 것이다. 그럼에도 파천은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검을 짚
으며 몸을 일으켰고 무리가 따르는지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눈에서 눈물이
흘러 나왔다. 슬픔의 눈물이 아니었다. 분함의 눈물이었다. 처절한 분노를 풀길 없
는 한 서린 눈물이었다. 놈들을 죽이고 싶었다. 지금처럼 살인의 욕구가 넘쳐 난적
이 있었던가? 이대로 죽기에는 너무 억울했다.
‘놈들을 죽여야 하는데…… 천마, 독고무…… 미안하다. 너희들의 복수를 할
수 없을 것 같다. 이대로 죽기에는 너무 억울하다. 정말 이리 헛되게 죽어야 한단
말인가?’
“안~~돼!”
파천은 몸을 떨치고 일어났다. 어디에서 솟아난 힘인지는 모르나 벌떡 몸을 일으키
는가 했더니 노인을 향해 뛰어간다.
“으아아아아”
검을 하늘을 향해 세우고는 무작정 뛰었다. 2장 앞까지 당도하자 발을 구르며 도약
했고 온몸의 힘을 다해 검을 내리그었다.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
다. 노인은 비웃음을 흘리며 왼발을 축으로 옆으로 슬쩍 비켜서더니 금척을 검의
선로를 비집고 쑤셔 넣었다.
“꺽”
너무나 빠르고 교묘했는지라 금척은 파천의 검을 비끼며 오른쪽 어깨에 깊숙이 박
혔다. 회심의 미소를 짓던 노인의 눈이 놀람으로 부릅떠지고 그는 황급히 금척을
뽑아내며 뒤로 몸을 솟구쳤다.
찌이이익
어깨에 큰 상처를 입었음에도 파천의 검이 멈추지 않고 자신에게 쇄도해오자 그가
놀라 몸을 빼낸 것이다. 파천의 검에 의해 상의자락이 찢어지며 가는 혈선이 그어
졌다. 한 순간만 늦게 움직였다면 그의 검에 의해 동강이 났을지도 몰랐다. 비틀거
리는 몸을 가누기도 힘에 겨운지 간신히 버티고 서 있는 파천의 의지는 참으로 놀
라운 것이었다.
‘안돼.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으아아아아!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단 말이다.”
그는 또 다시 노인에게 덤벼들었다. 어찌 보면 너무나 무모한 몸부림이었다. 그저
검을 들고 공간을 휘젓는 몸짓에 불과했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장내의 인물들에게
서 묘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누구나 삶에 대한 집착은 강하리라. 그렇지만 단
지 그렇게 설명하기에는 눈앞의 놈의 행동은 왠지 너무 처절한 것이었다.
노인은 금척으로 다시 파천의 검을 튕겨내며 재차 찔러왔다. 이번엔 심장이었다.
단숨에 생명을 뺏어버리기 위함이었다. 공격하는 그 조차 미쳐 날뛰는 파천의 기세
에 섬뜩함을 느꼈던 것이다.
푹
금척이 살을 가르며 박히는 소리였다. 금척을 파천의 몸에 쑤셔 박은 노인은 오히
려 놀람의 표정을 드러내었다. 마지막 순간에 파천은 본능적으로 몸을 비틀었고 그
바람에 심장 옆을 관통한 것이다. 노인은 금척을 뽑아내며 왼손으로 파천의 오른
쪽 늑골을 때렸다.
펑
“으악”
비명성을 질러대며 허공을 날아가는 파천의 입에서는 시커먼 피가 토해지며 점점이
허공에 뿌려졌다. 바닥에 쳐 박힌 파천은 잠잠했다. 엎어져 있는 파천의 고개가
힘겹게 치켜지고 다시 일어나려고 버둥거렸다. 그럼에도 그는 일어설 수 없었다.
이제 그에게는 몸을 일으킬 기력조차 없는 것이다. 단지 무의식적으로 발버둥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한번씩 몸을 꿈틀댈 때마다 입에서 시커먼 피가 게워지
고 여기저기 난 상처로 인해 바닥이 피로 젖어 들어갔다. 이제는 죽음만이 그를 편
히 쉬게 해 줄 것이다.
‘이렇게 죽을 수 없어. 제발…… 하늘이여, 나에게 힘을…… 내가 죽으면 많은
사람들이 죽어야 하오. 날 믿고 따르는 자들을 고통 속에 버려 둘 수는……’
아! 그런 이유로 저리도 처절하게 죽음을 거부하는 것인가? 그의 가슴에는 누구보
다 따뜻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모든 것을 잃었던 한 번의 경험으로 자신에게 부여
된 사람들을 지키고 싶어하는 욕망이 남다르게 강했고 그로 인해 스스로 더욱 잔인
해져야만 했었다.
더 이상은 잃을 수 없다는 강박관념이 그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적에
게는 냉정했지만 따지고 보면 그 모든 행동들이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불행에 빠
뜨릴 수 없다는 단순한 목적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스스로 자기 앞에서 목숨을 끊고 눈물로 그의 안위를 걱정하던 신하들과 그
리고 궁녀들…… 또 다시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져야 하는가? 진정 내가 숨쉴 공
간은 이곳 하늘 아래에는 존재하지 않는단 말인가?
“큿큿큿”
파천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자조적인 웃음은 너무나 공허했다.
“쿨럭 쿨럭”
또 다시 피가 게워졌다. 살아 있는 것이 이리도 힘이 들 줄은 몰랐다. 가슴이 아팠
다. 그런데도 의식은 점차 선명해지는 듯도 하니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어디 있는가
?
“여락! 마지막은 네가 장식해줘라.”
“네, 사숙”
상여락은 허리의 검을 뽑아 들었다. 달빛을 받아 번쩍이는 보검이었다. 상여락은
아주 흡족한 미소를 배어 물며 파천에게로 다가선다. 그의 목을 잘라주기 위함이었
다. 무림오천 중 일인이자. 마도의 신성으로 무림에 등장한 초고수! 따지고 보면
자신은 무림맹주라는 지위로 인해 무림오천의 일인으로 불렸다면 이 자는 순전히
자신의 능력만으로 무림오천으로 불린 자다. 그런 고수의 목을 자신의 애검으로 잘
라낸다고 생각하니 왠지 흥분이 되었다. 머리맡에 선 상여락이 파천을 내려다보았
다.
“후후 네가 이 시대에 태어난 것을 한탄해라. 네가 약해서 죽는 것이 아니다. 재수
가 없어서이지. 채 꽃피워 보지도 못하고 죽는 고수들이 한둘이겠느냐? 강호가 원
래 그런 곳이니 누구를 원망하겠느냐? 재수가 없는 거지. 인간의 의지만으로는 강
호를 평정할 수 없다. 그런 절대자는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 너는 너무
강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우리와 가는 길이 달랐다. 잘 가라. 진심으로 너의 죽
음을 애도하마.”
상여락은 검을 치켜들었다.
“큿큿큿”
또 다시 터져 나오는 파천의 웃음. 모든 것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이. 그것만이 마
지막으로 자신이 할 일이라도 되는 듯한 태도였다. 그 웃음소리를 듣고 있자니 상
여락은 왜 그리 부끄러워지는지…… 온 몸이 벗겨져 세상에 드러난 것처럼 수치
감을 느끼기 시작했고 그것을 감추기라도 하려는 듯이 검을 힘차게 내리쳤다.
“큿큿큿”
탕
“억”
상여락은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웬 놈이냐?”
소리를 지른 것은 자신이 아니었다. 금척을 지닌 노인이 지른 소리였다. 장내에 있
던 혈마천의 인물들은 고개를 돌려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런데도 사람의 기척은 그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어이없게도 내리치는 상여락의 검을 때린 것은 작은
돌멩이 하나였고 그 충격에 세 걸음이나 뒤로 밀려난 상여락이었다. 지켜보고 있
던 세 명의 노인보다도 당사자인 상여락이 받은 충격은 더욱 극심한 것이었다.
‘대체 어떤 놈이……’
사람이 황당한 경우를 당하면 얼이 빠지는 법이다. 그런 점에서 상여락의 상태는
바로 그런 경우라 할 수 있었다. 그는 이빨을 앙 다물며 다시 한번 파천의 목을 쳐
갔다. 이번에는 극도로 내공을 끌어 올렸기에 쉽게 물리치지 못하리란 생각이었다.
탕
“으윽”
이번에 받은 충격은 더욱 극심한 것이었고 세 걸음이 아니라 2장여나 주르륵 밀려
나가 있었다. 마치 그의 목을 치면 세상의 종말이라도 올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마치 초자연적인 존재가 개입을 하고 있는 듯한 두려움마저 느껴지는 상여락
이었다. 이번에 그의 검을 때린 것은 호두알 만한 흙덩어리였다.
“대. 대체 어떤 고인이시오?”
상여락은 포권까지 해 보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로 그때다. 저 멀리서 천둥같
은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모두 한치도 움직이지 마라. 움직이는 놈들은 모두 죽인다.”
마치 천 개의 종을 한꺼번에 울려 대는 듯한 소리였고 그 소리에 주위에 늘어서 있
던 수하들이 피를 토해내며 주저앉기까지 했다. 처음의 소리가 들려올 때는 멀리서
들리는 듯 하더니 말이 끝날 때쯤엔 가까이서 들려오니……
‘그렇다면 그 멀리서 내가 내려치는 검을 제지했다는 말인가? 이, 이런 말도 안되
는 일이……’
그는 두려움으로 온 몸을 떨어 대었다. 도무지 사람의 능력이라고 말할 수조차 없
는 것이었다. 아직 저 멍청한 노인네들은 그런 것조차 생각지 못하고 고래고래 고
함을 쳐대고 있었으니,
“대체 어떤 놈이, 이따위 수작질이냐?”
상여락은 빠르게 염두를 굴렸다. 저자의 행동으로 봐서는 결코 호의를 지닌 사람의
행동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 그는 갈등하고 있었다. 도망을 갈것인
가? 아니면 저 노인네들이 강하니 함께 합공을 해서, 이기는 쪽에 도박을 거는 모
험을 할 것인가?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거는 일인지라 확실하지도 않은 모험을 하
고 싶지는 않았다. 그가 막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휘리리링
바닥에서 모래바람이 일어나더니 하늘로 솟구치고 마치 그 모래바람을 누르고 하강
하는 듯이 온 몸에 달빛을 두르고 나타나는 이가 있었다.
오! 저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진정 상여락은 태어나서 이렇게 공포스러운 장면은
처음 본다. 입을 딱 벌린 상여락은 이제는 마지막 자신의 생각을 실행할 시간여유
마저 잃어버렸음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봉두난발한 새빨간 머리털이 하늘로 솟
구쳐 있고 얼굴은 청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동공은 하얗게 비어있어 그 또한 공포
스러웠다. 도저히 사람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상여락이 도망가야 한다
는 생각도 잊어버린 채, 장내에 나타난 인물에게 질문했다.
“당, 당신은 누구십니까?”
아직까지 정체조차 모호한 기이한 존재(?)는 그런 상여락 쪽으로는 시선 한번 주지
않고 바닥에 쓰러져 있는 파천쪽으로 시선을 준다. 그 기이한 존재가 내려선 곳은
파천의 곁이었다. 손을 뻗치자 파천의 몸이 둥둥 떠오르더니 그의 품으로 들어오
고 그는 한 동안 파천의 이곳 저곳을 만지거나 주무르거나 짚어 나갔다. 약 일각동
안이나 그러고 있는 괴인을 바라보며 장내의 그 누구도 아무런 반응조차 하지 못했
다. 만약 한마디라도 떼어 낸다면 제일 먼저 재수없이 죽게 될 지도 모른다는 확인
되지 않은 두려움이 결사적으로 입을 막게 하는 힘이었다. 할 일을 다 마쳤다는 듯
이 다시 파천을 땅에 내려놓은 괴인은 그들 쪽을 쳐다보았다. 동공이 하얗게 번뜩
이니 어디를 쳐다보는지조차 명확하지 않았는지라 모두들 자신을 쳐다본다는 착각
속에 몸서리치고,
“대체…… 당신은 누구십니까?”
금척의 노인이 겨우 떼어 낸 말이었다. 상여락은 이 사숙이 무척이나 용기가 있다
고 생각했다. 분명히 그자의 고개가 그쪽으로 돌려졌고 말이라는 것을 하고 있었다
.
“크크크크 너희들은 해서는 안될 짓을 했다. 감히…… 건드려서는 안될 사람을
건드렸다. 각오는 되어 있겠지?”
오! 저것을 사람의 목소리로 규정해도 된단 말인가? 녹 쓴 쇠를 뾰족한 돌로 긁어
내는 듯한 소리가 그들의 귀를 사정없이 학대한다. 역시 상여락의 예상은 정확했다
. 저 분(!)은 결코 좋은 뜻을 지니고 이곳에 나타난 분(!)이 아니었다. 빨리 도망
가지 못한 자신이 원망스러웠고 또 다시 화가 나 발작하는 저 노인네들을 쳐죽이지
못하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늙으면 죽어야지. 아직은 창창한 조카를 함께 지옥
으로 끌고 들어가고 싶어하는 저 악착스러움이 정말이지 진저리치게 싫었다.
“닥쳐라. 네가 귀신인지 사람인지는 모르겠으나, 감히 우리들에게 그런 말을 할 자
격이 있단 말이냐?”
아마도 그 스스로도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고 하는 말일거다.
“저, 사숙. 잠시 고정하시고 사태를 직시하심이…..”
“시끄럽다. 내 저 괴물을 홀랑 벗겨 놓지 않으면 다시는 무인이라 자처하지 않겠다
.”
“쓰레기들, 만약에 이 녀석이 죽는다면…… 맹세컨대 너희 혈마천 놈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살게 해 주겠다.”
무슨 소리인가? 이 상황에서도 의문을 드러내고 있는 사람들!
“지옥에서”
그제야 구조상 이해가 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마는 상여락!
다음편은 잘하면 오늘 중으로 아니면 새벽정도에 올라갈지도 모르겠네요.
혹시 모르니 기다리지는 마시기를……
계속됩니다.
앞으로는 이것 저것 신경쓰지 않고 연재에만……
생각이 복잡해지니 글도 빨리 나가지 않고, 문장은 좋을지 모르지만 맛은
떨어지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제 특유의 스타일(그런게 있었나?)로 죽이되든 밥이되든 밀어 붙이겠습니다
.
혹시라도 최근의 몇편이 더 마음에 드신다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지만……
제 스스로 재미가 없으니, 쓸 기분이 나지 않습니다.
비평이나 의견 마음껏 받습니다.
망설이지 마시고 날려주세요.
[email protected]
감사합니다.
『SF & FANTASY (go SF)』 125683번
제 목:[하/펌] 황제의 검 (75)
올린이:armisael(김동호 ) 01/02/06 07:27 읽음:531 관련자료 없음
제 목:[연재] 황제의 검 (75) 관련자료:없음 [62422]
보낸이:임삼열 (logos333) 2001-02-05 23:42 조회:505
- 황제(皇帝)의 검(劍)- [75]
“너희들은 해서는 안 될 실수를 했다. 감히 나를 깨우다니…… 그렇게도 살기가
귀찮으면 검을 입에 물고 엎어지면 될 것을…… 멍청한 놈들! 너희들 같은 하루
살이들이 감히 건드려서는 안 될 인물을 건들고 죽이려고 했으니, 더 이상 살기를
바라지 마라.”
진정 그의 모습은 꿈에서라도 보기 싫은 끔찍한 형상이었다. 한마디 한마디를 뱉어
낼 때마다 살기와 마기가 소용돌이 쳤고 그것은 지극한 공포심을 유발한다. 명색
이 혈마천의 장로요, 이총사라는 자들이 그의 말에 기가 죽어 몸을 떨어대는 것만
봐도 어느 정도의 위력인지를 알게 해 준다. 심장 약한 사람은 쳐다보기만 해도 심
장이 멎을 정도라고 하면 과장이 있을지도 모르나 이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하늘을 향해 곤두 서 있는 붉은 머리칼이 그랬고 천을 갖다 대면 염색이 될 정도로
푸른 얼굴빛이 그랬으며 특히 저 두 눈! 새하얗게 번들거리는 눈에 가끔씩 폭사되
는 눈빛이 그랬다. 지옥사자도 왔다가 살려 달라고 애걸복걸하게 만들어 버릴 정도
였다. 천 여명의 사람들이 한 사람을 포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한사람에게 천
여명이 위협받고 있으니 이런 황당한 경우가 있는가?
“닥……쳐라. 네 놈이 우리가 누구인지 모르는가 본데……”
“모르긴? 곧 죽을 놈들이지! 그것이면 충분하다. 크크크크 자, 어떻게 죽여줄까?
포를 떠 줄까? 바짝 태워줄까? 그도 아니면 얼려 줄까? 꼬챙이로 찔러 줄까? 아예
떡판이 되게 해 줄까? 말만해라. 그 정도쯤이야 못 들어 주겠느냐?”
할말을 잃어버린 혈마천의 인물들은 멍하니 그를 쳐다보고, 금척을 지닌 노인이 막
발작을 일으키려하자 한 노인이 그를 제지한다.
“대체 당신은 누구 시오? 저 녀석과는 어떻게 되는 관계이기에, 우리를 핍박하는
것이오? 우리 또한 연유도 모르고 당신과 싸우기는 싫소이다.”
“싸워? 너희들이 나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푸하하하하”
또 다시 터져나오는 광소에 모두 귀를 틀어막아 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여기저기
서 비명성을 지르며 쓰러지는 수하들이 속출하자 방금 말했던 노인이 사자후를 발
한다.
“갈”
“푸하하하하”
괴인의 웃음소리에 묻혀 들리지도 않는다. 안색이 샛노래지는 노인을 바라보며 모
두는 더욱 공포감에 물들었다. 갑자기 광소를 뚝 거친 괴인은 그들을 스산한 눈빛
으로 바라본다.
“후후후 가소로운 놈들! 너희가 강해서 저 녀석을 이겼다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저 녀석이 무림경험이 일천하여 방심하다 당한 것이지, 제대로 싸웠다면 감히 너
희가 일수라도 견뎠겠느냐? 무상지독이라 했는가? 그것을 또 한번 써보지 그래? 후
후 미련한 놈들, 그런 얄팍한 수나 쓰는 것들이 무림인 들이라고 행세하고 다니다
니, 너희들 같은 놈들이 있기 때문에 나 같은 놈도 있는 것이다. 긴말하기 귀찮으
니 스스로 목숨을 끊어라.”
그의 말을 듣고 있자면 당연히 그래야 할 것만 같은 위압감을 느끼게 된다. 참으로
괴이한 일이었다.
노인 중에 하나가 손을 번쩍 치켜들자 느슨해졌던 포위망이 금새 조여진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괴인은 재미있다는 듯이 히죽거리더니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아암. 그래야지. 너희들을 스스로 죽게 할 수는 없지. 자. 덤벼보아라. 진정한 마
수(魔手)가 어떤 것인지를 느끼게 해주마. 클클클”
“쳐라.”
세 노인과 상여락이 비교적 멀찍이 물러서고 혈마천의 수하들은 개떼처럼 괴인에게
들러붙는다. 괴인은 그 모습을 보며 파천을 향해 손을 벌리고 그러자 파천이 그의
품안으로 들어온다.
“푸하하하하 모조리 죽인다. 내가 곧 너희의 생사여탈권을 쥔 사신임을 느끼게 해
주겠다.”
콰아아아아
어디서인지 모르는 바람이 휘몰아치고 그것은 살을 가르고 몸이 떠밀려 갈 정도의
광풍이었다. 괴인의 한 손이 하늘을 향해 들려져 있었고 그 손에서 예의 그 강풍이
몰아쳐 나왔다. 그 누구도 한발자국도 전진하지 못했고 겨우 몸을 지탱하기에만도
벅차 보였다. 그러니 무슨 공격을 할 수 있으리오? 바로 그때였다.
“광풍사(狂風死)에 죽는 것을 영광으로 알아라.”
괴인의 손에서 시커먼 기류가 피어오르고 이내 바람결에 실려 함께 몰려 나갔다.
“으악”
“켁”
“큭”
오오,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저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
가? 보라. 괴인에게 다가서던 혈마천의 고수들이 하나같이 몸이 쩍쩍 갈라지며 터
져나가고 온 몸에서 피가 솟구치며 속절없이 죽어갔다. 그들의 몸이 갈라지며 밖으
로 밀려나온 내장들까지 바람에 휘말리고 사방 30장안은 순식간에 아비규환(阿鼻叫
喚)의 지옥도가 펼쳐지고 만다.
세 노인과 상여락은 그 모습을 보고서는 순식간에 30장 밖으로 물러서고 멀찍이서
공포스러운 눈으로 쳐다보고만 있었다. 몸이 찢어지고 다시 바람에 휩쓸리고 그것
이 다시 흉기가 되어 동료의 몸을 갈라버리고, 이런 무공이 있다는 것은 들어보지
도 못한 일이었다.
“저, 저, 저……”
결국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상여락은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그는 비교적 세명의
사숙보다 뒤쪽에 있었다. 그는 눈알을 빠르게 굴렸다.
‘여기 있어 봐야. 개죽음뿐이다. 도망가는 것만이 살길이다. 저 놈은 인간이 아니
다. 어찌 인간이 저런 가공할 무위를…… 아니다. 저것은 무공도 아닐 거다. 말
도 되지 않는다. 전설의 천마가 아니고서는 저런 인간이 존재하지는 않을 거다. 도
망가야 한다. 멀리 도망가는 길만이 살길이다.’
그는 혼란을 틈타 슬그머니 장내를 빠져나갔다. 세 명의 노인들은 눈앞의 참경에
신경이 팔려 그가 사라지는 것도 알지 못했다. 광풍 속에서는 처참한 비명성과 하
늘 끝까지 울릴 광소성 만이 난무했다.
“푸하하하하 너희가 자초한 것이니 날 원망하지 말아라. 지옥의 염왕이 누가 보내
서 왔냐고 묻거든 당신 친구가 한 일이라고 하거라. 푸하하하하”
어느새 광풍도 멎고 한 줄기 달빛만이 고요한데 그 중앙에 그림처럼 서 있는 괴인
이 있었으니, 그는 과연 누구란 말인가? 살아 있는 인간이라고는 세 명의 노인이
전부였다. 시체의 산을 본적이 있는가? 그것도 반자 크기로 조각난 살점들이 뒤엉
킨, 도저히 형체를 알아 볼 수 없는 시체더미 위에서 괴인은 차디찬 살기를 온몸에
칭칭 감고 있었다. 인간이라 부르기에는 너무 가공한, 신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잔악한, 그래 저 자는 악마가 분명할 것이다. 세 명의 노인이 공통적으로 떠올린
단어였다. 악마! 어쩌면 그 이름만으로도 부족할지도 모르는 괴인은 오만하게 하늘
을 우러르며 땅위를 딛고 사는 하찮은(?) 인간들을 굽어보았다. 그가 손가락을 까
닥한다. 가까이 오라는 뜻 일게다. 이중에 아무도 그 의미를 모르는 자가 없었지만
, 누구하나 선뜻 나서기를 꺼려한다. 제일 만만한 게 서열이라고 일제히 뒤를 쳐다
보았다. 앞세울 사람이 떠 오른 것이다. 그들은 동시에 뒤로 고개를 돌리다 놀람과
분노가 교차하는 일성을 토하고야 만다.
“쥐새끼 같은 놈이!”
“이런 찢어 죽일놈이”
“그새…..”
그들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 눈빛은 우리도 도망이나 갈걸 하는 후회로 가득차
있었다.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삼인이 동시에 괴인에게로 몸을 솟구친다.
‘제 놈도 사람임에야. 우리 세 명이 동시에 공격한다면…… 그래 승부는 해봐야
아는 것이다.’
‘정말 그럴까? 저 놈이 정말 사람일까?’
‘분명히 사람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호랑이에게 강아지 세 마리가 덤벼든다고 이
길 수 있을까?’
각각의 생각이야 어떻든 그들은 당당하게 나섰다. 한 명은 금척을 또 한 명은 검을
마지막 한 명은 도를 꺼내었다. 그들은 감히 숨도 크게 내 쉴 수 없었다.
[셋째야, 어서 무상지독을 뿌려보거라.]
[소용없습니다. 이미 저자가 나타나자마자 뿌렸습니다.]
[양이 적어서 일지도 모르니 마구마구 뿌려봐라.]
“가소로운 놈들! 또 그놈의 무상지독인가를 뿌려대는군. 그까짓 것이 나한테도 통
하리라 여겼는가? 빨리 시작하자. 지금 내 친구가 심히 좋지 못한 상황 중에 있으
니 너희들하고 노닥거릴 시간이 없다.”
“이런 빌어먹을…… 틀렸다. 쳐라.”
그들의 검과 도와 금척이 동시에 허공을 날으며 괴인을 삼분할 듯이 치고 들어왔다
. 괴인은 비웃음을 짓더니 몸을 솟구쳤다.
빛처럼 빠른 몸놀림으로 허공으로 도약하고 삼인이 쏘아낸 병기들이 하나같이 그를
따라 붙는다. 괴인은 허공 중에서 한 손을 활짝 펼쳐내었다.
“저, 저것은……”
“말, 말도 안 된다. 어찌 저것이….”
