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 나이트 – 125화
연기가 바람에 날리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히렌과 메이린은 스파크의 실체를 보고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크, 크리스!?”
연기가 걷힌 자리에는, 손에서 뿜어지는 푸른 기로 땅바닥에 마법진을 그리고 있는 크리스의 모습이 있었다. 마법진이 완성되고, 크리스는 천천히 손을 모아 주문을 외웠다.
“계약에 의해 주인을 섬기는 수라의 검이여… 이제 모습을 드러내어 주인에게 다시 복종하라!”
그녀의 주문이 끝나자, 마법진에선 검은색의 날을 가진 검 두 자루가 솟아 올랐다. 벨벳 크로스, 주인을 가린다는 수라계의 마검. 양손에 검을 쥔 크리스는 마법진이 사라짐과 동시에 검술 자세를 취하였다. 그러자 언제나 조용하기만 하던 그녀의 몸에서 붉은색의 투기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는 메탈재킷을 향해 맹렬히 대시하기 시작했다.
“크리스… 가?”
엘리마이트 빔이 쏘아지기 직전, 몸을 메탈재킷에게 날린 크리스는 자신의 검 벨벳 크로스로 엘리마이트 포대를 순식간에 잘라버렸다. 그리고 메탈재킷의 동체 위에 먹이를 잡은 야수처럼 자세를 취한 그녀는 다시 한번 검을 휘둘러 메탈재킷의 해치를 간단히 날려보내었고, 그 안에 있던 탑승자의 목숨도 같이 날려보내었다. 메탈재킷의 블랙박스를 꺼낸 크리스는 자폭 스위치를 누른 후에 메탈재킷에서 빠져나갔다. 곧 메탈재킷은 산산조각이 나며 사라졌고, 크리스는 블랙박스의 메모리 카드를 뽑아내어 전투 기록을 무용지물화 시켰다.
“… 후우….”
크리스는 한숨을 쉬고서 히렌과 메이린에게서 돌아섰다.
“크리스….”
메이린은 크리스가 고개를 돌리고 그대로 서 있자,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잡아주었다. 크리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메이린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크리스… 어째서…?”
“… 리오가 오면 얘기해줄게… 잠시만 참아주렴….”
“…!”
리오는 멀리서 들려온 폭음 소리에 흠칫 놀랐으나 계속해서 바이론에게 공격을 가했다. 그러나, 바이론은 뒤로 물러서서 검을 거두었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살기도 사라져갔다.
“후후후… 예상 외의 일이 벌어진 것 같군… 훗, 어쨌든 좋아, 나도 물러갈 때가 되었으니 말이야. 그러나, 그전에 정의의 기사님께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는데…?”
리오는 자세를 여전히 취한 상태에서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바이론이 자신에게 무엇을 묻겠다고 한 것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어서였다.
“넌 너 혼자서 제국을 쓰러뜨릴 거냐?”
“뭐…?”
바이론은 자신의 큰 중절모를 다시 쓰면서 계속 말했다.
“넌 모르고 있다… 네가 지금까지 싸워온 제국은 허상에 불과한 것이라는 걸 말이야, 넌 제국의 힘을 과소평가하고 있어… 후후후후후…!”
그 말을 들은 리오는 검을 내리고서 놀란 표정으로 바이론에게 물었다.
“뭐!? 무슨 헛소리냐 바이론!!”
바이론은 돌아서며 마지막으로 리오에게 말했다. 여태까지의 차가운 분위기와는 다른 바이론의 말투는 이상할 정도였다.
“… 제국의 힘이 너 하나의 힘으로 박살 날 정도면 주신께서 지크 녀석이나 슈렌 녀석을 지원으로 보내셨을까? 후후후… 어쨌든 지켜보겠다. 네가 제국의 제궁까지 무사히 들어올 수 있는지를 말이야…! 하하하하하!!!”
웃음소리를 남기며 사라져간 바이론의 뒤를 리오는 추격하지 않았다. 바이론의 말이 신경에 거슬려서였다. 리오는 다시 뒤로 돌아 일행이 있는 곳으로 최대한의 속력을 내어 향하면서 중얼거렸다.
