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검 – 94화 : 태양이 지는 곳에서 오는 사람들
-태양이 지는 곳에서 오는 사람들-
파천은 오늘도 바닷가를 서성였다. 시선은 어김없이 바다를 향했다. 피어 오른 구름은 버섯처럼 보인다. 수평선에 맞닿은 구름이 바다 속으로 자꾸만 삼켜져 가는 것만 같았다.
바람은 항시 그의 앞에서 불어왔다. 머리털을 나부끼게 하는 바람결엔 바다 내음과 더불어 중원의 향기가 스며 있는 듯 했다.
‘잠시만……. 잠시만 견뎌 다오. 지치고 힘들어도 조금만…… 조금만 견뎌 준다면……. 내 너를 위해 생명가지 내어 주리라.’
단지 땅의 의미만은 아니리라. 그 위를 딛고 사는 소중한 삶들을 향한 약속일 것이다. 파천은 굳은 결의를 다지며 시시때때로 형태를 변화시키는 구름을 바라본다. 환하게 미소 짓는 얼굴. 그것은 설란이었다.
“으아아아아.”
파천의 입에서 터져 나온 사자후는 군도를 뒤흔들 정도로 컸다. 군도 여기 저기 흩어져 있던 수련자들도 이 순간 파천의 사자후를 들었다.
그들은 그 속에 담긴 파천의 감춰진 심정을 읽고는 숙연해졌으며 일부는 더욱 각오를 새롭게 하기도 했다. 수련이 끝나지 않는 한 중원의 땅은 그리움 속에만 담아 두어야 한다. 누구보다 그들 자신들이 이 사실을 더 잘고 있었다.
군도의 중심으로 향하는 파천의 걸음이 무겁기만 하다. 언제라고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기약 없는 기다림. 그의 마음은 아득하기만 했다. 서두른다고 될 일도 아니었고. 스스로의 노력만으로 되는 일도 아니었다.
한 가지로 마음 쓰기를 다하고 성실한 노력을 더한다면 일의 결과는 좋은 결실을 맺어야 당연했다. 그렇지만 때때로 인간사란 이런 공식적인 적용이 무의미한 경우가 많았고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무공의 극의를 깨닫는다는 것은 한 사람이 나고 자라서 인격적으로 완성되는 것만큼이나 어렵고 먼 길이었다. 이 길에 든 자가 평생 노력하고 정진하여 스스로를 혹독하게 다룬다 하여도 백에 하나 이르지 못하고 짧은 생을 마감하는 것이 일반사이고 보면 파천의 기대는 부질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검법을 익힌 자가 이기어검에 이른 것만도 스스로 자족할 만큼 대단한 일이니, 이기어검의 심어검에 모두를 이르게 한다는 게 어찌 간단한 요구일 수 있겠는가. 내공이 모자람은 없었다. 수법의 능숙함이 부족한 것도 아니었다. 이치를 깨달아 설명을 한다 해도 실제 몸으로 행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파천을 비롯해 그 경지에 이미 이른 사람에게는 수월한 것이겠으나 다른 이에게는 아무리 궁구하여 막연하게나마 그림을 그려 보아도 그 실체가 요원하기만 한 것을…….
군도의 중심에서 서북쪽을 향해 서 있는 산은 파요(波謠)라고 불렸다. 산은 나직하고 숲은 우거지지 않았지만 여기저기 천연적인 동굴과 평평한 암반이 많은 곳이었다. 그곳을 오르던 파천은 저 멀리 작은 인영이 빠르게 움직여 가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소군.’
그의 하나뿐인 제자였다. 때로 당돌하게까지 느껴지는, 아직은 소녀 티를 벗지 않은 사랑스런 애제자를 바라보는 파천의 눈길은 따스하기만 했다. 작고 귀여운 손을 움켜쥐며 천하제일검객이 되고 싶다 하던 그녀의 옛 모습을 떠올리며 파천은 흐뭇한 시선을 얼굴 가득 그려 넣는다.
험난한 길이지만 가기를 마다 않고 이 자리까지 이른 그녀를 파천은 자랑스러워했다. 아직은 많이 부족하고 버릇이 없기도 했지만 그에게만은 혈육만큼이나 소중하게 생각되는 존재였다.
파천은 허공으로 몸을 띄워 올렸다. 그가 다가가는데도 소군은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수련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사부가 하사한 간장검을 손에 쥔 채 허공을 무수한 선으로 채워 가는 그녀의 몸짓은 예전과는 분명 다른 경지를 보였다. 검 끝에서 스며 나오는 검강은 매서웠고, 사방을 향해 휘몰아치는 검풍은 사납기만 했다. 빠르고 예리한가 하면 강하고 무겁기도 했다. 검로의 변화는 자유로웠으며 공격과 수비의 진퇴는 적절했으며 화려하기까지 했다.
파천은 소군의 수련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잠자코 지켜보고만 섰다. 화려한 검무를 추어 가던 그녀가 갑자기 동작을 멈추는가 싶더니 불현듯 허공을 진동하는 당찬 기합성을 내질렀다.
“타앗”
한 발이 땅을 박차자 그녀의 몸은 제비처럼 빠르게 허공으로 도약했다. 삼 장까지 치솟은 그녀의 검이 아래쪽을 향하자 검 끝에서 선홍빛 검강이 폭사했다.
슈슈슈슈
콰쾅
쾅
암반 여기저기에 균열이 일며 움푹 패여 나갔다. 굳은 떡이 갈라지는 것도 같았다. 대단한 위력이었다. 언제 그런 가공한 공격을 펼쳤는가 싶게 가볍게 땅으로 내려선 소군은 이내 평정을 되찾는다. 호흡은 여전히 고요하기만 했다.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어.”
그녀의 수심에 가득 찬 음성을 발했다.
“후유, 갈 길은 아직도 멀기만 해. 언제쯤 이기어검술을 익힐 수 있을까.”
허공으로 시선을 옮겨가는 자태는 아름답게 빛을 발했다. 그녀의 축 처진 어깨 위로 내려앉은 것은 사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다는 자책감이었다. 내리깐 시선은 암울했다. 소군의 등뒤에 서 있는 파천에게까지 그 감정은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녀석, 실망감이 큰가 보구나.’
파천은 일부러 기척을 내며 다가갔다. 그 소리에 소군은 빠르게 반응하며 몸을 돌려세웠다. 주변을 경계하는 눈빛이 사나운 살쾡이를 연상케 했다.
“사부님!”
파천의 얼굴엔 부드러운 미소만이 가득하다. 항상 제자에게 관대하기만 한 사부에게 소군은 머리를 들지 못했다. 파천은 무슨 말인가를 해주어야만 했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엄하게 가르치진 않았지만 응석받이로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때때로 도에 지나치는 버릇없는 행동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오해를 사기도 한다는 것을 파천은 잘 알고 있었다.
“아직은 무리가 있을 거다. 너무 조급하게 생각지는 말아라.”
“사부님,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어요.”
분명히 그녀의 말은 도움을 청하는 것이었다. 간절한 염원을 담고 부담스런 눈빛을 보내는 제자 옆에 파천은 아무렇게나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잔잔한 음성이 파천의 입에서 흘러 나온 것은 잠시의 간격을 두고서였다.
“옆에 앉아 봐라.”
옆에 앉은 소군을 향해서가 아닌 산아래 바다를 향한 시선은 고요히 가라앉아 있다. 무슨 말을 들을까, 한껏 기대에 부푼 소군은 파천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수려한 파천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검이무엇이라 생각하느냐?”
뚱딴지 같은 질문에 소군은 한동안 대답을 못라고 머뭇거리기만 했다. 잠시 후…….
“검은 예이자 도입니다.”
“쓸데없는 소리!”
칭찬까지는 바라지 않았지만 이런 소리를 들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소군으로서는 당황될 수밖에 없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느냐?”
소군은 즉각적으로 대답했다.
“네.”
“누가 그리 말하더냐?”
“제 스스로 생각한 거예요.”
“그래?”
“네.”
“그리 생각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지?”
무엇일까 고민해 보았자 알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그저 즉흥적으로 대답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고래로부터 전해져 온 검법을 익히고 연마하는 데 주력했지 검이 무엇인가 따위를 생각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정정하겠어요. 검은 살인술이자 살인의 도구입니다.”
“검이 단지 살인에만 쓰이더냐?”
분명 소군을 골려 주려는 의도인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런 선문답 같지도 않은 질문을 이어 나갈 이유가 없었다.
“솔직하게 말씀드려서 검은……. 검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소군은 솔직해지기로 했다. 모르는 걸 아는 척한다는 것이 자신의 성미엔 맞지 않았던 것이다.
“검은 아무것도 아니다.”
소군은 파천의 말에 약올라 했다.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소군아.”
“왜요?”
조금은 퉁명스런 대답. 소군으로서는 자연스런 반응이었다. 사부를 존경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장단을 맞춰 줄만큼 그녀는 순종적인 건 아니었으므로.