“정말, 저 사람이……”
똑 같은 반응들이었다. 대체 무엇을 보았기에? 허공에는 세 명이 날려보낸 검,도,
척이 허공에서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정지되어 있었고 그 사이를 가르며 아수라
의 두상들이 허공을 선회하며 맴돌았다. 그런가 했더니 순식간에 그 아수라상들은
땅으로 곤두박질치며 그 흉측한 얼굴을 그들에게로 돌렸고
“어, 어”
“캑”
“컥”
“꺽”
세 마디의 비명성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적절한 고저(高低)를 맞추며 함께 울려
나왔다. 아수라 상들이 그들의 몸을 지나치며 지른 소리였다. 몸통중간이 아수라
상 크기만큼 뻥 뚫려 있었다. 내장이고 뼈고 살이고 피고간에 모조리 가루가 되어
흔적조차 없어진 커다란 구멍사이를 바람만이 휑하니 들락거린다. 세 사람은 약간
의 시간차를 두고 바닥으로 쓰러져갔다. 그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믿을 수 없다는
불신으로 가득했다. 괴인은 바닥으로 내려서더니 파천을 바닥에 눕혔다. 그리고는
침울해진 얼굴로 그의 상세를 살핀다.
“바보같은 놈! 이 따위 놈들에게 이리도 처참하게 당하다니….. 파천. 정신이 드
느냐? 파천. 파천”
추궁과혈을 하고 혈도를 쳐보아도 파천은 일어 날줄을 모른다. 괴인은 한참을 고민
하더니 파천을 똑바로 앉힌다. 그리고는 등뒤 명문혈에다 진기를 부어 넣기 시작했
다. 이런 들판에서 더군다나 방금 격전을 치른 곳에서 아직 적이 있을지도 모르는
곳에서 위험을 감수한 행동을 하는 그가 더욱 궁금해진다. 대체 그는 누구란 말인
가?
일다경쯤 흐르고 나자, 파천의 얼굴에 혈색이 조금씩 감돌기 시작한다. 등뒤에 있
던 괴인이 파천의 등을 탁 치자.
“컥”
파천의 입에서 주먹만한 핏덩이가 토해져 나온다. 그것을 보던 괴인은 그제야 안심
한 듯 파천을 안았다. 그리고는 어디론 가로 사라져갔다.
★ ★ ★
이곳은 융중산의 한 동혈이었다. 그곳으로 파천을 데려온 괴인은 한참이나 파천의
상처 이곳 저곳을 살펴보았다.
“한 시름 놓기는 했으나 아직 불안하다. 잘못하면 영영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빨리 의식을 차리고 스스로 치유하지 못하면 위험하다.”
그 정도로 심각하단 말인가? 괴인은 의술에도 해박한 듯 했으나, 그가 아는 것이
의술이라 하기는 뭣했다. 단지 그는 진기와 혈도에 대해서, 그리고 인체에 대해서
잘 알뿐이지, 일반적인 병을 낫게 하는 재주는 없었다. 그는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파천이 스스로 깨어나기를……
파천이 처음 눈을 뜬 시간은 동혈로 들어온 지도 한 시진이나 지난 뒤였다. 그는
깨어나서는 눈만 멀뚱거리다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아침이 되었다. 그
런데도 파천은 일어나지 않는다. 괴인은 숲 속에 들어가서 사냥을 했다. 그 엄청난
무공으로 토끼를 잡는다는 것이 쑥스러운 일이었으나 어쩌겠는가? 배고프면 못 참
는 것을…… 그는 동굴로 돌아와서는 토끼의 가죽을 벗겨내고 내장을 꺼내더니
통째로 진흙을 발랐다. 그리고는 손에 들고 삼매진화를 일으키니 순식간에 진흙덩
이가 새카매졌다. 그는 바짝 마른 진흙덩이를 털어 내고 그 안의 노릿노릿한 살코
기를 베어 물었다. 소금이 없어 간이 맞지는 않았으나 먹을 만 했다.
정오가 되자 또 다시 배가 고파왔다. 그는 이번에는 노루를 잡기로 했다. 몸을 솟
구치자 허공으로 십장이나 올라가더니 그곳에 멈추어 서서는 사방을 살폈다. 노루
가 보였다. 산에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그는 목표물을 향하여 쏘아져갔다. 바로
그때다.
“아니, 이 소리는……”
쇄액
그는 노루에게로 향하던 몸을 뒤틀어 동굴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파천이 깨어나서 본 것은 괴물이었다. 그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다. 원래가 사람
이란 동물은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하는 족속이고 보면 그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했다. 괴물은 사람과 흡사했으나 사람은 결단코(!) 아니었다. 사람이라면 저
렇게 생겨먹었을 리가 없었다.
붉은 머리칼은 하늘을 향해 치솟아있고 얼굴은 시퍼렇게 물들어 있다. 그런가 하면
두 눈은 까만 눈동자라고는 눈을 씻고 보아도 찾아 볼 수 없으니, 영락없는 요괴
의 모습이었다. 파천은 자신이 죽어 요괴들이 사는 곳에 왔다 여겼다. 멀뚱거리며
쳐다보는 파천의 시선에 요괴가 기뻐하는 듯(?)한 느낌이 전해져 왔다. 얼굴을 잔
뜩 구기고 어찌 보면 우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그 놈의 요괴가 사람의 말을 하
고 있었다.
“파천, 드디어 깨어났구나.”
내 이름을 알다니? 저 놈은 요괴이니 그 정도쯤 알아내는 것은 일도 아닌가 보다.
파천은 일단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몰라 몸을 일으켜보았다.
“윽”
온몸에 통증이 몰려왔다. 바늘로 찔러대는 듯도 했고 경험은 없으나 톱으로 켜는
듯도 했고 망치로 자근자근 다져놓는 듯도 했다.
‘빌어먹을 험하게 죽은 놈은 죽어서도 고통을 느끼는가 보군.’
“괜찮으냐?”
요괴가 손을 가까이 대려하자, 파천은 기겁을 하며 몸을 뒤척였다. 그런 그를 보며
괴인은,
“너, 뭐 하는 거냐?”
파천은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너, 누구지?”
요괴는 한참을 멍청하게 있더니 파천을 향해 대뜸 해댄다는 소리가,
“나, 천마야 임마. 정신차려.”
파천은 등을 벽에 기대고 앉았다. 여전히 그의 시선에는 불신이 가득했다. 지금 그
의 머릿속은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뒤엉켜 있었다. 어디서부터 풀어나가야 할
지 몰랐다. 자칭 천마라고 한 저 이상하게 생겨먹은 놈이 정말로 천마인지조차 확
신이 가지 않았으니……
“그러니깐 네 말인즉슨, 네가 천마이고 나를 구해내었다는 것이냐?”
“그렇지. 얘가 왜 이리 사람(!) 말을 안 믿고 그러지?”
뭔가 켕기는 구석이 있는 듯이 그는 유독 사람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며 강조했다.
저 말투를 보면 천마 같기도 하지만, 모양새는 영 아니올시다이니……
“대체 어떻게 된 거냐? 그리고 그 요상한 용모는 또 뭐고?”
“자식이 사람 무안하게…… 이게 원래 내 모습이다.”
“독고무 안에 들어가 있던 놈이 어떻게 제 모습을 되찾는단 말이냐?”
“놈이 죽었으니깐…… 얘기하자면 복잡하지만, 잘 들어라. 독고무는 죽었다. 그
놈이 죽으면서 난, 내 자신을 되찾은 거고, 순간 분노로 마성이 폭발하면서 원래의
모습을 되찾은 거다. 자세히 보면 독고무 얼굴 그대로일거다.”
그렇게 듣고 보니 그런 듯도 했다. 이목구비를 찬찬히 뜯어보면 독고무가 확실했다
. 그런데 전체적으로 놓고 보면 생판 처음 보는 요괴였다.
“쿡쿡쿡…… 하하하하하”
“왜 웃냐?”
“하하하하…… 아니다. 너, 그렇게 하고 세상을 돌아다닐 참이냐?”
“으음…… 사람이 용모 가지고 따지는 것보다 더 치사한 것이 없다. 그래도 한때
는 이 모습에 중원의 모든 여자들이 뻑가서 덤벼들던 때도 있었다.”
“에이…… 설마! 네가 죽일까봐 두려워서였겠지. 네가 멋있다고 생각했겠냐? 그
건 그렇고 독고무가 죽은 것은 확실하냐?”
“그래. 그 녀석은 죽었다. 나도 이런 결과가 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놈이 죽
은 시간이 공교로워서 이런 결과가 발생한 것 같기도 하고…… 만약 죽은 지 오
래였다면 내가 이 몸을 차지하지는 못했겠지. 내가 의식을 차려보니 내공은 흩어져
있고 옆구리가 허전하더라. 곧바로 흩어진 내공을 수습하자, 괜히 분노가 치밀더구
나. 너무 과도하게 진기를 끌어올리자, 예전의 마성이 도졌고 이런 모습으로 변해
버렸지. 그 바람에 상당히 강해지긴 했지만……”
“그래? 그렇다면 예전정도로 강해진 거냐?”
“아직 멀었다. 그렇지만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예전의 힘을 되찾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오히려 내게는 전화위복이 된 셈이지. 밤이나 낮이나 내 마음대로 생활할
수 있게 되었으니…… 흐흐흐 이제야 말로 내 꿈을 이룰 때가 온 것 같다.”
‘미친 놈! 저 자식 또 그딴 생각이나 하는군.’
“그나저나 너도 참 멍청한 놈이다.”
“무슨 소리냐?”
“내공이 십갑자가 넘는다는 놈이 무상지독인가 그런 시답잖은 것도 이겨내지 못하
니 하는 말이다.”
“단전의 내공이 모두 흩어졌으니 난들 방법이 없더라. 그러고 보니, 너는 어떻게
내공을 회복했지?”
“그러니 멍청하다는 거다. 내공이란 무형의 기운이 유형화 된 것이니 유형화된 것
이 무형화 되었다고 당황할 필요는 없지.”
“무슨 말이지?”
“말 그대로다. 한번 생긴 내공이란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사라지지 않는다. 없어진
내공이 어디 갔겠느냐? 경맥의 어딘가에 흩어져 있다는 거지. 경맥에서 일어나는
진기를 한곳으로 모으고 그 힘을 다시 단전으로 보내고, 새롭게 경맥에서 일어나는
힘을 단전으로 보내고, 이런 식으로 하면 다시 내공을 되찾을 수 있다는 말이다.
내공폐지는 인간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거다. 단지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 경맥
의 일부분을 폐쇄하거나 단전을 파괴하여 무공을 사용하지 못하게 할 뿐이다. 그러
니 너 정도의 내공 수준에 이르면 어떠한 경우에도 스스로 복구가 가능하다는 말이
다.”
“그런거였나?”
그제서야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파천이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정색을
하며,
“놈들은?”
“한놈 빼고 모두 죽였다.”
“한놈?”
“무림맹주로 있던 놈은 도망쳤다.”
“허참, 그 놈 하여튼 내빼는 데는 타고난 놈이군…… 자, 이제 가자.”
“어디를? 무림맹으로 가자고?”
“아니. 마도련으로 간다.”
“마도련에는 왜?”
“광마존 등이 위험하다. 이 기회에 혈마천의 중원세력을 초토화시켜버려야겠다. 천
마!”
“왜?”
“너도 알다시피 지금 금응은 천마교에 가 있을 거다. 그러니 너, 나를 데리고 악양
까지 어느 정도의 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겠냐?”
“글쎄다. 해 떨어지기 전까지는 가능하겠지?”
“좋다. 가자.”
“자식 성질 급하기는…… 좋다. 가자. 대신 노루 한 마리 잡아먹고 가자. 배고프
면 난 아무것도 못하는 성격인지라……”
감사합니다.
내일 올라갑니다. 오후 4시 이후에나 올릴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드는군요.
마찬가지로 이런 식으로 띄엄띄엄 올라갑니다.
한편이 완성되면 무조건 올리는 방식을 택하는 것이
나을 듯 싶군요.
그 동안 제가 게으름을 피운 것은 아닙니다. 설정을
하고, 휴식도 취하고 인터넷도 하고,(결국은 게으름을
피웠다는…… 사실은 근래 채팅을 좀 하느라, 글 쓰는데
소홀한 것은 사실입니다. 당분간은 하루에 한시간, 내지
시간반 정도만 하고 말겠습니다.)
그럭저럭 2월중에 1부를 끝내겠다는 약속은 지킬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만 어떤 분은 좀더 늘려달라고 하시지만
저도 좀 쉬어야지요. 2부는 미리 비축분을 만들어 놓고
시작하는 것이 여러모로 좋을 듯 하군요.
잡설이 길어지면 안되겠죠?
감사합니다. 그럼. 안녕히……
『SF & FANTASY (go SF)』 125935번
제 목:[하/펌] 황제의 검 (76)
올린이:armisael(김동호 ) 01/02/08 00:15 읽음:388 관련자료 없음
제 목:[연재] 황제의 검 (76) 관련자료:없음 [62481]
보낸이:임삼열 (logos333) 2001-02-06 18:23 조회:1391
- 황제(皇帝)의 검(劍) - [76]
어두움이 깔리기 시작한 대지의 기운은 자체의 차가움으로 한껏 몸을 움츠러들게
한다. 어두움만이 존재하는 세상이 아니기에 반쪽 빛의 개입으로 그것은 더욱 극명
하게 둘을 분리하는 듯 여겨지지만 사실은 언제나 그렇듯 혼재되어 있다. 어둠의
세상을 살아가는 이도 없겠거니와 밝음 속에서만 삶을 영위하는 이도 없기에 세상
은 복잡 미묘 한 것이고 그래서 더욱 인간을 혼재 속으로 소외시키는 것인지도….
.. 뒤섞인 인간 군상들은 저마다 제 색깔을 지니고 있다지만 그 또한 자기만의 것
이라 하지 못하고, 획일하여 모두 동일하다 할 수도 없음이니 이것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그래서 더욱 연민을 일으키게 하는 미완의 아름다움이 아닐지?
그런 점에서 이 두 명이야말로 어둠과 밝음의 가장 치열한 혼재를 경험하고 있는
자들일지도 모른다.
천마는 역시 그 이름에 부끄럽지 않았다. 아직 내공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파천
을 안고서 한시도 쉬지 않고 악양으로 달려 온 것이다. 그는 모든 가치를 단순화시
키는 장점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었다. 언제든 모든 가치에 우선하는 것은 바로 자
기 자신이었다. 누구처럼 대의나 명분을 따지지도 않고 필요 없이 남의 것을 가로
채지도 않으며 오로지 마음이 시키는 대로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사람의 표본이라
할 만했다. 지금도 파천의 부탁에 의해 악양까지 가장 빠른 시간 내에 도착해야 한
다는 그 한가지 목표만을 지니고 설사 땅이 뒤집히고 하늘이 무너진다해도 그것에
만 집중되어 있는 것이다.
파천의 마음은 조급함으로 바짝 타오르고 있었으나 애써 편안함을 유지하려 했다.
동정호에 다다른 천마는 배를 타지도 않고 하늘을 가로지르며 목표한 지점으로 날
아갔다. 누가 보면 새라 여길 만큼 높은 지점을 갈랐기에 사람들 눈에는 띄지 않았
다. 바위섬은 여전히 굳건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파천은 예의 신호를 보내었
다.
‘지금쯤 일이 벌어졌다면 통로는 열리지 않을 것이다. 아직 일이 시작되지 않았다
면 통로는 열리겠지. 아니다. 어쩌면 마도련의 일부 인물들만이 개입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틀림없이 문은 열린다.’
여전히 파천은 천마의 품에 안겨 있었고 천마는 두 발로 수면을 딛고 있었다. 심하
게 수면이 출렁대고 있었음에도 천마가 딛고 선 주위의 일장은 어찌 된 일인지 고
요하기만 했다. 마치 얼어버린 듯 요동을 하지 않는다.
그르르르릉
통로가 열렸다. 그것을 본 파천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 ★ ★
“그것이 사실이냐?”
“그렇습니다. 지금 전 지도부에 명령이 하달되었다 했습니다.”
“갑자기 대종사가 나타났다는 말인가? 뭔가 미심쩍은데?”
광마존의 안색은 어두웠다. 마도대종사 혁우종이 나타났다는 것이 그에게는 그리
반가운 일일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지존도 계시지 않은 시점인지라 더욱 안심이
되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대종사를 흉수로 지목하고 있었고 그가 곧 혈마천의 인
물일거라 거의 단정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러니 급작스럽게 그가 나타났다는 것
은 어떤 점으로도 자신들에게 그리 좋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광마존이 벌떡 몸을 일으킨다.
“좋다. 어차피 한번은 부딪혀야 할 상대이니…… 가자.”
그의 시선은 무영존에게 머물렀다가 다시 율극에게로 향한다.
“율극 너도 가자.”
“히히 율극은 안 간다. 여기서 낮잠이나 자고…… 대장을 기다려야지.”
그는 탁자에다 팔을 고이고 자는 시늉을 했다. 파천을 향해 지존이라 했다가 대장
이라 했다가 마음이 안 내키면 두목이라 하기도 하니 사용하는 어휘는 정신상태에
비해 상당히 다양(?)하다 할 수 있었다. 한가지 다행이라면 파천에게서 들은 것과
는 달리 비교적 온순하게 광마존의 말을 따른다는 점이었다. 가끔씩 그에게 형이라
고 불러서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으나 그리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율극 그만 일어서라. 대장이 돌아와서 네가 내 말을 듣지 않았다는 것을 아시게
되면 뭐라고 하실까?”
광마존의 점잖게 타이르는 말에 율극이 고개를 번쩍 치켜든다.
“대장이 나를 때릴 거야. 그러면 율극이 아프다. 그것은 싫다.”
“그래. 그러니 어서 내 말대로 하거라.”
“광마 형! 그래. 가자”
율극은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제가 먼저 앞장서서 걸어 나간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광마존과 무영존은 낮은 웃음을 흘렸다.
존마전의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항상 마도대공인 파천이 앉아 있던 태
사의에 중후한 학자풍의 중년인이 좌정하고 있고 그의 옆으로는 광마존이 한번도
본적이 없는 낯선 인물들이 십여 명이나 시립 해 있었다. 그리고 그 밑으로 포단
대신에 긴 탁자와 의자들이 놓여 있고 이미 그곳에는 마도련의 지도부 인사들이 자
리해 있었다. 광마존은 안으로 들어가다 걸음을 멈추어야만 했다. 내부를 둘러보았
으나 빈자리는 보이지가 않았다. 결국은 그가 앉을 자리는 애초에 마련되어 있지도
않았던 것이다.
‘이것봐라. 아예 처음부터 본색을 드러낼 참인가?’
그는 아무 소리 않고 안으로 들어섰고 몇 사람이 그에게 목례를 취하기도 한다. 그
들의 얼굴 또한 당황으로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대종사를 뵙소이다.”
광마존이 포권을 취하며 형식적인 예를 차리자 청수한 인상의 중년인이 호목을 부
릅뜨며 의아한 시선을 보낸다.
“그대는 누구지? 누구이길래, 이곳 존마전에 발을 들여놓는가? 이곳에는 마도련의
간부들만이 들어 올 수 있는 자리다. 잘못 알고 왔다면 그만 돌아가라.”
점잖게 타이르듯이 하는 말이었다. 천인대장 이시명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대종사
를 쳐다본다.
“대종사! 저분은 대공의……”
“자네는 그 동안 못 본 사이 많이 달라진 것 같군. 언제부터 남의 대변인 노릇을
했지?”
그 말에 이시명이 어쩔 바를 모르다 다시 제자리에 앉는다.
“모두에게 알리겠다. 나는 대공 한 사람과만 계약을 했다. 그의 수하에게까지 그
권한과 직위를 보장한다고 말한 적은 없다. 그리고 이 시간 부로 대공과의 계약은
파기한다. 그러니 더 이상 저들은 우리 마도련의 인물들이 아니다.”
몇 사람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진다. 그들은 대종사가 설마하니 이런 식으로 나
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는지라 그의 처사가 온당하지 못할뿐더러 야비하고 치졸하다
고까지 여겨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지금과 같은 마도련의 강남무림장악은 순전히
마도대공의 공적이라 할 수 있다. 그 동안 대종사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다가 일이
성취된 뒤에 갑작스럽게 나타나서는 그간의 공로자들인 대공의 세력을 일시에 부정
하고 있으니 이를 어찌 마도대종사의 처사라 할 수 있겠는가?
“대종사! 그것은 부당합니다. 어찌 그런 말씀을 그리 쉽게 하실 수 있소이까?”
동정십팔채의 총채주인 탁탑천왕 거여패가 흥분하여 내지른 소리였다. 그 말에 동
조하는 소리들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특히 흑사신 황보염의 말은 지나친 감이
있었다.
“대종사는 뭔가 착각을 하고 계신 것이 아니오이까? 마도련은 대종사 한사람의 것
이 아니오. 그런 점에서 이런 중대사를 대종사 혼자서 일방적으로 결정함은 부당하
외다.”
그 말에 대종사 혁우종의 안색이 천천히 굳어지기 시작했다.
‘호 이것들 봐라. 이들의 반응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감히 내게 반기를 들
정도로 그에 대한 신임이 깊다는 것인가?’
“흑사신 황보염!”
착 가라앉은 음성이 대종사에게서 터져 나오자,
“왜 그러시오?”
누가 들어도 그의 음성에는 대종사에 대한 반감이 묻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하
긴 왜 그렇지 않겠는가? 그 동안 쥐죽은듯이 숨어 있던 자가 모든 일이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나자 나타난 꼴이니, 진정 스스로를 마도인이라 자부하는 그들에게는 여
러모로 탐탁지 않은 행동이었다. 가만이나 있었으면 모를까? 이미 그들의 심중에
대종사 이상의 비중으로 자리잡고 있는 파천을 몰아내려 하는 데야 잠자코 있을 그
들이 아니었다. 유일하게 불만을 표하지 않는 사람이라고는 군사 제갈초홍과 그 동
안 련내에서 모습을 감추었던 마안대장이 고작이었다.
“자네 말은 그 정도도 내 스스로 결정하지 못한다는 것인가? 내가 그를 내치려 하
는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는 먼저…… 마도련의 원로들인 장로들을 모두 죽였다. 뿐만 아니라 마도련을
전면에 부상시킨 것 또한 자기권한 밖의 일이었다. 이 정도만으로도 그를 축출하
기에는 부족함이 없을 듯 한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참으로 어이없는 말이었다. 정작 가려운 등을 긁어주고 나니 아쉬울 것이 없어진
자의 행태로 밖에는 보이지가 않으니…..
“내 생각을 물었습니까? 나는…… 오히려 대종사야말로 마도에 필요 없는 인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봤소만……”
웅성 웅성
그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모두 내심으로야 그렇게 생각 할 수도 있었지만 그것을
표현한다는 것은 심히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아직은 그가 전 마도인의 생사여탈권
을 쥐고 있는 마도대종사이기 때문이었다.
“후후후 너의 뜻은 내 충분히 알아들었다. 참으로 가소로운 위인들이군. 너희가 철
석같이 믿는 대공이 살아 이 얘기를 들었다면 참으로 흐뭇해했겠군.”
대종사의 말이 떨어지자 모두의 시선에 놀람이 떠오르고 당장 광마존의 안색은 새
하얗게 탈색되어 갔다. 그는 한걸음 나서며,
“너의 그 말은…… 대체 무슨 의미냐?”
“크하하하 말 그대로다. 이미 한 구의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는 자가 더 이상 너희
의 방패막이가 되지는 못할 거라는 말이지.”
“이, 이놈이”
광마존이 발작하여 앞으로 쏘아져 간다. 그런데 이것이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그
는 몇 번이나 내공을 운기 해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이, 이런 개같은 경우가?”
광마존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던 대종사는 대전이 부셔질 듯한 웃음을 흘려 내었다.
“푸하하하하하하 미련한 놈들! 너희는 이미 중독이 되어 내공을 운기하지 못한다.”
“뭐, 뭐라고?”
“설마?”
“으음”
장내에 있던 인물들은 순식간에 절망의 안색이 되고 만다. 그들은 그의 말대로 운
기를 해 본 결과 단전이 텅 비어 있음을 느낀 것이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
단 말인가?
“후후 너희들을 쳐죽이는 일쯤 나에게는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도 쉬운 일이지. 다
시 한번 확인하마. 나를 따르겠는가? 아니면 이미 죽고 없는 대공을 따르겠는가?”
장내는 순식간에 싸늘해져왔다. 모든 것은 명확했다. 어떤 연유인지는 모르나 내공
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은 무인에게 죽음의 선고나 마찬가지였다. 아마도 대공을
따른다고 한다면 이 자리에서 죽음을 면키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고 대종사를 충
성으로 받들겠다는 말을 하기엔 그들의 자존심이 허락하지를 않는다. 이런 치졸한
수를 쓰는 작자에게 머리를 숙일 바에는 마도의 거물들다운 깨끗한 죽음이 차라리
명예롭지 않겠는가? 곧 바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는 그들에게 대종
사가 다시 한번 확인을 했다.
“잘 결정해라. 생명을 걸고 하는 결정이니 경솔함이 없어야지? 푸하하하하”
“대종사께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대종사께 충성을…..”
두 명이었다. 그들은 군사와 마안대장! 역시 그들은 처음부터 대총사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 놈! 너에게 죽음을 맞는 한이 있어도 너에게 머리를 숙이지는 않겠다.”
황보염의 말은 망설이고 있던 좌중의 인물들을 선동하는 결과가 되고야 만다.
“그렇소. 저런 치졸한 놈에게 지금껏 머리를 숙여 왔던 것도 억울하건만…… 이
미 안 이상에야 저 놈을 따를 수는 없지. 내 죽는 한이 있어도 너에게 머리를 숙이
지는 않겠다.”
