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 나이트 – 28화
리오와 바이칼은 급히 왕궁으로 향하였다. 무엇이라도 말스왕에게 해 주어야만 기분이 풀릴 듯해서였다.
“왕께서 왜 우리를 부르시는지 슈가 말 안 했나?”
“아니. 확실히 말하지는 않았어. 하지만 뭔가 부탁이 있는 것만은 분명해.”
둘은 곧 왕궁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문으로 당당하게 들어갈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은 성벽을 넘어서 왕성으로 들어갔다. 아주 조용히.
말스왕은 기운이 쇠한 듯 의자에 기대어 앉아있었다. 레나의 참변을 겪은 후로 그가 가지고 있던 일말의 희망마저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라가즈는 말스왕의 옆에서서 고개를 떨구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왕국 대 마법사라는 자신의 앞에서 레나가 간단히 수정상이 되어서였다. 그 순간부터 그는 자신을 자책하며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그들의 눈앞에 두 개의 그림자가 빠르게 나타났다. 하지만 라가즈와 왕의 자세는 변하지 않았다. 왕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왔는가, 리오, 그리고 바이칼…”
“예.”
라가즈도 고개를 들고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네도 알다시피 레나님께서 저렇게 되시면서 말스 왕국의 정식 후계자는 사라진거나 마찬가지가 되어버렸다네. 저 무례한 영주들 사이에서는.”
리오의 표정이 레나의 이름이 나오자 잠시 어두워졌다.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아닐세. 어쨌든 이대로 놔두게 된다면 이 왕국은 타르자가 말한 것처럼 영주들에 의해서 자멸의 길로 빠지게 될 걸세. 그래서 전하와 상의한 끝에 결국 마지막 희망을 걸어보기로 결정했네.”
“마지막 희망이요?”
리오는 고개를 들어서 라가즈를 바라보았다.
“이제 영주들은 지체 없이 이 왕국을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겠지. 아마도 오늘이나 내일 당장이 될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이 왕국의 태자이신 태라트님을 이곳에 다시 모시고 올 수만 있다면 그들 중에 한 명이 정권을 잡게 된 것은 무효화가 된다네.”
“그렇지만 태자님께서 어디 계시는지 모르지 않습니까?”
라가즈는 자신의 품 안에서 낡은 지도 한 장을 꺼내었다.
“이것은 루아스 대륙의 지도라네. 태라트님은 바로 이곳…”
라가즈는 지도의 중심부에서 약간 벗어난 곳을 가리켰다.
“이곳에 계시다는 정보가 있었네.”
리오는 일어서며 당당하게 말했다.
“맡겨 주십시오. 태자님을 꼭 모시고 오겠습니다.”
말스왕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하지만 힘이 없어서인지 말을 하지는 못하였다.
“그럼 자네에게 부탁하겠네. 이걸 받게나, 그리고 동행이 있다네.”
라가즈가 말하자 그들이 있는 방문이 열리면서 슈가 들어왔다.
“동행이요?”
슈는 리오에게 살짝 윙크를 해 보였다.
“잘 부탁해요 리오.”
바이칼은 도대체 자신이 왜 왔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이야기는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저… 라가즈님.”
“아, 자네를 잊었었군. 이번 일은 자네가 빠지면 힘들다네.”
라가즈는 바이칼에게 다가와서 열쇠를 하나 건네주었다.
“영주들은 사실 아직도 불안에 떨고 있을 게야. 극단적으로 레나님의 수정상을 깨버릴 수도 있겠지. 만약의 경우에 리오에게 차질이 생겨서 태라트님이 영영 못 오신다는 상황이 생기고 레나님의 수정상이 깨어진다면 이 왕국은 끝나게 될 걸세. 자네의 임무는 레나님의 수정상을 잠시 맡아달라는 것이네.”
“수정상을…?”
바이칼은 겉으로는 생각하는 척하였으나 속으로는 기분이 매우 좋았다. 수정상을 맡아달라는 것은 곧 자신의 휴가를 뜻하는 것이기도 했었다.
“좋습니다. 하지만 열쇠는 주실 필요가 없습니다.”
“아니, 왜 그런가?”