“너는 검을 무엇으로 사용하느냐?”
“무엇으로 사용하다뇨? 손으로 사용하죠.”
역시 대답하는 태도가 그리 곱지만은 않았다. 파천은 바다로 향한 시선을 여전히 고정한 채 말했다.
“손으로 어떻게 사용하지?”
무슨 대답인가를 유도하려는 의도인 듯했지만 그리 간단치가 않았다.
“잘요.”
소군의 역습인가.
“끄응, 녀석, 심통이 났구나. 잘 들어봐라. 손도 검도 아무것도 아니다. 검이란 손의 연장일 뿐이고, 손이란 것도 기를 다루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신체 중 가장 쉽게 외부와 연결될 수 있기에 그 용이성 때문에 손이 사용되는 것뿐이란다.
예를 들어 손보다 더 쉽고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우리는 그걸 이용해서 무공을 펼쳤겠지. 결국 무공이란 누가 얼마나 기를 잘 사용하는가에 달렸다. 두 손이 없는 사람 중에 검객을 본 적이 있느냐?”
“없어요.”
“무공을 익히기 전에 손을 잃은 사람이라면 검을 사용하는 자는 없을 거다. 그렇지만 이미 기를 능숙하게 사용하는 자가 손을 잃었다면 어찌 될까?”
“그래도 검을 쓸 수는 없어요.”
“그건 네가 손으로만 검을 대하기 때문이란다. 손을 통해서만 검을 다룬다면 검술의 영역에 머물고, 마음으로 보고 기로 다스린다면 검도에 들었다 할 수 있지. 이기어검이란 검도의 상승경지다 기를 다룸에 있어 굳이 손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경지이지. 자, 이것을 보아라.”
스스스스
파천의 앞, 바닥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던 돌멩이가 저절로 허공으로 떠올랐다. 소군은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허공섭물 정도는 그녀도 익숙하게 펼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허공섭물과 이기어검의 차이가 무엇일까?”
“그야……으음…… . 모르겠어요.”
“둘의 공통점은 손으로 매개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기만을 이용해 사물을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둘 사이엔 현격한 차이점이 있다. 그것은 아주 간단하다. 허공섭물은 사물의 외부에만 작용하여 물리적으로 힘을 가한 상태다. 허공 중에 이 돌이 떠 있지만 엄연히 말해 이건 내 기에 의지하고 있는 상태다.
이기어검의 상태는 이와는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검에 기를 실어 허공을 자유롭게 노닐지만 그 검은 손 안에 있을 때와 전혀 다르지 않다. 그 상태로 검기나 검강을 사용할 수 있다는 의미다. 결국 외부적으로 힘이 가해진 것이 아니라 내부적으로 기와 일체화되어 있다는 의미다.”
“아!”
소군은 뭔가 깨닫는 바가 있는지 감탄성을 흘렸다. 그렇지만 이내 얼굴이 어두워진다.
“사부님, 그렇지만 그걸 안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잖아요. 결국 그 이치를 안다고 해서 펼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소군은 금세 시무룩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그렇지, 네 말이 맞다. 알고 있다 해서 펼칠 수 있는 건 아니다. 먼저 내공이 받쳐 줘야 하고 기를 뻗고 거둠이 자유로워야 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검에 대한 이해가 동반되지 않으면 안 되지. 그렇지만 단계별로 봤을 때 수어검의 경지에 이르는 건 특별한 수련만으로도 가능하다.”
“어떻게요? 어떻게 하면 되죠?”
“이렇게 하면 된다.”
파삭
허공에 떠 있던 돌이 별안간 부서졌다. 작은 알갱이로 변한 돌들이 허공에서 맴돌기 시작했다. 그 돌은 점차로 기이한 선들을 그리며 허공을 장악해 갔다. 각기 생명을 부여받은 것처럼 허공을 자유롭게 떠도는 것이었다. 그 움직임은 불규칙했다. 파천이 앉은 자리에서 일장 안에 머물던 돌들이 급작스럽게 공간을 넓혀 가고, 그것은 이내 빠른 속도로 자리를 바꿔 갔다. 현란하기까지 한 움직이들이었다. 파천은 돌들을 움직이는 것을 멈추지 않고 소군을 돌아보며 말했다.
“할 수 있겠느냐?”
“아뇨.”
소군은 사부가 보여주는 수법을 펼칠 자신이 없었다.
“흐음, 이건 할 수 있겠지?”
또 하나의 돌이 허공에 떠올랐다.
핑
순식간에 십여 장 밖으로 날아가던 돌이 허공에 멈추더니 다시 뒤로 후퇴되어 왔다. 파천은 연속적으로 돌을 허공에서 밀어냈다 당겼다를 반복해 갔다.
“네. 그건 할 수 있어요.”
“네 안에 있는 기를 외부로 표출하는 것과 거두는 것을 반복함에 있어 가장 단조로운 것은 직선을 택함이다. 이 단계가 원숙해지며 그 다음엔 곡선을 그려라. 뒤 이어 네 기와 사물을 일체화시켜 나가는 수련을 하도록 해라. 이런 식으로 말이다.”
파삭
십 장 너머로 날아간 돌이 그 자리에서 터져 나갔다. 소군은 조금은 이해가되는 것도 같았다.
“자, 그럼 나는 이만 가보마.”
스스스스
“사부……님. 아직 물어볼 게 많았는데. 좋아, 어쨌든 이제 방법은 알았으니 노력만이 남은 건가?”
소군의 독배근 희망에 부풀어 있어서인지 활기차기만 했다.
파천은 여러 수련자들을 더 찾았다. 그렇다고 해서 소군에게 가르쳐 준 방법만을 고집하지는 않았다. 그가 판단하여 가장 적절하다 생각되는 수련법들을 사용토록 했다.
군도에 또다시 어둠이 내렸다. 사위는 바람마저 잠잠하여 고요하기만 했다. 다 함께 저녁식사를 마친 후 파천은 광마존과 태숙, 그리고 율극을 따로이 불러 개인 지도를 했다. 그들 중에 광마존은 이기어검의 심어검을, 태숙은 무형검을, 율극은 구음마장을 9성 정도로 익히고 있었다.
율극에게 검을 가르친다는 건 무리가 따랐다. 검을 사용해 보 적이 없었으므로 굳이 새롭게 익히게 할 필요는 없었다. 단지 율극이 좀더 구음마장을 대성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파천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이와는 달리 광마존과 태숙에게는 좀더 심도 있는 무공 강해를 진행했다.
매일 일정 시간 집중 수련을 받아서인지 그들의 실력은 나날이 눈에 띄게 성장했다. 파천은 수련실에 그들을 남겨 두고 밖으로 향했다. 그는 긴 복도를 지나 전각을 빠져 나왔고 뒤쪽 절벽 쪽에 있는 작고 아담한 모옥으로 향했다.
“들어가겠소.”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 없었으나 분명 상대는 모옥 안에 있었다. 그런데 아무런 대답도 없다. 파천은 개의치 않고 문을 밀었고 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모옥은 그 규모만큼이나 간단한 구조로 되어 있었다. 석실이 있고 정면에 또 다른 문이 하나 더 있을 뿐이었다. 단 두 개의 석실로만 이루어진 듯했다. 파천은 정면에 위치한 또 하나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안에서 향긋한 약향이 은은하게 풍겨 나왔다. 침상에 누군가 누워 있는 것이 보였다. 파천은 그를 향해 나직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상태는 좀 어떠시오?”
침상에 누운 채로 파천을 향해 고개를 돌린 사람은 북해빙궁주였다. 그가 왜 이곳에 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의 상태가 그리 좋지 않다는 건 누가 보아도 단박에 알아챌 수 있을 듯싶었다. 그 정도로 그는 피폐해져 있었다.
‘상태가 호전되는 속도가 그리 좋지 않아. 하긴 스스로 치료를 거부하고 있으니 이는 당연한 일이겠지.’
파천은 의자를 침상 곁으로 끌어당겨 바싹 붙어 앉았다. 빙궁주는 두 눈을 꼭 감은 채였다. 고집스런 얼굴은 냉담해 보이기만 했다.
“궁주! 이제 그만 고집을 꺾으시오.”
대답할 의사가 전혀 없는 상대와 대화를 나눈다는 건 참으로 고역이다. 결국 파천은 혼자 지껄일 수 밖에 없었다.
“이런다고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소. 치료를 거부하는 건 궁주의 자유지만 난 그대를 이대로 방치해 둘 수는 없소.”
“그만 돌아가시오.”
처음으로 입을 열었는데 그 음성이 싸늘하기만 했다. 아예 상대를 보지도 않겠다고 작심한 모양인지 눈을 뜰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할 말만 하면 되는 사람처럼 습관적으로 입을 열어 갔다.
