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 나이트 – 146화
아침이 되어서, 지크는 조금 후 돌아오겠다는 쪽지를 써놓고 조용히 집을 나섰다. 어제처럼 샤오민이 빨래를 널고 있질 않아 빠져나가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물론 있어도 문제가 없겠지만….
루이크의 방에서 모자를 잠시 빌려(?) 쓴 채 거리를 활보하던 지크는 어느덧 바이런과 싸웠던 도시 외곽에 당도했다. 그때는 정말 운이 좋다고 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대량의 기를 소모하고도 가사 상태만으로 끝났으니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
‘무명도는 어디에 두었었더라…?’
어딘가에 떨어뜨렸다는 것 외엔 기억이 나질 않았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보통 사람이 가져갔을 경우는 제외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웬만한 사람은 들지도 못할 무기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뭐해. 보이질 않는걸….”
이리저리 둘러보던 지크는 제국군들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하자 천천히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제국군 역시 그를 보지 못한 것 같았다.
“… 어딘가엔 있겠지 뭐. 그건 그렇고, 이제 돌아가 볼까?”
지크는 하늘을 쳐다본 뒤에 다시 길을 걸었다. 어제와 같이 구름이 낀 날씨였다. 제국의 하늘이 언제나 그런 것처럼….
“이봐! 비켜라 비켜! 마차에 치이고 싶나!!”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뒤에서 확성기 음이 들려왔다. 어느 부자가 마차를 타고 거리를 통과하는 모양이었다. 지크도 역시 옆으로 슬쩍 길을 비켜주었다.
“… 어라?”
지크는 방금 스쳐 지나간 마차의 뒤를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무언가 이상한 기분이 그의 머릿속을 때리고 지나간 듯해서였다. 마치 누군가가 있는 것만 같았다.
“이상한데…? 아직도 기가 부족한가?”
지크는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며 다시 모자를 눌러 쓰고는 길을 재촉했다.
“이상해요 커드… 누군가가 지나간 것만 같아요.”
커드 버클레이란 이름의 귀공자와 함께 마차를 타고 가던 20세 가량의 여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신의 옆에 앉아있던 커드에게 말했다.
“그래요? 하긴, 프시케의 감각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니까요. 그럼 마차를 돌릴까요?”
예전처럼 시장에서 산 중급의 옷을 입고 있는 프시케가 아니었다. 커드와 마찬가지로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있는 그녀였다. 프시케는 고개를 저었다.
“… 아니에요. 그냥 가요 커드.”
둘을 실은 마차는 계속해서 달렸다. 그 목적지는 도시의 중앙에 위치한 대 성당이었다.
지크가 집에 돌아온 시간은 정오 무렵이었다. 집 앞에 왔을 때 그의 눈에 맨 처음 들어온 것은 의자에 앉아 조용히 책을 읽고 있는 샤오민의 모습이었다.
‘가엾은…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고약한 병에 걸리다니….’
지크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샤오민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머리를 한번 가로 저은 후에 집 마당에 들어섰다.
“다녀왔어요 샤오민 씨.”
샤오민은 지크의 목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아, 일어서지 마세요. 가만히 앉아 계세요.”
샤오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의자에 앉았고, 지크는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와 그녀가 보고 있던 책의 제목을 슬쩍 보며 말했다.
“흐음… ‘영원의 사랑’이라… 재미 있나요?”
샤오민은 쓸쓸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직 사랑이란 걸 못해본 저에겐 재미가 있더군요.”
지크는 속으로 아차 하며 그녀에게 내심 미안해했다. 샤오민은 잠시 분위기가 가라앉자 화제를 바꾸기로 한 듯 지크가 쓰고 있는 모자를 보았다.
“어머? 그건 루이크의 모자… 같은데요?”
“아, 이거요? 헤헷, 사정이 있어서 잠깐 썼습니다. 그 애에겐 비밀이에요!”
샤오민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하지만 아주 잘 어울리는데요? 키가 크셔서 그럴까요?”
“흐음… 주인 것이 아니라서 그럴지도? 하하핫.”
샤오민은 쿡쿡 거리며 웃다가 예전 같지 않게 활짝 웃으며 즐거워했다. 지크도 그녀가 즐거워하는 모습이 보기 좋은 듯했다.
“호호호홋… 하아, 이렇게 웃어본 것도 오래간만이네요. 가슴속도 이상하게 편안하고. 지크 씨는 역시 이상한 사람 같아요.”
“네? 이상하다니요?”
“뭐랄까… 마치 바람 같아요. 자유롭고, 활발하고, 남을 끌어들이는 이상한 힘이 있는 것만 같아요. 물론 좋은 뜻으로 말한 거예요.”
그녀의 말을 들은 지크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얘기이기 때문일까….
‘… 그래, 오늘 말고 내일 떠나자. 오늘까진 샤오민을 즐겁게 해주고 싶으니까….’
지크는 그녀가 앉아있는 의자 옆에 기대며 자신이 알고 있던, 경험했던 재미있는 일을 그녀에게 한 가지씩 말해주기 시작했다. 지크가 진정으로 즐거울 때는 자신이 한 행동을 말로서 다른 사람이 즐거워할 때였다. 그리고 그때가 지금이었다.
12장 [말살 작전]
리오는 카디스를 쓰러뜨린 뒤에 숙소의 침대 위에서 조용히 정좌를 한 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리카나 다른 일행이 말을 걸어도 그냥 침묵만을 지킬 뿐이었다.
“도대체 무슨 약속을 했길래 침대에서 저러고 있는 거지?”