“비겁한 놈!”
“너 같은 놈이 마도대종사라니? 널 대종사로 여기는 마도인들이 불쌍하구나.”
그들의 조소 담긴 말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자 장내에는 살기만이 흘러 넘쳤다.
“혈마천의 주구! 너 따위 놈에게 지존이 당했다고는 믿을 수 없다. 장웅과 단야적
풍을 살해한 것도 네놈의 짓이지 않느냐?”
광마존의 말은 한껏 타오는 불길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뭐, 뭐라고? 저 놈이 흉수?”
“혈마천이라니?”
“대체 무슨 말이요?”
“저 놈이 바로 혈마천이라는 곳의 주구외다.”
광마존의 설명에 그들은 아직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들이었다. 그가 다른 세력의
하수인에 불과하단 말인가?
“이런 똥물에 튀겨 죽일 놈! 그러고도 네가 대종사라 할 수 있느냐?”
이제는 아예 대놓고 놈자를 붙이며 삿대질까지 하기에 이른다. 대종사의 반응은 의
외로 침착했다. 그리고 또 한사람, 침착한 이가 있었으니 그는 대종사의 대제자인
한당이었다.
“그는…… 대종사가 아니오. 이미 대종사는 살해되었을 것이오. 내가 그것을 느
낀 지는 꽤나 오래 되었으니……”
“후후 이제와서 숨길 필요는 없겠지. 그렇다. 내가 그들 모두를 죽였다. 너희들 같
은 버러지들은 언제든지 죽일 수 있지. 너희들이 가진 세력이 필요한 것이지. 너희
들은 더 이상 필요가 없다. 군사!”
“네, 영주”
어느새 제갈초홍과 마안대장은 대종사 곁으로 다가서 있었고 대종사의 옆에 시립하
고 있던 10여명의 인물들이 앞으로 나선다.
“이미 놈들이 살기를 거부했으니 모두 죽이고, 마도련을 새롭게 수습해라.”
“존명!”
그들의 하는 양을 살피던 마도련의 지도부는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몸을 일으켜보
았으나 내공이 사라진 지금,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존마전의 내부로 일단의 인물들이 들어서고 그들은 하나같이 복면을 한 신비인 들
이었다. 100여명의 인물들이 아무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입구를 봉쇄한다. 이미
모든 준비는 끝나 있었던 것이다. 그가 확인운운 한 것도 형식적인 것에 지나지 않
았고 처음부터 모두를 죽이기로 작정하고 있었음이 분명해 보였다.
마도련의 지도부인사들은 광마존을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나는 믿을 수 없소. 그 분은 그리 쉽게 돌아가실 분이 아니오. 적들이 아무리 흉
험한 암계를 꾸민다 해도……”
그의 마지막 말은 입안에서만 맴돌았다. 한가지 생각이 불현듯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 이들이 쓴 수법대로라면…… 지존의 내공이 소멸되었다면…… 어쩌면…
…’
광마존의 얼굴에도 절망의 그림자가 스며들었다. 그는 머리를 저었다.
‘그럴리 없다. 그 분은 우리와는 다른 분이다. 분명히 살아 계시리라. 여기서 우리
가 모두 죽는다 해도 분명히 복수를 해 주시리라.’
광마존은 살기 찬 두 눈을 번뜩였다.
“네 놈을 쳐죽이지 못함이 원통하구나.”
광마존의 옆에 있던 율극이 그런 그를 보며 한다는 말이,
“형! 저놈 죽이고 싶어?”
천진난만한 아이의 말투 같은 율극의 말이 광마존의 상념을 흔들어 깨웠다. 그는
슬쩍 옆에 있는 율극을 보았다.
“그래. 난 저놈을 죽이고 싶다.”
“내가 죽여줄까? 나 싸움 잘하는데……”
“뭐? 후후 그래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만은……”
“근데 저 놈이 나쁜 짓을 했어?”
“대장을 죽이려고 한 놈이다.”
하마터면 ‘죽인’ 이라고 말할 뻔하다가 황급히 말을 바꾼다. 아직은 한줄기 희망을
포기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뭐야? 대장을 죽여? 저 놈이?”
율극은 광마존의 말을 파천을 죽였다는 말로 이해했고 그 즉시 대종사쪽 만을 쳐다
보는데 점차 그의 눈빛이 달라져 갔다. 광마존은 율극을 정면으로 보고 있지 않았
기에 그의 이런 변화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눈을 마주보고 있는 대종사는
소름이 끼침을 느껴야만 했다.
‘참으로 기분 나쁜 눈이군. 검은 동자는 어디 가고 흰자위뿐이라니…… 더군다나
저 소름끼치는 분위기는 또 뭐람?’
율극이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그는 이미 이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또 다시 광인
으로 돌아가려는가? 그리고 그는 내공을 상실하지 않았단 말인가? 알 수 없는 일이
었다.
“죽인다. 모두 죽인다. 대장을 죽인 자는 용서할 수 없다. 나, 율극이 모조리 죽여
버린다.”
율극의 말은 더 이상 치기 어린 바보의 말이 아니었다. 소름끼치는 마기가 풀풀 날
렸고 살기가 만장까지 치솟을 듯 했다. 그의 기세가 심상치 않아 보이자 대종사 앞
으로 시립하고 있던 십 여명이 막아서고, 바로 그때였다.
“모조리 죽여 버리겠다.”
율극의 입에서 존마전 전체를 울리는 소리가 터져나오더니 그의 몸은 희뿌연 안개
에 휩싸이며 앞으로 번개처럼 튀어나갔다.
많이 늦었죠?
간만에 텔레비전을 보다가 좀 늦어버렸네요.
내용이 좀 짧더라도 이해해 주세요.
다음 편은 자정전에 올라갑니다.
『SF & FANTASY (go SF)』 125937번
제 목:[하/펌] 황제의 검 (77)
올린이:armisael(김동호 ) 01/02/08 00:16 읽음:382 관련자료 없음
제 목:[연재] 황제의 검 (77) 관련자료:없음 [62529]
보낸이:임삼열 (logos333) 2001-02-06 22:55 조회:1428
- 황제(皇帝)의 검(劍) - [77]
검에서 검강을 뻗치기란 쉽지가 않은 일이다. 적어도 내공이 3갑자 이상이라야 흉
내라도 낼 수 있는 경지이니 이 정도만 되어도 일류고수로 불리기에 부족하지 않다
. 무림을 행도 하다 보면 사실 이 정도의 고수를 만나기란 쉽지 않다. 단지 무림맹
이나 마도련 같은 곳은 정도와 마도 문파들의 연합체 성격이 강한 단체였으므로 각
문파의 최고수들이 상주하기 마련이고 그런 곳에서야 검강을 일으키는 고수를 비
교적 쉽게 볼 수 있다.
지금 마도대종사의 앞을 엄밀히 막아서고 있는 자들은 검강이 한자나 치솟는 자들
이었으므로 최소한 200년의 내공을 지녔다는 말이다. 금석도 두부 베듯이 잘라내는
경지의 고수들인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율극이 맨몸으로 부딪혀 간다.
캉
캉
이것이 무슨 요상한 소리란 말인가? 분명히 그들의 검은 검강으로 잔뜩 기세를 올
리고 맨살을 내리쳤건만 불똥이 튀면서 반탄 되어 나오니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었
다. 그렇다고 맥 놓고 감탄이나 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재차 뒷사람들이 검으로
율극을 찔렀다. 적어도 이번에는 이 요상한 놈을 격퇴시키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멈추게 할 수는 있으리라 여겼다.
쾅
“헉”
“끄억”
그들은 자신의 애검과 함께 뒤로 날려가고야 만다. 자세히 보니 율극의 몸 주위로
는 희뿌연 안개가 감돌고 있었고 그것은 검으로 내리 칠 때마다 그의 몸을 더욱 엄
밀히 감쌌다. 율극이 나가던 기세를 멈추지 않고 마지막 다섯명을 향해 손을 흔들
었다. 그들은 이미 검강을 일으키며 한꺼번에 그에게 직격하고 있었기에 자연 즉
율극의 장력과 부딪혔다.
콰앙
천번지복할 굉음이 울려 나오며 검이 산산조각나 흩어졌다.
“으윽”
“컥”
“캑”
누가 더 고상한(?) 비명소리를 지르는가를 내기라도 하듯이 함께 울려 나온 소리였
다. 어느새 율극은 그들의 사이를 지나치며 대종사의 지척까지 이른다. 율극의 손
이 내밀어지고 대종사가 몸을 허공으로 띄우고 율극이 지나친 다섯명의 신비인의
몸이 우수수 조각나 흩어진 것은 동시의 일이었다. 구음진경의 무공이 위력을 발휘
한 것이다. 이런 것을 알리 없는 장내의 인물들은 지금까지 그저 바보라고만 알고
있었던 자가 기절초풍할 위력을 발휘하자 은근히 그를 응원하기 시작했다.
“우와 잘한다.”
“대단하다. 저럴 수가?”
“역시 대공의 수하는 뭔가 달라도 다르구나.”
그들의 시선은 대종사의 육장과 율극의 장심이 밀착하는 것을 빠르게 따라갔다. 한
순간도 놓치면 천추의 한을 남기기라도 하는 듯이 조바심을 내는 모습들이었다.
콰앙
“으윽”
누가 비명을 지른 것인가? 누가 격퇴된 것인가?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그것 하나였
다. 이 결과에 따라 자신들의 생명도 좌우되는 것이었기에 관심은 지대했다. 율극
은 한 걸음 물러나 있었고 대종사는 태사의를 넘어뜨리며 뒤로 날아가 간신히 몸을
지탱한다.
“야호, 대종사 저것 별것 아니구나.”
“끝내준다.”
광마존 또한 놀람의 눈으로 다시 한번 율극을 쳐다본다. 대체 어떻게 그만이 내공
을 상실하지 않았는지 조차 알지 못했으나 율극이 생각보다 더 강하다는 사실이 왜
이리도 기쁘단 말인가? 저 정도라면 쉽게 지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율극의 말
처럼 모두 죽일 수 있을 지도 몰랐다.
대종사는 눈앞의 괴물같은 놈을 쳐다보았다. 그는 아직까지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
이었다.
“빌어먹을…… 이게 무슨 개망신인가?”
그는 허리춤에 매어져 있는 검을 끌렀다. 검신이 붉은 빛이 나는 것이 보검임에 틀
림이 없었다. 그는 검집을 한쪽에 팽개치고 두 손으로 검자루를 힘주어 움켜 쥐었
다.
“내가 방심했구나. 다시 한번 해보……”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눈앞의 괴물 같은 놈이 또 다시 덤벼들었던 것이다. 손
을 앞으로 쭉 밀어내는 상대의 장심 에서는 구름기둥 같은 장력이 돌풍처럼 밀려나
온다. 아직 근처에 다다르지도 않았는데, 한기가 밀려오는 것이 극음의 무공인 듯
했다.
“받아라. 놈! 탈명검 염화탈명(炎火奪命)”
그의 검에서는 시뻘건 화염이 솟구쳤다. 언젠가 무창의 비무에서 4룡중 한 명인 탈
명화룡이 전개한 바로 그 검법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화염은 당시보다 더욱 거센것
이었다.
두 가지 각기 다른 성질의 기운이 부딪히자 심상치 않은 충돌음이 일어난다.
쾅
콰콰쾅
그들은 연속적으로 부딪혔으나 누구도 승기를 잡지는 못했다.
‘빌어먹을 저 놈이 여유를 주지 않으니, 혈마환살검을 쓸 수도 없고…… 뭐 저런
놈이 다 있냐?’
그는 다급했다. 수 천 번의 비무를 겪어 보았다 자부하는 자신이었지만 눈앞의 상
대는 모두지 일반적인 상식이 통하지 않는 자였다. 정묘한 초식을 지닌 것도 아니
고 그저 장심에서 희뿌연 극음의 강기 만을 뿜어 낼 뿐이었다. 그러나 어찌나 그
위력이 극심한지 슬쩍 스치기만 해도 옷자락이 부서져 나간다. 그러니 한 순간이라
도 방심하는 날에는 어찌 손써볼 여유도 없이 한 조각 빙편으로 화할 판이다. 결국
그는 비교적 빠르게 전개 할 수 있는 탈명검과 간혹 장력을 발출하는 것이 고작이
었다. 자신이 가장 자신 있게 펼칠 수 있는 비장의 무기인 혈마환살검은 시도조차
하지 못한다.
“죽어라.”
놈은 그 소리만을 내 지르며 육장을 휘둘러 온다. 어찌나 몸놀림이 빠른지 눈 앞이
어질어질했다. 점차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음에도 놈은 한시도 쉬지 않고 죽어라
공격을 해댔다. 놈은 지치지도 않는 진정 괴물이었던 것이다.
‘좋다. 이렇게 된 것 할 수 없다.’
쾅
또 한번의 격돌로 뒤로 성큼 물러서며 상대가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오른손으
로 검을 쥐고 왼손을 품속으로 넣는다. 놈은 역시나 그 지겹도록 본 수법을 무식하
게 휘둘러 오며 공격을 했다. 스치면 죽는다는 생각밖에 없었는지라 극도로 조심했
다.
“이놈 이제는 죽어라.”
대종사의 검이 화염을 뿜어내며 구음마장과 충돌해가고 품속에 들어갔던 왼손이 밖
으로 나오며 무엇인가를 홱 뿌렸다.
“억”
처음으로 율극은 신음을 발하며 뒤로 물러서고 그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온
몸에는 빽빽하게 작은 침들이 박혀 있었다.
“하하하하 네가 용빼는 재주가 있어도 살아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시독탈
명침(屍毒奪命針)이라는 것……”
득의한 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어가던 대종사가 멈칫 하더니 놀라 입을 딱 벌린다.
율극이 하는 짓을 보라.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침들을 뽑아 쥐더니 한 손에
쥐고 힘을 준다. 그리고는 손을 벌리자 무엇인가가 손바닥에서 또르르 굴러 떨어
진다. 그것은 얼음덩이였다. 침들을 한데 모아 한꺼번에 얼려 버린 것이다. 그리고
는 손으로 침이 박혔던 몸을 슥슥 문지르더니 대종사를 쳐다보고는,
“이놈 죽어라”
지겹도록 들은 그 말을 또 다시 뱉어내며 두 손을 들어 공격해 온다.
“뭐, 이, 이런 놈이 다 있냐?”
그는 순간적으로 뒤로 물러서고, 공격의 기회를 놓쳐 물러서고, 반격을 하기가 엄
두가 나지 않아 물러서고…… 계속 물러서고 있었다. 이제는 대전의 아래쪽으로
까지 밀려나며 대전을 한바퀴 돌아갔다. 마치 모두에게 좀더 자세히 보여주기 위해
선을 보이는 듯 했다.
율극의 구음마장이 대종사에게 다가오면 간신히 탈명검을 발휘하며 뒤로 물러선다.
벌써 이러기를 수십차례, 보는 사람도 슬슬 지겨워오기 시작했다. 당하는 사람이
야 똥줄이 탈만큼 다급할지는 몰라도 보는 사람은 빨리 어떤 식으로든 결말이 났으
면 하고 바라는 심정인 것이다. 결국은 그가 밑으로 도망가는 바람에 입구를 막고
있던 혈마천의 수하들까지 몇사람, 개죽음을 당하고야 마니……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었다.
군사가 마안대장에게 전음을 보내었다.
[쉽사리 끝날 것 같지는 않군요. 저자들을 마안대장이 모두 죽여요.]
[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이미 영주의 명이 떨어졌으니 더 이상 살려 둘 필요가
없어 보이는 군요. 어차피 저 괴물은 좀더 두고 상대해야 할 것 같으니……]
[알겠습니다.]
마안대장은 회색의 야행복 같은 차림을 하고 있었고 두 눈만 빠끔히 내어놓았다.
그가 좌중의 인물들에게 다가선다. 광마존과 무영존은 그들을 은근히 감시하고 있
었으므로 지금 그들의 행동이 무엇을 뜻하는 지를 알아챈다.
“율극아”
광마존의 음성이 토해지자, 그렇게 미쳐서 광분하던 율극의 신형이 거짓말처럼 딱
정지한다. 그리고는 소리가 난 쪽으로 돌아본다.
“광마 형! 왜 그러지?”
아직은 정신이 나간 것이 아니었나 보다. 율극이 이쪽으로 쳐다보자 좌중의 인물들
에게 다가서던 마안대장의 걸음 또한 동시에 멈추고, 그러는 사이에 대종사 혁우
종은 한숨을 돌리고 있었다.
‘무식한 잡것’
이것이 율극을 바라보는 대종사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싸우고 싶지
않은 상대였다. 이렇게 악착같이 덤벼드는 놈은 머리털 나고 처음이었다. 설사 존
마전을 나가 악양 땅을 벗어난다 해도 저 놈은 악착같이 따라 올 놈으로 보였다.
“저 연,놈들을 먼저 죽여라.”
광마존이 군사와 마안대장을 가리키자 마안대장은 흠칫하여 한 걸음 물러섰고 군사
제갈초홍은 그 예쁜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두려움에 잠겼다. 보아하니 대종사조
차 저 괴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주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는 두 사람인지라 그
다급함은 대단한 것이었다.
“저것들 먼저 죽이라고?”
“그래. 쟤네 들이 이 형을 죽이려고 하는구나.”
“그래?…… 알았어.”
천연덕스럽게 대답하고는 대종사를 보며,
“너,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라. 갔다와서 죽여 줄 테니……”
“허허허허 참으로 이런 꼴을 당하게 될줄이야.”
율극은 귀찮다는 듯이 두 사람에게 다가선다.
“이 놈! 어딜 가느냐?”
등뒤에서 대종사가 검으로 율극을 찔러왔다. 그러자 율극은 손을 뒤로 휘둘러 장력
을 쏘아내더니 반탄되는 힘을 빌려 순식간에 두 사람에게로 다가선다. 다급해진 두
사람은 대종사 쪽으로 몸을 피하고 그 뒤를 다시 율극이 쫓고, 참으로 진풍경이
펼쳐진다. 분명히 서로의 생명을 뺏기 위한 진지한(?) 몸짓들이었건만 보는 사람들
은 왜 이리 웃기는지? 결국은 대종사의 뒤까지 무사히(!) 도망간 군사와 마안대장
은 안도의 한숨을 쉰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에 불과 했으니, 곧 바로 율극의 무지막지한 공격이 시작된 것
이다. 처음에는 비등하게 대결을 하는 듯 하더니 곧 바로 뒤로 쫓겨나기 바쁘다.
그 바람에 뒤에 숨어 있는 두 사람의 생명은 더욱 위험해 지기 일쑤였다. 까딱 재
수 없으면 그대로 생명줄을 놓아야 할 판이었다. 대종사가 어느 방향으로 도망갈지
는 그들도 예측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마안대장은 둘이 격돌하는 틈을 타 대종사의 뒤에서 옆으로 빠져나가 보았다. 그랬
더니 아니나 다를까 저 무식한 괴물 같은 놈은 자신을 먼저 죽이려고 덤비지 않는
가? 왜 그런 명을 내려 이런 위험을 자초하는지? 군사에게 욕이라도 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 순간 대종사 또한 스스로를 한탄하고 있었다.
‘바보 같은 놈. 아까 기회가 왔을 때에 혈마환살검을 끌어올리는 건데……’
참으로 스스로 생각해도 한심한 노릇이었다.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자신이 죽는다
는데에 별다른 변수는 없어 보였다. 간혹 차라리 그냥 죽을까 하는 유혹마저 들 정
도니 저 놈의 끈질김이 얼마나 공포심을 주는지를 알 것이다.
‘그래. 그 방법이 있었군. 마안대장으로 하여금 다시 시선을 끌게 하고 그 사이에.
…..’
[잘 들어라. 지금 다시 한번 놈의 관심을 끌어라. 그 사이에 내가 혈마환살검을 끌
어올릴 것이니.]
이것은 분명히 나가 죽어 라는 명령이었다. 마안대장이 전음으로 즉시 대종사에게
대답한다.
[싫습니다. 뻔히 죽을 줄 알면서 그런 위험을 자초할 수는 없습니다.]
참으로 황당한 대답이었다.
[야. 이놈아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우리 모두다 죽는단 말이다.]
[그렇다고…… 알겠습니다.]
[지금이다 튀어나가]
마안대장은 순간 옆으로 전력으로 튀어나갔고 금새 율극은 그를 죽이기 위해 따라
붙는다. 바로 그 때였다. 대종사의 검에서 심상치 않은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왼손바닥을 검자루 아래에 받치고 검극을 일직선으로 허공으로 세웠다. 얼마의 시
간이 흘러가자 그의 검에서 검은 안개가 흘러나오며 바닥에 깔리기 시작했다. 탈명
화룡이 펼쳤던 혈마천 삼대마공 중 하나라는 혈마환살검이었다. 대종사의 뒤에 있
던 군사는 안도의 탄성을 발한다.
“아, 이제 되었다.”
그녀는 안심이 되었다. 혈마환살검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그녀는 알고 있었
다. 언젠가 무창에서 옥면신룡의 수하라는 자에게 대총사의 이제자 장도일이 한번
파해 당하기는 했으나 그 자는 혈마환살검의 오의를 채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눈
앞의 영주라면 장도일 보다는 뛰어 난 고수이다. 게다가 혈마환살검만을 익혀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 검법에 집착을 보여 왔었다. 그러니 저 미친놈을 때려
잡기에는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한 편 옆으로 튀어나간 마안대장은 죽어 라고 도망가기 바빴다. 감히 자신의 실력
으로는 맞상대한다는 자체가 불가능함을 알기에 그나마 빠른 경신재간을 믿고 도망
을 갔다. 꽤나 넓은 존마전 안이었지만 오늘따라 왜 이리 좁게 여겨지는지? 따라가
던 율극이 제자리에 딱 멈추는가 했더니 서서히 한 면으로 그를 몰아갔다. 언제든
장력을 발출 할 준비를 갖추고 있는지라 쉽사리 도망가지도 못했다. 정면으로 마주
보고 서서히 다가오니 그 어디로도 발을 떼어 놓기가 쉽지 않았다.
‘아, 이제는 꼼짝없이 죽었구나. 저 빌어먹을 영주자식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닌데..
…. 쳇 지가 군사에게 마음이 있으니 나에게 이런 역을 시킨다는 것쯤 모를 줄 알
았느냐?’
피슉
율극은 몸을 움츠렸다 순간적으로 공간을 단축하더니 손을 떨쳤다. 이미 그 어느
곳으로 도망쳐보아도 장력의 사정권 안에 들어감을 절감한 마안대장은 이대로 개죽
음을 당할 수 없다는 듯이 힘껏 두 손을 펼쳤다.
그의 장력이 괴물 같은 놈의 흰색 기류에 닿자 소리 없이 소멸되고 그것은 곧장 눈
앞을 뒤덮었다. 등줄기가 시원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손을 펼
친 그 자세대로 마안대장은 얼음덩이가 되었고 점차로 미세한 균열을 일으키는가
했더니 우수수 떨어져 바닥을 뒹군다.
“히히 한 놈 죽였다.”
율극은 뒤로 돌아서서는 광마를 향해 한 번 웃어주고는 곧 바로 대종사쪽으로 몸을
솟구쳤다.
“으응?”
율극이 고개를 갸웃했다. 눈앞에는 시커먼 연기가 흐르지도 않고 뭉쳐 있었고 그
위로는 검극이 삐죽하니 솟아 있었다. 종이배를 접어 물위에 띄어 놓은 듯이 안개
를 따라 흔들리고 있었고 움직임이 있을 때마다 몇 개에서 수 십 개의 환영을 만들
었다. 집중하여 보면 볼수록 환각이 심해져서 어느 것이 진짜인지를 알 수 없게 했
다. 점차로 그 숫자는 급속도로 늘어가는가 했더니 눈앞을 가득 채운다.
“율극. 조심해라. 사정보지말고 뭉쳐 있는 안개를 때려라.”
광마존은 이미 한번 상대해 본 경험이 있기에 그 검법의 위력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정상적인 상태라면 능히 저 정도야 상대할 수 있었으나 지금의 그로서는 군
사 제갈초홍도 이길 수 없었다. 광마존의 말이 있었음에도 율극은 고개만을 갸웃거
리며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보고만 있다.
“크크크크 이제 네 놈을 죽여주마!”
그 음성은 분명히 자신감에 넘치는 대종사의 음성이었다. 순간 율극의 얼굴에 이채
가 떠오르고,
“아, 그곳에 숨어 있었구나. 죽어라.”
율극의 손에서 또 다시 쏟아지는 구음진기! 그러자 허공을 떠돌던 검극이 순간적으
로 사방으로 흩어지며 여러 겹으로 겹쳐지고 수 백 개나 되는 형상으로 다시 분리
된다. 율극이 쳐낸 장력은 이미 그 변화에 묻혀 소리 없이 소멸된 뒤였다. 율극은
이상하다는 듯이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이상하네? 왜, 아무런 소리가 안 나지?”
무언가 부딪혀야 정상이건만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음이 이상했나보다. 서서히 검
극이 다가서고 있었음에도 율극은 멍청하니 움직이지도 않는다.
광마존은 애가 탔다. 그가 상대해 보았던 탈명화룡보다는 강한 고수였지만 자신이
상대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라고 여겨졌다. 문제는 율극이 자신의 능력을 사용할 줄
을 모른다는 것이다. 지나치게 정직한 공격만을 펼치는지라 능력에 비해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을 일깨워주고 싶어도 율극의 지능수준이 떨어지니 방
법이 없었다.
