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 나이트 – 151화
“그, 그건…!”
지크는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여신교의 성전에서 프시케를 만난 이후에 그녀에게 신경을 쓰느라 대전제를 잊고 만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슈렌은 여전히 노기 어린 표정으로 지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떻게 할래. 연애 같은 시시콜콜한 일 때문에 이곳에서 평생 살 거야, 아니면 이것을 다시 받을 거야.”
슈렌은 자신의 허리춤에 있는 헝겊에 싸여있는 물건을 지크에게 내밀었다. 지크는 헝겊을 풀어보지 않아도 내용물이 무엇인지 알 수가 있었다.
“무, 무명도…!”
지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슈렌의 손에 들려있는 무명도를 바라보았다. 무명도는 헝겊에 싸인 채로 희미한 공명음을 내고 있었다. 그런 것을 처음 보는 샤오민이 놀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샤오민은 거기에 대해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직감적으로 둘에겐 중대한 일이 있을 것만 같아서였다.
“… 생각이 없는 모양이군. 좋아, 무명도는 네 것이니까 이곳에 두고 가지. 대신 다시는 날 볼 생각은 말아라.”
슈렌은 무명도를 땅에 던져놓고 샤오민에게 사과의 인사를 한 후 집을 빠져나갔다. 지크는 그늘이 드리워진 표정으로 슈렌의 뒷모습을 볼 뿐이었다.
“… 지크 씨.”
샤오민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크의 어깨를 두드리며 그를 불렀다. 그러나 지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샤오민은 답답한 듯 다시 한번 그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지크 씨, 제 말 좀 들어 보시겠어요?”
지크는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샤오민은 가슴이 다시 갑갑해진 듯 의자에 앉으며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인간에게 사랑이란 건 참 중요한 거예요. 전 지크 씨가 ‘그녀’에겐 목숨도 버릴 만한 용기가 있는 사람이라고 믿어요. 하지만, 슈렌 씨라고 하셨나요? 그분이 말씀하신 것을 들어보니 저와 같은 여자들과는 달리 남자들에겐 사랑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 것 같네요.”
“더… 중요한 것…?”
지크는 슬쩍 샤오민을 돌아보며 말했다. 샤오민은 웃으며 말을 계속했다.
“예, 지크 씨도 ‘할 일’이 있으시겠죠? 바로 그것 같아요. 그것을 망각한다면 아무리 사랑의 기쁨에 도달한다고 해도 잠깐뿐일 거예요. 할 일을 한 후에 사랑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본답니다. 저는요….”
지크는 가만히 샤오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침까지만 해도 자신을 억지로 보내는 듯한 얼굴을 했던 그녀가 지금은 온화한 미소를 띄우고 자신을 돕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녀를 약한 여자라고만 보았던 자신이 부끄러워져만 갔다.
“… 샤오민 씨. 제가 한 가지 부탁 드려도 되나요?”
“예? 예에… 그러세요.”
지크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앉아있는 샤오민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약간 거친 그의 손으로 샤오민의 얼굴을 살며시 감싸며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갔다. 샤오민은 처음에 약간 저항하려 했으나 그것도 잠시였다. 조금 후 지크는 입술을 떼고 그녀에게 말했다.
“… ‘할 일’이 생각났어요. 이건 완전한 작별 인사랍니다.”
지크가 땅에 떨어져 있는 무명도를 잡을 때까지 샤오민은 눈을 감고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그가 마당의 작은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을 때 그녀는 눈을 뜨고 지크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은 보통 때보다 더욱 반짝이고 있었다. 지크는 다시 그녀를 바라보고 인사를 했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몸 건강하시고요.”
샤오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녀에게 믿음이 담겨있는 웃음을 지어 보인 지크는 완전히 돌아서서 어디론가 달려가기 시작했다.
“조심하세요….”
샤오민은 그 말을 한 후에 남아있던 빨래를 다시 널기 시작했다. 전보다 자신의 몸이 갑자기 나아진 것만 같아 그녀는 이상하게도 기분이 좋았다.
지크는 슈렌이 샤오민의 집 맞은편의 전신주에 기대어 서 있는 것을 보고 빙긋 웃으며 그쪽으로 다가갔다. 슈렌은 지크가 다가오자 눈을 뜨고서 그를 바라보았다.
“… 마음은 정했나?”
슈렌의 멋없는 말을 이제는 듣기 싫다는 표정을 지은 지크는 슈렌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봐 이봐, 형제끼린데 웃으면서 말하면 덧나? 좀 웃어 보라구 슈렌 씨! 그리고, 할 일은 생각났어. 이제 리오 녀석이나 도와주러 가자구.”
슈렌은 고개를 끄덕인 후 전신주에서 몸을 떼었다.
“좋아, 그러나 그전에 또 할 일이 있어.”
“뭔데?”
슈렌은 눈짓으로 큰 도로를 가리켰다. 희미하긴 했지만 메탈 재킷들이 모여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아까 그 여자분이 널 숨겨주었다는 걸 아는 모양이던데? 제국의 정보망을 너무 우습게 본 것 같아. 이 도시부터 정리해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어.”
지크는 한쪽 눈썹을 치켜뜨며 슈렌을 바라보았다. 할 일이 어쩌고 했으면서 또 다른 곳으로 새고 있질 않은가. 물론 옳은 일이어서 지크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곳에 오고 있는 녀석들부터 처리하자. 꽤 많을 것 같군….”
지크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서 슈렌을 바라보았다.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었지만 슈렌은 눈썹 하나 꿈틀거리지 않았다.
“오늘 내로 처리할 수 있어?”
“그럴 순 없겠지, 아까 그 여자분의 집에 머무르며 상황을 보는 수밖에. 우리가 떠나면 저 집은 단숨에 박살날 거야. 자, 녀석들이 가까이 왔으니까 준비해라 지크.”