“궁주의 지금 상태는 그리 좋지가 않소. 심맥을 스스로 끊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소. 물론 패배를 스스로도 인정할 수 없겠지만 이미 결과는 너무도 뚜렷하게 우리 앞에 놓여 있소. 율극을 생각해서라도 마음을 돌리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빙궁주는 자신의 아들이 적들과 함께 있다는 것을 알고도 놀라지 않았으며, 자신을 보고도 알아 보지 못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지도 않았었다.
그는 스스로 죽기로 작정한 듯했고, 그 결심이 얼마나 굳은지 신수궁에 도착하자마자 자살을 시도했다. 감시가 뜸한 틈을 타서 심맥을 스스로 끊은 것이다. 그렇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시도는 미수로 그치고 말았다.
의노의 도움으로 생명을 건지긴 했지만 지금 상태가 그리 썩 좋지만은 않았다. 빙궁주는 누군가가 시중 드는 걸 아주 싫어했다. 하루에 두 번 의노가 방문해 상태를 살폈으며 식사를 갖고 시비들이 두차례 방문할 뿐이었다.
빙궁주의 현 상태는 아주 심각하다고 보아야 했다. 신체 상태가 심각한 것이 아니라 그의 정신적 불안감이 위험했다. 살고자 하는 최소한의 의욕마저 상실한 그가 모든 걸 거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의노가 투약한 약 기운으로 마지 못해 버텨 가고 있는 셈이었다. 그런 빙궁주를 내려다보는 파천의 심정은 착잡하기 이를 대없었다.
“율극의 구음마장이 점점 완숙해져 가고 있소. 어쩌면 북해빙궁 사상 최초로 대성할지도 모르겠소.”
빙궁주가 얼핏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순간적인 동요였지만 이마저도 최초의 반응이었다. 얼굴에 잔 경련을 보이는 빙궁주를 향해 파천은 계속 말을 이었다.
“빙궁 역시나 피해자에 불고하오.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 누구도 피해 갈 수 없소. 나와 중원의 형제들은 좀더 적극적으로 그 불행의 원흉을 향해 검을 뽑아들기로 했소. 그대도 이미 알고 있을지 모르지만 일월교는 중원을 장악하고 지배하고자 함이 안이오. 오직 피만 원할 뿐이오. 어차피 선택은 그대 몫이니 더 이상 말하지 않겠지만……그들은 중원에 들어왔던 그대의 딸 사라를 감금시켜 놓고 있었소.”
빙궁주는 금시초문이란 반응이었다. 그의 눈이 처음으로 파천을 향했다. 시선엔 의문이 가득했다. 정말이냐고 묻고 있었다.
“이건 사실이오. 왜 그들이 사라를 감금시켰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어쨌든 그들에게 최소한의 도의 따위가 있을 리 없다는 걸 확인하게 되었소.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얻고자 하는 결과가 모두의 침몰이라는 것이오. 막아야 하지 않겠소?”
“어차피……그대도 마찬가지지 않은가. 그들이 얻고자 하는 걸 막아서는 이유가 그대가 중원을 얻고자 하는 게 아닌가 말이다.”
빙궁주의 반박하는 말이 파천은 반가웠다. 그가 반응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슷로의 삶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될 수도 있을 거요,. 그렇지만 엄연히 난 그들과 다르다고 장담할 수 있소. 정의나 도의를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오. 단지 지켜 주고 싶을 뿐이오. 이 땅을, 이 땅에 뿌리를 박고 사는 사람들을, 그들의 소중한 삶을 지켜 주고 싶소. 힘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박탈당한 그들의 소중한 것들을 돌려주고 싶소.
내게 힘이 없었다면 난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 거요. 난 그들과 최후까지 싸울 거요. 바라는 건 단 한 가지!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단 한 번뿐인 삶의 기회를 돌려주자는 거요. 모든 걸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삶의 터전을 다시 마련해 주는 것이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의 전부요.”
빙궁주의 눈동자는 여전히 차가웠다. 그에게 더 이상의 설득은 그다지 의미가 없음을 파천도 잘 알았다. 시간이 필요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파천은 내려다보던 시선을 거두고 밖을 향해 걸음을 떼었다. 그가 막 내실을 빠져 나오고 있을 때, 빙궁주의 혼잣말 같은 질문이 이어졌다.
“내……아들을……끝까지 책임질 수 있소?”
“물론이오.”
파천은 그 말을 끝으로 내실에서 사라졌다. 홀로 남은 빙구주는 침상에서 돌아누웠다. 언뜻 그의 눈가에 이슬이 맺혀 있는 것도 같았다.
요 며칠 간 무황성의 분위기는 조개모변(朝改慕變)하다 못해 시시가각 기이한 기류가 암울하게 흘러 다녔다. 폭풍전야와도 같은 기분 나쁜 침묵이 어디에든 안개처럼 스며들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건 외부적으로 드러난 분위기였을 뿐이고 은밀하나마 나고 드는 움직임이 있었다. 또한 짜여지기 시작한 파벌을 따라 은근히 적대 관계에 놓일지도 모를 서로에게 지분대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 교주의 전격 선언이 있고 나서 며칠 동안의 경계만으로는 성에 안 찼는지 외성의 허름한 곳에선 십여 명이 혈투를 벌여 죽고 죽이는 사태까지 벌어지고야 말았다.
일이 이 지경인데도 상층부의 움직임은 조용하기만 했다. 애초에 관여할 의사가 없다는 것이 명백해진 것이다. 이제 관심은 짜여진 판의 진행이 어찌 될 것인가였다. 무황성의 권력 구조를 크게 구분하여 본다면 교주의 직계 세력과 마전, 내밀원, 호교원이 주류이고 이와는 별도로 마황군을 비롯한 무황성 원래의 전력, 여기에다 각 새외의 세력들이었다. 이들이 어떤 구조로 맺고 끊어질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아랫사람은 그들대로 본능적인 느낌을 통해 관도가 어찌 돌아가는지 대충 낌새를 알아차렸다. 가장 두드러진 움직임은 사사혈교와 사황성, 북해빙궁을 제외한 나머지 새외 세력간의 연합이었다. 이들의 수뇌들은 틈만 나면 회동을 하였고, 중각책과 하위자들까지 드러내 놓고 친목을 도모했다. 마치 외부에 자신들의 연합을 과시라도 하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이들 행보에 자극을 받은 탓인지 얼마 가지 않아 사황성주가 수장을 잃은 북해빙궁과 사사혈교의 간부들을 모아들였다. 두 세력간의 움직임이 무황성 전체를 더욱 긴장감에 휩싸이게 하던 어느 날, 사황성주는 공식적으로 마전주를 찾았고, 세 시진 간의 독대 이후에 수하들을 끌고 무황성을 나섰다. 그들 사이에 어떤 말이 오갔는지는 당사자들만 알 일이었다.
사홍성의 본거지인 절강과 복건뿐만 아니라 북해빙궁의 주둔지였던 산동, 사사혈교의 거점인 사천과 섬서, 귀주에서는 일대 회오리가 몰아치기 시작했으니.
사황성주는 전 수하들에게 명을 내려 세력을 정비하게 하고, 사사혈교와 북해빙궁의 전력을 절강으로 불러 들였다. 이렇게 되자 사천과 섬섬, 귀주, 산동은 비어 버린 형국이었다. 대륙의 동쪽하고도 강남에 힘을 집결시킨 의도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되자 혈마천과 천황부는 좋아라 하고 공백 상태인 지역으로 세력을 넓혔다. 혈마천이 섬서와 산동마저 장악했으며, 천황부는 접경 지역인 귀주와 사천을 손 아래 넣었다. 이런 발 빠른 움직임은 단열흘 간에 벌어진 변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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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감히 의자에 앉지 못하고 바닥에 끓어 엎드려 있었다.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두 사람은 전음으로만 대화를 나누었다.
[대체 우리를 왜 부른 걸까요?]
초량의 물음에 상여락은 대답지 못했다.
[비밀리에 부른 것을 보니 알려져서는 곤란한 일이지 않겠소?]
상여락이 대답하지 앉자 초량이 이렇게 말을 이었다. 상여락은 묵묵히 초량의 전음을 듣고만 있다가 이렇게 말했다.
[사형에게도 알리지 않고 나만 부른 것이 영 찜찜하구려.]
[저도 마찬가집니다. 사부에게 말하지 말라고 한 대목이 영 마음에 걸립니다.]
두 사람 모두 똑같은 전갈을 받았고, 이 자리에 조아리고 잇게 된 것이다. 무릎 끓고 있는 지도 꽤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 교주는 나타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초조해졌다. 이런 기다림에 익숙지 않은 두 사람이었던지라 마음의 동요는 더 큰 것이었다.
“고개를 들라”
두 사람은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전신을 흠칫거렸다.
‘아무런 느낌도 갖지 못했는데……. 교주의 음성일까?’