“크크크크 네 놈의 재롱은 여기서 끝이다. 더 이상은 요행수를 바라지 마라.”
피슛
순간적으로 무엇인가가 번뜩인다 여겼건만 이미 율극의 상체가 길게 찢어졌다.
“아악…… 아프다.”
피가 흘러내린다. 율극은 그것을 보다 본능적으로 손을 갖다 대었다. 그의 손에서
는 하얀서리가 맺혀 가고, 그가 손을 떼자 상처는 아물어 있었다. 파천으로 하여금
감탄을 쏟아 놓게 만들었던 바로 그 수법이었다. 상처를 내기도 힘이 들었지만 상
처를 낸다 하여도 금방 아물어 버리는……
“오, 저럴 수가?”
“어찌 저런 일이?”
장내의 인물들에게서 부지불식간에 터져 나온 감탄성이었다.
“정말 괴물 같은 놈이구나. 살려두어서는 안 될 놈이다.”
검극이 다시금 움직임을 보였다.
피슛
움직인다 느낀 순간 어느새 번뜩 빛을 발한다. 수십 개의 검극이 한꺼번에 물밀 듯
쏘아졌다가는 뒤로 물러선다.
율극은 상처로 괴로워했다. 그도 아픔을 느끼기는 매 한가지였다. 어찌 손쓸 사이
도 없이 상처가 생긴 것이다. 이번에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검극이 또 다시 움
직임을 보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율극은 두 눈을 부릅뜨고 검극을 노려보았다.
피슛
본능적으로 율극은 몸을 비틀었다. 새하얀 검강이 십자형태로 그의 상체를 그어오
는 것이 느껴졌다. 몸을 틀어 회전을 시키며 손을 뒤집었다.
쾅
피슛
대종사는 끈질겼다. 연이어 공격이 터져 나오고 율극의 몸에는 여기저기 큰 상처들
이 생겨났다. 채 아물기도 전에 갈라지는 살들인지라 이미 상체는 피로 흠뻑 젖어
들었다. 뒤로 연신 물러서는 율극은 보기에도 안쓰러워 보였다. 능력을 지니고는
있으되 사용할 줄 모르는지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주었다.
“켈켈 이제는 목을 잘라주지. 네가 목이 잘리고도 살아 있을지 궁금하구나.”
광마존은 모든 희망을 버렸다. 율극이 놈보다는 강했다. 그런데도 그 강함을 사용
할 줄 모르니 소용이 없었다. 율극의 단순한 공격은 자신보다 훨씬 하수인경우에만
소용이 있었고 비슷하거나 격차가 심하지 않으면 되려 당하기 십상이었다.
‘담대추광! 이 미련한 놈. 이 까짓 암계에 당하다니, 그러고도 네가 천마교 제이인
자라 할 수 있단 말이냐?’
그는 안타까웠다. 어찌 할 수 없는 자신의 무력함이 원망스러웠다. 율극의 죽음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자신을 스스로 저주했다. 여태껏 무림에 나와서 자신으로 하여
금 전력을 기울이게 만든 사람은 없었다. 그가 전력을 기울인다면 파천을 제외하고
는 당해낼 사람이 과연 전 무림을 통틀어서 몇이나 있겠는가? 그처럼 강한 무공을
지니고서도 이리 허무하게 암산에 당한 자신의 경솔함을 탓해 보았으나 소용이 없
었다. 심지어 파천마저 그런 곤란을 겪었다면 과연 그가 믿을 것인가?
그것은 무영존 또한 마찬가지이리라. 이제 곧 천마교가 무림에 등장 할 것이고 11
명의 동생들과 함께 무림을 질타할 수 있을 텐데…… 모든 것은 물 건너 간 것이
다.
“켈켈 죽어라”
“으악”
“꺽”
“끄악”
한 명이 아닌 여러 명이 동시에 질러대는 비명소리라? 그것은 분명히 율극의 것이
아니었다. 좌중의 시선이 일제히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돌아갔다. 입구 쪽 이었다.
어느새 그곳을 지키고 있던 혈마천의 수하들이 난자되어 입구 쪽에 어지럽게 널려
있다. 그리고 그곳을 향해 들어서는 두 사람!
광마존의 얼굴에 감동이 물결치고 눈이 빨갛게 충혈 된다. 제일 먼저 소리친 사람
은 의외로 율극이었다.
“대장!”
순간이다. 대종사의 검극이 빛을 뿜었고 한눈 팔고 있는 율극의 목을 쳐간다. 그러
나 그 순간 그 빛보다 배는 더 빠른 움직임이 있었고,
사람들은 이 순간 눈앞에서 무엇인가가 번쩍 한다고 여겼을 뿐이었다. 입구로 들어
서는 두 사람중 한 사람이 그곳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그는 어이없게도 율극의 목
에 대어져 있는 검을 맨손으로 잡고 있었다.
“장난질은 여기서 끝이다. 제 죽을 때를 알지 못하는 놈은 살아 있을 가치가 없지.
“
분명히 사리에 맞지 않는 말이었다. 그 말을 한 사람은 붉은 머리칼에 푸른 얼굴을
하고 하얀 눈빛을 지닌 진짜(?) 괴물이었다. 율극이 바로 눈앞에 있는 그를 보고
두려워하는 것만 봐도 그것은 여실히 증명되는 사실로 여겨진다.
“지존!”
“대공! 무사하셨군요.”
“대공”
장내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무릎을 꿇었다. 그들의 목소리는 은은하게 떨려 나왔다.
예전에는 두려움으로 떨었지만 지금의 떨림은 그런 의미는 결단코 아니었다.
“모두 살아 있었구나. 정말 고맙다 살아 있어 줘서……”
감동의 물결이 존마전을 장악해간다.
“파천 이 녀석 어떻게 할까?”
어느새 검은 안개는 완전히 걷혀 있었고 천마의 손에는 대종사가 멱살이 틀어 잡혀
꿈틀대었다. 천마가 이미 어떻게 손을 써 놨는지 그는 축 늘어져 있었으나 정신은
말짱해 보였다. 파천은 존마전의 바닥에 꿇고 있는 자들을 한 사람씩 일으켜 세웠
다. 그리고는 그들 사이를 거쳐서 넘어져 있는 태사의를 일으켜 그곳에 앉았다.
“그 놈을 이리로 데려와라.”
율극은 천마의 옆에 서서는 주눅이 들어 그 얼굴만 쳐다보았다. 율극이 자신을 빤
히 쳐다보자 머쓱해진 천마 왈,
“뭘 보냐?”
율극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다시 고개를 쳐들고 보니 괴물은 사라지고
없었다. 어느새 대장 앞에 가서 미꾸라지 같은 놈을 내동댕이치고 있다. 율극은 눈
앞의 여자를 보았다. 아무도 자신에게 관심을 갖지 않자, 제갈초홍은 어찌해야 할
지를 몰라 우물쭈물하고 있다가 자신을 쳐다보는 율극과 눈이 마주쳤다. 율극이 자
신을 보며 하는 말,
“뭘 보냐?”
제갈초홍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으나 대공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현명한 그녀는 모든 것이 틀어졌음을 깨달은 것이다. 이제 자신의 생명조
차 저자의 손에 쥐어진 셈이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나니 이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지금 죽음을 맞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감사합니다.
좀더 길게 쓰려하다가 간단하게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80편 넘어가면서부터는 천마교와 쌍노에게 준비시킨 세력, 그리고 청면마왕이
준비한 세력까지, 뒤이어 세외의 세력이 한 바탕 뒤엉켜 세력을 뽐내고
그 중에 절세고수들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그 사이사이의 작은 이야기들도 나올 것 같습니다.
작은 문파들의 이야기 말이죠. 그것을 어떻게 잘 조화시키느냐도 고민되는군요.
해보다 귀찮으면 백지화시킬 수도 있습니다.
대체적으로 설정과 줄거리는 끝나 있지만 중간중간 달라질 수도 있겠고,
여차하면 파천을 죽여버리고 다른 주인공을 등장시키는것도(농담인 것 아시죠?)
무진장 많은 이야기들이 준비되어 있어 빨리 쓰고 싶은데…… 하루에 쓸 수 있는
양에 한계가 있는지라, 어쩔 수가 없군요. 이런 잡담글이라면 하루 종일도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이점 널리 이해해 주시고 혹시 양이 마음에 차지 않는
분이 계시더라도 참아주시기를……
내일은 오후 5시전에 한편, 그 다음은 다음 편에 공지하겠습니다. 참고로 수요일과
일요일은 많이 못 올립니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SF & FANTASY (go SF)』 125938번
제 목:[하/펌] 황제의 검 (78)
올린이:armisael(김동호 ) 01/02/08 00:16 읽음:569 관련자료 없음
제 목:[연재] 황제의 검 (78) 관련자료:없음 [62642]
보낸이:임삼열 (logos333) 2001-02-07 22:59 조회:326
- 황제(皇帝)의 검(劍) - [78]
태사의에 전신을 묻고서 파천의 시선이 눈 앞의 사람들에게로 향한다. 시간이 조금
만 늦었거나 천마가 없었다면 자신을 비롯해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을 생각하니 아찔하기까지 했다. 지금껏 스스로 그 얼마나 오만했었던가?
세상에 두려운 것이 없었고 그 모든 것이 스스로에게 갖추어져 있음이 당연하며
오히려 부족한 감이 있다 여겼다. 어려운 일도 없으며 어떤 일도 할 수 있다는, 그
래서 마치 신이라도 된 양 우쭐하여 행동하지 않았던가?
그런 그가, 이제는 죽었다. 이미 자신은 죽은 것이라 여겼다. 스스로 죽음을 이겼
다면 모를까? 천마에 의해 죽음에서 구해진 주제에 더 이상 내세울 것이 없다 여겼
다. 스스로 죽음을 예감하며 느꼈던 절망감, 그리고 비애감, 삶에 대한 아쉬움, 또
다시 반복된 박탈감까지……
‘그래 이 모든 순간이 나에게 주어진 마지막 삶인 것을, 나의 삶이 결코 나의 것은
아닌 것을…… 나를 위해 대신 죽은 그들의 여망과 그들에게 진 빚으로 여분으
로 주어진 삶이었음을, 나는 잊고 있었다. 바로 저 얼굴들! 이제 내가 지켜야 할
것들이다. 쓰러지면 안 된다. 파천! 너는 이제 혼자가 아니다. 죽음도 너를 쓰러뜨
리지 못하게 하라. 운명도 너를 비켜가게 만들란 말이다.
정신 차려야 한다. 또 다시 패배할 수는 없지 않겠느냐? 내가 지닌 것으로 세상을
이기리라. 운명이란 놈을 꺾어버리고 새로운 세상을 펼쳐 보이리라. 더 이상 저들
이 괴로워하거나 노여워 할 일이 없는, 불안에 떨지 않아도 좋은 그런 세상을 만들
리라. 나는…… 어떻게 되어도 좋다. 그리 할 수만 있다면 악마가 되어도 좋으리
라. 영원히 지옥 불 속에서 고통을 당해도…… 나는 만족할 수 있다.’
그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다시는 이런 실
수는 하지 않으리라. 그의 시선이 무릎 꿇려 있는 두 사람에게 머물렀다. 제갈초홍
은 고개를 떨구고 있었지만 대종사의 눈빛은 여전히 오만했고 살기를 담고 있었다.
결코 쉽게 꺾여질 위인은 아니었다. 그를 보고 있자니 왠지 모를 측은함이 밀려
왔다. 파천은 그를 처음 본다.
마도대종사 혁우종! 마도의 하늘이라 불리는 자! 무림오천의 일인이자 정도의 득세
가운데서도 지금껏 마도련을 지탱시켜 왔던 자! 전설이 눈앞에 있었다. 그런데 왜
이리 초라하게 느껴지는가? 적어도 그가 예상한 대종사 혁우종은 이보다는 거대한
인간이어야 했다. 사람이라면 아무리 보잘것없어 보이는 자라도 향기라는 것이 있
고 그 사람 특유의 기운이라는 것이 있다. 그 사람을 판단하는 절대적인 기준은 되
지 못한다 할지라도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이라면 적어도 범인과는 다른 그
무엇인가가 있기 마련인데 지금 눈앞의 혁우종에게서는 그런 기운이 전혀 느껴지
지 않는다. 파천이 그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는 다시 군사 제갈초홍에게
로 시선이 옮겨간다.
“군사!”
여전히 그의 입에서는 군사라는 호칭이 흘러 나왔다. 힘겹게 들려지는 얼굴에는 자
책감과 수치심이 가득했다. 그러나 그런 것보다 그녀의 얼굴을 더욱 강하게 지배하
는 부피는 모든 것을 털어 낸 자의 담담함이었다. 아무런 욕심도 없기에 기대치도
없고, 그러니 절망하지도 않는, 모든 것을 감수 할 준비가 되어 있기에 두려움도
없는, 그런 모습이었다.
“할말은 없는가?”
제갈초홍의 눈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그녀의 입 또한 몇 번인가 달싹이려다
멈추어버린다.
“마지막으로 할말이 있으면 해도 좋다.”
‘마지막’이라는 말이 왜 이리 가슴을 뛰게 한단 말인가? 이미 그는 두 사람을 죽이
기로 작정한 듯 했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었으므로 특별히 억울하지는 않았지만 역
시 아직 젊은 나이의 그녀였기에 아쉬움이 남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대공을 처음 봤을 때, 제 느낌은 솔직히…… 뭔가 일이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예
감이었죠. 내가 본 당신은 결코 2인자로 머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깐요. 마
치 잠룡을 대하듯이…… 저는 그때 이미 오늘을 예감했는지도 모르죠. 지금…..
. 아쉬움은 남을지언정 후회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가? 혈마천에서의 너의 지위는 어떻게 되지?”
또 다시 듣는 말이었다. 그가 혈마천을 언급하자 그녀는 애써 놀람을 감추고 태연
을 가장했다. 광마존이 혈마천을 입에 올렸을 때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찌
저자가 혈마천의 존재를 알고 있단 말인가? 정작 지금 그것을 다시 한번 확인한 것
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그녀는 내심으로 거듭 놀라고 있었다.
“역시 대공은 많은 것을 알고 계셨군요. 우리는…… 아니 나는 대공에 대해서 많
은 것을 알고 있지 못했고 지금까지도 저는 대공을 모르겠어요. 어디서부터 일이
잘못 되었는지……우리가 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겠죠? 저는…… 대
총사의 제자입니다.”
그녀의 말은 파천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제갈초홍의 말이 주는 여운은 대총사
가 옆에 있는 혁우종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래? 그럼 이자가 대총사가 아니란 말인가? 대총사는 대체 누구지? 나는 마도대
종사가 대총사라 여겼건만……”
“이분은……”
“초홍! 그만 두지 못하느냐? 적에게 우리의 모든 것을 낱낱이 밝힐 셈이냐?”
혁우종의 질책이었다. 그녀는 그런 그를 바라보며 안타까움을 드러낸다.
“더 이상 무슨 미련을 가지는 거죠? 모든 것을 포기하세요 사형!”
“너, 너!”
파천은 의미심장한 눈빛을 빛내며 태사의에서 몸을 일으키고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혁우종에게 다가선다. 그러더니 오른 손을 뻗쳐 혁우종의 머리털을 움켜잡았다. 혁
우종의 앙 다문 입술 사이로 상처 입은 야수의 울부짖음이 새어나온다.
그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가는가 했더니 순간적으로 그의 목 부분을 움켜쥔다. 그리
고는 그의 얼굴에서 무엇인가를 홱 벗겨 내었다. 인피면구였다. 너무나 정교한 것
이었기에 지금껏 그 누구도 알아채지 못한 것이다.
지켜보고 있던 자들의 입에서 탄성이 토해졌다.
“너는 누구지?”
역시 예상대로 혁우종은 말이 없었다. 인피면구 사이로 드러난 얼굴은 의외로 젊은
삼십대 중반의 사내였다. 선이 굵고 야무지게 생겼으나 입술이 얄팍한 것이 편협
한 성격임을 말해준다.
파천은 그의 머리털을 움켜잡았던 손을 풀며 몸을 돌려 태사의에 다시 가 앉았다.
그리고는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한참이 지난 뒤에,
“제갈초홍, 나의 의문을 풀어줄 생각은 없나?”
그녀는 가볍게 몸을 떨었다. 그녀가 기억하기로 대공이 자신의 이름을 부른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가 요구한 것이 너무도 달콤한 유혹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의 물음에 충실하게 답한다면 어쩌면 살아 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
녀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파천의 눈은 또한 그것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그런 이
유보다도 더욱 그녀를 끌어당기는 것은 상대에 대해 확인 할 수 없는 미묘한 감정
이었다.
“맹목적인 충정만이 최고의 가치는 아니다. 때로는 길이 아니라고 판단되면 과감하
게 버릴 줄도 알아야 한다. 너는 현명한 여인이다. 그 누구보다…… 나의 의문에
답해 줄 생각은 없나? 강요하지는 않겠다. 스스로 선택해라.”
“이 빌어먹을 놈! 우리를 어서 죽여라. 패한 무사에게 수치는 주지말고”
“내가 언제 너에게 수치를 주었지? 너희들은 너무나 비겁한 부류들이다. 결코 무사
라고 할 수 없는 무리이지. 그렇지 않은가? 무상지독이란 산공독을 사용한것도 그
렇고, 나를 암격한 무리들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도망간 이총사가 실패의 책임을 회
피하기 위해 아직 소식을 전하지 않은 것만 봐도, 너희들에게는 신의 따위는 존재
하지 않는다. 그 바람에 일이 수월해지기는 했지만 말이다.”
파천이 지금까지의 정황으로 판단한 추측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거의 틀림이 없을
듯 보였다. 그의 말을 듣고서야 그제야 지금의 상황이 어찌된 연유인지를 깨달은
제갈초홍은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대공이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은 그들의 입장에
서 보면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고 설사 일이 틀어졌다 하더라도 최소한 그
것을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어야 옳았다. 그랬다면 최소한 이런 상황만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역시 그랬군요…… 좋아요. 대답하겠어요.”
“초홍 너, 설마……”
“그래요. 더 이상 희망이 없어 보이는군요. 서로를 믿지 못하고 서로에게 신뢰를
주지 못한다면 그 조직은 무너질 수밖에 없어요. 적어도 그 자가 우리의 사숙이라
면 더욱 이럴 수는 없어요.”
파천은 그녀의 말로 간접적으로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제갈초홍의 말대로라면
저 녀석은 제갈초홍의 사형이 분명하리라.
제갈초홍은 분명한 어조로 말을 이어 나갔다.
“저는 대총사의 삼 제자입니다. 그리고 제 옆에 계신 분은 대 제자죠. 무창 남도맹
의 비무에서 죽은 사람은…… 제 바로 위의 사형이고요. 마도련의 대종사는 이미
오래전에 저희들의 사부님이자 혈마천 대총사에게 죽음을 당했습니다. 사부님은
혈마천주의 사제죠. 그 동안 사부님이나 사형이 대종사의 역할을 대신해 오고 있었
습니다. 그러다가 사부께서 마도련을 비우는 시간이 많아 지셨기에 대사형이 그 역
할을 담당해 오고 있었죠.”
한번 토해지기 시작하자 일사천리로 쏟아진다. 그 모습을 제갈초홍의 사형이란 녀
석이 넋을 놓고 쳐다본다. 그녀는 혈마천의 일급 정보에 거의 근접해 있다. 그러니
그녀가 입을 열기로 마음먹는다면 혈마천이 받는 타격이란 일만의 수하들을 잃는
것 만큼이나 극심할 터였다.
“네, 네가 배신을?”
제갈초홍이 그런 그를 쳐다보며 비웃음을 흘렸다.
“배신이라고 하셨나요? 이미 저는 많은 것을 알고 있어요. 지난날 우리 집안의 혈
사가 북검회주에 의해 저질러 진 것이 아니라, 바로, 이총사 그 사람에 의해서 저
질러 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교묘하게도 당신들은 내게 모든 것을 속였고 저를
이용해 왔어요. 내가 영원히 이 사실을 모를 거라 믿었겠지요? 언제든 내게 힘이
생기는 날을 기다려 왔어요. 전 그렇게 어리석지 않기 때문에 헛되이 목숨을 상납
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어찌, 어찌 네가 그 사실을 안단 말이냐? 대체 누구냐? 네게 그것을 알려준 사람
이?”
파천은 둘의 말에 두 귀만 활짝 열어 놓으면 되었다. 그가 물어보지 않아도 많은
정보들이 쏟아져 들어오니 말이다. 예전에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무상신검에 대한
지나친 적의를 느낀 적은 있었지만 이런 사연이 있을 줄은 몰랐다. 그래서 대대로
정도세가인 제갈가의 후예가 마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었구나 생각하니 왠지 그
또한 씁쓸한 일이었다.
제갈초홍은 자신의 사형을 외면하며 파천을 쳐다본다.
“혈마천의 세력은 북검회와 남도맹, 그리고 마도련에 각기 침투해있었지만 그것은
수뇌부에 지나지 않고 그 또한 얼마 전에 지위를 박탈당하고 도주했지요.”
“그런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음에도 파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리고?”
“구대문파를 비롯한 정도대파들뿐만 아니라 중원의 거의 모든 대문파들에는 간세가
숨어 암약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들의 신원은 알고 있느냐?”
그녀는 망설임 없이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제갈초홍의 사형이란 자는 그런 그녀를
보며 얼이 빠져 그저 쳐다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네.”
“그래? 그것 잘 되었구나. 흐음…… 혈마천이 그 정도로 중원에 깊숙이 들어 와
있다는 말이지? 좋다. 광마!”
“네”
“이 놈을 뇌옥에 가둬라.”
“존명!”
광마존의 지시에 따라 천인대장 이시명과 부하들이 얼마 전까지 마도대종사 행세를
하던 자를 질질 끌고 밖으로 사라져 갔다.
어느새 존마전은 말끔히 치워져 있었고 전 마도련의 간부들은 아래쪽에 포단을 깔
고 앉았다. 중앙의 태사의에는 파천이, 그 옆에는 또 하나의 태사의가 놓여 있었으
며 그곳에 천마가 자리했다.
“그들이 사용한 무상지독의 효능은 하루동안이다. 그 동안에는 내공을 사용하지 못
하므로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앞으로 마도련은 당분간 이곳 지하의 총단
과 무창, 악양의 세 곳으로 분산 배치하라. 그리고 지도부는 여전히 이곳 지하에
머물도록…… 특별한 명이 있기 전까지는 당분간 대외적인 활동을 자제하며 세력
정비에만 신경을 쓰도록 한다.”
“존명”
“이 일의 책임자는 광마로 할 것이며 무영과 한당, 그리고 황보염이 이를 보좌한다
.”
“존명”
우렁찬 대답이었다.
“공석인 마안대장에는 대종사의 삼 제자인 도무방이 맡도록 해라.”
“존명”
도무방이 앉은 자리에서 머리를 숙였다. 파천은 갑자기 피로감이 몰려왔다. 그동안
의 긴장이 일시에 풀어지는 현상이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전면을 바라보며 조용한
일성을 흘렸다.
“오늘은 이것으로 하고 모두 처소로 돌아가서 쉬도록 해라.”
“존명!”
“대공!”
군사 제갈초홍이었다. 그녀의 부름에 파천이 의아하여 쳐다보고,
“왜 그러지?”
“마도련에 숨어 있는 간세들부터 처단하심이…… 지금 여기 있는 분들이 처소로
돌아갈 경우 어쩌면 적의 암격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곳에 죽은 놈들말고도 혈마천의 인물들이 있단 말인가?”
“네! 그다지 많은 숫자는 아니나, 그 중에는 초특급 살수도 끼여 있습니다. 지난날
장웅을 살해한 자들 중에 하나입니다. 그자는 혈마천에서 키운 살수 중 다섯 손가
락에 꼽히는 인물입니다.”
“그런가? 그럼 그 일은 군사와 여기……”
천마를 쳐다보다 뭐라고 소개해야 할지를 몰라 머뭇거린다.
“난 마천이라 한다. 파천과는 친구사이이다.”
천마가 먼저 선수를 치고 나왔다. 마천과 파천이라…… 독고무가 죽었으니 더 이
상 그 앞에서 머리를 숙이기가 귀찮았던 것이다. 마천이라는 이름은 천마를 거꾸로
뒤집어 놓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좌중의 인물들은 그때까지만 해도 대공의 옆에
있는 인물에게 계속 신경이 쓰이던 차였다. 머리털 나고 저렇게 공포스러운 외모의
소유자를 대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대종사를 다루는 그의 가공한 무공
또한 호기심을 자아내게 한 것이다. 대공의 옆에 태사의를 마련하여 함께 앉아 있
는 것으로 봐서는 결코 그의 수하가 아님은 알았으나 친구라는 말에 왠지 어울리지
않음을 느껴야 했다. 절세 미남자와 거의 괴물에 가까운 야수가 친구라니 어딘가
어색했던 것이다.
“끙…… 그래 여기 마천과 군사가 모든 일을 책임지고 처리하도록 해라. 다른 사
람들은 모두 처소에 돌아가서 휴식을 취해도 좋다.”
“존명.”
천인대와 마안대는 군사와 마천이라 불리는 자와 함께 마도련내에 있는 적의 간세
를 소탕해나갔다. 워낙에 소리없는 움직임이었기에 대부분의 마도련 고수들은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심지어 존마전에서 일어 난 일조차 그들은 알지 못하고 있었으
니 더 이상 말해 무엇하겠는가?
