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 나이트 – 17화
헤리온은 끝까지 자신의 창을 놓지 않고 있었다. 대단한 정신력이었다. 그는 천천히 창에 의지하여 일어섰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기까지 했다.
“그, 그런데 클루토는 어디있지?”
리카는 두리번거리며 클루토를 찾았다. 그러나 풋내기 마법사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뭘 찾아… 저기 굴러다니는 거 아닌가?”
리오는 손가락으로 경기장 아래쪽을 가리켰다. 리카는 그쪽을 보고서 경악을 금치 못했다.
“크, 클루토!”
폭발에 의해 장외로 나가떨어진 클루토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판정의 호른 소리와 함께 치료를 담당하는 승려들이 두 패로 나뉘어서 클루토와 헤리온에게 달려갔다. 그들은 회복의 주문과 약초 등을 사용하며 클루토와 헤리온을 잠시 후에 일으킬 수 있었다.
클루토가 눈을 뜨며 처음으로 본 것은 씁쓸한 웃음을 짓고 있는 리오와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리카였다. 그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내가… 졌지?”
그 말을 들은 리카는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클루토의 뺨을 후려쳤다.
“이 바보야! 죽으면 어떻하려고 그랬어!!”
클루토는 뺨을 어루만지며 살짝 웃었다.
“헤헤… 이기면 네가 좋아할 거 아니야…”
리카는 울음을 터뜨리며 누워있는 클루토의 작은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리오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 잘했어 클루토. 적어도 망신은 안 당했으니까.”
“뭐라고! 누구 때문에 클루토가 이 지경이 됐는데!!”
리카는 일어서서 리오에게 소리를 버럭 질러댔다. 리오는 머리를 긁적이며 사과를 했다.
“자, 너 다음 경기잖아. 준비 안 할 거야?”
리카는 들것에 놓여지는 클루토와 리오를 번갈아서 쳐다보았다. 승려들을 막아놓고 잠시간 생각하던 리카는 리오에게 명령어조로 말하였다.
“꺽다리.”
“왜?”
“어제 했던 약속 기억하지?”
“음…”
“난 클루토를 간호할 거야. 내가 없으니 우승이 쉬워지겠지?”
리오는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말했다.
“그렇겠지. 안심하고 가세요 말괄량이 씨. 우승은 꼭 할 테니까.”
리오는 리카의 뾰족한 코끝을 검지로 살짝 튕겨주었다. 리카는 코를 오른손으로 가리며 실려가는 클루토를 따라서 경기장 밖으로 나갔다. 얼굴이 약간 빨개져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승 못하면 알아서 해 꺽다리!!”
라고 리오에게 외쳤다.
리카의 기권으로 슈레이는 4강에 부전승으로 올라가게 되었고. 잠시 후에 슐턴과 바이칼의 경기가 시작되었다.
왕은 열기를 더해가는 경기를 지켜보면서 오랫만에 자신의 피도 끓어오름을 느꼈다. 그러다가 침묵의 마법사라 불리우는 왕국 최강의 마법사 라가즈가 갑자기 나타난 것에 대해 궁금증을 느꼈다.
“아, 그러고 보니 라가즈. 갑자기 속세엔 왜 나오게 되었소?”
“그러고 보니 말씀드리는 걸 깜빡했군요. 호위들과 시종들을 좀…”
“알겠소, 여봐라.”
말스왕의 명령으로 특별석의 자리에는 왕과 라가즈, 그리고 레나만이 있게 되었다.
“… 두 가지 소식이 있습니다. 먼저 태라트 왕자님의 소식입니다.”
“으음?! 그게 사실이오!”
“예, 왕자님께선 지금 루아스 대륙에 계십니다.”
이 세계를 이루고 있는 네 개의 대륙 중 세 번째로 큰 루아스 대륙은 오래전부터 말스 왕국과 무한 동맹을 맺고 있는 가이라스 왕국이 지배하고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지역의 대부분이 험한 산지와 정글로 되어 있어서 인구는 그리 많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지역적 특성에 따라 전설과 보물이 어느 대륙보다 많이 전해와서 찾아오는 탐험가의 숫자는 굉장했다.
“루아스에? 그러면 가이라스 5세에게 부탁하면 되지 않소?”