초량은 자신이 교주의 음성을 기억치 못하고 있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기이함을 느꼈다. 많이는 아니지만 여러 번 그의 음성을 들었음에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못내 의아롭기만 했다. 초량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보았다. 눈 앞
태사의에 누군가 좌정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 형체가 명확하지 않았다.
“내가 너희들을 왜 불렀는지 궁금하지 않느냐?”
두 사람은 누가 대답하겠거니 싶었는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난 인재를 좋아한다. 내가 생각하는 인재란 여러 의미가 있지만 하고자 하는 의지가 분명하고 그 수단이 명쾌한 자들이다. 의지란 야심이라 불러도 좋겠지. 너희들의 공통점이 무언지 아느냐?”
“모르겠습니다.”
이번엔 초량이 재빨리 대답했다. 상여락은 안력을 돋우어 교주의 진면목을 알아내려 애써 보았지만 그 모두가 허사였다. 아무리 형체를 잡아 보려 해도 되지 않았다.
‘기로 차단한 것인가? 형체가 모호하기만 하군.’
“날 보려 하지 말아라.”
상여락은 뜨끔했다. 마음속을 들켰다는 사실보다는 그 음성이 주는 묘한 신비감 때문이었다. 딱히 살기라고 규정지을 수 없는 기운이었다.
“너희의 공통점은 교활하다는 거지. 살기 위해서, 더 높은 곳으로 오르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정리 따위는 과감하게 버릴 수 있다는 거지. 난 이 점을 아주 높게 평가하고 있어.”
“감사합니다.”
역시 이번에도 초량의 대답이었다. 그렇지만 초량과 상여락은 그리 썩 좋은 기분만은 아니었다. 자신들에 대해 누군가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것이 반가울 리는 없었다.
“최고가 되고 싶지 않느냐?”
달콤하게 들렸다. 두 사람 모두 가장 좋아하는 말이기도 했고 인생의 목표이기도 했다.
“말해 보라.”
“최고가 되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불가능함을 알고 있기에 어느 정도는 포기했습니다.”
“‘하하하하, 솔직하군.”
초량의 대답에 교주는 연신 유쾌한 웃음을 흘렸다. 또다시 그에게서 흘러 나온 말은 두 사람 모두 흥분시키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난 너희들을 최고의 자리에 올려 줄 수 있다.”
최고의 자리……. 그랬다. 그건 사실이었다. 일월교주의 힘이라면 꿈이라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역량이 있었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붉은 피가 검게 변한다 하더라도 한 번쯤 빠져들고 싶은 유혹은 쉽사리 떨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두 사람 모두는 교주의 제안이 얼마나 큰 대가를 요구할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더욱 흥분했다.
‘어떤 대가를 치른다 하더라도 될 수만 있다면…… 내 영혼이라도 팔 수 있다.’
두 사람의 내심은 동일한 셈이었다. 그들의 신경은 점차로 예민해져 갔고 다음에 나올 교주의 말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저번에도 밝혔다시피 강한 자가 모든 걸 차지한다. 너희들은 내가 볼 때 자격이 충분하지. 내 기준에 의하면 너희들은 누구보다 강하다. 힘은 내가 줄 수 있다. 현재 무황성에서 가장 강한 자가 누구라 생각하느냐?”
처음으로 상여락이 대답했다.
“교주님을 제외하고는 천마와 내밀원주, 마전주일 것입니다.”
“잘 알고 있구나. 그들은 강하다. 너희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하지.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으니까. 그럼 혈마천주와 천황부주는 어느 정도라 생각하느냐?”
“그에 못 미칩니다.”
“못 미치는 정도가 아니다. 마전에만 해도 그들보다 강한 자가 최소한 다섯은 된다.”
초량과 상여락으로서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숫자였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만큼 벽이 많다는 얘기였고, 그렇다면 믿어 낙심하느니 안 믿는 것이 속 편했다. 게다가 자신들의 사형과 사부도 얼마나 강한가. 그들로서는 인정하기 힘들었다.
“몰랐었나 보군. 간략하게 말하겠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그들을 능가하기란 불가능하지. 앞으로 백 년이 지난다 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그렇지만 난 너희들을 그렇게 만들어 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너희들이 마음껏 부릴 수 있는 수하들도 주겠다.
두 사람에게는 이곳이야말로 낙원이었고, 지금이야말로 생애 최고의 순간이었다. 그렇게 염원하던 것을 아무런 노력 없이 얻을 수 있다는 것만큼 강한 유혹이 어디 있겠는가. 매력을 넘어 마력을 선사해 주는데 마다할 리가 없었다. 두 사람은 꿈에 부풀어 갔다. 정말 가능할까, 또는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에 대한 염려 따위는
천 리 밖으로 달아났다. 애써 고개를 돌려 돌아보고 싶지도 않았다.
“어떤가? 흥미가 동하지 않느냐?”
어디 흥미뿐이겠는가.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어떤 명이라도 완수해 보이겠습니다.”
초량의 그 말은 중간 단계의 오가는 대화를 간략하게 만들었다. 무엇을 원하느냐라는 질문이기도 했다.
“내가 원하는 건 아주 쉬운 거다.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 내가 너희들에게 원하는 걸 해주면 된다. 너희 뜻을 이룬 뒤가 되겠지. 하겠느냐?”
“하겠습니다.”
“마다할 이유가 없습니다,”
초량과 상여락의 입에서 동시에 흔쾌한 승낙이 떨어졌다. 역시 두 사람은 비슷한 데가 많았다. 당장 눈앞에 얻을 것이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거부할 수 없을 만큼 스스로가 원하는 것이라면 훗날의 어려움 정도는 아무런 의미를 발휘하지 못했다. 적어도 두 사람은 그렇게 생각했다.
“좋다. 단 한 가지, 너희들이 명심해야 할 게 있다. 여기서 나가게 되면 너희들을 인도할 자가 있을 게다. 너희들은 그를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완전하지 않은 이상엔 그 어디에도 나타나선 안 된다. 너희의 사형과 사부에게도 몸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만약 그럴 시엔 너희의 안전은 보장받지 못한다. 내밀원주와 마전주는 여기서 나가는 순간부터 너희의 적이라 생각해라.”
충격적인 말이었다. 대체 그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기에 이런 말을 한단 말인가, 라는 의문이 저절로 생겼다.
“그리고 모든 것을 얻었다 하더라도 여전히 천마와 마전주, 내밀원주와는 부딪치지 마라. 이후 모든 움직임은 내 명에만 따라야 한다. 너희는 이 순간부터 혈마천과도 천황부와도 무관하다. 할 수 있겠느냐?”
“존명.”
“하겠습니다.”
그들의 눈과 귀는 어느새 멀어 있었다.
“너희들이 얻을 것에 대해 미리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기존의 무공에 대한 견해를 완전히 버려야 한다. 그것을 익히는 순간 두 가지 효능을 발휘케 한다. 첫 번째는 상대의 기를 흡수할 수가 있다. 또한 이는 상대의 어떤 공격도 어느 정도는 격감시킬 수 있는 효과도 있다. 또 하나는 너희들의 내재된 잠재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리는 것이다.
결국 짧은 시간 동안 너희들을 초인으로 만들 수는 없다. 그렇지만 그 수법을 익히기만 한다면 감히 너희 앞에서 일수를 견딜 자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상대의 기를 흡수함으로 점차 빠른 속도로 성장하게 되겠지.”
듣고 있기만 해도 가슴이 뛰었다. 상여락은 사형을 간단하게 넘어설 수 있다는 생각에, 초량은 그 동안에 받았던 수모를 한 번에 갚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상처받았던 스스로에 대한 무력감을 치유할 수 있다는 생각에 하늘이라도 날을 것만 같았다.
“이제 가라. 왔던 문으로 나가지 말고 반대편으로 가라.”
“존명.”
“존명.”
두 사람의 얼굴은 무한한 기대감으로 물들었다. 과연 그들 뜻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질지는 미지수였지만 어쨌든 그들은 과감하게 그 길을 선택한 것이다.
실내에서 두 사람이 사라지고 나자 교주의 입에서 의외의 말이 흘러 나왔다.
“너희들은 내 충실한 개가 되어야 해. 사냥이 끝난 뒤엔 너희 운명이 어찌 될지는 내 알 바 아니지만 그 동안엔 마음껏 영화를 누릴 수 있으리라. 사령(死靈)!”
스스스스
검은 그림자! 달리 표현할 말이 없었다. 분명 그건 그림자였다. 형체는 없는데 길쭉한 그림자가 바닥에 깔려 있었다.
“혼세령(混世令)을 발동하라. 이후 당분간은 날 찾지 마라.”
스스스스
한 마디 말도 없이 그림자는 바닥으로 스며들어 갔다. 홀로 남은 교주에게서 또다시 흘러나온 말!
