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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즈 나이트 – 227화


“린스 공주님을 어떻게 생각하시냐고 물었습니다.”

리오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노엘이란 천재 여성이 “공주님이라 생각하죠”라는 말장난에 웃고 넘어갈 여자가 아니라는 것을. 리오는 내심 고민하다가 머리를 긁으며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솔직한 심정이었다.

“…저에겐 그냥 레프리컨트 왕국의 왕녀이실 뿐입니다.”

물론 그 말이 그 말이었지만.

낮잠을 푹 자고 일어난 린스는 눈을 비비며 부엌에서 차가운 물을 찾아 마신 후 다시 방으로 향했다. 도중에 우연히 창밖을 바라본 린스는 리오와 노엘이 대화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뭐야 저 바람둥이…! 몰래 노엘이랑 사귀는 건가?”

이상한 질투심을 느낀 린스는 살짝살짝 창가로 다가가 작게 들리는 둘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그 이상의 마음은 없으신가요?”

노엘의 표정은 이상할 정도로 진지했다. 리오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공주님께서 절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전 그분을 왕국까지 모셔만 드릴 뿐입니다. 그 후엔 제 갈 길을 떠날 거니 그 이상의 감정을 가질 필요는 없겠죠. 그리고, 저에겐 그 이상의 감정이란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노엘은 흠칫 놀란 눈으로 리오를 바라보았다.

“예? 무슨 뜻이시죠? 사랑이란 감정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 있을 리가 없잖습니까?”

리오는 쓴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딴 감정은 저에겐 필요 없으니까요. 전투할 때 감정이란 건 쓸데없는 쓰레기일 뿐, 도움은 주지 않지요. 일시적으로 잠재 능력을 끌어올릴 순 있겠지만… 필요 없는 감정입니다.”

노엘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눈으로 리오를 바라보게 되었다. 노엘은 몸을 떨며 리오에게 다시 물었다.

“…지금까지 어떤 사람들을, 몇 명이나 살해해 왔죠?”

그 질문에 리오는 잠시 입을 열지 않았다. 노엘은 재차 질문을 던졌다.

“어떤 사람들을, 몇 명이나 살해해 왔나요!!”

결국 리오는 피식 웃으며 그 질문에 답했다.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여자, 어린아이, 노약자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할 일을 위해 가리지 않았죠. 쓸데없는 질문을 하셨군요 노엘 선생….”

대답을 들은 노엘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리오를 쏘아보았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그녀의 눈은 분노에 일그러진 듯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실망감과 알 수 없는 공포가 교차하고 있는 것이었다.

“…잠시간이라도 당신에게 린스 공주님을 맡길 수 있다고 생각한 제가 어리석었군요. 여기서 당장 당신과 헤어지고 싶지만 지금은 당신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니 아무 말 않겠습니다. 단, 공주님과는 대화를 하지 말아주세요. 그분까지 당신 몸에 묻어있는 피가 튈 것 같으니까요…!!”

리오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변명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거짓말이라고 말해!!”

순간 들려온 목소리에 리오와 노엘은 흠칫 놀라며 갑자기 벌컥 열린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지금까지의 대화를 다 들은 린스가 울음을 겨우 참고있는 표정으로 서서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린스는 리오의 앞으로 걸어가 그의 옷자락을 잡고 다시 소리치기 시작했다.

“그럴 리가 없어!! 네가 그럴 리가 없어!!! 넌 따뜻했다구, 네 말은 언제 들어도 기분이 포근하단 말이야!!! 그런 네가, 리오가 사람들을 무차별로 죽일 리가 없어! 살인 기계가 아니란 말이야!! 어서 거짓말이라고 말해!!!!”

린스의 슬픈 목소리완 대조적으로, 리오는 표정 하나 움직이지 않고 조용히 답했다.

“…들으신 그대로… 입니다.”

결국 린스는 집 안으로 뛰어들어가고 말았다. 노엘은 잠시간 리오를 바라보다가 아무 말 없이 린스의 방으로 급히 들어갔고 리오는 피식 웃으며 아까 전과 같이 의자에 앉아 붉은 서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야기가… 샜군. 후후훗….”