“제국의… 진짜 힘…?”
리오가 도착했을 때 그의 눈에 보인 것은 메탈재킷의 잔해와 흑색의 날을 하고 있는 검을 든 채 서있는 크리스와 히렌, 메이린의 무사한 모습이었다. 리오는 한편으론 다행이라 생각하면서 크리스의 모습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 모두 무사해서 다행이야, 그런데 크리스는…?”
리오가 크리스를 바라보자, 그녀는 검을 들고 리오에게 천천히 향하였다. 메이린은 무언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크리스에게서 흐르기 시작하자 그녀의 앞을 막아서며 소리쳤다.
“크, 크리스! 이러지 말아요!!”
크리스는 자신의 앞을 겁에 질린 표정을 지은 채 막고 있는 어린 소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 미안해 메이린, 비켜줘 제발….”
크리스가 보통 사람과 별 다를 것 없이 말하는 것을 본 리오는 팔짱을 끼고서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 그 흑색의 검…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설마 크리스가…?”
크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표정엔 그늘이 져 있었다. 아주 슬픈 듯한… 무언가 말하기 싫은 일을 밝히기 직전의 표정이었다.
“리오가 생각하는 대로에요… 제 본명은 크리나 바리하이크. 제국 오마 장군의 일인…이었지요. 기억 날 거예요 리오 씨, 가이라스 수도의 성문 앞에서 처음 만났었지요 우리는….”
리오는 쓰디쓴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자신의 예상이 틀리길 바랐을지도 모른다.
“후훗… 그래, 그렇다면 그때의 철가면이 당신이었다, 이거지?”
크리스는 계속 고개를 숙이고서 말을 이었다. 메이린도 크리스의 말을 듣고는 충격을 받은 듯, 눈을 크게 뜬 채 크리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예… 그 일이 있은 지 얼마 후, 전 황제 폐하의 추방 주문으로 제국의 항구도시 보르이크에 떨어졌지요. 가진 것이라고는 옷 한 벌… 추방되고 나서부터 전 당신을 만나기 직전까지 거의 폐인이 되어 도시의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녔어요. 그렇게 된 지 거의 2주일이 될 무렵, 전 그토록 원수를 갚겠다고 생각한 당신을 주점에서 만나게 된 거예요. 그리고 다음날, 저와 만나기로 한 공원에서 메탈재킷을 만났었지요? 그들을 부른 것이 바로 저였어요….”
리오의 눈은 가늘게 변해 있었다. 그 다음에 그녀가 한 일이 무엇인지 예상할 수 있어서였다. 리오의 팔엔 힘이 들어가 있었다.
“… 마을을 거의 전멸시킨 메탈재킷 부대도 나 때문에 당신이 부른 건가…?”
리오의 그 말을 들은 크리스의 뺨에는 반짝이는 것이 흘러내렸다. 크리스의 입술은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 예, 그러나 그때, 메탈재킷 부대가 당신만을 노리지 않고 마을 전체에 포격을 가한 후에 나머지 마을 사람들도 죽이려고 하자, 전 무엇이 옳은 것인지 다시 한번 의문이 들었어요. 그리고 그들을 처리한 후 리오가 저에게 웃으면서 말해주었을 때… 전 이때까지 느낄 수 없었던 것을 느낄 수 있었어요. 그래서 틈이 나면 당신에게 접근한 것이었죠. 제 안에 있는 오마 장군 크리나 바리하이크의 존재를 지우기 위해서요… 그러나, 이젠 어쩔 수 없군요. 다시는 뽑지 않으려고 생각한 이 검을 다시 들고 크리나 바리하이크의 살인 검술을 사용했으니요.”
크리스는 손으로 눈물을 닦고서 리오를 바라보았다. 전의가 담겨 있긴 했지만 살의는 없는 눈이었다. 리오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려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 크리나 바리하이크로서, 당신에게 도전하겠어요. 그게 저의 원래의 목적이고, 리오도 역시 마을의 일을 생각해서 저를 없애고 싶을 테니까요. 그럼….”