말을 걸어도 리오가 대답을 안 하자 약간 화가 난 리카가 방문 앞에 서있던 클루토에게 짜증을 내며 말하자, 클루토는 어깨만 으쓱일 뿐이었다.
“저 꺽다리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속을 모르겠단 말이야. 능구렁이 같이… 아얏!.”
신나게 클루토 앞에서 리오 얘기를 하고 있던 리카는 갑자기 열려지는 방문에 머리를 부딪히고 말았다. 그녀는 인상을 가득 쓰고서 뒤를 돌아다보았다.
“누가 능구렁이야. 그건 그렇고, 난 뭐 좀 먹으러 가니까 찾는 사람이 있으면 식당으로 오라고 전해, 그럼 부탁한다.”
간단히 말을 끝낸 리오는 천천히 식당 쪽으로 향했다. 리카와 클루토는 멍하니 리오가 가는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 진짜 속을 모르겠다구… 저 괴물은.”
마치 식료품 상점과 같이 장식된 식당 안에서 리오는 빵을 씹으며 카디스가 마지막에 남긴 말을 되뇌어 보았다.
“아직 세 사람이나 남아 있다고? 젠장….”
사실, 카디스와의 전투는 여느 때보다 힘든 전투였다. 리오가 마법을 사용하지 않고 검만을 사용하여 카디스와 싸운 이유는 영구적일 것만 같던 그 엄청난 재생 능력에 도전해 보고 싶어서였다. 그때의 상대는 한 사람 이었으나 그런 재생 능력을 가진 적이 셋이라면 문제는 달라질 수도 있는 것이었다.
“나도 은퇴나 할까 봐, 풋….”
씁쓸히 웃으며 빵 봉지를 쓰레기통 안에 던져 넣은 리오는 자신의 앞에 세레나가 서있는 것을 보고 입 언저리를 털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아, 세레나도 배고픈가요?”
멋이 없는 말투였지만 한두 번 듣는 것도 아니어서 세레나는 그저 빙긋 웃을 뿐이었다. 그녀는 리오의 옆에 앉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이곳에 계시다고 클루토가 전해주던데요? 그런데….”
세레나는 다음 말을 꺼내려다가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리오는 그녀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 말씀하세요.”
약간 안심이 된 듯한 표정을 지은 세레나는 한숨을 쉰 후 힘겹게 말을 꺼내었다.
“저어… 괜찮으시겠어요? 어제 전투를 보니 그리 쉽지 않은 상대들 같던데요….”
자신의 말을 듣고서 리오가 자존심이 상하지 않을까 해서 주저했지만 리오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글쎄요… 싸우는 날 운이 좋으면 이기는 거고 나쁘면… 어떻게 되는 거죠 뭐. 괜히 걱정해봤자 적들이 약해지는 것도 아니고, 봐주는 것도 아니니까 그냥 이렇게 생각하는 편이 저에겐 편해요.”
말을 들은 세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리오는 씨익 웃어 보인 후에 다시 빵을 하나 사면서 말했다.
“그러니 그때까지 많이 먹어둬야죠. 배가 고파서 빌빌대지는 말아야 하니까요.”
세레나도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리오의 옆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 아마 가즈 나이트가 이곳에 있었어도 당신보다는 약했을 거예요. 믿을게요, 리오 씨를요. 그럼 많이 드세요.”
리오는 흠칫 놀라며 윗층으로 올라가는 세레나를 바라보다가 씁쓸히 웃어넘기며 빵을 씹었다.
“… 에이, 설마….”
신계.
회색의 옷을 입고 있는 한 노인-바로 주신이었다. 그의 할 일이란 간단하기 그지없었다. 먹고, 마시고, 서류에 결재하고, 자고 등등…. 그러나 오늘만큼은 침대에서 일어서서 한 젊은이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흐음… 그렇다면 이번에 리오가 맡고 있는 사건이 ‘시간의 저편’으로 쫓겨난 고신들과 연관되어 있다 이 말인가?”
한 젊은이-어깨까지 기른 곱슬머리에, 흰색의 제복과도 같은 옷을 입고 있는 말끔한 얼굴의 미남은 자세를 낮춘 채 고개를 끄덕였다.
“예, 소환계를 맡고 계시는 신께도 여쭈어보니 그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저도 확실하다고 봅니다.”
주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약간 근심스러운 얼굴로 턱을 괸 채 한숨을 쉬며 말했다.
“슈렌과 그쪽 계통은 맡아본 적이 없던 지크까지도 지원으로 보냈는데… 아무래도 안 되겠군. 잘못하면 셋 다 3개월간의 저승 여행을 할 것 같아. 저번에 보니까 지크의 생체 리듬이 거의 영까지 간 적도 있더군, 물론 바이런이 한 일이라서 뭐라고 할 수도 없지만 말이야. 그녀석도 다 생각이 있겠지… 그럼 어쩔 수 없네, 자네도 지원을 해주게나.”
젊은이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주신에게 경례를 붙였다. 지원을 하겠다는 말과 같았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이번엔 ‘특권’이 배제되는 겁니까?”
주신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아무래도… ‘특권’ 발휘할 상대는 없으니까. 그럼 잘 다녀오게. 아참, 자네 리오 형제들과 만난 적이 없지?”
젊은이는 씁쓸히 미소만을 지을 뿐이었다.
“얼굴은 압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젊은이는 곧 환한 빛에 휩싸여 어디론가 사라져 갔다. 주신은 그래도 걱정이 된다는 표정으로 그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휀 라디언트’… 부탁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