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 나이트 – 135화
“… 프시케…는 어디 있겠지 뭐.”
지크는 빙긋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또다시 달라진 그의 태도에 일행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어, 뭘 보는 거야? 어서 찾아보자구.”
일행은 지크가 다시 예전처럼 돌아오자, 별 걱정이 없다는 듯 서로를 부축하며 일어섰다. 그러나, 리오만은 벌레 씹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 녀석… 괜찮은 거야?”
그들은 형제였다. 서로의 이상점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는 사이였다. 하지만, 지크의 이상점이 겉으론 드러나지 않는 것임엔 틀림이 없었다. 리오는 고개를 흔들며 일행에게 말했다.
“자, 우선은 내가 묶고 있는 여관으로 가자구. 거기서 좀 쉬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리고 새로운 친구들도 만날 수 있을 거야.”
리오의 말을 들은 리카와 클루토는 다시 어린아이가 된 듯 좋아했지만, 세레나는 뭔가 불안함을 떨칠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들었던 리오의 행적을 보아와선….
“세레나 씨는 안 갈 거예요?”
리오가 엄지손가락을 펴 보이며 가자고 하자, 세레나는 잠시 생각을 지우고 웃음을 띄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크는 자신이 먼저 프시케를 찾아보겠다며 여관의 위치를 묻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리오는 지크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본 뒤에 일행을 데리고 언덕을 천천히 내려갔다.
크리스는 리오가 나가 있을 동안에 아이들과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이들은 크리스가 예전보다 많이 상냥해진 것에 기분이 좋은 듯, 거리낌 없이 터놓고 이야기를 했다. 얘기가 무르익어갈 즈음, 아래층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고 크리스와 아이들은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자자, 여기야. 어서 들어가서 좀 쉬거라.”
리오의 목소리와 함께, 노크 소리가 들려왔고, 크리스는 들어오라는 말을 문밖의 리오에게 해 주었다. 그러나, 문을 열고서 들어온 사람은 생전 처음 보는 피곤한 표정의 소년과 소녀였다.
“후우… 부축해 줘서 고마워요 리오. 어? 누가 있는데요…?”
리오는 아차 하면서 방 안으로 들어왔다. 크리스는 리오가 들어오자 무슨 일인지 알아보려고 침대에서 일어섰으나, 리오와 함께 세레나가 들어오자 그녀의 표정은 한순간에 굳어졌다. 그것은 세레나도 마찬가지였다.
“어, 이런… 모두 여기에 모여 있었군. 자, 모두들 인사해요. 이쪽은 다른 대륙에서 건너온 친구들이고, 저쪽은 이 대륙에서 사귄 새 친구들이고….”
리오는 웃으면서 서로를 소개시켜 주었으나, 갑자기 쌍방 사이에 차가운 공기가 흐르자 흠칫 놀라며 양쪽을 바라보았다.
“… 실망했어요 리오 씨…!”
세레나는 그 말을 하고 방 밖으로 뛰어나갔고, 크리스 역시 고개를 돌려버렸다. 피곤을 무릅쓰고 메이린에게 인사를 한 클루토는 히렌의 눈총을 받아야만 했고, 인사를 받은 메이린은 리카와 잠시간 눈을 마주쳐야만 했다. 이런 웃지 못할 상황 속에서 리오는 밖으로 뛰쳐나간 세레나가 더 급하다고 생각하고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방 밖으로 나갔다.
“어라…?”
세레나는 그리 멀리 있지 않았다. 문 바로 옆에 기대어 서서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리오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녀의 가는 팔을 붙잡았다.
“…?”
“잠깐 나하고 얘기 좀 해요.”
세레나는 리오가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나오자 속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리오는 세레나를 끌다시피 하여 밖으로 나간 후에, 그녀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얘기를 시작했다.
“뭘 실망했다는 겁니까?”
“예…?”
세레나는 리오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얼른 대답을 하지 못했다. 리오는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계속 세레나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간의 침묵 후에, 세레나는 입을 열었다.
“… 기분이 좋지 않았어요. 리오 씨가 다른 여자와 지금까지 있었다는 것 자체가….”
리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세레나는 계속해서 얘기를 이어나갔다.
“저도 제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당신이라는 사람이 저의 옆에만 있었으면 하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찰 때도 있어요. 하지만, 리오 씨는 제 옆에만 있기엔 너무나 할 일이 많은 사람이란 걸 저도 알고 있어요. 기다려 보자는 생각도 해보지만…. 언제까지나 기다릴 수는 없을 것 같아요.”
리오는 그녀의 얘기를 듣고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 절 너무 좋아하지 말아주세요, 세레나 양. 전 그냥 하급의 떠돌이 기사일 뿐이고 당신은 가이라스 왕국의 일등 귀족 가문의 장녀이십니다. 신분은 둘째치더라도 전 아직 심각하게 이런 일을 생각해본 일이 없습니다. 당신께는 너무나 실망스러웠을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제가 처한 상황으론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죄송하다는 말 외에는….”
세레나는 담담한 표정으로 리오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 알고 있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의 얘기가 끝나자, 세레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리오를 바라보았다.
“… 알겠어요 리오 씨. 역시 당신의 가슴속에 있는 ‘그녀’에겐 제가 당해낼 수 없을지도 모르겠군요….”
리오는 흠칫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세레나의 입에서 나올 줄은 상상도 못한 말이었던 것이었다. 리오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세레나는 자신의 말을 계속했다.
“… 하지만, 전 리오처럼,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그 말을 남기고 다시 방으로 들어가는 세레나의 뒷모습을 리오는 엷은 미소를 띠운 채 바라보고 있었다.
“나처럼… 포기하지 않으신다…? 후훗….”
