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 나이트 – 3화
갑자기 집을 떠나라는 말에 레나와 그녀의 동생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갑작스레 말해서 미안하다만, 어쩔 수 없구나. 네가 가야만 이 왕국이 살아난단다 레나야.”
레나는 말이 나오지가 않았다. 촌구석의 시골 처녀가 어떻게 이 거대한 왕국을 움직일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이…그것이 무슨 소리세요! 이해가 가게끔 얘기를 해주세요 아버지!”
파르하는 그녀의 반응이 어떨지 예상하고 있는 터라 별로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그녀에게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에게 내심 미안해하였다.
“리오 군과 수도로 가면 모든 걸 알 수 있을 거야. 그때까지 참아줘야 한단다.”
그녀는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버지!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어요! 어제까지만 해도 제가 없으면 하루도 못 사신다고 말하셨던 분이 오늘 갑자기 떠나라고 말하시다니…!”
그녀는 목이 메인 듯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파르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자신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
“레나, 제 말을 들어보세요.”
리오는 그녀의 곁으로 갔다. 그도 그리 밝은 표정은 아니었다.
“필요 없어요!”
리오에게 소리친 레나는 자신의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도저히 감정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리오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방문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흠…더 큰일이군….”
이렇게 말한 리오는 밖으로 나가려 했다.
“자네 어디가나?”
“밖에 있겠습니다. 저보다 레나님이나 달래주세요. 그럼.”
리오가 밖으로 나가자 파르하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는 천장을 바라보고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런 그에게 코나가 다가왔다.
“아버지…”
코나는 걱정스런 눈빛으로 파르하를 보고 있었다. 파르하는 코나의 어깨를 감싸주며 아이를 안심시켜 주었다. 코나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태어나서 단 두 번 보았다. 코나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 파르하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어린아들에게 기대어 자신의 감정을 보이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와 상황이 달랐다. 그래서 그는 더더욱 마음이 아파왔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리오는 집 앞에 계속 서있기만 했다. 그도 대책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 힘으로도 안되는 게 있기도 해야겠지. 하지만…하루가 급한 일인데….”
리오는 노을이 지고 있는 하늘을 보았다. 싸움만 할 줄 아는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그가 취하는 행동이었다. 그의 붉은 장발이 바람에 날리기 시작했다.
늦은 저녁 무렵, 레나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깜박 잠이 든 모양이었다. 그녀는 침대에 앉아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망설이고 있었다. 파르하가 말한 왕국이 자신에 의해서 살아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자신 혼자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아버지의 부탁이었다. 그녀는 태어나서 처음 아버지에게 부탁을 받은 것이었다. 머릿속이 다시 혼란해졌다. 레나는 창가로 다가갔다. 신선한 공기라도 쏘이면 좀 나을듯 해서였다. 창문을 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는 집 아래를 내려다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니…리오씨?”
리오는 여전히 밖에 서 있었다. 발자국이 없는 것으로 봐서 한자리에 계속 있었는 듯했다. 리오는 여전히 그녀가 결심하기를 기다리는 듯했다. 레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만난 지 몇 일도 안 된 그 떠돌이 기사는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면서까지 자신을 수도로 데려가려고 하고 있었다. 레나는 갑자기 말스 왕국 창건서의 내용이 생각났다. 거기에 쓰여있는 가즈 나이트란 인물은 자신의 생명을 바치면서까지 자신과 추호도 상관없는 말스 1세를 도와주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말스 1세가 가즈 나이트의 마음에 들어서라고 간단히 쓰여있었다. 집 앞에 서있는 리오란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전혀 상관없는 레나를 수도까지 보호해 주기 위해서 아직까지도 서있는 것이었다.
“리오…아버지….”
레나는 혼자서 중얼거린 뒤 방에서 나갔다. 식탁 앞에 앉아서 뭔가를 생각하고 있는 파르하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가 나오자 파르하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아, 앉으세요 아버지.”
레나는 파르하를 다시 앉힌 후에 자신도 의자에 앉았다.