주점은 오늘도 만원이었다. 오늘따라 장노인의 몸놀림이 뭔가 이상함을 느낀 사람
은 많지 않았다. 술을 주문하거나 안주를 시켜도 듣지도 못하고 멍하게 있을 때가
많았다. 포경호는 그런 장노인을 보며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도련에
들어온 이후 자신은 이곳 주점에서만 일했다. 한때는 청운의 꿈을 안고 가입한 곳
이었으나 그를 소개했던 고향 선배가 비밀지단에서 활동하다 불의의 사고로 죽고
난 뒤에는 그 꿈마저 접었다. 그저 하루하루를 주점에서 허드렛일이나 하며 보내는
것에 만족하고 있었다.
한가지 불만이라면 이곳은 외부와 차단된 곳이라 여색을 가까이 하기가 힘이 들었
다. 이곳에 여고수들도 있으나 주점에서 허드렛일이나 하는 그에게까지 차례가 넘
어오지는 않았고 각 당주나 향주급 이상의 처소에서 일하는 시비들 정도나 어떻게
수작을 부려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것 한가지를 제외하고는 비교적 편안한 생활
이었고 스스로도 만족하고 있었다. 또한 가끔씩 도박판이 벌어지면 끼어 들어 한몫
잡거나 옆에서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이런 그를 가장 아껴주고 위해주는 이는 뭐니뭐니해도 주점의 책임자인 장노인이었
다. 사실 책임자라고 해봐야 달랑 두명이 전부인 주점에서의 직책에 불과하지만 하
급무사들의 왕래가 빈번한 곳이었으므로 그는 때로는 아버지처럼 때로는 형님처럼
모든 사람들을 차별 없이 대했다. 포경호는 그런 그를 보고 있으면 괜히 존경심이
치밀고는 했다.
“그래서 말입니다. 외당의 심향주 처소에 아앵이가 말이죠. 양다리를 걸치다 호되
게 당했다는 것 아닙니까? 킥킥 그년이 얼굴이 시퍼렇게 멍이 들어서는…… 참으
로 웃기는 계집이죠. 얼굴 반반한 것 하나 밑고 아랫도리를 휘돌리더니…… 언젠
가는 꼬리가 밟힐 줄 알았죠.”
포경호는 빠른 손놀림으로 설것이를 했다. 주점에 사람들이 가득 할 때는 그가 하
는 일은 오로지 설것이 하나였다. 그릇수가 그다지 풍족하지 못하기에 빠르게 그릇
을 준비해 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술을 주문하고, 갖다 먹고, 갖다 놓는 것까지 스
스로 알아서 하기 때문에 그다지 많은 손길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장노인은 새우와
돼지고기를 함께 볶으며 포경호의 말을 듣는 것 같았다. 지금쯤이면 한마디쯤 참
견이 있거나 아니면 맞장구를 쳐주기 마련인데 역시나 장노인에게서는 아무런 반응
도 없었다.
‘오늘은 참 이상하단 말이야. 대체 무슨 일이지? 계집들처럼 생리를 하는 것도 아
닐거고…… 에라이 모르겠다. 신경 끊자. 이 복잡한 세상에 남의 일까지 신경 쓰
면서 살 수는 없는 법이지. 아암…… 빌어먹을 계속 신경이 쓰이네. 주점에 달
랑 둘이서 일하는데 계속 저러면 참으로 심각하겠어.’
포경호는 씻어낸 그릇의 물기를 닦아내며 선반 위에다 올려놓았다. 그는 힐끔거리
며 장노인을 쳐다보았으나 역시나 그는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 밖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대체 무슨 일이지? 또 누가 싸움이라도 하나? 포경
호는 하던 일을 멈추고 밖을 내다보았다.
“아니, 저 분들은?”
포경호의 눈이 화등잔만하게 커졌다. 분명히 제일 앞장서서 안으로 들어 오고 있는
여자는 몇 번 보지는 못했지만 마도련의 군사가 분명했다. 저런 최고위급 고수가
이곳 주점을 찾는 경우란 거의 없는데…… 하긴 전번 에는 대공까지 오셨다 갔으
니…… 포경호는 아직도 그 날을 잊지 못한다. 소문으로만 듣던 마도대공을 코앞
에서 보았으며 그의 안주를 직접 챙겨주기까지 했으니 그로서는 잊을 수가 없는 날
이었다.
제갈초홍 일행이 주점 안으로 들어서자 주점 안에 있던 인물들이 일제히 일어서더
니 고개를 숙이며 예를 취한다.
“군사를 뵙습니다.”
군사 뒤로 보이는 자들은 천인대원들과 마안대원들이 분명해 보였다. 그들의 기세
는 대단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그리고 이곳에는 무슨 일이지? 괜히 상
관도 없으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불안해하는 모습들이었다. 그들 모두의 시선
은 자연스럽게 군사 바로 뒤에 서 있는 괴인에게 집중되더니 떨어질 줄을 모른다.
한순간이라도 시선을 떼면 죽을 것만 같은 묘한 두려움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무리 하급무사들이라고는 하나 평생을 피 밭에서만 굴러 온 자들이었고 본능적으
로 고수를 알아보는 눈들은 있었다. 그들이 보기에도 판단이 불가능한 고수로 보였
고, 그들이 알기에 마도련 내에 저런 고수가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은 새로 영입한 고수일거라고 쉽게 생각했다. 바로 그때였다. 그들을 더욱 경
악하게 하는 말이 군사에게서 터져 나왔으니,
“들어가시죠. 이 안에 있습니다.”
“그래?”
군사가 오히려 깍듯하게 예를 표하자 장내 인물들의 허리도 자연히 한번 더 굽어지
고야 만다.
“모두 내 보내라.”
“존명! 주점에 있는 자들은 모두 처소로 돌아가라. 다시 한번 말……”
더 이상 말을 이을 필요가 없었다. 우당탕탕 하는 소음과 함께 한꺼번에 몰려 나가
기 시작했고 그들의 지금의 몸놀림만으로는 일류 고수라 불러도 무방할 것 같았다.
천마는 주점의 한자리에 가서 앉았다. 군사가 주방 쪽을 쳐다본다.
포경호는 밖으로 뛰어나가야 할지 가만히 있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하고 허둥댔다.
돌아가는 분위기가 왠지 이 자리에 자신이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루종일 잔뜩 무게만 잡고 홀로 심각해져 있던 장노인이 자신을 쳐다
보더니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너는 여기 가만히 있어라. 그리고…… 그 동안 고마웠다.”
그 말을 하고서는 몸을 홱 돌려 천장의 한곳을 뜯어낸다. 그러자 그곳에서 장검이
한 자루 튀어나오지 않는가? 그는 검자루를 꽉 쥐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 모습을
본 포경호는 아무소리도 못하고 어리둥절해서 제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모든 것
이 갑자기 혼란스러워 졌기 때문이다.
“군사가 이곳엔 무슨 일이오?”
그의 말은 결코 존대가 아니었다.
“모든 것은 끝났어요. 당신의 역할도……”
동시에 끝난것이죠. 라는 말은 입안에서만 맴돌았다. 혈마천의 인물들 치고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보다 강하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을 제
외하고는 누구나 그의 검을 두려워한다. 그녀 또한 그가 두렵기는 마찬가지였다.
다섯명의 혈살수! 그들은 혈마천에서 오마혈수(五魔血手)라고 불린다. 오로지 천주
나 총사들의 명에 따라 살수를 펼치는 자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눈앞의 노인이었
다. 그는 침착한 얼굴로 군사와 천마를 쳐다보았다.
“보아하니…… 의외의 변수가 있었던 모양이군. 게다가 그대가 배신을 한 것 같
고……”
그는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루종일 그를 불안하게 했던 것이 실체를 드러낸
꼴이었다. 그는 천마를 바라보고는 두 눈을 감는다. 죽음을 예감하는 것인가?
‘도저히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자가 아니다. 결국 내 지겨운 삶도 이곳에서 마감을
하는가 보군.’
그의 눈이 다시 뜨여 졌을 때 그 안에는 비장함만이 가득 물결친다. 천마가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말은 필요 없겠군. 고통 없이 죽여주마.”
“한가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뭐냐?”
“대체 당신은 누굽니까? 하늘 아래 당신 같은 사람이 있는 줄 알았다면 난……
살검을 잡지는 않았을 것이오.”
“후후 대답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군. 지옥에 가서 의문을 해결하도록……”
장노인의 검이 주인의 마음을 헤아리기라도 하는 듯이 검집을 어렵게 빠져나온다.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는 평범한 청강장검이었다.
장노인은 뒷걸음치며 스스로 간격을 벌렸다. 어떤 식으로든 일초의 승부면 족할 것
이다. 삶에 미련 따위는 없었다. 살수로서의 삶은 스스로가 원해서 걸은 것이 아니
었다. 그가 철들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는 이미 살수였다. 그렇게 운명지어졌기에 그
것을 거부할지, 아니면 묵묵히 받아들일지 만을 선택하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받아 들였다.
‘대형! 당신이 보고 싶군요. 당신의 용기를 당시에는 어리석다 여겼건만, 죽음을
앞둔 지금…… 당신의 그 용기가 위대하다 여겨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후후 당
신의 싱그러운 미소를 다시 한 번 볼 수 있다면……’
“하앗”
장노인의 청강장검은 변식을 무시하고 곧장 직격하여 찔러 온다. 언뜻 그가 노리는
부위가 상체의 중완혈을 노리는 듯 했으나 위로 거궐에서 옥당, 자궁혈까지 아래
로 음교, 기해혈을 한꺼번에 노리는 듯 심한 상하의 떨림을 보인다. 촌음에 쾌참하
는 빠르기였으므로 웬만한 고수라면 당황하여 손도 쓰지 못할 정도로 위력적인 검
법이었다. 더군다나 그의 검 끝에서는 예리한 검강이 뻗치고 있었음에야…… 천
마는 그런 그의 검격 안으로 오히려 뛰어들더니 손을 뻗친다.
순간 장노인의 얼굴에 어이없어 하는 빛이 빠르게 나타났다 사라진다. 도무지 상식
에 어긋나는 행동이었기에 제갈초홍등도 적이 당황하는 듯 했다. 이변이 없는 한
장노인의 검은 마천의 손을 찢어 놓으며 상체에 깊숙이 박혀 들리라. 천마의 손이
기묘한 호선을 그리며 마치 허공에 그림이라도 그리려는 듯 언뜻 화려하게 움직이
고 장심을 장노인의 검극을 따라 내리누르며 검신을 타고 올라간다. 순간 천마의
손에서 서로의 움직임을 분간 할 수 없는 강렬한 빛이 폭사되니 주위에 있던 자들
의 눈이 절로 감겼다.
“꺼억”
“잘가라. 죽음은 너를 편안하게 할 것이다.”
천인대원들과 마안대원들의 입에서 감탄성이 토해졌다.
“오, 저럴수가?”
“대체 어떻게 저런……”
천마의 손은 장노인의 심장에 깊숙이 박혀 있었다. 장노인의 떨리는 눈이 천마의
눈을 마주보다가, 그의 어깨로 떨어지고, 다시 팔로, 마지막으로 자신의 몸 안에
감춰진 손을 찾아간다. 서서히 감겨지는 두 눈을 억지로 치켜 뜨고 그는 간신히 이
말을 뱉어내었다.
“내 죽음이…… 이리도…… 화려할 줄이야. 고맙소. 진심으……로”
천마의 손이 빠져나오자 의지할 곳이 없어진 장노인의 몸이 순식간에 허물어진다.
죽은 것이다.
“가자.”
천마가 할 일을 다 하였다는 듯이 휘적휘적 밖으로 사라져간다.
군사는 다시 한번 장노인을 쳐다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천인대원들이 그의 시체를
수습하는 모습이 보였다.
포경호는 한 방울의 눈물만을 흘렸다. 그를 위해서는 그것으로 족하다 여겼다. 자
신마저 감쪽같이 속인 그의 처사에, 앞으로 그 누구를 믿을 수 있겠는가? 그의 삶
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고단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많이 늦었습니다.
너무나 어이없게도 한편을 다 써놓은 것을 제가 실수로 지워버리는
…… 그래서 다시 두드렸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것 한편입니다. 시간도 너무 늦었고……
내일은 두 편 올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덧, 참고로 개인 홈피에는 더 이상 올리지 않겠습니다. 이점 양해하시고
답글 못 드린 분 들게 죄송합니다.
그리고 제목을 붙일까요? 실수를 하게 된것도 순전히 제목이 없어서……
저도 이것인지 저것인지 헷갈리기도 하고, 찾아보기도 힘이드는군요.
어쩌면 올렸던 글을 또 올리는 불상사까지……
『SF & FANTASY (go SF)』 126150번
제 목:[하/펌] 황제의 검 79.또 다른 깨달음!
올린이:armisael(김동호 ) 01/02/09 07:21 읽음:437 관련자료 없음
제 목:[연재] 황제의 검 79.또 다른 깨달음! 관련자료:없음 [62733]
보낸이:임삼열 (logos333) 2001-02-08 22:34 조회:754
- 황제(皇帝)의 검(劍) - [79]
【 또 다른 깨달음 】
서로를 찾는 눈길들 사이로 따스한 정이 오간다. 어찌 보면 뭐 그리 대수로울 것
있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죽음의 위기는 서로에 대한 소중함을 일깨우기에 부족
하지 않았고 내부에서 잠잠히 숨죽이고만 있던, 그래서 스스로도 깨닫지 못하던 바
를 명확한 의식의 표면까지 밀어 올리는 역할을 했다. 서로가 보잘것없는 우연으로
죽어야 할 존재들이라고는 생각지 않기에, 충정과 애정이 뒤숭숭하게 섞이어 확산
될 힘을 갖지 못한 감정의 상태를 현실의 것으로 만들어 준 것이다.
하늘을 꿋꿋이 떠받치고 살아 있다는 자체가 때로는 무한한 감동을 줄 때가 있다.
파천도 죽음을 직감하는 순간 이들을 떠 올렸고 광마존과 무영존도 다르지 않았다.
뻣뻣한 사내들인지라 잘 내색하지 못할 뿐 그들의 눈빛은 분명히 예전과 다른 제
색깔로 채색되고 있었다.
천마는 괴이한 그 눈을 들어 그런 그들을 쳐다보더니 입을 씰룩거리며 무슨 말인가
를 하려했다. 그러나 그의 말은 파천이 뱉어내는 말에 밀려 뒤로 미루어지고 만다.
“고생했다. 그리고…… 부탁하건대 모두들 죽지 마라!”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리요? 그것이면 족한 것을. 광마존은 아무리 기억 쪽으로
몸을 구부려 보아도 이런 가슴 뭉클한 얘기를 들은 경험을 찾아 낼 수 없었다. 예
전의 천마교 시절의 좋지 못했던 기억을 생각 앞에 가져와 봤다. 오로지 무공일도
에만 정진하다 오히려 욕심이 화가 되어 심마에 들게 되고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삶의 질곡을 그에게 경험하게 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그들은 나에게로 향한 분노와 살기를 마음껏 뿜어내고 있
었다. 한때는 친인들 이었기에 어찌 된 연유인지를 알았다 해도 달라질 것은 없었
다. 그들의 이유 있는 적의를 온몸으로 감당해야했고 가슴 깊이 서글픔을 접으며
뇌옥에 가두어졌다. 나는 그 순간 모든 상황을 거부라도 하려는 듯, 천마비고에 스
스로를 가두었다. 적어도 그 순간, 저들의 차가운 시선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안
식처로 여겨졌기에 비고로 도망치듯 들어갔지만 그 뒤로도 그때의 기억은 오랜 시
간동안 상처로 들러붙어 있었다.
이런 자신의 삶 가운데 파천을 만났다는 것은 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부여해 주었다
. 천마교에서도 이미 그런 상황을 경험한 바 있었고 앞으로도 그러리라 짐작 해 본
다. 설사 한줌의 흙으로 피와 함께 뒤섞인다 하여도 그것을 거부하지는 않으리라.
지금의 이 감동만으로도 충분했다. 지존은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분이시다. 그
런 그가 저 한마디를 해내기 위해 얼마만한 심적 격동을 겪었으며 죽음의 결정을
거부하는 처절한 몸부림이 있었는지가 짐작되어 온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파천이 그간의 얘기를 그들에게 들려주었다. 몇 번인가 가슴 밑바닥
에서 울컥 울컥 치솟아 오르는 격정과 적에 대한 분노를 애써 눌러 두어야 했고,
이것은 아마도 그들을 만났을 때 무서운 힘으로 돌출 될 것이다. 옆에 있는 마천이
란 분이 천마이리라 짐작은 했지만 그의 입으로 재차 확인되자, 그리고 더 이상 독
고무와 공유되지 않는 몸이란 사실에 그들은 다시 한번 예를 표해야만 했다. 완전
한 천마의 부활을 바라보는 그들의 심정은 또 다른 신선한 충격으로 떨려왔다.
“무영은 마황검위대가 중원에 들어오면 그들과 합류한다. 단장화와 함께 비교적 중
원의 상황에 밝으니 진두지휘함에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존명”
“광마는 아까도 얘기했다시피 마도련을 책임진다. 청면마왕이 영입한 마도인들과
함께 유기적으로 연계하도록.”
“존명.”
“율극아”
“응 대장”
“으음?”
파천의 반응이 있기 전에 이미 천마의 꽉 쥐어진 주먹이 율극의 머리를 사정없이
내리친다.
꽝
다른 사람들 같았으면 머리에 구멍이 날 정도로 강한 타격이었으나 율극은 살짝 얼
굴을 찡그렸을 뿐이었다.
“야 이녀석아. 파천이 동네 골목대장이냐? 지존이라고 불러라.”
“씨이 형아는 뭔데 나를 때려?”
지금 율극의 표정은 참으로 기이한 것이었다. 천마를 본능적으로 두려워하는 기색
과 한 대 맞은 것에 대한 분노가 함께 떠올라 교묘히 섞이어 있었다.
“형아라고? 햐. 이놈봐라. 말도 제대로 못하는 늑대새끼 같았던 놈이 이제는 아예
같은 서열로 놀려고 그러네. 형아 라고 그랬냐?”
“그래 뭐……”
“형아라? 으음…… 요걸 어떻게 요리하지?”
그런 둘을 쳐다보며 파천이 통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둘이 형제간으로 지내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겠다. 아주 잘 어울리겠는
데?”
“뭐야?”
정색을 하는 천마와 그런 그를 보며 감히 드러내놓고 웃지 못하는 광마와 무영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천마는 알고 있었다. 저들의 입이 씰룩거리고 상체가 들썩
거리는 것이 웃음을 억지로 참기 위함임을…… 천마가 다시 한번 율극을 노려본
다. 멀뚱거리며 쳐다보는 그에게서 뭘 바란 다는 자체가 무리임을 천마는 뒤늦게
깨닫고는,
“그래. 네 멋대로 살아라. 너한테 뭘 바라겠냐? 대신 나를 지금부터 마천님이라고
불러라. 알았지?”
“싫어. 형아라고 부를래.”
천마가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저으며,
“그래, 알았다. 네 마음대로 해라. 국자로 똥을 푸든 개밥그릇을 제상에 올리든 말
이다.”
율극의 고집을 꺾기란 어려워 보였다. 파천은 율극의 천진한 행동과 천마의 가식
없는 행동이 왠지 닮아 있다고 여겼으나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놓지는 않는다. 분
명 천마는 기분 나빠 할 것이 분명했으므로.
“여기 일이 마무리되었으니 난 천마와 율극을 데리고 개봉으로 떠나겠다. 무슨 일
이 있으면 언제라도 개방을 통하여 연락을 취해라.”
“존명!”
“네, 알겠습니다.”
“천마!”
“왜?”
“너, 그 모습 좀 바꿀 수 없겠냐?”
“왜?”
몰라서 물어? 라고 쏘아 붙여주고 싶었지만 간신히 참았다. 괜히 천마의 기를 죽일
(?) 필요는 없었다.
“눈에 좀 거슬려서 그래. 그 모습으로 무림맹에 들어 갈 수는 없잖아?”
“얼굴은 바꿀 수 있지만…… 머리칼은 나도 어쩔 수 없다.”
천마는 내 모습이 어때서? 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예전의 나약한 인상의 독고무
보다는 지금이 훨 낫다 여기는 그였다.
“앞으로 천마 네가 할 일이 많을 것 같다. 아무래도 네가 나서주면 여러 가지로 마
음이 놓이지.”
“내가 너를 도와 주는 거야 당연한 일이지. 언제든 말만해라. 황제의 목이라도 따
오라면….”
말을 하다가는 순간 실수임을 절감한 천마가 끝말을 흐렸다. 슬쩍 쳐다본 파천의
얼굴은 그다지 변화가 없었다.
“무영!”
“네. 지존”
“너는 가서 제갈초홍을 불러 오라.”
“존명!”
무영이 밖으로 사라져가고 장내에서는 또 다시 천마와 율극의 가벼운 실랑이가 벌
어진다. 점차로 천마에 대한 율극의 경계심이 허물어지자 그의 입에서는 천마를 당
황하게 만들만한 지껄임이 연신 쏟아졌기 때문이다.
★ ★ ★
“부르셨습니까?”
“거기 앉아라.”
“네”
“한가지 물어 볼 것이 있다.”
“무엇이든지 말씀하십시오.”
제갈초홍은 두 눈을 고정하고 파천의 다음 말을 기다린다.
“대총사는 지금 어디 있지? 왜 그가 이번 일에 개입하지 않은 것인가?”
제갈초홍은 반짝이는 눈을 더욱 빛내며 파천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그리고 작고 예
쁜 입술을 벌려 오물거리며 말을 만들어 나갔다.
“사부님은…… 달단으로 가셨습니다.”
“달단이라고?”
“네!”
“왜지?”
“달단에는 전설적인 무문인 천황부가 있지요.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혈마천의 대표
자격으로 그들과 협상을 하러 가셨을 겁니다.”
천황부와의 협상이라고?
“혈마천이 천황부와 동맹이라도 맺을 참인가?”
“제 생각이기는 하지만……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혈마천은 오래 전부터 천황
부와 사사혈교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고 오로지 상대는 그들 뿐이라 여겨
왔습니다. 지금 중원의 상황이 겉으로 드러난 것으로는 사황성을 비롯한 세외삼세
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으나 사실상 그들보다도 혈마천, 천황부, 사사혈교의 힘이
훨씬 강대하니깐요. 이미 오래 전부터 혈마천은 중원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고 천황
부 또한 모종의 움직임을 보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오로지 사사혈교만이 아직
이렇다할 움직임이 없습니다.”
그녀는 끝까지 혈마천이라고 불렀다. 이제 그녀의 마음속에서 완전히 정리 된 것인
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나타내려 하는 것인지는 모르나, 어쨌든 지금 그녀의 모습만
은 파천등에게 내가 당신들의 편입니다, 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행동이었다.
“군사.”
“네”
“무상지독이란 것, 지금도 가지고 있나?”
“네…… 아직 소량이 남아 있기는 합니다만……”
“그것을 나에게 다오. 아무래도 성분을 검사하여 이에 대한 해약이라도 만들어 놓
아야 할 것 같다.”
“이것은 혈마천의 천년연구의 결실입니다. 그리 쉽게 해약을 만들지는 못할 것입니
다.”
“후후 그럴지도 모르지만…… 나에게는 이 땅 최고의 신의가 있다. 그라면 충분
히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어찌 너희들은 중독이 되지 않았지? 미리 해약을
복용한 것이 아니었나?”
“아닙니다. 이것은 해약이 없습니다.”
그녀는 품속을 뒤져 작은 옥병 하나를 꺼낸다. 한 손에 들어 갈 정도의 크기였는데
위 부분의 마개를 여니 미세한 구멍들이 여러 개 뚫려 있었다.
“이것을 사용하는 방법은 일반적인 용독(用毒)과는 틀려서 공기 중에 흘려 보내는
것은 동일하지만…… 내공을 사용하여 옥병에 진기를 주입하면 무취(無臭) 무색(
無色) 무형(無形)의 상태로 독기가 스며 나오고 일정한 특정인이나 특정지역만을
중독 시킬 수가 있게 됩니다.”
참으로 놀라운 수법이었다. 무형지독의 용독이라 해도 대부분 미세한 분말 형태나,
아니면 진기로 공기 중에 흩어서 일정한 지역전체를 중독 시키는 경우가 대부분이
었는데 이것은 100명이 한데 섞여 있어도 특정한 인물만 중독 시킬 수 있다 하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파천은 심각한 표정이었다.
‘이것의 해약을 만들지 못하면 엄청난 희생이 따를 것이다. 아무리 고강한 무공을
지니고 있다 해도 내공을 상실한다면 소용이 없는 법이니…… 이것이 가장 시급
한 일일지도 모르겠구나.’
파천은 제갈초홍이 내민 옥병을 품속에 갈무리한다. 만약 의노가 무상지독의 해약
을 만들지 못한다면 전력을 기울여서라도 혈마천부터 붕괴시켜야 할지도 모른다.
그들에게서 무상지독을 탈취하지 못한다면 승부는 해보나마나 일 것이다.
★ ★ ★
파천은 처소에 홀로 있었다. 무림에 발을 디딘 이후의 지난날을 되짚어 새겨 보았
다. 짧은 기간동안 그는 몰라보게 달라졌으며 여러 가지를 거의 동시라 싶을 정도
로 다양하게 겪었다. 무림에 대해 거의 백지였던 그가 거대한 장막 뒤에서 무림을
움직여 가는 주재자로 변화했고 천마와 혜능의 이입을 통해 얻어진 무공에 대한 지
식이 더할 수 없이 풍성해졌으며 그 깊이도 더해졌다. 처음에는 괴팍하고 잔인하기
만 했던 그의 성격이 점차로 필요에 의해 조절하는 모습을 보이는 가 했더니, 천마
와 혜능의 분리를 통해 원래의 성품이 조금씩 개입을 하기 시작했다.
