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 나이트 – 22화
“과연 그렇겠군. 하긴 저 정도의 명검을 가진 사나이가 그 정도의 기술을 쓰지 못한다면 말이 안 되겠지.”
“하지만 유예시간 없이 순간적으로 쓴다는 건 이해가 가질 않는군요.”
왕도 라가즈의 말에 동감하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어쨌든 계속 지켜봅시다.”
리오는 검을 경기장 바닥에 꽂아 넣고 양손을 가슴 앞에서 교차시켰다. 공기가 리오의 주위에서 맴돌기 시작했다.
“기를 높이냐? 좋아!”
바이칼은 검을 놓지 않고 몸을 꼿꼿이 세운 뒤에 기를 모으기 시작했다. 전기력이 그의 주변에서 소용돌이쳤다. 리오는 검을 다시 잡은 후에 자세를 취했다. 바이칼도 자세를 고쳐 잡고 리오를 주시했다. 리오는 검을 높게 쳐들었다. 흰색의 아지랑이가 검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좋아! 얼마든지 와… 엇?”
바이칼은 잠시 말을 끊었다. 리오도 검기를 거두고 뒤를 돌아다 보았다. 경기장 서쪽의 상공에서 까만 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점점 수가 많아지기 시작했다.
“저건…!”
리오의 동공이 인간의 것 이상으로 확대가 되었고 리오의 눈은 멀리서 다가오는 검은 점들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 와이번이다!!”
리오는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외쳤다.
와이번이란 용과 비슷하게 생긴 날아다니는 거대 파충류의 일종이었다. 사는 곳이 일정치가 않고 성질이 흉포해서 모험가나 여행객들의 신변을 가장 위협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들이 갑자기 말스왕국의 수도로 침범해오고 있었다.
“수십 마리는 되겠는데? 어떻게 저 녀석들이 떼를 지어 이동할 수가 있지?”
“보통 일이 아닌 듯싶군.”
리오는 팔짱을 끼고서 생각에 잠겼다. 바이칼은 구석에서 구경하고 있던 대신관을 불러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대신관은 와이번이란 이름을 듣고서 경악을 금치 못했다.
“빨리 왕께 전해요. 안 그러면 피해자들이 속출할 테니.”
“아, 알겠소!”
대신관이 왕이 있는 특별석으로 달려가는 걸 본 바이칼은 다른 곳도 둘러보았다.
“다른 하늘에선 오지 않는군. 어디까지 왔냐?”
“음… 6분 후면 이곳에 당도할 것 같은데?”
대신관은 숨을 헐떡거리며 왕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왕은 놀란 표정으로 대신관에게 되물었다.
“아니, 와이번들이 어떻게 떼를 지어서 공격을 해온단 말인가! 라가즈, 어떻게 된 거요!”
“사마술 같습니다. 그것 외에는…”
라가즈가 말을 하는 도중에 한 병사가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상태였다.
“마마! 수도 외곽에 멘티스 솔져들이 나타났습니다! 성 외곽 방어 부대로는 역부족이어서 그들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주민들은 피신시켰으나…”
“뭣이라고!”
말스왕은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다. 매우 흥분된 표정이었다.
“당장 장군들을 집결시키고 크림슨 나이트들을 비상 출동시키도록! 지체하지 말아라!”
시종들은 특별석 밖으로 빠르게 뛰어나갔다. 레나도 걱정되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아바마마…”
“아, 공주는 짐과 함께 왕궁으로 돌아가자꾸나. 라가즈, 도와주시오.”
라가즈는 특별석의 의자들을 치우고 거대한 도형을 바닥에다가 그렸다. 그리고 도형의 중앙에 자리를 잡은 후에 주문을 외웠다.
“오르마 다사라하 바라흐, 공간의 신 자이레토시여 저희들을 저희가 원하는 장소에 도달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시오. 자, 두 분은 어서 이쪽으로…”
왕과 레나는 라가즈의 말에 따라 도형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도형은 황금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텔레포트!”
라가즈의 주문이 끝남과 동시에 세 명의 형체는 빛이 되어 어디론가 사라졌다.
대신관이 호른을 연속으로 네 번 불자 관중들은 급히 경기장에서 퇴장하기 시작했다. 호장들은 또 다른 대신관의 말을 듣고 황급히 경기장 밖으로 뛰어나갔다.
“자, 왕과 공주도 궁으로 간 것 같으니 우리도 나가볼까?”
리오는 뒤쪽으로 엄지손가락을 펴보이며 바이칼에게 말했다.
“그래야겠군. 넌 수도 안쪽을 맡아라. 난 와이번들을 맡을 테니까.”
“알았다. 아무래도 수도 안쪽까지 뭔가가 들어온 것 같으니까.”
리오는 말을 마치고 나서 바람같이 경기장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바이칼은 기를 얼마간 모은 뒤에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공중 부유술이었다.