“아버지…저 결심했어요.”
레나는 살짝 미소를 보였다. 그러자 파르하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고맙구나…정말 고맙구나…!”
레나는 눈을 감고 파르하에게 천천히 자신의 생각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로 생각해보니…저는 여태까지 저와 우리 가족만을 생각한 것 같아요. 아까도 아버지께서 왕국을 살린다는 말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전 코나와 아버지가 걱정돼서 떠나는 게 싫었었어요.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든지 왕국을 살릴 수 있다는 건 왕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발 벗고 나서야 하는 일이죠. 그래야 우리 가족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도 행복해지겠지요….”
파르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레나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래… 난 오늘 네가 정말 자랑스럽구나 레나야.”
파르하는 자신의 딸이 더 이상 집에서 일하는 평범한 여자가 아니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웃음이 절로 났다.
“그래…아, 리오 군이 이 얘길 들었어야 하는데, 나가버렸으니 원….”
그때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리오였다.
“다 들었습니다. 정말 잘 생각하셨습니다 레나. 그럼 언제 출발하실 겁니까?”
리오는 빙긋 웃으며 레나에게 물었다. 레나도 그에게 미소를 지어주며 말했다.
“내일 바로 출발하겠어요. 왕국의 문제인데 빨리 처리할수록 좋은 거 아니겠어요?”
그 말을 들은 리오는 수염도 나지 않은 턱을 어루만졌다. 그의 또 한 가지 버릇이기도 했다.
“음… 좋습니다. 그럼 내일 아침에 뵙지요.”
“예? 여기서 주무시지 않고요?”
리오는 고개를 흔들며 사양했다.
“아니요, 여기서 뒷처리를 할게 있어서요. 그럼 안녕히 주무십시오.”
그렇게 말한 리오는 바람같이 문을 열고 밖으로 사라졌다. 둘은 여기에 온 지 몇일 안 된 리오가 뒷처리할 게 뭔지 도저히 감이 잡히질 않았다.
“흠…내일 아침이면 알겠지.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강한 사나이라면 설마 내일 시체가 되어서 오진 않을 거 아니냐. 그럼 자자꾸나.”
레나는 손을 깍지 낀 후 머리 뒤로 돌리고는 숨을 한껏 들이마셨다. 조금이라도 더 이 집에서 풍기는 냄새를 맡아보고 싶었다. 다시는 맡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문득, 동생인 코나의 일이 떠올랐다.
“아버지…코나에게는 내일 뭐라고 말하죠?”
그 질문에 파르하도 말을 잊었다. 레나가 떠난 후에 열두 살의 코나가 그 공백을 견뎌낼 수 있을까가 의문이었다. 파르하도 오후에는 거의 집을 비우는 형편이라서 결국 집에는 코나 혼자서 남게 되는 것이다.
“…그 애가 더 강해지는 계기가 될지도 모르고. 아니면….”
“코나는 분명히 견뎌낼 수 있을 거예요. 코나도 그랬잖아요. 언젠가는 아버지보다 더 강한 남자가 될 거라고요. 전 코나를 믿어요 아버지.”
파르하는 약간 안심이 되는 표정을 보였다. 그 말에 긍정이 갔다.
“그래, 그 앤 내 아들이니까. 자, 이러다 내일 늦게 일어나면 어쩌려고, 그만 자야지.”
파르하는 아쉬움 반, 졸음 반으로 레나에게 말했다 레나도 약간 졸음이 왔다는 듯 인사를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예, 아버지. 안녕히 주무세요.”
배른할트 지방 영주의 성에선 그날 밤 비상이 걸려있었다. 기사들과 보통 병사들은 차기 영주인 그루드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나같이 억지로 모인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루드가 성의 베란다에 나타나자 군인들은 모두 대열을 가다듬었다. 그루드는 탁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여봐라! 오늘 저녁에 헝겁 망토를 뒤집어쓴 빨간 머리 얼간이가 이 성에 침입한다는 정보가 있었다! 모두들 오늘만큼은 정신을 집중하고 경계를 서주기 바란다. 빨간 머리카락이 보이기만 하면 그 즉시 목을 베던가, 사로잡던가 하도록! 그리고 그녀석은 매우 강하니까 각별히 조심해라! 이상!!”