“어차피 영주들로부터 숨겨둘 것이면 아예 누군가가 훔쳐갔다고 꾸미면 그만 아닙니까. 그렇게 해두면 영주들도 안심할 것이구요.”
라가즈는 바이칼의 말도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좋아. 그러면 자네에게는…”
“공주님의 수정상이 어디에 있는지만 가르쳐 주십시오.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리오. 자네에게 모든 걸 맡기네.”
라가즈는 다 됐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말을 맺었다.
“그대들에게 신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그날 저녁. 리오와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슈는 수도의 동쪽 문을 통과해서 항구 도시 파하마로 향하였다. 슈는 도중에 무엇이 그리도 궁금한지 계속해서 리오에게 질문을 던졌다.
“저, 리오…”
다시금 슈의 질문이 들어오자 리오는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슈의 말문을 막았다.
“아아, 그만 좀 할 수 없어요? 벌써 스무 번이 넘는 질문을 받아줬잖아요. 이제 그만 좀 하라구요.”
슈는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서 머리 뒤로 깍지를 낀 후에 멀리서 떠오르는 달을 바라보았다.
“흠… 하긴, 미안해요.”
리오는 약간 무안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할 것까지는 없어요.”
그때 슈가 갑자기 리오의 앞으로 나서며 리오를 정면에서 바라보았다.
“음? 왜 그래요?”
슈는 그녀의 귀여운 얼굴을 찡그리며 리오에게 화가 난 듯한 말투로 말했다.
“마음에 안 들어요.”
리오는 무슨 영문인지 통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예? 뭐가…”
슈는 리오에게 얼굴을 바짝 들이대며 말했다.
“당신이 하는 것, 존댓말 말이에요.”
리오는 코웃음을 치면서 씨익 웃었다.
“하, 그게 뭐가요.”
슈는 리오의 널찍한 가슴에 오른손 검지 손가락을 가져가며 대답을 해주었다.
“이번 임무의 대장은 당신이라고요. 내가 당신에게 존댓말을 쓰는 건 당연하지만 리오가 나에게 존댓말을 쓰는 건 이상하다구요.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이 여장군은 놀러 가는구나…라고 리오는 문득 생각을 했다.
“그럼, 반말 써도 괜찮겠어요?”
슈는 한쪽 눈을 찡긋 감았다.
“전 존댓말을 계속 듣게 되면 귀에 뭐가 난다고요. 반말을 듣는 게 저에게도 편해요.”
“그렇다면… 하는 수 없지.”
리오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졌다는 표시를 나타냈다.
며칠 후, 파하마에 도착한 리오는 슈가 루아스 대륙에 가기 전에 물품을 정리해야 한다는 협박(?)을 하는 바람에 잠시간 시장에서 머물러 있었다.
“간단히만 챙겨가자고… 어디 여행가는 것도 아니잖아.”
슈는 옷가지 몇 개를 사면서 대답을 했다.
“여행 가는 것 아닌가요? 일 년이 걸릴지도 모르는 임무인데요 뭐. 준비는 잘해 가야죠.”
리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어 보이고는 혼자서 항구로 향하였다.
“어디가요 리오, 같이 가야죠!”
“걱정하지 마. 항구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안심하고 고르라고. 빨리 와.”
“알았어요. 나중에 봐요.”
슈는 약간 홀가분한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또다시 시장의 깊숙한 곳으로 향하였다.
“… 저러고도 스물두 살이라니. 어리다 어려…”
리오는 항구로 걸어가면서 멀리 보이는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저 대륙에 가본 것도 백 년 만이군…”
리오는 잠시 회상을 하는 듯이 눈을 살짝 감았다.
“… 레나의 무덤이 그곳에 있지 아마…”
리오는 눈을 뜨며 살짝 미소를 지어보였다.
“훗, 잡념을 버려라 리오. 너에겐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잖아.”
리오는 머리를 흔들면서 자신에게 이야기했다.
“…… 좋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것 같군. 후후후…”
그는 웃으면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흰색의 갈매기들이 각각 소리를 내면서 자유롭게 날아가고 있었다.
“리오, 오래 기다렸어요?”
슈의 발랄한 목소리가 리오의 귓가에 들려왔다. 약간 커다란 짐을 매고 있는 슈의 모습을 바라본 리오는 크게 심호흡을 해 보았다.
“… 가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