“이제 내 길을 찾아야 한다. 그들과의 싸움은 이제 시작되었다. 모든 것이 멸망하고 새롭게 일어서리라. 하하하하.”
교주가 사라졌다! 교주의 직계 세력이 사라졌다! 초량과 상여락이 실종되었다!
이 소식은 금세 무황성에 파다하게 퍼져 갔다. 그들이 왜 사라졌으며 어디로 갔는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구구한 억측이 난무했지만 그 어떤 것도 그럴 듯한 건 없었다. 외부적으로 드러난 무황성은 여전히 고요했지만 내부는 무섭게 꿈틀댔다.
“교주가 우리 뒤통수를 치려 하는 것 같지 않나?”
“별 기대도 안 했어.’
내밀원주의 대답은 교주에 대해 기대를 안 했다는 건지, 아니면 뒤통수를 치는 것에 대해 그렇다는 건지 모호하기만 했다.
“우리도 움직여야 하지 않을까?”
“아직은 때가 아니야.”
“교주의 움직임은 전혀 예측할 수 없어. 천마의 말을 종합하면 역시 한 가닥 기대마저 버려야 한다는 말인데…….”
“이미 어느 정도는 예상하지 않았나?”
“하긴…….”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감상에 젖을 필요는 없지. 어차피 피차간에 필요에 의해 맺어진 인연이니……. 우리는 우리 갈 길만 가면 된다. 적루아.”
[네.]
“내밀원의 전 밀사를 동원하여 야림의 근거지를 파악케 해라. 그들이 어디서 무얼 하는지 어느 정도의 인원인지 소상하게 조사하라고 일러라.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상여락과 초량에 대한 추살령을 전 무황성에 내려 두어라.”
[알았어요.]
적루아가 빠져나간 실내의 분위기는 금세 음울해졌다.
내밀원주는 상체를 뒤로 한껏 젖히며 기지개를 켰다.
“우리 적은 분명해졌군.”
“적? 적이라…… 세상 모두가 우리 적이지 않았나?”
“후후후, 하긴 그렇군. 교주는 좀 벅찬데 말야. 먼저 움직이지 않는 한 잠자코 있으려 했더니…… 이렇게 재빨리 일을 진행시킬지는 몰랐는데.”
“일월교와는 사실상 오늘 부로 결별이군. 그건 그렇고 천마에 대해서는 어쩔 셈이냐?”
마전주의 질문에 내밀원주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역시 아직은 색깔이 분명치 않지?”
“의도를 분명히 하긴 전에는 굳이 적을 만들 이유는 없지. 그는 교주만큼이나 부담스럽거든.”
“주는 것도 없는데 왠지 친밀감이 든단 말이야. 그를 확실한 우리 편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교주를 충분히 견제할 수 있을 텐데.”
“어쨌든 그가 우리와 적이 아니라는 것만으로 교주는 충분히 부담스러워 할 거야. 더군다나 우리에겐 적루아가 있잖아.”
“크크크, 녀석의 그런 모습은 처음 봤어.”
“정에 굶주린 녀석이 가둔 것을 풀어 버리면 무서운 법인데. 만약 상처받으면 어쩌지?”
“그것도 다 제 운이겠지. 우리가 염려한다고 될 일도 아니고.”
주거니 받거니 하는 대화 가운데 현 상황에 대한 위기감은 투영되지 않았지만 그들의 내심마저 한 점 동요 없이 고요하지는 않았다. 인간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먹고 살아가는 존재다. 당장이 힘들고 어려워도 내일은 나아질 거라는 한 조각 희망. 이것마저 없다면 아마도 인간이라는 존재는 대부분 죽음을 선택할 것이다. 미래가 어찌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이들은 어느 정도는 예감하고 있었다.
‘하긴 우리에게 미래는 언제나 어둠의 퀴퀴함만이 가득하지 않았던가.’
이백 년을 넘게 살아오는 동안 인간답게 살았던 시간은 얼마 되지도 않았다. 그들의 삶에서 스스로를 주장하기엔 그들이 진 짐이 너무도 무겁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성장 과정 자체가 그들의 의식을 비정상적으로 비틀어 버린 때문이기도 했다.
인간의 바탕에 깔린 기본적인 정서가 무언지도 모르는 자들은 슬픔을 슬픔으로 인식하지도 못한다. 그들이 감상에 젖을 때란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흔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적루아에 대해서 만큼은 둘 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애정을 지니고 있었다. 유일하게 돌보아야 할 대상이라고 여겨온 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그녀 자체의 신비한 성정 때문이었다. 아무리 물들여도 변하지 않는 순수함은 너무도 강력해서 은연중에 자신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어떤 순간에도 그녀만은 지켜 주고 싶었고 자신들의 미래가 암울할 것이란 예상이 강할수록 그녀에 대한 염려가 지극했다. 그런데 이제야 그들이 안심하고 그녀를 맡길 수 있는 대상을 찾은 것이다.
“천마라면……적루아를 행복하게 해주겠지.”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내밀원주의 음성엔 스스로도 느끼지 못하는 허탈감이 배여 있었다.
좌충우돌이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천향옥봉 자운은 처음 무황성에 들어온 날부터 유명해졌다. 첫 번째는 그녀의 외모가 주는 아름다움과 신비한 분위기 때문이었고, 두 번째는 그녀의 가차없는 손속 때문이었다.
남자란 존속은 원래가 미인에겐 약한 법이고, 벗어 버리지 못한 수놈으로서의 야수적 본능은 그녀를 향한 관심을 증폭시켰다. 근원으로서의 회귀를 꿈꾸며 그 품을 그리워하여 추근추근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자연스런 눈흘림 정도였지만 그런 것에도 자운은 지나치게 반응했다.
아래위를 훑어보면 눈을 뽑고 옆을 걷다 스치면 살을 도려냈다. 그런가 하면 조금만 강하다 싶은 자가 보이면 다짜고짜 덤벼들기 일쑤였으며, 무황성 무사들 치고 그녀를 모르는 자는 아무도 없게 되었다.
소문은 소문을 낳고 그녀에 대한 진실을 파악하고자 몰려드는 자들도 생겼으니 그녀는 금세 유명인이 되고야 말았다. 그녀의 신분이 혈마천주의 제자라는 것이 알려지자 이것이 또한 상승 작용을 일으켜 그녀에 대한 호기심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이런 기대에 부응코자 하는 그녀의 자상한 배려인지 그녀는 매일같이 현천마녀들을 대동하고 무황성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호호호, 나의 화려한 미모엔 못 미치지만 동생의 미색도 결코 부족하지 않은 것 같군, 천상의 선녀들도 우리를 보면 시샘을 느낄 거야. 이건 확실해.”
말하는 이는 천향옥봉 자운이 분명했다. 그녀의 성격은 종잡을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얼굴에 냉기가 풀풀 날리는 것 같더니 이제는 요사스럽기까지 하다. 그녀를 예전에 조금이라도 알고 있던 자라면 자신의 눈을 의심케 하는 변화였다. 아니 변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다른 사람이나 진배없었다.
그녀 앞에 마주앉은 여자는 깨끗한 취의경장을 걸친 미녀였다. 긴 머리를 두 갈래로 땋아 내리고 눈을 아래로 살짝 내리깐 용모는 요조숙녀라 불리기에 족했다.
“그런데 말야…….”
뭔가 대단한 거라도 발견한 듯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던 자운은 샐쭉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하기 시작했다.
“동생의 눈 속엔 누군가를 향한 원한이 있는 것 같단 말야. 그리고……그리움도 담겨 있어. 그 대상이 참 궁금하군.”
“그런가요?”
표정의 변화가 없다는 게 마음이 죽었다는 걸 의미한다면 자운의 앞에 앉은 미녀는 그런 조건을 충족시켰다. 공허한 시선을 들어 잠시 자운을 향했다가는 다시 찻잔을 떨어뜨린다.
“흠, 말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돼. 아함, 오늘은 무척 따분하군. 무황성에 들어오면 재미있는 일이 있을 줄 알았더니 여긴 하남무왕부보다 더 한데 그래. 그놈의 금역은 왜 그리 많은지.”
“언니는 참 강해 보여요.”
“그래? 나 강해. 내 목표가 뭔지 알아?”
“뭔데요?”
“무림 최고의 강자가 되는 것 하나와 세상 모든 남자들을 무릎 꿇리고 종으로 부리는 것. 호호호호, 신나지 않아?”
천향옥봉 자운은 처음 대법을 마쳤을 때와 많이 달라져 있었다. 말이 많은 것도 그 중의 하나였다.
“빙화는 뭘 이루고 싶어?”
“전……이루고 싶은 게 없어요. 원래는 있었는데 하나는 바랄 수도 없게 되었고, 또 하나는……제 능력으로 되지도 않으니.”
“뭐야? 그래서 포기했단 말야? 이 언니만 믿어. 그게 뭔지는 모르지만 내가 이뤄 줄 테니.”