‘무림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강함과 교할함인 줄 알았는데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었
다. 오히려 작은 술수는 큰 힘을 내지 못하고 간교는 큰 생각을 이기지 못한다. 어
쨌든 내게 지금 가장 시급한 것은 스스로를 완성시켜 가는 것이다. 완전해지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내가 지닌 것을 최대한 완성시킬 수는 있을 것이다. 스스로 강하
지 못하면 아무도 나를 지켜주지 못하고 그 결과는 때로 불시에 좌절을 안기고, 일
어서서 굳건하지 못하면 나를 따르는 자들을 지켜주지 못한다.’
파천에게 이번 일은 너무나 많은 것을 남겨 주었다. 무림에 대해 만만하게 생각하
던 오만함을 일시에 무너뜨려 버렸고 아무리 분명한 일도 재삼 재사 확인하고 또한
적의 간교에 놀아나지 않을 정도의 조밀한 체제를 구축하고 있어야 함을 일깨운
것이다.
파천의 눈이 공간을 차단하며 서서히 감겨졌다. 몸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생각을 하
나로 했다. 스스로 몸을 살피고 마음을 견정(堅正)케 했다. 그러고 나서야 내공을
살핀다. 여태껏 자신의 몸 안에서 일어나는 일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음에야
더 크고 진실 된 것을 보는 힘이 생기겠는가? 지금까지 그의 무공의 경지를 이끌어
온 것이 견문각지(見聞覺知)의 형태였다면 이제는 견성성각(見性成覺)의 마음으로
본성을 살피는 것에 힘을 써야 함을 느낀 것이다. 내부를 천착(穿鑿)하지 않고는
제대로 된 무학의 경지를 이룰 수는 없는 것이다. 관절의 형태를 알지 않고서는 몸
의 움직임을 이해하기 힘들고 경맥의 흐름을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내공을 논할 수
없다. 무학의 본질을 알아 가는 것도 중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내 몸과 정신을
바로 알아 충분한 터전을 마련하는 일은 더욱 중요한 일일 것이다.
상념은 불 일 듯 일어나다가 죽은 듯 고요해지고 다시 만방으로 퍼져 나갈 듯 또
다른 상념들을 불러일으킨다. 꼬이고 뒤섞이어 혼잡해지고 겹겹이 쌓여 정심을 뭉
개어 버린다. 그런가 하면 더 깊이 그 가운데로 이르지 못하게 포위하고 위협하며
때로는 미혹을 일으키고 흔들어 놓는다. 점차로 생각은 꼬리를 이어 잡념으로 분산
되니 그 안에서 순간을 빌어 제 모습을 보이는 것은 하나같이 지난날의 아픔, 고뇌
, 외로움, 절망과 같은 부정적인 생각들뿐이었다. 그것에 집착하니 더욱 강한 힘으
로 이끌어 들이고 분노와 살심을 일으켜 이제 정념은 게으르게 쳐져 버리고 만다.
이런 식이라면 백날 해 보아도 소용이 없다.
파천은 내심을 추스르며 다시 한번 다잡아 일으킨다. 그리고 조용한 가운데 여든
한자의 천부경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참으로 신기한 것이 그렇게 날뛰던 잡념들이
어느 순간엔가 제 위치로 소멸되어 가고 점차로 적정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소리조
차 이르지 못하고 느낌조차 그와는 상관이 없어지고 오로지 무한의 념(念)의 세계
만이 그 큰공간을 잔뜩 벌리고 그를 맞아들인다. 그는 어느새 그 가운데 좌정하고
그제야 내공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단전의 내공은 회복되어 있었으므로 동시간에
기운은 사지백해에 충만하고 경맥과 혈도를 힘차게 흘러 다닌다. 특별한 의식의 집
중 없이도 그 힘은 제 갈 길을 알아서 휘돌아 가리라.
‘단전의 내공이 소멸되고도 경맥에서 발원된 힘이 일어났었다. 그 정체는 뭘까?’
파천은 이것의 원인을 알아내는 일이야말로 그 동안, 그의 경지를 막아서고 있던
핵심적인 문제의 해결책이라 여겼다. 초마의 정경에서 진경으로 들어서지 못하는
이유가 그 상관관계를 알지 못하는데서 기인하는 듯했다.
‘단전의 내공이란 우주의 기를 몸에 받아 들여 유형화 시켜 놓은 것이다. 그것은
우물물을 퍼다가 독에 부어 놓은 것처럼 언제든 사용하기 위함과 같다. 문제는 경
맥에서 저절로 일어나는 힘이다. 무상지독에도 소멸되지 않은 내공. 엄밀히 말해
그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주의 기를 일시에 차용한 것인가?’
점점 생각은 그 골을 깊이 하고 끝간데 모르고 깊어지고 넓어지더니 어느 순간 빛
처럼 그의 상념을 뒤흔들어 버린다. 마치 막혔던 둑이 일시지간에 터져 나가는 듯
한 희열감이 밀려 왔다.
‘그래 바로 그것이다. 학문을 익히는 자가 책을 보고 사물을 연구하며 듣고 알아가
는 것은 단전에 쌓아 놓은 내공과 동일한 이치이다. 그 자가 보지 못하고 듣지 못
하고 깨닫지 못한 진리까지, 즉 모든 가능성을 포함한 학문의 대상들은 마치 무한
한 우주의 기와 일맥상통한다.
경맥에 흐르는 내공이라 함은 학자가 학문이 깊어지고 지식이 늘어갈수록 그와 연
관되어 늘어나는 학문에 대한 익숙함, 경험, 처세, 이해력 등과 같은 경우이며 내
공을 받아들이고 그 양과 질을 조정하는 익숙함. 그것이 바로 경맥에서 스스로 반
응하여 힘을 일으키고 우주의 기와 교통하는 근저를 확대시켜 준다. 몸 안에 쌓아
놓을 수 있는 내공의 양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경맥을 통해 일으킬 수 있는 힘
의 양에는 한계가 없다. 스스로의 힘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기를 사용하
기 때문이다.
결국은 더 나은 경지로 나가기 위해서는 내공을 쌓아나가는 것뿐만이 아니라 경맥
을 흐르는 기의 힘과 경맥 자체를 더욱 정밀하고 강하고 익숙하게 하는 것이 중요
하다. 마치 평생을 학문에 정진한 식자(識者)가 순간의 깨달음을 통한 각자(覺者)
의 지혜에서 오는 일언(一言)을 감당하지 못함과 같다. 이 이치야말로 무한의 경지
로 들어서게 하는 첫 씨앗이다.
아이는 아이의 몸을 지니고 그 연륜만큼의 생각과 행동을 한다. 어른이 되어서도
아이처럼 행동하면 그 자체가 성숙되지 못한 것과 같이 깨달음의 깊이로 들어선 자
가 여전히 단전에 주(住)하는 내공에 집착함은 이와 마찬가지일 것. 벗어야 한다.
새로움을 보기 위해서 낡은 몸을 스스로 깨는 고통을 감내하지 못하면 더 이상의
정진은 없다. 인간의 몸이 소우주이니 이곳에서 생멸(生滅)이 일어나고 천지기운이
서로 화합한다. 마음을 얻어 몸을 세우고 몸을 비워 기에 나가며 그 기로서 만상(
萬象)을 보아야 한다.’
파천은 더욱 깊이 잠겨 들어갔다. 그는 느끼지 못하고 있었으나 그의 몸에서는 점
차로 칠채서기(七彩瑞氣)가 일어나 그의 모공을 통해 왕래하고 그의 몸은 저절로
허공 중에 떠다니고 있었다. 얼굴은 더 할 수 없이 고요하고 평안해 보였다.
그가 방안에 틀어박혀 이 깨달음의 순간을 음미하고 있을 때에 몇 명이 그의 처소
를 방문했다가는 그냥 돌아가고는 했으며 언젠가부터 천마가 그 방안에서 꼼짝하지
않고 지켜 서 있었다. 파천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더 할 수 없는 흐뭇함으로 가
득 차 있었다.
‘역시 너는 대단한 녀석이구나. 평생을 통하여 겨우 들어선 이치를 몇 번의 깨달음
으로 이르다니…… 괜히 심술이 돋는데? 그래. 파천 너야말로 무학의 끝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인지도…… 너를 세상에 보낸 신의 뜻을 너는 잊지 말아야 한
다. 언제일지 모르나…… 네 어깨에 짊어져야 할 것은 더욱 크고 무거운 것이니.
….. 지금쯤 혜능은 네가 마지막으로 품어야 할 씨앗을 만들고 있겠군.’
무슨 의미일까?
천마는 꼬박 3일을 파천의 곁을 지키고 서 있었다. 하나는 그를 보호하기 위함이었
고 또 하나는 도저히 그곳을 떠나지 못하게 하는 감동이 그의 발목을 붙잡았기 때
문이다.
늦었습니다.
아무래도 파천을 좀더 강하게 만들어야 할 것 같아서……
그래서 오늘은 이것 한편입니다.
앞으로는 세력싸움 틈틈이 파천의 무공증진에 대한 내용들이 첨가됩니다.
그리고 이제 좀 사람다운 놈으로 바뀌어 가지만, 자신을 지키고 자기 것을
보호하는 데는 여전히 잔인한 놈입니다. 그리고 사랑! 이것이 빠지면…… 거품
없는 맥주겠지요?(거품 없는 맥주가 더 좋다고요?) 이제 시작입니다. 그렇다고 난
잡한 색은 될 수 있으면 지양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즐거운 하루 되시기를……
제 목 : [연재] 황제의 검 80.비무
- 황제(皇帝)의 검(劍) - [80]
[ 비 무(比武) ]
천마는 한쪽에 서서 파천의 몸에서 일어나는 심상치 않은 변화를 눈 여겨 보았다.
언젠가부터 시시각각으로 돌변하는 모양새를 나타냄에 따라 천마의 안색도 그에
맞춰 점점 호응을 빨리 하였다. 파천의 몸은 여전히 공중에 떠다니고 있었고 모공
에서 뻗어 나오던 칠채서기는 점차로 그 농도가 짙어져 나중에는 그 모습마저도 완
전히 삼켜버리고 만다. 삼일이라는 시간이 사람의 전 일생에 비추어보면 너무나 짧
은 순간이기는 했으나 파천의 삶에서 이 삼일이 갖는 의미가 어느 정도의 중요한
비중을 지닌 것인가를 잘 알고 있는 천마였기에 그 초조함과 기대는 남다른 것이었
다.
누구나 무공의 진전에 따라 몇 번의 변화를 갖기는 하지만 지금 눈앞에 보이는 파
천의 변화는 일반적인 무공의 상식에 어긋나는 것이기도 했다. 삼일간이나 무념의
상태로 공중부양을 하는 것도 그랬고 모공을 통해 칠채서기를 뿜어내는 것도 그랬
다. 이 모든 것이 초마의 정경에서 진경으로 들어서는 현상임을 모르는 일반 무림
인들이 보았다면 기이한 괴사쯤으로 여길만한 일이었다.
‘진경에 들어간다 함이야말로 인간이 이를 수 있는 무학의 끝에 이름과 동일하다.
공경은 자연검의 경지, 나 또한 그 초입에서 머물다 말았다. 만가지 상념에서 한줄
기 빛을 부여잡는 것만큼이나 어렵고도 힘든 일이지. 때로는 인간의 의지만으로도
이룰 수 없는 일은 있기 마련이고 무학에서도 마찬가지다. 하늘은 사람을 낼 때 그
사람이 쓰일 수 있는 그릇을 정해 놓았거나 아니면 그 그릇을 스스로 만들 능력을
부여했는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이에는 하늘의 도우심이 있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무림역사상 초마의 진경에 든 자가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너의 검에 대한 이해만
은 이미 나를 앞질렀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런 너이기에 만인의 기대를 한 몸에 받
아도 스스로 무겁다 여기면 안 되는 것이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파천의 몸에서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
다.
“오오!”
천마의 입에서는 부지불식간에 절로 감탄사가 새어 나오고 그의 눈은 놀람으로 한
껏 커져 간다.
모공을 들락거리던 칠채서기는 모조리 파천의 몸으로 스며들어가고 순식간에 빛이
강해지며 파천의 몸을 가리고 있던 옷이 재가 되어 바스러졌다. 그리고 땀이라도
흘리는 것처럼 모공에서 새어나오는 것이 있었으니 금빛으로 번들거리는 끈적끈적
한 액체였다. 순식간에 파천의 몸은 금색으로 칠한 듯 빛을 발했고 심지어 머리털
까지 밝게 빛났다.
“저, 저것은 설마? 전설의 금강신(金剛身)?…… 어찌 금강신이 지금에 나타난단
말인가? 그럼, 파천이 바로 그분? 말도 안 된다. 아직 그분은 세상에 나타날 때가
아니라 하지 않았는가? 이것이 어떻게 된 것이지?”
놀람이 커서일까? 입까지 벌리고 입가로 고인 침이 턱 아래로 흘러내릴 지경인데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음에야.
한시진 정도가 일각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파천의 몸은 더 이상 빛날 수 없는 화려
한 금빛으로 번쩍이고 있었으며 그런 상태로 서서히 바닥을 향해 내려온다. 천마는
조심스럽게 파천에게로 다가갔다. 완전히 바닥에 내려온 파천의 몸에서는 더 이상
의 변화는 없어 보였다. 천마는 그런 그를 위에서 내려다보았다. 파르르 떨리는 파
천의 눈꺼풀이 새로운 순간을 예고하는 듯 했고 시간을 단절하고 있던 현실의 벽을
다시금 의식 속으로 연결시켜주기 위함인 듯 했다. 파천의 눈이 어렵게 떠지고 몸
전체를 짙게 장악하고 있던 황금빛 물결은 한 겹 피부 속으로 도사리기라도 한 듯
이 은은하게 빛날 뿐이었다. 그러나 머리색깔만은 여전히 짙은 금발의 상태였다.
자신을 내려다보던 천마와 눈이 마주친 파천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내가 얼마동안이나 이러고 있었지?”
멍청한 모습으로 파천을 내려다보고 있던 천마는 그 말에야 정신을 가다듬고 겨우
대답을 한다.
“삼일하고도 세 시진이 지났다.”
“삼일? 그래? 잠깐 자고 일어난 것 같은데…… 그렇게 많은 시간이 흘렀단 말인
가?”
몸을 툭툭 털어 내며 상체를 일으키던 파천은 자신의 몸이 달라진 것을 보고는 의
아하여 천마를 쳐다본다.
“대체 내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거냐?”
옷은 사라져 벌거벗었고 피부는 은은한 금색으로 빛났다. 파천이 놀라는 것도 어쩌
면 당연한 일이었다. 천마 또한 그런 파천의 반응에 아는 것이 없기는 매 한가지인
지라 입 주위를 불뚱거리며 얼버무린다.
“네가 모르는데 나라고 아는 것이 있겠느냐?”
파천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몸을 벌떡 일으킨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벽
장에 가서 흑삼 한 벌을 꺼내 입었다. 옷을 입으며 파천이 다시 말을 꺼냈다.
“삼일이나 지났다고? 어이가 없군. 그리고 이 꼴은 또 뭐야?”
벽장한쪽에 설치된 동경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보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 천마의 얼굴이 푸르고 머리털이 빨갛다고 나무랄 것이 없었다. 자신의 모습을 보
라. 금발에 금색 피부에 눈동자까지 금색으로 빛나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사람의
모습이라 할 수 있으리요?
천마가 파천에게 넌지시 운을 떼어본다.
“너 혹시 그 동안 어디 갔다 온 것 아니냐? 누구를 만나고 왔다던가?”
“그것은 또 무슨 소리냐? 내가 이 방에서 나간 적이 없거늘 누굴 만나고 와?”
태연한 그 모습에는 한 점 거짓도 엿보이지 않는다. 천마는 점점 더 혼미 속을 걷
는 듯 어질어질했다.
“잠깐 명상에 잠겨 있었을 뿐이고 그 다음에는 잠시 졸았던 것 같고…… 그리고
꿈을 꾸기는 했지.”
“꿈? 자세히 말해 봐라.”
천마의 지나친 반응에 파천이 뒤를 돌아본다.
“너, 왜 그래? 뭔가 아는 것이라도 있어? 냄새가 나는데?”
“내가 알기는 뭘 안다고 그러냐? 그냥 꿈을 꾸었다니…… 궁금해서 그러지.”
천마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가며 파천의 추궁하는 듯한 눈길을 피한다. 옷을 모두
걸친 파천은 한쪽에 놓여 있는 천마검을 집었다.
“천마!”
“왜?”
“우리 비무나 한번 해 볼까?”
“뭐?”
천마는 파천이 설마 그런 말을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지라 다소 과장된 몸짓
을 취했다.
“싫어?”
“싫다기보다는…… 까짓 거 좋다. 그런데 어디서 하지?”
“어디는…… 존마전에서 하면 되지.”
그 말을 끝으로 할말 다 했다는 듯,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는 파천.
그런 그를 보며 천마의 표정이 기이해진다.
‘자식, 네가 아무리 강해졌기로서니 나를 이기겠냐? 나는 이미 예전의 구성(九成)
을 회복하고 있단다.’
어깨를 곧추세워 쭉 뻗으며 파천의 뒤를 따르는 천마의 걸음걸이에는 자신감이 가
득 넘치고 있었다.
★
존마전으로 통하는 모든 입구가 봉쇄되었다. 마도련의 새로운 지배자로 등극한 마
도대공의 명에 따라 천인대원들이 존마전 밖을 폐쇄한 것이다.
존마전의 대전에 마주 선 파천과 천마는 서로를 쳐다보았다. 파천이 손에 든 천마
검을 천마에게로 휙 던졌다. 얼떨결에 검을 받아 쥔 천마는 무슨 의미인지를 몰라
파천을 쳐다보고, 그런 그를 향해 파천이 입을 열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검이 필요 없다. 그러니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 뿐이다.”
그 말에 천마는 심각해진 얼굴로 검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파천에게로 검을 던진다.
“나 역시 검이 필요 없다. 그리고 이 검은 이제 너의 것이다. 나와의 인연은 1700
년 전에 다했다. 그것을 다시 나에게 돌려줌은 그 검과 나에 대한 모독이다. 그러
니 받을 수 없다.”
“그래? 그럼 할 수 없군.”
파천은 검을 한쪽 구석에 세워 두었다. 둘은 이내 5장거리를 격하고 마주섰다. 서
로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지만 어떻게 보면 너무나 모르는 두 사람일지도 모른다.
천마가 아는 무공은 파천도 알고, 파천이 아는 무공 중 가장 강한 것은 천마의 것
이다. 그러나 이미 두 사람 모두 초식이나 독문기공(獨聞氣功)에 의지하는 수준을
넘어서 있었고 그 이후의 서로의 경지나 기예가 어느 정도인지는 짐작만 할 뿐 정
확하게 알지 못했다. 무림사에서 가장 강하다고 인정받는 천마와, 이 시대 최강자
라 해도 부족하지 않은 파천의 대결! 이것은 고금에 다시없을 명승부가 될 것이 틀
림없었다. 천마는 이미 어느 정도 자신의 옛 실력을 되찾아가고 있었고 파천은 초
마의 진경에 들어섰다.
“천마! 최선을 다해야 할거다. 나는 이미 새로운 경지로 들어섰고 그것마저도 극복
한 듯 여겨진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천마 너라도 쉽게 나를 상대할 수는 없을 거다
.”
‘아니 저 녀석이?’
천마는 은근히 자존심이 상해 왔다. 그래도 명색이 영세제일존(永世第一尊)이자 고
금제일인(古今第一人)이라는 자긍심 하나로 살아가는 자신이건만 나중에야 모르지
만 아직은 파천도 자신의 상대는 아니라 여기고 있었기에 파천의 그 말은 그의 자
존심을 건들고도 남음이 있었다.
“너, 내가 공경의 초입까지 간 것을 알고 있지? 난 이미 자연검의 요체를 깨달았다
. 이제 겨우 무형검의 끝을 본 너와는 다르다는 말이지. 괜히 나를 격동시켜 창피
나 당하지 말아라.”
역시 천마는 무공에 대한 자부심만은 설사 그 상대가 파천일지라도 한발도 물러설
위인은 아니었다.
“후후 시작해라. 자연검이니 우주검이니 하는 것도 모두 너의 개념이지 세상사람들
은 모르는 것이다. 그렇지 않나? 검의 극의(極意)에 이르기 전에는 그곳으로 이르
는 길은 수 없이 많은 법. 너의 검이 최고라고 여기다가는 오늘 나한테 분명히 패
한다.”
더 이상의 말은 둘 사이에 필요가 없었다. 둘은 곧장 상대의 기운을 살피기 시작했
다. 둘은 무턱대고 공격을 할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생사를 건 싸움이 아니기에
서로의 기예를 겨루는 선에서 마무리되어야 할 비무, 그러니 상대가 패배를 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짜내기에 여념들이 없었던 것이다. 천마에 의해 파천을 둘러싼 공
간은 수 만개의 선으로 분할 된지 이미 오래였다. 파천이 움직임을 보이는 순간 천
마의 무형검은 빛을 발할 것이다. 그것은 파천도 마찬가지였다.
“후후후후”
파천은 낮은 웃음을 흘리며 앞으로 걸어갔다. 파천의 최초의 한발이 떼어지며 몸이
물결치며 움직이는 바로 그 순간, 천마의 손에서는 눈을 멀게 할 검강이 열 줄기
나 폭사되었다. 무형검이었다. 그것도 극의에 달한 무형검! 파천이 움직일 수 있는
모든 방위를 차단하고 순간을 만분(萬分)할 속도로 검의 폭주는 이루어졌고 그 어
디로도 피할 수는 없어 보였다. 파천의 몸은 순간 좌우로 쫙 벌어지며 분신(分身)
들이 수 십 개로 늘어나고 천마의 검이 파천을 뚫어가자 그 공격권에 있던 분신들
이 차례로 소멸했다.
“응?”
천마의 놀람의 탄성을 묻어버리며 파천의 기이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좌우에 각각
하나씩만 남은 파천이 천마를 가운데로 두고 양손을 활짝 펼쳤다.
“우르르르릉”
금빛으로 온몸을 장식한 금룡(金龍)들이 둘의 손에서 십 여 마리씩이나 한꺼번에
튀어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것들의 움직임은 직선이 아닌 제각각이었다. 입을 벌리
고 곧장 천마를 물어뜯으려고 덤비는 놈이 있는가 하면 바닥을 낮게 날아오는 놈이
있고 공격은 관심이 없는 듯이 배후로 돌아가는 놈도 있었다. 마치 모두 살아 있
는 진짜 용들 같았다. 모두 스무마리의 용이 존마전 안을 가득 채운 모습은 실로
대단한 위용이었다.
“대단하다. 파천”
천마는 천마군림보를 밟으며 12지신으로 몸을 늘이더니 한 줄로 늘어서서는
“바람이 일어나 공간을 삼킬지라.”
콰아아아아
고오오오오
기이한 소리들이 존마전을 울리고 사방에서 몰려든 바람이 몰아치며 용들사이를 누
볐다.
콰광
콰앙
콰콰쾅
실로 대단한 격돌음 이었다. 얼마나 충격의 여파가 컸던지 이 큰 존마전 전체가 무
너질 듯이 진동을 보였다. 바람은 그저 바람이 아니라 검강을 함유한 바람이었다.
용도 그냥 허상이 아니라 무형검의 다른 형태였다. 그 둘이 부딪히고 있었으니 존
마전이 이 정도로 흔들리는 것은 당연했다. 지금의 공격도 그들이 전력을 기울이는
것은 아닌 듯 했다. 둘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서로에 대한 감탄과 이 비무 자체
에 대한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하 천마 설마 이것이 네 밑천의 전부는 아니겠지?”
“물론이다. 파천 너도 어서 비장의 무기를 꺼내놓지 않으면 써볼 기회도 없이 패하
고 말 것이다.”
콰광
연신 충돌하고 있었지만 두 힘은 한치의 양보도 없이 맞물려서 부딪히고만 있었다.
‘파천녀석! 이 기회에 한번 꺾어보지 않으면 나중에는 영영 이길 수 없을지도 모르
겠다. 이번에 확실하게 꺾어버리고 이후에는 핑계를 대며 거절하면 되니깐….킥킥
나는 영원한 승자고 여전히 영세제일존이고 고금제일고수가 되는 것이다.’
천마가 내심으로 염두를 굴리며 계산을 끝내더니 드디어 비장의 수를 공개하기 시
작했다.
“파천 조심해라. 한번도 써 보지 않았던 비장의 수법이다. 이름하여 파멸(破滅)의
검(劍)이다.”
천마의 몸이 순간 대전의 천장까지 치솟더니 가부좌를 틀고 허공 중에 멈춘다. 그
상태로 하나밖에 없는 손을 가슴 쪽으로 깊이 끌어들였다가 순간 아래 방향으로 장
심을 활짝 폈다.
“우우우우우우웅”
이미 장내에는 용도 바람도 사라졌다. 오로지 허공에 떠서 가부좌를 틀고 있는 천
마와 아래쪽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파천이 있을 뿐이었다. 천마의 손이 펼쳐져
있었지만 장내에는 기이한 소리만이 울릴 뿐 어떤 변화도 없었다.
