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 나이트 – 140화
9장. [외전]
한 군인이 말스 왕성의 알현실에 헐레벌떡 뛰어 들어오자, 왕좌에 앉아있던 큰 몸집의 사나이가 창백해진 얼굴로 병사에게 물었다.
“여봐라! 성문은, 성문은 어떻게 되었나!!”
병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침통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괴물입니다, 제 생전 그런 괴물은 처음 보았습니다! 성문을 부수고, 방어하던 전군을 어린아이 다루듯 완전히 쓸어버렸습니다, 그것도 단 혼자서…!”
그때, 그 병사가 단단히 닫아 두었던 방문이 퍼엉 소리를 내며 재로 화하였다. 불에 타 쓰러지는 문 뒤엔, 푸른색의 장발을 나빌리고 있는 한 사나이의 모습이 들어와 있었다. 그의 손에는 긴 창이 들려져 있었고, 그의 얼굴은 약간 찡그려진 채 의자 위에 앉아있는 덩치 큰 사나이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는 손가락을 그에게 향하며 말했다.
“어서 내려와라, 국민의 피를 너무 빨아먹어서 몸이 둔해졌나 보지?”
병사는 자신의 허리에 장비된 검을 뽑아 들고 그에게 달려들었다. 장발의 사나이는 눈을 지긋이 감은 채 자신의 창을 양손으로 빠르게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병사는 잠시 멈추어 섰고 의자에 앉아있는 사나이도 몸을 일으켜 어디론가 도망치려고 했다. 그러나, 창의 회전 속도가 상상 이상으로 빨라지면서 알현실 안의 공기 역시 강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결국 병사와 사나이는 바람에 못 이기고 뒤로 튕겨져 벽에 찰싹 달라붙어 꼼짝도 못 하게 되었다. 안면을 강타하는 바람은 그들의 호흡을 저지 시켰고, 호흡을 하지 못한 두 명은 몸을 경련시키며 괴로워했다.
“이 정도로만 해 두지.”
사나이는 양손으로 창을 잡아 회전을 정지시켰고, 벽에 달라붙어 있던 두 명은 바람이 멈추자 바닥에 떨어졌다. 창을 다시 등 뒤에 멘 사나이는 자신의 머리를 쓸어 내리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알현실에 피를 묻힐 순 없겠지….”
며칠 후.
국민들의 환호성과 함께 다시 성의 발코니에 선 말스 국왕은 태라트의 부축을 받으며 자신의 이름을 외치고 있는 국민들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영주들의 손에서 놀아나던 말스 왕국은 어제의 전투로 다시 말스 국왕에게 돌아왔었다. 왕의 연설이 끝나고, 왕성의 밖 이곳저곳에선 추수 감사절 이상 가는 대축제가 열려졌다. 물론, 먹을 것은 그리 없었지만 사람들의 표정은 다른 축제 때보다 더 밝았다.
그날 저녁, 슈렌은 말스 왕과 태라트 황태자에게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서 알현실에 들어왔다.
“아니, 조금 더 쉬었다가 가게나. 바로 떠난다면 섭섭할 것 같은데….”
슈렌은 언제나처럼 무뚝뚝한 얼굴로 살며시 고개를 숙여 미안함을 나타내었다.
“황공하옵니다만, 그럴 수가 없습니다. 저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또 생겨나서 말이지요. 그리고 떠나기 전에 한 가지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국왕과 태라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슈렌의 말을 계속해서 들었다.
“말스 왕국 안에 있는 마법사들을 빠른 시일 안에 수도로 집결시켜 주십시오. 이곳이 될지, 아니면 가이라스 왕국이 될지는 저도 잘 모르겠지만 최후의 전투에 대비하셔야만 합니다. 물리적인 공격력은 지금의 제국에겐 무효합니다. 오직, 마법만이 이 왕국을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국왕과 태라트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슈렌은 다시 허리를 굽혀 둘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그럼, 건강하십시오 두 분 다….”
태라트는 슈렌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잡고 답례를 해주었다.
“… 먼저 인사를 해야 할 건 우리 왕국인데, 자네가 먼저 인사를 하는군…. 정말 고맙네 슈렌.”
슈렌의 입가엔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미소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는 몸을 일으키고 양손을 펼쳐 자신의 기염을 풀었다. 붉은색의 화염이 그의 몸을 휘감았고, 화염이 사라지자 그의 몸도 같이 사라져갔다. 말스 국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굉장한 사나이군… 리오란 사나이 이상 가는….”
“그렇습니다 아바마마… 아, 궁중 마법사에게 파라그레이드를 버틀렌 족장님에게 넘겨주라고 명령했습니다.”
“음, 잘했구나. 근데, 그 소검으로 뭘 하겠다는 소린지 원… 어쨌든 기다려보면 알겠지….”
어느 숲속.
일행이 노숙을 하고 있을 무렵, 세레나는 옆에서 조용히 자고 있는 크리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주 깨끗한 얼굴에, 약간 다듬어지진 않았지만 아름다운 금발을 그녀는 가지고 있었다.
‘그 사람 주위엔 이런 미인밖에 없구나…. 하지만 난….’
세레나는 잠시 자신이 크리스에 비해 너무나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전에 리오의 앞에서 말했던 자신의 결심도 점점 자신이 없어졌다.
‘포기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세레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오늘 저녁은 그리 잠이 잘 오지는 않을 것만 같았다. 그녀가 잠든지 얼마 안 되어서, 이번에는 크리스가 눈을 뜨고 세레나를 바라보았다. 보석과 같이 빛나는 그녀의 검은 머리와 청순함이 느껴지는 그녀의 얼굴은 자신과는 너무도 다른 것이었다.
‘리오와 오랫동안 같이 있었던 여자 같은데….’