빙화는 눈앞의 자운을 보며 야릇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에게 있지 않은 것을 발견한 자의 눈빛인 것도 같았다. 자운의 앞에 마주앉은 빙화라 불린 여자는 천황부의 삼제자였다. 초량과 직므은 혈마가 되어 버린 혈수천자의 사메이기도 했다.
자운과 알게 된 것은 며칠 되지 않았다. 처음 두 사람이 만난 것은 혈마천주와 천황부주가 만나는 자리에서였다. 초량과 상여락의 실종과 연이은 그들에 대한 추살령으로 앞으로의 계획에 지대한 차질을 빚게 된 두 사람이 심각한 대화를 나누는 자리였다. 그러나 자운의 활달함 때문에 회의는 채 진행되지 못하고 파했고, 그 자리에서 자운은 뜻밖애도 빙화에게 의자매로 지내자고 제의했다.
빙화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두 사람이 의자매를 맺은 이후로 무황성 내의 소란은 많이 잠잠해졌다. 허구한 날 무황성 내를 헤집고 다니던 자운이 빙화를 찾는 횟수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성격은 정반대였다. 그럼에도 둘은 상당히 잘 어울렸으며 서로에 대한 호감이 깊어만 갔다. 빙화는 유독 자운 앞에서만 입을 떼었다. 심지어 사부인 천황부주에게도 마찬가지였는데 자운에게는 무엇 때문인지 스스럼없이 대하곤 했다. 주로 먼저 화제를 이끄는 쪽은 자운이었지만 빙화 또한 비교적 적극적으로 대화에 참여했다.
“동생은 무공에 대한 욕심이 강하지 않은 것 같아.”
“네.”
“무림에서 믿을 수 있는 건 결국 자신 뿐이야. 그 누구도 믿어선 안되지. 심지어 사부도 때로는 적이 될 수도 있으니 말해 무엇하겠어. 그러니 자신을 지키고 살아 남으려면 강해지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빙화 또한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원래가 그다지 무공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무림인이 되어야 했지만 만약 스스로의 삶의 형태를 다시 선택할 수 있다면 무림인은 되고 싶지가 않았다.
“두 분 소저께 아룁니다.”
밖에서 들려 온 소리에 자운이 답했다.
“뭐냐?”
“천주께서 두 분을 모셔 오라 하셨습니다.”
“사부가? 알았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자운의 얼굴은 살짝 찌푸려져 있었다.
빙화는 자운의 아무렇게나 지껄여대는 말에 보일 듯 말 듯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내실로 들어서던 자운은 흠칫한다. 그것도 잠시, 안으로 들어서며 큰 소리로 말했다.
“사부, 무슨 일인데 사람을 오라 가라 하는 거야?”
혈마천주 옆에 있던 천황부주는 한두 번 보는 장면도 아니었지만 볼 때마다 기분이 좋지가 않았다. 버릇이 없다는 말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았다. 아무리 좋게 보아 준다 해도 저건 아니다 싶었다. 그녀와는 달리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며 들어서는 빙화를 보며 흐뭇한 표정이 되어 가는 천황부주! 그리고 그들 옆에 상석을 차지하고 앉아 있는 사람이 있었다. 천마였다.
“어서 오너라. 이 분께 인사를 드리도록 해라.”
“소녀 빙화라 합니다.”
“자운이는 뭐 하는 게냐? 어서 인사 올리지 않고? 이 분이 바로…….”
혈마천주의 말을 자르며 자운이 끼어들었다.
“무척 강하군. 전율이 일 정도로 말야. 한 번 붙어 보고 싶어. 이건 진심이야.”
다짜고짜 해대는 반말에 혈마천주와 천황부주는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들의 염려와는 달리 천마의 표정엔 전혀 변화가 없다. 그렇지만 그의 내심은 그렇지 않았다.
‘조금 전 안으로 들어서며 놀랐던 것은 날 알아 봐서가 아니었던가? 예전의 기억이 사라진 것도 아니라면서 날 알아 보지 못하는 것 같으니…….’
그랬다. 그것이 궁금했던 것이다. 천마가 굳이 이곳을 찾은 건 그녀를 보기 위함이었다. 자운이 무슨 대법인가를 받아 옛 기억을 되찾았다는 것까지는 들어 알고 있던 차였다. 광마존과 파천에 대한 기억을 지니고 있는지의 여부가 궁금했다.
“무슨 말버릇이냐. 네가 이 분이 누군지나 알고서 그런 말을 하는게냐?”
“누구든 무슨 상관이람. 사부! 저자가 교주야?”
혈마천주의 나무라는 말에도 자운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눈치를 보고 있던 두 무왕이 천마가 불쾌해 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자 그제야 안심하는 눈치다. 그들로서도 천마는 두렵기만 한 존재였다. 그가 발작이라도 하는 날에는 심히 곤란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혈마천주는 속으로 치밀어 오르는 부아를 삭히느라 힘들었다.
혈마천주의 상태와는 아랑곳없이 천마가 조용한 어조를 흘렸다.
“너는 나를 알아 보지 못하는구나.”
“당신 나 알아?”
“안다.”
“우리가 언제 만난 적이 있었던가?”
“난 천마다.”
그 말에 자운도 빙화도 경악했다. 세상에 천마라니, 라는 표정들이었다. 아직까지 무황성의 하부 고수들에겐 지옥마황이 천마라는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다. 일월교주와 내밀원주, 마전주가 함구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만약 그것이 알려진다면 일대 혼란을 각오해야 할 지도 몰랐다.
“진정 날 모른단 말이냐?”
“알긴……알지……요.”
자운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주눅이 들었다. 스스로 어느새 존대를 쓰고 있다는 사실도 느끼지 못했다.
“어떻게 알지?”
“세상에 천마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흐음, 날 예전에 본 적은 진정 없단 말이지?”
“네.”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광마존은……기억나느냐?”
“광마……존?”
“모른단 말이냐?”
“몰라요.”
너무도 쉽게 부정하는 말에 천마는 더 이상 물어 보아야 소용이 없음을 알았다. 천마와 자운간의 대화를 주의 깊게 듣던 혈마천주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저 아이는 예전의 기억만 지니고 있을 뿐입니다. 섭혼술에 당했던 시기는 전혀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런가? 확실한가?”
“지금으로서는……”
“사부, 무슨 말이야? 섭혼술에 당하다니? 내가 그런 하잘 것 없는 수법에 당했었단 말야?”
“끄응.”
천마는 천향옥봉 자운의 모습을 보며 가슴 한구석이 허전해지는 걸 느꼈다.
‘광마존의 그 애틋한 사랑이 무의미한 것이 되어 버렸나 보군.’
´UA½³? AU¿iAC AI°u ºn½ACN ≫oE²AI ¶C CN ¹ø ¹u¾iA³´U. 이번엔 자운이 아닌 빙화였다. 천황부주는 빙화를 데리고 혈마를 찾았다. 애초의 계획대로 혈마를 자신들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시도였다., 혈수천자의 의식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기를 바라면서 혈마의 처소를 찾았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이 아이를 모르시겠습니까?”
천황부주의 기대와는 달리 혈마는 간단히 고개를 저었고 대신 엉뚱한 얘기만 했다.
“예쁜 아이군. 이 아이를 내게 상납하려 한다면 두고 가라.”
빙화가 받은 충격은 천황부주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빙화는 심적인 충격을 다스리지 못하고 실신할 지경이었다. 사형이 자신을 알아 보지 못한다니 그만 눈시울이 붉어지며 서글픔에 북받쳤다. 예전의 기억이 새록새록 솟으며 빙화의 눈에 눈물을 만들었다. 울고 있는 빙화를 향해 혈마는 또 한 번의 비수를 던졌다.
“감히 내 앞에서 눈물을 보이다니……. 흥미가 떨어졌다. 데려 가라. 난 톡 쏘는 가시와 같은 아이가 좋다.”
천황부주는 그 순간 엉뚱하게도 쳔향옥봉 자운을 떠올렸다. 두 사람은 혈마의 처소를 나오며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무황성을 나온 사황성주는 발빠르게 움직여 나갔다. 세력 정비가 끝나자 막바로 중원 탄압에 들어갔다. 한 손엔 검을, 다른 손엔 복종을! 둘 중의 하나의 선택을 강요하였지만 그들을 막아 줄 세력이나 인물은 드넓은 대륙을 뒤져 보아도 눈에 띄지 않았다.
제일 먼저 무림 문파의 대상이었는데, 규모와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단 세 명만으로 구성되었다. 굴종이 아니면 죽음을 맞아야만 했다. 절강성과 복건성은 완전히 아비규환의 장이 되고야 말았다.