“야, 이 바보 같은 놈아! 잘못하면 죽는다. 빨리 수비를 하던, 졌다고 하던지 빨리
결정해라.”
천마의 다급한 소리와는 달리 장내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파천은 전면을 살피
다 놀라 한 걸음 물러섰다.
“이, 이런 일이?”
무엇인가가 꿈틀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공간이었다. 공간이 스스
로 움직이며 파천에게로 다가오는 것이다. 파천은 뒤로 몸을 빼내며 일검을 쳐내었
다. 파천이 쏘아낸 무형검은 흔적도 없이 공간에 저절로 갇혀서 소멸되고 만다. 마
치 공간을 접어가며 점점 거리를 좁혀오는 듯했다. 그 속도가 그리 빠르다 할 수는
없었지만 워낙에 거대한 공격범위를 지녔는지라 도저히 피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
어 보였다. 천마가 힘을 빼내지 않는 한은 저 괴물 같은 이상한 놈은 공간을 집어
삼키며 전진할 것이다.
“좋다. 그럼 나도 비장의 수를 보여주지.”
파천은 더 이상 물러서지 않고 한 손을 천장으로 향해 빳빳이 세웠다. 그는 천천히
손을 아래로 내리 그었다.
대체 무슨 짓이란 말인가? 12개의 무형검을 모두 발출하여 검폭을 해도 시원찮은
판에 손을 아래로 내리긋는 동작이라니? 천마도 고개를 갸웃하다가 놀라 가부좌를
풀어 버리고 만다.
“이, 이런?”
대체 무엇을 보았기에 그가 이렇게도 놀란단 말인가? 파천은 분명히 손을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내렸을 뿐이다. 그것도 단 한번!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다. 파천의
손은 계속해서 내려쳐지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여전히 그의 손은 천장을 가리키고
있을 뿐 한치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음에야. 그의 모습은 점점 더 크게 보였고 그
의 손은 더욱 더 커졌으며 내려치는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지고 나중에는 빠른 것인
지 느린 것인지 정지되어 있는 것인지도 분간이 되지 않았다.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손 하나 밑으로 긋는다고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만은 현실
은 그렇지가 않았다. 마치 거대한 도인지 검인지도 명확하지 않은 집채만한, 아니
존마전을 가득 채울? 그것보다 더욱 거대한, 그래서 볼 때마다 부피가 더 커지는
검이 천천히 공간을 양단해 온 것이다. 그리고 천마가 떨쳐낸 파멸의 검을 간단하
게 두 쪽으로 잘라내고 있지 않은가? 처음에는 파천의 검도 그 공간에 갇히는 듯
했다. 그러자 더 큰 검이 그 공간을 다시 쳐오고 그것마저 갇히자 더 큰 검이…..
. 결국 공간은 두 쪽으로 갈라졌고 천마는 그 충격으로 뒤로 주루룩 밀려난다.
아무런 소리도 없었다. 이 모든 것이 천마에게는 환상처럼 여겨졌다. 그 짧은 순간
에 일어 난 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아니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진 것인가? 파멸의 검은 물론 불완전하긴 하나 자연검의 요체를 담고 있거늘
? 어찌 이리 맥없이 무너진단 말인가? 조금 전 그것은 뭐였지?’
천마는 도저히 당면한 현실을 믿을 수 없었다.
파천이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천마! 결국은 비겼구나.”
이것은 또 무슨 소리인가?
“치워라. 승부는 진실 된 것이다. 어줍잖은 동정심이라면 사양하마.”
“너 동정심이라고 했냐? 나한테 그런 것이 있을 리가 없잖아? 나는 있는 사실을 그
대로 말했을 뿐이다. 너는 아직 예전의 너에 비하면 불완전하고 파멸의 검도 그래
서 완전하게 펼칠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가 않다. 그러니 내가 약간의 우
위를 점했다고 내가 이겼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 그리고 너의 몸 역시 팔이 하나
없다. 그러니 이 승부는 무승부다. 그러나 너무 좋아하지 마라. 언젠가는 너를 꼭
꺾어 보이마. 약속하지.”
그리고는 빙긋 미소짓는다. 파천 특유의 화려한 미소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현기
증이 나게 할 정도였다. 그 모습에 천마 또한 피식 웃고는,
“좋다. 나도 너와의 승부를 이 정도로 시시하게 끝내고 싶지는 않았다. 다음 번에
는 코를 납작하게 눌러주마. 아마 밤마다 악몽을 꾸게 될 거다.”
이런 그의 말과는 달리 그의 내심은 다른 것이었으니,
‘내가 골이 비었냐? 너하고 다시 비무를 하게? 어이구 이게 무슨 개망신이냐? 저
괴물 같은 놈! 어느새 이 정도로 강해졌단 말이지? 그래 끝없이 성장해라. 킥킥 비
무야 이렇게 어물쩍 넘어갔다가 나중에야 핑계를 대고 내 쪽에서 피하면 그만이지.
‘
참으로 천마다운 생각이었다. 그러나 사실 엄밀히 말해 파천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 게다가 천마는 살심이 동해야 제 실력이 나오는 인간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지
금의 패배가 천마의 전부의 실력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적어도 그에게는 아직 공
개하지 않은 비술이 수 십 가지는 더 있었으니 말이다.
★
방으로 다시 돌아온 파천은 천마와 마주 앉았다. 이미 한차례 그를 보기 위해 수하
들이 다녀간 뒤였다. 그의 달라진 모습에 모두 놀라며 어찌 된 영문인지를 물었지
만 파천도 모르니 대답할 말이 없었다. 결국 머리만 싸매다 모두 쫓아 버렸던 것이
다.
“파천! 아까 네가 꾼 꿈에 대해서 얘기 해 봐라.”
“꿈? 몰라.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단지”
“단지?”
“누군가를 만난 것은 확실하고 그 사람과 대화를 나눈 것 같아. 주로 그 사람은 내
게 말하고 나는 듣기만 하고, 그러더니 무슨 말인가를 하며 내 머리를 만졌는데 불
로 지지는 듯이 뜨거워졌지. 그리고는 옷 한 벌을 내게 툭 던져 주더군.”
“그리고?”
천마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금빛으로 빛나는 그 옷을 입었다. 그게 다야.”
“기억나는 말은 하나도 없니?”
“기억나는 것? 으음…… 아 하나 있다.”
“뭔데?”
“시간이 차면 모든 것을 얻게 될 것이다. 이 한마디가 전부다.”
천마는 그 말을 다시 되뇌어 보았다.
“그리고는 없냐?”
“옷을 주며 이것은 선물이다라고 한 것, 그러고는 없어. 정말이야. 무지하게 많은
말을 들었던 것 같은데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
“그래? 그럼 할 수 없지.”
“그런데 왜 그렇게 내가 꾼 꿈에 관심이 많아?”
“관심은? 네가 언제 꿈 얘기를 한 적이 있었냐? 그러던 네가 갑자기 꿈을 꾸었다고
하니 궁금해서…… 그래서 그랬지.”
얼버무리는 천마를 의미심장한 눈길로 쳐다보는 파천과 그런 그의 눈길을 피하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천마!
“파천, 무림맹으로 가야지. 여기서 더 있을 이유가 없잖아? 이제부터야말로 머리
터지게 싸워야 할 것 아니냐?”
파천은 결국 천마가 무엇인가를 숨기고 있다는 심증만을 지닌 채 자리에서 일어선
다.
“가야지. 중원을 먹느냐? 먹히느냐의 대장정이 바야흐로 이제 시작이다. 최상의 전
력과 최고의 호기를 버려 둘 수는 없지. 가자.”
너무 오랜만이죠? 이미 공지를 드렸듯이 앞으로는 일주일에 네 번 정도
여러분과 만날 것 같습니다.
대신 좀 더 치밀하게 구성을 짤 것이니 앞으로는 재미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개인 홈피에 싣겠다고 메일 주시는 분들!
더 이상은 홈피에 퍼가지 마십시오. 개인적으로 연락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모두 즐거운 하루 되세요.
제 목 : [공지] ‘황제의 검’ 출판과 관련하여……
먼저 지난 두달간의 여러분들의 관심과 격려에 감사함을 드립니다.
작년 12월 17일에 연재를 시작하여 이제 어느덧 두달이라는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2월초부터 출판제의가 들어 왔지만 일부 완결 후에 출판을 하려 했으나 결국에는
출판을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중앙일보 법인 출판사인 중앙 M&B(www.jbookmarket.co.kr)에서 ‘황제의 검’을 출간
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2월8일 이후로 연재가 중단된것도 1,2권분의 수정작업 때문
이었습니다. 거의 다시 쓴다는 각오로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특히 앞부분에는 새로
이 첨가되는 내용이 전체의 20%에 육박할 정도로 많은 부분 수정, 첨가하였습니다.
(파천의 무공수련 부분 등.) 출판본은 한번 나가면 다시는 손을 볼 수 없기에 후회
가 없도록 최선을 다 하였습니다.
몇가지 사항을 알려 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내일 자정(27일 0시)을 기해서 40회 분량까지 통신(하이텔,나우,천리안)이나
인터넷(다크,백군,정안,채리,무림동,pureatom)모두 한꺼번에 삭제 하겠습니다.
앞으로 연재는 당분간 불규칙적으로 올라갑니다. 다음주가 지나면 아마도 예전의
연재속도를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앞으로 황제의 검은 총, 최소 14권에서 16권까지(일부는 7권) 진행될 예정입니다.
출판 이후에도 통신 연재는 계속 됩니다.
이후 인터넷 홈피(현재 올리고 있는 곳은 제외)에 더 이상 글을 드릴 수 없을것 같
습니다.
이외에 궁금하신 점이 있으시면 제 메일로 연락 주십시오.
그 동안 제게 메일을 주시고 추천해 주신 님들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님들의 기
대에 어긋나지 않는 책으로 다가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임 무성 드림(제 본명입니다. 이제야 밝히게 되어서 죄송합니다.)
- 사황성의 제자들!
파천의 얼굴이 심각하게 일그러졌다. 그 앞에는 천마와 광마존, 무영존이 불안한
기색을 보이며 마주 앉아 있고 오로지 율극만이 그런 장내의 분위기와는 아랑곳없
이 희희낙락할 뿐이었다.
천마가 파천의 눈치를 살피며 어렵게 입을 뗀다.
“파천, 어쩔 수 없을 것 같은데…… 이왕 이렇게 된 것 아예 모든 것을 밝히는
것이 어떻겠어?”
파천의 눈이 천마쪽을 향했다.
“아직은 시기상조다. 천마서생과 옥면신룡이 동일인물이라는 것이 알려지면 극심한
혼란이 야기된다. 그렇게 되면 앞으로의 계획에 차질이 생길 것은 명약관화한 일
이지.”
“지존. 그렇다고 달리 방도가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광마존의 그 말은 당면한 현실을 직시하는 적절한 표현이었다.
“천마 정말로 다른 방법은 없겠나?”
“있다면 한가지 밖에 없지.”
“응? 방법이 있어?”
파천이 천마의 말에 반가움을 나타냈다.
“머리를 모두 밀면 된다. 까까중이 되는 거지. 킥킥 볼만하겠다.”
“뭐야?”
파천의 어이없는 실소와는 달리 율극은 그 말에 호기심을 나타냈다.
“까까중? 히히 나도 까까중 할래.”
“천마, 이것은 나에게만 해당 사항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머리를 밀어야 한다
면 너 또한 그렇게 해야 한다. 물론 알고는 있겠지?”
“끙, 그런가?”
이들이 이렇게 고민하는 이유는 머리색 때문이었다. 파천은 금발이고 천마는 적발
이었다. 어떤 방법으로도 머리색만은 바꿀 수가 없었다. 파천의 두 가지의 신분 즉
, 천마서생과 옥면신룡이 동일한 금발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사람들의 이
목을 끌기에는 충분할 것이고 그의 정체가 드러나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머리
를 밀어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결코 쉽다 할 수 없는 문제였다.
“할 수 없지. 가발이라도 만들어 쓰고 다닐 수밖에.”
결국은 이렇게 결정나고야 만다. 광마존은 중요한 밀명을 받고 임무를 수행하기 시
작했다. 이름하여 가발 만들기! 그는 비밀리에 마도련 내에 있는 첩보조직의 수뇌
인 마안대장을 불렀고 그에게 가발을 주문했다. 살수행을 나가거나 첩보활동을 하
다보면 인피면구나 가발을 사용하는 것은 일반화된 것이었기에 구하기에 그다지 어
렵지는 않았다. 다만 까다로운 두 사람의 취향에 맞추기 위해 몇 번이나 광마존은
마안대를 들락거려야만 했다. 결코 웃을 수만은 없는 상황이었다.
존마전에 모인 마도련의 수뇌부들은 태사의에 좌정하고 있는 인물에게 시선을 주었
다. 중원 마도의 새로운 지배자로 등극한 마도대공 천마서생 파천의 모습은 범접치
못할 위엄으로 충만했다. 그의 시선은 신비감으로 가득했고 간혹 폐부를 찌를 듯
이 쏟아지는 패기는 그들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였다. 그들은 기다렸다. 새로운 마
도대종사의 입이 열리기만을……
“지금까지 모두 잘 참아 주었다. 이제야말로 중원마도의 저력을 보일 때가 왔다.
먹느냐 먹히느냐의 숨막히는 접전이 시작될 것이다. 한 순간이라도 방심한다면 돌
이킬 수 없는 사태로 치달을 것이다. 결코 후회가 없도록 혼신의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우리의 적은 정도무림맹 만이 아니다. 이미 모습을 드러낸 사황성을 비롯
한 세외삼세와 어쩌면 그들 보다 더 버거운 상대들인 신비의 세력들이 도처에서 야
욕을 드러낼 것이다. 그래서……”
잠시 하던 말을 중단한 파천의 시선이 장내를 다시 한번 쓸어보았다.
“본 마도련의 조직을 대대적으로 개편하겠다. 이는 앞으로 닥칠 혈전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이다. 지금의 조직 편성은 어딘가 허술한 점이 많다. 군사.”
제갈초홍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네, 주군.”
“조직 편성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너무나 급작스러운 질문이었지만 그녀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준비한 말이
라도 하는 것처럼 머뭇거림 없이 대답했다.
“기존의 비밀지단을 폐지하고 그 일부를 마안대에 편성하는 것이 여러모로 좋을 듯
합니다. 이미 드러난 마당에 더 이상 비밀지단을 유지할 이유는 없습니다. 일부의
인원만 첩보조직으로 기용하고 나머지는 본단에 재편성하는 것이 낫습니다. 그리
고 마안대와 천인대를 합병하여 강화시킬 필요성도 요구됩니다. 마도7문의 세력들
은 하나로 통합하여 기동성을 높이고 지휘체계도 확고히 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다가 새로이 영입되는 마도인들을 적재적소에 투입하여 문파 단위의 조직 편
성을 지양하여야 합니다.”
“흐음. 그리고?”
“세 조직으로 나누었으면 합니다. 첫째는 마안대와 천인대를 하나로 묶어 첩보와
특정 작전에 투입하고 마도 7문을 통합하여 전면전에 대비합니다. 물론 지금부터
전면전에 대비한 기동훈련을 병행해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기존의 내, 외당
을 비롯한 일부 세력들은 예비세력으로 편성하여 언제든 싸움이 벌어지면 정예 세
력의 증원군으로 준비 시켜야 합니다.”
“흐음. 좋다. 군사의 의견에 이견이 있는 사람 있는가?”
그 누구도 이견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것을 확인한 파천은 분명한 어조로 다시 한
번 확인을 했다.
“좋다. 그럼 이견이 없는 것으로 알고 지시를 내리겠다. 마도7문의 전 병력을 하나
로 합병한다. 광마를 수장으로 하고 그의 지시에 따르도록 한다. 그리고 마안대와
천인대의 책임자는…… 한당이다.”
한당은 의외의 명에 눈빛을 빛냈다. 설마 자신에게 이런 중책을 맡기리라고는 생각
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예비병력은 군사가 맡아서 운영하도록 한다. 그리고 조직편성에 따른 세부적인 사
항은 군사의 지시를 따르도록. 차후 조직 편성이 끝나는 대로 곧장 작전에 투입될
것이다. 제일 먼저 할 일은 무림맹의 상권을 와해시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중원
상계에 침투한 외부 세력과의 대접전이 있을 것이니, 마음의 준비를 해 두도록,
당분간 무림맹과의 전면전은 없다.”
“주군.”
제갈초홍이었다. 그녀는 의문을 담고 파천을 바라보았다.
“지금 무림맹은 사황성의 사천 침입 때문에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지금이
호기인 듯 하니 차라리 지금 그들의 세력을 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만…… 물
론 전면전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그들이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못하는 틈을 노려 강
북에 진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군사의 말도 일리는 있지만 아직은 때가 이르다. 우리가 무림맹과 충돌을 일으키
면 세외삼세나 혈마천 등이 좋아 할 것이다. 지금부터는 정, 마의 싸움이 아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적은 도처에 존재한다. 그들 모두를 한꺼번에 상대 할 전력이 되
지 않는 이상, 세력간의 틈바구니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해야 한다. 그들도 마찬가
지 생각일 테지. 끝까지 살아 남는 자가 모든 것을 차지한다. 무슨 말인지 알겠나?
아직은 어느 한쪽의 균형이 무너지면 안 된다는 말이다. 만약 우리가 무림맹을 친
다면 그 순간 외부 세력은 한꺼번에 중원으로 몰려 들것이다. 그때는 이미 모든 주
도권은 저들에게 넘어간 뒤겠지. 어떠한 경우에도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존명.”
파천에 대한 숨길 수 없는 감탄이 제갈초홍의 얼굴에 떠올랐다. 그것은 다른 사람
들도 마찬가지였다. 믿음을 주는 지도자를 만나기란 쉽지 않다. 그런 점에서 파천
이야말로 절대적인 신뢰를 이끌어낸 보기 드문 지도자였다. 그런 그들의 내심은 숨
김없이 표현되었다.
“오늘은 전 수하들에게 마음껏 먹고 마시게 하라. 내일부터는 숨막히는 긴장의 연
속일 테니 오늘만이라도 즐길 수 있도록 배려해라.”
“존명”
“존명”
“한당만 남고 모두 나가 보도록.”
이제 존마전에는 한당과 파천만이 자리해 있었다. 한당은 무슨 연유인지를 몰라 어
리둥절한 모습이었다.
“한당.”
“네, 주군.”
“너는 야심이 큰놈이다. 그렇지 않나?”
“……”
한당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나는 너의 그릇을 알고 있다. 결코 누군가의 수하로 남아 있을 녀석이 아니지. 아
직은 때가 아니기에 기다리고 있는 것뿐이다. 아, 그렇다고 너의 야망을 나무라기
위함이 아니다. 내가 너를 천인대와 마안대의 책임자로 세운 이유가 궁금하지 않은
가?”
“모르겠습니다.”
나지막한 대답이었다. 감정이 실리지 않아서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마도 넌, 네 실력을 감추고 있을 테지. 그리고 모르긴 해도 혈마천과 관련도 있
을 것이고…… 너의 사부인 마도대종사를 죽인 자와 계약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
지.”
한당의 몸이 부르르 떨려 왔다.
“그렇다고 긴장할 것은 없다. 한마디만 하지. 모든 것은 네 선택에 달렸다. 어느
쪽을 선택하던지 그것은 전적으로 네 자유다. 그러나…… 이것 한가지만은 명심
해 둬라. 나는 그렇게 자비롭지 못하다. 지금까지 어떤 생각을 지니고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앞으로의 네 행동에는 철저하게 책임을 물을 것이다. 되었
다. 가 봐라.”
파천은 그 말을 끝으로 태사의에 온 몸을 묻어 버렸고 눈 마저 감아 버렸다. 한당
은 고개를 들어 그런 그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은 잠깐이지만 심하게 흔들린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존마전을 벗어났다. 그가 사라지고 나자 파천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천마!”
스스스스
천마가 장내에 나타난다. 여전히 그의 머리는 눈을 자극하는 붉은 색이었다. 마치
피로 머리를 감은 듯 했다.
“왜 그러지?”
“저 녀석. 나는 마음에 드는데, 너는 어떠냐?”
“대단한 놈이지. 여기 있는 놈들 중에는 최 고수일거다. 제 실력을 감추고 무영에
게 패배를 당할 만큼 영악하기도 한 놈이고. 그렇다고 혈마천의 주구 노릇이나 할
놈은 아니다. 무슨 사정인가가 있을 거다. 시기만 잘 타고났다면 세상을 지배하고
도 남았을 놈이야.”
“그런가? 과연 저 녀석이 어떤 결정을 할지 궁금하군. 아깝지만 적으로 돌아선다면
버려야겠지.”
“후후 그러면서도 무척 아쉬운가 보구나.”
“저런 놈 하나를 길러내기가 쉬운 일은 아니니깐. 천마교에 갔다 놔도 열 손가락
안에는 들어갈 실력이 어디 쉽냐?”
“그래봐야 애들 장난이지. 나는 무척 궁금하다. 혈마천이나 사사혈교 천황부라는
애들의 실력이 어느 정도나 되는지…… 빨랑 빨랑 기어 나왔으면 좋겠다. 요즘
같아서는 좀이 쑤셔서 원……”
“하하하 조금만 기다려 봐라. 네가 그렇게 재촉하지 않아도 놈들은 나타나게 되어
있으니.”
★
무림맹은 최근에 일어난 일로 극심한 혼란 가운데 있었다. 사황성의 사천 서부지역
점령에 마도련의 강남지역 장악, 여기에다 정도사령대 대령사의 실종까지 겹쳐서
한 차례의 폭풍우가 휩쓸고 난 뒤, 망망한 대해를 기약 없이 표류하는 쪽배를 방불
케 했다. 무림맹주인 잠룡대제는 상징적인 존재에 불과했으며 이미 무림맹 고수들
의 마음속에는 옥면신룡이 지도자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그런 그가 아무런 소식도
없이 연락이 두절되었고 그와 함께 떠났던 정도사령대의 사령들은 속속 돌아오고
있었으니 그들의 불안감은 더욱 커져만 갔다.
정도사령대의 이번 중원 출행에서의 손실은 무림맹 전체의 분위기를 가라앉게 만들
었다. 연일 회의가 계속되고 대책을 논의했지만 결론은 사천의 오련회에 더 이상의
병력 증원은 불가능하다는 것뿐이었다. 만약에 있을지도 모르는 다른 세력들의 도
발이 염려되었기 때문이었다.
★
“이 녀석들, 그렇게 주의를 주었건만 너희들 마음대로 행동했단 말이냐? 하라는 조
사는 하지 않고 그 따위 짓을 해? 만약 혈강시들의 제조가 늦어 졌다면 너희는 죽
은목숨이었다.”
“사형. 그렇지만 저희들도 다 생각이 있어서…..”
“아니 이 녀석이 뭘 잘했다고 그래도 주둥이를 놀려?”
호통성에 소년은 움찔했다. 호화로운 대전에 몇 명의 인물들이 자리를 함께 하고
있었다. 이곳은 송번에 위치하는 사황성 중원침략의 전진기지였다. 세외삼세는 모
두 천년 이상의 전통을 지닌 문파들이다. 그들의 행사는 워낙에 은밀한 바가 있어
서 그들의 본단의 위치가 어디인지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그들이 무림에 한꺼번
에 등장한 적은 무림역사상 한번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의 등장은 중원무림을 긴
장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강맹한 세력을 자랑했다. 사황성은 청해무림의
성지였으며 정신적 지주였다. 그들의 무공은 기이하도록 강했으며 또한 패도적이었
다. 그런 그들이 중원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그것도 지금과 같이 극심한 혼란의
때에……
대전에 무릎을 꿇고 있는 두 명은 다름 아닌 오련회에 침입했다 부상당하고 도주한
소랑과 소소였다. 눈앞의 사람들은 그들의 사형이자 이번 중원침략의 대업을 맡은
수뇌들이었다. 평소 사형들을 극히 어려워하는 두 명인지라 고개만 조아리고 있을
뿐이었다. 소소는 특히 그 중에 한 명을 무척이나 두려워하는 눈치였다. 장내에는
그 둘을 제외하고 삼 인이 함께 하고 있었다. 한 명은 태사의에 거만한 자세로 앉
아 있는 자였는데 단정한 이목구비에 선명한 인상을 풍기는 자였다. 미간에 붉은
사마귀가 무척이나 특이하게 비치는 자였다. 그의 우측에 서 있는 자는 조금 전까
지 소랑과 소소를 나무라던 자였다. 키가 7척이나 되었으며 호목(虎目)이 유난히
빛을 발하는 자였다. 태사의 좌측에는 호리호리 하게 생긴 20대 중반의 사내가 가
슴에 한 자루 칼을 품고 있었다. 한가지 특이한 것은 검집이 없는 검을 그는 그대
로 품에 안고 있다는 점이었다. 세 명은 사황성주의 다섯 명의 제자들 중에 소랑과
소소를 제외한 나머지 제자들이었다.
“그래. 중원 무림을 조사해 본 결과는 무엇이냐?”
태사의에 앉은 자의 음성은 나직하면서도 부드러웠다. 그러나 소소는 알고 있었다.
저 음성의 주인공이 얼마나 잔인한 성품의 소유자인지를.
“저희들이 조사해 보고…… 몸으로 느낀 결론은…… 전면전은 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소랑은 간신히 그 말을 마쳤다. 한마디를 토해내는 것이 왜 이리 힘이 든단 말인가
?
“그런 결론에 이르게 된 이유는? 소소 네가 말해 보거라.”