크리스는 팔베개를 하며 조용히 하늘을 바라보았다. 오늘 밤은 날이 맑아서 별을 모두 볼 수가 있었다. 반짝이는 별들에게 맹세라도 하듯이, 그녀는 중얼거렸다.
“… 절대로 지지 않을 거야.”
크리스는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둘이 이러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리오는 모닥불 땔감을 어디선가 가져와서 약간 흐릿해진 모닥불에 하나씩 집어넣기 시작했다.
“… 지지 않을 거라니, 잠꼬대도 거칠군… 후훗.”
리오는 그 순간 크리스의 얼굴이 발개진 것을 보지 못한 채, 그대로 나무에 기대어 다시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세레나는 다시 눈을 반짝이며 일어서려다가, 리오의 마음이 아직은 편치 않을 거라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 그냥 잠을 청하였다.
수도로 가던 중, 일행은 잠시 휴식을 취하게 되었다. 리오는 또다시 어디론가 사라졌고, 리카는 클루토에게 이리저리 궁시렁대며 지루함을 달래고 있었다. 그 장면을 보고 있던 히렌은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리카를 바라보았다.
“어이, 땋은 머리! 잠깐 나 좀 볼래?”
리카는 인상을 쓰며 히렌을 바라보았다.
“뭐야 얼간이. 나에게 볼일이 있나 보지?”
히렌은 리카에게서 의외의 반응이 나오자, 움찔하며 말투를 약간 부드럽게 고쳤다.
“아, 아니. 심심하면 나하고 대련이나 해 보자구….”
“대련이라…?”
리카는 팔짱을 끼고 가만히 생각해 보다가, 그것도 괜찮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진검으로 할래, 아니면 나뭇가지로 할래? 난 아무거나 괜찮아.”
히렌은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설마 하며 진검으로 하자고 했다. 리카는 자신의 검을 뽑으며 히렌에게 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히렌은 아무래도 불안했다.
“좋아, 다쳐도 세레나 언니가 치료해줄 거니까 맘 놓고 싸우자구.”
클루토는 그 둘을 말리려 했으나, 리카의 눈빛에 질려 그러할 수가 없었다. 결국, 둘의 대련은 시작되었다.
히렌은 리오가 고쳐준 자세로 리카에게 차근차근히 공격을 가해갔다. 리카는 히렌의 공격력이 생각보다 강하다는 것을 느끼고, 그녀 역시 천천히 히렌의 움직임을 보았다. 리오가 하던 대로….
“어? 저 애들 뭐하는 거니?”
일을 마친 리오가 클루토에게 다가와서 묻자, 클루토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대련이래요… 근데, 이제 보니 리카도 꽤 잘하는군요.”
리오는 팔짱을 끼고서 둘의 움직임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히렌은 자신이 가르쳐준 기본을 바탕으로 한 힘의 검술을 사용하고 있었고, 리카는 히렌보다 빠른 속도를 이용한 탐색전 위주의 검술을 하고 있었다.
“흐음… 저 멍청한 녀석, 힘이 너무 들어가 있잖아. 저러다가 제풀에 지쳐 쓰러지고 만다구.”
리오의 말대로, 히렌은 몇 번의 공격을 한 것뿐이지만 벌써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리카는 히렌의 동작이나 검술이 단순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본격적으로 공격을 행하였다. 히렌은 리카의 공격이 갑자기 거세어지자, 당황하며 방어 자세를 취하였다. 결국, 힘이 떨어진 히렌은 리카의 공격을 몇 번 받아보고는 검을 놓치고 말았다. 손을 부여잡고 있는 히렌을 보고, 리카는 자신의 검을 다시 집어넣었다.
“자, 대련 끝!”
히렌은 한숨을 쉬며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다. 리오는 고개를 저으며 히렌에게 소리쳤다.
“이봐, 내가 가르쳐준 기술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너만의 개성이 없다면 그것은 필요 없는 검술이야. 나하고 만나기 전에 네가 사용하던 검술을 사용해 봐. 자세나, 고칠 만한 것에만 나에게 가르침받은 것을 적용해 보라구. 오늘은 여기까지 해라.”
리오의 얘기가 끝나자, 리카는 무릎을 굽히고 앉아있는 히렌의 머리를 툭 치며 말했다.
“어머, 넌 꺽다리에게 가르침받았었니? 그런데, 배운 것 치곤 너무 못하더라. 호호호홋….”
히렌은 치가 떨렸지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자신은 패자였기 때문이었다. 히렌은 자신의 검을 다시 잡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 쳇, 지지 않을 거야. 더 연습해야지….’
리오는 일행을 부르며 다시 출발할 준비를 서둘렀다.
“자, 마지막 도시가 멀지 않았으니 서두르자구!”
“그래…? 교황 녀석이 일을 끝냈다고?”
황제는 자신의 앞에서 보고를 올리고 있는 한 병사를 의자에 앉아 내려다보며 다시 확인하려는 듯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병사는 품에서 한 장의 종이를 꺼내어 황제에게 보였다. 황제는 종이에 쓰여진 글을 읽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의외로 빨리 ‘아공간’이 열리겠군. 역시 운이 좋은 녀석이라니까… 후훗.”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병사에게 명령했다.
“장관과 각 공중 요새의 함장들에게 소집 명령을 내려라. ‘사냥’이 시작되니까 말이야….”
병사는 곧바로 허리를 굽힌 후에 방을 빠져나갔다. 황제는 조용히 알현실 천정에 그려져 있는 세계 지도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 네 개로 이루어져 있는 이런 작은 세계 따윈 하루면 정복할 수 있지. 이런 조그마한 세계엔 관심이 없다구. 후후후… 한번 놀아나 봐라. 가즈 나이트 리오 스나이퍼… 내 손 안에서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