군인들은 서로 웅성대며 자신의 위치로 돌아갔다. 그루드는 그제서야 약간 안심이 됐다. 설마하니 200여 명이나 되는 군인들을 뚫을 리는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는 천천히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약간은 피곤한 표정이었다. 아마도 긴장감 때문일 것이다. 그는 한숨을 크게 쉰 후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 잠시 눈을 붙여보자는 생각에서 였다.
“아아… 빌어먹을 빨간 머리 녀석… 잡히기만 해봐라. 내 그냥…”
“어쩔 건데, 아저씨.”
“어쩌긴 어째, 혼을 내줘야…”
그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이 방에 자신 말고 들어와 대답해 주고 있는 건 도대체 누구인가? 그는 검을 뽑아 들며 소리쳤다.
“누, 누구냐! 어서 나와라!!”
“아아, 흥분하면 건강에 좋지 않아요 아저씨. 나야 나.”
천정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루드는 천정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서 그는 눈을 비벼댔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이 그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천정에 사람이 붙어있었다. 사지를 천정에 대고 있는 상태였다. 게다가 그 사람은 아까 혼내주겠다고 호언장담한 목표 – 리오였다. 리오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뭘 그리 놀라나.”
리오는 바닥에 사뿐히 내렸다. 거의 소리가 나질 않았다. 마치 야생동물과도 같은 몸놀림이었다. 그루드는 경비병을 부르려고 입을 벌렸으나, 리오가 검 손잡이에 손을 갔다 대자 다시 입을 닫았다.
“아, 그래야지. 여기서 당신이 죽으면 나에겐 이익 될 건 없어. 물론 불이익도 없지만.”
그루드는 식은땀을 흘리며 리오에게 소리쳤다.
“네 녀석, 용건이 도대체 뭐냐!”
리오는 검에서 손을 뗀 후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음…그냥 `가만히’있어달라는 것뿐이야.”
그루드는 이상하다는 듯 역으로 물었다.
“뭐라고? 가만히 있어달라고?”
그루드의 성격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부탁이었다. 그루드는 너털웃음을 띄우며 말했다.
“우하하하하! 당돌한 녀석이구나! 영주의 자리에 앉아서 가만히 있으라구? 하하하하하…!”
그루드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에겐 참을 수 없는 유머였을지도 모른다. 리오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양 어깨를 으쓱 들어 올렸다.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약간 비싼 성 같은데… 아까워.”
리오가 고개를 내젓자 그루드의 웃음이 멎었다.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 생각난 듯한 표정이었다.
“너… 무슨 속셈이냐?”
리오의 망토 자락에서 자색의 검이 그의 손에 이끌려 나왔다. 그루드는 리오에게서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그루드의 표정은 공포에 질려있었다. 그야말로 새파랬다.
“너.. 너… 죽이지 않는다고 했잖아!”
리오는 태연한 표정으로 그루드를 바라보았다.
“그랬지. 하지만 그 이외의 짓을 안 한다고는 말한 적 없어.”
“뭐라고…?”
그루드는 자신이 죽지 않는다는 얘기를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더더욱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다음날 아침.
배른할트 지방은 타 지방보다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래서 여름이 되어도 그리 덥지가 않았다. 덥다기보다는 오히려 쾌적했다. 반면에 겨울은 무서울 정도로 추웠다. 그 지역의 주민들은 가을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집 지하에 추수한 식량과 땔감을 저장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나서 겨울이 오면 거의 바깥에 나서질 않는다. 그야말로 살인적인'추위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에서 이 지방은 가축을 별로 키우지 않는다. 키워도 겨울을 잘 견디긴 하지만 유제품은 보통의 젖소보다 얻기 어려운
무’라는 동물을 키운다. 그 이외의 동물은 이 지역에선 겨울이 오면 고기 신세를 면하기 어렵다.