리오는 머리를 몇 번 흔든 후에 한숨을 쉬고 자신도 다시 방에 들어갔다.
“쳇, 도대체 어딜 간 거야!”
지크는 갑자기 짜증을 내며 옆 건물의 벽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주먹 자국이 선명하게 남은 벽을 본 사람들은 지크의 주위에서 슬쩍슬쩍 벗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크는 그런 것 따위는 신경도 안 쓴다는 듯 계속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프시케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거의 한밤중이 되어서야 지크는 리오가 말한 여관에 돌아왔고, 아래층에서 인상을 쓴 채 지크를 기다리던 리오는 화를 내면서 지크에게 다가왔다.
“어떻게 된 거야? 여태까지 안 들어오고 말이야!”
지크 역시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평상시엔 이런 적이 없던 지크여서 리오는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 미안하다. 도시 전체를 돌아보느라고…. 근데 난 어디서 자면 되는 거냐?”
리오는 지크에게 따라오라는 손짓을 한 뒤에 자신의 방으로 인도했다. 방 안에는 히렌과 클루토가 멀찍이 떨어져 잠을 자고 있었다.
“아, 무명도가….”
침대의 옆에 비스듬히 놓여있는 자신의 칼을 본 지크는 손으로 몇 번 쓰다듬은 뒤에 다시 내려놓고 그 옆에 누웠다.
“… 방바닥에서 그냥 잘 거야?”
리오의 질문에 지크는 피식 웃으며 눈을 감았다.
“그럼 곰인형이라도 껴안고 자라고? 너도 잠이나 자라.”
말투엔 변화가 없는 것을 본 리오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침대 위에 누웠다. 오랫만에 마법을 사용한 날이어서 그런지 머리가 약간 띵 해왔다.
“후우… 복잡하다 복잡해….”
내일 출발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리오는 편안히 잠에 빠져들었다.
프시케는 자신의 의식이 돌아왔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의식을 잃기 전에 본 장면은 클루토가 메탈재킷에서 발사된 탄환을 맞고 쓰러지는 것, 그뿐이었다. 그녀는 살짝 몸을 움직여 보았다. 침대 위에 누워 있는 것 같지만 지금까지 사용했던 여관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더 편안하고, 더 따뜻한 느낌이었다. 좋다고만 생각하던 프시케는 갑자기 눈을 번쩍 뜨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 아니…!?”
그녀가 현재 있는 곳은 여관방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병원의 하얀 방도 아니었다. 호화로운, 듣고 있기만 하던 귀족의 방과 흡사했다. 침대와 이불 역시 여관에서 사용하는 가벼운 이불도 아니었다. 꽤나 두껍지만 가볍고 따뜻한 이불이었고 침대도 마찬가지로 고급 침대였다.
“도대체…? 지크 씨는, 클루토는…?”
갑자기 변한 주위의 환경에 놀란 프시케는 당황한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사람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누군가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하녀의 옷차림을 하고 있는 한 여성이었다.
“어머? 일어나셨군요 아가씨! 잠시만 기다리세요, 주인님께 말씀드리고 다시 오겠습니다.”
하녀는 다시 방을 나섰고, 프시케는 도저히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윽고, 하녀와 함께 화려한 옷을 입고 있는 한 청년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프시케는 그 청년의 얼굴을 보고 잠시 넋을 잃고 말았다. 그 정도의 미모를 그 청년은 소유하고 있었다. 청년은 프시케가 누워 있는 침대 옆에 앉아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정신이 드셨군요 아가씨. 이곳은 저의 집이니 안심하십시오.”
그 청년의 집이라는 소리를 들은 프시케는 더욱더 안심할 수가 없었다. 청년은 말을 계속 이었다.
“제 이름은 커드 버클레이라고 합니다. 실례지만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프시케는 약간 긴장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프시케… 그냥 프시케에요. 근데, 제 친구들은 어디 있죠?”
커드는 긴 한숨을 쉬며 미안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 제국군에 의해 그만….”
프시케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와 동시에 의구심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서, 설마요…! 다른 일행은 모를까, 지크 씨까지…!?”
커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프시케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어, 어떻게 그럴 수가…!”
흐느끼기 시작한 그녀의 가녀린 어깨를 커드는 살며시 안아주며 말했다.
“…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때 제가 할 수 있었던 일은 혼수상태에 빠진 당신을 구해내는 일뿐… 정말 죄송합니다. 아, 아직 몸이 좋지 않으신 것 같으니 더 누워계십시오, 전 다시 오겠습니다. 그리고 제 옆에 있는 클라렌에게 부탁하고 싶으신 것이 있으면 모든지 말씀만 하십시오.”
클라렌은 커드와 함께 들어온 하녀의 이름이었다. 그녀는 프시케에게 살짝 인사를 했고 커드는 몸을 일으키며 방을 빠져나갔다.
“전 그럼 이만…. 자주 들르겠습니다.”
프시케는 그가 나갈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몸을 웅크리고 눈물만을 흘릴 뿐이었다.
“어째서… 나와 친한 사람들은 모두 죽는 걸까…?”
커드는 방문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말끔한 복장의 하인에게 조용히 말했다.
“… 전 추기경들에게 연락을 취해라. 여신께서 다시 우리에게 돌아오셨다고 말이야, 알겠나? 그리고 황제에게도 전해라.”
하인은 자신의 안경을 어루만지면서 허리를 굽혔다. 커드는 자신의 장발을 위로 쓸어 올리며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후후후후… 이제, ‘힘’을 얻을 차례군….”
커드는 조용히 몸을 돌려 복도를 걸어나갔다. 그의 발자국 소리가 이상할 정도로 크게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