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 나이트 – 20화
“하, 꽤 자신만만하군…?”
슈레이는 감탄하듯이 말하고는 천천히 전투 준비를 하였다. 등에 장비하고 있던 검을 뽑아서 양손으로 거머쥐었다.
“음? 또 다른 검인가?”
거리에서의 결투 때 바이칼이 산산조각낸 검과는 다른 검이었다. 흰색의 날에 갈색의 가루를 가진 검이었다.
“내가 제일 아끼는 검이지. 몇 년 전에 드워프의 장로가 선물해준 검이야.”
그리 큰 검은 아니었으나 검 날이 드래곤 슬레이어보다는 훨씬 넓었다.
“그래? 또 잘라주기는 아까운 검인데 그래?”
이 남자의 입은 여간 험한 게 아니라고 슈레이는 생각했다. 대신관의 호른 소리가 들려오고 준결승전 제2경기는 시작되었다.
수도 외곽을 담당하는 병사들은 축제 날에 자신들이 당직인 것을 한탄하며 그리 즐겁지 않은 표정으로 보초를 서고 있었다.
“으으… 우리 어머니는 지금쯤 페레이드를 보시면서 즐거워하시겠지.”
“자네만 그런가? 난 부인과 아이들이 오늘만큼 부러운 적이 없었다네.”
그 둘 중에서 가장 고참인 듯한 병사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자네들은 이번 한 번이지? 난 3년째 계속이라구. 젠장…”
다른 병사들은 고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웃고 신세 한탄을 같이 하였다. 축제를 보지 못하는 그들에겐 그것이 조금이라도 위안일지 모른다.
“흠? 잠깐만!”
고참은 갑자기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걸 느끼고 경계에 들어갔다. 다른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성벽 근처의 숲속이 이상하리만치 시끄러웠다.
“뭐지?”
병사들은 장비하고 있던 무기를 빼어들고 숲으로 조심스럽게 접근해갔다. 숲에 거의 접근하자 숨소리가 들려왔다. 인간의 숨소리가 아니었다.
구우우우우…
숲속에서 거대한 그림자들이 솟아올랐다. 병사들보다 세 배는 커 보였다.
“이… 이런!!”
병사들 중 한 명이 무기를 집어 던졌다. 그러나 팅 하는 소리와 함께 무기는 힘없이 땅으로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그 그림자와 비슷하게 생긴 그림자들이 하나둘씩 숲에서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이런…!”
“하앗!”
슈레이의 돌진계 검술은 왕국 안에선 너무나도 유명한 것이었다. 거기에 무릎을 꿇은 남자들이 한둘이 아니었고 그 기술 자체도 독특한 것이었다. 슈레이는 이번 대전에서도 역시 같은 식으로 기술을 펼치기 시작했다.
“훗.”
바이칼은 여유 있는 표정으로 슈레이의 선제공격을 회피했다. 슈레이는 다시 거리를 좁히고 검을 휘둘렀다.
“검을 뽑지 않을 건가?”
“필요가 없으면 안 뽑아도 되는 거 아닌가?”
대화 내용처럼 바이칼은 이번 대전에서 검을 가급적이면 사용하지 않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자칫 검에 슈레이가 얼굴이라도 베이게 되면 평생 자신이 책임져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기도 했고 여성에겐 매우 친절하다고 자부하는(?) 그의 성격이기도 했다.
“그 말이 쏙 들어가게 해주지!!”
슈레이는 흥분된 표정으로 바이칼에게 지금까지와는 다른 패턴으로 공격을 가해오기 시작했다.
“어엇?”
바이칼은 자신의 코앞까지 들어온 슈레이의 검을 보고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안되겠군.”
더 이상 피하기는 약간 어렵다고 느낀 바이칼은 등에 장비된 칼집에서 자신의 검을 꺼냈다. 관중들 사이에서 다시 한번 탄성이 들려왔다. 멋지게 곡선을 그리고 있는 바이칼의 검이 햇빛에 반사되어 독특한 광채를 뿜어냈다.
“필요가 없지는 않았나 보군, 미소년.”
슈레이는 그것 보라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비아냥거렸다.
“훗, 마음대로 생각하라구.”
바이칼은 자세를 취하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예전에 시장에서 싸우던 슈레이가 아니었다. 그때와는 달리 잡념이 없는 듯하였다.
슈레이는 몸을 날리면서 바이칼의 다리를 노리고 검을 휘둘러왔다. 살짝 방향을 틀어서 공격을 피한 바이칼은 오른쪽 다리를 넓게 뻗으며 검으로 큰 호선을 그었다.
“타앗!”
바이칼이 거의 사용하지 않는 강검술(强劍術)이었다. 의외로 긴 공격 범위에 슈레이는 놀랐지만 검으로 침착하게 공격을 받아내었다. 약간 강하다는 느낌이 손에 전해왔다.