지크는 손을 부르르 떨면서 슈렌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슈렌은 역시 얼굴색도 바꾸질 않았다.
“이 자식! 그럼 난 뭐가 되란 말이야!! 기껏 분위기 잡고 작별 인사하니까…!”
순간, 지크는 고개를 옆으로 꺾었다. 슈렌의 손바닥에서 뿜어진 기합 때문이었다. 그가 고개를 옆으로 꺾은 순간 그의 뒤에선 둔탁한 기계음이 들려왔고 지크가 돌아보자마자 폭발과 함께 메탈 재킷 한대가 사라져갔다.
“조심해라 지크. 너 기가 아직 회복이 안된 거 아니야?”
지크는 손가락을 슈렌의 앞에서 저어 보였다. 그럴 리는 없다는 표정이었다.
“쳇, 걱정마. 여긴 내가 맡을 테니까 넌 다른 쪽을 맡아줘. 두 군데서 오고 있는 것 같으니까 말이야.”
슈렌은 그룬가르드를 몇 번 돌리고 나서 지크가 가리킨 방향으로 뛰었다.
“오긴 뭐가 오냐 멍청아….”
지크는 씨익 웃으며 자신의 앞을 바라보았다. 수대의 메탈 재킷이 그의 앞에 떠억 버티고 서 있었다. 그들은 지크를 보고서 무기 장치를 꺼내어 지크에게 조준하였다.
“여긴 내가 다 맡아주지. 헤헤헷… 이봐, 와봐라 깡통들! Hurry Up!!”
지크는 자신의 바지 주머니 안에 꼬깃꼬깃 구겨져 들어있던 가죽 장갑을 다시 손에 끼우며 메탈 재킷들에게 소리쳤다. 메탈 재킷의 탑승자들은 이를 갈면서 방아쇠에 손을 가져갔으나 잠시 후 그들의 표정은 경악으로 바뀌어져 갔다. 자신들에게 소리친 얼간이가 전기를 뿜어내자 소문으로만 듣던 ‘메탈 재킷 킬러’가 누구인지 깨달아서였다.
집 앞에서 몇 번의 폭음이 들려오자 샤오민은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폭발음이 들린 쪽을 창문을 통해 바라보았다.
“괜찮을까… 지크 씨는.”
5분가량이 흐른 후, 폭음 소리는 멈추었고 샤오민은 한숨을 쉬며 다시 자신의 일을 보기 시작했다. 동생이 올 때가 되어서였다. 그때, 마당 쪽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오자 샤오민은 다시 불안한 표정을 짓고서 창문으로 마당을 바라보았다.
“어, 어머!?”
“이거 놔 이 파랑 머리야! 아프단 말이야!!”
마당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는, 얼굴을 약간 찡그리고 있는 슈렌에게 귀를 잡히고 있는 지크에게서 들려오는 것이었다. 샤오민은 깜짝 놀라며 문을 열고 밖에 나가보았다.
“지, 지크 씨! 어떻게 되신 거예요?”
슈렌의 손에서 풀려난 지크는 귀를 만지작거리며 샤오민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헤헷… 돌아와 버렸어요 샤오민 씨….”
샤오민은 속으로 황당하기까지 했으나 겉으로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팔짱을 낀 채 약간 화난 표정으로 지크를 바라보고 있는 슈렌과, 자신에게 다시 인사를 하고 있는 지크의 모습이 그녀에겐 너무나도 우스웠기 때문이었다.
14장 [빛의 전사]
세레나와 크리스를 비롯한 일행들은 리오가 한 낯선 남자의 등에 업혀서 여관으로 돌아오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낯선 남자가 리오를 침대에 눕히자 크리스와 세레나는 앞을 다투어 리오에게 달려들어 눈물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 바람둥이가 따로 없었군….”
낯선 남자-휀의 말이었다. 휀은 리오 주위에 있는 네 명의 소년 소녀를 둘러보았다. 모두 걱정이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휀은 자신이 낄 상황이 아닌 것 같아 조용히 방을 나서려고 했다.
“잠깐 기다려요!”
누군가의 목소리가 휀의 발을 멈추었다. 그는 시큰둥한 얼굴로 자신을 부른 여성을 돌아보았다.
“당신, 리오 씨와 무슨 관계죠?”
검은 생머리를 한 성직자 차림의 여성이 그에게 인상을 쓴 채 물었다. 휀은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대충 대답을 했다.
“어… 그러니까, 먼 친척 관계에요.”
“그 정도로 당신이 누군지 알 수 없어요!”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은 세레나에게 이런 면이 있을 줄은 몰랐다는 표정을 지었다. 휀 역시 순하게 생긴 겉과는 그녀가 많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흐음… 좋습니다. 제 이름은 휀 라디언트, 직업은 그랜드 크로스 나이트입니다. 리오와 친척이라서 그를 찾으려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이 녀석이 붉은 옷을 입고 있는 마녀에게 당할 뻔한 것을 도와준 것뿐이요. 제국군이라는 의심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랜드 크로스 나이트’란 말을 들은 세레나는 그제서야 표정을 풀고 휀에게 사과를 하였다.
“그럼 실례가 많았습니다. 전 세레나 블레이크입니다. 저를 비롯한 일행은 리오 씨를 도와드리며 제국을 여행하고 있지요. 그래서 당신을 잠시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휀은 세레나가 예까지 갖추고 자신에게 사과하자 미안해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휀은 자신이 입에 올린 ‘그랜드 크로스 나이트’의 뜻이 이곳에선 어떤 뜻으로 통용되는지 모르고 있는 상태였다. 물론 다른 일행들은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