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 나이트 – 177화
리오는 왕성 쪽을 돌아보았다. 열린 성문의 틈으로 살짝 내밀어진 사람의 머리가 보였다.
“너희들…?”
지금까지, 자신과 힘든 여행을 같이해 주었던 아이들이었다. 자신을 믿어 주었고 그 믿음 하나로 여기까지 온 자랑스러운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리오는 씨익 웃어주었다.
“이길 거죠 리오! 믿고 있어요!”
아이들은 하나같이 외쳤고 리오는 검을 땅에 꽂은 후 답례를 하듯 엄지손가락을 그들에게 펴 보였다.
“… 고맙다.”
리오는 천천히 성문 위를 올려보았다. 에메랄드색 머리의 미녀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바로 레나 공주였다.
둘은 서로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 사이엔 수만의 대화가 오고 가는 중이었다.
리오는 오른손을 복부에 가져간 후, 왼손으로 망토의 한쪽 끝을 잡은 후에 정중히 허리를 굽혀 보였다. 무도회에서 춤을 추기 전에 시작한다는 인사와 같은 행동이었다.
“… 부탁해요 리오….”
레나 역시 자신의 치마 양 끝을 잡아 살짝 올린 후에 고개를 약간 숙여 보였다.
리오의 인사에 대한 답례였다.
리오는 몸을 세우고 검을 다시 잡은 후 곧바로 반 바퀴 돌아 고신들을 바라보았다. 여지껏 자신이 상대해왔던 적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강적들이었다. 하지만 리오의 얼굴엔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그와 함께 싸워줄 강력한 형제와 동료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자아… 가볼까?”
“붉은 머리… 저 녀석이 부르크레서를 한번 쓰러뜨렸다는 최강의 가즈 나이트인가?”
우라누브가 동료들에게 묻듯이 말했다. 보르크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런 것 같아. 하지만 그때의 부르크레서는 우리처럼 힘을 완전히 얻은 상태가 아니었어. 지는 것이 이상하진 않아.”
고신들은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우라누브만이 공중에 몸을 띄워 앞으로 전진할 뿐이었다.
“가즈 나이트, 그리고 새로운 용제… 어느 정도의 힘을 가졌는지 지켜보겠다. 후후후훗….”
이윽고, 이 세계뿐만 아닌 모든 세계의 운명을 건 전투는 시작되었다.
리오는 온몸의 기를 폭발시키듯 분출하며 우라누브에게 돌진하였고 지크는 기전력을 끌어올리지 않은 상태에서 라기사크와 맞서기 시작했다. 슈렌은 마치 정해져 있었다는 것처럼 창을 들고 있는 가르마자와 자신의 창을 맞대었고 휀과 보르크라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바이칼은 공중에서 아크로와 대결하기 시작했다.
“훗, 죽어라.”
라기사크는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지크에게 별것 아니라는 표정으로 손을 휘둘러주었다. 그러자 엄청난 공기의 폭발과 함께 지크가 있었던 지표엔 깎인 듯한 표식이 남게 되었다.
“죽는 게 그리 쉬운 줄 아나!”
어디선가 들려온 기합성과 함께 라기사크의 눈앞에서 두 개의 거대한 검광이 순간적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라기사크는 코웃음을 치며 슬쩍 뒤로 움직였다. 무명도의 공격 범위에서 털끝 하나 차이로 물러선 것이었다. 상당한 난이도의, 그렇지만 체력의 소모가 가장 적은 회피법이었다.
“치잇!”
지크는 반격을 받지 않기 위해서 버릇처럼 뒤로 빠르게 물러섰다.
“너무 느리잖아 터프 가이?”
순간, 지크는 등 뒤에서 오는 섬뜩함과 엄청난 충격을 동시에 느껴야만 했다.
‘어, 어느새!?’
다시 중심을 잡고 자세를 취한 지크는 자신의 뒤쪽에 나타났던 라기사크를 바라보았다.
차원이 다르다.
기전력을 거두어서 능력이 최대의 80% 이하라고는 하지만 제1 안전 주문이 풀린 시점의 지크를 빠르기로서 능가한다는 것은 가공할 만한 일이었다.
“이렇게 약할 줄이야, 기대에 못 미치는데 터프 가이? 후후훗… 하하하핫.”
여유 만만한 라기사크를 본 지크는 눈을 감고 손과 여러 관절을 풀기 시작했다. 우두둑 소리가 여러 차례 들린 후, 지크는 씨익 웃으며 라기사크에게 말했다.
“미안하군.”
그리고 지크의 몸에선 엄청난 양의 기전력이 뿜어지기 시작했다.
“기대를 저버리진 않겠다. 헤헷!”
휀은 플랙시온을 왼손에 바꾸어 들고 오른팔 손목을 이리저리 돌려보고 있었다. 보르크라는 휀의 그런 여유 있는 행동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지루해졌는지, 상황에 맞지 않는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 너, 어째서 가즈 나이트가 된 건가. 그대로 인간인 채 살았다면 나에게 고통을 당하지 않을 텐데 말이야.”
그 질문에, 휀은 쓸쓸히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누님 때문에… 단 하나뿐이었던 나의 누님을 지켜주고 싶었다. 그래야 나 때문에 누님이 흘린 눈물을 갚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 말이야….”
보르크라는 검은색 빛을 발하고 있는 자신의 검을 들며 고개를 살짝 저어 보였다.
“훗, 꽤나 감상적인 녀석이군. 죽이기엔 아까워….”
“칭찬해줘서 고맙군, 하지만 난 당신을 돌려보내야만 해.”
오른손에 다시 플랙시온을 거머쥔 휀은 표정을 굳히며 보르크라를 바라보았다. 보르크라는 기다렸다는 듯 검을 내려 자신만의 자세를 취한 채 전투를 준비하였다.
“해볼 테면 해 봐라… 신의 얼간이.”
슈렌과 가르마자는 다른 동료들보다 훨씬 먼저 전투를 하는 중이었다. 슈렌의 이마엔 벌써 땀방울이 맺혔고 가르마자 역시 긴장된 얼굴로 슈렌을 바라보고 있었다.
“굉장한 창술이군, 칭찬할 만해. 창의 신이라 불리웠던 나와 이렇게까지 대결할 수 있는 녀석이 있다니, 기쁘지 않을 수 없군.”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슈렌의 고속 찌르기가 가르마자의 몸통을 노리고 들어왔다. 가르마자는 인상을 약간 찡그리고 슈렌의 창을 막아내었다.
슈렌은 무뚝뚝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대전 중이다. 잡담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가르마자는 피식 웃은 후 다시 슈렌과 공방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치열한, 창 끝에서 불똥이 튈만한 대전이었다.
바이칼은 드래곤 슬레이어를 뽑은 채 아크로를 보려보고 있었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차가운 감이 전혀 없는 바이칼의 분위기에 아크로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급, 지수화풍의 4대 정령계를 받고 있는 신 따위는 비교도 안 될 위압감이 바이칼에게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바이칼은 천천히, 그리고 짧게 한마디를 던졌다.
“… 죽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