목숨 그 자체만이라도 부지하려면 하루 바삐 성을 벗어나 도주해야만 했다. 가족을 버리고, 친지를 버리고, 삶의 터전을 버려 두고 타지로, 타지로 향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언제까지고 무황성을 떠날 것 같지 않던 혈마천과 천황부가 중원 각지로 흩어져 그들과 동일한 행동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은 더했다. 일가 중 단 한사람이라도 무림인이라면 그 가족 구성원 모두는 심의의 대상이었다. 죽일 자와 살릴 자로 구별하는 기준은 영원한 충성을 맹세하는 것이었고, 그건 피로 쓴 혈서로만 인증되었다. 이민족의 지배에서 벗어난 지 이제 얼마나 되었다고 또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가, 하고 한탄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항주의 기루인 매향루에서 총관을 보는 장욱은 한 대 모산파의 문하로 있는 적이 있었다. 젊은 시절 삼 년 남짓 있다 견디지 못하고 줄행랑을 친 기억이 있었으므로 스스로 무림인이라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위인이었다.
이후 대륙을 떠돌아 다니며 온갖 잡다한 일을 하며 겨우 겨우 연명해 가다 어찌 어찌하여 항주에 자리 잡게 되었고, 이제 어느덧 이십년이란 세월이 흘러가고 있었다.
기녀 중 하나와 눈이 맞아 제법 그럴듯한 가정도 꾸몄고, 사내 둘에 여식 하나들 둔 어엿한 가장이기도 했다. 기루의 총관이라 해봤자 전반적인 기루 운영은 루주가 직접 관여했기에 그가 하는 일이라고는 기녀와 손님 관리에만 신경 쓰면 그만이었다.
그는 해가 중천에 걸려서야 때늦은 식사를 하고 기루 곳곳을 돌아보는 중이었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면 손님이 꼬이기 시작하고, 자정이 지나면 빈 방 하나 남지 않을 정도로 제법 장사가 되는 기루였다.
그의 꿈은 이 정도는 아니더라도 작은 기루 하나를 장만해 꼼꼼하게 운영해 보는 것이었다. 이곳 항주에서라면 아무리 작은 기루라도 총관이 지금보다야 나을 것이라 생각했다. 남의 일을 한다는 것이 주는 정신적인 피로감은 둘째치고, 근래 들어 여러 골치 아픈 일이 빈번하였기에 이런 그의 생각이 점차 구체적인 계획으로 굳어져 가는 중이었다.
“야, 이 년아. 네 방은 네가 치워야 할 것 아냐. 이렇게 해놓고 손님을 받을 참이냐?”
이곳 매향루의 내실은 각기 기녀들에게 배정되어 있었는데 지정 손님이 없거나 신참내기들인 경우엔 따로 숙소를 마련해 두고 있었다.
장욱은 오늘도 각 내실을 돌아보며 청소 상태를 꼼꼼히 점검했다. 아직 옷도 제대로 걸치지 않은 거의 알몸뚱이로 그 앞을 왔다 갔다 하는 계집들을 보며 큰 소리로 재촉하기 시작했다.
“조금 있으면 루주가 오실 것이다. 만약 그때까지도 청소 상태가 시원치 않은 것들은 오늘 장사 공칠 줄 알아.”
말은 저렇게 하면서도 그가 얼마나 자신들을 챙겨 주는지 잘 알고 있는 기녀들은 엉덩이를 실룩이며 한마디 하는 걸 잊지 않았다.
“알았어요. 맨날 그 잔소리. 우리가 언제 게으름 피는 것 봤어요?”
“그러게 말이다. 오라비는 다 좋은데 저 잔소리가 너무 심해. 턱에 수염이 났으면 좀 진득한 맛이 있어야 할 게 아니야.”
“호호호, 수염이 나면 뭐하니? 사내 구실을 제대로 못 하…….”
“뭐? 이것들을 그냥.”
“아, 아니예요. 하면 되잖아요.”
쪼르르 자기 방으로 달려가서는 야단법석을 떨어대었다. 요란하게 장식이 되어 있는 방이 있는가 하면 기녀의 방 치고는 단순하게 치장된 곳도 있었다. 총관은 방들을 돌아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 오늘도 열심히 돈 벌어 보자고. 이곳 항주의 사내놈들 돈은 다 너희들 것이지 않느냐?”
“항주뿐이겠어요?”
“호호호호”
장욱은 복도를 되돌아 나와 아래층으로 향했다. 그가 마지막 계단위에서 바닥으로 발을 딛으려 할 때였다. 서너 명의 인물들이 문을 부수듯이 밀어젖히고는 안으로 들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무슨 일……들이십니까?”
장욱은 내심 불안했다. 이런 시간에 남자들이, 더군다나 무사들이 들이닥친 경우란 그의 기억에도 전무했다. 일층의 사방에서 건장한 사내들이 긴장된 눈빛으로 천천히 걸어나오는 걸 보자 장욱은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일류 무사들이라면 모르지만 웬만한 파락호들은 작살을 내고도 남을 그의 동생들이었다.
“네가 장욱이냐?”
제일 앞에 선 자는 삼십대의 흑으무사였는데 눈빛이 여간 사나운 게 아니었다. 장욱은 직감적으로 고수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습니다만…….”
“너는 본 벌의 명이 그렇게도 하찮게 여겨지더냐?”
“무슨 말씀이신지…….”
“너는 무황벌에서 내린 명을 알고 있느냐?”
무황벌이란 말에 모여들던 장한들의 얼굴이 사색이 된다. 장욱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의 자세는 금세 달라졌으니 두 손을 앞으로 하고 허리를 반쯤 꺾었다.
“나으리,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도무지 알아듣지 못하겠습니다요.”
“이런 하찮은 것이! 잘 들어라. 본 벌에선 칠 일 간의 기한을 두고 항주에 있는 모든 무림인들에게 방문을 내렸었다. 충성서약을 하고 복종하는 자들은 살려 두되 그 나머지는 가차없이 죽인다는. 그것을 네가 보았든 보지 못했든지는 중요치 않다. 우리는 집행할 뿐이다.
“제, 제가 무슨 무림인이라고 그러십니까? 저도 그 방을 보았습니다. 제가 어떻게 무림인이 됩니까?”
“억울하냐?”
“그렇습니다. 억울합니다. 주루의 총관이나 하고 있는 저를 무림인이라 하신다면 그 누가 들어도 억지라 할 것입니다.”
“넌 예전에 모산파에서 삼 년 간 수련한 적이 있었지?”
“그, 그것을 어떻게…….”
“넌 십 일 저에 네 친구와 함게 객잔에서 술김에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네 친구인 우진량이 우리에게 이르길 넌 무림인일 뿐만 아니라 무황벌에 대해 여러 번 좋지 않은 감정을 드러낸 적이 있다 했다. 볼 것 없다. 죽여라.”
쉬익
뒤에 서 있던 고수 중 하나가 어느새 손에 검을 쥐고 장욱의 전면을 긋고 있었다. 장욱은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의 본능적인 반사 신경보다 검의 속도가 더 빨랐다.
“커억.”
얼굴을 반쯤 가르고 어깨와 가슴까지 갈라 버린 검은 어느새 제 집으로 돌아간다. 저항 한 번 못해 보고 죽은 자는 서서히 쓰러져 갔다.
“대형.”
장한들이 울분을 토했다.
“저놈들도 죽여라. 이 기루는 지금 부로 적대 조직으로 판명되었다.”
세 명의 고수들이 사방을 향해 튀어나갔다. 그들의 몸 동작은 일반인들의 육안으로는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쾌속이었던지라 이내 장한들 사이에서도 죽음을 알리는 비명들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끄악.”
“꺼억, 억울……해.”
“사, 살려, 컥”
무자비한 살수는 단 한 명의 생존자도 허락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더 이상 소리 지를 자는 남아 있지 않았는데, 비명은 엉뚱한 곳에서 터져 나왔다. 이층 계단 위에서 장내의 참경을 발견한 한 기녀가 있는 힘껏 비명으르 지른 것이다.
“까악, 사, 살인이다.”
“죽여라. 하나도 남김없이.”
뒤이어 메마른 살인 명령이 또다시 이어졌다. 세 명의 고수들은 이층으르 향해 몸을 날렸다. 장내에 홀로 남은 흑의무사는 바닥에 엎어져 있는 장욱의 시체를 발로 툭 걷어찼다. 뒤 이어 그의 입에서 흩어 나온 말은 장욱이 살아 들었으면 더 억울할 뻔한 소리였다.
“네 친구 놈이 내게 이르길 네 예쁜 부인과 딸만은 잘 챙겨 주겠다고 하더구나. 친구간의 의리를 다 한다나 뭐라나. 그러면서 말이다. 하하하하.”
분 냄새 가득했던 매향루가 졸지에 혈향만이 넘실대는 공동 무덤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이중에선 아직 끝나지 않은 죽음의 집행을 알리는 소리들이 간간이 들려 오고, 그들의 삶이 고단했던 만큼 비명소리는 더욱 애절하기만 했다. 삶에 대한 미련을 담은 소리여서 더 그런 것 같았다.