나지막이 중얼거린 리오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리고 버릇처럼 자신의 목에 걸려있는 은제 십자가를 매만져 보았다.

마을의 불이 하나둘씩 꺼져갈 깊은 밤, 리오 역시 잠자리에 들기 위해 침대에 누웠다. 케톤은 피곤한지 일찌감치 잠들어 있었다.

“머릿속이 더 피곤하군, 말재주 없는 것도 괴롭단 말이야… 흐음.”

마악 불을 끌 무렵, 누군가가 리오의 방문을 두드렸다. 무슨 일이 있구나 생각한 리오는 케톤이 깨지 않을 정도로 조용히 일어나 조용히 방문을 열어 보았다.

“…? 노엘 선생님?”

노엘은 검지손가락을 입에 대고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낸 뒤 리오에게 나오라는 손짓을 했다. 리오는 아무 말 없이 방을 나왔고 노엘을 따라 부엌으로 향했다.

“자, 의자에 앉으세요 스나이퍼 씨.”

노엘은 리오에게 먼저 앉으라고 권한 후 리오와 함께 자리에 앉았다.

“오후의 일을 생각해 보니 제가 실수했더군요, 사과드려요 스나이퍼 씨.”

“예? 사과하실 것까진 없는데요…?”

노엘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안경을 벗은 뒤 차근차근 얘길 시작했다.

“제가 너무 과거의 일을 들춘 것 같아서죠. 지금까지도 스나이퍼 씨가 어린아이, 부녀자들을 가리지 않고 살해한다고는 믿어지지 않아요. 솔직히 얘기해주세요 스나이퍼 씨. 이건 저를 위해서가 아니고 린스 공주님을 위해서입니다.”

리오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자신의 머리를 긁으며 잠시 생각을 해 보았다. 몸을 다시 바로 한 리오는 노엘에게 대답했다.

“…사실 예전엔 그랬습니다. 저와 관계된 사람들을 살해한 적들의 도시 주민들을… 무차별로 살해했지요. 하지만 몇 년 흐르면서 약간은 자제할 수 있게 되더군요. 사람들도 많이 만나왔고, 지금은 웬만한 일이 아니고선 그 정도로 이성을 잃지는 않습니다.”

노엘은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 다시 무엇인가가 생각난 듯 리오에게 되물었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요. 진짜로 사랑이란 걸 해본 적 없나요?”

리오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가 말이 없자 노엘은 손을 저으며 빙긋 미소를 지어주었다.

“…말하기 괴로우시다면 하지 않으셔도 상관없어요. 하지만 제 생각을 말씀드리자면… 스나이퍼 씨를 사랑했던 여성들은 많았을 거라 생각돼요. 사랑 안 해본 저까지 그렇게 느낄 정도면 맞다고 생각되는데… 아, 대답 안 하셔도 상관없어요.”

리오는 조용히 노엘을 바라보았다. 안경을 쓰지 않은 노엘의 얼굴은 20대 중반의 매력이 어떤 것인지 충분히 나타낼 만큼 아름다웠다. 노엘은 리오가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자 다시 안경을 쓰며 고개를 숙여 버렸다.

“왜, 왜 그렇게 바라보시죠?”

리오는 빙긋 웃으며 턱을 괸 채 대답했다.

“안경을 안 쓰시니… 너무 아름다우셔서요. 괜한 말이 아니니 고개 숙이실 건 없어요.”

잠시간 말이 없던 노엘은 안경을 고쳐쓰며 웃어 보였다.

“호홋… 고마워요 스나이퍼 씨. 그리고 마지막으로… 린스 공주님께 잘해주세요. 좋아하는 남자가 생긴 것 같다고 저에게 직접 말하신 건 스나이퍼 씨가 처음이거든요. 린스 공주님은 아직 어리세요, 그분께 상처를 주지 말아주세요… 부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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