메이린은 크리스가 천천히 검을 올리자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말리기 시작했다. 리오도, 크리스도 잃고 싶지 않은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그만해요! 리오는 용서해줄 거예요, 반드시 용서해줄 거라고요! 제발 싸우는 건 그만해요!!!”
그러나, 그녀의 말과는 반대로 리오는 디바이너를 천천히 빼어들었다. 그런 리오를 뒤에서 잡은 것은 히렌이었다.
“왜 그래요 리오! 설마 진짜로 크리스를 죽이려는 건…!”
리오는 히렌을 강제적으로 떼어 놓으면서 소리쳤다. 분노가 가득 실린 음성이었다.
“시끄러워! 지금 우리들의 앞에 있는 여자는 크리스가 아니야! 크리나 바리하이크란 말이야!! 저 여자가 무슨 짓을 했는지 너희들도 알고 있잖아! 무고한 사람들을 단순한 복수심 때문에 희생시켰다고!!!”
메이린은 리오가 그렇게까지 흥분하며 소리치자 울음을 터뜨리며 이번에는 리오에게 매달렸다.
“아, 안돼요!! 제발 이러지 말아요 리오! 크리스를 용서해줘요!!!”
리오는 귀찮다는 듯 메이린까지 밀어낸 후에 크리스를 향해 자세를 취했다. 크리스도 자세를 취했으나 리오처럼 살기는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거의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였다.
“와라, 오마 장군 크리나!!!”
크리스는 굳은 표정으로 리오의 말에 따라 그에게 돌진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리오도 마찬가지로 크리스에게 달려들었고 쌍방의 검은 결국엔 충돌했다. 처음의 몇 분간 둘은 거의 호각인 듯하게 보였으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밀리는 것은 크리스였다. 속도에서는 거의 차이가 없었으나 힘에서 밀리는 것이 확실히 보여졌다. 그리고 검의 기교도 상당한 수준의 차이가 있었다.
크리스의 왼팔에 리오의 검이 스쳤고 약간의 피가 공중에 뿌려졌다. 크리스의 얼굴이 통증에 약간 일그러졌지만 그녀는 결코 물러서지 않을 생각인 듯했다.
“그만해요! 둘이 싸우는 것, 보고 싶지 않아!!”
메이린의 울부짖음에도 불구하고, 리오의 검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의 몸에서 뿜어지는 살기의 공포 때문인지, 아니면 안타까움 때문인지 히렌은 꼼짝하지 않고 둘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당신 때문에 영문도 모르는 채 죽어간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 아나! 그리고, 당신 때문에 가족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슬픔을 아나!! 난 용서 못 해, 용서 못 한다구!!!”
리오의 분노가 서린 일격이 크리스의 검을 쳤고, 두 자루의 검 중 하나가 부러져 나갔다. 크리스는 나머지 검 하나를 양손으로 쥐고 다시 리오와 싸워나갔다. 리오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계속해서 말을 해 나갔다.
“존재를 지운다고? 웃기지 말아! 이 세상이 뒤집어지지 않는 한 당신이 크리나인 것은 변하지 않아, 사람들의 기억 속에, 무덤의 글귀에! 크리나의 기억은 지워지지 않을 거야! 단순히 이름만 바꾼다고 바뀌는 것이 아니야!!”
공중에 반짝이는 것이 흩어져 날리기 시작했다. 지금은 정오가 가까워진 시간이어서 이슬일 가능성은 없었다. 그 물방울들은 크리스의 눈에서 흩날리고 있었다. 결국 디바이너가 나머지 검도 두 쪽을 내어버리고, 크리스는 그 충격에 결국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메이린은 그것을 보고 그만 땅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리오는 표정을 바꾸지 않고 크리스를 향해 검을 높이 들었다. 크리스는 눈을 감고서 나지막이 말했다.
“이제… 끝내주세요, 리오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