사천성과 섬서성이 인접하는 분천이라는 곳은 예로부터 척박한 땅에 비해 인재가 많이 나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명을 세운 주원장을 따르던 인물들 중에 나중에 유입된 인사는 열에 셋은 분천 출신이었다. 이런 이유로 근처의 지역 유지들이나 무문 등에서도 이곳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뒤에 철쭉으로 산을 두르고 앞으로 맑은 내가 흘러 사시사철 맑고 투명한 고을이었다. 아이들은 집 앞에서 뛰놀고 어른들은 땀을 흘려 일했다. 저마다 분수를 알아 자족하며, 웃으며 사는 사람들이었다.
나라에 법이 있으나 굳이 애써서 드러내지 않아도 될 만큼 순박하고 정이 넘치는 고을에 사단이 났다. 어느 날 고을의 촌장격인 장노인의 집 손녀가 눈 속에서 얼어 가는 젊은이를 데려 왔다. 곧 넘어갈 듯 하던 생명을 모질게 이어 가던 젊은이는 가슴에 큰 상처를 입고 있었다. 시름시름 앓는 환자 앞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간호하던 경운하의 정성이 통했음인지 점차 숨을 진정시키며 눈을 뜨기에 이르렀다. 그 젊은이의 눈으로 사물을 분별하기 시작하자 엉뚱한 소리를 늘어 놓았다.
“날 구해 주신 은혜는 고맙기 이를 데 없으나 나로 인해 이 마을에 재앙이 닥칠까 두렵습니다. 이제 기력이 돌아 왔으니 제 갈 길로 가겠습니다. 이 은혜는 죽어서도 잊지 않겠습니다.”
또박또박 뱉어내는 말을 경운하도, 그의 할아버지 경노인도 들었지만 처음에는 대수롭게 생각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만류에도 끝끝내 일어서려던 젊은이가 기혈이 역행하여 다시 혼절했기 때문이다. 엄동설한에 멀쩡한 생명을 내몰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한동안은 젊은이를 거둬야 할 판이 되자 그가 한 말이 마음에 걸리기 시작했다. 급기야 경노인은 마음의 남자들을 불러 모아 회의를 열었다.
여러 가지 의견들이 오가고 때로 대립하기도 했지만 결론은 한 가지였다. 인간으로서 위경에 처한 자를 모른 척할 수 없다는 것. 마을에 화가 미치리란 말이 걸리긴 했지만 설마 하는 심정들이었다.
젊은이가 경노인 집에 누운 지 열흘이 안 되어 수상한 사람들이 근처를 오가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흔히 말하는 무림인일 것이라고 생각한 마을 청년들은 이 일을 경노인과 어른들에게 알렸다. 그들이 누군가를 찾고 있고, 근처를 서성이는 것을 보아 아마도 그 젊은이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노인들은 그들 몰래 동리 밖으로 피신시키자 했다. 모두들 이 의견에 동의하여 이제 겨우 운신하게 된 젊은이를 일으켜 경노인의 손녀와 동네 청년 두 사람을 붙여 철쭉산을 넘어가게 했다.
벅차고 힘에 겨웠던지 몇 번인가를 비틀거렸다. 걸음을 멈추었다. 젊은이의 몸은 불덩이를 방불케 했지만 그의 딱한 처지만을 돌볼 수는 없는 입장이었다. 경운하는 쉬었다 가자고 했으나 청년들은 막무가내였다. 이 자가 제 입으로 화가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고, 그것은 청년들을 조급하게 만들었다.
몇 달 전에 장가를 가 어엿한 한 집안의 가장이 된 철연은 더 한 심정이었다. 안 사람이 임신을 한 것을 며칠 전에 알게 된 그로서는 어떤 일이든 위험은 피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 그들의 앞길을 누군가가 막아섰을 때 그들은 아무런 생각도 떠올리지 못했다.
“흐흐, 역시 그 마을에 있었구나. 마을 안으로 들어섬을 금지 당해 내심 분통을 터뜨리고 있었는데 네가 제 발로 나와 주니 이보다 좋은 일이 없구나. 네 운도 여기서 끝이다.”
“그래, 나도 지쳤다. 이제 끝내자. 대신…… 마을 사람들은 해치지 마라. 나 하나의 생명으로 끝내자.”
젊은이는 그 말을 하며 자신으르 부축하고 있던 경운하를 살짝 밀쳤다. 조금 전까지 서 있기도 힘들어 하던 그에게 무슨 힘이 생겼는지 꼿꼿하게 몸을 세운다.
“네 생명을 거두는 건 당연한 일이지. 네가 부탁하지 않아도 그 마음을 들어서지 못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젊은이는 무슨 말인지 얼른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은인들의 안위가 보장되었으니 이제 죽으면 그만이라 생각했다.
“그렇지만 마을을 떠나 온 계집과 두 놈은 죽여야지. 크크크.”
흑의의 중년인은 험악한 인상을 더욱 기괴하게 만들며 미소 아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젊은이는 다급하게 세 명의 은인들 앞을 막아섰다.
“그런 식으로 나온다면 나도 그냥 당하고 있지만은 않겠다.”
“물론 네가 예전 상태 그대로였다면 난 네 앞에 이렇게 서 있지도 못했겠지. 허나 넌 제대로 서 있기도 힘이 들지 않느냐. 괜한 오기 부리지 말고 그냥 가거라.”
스르르릉
검으르 뽑아든 자의 팔뚝 혈관들이 심하게 꿈틀거리며 요동쳤다.
“안 될 일!”
뒤에서 들려 온 소리에 흑의 무사는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세웠다. 번개가 무색한 몸놀림이었지만 헛된 몸짓에 불과했다.
번쩍
무엇이 어찌 된 연유인지를 알아 본 사람은 젊은이 하나였다.
쩌억
흑의 무사의 몸은 반으로 갈라져 갔다. 무슨 수법으로 죽었는지 내장이 쏟아져 나왔는데도 꽁꽁 얼어 피조차 흘러 나오지 않았다. 젊은이는 경악했고 나머지 사람들은 반가움을 드러내었다.
“장 아저씨.”
경운하의 기억에 십여 년 전이가부터 마을에 들어와 살기 시작한 인물이었다. 말이 없고 과묵한 성격이었지만 당시 동네 아이들이 가장 따르고 좋아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낚시와 사냥술을 아이들에게 가르쳤고, 때때로 상처 입었을 때 어떻게 치료하는지와 수맥을 찾는 법, 별자리를 보고 길흉을 아는 법까지 온갖 잡다한 것을 가르쳐 준 사람이었다. 훌쩍 큰 키에 당당한 체구를 지닌 장 아저씨는 빙그레 웃고 있었다.
“운하야, 어서 마을로 돌아 가거라. 촌장님께 인사도 드리지 못하고 떠나게 되어 송구하다고 일러 주고, 그 동안 모두들 즐거웠다고 전해 다오.”
마지막 인사일 거라고 운하는 생각했다. 언제나 옆에서 친숙한 존재로 있을 거라 여겼던 사람이건만 이 순간 경운하는 장 아저씨를 예전의 그로 느낄 수가 없었다. 이미 다른 세계에 있는 존재를 향해 그녀는 고개를 숙여 보였다.
“아무쪼록 조심하세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두 청년들도 인사만 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졌다.
“당신은 혹시…….”
“그래, 난 혼세마인 중 하나다.”
“그런데 어찌 당신이 날 도와 주는 겁니까> 내게 이미 척살령이 내렸을 텐데.”
“네가 일족 중 유일하게 살아 남았더냐?”
“그렇습니다. 어디서 오신 분입니까?”
“태양이 지는 곳에서 왔다.”
“역시……그러셨군요.”
“안타까운 일이지. 너희가 뜻을 이루었다면 혼세령은 발동되지 않았을 터인데.”
“혼세령이 발동되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너를 쫓던 아이들은 내가 모두 처리했다. 달이 뜨는 대지에서도 혼세마인들이 나올 것이다. 그들을 만난다면 살아남기 힘들테지. 아무쪼록 살아남기를 바란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젊은이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젊은이는 멀어져 가는 사내를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이제 희망은 없는 겁니까?”
사내는 뒤돌아 보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아무도 모른다. 그렇지만 희망은 애초에 있지도 않았다. 단지……늦출 수는 있었건만……. 잠들어 있던 대지들이 깨어나기 시작하면 세상은 지옥이 될 것이다. 멀리……멀리 떠나거라.”
이제는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린 사내의 흔적을 젊은이는 여전히 눈으로 좇고 있었다.
“그랬던가…… 하늘이 세상을 버린 건가. 그토록 깨어나지 않길 바랐건만……. 교주. 당신은 진정 세상의 멸망을 원하는 거요?”
들어도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젊은이는 혼세마인이 사라진 방향으로 걸음을 떼었다. 붉은 노을이 젊은이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