소소는 자신의 이름이 거명되자 흠칫 놀라기까지 했다.
“대사형…… 그, 그것은 중원 무림이…… 우리 생각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
“더 강하다?”
소랑이 소소의 말을 거들었다.
“사실입니다. 오련회주라는 자, 한 명을 우리 둘이서 당해내지 못했습니다. 그 자
는 겨우 무림칠기 중의 말석에 올라 있는 자입니다. 그가 그 정도이니 무림오천이
라 불리는 자들은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강자들일 것입니다.”
“후후 그런 이유가 전부인가? 너희들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아니냐? 물론 중원에
강자들이 없을 수는 없겠지. 중요한 것은 그들 몇 사람이 대세에 영향을 미칠 만큼
강하다고는 믿을 수 없다. 어차피 전면전으로 가면 세력싸움이다. 우리 사황성은
약하지 않다. 아니 사상최대라 할 만 큼 강하지. 그리고 무림오천이라고 했나? 그
들만큼 강한 고수 또한 우리측에도 얼마든지 있다. 더군다나 혈강시까지 완성된 이
마당에 그들을 두려워 할 필요는 없다. 내가 너희들에게 중원을 조사하라고 시킨
이유는 자신감을 가지라는데 있었다. 너희들이 나를 실망시키다니…… 적어도 사
황성주의 제자라면 청해에서는 가장 존귀한 자들이다. 그런 너희들이 두려움에 떨
다니…… 가서 특별한 명이 있기 전까지 꼼짝 말고 대기하고 있어라. 아무래도
너희들은 좀더 강한 수련이 필요할 것 같구나.”
웃음 섞인 그 말에 소랑과 소소는 두려움에 떨었다. 한마디 변명도 하지 못하고 그
들은 실내에서 무언의 추방을 당하고야 만다.
태사의의 인물이 장내에 남아 있는 두 사제에게 명을 내린다.
“너희들은 혈강시들을 준비시켜라. 먼저 오련회를 친다. 중원 무림에 사황성의 위
대함을 보여주리라. 감히 중원 따위가 우리의 상대는 아니다. 가라.”
“네. 사형”
“알겠습니다.”
두 사람은 절도 있는 동작으로 인사를 하고는 실내를 물러 나왔다. 그런 그들을 바
라보는 태사의의 인물에게서 나직한 독백이 흘러 나왔다.
“소랑과 소소가 잘못 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를 막을 수는 없다.
중원은 이제 곧 알게 되리라. 사황성의 힘이 결코 중원의 아래가 아님을……후
후후후 이제 곧 중원은 우리 손에 떨어진다.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 하하하하하”
82.어둠속의 동맹
어둠이 스물 거리며 피어나는 곳에 그 어둠을 살라먹는 미세한 빛 무리가 뭉쳐 있
다. 허공을 부유하는 혼백의 움직임인양 그것은 신비한 감을 불러일으키고 동화되
지 아니하고는 견디지 못할 이질감을 장내에 선사했다. 끈적끈적한 습기는 어디에
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를 불쾌감마저 끌어내니 이런 곳에 사람이 존재하기는 힘이
들어 보였다. 정체도 분명치 않은 메케한 냄새마저 한몫 거들고 있어서 그것은 더
욱 극명하게 분위기를 사이 하게 만들었다.
금면탈의 괴인은 그곳에서 이각을 버티었다. 나무로 대충 짜 놓은 듯한 아귀가 잘
맞지 않는 의자가 삐거덕거리며 비명을 질러댔고 간간이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천장
에 맺힌 물방울들이 물웅덩이에 떨어지는 소리가 전부였다. 그는 전면을 바라보았
다. 분명히 그 빛은 눈앞에서 비치고 있었지만 그것의 정체는 확연하지 않았다. 놀
랍게도 그 빛은 신화경에 이르렀다 자부하는 자신의 무공을 비웃을 만큼 위력적이
었다. 그의 인내심은 남다른 데가 있었기에 심적인 동요를 내색하지 않았으나 그
또한 인간인 바에야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었다. 막 그가 입을 떼어 가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대가 혈마천의 사자인가?”
저것을 사람의 음성이라 할 수 있을까? 고저가 분명치 않고 살아 있는 사람의 것이
라 여겨지지 않는 한기가 감도는 음성이었다. 그럼에도 그 의미만은 분명히 전달되
었기에 금면탈의 괴인은 분명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렇소. 본좌가 바로 혈마천의 사자요.”
“혈마천이 여기에는 무슨 일이지? 대단한 배짱이구나. 아무리 사자의 임무를 띠고
왔다고는 하나 단신으로 여기 올 생각을 하다니…… 그래 무엇 때문에 왔는가?”
“그대의 신분을 먼저 밝혀주시오. 나는 부주가 아니면 상대하지 않소.”
“이제 보니 죽고싶어 찾아 온 자였군. 부주님은 너 같은 애송이를 만나실 분이 아
니시다. 할말이 있으면 나에게 하면 된다.”
“애송이라? 천황부가 이렇게 무례한 곳 인줄 알았다면 나는 오지 않았을 것이오.”
“하하하하 어처구니없도록 대담한 자구나. 좋다. 본좌는 본 천황부의 오황 중 하나
인 암흑마황(暗黑魔皇)이다. 무슨 용건으로 왔는가?”
“으음…… 좋소. 나는 혈마천의 대총사요. 귀부와 본천과의 동맹을 제의하는 바
이오.”
“동맹?”
“그렇소.”
“하하하하하하”
웃음소리는 끊어지지 않을 듯 했다.
“뭐가 그리 우습소?”
“뭐가 우습냐고? 무림에서의 동맹이란 비슷한 세력간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너희
혈마천이 감히 우리 천황부와 동격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냐? 무림에서는 철저히 강
자존의 법칙만이 존재하지. 너희 혈마천이 우리 밑으로 들어오겠다면야 말리지는
않겠지만 감히 동맹이라니…… 일고의 가치도 없는 말이군.”
철저히 무시하는 그 말에도 대총사는 이렇다할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지금 무림의 상황은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고 있을 것이오. 과연 천황부 단일
세력으로 무림을 독패 할 수 있겠소? 중원무림의 저력은 대단한 것이오. 거기다
사사혈교와 사황성, 북해빙궁까지 패권을 노리고 있소이다. 당신들 천황부가 얼마
나 강한지는 모르나 결코 당신들 힘만으로는 두 개의 세력도 감당하지 못할 것이오
. 결국 동맹을 맺지 못하는 세력은 철저하게 무너지고 말 것이오.”
“네 말에도 일리는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직 우리
를 긴장시킬 수 있는 세력이란 전설의 천마교 뿐이다. 그들이 다시 무림에 등장하
지 않는 한은 무림은 우리들 차지가 될 것이다.”
“그렇소? 천황부는 참으로 답답한 곳이었군. 사황성이 이미 중원에 들어와 있음은
알고 있을 것이오. 뿐만 아니라 곧 이어 북해빙궁도 들어 올 것이고 신수궁과 사사
혈교도 잠자코 있지만은 않겠지. 그럼 그들 모두를 천황부 혼자만의 힘으로 상대할
수 있으리라 여기오? 독불장군은 없소. 만약 귀하가 생각하는 것처럼 천황부가 그
리 강하다면 아마도 제일 먼저 제거될 것이오. 그래도 자신 있다면 이 제의는 없었
던 것으로 할 수밖에…… 우리와 동맹을 맺고자 하는 곳은 얼마든지 있으니…..
.”
대총사가 몸을 일으켰다. 그는 한 점 망설임도 없이 몸을 돌려서 발걸음을 떼어갔
다.
“잠깐만 기다려 봐라. 성격이 매우 급한 자군. 동맹의 조건은 무엇인가?”
대총사는 몸을 돌리지도 않고 대답했다.
“동맹할 의사는 있는 것이오?”
“조건을 들어보고 결정하겠다.”
스스로를 암흑마황이라 자칭한 자의 말에 근거하면 그 자의 직위와 권한이 천황부
내에서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님을 알게 해 준다. 이런 중차대한 일을 결정할 수 있
을 만큼……
대총사가 몸을 돌려 세웠다.
“아주 간단하오. 첫 번째는 불가침 협정이오. 무림의 여타 세력이 괴멸 될 때까지
서로를 침범하지 않겠다는 약속이 필요하오.”
“흐음…… 그것은 당연하겠지.”
“두 번째는 공동전선 형성이오. 아, 물론 우리가 동맹하고 있음은 다른 세력에 알
려져서는 곤란하오. 다만 서로의 의견을 조율하여 중원 제패까지의 기나긴 여정동
안 모든 작전은 공동으로 하게 될 것이오. 이를 위해 서로간의 긴밀한 연락이 요구
되오.”
“흐음 그리고?”
“정보 공유요. 적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귀 세력과 본 혈마천의 세력편성까지 서로
가 알 수 있어야 하오.”
“뭐? 그것은 조금 무리가 있지 않나?”
“이것은 서로에 대한 신뢰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요. 서로의 세력 편성에
대해서 알게 되면 상대의 움직임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것이고 그것만이 서로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이어가게 할 것이오.”
“그런가? 좋다. 그 다음에는?”
“마지막으로 모든 적들이 소멸될 때까지 각자 세력의 일부를 상대 진영에 두어야
하오.”
“무엇이라고? 으음…… 그것은 곤란하다.”
“왜, 곤란하다는 것이오?”
“왜, 곤란하냐고? 그것을 몰라서 하는 말인가? 너희가 우리 세력을 먼저 제거하고
우리 쪽에 심어둔 세력을 통해 내부 혼란을 기도한다면 우리로서는 달갑지 않기 때
문이지. 그런 불안을 지니고서야 어찌 동맹관계가 유지될 수 있겠느냐?”
“그것은 피차 마찬가지 아니겠소? 어차피 서로간의 동맹관계는 다른 세력들이 괴멸
되기 전까지는 좋든 싫든 유지해야 할 것이오. 정보공유에도 충분히 이바지 할 것
이고 정기적으로 연락을 취한다면 상대의 급작스런 배신을 경계할 수도 있소이다.”
“으음….. 좋다. 대신.”
“무엇이오?”
“우리도 한가지만 요구하지. 우리가 조사해 본 바로는 중원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사람은 세 명이다.”
“세 명?”
“그렇다. 그 놈들만 제거된다면 무혈입성도 꿈만은 아니지. 어차피 우리 두 세력을
제외하고는 사사혈교나 경계할 만한 상대지. 중원의 무림오천 중의 삼인인 장삼봉
과 옥면신룡, 그리고 천마서생만 제거한다면 중원제패는 훨씬 앞당겨질 것이다. 그
래서 그들 셋을 혈마천이 제거해 준다면 동맹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너희들의 요
구를 모두 수용하겠다.”
대총사는 어이가 없었다. 대체 뭐 하자는 수작이란 말인가?
“그것을 지금 말이라고 하시오? 천마서생은 내가 지닌 정보로는 이미 중원마도를
한 손에 움켜쥐었소. 옥면신룡 또한 정도무림맹의 실질적인 지도자요. 게다가 무당
의 장삼봉 진인은 신룡과 같아서 그 흔적을 찾기조차 쉽지가 않소. 그들 세 명은
중원의 실질적인 힘 그 자체요. 그런 그들을 우리더러 제거하라는 말이오? 그것이
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오? 그것을 그리 쉽게 처리할 정도의 힘을 갖고 있다면
귀부와 동맹 따위를 제안 했겠소이까?”
스스로 생각해도 조금은 무리한 요구라고 생각이 들었는지 암흑마왕은 양보를 했다
.
“그럼…… 셋 중에 하나라도 제거하는 성의를 보여라. 그러면 동맹을 하겠다.”
‘약아 빠진 놈. 좋다. 일단은 네놈들이 하라는 대로 따라주지. 그러나 모든 일이
우리 뜻대로 이루어진 다음에는 네놈부터 죽여주마.’
“좋소. 천마서생을 죽여주겠소.”
“그러면 우리의 동맹은 성립된 걸로 하지. 빠른 시일 내에 천마서생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기대하겠다. 후후후 우리 두 세력의 연합이라면 무림을 집어삼키는 것은
시간 문제 겠군.”
‘어이가 없는 자다. 어느 정도의 자신감을 지니는 것은 모르겠으나 이것은 좋지가
않다. 아직 중원 무림의 진정한 저력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는 듯 하니…… 이것
이 과연 잘하는 짓인가? 사형은 하필이면 이들 천황부와 동맹을 맺으라고 하시는
것인지……’
★
산서성 태원에는 세 명의 유명인사가 있다. 그 하나는 세상의 모든 이치를 꿰고 있
다 하여 만통대로(萬通大老)라 불렸고 또 하나는 그의 손에서 만들지 못하는 것이
없다하여 신장대로(神匠大老)라 하였으며 마지막으로 세상에 모르는 무공이 없다하
여 무불무학자(無不武學者) 만공대로(萬功大老)라 하였다. 이 세 사람은 산서무림
의 자랑이자 정도 무림의 명숙들이기도 했다. 어떤 자리에 간다 하여도 이들에게
상석은 언제나 예비 되어 있을 정도로 그들의 명성은 대단한 것이었다. 이들은 비
슷한 나이에 친구처럼 지내는 사이였는데 언젠가 한날 한시에 은퇴할 것을 결정한
적이 있었고 오늘에야 그것을 실행하기에 이르렀다.
태원에 이렇게 많은 무림인들이 모여 든 것은 처음이리라. 현 무림의 상황이 그리
태평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평소에 이들과 친분이 있는 무림인들이나 문파에서 사람
을 보내왔고 산서에 적을 두고 있는 무림인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앞으로 이들이
은퇴후의 남은 여생을 보내게 될 은현장은 발 디딜 틈 없을 정도로 혼잡했다. 흔히
무림에서 은퇴식을 하는 것은 삼생의 복을 타고나야 가능하다 했으니 이들이야말
로 만인의 축복을 받기에 어색하지 않았다.
은형장의 총관 강호충은 몰려드는 인파에 머리를 흔들었다. 금분세수가 무림에 흔
하지 않은 일이었기에 충분히 예상한 바였으나 이 정도로 성황을 이룰 줄은 짐작하
지 못했기 때문에 당황되었다. 은현장의 수하들이래 봐야 100명을 헤아릴 정도니
족히 3000명을 넘어설 것 같은 군웅들이 몰려들자 그들의 노고가 이만저만 큰 것이
아니었다. 장내, 외에 차양을 치고 자리를 마련하기 바빴고 음식을 조달하기도 벅
찼다.
“총관나으리 음식이 떨어져 가는데요.”
총관은 머리를 짚었다. 시비들의 우두머리 격인 수운이는 평소 그 하는 행사가 치
밀하고 또한 총명하여 총관의 신임이 두터운 아이였다. 그녀는 총관을 빤히 쳐다보
며 신속히 대책을 세워 줄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너는 아이들을 데려가서 성내의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해 오너라. 술이야 얼마든지
조달할 수 있을 거고…… 돈은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 요리사들을 초빙해 오고
식당에서 쓸 음식재료들을 모두 사 오너라. 어서 서둘러라.”
“네, 알았습니다.”
수운이 뛰어 가는 것을 본 총관은 어질어질함을 느껴야만 했다.
‘아직 은퇴식은 두 시진이 더 있어야 시작될 터이고 모르긴 몰라도 밤새도록 잔치
가 벌어질텐데 큰일이군. 게다가 무림대파에서는 아직 도착도 하지 않았으니……
‘
그는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도처에 차양이 쳐져 있었고 자리를 깔고 앉은 무림인
들이 술을 들이키며 왁자하게 떠드는 모습들이 눈에 들어왔다. 바깥 상황도 이에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한쪽에는 방명록을 기재하는 수하들의 모습도 보였지만 이미
등재하는 것을 포기했는지 손을 놓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무림인들이 몰려 온 것이 한편으로는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항상 이
런 은퇴식에는 평소 사이가 좋지 않거나 은원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찾아와서 행패
를 부리기 마련이었고 그것을 잘 수습해야 은퇴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세 장주님이야, 무림에 은원을 쌓은 적이 없으시니 그런 일이야 없겠지만 만
에 하나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한다 해도 하객들이 이리 많으니 잘 무마가 되겠구나
.’
총관은 또 다시 바쁘게 뛰어 다녀야만 했다.
은현장 유일의 대전이라 할 수 있는 경천전(敬天殿)에는 산서무림의 중소 문파들의
문주들이 자리해 있었다. 기껏해야 10명이 채 안 되는 수였기에 대전이라 하기에
조금은 비좁은 곳이지만 그리 썰렁해 보이지는 않았다.
“이렇게 은퇴식을 축하 해 주기 위해 왕림해 주셔서 저희들은 몸둘 바를 모르겠군
요. 아무쪼록 마음껏 즐기시기를 바랍니다.”
만통대로 기문선의 훌렁 벗겨진 대머리가 오늘따라 유난히 빛을 발했다. 인자한 두
눈에는 흡족함과 함께 어딘가 불안한 기색이 엿보이고 있었다. 두 사람과 나란히
앉아 있는 두 명의 장주 역시 마찬가지인 듯 했다.
덜컹
문이 심하게 요동치며 열렸고 그 사이로 총관이 다급한 신색으로 들어서자 만통대
로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이냐?”
총관은 숨을 고르며 무슨 말인가를 하려 했지만 터지느니 거친 호흡소리뿐이었다.
이를 본 만통대로의 꾸짖음이 있고 나서야 그는 말문을 틔었다.
“지금….. 밖에…… 괴인들이 와서 난동을 부리고 있습니다. 장주님들을 데려
오지 않으면 이곳을 쑥밭으로 만들어 버리겠다며……”
“무엇이라고?”
만통대로는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이었고 총관의 말에 반문을 한 이는 옆의 만공대로
추자승이었다. 세 명의 장주들은 빠르게 시선을 교환했다. 이런 그들의 모습을 살
피던 장내의 귀빈들의 얼굴에는 의아함이 가득했다.
산서 무림의 기둥 중 한곳인 철혈장 장주인 호아검(虎牙劍) 진표율이 앞으로 나섰
다. 그는 자신의 허리에 매어진 검 자루를 한번 툭치며 점잖은 음성을 발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별일 아닐 겁니다. 여러분들은 여기 계십시오. 저희들은 어찌 된 연유인지를 알아
보고 오겠습니다.”
세 명의 장주는 총관의 뒤를 따라 바깥으로 사라져갔고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한 호
아검도 그들의 뒤를 따랐다. 그들이 밖에 나와보니 은현장 바깥에서는 팽팽한 긴장
감이 흐르고 있었다. 삼십여명은 족히 될 인원들이 윤기가 흐르는 흑마에 올라탄
채 기세등등하게 군웅들을 쳐다보고 있었고 많은 수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기세가
워낙에 흉험했는지라 아무도 그들을 제지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들 앞에
는 은현장의 호장무사들이 문 앞을 지키고 서 있었지만 볼품 없는 모습들이었다.
[자네의 점괘가 오늘도 적중했군. 나는 오늘만이라도 틀리기를 바랬건만……]
만통대로에게 전음을 보낸 이는 은현장의 세 장주 중의 일인인 신장대로 호만득이
었다. 그의 전음에 얼굴에 수심을 드리운 만통대로가 전면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장내에 나타나자 중인들이 한 쪽으로 길을 틔어 주었다.
만통대로는 눈앞을 쳐다보았다. 인원은 서른 명에 불과 했으나 그들이 내 뿜는 기
운은 삼백 명 이상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무리 중 최선두에
서 있는 젊은이에게 가서 멎었다. 분위기로 보나 그들이 서 있는 위치로 보나 그가
저들 무리의 수장으로 여겨졌다. 흑마보다 더 짙은 흑의무복에 눈빛이 날카로운
자였다. 전체적으로 한 자루 날선 칼을 보는 듯한 예리한 기도를 풍기고 있었다.
그는 오만한 시선으로 세 명의 장주를 쓸어 보았다.
“그대들이 이곳의 장주들인가? 오늘 은퇴식을 한다는…..”
군더더기가 없는 음성이었다. 인간의 정이 느껴지지 않는 무미건조함이 어떠한 것
인지를 보여주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무례하구나. 감히 무림 말학 주제에 대 선배에게 이 따위 버릇없는 언사를 하다니
……”
철혈장주의 호통소리였다. 그의 말에 호응하는 소리들이 군웅들에게서 터져 나왔다
.
“어서 말에서 내리지 못할까?”
“어디서 굴러먹던 놈들이냐? 정체를 밝혀라.”
말 위의 흑의 사내는 그런 군웅들의 반응에 그저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을 뿐이다.
그런데도 장내는 급작스럽게 조용해져 버렸다.
만통대로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그렇소이다. 우리들이 이곳 은현장의 세 장주요. 그러는 귀공은 대체 누구시오?
그리고 이곳에는 무슨 용무로 오셨소?”
“알 것 없다. 우리는 먼길을 왔다. 우연히 이곳에서 은퇴식을 한다기에 찾아 왔을
뿐이다. 우리 일행들이 쉴 곳을 마련하고 접대를 해라.”
그 말을 들은 장내의 모든 인물들에게서는 하나같이 잘못 들었지 않나 하는 의문이
떠올랐다.
‘저 자는 항상 명령만을 내려오던 자다. 그리고 멀리서 왔다는 것을 보니 새외의
인물이기 쉽다. 오늘은 길보다는 흉이 많겠구나. 오늘 처신을 잘못하면 큰 어려움
을 겪게 되리라.’
만통대로는 조심스럽게 사내를 올려다보며 입을 떼어갔다.
“들어오시오. 그 정도야 못하겠소? 원래 잔치 집에는 손님이 많을수록 좋은 법이니
…… 총관. 어서 안내하거라.”
“네, 장주님.”
“잠깐.”
이번에는 또 뭐란 말인가? 세 장주의 얼굴에 불안이 스쳐갔다.
“나는 번잡한 것을 싫어한다. 장내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내 보내거라.”
그 말은 분명 억지였다. 이런 말을 태연하게 뱉어내는 사람에게 좋은 낯으로 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통대로의 얼굴은 변화가 없었고 침착하게 대응했다.
“오늘은 우리 세 늙은이들의 은퇴식이오. 그리고 여기 계신 분들은 부족한 저희들
의 은퇴를 축하해주기 위해 오신 분들이오. 이런 분들을 나가라 할 수는 없소이다.
그러니 귀하께서 양보를 해 주셨으면 좋겠소.”
그가 이렇게 까지 저자세로 나오는 이유를 사람들은 이해 할 수 없다는 표정들이었
다.
“좋아. 내가 양보하지. 은퇴식은 내일로 미뤄라. 우리는 하루만 이곳에 있다 가겠
다.”
“이런 발칙한 놈. 네 놈이 뭐 하는 놈인지는 모르겠으나 참으로 오만함이 하늘에
미치는 놈이구나.”
철혈장주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대로하여 외쳤다. 흑의사내의 시선이 그에게 머물
렀다.
“죽고 싶은가 보군.”
그 한마디가 전부였다. 순식간에 장내는 차가운 살기가 피어나고 삼십여명의 무사
들의 눈이 차갑게 빛나기 시작했다.
“장주. 이 놈들을 그냥 놔 둘 참입니까?”
철혈장주의 말이었다. 그는 상대들의 기세가 만만치 않자 이렇게 말을 돌린 것이다
. 그러나 여전히 그 또한 기세를 죽이지 않고 마주 쏘아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세 명의 장주는 참으로 난감했다.
‘이 일을 어쩐단 말인가? 만약 저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저들은 살수를 펼칠
것이고…… 저들은 결코 만만한 자들이 아니다. 이 많은 군웅들 앞에서도 한치
의 흔들림도 없는 것만 봐도 저들이 어떤 자들인지는 알 수 있다.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이제 하루만 지나면 무림과의 연을 마치고 여생을 편히 지낼 수도 있겠건만 하필이
면 마지막에 이런 일이 벌어진단 말인가? 그들이 어떤 대답을 하느냐에 따라 장내
의 분위기는 달라 질 것이다. 흑의인들의 요구를 들어 준다면 은퇴를 축하해주기
위해 이곳에 모인 군웅들에게서 비겁한 자로 낙인찍힐 것이고 자존심을 세우고 강
경하게 대한다면 이곳은 금새 피바다가 될 것이 분명했다. 어느 쪽도 그들이 원하
는 것은 아니었다.
[어떻게 할 참이냐?]
만공대로가 만통대로에게 물어오는 전음이었다.
[무인으로서의 자존심을 지키자.]
이것이 만통대로의 최후의 결정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억지요. 안 되겠소. 그냥 돌아가 주시오.”
만통대로의 그 말에 장내의 군웅들의 얼굴에 떠 오른 것은 당연하다는 표정들이었
다. 이제는 과연 그들이 어떤 태도를 보일 것인가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어리석은 자로군. 그깟 자존심 때문에 죽음을 자초하다니…… 얘들아 장내를 정
리해라.”
“존명”
“존명”
삼십명의 흑의무사들이 동시에 대답을 하는가 했더니 허리에 차여져 있는 도를 뽑
아들고는 산지사방으로 튀어나갔다. 그들은 순식간에 무리 중에 섞여 들어갔고 그
들의 도는 불을 뿜었다.
“끄악”
최초의 비명성이 터져 나온 이후 연이어 여기저기서 비명성이 이어졌다.
“이 놈들.”
철혈장주가 그런 흑의인들 중 한 명에게 검을 빼들고 덤벼들었다. 세 명의 장주와
은현장의 수하들도 무기를 빼들고 달려든다. 장내는 일 순간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