“그것이… 가이라스 왕실도 지금 혼란에 빠져있기 때문에 전사들을 선발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계신 곳도 확실히 알지만 워낙 지형이 험해서…”
왕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들의 생사를 확실히 알면서도 만나지 못하는 부모의 심정이었다.
“7호장을 보낸다 하더라도 직속 군대가 없는 슈 한 명뿐인데…”
“그건 나중에 자세히 검토해보기로 하시지요. 더 급한 문제가 있습니다.”
“더 급한 문제?”
“바로 어둠의 제왕 `가스트란’ 문제입니다.”
대신관의 호른 소리와 함께 바이칼과 슐턴은 경기장에 올라섰다. 둘 사이의 공기가 심상치 않았다. 아까 전의 대기실 안에서의 마찰 때문이었다.
“여기서 죽으면 그것도 영광이란 걸 아는가?”
슐턴이 먼저 심리전을 펼치기 시작하자 바이칼도 받아치기 시작했다.
“흠, 여기서 죽여달란 말이군? 걱정 마라, 묘비에다 네 욕은 안 쓸 테니까.”
슐턴은 난폭하게 검을 꺼냈다. 지난번 리오와 대결할 때의 검과는 다른 검이었다.
“입을 이것으로 막아주마.”
바이칼은 등에 매여 있는 자신의 검을 꺼냈다.
<드래곤 슬레이어…>
물질계 최강의 생물이라 불리우는 용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는 몇 안 되는 무기 중에 최강인 검이다. 용신의 어금니로 되어있다는 칼자루에, 10억 년 이상 살아온 용왕의 몸속에서만 생겨난다는 금속 아닌 금속제의 검신. 재료로만 보아도 강한 이 검을 바이칼이 왜 가지고 다니는지는 후에 밝혀질 문제이다.
맑은 소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드래곤 슬레이어는 검 애호가들의 감탄사를 뽑아내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하지만 검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두 명뿐이었다.
라가즈는 그 검을 보고선 신음에 가까운 탄성을 내었다.
“이럴 수가… 저것은 드래곤 슬레이어! 그리고 저 청년이…!”
말스 왕이 뒤를 이었다.
“드래곤 로드(Dragon Lord)일지도 모르겠군.”
슐턴도 검을 보고 나서 약간 긴장을 하였으나 전에 리오의 자색 검을 보았을 때보다 공포감을 느끼진 않았다.
“검이 좋다고 실력이 좋지는 않겠지.”
“난 네 검이 아까워 보이는데?”
대신관의 호른 소리가 들리자마자 슐턴의 격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지금까지 호장들의 공격과는 차원이 달랐다. 과연 `검성’이었다.
관중들의 눈에는 슐턴의 검이 여러 갈래로 나뉜 것처럼 보였다. 그 정도의 속공이 바이칼을 노리고 있었다.
“흥.”
바이칼은 아무런 자세도 취하지 않은 채 검을 잡은 오른손을 슐턴에게 휘둘렀다.
파앙!
“어엇!”
슐턴은 공격을 멈추고 뒤로 빠르게 물러섰다. 머리 위에 약간의 충격이 느껴져서였다. 머리 부위를 매만지자 언제나 쓰고 있던 서클렛이 짝 소리를 내며 경기장 바닥으로 떨어졌다.
“다음에 이런 저급 기술로 공격하면 네 이마에 나의 이름을 새겨줄 거다. 다른 걸로 공격해봐.”
바이칼은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슐턴을 바라보았다. 슐턴은 그 표정을 보며 자존심에 금이 가는 걸 느꼈다. 또다시 느껴보는 패배감이었다.
“이 녀석!”
그는 기를 끌어모았다. 그리고는 검에 기를 실어 보내며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기가 실린 검에서 푸른색의 방전이 일어났다. 그걸 본 슈레이와 슈는 슐턴이 제정신이 아니라고 느꼈다.
“그 기술을 직접 사용하다니!”
“슐턴! 미쳤어요!”
보통 인간으로선 상상도 못 할 높이로 뛰어오른 슐턴의 모습에 관중들은 숨소리를 죽였다. 말로만 듣던 슐턴의 초 기술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끝이다!! 뇌격 전살검(雷格 電殺劍)!!”
순간 슐턴에게 보인 바이칼의 표정은 그에게 이상할 정도의 공포심을 불러일으켰다. 바이칼은 얼음과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