“아앗!”
눈 깜짝할 사이에 바이칼의 제2타가 슈레이의 오른쪽 옆구리를 노렸다. 방어 상태를 무시한 공격이어서 슈레이도 이 공격만큼은 피할 수가 없었다.
파앙!
슈레이는 급한 김에 오른팔의 아대로 공격을 막아내었다. 아대의 강철 부분이 절반 이상 깎여나갔다. 만약 방어하지 못했다면 슈레이의 몸은 두 동강이 났을 것이다.
`죽는 것보다야 괜찮겠지.’
갑자기 변한 바이칼의 공격 형태에 슈레이는 놀라면서도 호장이라는 이름답게 침착하게 방어를 해나갔다. 슈레이는 바이칼이 또다시 큰 베기를 해오자 뒤로 물러서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바이칼도 한 번 심호흡을 해본 후 다시 처음의 자세로 돌아갔다.
“이걸 받아낼 수 있을까?”
슈레이는 왼손을 가지런히 모은 후 빠르게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바이칼은 설마 슈레이가 주문을 외울 줄 알리라고는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이런?!”
슈레이는 주문이 끝이 나자 모았던 왼손을 앞으로 뻗으며 손바닥을 폈다. 그러자 그녀의 주위에 반짝이는 물질들이 땅에서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다리아 자리메이사! 땅의 정령이여 계약의 힘으로 적을 뚫어라, 가이아 드라이버!!”
6급 지(地)의 정령 마법 가이아 드라이버, 이 주문은 땅속에 들어있는 광물질을 공기 중으로 끌어내어 결정을 만든 후 목표물을 관통시키는 주문이었다.
“정령 마법!”
바이칼은 날아오는 녹황색의 결정체를 이리저리 피해 다녔다. 결정체는 마치 살아있는 곤충처럼 빠르게 바이칼을 뒤쫓아 다녔다.
“피할 수 있다면 피해 보시지, 하지만 결정을 깨기는 어려울걸? 다이아몬드에 가까운 경도를 가지고 있으니까.”
바이칼은 계속 피해 다니다가 슈레이의 말에 자극을 받았는지 인상을 약간 찌푸리며 말했다.
“다이아몬드에 가깝다고?”
슈레이는 그다음 벌어진 상황을 보고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바이칼의 모습이 잠시 보이지 않았다가 다시 보이게 되자 바이칼의 손에는 날아다니던 결정체가 고이 모셔져 있었다.
“그렇진 않은 것 같은데?”
바이칼은 약간의 미소를 보인 뒤에 결정을 잡고 있던 오른손에 힘을 가했다. 그러자 결정은 빛을 뿜어내며 시커먼 탄소 덩어리로 변하여 경기장 바닥에 떨어졌다. 바람이 슈레이의 머리카락을 살짝 날리고 경기장 바닥의 탄소 덩어리를 쓸어냈다.
“이, 이런…!”
슈레이는 굉장히 화가 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주문이 이렇게 허망하게 깨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어서였다.
“없애버리겠어!”
슈레이는 자신의 검을 경기장 바닥에 힘껏 꽂았다. 그리고는 양손을 모으고 다시 한번 주문에 들어갔다.
“다리아 바라히어 미라다이카! 땅의 정령 노움이여! 그 힘을 발휘하여 적을 산산조각 내시오!”
“5급 주문?! 어떻게!”
확실히 의외의 일이었다. 숙련된 기사나 전사가 기껏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은 6급이었다. 5급 정도의 대량 살상이 가능한 중 주문을 알기란 머리 나쁜(?) 그들에겐 힘든 것이었다. 그리고 안다 하더라도 접근전이 주류를 이루는 그들에겐 다대일의 전투가 아닌 이상 주문 외울 시간도 없었다.
“가이아 브레이크!!”
그녀의 외침과 동시에 땅에 꽂혔던 그녀의 검이 빛을 발하며 우우웅 소리를 내었다. 바이칼은 피식 웃으며 생각했다.
`뭐야… 진짜로 외운 줄 알았잖아…’
슈레이는 주문으로 검 안에 들어있는 정령 노움의 힘을 일깨우는 것뿐이었다. 실질적으로 알고 있는 주문은 6급까지였다. 5급 이상의 주문은 검 안에 들어있는 노움이 사용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5급 주문은 5급 주문. 경기장의 바닥이 진동하며 뾰족한 돌기둥들이 바이칼의 사방에서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관중들은 거의 볼 수 없는 이 상황을 기억에 담으려고 흙먼지에 의해 나오는 눈물을 참아가며 경기를 끝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튀어나오는 돌기둥 속에서 바이칼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팔짱을 끼었다.
“혼 좀 내줘야겠군… 저 까만 아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