어쨌든 오늘은 여름의 날씨라서 활동하기엔 적합했다. 마침 오늘 여행을 떠나기로 한 여행자에게는 행운의 날과도 같았다.
“음…왜 이리 안 나오지? 이사 가는 것도 아닌데….”
리오의 표정은 그가 얼마나 오래 있었는가를 잘 나타내 주었다. 약간은 피곤한 기색도 보였다. 하지만 그의 붉은 더벅머리는 더더욱 강렬한 붉은빛을 띄고 있었다. 위쪽으로 묶어 아래로 길게 내린 머리채는 여성들의 머리카락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지니고 있었다. 박력마저 느껴졌다.
그가 앞에 서있는 집의 문이 열리고 안에서 에메랄드빛의 머리카락을 지닌 여인이 눈을 비비며 리오에게 다가왔다. 햇빛이 너무 밝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리오에게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미안해요. 작별인사가 너무 길어져서요…”
리오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는 동작이었다.
“아니에요 레나. 그건 그렇고 짐은 잘 챙겼어요?”
레나는 등에 지고 있는 커다란 짐을 의식했다.
“예, 웬만한 건 다 챙겼어요. 그리고 이것도….”
레나는 헝겁에 쌓여있는 긴 물건을 리오에게 보여주었다. 어제 리오에게 기사의 의식을 치러주었던 소검이었다.
“아버지께서 꼭 들고 가라고 하셨어요. 그래야 일이 완벽해진다고 하시면서요.”
리오는 턱을 어루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래요? 아, 배낭은 제게 주세요. 검은 레나가 들고요. 여차하면 호신용으로 쓸 수 있게 헝겁은 풀어두세요.”
레나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전 검을 한 번도 사용해 본 적이 없는데요?”
리오는 배낭을 받으며 웃음을 지었다.
“괜찮아요. 쓸 일도 별로 없을 테니까요. 그 검을 쓰게 될 정도의 전투는 거의 없을 테니까요.”
리오 자신이 그전에 일을 다 처리하겠다는 뜻이었다. 레나는 내심 안심이 되었다. 사실 그가 동행한다는 것으로도 충분한 안심이 되었지만 리오가 그렇게 말을 하니 더더욱 그런 마음이 들었다.
“그럼, 믿겠어요.”
레나는 미소를 지으며 답해주었다. 둘은 천천히 마을의 경계선으로 가기 시작했다. 조금 걷다가 레나가 리오에게 물었다.
“음… 여기로 계속 가다 보면 영주의 성이 나오는데, 어쩌죠?”
“어쩌긴요. 그냥 갈 길을 가면 되는 거죠. 아, 그리고 도중에 영주의 성을 자세히 보세요. 아주 재미있을 거예요.”
리오는 특유의 웃음을 지어보였다. 레나는 그의 말이 무슨 소린지 직접 보기 전까진 이해가 가질 않았다. 조금 후에 숲 사이로 영주의 작은 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머나…?”
레나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너무나 놀라운 광경이었다. 성이 앞문에서부터 가로로 양분되어 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성의 중앙으로 뭔가가 지나간 느낌이었다.
“성 안의 사람들은 모두 도망쳤어요. 사상자는 없고요. 아, 정신적 충격을 받은 사람이 있겠군요.”
리오는 태연한 표정으로 레나에게 자랑하듯 말하였다.
“그리고 이것으로 마을 사람들은 그루드의 횡포에 대해 걱정 안 해도 될 겁니다. 제가 어제 잘 타일러 놨으니까요.”
레나는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잘된 건지, 안된 건지…어쨌든 그녀는 이 수수께끼의 인물이 점점 마음에 들어가는 걸 느꼈다.
“자, 여기서 4일 정도 걷게 되면 라이논입니다. 우선 거기까지 가보죠.”
“예.”
둘은 계속 걷기 시작했다. 방향은 남쪽이었다.