“기 소비가 심하겠지만 어쩔 수 없지. 속전속결로 끝내는 수밖에.”
바이칼은 빠른 속도로 점점 다가오는 와이번들을 향해 대기를 박차고 날아가기 시작했다.
왕궁에 도착한 말스왕은 회의장에서 영주들의 모습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것에 분노를 감추지 못하였다.
“뭣이라고! 영주들이 모조리 없어져! 어제까지만 해도 나에게 충성을 맹세하겠다던 그들이!!”
왕은 화를 참지 못하고 주먹으로 탁자를 후려치며 소리쳤다. 카라한도 노기 어린 목소리로 왕에게 말했다.
“마마, 영주들이 없어도 저희들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크림슨 나이트들도 출격을 개시했고 다른 부대들도 지원을 위한 준비가 완벽하게 갖춰져 있습니다. 진정하십시오.”
“으음…! 알겠네.”
왕은 화를 가라앉히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곧이어 페란드가 들어와서 왕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마마, 수도 남쪽 도시에 멘티스 솔져들이 나타나서 난동을 부리고 있습니다. 숫자가 꽤 많은 것으로 보아서 크림슨 나이트 두 부대로도 그들을 물리치기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와이번들은 수도 서쪽에 나타나서 민가들을 태우고 있다 합니다. 궁수 부대로는 어림도 없을 것 같습니다.”
왕은 두 손을 깍지 낀 후에 코 아래에 대면서 고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음… 와이번이 문제로군. 대책은 서있나?”
“예, 강궁병 부대와 드래곤 나이트들이 준비를 마쳤습니다. 헤리온이 오면 즉시 출격할 것입니다.”
말스 왕국의 드래곤 나이트 부대는 전 세계에 정평이 나있는 왕국 최정예 부대 중에 하나였다. 슐턴의 크루세이더, 오르만의 발키리, 그리고 슈레이의 그랜드 나이트 등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좋아, 방어 전력은?”
“창기병대 10부대가 성으로 오는 길목을 차단하고 있습니다.”
“좋아, 그럼 우리는 결과를 기다려보세.”
“이런! 이런 괴물들이 있었다니!”
크림슨 나이트의 대장은 자신들의 전력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멘티스 솔져들의 전투력에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벌써 열 명이 넘는 기사들이 자신들의 붉은 갑옷을 피로 더욱 진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에 반해 멘티스 솔져들은 전혀 피해를 입지 않고 있었다.
“이런 사마귀 녀석들!!”
한 기사가 자신들의 눈앞에서 시민 한 명이 그들의 먹이로 변하는 것을 보자 참지 못하고 진형을 이탈하고 말았다. 그는 길다란 창을 멘티스 솔져에게 능숙한 솜씨로 휘둘렀으나 멘티스 솔져의 낫과 같은 팔에 그대로 오른팔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런, 안돼!!”
동료들의 오열에도 불구하고 기사는 온몸을 난도질당한 후에 피를 흘리며 죽어갔다. 결국 참지 못한 다른 기사들도 일제히 돌격해 들어가서 한 마리를 집중 공격한 끝에 겨우 쓰러뜨릴 수 있었다. 하지만 뒤에 포진해 있던 다른 멘티스 솔져들이 가만히 있을 리는 만무했다. 다른 기사들도 결국에는 잔인한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크림슨 나이트의 대장은 천천히 다가오는 멘티스 솔져들을 바라본 후 눈을 잠시 감았다.
`… 미안하다 얘들아…’
눈을 뜬 대장은 각 기사단의 대장에게만 지급되는 비상 병기를 자신의 갑옷 주머니에서 꺼냈다. 주황색의 피리… 분 사람을 버서커로 만들어주는 달의 피리
였다.
“나머지들은 여기에서 모두 피신해서 지원군을 기다려라! 여긴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막아보마!”
“대장님! 설마…!!”
한 기사가 대장의 어깨 보호구를 부여잡았다. 그러나 대장은 그의 얼굴을 후려치며 소리쳤다.
“이 녀석! 명령을 듣지 못했나!! 그러고도 말스왕국의 기사더란 말이냐! 상관의 명령을 거역하면 기사의 자격은 박탈당한다!!”
“대장님은 가족이 있질 않습니까! 그 피리는 제게 주십시오!!”
젊은 기사는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대장에게 호소했다. 그러나 대장의 결의는 단단했다.
“뭣들하나! 이 녀석을 당장 끌고 가라!!”
다른 기사들은 침통한 표정으로 젊은 기사를 데리고 뒤쪽에 구축된 방어선을 향해서 달려갔다. 대장은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띄웠다.
“나에겐 가족이 있지만 너에겐 어머니가 계시질 않느냐. 후후…”
말을 마친 대장은 달의 피리를 불기 시작했다. 고요한 소리가 멘티스 솔져들의 움직임을 정지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